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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의 모음 - 17. 자눗소니 품(Jāṇussoṇi-vagga. AN10.167-177)

실론섬 2014. 9. 8. 12:47

 

제17장 자눗소니 품 Jāṇussoṇi-vagga (AN 10.167-177)

brāhmaṇapaccorohaṇīsuttaṃ (AN 10.167-바라문의 하강(내림)의식 경)

167. 그 무렵에 자눗소니 바라문은 포살일에 머리를 감고 아마포로 만든 새 옷 한 벌을 입고 젖은 꾸사 풀을 한 움큼 쥐고 세존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 세존께서는 자눗소니 바라문이 포살일에 머리를 감고 아마포로 만든 새 옷 한 벌을 입고 젖은 꾸사 풀을 한 움큼 쥐고 멀지 않은 곳에서 한 곁에 서있는 것을 보시고 자눗소니 바라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바라문이여, 어찌하여 그대는 포살일에 머리를 감고 아마포로 만든 새 옷 한 벌을 입고 젖은 꾸사 풀을 한 움큼 쥐고 한 곁에 서 있습니까? 오늘 바라문의 가문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
"고따마 존자여, 오늘은 바라문 가문에서 하강의식(내림의식)을 하는 날입니다.”
“바라문이여, 바라문들은 어떻게 하강의식을 행합니까?”
“고따마 존자여, 여기 바라문들은 포살일에 머리를 감고 아마포로 만든 새 옷 한 벌을 입고 젖은 소똥을 땅에 바르고 푸른 꾸사 풀을 그 위에 펴고 그 가장자리와 불을 안치한 곳 사이에 잠자리를 만듭니다. 그들은 그 밤에 세 번 일어나서 합장하고 ‘우리는 당신에게로 하강합니다. 우리는 당신에게로 하강합니다.’라고 하면서 불에 예배합니다. 그리고 많은 생 버터와 정제된 버터로 불에 헌공합니다. 그 밤이 지나면 딱딱하고 부드러운 맛있는 음식으로 바라문들에게 공양합니다. 고따마 존자여, 바라문들은 이렇게 하강의식을 행합니다.”

“바라문이여, 바라문들의 하강의식과 성스러운 율에서의 하강의식은 다릅니다.”
“고따마 존자여, 그러면 성스러운 율에서는 하강의식을 어떻게 합니까? 성스러운 율에서 행하는 하강의식에 대해서 제게 법을 설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바라문이여, 그렇다면 그것을 듣고 잘 사고하십시오. 나는 설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존자시여.”라고 자눗소니 바라문은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바라문이여, 여기 성스러운 제자는 이렇게 숙고합니다.

‘생명을 해치는 것은 금생과 내생에 악한 과보를 가져온다.’라고. 그는 이렇게 숙고하면서 생명을 해치는 것을 버리고, 생명을 해치는 것으로부터 하강합니다.

‘주어지지 않은 것을 가지는 것은 금생과 내생에 악한 과보를 가져온다.’라고. 그는 이렇게 숙고하면서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것을 버리고,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것으로부터 하강합니다.
‘음행에 대해 삿되게 행하는 것은 금생과 내생에 악한 과보를 가져온다.’라고. 그는 이렇게 숙고하면서 음행에 대해 삿되게 행하는 것을 버리고, 음행에 대해 삿된 행위로부터 하강합니다.

‘거짓을 말하는 행위는 금생과 내생에 악한 과보를 가져온다.’라고. 그는 이렇게 숙고하면서 거짓을 말하는 행위를 버리고, 거짓을 말하는 행위로부터 하강합니다.

‘이간하는 말은 금생과 내생에 악한 과보를 가져온다.’라고. 그는 이렇게 숙고하면서 이간하는 말을 버리고, 이간하는 말로부터 하강합니다.

‘거친 말(욕설)은 금생과 내생에 악한 과보를 가져온다.’라고. 그는 이렇게 숙고하면서 거친 말을 버리고, 거친 말로부터 하강합니다.
‘꾸며대는 말은 금생과 내생에 악한 과보를 가져온다.’라고. 그는 이렇게 숙고하면서 꾸며대는 말을 버리고, 꾸며대는 말로부터 하강합니다.

‘간탐은 금생과 내생에 악한 과보를 가져온다.’라고. 그는 이렇게 숙고하면서 간탐을 버리고, 간탐으로부터 하강합니다.‘

성냄은 금생과 내생에 악한 과보를 가져온다.’라고. 그는 이렇게 숙고하면서 성냄을 버리고, 성냄으로부터 하강합니다.

‘삿된 견해는 금생과 내생에 악한 과보를 가져온다.’라고. 그는 이렇게 숙고하면서 삿된 견해를 버리고, 삿된 견해로부터 하강합니다."


“고따마 존자여, 바라문들의 하강의식과 성스러운 율에서의 하강의식은 다릅니다. 고따마 존자여, 바라문들의 하강의식은 성스러운 율에서의 하강의식에 비하면 16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경이롭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경탄할만 합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시듯, 혹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듯이, 아니면 길을 잃고 헤매던 사람에게 길을 가르켜 주시듯, 또는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 고따마 존자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주셨습니다. 저는 이제 고따마 존자께 귀의합니다. 또한 그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또한 그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에 귀의합니다. 고따마 존자께서는 저를 재가신자로 받아주십시오. 오늘부터 목숨이 붙어 있는 그날까지 귀의하옵니다.”

 

ariyapaccorohaṇīsuttaṃ (AN 10.168-성스러운 하강의식 경)
168.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성스러운 하강의식인가?"
"세존이시여, 저희에게 법은 세존을 뿌리로 하는 것이고, 세존에 의해 이끌어지는 것이며, 세존을 의지처로 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의 그 뜻을 잘 설명해 주십시오. 저희들은 세존의 가르침을 듣고 잘 간직하겠습니다."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하강의식에 대해서 설하리라. 듣고 마음에 잘 새겨라. 나는 설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성스러운 하강의식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성스러운 제자는 이렇게 숙고한다.

‘생명을 해치는 것은 금생과 내생에 악한 과보를 가져온다.’라고. 그는 이렇게 숙고하면서 생명을 해치는 것을 버리고, 생명을 해치는 것으로부터 하강한다.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것은 ··· 음행에 대해 삿되게 행하는 것은 ··· 거짓을 말하는 행위는 ··· 이간하는 말은 ··· 거친 말(욕설)은 ··· 꾸며대는 말은 ··· 간탐은 ··· 성냄은 ··· 삿된 견해는 금생과 내생에 악한 과보를 가져온다.’라고. 그는 이렇게 숙고하면서 삿된 견해를 버리고, 삿된 견해로부터 하강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성스러운 하강의식이다.”

 

saṅgāravasuttam (AN 10.169-상가라와 경) 
169. 그 무렵
상가라와 바라문이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과 함께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서로 안부 인사와 우호적인 대화를 나눈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상가라와 바라문은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고따마 존자시여, 어떤 것이 이 언덕이고, 어떤 것이 저 언덕입니까?”
“바라문이여, 생명을 해치는 것은 이 언덕이고, 생명을 해치는 것을 멀리 떠나는 것은 저 언덕입니다.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것은 이 언덕이고,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것을 멀리 떠나는 것은 저 언덕입니다. 음행에 대해 삿되게 행하는 것은 이 언덕이고, 음행에 대해 삿되게 행하는 것을 멀리 떠나는 것은 저 언덕입니다. 거짓을 말하는 것은 이 언덕이고, 거짓을 말하는 것을 멀리 떠나는 것은 저 언덕입니다. 이간하는 말은 이 언덕이고, 이간하는 말을 멀리 떠나는 것은 저 언덕입니다. 거친 말은 이 언덕이고, 거친 말을 멀리 떠나는 것은 저 언덕입니다. 꾸며대는 말은 이 언덕이고, 꾸며대는 말을 멀리 떠나는 것은 저 언덕입니다. 간탐은 이 언덕이고, 간탐 없음은 저 언덕입니다. 성냄은 이 언덕이고, 성냄 없음은 저 언덕입니다. 삿된 견해는 이 언덕이고, 바른 견해는 저 언덕입니다.

바라문이여, 이런 것이 이 언덕이고, 이런 것이 저 언덕입니다.”

'인간들 가운데 저 언덕에 도달한 사람은 드물고, 

사람들 대부분 이 언덕에서 방황하고 있다.  

법을 따르는 자들에게 법이 바르게 설해질 때 

그들은 건너기 어려운 죽음의 영역을 건너 저 언덕에 도달한다. 

 

현자는 나쁜 법을 제거한 뒤 좋은 법을 닦는다.  

윤회에서 벗어나 윤회 없음에 이르러 기쁨이 없는 

평온한 머뭄에서 기쁨을 찾아야 한다. 

감각적 쾌락을 버리고 무소유가 되어서 현자는 

마음의 오염원들로부터 자신을 청정하게 한다. 

 

깨달음의 구성요소들로 바르게 마음을 잘 닦아서 

취함을 놓아버려 집착 없음을 기뻐한다. 

번뇌 다한 거룩한 자들은 세상에서 완전한 평화를 얻는다.'

 

이 언덕 경(A10:170)
orimatīra-sutta 

170.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이 언덕이고 어떤 것이 저 언덕인가?"
"세존이시여, 저희에게 법은 세존을 뿌리로 하는 것이고, 세존에 의해 이끌어지는 것이며, 세존을 의지처로 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의 그 뜻을 잘 설명해 주십시오. 저희들은 세존의 가르침을 듣고 잘 간직하겠습니다."
“비구들이여, 이 언덕과 저 언덕에 대해서 설하리라. 듣고 마음에 잘 새겨라. 나는 설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생명을 해치는 것은 이 언덕이고, 생명을 해치는 것을 멀리 떠나는 것은 저 언덕이다.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것은 이 언덕이고,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것을 멀리 떠나는 것은 저 언덕이다. 음행에 대해 삿되게 행하는 것은 이 언덕이고, 음행에 대해 삿되게 행하는 것을 멀리 떠나는 것은 저 언덕이다. 거짓을 말하는 것은 이 언덕이고, 거짓을 말하는 것을 멀리 떠나는 것은 저 언덕이다. 이간하는 말은 이 언덕이고, 이간하는 말을 멀리 떠나는 것은 저 언덕이다. 거친 말은 이 언덕이고, 거친 말을 멀리 떠나는 것은 저 언덕이다. 꾸며대는 말은 이 언덕이고, 꾸며대는 말을 멀리 떠나는 것은 저 언덕이다. 간탐은 이 언덕이고, 간탐 없음은 저 언덕이다. 성냄은 이 언덕이고, 성냄 없음은 저 언덕이다. 삿된 견해는 이 언덕이고, 바른 견해는 저 언덕이다.
비구들이여, 이런 것이 이 언덕이고, 이런 것이 저 언덕이다.”

 

'인간들 가운데 저 언덕에 도달한 사람은 드물고, 
사람들 대부분 이 언덕에서 방황하고 있다.  
법을 따르는 자들에게 법이 바르게 설해질 때 
그들은 건너기 어려운 죽음의 영역을 건너 저 언덕에 도달한다. 

현자는 나쁜 법을 제거한 뒤 좋은 법을 닦는다.  
윤회에서 벗어나 윤회 없음에 이르러 기쁨이 없는 
평온한 머뭄에서 기쁨을 찾아야 한다. 
감각적 쾌락을 버리고 무소유가 되어서 현자는 
마음의 오염원들로부터 자신을 청정하게 한다. 

깨달음의 구성요소들로 바르게 마음을 잘 닦아서 
취함을 놓아버려 집착 없음을 기뻐한다. 
번뇌 다한 거룩한 자들은 세상에서 완전한 평화를 얻는다.'

 

paṭhamādhammasuttaṃ (AN 10.171-비법 경1)
171. “비구들이여, 비법과 이익 아님을 알아야 한다. 법과 이익을 알아야 한다. 비법과 이익 아님을 알고, 법과 이익을 안 뒤에 법에 따르고 이익에 따른 실천을 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비법이고 이익 아님인가?

생명을 해치는 것은 비법이고 이익 아님이다.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것은 비법이고 이익 아님이다. 음행에 대해 삿되게 행하는 것은 비법이고 이익 아님이다. 거짓을 말하는 것은 비법이고 이익 아님이다. 이간하는 말은 비법이고 이익 아님이다. 거친 말은 비법이고 이익 아님이다. 꾸며대는 말은 비법이고 이익 아님이다. 간탐은 비법이고 이익 아님이다. 성냄은 비법이고 이익 아님이다. 된 견해는 비법이고 이익 아님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비법이고 이익 아님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법이고 이익인가?

생명을 해치는 것을 멀리 떠나는 것을 법이고 이익이다.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것을 멀리 떠나는 것은 법이고 이익이다. 음행에 대해 삿되게 행하는 것을 멀리 떠나는 것은 법이고 이익이다. 거짓을 말하는 것을 멀리 떠나는 것은 법이고 이익이다. 이간하는 말을 멀리 떠나는 것은 법이고 이익이다. 거친 말을 멀리 떠나는 것은 법이고 이익이다. 꾸며대는 말을 멀리 떠나는 것은 법이고 이익이다. 간탐 없음은 법이고 이익이다. 성냄 없음은 법이고 이익됨이다. 바른 견해는 법이고 이익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법이고 이익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비법과 이익 아님을 알아야 한다. 법과 이익을 알아야 한다. 비법과 이익 아님을 알고, 법과 이익을 안 뒤에 법에 따르고 이익에 따른 실천을 해야 한다.’라고 한 것은 이런 이유로 그렇게 말했다.”

 

dutiyādhammasuttaṃ (AN 10.172-비법 경2)

172. “비구들이여, 비법과 이익 아님을 알아야 한다. 법과 이익을 알아야 한다. 비법과 이익 아님을 알고, 법과 이익을 안 뒤에 법에 따르고 이익에 따른 실천을 해야 한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선서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신 뒤 자리에서 일어나 거처로 들어가셨다. 세존께서 들어가신지 오래지 않아서 비구들에게 이런 토론이 일어났다.

“도반들이여, 세존께서는 우리에게 ‘비구들이여, 비법과 이익 아님을 알아야 한다. 법과 이익을 알아야 한다. 비법과 이익 아님을 알고, 법과 이익을 안 뒤에 법에 따르고 이익에 따른 실천을 해야 한다.’라고 간략하게 개요만 말씀하시고 상세하게 그 뜻을 분석해 주시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거처로 들어가셨습니다. 세존께서 이처럼 간략하게 개요만 말씀하시고 상세하게 그 뜻을 분석해 주시지 않았는데, 누가 참으로 그 뜻을 상세하게 분석해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다시 비구들에게 이런 토론이 일어났다.

“마하깟짜나 존자는 스승께서 칭찬하셨고, 지혜로운 동료 비구들이 존중합니다. 세존께서 간략하게 개요만 말씀하시고 상세하게 그 뜻을 분석해주시지 않으신 것을 마하깟짜나 존자가 참으로 상세하게 그 뜻을 분석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마하깟짜나 존자에게 다가가서 이 뜻을 질문합시다. 그래서 마하깟짜나 존자가 우리에게 설명해주는 대로 그렇게 받들어 지니도록 합시다.”

 

비구들은 마하깟짜나 존자에게 찾아갔다. 가서는 마하깟짜나 존자와 함께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서로 안부 인사와 우호적인 대화를 나눈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비구들은 마하깟짜나 존자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
“도반 깟짜나여, 세존께서는 ‘비구들이여, 비법과 이익 아님을 알아야 한다. 법과 이익을 알아야 한다. 비법과 이익 아님을 알고, 법과 이익을 안 뒤에 법에 따르고 이익에 따른 실천을 해야 한다.’라고 간략하게 개요만 말씀하시고 상세하게 그 뜻을 분석해주시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거처로 들어가셨습니다. 세존께서 들어가신지 오래지 않아서 우리에게 이런 토론이 일어났습니다.
‘도반들이여, 세존께서는 우리에게 ‘비구들이여, 비법과 이익 아님을 알아야 한다. 법과 이익을 알아야 한다. 비법과 이익 아님을 알고, 법과 이익을 안 뒤에 법에 따르고 이익에 따른 실천을 해야 한다.’라고 간략하게 개요만 말씀하시고 상세하게 그 뜻을 분석해주시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거처로 들어가셨습니다. 세존께서 이처럼 간략하게 개요만 말씀하시고 상세하게 그 뜻을 분석해주시지 않았는데 누가 참으로 상세하게 그 뜻을 분석해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다시 우리들에게 이런 토론이 생겼습니다. ‘마하깟짜나 존자는 스승께서 칭찬하셨고, 지혜로운 동료 비구들이 존중합니다. 세존께서 간략하게 개요만 말씀하시고 상세하게 그 뜻을 분석해주시지 않으신 것을 마하깟짜나 존자가 참으로 상세하게 그 뜻을 분석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마하깟짜나 존자에게 다가가서 이 뜻을 질문합시다. 그래서 마하깟짜나 존자가 우리에게 설명해주는 대로 그렇게 받들어 지닙도록 합시다.’라고. 그러니 마하깟짜나 존자는 우리에게 분석해주십시오.”

 

예를 들면, 도반들이여, 심재가 필요하고 심재를 찾는 사람이 심재를 찾아서 돌아다니다가, 심재를 가지고 튼튼하게 서 있는 큰 나무의 뿌리와 줄기를 제쳐놓고는 잔가지와 잎사귀에서 심재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도반들에게도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스승께서 면전에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분 세존을 제쳐놓고 제게 그 뜻을 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도반들이여, 참으로 그분 세존께서는 알아야 할 것을 아시고, 보아야 할 것을 보시는 분이며, 우리의 눈이 되시고, 지혜가 되시고, 법이 되시고, 으뜸이 되시며, 사성제를 말씀하는 분이시고 진리를 꿰뚫으시면서 선언하는 분이시고, 뜻을 밝히는 분이시고, 불사(不死)를 주는 분이시며,법의 주인이시며, 여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대들은 그때 바로 세존께 다가가서 그 뜻을 여쭈었어야 했습니다. 그때가 바른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세존께서 그대들에게 설명해주신대로 잘 호지했어야 했습니다.”

 

“도반 깟짜나여, 참으로 그분 세존께서는 알아야 할 것을 아시고, 보아야 할 것을 보시는 분이며, 우리의 눈이 되시고, 지혜가 되시고, 법이 되시고, 으뜸이 되시며, 사성제를 말씀하는 분이시고 진리를 꿰뚫으시면서 선언하는 분이시고, 뜻을 밝히는 분이시고, 불사(不死)를 주는 분이시며, 법의 주인이시며, 여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때 바로 세존께 다가가서 그 뜻을 여쭈었어야 했습니다. 그때가 바른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세존께서 우리들에게 설명해주신 대로 잘 받들어 지녀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깟짜나 존자는 스승께서 칭찬하셨고, 지혜로운 동료 비구들이 존중합니다. 세존께서 간략하게 개요만 말씀하시고 상세하게 그 뜻을 분석해주지 않으신 것을, 깟짜나 존자는 참으로 상세하게 그 뜻을 분석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깟짜나 존자는 귀찮다 여기지 마시고 우리에게 분석해주십시오.”

 

“도반들이여, 그렇다면 이제 그것을 들으십시오. 듣고 마음에 잘 새기십시오. 나는 설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도반이시여.”라고 비구들은 마하깟짜나 존자에게 대답했다. 마하깟짜나 존자는 이와 같이 말했다.

 

“도반들이여, 세존께서는 ‘비구들이여, 비법과 이익 아님을 알아야 한다. 법과 이익을 알아야 한다. 비법과 이익 아님을 알고, 법과 이익을 안 뒤에 법에 따르고 이익에 따른 실천을 해야 한다.’라고 간략하게 개요만 말씀하시고 상세하게 그 뜻을 분석해주시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거처로 들어가셨습니다. 도반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비법이고, 어떤 것이 법이며, 어떤 것이 이익 아님이고, 어떤 것이 이익입니까?

 

도반들이여, 생명을 해치는 것은 비법이고, 생명을 해치는 것을 멀리 떠나는 것은 법입니다. 생명을 죽이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여러 가지 삿되고 선하지 않은 법들이 생깁니다. 이것이 이익 아님입니다. 생명을 해치는 것을 멀리 떠나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여러 가지 선한 법들이 닦음을 통해 완성에 이릅니다. 이것이 이익입니다.


도반들이여,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것은 비법이고,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것을 멀리 떠나는 것은 법입니다.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여러 가지 삿되고 선하지 않은 법들이 생깁니다. 이것이 이익 아님입니다.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것을 멀리 떠나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여러 가지 선한 법들이 닦음을 통해 완성에 이릅니다. 이것이 이익입니다.

 

도반들이여, 음행에 대해 삿되게 행하는 것은 비법이고, 음행에 대해 삿되게 행하는 것을 멀리 떠나는 것은 법입니다. 음행에 대해 삿되게 행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여러 가지 삿되고 선하지 않은 법들이 생깁니다. 이것이 이익 아님입니다. 음행에 대해 삿되게 행하는 것을 멀리 떠나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여러 가지 선한 법들이 닦음을 통해 완성에 이릅니다. 이것이 이익입니다.


도반들이여, 거짓을 말하는 것은 비법이고, 거짓을 말하는 것을 멀리 떠나는 것은 법입니다. 거짓을 말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여러
가지 삿되고 선하지 않은 법들이 생깁니다. 이것이 이익 아님입니다. 거짓을 말하는 것을 멀리 떠나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여러 가지 선한 법들이 닦음을 통해 완성에 이릅니다. 이것이 이익입니다.

 

도반들이여, 이간하는 말은 비법이고, 이간하는 말을 멀리 떠나는 것은 법입니다. 이간하는 말을 조건으로 하여 여러 가지 삿되고 선하지 않은 법들이 생깁니다. 이것이 이익 아님입니다. 이간하는 말을 멀리 떠나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여러 가지 선한 법들이 닦음을 통해 완성에 이릅니다. 이것이 이익입니다.

 

도반들이여, 거친 말은 비법이고, 거친 말을 멀리 떠나는 것은 법입니다. 거친 말을 조건으로 하여 여러 가지 삿되고 선하지 않은 법들이 생깁니다. 이것이 이익 아님입니다. 거친 말을 멀리 떠나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여러 가지 선한 법들이 닦음을 통해 완성에 이릅니다. 이것이 이익입니다.


도반들이여, 꾸며대는 말은 비법이고, 꾸며대는 말을 멀리 떠나는 것은 법입니다. 꾸며대는 말을 조건으로 하여 여러 가지 삿되고 선하지 않은 법들이 생깁니다. 이것이 이익 아님입니다. 꾸며대는 말을 멀리 떠나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여러 가지 선한 법들이 닦음을 통해 완성에 이릅니다. 이것이 이익입니다.

 

도반들이여, 간탐은 비법이고, 간탐 없음은 법입니다. 간탐을 조건으로 하여 여러 가지 삿되고 선하지 않은 법들이 생깁니다. 이것이 이익 아님입니다.간탐 없음을 조건으로 하여 여러 가지 선한 법들이 닦음을 통해 완성에 이릅니다. 이것이 이익입니다.

 

도반들이여, 성냄은 비법이고, 성냄 없음은 법입니다. 성냄을 조건으로 하여 여러 가지 삿되고 선하지 않은 법들이 생깁니다. 이것이 이익 아님입니다. 성냄 없음을 조건으로 하여 여러 가지 선한 법들이 닦음을 통해 완성에 이릅니다. 이것이 이익입니다.

 

도반들이여, 삿된 견해는 비법이고, 바른 견해는 법입니다. 삿된 견해를 조건으로 하여 여러 가지 삿되고 선하지 않은 법들이 생깁니다. 이것이 이익 아님입니다. 바른 견해를 조건으로 하여 여러 가지 선한 법들이 닦음을 통해 완성에 이릅니다. 이것이 이익입니다.

 

도반들이여, 세존께서는 ‘비구들이여, 비법과 이익 아님을 알아야 한다. 법과 이익을 알아야 한다. 비법과 이익 아님을 알고, 법과 이익을 안 뒤에 법에 따르고 이익에 따른 실천을 해야 한다.’라고 간략하게 개요만 말씀하시고 상세하게 그 뜻을 분석해주시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거처로 들어가셨습니다.  도반들이여, 나는 세존께서 간략하게 개요만 말씀하시고 상세하게 그 뜻을 분석해주시지 않으신 것에 대해서 이와 같이 그 뜻을 상세하게 압니다. 도반들이여, 그대들이 원한다면 세존께 가십시오. 가서 세존께 이러한 뜻을 아뢰어 세존께서 그대들에게 설명해주시는 대로 받들어 지니십시오.”
“알겠습니다, 도반이시여.”라고 비구들은 마하깟짜나 존자의 말을 기뻐하고 감사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서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후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아서 비구들은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비구들이여, 비법과 이익 아님을 알아야 한다. 법과 이익을 알아야 한다. 비법과 이익 아님을 알고, 법과 이익을 안 뒤에 법에 따르고 이익에 따른 실천을 해야 한다.’라고 간략하게 개요만 말씀하시고 상세하게 그 뜻을 분석해주시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거처로 들어가셨습니다. 세존께서 들어가신지 오래지 않아서 저희들에게 이런 토론이 일어났습니다. 
‘도반들이여, 세존께서는 우리에게 ‘비구들이여, 비법과 이익 아님을 알아야 한다. 법과 이익을 알아야 한다. 비법과 이익 아님을 알고, 법과 이익을 안 뒤에 법에 따르고 이익에 따른 실천을 해야 한다.’라고 간략하게 개요만 말씀하시고 상세하게 그 뜻을 분석해 주시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거처로 들어가셨습니다. 세존께서 이처럼 간략하게 개요만 말씀하시고 상세하게 그 뜻을 분석해주시지 않았는데 누가 참으로 상세하게 그 뜻을 분석해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다시 우리들에게 이런 토론이 생겼습니다. ‘마하깟짜나 존자는 스승께서 칭찬하셨고, 지혜로운 동료 비구들이 존중합니다. 세존께서 간략하게 개요만 말씀하시고 상세하게 그 뜻을 분석해주시지 않으신 것을 마하깟짜나 존자가 참으로 상세하게 그 뜻을 분석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마하깟짜나 존자에게 다가가서 이 뜻을 질문합시다. 그래서 마하깟짜나 존자가 우리에게 설명해주는 대로 그렇게 받들어 지닙도록 합시다.’라고.  그런 저희들은 마하깟짜나 존자에게 다가갔습니다. 가서는 마하깟짜나 존자에게 이 뜻에 대해서 질문을 했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런 저희들에게 마하깟짜나 존자는 이러한 형태와 이러한 단어들과 이러한 문장들로 그 뜻을 잘 분석해주었습니다.”

 

“장하고 장하구나, 비구들이여. 비구들이여, 마하깟짜나는 현자다. 비구들이여, 마하깟짜나는 큰 지혜를 가졌다. 만일 그대들이 내게 다가와서 이 뜻을 물었다면 나도 그와 같이 설명했을 것이다. 마하깟짜나가 설명한 것이 바로 그 뜻이다. 그러니 그대들은 그것을 잘 받들어 지니도록 하여라.”

 

tatiyādhammasuttaṃ (AN 10.173-비법 경3)
173. “비구들이여, 비법과 이익 아님을 알아야 한다. 법과 이익을 알아야 한다. 비법과 이익 아님을 알고, 법과 이익을 안 뒤에 법에 따르고 이익에 따른 실천을 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법이고, 어떤 것이 비법이며, 어떤 것이 이익 아님이고, 어떤 것이 이익인가?

 

비구들이여, 생명을 해치는 것은 비법이고, 생명을 해치는 것을 멀리 떠나는 것은 법이다. 생명을 해치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여러 가지 삿되고 선하지 않은 법들이 생긴다. 이것이 이익 아님이다생명을 해치는 것을 멀리 떠나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여러 가지 선한 법들이 닦음을 통해 완성에 이른다. 이것이 이익이다.

 

비구들이여,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것은 비법이고,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것을 멀리 떠나는 것은 법이다.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여러 가지 삿되고 선하지 않은 법들이 생긴다. 이것이 이익 아님이다.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것을 멀리 떠나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여러 가지 선한 법들이 닦음을 통해 완성에 이른다. 이것이 이익이다.


비구들이여, 음행에 대해서 삿되게 행하는 것은 비법이고, 음행에 대해서 삿되게 행하는 것을 멀리 떠나는 것은 법이다. 음행에 대해서 삿되게 행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여러 가지 삿되고 선하지 않은 법들이 생긴다. 이것이 이익 아님이다. 음행에 대해서 삿되게 행하는 것을 멀리 떠나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여러 가지 선한 법들이 닦음을 통해 완성에 이른다. 이것이 이익이다.

 

비구들이여, 거짓을 말하는 것은 비법이고, 거짓을 말하는 것을 멀리 떠나는 것은 법이다. 거짓을 말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여러 가지 삿되고 선하지 않은 법들이 생긴다. 이것이 이익 아님이다. 거짓을 말하는 것을 멀리 떠나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여러 가지 선한 법들이 닦음을 통해 완성에 이른다. 이것이 이익이다.

 

비구들이여, 이간하는 말은 비법이고, 이간하는 말을 멀리 떠나는 것은 법이다. 이간하는 말을 조건으로 하여 여러 가지 삿되고 선하지 않은 법들이 생긴다. 이것이 이익 아님이다. 이간하는 말을 멀리 떠나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여러 가지 선한 법들이 닦음을 통해 완성에 이른다. 이것이 이익이다.

 

비구들이여, 거친 말은 비법이고, 거친 말을 멀리 떠나는 것은 법이다. 거친 말을 조건으로 하여 여러가지 삿되고 선하지 않은 법들이 생긴다. 이것이 이익 아님이다. 거친 말을 멀리 떠나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여러 가지 선한 법들이 닦음을 통해 완성에 이른다. 이것이 이익이다.

 

비구들이여, 꾸며대는 말은 비법이고, 꾸며대는 말을 멀리 떠나는 것은 법이다. 꾸며대는 말을 조건으로 하여 여러 가지 삿되고 선하지 않은 법들이 생긴다. 이것이 이익 아님이다. 꾸며대는 말을 멀리 떠나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여러 가지 선한 법들이 닦음을 통해 완성에 이른다. 이것이 이익이다.

 

비구들이여, 간탐은 비법이고, 간탐 없음은 법이다. 간탐을 조건으로 하여 여러 가지 삿되고선하지 않은 법들이 생긴다. 이것이 이익 아님이다. 간탐 없음을 조건으로 하여 여러 가지 선한 법들이 닦음을 통해 완성에 이른다. 이것이 이익이다.


비구들이여, 성냄은 비법이고, 성냄 없음은 법이다. 성냄을 조건으로 하여 여러 가지 삿되고선하지 않은 법들이 생긴다. 이것이 이익 아님이다. 성냄 없음을 조건으로 하여 여러 가지 선한 법들이 닦음을 통해 완성에 이른다. 이것이 이익이다.


비구들이여 삿된 견해는 비법이고, 바른 견해는 법이다. 삿된 견해를 조건으로 하여 여러 가지 삿되고 선하지 않은
법들이 생긴다. 이것이 이익 아님이다. 바른 견해를 조건으로 하여 여러 가지 선한 법들이 닦음을 통해 완성에 이른다. 이것이 이익이다.

 

'비구들이여, 비법과 이익 아님을 알아야 한다. 법과 이익을 알아야 한다. 비법과 이익 아님을 알고, 법과 이익을 안 뒤에 법에 따르고 이익에 따른 실천을 해야 한다’라고 한 것은 이러한 이유로 그렇게 말했다.”

 

kammanidānasuttaṃ (AN 10.174-업(業)의 인연(因緣) 경)
174. “비구들이여, 생명을 죽이는 것은 세 가지가 있다고 나는 말한다. 탐욕 때문에(원인 때문에), 성냄 때문에, 어리석음 때문에 죽인다. 
비구들이여,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것도 세 가지가 있다고 나는 말한다. 탐욕 때문에, 성냄
때문에, 어리석음 때문에 주지 않은 것을 가진다. 

비구들이여, 음행에 대해 삿되게 행하는 것도 세 가지가 있다고 나는 말한다. 탐욕 때문에, 성냄 때문에, 어리석음 때문에 음행에 대해서 삿되게 행한다.

비구들이여, 거짓을 말하는 것도 세 가지가 있다고 나는 말한다. 탐욕 때문에, 성냄 때문에, 어리석음 때문에 거짓을 말한다.

비구들이여, 이간하는 말도 세 가지가 있다고 나는 말한다. 탐욕 때문에, 성냄 때문에, 어리석음 때문에 이간하는 말을 한다.

비구들이여, 거친 말도 세 가지가 있다고 나는 말한다. 탐욕 때문에, 성냄 때문에, 어리석음 때문에 거친 말을 한다.

비구들이여, 꾸며대는 말도 세 가지가 있다고 나는 말한다. 탐욕 때문에, 성냄 때문에, 어리석음 때문에 꾸며대는 말을 한다.

비구들이여, 간탐도 세 가지가 있다고 나는 말한다. 탐욕 때문에, 성냄 때문에, 어리석음 때문에 간탐을 낸다.

비구들이여, 성냄도 세 가지가 있다고 나는 말한다. 탐욕 때문에, 성냄 때문에, 어리석음 때문에 성냄을 품는다.

비구들이여, 삿된 견해도 세 가지가 있다고 나는 말한다. 탐욕 때문에, 성냄 때문에, 어리석음 때문에 삿된 견해가 생긴다.

 

비구들이여, 이처럼 탐욕은 업의 인연(因緣)이고 근원이다. 성냄은 업의 인연이고 근원이다. 어리석음은 업의 인연이고 근원이다. 탐욕의 부서짐으로부터 업의 인연의 부서짐이 있고, 성냄의 부서짐으로부터 업의 인연의 부서짐이 있고, 어리석음의 부서짐으로부터 업의 인연의 부서짐이 있다.”

 

parikkamanasuttaṃ (AN 10.175-피함 경)

175. "비구들이여, 이것은 피함을 가진 법이지 피함을 가지지 않은 법이 아니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이것은 피함을 가진 법이지 피함을 가지지 않은 법이 아닌가?

비구들이여, 생명을 해치는 자에게 생명을 해치는 것을 멀리 떠나는 것은 피함이다.

비구들이여,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자에게 주지 않을 것을 가지는 것을 멀리 떠나는 것은 피함이다.

비구들이여, 음행에 대해서 삿되게 행하는 자에게 음행에 대해서 삿되게 행하는 것을 멀리 떠나는 것은 피함이다.  

비구들이여, 거짓을 말하는 자에게 거짓을 말하는 것을 멀리 떠나는 것은 피함이다.

비구들이여, 이간하는 말을 하는 자에게 이간하는 말을 멀리 떠나는 것은 피함이다.

비구들이여, 거친 말을 하는 자에게 거친 말을 멀리 떠나는 것은 피함이다.

비구들이여, 꾸며대는 말을 하는 자에게 꾸며대는 말을 멀리 떠나는 것은 피함이다.

비구들이여, 간탐하는 자에게 간탐 없음은 피함이다.

비구들이여, 성냄을 가진 자에게 성냄 없음은 피함이다.

비구들이여, 삿된 견해를 가진 자에게 바른 견해는 피함이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이것은 피함을 가진 법이지 피함을 가지지 않은 법이 아니다.”

 

cundasuttaṃ (AN 10.176-쭌다 경)

176. 한 때에 세존께서는 빠와에서 대장장이의 아들 쭌다의 망고 숲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대장장이의 아들 쭌다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후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대장장이의 아들 쭌다에게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쭌다여, 그대는 누구의 정화의식을 좋아하는가?”
“세존이시여, 서쪽지방에 바라문들이 있어, 그들은 물병을 들고 세왈라 수초로 만든 화환을 두르고 불을 숭배하고 물에 들어가는 정화의식을 천명합니다. 저는 그들의 정화의식을 좋아합니다.”
“쭌다여, 그렇다면 서쪽지방의 바라문들은 정화의식을 어떻게 천명하는가?”

“세존이시여, 서쪽지방의 바라문들은 물병을 들고 세왈라 수초로 만든 화환을 두르고 불을 숭배하고 물에 들어가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이와 같이 가르칩니다. ‘오시오, 아무개 사람이여. 그대는 좋은 시간에 침상에서 일어나 땅을 만지시오. 땅을 만지지 못하면 젖은 소똥을 만지시오. 젖은 소똥을 만지지 못하면 푸른 풀을 만지시오. 푸른 풀을 만지지 못하면 불을 숭배하시오. 불을 숭배하지 못하면 합장하고 태양에 예배하시오. 만일 합장하고 태양에 예배하지 못하면 밤의 삼경에 물에 들어가시오.’

세존이시여, 서쪽지방의 바라문들은 이와 같이 물병을 들고 세왈라 수초로 만든 화환을 두르고 불을 숭배하고 물에 들어가는 정화의식을 천명합니다. 저는 그들의 정화의식을 좋아합니다.”
“쭌다여, 서쪽지방의 바라문들이 천명하는, 물병을 들고 세왈라 수초로 만든 화환을 두르고 불을 숭배하고 물에 들어가는 정화의식과 성스러운 율에서의 정화의식은 다르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성스러운 율에서 정화의식은 어떻게 합니까? 성스러운 율에서의 정화의식에 대해서 제게 법을 설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쭌다여, 그렇다면 그것을 들어라. 듣고 마음에 잘 새겨라. 나는 설할 것이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대장장이의 아들 쭌다는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쭌다여, 몸으로 짓는 세 가지 불결함이 있고, 말로 짓는 네 가지 불결함이 있고, 마음으로 짓는 세 가지 불결함이 있다.

쭌다여, 그러면 어떤 것이 몸으로 짓는 세 가지 불결함인가?

쭌다여 여기 어떤 자는 생명을 해친다. 그는 잔인하고, 손에 피를 묻히고, 죽이고 폭력을 행사하는데 몰두한다. 모든 살아있는 중생들을 향하여 관대하고 자비한 마음을 갖지 않는다.

그는 주지 않은 것을 가진다. 그는 마을에서나 숲속에서 자기에게 주지 않은, 남의 재산과 재물을 도적질로써 취한다.

그는 음행에 대해서 삿되게 행한다. 어머니가 보호하고, 아버지가 보호하고, 오빠가 보호하고, 언니가 보호하고, 친지들이 보호하고, 법으로 보호하고, 남편이 있고, 가문이 보호하고, 심지어 혼약의 정표로 화환을 두른 그러한 여인들과 성행위를 한다.
쭌다여, 이것이 몸으로 짓는 세 가지 불결함이다.

 

쭌다여, 그러면 어떤 것이 말로 짓는 네 가지 불결함인가?

쭌다여, 여기 어떤 자는 거짓을 말한다. 그는 법정에서나 회의에서나 친척들 사이에서나 조합원들 사이에서나 왕 앞에서 증인으로 출두하여 질문을 받는다. ‘오시오, 선남자여. 그대가 아는 것을 말해주시오.’라고. 그러면 그는 알지 못하면서 ‘나는 압니다.’라고 말하고, 알면서 ‘나는 알지 못합니다.’라고 한다. 보지 못하면서 ‘나는 봅니다.’라고 말하고, 보면서 ‘나는 보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자기의 목적을 위해서나 남의 목적을 위해서나 어떤 세속적인 목적을 위해서 고의로 거짓을 말한다.

그는 이간하는 말을 한다. 그는 여기서 듣고 이들을 이간시키려고 저기서 말한다. 저기서 듣고서 저들을 이간시키려고 여기서 말한다. 이처럼 화합하는 자들을 이간시키고 이간을 조장한다. 그는 불화를 기뻐하고, 불화를 즐기며, 불화를 일으키는 말을 한다. 

그는 거친 말을 한다. 그는 거칠고, 난폭하고, 남을 언짢게 하고, 남을 모욕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분노하고, 삼매로 이끌지 못하는 그런 말을 한다.

그는 꾸며대는 말을 한다. 그는 부적절한 시기에 말하고, 사실이 아닌 것을 말하고, 무익한 것을 말하고, 법에 어긋나는 것을 말하고, 율에 저촉되는 말을 한다. 그는 적절하지 않은 시기에 근거없고 무절제하며, 이익이 되지 않게 말한다.

쭌다여, 이것이 말로 짓는 네 가지 불결함이다.

 

쭌다여, 그러면 어떤 것이 마음으로 짓는 세 가지 불결함인가?

쭌다여, 여기 어떤 자는 간탐한다. 그는 ‘오, 저 사람 것이 내 것이라면.’이라고 남의 재산과 재물을 탐한다.
그의 마음은 성냄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이 중생들이 죽어버리길, 파멸되기를, 멸망해버리길, 없어져버리길.’하고 타락한 생각을 품는다.

그는 삿된 견해를 가진다. ‘보시란 없다. 제물이 없다. 공양이란 없다. 선행과 악행의 업들에 대한 열매도 없고 과보도 없다.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다. 어머니도 없다. 아버지도 없다. 화생하는 중생도 없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철저히 알았고, 겪어 알아, 그것을 알려주는 바르게 행하고, 바르게 들어간, 사문과 바라문이 이 세상에는 없다.’라는 삿된 견해를 가진다.

쭌다여, 이것이 마음으로 짓는 세 가지 불결함이다.

쭌다여, 이것이 열 가지 해로운 업의 길이다.

쭌다여, 이러한 열 가지 선하지 않은 업의 길을 갖춘 자는 적당한 시간에 침상에서 일어나 땅을 만지더라도 청정하지 못하며, 땅을 만지지 않더라도 청정하지 못하다. 젖은 소똥을 만지더라도 청정하지 못하며, 젖은 소똥을 만지지 않더라도 청정하지 못하다. 푸른 풀을 만지더라도 청정하지 못하며, 푸른 풀을 만지지 않더라도 청정하지 못하다. 불을 숭배하더라도 청정하지 못하며, 불을 숭배하지 않더라도 청정하지 못하다. 합장하고 태양에 예배하더라도 청정하지 못하며, 합장하고 태양에 예배하지 않더라도 청정하지 못하다. 밤의 삼경에 물에 들어가더라도 청정하지 못하며, 밤의 삼경에 물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청정하지 못하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이러한 열 가지 선하지 않은 업의 길 자체가 청정하지 못하고, 또 청정하지 못함을 만들기 때문이다. 
쭌다여, 이러한 열 가지 선하지 않은 업의 길을 갖춤으로써 지옥이 알려졌으며, 축생의 모태가 알려졌으며, 아귀계가 알려졌으며, 여러 비참한 세계들이 알려진 것이다.

 

쭌다여, 몸으로 짓는 세 가지 청정함이 있고, 말로 짓는 네 가지 청정함이 있고, 마음으로 짓는 세 가지 청정함이 있다.

쭌다여, 그러면 어떤 것이 몸으로 짓는 세 가지 청정함인가?
쭌다여, 여기 어떤 자는 생명을 해치는 것을 버리고, 생명을 해치는 것을 멀리 떠난다. 몽둥이를 내려놓고, 칼을 내려놓고, 모든 살아있는 중생들을 향하여 관대하고 자비한 마음을 갖고 머문다.
그는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것을 버리고,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것을 멀리 떠난다. 그는 마을에서나 숲속에서 남의 재산과 재물을 도적질로써 취하지 않는다.

그는 음행에 대해서 삿되게 행하는 것을 버리고 음행에 대해서 삿되게 행하는 것을 멀리 떠난다. 그는 어머니가 보호하고, 아버지가  보호하고, 오빠가 보호하고, 언니가  보호하며, 친지들이 보호하고, 남편이 있고, 가문이 보호하고, 혼약의 정표로 화환을 두른 그러한 여인들과 성행위를 범하지 않는다.

쭌다여, 이것이 몸으로 짓는 세 가지 청정함이다.


쭌다여, 그러면 어떤 것이 말로 짓는 네 가지 청정함인가?

쭌다여, 여기 어떤 자는 거짓을 말하는 것을 버리고, 거짓을 말하는 것을 멀리 떠난다. 그는 법정에서나 회의에서나 친척들 사이에서나 조합원들 사이에서나 왕 앞의 증인으로 출두하여 질문을 받는다. ‘오시오, 선남자여. 그대가 아는 것을 말해주시오.’라고. 그러면 그는 알지 못하면 ‘나는 알지 못합니다.’라고 말하고, 알면 ‘나는 압니다.’라고 한다. 보지 못하면 ‘나는 보지 못합니다.’라고 말하고, 보면 ‘나는 봅니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자기의 목적을 위해서나 남의 목적을 위해서나 세속의 어떤 목적을 위해서도 고의로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그는 이간하는 말을 버리고, 이간하는 말을 멀리 떠난다. 여기서 듣고서 이들을 이간시키려고 저기서 말하지 않는다. 저기서 듣고서 저들을 이간시키려고 여기서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이와 같이 분열된 자들을 합치고, 우정을 장려하며, 화합을 기뻐하고, 화합을 즐기며, 화합하게 하는 말을 한다.

그는 거친 말을 버리고, 거친 말을 멀리 떠난다. 그는 유순하고, 귀에 즐겁고, 사랑스럽고, 가슴에 와 닿고, 점잖고,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그런 말을 한다. 
그는 꾸며대는 말을 버리고, 꾸며대는 말을 멀리 떠난다. 그는 적절한 시기에 말하고, 사실을 말하고, 유익한 말을 하고, 법을 말하고, 율을 말한다. 그는 적절한 시기에 이치에 맞고, 절제가 있으며, 유익한 말을 한다.

쭌다여, 이것이 말로 짓는 네 가지 청정함이다.

 

쭌다여, 그러면 어떤 것이 마음으로 짓는 세 가지 청정함인가?

쭌다여, 여기 어떤 자는 간탐하지 않는다. 그는 ‘오, 저 사람 것이 내 것이라면.’이라고 남의 재산과 재물을 탐하지 않는다.
그의 마음은 성냄이 없다. ‘이 중생들이 원한에서 벗어나고, 고통에서 벗어나고, 위험에서 벗어나기를. 그들 스스로 돌보면서 행복하게 지내기를.’하고 성내지 않은 마음을 품는다.

그는 바른 견해를 가진다. ‘보시란 있다. 제물이 있다. 공양이란 있다. 선행과 악행의 업들에 대한 열매도 있고 과보도 있다. 이 세상도 있다. 저 세상도 있다. 어머니도 있다. 아버지도 있다. 화생하는 중생도 있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철저히 알았고, 겪어 알아 그것을 알려주는 바르게 행하고, 바르게 들어간, 사문과 바라문이 세상에는 있다.’라고 바른 견해를 가진다.

쭌다여, 이것이 마음으로 짓는 세 가지 청정함이다.”


쭌다여, 이것이 열 가지 선한 업의 길이다.

쭌다여, 이러한 열 가지 선한 업의 길을 갖춘 자는 적당한 시간에 침상에서 일어나 땅을 만지더라도 청정하며, 땅을 만지지 않더라도 청정하다. 젖은 소똥을 만지더라도 청정하며, 젖은 소똥을 만지지 않더라도 청정하다. 푸른 풀을 만지더라도 청정하며, 푸른 풀을 만지지 않더라도 청정하다. 불을 숭배하더라도 청정하며, 불을 숭배하지 않더라도 청정하다. 합장하고 태양에 예배하더라도 청정하며, 합장하고 태양에 예배하지 않더라도 청정하다. 밤의 삼경에 물에 들어가더라도 청정하며, 밤의 삼경에 물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청정하다.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이러한 열 가지 선한 업의 길 자체가 청정하고, 또 청정함을 만들기 때문이다. 쭌다여, 이러한 열 가지 유익한 업의 길을 갖춤으로써 천상이 알려졌으며, 인간이 알려졌으며, 여러 좋은 곳[善處]들이 알려진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자 대장장이의 아들 쭌다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경이롭습니다, 세존이시여. 경탄할만 합니다, 세존이시여.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혹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듯이, 아니면 길을 잃고 헤메던사람에게 길을 가르켜 주시듯, 또는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 세존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주셨습니다. 

저는 이제 세존께 귀의하옵니다.

또한 그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또한 그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에 귀의합니다. 

세존께서는 저를 재가신자로 받아주소서. 오늘부터 목숨이 붙어 있는 그날까지 귀의하옵니다.”

 

jāṇussoṇisuttaṃ (AN 10.177-자눗소니 경)
177. 그 무렵 자눗소니 바라문이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과 함께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서로 안부 인사와 우호적인 대화를 나눈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자눗소니 바라문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고따마 존자시여, 우리 바라문들은 보시를 하고 ‘이 보시가 친지와 혈육인 죽은 이들에게(조상들께) 도달하기를. 이 보시를 친지와 혈육인 죽은 이들이 사용하기를.’이라고 조상제사를 지냅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런데 이 보시가 친지와 혈육인 죽은 이들에게 도달합니까? 이 보시를 친지와 혈육인 죽은 이들이 사용합니까(즐깁니까)?”
“바라문이여, 적절한 곳에서는 도달하지만, 적절하지 않은 곳에서는 도달하지 않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어디가 적절한 곳이고 어디가 적절하지 않은 곳입니까?”

 

“여기, 바라문이여, 어떤 자는 생명을 해치고, 주지 않은 것을 가지고, 음행에 대해 삿되게 행하고, 거짓말을 하고, 이간하는 말을 하고, 거친 말을 하고, 꾸며대는 말을 하고, 간탐하고, 마음이 성냄으로 가득 차있고, 삿된 견해를 가졌습니다. 그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지옥에 태어납니다. 지옥 중생들을 위한 어떤 음식이 있는데, 그것으로 그는 거기서 생명을 유지하고, 그것으로 그는 거기에 머뭅니다. 바라문이여, 이것이 적절하지 않은 곳이니 거기에 머무는 자에게는 그 보시가 도달하지 않습니다.

 

다시, 바라문이여, 여기 어떤 자는 생명을 해치고 ··· 삿된 견해를 가졌습니다. 그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축생의 모태에 태어납니다. 축생의 모태에 속하는 중생들을 위한 어떤 음식이 있는데, 그것으로 그는 거기서 유지하고, 그것으로 그는 거기에 머뭅니다. 바라문이여, 이것이 적절하지 않은 곳이니 거기에 머무는 자에게는 그 보시가 도달하지 않습니다. 

 

다시, 바라문이여, 여기 어떤 자는 생명을 해치는 행위를 멀리 여의고,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행위를 멀리 여의고, 음행에 대한 삿된 행위를 멀리 여의고, 거짓을 말하는 행위를 멀리 여의고, 이간하는 말을 멀리 여의고, 거친 말을 멀리 여의고, 꾸며대는 말을 멀리 여의고, 간탐하지 않고, 마음에 성냄이 없고, 바른 견해를 가졌습니다. 그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인간의 동료로 태어납니다. 인간을 위한 어떤 음식이 있는데, 그것으로 그는 거기서 유지하고, 그것으로 그는 거기에 머뭅니다. 바라문이여, 이것이 적절하지 않은 곳이니 거기에 머무는 자에게는 그 보시가 도달하지 않습니다.   

다시, 바라문이여, 여기 어떤 자는 생명을 해치는 것을 멀리 여의고 ··· 바른 견해를 가졌습니다. 그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신들의 동료로 태어납니다. 신들을 위한 어떤 음식이 있는데, 그것으로 그는 거기서 유지하고, 그것으로 그는 거기에 머뭅니다. 바라문이여, 이것이 적절하지 않은 곳이니 거기에 머무는 자에게는 그 보시가 도달하지 않습니다.  

 

다시, 바라문이여, 여기 어떤 자는 생명을 해치고 ··· 된 견해를 가졌습니다. 그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아귀계에 태어납니다. 아귀계의 중생들을 위한 어떤 음식이 있는데, 그것으로 그는 거기서 생명을 유지하고, 그곳으로 그는 거기에 머뭅니다. 혹은 친구나 동료나 친지나 혈육들이 여기서 보시를 베풀어 공급해 주는 어떤 것이 있는데, 그것으로 그는 거기서 생명을 유지하고, 그것으로 그는 거기에 머뭅니다. 바라문이여, 이것이 적절한 곳이니 거기에 머무는 자에게는 그 보시가 도달합니다.

 

"만약, 고따마 존자시여, 그 친지와 혈육인 죽은 이가 거기에 태어나지 않으면 누가 그 보시를 사용합니까?”

“바라문이여, 그 적절한 곳에 태어난 다른 친지와 혈육인 죽은 이들이 그 보시를 사용합니다.”

“만약, 고따마 존자시여, 그 친지와 혈육인 죽은 이가 그곳에 태어나지 않고, 또 다른 친지와 혈육인 죽은 이들도 그곳에 태어나지 않으면 누가 그 보시를 사용합니까?”

“바라문이여, 이 기나긴 삶의 여정에서 그의 친지와 혈육인 죽은 이들이 없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바라문이여, 보시한 사람에게 결실이 없는 경우는 없습니다.”

 

“고따마 존자께서는 적절하지 않은 곳에 대해서도 생각을 말합니까?”
“바라문이여, 적절하지 않은 곳에 대해서도 나는 생각을 말합니다. 여기,
바라문이여, 어떤 자는 생명을 해치고, 주지 않은 것을 가지고, 음행에 대해서 삿되게 행하고, 거짓을 말하고, 이간하는 말을 하고, 거친 말을 하고, 꾸며대는 말을 하고, 간탐하고, 마음이 성냄으로 가득 차있고, 삿된 견해를 가졌습니다. 그는 사문이나 바라문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과 탈 것과 화환과 향수와 연고와 좋은 거처와 불 밝힐 것을 보시한 자입니다. 그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코끼리들의 동료로 태어납니다. 그는 거기서 먹을 것과 마실 것과 화환과 다른 장신구를 얻습니다.

 

바라문이여, 이 세상에서 생명을 해치고, 주지 않은 것을 가지고, 음행에 대해서 삿되게 행하고, 거짓을 말하고, 이간하는 말을 하고, 거친 말을 하고, 꾸며대는(잡담) 말을 하고, 간탐하고, 마음이 성냄으로 가득 차있고, 삿된 견해를 가졌기 때문에 그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코끼리들의 동료로 태어났니다. 그러나 그가 사문이나 바라문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과 탈 것과 화환과 향수와 연고와 좋은 거처와 불 밝힐 것을 보시했기 때문에 그는 거기서 먹을 것과 마실 것과 화환과 다른 장신구를 얻습니다.

 

바라문이여, 여기 어떤 자는 생명을 해치고 ··· 견해를 가졌습니다. 그는 사문이나 바라문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과 탈 것과 화환과 향수와 연고와 좋은 거처와 불 밝힐 것을 보시한 자입니다. 그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말들의 동료로 태어납니다. ··· 소들의 동료로 태어납니다. ··· 개들의 동료로 태어납니다. 그는 거기서 먹을 것과 마실 것과 화환과 다른 장신구를 얻습니다.

 

바라문이여, 이 세상에서 생명을 해치고 ··· 삿된 견해를 가졌기 때문에 그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개들의 동료로 태어납니다. 그러나 그가 사문이나 바라문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과 탈 것과 화환과 향수와 연고와 좋은 거처와 불 밝힐 것을 보시했기 때문에 그는 거기서 먹을 것과 마실 것과 화환과 다른 장신구를 얻습니다.

 

다시, 바라문이여, 여기 어떤 자는 생명을 해치는 행위를 멀리 여의고 ··· 바른 견해를 가졌습니다. 그는 사문이나 바라문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과 탈 것과 화환과 향수와 연고와 좋은 거처와 불 밝힐 것을 보시한 자입니다. 그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인간들의 동료로 태어납니다. 그는 거기서 인간에 속하는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에 묶인 것들을 얻습니다.

 

바라문이여, 이 세상에서 그가 생명을 해치는 행위를 멀리 여의고 ··· 바른 견해를 가졌기 때문에 그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인간들의 동료로 태어납니다. 그리고 그가 사문이나 바라문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과 탈 것과 화환과 향수와 연고와 좋은 거처와 불 밝힐 것을 보시했기 때문에 그는 거기서 인간에 속하는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들에 묶인 것들을 얻습니다.

 

다시 바라문이여, 여기 어떤 자는 생명을 해치는 행위를 멀리 여의고 ··· 바른 견해를 가졌습니다. 그는 사문이나 바라문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과 탈 것과 화환과 향수와 연고와 좋은 거처와 불 밝힐 것을 보시한 자입니다. 그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신들의 동료로 태어납니다. 그는 거기서 신들에 속하는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들에 묶인 것들을 얻습니다.

 

바라문이여, 이 세상에서 그는 생명을 죽이는 행위를 멀리 여의고 ··· 바른 견해를 가졌기 때문에 그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신들의 동료로 태어납니다. 그리고 그가 사문이나 바라문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과 탈 것과 화환과 향수와 연고와 좋은 거처와 불 밝힐 것을 보시했기 때문에 그는 거기서 신들에 속하는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들에 묶인 것들을 얻습니다.

그래서 바라문이여, 보시한 사람에게 결실이 없는 경우는 없습니다."

 

“경이롭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참으로 놀랍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고따마 존자시여, 보시를 하는 것은 적절하고 조상제사를 행하는 것도 적절합니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도 보시자에게는 결실이 없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라문이여, 참으로 그렇습니다. 바라문이여, 참으로 보시한 사람에게 결실이 없는 경우는 없습니다.”

 

“경이롭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경탄할만 합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시듯, 혹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듯이, 아니면 길을 잃고 헤매던 사람에게 길을 가르켜 주시듯,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 고따마 존자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주셨습니다.

저는 이제 고따마 존자께 귀의하옵니다.

또한 그 가르침에 귀의하옵니다.

또한 그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에 귀의하옵니다.

고따마 존자께서는 저를 재가신자로 받아주소서. 오늘부터 목숨이 붙어 있는 그날까지 귀의하옵니다.”

 

 


제17장 자눗소니 품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