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청(德淸)은 명말 4대사중의 한 사람이다. 연지주굉(蓮地株宏), 자백진가(紫柏眞可), 감산덕청(감산德淸), 우익지욱(우익旨旭)을 세상에서는 명대의 4 고승이라 한다.
감산덕청은 속성은 채씨(蔡氏)이고 안휘(安徽)의 금능(金陵)에서 태어 났다. 20세에 남경 보은사(報恩寺)에서 출가 하였다. 주지스님 서림명법(西林命法) 손준공(孫俊公)이 그에게 [법화경]을 독송하게 하였는데 4개월만에 능히 외우게 되었다.
그리하여 서림(西林)은 그의 총명함을 보고 사서역경(四書易經)및 고문시부(古文詩賦)등을 배우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젊은 나이인데도 능히 시를 쓰고 작문을 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내외의 황로지학(黃老之學) 에도 박통(博通) 하였다.
1564년 그는 운곡(雲谷 法谷)을 섭산(攝山)의 서하사(栖霞寺)에서 배알(拜謁)하였을 때 중봉광록(中峰廣錄)을 얻어 읽고 그케 감동하여 선(禪)을 배우기로 결심 하였다. 같은 해 겨울에 또 무극(無極 明信)으로부터 화엄현담(華嚴玄談)을 청강(聽講)하고 청량(淸凉)을 앙모(仰慕)하게 되었다.그러므로 호를 스스로 징인(澄人)이라 지었다 한다.
그해에 무극(無極)으로부터 구족계도 받았다. 몇년이 지난 후 보은사에서 의학(義學)을 설립하고 수행승들을 교육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승려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그후에 진강(鎭江) 금산사(金山寺)의 초빙에 응하여 2년동안 후학을 가르치고 염불공안도 얻었다.
1571년 전국을 유랑하고 그는 더 공부를 하기 위하여 북으로 갔다. 먼저 북경에 가서 법화(法華)와 유식(唯識)을 청강(聽講)하고 또 편웅 진원(編融 眞圓), 소암 덕보(笑巖 德寶)의 두 스님에게 공부를 배우고 선요(禪要)의 가르침을 청 하였다.
1573년 오대산을 유람하고 나서 감산은 북대(北臺)의 풍경이 기이하고 수려함을 보고 흥취가 있어 자호(自號)를 감산이라 지은 듯이 여기에 있다 한다. 또 얼마되지 아니하여 북경 서산에 돌아와 당시의 명사(名士) 왕차공(王次公). 구정백(歐楨伯)등과 알게되어 시문(詩文)을 주고 받았다.
1574년 그는 북경을 떠나서 행각(行脚)에 들어가서 숭산(嵩山).낙양(洛陽)을 유람하고 산서포주(山西蒲州)에 가서 묘봉(妙峰)을 뵈옵고 그와 함께 오대산에 가서 북대쪽의 용문(龍門)에 거주하면서 오로지 참선에 주력하였다.
1576년 주굉(株宏)이 오대산을 유람할 때 특별히 그를 방문하고 5일간의 담화를 나누고 이별 하였다. 1581년 신종(神宗)의 자성태후(慈聖太后)가 사람을 오대산에 보내서 기저도량(祈儲道량)을 설치하고 사리탑을 세웠다. 그와 묘봉은 함께 그 도량에서 무차법회(無遮法會)를 열고 원만히 회향하게 되었으며 이 법회에는 500여명의 대중이 참석 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한 1년동안 오대산에서 화엄현담(華嚴玄談)을 강론하였는데 청중이 근 1만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1583년 그는 뢰산(牢山)에 가서 나라연굴(那羅延窟)에서 토굴을 짓고 안거 하면서 감산이란 별호(別號)를 쓰기 시작 하였다. 그때에 이미 명성이 대단히 높았다. 황태후가 사신으로 하여금 삼천금을 보내면서 암자를 건립해서 거주하라 했는데 그때 산동(山東)에서 재황(災荒)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 비용을 가지고 굶주린 빈민을 구하고자 건의를 드리고 전액을 그들에게 보시 하였다.
1586년 신종(神宗)은 대장경 15부분을 인쇄하여 전국 명산에 보내었다. 자성태후는 특별히 일부를 동해뢰산(東海牢山)에 보내었는데 안치할 곳이 없었기 때문에 또 재시(財施)를 베풀어서 사찰을 짓고 해인사(海印寺)라 칭하고 스님을 모시었다.
1595년 신종은 황태후가 불사에 많은 자금을 소비하는 것을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던 중 태후가 조정 대신으로 하여금 다시 뢰산으로 불사금을 보내게 되었는데 이 신하가 공교롭게도 황제가 미워하는 신하였다. 황제는 신하와 감산 덕청에게 무고한 죄를 뒤집어 씌워 포박하고 하옥 하였다. 죄명은 사사로히 사원을 창립했다는 것이고 그 결과로 군에 충당되어 광동뢰주(廣東雷州)로 유방(流放)가게 되었다.
1600년 가을에는 남소장관(南韶長官) 도축(道祝)이 조계로 모시고자 공식을 청하였다. 그때에 남화사는 이미 쇄락된지 오래 되었다. 그가 도착한 후 절안을 정리하고 승(僧)을 뽑아 계를 받게하여 사미를 배양하고 스님들이 공부하는 강당을 열고 청규(淸規)를 정립(訂立)하니 1년 사이에 백폐(白廢)가 모두 사라지고 다시 선풍이 널리 살아나게 되었다.
1603년에 요서(妖書)사건에 모함되어 뢰주로 되돌아 가게 되었다. 1606년에 명나라 조정에서 특사가 대려 덕청은 다시 조계로 돌아오게 되었다. 1613년 영호(靈湖)의 만성사(萬聖寺)에서 주석 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능엄통의(능嚴通議), 법화통의(法華通議),기신논략소(起信論略疏)를 쓰고 아울러 개강(開講)도 하였다. 1614년 그곳을 떠나 1616년에 구강(九江)의 여산에 다다라서 머물다
1617년 항주(杭州)의 운서사(雲栖寺)에 머물며 여러곳을 다니며 설법을 하여 불법을 널리 알렸고 1622년 다시 조계로 돌아 왔다.
1623년 10월11일에 조계 남화사에서 원적(圓寂)하시니 세수는 78세였다. 1640년 제들이 스님의 유해(遺骸)에 옷칠을 하여 탑원(塔院)에 모시었다. 조계는 원래 중국 선종의 조정(祖庭)이 된다. 그러나 명말에 이를러 이미 황폐화되어 있었다. 덕청에 이르러서 다시 선풍을 일으키고 청정도량으로 경영(經營)을 하니 비로소 옛모습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를 조계의 중흥조사(中興祖師)라고 말한다.
덕청 감산은 일생동안 홍법(弘法)에 힘을 썼으며 가르친 제자도 아주 많다. 덕청은 젊었을 때 부터 시문과 서법(書法)에도 널리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그는 말하되, "옛사람이 시로써 선(禪)을 비부(比附)해 묘사 했으나 시만 알고 진선(眞禪)은 또한 알지 못하였다." 하였다. 그는 또 말하길 " 세인들이 도연명(陶淵明)과 이태백(李太白)의 시경(詩境)은 현묘(玄妙)하다고 한다. 그러나 선과 선의 미(味)는 잘 알지 못한 거이고 왕유(王維)의 시에도 불어(佛語)가 많이 나오고 있어 후인들이 비록 그를 과장해서 선을 잘 안다고 하였으나 문자선(文字禪)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거의 사상과 학설은 여러 방면에서 표현되고 있어 일종일파(一宗一派)를 지키는데 구애되지 않았다. 그는 염불과 참선을 겸하여 닦는 행이 가장 온당한 법문이 된다고 하였다.
그는 좌선에 대해서 " 소위 좌선이라 하지만, 선은 또한 앉아 있는데 속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앉아 있는 것으로써 선이라 한다면 행주좌와(行住坐臥) 사위의(四位義)는 무엇 때문에 말하는 것일까? 또 선이란 것은 바로 마음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심체가 적멸한 것을 알면 본래 스스로 동하지 아니 하나니 무엇이 있어 행주좌에 꺼리끼겠는가? 진실로 자심(自心)을 깨닫지 못하면 비록 앉아 있다고 해도 이익이 없다. 곧 대정(大定)이 아니다. 소위 선은
항상 정(定)에 있는 것이 아니고 정이 아닌 때가 있어서는 아니된다".
그는 또 대중들에게 염불을 가르쳐 말하되, "현재 염불하는 사람이 곧 자성미타(自性彌舵)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하는 정토(淨土)는 마음이 깨끗하면 극락이다. 모든 사람이 진실로 염념불망(念念不忘)하면 마음 마음에 미타부처님이 출현하며 걸음걸음이 극락세계의 가향(家鄕)이 된다. 그렇게 되면 무엇 때문에 멀리 십만억 국토밖에 따로 정토가 있어 돌아가려고 하겠는가?"
덕청스님이 불교내에서 주장했던 것은 선정쌍수(禪淨雙修)이고 외전(外典)에 대해서는 유(儒).도(道).석(釋)의 삼교의 조화를 선전하고 있다. 그것은 그가 쓴 도덕경해(道德經解)의 권두(卷頭)에 쓴 관노장영향론(觀老莊影響論) 가운데에서 그는 삼교의 조화사상을 극력 주장 하였다.
그는 말하되, "학문을 배우는데 세 가지 요긴한 것이 있는데 즉 춘추(春秋)를 알지 못하면 능히 세상을 섭수(攝受) 할 수가 없고, 노장(老莊)을 정연(精硏) 하지 않으면 능히 세상을 잊을 수가 없고, 참선을 하지 아니하면 세상에서 나올 수가 없다"고 하였다.
또한 감산스님은 "나는 젊어서 유불선을 다보고 물러가서 깊은 산 흐르는 물가에 고요하게 앉아서 마음을 관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서 삼계가 오직 이 마음 하나이며 만법이 오로지 이 마음의 무딤인줄을 알았다. 이 심식(心識)을 관하여 보니 일체형상이 오직 마음의 그림자이며 일체 소리가 마음의 묘아리이다. 이 마음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일체 성인의 그림자를 단정히 쫓아 가는 것이며 일체 언교(言敎)는 모두 이 묘아리를 순(順)하는 것이다. 만법은 오직 마음으로 짖는 일이다.
세상을 다스리고 생을 돕는 업 등과 듣고 말하는 것이 모무다 정법을 순하는 것이다. 이 마음 밖에 법이 없으므로 법이 모두 다 진(眞)이다. 그런데 미(迷) 한 사람은 집착 때문에 묘(妙)하지 아니함이 없다. 만약 자기의 마음을 깨달으면 법이 묘하지 아니함이 없다. 심(心)과 법(法)이 다 묘(妙)한 것은 오직 성자라야 능하게 알 수있다".라고 하였다.
'육신불 (肉身佛)'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육신불(肉身佛) - 설봉 의존(雪峰義存.822-908) (0) | 2015.05.03 |
---|---|
육신불(肉身佛) - 석두 희천(石頭希遷. 700-790) (0) | 2015.05.02 |
육신불(肉身佛) - 사조 도신(四祖道信. 580-675) (0) | 2015.05.02 |
육신불(肉身佛) - 해옥 무하(海玉無瑕. 1513-1639) (0) | 2015.05.02 |
육신불(肉身佛) - 김 교각 스님( 지장법사(地藏法師. 696-794)) (0) | 2015.05.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