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elakassapavatthu (나체 수행자 깟사빠 이야기)
*본경은 나체수행자 깟사빠에게 하신 세존의 사자후를 담은 것이다. 그래서 「깟사빠 사자후 경」(Kassapasihanada sutta)이라고도 전해온다. 사자후(sihanada)는 siha(사자)-nada(소리)의 역어인데 주석서에서는 "다른 교설에 의해서 깨뜨려지지 않고 자신의 교설을 명쾌하게 밝히는 두려움 없는 소리"(DA.iii.844)로 설명하기도 하고 "뛰어난 소리이며 우둔하지도 않고 포악하지도 않은 사자가 내는 최상(uttama)의 소리"(DA.iii.879)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자후라는 제목이 부튼 경은 모두 다른 종교나 다른 사상에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들이 결코 따를 수 없고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세존의 교단에만 있는 뛰어난 가르침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마치 뭇짐승들이 사자후를 듣고 두려워하듯이 세존의 이러한 사자후를 듣고 외도들릉 두려워하고 자취를 감추게 된다.
38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우룬냐에서 깐나깟탈라에 있는 사슴동산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나체수행자 깟사빠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과 힘께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두분이 안부 인사와 우호적인 대화를 나눈 뒤에 한 곁에 섰다. 한 곁에 서서 나체수행자 깟사빠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나는 이렇게 들었습니다, 고따마 존자여, '사문 고따마는 모든 고행을 비난한다. 모든 고행자와 거친 삶을 사는 자(난행고행)를 전적으로 비난하고 비방한다.'라고. 고따마 존자여, '사문 고따마는 모든 고행을 비난한다. 그는 고행자와 거친 삶을 사는 자를 전적으로 비난하고 비방한다.'라고 말하는 그들은 누구든지 고따마 존자께서 말씀하신 대로 말하는 것입니까? 고따마 존자를 거짓으로 비난하는 것이 아닙니까? 가르침에 일치하는 법을 설명하는 것입니까? (고따마 존자가 설했다고 전해진 이것을 반복하더라도) 어떤 사람도 나쁜 견해에 빠져 비난의 조건을 만나지 않겠습니까? 저희는 고따마 존자를 비난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우룬냐(Urunna)은 꼬살라 국의 도시 이름이며, 깐나깟탈라(Kannakatthala)는 우룬나에서 멀지 않은 아름다운 장소라고 주석서는 밝히고 있다.(DA.ii.349). 바로 이곳에서 빠세나디 꼬살라 왕에게 설하신 경으로 「맛지마 니까야」 「깐나깟탈라 경」(Kannakattala sutta, M90)이 있다.
*원어는 acela로 a(부정접두어)+cela(옷)로 분석되며 주석서에서는 나체유행승(nagga-paribbajaka)이라고 정의한다.(Ibid)
*초기경들과 주석서들에서 깟사빠(Kassapa, 가섭)라고 불리는 사람은 DPPN에 의하면 30명 가까이 된다. 그래서 그들을 구분하기 위해서 각각 다른 별칭으로 부르고 있다. 가장 유명한 세존의 직계제자인 깟사빠 존자는 마하깟사빠(대가섭)라 불렀고, 우루웰라에서 천 명의 제자들과 함께 붓다께 귀의한 가섭 3형제 가운데 맏형은 우루웰라 깟사빠(Uruvela Kassapa)라 불렀다.
본경에 나오는 깟사빠는 나체수행자인데 본경에 의하면 그는 세존의 설법을 듣고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맛지마 니까야」 「박꿀라 경」(Bakkulasutta. M124/iii.124ff.;AA.i.171)에 의하면 본경에 나타나는 나체수행자 깟사빠는 박꿀라 존자의 오랜 친구였는데 박꿀라 존자의 설법을 듣고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
382. "깟사빠여, '사문 고따마는 모든 고행을 비난한다. 모든 고행자와 거친 삶을 자를 전적으로 비난하고 비방한다.'라고 말하는 자들은 내가 말한 것을 말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있지도 않는 것에 의해 거짓으로 나를 비난하는 것입니다. 여기 깟사빠여, 나는 인간을 뛰어 넘은 청정한 하늘과 같은 눈(天眼)으로, 어떤 거친 삶을 사는 고행자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고통스러운 곳, 비참한 곳, 험난한 곳, 지옥에 태어나는 것을 봅니다. 여기 깟사빠여, 나는 인간을 뛰어 넘은 청정한 하늘과 같은 눈으로, 어떤 거친 삶을 사는 고행자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 세계에 태어나는 것을 봅니다.
383. 여기 깟사빠여, 나는 인간을 뛰어 넘은 청정한 하늘과 같은 눈으로, 어떤 적은 고통의 삶을 사는 고행자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고통스러운 곳, 비참한 곳, 험난한 곳, 지옥에 태어나는 것을 봅니다. 여기 깟사빠여, 나는 인간을 뛰어 넘은 청정한 하늘과 같은 눈으로, 어떤 거친 적은 고통의 삶을 사는 고행자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 세계에 태어나는 것을 봅니다. 깟사빠여, 이런 고행자들의 오고 감, 죽고 다시 태어남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아는 내가 모든 고행을 비난하고, 모든 거친 삶을 사는 고행자를 전적으로 비난하고 비방하겠습니까?
384. 깟사빠여, 머리카락을 꿰뚫는 궁숯처럼 남의 말에 대처하는 현명하고 유능한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있습니다. 생각건대, 그들은 지혜를 익혀서 치우친 견해를 부수며 돌아다닙니다(논쟁에 뛰어납니다). 그들도 어떤 경우에는 나와 일치하고, 어떤 경우에는 나와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옳습니다'고 말하는 어떤 것을 우리도 '옳습니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옳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어떤 것을 우리도 '옳지 않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옳습니다'고 말하는 어떤 것을 우리는 '옳지 않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옳지 않습니다다'라고 말하는 어떤 것을 우리는 '옳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옳습니다'고 말하는 어떤 것을 남들도 '옳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옳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어떤 것을 남들도 '옳지 않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옳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어떤 것을 남들은 '옳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옳습니다'라고 말하는 어떤 것을 남들은 '옳지 않습니다'라고 말합니다.
samanuyuñjāpanakathā (교차하여 질문하는 이야기)
385.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도반들이여, 일치하지 않는 경우는(서로 일치하지 않는 점들에 대해서는) 그대로 둡시다. 일치하는 경우에 대해서 스승은 스승끼리, 승가는 승가끼리 교차하여 질문하고(서로 질문하고), 이유를 묻고, 함께 대화하는 현명한 자들이 있습니다. '해롭고 해롭다고 알려진,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고(결점이 있고)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라고 알려진, 실천하지 않아야 하고 실천하지 않아야 한다고 알려진, 성자에게 어울리지(적합하지) 않고 성자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알려진, 나쁘고 나쁘다고 알려진(검은 것이고 검은 것이라고 알려진) 법들을 이 존자 가운데 누가 남김없이 버렸습니까? 사문 고따마입니까, 아니면 다른 스승 존자들입니까?라고.
*인도에서는 불교의 승단만을 상가(sangha)로 부른 것이 아니라 사문들을 비롯한 종교집단들을 상가라고 부르기도 하고 가나(gana)라고도 불렀다.
386. 깟사빠여, 교차하여 질문하고, 이유를 묻고, 함께 대화하는 현명한 자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라는 경우가 있습니다. ''해롭고 해롭다고 알려진,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고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라고 알려진, 실천하지 않아야 하고 실천하지 않아야 한다고 알려진, 성자에게 어울리지 않고 성자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알려진, 나쁘고 나쁘다고 알려진 법들을 이 존자들 가운데 사문 고따마는 남김없이 버렸습니다. 그러나 다른 스승 존자들은 일부분을 버렸습니다.'라고. 이렇게, 깟사빠여, 교차하여 질문하고, 이유를 묻고, 함께 대화하는 현명한 자들 가운데 대부분 내가 칭송됩니다.
387. 깟사빠여, 교차하여 질문하고, 이유를 묻고, 함께 대화하는 다른 현명한 자들도 있습니다. '유익하고 유익하다고 알려진, 비난받지 않는 것이고 비난받지 않는 것이라고 알려진, 실천해야 하고 실천해야 한다고 알려진, 성자에게 어울리고 성자에게 어울린다고 알려진, 좋고 좋다고 알려진 법들을 이 존자들 가운데 누가 남김없이 수용하였습니까? 사문 고따마입니까, 아니면 다른 스승 존자들입니까?'라고.
388. 깟사빠여, 교차하여 질문하고, 이유를 묻고, 함께 대화하는 다른 현명한 자들도 있습니다. '유익하고 유익하다고 알려진, 비난받지 않는 것이고 비난받지 않는 것이라고 알려진, 실천해야 하고 실천해야 한다고 알려진, 성자에게 어울리고 성자에게 어울린다고 알려진, 좋고 좋다고 알려진 법들을 이 존자들 가운데 사문 고따마는 완전히 수용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스승 존자들은 일부분을 수용하였습니다.'라고. 이렇게, 깟사빠여, 교차하여 질문하고, 이유를 묻고, 함께 대화하는 자들 가운데 대부분 내가 칭송됩니다.
389. 깟사빠여, 교차하여 질문하고, 이유를 묻고, 함께 대화하는 다른 현명한 자들도 있습니다. '해롭고 해롭다고 알려진,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고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라고 알려진, 실천하지 않아야 하고 실천하지 않아야 한다고 알려진, 성자에게 어울리지 않고 성자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알려진, 나쁘고 나쁘다고 알려진 법들을 이 존자들 가운데 누가 남김없이 버렸습니까? 고따마 제자들의 승가입니까, 아니면 다른 스승 존자들의 제자들의 승가입니까?'라고.
390. 깟사빠여, 교차하여 질문하고, 이유를 묻고, 함께 대화하는 현명한 자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라는 경우가 있습니다. ''해롭고 해롭다고 알려진,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고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라고 알려진, 실천하지 않아야 하고 실천하지 않아야 한다고 알려진, 성자에게 어울리지 않고 성자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알려진, 나쁘고 나쁘다고 알려진 법들을 이 존자들 가운데 고따마의 제자들의 승가는 남김없이 버렸습니다. 그러나 다른 스승 존자들의 제자들의 승가는 일부분을 버렸습니다.'라고. 이렇게, 깟사빠여, 교차하여 질문하고, 이유를 묻고, 함께 대화하는 현명한 자들 가운데 대부분 내가 칭송됩니다.
391. 깟사빠여, 교차하여 질문하고, 이유를 묻고, 함께 대화하는 다른 현명한 자들도 있습니다. '유익하고 유익하다고 알려진, 비난받지 않는 것이고 비난받지 않는 것이라고 알려진, 실천해야 하고 실천해야 한다고 알려진, 성자에게 어울리고 성자에게 어울린다고 알려진, 좋고 좋다고 알려진 법들을 이 존자들 가운데 누가 남김없이 수용하였습니까? 고따마의 제자들의 승가입니까, 아니면 다른 스승 존자들의 제자들의 승가입니까?'라고.
392. 깟사빠여, 교차하여 질문하고, 이유를 묻고, 함께 대화하는 현명한 자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라는 경우가 있습니다. '유익하고 유익하다고 알려진, 비난받지 않는 것이고 비난받지 않는 것이라고 알려진, 실천해야 하고 실천해야 한다고 알려진, 성자에게 어울리고 성자에게 어울린다고 알려진, 좋고 좋다고 알려진 법들을 이 존자들 가운데 고따마의 제자들의 승가는 남김없이 수용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스승 존자들의 제자들의 승가는 일부분을 수용하였습니다.'라고. 이렇게, 깟사빠여, 교차하여 질문하고, 이유를 묻고, 함께 대화하는 현명한 자들 가운데 대부분 내가 칭송됩니다.
ariyo aṭṭhaṅgiko maggo (여덟 요소로 구성된 성스러운 길-팔정도(八正道))
393. 깟사빠여, 길이 있고, 닦음이 있습니다. 그대로 닦는 자는 '사문 고따마는 적절한 때에 말하고, 사실대로 말하고, 이익되게 말하고, 법에 맞게 말하고, 율에 맞게 말하는 자'라고 스스로 알게 되고 스스로 봅니다. 그러면, 깟사빠여, 무엇이 길이고, 무엇이 닦음이어서 그대로 실천하는 자는 '사문 고따마는 적절한 때에 말하고, 사실대로 말하고, 이익되게 말하고, 법에 맞게 말하고, 율에 맞게 말하는 자'라고 스스로 알게 되고 스스로 봅니까?
오직 이것,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노력(正精進), 바른 마음챙김(正念), 바른 삼매(正定)의 여덟 요소로 구성된 성스러운 길(道)[팔정도.八正道]입니다.
깟사빠여, 이것이 길이고, 이것이 닦음입니다. 그대로 실천하는 자는'사문 고따마는 적절한 때에 말하고, 사실대로 말하고, 이익되게 말하고, 법에 맞게 말하고, 율에 맞게 말하는 자''라고 스스로 알게 되고 스스로 봅니다.
tapopakkamakathā (고행의 실천 이야기)
394. 이렇게 말했을 때, 나체 수행자 깟사빠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도반 고따마여, 이런 고행을 실천도 이런 사문·바라문에게는 사문 됨이라고 알려졌고, 바라문 됨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나체수행자이고(나체로 살고), 관습을 거부하며 살고(품행에 얽매이지 않고), 음식을 손에 (받아) 핥아서 먹고, [음식을 주기 위해서] 오라 하면 가지 않고, [음식을 주기 위해서] 서라 하면 서지 않으며, 가져온 음식을 받지 않고, [자기 몫으로] 지정된 것을 받지 않으며, 초청에 응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릇으로 [주면] 받지 않고, 접시로 [주면] 받지 않고, 문지방을 넘어서 주는 것, 막대기에 꿰어진 것, 절구공이 안에 있는 것을 받지 않으며, 두 사람이 먹을 때, 임신부로부터, 젖을 먹이는 여자로부터, 남자 품에 안겨 있는 여자로부터 받지 않으며, [보시한다고] 널리 알릴 때 받지 않고, 개가 옆에 있을 때 받지 않고(개가 대기하고 있는 곳에서 받지 않고), 파리 때가 날라 다니는 곳에서 받지 않고, 어류를 받지 않고, 고기를 받지 않고, 술과 발효주와 발효하여 끓인 것을 마시지 않습니다. 한 집에서 한 입의 음식을, 두 집에서 두 입의 음식을 ··· 일곱 집에서 일곱 입의 음식을 받아 먹습니다. 한 닷띠의 음식으로 삶을 유지하고(한 닷띠의 음식만을 구걸하고), 두 닷띠의 음식으로 삶을 유지하고, ··· 일곱 닷띠의 음식으로 삶을 유지합니다. 하루에 한 번 음식을 먹고, 이틀에 한 번 음식을 먹고, ··· 일주일에 한번 음식을 먹습니다. 이처럼 보름에 한 번 음식을 먹는 방법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실천하며 머뭅니다.
*닷띠(datti)란 적은 분량의 음식을 넣어서 놓아두는 작은 그릇(pati)을 말한다.(DA.ii354)
395. 도반 고따마여, 이런 고행의 실천도 이런 사문·바라문에게는 사문 됨이라고 알려졌고, 바라문 됨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야채를 먹기도 하고, 수수를 먹기도 하고, 생쌀을 먹기도 하고, 부드러운 뼈를 먹기도 하고, 수초를 먹기도 하고, 왕겨를 먹기도 하고, 쌀 씻은 물을 먹기도 하고, 참깨가루를 먹기도 하고, 풀을 먹기도 하고, 소똥을 먹기도 하고, 나무뿌리와 열매를 음식으로 삶을 유지하고, 떨어진 열매를 먹고 삶을 유지합니다.
396. 도반 고따마여, 이런 고행의 실천도 이런 사문·바라문에게는 사문 됨이라고 알려졌고, 바라문 됨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삼베로 만든 옷도 입고, 삼베와 다른 원료를 섞어 짠 거친 옷도 입고, 시체를 싸맨 헝겊으로 만든 옷도 입고, 넝마로 만든 옷도 입고, 나무껍질을 엮어 만든 옷도 입고, 영양 가죽을 입고, 영양 가죽으로 만든 외투도 입고, 꾸사 풀로 만든 옷도 입고, 나무껍질로 만든 외투도 입고, 나무의 편편한 조각으로 만든 옷도 입고, 머리카락으로 만든 담요를 두르고, (동물의) 꼬리털로 만든 담요를 두르고, 올빼미 깃털로 만든 옷도 입습니다.
머리카락과 수염을 뽑는 수행을 실천하는 자여서 머리카락과 수염도 뽑고, 앉는 것을 거부하는 자여서 똑바로 서기도 하고(자리에 앉지 않고), 쪼그리고 앉는 정진을 실천하는 자여서 쪼그려 앉기도 하고, 가시에 기대는 자여서 가시로 된 침상을 사용합니다. 밤에 세 번을 물에 들어가는 수행을 실천하면서 머뭅니다."라고.
tapopakkamaniratthakathā (고행의 무의미함)
397. "만약, 깟사빠여, '나체수행자이고, 관습을 거부하며 살고, 손에 받아 핥아서 먹고 ··· 일주일에 한 번 음식을 먹습니다. 이처럼 보름에 한 번 음식을 먹는 방법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실천하며 머뭅니다.'라고 해도 그에게 이런 계의 갖춤과 마음의 갖춤과 지혜의 갖춤이 닦이지 않고 실현되지 않는다면, 그는 사문 됨에서 멀고, 바라문 됨에서 멉니다. 깟사빠여, 비구가 적의가 없고 악의가 없는 자애로운 마음을 닦고,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바로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여 성취하여 머물 때, 깟사빠여, 이런 비구가 사문이라고도, 바라문이라고도 불립니다.
만약, 깟사빠여, '야채를 먹기도 하고 ··· 나무뿌리와 열매를 음식으로 삶을 유지하고, 떨어진 열매를 먹고 삶을 유지합니다.'라고 해도 그에게 이런 계의 갖춤과 마음의 갖춤과 지혜의 갖춤이 닦이지 않고 실현되지 않는다면, 그는 사문 됨에서 멀고, 바라문 됨에서 멉니다. 깟사빠여, 비구가 적의가 없고 악의가 없는 자애로운 마음을 닦고,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바로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여 성취하여 머물 때, 깟사빠여, 이런 비구가 사문이라고도, 바라문이라고도 불립니다.
만약, 깟사빠여, '삼베로 만든 옷도 입고, 삼베와 다른 원료를 섞어 짠 거친 옷도 입고 ··· 밤에 세 번을 물에 들어가는 수행을 실천하면서 머뭅니다.' 라고 해도 그에게 이런 계의 갖춤과 마음의 갖춤과 지혜의 갖춤이 닦이지 않고 실현되지 않는다면, 그는 사문 됨에서 멀고, 바라문 됨에서 멉니다. 깟사빠여, 비구가 적의가 없고 악의가 없는 자애로운 마음을 닦고,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바로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여 성취하여 머물 때, 깟사빠여, 이런 비구가 사문이라고도, 바라문이라고도 불립니다."
398. 이렇게 말했을 때, 나체수행자 깟사빠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고따마 존자여, 사문 됨은 행하기 어렵습니다. 바라문 됨은 행하기 어렵습니다."라고.
"깟사빠여, '사문 됨은 행하기 어렵다. 바라문 됨은 행하기 어렵다.'라는 것은 세상에서는 당연한 것입니다. 만약, 깟사빠여, '나체 수행자이고, 관습을 거부하며 살고, 손에 받아 핥아서 먹고 ··· 이처럼 보름에 한 번 음식을 먹는 방법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실천하며 머문다.'라는, 깟사빠여, 이만큼의 고행의 실천으로 사문 됨이나 바라문 됨이 행하기 어렵고, 매우 행하기 어렵다고 한다면, 이것은 '사문 됨은 행하기 어렵다. 바라문 됨은 행하기 어렵다.'라고 말하기에 적절하지 않습니다.
장자나 장자의 아들, 심지어 물 긷는 하녀까지도 '이제 나는 나체수행자로 살고, 관습을 거부하며 살고, 음식을 손에 (받아) 핥아서 먹고 ··· 이처럼 보름에 한 번 음식을 먹는 방법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실천하며 머문다.'라고 행하는 것이 가능할 것입니다.
깟사빠여, 이만큼과 다른 어떤 것, 이런 고행의 실천과 다른 어떤 것에 사문 됨이나 바라문 됨이 행하기 어렵고, 매우 행하기 어려움이 있으므로 그것 때문에 '사문 됨은 행하기 어렵다. 바라문 됨은 행하기 어렵다.'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합니다. 깟사빠여, 비구가 적의가 없고 악의가 없는 자애로운 마음을 닦고,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바로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여 성취하여 머물 때, 깟사빠여, 이런 비구가 사문이라고도, 바라문이라고도 불립니다.
만약, 깟사빠여, '야채를 먹기도 하고, 수수를 먹기도 하고 ··· 나무뿌리와 열매를 음식으로 삶을 유지하고, 떨어진 열매를 먹고 삶을 유지한다.'라는,
깟사빠여, 이만큼의 고행의 실천으로 사문 됨이나 바라문 됨이 행하기 어렵고, 매우 행하기 어렵다고 한다면, 이것은 '사문 됨은 행하기 어렵다. 바라문 됨은 행하기 어렵다.'라고 말하기에 적절하지 않습니다.
장자나 장자의 아들, 심지어 물 긷는 하녀까지도 '이제 나는 야채를 먹기도 하고, 수수를 먹기도 하고 ··· 나무뿌리와 열매를 음식으로 삶을 유지하고, 떨어진 열매를 먹고 삶을 유지한다.’라고 행하는 것이 가능할 것입니다.
깟사빠여, 이만큼과 다른 어떤 것, 이런 고행의 실천과 다른 어떤 것에 사문 됨이나 바라문 됨이 행하기 어렵고, 매우 행하기 어려움이 있으므로 그것 때문에 '사문 됨은 행하기 어렵다. 바라문 됨은 행하기 어렵다.'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합니다. 깟사빠여, 비구가 적의가 없고 악의가 없는 자애로운 마음을 닦고,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바로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여 성취하여 머물 때, 깟사빠여, 이런 비구가 사문이라고도, 바라문이라고도 불립니다.
만약, 깟사빠여, '삼베로 만든 옷도 입고, 삼베와 다른 원료를 섞어 짠 거친 옷도 입고 ··· 밤에 세 번 물에 들어가는 수행을 실천하면서 머문다.'라는, 깟사빠여, 이만큼의 고행의 실천으로 사문 됨이나 바라문 됨이 행하기 어렵고, 매우 행하기 어렵다고 한다면, 이것은 '사문 됨은 행하기 어렵다. 바라문 됨은 행하기 어렵다.'라고 말하기에 적절하지 않습니다.
장자나 장자의 아들, 심지어 물 긷는 하녀까지도 '이제 나는 삼베와 다른 원료를 섞어 짠 거친 옷도 입고 ··· 밤에 세 번 물에 들어가는 수행을 실천하면서 머문다.'라고 행하는 것이 가능할 것입니다.
깟사빠여, 이만큼과 다른 어떤 것, 이런 고행의 실천과 다른 어떤 것에 사문 됨이나 바라문 됨이 행하기 어렵고, 매우 행하기 어려움이 있으므로 그것 때문에 '사문 됨은 행하기 어렵다. 바라문 됨은 행하기 어렵다.'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합니다. 깟사빠여, 비구가 적의가 없고 악의가 없는 자애로운 마음을 닦고,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바로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여 성취하여 머물 때, 깟사빠여, 이런 비구가 사문이라고도, 바라문이라고도 불립니다.
399. 이렇게 말했을 때, 나체수행자 깟사빠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고따마 존자여, 사문은 알기 어렵습니다. 바라문은 알기 어렵습니다."라고.
"깟사빠여, '사문은 알기 어렵습니다. 바라문은 알기 어렵습니다. 만약, 깟사빠여, '나체수행자이고, 관습을 거부하며 살고, 손에 받아 핥아서 먹고 ···이처럼 보름에 한 번 음식을 먹는 방법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실천하며 머문다.'라는, 깟사빠여, 이만큼의 고행의 실천으로 사문이나 바라문이 알기 어렵고, 매우 알기 어렵다고 한다면, 이것은 ‘사문은 알기 어렵습니다. 바라문은 알기 어렵습니다.’라고 말하기에 적절하지 않습니다.
장자나 장자의 아들, 심지어 물 긷는 하녀까지도, '이 사람은 나체수행자이고, 관습을 거부하며 살고, 손에 받아 핥아서 먹고 ···이처럼 보름에 한 번 음식을 먹는 방법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실천하며 머문다.'라고 아는 것이 가능할 것입니다.
깟사빠여, 이만큼과 다른 어떤 것, 이런 고행의 실천과 다른 어떤 것에 사문이나 바라문이 알기 어렵고, 매우 알기 어려움이 있으므로 그것 때문에 '사문은 알기 어렵다. 바라문은 알기 어렵다.'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합니다. 깟사빠여, 비구가 적의가 없고 악의가 없는 자애로운 마음을 닦고,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바로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여 성취하여 머물 때, 깟사빠여, 이런 비구가 사문이라고도, 바라문이라고도 불립니다.
만약, 깟사빠여, '야채를 먹기도 하고, 수수를 먹기도 하고 ··· 나무뿌리와 열매를 음식으로 삶을 유지하고, 떨어진 열매를 먹고 삶을 유지한다.'라는, 깟사빠여, 이만큼의 고행의 실천으로 사문이나 바라문이 알기 어렵고, 매우 알기 어렵다고 한다면, 이것은 ‘사문은 알기 어렵습니다. 바라문은 알기 어렵습니다.’라고 말하기에 적절하지 않습니다.
장자나 장자의 아들, 심지어 물 긷는 하녀까지도 '이 사람은 야채를 먹기도 하고, 수수를 먹기도 하고 ··· 나무뿌리와 열매를 음식으로 삶을 유지하고, 떨어진 열매를 먹고 삶을 유지한다.'라고 라는 것이 가능할 것입니다.
깟사빠여, 이만큼과 다른 어떤 것, 이런 고행의 실천과 다른 어떤 것에 사문이나 바라문이 알기 어렵고, 매우 알기 어려움이 있으므로 그것 때문에 '사문은 알기 어렵다. 바라문은 알기 어렵다.'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합니다. 깟사빠여, 비구가 적의가 없고 악의가 없는 자애로운 마음을 닦고,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바로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여 성취하여 머물 때, 깟사빠여, 이런 비구가 사문이라고도, 바라문이라고도 불립니다.
만약, 깟사빠여, 삼베로 만든 옷도 입고, 삼베와 다른 원료를 섞어 짠 거친 옷도 입고 ··· 밤에 세 번을 물에 들어가는 수행을 실천하며서 머문다.'라는, 깟사빠여, 이만큼의 고행의 실천으로 사문이나 바라문이 알기 어렵고, 매우 알기 어렵다고 한다면, 이것은 ‘사문은 알기 어렵습니다. 바라문은 알기 어렵습니다.’라고 말하기에 적절하지 않습니다.
장자나 장자의 아들, 심지어 물 긷는 하녀까지도, '이 사람은 삼베로 만든 옷을 입고 ··· 밤에 세 번 물에 들어가는 데 몰두하며 머문다.'라고 아는 것이 가능할 것입니다.
깟사빠여, 이만큼과 다른 어떤 것, 이런 고행의 실천과 다른 어떤 것에 사문이나 바라문이 알기 어렵고, 매우 알기 어려움이 있으므로 그것 때문에 '사문은 알기 어렵다. 바라문은 알기 어렵다.'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합니다. 깟사빠여, 비구가 적의가 없고 악의가 없는 자애로운 마음을 닦고,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바로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여 성취하여 머물 때, 깟사빠여, 이런 비구가 사문이라고도, 바라문이라고도 불립니다.
sīlasamādhipaññāsampadā (계-정-혜를 갖춤)
400. 이렇게 말했을 때, 나체수행자 깟사빠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그런데 고따마 존자여, 무엇이 그 계를 갖춤이고, 무엇이 마음을 갖춤이고, 무엇이 지혜를 갖춤입니까?"라고.
"여기, 깟사빠여, 여기 여래·아라한·정듣각이 세상에 출현합니다. ··· 두려움을 보면서 머뭅니다. 받아들인 뒤 학습계목들 위에서 닦습니다. 유익한 몸의 업과 말의 업을 갖추고, 생계가 청정하고, 계를 갖추고, 감각기능의 문을 보호하고, 마음새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갖추고, (얻은 필수품으로) 만족합니다.
401. 깟사빠여, 어떻게 비구는 계를 갖춘 자입니까? 여기, 깟사빠여, 비구는 생명을 해치는 행위를 버리고 생명을 죽이는 행위를 멀리 떠납니다. 몽둥이를 내려놓고 칼을 내려놓습니다. 모든 살아있는 중생들을 향하여 관대하고 자비한 마음을 갖고 머뭅니다. 계를 갖춤에는 이런 것도 있습니다. ···
심지어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 존지들은 믿음으로 주어진 음식을 먹으면서, 예를 들면, 신의 축복을 비는 의식, 귀신을 쫓는 의식 ··· 필수적인 약용식물을 처방하는 등 하천한 지식을 통한 삿된 삿된 생활로 생계를 유지합니다. 그는 하천한 지식을 통한 이런 삿된 생활로부터 멀리 떠난 자입니다. 계의 갖춤에는 이런 것도 있습니다.
깟사빠여, 이렇게 계로써 잘 단속하는, 계를 갖춘 그 비구는 어느 곳에서도 두려움을 보지 못합니다. 예를 들면, 깟사빠여,적을 정복한, 머리에 의식을 치르고 왕위에 오른 끄샤뜨리야 왕은 어느 곳에서도 두려움을 보지 못합니다. 이처럼, 깟사빠여, 계로써 잘 단속하는, 계를 갖춘 그 비구는 어느 곳에서도 두려움을 보지 못합니다. 이런 성스러운 계의 조목(계온.戒蘊)을 갖춘 그는 안으로 피하지 않아도 되는 행복을 경험합니다. 이렇게, 깟사빠여, 비구는 계를 갖춘 자입니다. 깟사빠여, 이것이 계를 갖춤입니다. ··· 초선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마음을 갖춤에는 이런 것도 있습니다. ··· 제2선을 ··· 제3선을 ··· 제4선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마음을 갖춤에는 이런 것도 있습니다. 깟사빠여, 이것이 마음을 갖춤입니다.
그가 이렇게 삼매를 닦고 ··· 지(知.앎)와 견(見.봄)으로 마음을 이끌어 내고 향하게 합니다. ··· 지혜를 갖춤에는 이런 것도 있습니다. ···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분명히 압니다. ··· 지혜를 갖춤에는 이런 것도 있습니다. 깟사빠여, 이것이 지혜의 갖춤입니다.
깟사빠여, 이런 계의 갖춤, 마음을 갖춤, 지혜를 갖춤보다 더 높고 더 뛰어난 다른 계를 갖춤, 마음을 갖춤, 지혜를 갖춤은 없습니다.
sihanadakatha (사자후)
402. "깟사빠여, 계를 설하는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있어서 그들은 여러 가지 방편으로 계를 칭송하여 말합니다. 그러나, 깟사빠여, 성스러운 최상의 계에 관한 한 거기서 나는 나 자신과 동등한 자들을 관찰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더 뛰어난 자가 있겠습니까? 깟사빠여, 참으로 높은 계에 관한 한 내가 뛰어납니다.
깟사빠여, 고행을 통한 금욕을 설하는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있어서 그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고행을 통한 금욕을 칭송하여 말합니다. 그러나, 깟사빠여, 성스러운 최상의 고행을 통한 금욕에 관한 한 거기서 나는 나 자신과 동등한 자들을 관찰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더 뛰어난 자가 있겠습니까? 깟사빠여, 참으로 높은 금욕에 관한 한 내가 더 뛰어납니다.
깟사빠여, 지혜를 설하는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있어서 그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지혜를 칭송하여 말합니다. 그러나, 깟사빠여, 성스러운 지혜에 관한 한 거기서 나는 나 자신과 동등한 자들을 관찰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더 뛰어난 자가 있겠습니까? 깟사빠여, 참으로 높은 지혜에 관한 한 내가 더 뛰어납니다.
깟사빠여, 해탈을 설하는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있어서 그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해탈을 칭송하여 말합니다. 그러나, 깟사빠여, 성스러운 최상의 해탈에 관한 한 거기서 나는 나 자신과 동등한 자들을 관찰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더 뛰어난 자가 있겠습니까? 깟사빠여, 참으로 높은 해탈에 관한 한 내가 더 뛰어납니다.
403. 깟사빠여, 외도 유행승들이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을지 모릅니다. '사문 고따마는 사자후를 토한다. 그러나 빈 집에서 사자후를 토하뿐 대중들 가운데서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라고. '그렇게 말하지 말라.'는 것이 내가 그들에게 하려는 말입니다. 깟사빠여, 그들에게 나는 '사문 고따마는 사자후를 토합니다. 그것도 대중들 가운데서 그렇게 한다.'라고 말합니다.
깟사빠여, 외도 유행승들이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을지 모릅니다. '사문 고따마는 사자후를 토한다. 그것도 대중들 가운데서 그렇게 한다. 그러나 그는 용맹스럽게 사자후를 토하지는 않는다.'라고. '그렇게 말하지 말라.'는 것이 내가 그들에게 하려는 말입니다. 깟사빠여, 그들에게 나는 '사문 고따마는 사자후를 토한다. 그것도 대중들 가운데서 그렇게 한다. 그는 용맹스럽게 사자후를 토한다'라고 말합니다.
깟사빠여, 외도 유행승들이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을지 모릅니다. '사문 고따마는 사자후를 토한다. 그것도 대중들 가운데서 그렇게 한다. 그는 용맹스럽게 사자후를 토한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게 질문을 하지는 않는다.'라고. '그렇게 말하지 말라.'는 것이 내가 그들에게 하려는 말입니다.
깟사빠여, 그들에게 나는 '사문 고따마는 사자후를 토한다. 그것도 대중들 가운데서 그렇게 한다. 그는 용맹스럽게 사자후를 토한다. 아울러 누구라도 그에게 질문을 한다.'라고 말합니다.
깟사빠여, 외도 유행승들이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을지 모릅니다. '사문 고따마는 사자후를 토한다. 그것도 대중들 가운데서 그렇게 한다. 그는 용맹스럽게 사자후를 토한다. 그러나 그들의 질문을 설명하지 않는다.'라고. '그렇게 말하지 말라.'는 것이 내가 그들에게 하려는 말입니다. 깟사빠여, 그들에게 나는 '사문 고따마는 사자후를 토한다. 그것도 대중들 가운데서 그렇게 한다. 그는 용맹스럽게 사자후를 토한다. 아울러 질문하는 자가 누구라도 그들의 질문을 설명한다.'라고 말합니다
깟사빠여, 외도 유행승들이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을지 모릅니다. '사문 고따마는 사자후를 토한다. 그것도 대중들 가운데서 그렇게 한다. 그는 용맹스럽게 사자후를 토한다. 그러나 질문에 대한 설명으로 그들의 마음을 만족하게 하지는 못한다.'라고. '그렇게 말하지 말라.'는 것이 내가 그들에게 하려는 말입니다. 깟사빠여, 그들에게 나는 '사문 고따마는 사자후를 토한다. 그것도 대중들 가운데서 그렇게 한다. 그는 용맹스럽게 사자후를 토한다. 그들에게 나는 질문에 대한 설명으로 그들을 만족하게 한다'라고 말합니다.
깟사빠여, 외도 유행승들이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을지 모릅니다. '사문 고따마는 사자후를 토한다. 그것도 대중들 가운데서 그렇게 한다. 그는 용맹스럽게 사자후를 토한다. 그러나 들어야 할만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그렇게 말하지 말라.'는 것이 내가 그들에게 하려는 말입니다. 깟사빠여, 그들에게 나는 '사문 고따마는 사자후를 토한다. 그것도 대중들 가운데서 그렇게 한다. 그는 용맹스럽게 사자후를 토한다. 그들에게는 나는 들어야 할 만한 것으로 생각한다.'라고 말합니다.
깟사빠여, 외도 유행승들이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을지 모릅니다. '사문 고따마는 사자후를 토한다. 그것도 대중들 가운데서 그렇게 한다. 그는 용맹스럽게 사자후를 토한다. 그러나 듣고서 청정하게 믿지는 않는다.'라고. '그렇게 말하지 말라.'는 것이 내가 그들에게 하려는 말입니다. 깟사빠여, 그들에게 나는 '사문 고따마는 사자후를 토한다. 그것도 대중들 가운데서 그렇게 한다. 그는 용맹스럽게 사자후를 토한다. 그들에게는 나는 그들은 듣고서 청정하게 믿는다'라고 말합니다.
깟사빠여, 외도 유행승들이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을지 모릅니다. '사문 고따마는 사자후를 토한다. 그것도 대중들 가운데서 그렇게 한다. 그는 용맹스럽게 사자후를 토한다. 그러나 그들은 청정한 믿음을 행하지는 못한다.'라고. '그렇게 말하지 말라.'는 것이 내가 그들에게 하려는 말입니다. 깟사빠여, 그들에게 나는 '사문 고따마는 사자후를 토한다. 그것도 대중들 가운데서 그렇게 한다. 그는 용맹스럽게 사자후를 토한다. 그들에게는 나는 그들은 청정한 믿음을 행한다.''라고 말합니다.
깟사빠여, 외도 유행승들이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을지 모릅니다. '사문 고따마는 사자후를 토한다. 그것도 대중들 가운데서 그렇게 한다. 그는 용맹스럽게 사자후를 토한다. 그러나 그들은 올바른 길을 닦지는 못한다.'라고. '그렇게 말하지 말라.'는 것이 내가 그들에게 하려는 말입니다. 깟사빠여, 그들에게 나는 '사문 고따마는 사자후를 토한다. 그것도 대중들 가운데서 그렇게 한다. 그는 용맹스럽게 사자후를 토한다. 그들에게는 나는 올바른 길을 닦는다.'라고 말합니다.
깟사빠여, 외도 유행승들이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을지 모릅니다. '사문 고따마는 사자후를 토한다. 그것도 대중들 가운데서 그렇게 한다. 그는 용맹스럽게 사자후를 토한다. 그러나 도 닦음을 성취한 분을 만족하게 하지는 못한다.'라고. '그렇게 말하지 말라.'는 것이 내가 그들에게 하려는 말입니다. 깟사빠여, 그들에게 나는 '사문 고따마는 사자후를 토한다. 그것도 대중들 가운데서 그렇게 한다. 아울러 그는 용맹스럽게 사자후를 토한다. 그에게 질문을 한다. 그들의 질문을 설명한다. 질문에 대한 설명으로 그들의 마음을 만족하게 한다. 들어야 할 만한 것으로 생각한다. 듣고서 청정하게 믿는다. 청정한 믿음을 행한다. 올바른 길을 닦는다. 닦음과 익힘을 완성한 분을 흡족하게 한다.'라고 말합니다,
titthiyaparivasakatha (깟사빠가 구족계를 받음)
404. 깟사빠여, 한 때에 나는 라자가하에서 독수리봉 산에 머물렀다. 거기서 니그로다라는 어떤 고행자가 높은 금욕에 대해서 질문을 하였습니다. 나는 그가 질문한 높은 금욕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습니다. 내가 설명해 주었을 때 그는 마음이 기뻐서 크게 감동한 것 같았습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세존의 법을 듣고 마음이 기뻐서 마치 크게 감동한 것 같지 않은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경이롭습니다, 세존이시여, 경탄할만 합니다, 세존이시여.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혹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듯이, 아니면 길을 잃고 헤매던 사람에게 길을 가르켜 주시듯, 또는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서 등불을 가져오듯, 세존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법(진리)을 밝혀주셨습니다. 저는 이제 세존께 귀의합니다. 또한 그 가르침(법)에 귀의합니다. 또한 그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에 또한 귀의합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께 출가하고자 합니다. 저는 구족계를 받고자 합니다."
*지금까지 본경에서 나체수행자 깟사빠가 세존을 부를 때 사용한 호칭은 고따마 존자(bho Gotama)' 아니면 '도반 고따마(avuso Gotama)'였다.이제 그는 세존께 대한 믿음이 굳건해져서 마침내 세존을 반떼(bhante)라고 부르고 있다. 반떼(bhante)는 초기경에서 세존이나 스승이나 주인을 제외하고는 절대로 사용하지 않는 가장 높은 존칭이다. 외도들도 세존께는 항상 도반(avuso)라고 부르고 있으며, 세존을 스승으로 존경할 때만 반떼(bhante)라고 부른다.
405. "깟사빠여, 전에 외도였던 자가 이 법과 율에서 출가하기를 원하면 그는 넉 달의 견습기간을 거쳐야 합니다. 넉 달이 지나고 비구들이 동의하면 출가하게 하여 비구가 되는 구족계를 받게 한다. 물론 여기에 개인마다 차이가 있음을 나는 인정합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전에 외도였던 자가 이 법과 율에서 출가하기를 원히고 구족게를 받기를 원하면 그는 넉 달이 지나고 비구들이 동의하면 출가하게 하여 비구가 되는 구족계를 받게 하신다면 저는 4년의 견습기간을 거치겠습니다. 4년이 지나고 비구들이 동의하면 출가하게 하시어 비구가 되는 구족계를 받게 해 주십시요."
나체 수행자 깟사빠는 세존의 곁으로 출가하였고 구족계를 받았다. 구족계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깟사빠 존자는 홀로 머물며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며 지냈다. 그는 오래지 않아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성취하고자 집에서 나와 출가하는 그 위없는 청정범행의 완성을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물렀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분명히 알았다. 깟사빠 존자는 아라한들 중에 한 분이 되었다.
사자후 큰 경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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