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불교의 관점에서 본 기복불교
명법 스님
1. 불교의 젠더화, 기복불교
해마다 수능시험을 치르는 날이면 온 나라가 몸살을 앓는다. 이날은 사회의 모든 관심과 가동 가능한 모든 자원이 수험생들에게 집중된다. 경찰차에서 내리며 허겁지겁 고사장으로 들어서는 입시생, 교문 주변에 늘어선 응원 나온 선후배들, 닫힌 철문에 덕지덕지 붙인 엿과 함께 전국의 사찰과 교회, 성당 등 모든 종교시설을 채우고 있는 대한민국의 어머니들은 이날만 볼 수 있는 익숙한 풍경이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한국 종교에 만연한 기복신앙의 현장이다.
기복신앙은 가장 대중적인 신앙 형태지만 그에 대한 판단은 양가적이다. 한편에서는 헌신적인 모성애라고 칭송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가족이기주의라고 비난받고 있다. 불교계에서도 바람직한 신행으로 간주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구태의연하고 부정적인 불교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기복불교 비판론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것은 첫째 수행중심주의적 관점에서 복을 구하는 행위는 깨달음을 추구하는 수행과 상반되며, 둘째 정치적으로 “백성들의 관심을 현실과 현세보다 미래와 내세로 돌려” “개인과 가족의 안위만 빌게” 만들며, 셋째 시대적으로 “현실문제로부터 동떨어져 있기에 산중일 수밖에 없는” 삶에서 유리된 박제화된 구시대의 유물이다.
최연은 한국불교가 “기복적이고 호국적이기 때문에 올바른 비판의식을 가진 식자층이 외면하게 되고, 이 때문에 상대적으로 현실문제에 관심이 적은 여성과 노인들이 주류를 이룰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이러한 한국불교의 왜곡된 현실조건들을 극복해” 가는 노력으로 재가불교운동을 평가하였다. 재가불교운동 중 하나인 ‘거사불교운동’은 “학문을 전업으로 하는 식자층들이 주를 이루며 불교사상의 현대적 해석, 새로운 시대의 대안 제시, 불교계의 오피니언 리더 역할”을 하는 “지식인”과 “신행을 지도하고 교리를 교육하고 대사회적인 포교도 함께하는” “재가법사”가 이끄는 불교운동이다. “치마불교”라는 비아냥거리는 표현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듯이 이러한 평가 이면에는 기복불교의 주 계층인 여성불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이처럼 기복불교 비판 담론은 현대적이고 합리적인 남성들의 불교와 기복 중심의 비합리적이고 전근대적인 여성불교를 구별하고, 근대적 남성의 종교성을 주체화시키기 위하여 전통적인 여성의 신행을 타자화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젠더화는 어디선가 본 듯한 낯익은 것이다. 다름 아니라 서양과 동양을 근대적이고 합리적인 남성과 전근대적이고 비합리적인 여성으로 젠더화한 서양 오리엔탈리즘의 구조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사실 이 일치는 우연한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기복불교 비판 담론의 근거를 제공해주는 초기불교 교리가 바로 서양 근대학문의 관점에서 재구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김종만은 “교리에 따른 신행 활동”을 하자고 주장하면서 암베드카르가 미래사회에 알맞은 종교의 조건으로 들었던 항목 중 “과학과 이성에 모순되지 않을 것”이라는 항목을 강조한다. 또한 그는 그것이 “최근 종교학자들 사이에서도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상황”이라고 하면서 한국에서 불보살을 신적 존재로 간주하고 그 앞에서 복을 비는 기복신앙을 불교의 본질 자체를 왜곡하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처럼 기복불교 비판 담론은 객관적이고 진보적인 담론인 양 주장하지만 사실은 서구적 모델을 추종하는 연구자 자신의 편향적 사고가 개입되어 있다.
위에서 본 것처럼 기복불교 비판 담론은 서구 종교의 성서중심주의 모델을 따라 재구성된 교리에 근거하기 때문에 전통적이고 미신적인 불교를 폐기해야 한다는 계몽론의 형태를 띠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비판에도 기복불교가 여전히 성행하는 것으로 볼 때, 그 비판들은 실제 상황을 개선하는 데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했던 것 같다. 그 까닭이 어디에 있을까? 이에 대하여 백재환은 이 비판들이 “연구 대상인 실천을 그 실천들이 실질적으로 기능하는 문맥에서 분리된 주장들과 데이터의 죽은 집대성으로 변형시켰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처럼 기복불교 비판은 당위론에 근거하여 현실을 재단했을 뿐 아니라 남성 엘리트주의적 시각에서 기복신앙의 주 대상이며 한국불교의 절대다수를 이루는 여성들을 타자화하였다. 그들은 여성불교의 다양한 사회적, 경제적 요인과 종교적 제도적 측면을 고찰하지 않고 기복불교의 모든 문제를 여성에게 전가했다. 한국불교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여성은 그들의 담론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으며 당연히 한국불교 발전에 기여한 여성들의 공로도 인정하지 않았다. 바로 이런 반여성적, 반대중적 입장에서 거사불교를 한국불교의 미래를 위한 대안으로 제시하게 된다. 이 점에서 기복불교 비판은 남성 엘리트의 입장에서 전개된 반여성적이고 반대중적 논의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기복신앙의 주 계층인 여성을 통해 기복불교를 재평가하려는 입장에 서 있다. 과연 기복불교가 욕망의 추구만 목적으로 하는 이기적이고 비불교적인 것인지, 여성들은 왜 기복을 하는지, 그 종교적, 사회적 의미가 무엇인지 등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나아가, 가장 대중적인 신행행위인 기복신앙을 그 종교적 사회적 실천 맥락에서 바라보고 이를 통해 남성학자들이 부정적으로 평가한 여성불교의 긍정적인 지점을 드러내고 타자화된 여성을 불교의 주체로 세우고자 한다.
2. 기복불교의 윤리성
‘복을 비는 행위’ 즉 기복행위는 사실 모든 종교현상의 기본양상이다. 기도축원문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무병장수, 경제안정, 입신양명, 자손흥성, 국태민안’ 등의 내용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기원을 포함하고 있다. 이 기도문을 올리는 사람이 대부분 여성이라는 것은 곧 여성들의 신행 행위가 가족의 건강과 안녕, 경제적 부의 성취, 그리고 자녀들의 학업과 시험합격 등에 집중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기원하다’ ‘발원하다’ ‘원한다’는 것은 욕망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기복신앙은 종교라는 신성한 영역에서 욕망을 추구하는 불순한 행위로 간주되며, 김성례가 지적하듯이 “초월적인 정신주의적인 신앙을 표방하는 기독교나 불교 등 기성종교를 타락시키는 악의 원천”으로 타파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욕망을 버리고 해탈을 추구하는 불교의 입장에서 그것은 비불교적인 신행행위로 비판받고 있다. 조준호는 기복이 부처님이나 신과의 이원대립적 관계에서 이루어지며, 주문이나 주법 같은 방법에 의지하며, 현세이익을 목적으로 하며, 사제가 주관하는 의례를 통해 행해지며, 따라서 비는 대상, 비는 사람, 그리고 중재자인 사제 사이에 모종의 거래관계가 형성되며, 더구나 샤머니즘과 습합된 것이기 때문에 불교가 아니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처럼 기복불교 비판은 기복이 이기적 욕망에 바탕을 둔 행동이라는 점에 비판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나 욕망에 기초하지 않는 신행만 종교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기복불교 비판자들의 시각은 이윤 추구가 목적이 된 근대 이후에 발생한 도덕관념에 근거를 둔 것이다. 어떤 대가나 보상을 바라지 않는 증여, 기부, 자선이라는 이념은 이기적이고 이익만 추구하는 시장 교환에 대비되는 교환 원리이지만 이것이 가능한 것은 역시 시장경제의 성립에 의해서 만들어진 서구적, 근대적 통념이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기복신앙은 대가를 바라는 이기적이고 타산적인 행위이지만, 실제로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는 브뤼노 라투르의 지적처럼 근대적 세계가 합리적이고 이성적이었던 적이 결코 없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무사 무욕한 도덕과 종교를 주장하는 기복불교 비판자들의 시각이 얼마나 편협하고 얼마나 현실에서 벗어난 것인지 알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가난, 질병, 죽음 등 현실적인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그 해결을 위해 종교적인 힘에 의지한다. 이와 같은 인간적 한계와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종교적 해결책은 무엇일까? 물론 불교의 정답은 고통의 근원에 대한 자각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고통의 근원을 자각하기가 쉽지 않다. 더구나 출가자가 아닌 일반 신도를 곧바로 실존적 문제의 해결을 위한 수행으로 이끌기는 어렵다. 레비나스가 말했듯이 욕구는 무욕 속에서 완화되는 것이 아니라 만족으로 진정되기 때문에 기복신앙은 이처럼 실존적 문제에 당면한 인간들이 선택하는 가장 현실적이고 대중적인 신행 형태가 된다.
김성례는 기복행위가 “기복에 대한 신앙인의 구체적인 삶의 맥락에서 보았을 때 나름대로의 정서 구조와 문화적 논리”가 있으며, “불확실한 세상에 대한 설명체제”이자 “현세적 복락을 기원하지만 본질적으로 물질주의적이거나 공리주의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재수굿을 일례로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기복은 개인에게 절실한 건강과 부의 문제를 해결하고 “실제적인 삶의 질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효과적인 의례”이다.
이처럼 무속적 기복신앙이 “한국의 자본주의 문화의 변방에 남아 있는 미신적이거나 전근대적인 잔존물이 아니라” “물질적 풍요로움과 소비 욕구의 충족을 목표로 하는 후기 자본주의 문화의 한가운데에서 활성화되고 있는 ‘지금 여기의’ 종교”이며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합리성 논리에 대항하는 민중적 종교의 표현”이라면, 불교의 기복행위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프랑스의 인류학자 마르셀 모스(Marcel Mauss)에 따르면, 원시사회와 고대사회의 선물(gift) 교환에서 매개물인 제물과 선물은 사물 자체가 아니라 주는 자의 혼이나 마음 같은 영적인 힘이 부여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므로 증여는 독립된 개인들 사이의 공리적 교환방식이 아니라 상호의존적 관계에 있는 사람들 사이의 호혜적인 교환방식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보답을 기대하며 기도하는 기복행위는 기복불교 비판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해관계나 부의 직접적인 획득을 목표로 하는 공리주의가 아니라, 호혜성을 바탕으로 한 총체적 증여의 한 형식이다. 기복불교에서 공양물이나 기도금은 그 교환가치나 유용성보다 기도하는 자의 ‘정성’을 표시하고 그 크기를 가늠하는 기준으로 간주된다. 불교는 원시종교나 다른 종교보다 정신적 요소를 더 강조하기 때문에 ‘빈자일등(貧者一燈)’의 예에서 보듯이 마음을 더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에 칭명염불이나 절, 기도 같은 행위만으로도 기도가 성립된다. 이 점에서 기복불교는 원시종교나 고대종교보다 더 정제된 선물 교환의 형태이다. 자유와 의무, 그리고 이타적이며 타산적인 동기가 역설적으로 결합된 호혜성이야말로 사회관계의 진정한 원천이라는 모스의 주장을 따르면, 기복신앙은 총체적 증여에 기초한 호혜적 인간관계의 한 형태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므로 증여 또는 보시는 순전히 자유로운 발의에 기초한 ‘합의’를 통해 형성되는 ‘계약’처럼 ‘주고/받음’으로 끝나지 않고, ‘주고/받고/되돌려주는’ 순환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초기불전에서도 보시를 하기 위해 돈과 재산을 모으는 노력을 부정하지 않았다.
재가남성은 부지런히 노력하여 돈과 재산을 모아서 그의 처자와 여러 권속, 노비, 종, 친구, 조력자 그리고 모든 친척들을 공양하여 필수품을 제공하고 이익과 안락을 주고 이들과 함께 고락을 같이해야 한다. 이것을 괴로움과 즐거움이 함께 어울린 불이라고 한다.
이는 보시를 하기 위해 더 많은 재물을 벌어야 하며 이렇게 번 재물을 버림으로써 보시가 이루어진다는 역설을 성립시킨다. 이 역설을 통해 증여는 윤리적인 것이 된다. 재가신도들의 재보시와 불보살의 가피, 승려들의 법보시는 베푸는 자에게 윤리적 도덕적 우월성을 보장해준다. 이처럼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뛰어나다는 믿음은 ‘주고받는’ 교환 과정에서 ‘되돌려주어야 한다’는 부채감을 부과하며 이를 통해 ‘주고/받고/답례하는’ 규범성이 확립된다.
따라서 기복신앙을 긍정하되 기복보다 작복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은 기복이라는 신앙행위를 충분하게 이해하지 못한 논의이다. 마성 스님은 타력신앙이 복을 외부에서 구하는 비불교적인 기복신앙이라면, 복을 내부에서 구하는 기복은 사실은 작복이며 자력적이고 불교적이라고 구별하면서 작복을 기복의 대안으로 보았다. 그런데 그는 기복에 작복의 요소가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했으므로, 보시물을 주고 불보살의 가피를 받는 교환과정에서 신도는 자신이 제공한 공양물에 비하여 압도적으로 많고 훌륭한 보답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과 보답해야겠다는 의무감이 생긴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기복행위는 현재 복을 받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되갚는 ‘회향’으로 나아간다. 회향은 한편으로 가피에 대한 되갚음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미래의 행복을 위한 복 짓기, 작복이다. 주는 행위의 힘을 체험한 사람은 받으려는 욕망을 버리고 자발적으로 남에게 베풀기를 즐기게 된다. 나아가 인과법을 깨닫고 자신의 행동과 마음을 반성하고 ‘타자로의 열림’을 경험하게 된다.
지금까지 기복을 단순히 이기적 욕망의 추구로 이해한 기복불교 비판자들은 기복이 자연스럽게 작복으로 이어지는 메커니즘을 이해하지 못하고 당위론에 빠져 미신 취급을 했다. 가피를 경험한 사람들이 더 깊이 수행에 몰두하여 어려운 사람을 돕거나 사찰의 대소불사에 시주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특히 여성불자들은 사찰의 든든한 재정적 후원자로서, 사찰의 대소사에 기꺼이 동참하는 소리 없는 일꾼으로서 한국불교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던 것을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3. 치유와 성숙의 경험으로서의 기복
기복불교에 대한 두 번째 비판은 다음과 같다. 기복은 “말 그대로 복을 받기 위해 절대자의 가피를 바라는 기도행위”이기 때문에 불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절대자에 대한 의존을 강조하는 기독교에 반발하여 인간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불교에 매혹당한 사람들 중에는 타력신앙이 불교가 아니라는 신념이 팽배해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서양 종교와의 비교에서 발생한 근대적인 사고이다. 자력신앙과 타력신앙을 구분하고 자력신앙이 타력신앙보다 우월하다고 보는 관점이 불교적인지 확인해보아야 한다.
김종만은 “절대자의 가피”를 구하는 것이 불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부처님은 깨달은 스승이자 성인이지 중생들에게 어떤 초월적 능력을 보여주는 존재가 아니며” 보살들의 중생구제의 서원도 “그 구원의 힘은 초월적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뼈를 깎는 정진과 원력이 바탕이 되는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는 “지혜와 이성을 앞세우는 불교”에서 기복신앙이 횡행하는 것을 걱정하면서 “방편은 깨달음과 관련한 훌륭한 교화방법에 가까운 것이지 기복과 주술 등 타력에 의존하자는 것이 아니다.”고 하여 기복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과연 그가 주장하듯이 ‘가피’는 비불교적인 것인가? 불교는 초월적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는가? 또 그들이 인간에게 영향을 줄 수 있으며 인간에 대한 선의를 가지고 있지 않았는가? 김종만의 주장을 따른다면 대승불교의 보살서원은 기만이라고 해야 한다. 불교를 “지혜와 이성을 앞세우는 종교”로 본 그의 시각에서 드러나듯이 이러한 사고는 서양학문의 논리에 물든 것이기는 하지만, 보살들의 구원의 힘이 “정진과 원력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 해서 “초월적 능력”을 갖지 않는다는 그의 주장은 초기불전에도 명백히 표현되어 있는 부처님의 초월적 능력을 부정하는 오만한 주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정토의 존재와 아미타불의 본원력에 의해 십념염불로 왕생극락이 가능하다는 것은 원효의 《열반종요》에서 이미 논증되었다. 원효의 대중교화는 이와 같이 탄탄한 교리적 기초 위에서 행해진 것이지 단지 좋은 방편이라고 하여 정토신앙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다. 타력의 구제 능력과 원력으로 세워진 정토라는 세계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아닌지는 이 글의 논의 범위를 벗어나지만, 원효의 경우처럼 정토신앙, 즉 아미타불의 본원력으로 내세에 정토에 태어나겠다는 기복신앙은 불교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기복신앙에서 불보살의 가피는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다. 이 수동성과 불보살의 초월적 가피의 증명할 수 없는 신비 때문에 그것은 무속이나 기독교처럼 신의 존재를 가정하는 종교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지 불교와 무관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불교의 기도법은 사제나 영매 같은 대행자를 내세우거나 공물을 바치는 의례가 아니라 마음을 정화하는 대승불교 수행법의 하나이기 때문에 자력신앙으로 해석 가능하다. 특히 사시마지와 조석기도 때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천수다라니의 염송과 기도는 그 속에 예배, 찬탄, 발원, 참회, 주력, 칭명 등 모든 수행법이 집대성되어 있기 때문에 불교수행으로 이해될 수 있다.
궁극적인 고의 해결을 가져온다면 그것을 자력으로 해석하든 타력으로 해석하든 상관없지만, 타력신앙의 장점은 인간, 즉 자아의 위치를 수동적인 곳에 둔다는 데 있다. 이 수동성은 일견 맹목적인 신앙과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은 ‘무아’의 한 모습이다.
이처럼 가피가 자신의 노력이나 수행의 결과가 아니라 전적으로 타자에게 맡겨져 있다는 관념은 자기의식의 오만을 없앨 수 있는 좋은 방편이다. 그러므로 불보살의 가피는 ‘초월적 존재에 대한 종속’이 아니라 ‘무아’의 체현이며 ‘타자로의 열림’과 ‘겸손’을 가져다준다. 이와 같은 정신적 성숙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가 무질서하고 부조리한 것이 아니라 더 깊은 관계성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이해하게 하며 지금까지 자신을 고통스럽게 했던 온갖 장애와 곤란을 새로운 관점에서 해석하고 삶의 더 깊은 차원을 이해하게 한다.
물론 기복 활동은 ‘주는 자’에 대한 집착을 야기할 수 있다. 타력신앙은 초월적 존재에 대한 의존이라는 면에서 어떤 대상에 대한 집착으로 변할 여지가 있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 기복신앙이 미신으로 치부되었지만 집착은 자력신앙에서도 일어난다. 오히려 자력신앙은 근대적인 자아 관념과 결부되어 ‘자아’라는 상에 고착될 우려가 있으므로 선 수행에서도 “의식적으로 깨달음을 기다리지[將心待悟]” 말라고 경계했으며, 1970년대 젠붐에 대하여 초걈 트룽파가 “구도자가 정신성을 ‘궁극적 성취’로, 다시 말해 ‘에고’의 강박적 욕망에 의해 추동된 ‘일종의 성취’로 만듦으로써 미묘하게 자신에게 아첨하고 속이는 것을 ‘정신적 물질주의’라고 비판”한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자력신앙이건 타력신앙이건 ‘구한다’거나 ‘얻는다’는 생각을 버려야 하지만, 근대적 자아에게 자력신앙이 비록 더 친밀하다 하더라도 의식의 수동성을 강조하는 타력신앙이 자아의식의 기만을 극복하는 데 더 적합할 수 있다.
기복신앙은 욕망이 동기가 되었지만 욕망을 초월하고 있다. 기복신앙의 토대는 결코 비도덕적이거나 초월적 존재에 대한 집착이 아니다. 기도는 오히려 더 높은 존재로의 열림을 통해 무아를 체험하며 그것은 불법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고 실제적인 변화를 가져다준다. 이 과정을 거쳐 인간은 더욱 윤리적인 존재가 되며 삶의 종교적 신화적 차원이 열리게 된다.
4. 여성들은 왜 기복을 하는가?
여성의 관점에서 기복은 또 다른 차원을 가진다. 여성의 기도는 분명 욕망에 토대를 두고 있지만, 그 결과를 수혜하는 자는 여성 자신이 아니라 그들의 남편이나 자식, 또는 부모이다. 가족들이 받게 되는 복이 결과적으로 여성 자신의 행복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여성을 그 수혜자라고 말할 수 있으며, 이런 관점에서 여성들의 기도는 가족이기주의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성에게 가정은 그들의 삶의 의미가 구성되는 공간이므로 이 공간을 벗어나 이타주의를 실천하라는 말은 비현실적인 요구이다. 또 어떤 이타주의도 궁극적으로 그 혜택이 자신에게까지 돌아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가족을 위한 여성들의 기복을 이기주의로 몰아붙이는 것은 지나친 감이 있다.
그동안 불교계에서 여성불자들은 주체적이지 못하다는 비판을 들어왔다. 그 주된 이유는 기복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근대적 자아가 불교신행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조절하여 마치 진보적이고 불교적인 것처럼 포장하지만, 그 이면에 자아의 욕망이 자리 잡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과 달리, 여성들의 기복행위에서 더 순수한 불교 정신을 볼 수 있다.
나는 그것을 ‘책임과 희생’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성숙은 ‘책임과 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여성들에게만 해당하는 덕목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여성들이 더 많이 실천했기 때문에 그것을 여성불교의 특징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여성은 참으로 가족에 대한 ‘책임과 희생’을 통해 더 큰 자아로 성숙한다. 그러므로 여성은 초월적 존재의 구원만 기다리는 수동적이고 객체적 존재가 아니라 가족에 대한 ‘책임과 희생’을 다하는 주체적이고 이타적인 존재이다. 기복불교는 그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
다른 한편, 여성들의 ‘책임과 희생’이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들에게 부과된 타자화의 산물이며 따라서 가부장적 여성성이라는 반론도 존재한다. 애멀리 아벨, 마거릿 넬슨 같은 여성심리학자들이 보살핌을 지나치게 낭만화시키고 개인주의화한 점을 비판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보살핌이 여성들에게는 여전히 불평등한 책임을 부과하는 짐으로서 부과되고, 이러한 불평등한 제도가 보살핌의 과정을 왜곡시키고 있음을 밝히기도 했다.
이러한 반론을 충분히 고려하고 보살핌이 남성중심사회의 산물임을 인정하더라도, 유념하여야 할 점은 보살핌은 ‘타자로의 열림’을 전제하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것이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해서는 안 될 가장 불교적인 태도가 아니겠는가?
이 점에서 “삶 가운데 타자와의 관계의 흔적, 타자성이 순수한 상태로 나타나는 상황, 타자성을 자신의 본질로 가지는 타자와의 관계”가 있다고 본 레비나스의 타자철학은 더 긍정적이다. 특히 그는 이러한 관계가 가족 속에 있기 때문에 가족을 모든 도덕성의 근원이자 뿌리로 간주했다. 레비나스의 주장에 따르면, 타자윤리의 보편성은 자아론적인 이기주의를 버릴 것과 자기희생을 요구한다. 인간의 자기 본성은 ‘너’와 ‘나’의 구체적인 사회성과 유대관계에 의해 정의될 수 있는 것이므로 존재의 자기정체성은 바로 타자성에서 논의된다. 따라서 타자성은 주체의 사유 속에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유를 떠나 자기희생과 같은 타인에의 관심과 행위를 통해 실현된다.
일부 여성주의 학자들은 “남을 보살피고 배려하며, 관계를 지향하고, 생명을 중시하는 ‘여성적인 가치들’이 경쟁적이고 비인간화된 사회의 대안적인 가치로서 소중하고 의미 있는 가치”라는 것을 확신하면서도 이 덕목을 강조하는 것이 자칫 여성들에게 일방적인 희생과 전근대적인 굴종을 가져오지 않을까 걱정한다. 그것은 이 가치가 남녀 모두가 실천해야 하는 보편적 가치임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처럼 소극적으로 머물러 있는 한, 여성주의는 많은 여성들에게 힘을 주지 못하고 혼란만 가져다주게 될 것이다.
불교계에서도 ‘무주상보시’와 ‘하심’을 강조하는 태도 때문에 여성들의 책임과 의무의 실천은 여성의 주체성을 부정하거나 누군가에게 종속된 것으로 오해되었다. 그러나 타자로의 열림은 상호적이며 자신의 삶에서 타자의 존재가 필수적이라는 이해 없이는 불가능하다. 김정희가 주장하듯 “무아는 근대적 자아와 달리, 어떤 외적 번뇌나 권위에도 속박당하지 않는, 자기 내면으로부터의 당당함을 지니는 심리적으로 안정적이고 강한 자아라는 긍정성을 지니는 것”이기 때문이다.
안옥선이 지적하듯이 타인에 대한 배려는 자기성찰적 경험에 의존한다. “나의 행복과 너의 행복이 불가분리적으로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타자의 행복을 수반/전제하지 않고서는 나 자신도 행복해질 수 없으며, 나 자신의 행복을 수반/전제하지 않고서는 타자의 행복도 가능하지 않다. 자리이타-적극적 자기 배려는 물론 적극적 타자 배려까지 요청”하는 것이다. 윤대선이 지적하듯이 모든 윤리적 종교적 가치는 궁극적으로 자아의 영역을 벗어나 타자의 영역으로 들어갈 때, 타자의 영역에 관심을 가질 때 실현된다.
그러므로 여성성을 남성성에 대립되는 여성성으로 보기보다 “차이들을 나누는 차이로서 다른 모든 차이와 구분되는 차이뿐만이 아니라 차이의 질 자체로” 이해하는 것이 불교여성주의의 지평을 확대하는 데 필요한 관점이다. 그것은 여성성 속에서 여성을 재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 인간을 재발견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므로 ‘책임과 희생’이라는 여성불교의 장점은 남성들도 함께 배워야 할 소중한 가치이며 보살도의 구현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진정한 책임과 희생정신은 자기방기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책임과 희생’을 기초로 한 여성의 기도는 비록 그것이 초월적 존재에 대한 수동성을 보여준다고 하더라도 가족 내에서는 적극적이며 주체적인 행위로 해석될 수 있다.
4. 불교의 주체로 거듭나기 위하여
지금까지 여성불자들은 불교수행이 자신에게 가져다준 변화를 자신의 가족들에게 전달하고 이타주의를 가족과 사찰을 넘어 더 넓은 차원으로 확산시키는 데 적극적이지 못했다. 가정에서 가부장적 질서에 순종하였듯이 여성들은 사찰에서도 남성 출가자를 중심으로 하는 가부장적 질서에 순종했으며 호혜성의 윤리를 가족관계나 사원에만 한정시켰다. 그 결과 그들의 희생은 가정과 승가에서 가부장적 권위를 강화하고 개별 사찰의 외형적 성장주의를 도왔다. 뿐만 아니라 불교계에서 여성 억압적 관습을 강화하고 이기적이고 권력지향적인 풍조를 만드는 역설적인 상황을 초래했다. 이는 여성들이 자신들의 신행이 갖는 긍정적인 힘과 ‘책임과 희생’의 이타주의의 대안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성격을 확신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다. 거기에는 서구지향적인 불교계의 풍조와 합리주의와 이성을 진보로 착각하여 여성불교를 비하한 남성 엘리트 학자들의 역할도 컸다.
이제 여성불자들은 자신들 신행의 가치를 자각하고 그 가치가 확산될 수 있는 조건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책임과 희생’은 인간의 보편적 윤리이며 성숙이기 때문에 여성만 아니라 남성들도 실천해야 할 덕목이다. 따라서 여성은 이 가치를 확산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여성이 가족을 위해 책임과 희생을 다하는 것이 지극히 주체적인 삶의 방식이듯이 남성 역시 가정에서 가부장적 권위를 버리고 아버지로서 책임과 희생을 다하도록 요청해야 하며, 남성이 사회적 책임을 떠맡듯이 여성들도 자신들의 사회적 책임을 방기해서는 안 된다. 또한 신행생활을 여성들에게 일임했던 남성들에게 함께 신행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동참을 이끌어내야 하고, 남편과 자식들이 자신이 경험한 종교적 체험과 ‘책임과 희생’이라는 덕목을 실천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가족의 종교 대리인인 주부들이 스님들에게 기도를 위임하고 기도금만 보내는 일은 지양해야 한다. 물론 그러한 신행을 통해서도 불보살의 가피가 주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와 같은 대리체험을 통해서는 더 깊은 종교체험을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호혜성에 기초를 둔 ‘주고/받고/되돌려주는’ 선물 교환이 시장경제의 ‘주고받기’ 상품 교환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종교의 세속화는 호혜적 교환관계가 이해타산적 교환관계로 바뀌는 데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미 종교의 상업화와 세속화가 절집 깊이 진행되고 있다. 기도부전이 대신하는 기도는 불교의 세속화를 더욱 부추길 것이다. 가급적 사찰에서 행해지는 기도에 동참하고, 형편이 되지 않으면 가정에서라도 기도를 계속해야 한다.
이와 같은 세속화에는 승려들의 책임도 적지 않다. 신도들에게 바른 법을 전하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잘못이지만 점점 야박해져 가는 절집 인심도 이러한 세속화를 부추기고 있다. 사찰 재정만 생각하여 기도를 한다거나 노골적으로 시주를 요구한다거나 이해타산적인 태도로 신도를 대하고 의식을 집전할 때 정성을 다하지 않는다면 신도들은 곧 실망하고 떠날 것이다. 어찌 보면 신도들의 요구는 단순하다. 스님들이 타산적이지 않고 조금만 더 친절하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불교가 현대화되지 않는 것보다 신도와 승려의 관계가 이해타산적인 교환관계로 변하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한편, 가부장제도가 가정 내의 성 역할의 분담을 가져왔듯이 사찰에서도 성에 따른 역할 분담이 이루어지고 있다. 주로 재가여성과 비구승으로 이루어지는 역할 분담은 ‘책임과 희생’은 대체로 재가여성의 몫이 되고 비구승들에게 가부장적 권위를 부여하는 데 일조했다. 많은 여성불자들의 후원이 주로 비구 스님에게 집중되어 그들의 활동과 위상을 강화하는 데 큰 기여를 했지만 여성불자들의 목소리는 그 누구도 대변하지 않고 있다. 다른 한편, 여성수행자들은 같은 여성이면서도 여성 끼리의 연대에 무관심하여 승단 안의 여성들의 열악한 위치를 스스로 고착화시키고 있다.
재가여성들이 가정에서 보살도를 실천한다면 여성출가자들은 전통적인 가정의 틀 밖에서 보살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가족적 질서를 버리고 평등하고 자유로운 인격으로서의 삶을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출가자들은 다시 승가 안에서 비구/비구니의 가부장적 질서와 비구니 승가 내부의 가족주의에 묶여 있다. 상황은 승가 밖보다 더 심각하다. 지금까지 재가여성과 출가여성은 서로 연대하는 데 무관심했지만 서로 연대한다면 큰 힘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가족 내에서 여성들의 문제에 대하여 출가여성은 종교지도자이면서도 동지적 입장에서 도울 수 있으며 마찬가지로 승가 내에서 여성의 문제에 대해서는 재가여성이 외호자이면서 동지적 입장에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상호연대를 통해 재가여성들은 자신들의 가족에 대한 헌신을 사회로 확산시키고 여성출가자들은 불교발전에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성 출·재가자들의 연대는 여성으로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과 희생’을 실천하고 그 가치를 남성 출·재가자들에게까지 확장시키고, 다시 말해 보살도 정신을 선양하고, 나아가 여성이나 비구니만 아니라 남성 재가신도와 비구승 모두를 위한, 그리고 종단 전체의 발전에 공헌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또한 책임을 진다는 것은 눈앞에 닥친 일만 아니라 연기적 관계를 인식하고 모든 생명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으로 확대되어야 하며, 희생은 복종이나 무분별이 아니라 올바른 수행과 바람직한 미래를 위하여 적극적으로 반대할 수 있는 용기까지 포함해야 한다.
한국여성들의 기복불교가 신행의 순수성을 보존하고 있을 뿐 아니라 여성성에 대한 매우 탁월한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폐해에 대하여 좁은 개인의 관점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 및 사물과 공감할 수 있는 능력, 즉 타자로의 열림을 회복시키고, 가정과 승가의 약자인 여성들이 남성을 비롯한 인간 전체의 발전에 기여하는 “새로운 휴머니즘으로서 페미니즘의 지평”을 연다는 점에서 대안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런 점에서 기복불교를 무시하거나 경시해서는 안 되고 그것이 내포한 긍정적 힘, 즉 지금까지 한국 여성불자들이 보여준 ‘책임과 희생’이라는 덕목을 더 넓혀서 사회 전체를 포용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명 법 / 조계종 교수아사리.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 동 대학원 미학과 졸업(석사· 박사학위 취득). 1993년 출가, 운문승가대학 졸업. 서울대, 운문승가대, 서울대학원 강사 등 역임. 현재 운문사 강사,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학과, 동국대 불교대학원 명상상담학과 강사. 주요 저서로 《선종과 송대사대부의 예술정신》 《미학의 역사》(공저) 등과 〈송대 예술관에 끼친 선종의 영향〉(박사학위 논문)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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