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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주 브라흐마(Brahm ) 신에 대한 붓다의 비판

실론섬 2014. 6. 13. 19:24

창조주 브라흐마(Brahm ) 신에 대한 붓다의 비판

안양규(동국대 경주 캠퍼스 교수)

 

I. 서 언 

II. 브라흐만교의 브라흐마 신앙 

III. 붓다의 브라흐마 비판 

    1. 창조신으로서의 브리흐마 비판. 

    2. 全知者로서의 브라흐마 비판. 

    3. 브라흐마에 이르는 길에 대한 비판 

    4. 브라흐마의 불교적 수용 

IV. 결 어 

 

I. 서 언

 

붓다의 브라흐마(Brahm ) 신 비판은 우주를 창조하고 통치하는 전지전능한 신에 대한 부정이다. 유신론(theism), 더 정확히 말하면 단일신론(henotheism) 내지 유일신론(monotheism)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단일신론은 다신론(polytheism)과 마찬가지로 여러 신들을 인정하지만 그 복수의 신들 중 어떤 특정의 한 신을 최고신으로 숭배하는 점에서 다신론과 다르다. 그리고 단일신론은 교체신론(kathenotheism)으로도 불리며, 오직 하나의 절대적인 인격신을 믿는 유일신론과 다르다.

  

붓다 당시 브라흐마 신은 창조신으로 스스로 존재하며 중생의 행복과 불행을 좌우하는 신으로 신앙되고 있었기 때문에 브라흐마 신은 초기불교 문헌에 한정해서 말하면 단일신론과 유일신론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보인다. 더 정확히 초기불교 경전에 한정해서 말하면 브라흐마 신이 최고의 창조신으로 브라흐만교도들에게 신앙되고 있었기 때문에 브라흐만교도들에겐 브라흐마 신은 유일신인 것이다. 붓다의 브라흐마 신에 대한 비판은 유일신에 대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붓다 당시 인도의 종교계에는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브라흐만교와 사문으로 나뉘어 매우 복잡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브라흐만교는 자신의 전통 내에서 여러 서로 다른 사상과 신앙 체계를 제시하고 사문들도 마찬가지로 제각기 자신의 이론을 펼치며 다른 종교를 비난하고 있었다. 주지하듯이 브라흐만교는 사문 이전부터 있었던 종교이며 사문은 전통적인 브라흐만교를 비난하며 성립되고 있었던 것이다. 브라흐마 신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브라흐만교의 신앙체계를 사문들은 모두 비판하였다. 붓다도 이런 사문 운동의 흐름에 속해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붓다는 다른 사문들과 다른 각도에서 브라흐만교를 비판하였다.

  

대부분의 사문들이 전적으로 브라흐만교의 신앙 행위를 부정했지만 붓다는 비판적으로 수용하였다. 브라흐만교에 대한 붓다의 비판은 다양한 측면에서 이루어지고 있지만 본고에서는 브라흐만교에서 가장 중요시되고 있는 창조신 브라흐마에 대한 붓다의 비판을 살피고자 한다. 브라흐마 신에 대한 붓다의 비판은 다른 유일신을 믿고 있는 종교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 신학의 변신론(theodicy)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내용들이 이미 붓다의 비판에 소개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II. 브라흐만교의 브라흐마 신앙

  

힌두교는 그 내용이나 실천면에서 너무나 다양하여 정의하기 곤란하지만 베다 문헌의 성립에서부터 지금까지 형성된 신념체계의 복합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초기 힌두교는 베다 문헌, 브라흐마 문헌, 우파니사드 문헌에 근거한 신앙체계를 의미한다. 특히 본고에서 다루고자 하는 브라흐마 신은 베다 말기에 그 시원을 형성하고 브라흐마나에서 발전되고, 우파니사드에서 정점을 이루게 된다. 이 시기를 편의상 브라흐만교라고 명칭하고 사용하기로 한다.

  

브라흐민 계급이 중심이 된 브라흐만교는 세 가지로 그 특징을 말할 수 있다. 첫째, 브라흐민들은 브라흐마 신과 직접 교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신이 속해 있는 계급의 절대적 우위를 천명한다. 들째, 세상의 모든 것이 신에 대한 제사와 기도 여하에 따라 결정된다는 제사만능주의 신관이다. 세째, 베다 등의 성전에 계시된 제사법 등을 알고 실천하면 브라흐마 천계에 태어날 수 있다. 베다 시기에서 브라흐마 시기로 이행되면서 브라흐민 계급이 담당하던 제사의식도 분화되고 전문화돠어 갔다. 이 시기엔 제사의식(yaj a)은 제일 중요시되어 제식(祭式)에 관한 절차 하나하나에 세밀히 규정되고 일상 활동도 제식과 관련하여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제식을 담당하는 브라흐민 계급은 다른 세 계급보다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 브라흐마나 문헌은 베다에 관한(특히 제사 부분) 주석인데 특별히 제식을 특징으로 하고 있는 야주루 베다에 관하여 자세한 주석을 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띤다. 브라흐마 개념의 형성은 우파니사드 문헌이 성립하면서 본격적으로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브라흐마라는 관념엔 두 가지 의미가 놓여 있다. 첫째 인격신으로서의 브라흐마(이땐 남성명사 brahm 로 표기된다.)는 우주를 창조하고 모든 신들을 다스리는 지배자로 여겨진다. 둘째 우주의 원리 내지 법칙으로서의 브라흐마(이땐 중성명사 brahman로 표기된다.)는 도교의 道와 같은 존재로 우주를 관통하는 또는 성립시키는 궁극적 원리 내지 법칙이다.

 

 초기불교 문헌에 의거해 보면 브라흐마의 두 개념 중 창조신으로서의 브라흐마가 붓다의 비판대상이 되고 있다. 그렇다고 붓다가 궁극적 법칙로서의 브라흐마를 인정했다고 성급히 결론 내려서도 안된다. 단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초기경전에는 궁극적 원리로서의 브라흐마에 관한 비판이 없다는 것이다. 붓다가 이 개념을 알고 있으면서도 언급하지 않은 것인지 또는 몰랐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은 것인지 단언할 수 없다. 만약 붓다가 알고 있으면서도 비판하거나 언급하지 않았다면 간접적으로 이것을 용인한 것이라고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인격신으로서의 브라흐마에 대한 신앙은 우파니사드 시기에 상당히 널리 행하여지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우주를 창조하고 유지하고 파괴하는 창조신은 숭배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올덴베르그(Oldenberg)에 의하면 우파니사드라는 말의 참된 의미는 존경 내지 숭배라고 한다. 우파니사드 시기엔 왕과 사변적인 브라흐민은 인격신에 대한 희생제의를 반대하였지만 일반 대중들은 인격신에 대한 신앙과 의례를 널리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곧 우파니사드의 브라흐만이 인격신으로 신앙되고 있었던 것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붓다의 탄생전 이미 인도에는 다신교, 단일신교, 교체신교, 유일신교의 사상이 형성되었고 브라흐마 신은 유일신, 창조신, 율법신으로 숭배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불교문헌에 의거해 보면 브라흐마 신은 추종자들에게 유일 절대신으로 신앙되고 있었다. 리그 베다 말기에 창조주로 나타난 Prajapati(중생의 주인), Visvakarman(일체 창조자), Brahmanaspati(기도의 주인), Puruna(原人) 등의 신들이 브라흐마 시기에 와서는 Prajapati로 통일되고, Prajapati에서 브라흐마 신으로 점차 변화하여 간 경로가 보인다. Praj apati는 리그 베다에서 이미 등장하였지만 브라흐마 관념은 브라흐마나 문헌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Prajapati는 신화적 색채가 짙은데 반하여 브라흐마 신은 기도의 추상화로서 신학적 산물이다. Prajapati에 관한 내용은 주로 우주 창조에 관한 것으로 신화적이라서 인간의 일상 생활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는데 비해 브라흐마 신은 기도의 대상으로 인간사와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다.

 

 베다 문헌의 말기에 창조신 개념이 형성되어 여러 신들의 이름이 나타나고 신앙되다가 점차 단일신으로 정리되고 마침내 우파니사드에선 브라흐마 신이 최고신으로 여겨진 것이다. 베다의 신들의 이름이 초기 불교경전에 언급되고 있다. 즉 Indra, Soma, Varu a, Is na, Paj pati, Mahiddhi, Yama 등 신의 이름이 등장하지만 초기불교 경전에선 이들은 과거의 신으로 취급되고 브라흐마에 대한 언급이 압도적으로 많다. 브라흐마 주재신(Issara)에 의해 세계가 창조되고 그에 의해 통치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신앙의 배경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초기불교 경전이다. 붓다는 그 당시 사람들이 광범위하게 믿고 있던 창조주 브라흐마 신을 비판한 것이다.

  

III. 붓다의 브라흐마 비판

  

1. 창조신으로서의 브리흐마 비판.  

앞서 살펴보았듯이 브라흐민들은 브라흐마를 우주의 창조자로 여기고 숭배하고 있었다. 이러한 브라흐민의 신앙에 대해 붓다는 어떻게 브라흐민들이 이런 신앙을 가지게 되었는 지 설명하면서 그들의 오류를 지적한다. 경전에 있는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우주가 수축할 때 중생들(satta)은 거의 모두 極光天( abhassara Brahma )이라는 天界에 태어났다. 그곳에서 그들은 즐거움을 음식으로 삼아 지내며 스스로 빛을 내며 공중을 날아다녔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우주가 팽창하게 되었다. 팽창하는 우주에 텅빈 브라흐마(Brahma) 궁전이 나타나게 되었다.

  

한 중생이 극광천에서 죽어 이 텅빈 브라흐마 천계에 태어나게 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즐거움을 음식으로 삼아 지내며 스스로 빛을 내며 공중을 날아다녔다. 이렇게 오랫동안 홀로 지내자 불만족과 근심이 일어났다. 그는 만약 다른 중생들이 이곳에 태어나게 된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마침 다른 중생들이 극광천에서 죽어서 브라흐마 천계에 태어나 처음 태어난 중생과 함께 지냈다.

 

 최초로 브라흐마 천계에 와서 머문 중생은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나는 브라흐마, 위대한 브라흐마이며, 정복자이며 정복당할 수 없으며, 전지자, 전능자이며 군주이며, 창조자, 통치자, 임명자, 명령하는 자이며, 이미 존재하는 모든 것과 미래에 존재하게 될 모든 것의 아버지이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나에 의해 창조된 것들이다. 왜냐하면 내가 처음에 `만약 다른 중생들이 이곳에 태어나게 된다면`하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나의 소원이었고 이들 중생들은 태어나게 된 것이다." 뒤에 태어난 중생들도 이미 이곳에 존재하고 있었던 중생을 그의 주장처럼 생각했다. 그리고 처음 태어난 중생은 그보다 뒤에 태어난 중생들보다 더 아름답고 더 힘이 강했다.

  

어떤 중생이 브라흐마 천계에서 인간계로 태어나게 되었다. 그는 성장하여 출가 수행하였다. 선정 수행의 결과로 그는 자신의 전생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브라흐마 천계에서의 생애만 볼 수 있었고 그 이전의 생애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생각했다. "저 브리흐마가 우리를 만들었고, 그는 영원 불변하며 상주하며 변화하지 않으며 영원히 동일하게 존재한다. 그러나 그에 의해 창조된 우리는 무상하며, 안정되지 못하고 수명이 짧아 이 세상에 오게 되었다."

 

 브라흐민들이 어떻게 브라흐마를 창조신으로 믿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브라흐마 천계에 존재하는 중생들은 브라흐마 천계에 제일 먼저 온 자를 창조자로 그릇되게 여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정적인 오해의 발생은 제일 먼저 태어난 자가 홀로 오랫동안 지내다가 다른 중생들의 출생을 바라고 있을 때 마침 극광천에서 수명과 복을 다한 중생이 태어나게 됨으로서 자신이 다른 중생들을 창조했다고 믿게 된 것이다. 이 설명은 브라흐만교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브리흐마의 창조 신화를 염두에 두고 붓다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파니사드에서 브라흐마는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나는 신성의 핵심을 가진 자로 처음 존재한 자이다. 신들이 태어나기 전 나는 존재하고 있었다. 나는 不死의 배꼽이다." 만약 브라흐마 천계에 태어난 중생이나 인간계에 태어난 중생이 만약 극광천을 기억할 수 있었다면 브라흐마를 창조자로 여기는 실수를 범하지 않게 될 것이다. 전생을 기억할 수 있는 능력, 즉 숙명지가 충분히 개발되었다면 브라흐마가 우주의 창조자로 여기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붓다는 인격신의 전능이라는 속성을 부정한다. 전지가 모든 것을 아는 것이라고 한다면 전능이란 일어난 일,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 일어날 일을 제어하고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따라서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신의 손에 달려있는 것이다. 브라흐마의 전능을 받아들이면 인간의 자유의지와 도덕적 책임은 전면 부정되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 신학에서 심각하게 논의된 것이지만 붓다는 신의 전능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상충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붓다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거기에서 이루어진 행위에 대한 책임을 인간 자신에게 돌리고 있으며 신의 전능이라는 관념은 잘못된 것으로 비판하고 있다.

  

부리닷타 자타카(Bh ridatta J taka)에서 브라흐마 신이 세상에 규정해 놓은 네 카스트의 의무가 지켜주지 않고 있는데 왜 브라흐마가 바로잡지 않느냐고 브라흐마의 전능을 비판하고 있다. "만약 저들 브라흐민들의 가르침이 옳다면 크사트리아 계급에 속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왕이 되어선 안되고, 브라흐민이 아닌 자는 결코 만트라(mantra)를 배워선 안되고, 바이사가 아닌 자는 논밭 등에서 일을 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되지 않고 있다. 심지어 브라흐민 조차도 무기를 지니고 돌아다닌다. 이러한 일들이 행하여지고 있는 것을 보고도 왜 브라흐마 신은 이런 것들을 바로 잡지 아니하는가?" 네 계급으로 이루어진 카스트 제도는 브라흐마 신에 의해 제정된 것으로 브라흐민들은 믿고 있었다. 브라흐민 계급은 브라흐마 신의 입에서 출생하고, 크샤트리아 계급은 신의 어깨에서 나오고 바이샤 계급은 신의 복부 아래에서 수드라 계급은 신의 발에서 나왔다고 브라흐민들은 출생하였다고 가르치고 있다. 브라흐만교에 의하면 인간의 사회적 역할과 의무는 출생에 의해 결정된 것이므로 어떤 상황에도 바뀌어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브라흐민은 제사를 담당하고, 크사트리아는 국방을, 바이사는 생산을, 수드라는 노예의 역할을 하도록 브라흐마 신에 의해 창조된 것인데 붓다 당시 이미 네 계급 각각의 의무는 지켜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브라흐만교는 사회 계급 제도를 신의 의지로 설명하여 사회 질서나 불평등한 사회적 지위를 보존하려고 하였다. 상층에 속하는 계급은 하층 계급의 불만족을 신의 창조 의지로 설명하여 자신의 사회적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카스트제도는 사회의 변화에 따라 이미 엄격하게 지켜주지 않음으로 더 이상 사회 계급의 질서 유지를 성립시켜 줄 수 있는 이론이 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신의 규정과 의지에 反하여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꼬집어서 붓다는 브라흐마 신의 무능을 들추어내고 있는 것이다. "만약 신이 전 우주의 운행을-영광과 비참, 선행과 악행- 계획했다면 인간은 단지 신의 의지의 도구일 뿐이고 신만이 책임져야 마땅하다." 만약 모든 것이 신에 의해 계획되고 창조되었다면 인간의 행위에 대한 상벌은 가능하지 않게 될 것이다. 악인은 항상 자신의 악행을 신의 의지로 돌리고 자신에겐 책임이 없다며 처벌을 외면할 수 있을 것이다. 보살은 신의 전능을 믿고 있는 종교인들을 위해 일부러 원숭이 한 마리를 죽이는 것처럼 행동하였다. 그들이 보살이 원숭이를 살생하였다고 비난하자 보살은 신에 의해 창조된 인간이 악인으로 비난받아서는 안되고 신이 책임져야 한다고 응수한다. 인간은 악한 일을 하도록 신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므로 그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없고 만약 묻는다면 신에게 물어야 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붓다가 신의 전능을 부정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인간의 도덕적 자유의지와 그 책임을 무용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그의 비판은 윤리적 행위에 근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형이상학적인 측면에서나 영지주의와 같이 신비적인 입장에서 신의 전능을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사회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행위와 그 책임을 염두에 둔 것이다. 만약 모든 행위를 신의 전능으로 돌린다면 윤리는 성립될 수 없다.

  

"살인자들은 살인을 하도록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 마찬가지로 도둑놈도, 음탕한 자도, 사기꾼도, 험담자도, 꾸짖는 자도, 어리석게 말하는 자도, 악의를 품고 있는 자도, 미워하는 자도, 사견을 가진 자도, 누구든지 그들은 그렇게 창조되어진 것이다." 이렇게 신의 창조 능력에 그 책임을 돌리면 종교적 노력이나 수행은 무의미하게 되고 말 것이다. "(신의) 창조를 믿으면 의지, 인내 나 해야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일에 대한 분별이 없게 될 것이다.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게 되어 正念이 성립되지 못하여 자신을 보존하지 못하게 된다." 결국 종교 수행이라는 것은 성립될 수 없게 된다. 붓다는 지금 감수하는 행복과 불행이 모두 과거의 업에 기인한다는 숙명론이나 모든 것은 원인 없이 우연히 발생한다는 무인론(無因論)과 마찬가지로 존우론(尊祐論)도 인간의 자유의지와 노력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사견이라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신학의 신정론에서 다르어지는 중심 주제를 상기시키는 구절이 있다. "만약 브라흐마 신이 모든 우주의 군주이고 온갓 중생의 창조자이면 첫째 왜 신은 전세계를 행복하게 만들지 아니하고 불행을 만들었는가?; 둘째 어떤 목적으로 신은 세상에 불의, 사기, 위선 등으로 가득차게 만들었는가?; 세째 정의가 있을 곳에 불의가 있게끔 한 점에서 모든 중생의 창조신은 악한 자가 아닌가?" 이상 3가지 논의는 기독교 신학의 변신론에서 전형적으로 논의되는 문제들이다. 창조신은 완벽하므로 그가 창조한 세계도 완벽하리라고 기대된다. 그가 만든 세계가 불완전하므로 창조신에 대해 두 가지를 말할 수 있다. 첫째 신이 전능하지 못하거나 둘째 전능하다면 신은 악성을 지니고 있다. 만약 모든 것을 총괄하는 신이 있다면 중생이 느끼는 고락도 주재신(主宰神)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주재신은 사악한 존재이다. 결국 신의 전능은 그가 만든 세계에 만연한 악과 모순되므로 신의 전능이라는 믿음은 잘못된 것이라고 결론 내려야 할 것이다. 이것이 창조신의 전능에 대한 붓다의 비판이다.

 

 2. 全知者로서의 브라흐마 비판.

 붓다 당시 브라흐마 신을 신봉하고 있던 신도들은 브라흐마 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믿은 것으로 초기경전에 나오고 있다. 전지(omniscience)라는 말은 전능(omnipotence)이라는 말고 함께 절대신의 본질을 드러내는 주요한 개념이다. 조금 전 위에서 살펴본 브라흐마의 우주의 창조는 절대신의 전능에 속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지금 살펴 볼 비구와 브라흐마의 대화는 전지에 관한 논의이다.

 

 이들의 대화는 케밧다 경전(Kevaddha Sutta)에서 붓다에 의해 다시 진술되고 있다. 비구 승가에서 한 비구가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어디에서 사대 즉 지계, 수계, 화계, 풍계가 남김없이 사라지는 것일까?" 이 비구는 의문을 풀기 위해 천상의 신들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그는 먼저 인간계 바로 위에 있는 사천왕(Catumaharajika) 천계의 신들에게 가서 자신이 품고 있던 질문을 던졌다. 그의 질문에 신들은 알지 못한다고 대답하며 그들의 주신인 사천왕에게 물어 보라고 권한다. 그래서 비구는 사천왕에게 가서 자신의 질문을 하지만 사천왕은 알지 못한다고 대답하며 자신 보다 높은 천계인 삼십삼(Tavatimsa) 천계의 신들에게 물어보라고 권한다.

  

삼십삼 천계의 신들은 그들의 주신인 삿카(Sakka)에게 물어 보라고 하지만 삿카는 야마(Yama) 천계의 신들에게 물어 보라고 원한다. 이런 식으로 비구는 야마 천계의 신들, 그들의 주신, 도솔천의 신들과 그들의 주신, 화락 천계의 신들과 그 주신, 他化自在 천계의 신들과 그들의 주신 바사밧티(Vasavatti)를 차례로 방문하여 물어 보지만 답을 얻지 못한다. 바사밧티는 브라흐마 천계의 신들을 소개한다. 비구의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한 브리흐마 천계의 신들은 그들의 주신인 브라흐마를 전지자라고 찬양하며 그에게 물어보라고 권유한다.

  

비구는 마침내 브라흐마 신을 만나 4대의 소멸에 관한 동일한 질문을 하였다. 이에 브라흐마는 대답하였다. "나는 브라흐마, 위대한 브라흐마이며, 정복자이며 정복당할 수 없으며, 전지자, 전능자이며 군주이며, 창조자, 통치자, 임명자, 명령하는 자이며, 이미 존재하는 모든 것과 미래에 존재하게 될 모든 것의 아버지이다." 이러한 자화자찬의 대답에 대해 비구는 브라흐마가 그러한지 아닌지의 여부에 관심이 없다고 하며 자신의 질문을 대답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브라흐마는 다시 똑같은 대답을 한다. 세번째로 비구는 그런 자기 과시의 대답이 아닌 자신의 질문에 바로 대답해 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자 브라흐마는 비구의 손을 잡고 옆으로 데리고 가서 말한다. "비구여! 이들 신들은 믿고 있다: 브라흐마가 보지 못하는 것이 없고 그가 알지 못하는 것이 없으며, 그가 자각하지 않는 것이란 있을 수 없다. 바로 이런 이유로 나는 그들 면전에서 대답할 수 없었다. 비구여! 사실 나는 사대(四大) 요소가 남김없이 사라지는 곳을 알지 못한다." 브라흐마는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고 대신 그 질문은 붓다에게 물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브라흐마가 자신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신들을 언급하지 않는 것에 주목하게 된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브라흐마는 자신이 창조신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보다 높은 존재가 있다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착각은 붓다 당시 브라흐마 신봉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신앙의 내용이었던 것이다.

  

설령 천계 중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 천계의 신들이나 그들의 주신에게 비구가 동일한 질문을 하더라도 정답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비상비비상처 천계도 윤회 세계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윤회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한 자에게 윤회 세계의 끝을 묻는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마치 우물 안 개구리에기 우물의 끝과 그 너머를 묻는 것과 같다. 비구의 질문은 윤회의 끝에 관한 질문이다. 지수화풍 4대는 물질의 세계를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원소이다. 4대의 결합에 의해 인간계를 비롯한 물질의 세계가 형성되어 있다. 이러한 물질의 세계는 본질적으로 생멸 변화의 법칙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다. 무상한 것이므로 고(苦)라고 가르치고 있다.

  

어디에서 사대가 남김없이 사라지는 것일까 라는 비구의 의문은 결국 물질의 세계, 즉 윤회의 세계의 종착역에 관한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윤회의 끝 즉 열반에 관한 질문이다. 비구는 지수화풍으로 이루어진 윤회 세계의 끝, 즉 열반에 관하여 질문하였고 붓다는 열반을 성취한 아라한과 관련하여 질문을 고쳐 대답한다. 비구는 열반 그 자체에 대해 묻었던 것이라면 붓다의 대답은 열반에 이른 아라한으로써 대답을 한 것이다. 붓다의 궁극적인 목표인 열반은 언설로 설명하거나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붓다는 대신 열반에 도달한 아라한을 매개로 삼아 간접적으로 열반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브라흐마의 전지와 관련하여 보면 브라흐마는 아직 열반에 이르지 못한 신이기 때문에 당연히 열반에 이른 붓다와 달리 윤회의 끝에 대답할 수 없었던 것이다. 비구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 것은 결국 그는 전지자가 아닌 것을 나타내는 것이며 윤회 세계에 구속되어 있는 존재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브라흐마의 무지의 고백은 역으로 붓다의 전지를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3. 브라흐마에 이르는 길에 대한 비판 

붓다 당시 브라흐마 인격신을 믿었던 브라흐민들은 브라흐마 신에 도달할 수 있는 길에 관하여 다양한 방법들이 제시되고 있었다. 제시된 방법이 동일하지 않고 서로 다를 때 브라흐민들 간에도 혼란이 일어났다. 특히 처음 브라흐만교를 배우는 사람들에겐 그 혼란의 정도는 더욱 극심하였다. 어떤 브라흐민 스승은 기도를, 어떤 스승은 만트라(주문)를, 또 어떤 이는 제사를 통해서 브라흐마에 도달할 수 있다라고 가르치고 있었다. 물론 이들 방법들은 모두 베다에 근거한 것들이다. 베다 문헌 중의 말기에 나타난 베단타 즉 우파니사드는 최고신 브라흐마와 그에 이르는 길을 강조하여 설하고 있다. 엄격히 구분해 보면 초기 베다의 문헌에 비해 우파니사드는 제사 중심에서 벗어나 철학적인 사변이 두드러진다. 그렇지만 초기 불교 경전에는 이들에 대한 명확한 구분을 하지 않고 함께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다. 따라서 브라흐마에 이르는 길에 대해 숱한 방법들이 제시되어 서로 경쟁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사정이 테빗자 경전(Tevijja Sutta)에 잘 소개되어 있다. 두 젊은 브라흐민이 각각 자신들의 스승이 가르친 길만이 바르고 다른 스승의 것은 그르다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다투던 두 젊은이는 붓다에게 가서 누가 옳은지 확인하기로 한다. 그들은 붓다에게 그들의 논쟁했던 사정을 말하고 물었다. "유명한 브라흐민들이 브라흐마에 이르는 길을 제각기 설하고 있는데, 마치 어떤 마을에 도달할 수 있는 길에 여러 가지가 있듯이 그들이 제시한 방법이 모두 옳은 것입니까?" 이에 붓다는 반문한다. "3종의 베다에 능숙한 브라흐민들 중 단 한 사람이라도 직접 브라흐만을 본 사람이 있는가?" 현재 그러한 브라흐민 스승은 없다라는 대답을 들은 붓다는 지금 스승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서 7대의 스승 중에도 브라흐마을 직접 친견한 사람이 있는가 라고 다시 물었다. 과거의 스승들 중에도 브라흐마를 직접 친견한 자가 없다는 말을 듣자 붓다는 다음과 그 허물을 묻는다.

 

 첫째 붓다는 만트라를 신봉하고 있는 브라흐민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주문의 효능에 대한 비판이다. 브라흐민 계급들은 기도문의 성스러운 힘이 우주의 대사까지도 바꿀 수 이다라고 믿게 되어 제식에 따라 기도하면 신조차도 그 기도에 종속된다라고 주장하며 주문의 효력을 절대시하였다. 과거의 브라흐민들은 3종의 베다에 능통하고 만트라를 만들고 설하였다. 그들의 고대 찬가는 현재의 브라흐민에게 전해져 찬송되어지고 설해지고 있다. 그들은 그렇게 직접 보고 알지 못하지만 단지 브라흐마에 이른 길을 가리키고 있을 뿐이다. 단지 자신에게 전해진 길만이 바른 것이고 나머지는 옳지 않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만트라를 외우고 있는 브라흐민을 붓다는 줄지어 서 있는 장님에 비유하고 있다. 일단의 장님들이 줄을 지어 앞에 선 사람에 의존하여 줄지어 있는 것과 같다라고 풍자하고 있다. 맨 앞에 서 있는 사람도 보지 못하는 장님이고 그 사람을 잡고 서 있는 사람도 보지 못하고 뒤이어 선 사람들도 장인과 같다는 것이다. 자신이 직접 보고 확인하지도 않은 것을 진실이라고 믿는 것은 과거의 전통을 맹목적으로 수용하고 되풀이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은 브라흐만교의 경전 구체적으로는 3종의 베다에 관한 비판이다.

 

 둘째, 보통 사람들처럼 3종의 베다에 능통한 브라흐민들도 달과 태양을 본다. 태양과 달이 떠오르거나 질 때 브라흐민들은 기도하고 찬송가를 부르며 합장한 채 예배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태양이나 달은 볼 수 있지만 그곳에 이르는 길을 제시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브라흐마에 이르는 길에 관해서도 동일한 말을 할 수 있다. 여기서 붓다는 첫번째 비판에 관련하여 일보 양보하여 설령 브라흐민들이 브라흐마 신을 볼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신에 이르는 길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신도 알지 못한 사이 어떤 우연이나 계기에 의해 브라흐마를 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그러한 것들은 다른 사람에 의해 되풀이 될 수 있은 것이 아니므로 보편타당한 길이 아닌 것이다.

  

붓다는 당대의 브라흐민들의 실상을 목격한 결과 그 어느 브라흐민도 직접 브라흐마를 본 자는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라흐민들이 브라흐마에 이른 길을 제시하고 실천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몇 가지 비유를 들어 비판하고 있는데 한 가지만 살펴보기로 한다. 물이 가득 흘러가는 강의 언덕에 서서 맞은편 강둑으로 가려는 사람이 맞은편 강둑을 향해 자신을 향해 오라고 소리치는 것과 같다. 자신은 이쪽 언덕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으면서 저쪽 강둑을 불러오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브라흐민들도 브라흐마를 향해 끊임없이 기도하며 통곡하면서 소원을 들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도나 찬가로 브라흐마를 친견할 수 없다는 것으로 기도와 같은 종류의 신앙행위가 무의미하다는 비판이다.

 

 붓다 당시의 만연한 믿음 중의 하나는 브라흐마 신에게 기도하면 범천에 태어난다는 것이다. 붓다는 이런 신앙 행위에 대해 인과응보의 업보로 비판하고 있다. 호수에 던져진 돌을 기도로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할 수 없다. 즉 악업을 지은 사람이 죽을 때 브라흐마 신에게 기도한다고 해서 그 악인이 천상에 태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오욕락이라는 족새 즉 형색, 소리, 향기 등 5가지 감각적인 쾌락의 대상을 즐기고 있는 브라흐민이 기도를 통해서 사후 브라흐마 신에게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두건을 머리에 둘러쓰고 차안에 누워 있으면서 피안에 도달할 수 없는 것처럼 탐욕 등의 오개(五蓋)에 덮여 있으면서 브라흐마 신에게 도달하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

  

붓다의 비판은 무엇보다도 현실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브라흐민들의 윤리의식 내지 행위에 대해 비판한 것이다. 붓다는 특히 현재 브라흐민이 실제 하고 있는 모습과 그들의 이상 즉 브라흐만에 도달하는 것 사이에 있는 모순에 관해 비판의 촛점을 맞추고 있다. 따라서 현재 브라흐민들이 행하고 있는 작태에 대해 집중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붓다는 묻는다. "브라흐마 신은 아내와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가?" "그는 惡意로 가득차 있는가?" "그는 不淨한 자인가?", "自由自在하지 못한가" 브라흐민들로부터 브라흐마 신은 아내도 재산도 소유하고 있지 않으며 부정하지도 않지만 자유자재하다라는 대답을 듣는다.

  

3종의 베다에 능통한 브라흐민들은 아내와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지 붓다는 물었다. 그렇다라는 말을 듣고 붓다는 결론짓는다. 브라흐마 신과 브라흐민들 사이에 어떠한 공통점도 없으므로 브라흐민들이 죽어서 브라흐마 신에게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공허하다는 것이다. 사실 브라흐민들의 행위를 보면 강물에 빠져 물 속으로 가라앉고 있는데도 피안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그들의 3종 지식은 3개의 사막이고 3개의 황무지이고 3개의 파괴이다"라고 결론짓는다. 브라흐민들이 자신들이 신봉하고 있던 3종의 베다에 관한 지식이 브라흐마 신에게 도달할 수 있는 구원의 길이라고 믿는데 반하여 붓다는 3종 지식은 오히려 사막이나 황무지처럼 쓸모 없는 것이며 더 나아가 구원을 저해하는 파괴자라고 비판한다.

  

이상과 같이 붓다는 브라흐민들의 신앙행위에 대해 비판한 다음 붓다는 바른 길을 제시한다. 우리는 붓다의 대안을 살핌으로써 붓다가 브라흐민들의 신앙 중 어떤 부분에 비판의 초점이 집중되었는지 다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브라흐민 바셋타(Vasettha)는 붓다에게 브라흐마 신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 줄 것을 요청한다. 붓다는 브라흐마 신과 그가 지배하고 있는 범천의 세계, 그리고 그곳에 이르는 길, 범천에 도달할 수 있는 수행방법을 알고 있다라고 확언하면서 사무량심(四無量心)을 설한다. 마치 나팔수가 사방을 향해 나팔 소리를 내듯이 자심(慈心, metta)으로 자신을 채운 뒤 동서남북 상하 모든 세계로 향하여 증오나 악의 없는 자심을 가득 채운다. 자심으로 어떠한 욕계의 번뇌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 바로 브라흐마 신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이라고 붓다는 제시하고 있다. 똑같이 悲喜捨의 수행이 바로 브라흐마 신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렇게 자비희사 사무량심을 수행하고 있는 비구야말로 브라흐마에 도달할 수 있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비구는 아내도 재산도 없으며, 증오도 없으며, 청정하며, 자유자재하므로 브라흐마 신이 갖추고 있는 덕성과 공통된 부분이 많으므로 비구는 죽어서 브라흐마 신에 이를 수 있다라고 결론짓는다.

 

 베다에 관한 절대적 신앙을 고수하면서도 윤리적으로 살지 못하고 있는 브라흐민들을 도덕적인 실천체계인 사무량심으로 이끄는 붓다에게서 우리는 무의미한 신학적인 논의보다도 구체적인 실천 행위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도덕적인 행위는 브라흐마 신에게 이를 수 있는 길이 되겠지만 불교가 지향하는 구극적인 세계 즉 열반에는 이르게 할 수 없다. 불교 전체 체계에서 브라흐마 신이나 그가 거주하고 있는 범천의 세계는 윤히 세계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을 뿐이며 열반의 세계가 아닌 것이다. 붓다는 제자들에게 신이 되거나 천상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욕망은 하나의 족쇄이므로 그것을 단절해 버리라고 가르치고 있다.

 

 4. 브라흐마의 불교적 수용

 브라흐만교에선 브라흐마는 우주를 창조한 창조신이지만 불교에선 브라흐마 천계에 제일 먼저 태어난 자이거나 브라흐마 천계의 신들 중 가장 수승한 신일 뿐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브라흐마와 브라흐마 천계의 신들 사이에 본질적인 질적 차이가 없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문맥에 따라선 브라흐마 최고신과 브라흐마 천계에 살고 있는 신들 모두를 브라흐마로 통칭해도 무방하다. 브라흐마 신이 복수로 불교문헌에 표기되는 것은 브라흐만 신도들이 브라흐마 신을 유일신으로 신앙하고 있는 것을 부정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즉 브라흐만교 추종자들이 절대 유일의 최고신 브라흐마도 결국 붓다에 의하면 브라흐마 천계에 머물고 있는 신들 중 하나의 존재일 뿐이다라는 것이다. 물론 다른 신들에 비해 여러 가지 측면에서 뛰어나겠지만 생사의 법칙에 구속되어 있다고 보고 있다. 브라흐마 천계에서 수명이나 복락이 다하면 다른 세계로 태어나게 된다. 브라흐마 신들 중 일부는 인간계로 태어나지 않고 바로 열반에 이르기도 하고 또 다른 일부 브라흐마 신들은 인간계에 태어난다.

  

브라흐민들은 절대 유일의 상주한 존재로 여기고 있지만 불교에선 브라흐마도 무상한 존재로 생사 윤회의 법칙에 존속되어 있는 한 존재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들이 아무리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더라도 결국 생멸에 종속되어 있는 무상한 존재라고 가르치고 있다. 브라흐마의 수명은 1 겁(kalpa)이다라고 구체적으로 명시한 문헌도 있다. 겁(劫)이란 시간 단위가 인간의 시간 관념으로 본다면 무한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겠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여전히 유한 것으로 한시적인 것이다. 브라흐마에게 주어진 시간이 끝나면 브라흐마로서의 삶은 끝나고 업보의 법칙에 따라 다시 새로운 종류의 중생으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브라흐마 천계의 신들이 모두 한결같이 붓다나 그의 제자들을 보호하거나 그들의 설법에 열중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불교를 보호하는 것으로 수용되었다. 브라흐마 신은 브라흐만교에서 최고신으로 여겨지지만 불교에서는 불교를 보호하는 신들 중 한 신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정각 직후 설법을 주저하고 있던 붓다에게 브라흐마 사항파티(Sahampati) 가 나타나 설법을 간곡하게 권청한 것이나 브라흐마 신이 여러 천신들이 모인 자리에서 붓다를 찬탄한 것을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경전 보다 다소 후대에 성립된 문헌에 의하면 붓다가 탄생할 때 어린 붓다를 보호한 신은 다름 아닌 브라흐마라고 한다.

  

브라흐마 신을 불교에서 완전히 배척하지 아니하고 수용한 것은 무엇보다도 윤리적 행위를 강조한 것이다. 브라흐마 신은 선한 행위에 대한 과보로 즐거움을 천계에서 누리는 것이다. 인간계 이하의 세계에 만연하는 고통을 느끼지 않고 즐거움을 음식 삼아 살아가는 신이다. 붓다가 브라흐마 신에 이르는 길로 4무량심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브라흐마 신을 윤리적인 인과응보의 가르침을 베풀기 위해 이용한 것이다.


브라흐마데바(Brahmadeva)라는 비구가 아라한이 되어 걸식하다가 자신의 어머니 집에 이르게 되었다. 그때 그의 어머니는 브라흐마 신을 믿으며 수시로 브라흐마 신에게 음식 공양을 올렸다. 이것을 본 브라흐마 신은 그의 어머니에게 나타나 훈계한다. 브라흐마 신은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있으며 브라흐마는 결코 이런 종류의 음식을 먹지 않는다; 아라한이 된 당신의 아들이 어떠한 신들보다 뛰어나니 그에게 음식을 공양하는 것이 낙과를 최상으로 만들어 낼 것이다. 브라흐마 신에게 제사를 지내거나 기도하는 것 대신 참된 수행자에게 음식을 보시하는 것이 더 나은 과보를 초래한다 라는 것을 브라흐마 신이 가르치고 있는 점에서 브라흐마 신은 불교에서 도덕적 행위를 가르치는 존재로 수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IV. 결 어

 

붓다가 브라흐만교의 최고 인격신을 부정한 것은 붓다 당대의 유물론자의 비판과 다르다. 유물론자는 베다의 브라흐마 신을 어릿광대, 또는 성실하지 못한 자로 비난하였지만 불교는 그렇게 도발적으로 비난하지 않고 브라흐민들이 오해하고 있는 신의 관념을 비판한 것이다. 전능이나 전지는 모두 신의 본성에 관한 것으로 붓다는 이 두 가지 권능에 대해 비판했다. 붓다는 특히 창조를 비롯한 브라흐마의 전능을 비판하였다. 신의 창조에 대해선 브라흐마 신이 전생을 기억하지 못한 이유로 자신을 세계의 창조자로 착각했다는 것이고 신의 전능에 대해선 세상의 악을 제거하지 못한다는 점을 들고 있다.

  

붓다가 브라흐만교들이 브라흐마 신을 창조신으로, 유일의 최고신으로 믿고 기도하는 신앙행위에 대해 비판한 것을 살펴보았다. 붓다는 유물론자와 달리 브라흐마 신의 존재 그 자체를 전면 부정하지 아니하고 브라흐마 신을 생멸변화에 종속되어 있는 무상한 존재로 격하시켰다. 한편 붓다는 브라흐만교 추종자들이 갖고 있었던 브라흐마 신에 관한 신념을 적당하게 수용하면서 제사나 기도 등의 신앙 행위 대신 자비희사의 도덕적 행위를 일체 중생에게 행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붓다는 창조신에 대한 맹목적인 신앙을 중심으로 인간의 행과 불행에 접근하는 것에 대항하여 현재 고통 받고 있는 현실에 중점을 둔 것이다.

 

 지금 땅 위에서 생활하고 있는 자신의 삶이 어떠한 모습인가를 먼저 고찰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것이다. 인간의 불행은 신에게 돌리기 이전에 인간 자신에게서 그 불행의 원인을 찾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이 사랑을 그 본질로 하며 우주를 창조하고 통치하는 신이라면 인간 등 중생이 고통받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인간의 고통이 존재한다는 것은 고통을 제거해 줄 수 있는 전능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붓다는 브라흐마 신의 속성 중 전능과 전지를 제거하고 사랑은 남겨 두었다. 모든 중생을 평등하게 사랑하는 신인 브라흐마에 이르는 방법으로 사무량심의 수습을 제시한 것이다. 요컨대 실용적인 관점에서 보면 붓다의 브라흐마 신 비판은 미래의 행복을 신에게 기도나 제사하지 말고 고통의 근원인 자신의 이기심을 극복하도록 중생을 사랑하도록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