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논문·평론

재가자를 위한 교서 - 마성스님/팔리문헌연구소 소장

실론섬 2015. 3. 22. 01:11

연재를 시작하면서

마성 스님/ 팔리문헌연구소 소장 

 

붓다는 언제나 상대편의 근기에 따라 법을 설했다. 즉 청취자의 능력과 수준에 따라 각기 다르게 법을 설했다. 이러한 붓다의 설법태도를 대기설법(對機說法) 혹은 응병여약(應病與藥)이라고 한다. 이 대기설법에 따르면 붓다의 교설은 크게 출가자를 위한 교설과 재가자를 위한 교설로 구분된다.


그런데 대승불교권에서는 출가와 재가의 구별 없이 천편일률적으로 법을 설한다. 대승불교 자체가 출가와 재가의 엄격한 차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대승불교는 원래 재가자를 중심으로 일어난 새로운 불교운동이었기 때문에 출가와 재가를 구분한다는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중에는 출가보살과 재가보살의 역할이 분명해지면서 구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편 초기불교에서는 처음부터 출가자를 위한 교설과 재가자를 위한 교설이 엄격히 구분되어 있었다. 이를테면 출가자가 지켜야 할 계율과 재가자가 지켜야 할 계율이 완전히 다르게 제시되었고, 그 실천 수행법도 완전히 구분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이치를 알지 못하고, 간혹 스님들의 법문 중에는 재가자들이 현실적으로 전혀 수용할 수 없는 것들을 강요하는 경우를 흔히 목격하게 된다. 이러한 법문은 신심을 불어넣어 주기보다는 오히려 불교를 외면하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사실 출가자와 재가자는 그 삶의 방식이 전혀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법문의 내용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점을 간과한 법문은 공허한 뜬구름 잡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이를테면 출가자는 삼의일발(三衣一鉢)에 의한 무소유(無所有)의 삶이 미덕이다. 반면 재가자는 보다 많은 재화(財貨)를 획득해야만 생활의 안정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가자에게 무소유의 삶을 강요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닐 수 없다. 간혹 재가자 중에서는 이러한 법문을 듣고 재물을 획득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위배되지나 않을까 염려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것은 출가자에게 해당되는 교설을 재가자에게 가르쳤기 때문이다. 초기경전에 의하면 붓다께서는 출가자가 아닌 재가자에게는 정당한 방법에 의해 열심히 노력하여 보다 많은 재화를 획득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왜냐하면 재물은 자신의 삶은 물론 타인에게도 안락을 줄 수 있고, 또 나머지 여력으로 성자와 출가자에게 공양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초기경전에는 재가자를 위한 교설이 많이 담겨져 있지 않다. 붓다께서 재가자를 위한 가르침을 펴지 않았기 때문에 경전에 수록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붓다는 오히려 출가자보다 재가자를 위해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법을 설했을 것이다. 그러면 초기경전에 재가자를 위한 교설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은 까닭은 무엇인가?


이것은 경전 성립과 깊은 관련이 있다. 역사적으로 붓다의 가르침은 처음부터 문자로 기록된 것이 아니었다. 붓다의 말씀은 제1회 결집 이후 스님들의 암송에 의해 구전(口傳)되어 오다가 기원전 1세기에 비로소 문자로 기록되었다. 이와 같이 붓다의 말씀이 구전되는 동안 출자자들은 자신들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재가자를 위한 교설을 굳이 암송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재가자를 위한 교설이 무시되어 전승되지 않았을 뿐이다.


그 증거로 현재 초기경전에 남아있는 재가자를 위한 교설들은 대부분 출가자와 재가자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거나, 출가자에게 먼저 법을 설하고, 이어서 재가자에게 설법한 것들이 남아 있다. 간혹 재가자만을 위한 아주 특별한 경우도 남아 않지만 초기경전에서 재가자를 위한 교설은 현재 많이 남아있지 않다. 그 이유는 바로 스님들의 구전에 의해 전승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에 의해 비록 초기경전에 재가자를 위한 교설이 많이 남아 있지 않지만, 우리는 현존하는 초기경전을 통해 붓다께서 재가자에게 무엇을 가르치려고 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것은 오로지 재가자들의 신앙생활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다.


이 연재물은 초기경전 가운데 붓다께서 특별히 재가자를 위해 설한 팔리 경전과 한역 아함에서 그 내용을 발췌하여 소개하고, 필자 나름대로의 해석을 덧붙일 것이다. 특히 필자는 그 경전이 설해진 배경과 문헌적 가치에 대해서도 가능한 언급할 생각이다. 그래야만 비로소 붓다께서 그 법문을 설한 본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재가자가 얻기 원하는 네 가지 조건

  

한때 아나타삔디까(An?thapindika) 거사가 세존께 찾아와 예배드리고 한쪽에 앉았다. 그때 세존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가장(家長)이여, 세상에서 얻는 것이 바람직하고 소중하며 즐겁고도 어려운, 실현해야 할 네 가지 조건이 있다. 이 네 가지는 무엇이겠는가?

적법한 수단으로 재산이 나에게 오기를! 이것이 (실현해야 할) 첫 번째 조건이다.

적법한 수단으로 얻은 재산이 있고, 좋은 평판이 친척 및 스승들과 더불어 나에게 오기를! 이것이 … 두 번째 조건이다.

적법한 수단으로 얻은 재산이 있고, 친척 및 스승들과 더불어 좋은 평판을 얻으면, 장수하고 먼 과거에 이르기를! 이것이 … 세 번째 조건이다.

재산을 얻고 … 좋은 평판이 … 그리고 장수한 후, 육신이 스러지면, 저 세상에서 행복한 목적지, 하늘세계에 이르기를! 이것이 … 네 번째 조건이다.

가장이여, 이러한 것들이 세상에서 얻는 것이 바람직하고 소중하며 즐겁고도 어려운, 실현해야 할 네 가지 조건이다. 

 

위 내용은 앙굿따라 니까야(Anguttara Nik?ya Ⅱ, p. 66)에 실려 있다. 이 경전의 이름은 빳따깜마 숫따(Pattakamma sutta)인데, 이에 대응하는 한역은 발견되지 않는다. 영어로는 ‘네 가지 행위의 공덕(Four deeds of merit)’이라고 번역되었다. 재가자가 갖추어야 할 네 가지 조건들을 언급한 것 가운데 하나이다. 이 경전의 팔리어 원문에는 경전을 설한 장소가 명기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전후 사정으로 미루어 붓다께서 사왓티 근처의 아나타삔디까의 동산인 제따(Jeta) 숲에 머물고 계실 때인 듯하다. 이 경전은 아나타삔디까(給孤獨長者)에게 설한 법문이다. 붓다는 그를 가하빠띠(gahapati)라고 불렀다. 팔리어 가하빠띠는 영어로 하우스파더(housefather)라고 번역되는데, 우리말로는 가장(家長) 혹은 거사(居士)라는 뜻이다. 


이 경전에 의하면, 한 개인의 네 가지 주요한 바람 가운데 하나는 “적법한 수단으로 재산이 나에게 오기를!” 원하는 것이다. 모두 부유하고 풍요로운 사람이 되길 원한다. 붓다는 이 타고난 인간의 본성을 잘 알고 있었다. 붓다에 의하면, 이것이 얻는 것이 바람직하고 소중하며 즐겁고도 어려운 것이다. 한 개인이 부유하고 풍요해지고 나면, 그는 자신의 친척들과 스승들에게 널리 알려지고 장수하기를 원한다. 이러한 세 가지 조건만으로는 재생을 믿는 한 개인의 삶을 행복하고 성공적이며 완전하게 만들지 못한다. 재산, 좋은 평판과 장수의 성취와 함께 그는 육신이 스러지면, 저 세상에서 행복한 목적지, 하늘세계[天界]에 이르기를 바란다.


이 설명에 따르면, 경제적 여건은 완전하고 만족스런 삶의 가장 근본적이고 중차대한 요소이다. 경제적 여건이 튼튼하고 안정되지 못하면, 그 개인은 어떤 희망도 없는 비참한 신세가 된다. 자신의 모든 희망과 전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그의 재산이다. 평판, 장수 및 사후의 행복한 목적지는 재산의 결과로써 생기는 조건이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이 얻기는 어렵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얻기 바라는 네 가지 조건은 재산, 좋은 평판, 장수, 생천(生天)이다. 이 네 가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재산이다. 특히 재가자는 재산이 있어야 그 다음 단계, 즉 평판, 장수, 생천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붓다는 인간사회에서 재산이 차지하는 두드러진 역할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붓다는 재가자들에게 재산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것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아나타삔디까는 붓다 당시 최고의 재력가였다. 그는 최초의 불교 사찰인 기원정사(祇園精舍)를 지어 승단에 기증했던 사람이다. 오늘날의 재벌 총수와 같은 사람이다. 이러한 재벌 총수에게 붓다는 재산의 효용성을 강조하는 법문을 설했다. 이 점에 우리는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흔히 불교도는 무소유의 청빈(淸貧)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덕목은 출가자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따라서 출가자에게 요구되는 무소유의 삶을 재가자에게 강요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붓다는 가난을 찬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계의 중요성

  

붓다께서 입멸 삼 개월 전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가하를 출발하여 암바라티까와 나란다를 거쳐 빠딸리가마(P?talig?ma)에 도착하여 잠시 머물고 있을 때였다. 그때 빠딸리 마을 사람들은 붓다께서 자신들의 마을을 방문해 주신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진심으로 환영했다. 세존께서는 빠딸리 마을의 공회당으로 자리를 옮겨 그 마을의 재가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거사들이여, 계율을 지키지 않고 어긴 자는 다섯 가지 환란이 있다. 다섯 가지란 무엇이겠는가? 

①③거사들이여, 계율을 지키지 않고 어긴 자는 게으름 때문에 커다란 재산의 손실을 겪게 된다. 이것이 계율을 지키지 않고 어긴 자에게 생기는 첫 번째 환란이다. 

②거사들이여, 또한 계율을 지키지 않고 어긴 자는 나쁜 소문이 퍼진다. 이것이 계율을 지키지 않고 어긴 자에게 생기는 두 번째 환란이다. 

③거사들이여, 또한 계율을 지키지 않고 어긴 자는 귀족의 모임, 바라문의 모임, 거사의 모임, 사문의 모임 등 어떤 모임에 가더라도 자신감이 없고 주저하게 된다. 이것이 계율을 지키지 않고 어긴 자에게 생기는 세 번째 환란이다. 

④거사들이여, 또한 계율을 지키지 않고 어긴 자는 혼란스러운 죽음을 맞이한다. 이것이 계율을 지키지 않고 어긴 자에게 생기는 네 번째 환란이다. 

⑤거사들이여, 또한 계율을 지키지 않고 어긴 자는 몸이 부서져 죽은 뒤에 나쁜 곳[惡趣] 혹은 지옥에 태어난다. 이것이 계율을 지키지 않고 어긴 자에게 생기는 다섯 번째 환란이다. 

거사들이여, 계율을 지키지 않고 어긴 자에게는 이러한 다섯 가지 환란이 있다.


거사들이여, 계율을 지키고 실천하는 자는 다섯 가지 공덕이 있다. 다섯 가지란 무엇이겠는가? 

①거사들이여, 계율을 지키고 실천하는 자는 게으르지 않기 때문에 재산을 많이 얻게 된다. 이것이 계율을 지키고 실천하는 자에게 생기는 첫 번째 공덕이다. 

②거사들이여, 또한 계율을 지키고 실천하는 자는 좋은 평판을 얻게 된다. 이것이 계율을 지키고 실천하는 자에게 생기는 두 번째 공덕이다. 

③거사들이여, 또한 계율을 지키고 실천하는 자는 귀족의 모임, 바라문의 모임, 거사의 모임, 사문의 모임 등 어떤 모임에 가더라고 자신감이 있고 떳떳하게 된다. 이것이 계율을 지키고 실천하는 자에게 생기는 세 번째 공덕이다. 

④거사들이여, 또한 계율을 지키고 실천하는 자는 평온한 죽음을 맞이한다. 이것이 계율을 지키고 실천하는 자에게 생기는 네 번째 공덕이다. 

⑤거사들이여, 또한 계율을 지키고 실천하는 자는 몸이 부서져 죽은 뒤, 좋은 곳[善趣], 또는 하늘세계[天界]에 태어난다. 이것이 계율을 지키고 실천하는 자에게 생기는 다섯 번째 공덕이다. 

거사들이여, 계율을 지키고 실천하는 자에게는 이러한 다섯 가지 공덕이 있다.” 


이 법문은 재가자가 지켜야 할 계율을 지키지 않는 자와 계율을 지키는 자를 비교 설명한 것이다. 즉 계율을 지키지 않는 자는 다섯 가지 환란 혹은 재난을 만나지만, 반대로 계율을 지키는 자는 다섯 가지 이익 혹은 공덕을 얻는다는 내용이다. 다섯 가지 환란은 재산의 손실, 나쁜 소문, 주저함, 혼란스러운 죽음, 죽어서 나쁜 곳에 태어난다는 것이고, 반대로 다섯 가지 공덕은 재산의 획득, 좋은 평판, 떳떳함, 평온한 죽음, 죽어서 좋은 곳에 태어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붓다께서 재가자의 삶에 있어서 지계의 중요성을 강조한 법문이다. 이 법문은 너무나 지당하신 말씀이다. 그래서 오히려 평범한 이야기로 들린다. 그러나 실제로 재가자들에게 이 보다 더 중요한 가르침은 없다.


이 법문은 팔리어『대반열반경』과『율장』「대품」및『우다나(Ud?na, 自說經)』등 세 곳에 똑같은 내용이 설해져 있다. 그런데 한역『유행경(遊行經)』에서는 죽음을 맞이하는 상태에 관한 부분은 빠져 있다. 그 대신 첫째 부분을 둘로 구분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첫째,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재물을 구하나 뜻대로 되지 않지만, 반대로 계율을 지키면 모든 것을 뜻대로 구할 수 있다. 둘째, 파계자는 비록 재산이 있더라고 점점 없어지지만, 지계자는 자신이 가진 재산이 더욱 불어 손해되는 일이 없다. 이 법문에 의하면, 이 세상에서 행복한 삶을 누리고, 내세에 좋은 곳에 태어나고자 한다면 반드시 계율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재가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 네 가지


붓다께서 아나타삔디까(Anathapindika, 給孤獨) 장자에게 다음과 같이 설했다.


“거사여, 세상에서 얻는 것이 바람직하고 소중하며 즐겁고도 어려운, 실현해야 할 네 가지 조건이 있다. 네 가지란 무엇인가? 믿음의 완성, 계율의 완성, 베풂의 완성, 지혜의 완성이다.


거사여, 그러면 믿음의 완성이란 무엇인가? 여기 성스러운 제자는 믿음에 대한 확신을 가진다. 그는 ‘세존께서는 아라한이시며, 완전히 깨달으신 분이시며, 지혜와 실천이 구족하신 분이시며, … 하늘과 인간의 스승이시며, 깨달으신 분, 세존이시다’라고 여래의 깨달음을 믿는다. 거사여, 이것을 믿음의 완성이라고 부른다.

그러면 계율의 완성이란 무엇인가? 여기 성스러운 제자는 살생을 삼가고, … 게으름의 원인이 되는 발효되거나 증류된 술을 삼간다. 이것을 계율의 완성이라고 부른다.

그러면 베풂의 완성이란 무엇인가? 여기 성스러운 제자는 인색함의 때[?垢]로부터 벗어난 마음으로 집에서 산다. 그는 인색하지 않고 순수하게 베풀며, 자기를 포기하고, 구걸에 응하며, 자비로운 보시물을 나누어 주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거사여, 이것이 버림의 완성이다.

그러면 지혜의 완성이란 무엇인가? 지나친 탐심으로 그릇된 욕망에 사로잡힌 마음을 지니고 살며, 해서는 안 될 일을 행하는 가장은 해야 될 일을 하지 못한다. 그렇게 행하고, 그렇게 행하지 못하면서, 그는 좋은 평판과 행복에서 떨어진다. 악의에 … 나태와 무기력에 … 산만함과 낭패감에 … 의심과 주저에 사로잡힌 마음을 지니고 살므로, 그는 해서는 안 될 일을 행하고, 해야 될 일은 하지 못한다. 그렇게 행하고, 그렇게 행하지 못하면서, 그는 좋은 평판과 행복에서 떨어진다. 


위 내용은 재가자의 신행체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네 가지 덕목이다. 이른바 믿음의 완전한 갖춤(saddh?-sampad?, 信具足), 계율의 완전한 갖춤(sala-sampad?, 戒具足), 베풂의 완전한 갖춤(c?ga-sampad?, 捨具足), 지혜의 완전한 갖춤(pa???-sampad?, 慧具足)인 것이다.


첫째, 믿음의 완전한 갖춤이란 신앙의 대상인 불, 법, 승 삼보를 확실히 믿는 것을 말한다. 위 경전에서는 오직 붓다에 관한 부분만 언급되어 있지만, 나머지 법과 승에 관한 것은 생략된 것이다. 다른 경전에서 붓다는 재가 신자가 되려면 불, 법, 승 삼보에 귀의해야 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재가자가 갖추어야 할 첫 번째 조건인 믿음의 완전한 갖춤인 것이다.


둘째, 계율의 완전한 갖춤이란 재가자가 지켜야 할 계율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 재가자가 지켜야 할 계율은 오계(五戒)와 팔재계(八齋戒)이다. 오계는 재가자가 평소에 지켜야 할 최소한의 계율이고, 팔재계는 재가자가 특정월과 특정일, 즉 삼장(三長)과 육재일(六齋日)에 지키는 계율이다. 붓다는 출가자가 아닌 재가자는 일생동안 지계 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에 특정월과 특정일만이라도 팔재계를 지키며 수행하기를 권했다. 이것이 재가자가 갖추어야 할 두 번째 조건인 계율의 완전한 갖춤인 것이다.


셋째, 베풂의 완전한 구족이란 인색하지 말고 남에게 조건 없이 베푸는 것을 말한다. 이 베풂의 완전한 구족을 시구족(施具足)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그런데 팔리어 짜가-삼빠다(c?ga-sampad?)는 사구족(捨具足)으로 번역하는 것이 원래의 뜻에 가깝다. 사구족은 베풂뿐만 아니라 마음속의 인색함까지 벗어버린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사구족은 시구족보다 넓은 의미를 갖고 있다. 이것이 재가자가 갖추어야 할 세 번째 조건인 베풂의 완전한 갖춤인 것이다.


넷째, 지혜의 완전한 갖춤이란 사제(四諦)에 대하여 확신을 갖는 것을 말한다. 이른바 ‘이것은 괴로움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원인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사라짐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사라지는 길이다’라고 바르게 아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재가자가 갖추어야 할 네 번째 조건인 지혜의 완전한 갖춤인 것이다.


한역 잡아함경에서는 이 네 가지 외에 들음의 완전한 갖춤(suta-sampad?, 聞具足)을 추가하기도 하였다. 이 법문은 초기경전 여러 곳에 설해져 있다. 그 설명 방식은 약간 다르지만 재가자가 갖추어야 할 네 가지 조건으로 제시된 것이다. 이것은 재가자의 신앙 체계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가르침이다.

  

눈먼 사람(盲人)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세 유형의 사람들이 있다. 무엇이 세 유형의 사람인가? 눈먼 이, 외눈 가진 이, 두 눈 가진 이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눈 먼 이는 어떤 인물인가?

이 경우 어떤 사람은 얻지 못한 재물을 획득하거나, 자신이 갖고 있는 재물을 증식하도록 해 줄 눈을 갖추지 않았다. 그는 선과 악, 비난받을 만한 일과 칭찬받을 만한 일, 비천함과 고귀함, 밝음과 어둠이라는 상태를 보기에 적합한 눈도 가지고 있지 않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사람을 ‘눈먼 이’라고 부른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외눈 가진 이는 어떤 인물인가?

이 경우에는 어떤 사람이 재물을 획득하기 위한 눈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선과 악이라는 상태를 분별할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러한 사람을 ‘외눈 가진 이’라고 부른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두 눈 가진 이는 어떤 인물인가?

이 경우에는 어떤 사람이 얻지 못한 재물을 획득할 수 있는 눈과 자신이 갖고 있는 재물을 증식할 수 있는 눈은 물론 선과 악, 비난받을 만한 일과 칭찬받을 만한 일, 비천함과 고귀함, 빛과 어둠이라는 상태를 분별할 수 있는 두 눈 모두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람을 ‘두 눈 가진 이’라고 부른다. 이 세상에는 세 유형의 사람이 있다. 

 

시력을 빼앗긴, 눈먼 이는 재산도 없고

좋은 행실도 하지 않아 두루 불행하네.

그리고 다시, 옳고 그름을 함께 지닌 외눈 가진

이는 속임수와 기만과 거짓말로 재산을

추구한다고 말해지네. 그는 속되고 돈 자랑하며

재산을 얻는 데 영리해서 세상을 떠나면

지옥에서 괴로워하는 상처일 것이네.

하지만 최고는 두 눈 가진 이라네.

올바르게 얻은 올바른 노력발휘의 재산을

그는 베푼다네. 망설임 없이 최대의 선의로서.

그는 슬픔도 없는 축복받은 가정에서 태어나

눈먼 이와 외눈 가진 이로부터 초연하니

가치 있는 두 눈 가진 이가 된다네.” 

 

위 내용은 앙굿따라 니까야(Anguttara Nikaya, 增支部)의 안다 숫따(Andha sutta, 盲人經)의 전문이다. 이 경전은 언제 어디에서 누구에게 설한 것인지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전후 문맥상 붓다께서 사왓티의 기수급고독원에서 설한 것으로 보인다. 이 경전은 비구들에서 설한 것이지만, 실제 내용은 재가자를 위한 가르침이다.


이 경전을 분석해 보면, 세상에는 세 가지 유형의 사람이 있다. 즉 눈먼 사람(andha), 외눈 가진 사람(ekacakkhu), 두 눈 가진 사람(dvicakkhu)이다. 첫째, 눈먼 사람이란 재산을 모을 줄도 모르고, 선과 악 등을 분별할 줄도 모르는 사람을 말한다. 이를테면 자기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바보 같은 사람이 이에 해당된다. 둘째, 외눈 가진 사람이란 재산을 모을 줄은 알지만, 윤리도덕과 사리를 분별할 줄 모르는 사람을 말한다. 이를테면 오직 돈밖에 모르는 수전노(守錢奴)가 이에 해당된다. 셋째, 두 눈 가진 사람이란 부유한 재산가이면서 높은 도덕적 품격을 소유한 사람을 말한다. 가장 이상적인 인물은 두 눈 가진 이임은 말할 나위없다.


이 경전에 의하면, 비록 선과 악은 보지만 부유하지 않은 사람은 성공적인 삶을 살 수가 없다. 그리고 재산을 갖지 않은 사람은 진정으로 덕이 있는 사람이 될 수 없음도 암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할 재산마저 없으면, 그 밖의 다른 일을 전혀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부유한 사람이 덕이 높은 사람이 되는 것이 훨씬 더 용이하다. 이 경전에 따르면 재산과 덕은 손을 맞잡고 간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재가자의 이상은 재산과 덕 두 가지를 함께 갖춘 두 눈 가진 이가 되어야 할 것이다.

 


담미까경(Dhammika sutta)

 

393. 다음은 재가자가 해야 할 일을 말하리라. 이와 같이 실행하는 사람은 좋은 가르침을 듣는 사람이다. 순수한 출가 수행자에 대한 규정을, 소유의 번거로움이 있는 사람이 지키기는 어려울 것이다.

394. 산 것을 몸소 죽여서는 안된다. 또 남을 시켜 죽여서도 안된다. 그리고 죽이는 것을 보고 묵인해도 안된다. 난폭한 짓을 두려워하는 모든 생물에 대해서 폭력을 거두어야 한다.

395. 그리고 가르침을 받는 사람은 주지 않는 것을 무엇이든지 또 어디에 있든지 그것을 갖지 말라. 남을 시켜 가지거나 남이 가지는 것을 묵인하지도 말라. 주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지 가져서는 안된다.

396. 슬기로운 사람은 음행(淫行)을 회피하라. 타오르는 불구덩이를 피하듯. 만일 불음(不淫)을 닦을 수가 없더라도, 남의 아내를 범해서는 안된다.

397. 집회의 장소에 있든 단체에 있든지 간에, 누구도 남에게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 남에게 거짓말을 시켜도 안된다. 또 남이 거짓말 하는 것을 묵인해도 안된다. 모든 허망한 말을 하지 말라.

398. 또 술을 마셔서도 안된다. 이 불음주의 가르침을 기뻐하는 재가자는 남에게 술을 마시게 해도 안된다. 남이 술 마시는 것을 묵인해도 안된다. 이것은 마침내 사람을 취하게 하고 미치게 하는 것임을 알라.

399.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들은 취함으로써 나쁜 짓을 하고, 또한 남들로 하여금 게으르게 하고 나쁜 짓을 하게 한다. 이 불행의 원인을 회피하라. 그것은 사람을 취하게 하고 미치게 하며 어둡게 하는 것인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를 즐기는 것이다.

400. 첫째, 살아 있는 것을 해치지 말라. 둘째, 주지 않는 것을 가지지 말라. 셋째, 거짓말을 하지 말라. 넷째, 술을 마시지 말라. 다섯째, 부정한 짓인 음행을 떠나라. 여섯째, 밤에는 음식을 먹지 말라.

401. 일곱째, 꽃타래를 걸치지 말고, 향수를 쓰지 말라. 여덟째, 땅 위에 펼친 자리 위에서만 자라. 이것이야말로 여덟 부분으로 된 재계(齋戒)이다. 고뇌를 없애버린 부처가 가르친 바이니라.

402. 그리고 각각 보름 동안 제8일, 제14일, 제15일에 우포사타(Uposatha, 布薩)를 행하라. 또 특별한 달에는 여덟 부분으로 된 원만한 재계를 청정한 마음으로 행하라.

403. 재계를 행한 식자(識者)는 청정하게 가라앉은 마음으로 기뻐하면서, 이튿날 아침 일찍 수행자에게 음식을 베풀어주어라.

404. 법답게 얻는 재물을 가지고 부모를 섬기라. 떳떳한 장사를 하라. 이와 같이 열심히 살고 있는 재가자는 죽은 후 ‘저절로 빛이 난다’는 신들 곁에 태어나리라. 

 

위 내용은 가장 초기경전으로 알려져 있는 숫따니빠따(Suttanipata, 經集)의 쭐라박가(Colavagga, 小品)의 열네 번째 경전인 담미까경(Dhammika sutta, 曇彌迦經)의 일부이다. 숫따니빠따는 출가자를 위한 가르침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이 담미까경에서만은 재가자를 위한 지침이 설해져 있다. 

이 경전은 담미까라는 재가자가 다른 500명의 신도들과 함께 붓다를 찾아뵙고, “가르침을 받으려는 사람은 출가하는 것과 집에서 믿는 것과 어느 쪽이 더 좋겠습니까?”라고 붓다께 여쭈었다. 이에 대해 붓다께서 설한 것이기 때문에 재가자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가르침 가운데 하나이다.


붓다는 먼저 출가자에게 법을 설하고, 이어서 재가자에게 법을 설하면서 먼저 재가자는 ‘비구의 법(bhikkhudhamma)’, 즉 출가 수행자가 지켜야 할 계율을 완전히 이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인정했다. 왜냐하면 출가자의 생활과 재가자의 삶이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가자는 재가자로서 지켜야 할 나름대로의 규율이 있는데, 이것을 잘 실행한다면 훌륭한 재가 불자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것이 바로 재가자가 지켜야 할 팔재계(八齋戒)인 것이다.


사실 재가 생활은 욕망의 세계에 살면서 수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욕망을 절제하고 청정이 한다고 하더라고 거기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재가 생활의 표준이 될 수 있는 규정을 정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길상경(吉祥經)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날 거룩한 스승은 사밧티의 제타숲, 고독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는 장자의 동산에 계셨다. 그때 용모가 단정한 한 신이 밤중이 지나 제타 숲을 두루 비추며 스승에게로 왔다. 그리고 예배한 후 한쪽에 서서 시로써 여쭈었다.

258. “많은 신과 사람들은 행복을 바라면서 행운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으뜸가는 행복을 말씀해 주십시오.”

259. “어리석은 사람들을 가까이하지 말고, 어진 이와 가깝게 지내며, 존경할만한 사람을 존경할 것,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다.

260. 자기 분수에 알맞은 곳에 살고, 일찍이 공덕을 쌓고, 스스로 바른 서원을 하고 있는 것,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다.

261. 지식과 기술과 훈련을 쌓고, 그 위에 변재가 뛰어난 것,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다.

262. 부모를 섬기는 것, 처자를 사랑하고 보호하는 것, 일에 질서가 있어 혼란하지 않는 것,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다.

263. 보시와 이치에 맞는 행위와 친족을 사랑하고 보호하는 것과, 비난을 받지 않는 행위,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다.

264. 악을 싫어해 멀리하고, 술을 절제하고, 덕행을 소홀히 하지 않는 것,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다.

265. 존경과 겸손과 만족과 감사와, 때로는 가르침을 듣는 것,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다.

266. 인내하는 것, 온순한 것, 수행자를 만나는 것, 때로는 이치에 대한 논의를 하는 것,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다.

267. 수양과 깨끗한 행위와 거룩한 진리를 보는 것, 열반의 경지를 실현하는 것,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다.

268. 세상일에 부딪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걱정과 티가 없이 안온한 것,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다.

269. 이러한 일을 한다면 어떠한 일이 닥쳐도 실패하지 않는다. 어느 곳에서나 행복할 수 있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더없는 행복이다.” 

 

위 내용은 숫따니빠따(Suttanipata, 經集)의 쭐라박가(Colavagga, 小品)의 네 번째 경전인 마하망갈라-숫따(Mahamangala-sutta, 吉祥經)의 전문이다. 여기에 인용한 내용은 법정스님이 번역한 것인데, 그는 이 경전의 이름을 ‘더없는 행복’이라고 옮겼다. 그러나 여기서는 원제인 [길상경]으로 바꾸었다.


초기경전인 장부(長部)의 [선생경(善生經)]과 소부(小部)의 [경집]속에 편찬되어 있는 [보경], [자경], [길상경], [패망경] 등은 재가자를 위한 대표적인 경전들이다. 그 중에서도 앞의 [보경], [자경], [길상경] 등 세 경전은 상좌불교에서 호주(護呪, paritta)로 널리 암송되고 있다.


상좌불교에서는 출가, 재가를 막론하고 모든 불교 의례에서 이 세 가지 경전을 반드시 암송한다. 마치 우리나라 불자들이 반야심경을 암송하는 것과 같다. 불교도라면 단 하루도 이 경전들을 암송하지 않는 날이 없다. 그만큼 많이 암송되는 중요한 경전들이다. 이 때문에 그 내용 또한 매우 잘 알려져 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여기에 소개한 [길상경]은 재가자의 삶에 있어서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는 주옥같은 부처님의 말씀이다. 이 가르침은 오히려 너무나 평범해 보이기 때문에 간과하기 쉬운 측면도 있다. 그래서 이 경전은 단순히 눈으로 읽어서는 별로 감흥이 없다. 가슴으로 읽고 깊이 생각해 보았을 때, 비로소 그 가치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갈구한다. 그 누구도 행복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경전에서 제시한 부처님의 말씀 밖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한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부처님은 38가지의 일을 실천하면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일러주고 있다. 그러므로 누구든 이 가르침대로 실천하기만 한다면 더없는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전은 사람들이 번영하는 측면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타락해 간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에 해답을 제시한 것이 다음에 소개할 [패망경]이다.

 

파멸의 문(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거룩하신 세존께서는 사밧티(舍衛城)의 제타 숲, 외로운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는 장자의 동산(祇樹給孤獨園)에 계시었다. 그때 용모가 아름다운 한 신이 한 밤중이 지나, 제타 숲을 비추면서 세존께 가까이 다가왔다. 세존께 예배드린 후, 한쪽에 서서 시로써 여쭈었다.


91. “저희는 패망하는 사람에게 대해서 고타마께 여쭈어보겠습니다. 파멸에 이르는 문은 어떤 것입니까? 세존께 그것을 묻고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92. 세존께서 대답하셨다. “번영하는 사람도 알아보기 쉽고, 파멸도 알아보기 쉽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번영하고,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은 망한다.”

93. “잘 알겠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이것이 첫째 파멸입니다. 세존이시여, 둘째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파멸의 문은 무엇입니까?”

94. “나쁜 사람들을 가까이 하고 착한 사람들을 멀리 하며, 나쁜 사람이 하는 일을 좋아하면 이것은 파멸의 문이다.”

95. “잘 알겠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이것이 둘째 파멸입니다. 세존이시여, 셋째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파멸의 문은 무엇입니까?”

96. “(아무 때나) 잠자는 버릇이 있고, 사교의 버릇이 있고, 분발하여 정진하지 않고 게으르며, 걸핏하면 화를 잘 내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파멸의 문이다.”

97. “잘 알겠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이것이 셋째 파멸입니다. 세존이시여, 넷째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파멸의 문은 무엇입니까?”

98. “자기는 풍족하게 살고 있으면서 늙어 쇠약한 부모는 돌보지 않는 그런 사람이 있다. 이것은 파멸의 문이다.”

99. “잘 알겠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이것이 넷째 파멸입니다. 세존이시여, 다섯째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파멸의 문은 무엇입니까?”

100. “바라문이나 사문, 혹은 다른 걸식하는 이를 거짓말로 속인다면, 이것은 파멸의 문이다.”

101. “잘 알겠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이것이 다섯째 파멸입니다. 세존이시여, 여섯째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파멸의 문은 무엇입니까?”

102. “엄청나게 많은 재산과 귀금속과 먹을 것이 풍족한 사람이 자기 혼자서만 독식한다면, 이것은 파멸의 문이다.”

103. “잘 알겠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이것이 여섯째 파멸입니다. 세존이시여, 일곱째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파멸의 문은 무엇입니까?”

 

위 내용은 『숫따니빠따(Suttanip?ta, 經集)』제1장 우라가박가(Uragavagga, 蛇品)의 여섯 번째 『빠라바와-숫따(Par?bhava-sutta, 敗亡經)』의 전반부이다. 이 경전의 제목인 ‘빠라바와’는 패배(敗北) 혹은 패망(敗亡)이라는 뜻이다. 즉 인간이 타락해 가는 모습을 ‘패망’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파멸의 문’으로 고쳤다. 붓다는 이 경전에서 인간이 정신적으로 타락해 가는 원인을 구체적으로 지적했다. 즉 열두 가지 행위가 인간을 타락하게 만드는 파멸의 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는 우선 전반부의 여섯 가지 파멸의 문만을 소개하였다.


여섯 가지 파멸의 문을 간추리면, 첫째는 진리를 싫어하는 것이다. 둘째는 나쁜 사람을 가까이 하고, 착한 사람을 멀리하는 것이다. 셋째는 게으르고 화를 잘 내는 것이다. 넷째는 부모를 잘 모시지 않는 것이다. 다섯째는 수행자를 거짓으로 속이는 것이다. 여섯째는 부자가 자기 혼자만 호의호식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붓다께서 첫 번째 파멸의 문으로 지적한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번영하고,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은 패망한다.’는 대목은 깊이 새겨두어야 할 가르침이다. 팔리어 담마(dhamma)라는 단어는 진리라는 의미도 있지만, 법칙, 정의, 규범이라는 뜻도 담겨있다. 후자의 뜻으로 보면, ‘정의나 규범을 사랑하는 사람은 흥하고, 그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망한다.’로 바꿀 수 있다. 사실 불의와 편법은 처음에는 성공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파멸의 문이다. 한마디로 정도(正道)만이 영원히 승리한다. 이러한 붓다의 가르침을 마하트마 간디는 ‘진리만이 이긴다.’라고 표현했다. 귀담아들어야 할 소중한 말씀이다. 


파멸의 문(2)

 

104. “혈통을 뽐내고 재산과 문벌을 자랑하면서 자기의 친척을 멸시하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파멸의 문이다.”

105. “잘 알겠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이것이 일곱째 파멸입니다. 세존이시여, 여덟째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파멸의 문은 무엇입니까?”

106. “여자에게 미치고 술과 도박에 빠져 버는 족족 잃어버리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파멸의 문이다.”

107. “잘 알겠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이것이 여덟째 파멸입니다. 세존이시여, 아홉째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파멸의 문은 무엇입니까?”

108. “자기 아내로 만족하지 않고, 매춘부와 놀아나고 남의 아내와 어울린다. 이것은 파멸의 문이다.”

109. “잘 알겠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이것이 아홉째 파멸입니다. 세존이시여, 열 번째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파멸의 문은 무엇입니까?”

110. “한창때를 지난 남자가 틴발 열매처럼 불룩한 젖가슴을 가진 젊은 여인을 유혹하고 그녀를 질투하는 일로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면, 이것은 파멸의 문이다.”

111. “잘 알겠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이것이 열 번째 파멸입니다. 세존이시여, 열한 번째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파멸의 문은 무엇입니까?”

112. “술과 고기 맛에 빠져 재물을 헤프게 쓰는 여자나 남자에게 집안일의 실권을 맡긴다면, 이것은 파멸의 문이다.”

113. “잘 알겠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이것이 열한 번째 파멸입니다. 세존이시여, 열두 번째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파멸의 문은 무엇입니까?”

114. “크샤트리아(武士)의 집안에 태어난 사람이 권세는 작은데 욕망만 커서, 이 세상에서 왕위를 얻고자 한다면, 이것은 파멸의 문이다.

115. 세상에는 이와 같은 파멸이 있다는 것을 잘 살피어, 현자와 성자들은 진리를 보고 행복한 세계에 이른다.” 

 

위 내용은 『패망경』에 나오는 열두 가지 파멸의 문 가운데 후반부 여섯 가지이다. 이 경전의 내용은 별도의 해석이 필요 없을 정도로 쉽게 설해져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위 경전의 내용을 다시 음미해 보자.


일곱 번째 파멸의 문은 혈통과 가문 등을 자랑하면서 이웃의 친척을 돌보지 않는 것이다. 이를테면 입만 열면 자기 가문의 우월성을 자랑하면서 그 가문 가운데 불우한 처지에 놓인 사람을 전혀 돌보지 않는 사람이 이에 해당된다.

여덟 번째 파멸의 문은 술과 여자, 도박 등에 빠지는 것이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아무리 많아도 술이나 도박, 그리고 여자에 빠지면 그 재산은 순식간에 탕진해 버릴 수도 있다.

아홉 번째 파멸의 문은 자기 남편이나 아내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외도를 일삼는 것이다. 남편이든 아내든 어느 한쪽이 외도에 빠지면 그 가정은 파괴되고 만다. 비록 어떤 사람이 사회적으로 성공했더라도 가정이 파괴되면, 그는 실패한 인생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돌아가 의지할 가정이 없기 때문이다.

열 번째 파멸의 문은 늙은 남성이 젊은 여인에게 빠지거나, 늙은 여인이 젊은 남자에게 빠지는 것이다. 이것은 패가망신의 지름길이다. 순간적인 쾌락을 좇아가는 것은 저열한 사람이다. 순간적인 쾌락 뒤에는 긴 고통이 뒤따른다.

열한 번째 파멸의 문은 낭비가 심한 사람에게 재산의 관리를 맡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재물을 획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관리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남편이 벌어온 재산을 아내가 허영심으로 낭비해 버린다면 파멸에 이르게 되는 것은 말할 나위없다.

열두 번째 파멸의 문은 분수에 맞지 않는 큰 목표를 설정하는 것을 말한다. 즉 자신의 능력은 따라주지 않는데, 도저히 실현 불가능한 높은 지위를 꿈꾸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 사회의 하위직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사람이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있다. 자신의 능력과 분수에 맞지 않는 과도한 목표에 매달리는 것도 곧 파멸의 문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붓다께서 언급하고 있는 파멸의 문은 지금 이 순간에도 유효하며, 미래 세대에도 그대로 유효할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의 실패를 조상이나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파멸은 자기 스스로 지은 것임을 이 경전을 통해 알 수 있다.

  

시갈로와다 숫따(1)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라자가하(Rajagaha, 王舍城) 근처 대나무 숲속 다람쥐 먹이터에 계셨다. 이때 시갈라(Sigala, 善生)라는 장자의 아들이 일찍 일어나 라자가하로 나왔다. 그는 머리와 옷이 젖은 채 합장을 하고는 땅과 하늘의 여러 부분, 동, 서, 남, 북, 상, 하의 여섯 곳을 향해 예배를 드렸다. 마침 같은 날 아침 일찍 세존께서 가사를 입고 발우를 가지고 걸식을 하기 위해 라자가하로 들어갔다. 세존께서는 시갈라가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고 물으셨다.


“젊은이여, 이른 아침에 라자가하를 떠나 머리와 옷도 적신 채 하늘과 땅의 여러 곳에 예배드리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예, 저희 아버님께서 돌아가실 때 땅과 하늘의 여러 곳에 예배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버님의 말씀에 따라 그것을 지키려고 일찍 일어나 라자가하를 나와서 이같이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젊은이여, 성인들의 율법에 따른다면 이처럼 여섯 방위를 향해 예배드려서는 안 되느니라.”

“그러면 성인들의 율법에 따른다면 여섯 방위를 향해 어떻게 예배드려야 합니까? 세존께서 성인들의 율법대로 여섯 방위에 대해 예배드리는 방법을 저에게 일러주신다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젊은이여, 내가 이제 말할 터이니 주의하여 듣도록 하라.”

“예, 그러하겠습니다.”


세존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젊은이여, 무릇 성인의 제자라면 네 가지 악한 행동을 멀리 해야 하느니라. 또 네 가지 동기에서 비롯되는 모든 악행을 멀리 해야 한다. 또 재산을 낭비하는 여섯 가지 행위를 멀리 해야 한다. 이 열 네 가지 악한 것을 멀리 하면 그가 바로 여섯 방위를 보호하는 사람이며, 이승과 저승에서 모두 자기 방식대로 살며 행복한 사람이니라. 그리고 죽어 몸이 분해되면 천상에 태어나 행복하게 살 것이니라.”

  

위 내용은 팔리어 디가 니까야(Digha-nikaya, 長部) 제31번째 경전인 시갈로와다 숫따(Sigalovada-sutta, 敎授尸迦羅越經)의 앞부분이다. 이 경전은 예로부터 재가자의 율장으로 여겼다. 이 경전은 인간관계의 윤리를 비롯한 재가자가 실천해야 할 덕목들을 아주 자세히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초기경전은 대부분 출가자를 위한 가르침이다. 그러나 이 경전만은 오직 재가자를 위한 것이다. 그래서 남방불교권은 물론 대승불교권에서도 이 경전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위에서 인용한 팔리경전에 대응하는 한역은 여러 가지 역본이 현존하고 있다. ①[佛說尸迦羅越六方禮經](大正藏 1권, pp.250-252); ②[佛說善生子經](대정장 1권, pp.252-255); ③장아함경 제16 [善生經](대정장 1권, pp.70-72); ④중아함경 33권, [善生經](대정장 1권, pp.638-642) 등이다. 여러 이본(異本)들을 대조해 보면 내용은 거의 비슷하다.


세존께서 라자가하 근처의 대나무 숲속에 머물고 있을 때, 장자의 아들 ‘시갈라’라는 청년이 아침 일찍 일어나 목욕재계하고, 동, 서, 남, 북, 상, 하 육방(六方)을 향해 예배하고 있었다. 붓다는 그것을 보고 그 청년에게 예배하는 이유를 물었다. 그러나 그는 부모의 유언에 따라 그렇게 할 뿐 그 뜻을 모른다고 대답했다.


붓다 당시에는 베다의 전통에 따라 육방에 대한 예배를 행하고 있었다. 이것은 외부 세계의 여러 부분에는 힘이 센 정령이나 신들이 거주하고 있다고 믿어 그들을 부르고 보호를 바라면서 예배드리는 것이었다. 이것은 베다 전통에 따른 오랜 의례였다.


붓다는 이와 같은 고루한 미신적 관행을 바로잡기 위해 육방과 예배의 의미를 재해석하였다. 즉 동방은 부모, 남방은 스승, 서방은 아내와 자식, 북방은 친구, 친척, 이웃, 하방은 하인, 일꾼, 고용인, 상방은 수행자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여섯 방위에 반드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붓다는 ‘예배(namasseyya)’라는 말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예배란 성스러운 것, 영예와 존경의 가치를 가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가? 붓다는 여섯 방위가 상징하고 있는 대상에 대하여 의무를 다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예배라고 일깨워주었다.


시갈로와다 숫따(2) 

 

“멀리 해야 할 네 가지 악한 행위는 무엇인가? 그것은 살인, 도둑질, 강간, 거짓말이니라. 이것들이 바로 멀리 해야 하는 네 가지 악한 행위이니라.

악행을 저지르게 하는 네 가지 동기란 무엇인가? 모든 악한 행동은 편애, 증오, 어리석음, 두려움이라는 동기에서 비롯되느니라. 그러나 성스러운 제자는 이러한 동기에 끌려 다니지 않으며, 그럼으로써 악행을 하지 않게 되느니라.

그리고 재산을 낭비하는 여섯 가지 행위는 무엇인가? 그것은 음주, 방탕, 유흥, 노름, 악한 친구와의 교제, 게으름이다.

젊은이여, 음주에는 여섯 가지 위험이 있느니라. 그것은 재산의 손실, 잦은 싸움질, 병, 나쁜 소문, 무례함, 지능 저하이다.

젊은이여, 알맞지 않은 시간에 거리를 쏘다니는 방탕에는 여섯 가지 위험이 있다. 그 자신이 보호받을 수 없고, 처자식과 재산도 그러하며, 보호받을 수 없는 범죄의 혐의를 받으며, 이름에 나쁜 소문이 붙어 다니며, 많은 말썽에 부딪치게 된다.

젊은이여, 유흥장에 자주 출입하는 데에도 여섯 가지 위험이 있느니라. 유흥장에 가면 춤과 노래와 음악과 낭송과 악기와 손뼉 소리가 어디에서 나는가를 찾게 된다.

젊은이여, 노름에는 여섯 가지 위험이 있다. 이기면 원한을 낳고, 지면 잃은 재산 때문에 슬퍼하며, 재산이 탕진되고, 그의 말은 의회나 법정에서 신뢰받지 못하며, 친구와 동료들의 경멸을 받으며, 사람들이 노름꾼은 좋은 남편이 될 수 없다고 얘기하기에 결혼 상대를 구하지 못하게 된다.

나쁜 친구와 사귀는 데에도 여섯 가지 위험이 있다. 노름꾼, 난봉꾼, 술꾼, 사기꾼, 협잡꾼, 깡패가 그의 친구나 동료가 되기 때문이다.

게으름에도 여섯 가지 위험이 있다. 너무 추워서, 너무 더워서, 너무 일러서, 너무 늦어서, 너무 배고파서, 너무 배불러서 일하지 못한다는 게으름뱅이는 해야 할 일이 쌓이는 동안 돈을 벌지 못하며, 결국 갖고 있는 재산마저 날려버리게 된다.” 

 

위 내용은 팔리어 디가 니까야(Digha-nikaya, 長部) 제31번째 경전인 시갈로와다 숫따(Sigalovada-sutta, 敎授尸迦羅越經)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것은 붓다께서 시갈라(Sigala)라는 청년에게 들려준 법문이다. 이 가르침은 붓다께서 기원전 6세기에 설한 것이다. 하지만 그 내용은 오히려 현대인을 위한 것처럼 느껴진다. 인간들의 삶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변한 것이 없는 모양이다.


붓다는 살인, 도둑질, 강간, 거짓말 등 네 가지 행위를 가장 나쁜 악행으로 보았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네 가지 행위는 죄질이 무거운 범죄로 다루어지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네 가지 행위를 저지른 자는 극형으로 다스리고 있는 것이 전 세계적인 추세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추방해야 할 나쁜 행위이기 때문이다.


붓다는 이러한 악행을 저지르게 되는 것은 네 가지 잘못된 동기가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즉 모든 악행은 편애, 증오, 어리석음, 두려움이라는 네 가지 동기로 말미암아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성스러운 제자는 이러한 동기에 이끌리지 않기 때문에 모든 악행을 저지르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악행의 네 가지 동기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탐(貪), 진(瞋), 치(癡), 포(怖)라고 할 수 있다. 붓다는 다른 경전에서 탐, 진, 치 삼독(三毒)은 모든 악의 근본이라고 했다. 재가자가 이러한 네 가지 동기에 끌려 다니지 않으면, 모든 악행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붓다는 음주, 방탕, 유흥, 노름, 악한 친구와의 교제, 게으름 등 여섯 가지 행위로 말미암아 재산을 낭비하게 된다고 가르쳤다. 이어서 붓다는 이들 여섯 가지에는 다시 여섯 가지 위험이 뒤따른다고 자세히 일러주었다.


위에서 인용한 내용은 재가자가 올바른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지켜야 할 준수사항임은 말할 나위없다. 후대에 성립된 [우바새계경]에서는 이러한 내용이 모두 재가자의 계율로 제정되어 있다. 비록 붓다께서 ‘시갈라’라는 한 청년에게 일러준 법문이지만, 모든 재가자들에게 해당되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붓다의 가르침은 시대가 변해도 그 가치는 조금도 퇴색되지 않는다.

 

시갈로와다 숫따(3) 

 

“친한 듯하나 원수로 생각해야 하는 네 종류의 사람이 있다. 욕심쟁이와 입에 발린 친절을 베푸는 사람과 수다쟁이와 부랑배가 그들이다. 욕심쟁이가 친한 척하더라도 원수로 간주해야 하는 것은 네 가지 이유 때문이다. 그는 탐욕스럽고, 적게 주면서 많이 기대하고, 해야 할 일도 두려움 때문에 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한다.

입에 발린 친절을 베푸는 자가 친한 척하더라도 원수로 간주해야 하는 네 가지 이유가 있다. 그런 부류의 인간들은 과거나 미래에 관해서는 친절한 약속을 하나 실제 베푸는 친절은 속이 빈말뿐이며, 친절을 베풀어야 할 때는 여지없이 돌아서 버린다.

수다쟁이가 친한 척하더라도 원수로 간주해야 하는 네 가지 이유가 있다. 그런 자는 너의 좋은 행동뿐 아니라 나쁜 행동에도 찬성한다. 그러나 면전에서는 칭찬하고 네가 없을 때는 비난한다.

부랑배가 친한 척하더라도 원수로 간주해야 하는 네 가지 이유가 있다. 그런 자는 네가 술 마실 때나 적당하지 않은 시간에 거리를 쏘다닐 때나 유흥장에 출입할 때나 도박할 때만 친구가 된다.

좋은 친구로 볼 수 있는 네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도움을 주는 친구와 행복할 때나 곤경에 처해 있을 때나 변함없는 친구와 좋은 충고를 해 주는 친구와 동정심 많은 친구가 그들이다.

도와주는 친구는 네 가지 이유 때문에 좋은 친구이다. 그는 네가 깨닫지 못할 때 지켜주며, 네가 지킬 수 없을 때 재산을 지켜주며, 네가 두려워할 때 위안처가 되며, 해야 할 일이 있을 때 필요한 것보다 두 배의 도움을 준다.

행복할 때나 곤경에 처해 있을 때나 한결같은 친구는 네 가지 이유 때문에 좋은 친구이다. 그는 너에게 자신의 비밀을 말하며, 너의 비밀을 누설하지 않으며, 네가 곤경에 처했을 때 너를 저버리지 않으며, 너를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기까지도 한다.

좋은 충고를 해주는 친구는 네 가지 이유 때문에 좋은 친구이다. 그는 네가 나쁜 일을 하지 못하게 하며, 네가 좋은 일을 하면 즐거워하며, 네가 전에 배우지 못한 것을 그로부터 배우며, 네게 천상에 이르는 길을 일러준다.

동정심 많은 친구는 네 가지 이유 때문에 좋은 친구이다. 그는 너의 불행을 보고 즐거워하지 않으며, 너의 성공을 함께 기뻐해주며, 사람들이 너에게 대해 악평하지 못하게 하며, 사람들이 너에게 대해 좋은 말을 하도록 전한다.”

 

 위 내용은 붓다께서 시갈라(Sigala)라는 청년에게 친구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한 것이다. 즉 나쁜 친구와 좋은 친구는 어떤 사람인가를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인생에서 친구의 중요성을 역설한 대목이다. 실제로 살아가면서 나쁜 친구를 만나느냐 좋은 친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이 달라진다.


특히 출가자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좋은 친구를 만나야 출가의 본래 목적을 빨리 이룰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친구를 ‘도반(道伴)’ 혹은 ‘길 벗’이라고 부른다. ‘수행의 길[道]을 함께 가는 반려자[伴]’라는 의미이다. 예로부터 불교교단인 상가(Sangha, 僧團)를 ‘좋은 벗의 집단’이라고 말한다.


초기경전에서는 ‘좋은 벗(kaly?namitta, 善友)’에 대해 설한 것이 꽤 많다. 어느 때 아난다 존자는 붓다께 “우리는 좋은 벗을 갖고 좋은 동지 속에 있다는 것은 이미 성스러운 이 도(道)의 절반을 성취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붓다는 “좋은 벗을 갖는 것은 절반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도의 전부이다”라고 아난다의 견해를 수정해 주었다.


또 다른 경전에서는 “비구들이여! 여기 한 법이 있나니 성스러운 여덟 가지 길을 일으킴으로써 이익 됨이 많도다. 그 한 법이란 무엇인가. 좋은 벗을 가짐이 그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세존에 의해 법은 잘 설해졌다. 그것은 좋은 벗과 좋은 동지를 가지는 일이며, 결코 나쁜 벗과 나쁜 동지를 가지는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와 같이 붓다는 언제나 좋은 벗을 갖고 좋은 동지와 함께 있다는 것은 이 도의 전부임을 강조하였다. 그만큼 친구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시갈로와다 숫따(4)

  

“그리고 젊은이여, 성인의 제자라면 여섯 부분을 어떻게 보호하는가? 여섯 부분이란 동쪽은 부모, 남쪽은 스승, 서쪽은 아내와 자식, 북쪽은 친구, 친척, 이웃, 아래쪽은 하인, 일꾼, 고용인, 위쪽은 수행자이다.

자식은 동쪽 부분의 부모를 다섯 가지 방법으로 섬겨야 한다. 부모에 의해 양육되었기에 이제 네가 모셔야 한다. 부모가 해야 할 일을 수행한다. 가족의 혈통과 전통을 유지한다. 유산을 잘 보살핀다. 부모님을 위해 보시한다. 즉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종교적 의식을 치른다.

반대로 부모는 다섯 가지 방법으로 자식에 대한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 자식이 나쁜 길로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 자식을 선한 길로 인도한다. 자식을 하나의 직업인으로 훈련시킨다. 적당한 상대를 골라 자식을 결혼시킨다. 적당한 시기에 자식에게 유산을 물려준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동쪽 부분은 보호되고 안전하고 편안하게 된다.”

 

위 내용은 붓다께서 시갈라(Sigala)라는 청년에게 육방(六方)에 대한 예배의 의미를 설명한 부분이다. 즉 육방에 대한 예배는 단순히 여섯 방위에 절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여섯 방위가 상징하는 대상에 대하여 의무를 다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예배라고 가르치고 있다.


당시 바라문들은 외적 세계의 각 부분에 거주하는 정령이나 신들로부터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여섯 방위에 예배하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붓다는 바라문 전통에 따른 예배 대신 성인의 율법[聖律]에 따라 각 부분에 대한 의무를 다함으로써 그들에게 예배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여섯 부분이 이런 방식으로 보호된다면 그들은 편안하고 안전할 것이며, 어떤 위험도 닥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여섯 방위가 상징하는 인간관계의 윤리를 말한 것이다. 즉 동쪽은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父子關係], 남쪽은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師弟關係], 서쪽은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夫婦關係], 북쪽은 친구간의 관계[朋友關係], 아래쪽은 주인과 종업원과의 관계[主從關係], 위쪽은 출가자와 재가자의 관계 혹은 성직자와 평신도간의 관계를 뜻한다. 이러한 여섯 부류의 인간관계에는 상호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이것을 붓다는 ‘시갈라’라는 청년에게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설명하고 있다.


인간관계의 윤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이다. 붓다는 ‘부모는 브라흐마라고 불린다.’(Brahmati m?t?pitaro)라고 말했다. 브라흐마(Brahma)라는 용어는 인도사상에서 지고의 가장 성스러운 개념이며, 붓다는 그 개념 안에 부모를 포함시킨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훌륭한 불교 가정에서는 자녀들이 말 그대로 매일 조석으로 부모에게 예배하고 있는 것이다.


먼저 자식이 부모에 대하여 지켜야 할 덕목에 대해 이 경전에서는 다섯 가지를 들고 있다. 

①옛날에는 부모가 나를 길러 주셨으므로 이제는 내가 부모를 부양하겠다. 

②부모의 일을 내가 하겠다. 

③혈통을 이어 가겠다. 

④가문의 명예 혹은 전통을 계승하겠다. 

⑤부모의 유산을 물려받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다. 이것이 바로 자식 된 도리로서 자신을 낳아준 부모에 대하여 그 은혜를 갚는 일이다.


한편 부모는 자식을 가르치고 보살필 의무를 지니고 있다. 이 경에서는 그 덕목을 다섯 가지로 꼽고 있다. 

①악을 행하지 않게 하며, 

②선행을 하도록 간곡히 타이르며, 

③기술을 익혀 직업을 갖게 하고, 

④적합한 여자와 결혼을 시키고, 

⑤적당한 때에 가산(家産)을 상속시킨다. 


이 밖에도 불전(佛典)에서는 부모는 자식이 사회인으로서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부모의 중요한 역할은 자식을 훌륭한 인격을 갖춘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 교육시키는 것이다. 즉 부모는 자식에게 인생의 교사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당시 인도사회는 가부장적 제도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붓다는 부모와 자식관계를 의무와 복종관계로 파악한 것이 아니라 서로 간에 사랑과 믿음으로써 자발적인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관계라고 설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불교에서 말하는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는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임을 알 수 있다. 


시갈로와다 숫따(5) 

 

“서쪽 부분의 아내를 남편은 다섯 가지 방법으로 섬겨야 한다. 아내를 존경한다. 아내에게 예의를 다 한다. 아내에게 솔직하게 대한다. 아내의 권위를 인정한다. 아내에게 보석 등의 장신구를 선물한다.

이처럼 남편에 의해 서쪽 부분으로 섬겨진 아내는 다섯 가지 방법으로 남편을 사랑해야 한다. 의무를 잘 수행한다. 친절하게 시중을 든다. 성실해야 한다. 남편의 소득을 잘 보호한다. 모든 취급하는 일들을 성실하고 익숙하게 한다. 이런 방식으로 서쪽 부분은 보호되고 안전하고 편안하게 된다.”

   

위 내용은 여섯 방위 가운데 서쪽 방위가 상징하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夫婦(關係]에 대해 붓다께서 ‘시갈라’라는 청년에게 설명한 부분이다. 이것을 좀 더 풀어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부부는 서로에게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의무를 지닌다. 즉 남편은 아내를 존중해야 하고, 예의로써 대해야 한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에게 충실해야 하며, 아내로서의 위치와 안락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 또한 아내에게 의복과 보석을 선사하여 즐겁게 해주어야 한다.


반대로 아내는 가사를 감독하고 돌보며, 손님, 내방객, 친구, 친척 및 고용원 등을 잘 접대해야 하며, 남편을 사랑하고 남편에게 충실해야 하며, 남편의 수입을 보호해야 하며, 모든 활동에서 현명하고 활기차야 한다.


이 경전에 의하면 부부 관계는 수직적이고 봉건적인 의무와 복종의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이고 상호적인 관계에 바탕을 두고 있다. 또한 서로가 감사하고 봉사하는 호혜적이고 합리적인 관계의 윤리인 것이다. 남녀가 평등한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가르침이다. 이 땅의 모든 남편과 아내들이 서로에게 각자의 의무, 즉 부부의 도를 다한다면, 그 가정은 분명히 행복이 가득한 보금자리가 될 것이다.


한편 위 팔리문에 해당하는 한역 장아함경의 [선생경(善生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즉 남편은 아내에게 ①예절로서 대하며(相待以禮), ②위엄을 지키고(威嚴不關), ③의복과 음식을 때맞추어 대어주며(衣食隨時), ④때때로 장엄하게 하여(莊嚴以時), ⑤집안 일을 믿고 맡긴다(委付家內). 반대로 아내는 남편에게 ①먼저 일어나고(先起), ②뒤에 앉으며(後坐), ③부드러운 말을 하고(和言), ④남편에게 경순하며(敬順), ⑤남편의 뜻을 미리 알아서 받들어 행하여야 한다(先意承旨).


가정의 행복은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바다. 그런데 가정의 행복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 그 자체임을 알아야 한다. “부모를 섬기는 것, 처자를 사랑하고 보호하는 것, 그것이 더 없는 행복이다”라고 부처님은 설했다. 우리는 불행을 만났을 때 비로소 과거의 평범한 일상들이 행복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사회 구성원의 기본단위인 각 가정이 행복할 때, 이 사회는 저절로 밝아진다. 가정이 화목하지 못하면 사회적으로 아무런 일도 할 수가 없다. 비록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가정이 파괴되었다면 실패한 인생에 불과하다. 사회적 성공은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가정의 중심축은 남편과 아내이다. 훌륭한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부부가 서로 신뢰하고 존경하며 헌신적이어야 한다. 불교에서는 부부 사이의 사랑은 거의 종교적이거나 성스러운 것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성스러운 가정생활’이라고 일컫는다. 최고의 존중심이 이 관계에 바쳐진 것이다.


대부분의 가정 불화는 부부의 도를 지키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다. 붓다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재가자들에게 다섯 가지 계율[五戒]를 지킬 것을 당부했다. 오계 가운데 세 번째가 바로 ‘삿된 음행을 삼가라[不邪淫]’는 것이다. 경전에서는 “슬기로운 사람은 음행(淫行)을 회피하라. 타오르는 불구덩이를 피하듯. 만일 정행(淨行)을 닦을 수가 없더라도 남의 아내를 범해서는 안 된다.”[숫따니빠따 396게]라고 했다. 훌륭한 가정을 가꾸기 위해서는 남편과 아내가 서로 존중하고, 각자 자기의 의무를 다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