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역 아함경/장아함경

13.대연방편경(大緣方便經)

실론섬 2015. 5. 21. 18:24

13.대연방편경(大緣方便經)

(경의 이역본으로는 후한 시대 안세고가 한역한 『불설인본욕생경(佛說人本欲生經)』과 송 시대 시호(施護)가 한역한 『불설대생의경(佛說大生義經)』이 있으며, 같은 내용의 경으로는 『중아함경』제 24권97번째 소경인 「대인경(大人經)」이 있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구류사국(拘流沙國)의 겁마사(劫摩沙) 마을에서 큰 비구 대중 1,250명과 함께 계셨다.

  

그때 아난은 고요한 곳에서 이렇게 생각했다.

'너무도 기이하고 특별하구나. 세존께서 말씀하신 열두 가지 인연법의 광명은 매우 깊어 알기 어렵구나. 그러나 내가 마음 속으로 관찰해 보니 마치 눈앞에 있는 일과 같은데 무엇 때문에 깊은 이치가 있다고 하는가?'


그렇게 생각한 아난은 곧 고요한 곳에서 일어나 부처님께 나아갔다. 부처님의 발에 이마를 대어 예배하고 한쪽에 앉아 세존께 여쭈었다.

“저는 아까 조용한 방에서 잠자코 혼자 생각하기를 '참으로 기이하고 특별하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열두 가지 인연법의 광명은 매우 깊어 알기 어렵다. 그러나 내가 마음 속으로 관찰해 보니 마치 눈 앞에 있는 일과 같은데 무엇 때문에 깊다고 하는가'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때 세존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만두라, 그만두라. 그런 말을 하지 말라. 아난아, 이 열두 가지 인연법의 광명은 너무도 심오하며 이해하기 어렵다. 아난아, 이 열두 가지 인연법은 보기도 어렵고 알기도 어렵다. 모든 하늘ㆍ악마ㆍ범천ㆍ사문 바라문으로서 아직 인연법에 대하여 관찰하지 못한 자가 만일 생각으로 헤아려보고[思量] 관찰하여 그 이치를 분별하려고 한다면 곧 정신이 아득하여 관찰해 볼 수 없을 것이다. 


아난아, 내가 이제 너에게 말해 주겠다. 늙고 죽음에는 연(緣:外緣)이 있다. 만일 누가 '무엇이 늙고 죽는 연인가'라고 묻거든 너는 그에게 '생(生)이 늙고 죽음[老死]의 연이 된다'라고 대답하라. 또 누가 '어떤 것이 생의 연인가' 하고 묻거든 너는 그에게 '유(有:존재)가 생의 연이 된다'라고 대답하라. 또 누가 '무엇이 유의 연인가'라고 묻거든 너는 그에게 '취(聚)가 유의 연이 된다'라고 대답하라. 또 누가 '무엇이 취의 연인가'라고 묻거든 너는 그에게 '애(愛)가 취의 연이 된다'라고 대답하라. 또 누가 '무엇이 애의 연인가'라고 묻거든 너는 그에게 '수(受)가 애의 연이 된다'라고 대답하라. 또 누가 '무엇이 수의 연인가'라고 묻거든 너는 그에게 '촉(觸)이 수의 연이 된다'라고 대답하라. 또 누가 '무엇이 촉의 연인가?'하고 묻거든 너는 그에게 '6입(入)이 촉의 연이 된다'라고 대답하라. 또 누가 '무엇이 6입의 연인가'라고 묻거든 너는 그에게 '명색(名色)이 6입의 연이 된다'라고 대답하라. 또 누가 '무엇이 명색의 연인가'라고 묻거든 너는 그에게 '식(識)이 명색의 연이 된다'라고 대답하라. 또 누가 '무엇이 식의 연인가'라고 묻거든 너는 그에게 '행(行)이 식의 연이 된다'라고 대답하라. 또 누가 '무엇이 행의 연인가?'라고 묻거든 너는 그에게 '치(癡)가 행의 연이 된다'라고 대답하라.

  

아난아, 이와 같이 치(癡)를 연(緣:外緣)으로 하여 행(行)이 있고 행을 연으로 하여 식(識)이 있으며, 식을 연으로 하여 명색이 있고 명색을 연으로 하여 6입이 있으며, 6입을 연으로 하여 촉이 있고 촉을 연으로 하여 수가 있으며, 수를 연으로 하여 애가 있고 애를 연으로 하여 취가 있으며, 취를 연으로 하여 유가 있고 유를 연으로 하여 생이 있으며, 생을 연으로 하여 늙음과 죽음과 걱정과 슬픔과 고뇌 등 큰 근심[患]의 덩어리가 있다. 이것이 큰 고음(苦陰)의 연이 된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생을 연으로 하여 늙고 죽음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만일 일체 중생이 생이 없다면 그래도 늙음과 죽음이 있겠느냐?”

아난이 대답했다.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난아, 이 연법(緣法)을 통해서 늙음과 죽음은 생으로 인하여 생기고 생을 연하여 늙음과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말한 이치가 여기에 있다.”

  

또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유를 연하여 생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만일 일체 중생이 욕유(欲有 :欲界)ㆍ색유(色有:色界)ㆍ무색유(無色有:無色界)가 없다면 그래도 생이 있겠느냐?”

“없을 것입니다.”

“아난아, 나는 이러한 연법을 통해서 생은 유로 인하여 생겨나고 유를 연하여 생이 있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말한 이치가 여기에 있다.”

  

또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취를 연하여 유가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만일 일체 중생에게 욕취(欲取)ㆍ견취(見取)ㆍ계취(戒取)ㆍ아취(我取)가 없다면 그래도 유가 있겠느냐?”

 “없을 것입니다.”

“아난아, 나는 이러한 연법을 통하여 유는 취로부터 생겨나는 것이고 취를 연하여 유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말한 이치가 여기에 있다.”

  

또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애를 연하여 취가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만일 일체 중생에게 욕애(欲愛)ㆍ유애(有愛)ㆍ무유애(無有愛)가 없다면 그래도 취가 있겠느냐?”

“없을 것입니다.”

“아난아, 나는 이러한 연법을 통해서 취는 애로부터 생겨나고 애를 연하여 취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말한 이치가 여기에 있다.”

 

또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수를 연하여 애가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만일 일체 중생에게 낙수(樂受)ㆍ고수(苦受)ㆍ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가 없다면 그래도 애가 있겠느냐?”

“없을 것입니다.”

“아난아, 나는 이 연법을 통해서 애는 수로부터 생겨나고 수를 연하여 애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말한 이치가 여기에 있다.

  

아난아, 마땅히 알라. 애(愛)를 인하여 구함[求]이 있고 구함을 인하여 이익[利]이 있고 이익을 인하여 씀[用]이 있고 씀을 인하여 욕심[欲]이 있고 욕심을 인하여 집착[著]이 있고 집착을 인하여 질투[嫉]가 있고 질투를 인하여 지킴[守]이 있고 지킴을 인하여 보호[護]가 있다. 아난아, 보호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칼과 막대기와 다툼[諍訟]이 있어 무수한 악을 짓는다. 내가 말한 이치가 여기에 있다.

  

아난아, 이것은 무슨 뜻인가? 만일 일체 중생들로 하여금 보호함[護]이 없게 한다면 그래도 칼과 막대기와 다툼[靜訟]이 있어 무수한 악을 일으키겠느냐?”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난아, 나는 이 연법을 통하여 칼과 막대기와 다툼은 보호로부터 일어나고 보호를 연하여 칼과 막대기와 다툼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난아, 내가 말한 이치가 여기에 있다.”

  

또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지킴[守]을 인하여 보호가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만일 일체 중생들로 하여금 지킴이 없게 한다면 그래도 보호가 있겠느냐?”

“없을 것입니다.”

“아난아, 나는 이 연법을 통해서 보호는 지킴으로부터 생겨나고 지킴을 인하여 보호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말한 이치가 여기에 있다. 


아난아, 질투[嫉]로 말미암아 지킴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만일 일체 중생들로 하여금 질투를 없게 한다면 그래도 지킴이 있겠느냐?”

“없을 것입니다.”

“아난아, 나는 이 연법을 통해서 지킴은 질투로부터 생겨나고 질투를 연하여 지킴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말한 이치가 여기에 있다. 


아난아, 집착[著]으로 인하여 질투가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만일 일체 중생들로 하여금 집착을 없게 한다면 그래도 질투가 있겠느냐?”

“없을 것입니다.”  

“아난아, 나는 이 연법을 통해서 질투는 집착으로부터 생겨나고 집착을 연하여 질투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말한 이치가 여기에 있다. 


아난아, 욕심[欲]으로 인하여 집착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만일 일체 중생들로 하여금 욕심을 없게 한다면 그래도 집착이 있겠느냐?”

“없을 것입니다.”  

“아난아, 나는 이 연법을 통해서 집착은 욕심으로부터 생겨나고 욕심을 연하여 집착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말하는 이치가 여기에 있다. 


아난아 씀[用]을 인하여 욕심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만일 일체 중생들로 하여금 씀을 없게 한다면 그래도 욕심이 생기겠느냐?”

“없을 것입니다.”  

“아난아, 나는 이런 이치를 통해서 욕심은 씀으로부터 생겨나고 씀을 연하여 욕심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말한 이치가 여기에 있다. 


아난아, 이익[利]을 인하여 씀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만일 일체 중생들로 하여금 이익을 없게 한다면, 그래도 씀이 있겠느냐?”

“없을 것입니다.”  

“아난아, 나는 이런 이치를 통해서 씀은 이익으로부터 생겨나고 이익을 연하여 씀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말한 이치가 여기에 있다. 


아난아, 구함[求]을 인하여 이익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만일 일체 중생들로 하여금 구함을 없게 한다면 그래도 이익이 있겠느냐?”

“없을 것입니다.” 

“아난아, 나는 이 연법을 통해서 이익은 구함으로부터 생겨나고 구함을 연하여 이익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말한 이치가 여기에 있다. 


아난아, 애(愛)를 인하여 구함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만일 일체 중생들로 하여금 애를 없게 한다면 그래도 구함이 있겠느냐?”

“없을 것입니다.” 

“아난아, 나는 이 연법을 통해서 구함은 애(愛)으로부터 생겨나고 애를 인하여 구함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말한 이치가 여기에 있다.”


또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애를 인하여 구함이 있다. 이리하여 지키고[守] 보호함[護]에 이르기까지의 이치도 마찬가지이며, 수(受)도 또한 그와 같아서 수를 인하여 구함이 있으며, 나아가 지키고[守] 보호함[護]에 이르기까지의 이치도 마찬가지이다.”


부처님께서 다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촉(觸)을 연하여 수가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아난아, 만일 눈이 없고 빛이 없고 눈의 인식작용[眼識]이 없다면 그래도 촉이 있겠느냐?”

“없을 것입니다.”

 

“만일 귀ㆍ소리ㆍ귀의 인식작용과 코ㆍ냄새ㆍ코의 인식작용과 혀ㆍ맛ㆍ혀의 인식작용과 몸ㆍ닿임ㆍ몸의 인식작용과 뜻ㆍ법ㆍ뜻의 인식작용이 없다면 그래도 촉이 있겠느냐?”

“없을 것입니다.”


“아난아, 만일 일체 중생들에게 촉을 없게 한다면 그래도 수가 있겠느냐?”

“없을 것입니다.”

  

“아난아, 나는 이 이치를 통하여 수는 촉으로부터 생겨나고 촉을 연하여 수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말하는 이치가 여기에 있다. 아난아, 명색(名色)을 연하여 촉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만일 중생에게 명색을 없게 한다면 그래도 마음의 감촉이 있겠느냐?”

“없을 것입니다.”

 

“만일 일체 중생에게 형색(形色)과 모형[相貌]을 없게 한다면 그래도 몸의 감촉이 있겠느냐?”

“없을 것입니다.”


“아난아, 만일 명색이 없다면 그래도 감촉이 있겠느냐?”

“없을 것입니다.”

“아난아, 나는 이 연법(緣法)을 통해서 촉은 명색으로부터 생겨나고 명색을 연하여 촉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말하는 이치가 여기에 있다. 


아난아, 식을 연하여 명색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만일 식(識)이 모태(母胎)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그래도 명색이 생길 수 있었겠느냐?”

“없을 것입니다.”


“만일 식이 모태에 들어갔다 나오지 않는다면 그래도 명색이 있겠느냐?”

“없을 것입니다.”

 

“만일 식이 태에서 나와 어린아이 때 없어지고 만다면 그래도 명색이 자라날 수 있겠느냐?”

“없을 것입니다.”

 

“아난아, 만일 식이 없다면 그래도 명색이 있겠느냐?”

“없을 것입니다.”

“아난아, 이 연법을 통해서 나는 명색은 식으로부터 생겨나고 식을 연하여 명색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말한 이치가 여기에 있다. 


아난아, 명색을 연하여 식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만일 식이 명색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곧 식이 머무를 곳이 없을 것이다. 만일 식이 머무를 곳이 없다면 그래도 생ㆍ노ㆍ병ㆍ사와 우ㆍ비ㆍ고ㆍ뇌가 있겠느냐?”

“없을 것입니다.”


“아난아, 만일 명색이 없다면 그래도 식이 있겠느냐?”

“없을 것입니다.”

“아난아, 나는 이 연법을 통해서 식은 명색으로부터 생겨나고 명색을 연하여 식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말한 이치가 여기에 있다. 명색은 6입(入)을 연(緣)하고 6입은 촉을 연하고 촉은 수를 연하고 수는 애를 연하고 애는 취를 연하고 취는 유를 연하고 유는 생을 연하고 생은 노ㆍ사ㆍ우ㆍ비ㆍ고ㆍ뇌의 큰 고음의 쌓임[大苦陰集]을 연한다.

  

아난아, 이렇게 가지런하게 말하고 가지런하게 대답하고 가지런하게 한계를 짓고 가지런하게 연설하고 가지런하게 지혜로 관찰[智觀]하고 가지런하게 중생을 위하느니라. 


아난아, 모든 비구는 이 법에 대하여 사실 그대로를 바르게 관찰하여 번뇌가 없어진 마음의 해탈[心解脫]을 얻으면 아난아, 이 비구는 마땅히 지혜의 해탈[慧解脫]을 얻었다고 한다. 이렇게 마음의 해탈을 증득한 비구는 여래의 마지막도 알고 여래의 마지막이 아닌 것도 알며, 여래의 마지막과 마지막 아닌 것도 알고, 여래의 마지막 아닌 것과 마지막 아님이 아닌 것도 안다. 무슨 까닭인가? 아난아, 이렇게 가지런하게 말하고 이렇게 가지런하게 대답하고 이렇게 가지런하게 한계를 짓고 이렇게 가지런하게 지

혜로 관찰하고 이렇게 가지런하게 중생을 위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 알아 번뇌 없는 마음의 해탈을 얻은 비구는 알지도 않고 보지도 않으며 다만 이렇게 알고 볼 뿐이다.

  

아난아, 나[我]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모두를 거의 아견(我見)이라고 하고 명색(名色)과 수(受)를 다 나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수(受)는 나가 아니고 나라는 것이 수이다'라고 말하고, 혹 어떤 사람은 '수는 나가 아니요, 나라는 것이 수도 아니며, 수법(受法)이 곧 나이다'라고 하기도 하고, 혹 어떤 사람은 '수(受)도 나라는 것이 아니고 나라는 것도 수가 아니며, 수법도 나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애(愛)가 나이다'라고 하기도 한다. 아난아, 저 나라는 견해를 가진 자들이 '수가 바로 나이다'라고 하거든 너는 마땅히 그들에게 '여래께서 고수(苦受)ㆍ낙수(樂受)ㆍ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 이 세 가지 수(受)에 대하여 말씀하셨는데, 낙수가 있을 때는 고수와 불고불낙수는 있을 수 없고, 고수가 있을 때는 낙수와 불고불낙수는 있을 수 없으며, 불고불낙수가 있을 때는 고수와 낙수는 있을 수 없다고 하셨다'라고 말하라. 


왜냐 하면 아난아, 낙촉(樂觸)을 연으로 하여 낙수(樂受)가 생겨나나니, 만일 낙의 촉이 멸하면 수도 또한 멸하기 때문이다. 아난아, 고촉(苦觸)을 연으로 하여 고수가 생겨나나니, 만일 고의 촉이 멸하면 수도 또한 멸한다. 불고불락촉을 연으로 하여 불고불락수가 생겨나나니, 만일 불고불락의 촉이 멸하면 수도 또한 멸한다. 


아난아, 비유하면 마치 두 개의 나무를 서로 비비면 곧 불이 일어나지만 각각 딴 곳에 두면 불이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이것도 또한 그와 같다. 낙촉을 연으로 하여 낙수가 생겨나는 것이므로 만일 낙의 촉이 멸하면 수도 또한 멸한다. 고촉을 연으로 하여 고수가 생겨나는 것이므로 만일 고의 촉이 멸하면 수도 또한 멸한다. 불고불락촉을 연으로 하여 불고불락수가 생겨나는 것이므로 만일 불고불락의 촉이 멸하면 수도 또한 멸한다. 


아난아, 이 세 가지 수(受)는 작용이 있는 것[有爲]이기 때문에 항상한 것이 아니고 연을 따라 생겨나나니, 다하는 법이요 멸하는 법이요 썩어 무너지는 법이다. 저것들은 나의 소유도 아니요 나 또한 저것의 소유가 아니다. 마땅히 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그것을 관찰하라. 


아난아 저들이 나[我]라는 견해를 가지는 것은 수(受)를 나[我]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잘못이다. 


아난아, 저 나라는 것이 있다고 보는 사람이 '수는 나가 아니고 나라는 것이 수이다'라고 말하거든 너는 마땅히 그에게 '여래께서 고수ㆍ낙수ㆍ불고불락수 이 세 가지 수(受)에 대하여 말씀하셨는데, 만일 낙수가 나라면 낙수가 멸할 때에는 곧 두 개의 나라는 것이 있게 되는 것이니, 이것은 잘못이다. 만일 고수가 나라면 고수가 멸할 때에는 곧 두 개의 나라는 것이 있게 되는 것이니, 이것도 잘못이다. 만일 불고불락수가 나라면 불고불락수가 멸할 때에는 곧 두 개의 나라는 것이 있게 되는 것이니, 이것도 잘못이다'라고 말하라. 


아난아, 저 나라는 것이 있다고 보는 자가 '수는 나가 아니요, 나라는 것이 곧 수이다'라고 말한다면 그것도 잘못이다. 


아난아, 저 나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가 '수는 나가 아니고 나라는 것은 수도 아니며, 수법(受法)이 나이다'라고 말하거든 너는 마땅히 그에게 '모든 것에는 수가 없는데 너는 어떻게 수법이 있다고 하는가? 네가 바로 수법이냐?' 하고 말하라. 그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므로 아난아, 저 나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가 '수는 나가 아니요, 나는 수도 아니며, 수법이 곧 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아난아, 저 나가 있다고 생각하는 자가 '수는 나가 아니요, 나는 수도 아니며, 수법도 나가 아니다. 오직 애(愛)가 나이다'라고 말하거든, 너는 그에게 '모든 것은 수가 없는데 어떻게 애가 있겠느냐? 네 자신이 곧 애이냐?'라고 말하라. 그러면 그는 '아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므로 아난아, 저 나가 있다고 생각하는 자가 '수는 나가 아니요, 나도 수가 아니며, 수법도 나가 아니다. 애가 바로 나이다'라고 말한다면 그것도 곧 잘못이다.

 

아난아, 이렇게 가지런하게 말하고 이렇게 가지런하게 대답하고 이렇게 가지런하게 한계를 짓고 이렇게 가지런하게 연설하고 이렇게 가지런하게 지혜로 관찰하고 이렇게 가지런하게 중생을 위하느니라. 


아난아, 모든 비구는 이 법에 대하여 사실 그대로를 바르게 관찰하여 번뇌가 없어진 마음의 해탈을 얻으면 아난아, 이 비구는 마땅히 지혜의 해탈을 얻었다고 한다. 이렇게 마음의 해탈을 증득한 비구는 나[我]라는 것이 있는 것도 알고 나라는 것이 없는 것도 알며, 나라는 것이 있는 동시에 나라는 것이 없는 것도 알고, 나라는 것이 있지도 않고 나라는 것이 없지도 않은 것도 또한 안다. 


무슨 까닭인가? 아난아, 이렇게 가지런하게 말하고 이렇게 가지런하게 대답하고 이렇게 가지런하게 한계를 짓고 이렇게 가지런하게 지혜로 관찰하고 이렇게 가지런하게 중생을 위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 알아 번뇌 없는 마음의 해탈을 얻은 비구는 알지도 않고 보지도 않으며 다만 이렇게 알고 볼 뿐이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저 나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똑같이 모두 결정적으로 말한다. 저 나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혹은 소량[少:少量]의 색(色)을 나라고 하고 혹은 무량[多:無量]의 색을 나라고 한다. 혹은 소량의 무색(無色)을 나라고 하고 혹은 무량의 무색을 나라고 한다. 


아난아, 저 소량의 색을 나라고 하는 자는 '소량의 색이 나이다. 내가 보는 것은 옳고 다른 이가 보는 것은 그르다'고 단정하여 말한다. 무량의 색을 나라고 하는 자도 무량의 색을 나라고 하여 내가 보는 것은 옳고 남이 보는 것은 그르다고 한다. 소량의 무색을 나라고 하는 자도 소량의 무색을 나라고 하며 내가 보는 것은 옳고 남이 보는 것은 그르다고 하며, 무량의 무색을 나라고 하는 자도 무량의 무색을 나라고 하여 내가 보는 것은 옳고 남이 보는 것은 그르다고 한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7식주(識住)와 2입처(入處)에 대해서 모든 사문 바라문은 '이곳은 안온하여 구제가 되고 보호가 되며 집이 되고 등불이 되며 밝음이 되고 귀의처가 되며 허망하지 않고 번뇌가 없는 곳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것을 일곱 가지라고 하는가? 

어떤 중생은 몸도 각각 다르고 생각도 각각 다른데 곧 하늘과 사람 세계가 그것이니, 이것이 초식주(初識住)이다. 모든 사문 바라문은 '이곳은 안온하여 구제가 되고 보호가 되며 집이 되고 등불이 되며 밝음이 되고 귀의처가 되며 허망하지 않고 번뇌가 없는 곳이다'라고 말한다. 아난아, 만일 비구로서 초식주를 알되 그 원인을 알고 그 멸을 알고 그 맛을 알고 그 허물[過:初識住의 過患]을 알고 그 벗어나는 방법을 알면 그는 진실 그대로를 알게 되리라. 

아난아, 그 비구는 '저는 나라는 것이 아니요 나도 저라는 것이 아니다. 진실 그대로를 보아 안다'고 말하리라.

  

어떤 중생은 몸은 각각 다르나 생각은 한가지인데 각기 다르니 범광음천(梵光音天)이 그것이며, 어떤 중생은 몸은 같으나 생각은 각기 다르니 광음천(光音天)이 그것이다. 어떤 중생은 몸도 같고 생각도 같은데 변정천(遍淨天)이 그것이며, 어떤 중생은 공처(空處)에 머물고 어떤 중생은 식처(識處)에 머물며, 어떤 중생은 불용처(不用處)에 머무르나니 이것을 7식주처라고 한다. 어떤 사문 바라문은 '이곳은 안온하여 구제가 되고 보호가 되며 집이 되고 등불이 되며 밝음이 되고 귀의처가 되며 허망하지 않고 번뇌가 없는 곳이다'라고 말한다. 아난아, 만일 비구로서 7식주를 알되 그 원인을 알고 그 멸을 알고 그 맛을 알며 그 허물을 알고 그 벗어나는 방법을 알면 그는 진실 그대로를 알고 보게 되리라. 그 비구는 '저는 나[我]가 아니요 나도 저가 아니다. 사실 그대로를 알고 볼 뿐이다'라고 말하리니, 이것이 7식주이다.

  

어떤 것이 2입처(入處)인가? 

무상입(無想入)과 비상무상입(非想無想入)이 그것이다. 어떤 사문 바라문이 '이곳은 안온하여 구제가 되고 보호가 되며 집이 되고 등불이 되며 밝음이 되고 귀의처가 되며 허망하지 않고 번뇌가 없는 곳이다'라고 말한다. 

아난아, 만일 비구로서 2입처를 알되 그 원인을 알고 그 멸을 알며 그 맛을 알고 그 허물을 알며 벗어나는 방법을 알면 그는 사실 그대로를 알고 사실 그대로를 보게 되리라. 그 비구는 '저는 나가 아니요 나도 저가 아니다. 사실 그대로를 알고 볼 뿐이다'라고 말하리니, 이것이 2입처이다.

  


아난아, 또 8해탈이 있다. 어떤 것이 여덟 가지인가? 

색(色)에 대하여 색으로 관하는 것이 첫 번째 해탈이고, 마음 속으로 색(色)을 생각하여 바깥의 색을 관하는 것이 두 번째 해탈이며, 깨끗한 것을 관하여 해탈하는 것이 세 번째 해탈이요, 색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 상대가 있다는 생각[有對想]을 멸하고 잡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며 공처에 머무르는 것이 네 번째 해탈이다. 공처(空處)를 초월하여 식처에 머무르는 것이 다섯 번째 해탈이고, 색처(色處)를 초월하여 불용처(不用處)에 머무르는 것이 여섯 번째 해탈이며, 불용처를 초월하여 유상무상처(有想無想處)에 머무르는 것이 일곱 번째 해탈이고, 멸진정(滅盡定)이 여덟 번째 해탈이다. 

아난아, 모든 비구가 이 여덟 가지 해탈에서 역순으로 노닐면서 드나들기를 자재로이 한다면 그러한 비구는 구해탈(俱解脫)을 얻는다.”

 

그때 아난이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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