기복불교 - 초기경전에 따른 교리적 검토
1. 들어가는 말
2. 기복불교의 정의
3. 불교 흥기에 즈음한 기복신앙
4. 기복신앙의 불교적 비판
5. 중심 교리로 본 기복의 검토
6. 복의 실체
7. 마치는 말
1. 들어가는 말
흔히 한국불교의 전체적인 양상이 기복(祈福)신앙에 의존하고 있다고 지적·비판되고 있다.그리고 그러한 기복신앙의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서 현재 여러 가지로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그 오랜 역사와 함께 광범위한 뿌리내림은 어쩌면 아직까지도 기복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하는 것 자체가 우리의 불교 현실에서는 어렵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하지만 주어진 주제와 관련하여 과연 기복불교가 불교인가를 초기불교의 범위 속에서 논의해 보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기복불교라는 말의 첫 글자인 ‘기(祈)’자에 주의를 보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글자 그대로 ‘빈다’라는 뜻으로 동의중복의 어휘로 ‘기도(祈禱)’라는 말이 불교계를 포함하여 널리 쓰여지고 있다. 따라서 기복불교와 관련한 문제는 ‘기도’라는 말과 다음의 ‘복’이라는 말 그리고 ‘불교’라는 말을 중심으로 검토되고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과연 ‘비는 종교적 행위 즉, 기도’가 불교 교리의 근본적인 입장에서 성립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함께 ‘복’은 과연 ‘빌 수 있는 성질의 것’인지 아니면 ‘빌 수 없는 것’인지, 그리고 그 교리적 근거는 무엇인지가 바로 ‘기복불교가 불교인가’를 논하는 중심적인 문제가 될 것이다.
2. 기복불교의 정의
1) 기복이라는 말
기복이나 기복신앙이라는 말은 사실 불교계뿐만이 아니라 민간신앙이나 기독교계에서도 널리 쓰이고 있다. 그러나 기복불교라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일반적으로 기복은 특히 불교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런데 기복, 기복불교라는 말이 일상적으로 쓰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학술적인 전문용어로는 정착되어 있지 않는 듯하다.
몇몇 국어사전에서 기복이라는 말을 ‘복을 빎’이나 ‘복을 내려 주기를 기원하는 일’ 정도로 간단하게 정의하고 있을 뿐이며, 대부분의 국어사전류에서는 기복이라는 용어 자체가 등재되어 있지 않다. 현재 유통되고 있는 몇 종류의 불교사전에서도 ‘기복’은 물론 ‘기복불교’라는 항목조차 찾을 수 없다.
예외적으로 최근에 개정된 한 사전에서만 ‘기복불교’라는 항목을 더하고 있을 뿐이다.1) 1) 홍법원의 《불교대사전》, 1998. : “복을 비는 불교란 뜻으로 경전에는 없는 말이다. 중생의 미혹한 마음을 깨달아 참 부처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불교에서 오직 개인이나 가족의 안녕과 복만을 빌기 위해 기도하는 것을 기복불교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기복불교’를 논의할 수 있는가. 일단 역사 속에 나타난 ‘기복’이라는 말의 용례를 찾아 논의의 실마리를 삼아보자. 고려시대 왕의 만수무강과 국가의 발전을 위해 부처님께 빌었던 법회를 기복도량(祈福道場)이라 불렀다. 이 용례를 차용해서 기복불교의 정의를 한자 그대로 ‘복을 비는 불교’를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기도는 어떠한가. 고대문헌에서 농사가 잘 되기를 비는 기곡(祈穀)과 특정한 날에 지내는 기곡제(祈穀祭) 또는 기곡대제(祈穀大祭)가 있었으며, 이외에도 가물 때 비가 내리기를 비는 기우(祈雨) 또는 의례를 갖춘 제사를 기우제(祈雨祭)라고 하였다.
이외에도 눈 오기를 비는 기설제(祈雪祭)나 날이 개기를 비는 기청제(祈請祭) 등이 있었다. 이 같은 맥락에서 전통적으로 마음에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기를 천지신명(天地神明)과 불·보살(佛·菩薩)에 비는 종교적인 행위로서 좀더 전문적인 용어로는 빈다는 뜻의 기도(祈禱)라는 동어반복의 말이 사용되고 있다. 문헌에 따라서는 도(禱)자만 쓰이거나, 또는 기도의 순서를 반대로 도기(禱祈)라는 말로 특정한 대상에 소원을 비는 행위로 다양하게 쓰여져 왔다.
따라서 기복의 ‘기’는 ‘기도’라는 말과 의미가 일치하며 비는 형식에 있어 민속과 무속 그리고 밀교2)의 잡다한 요소를 그 옷으로 입고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어 왔다. 그리고 현재 불교신앙에 있어서도 기도라는 말은 관음기도, 지장기도, 독성기도 또는 참회 정진 기도 등으로 매우 중요한 종교적 기능을 담는 용어로 쓰이고 있다. 2) 이는 일본학자들에 의해 잡부밀교(雜部密敎) 또는 약해서 잡밀(雜密)이라고 분류한 것을 말한다.
불교 경전에서 한자(漢字) 기도는 밀교에 속하는 경전인 《이취경(理趣經)》 등에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밀교에서 가지기도(加持祈禱)나 기도찰(祈禱札)이나 기도예(祈禱禮)라는 말이 사용된다. 이 외에도 중국과 한국 찬술의 여러 문헌에도 나타난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다른 사람의 기도를 대신 맡아서 해주는 스님을 기도법사(祈禱法師)라고 하는 용례도 있다.
2) 기복불교의 성격
기도라는 말에 대한 현재 유통하는 불교사전들의 설명을 보면 기도는 기원(祈願)·기청(祈請)·기념(祈念)과 같이 쓰이는 말이라고 한다.3) 이러한 말들은 모두 기복불교라는 뜻과 부응하여 ‘불·보살의 가피를 빌어 재앙을 피하고 복(福)을 더하도록 비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즉, 양재초복(禳災招福)을 비는 행위로 설명하고 있다. 그 중의 한 불교사전은 좀더 구체적으로 기도를 설명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기복불교의 성격을 가늠할 수 있어 그대로 인용한다.
《불교용어사전》 《가산불교대사전》 《불교대사전(홍법원)》의 기도 항목.
(기도란)① 부처님이나 신에게 적극적으로 빌어 그 초자연적인 위신력을 기계적으로 구하는 것으로 현세 이익적인 기도와 ② 부처님 등의 숭배 대상에 귀의하여 믿음을 가지고 참회하여 죄를 소멸하고 감사·보은·찬탄·숭앙 등을 위하여 부르는 비공리적(非公利的)인 기도 등이다. 전자는 주로 민간신앙과 기능신앙(機能信仰)이고 기도사(祈禱師)와 산복(山伏)에 의해 행해지는 악마를 물리치고 복을 부르며 병을 치료하는 것 등에 이용되었다.
후자의 예로는 밀교의 삼밀가지(三密加持), 정토교 계통의 염불(念佛) 등이 있다. 그러나 이런 기도형식은 반복하여 외우고 부르는 과정으로 쉽게 자기 목적화하여 한층 현세이익을 구하는 주문과 주법으로 마침내 첫번째의 기도 형태로 근접하여 이행한다.
그 점에서 기도라고 하는 것은 숭배대상과 인간이라는 이원대립적(二元對立的)인 관계에서 후자의 인간이 전자의 초자연적인 여러 가지 힘을 강제로 사람의 일에 유익하게 개입하기 위하여 행해지는 주술이나 종교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기도의 성격을 전형적으로 개발하여 체계화한 것이 밀교인데, 밀교의 기도법은 크게 ① 식재법(息災法) : 재앙과 고난을 제거하기 위해 수행하는 것, ② 증익법(增益法) : 행복과 건강을 부르기 위해 수행하는 것, ③ 경애법(敬愛法) : 인간의 마음에 자애로운 생각을 일어나게 하기 위해 수행하는 것, ④ 조복법(調伏法) : 악인(惡人)과 악심(惡心)과 삿된 영혼을 물리치고 제압하기 위해 수행하는 것, ⑤ 구소법(鉤召法) : 스스로 희망하는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수행하는 것 등 다섯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이것들은 좁은 뜻으로는 소위 삼밀행(三密行) 안에서 구밀(口密)에 해당하지만, 넓은 뜻으로는 삼밀행 전체, 곧 입으로 진언(眞言)을 부르고 손으로 인계(印契 : mudra?를 맺고 마음으로 본존(本尊)을 생각하는 것에 관계된다. 그리하여 기도라고 하는밀교의 다섯 가지 방법은 주술적 현세 이익적인 측면과 종교적 구제론적인 측면의 두 가지를 통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가산불교대사전》의 ‘기도’ 항목.
조금은 장황한 인용문을 언급하고 있는 이유는 이후의 기복불교의 설명에 있어 중요한 내용들과 용어를 대부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기도 즉, 비는 행위는 어디까지나 그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위에서 ‘부처님’이나 ‘신’과의 ‘이원대립적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정토계의 염불’의 언급에서처럼 아미타불과 함께 관세음보살 같은 여러 보살들이 기도의 대상으로 잘 알려져 있다. 신들 가운데는 호법신(護法神)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경전 가운데의 한 신중(神衆)이나 또는 전체 그리고 한국 재래의 민속 신들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나아가 ‘초자연적인 힘’도 그 대상이 되기도 한다.
둘째로 비는 방법 즉, 기도 형식에 있어 ‘초자연적인 위신력’을 구하기 위해 ‘반복하여 외우고 부르는’ 또는 ‘주문’이나 ‘주법’이, 그리고 더 구체적으로는 다섯 가지 기도법 모두 삼밀(三密) 가운데 구밀(口密)의 언급에서처럼 반복하여 외우고 부르는 데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주문과 주법 그리고 진언이 언급되는 것은 기도의 매개로 초자연적인 힘을 빌기 위한 방법으로 흔히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기복 의례로 분류되는 대부분의 사찰과 무속의 의례에서 주문이 빠지지 않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셋째로는 그러한 대상에 비는 행위의 목적은 기복과 관련해서 ‘악마를 물리치고 복을 부르며 병을 치료하는 것’과 같은 ‘현세 이익적인 것’이 언급되었다. 그리고 특히 밀교의 기도법 가운데 식재법, 경애법, 증익법과 조복법의 내용에도 기도의 목적이 잘 요약되어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식재법은 수해나 가뭄과 같은 자연의 재앙과 전쟁이나 기근 그리고 귀신 접한 병과 같은 재앙을 소멸하기 위한 것이고, 경애법은 모든 사람이 나를 보면 기쁨을 내게 하고, 천룡(天龍), 팔부(八部), 야차(藥叉)귀신 등을 복종시키고, 귀신을 복종시키며, 모든 원적(怨敵)들의 마음을 돌려 내 편으로 만들고, 제불보살이 보살펴 주도록 하는 것이고, 증익법은 세간의 쾌락을 비는 복득증익(福得增益), 벼슬을 비는 세력증익(勢力增益), 장수·건강을 비는 연명증익(延命增益), 땅속의 보물을 얻는 것 등이 그것이고, 마지막으로 조복법은 적을 항복받기 위한 기도이다.
넷째로 이 같은 ‘호마법(護摩法)’과 같은 양재초복을 비는 의례가 언급되는데, 이는 기복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이를 주관하는 사제와 함께 집전이 필요하였음을 보여준다. 현재에 있어서도 개인적 차원의 기복이든 호국불교와 같은 국가적 차원의 기복이든 주로 의식과 의례를 통해 행해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다섯째로 기복과 관련한 기도는 비는 대상과 비는 사람 그리고 중재하는 사제와의 일종의 조건적인 거래관계가 형성된다는 점이다. 신·불과 같이 복을 줄 수 있는 대상에 물질적이거나 정신적인 방법으로 정성을 보이는 것으로 결국 신·불이 감응을 일으켜 비는 사람에게 그 위신력을 미치게 할 수 있다는 것이고, 이 같은 의식에 따라 비는 사람은 중재자인 사제에게 적당한 보수를 바치는 구조인 것이다. 이는 종교집단에서 왜 기복신앙이 더욱 조직화된 형태로 정비되어 나아가는지 그 이유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여섯째, ‘초자연적인 여러 가지 힘을 강제로 사람의 일에 유익하게 개입하기 위하여 행해지는 주술이나 종교적 행위’라는 문구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기도를 통한 기복불교와 한국의 샤머니즘 즉, 현세 이익적 차원에서 기복적 주술을 행하는 무속과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만날 수 있는 장이 주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복불교와 관련하여 무속의 관계는 빠뜨리지 않고 이야기되는 이유는 원색적인 기복불교의 양태 중에는 무속과의 경계가 극히 애매해 어디까지가 무속이고 어디까지가 불교인지 모를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무속의 여러 종류의 기복적 주술(magic art)과 잡부밀교 경전에 나타나는 갖가지 주술의 내용이 놀랍도록 흡사하다.
현재까지 한국불교의 기복적 성격의 책임이 마치 무속과의 습합으로 설명되고 있는데, 반대로 현재 무속에서 행해지고 있는 대부분의 주술적 방법이 이러한 밀교 경전에도 나타난다는 것은 유의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기복불교와 관련해서 무속이 불교에 영향을 준 것이라기보다는 밀교 경전이 무속의 주술적 방법과 내용을 더 풍부하게 기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이기 때문이다. 가히 몇 개의 밀교 경전, 순밀로 분류되는 《대일경》이나 《금강정경》 등을 제외하고는 많은 밀교 경전은 풍부한 주술적 내용을 담고 있는 기복 경전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언급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비공리적인 기도’나 ‘종교적 구제론적 측면의 기도’이다. 이 말은 엄격한 의미에서 기복불교의 비는 행위 즉 기복의 범위로 볼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즉, 현재 한국불교에서 기도라는 말은 쓰이고 있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비는 행위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 있다. 그것은 화(禍)를 거두고 속죄나 복이 내리길 비는 타력적인 행위라기보다는 참된 성품(인간성)을 계발하기 위한 자기연마의 일환으로, 내용에 있어 순수하게 내면적인 성찰과 자발적인 참회반성을 하는 종교적
행위까지 기도라는 말이 쓰여지고 있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참회기도나 참회정진기도가 그러한 말에 속한다고 할 것이다. 예경 대상으로부터 현세 이익적인 차원의 보수를 전혀 기대하지 않는 순수한 신앙 행위을 말한다. 밀교의 수행법인 주문 또는 진언의 독송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이 갖는 일반적인 기능인 양재초복의 기복적 주술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선정 수행에 들기 위한 방편으로 독송될 때에 한에서는 종교적 구제론적인 측면으로 나아간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내용의 수행에 적용되는 기도라는 말과 여기서 논의하려고 하는 기복이라는 말의 적용은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3. 불교 흥기에 즈음한 기복신앙
불교가 흥기하기 이전의 고대 인도의 신앙 형태는 신과 같은 초월적 존재나 자연계의 배후에 존재한다고 하는 초자연적인 지배력을 그 기도의 대상으로 하였다. 그러한 대상을 찬송하여 찬가를 남긴 것이 바로 《베다》이다. 신들에게 공물을 바치고 찬송하는 종교적 제의(祭儀)를 통해 갖가지 종류의 현실적인 이익을 얻으려 했던 것이다. 예를 들면, 건강, 장수, 풍년, 강우, 자손 번식, 가축의 증식, 아내를 얻는 일, 전승과 전리품을 얻는 것 등을 사제나 의례를 통해 빌었던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불교가 흥기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계속되었다. 그래서 현세 이익을 위해 갖은 종류의 주문, 주술, 의례 그리고 기도가 기복 행위의 방법으로 사용되어졌음을 잘 보여주는 경전이 있는데, 《브라흐마 잘라 숫타》와 한역 대응경전인 《범동경(梵動經)》이다. 그 내용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자신들에게 복을 내려달라고 각종의 공양물을 올리고 기도하며 제사를 지내는 것
손을 합장하여 일월성신(日月星辰)에게 예배하고 기도하는 것
귀신을 부르거나 쫓으며 행하는 갖가지 기도(種種厭禱)와 무수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두렵게 하는 법
정력이 강해지기를 빌거나 무력해지기를 비는 주술을 쓰는 것
자손 번창을 비는 행위
병을 점치는 것이나 병이 나도록 또는 낫도록 주문을 외우는 것
손을 짚거나 짚지 않고 점보는 것
해몽과 점성술, 손금 그리고 다른 부분의 신체를 보고(面相·手相·身相·頭相·足相 등) 수명과 재화와 손실을 점치는 것
천시(天時)를 점쳐서 비가 많고 적을 것을 예견하는 것
풍년이나 흉년을 점치는 것
태평이나 환난을 점치는 것
(혼사 등의)길일을 점치는 것
혼사에 있어 길일을 잡아주는 것
수명을 점치는 것
집을 짓고 정원을 잡는 데 풍수지리를 보아주는 것
길흉화복을 점치는 것
벙어리나 귀머거리가 되도록 주문을 쓰는 것, 그리고 손이 잘리거나 유산을 하도록 주술을 쓰는 것
거울이나 동녀(童女), 그리고 신으로부터 길흉의 때를 묻는 행위
사람들에게 행·불행을 주려고 주문을 외는 것
물과 기타 다른 방법에 의해 죄를 면할 수 있다는 정화의례을 행하는 것
물과 불에 주문을 거는 것
귀신을 부리는 주문을 쓰는 것
독사를 호리는 기술과 위험으로부터 보호받는 주술
화살로부터 해를 당하지 않는 주문을 쓰는 것
관직에 있는 사람의 지위를 예견해 주는 것
동물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주술
입에서 불을 내는 이변을 보이는 것
안약이나 눈의 연고를 사용하여 (환상을 일으켜) 사람을 즐겁게 하는 것
고행으로 남의 존경심을 사서 이양(利養)을 구하는 것
국운(國運)을 점치거나 예언하는 것.
이와 같이 초기경전은 당시 일반대중에 있어 양재초복과 현세이익과 관련한 갖은 종류의 기복 행위가 얼마나 성행하고 있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불교가 이를 비판하면서 태동하였다는 것은 인류사에 있어 불교 흥기의 당위성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부처님은 이러한 모든 행위는 축생법(畜生法: tiraccha?a-vijja? 또는 서도법(庶道法)이라 규정하고 강력하게 금지하고 배격하였다. 이 말이 뜻하는 바는 ‘동물의 지식’ 즉, 수행하는 사람은 결코 행해서는 안 될 비천한 지식이라는 것이다. 불교적 용어를 쓰자면 세간적 또는 세속적 가치를 지니는 범속한 행태들이다.
따라서 수행자가 이양(利養)을 구하여 이를 행하거나 또는 부응하게 되면 사된 방법으로 연명(邪命 : miccha?iva)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런데 간과할 수 없는 기복 행위와 관련된 행태들이 언제부터인가 불교 내부로 그대로 복귀하거나 또는 변형된 모습으로 행해지고 있다.
4. 기복신앙의 불교적 비판
경전에서 ‘연기(緣起)를 보는 자는 업보(業報)를 본다’라고 한다. 이렇듯 불교의 업설(業說)은 궁극적으로 성불·열반과 직결되는 연기법과 함께 구제론적 성격의 가르침이다. 업보에 대한 가르침을 간단히 말하면 ‘(인간) 행위에 대한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어떤 행위에 대해 어떤 결과가 나타난다고 하는 행위와 그 결과의 인과 법칙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연기라는 진리에 의해 사람이 짓는 어떤 일이나 행위에 상응하는 어떤 결과가 반드시 나온다는 것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현생의 많은 사람이 짓는 행위의 과거 원인과 미래의 결과를 이야기할 수 있었던 근거가 되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주문이나 주술 그리고 기도를 매개로 현실적인 이익을 추구하려는 태도에 대해 비판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업보설의 무지 때문에 사람들은 인간 행위와 결과에 있어 외부의 초월적이고 신비로운 존재나 세계에 좌우된다고 믿고, 그렇게 주재하는 그들을 기쁘게 하고 달래거나 또는 교감을 통해서 은총을 비는 행위가 바로 기복인 것이다. 부처님이 주술이나 주문 그리고 기도 또는 의례를 부정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신의 뜻이나 귀신들의 장난과 조화에 의해 인간의 운명이 결정된다거나 아니면 우주의 거대한 영적 흐름과 법칙에 인간의 운명이 끼워 맞추어져 있다고 하는 생각을 비판하고 부정한 것이다.
기복에 대한 불교적 입장을 확인해 볼 수 있는 유명한 경전이 있다. 한역 《가미니경(伽彌尼經)》과 그에 대한 팔리 대응경전이 그것이다. 경전은 사제의 의례를 통한 기도로 천상에 태어나게 할 수 있느냐 하는 한 마을의 촌장의 질문으로부터 시작한다. Sam?utta Nika?a (PTS) vol.Ⅳ. pp.310ff. 중아함 권17의 《가미니경(伽彌尼經)》.
세존이시여, 서쪽에서 온 바라문 사제들이 물병을 들어올려 물을 뿌려 정화시켜 주는 의례나 화환으로 치장하여 올리는 의례나, 스스로 물에 들어가 씻는 정화 의례나 또는 화신(火神)에게 제사 지내는 의례를 행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의례를 통해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의 이름을 불러내 하늘 나라에 태어나게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세존은 아라한이며, 정각자이십니다. 그러니 당연히 세존께서도 사람이 죽으면 행복한 천상에 태어나도록 해 주실 수 있겠지요?
촌장의 이와 같은 질문에 부처님은 곧바로 다음과 같이 반문한다.
촌장이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약 어떤 사람이 살생하고 훔치고 사음을 행하고 거짓말과 삿된 생각에 빠진 자였다고 하자. 그리고 어느 때에 그의 목숨이 마치고 난 후 주변의 여러 사람들이 모여 모두 두 손을 치켜 모아들고 주문을 외우면서 그가 부디 하늘 나라에 태어날 수 있도록 찬양·기도하면서 그 사람의 주위를 돌며 떠나지 않았다고 하자. 이때 과연 죽은 자가 여러 사람들의 찬양과 기도로 하늘 나라에 태어날 수 있겠는가?
두말할 것이 없이 그럴 수 없다고 촌장은 답한다. 생전에 살생과 도둑질 등의 악행을 했던 사람을 위해 주문을 외우면서 비는 기도 의례로써 좋은 곳에 날 수 없다는 것은 지극히 솔직한 심정의 토로이었을 것이다.
두 손을 모으고 주문을 외우고 찬양· 기도했다고 할 때 바라문교의 신들이 기도의 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비는 것 즉, 기도라는 말과 함께 찬양 또는 찬송의 뜻이 쓰여졌다는 것이다. 찬송의 팔리 어는 토마나(thomana)이며 칭찬(稱讚)으로 한역되었다.
기도는 팔리 어로 ‘아야짜나’(a?a?ana)이며 한역으로는 구색(求索)으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칭찬의 원어에 해당하는 토마나의 산스크리트는 스토마나(stomana)인데 바라문의 의례에 있어 전문적인 용어로서 음률에 맞추어 부르는 만트라(mantra)를 나타낸다.
만트라의 한역은 진언(眞言)이나 주(呪) 그리고 신주(神呪) 또는 명주(明呪) 등으로 나타난다. 비는 행위(기도)와 그 대상인 초월적인 존재인 신들 그리고 그것을 집전하는 데 있어 매개가 되는 찬송가로서 만트라는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 같은 구조는 유신론(有神論)적인 특징을 가진 모든 종교에서 거의 보편적으로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상관관계를 염두에 두고 부처님이 기복 즉, 비는 행위에 대한 비판으로 단지 기도만을 대상으로 삼지 않고 더 나아가서 그 대상이 되는 신들과 그 매개인 만트라 주문까지 모두 부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계속해서 부처님은 생전에 착한 행위를 지은 사람을 마찬가지 방법으로 지옥에 태어나도록 주문을 외우며 기도한다고 해서 그렇게 될 수 없다고 하여 인간 행위의 결과가 주문과 기도 그리고 의례와 같은 타력(他力)에 의해 바꾸어질 수 없고 엄연한 선인선과(善因善果)·악인악과(惡因惡果)를 자업자득(自業自得) 또는 자작자수(自作自受)한다는 업보설(業報說)을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 계신다.
(악행자의 경우) 그것은 마치 큰 바위를 깊은 물에 던져 놓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바위가 떠오르도록 합장하며 주문과 기도로써 찬송하는 것과 같고, (선행자의 경우) 버터나 기름이 담긴 병을 깊은 물에 던져 깨뜨렸을 때 병 조각은 가라앉고 버터와 기름은 자연히 물 위로 떠오를 것을 사람들이 합장하며 주문과 기도로써 가라앉도록 하는 것과 같다.
최종적으로 이 같은 비유를 들고 난 후에 팔정도를 언급하는 것으로서 기도의 무효용(無效用)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있다. 왜냐하면 팔정도가 기도나 주문과 같은 타력(他力)을 전혀 전제하지 않는 인간을 중심으로 인간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실천법이기 때문이다. 이 경은 단적으로 불교가 당시의 미신적 그리고 기복적 종교 행태들에 대해 얼마나 비판적 태도를 취했던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부처님의 이러한 비판은 시대적 당위성이었다. 그러한 당위성으로 인해 불교는 새로운 종교로 흥기할 수 있었고, 인류 역사에 있어 보편성으로 인정되어 아직까지 그 빛을 더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는 중심교리―연기·사성제·삼법인 등등―에 있어 그 어느 가르침도 주술이나 기도로써 인간을 변화시킨다는 가능성도 담고 있지 않다. 학자들이 이 시기의 불교야말로 인류 종교사에서 있어 가장 비판적이고 지성적이고 이지적이고 합리적이며 그리고 계몽적인 종교라고 이야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5. 중심 교리로 본 기복의 검토
인류 역사에 있어 불교의 가장 큰 공헌 중의 하나를 든다면 인간의 운명이 인간의 외부적인 것이나 내부적인 것이나 또는 외부와 내부의 합한 것도 아닌, 나아가 아무런 원인도 없이 주어지는 상황에 따라 우연히 일어난다고 하는 미신으로부터 계몽시켜준 것이다. 대신에 인간 자신의 행위야말로 길흉화복의 도덕적 책임자이며 주체자임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궁극적인 입장에서 불교의 중심 사상인 연기설에 바탕을 둔 불교의 업설 즉, 인간의 행위에 관한 가르침이 왜 ‘복을 빌어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가를 잘 보여준다.
1) 연기설 속의 기복
비는 행위 즉, 기복이라는 종교적 행위가 불교의 근본 입장에서 왜 성립할 수 없는가는 바로 불교의 중심 사상인 연기법과 함께 연기법에 바탕을 둔 업설 때문이다. 연기법이 업사상과 직결되어 있음은 앞에서 이미 언급한 ‘연기를 보는 자는 업보를 본다’라고 하는 경전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연기설과 업보설에 따르면 우리는 복을 ‘빌’ 대상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의 갈대가 땅에 설 수 없고 두 개 혹은 세 개가 서로 의지해야 설 수 있다는 비유를 들어 인간과 인간사는 단지 관계 선상 속에서 그리고 조건 속에서 존재하고 전개됨을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관계를 떠나 인간의 운명에 관여하는 초월적인 어떤 존재가 있어 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때문에 연기설을 설명하는 잡아함의 《노경(蘆經)》과 이에 대응되는 팔리 경전 등에서 인간사를 발생시키는 소재의 근원에 따른 다믐 네 가지 범주를 모두 부정하고 있다.
즉, 인간사의 근거가 내재적인 요인에 있는 것(自作)도, 외재적인 주재에 의해 좌우되는 것(他作)도 그렇다고 양자가 모두 개입해서 나타나는 것(自他作)도 나아가서는 자작·타작·자타작도 아닌 가운데 원인 없이 나타나는 것(非自非他無因作)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또 다른 경전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그 내용이 제시되면서 마찬가지로 부정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잡아함 권12의 《노경(蘆經)》 ; Sam?utta Nikaya(Pali Text Society) vol.Ⅱ. p.112∼115. 9) 중아함 권3. 13의 《도경(度經)》; 권4. 19의 《니건경(尼乾經)》; Majjhima Nika?a (Pali Text Society) vol.Ⅱ. pp.214ff.
첫째, 인간사 모든 것은 숙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둘째, 인간사 모든 것은 전지전능한 자재신(自在神)에 의해 주관된다.
셋째, 인간사 모든 것은 원인도 조건도 없이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결정된다.
이처럼 불교는 당시 일반인을 포함한 종교·철학계가 취하거나 취할 수 있는 모든 형태의 세계관·인간관을 각각 4가지로 정리하여 비판·부정하고 있다. 이는 오늘을 사는 현대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세계관·인간관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입장들을 검토하고 있는 불교는 첫째의 입장은 앞의 인간사가 모두 내재적인 요인에 따라 결정된다는 자작과 함께 인간의 행·불행이 과거나 전생에 지은 바에 따라 결정된다고 하는 인간관이나 세계관으로 일종의 숙명론이라 할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이러한 숙명을 알기 위해 무당을 찾아 점을 보고 역술가에 손금이나 관상 또는 사주팔자를 보아 현재와 미래의 운명을 알아보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른 갖가지 종류의 기복적인 주술이 행해진다. 불교에 있어서도 연기론적 업보설보다는 숙세의 업만을 중심으로 인생의 문제를 강조하다 보면 자칫 기복신앙의 근거를 제공하는 양상으로 나아간다.
다음으로 두번째는 인간사 모두 전지 전능한 자재신에 의해 행·불행 등이 좌우된다고 하는 것은 앞의 외재적인 요인의 타작을 말한다. 신의 섭리에 따라 세상이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때 비는 대상이 분명하여 전형적인 기복신앙으로 발전할 수 있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종교인들에게 흔히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삶에 개입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귀신이나 귀령들도 이에 해당될 것이다.
무속의 굿이나 칠성·산신·일월성신(日月星辰) 그리고 조상신에 대한 신앙도 외부의 신적 존재와 인간의 운명이 그들과 관계되어 있다는 생각에서이다. 이러한 존재는 인간의 모든 길흉화복의 원천이어서 사제(司祭)에 의한 기복의례 또한 매우 발달해 있다.
불교에 있어서도 신과 같은 초월적인 존재로 불·보살을 생각하고 복을 주는 대상으로만 간주하여 복 내기를 비는 것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원인이 없이 나타난다는 것은 인간사 모든 행·불행이 앞의 네 가지에 의한 것도 아니고 행위의 인과에 따른 것도 아닌 단지 그때 그때 처한 상황에 따라 예측불가능하게 가변적으로 또는 우연히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기복을 비판하는 교리적 근거인 불교의 업설을 도리어 부정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인간의 길흉화복이 외부의 어떤 힘이나 내부적으로 결정된 어떤 것도, 그렇다고 양자를 합한 것이나 또는 아무런 이유 없이 오는 것도 아니라는 부정을 통해서 연기법의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모두 기복행위의 근거를 부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연기법에 있어서는 개개인의 삶과 관련되어 곁곁이 연결되어 있는 관계와 조건 속에서 인간의 길흉화복이 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의 업보설의 목적은 이러한 관계와 조건을 분명히 아는 지혜와 함께 개선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을 하도록 강조하는 것이다.
2) 업보설 속의 기복
기본적인 업(業)의 뜻은 ‘행위’인데 불교에서 업의 정의는 “나(부처님)는 의도(cetan) 있는 행위야말로 ‘업’이라고 선언한다.” 라고 하는 경구에 잘 나타나 있다. 불교적 의미의 업이란 인간의 신체적·정신적인 모든 면에서 의도 있는 적극적인 행위을 의미함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같은 업의 정의로 시작되는 경전은 우리의 언어적·신체적인 활동 그리고 의식과 같은 전반적인 활동과 행위가 전개되는 데 있어 그 결과를 현세에 받을 수도 다음 생에 받을 수도 있다고 계속해서 설명한다.
그러하기에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그 어떤 행위도 짓지 말고 좋은 결과를 이루기 위해 자각되고 진취적인 행위를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강조된다. 나아가 좋은 결과를 위한 구체적인 행위들도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 십선(十善)과 같은 행위와 함께 그 도덕적인 기준을 설하고 있으며, 더 적극적으로는 사무량심(四無量心)이 좋은 결과를 초래하는 씨앗임을 밝히면서 경을 마치고 있다.
행위를 업이라 할 때 그에 대한 결과는 보(報)나 과(果)라 하여 업보(業報)나 과보(果報)라는 말이 쓰이고 있다. 업보나 과보라는 말의 과는 원래 팔리나 산스크리트에서도 열매나 과일을 뜻하는 말이다. 씨를 뿌리면 싹이 트고 줄기가 나서 언젠가는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 결과가 있듯이 인간의 행위의 이치도 이와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한 바라문에게 “나도 또한 밭을 간다. 그리고 씨를 뿌리고 김을 맨다.”라고 했듯이 땀 흘리는 적극적인 노력과 의지가 들어간 행위야말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의미 있는
행위임을 강조하고 있다.
좋은 결과를 생산할 수 있는 적극적인 노력과 의지가 개입된 행위야말로 인간을 다복하게 한다는 매우 역동적인 가르침을 제시하고 있다. ‘칠불통계게(七佛通戒偈)’에서 적극적으로 악을 막고 선을 짓는 것이 모든 부처님이 한결같이 설하는 가르침의 정수(精髓)라고 강조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타력에 빌어서 좋은 결과를 얻겠다는 기복이 들어설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이다.
아무튼 기복 문제와 관련하여 근본적인 의미의 업설은 세계와 인간의 길흉화복과 흥망성쇠가 신이나 숙명 그리고 우연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더 나아가 불교의 업보설은 근본적으로 기도라는 종교적 행위와 대치하는 입장에 있다.
즉, 업설에 의하면 앞에서 본 《가미니경》의 예화에서 알 수 있듯이 초월적인 존재에게 드리는 기도에 의해 인과(因果)가 바뀌어질 수 있다는 것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대신에 연기법에 따른 자신의 행위 속에 근거하고 있는 업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업설에 따르면 복을 빌어야 할 대상은 바로 우리 자신인 것이다. 연기법의 이치에 따라 오로지 자신의 행위에 의해 ‘복’과 ‘비복(非福)’이 초래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업보설의 무지나 피상적인 이해 때문에 사람들은 인간 행위와 결과에 있어 외부의 초월적이고 신비로운 존재나 세계에 기대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 행위와 결과를 주재하고 있는 것이 있어 인간의 길흉화복이 모두 그들의 뜻에 따라 좌우된다고 믿는 것이다. 따라서 그렇게 주재하는 그들을 기쁘게 하고 달래거나 또는 교감을 통해서 은총을 비는 행위가 바로 기복인 것이다.
6. 복의 실체
1) 복의 개념
경전에 쓰여지는 한역 복(福)은 산스크리트의 푼야(pun.ya)나 팔리의 푼냐(punya)이다. 한역 과정에 있어서 복이라는 말의 동의어처럼 ‘선(善)’이나 ‘공덕(功德)’ 또는 ‘복덕(福德)’ 등으로도 옮겨졌다. 현재 유통되고 있는 불교사전류에 의하면 ‘공덕’ ‘선’ ‘가치 있는 행위’나 ‘법을 실행함으로써 발생하는 좋은 과보’, 그리고 ‘좋은 일을 함으로써 돌아오는 것’ 등으로 복의 뜻을 풀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기복불교와 관련해서 쓰이고 있는 ‘복’의 의미는 불교적 의미의 ‘법을 실행함으로써 발생하는 좋은 과보’, ‘좋은 일을 함으로써 돌아오는 것’이라기보다 국어사전의 ‘아주 좋은 운수’나 ‘큰 행운과 오붓한 행복’으로 쓰여지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양자의 차이는 불교 쪽이 ‘법을 실행함으로써’ 또는 ‘좋은 일을 함으로써’와 같이 원인적인 행위에 따르는 결과로서 ‘좋은 과보’나 ‘돌아오는 것’ 등을 말하는 데 반해 국어사전의 의미는 원인적인 행위는 언급되지 않은 채 단지 결과만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실 불교에서 의미하는 ‘복’이란 원인적인 것에 따른 결과로서 좋은 과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좋은 과보를 가져다 주는 원인으로서의 현재의 선행 자체도 ‘복’으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현재의 선행 자체도 과거의 선행이 전제되어 있지 않으면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에 짓는 복행(福行)은 이숙과(異熟果)이며 다시 이 과보를 복이나 복과(福果)라고 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불교에서 복을 정의하는 데 ‘선’이나 ‘가치 있는 행위’ 그 자체로 쓰는 경우가 있다. 즉 현재의 ‘선행’ 자체도 과거의 선행에 대한 또 다른 복이고 또 다시 미래에 좋은 결과를 뒤따르게 할 수 있는 행위라는 것이다.
2) 복업(福業) : 복 짓는 행위
복업을 닦아서 행복을 얻는 것은 복인복과(福因福果)라 하여 선인선과(善因善果)에 포함된다. 초기경전의 여러 곳에서 복의 결과가 뒤따르는 복인(福因)의 복행(福行)을 3가지로 나누어서 3복업(福業)을 설명하는데, 보시(布施), 지계(持戒) 그리고 정진(精進)의 복업이 그것이다. 한역의 《복업경(福業經)》은 위의 3복업을 다음과 같이 옮기면서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복 짓는 행위을 설명하고 있다.
첫째, 시(施)의 복업 : 마음을 내어 수행자들이나 가난한 사람,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사람, 오갈 곳 없는 노숙자에게 밥과 반찬·의복·침구·약품 그리고 주거지나 향, 꽃 등을 아낌없이 주는 것.
둘째, 평등(平等)의 복업 : 생명을 다치게 하지 않고, 훔치지 않으며 항상 반성해 보며, 부드러운 말을 쓰며, 남의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하며, 자신의 배우자 외에 다른 이와 성관계를 갖지 않고, 항상 진실하여 남을 속이지 않으며 정신을 흐리게 하는 술을 마시지 않으며, 난잡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또 모든 생명에 대한 사랑의 마음, 가엾이 여기는 마음, 기쁘게 하는 마음 그리고 평등하게 대해 주려는 마음을 이 세상 두루 채우도록 한량없는 마음을 내는 것.
셋째, 사유(思惟)의 복업 :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주의집중(念覺支) 등의 7각지를 닦는 것.
이상과 같이 3가지가 복을 뒤따르게 하는 기본적인 행위로서 복 짓는 복행이라고 많은 경전은 설명하고 있다. 또 다른 경에서는 부처님이 설법할 때 졸다가 꾸지람을 듣고 너무 열심히 정진한 나머지 결국 눈이 먼 제자가 바늘에 실을 꿰지 못하자 부처님이 직접 꿰어 주면서 복행(福行)이 설해지고 있다.증일아함 제12권 《福業經》.
여기서 부처님은 “세상에서 복을 구하는 사람으로 나보다 더한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나는 여섯 가지 법에 만족할 줄 모른다.
첫째는 보시하는 것이요,
둘째는 도덕적인 삶을 사는 것이요,
셋째는 참는 것이요,
넷째는 법을 설명하는 것이요,
다섯째 중생들을 보호하는 것이요, 여섯째는 위없는 바른 도를 구하는 것이다.”
라고 하여 복 짓는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증일아함 제32권 5.
계속해서 경의 말미에 복력(福力)으로 성불(成佛)까지 하게 되었다는 매우 예외적인 강조로서 경을 맺는다.13) 이렇게 ‘복을 짓는 행위’를 뜻하는 복업은 그 말과 함께 내용에 있어서도 선한 방향으로 향하는 적극적인 노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따라서 복업은 바로 복을 짓는 작복(作福)을 의미한다. 이는 복전(福田 : pun??khetta)이라는 말의 표현에서도 나타난다. 밭에 씨 뿌리고 잘 돌보아야 꽃 피고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이치와 같다. 이 경우에는 경 안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이미 열반을 성취한 여래의 경우 미래세에 복과(福果)를 주는 복업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복전 가운데 부처님이 가장 큰 복전이라고 하거나 부처님과 함께 불교 승가에 또는 팔정도를 수행하는 사람이 큰 복전이라고 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법보시가 최고의 복행으로 설명하거나, 병자를 돌보아 주는 것이 곧 부처님을 공양하는 복전으로 강조되기도 한다. 증일아함 제5권 12. 《일입도품(壹入道品)》 ; Vinaya Pit.aka (PTS) vol.Ⅰ. p.302.
3) 복과(福果) : 복행의 결과
복행의 복업에 따른 과보는 수많은 경전에서 다양하게 설해지고 있다. 드물게는 불교의 궁극적인 열반·해탈까지 언급하고 있지만 대부분은 복업에 따른 결과는 세간적 범위에 한정되어 나타난다. 하늘 세상과 같은 살기 좋은 곳에 몸을 받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초기 경전의 이른 층(古層)의 경전에서는 복을 짓는 것만으로 열반을 성취할 수 있다고 하지는 않는다. 또한 열반을 성취한 아라한이나 부처님은 복이나 비복행(非福行)의 개념에서조차 넘어서 있는 경지라고 한다. 하지만 후기층의 경전에서부터는 복을 짓는 행위 자체가 열반 성취의 직접적인 원인처럼 설해지고 있다.
우선 복업의 3복행 중 보시와 도덕적 생활과 같은 복된 행위는 그 정도에 따라서 3가지 단계의 과보가 있다고 한다.
첫째 작은 정도로 적은 복이 있는 세계를 누리는 것,
둘째는 큰 정도로 매우 유복한 상태의 삶을 누리는 것,
셋째는 인간의 범위를 넘은 천상과 같은 즐거운 세계에 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Anuttara Nikaya (PTS) vol.Ⅳ. p.241.
이것 외에도 현재의 행복함, 유복함, 신체적 건강이나 높은 사회적 지위가 과거의 복업에 대한 결과로서 이야기된다. 마찬가지로 현재의 복업은 그에 상응하는 미래의 복과를 초래한다.반대로 비복업(非福業)을 지었을 때는 화보(禍報) 또한 삼세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복과를 맺는 시간에 대해서는 복전의 비유처럼 복인이라는 씨앗을 심는 복행과 복업에 따라 언젠가 복과가 맺게 되는데 그것은 경전에 따라 바로 현재나 미래 또는 다음 생이나 다음 다음 생 혹은 부정기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설명되는데 이는 현재의 복과도 전생이나 그 이전의 다생에 걸친 복업에 대한 것일 수 있다. 이는 업보설과 같은 맥락에 있다.
그래서 “복을 지어서 오랫동안 쌓고 또 모아두면 그 복덕은 능히 그 사람을 위해 다른 세상의 즐거움을 마련한다.”라고 하는 복덕장(福德藏)의 개념까지도 보여준다. 이렇게 삼세에 걸친 비복과(非福果)와 복과(福果)를 《아비달마법온족론(阿毘達磨法蘊足論)》은 초기경전을 바탕으로 ‘오손감(五損減)과 오원만(五圓滿)’으로 각각 대응하여 정리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중아함 제46권의 《명종경(命終經)》. 17) 권경임, 《현대불교사회복지론》, 나남출판, 2000, p.58의 주 10에 인용된 원문에 대한 해석 : 그리고 다음의 ‘가정, 경제, 건강, 도덕 그리고 종교’와 같이 다섯 가지로 분류한 것은 p.58에서 빌어 옴.
① 가정 : 가족간의 불화와 화목.
② 경제 : 부의 손실과 원만한 증식.
③ 건강 : 병을 얻는 것과 무병하며 건강한 것.
④ 도덕 : 비도덕적인 삶과 도덕적인 삶.
⑤ 종교 : 나쁜 견해에 빠지는 것과 바른 견해를 갖는 것.
복업에 따른 인생 전반에 걸친 복된 삶으로 가정의 화목, 부유하게 되는 것, 건강의 증진, 도덕적인 삶 그리고 올바른 종교 생활로 요약되는 것이다. 불교가 말하는 복의 큰 범위를 잘 보여주고 있다.
4) 작복의 문제
대승의 《금강경(金剛經)》은 복덕을 사량해서는 안 된다 하여 집착 없는 복 지음의 큰 과보를 설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것은 초기경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복과를 위한 복행을 짓는 데 적극적일 것이 강조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복과를 계산한 복업을 지을것을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다.
사실 교리적인 입장에서 볼 때 복과 비복보다 더 큰 개념으로 사용되는 것은 선(善 : kusala)과 악(惡 : akusala)이라는 말이다. 이는 선·악의 개념 속에 복과 비복은 포함될 수 있지만 복과 비복 속에 선·악이 포함되는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선·악은 불교의 업설에 포함되는 개념이다. 이러한 개념의 범위 속에 복을 짓는 바에 따른 결과는 주로 복락이 넘치는 곳에 나는 것처럼 주로 세간적인 가치를 지니는 범위로 설명되었다.
하지만 불교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그러한 세간적인 가치까지도 뛰어넘는 열반과 성불에 있다. 그렇기에 열반과 관련해서는 다양한 종류의 선이 설명되지 복이라는 말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키지는 않는다. 그래서 불교의 궁극적인 열반의 경지 또는 아라한과는 복업까지도 초월한 상태로 설명된다. 그도 그럴 것이 열반 성취에 있어서는 선·악과 같은 상대적인 개념의 업까지도 소멸되어야 더 이상 윤회의 삶을 받을 일이 없는 완전한 경지가 되기 때문이다.
7. 마치는 말
지금까지 기복이 근본적으로 가능한가를 불교의 중심 사상인 연기설과 업설과의 관련 선상에서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볼 때 불교에서 말하는 복이 ‘과연 기복이냐 작복이냐’ 할 때 당연히 기복이 아닌 작복이라고 답하는 것이 정법(正法)의 입장에 선 것이라 할 수 있다.
초기경전에서 기복이 불교적인 의미로 쓰이는 용례는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작복이라는 말은 그 내용의 강조와 함께 수 없이 많이 나타난다. 땀 흘리는 농부와 같이 복인(福因)의 씨를 뿌리는 복행과 복업이 강조될 뿐이다. 그리고 불교의 중심 교리를 통해 보더라도 복을 빌 대상은 없다. 그렇다고 부처님이 다른 기도(祈禱)의 대상을 모두 제거해 버린 뒤 스스로 그 자리에 앉지도 않았다.
부처님은 예경(禮敬)의 대상이지 화(禍)는 물론 복을 내리는 기도의 대상이 결코 아니다. 나아가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한 이유는 세상 사람들의 물질적인 기대나 세속적인 욕망을 채워주기 위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불교를 포함한 다른 종교의 기능에 있어 ‘기복’이야말로 더 현실적으로 설득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어느 종교이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 종교의 중심 경전에 근거한 본연의 입장과 대치되는 대중적 차원의 신앙이 병존(竝存)하는 이중적 구조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간격의 차가 좁을수록 그 종교가 본래 가지고 있는 순수한 입장의 신앙적 선도력(先導力)이 잘 실현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필자는 편의상 크게 ‘경전적 불교’와 ‘대중적 불교’로 구분해 보고자 한다. 경전적 불교란 다시 ‘승원불교’라고도 할 수 있으며 전문 출가자에 의한 해탈·열반을 목표로 하는 불교를 말하고, 대중적 불교란 재가자를 중심으로 공덕을 쌓는 것을 목표로 하는 ‘작복불교’ 또는 ‘재가불교’라고 이름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기복불교’는 경전적 불교와 대중적 불교의 왜곡된 형태―특히 후자의―로서 현세 이익 차원에 머물러 주술과 관련해 있는 ‘통속불교’로 다시 이름해 본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 경계를 엄격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반대로 그 간격이 클수록 통속적인 대중 신앙에 영합하여 있거나 아니면 압도당해 본래의 순수한 입장을 드러내지 못한 채 왜곡된 형태 속에 머무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정법 구현의 차원에서라도 복을 달라고 빌고 매달리는 형태의 기복불교에서 작복불교라는 불교의 참된 입장으로 개선하고 유도하는 것이 강조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참된 불교인이라면 당당하게 복을 짓고 그 복과를 받을 수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기복이 아닌 작복이라는 말과 함께 시작하는 《복경(福經)》의 서두를 소개하면서 글을 맺는다.복을 두려워하지 말라. 복은 사랑스럽고 행복한 것이다. 마음으로 늘 생각하는 바이다. 왜냐하면 복은 기쁘고 행복한 것이기 때문이다.이와는 반대로 복을 사랑스럽지 않다고 생각하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을 두려워하라. 마음으로 늘 생각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라. 왜냐하면 복이 아닌 것은 괴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나(부처님)는 오랜 동안 작복(作福)하여 오랫동안 복을 받았는데, 그것은 사랑스럽고 행복한 것으로서 마음으로 늘 생각하는 바이다. 중아함 제34권의 《복경(福經)》
조준호
동국대 불교학과 및 인도 델리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 졸업. 철학박사.
현재 동국대 강사.
논문으로 <붓다(Buddha) 개념에 관한 연구: 팔리(Pali) 경전에 나타난 일국토 일불설에 대한 비판>
<불교의 기원과 Upanisad 철학: 불교는 Upanisad 철학의 아류에 지나지 않는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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