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강연 중계] 대승불교 기원론의 전망 / 사사키 시즈카
사사키 시즈카 / 번역: 종묵
[불교평론 60호]
목차
1. 소승에서 대승으로
2. 대승의 기원에 과한 제설
3. 대승 기원에 관한 최근 동향
4. 파승(破僧) 정의의 전환
5. 상정된 대승의 기원
6. 향후 유효하다고 생각되는 연구영역
7. 과거를 되돌아보며
1. 소승에서 대승으로
이 논문에서는 대승불교의 기원을 둘러싼 연구의 동향을 소개하고 향후 이 문제가 어떻게 전개해 가는지 그 전망을 논술하고자 한다. 또 이 글에서 쓰는 ‘소승’이라는 용어는 그것이 일종의 경멸하는 칭호로 적정성이 결여된 용어인 것은 충분히 알고 있지만 ‘대승’의 대립어로 가장 이미지를 환기시키기 쉬운 것이기에 편의적인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또 문장 중에서 깨달은 후의 고타마 싯다르타에 대해서 ‘석가모니’라고 부르는 것도 필자의 자의적인 호칭이다.
약 2천5백 년 전의 고대 인도에서 성립한 불교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절대 권위로 지키면서 점차 그 세력 범위를 확대해 갔다. 역사 문헌에는 석가모니가 입멸한 후에 불교 승단이 크게 두 개로 분열하고(근본분열), 그것이 또 이차적으로 분열함으로써 약 20개의 부파로 분열(지말분열)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기록이 역사적 사실을 올바르게 전하고 있는지는 매우 의문시되며, 인도불교사를 연구하는 자는 늘 그 신빙성을 의심해야 하는데, 불교승단이 어떤 이유로든 복수의 부파로 분열해 갔다는 사실은 틀림없다. 이와 같은 사실은 비문이나 중국 구법승들의 여행기, 또는 현존하는 불교문헌 속에도 그러한 부파의 존재를 언급하는 기술이 많이 보인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더불어 현재 스리랑카나 동남아국가들에서 행해지는 불교(소위 남방 상좌불교)를 전한 집단이 ‘상좌부’라든가 또는 ‘분별설부’라는 명칭으로 자기들이 분열한 부파 중 하나라고(보다 주관적으로 말하자면 ‘자신들이야말로 분열해서 나간 부파들의 본가이다’고) 자인하고 있는 것도, 불교가 복수의 부파로 분열한 것을 나타내는 중요한 증거라고 여겨졌다. 이 마지막 증거에 관해서는 다소 의문이 남아 있으며 스리랑카 등 남방국가들의 불교집단을 하나의 독립한 부파라고 생각해도 되는지는 단정할 수 없지만, 여하튼 불교 세계가 복수의 부파로 나뉜 것은 사실이다.
그러면 이들 부파는 어떤 가르침을 신봉한 것일까. 남방불교의 가르침은 명확히 소승불교이다. 여기서는 업의 자기책임제를 바탕으로 한 자주적 노력의 필요성이 강조되며 아라한을 향하는 출가수행이 필수 요건이다. 보살도나 회향 또는 다세계 다불의 세계관이란 대승적인 생각이 강조되는 것은 아니다. 또 지금은 이미 존재하지 않지만, 인도불교에서 가장 고도의 철학성을 지녔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도 그 기본 교의는 소승불교에 속한다.
이러한 사실에서 불교의 부파는 모두 소승불교를 신봉했었다는 가설이 성립된다. 즉 석가모니 시대의 불교가 부파분열을 거쳐도 그대로 계승되며, 약 20개로 분열한 부파는 모두 같은 스타일을 답습했다는 가설이다. 그래서 이 가설을 바탕으로 하는 한, 소승이라고 할 때 거기에는 석가모니 시대의 불교나 부파로 분열한 단계의 불교, 그리고 그 말예(末裔)로서 스리랑카 등에 현존하는 불교가 모두 포함되는 것이다.
대승불교는 종래의 소승불교와는 다른 새로운 형태의 사상과 수행법을 설하는 불교이다. 대승경전이 중국에 소개된 시기나 또는 최근 아프가니스탄에서 유출돼 세상에 알려지게 된 신출사본의 연대로 보더라도 대승불교의 발생은 적어도 기원1, 2세기 전이라고 생각되는데 정확한 연대는 불분명하다.
대승불교는 발생한 곳도, 창시자도 확정할 수가 없다. 원래 대승불교라는 것을 단일한 종교사상으로 파악하는 것 자체가 무리이다. 대승불교에는 팽대한 수의 경전이 존재하고 있는데, 그것들은 대승불교라는 하나의 사상을 많은 사람이 각각의 입장에서 말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원래 별개로 존재했던 복수의 집단이 각각의 입장에서 새로운 스타일의 불교를 창작하여 독자의 경전을 작성하고, 그것이 시대와 함께 융합하고 얽히면서 전체로서 대승이라는 큰 흐름을 형성해 갔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대승이란 복수(複數)의 원천에서 동시 병행적으로 발생한 일종의 사회현상으로 봐야 하는 새로운 불교 운동이다.
그러면 새로운 조류인 대승불교와 앞에서 말한 소승불교는 어떻게 관계하고 있는 것일까. 부파불교가 모두 소승불교라고 생각한다면 대승은 부파와 관계없는 곳에서 생겨난 것이 된다. 승단생활을 했던 부파불교 세계와는 다른 장소에서 새로운 교의를 주장하는 복수의 그룹이 나타나, 대승불교 운동을 전개했다는 것이 된다. 확실히 스리랑카 등 남방국가들의 불교나 설일체유부의 불교가 소승불교에 속한다는 사실을 부파 전체에 적용하고, 부파는 모두 소승이었다고 가정한다면 이런 결론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 설일체유부가 후대에 들어서 대승과 밀접하게 연결된 것이 명확하며, 중국 구법승의 기록에서 봐도 대승의 승려와 소승의 승려가 같은 사원에서 살고 있었던 사실 또한 명백하다. 따라서 부파불교가 모두 소승불교의 세계에 한정된다는 주장은 정확하지 않다. 그러면 ‘대승을 신봉하는 부파’라는 것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생각해야 한다. 그 경우, 대승이 부파불교 내부에서 발생했다고 상정하는 것 역시 충분히 가능하다. 즉 소승불교 속에서 대승불교가 태어났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소승과 대승이 어떻게 관계하는가 하는 문제는 대승불교가 도대체 어디에서 생긴 것인가 하는 문제와 같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명하는 것이야말로 현재 불교학계의 중요한 과제이다.
2. 대승의 기원에 관한 제설
소승과 대승의 관계를 생각할 경우 대략 2가지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소승이 원천이 돼서 그 속에서 대승이 태어났다고 하는 것, 또 하나는 소승과는 관계없는 전혀 다른 장소에서 대승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메이지 이후의 불교학에서 최초로 주장되었던 것은 전자였다. 《이부종륜론(二部宗輪論)》을 전거로 들어, 불교는 근본분열로 인해 상좌부, 대중부라는 2계통으로 나뉘었으며, 이 중 대중부 쪽에서 대승불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다. 대중부는 지말분열에 의해 보다 많은 부파로 나뉘었을 것인데 그중 어떤 부파에서 대승이 나온 것인지, 혹은 그 부파와 대승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지, 전혀 다른 것인지 등 구체적인 상황은 전혀 알 수가 없다. 단 대승은 대중부에서 나왔다는 설만이 주장되어 정설이 되었다.
이 설에 의하면 대승불교는 부파불교의 가지 중 하나를 연장한 그 끝에서 나타난 것이 된다. 단 이 설을 승인한다 할지라도 대승불교가 나타난 이유는 전혀 해명되지 않는다. 왜 대중부의 가지 끝에서 불교가 질적 전환을 일으키고, 대승이라는 새로운 사상을 탄생시켜야 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미해결인 채 남아 있다.
계속해서 이 설을 부정하는 형태로 제2의 가능성, 즉 대승은 그 이전의 소승불교의 세계와는 관계없는 다른 곳에서 발생했다는 가능성을 주장하는 설이 등장했다. 이 설은 주창자인 히라카와 아키라(平川彰)의 이름을 따서 일반적으로 히라카와설이라고 불린다. 이 설은 앞의 대중부 기원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치밀하고 고도한 논증 위에 성립돼 있다. 그 개요는 다음과 같다.
아직 대승불교가 나타나지 않고 불교 세계가 소승만일 때(물론 그때에는 소승이라는 명칭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으나) 불교를 담당한 자는 출가자였다. 비구, 비구니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출가자만의 생활공동체인 승단(상가)을 형성하여 독자적인 규율(율장)에 따라서 수행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승단은 인도나 스리랑카 등의 주변 지역에 산재하고 있으며 그 전체가 불교 세계라는 것을 형성하고 있었다. 어느 시기 그곳에, 그때까지와는 다른 생각을 가지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출가자가 아닌 재가자, 즉 일반인이다. 그 재가의 사람들도 역시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신봉하고 있었으나 ‘출가하지 않아도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점이 종래 출가자들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게다가 수행의 결과는 종래의 승단 출가자들보다도 한층 뛰어났으며 소승의 출가자의 마지막 도달 목표인 아라한을 넘은 존재, 즉 불타까지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재가자인 이상 그들이 종래의 불교 승단에 거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자기들의 새로운 불교운동을 기원하면서 거점으로 했던 것은 불타의 유골을 모시는 곳, 즉 불탑(스투파)이었다. 불탑은 엄밀히 말하자면 승단 관할 밖의 성역이며 승단과는 다른 곳에 세워질 때도 잦았다. 그들은 거기에 모여서 자기들의 생각을 가다듬고 석가모니 직설이라는 원칙으로 갖가지 대승경전을 창작했다는 것이 히라카와설이다.
히라카와설에 따르면 대승불교는 그 이전의 소승불교와는 단절된 곳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재가자의 불교라는 것이다. 소승과 대승은 엄밀히 2개로 분할할 수 있는 별개의 불교인 것이다. 어떤 이유로 소승불교 일부가 변질하여 그것이 대승이 되었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 경우 부파는 모두 소승불교를 신봉하고 있었다는 앞의 가설은 글자 그대로 엄밀히 성립된다. 1968년 세상에 등장한 히라카와설은 그 이전의 대중부 기원설을 일축하고, 그 후 30년 이상에 걸쳐 강력한 정설로 지지되었다. 단 이 히라카와설에서도 왜 대승이라는 특이한 새로운 사상이 생겨나야 했는지에 대한 역사적 필연성에 관해서는 충분한 설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승을 단일 기원의 한 가지 사상으로 파악한다면, 우연히 어느 시기에 어떤 사람이 생각나서 만들었다고 해석하더라도 어느 정도 해결이 되겠지만, 그것을 동시 다발적인 사회현상이라고 보는 한 그 역사적 필연성을 추궁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작업이며, 히라카와설은 그 점까지 충분히 설명한 것은 아니었다.
3. 대승 기원에 관한 최근 동향
최근 이 히라카와설에 대한 비판이 다방면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대승불교의 역사를 주의 깊게 거슬러 올라가면 그 앞에는 어떤 식으로든 소승불교의 존재가 보이게 되기 때문이다. 히라카와설에 의문을 가지고 대승불교의 기원을 소승불교 세계 내부에서 구하려고 한 이 새로운 움직임은 동서양 모두가 거부할 수 없는 하나의 큰 흐름이 된 것처럼 보인다.
이는 얼핏 보면 히라카와설이 부정되고 그 이전의 대중부 기원설로 이야기가 역행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학계는 이미 전설 등에 의거해서 대승의 기원을 말할 단계는 아니다. 히라카와가 자신의 설을 펼칠 때 사용한 지극히 실증적이며 역사적인 수법이 다음 세대에는 널리 수용되었으며, 많은 영역에 철저히 적용한 결과 히라카와설 자체에 수정할 필요성이 보이게 되었다는 흐름이다.
따라서 학설의 최종결론만을 보자면 현재는 다시 대승을 소승의 연장선상에 두는 구래의 설로 돌아간 것처럼 보이는데, 실은 그것은 히라카와설을 토대로 전개하는 새로운 불교학의 최신 국면이다. 대승을 대중부의 가지 끝에 위치시킨다는 단순한 구도로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소승불교라는 긴 전통을 가지는 고정화된 세계에서 왜 대승과 같은 혁신적 종교운동이 광범위하게 동시 발생했는지에 대해 연구자는 각각 머리를 짜서 그 수수께끼에 도전하는 중이다.
히라카와설이든, 그 이전의 대승불교 대중부 기원설이든 대승이 발생하는 과정을 도식적으로 나타낼 수는 있어도 발생의 필연성을 해명하지는 못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대승불교의 기원을 탐구하기 위해서 사용된 자료가 대승불교의 자료이기 때문이다.
대승이라는 현상이 일어날 때 거기에는 어떠한 원인이 있다. 그 원인은 당연히 결과보다 앞서 존재해야 한다. 즉 대승불교 발생의 원인은 대승불교가 이 세상에 나타나기 이전에 이미 존재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것을 탐구하는 데 필요한 것은 대승불교가 발생한 후에 쓰인 ‘대승불교의 자료’가 아니라 아직 대승불교가 일어나지 않은 단계의, 그 직전의 상황을 나타내는 자료이다. 이 단계의 정보를 충분히 입수하지 못하는 한 대승 발생의 역사적 필연성을 해명하는 것은 어렵다. 물론 그 정보가 그 후의 대승불교 세계까지 전달되어, 그것이 대승의 경전이나 논서에 기록되고 남아 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종래 수법이 부정되는 것이 아니지만, 대승의 자료만을 중심으로 대승의 기원을 찾는 것은 넘을 수 없는 한계가 존재한다.
그래도 만약 대승이 어느 특정 개인에 의해 만들어진 단일한 사상이었다면 그 정보가 나중에 대승경전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대승의 기원 문제는 훨씬 전에 해결됐을 것이다. 그러나 오래된 연구 축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승불교는 하나의 기원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그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대승이라는 운동이 단일 기원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동시 발생적인 일종의 사회현상으로 나타난 것임을 말하고 있다. 그 경우에는 동시대의 당사자 한 명 한 명에게 일의 전모가 보이지 않았으며 우리가 연구 대상으로 하는 모든 문제를 제대로 파악한 인간은 당시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 된다. 그러한 사람들이 쓴 대승경전에 일의 진상이 사실적으로 기록되어 있다고는 도저히 기대할 수 없다.
4. 파승(破僧) 정의의 전환
상세한 내용은 생략하지만, 필자는 아소카 비문이나 율장, 또는 아비달마라고 하는 대승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자료를 사용해서 대승 성립 직전의 불교 상황을 어느 정도 밝힐 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대승 발생의 원인이 된 어떤 사건의 존재가 부각된 것이다. 대승의 기원에 관한 최근의 연구 일례로 필자의 설을 간략하게 소개하겠다.
불교는 원래 석가모니를 기원으로 하는 단일의 종교였으며 교의도 하나였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불교에는 승단 구성원의 생활규범을 정한 ‘율장’이라고 불리는 규율이 있으며 모든 구성원은 그 율장의 규칙에 따라서 생활하는 것이 의무였다. 율장의 규칙 속에 ‘파승을 계획하는 것을 금지’라는 것이 있다.
파승이란, 불교 승단을 분열시키고 불교 세계의 통일성을 파괴하는 것이며 이것은 불교에서의 최대 최악의 죄 중 하나이다. 파승을 ‘계획한 자’에게는 승잔(僧殘)이란 극히 무거운 죄가 가해진다.
그렇다면 파승이란 구체적으로는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인가. 율의 기술에 따르면 그것은 “석가모니에 배반하는 잘못된 가르침을 주장하는 자가 한패를 모집하고 별개의 승단을 만드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후 아소카 왕 시대에 일어난 불교분열사건을 계기로 파승의 정의가 바뀌었다. “같은 승단 안에서 구성원이 2파로 나뉘고 별개 행사를 집행한다면 파승이다”라고 형태가 변했다. 환언하면 “만약 다른 의견을 주장하는 자가 있더라도 행사만 같이 행하면 모두가 정통의 불교 수행자로서 인정받는다”라는 것이다. 이렇게 파승의 정의가 바뀜으로써 그 이전의 불교는 “교의의 내용에 차이가 있어도 집단 행사만 같이 하고 있으면 모두 불교 수행자이다. 일단 집단행사를 같이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종교로 변모한 것이다. 그 후의 구체적 전개는 아직 충분히 해명되지 않았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불교 세계 전체가 다양한 교의의 병존을 승인하게 됐으며, 다양한 곳에서 일제히 혁신적인 교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생각하면, 소승불교 내부에서 다채로운 대승사상이 동시적으로 병행 발생했다는 현상은 제대로 설명될 것이다.
필자의 설은 대승이 소승불교 세계의 내부에서 발생해 왔다는 아이디어를 지지한다. 보통 그것은 ‘부파불교 속에서 대승이 태어났다’고 환언해도 의미는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이지만 필자 자신은 실은 좀 더 대담한 가설을 생각하고 있다. 부파불교에서 대승이 태어난 것이 아니라 부파불교와 대승은 하나의 같은 현상이 2가지 측면을 나타내고 있다는 생각이다. ‘법장부’나 ‘화지부(化地部)’ 등 각각에 고유 명칭을 가진 복수의 부파가 서로의 존재를 허용하면서 병존하는 부파불교의 상황은, 생각해보면 ‘다른 교의가 병존하는 것을 인정한다’라는 조건이 없으면 생길 수 없다. 내부에 다른 분자가 존재하는 것을 허용한다는 이 태도는 대승불교의 성립요인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부파도 대승도, 불교가 다른 교의의 병존을 용인하게 된 것으로 인해 일어난 새로운 상황이며, 양자의 진전 속도가 달랐기 때문에 외견상으로는 부파불교에서 대승불교가 일어난 것처럼 보이는 것일 뿐인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5. 상정된 대승의 기원
앞 절에서 나타낸 필자의 설을 만일 승인한다면, 대승의 기원에 관해서 이하와 같은 방향성이 필연적으로 인도된다.
▶ 대승불교는 석가모니 이래의 불교 승단 내부에서 생긴 것이며, 히라카와 씨가 말하는 것처럼 재가집단을 기원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단, 대승의 출가자를 지원하는 재가가 존재했다는 것은 당연히 예상된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자면 석가모니 이래의 승단의 내부에 있던 출가자의 일부와, 이를 지원하는 재가자가 일체가 되어 대승불교를 일으켰다는 것이 된다.
▶ 부파불교와 대승불교를 동일한 원인에서 발생한 두 방향의 현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양자는 대립하기보다 오히려 동일 현상의 표리로 봐야 할 것이다. 이후에는 대승불교와 부파불교를 대립 개념이라고 파악할 수 없게 된다.
▶ 엄밀히 말해, 불교사상을 소승과 대승이라는 구분으로 분류할 수는 없다. 불교승단의 내부에서 점차 대승이 나타났다면 그 과정에서는 반드시 일종의 그레이존(공통 부분—역자 주)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소승과 대승 사이에 한 줄을 긋는다면 ‘자신이 향하는 미래는 아라한이다’라고 생각하는 흐름과, ‘자신은 부처를 목표로 한다’고 하는 새로운 방향성의 중간이 될 것이다. 전자 속에서 순간적으로 후자의 움직임이 등장한다는 상황은 생각하기 어렵다. 역시 아라한을 목표로 한 소승불교 세계 속에서 자기 자신이 부처가 된다는 생각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부처가 되기 위한 방법’이 점차 구체화되고, 실현 가능성이 높아진 단계에서 ‘그럼 우리도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새로운 희망이 나타난다. 그러한 상황을 상정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와 같은 그레이존의 존재를 상정할 필요가 있다.
▶ 사상의 다양화가 용인된 것이 원인이 돼서 대승이 발생했다고 한다면 대승은 다원적으로 발생한 것이 된다. 그렇다면 대승의 기원을 단일한 그룹이나 단일한 부파에서 구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물론 그럴 가능성도 고려하면서 연구를 진행시키는 것은 필요한데 결코 처음부터 단일 기원을 상정해서 연구에 착수해서는 안 된다. 일단 연구 방향이 그런 단일 기원설에 빠지게 되면 전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된다.
이상과 같은 방향을 종합해 보면 대승의 기원은 극히 막연한 형태로밖에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마도 대승이라는 것은 실제로 그러한 막연한 모습에서 생겼던 것 같고, 그래서 종래 이루어진 팽대한 연구가 조금도 정리되지 않는 것이다. 대승의 기원을 찾는다고 할 경우, 그것이 어떤 수준의 ‘기원’인지 설정 방법에 의해 답은 달라질 것이다. ‘대승이라는 신기한 불교운동이 일어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위에서 가리킨 필자의 연구결과가 그 답이 될 것이다. 그러나 ‘왜 《반야경》의 사상이 생겨난 것일까’라든가, ‘법화사상의 원류는 어딘가’라는 각각의 문제를 묻는 경우에는 각각의 상황을 설명할 구체적인 답이 요구된다. 대승의 기원에 대한 문제는 물음의 양상에 따라 답이 달라지는 특수한 것이라는 점에 충분히 유의해야 한다.
만약 대승의 기원의 문제에 답을 내려고 했을 때, 거기에는 연구자가 반드시 명기해야 하는 필요조건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을 지적하겠다.
어떤 연구자가 대승의 기원으로서 특정 부파를 언급했다고 하자. 그럴 경우, 그 연구자가 어떤 의미에서 그 부파를 ‘대승의 기원’이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그것은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대승을 단일한 기원에서 일어난 하나의 불교운동이라고 볼 것인가, 아니면 기원을 달리하는 다른 복수 운동의 묶음이라고 볼 것인가. 그 차이로 논증 방법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① ‘대승은 단일 기원에서 출발한 운동으로 시대의 흐름 속에서 분기해 가며 지금과 같은 다양한 계통으로 전개했다’고 상정하고, ‘대승의 기원은 A라는 부파이다’라고 주장할 경우
◇ 대승의 역사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감에 따라 그것은 어떤 하나의 출발점, 즉 A라는 부파로 수속(收束)해 간다는 사실을 주장하게 되는데, 그럴 경우 대승과 부파 A와의 관련성을 나타내는 것만으로는 논증이 불충분하다. 부파 A 이외의 부파에서는 대승이 발생하였을 가능성이 없다는 점을 별개의 논증에 따라 명시해야 한다. 이 논증이 없으면 ‘확실히 A에서 대승이 발생했다고는 할 수 있으나 A에서만 발생하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다른 B나 C에서도 발생하였을 가능성이 남아 있다’라는 것이 된다. 즉 대승과 부파 A와의 관련성을 어느 정도 명확히 지적했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다원적 발생설을 부정할 수 없다.
② ‘대승은 다른 복수의 기원에서 출발한 다원적 운동으로, 그것이 시대적 흐름 속에서 점점 복잡화된 결과 지금과 같은 다양한 계통까지 전개됐다’고 상정한 다음에 ‘대승의 기원은 A라는 부파이다’라고 주장할 경우
◇ 그것은 물론 ‘복수의 대승 기원 중 하나가 부파 A다’라는 주장이기에 그것을 명기해야 한다. 대승은 다원적 종교운동이며 자기가 제시한 것은 그중의 한 계통에만 대한 기원 해명인 점을 명시해야 한다. 그것을 분명히 말하지 않으면 ①의 경우와 혼동되고 쓸데없는 혼란을 일으키게 된다. 또 당연히 ‘부파 A 이외의 남은 기원을 탐구하는 일’과, ‘부파 A에서 일어난, 그 계통의 대승이, 그 후의 역사 속에서 다른 기원에서 일어난 다른 대승과 어떻게 관련하며 융합해서 현재 상황에까지 이르렀는지 명확히 하는 일’이 남아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이 ②의 경우는 대승의 기원을 찾는 길은 끝까지 말해도 종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필자 자신은 앞에서도 주장한 바와 같이 ②의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다. 만약에 대승이 필자가 말하는 바와 같이 부파의 경계를 넘어서 동시에 발생한 다발적 운동이라면, 그것을 총체적으로 부감할 경우, 관계한 복수의 부파의 특성이 갖가지 비율로 섞인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대승의 발생에 대중부가 관계하고 있다면 대승의 도처에 대중부적인 요소가 분명히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대승이 대중부라는 1부파를 기원으로 일어난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대중부 역시’ 관계되었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뿐이다.
법장부나 설일체유부도 각각에 대승의 성립과 관련성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경우에는 대승 속에 법장부의 요소도 있고 설일체유부의 요소도 보이는 상황이 될 것이다. 따라서 대승의 기원을 시작부터 1부파라고 결론짓고 연구를 진행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즉 위의 ①의 가능성에 시계를 한정해서 연구하게 된다. 그러한 연구는 대개 잘될 것이다. 자기가 생각하는 부파의 특성이 팽대한 불교문헌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그 연구자는 ‘역시 생각했던 대로 대승의 기원은 ○○부파였다’고 확신해 그 믿음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된다. 시작부터 대승이 부파를 횡단하는 형태로 발생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고, 게다가 연구가 어느 정도 순조롭게 진행되기에 더욱더 시점이 고정화되는 것이다. 대승의 기원을 탐구할 경우에는 상기 ①, ②의 가능성을 모두 시야에 두면서 논리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반드시 주의할 필요가 있다.
6. 향후 유효하다고 생각되는 연구영역
불탑의 문제
히라카와설은 대승불교의 기원을, 불탑을 중심으로 모였던 재가 불교신자 집단이라고 생각하는데, 최근의 연구가 모두 부정하고 있는 것은 그 설 속의 “대승불교의 기원을 재가신자 집단이라고 생각한다”는 부분만이며, 대승이 불탑신앙에서 시작했다는 설은 아직까지도 부정하지 않는다. 불탑신앙을 중요시하지 않았던 대승 집단도 있었지만 다양한 대승운동 중에는 불탑신앙을 기본 교의로 성립한 계통이 존재했더라도 부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대승의 성립에 관해서는 향후도 불탑신앙과의 관련성을 충분히 고려하면서 연구를 진행할 필요가 있다.
보살의 주처에 관한 문제
최근 히라카와설의 불탑을 대신해 아란야를 대승 발생의 중심지로 생각하는 설이 유포되고 있다. 아란야란 본래 ‘삼림’을 뜻하는 인도어인데 불교에서는 ‘도시나 마을에서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사람이 없는 교외의 땅’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리고 불교 수행자 중에는 도시나 마을 근교에서 이웃들과 밀접하게 교류하면서 생활한 자도 있다면, 고독한 수행생활을 하는 이도 있다. 최근의 어떤 설에는, ‘아란야에서 살며 독자적인 생활을 하는 수행자’가 ‘독자의 사상을 전개하고’ 그 결과로 대승이 생겨났다고 하는 것이다. 분명히 대승이라는 새로운 불교운동의 발생에 아란야가 밀접하게 관련했을 가능성은 높다. 이 문제를 면밀히 조사해 가면 반드시 성과가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승의 기원을 아란야에 한정하는 설은 위험하다. 대승의 발생은 매우 복잡한 상황에서 나타난 현상이며 그 담당자인 대승보살의 주거도 다양한 가능성이 있다. 대승보살 활동 영역의 하나로서 아란야가 있었다는 신중한 전제하에서 이 문제를 추구할 필요가 있다.
대승경전의 정밀한 분석
이 분야의 연구가 대승의 성립상황을 해명하기 위해서 아주 유효하다는 것은 오카다(岡田), 시모다(下田), 와타나베(渡邊), 해리슨(Harrison), 나티에(Nattier) 들의 연구로 실증되었다. 향후 다른 대승경전에 관해서도 같은 방법을 적용하여 거기에서 대승성립에 관한 유효한 정보를 추출하는 것이 필요하다.
대승의 기원 그것에 초점을 맞춘 연구는 아니지만 특정한 계통의 대승경전을 철저히 조사하는 속에서 대승의 기원과 관련되는 중요한 지견을 얻는 경우도 많다(대표적으로 후지타(藤田)의 정토계 경전의 연구가 있다).
불설, 비불설론의 연구
대승이 전통적 불교 승단의 내부에서 생겨난 것이라면 그 새로운 사상을 권위 있는 불설로서 주장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또 그것을 좋게 보지 않은 자들은 권위를 부정하기 위한 반론을 전개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자세히 조사하는 것으로부터, 출가자들의 내부에서 대승사상이 생기고 유지되며 확대해갔던 상황이 구체적으로 해명될 가능성은 높다. 대승의 정통성을 옹호하는 대승교도와, 대승의 비정통성을 주장하는 반(反)대승교도의 논의를 정밀히 증명할 수 있다면 대승은 누가, 어떻게 해서 만들었는가의 의문에 대한 답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 이 영역의 연구는 아비다르마 불교와 대승과의 접점을 해명하는 의미에서도 아주 유망한 분야이다. 현재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취급하는 연구자로서는 혼조(本庄), 후지타 등이 있다.
대승의 발생과 동 시기에 제작된 자료의 조사
대승불교가 성립한 시기는 특정되지 않지만 사상으로서 성립은 대략 기원 전후 2, 3백 년간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시기와 그 직전에 성립한 대승 이외의 자료에는 대승 발생 상황이 비교적 객관적 태도로 기록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것을 추출할 수 있으면 대승의 기원을 해명하기 위한 미지의 정보를 대량으로 입수할 수 있게 된다. 동 시기 자료로 가장 가치가 있는 것은 말할 나위 없이 비문 등의 고고학적 자료이며, 그 유효성은 쇼펜(Schopen)이 실증했으나 그 외로 율 문헌, 아비다르마 논서(그중에서도 《바사론(婆沙論)》을 중심으로 하는 유부의 아비다르마 논서), 빨리어 불교권에 전해진 주석서들, 그 주석서에서 복원된 고주석류(시하라아타카타 및 bhanāka들의 설)가 새로운 연구대상으로 주목된다. 이 자료들에 관해서는 이미 무수의 연구가 발표되었지만, 그것을 대승의 성립과 관련짓고 역사적 시점을 조사한 연구는 아직 드물다. 향후 이 영역에서 새로운 대승불교 연구의 기점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이 문제에는 모리소도(森祖道)와 그의 학적 계몽을 받은 많은 젊은 연구자들이 연구를 시작하고 있다.
남방분별설부(소위 남방상좌부)와 《바사론》 이전의 유부의 정체 해명
필자는 앞에서 소개한 연구에서 대승의 기원에 관한 필자의 설을 제시했다. 거기서 이끌어낸 결론 중 하나로 스리랑카 등에 전해지는 남방상좌불교 및 《바사론》이 나타나기 전의 설일체유부는 부파의 개념으로 파악되어야 하는 집단이 아니라, 부파 성립 이전 더 오래된 형태의 불교 세계를 체현하려는 것이라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생겼다. 따라서 이러한 불교집단이 우리가 종래 상정했던 것처럼 독립된 하나의 부파로서 불교집단인지, 또는 부파 이전의 집단인지의 문제를 설정하고, 해결할 필요가 있다. ‘부파불교의 존재’ ‘대승불교의 발생’이라는 불교 특유의 기이한 두 가지 현상을 하나로 해명하려는 것은 조금 무모한 시도이기는 하지만 도전 가치가 충분하다.
‘대승’이라는 명칭의 연구
이것은 카라시마 세이시(辛嶋靜志)가 제시한 흥미로운 설로, 대승 즉 mahāyāna라는 말이 원래는 mahājñāna였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명칭 문제에서 멈추지 않고 대승이라는 운동이 어떤 환경에서 태어났는가 하는 대승의 기원에 관련되는 중요한 문제까지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향후의 경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상이 대승의 기원을 해명하는 데 유효하다고 여겨지는 연구영역이다. 필자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대승불교는 단일한 원천에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어떤 사상이라도 불교로 수용한다’는 새로운 승단의 운영 형태가 계기가 돼서 동시 발생적으로 일어난 폭넓은 종교운동이라는 것이 된다. 이에 대한 당면한 과제는 되도록 많은 가능성을 고려하면서 폭이 넓은 종교운동으로서 대승의 역사적 변천을 큰 시점에서 파악하고, 한편으로 대승 내부의 개개의 계통에 관해서 면밀히 발생 상황을 해명하는 2단계의 연구태도가 요구된다.
7. 과거를 되돌아보며
일본에서는 대승의 기원을 둘러싼 연구사에서 히라카와설의 영향은 아주 컸다. 필자가 불교학계에 발을 들여놓은 1980년쯤에는 히라카와설이 절대적인 권위였으며 대승의 본질을 말할 경우 거의 모두가 히라카와설에서 시작하는 상황이었다. 우선 히라카와설이 있고, 대승에 관한 논의는 모두 그것을 토대로 구축되어야 했다. 따라서 히라카와설과 맞지 않은 설은 무시되는 경향이 강했다. 히라카와설의 안목은 ‘대승운동을 담당한 사람은 불탑을 거점으로 하는 재가자 집단이었다’고 하는 점에 있기 때문에 이것과 상반하는 설, 즉 ‘대승운동은 기존의 출가 승단 내부에서 발생했다’는 생각은, 그 생각의 근거에 얼마나 타당성이 있는지를 묻기 전에 처음부터 고찰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대승의 기원에 관한 학설은 처음 전설을 바탕으로 하는 ‘대중부 기원설’이 나타나며, 그것을 비판하고 무너뜨리는 형태로 히라카와설이 나타났다고 앞에서 언급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흐름의 큰 틀을 나타냈을 뿐이다. 개별적으로 상세히 살펴보면 히라카와설이 나타나기 이전, 이 흐름과는 떨어진 곳에서, 다양한 연구자들의 개성적 아이디어는 산재했다. 그중에는 전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안이한 방법이 아니라 치밀한 문헌연구 결과로써 ‘대승은 출가승단 속에서 나타났다’고 주장하는 것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우수한 성과도 ‘대승운동이 출가승단 속에서 나타났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반(反)히라카와설’로 일괄 경시됐다.
히라카와설이라는 큰 파도가 밀려간 지금, 이와 같은 ‘잃어버린 성과’가 다시 얼굴을 내밀고 빛을 내고 있다. 필자가 현재 주목하는 것은, 키무라 타이켄(木村泰賢)과 니시 기유(西義雄)의 연구이다. 그들은 아비다르마 문헌을 철저히 고찰하면서 아비다르마 불교에서 대승으로 이어가는 길을 찾으려고 했으며, 실제로 어느 정도의 실마리를 발견했다. 그들의 성과는 히라카와설 전성시대에는 거의 누구도 평가하지 않았으나 지금이야말로 그 진정한 가치를 물을 때다. 대승이 대중부라는 단일한 부파에서 일직선으로 발생한 것은 아니고, 불탑을 중심으로 한 재가집단에 의해 만들어진 것도 아니며 광범위 출가승단 세계에서 어떤 미지의 과정을 거쳐 나타난 것이라면, 소승과 대승 사이의 연결을 문헌학에서 꾸준히 해명하려고 했던 이들 선학 연구야말로 가장 고마운 이정표가 되는 것이다.
필자는 소승이 대승으로 변용할 때 세계관의 변화가 매우 중요한 작용을 했다고 생각한다. 즉 소승의 단계에서는 세계에 불타는 한 명밖에 나타나지 않았고 동시에 2명 이상의 불타가 출현하는 일은 없다는 정해진 규칙이 있었다. 그렇다면 무불의 세상에 태어나 버린 우리에게는 불타를 만나서 서원을 세우고 보살이 되어 자기 자신도 불타로 향하는 길은 완전히 닫혀버린 것이 된다. 이런 상황을 타개해서 보살의 길을 모든 중생에 개방하기 위해 “다수의 세계가 있고 거기에는 지금도 다수의 불타가 살고 있다”고 하는 다불(多佛, 他佛) 사상이 고안되었다. 그렇게 되면 각각의 세계의 불타와 만남으로써 지금 현재의 우리에게도 불타가 될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이것이 대승이라는 신사상의 근본 토대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에서의 세계관을, “지금 현재도 어딘가에 불타는 있는 것인가. 만약에 있다면 어떻게 그 불타를 만날 수 있을까”라는 시점에서 봄으로써, 소승에서 대승으로의 변천 과정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실은 이러한 연구방침은 이미 80년도 더 이전에, 기무라 타이켄이 지적했다(木村泰賢 《小乗仏教思想論》 pp.100-101에서 인용. 구자(舊字), 가나 등 일부를 현재 사용하는 말로 고쳤다).
과거에 7불, 24불 혹은 수만의 부처가 있었다는 것은 제파가 일치해서 인정하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동시에 다른 세계에도 불타가 존재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을 경전에 비추어 보니 여래와 윤왕(輪王)과는 동등하게, 이륜왕(二輪王)이 나란히 나타나는 일이 없는 것처럼, 2불이 나란히 나타나는 일도 없다는 것은 시종 명확하다. —(중략)— 이렇게 이 문제에 대한 신학적 논구(論究)와, 유부를 비롯하여 2불 병출(竝出)을 부정하고, 이 전 우주에는 유일하게 1불만 존재하며, 그 감화의 범위로 하는 것에 일치하더라도, 대중부나 대중부의 영향을 받은 경량부와 같이 된다면, 다불 동시 존재를 주장한다. 이에 관한 문답은 구사론 제12에 게재되었는데, 이에 의하면, 일불파는 “여래의 위력은 시방의 삼천대천세계에 미치기 때문에 다불병출의 필요가 없음”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다불파는 “현재 많은 보살이 있고 불도를 수행하고 있는 한, 다른 삼천대천세계에는 또, 다른 부처도 있고 출현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을 부정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닌가. 게다가 경에 2불이 나란히 나오는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은, 이 세계(삼천대천세계)에 한정되는 것이라서, 굳이 다불을 부정하는 재료가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다불파는 분명히 후대의 대승적 불타관의 선구가 되었지만, 아직 후대의 대승과 같이, 다른 땅의 부처와, 이 세계의 유정과의 사이에 구체적인 관계를 인정하는 데까지는 아직 도달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을 잊으면 안 되는 것이다(중간의 출전 등 생략—사사키).
대승불교의 기원을 찾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부처가 될 수 있을까. 석가가 열반에 들어 무불의 세상이 된 지금, 그렇더라도 우리가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은, 왜일까”라는 물음에, 대승의 여러 계통이 각각 어떠한 답을 주고 있는지 그것을 체계적으로 조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것을 골자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대승의 계통수(系統樹)를 어느 정도 명쾌하게 내다보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것을 실마리로 다양한 대승운동의 기원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가깝게 접근하는 일이 가능하지 않을까 기대한다. ■
사사키 시즈카(佐々木閑) / 하나조노대학 교수. 교토대학 공학부 및 문학부 철학과 졸업(불교학 전공).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캠퍼스 불교학과 유학. 주요 논저로 《출가란 무엇인가》 《인도불교 변이론-왜 불교는 다양한가?》 《생물학자와 불교학자-7개의 대론》 등의 저서와, 번역서 스즈키 다이세츠의 《대승불교 개론》 외 다수의 논문이 있다.
종묵 / 해인사 승가대학 교수사. 해인사에서 출가. 해인사 승가대학 졸업. 일본 하나조노대학에서 《육조단경의 연구》로 박사 학위 취득. 하나조노대학 국제선학연구소 연구원, 북경대학, 청화대학 방문학자, 해인사승가대학 학장 등 역임. 저서로 《조계종 총림의 역사와 문화》(공저)가 있고, 주요 논문으로 〈초기 선종사의 연구〉 〈덕이본 《육조단경》 제본의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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