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삼매경론』 의 선수행론 고찰
김호귀/동국대학교 불교학부 강사
목 차>
Ⅰ. 선법의 한국 전래
Ⅱ. 금강삼매경론 과 선법
Ⅲ. 금강삼매경론 과 선수행론
1. 금강삼매경론 의 禪理
2. 向上門의 선수행론
3. 向下門의 선수행론
4. 반야바라밀의 실천
Ⅳ. 결어
<한글요약>
『금강삼매경』 의 무상법품의 無相이란 말하자면 無相觀이다. 모든 형상을 타파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상법품의 法이란 말하자면 관찰되는 법[所觀法]이다. 곧 일심법을 가리킨다. 곧 일체중생은 본래 일심과 본각이건만 단지 무명으로 말미암아 환상을 따라 유전할 뿐으로 모두 여래의 일미의 설법을 좇아 마침내 모두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경우에 그것이 무소득이기 때문에 일미라 말하는데 그것이 곧 일승이다. 지금 부처님이 들어간 실제와 법상은 적멸의 뜻이고, 일각과 요의는 일심과 여래장의 뜻이다.
여기에서 부처님이 중생으로 하여금 본각의 이익을 통하여 해탈법을 터득하도록 가르쳐주기 위하여 제시한 “제불세존이 오직 일대사인연으로 세상에 출현하셨다.”는 말에 대하여 원효는 이에 대하여 “만약 중생을 교화하려면 교화한다는 분별상이 없어야 하고 교화하지 않았다는 분별상도 없어야 한다. 그래야 그 교화가 훌륭하다. 그리고 저 중생들에게도 모두 心과 我를 벗어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心과 我는 구체적으로 법공과 아공을 터득하는 것인데 이것은 보살이 방편관을 닦을 경우부터 모든 有相을 타파하여 교화한다는 미혹한 분별상[幻相]까지도 마음에 생겨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아울러 이미 교화한다는 분별상을 타파하고 이어서 교화하지 않았다는 空相마저 버린 것이다. 왜냐하면 중생은 본래부터 마음이 분별상을 벗어나 있음을 모르고 끝없이 모든 분별상에 집착하여 망념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먼저 모든 분별상을 타파하여 분별상에 집착하는 마음을 없애야 한다.
이 경우에 일체중생에게 我와 心이 있으면 우선 我가 있는 자에게는 십이인연을 관찰토록 한다. 십이지인연의 관찰에서 無作緣生을 관찰하는 것은 作者에 대한 집착을 대치하는 것으로 마치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고 설하는 경우와 같다. 또한 無常緣生을 관찰하는 것은 常住에 대한 집착을 대치하는 것으로 마치 ‘이것이 생겨나므로 것이 생겨난다.’고 성하는 경우와 같다. 왜냐하면 아에 대한 집착이 남아있는 것은 작자와 상주가 근본이 되는데 그 근본이 없어지기 때문에 모든 지말도 따라 멸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십이인연의 도리를 관찰함으로써 공적심으로 부동의 경지에 도달하면 일체중생이 지니고 있는 유일의 본각을 통하여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일각에 함께 돌아가 삼계에 의지하지 않는 보시바라밀을 갖추고, 범부와 성인의 戒相에 집착하지 않는 지계바라밀을 갖추며, 공의 도리에 안착하여 적정한 삼업으로 몸과 마음에 집착이 없어지는 청정하고 무념한 인욕바라밀을 갖추고, 명칭[名]과 법수[數]를 멀리 떠나고 공견과 유견을 단제하며 오음의 공에 깊이 들어가서 섭수함도 없고 방기함도
없는 정진바라밀을 갖추며, 공적을 모두 떠났으면서도 모든 공에 집착이 없고 성품이 금강과 같은 선정바라밀을 갖추고, 마음에 마음의 모습이 없어서 허공처럼 집착하지 않고 제행도 발생하지 않으며 적멸도 증득하지 않고 지혜에도 머물지 않는 반야바라밀을 갖추어 삼보를 저버리지 않는 반야바라밀을 갖춘다.
이로써 「금강삼매경론」 에서 제시한 선수행론을 각 품의 차제에 따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가 있다. 첫째의 무상법품은 분별상이 없는 관찰을 설명한 것이다. 둘째의 무생행품은 무생과 무생을 터득하는 수행을 드러낸 것이다. 셋째의 본각리품은 본각에 의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넷째의 입실제품은 허상으로부터 실제에 들어가는 것이다. 다섯째의 진성공품은 일체행이 진성과 진공에서 나왔음을 변별한 것이다. 여섯째의 여래장품은 무량한 법문이 여래장에 들어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이와같은 여섯 품은 모두 관행이다. 왜냐하면 무릇 무시이래로 유전하는 모든 망상은 단지 형상에 집착하고 분별하는 병폐 때문이다.
이들 각 품의 선수행론의 관계에 대하여 말하면 먼저 모든 분별상을 없애야 한다고 말한다. 때문에 첫째로 분별상이 없는 법을 관찰할 것을 설명하였다. 비록 모든 분별상을 없앴더라도 만약 관찰하는 마음이 남아있으면 그 관찰하는 마음 때문에 오히려 본각을 모르게 되므로 관찰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도 없앤다. 이런 까닭에 둘째로 무생과 행을 드러낸다. 이윽고 행과 무생이어야 바야흐로 본각을 알게 된다. 無相과 無生은 向上의 상구보리에 해당한다.
그 본각에 의하여 중생을 교화하여 본각의 이익을 터득하도록 하므로 셋째로 본각리문을 설명한다. 만약 본각에 의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면 중생이 곧 허상으로부터 실제에 들어가는 까닭에 넷째로 입실제에 대하여 설명한다. 內行에는 곧 무상법과 무생행이 해당하고, 外化에는 곧 본각리와 입실제가 해당한다. 본각리와 입실제는 향하의 하화중생에 해당한다. 그러나 결국 향상과 향하는 모두 본래성불에 근거한 자리의 수행이고 깨침의 회향이기 때문에 결국 진성공으로 나아갈 수가 있다.
이처럼 내행의 향상과 외화의 향하라는 두 가지 방식[二利]으로 만행을 갖추어 동일하게 진성을 도출하고 모두 진공을 따른다. 이런 까닭에 다섯째로 진성과 진공을 설명한다. 이처럼 진성에 의하여 만행이 갖추어져야 여래장 곧 일미의 근원에 들어가는 까닭에 여섯째로 여래장을 드러낸다. 이리하여 마음의 근원에 돌아가면 곧 무위가 된다. 무위이기 때문에 되지 않는 것이 없다. 때문에 여섯 가지 품을 설하여 대승을 섭수한다. 이처럼 집착이 없고 분별이 없는 평등한 경지인 무소득의 일미야말로 바로 금강삼매경 의 宗이고 要이다. 제목으로 보아 알 수 있듯이 『금강삼매경』 은 수행 특히 선수행과 밀접한 선경에 속한다. 때문에 원효는 『능가경』 , 「대승기신론」 , 『여래장경』 , 『법화경』 , 『화엄경』 기타 많은 선경을 인용하여 무집착과 무분별의 도리및 그 행위방식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Ⅰ. 선법의 한국 전래
일찍이 달마를 비롯한 선종의 형성기부터 교학의 중시는 일관된 입장이었다. 달마는 모든 중생이 同一眞性을 지니고 있음을 믿고, 그것을 밝히기 위해서는 달리 언어문자의 가르침을 방편삼아 종지를 깨치는 것일 뿐 그것에 얽매이지 말며 壁觀을 통해 진리에 계합해야 한다고 말했다. 2조 혜가는 출가 이전부터 세간의 전적과 莊子 ․ 周易 등에 통하였고, 출가해서는 갖가지 교학을 공부하였다. 제2조가 된 이후에도 열반경 과 반야경 을 중시한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3조 승찬은 寶林傳 권8에 기록되어 있는 房琯의 碑文이 참조가 된다. 특히 信心銘 을 남기고 있는 점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4조 도신(580-651)의 반야경 중시 및 5조 홍인(601-674)의 『금강경』 과 『열반경』 의 사상은 자성청정심에 契証하는 것을 主로 삼아 定心을 중시하고 卽心卽佛의 도리를 고조시켰다. 4조 및 5조의 선풍은 이후 대통신수(606-706) - 普寂으로 계승되는 소위 북종선의 계통이 경론을 중시했다는 것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위의 기록들에 의해서 보면 신행은 弘忍 - 神秀 - 普寂 - 志空- 神行의 법맥으로 계승되었다. 이후 신행의 선법은 다시 遵範 - 慧隱 - 智詵으로 계승되어 소위 曦陽山門의 일파를 이루었다.
이로써 판단하면 신행은 동산법문을 계승하였고 동시에 당시의 북종계통의 법맥까지 계승하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신수를 계승한 의복과 보적 등은 국사의 지위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천하의 선법은 거의 이들을 중심으로 한 동산법문의 계승자들에 의하여 전개되고 있었다. 따라서 신행은 당시로서는 최고의 권위와 법맥을 계승한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훗날 소위 남종 계통의 선법이 정통으로 부각된 이후의 관점을 가지고 이전 신 행 당시의 선법의 정통과 방계의 문제를 적용해서는 안된다. 게다가 신행은 이미 도신의 정 통을 계승하고 있었다. 이 점은 최초기 신라에 전래된 선법과 그 계승이 정통선법이라는 점 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신행의 선법은 바로 법랑을 통한 동산법문의 見佛性과 守一不移의 계승이었으며, 志空을 통한 북종의 看心看淨의 계승이었다. 이것은 소위 남종 계통의 선법과는 다른 차원의 입장이었다. 때문에 이것은 초기 한국선법의 성격을 살펴보는 중요한 단서로 간주할 수 있다.
(소위 조사선법이 해동에 최초로 전승된 시기는 8세기 중반에 중국 선종의 제4조 대의도신의 동산법문을 계승한 법랑에 의한다. 법랑의 귀국연대는 불분명하다. 스승이었던 도신의 생몰 연대가 580-651이고, 제자였던 신행의 생몰 연대가 704-779였음은 밝혀져 있다. 그리고 신행 이 당에 들어가 입문한 지공대사의 스승인 보적의 생몰연대는 651-739였다. 때문에 이를 여 러모로 감안한다면 적어도 법랑의 생몰연대는 630을 전후하여 출생하고 730년을 전후하여 입 적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도 100여 세를 살았다는 추산이 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추정도 그리 녹록하지는 않다. 그러나 최치원의 비명에 의하면 도신의 선법을 계승했다 는 사실, 선법을 신행에게 전수했다는 사실만큼은 인정할 수 있다. 信行(704-779)은 智證大 師寂照塔碑 에 의하면 법랑에게서 心印을 받았지만 이후에 입당하여 神秀 - 普寂의 문인이 었던 志空에게서 灌頂授記를 받고 귀국하여 斷俗寺에서 입적하였다.( 朝鮮金石總覽 卷上, p.91) 이후 信行의 선법은 遵範 - 惠隱 - 智證大師 道憲으로 계승되었다. 신행은 신라 제36대 慧恭王代에 지리산에서 교화를 폈다. 그의 전기는 지리신 斷俗寺에 세운 金憲貞이 찬한 神 行碑 에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 朝鮮金石總覽 卷上, p.90 ; 海東金石苑 卷2, p.7.)
Ⅱ. 『금강삼매경론』 과 선법
중국 선법의 한국 전래 이전에 이미 해동에서는 원효의 『금강삼매경론』 을 통하여 조사선법의 원리 및 그 수행론에 대한 깊은 천착이 있었다. 원효는 『금강삼매경론』에서 무분별을 설하는 「無相法品」, 망념이 없음을 설하는 無生行品, 본래성불의 도리를 드러내는 「本覺利品」, 허상을 버리고 실제로 나아가는 「入實際品」, 진성과 진공에 근거하여 일체수행을 설하는 「眞性空品」, 이미 무량한 수행이 성취되어 있다고 설하는 「如來藏品」, 모든 수행을 점검하는 總持品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때문에 명칭도 달리 『攝大乘經』 내지 『無量義宗』 으로 불린다.
모든 수행의 기초는 번뇌가 본래 공임을 자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집착과 분별을 벗어나는 것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그 궁극은 이타를 지향한다. 이타는 다름아닌 중생심의 개현이다. 그 중생심은 중생과 부처가 다르지 않는 生佛一如이고, 진제와 속제가 다르지 않는 眞俗不二이다. 때문에 원효는 수행의 출발점인 공의 자각과 그 궁극점인 이타의 행위가 금강삼매경 의 대의라고 하여 “이가 아니면서[無理] 지극한 이[至理]이고, 그렇지 않으면서[不然] 바로 그러하다[大然]”고 말한다.
그렇지만 법맥의 사자상승을 중시하는 선법의 기준으로 보면 元曉(617-686)의 경우 해동에 전래된 선법과는 무관하다. 그러면서도 원효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이미 다양한 경론에 대한 교학적인 연구를 통하여 선사상 및 선수행과 관련된 다수의 선법이 천착되고 있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경우가 곧 원효의 『금강삼매경론』 이다.
이것은 직접적인 선어록과는 무관할지라도 그 가운데에는 이미 달마로부터 전수되었던 조사선법의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에 그 선수행론의 내용을 살펴보는 것은 이후 해동에서 전개된 선법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작업이기도 하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원효의 선수행에 대하여 상구보리에 해당하는 향상문의 입장과 하화중생에 해당하는 향하문의 입장으로 나누고, 나아가서 그것이 직접 바라밀실천으로 전개되었던 점에 대해서 고찰하기로 한다.
Ⅲ. 『금강삼매경론』 의 선수행론
1. 「금강삼매경론」 의 禪理
『금강삼매경론』 은 『금강삼매경』 에 대한 주석서로서 일곱 가지 품으로 나뉘어져 있으면서 각각의 품이 독립된 경전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옴니버스와 같은 형식을 보이고 있다. 전체적으로는 一味觀行 곧 여래장으로 귀일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일미관행이야말로 여래장을 터득하는 방식으로서 觀은 공간적으로 논한 것으로 境과 智에 통하고, 行은 시간적으로 논한 것으로 因과 果에 사무친다고 말한다.
원효는 제목인 금강삼매에서 금강은 비유를 들어 지칭한 것으로, 견실하다는 것을 체성으로 삼고 깨뜨리는 것[穿破]을 공능으로 삼으며, 삼매는 三摩呬多는 等引, 三摩地는 等持, 三摩鉢提는 等至, 駄演那는 靜慮, 奢摩他는 止, 心一境性은 一心, 그리고 定과 正思 등 여덟 가지로 분별한다.
첫째의 무상법품은 분별상이 없는 관찰을 설명한 것이다. 둘째의 무생행품은 無生과 무생을 터득하는 行을 드러낸 것이다. 셋째의 본각리품은 본각에 의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넷째의 입실제품은 허상으로부터 실제에 들어가는 것이다. 다섯째의 진성공품은 일체행이 진성과 진공에서 나왔음을 변별한 것이다. 여섯째의 여래장품은 무량한 법문이 여래장에 들어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이와 같은 여섯 품은 모두 관행이다.
이것은 모두 조사선의 수행 원리에 통하는 것으로 곧 무분별을 설하는 무상법품, 망념이 없음을 설하는 무생행품, 본래성불의 도리를 드러내는 본각리품, 허상을 버리고 실제로 나아가는 입실제품, 진성과 진공에 근거하여 일체수행을 설하는 진성공품, 이미 무량한 수행이 성취되어 있다고 설하는 여래장품, 모든 수행을 점검하는 총지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때문에 명칭도 달리 『섭대승경』 내지 『무량의종』 으로 불리운다.
각 품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말하자면 먼저 모든 분별상을 없애야 한다고 말한다. 때문에 첫째로 무상법품에서는 무상과 법의 두 가지 뜻을 드러냈기 때문에 무상법품이라 말하였다. 곧 분별상이 없는 법을 관찰할 것을 설명하였다. 無相이란 곧 無相觀이다. 모든 분별상을 타파하기 때문이다. 비록 모든 분별상을 없앴더라도 만약 관찰하는 마음이 남아있으면 그 관찰하는 마음 때문에 오히려 본각을 모르게 되므로 관찰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도 없앤다.
이런 까닭에 둘째로 무생행품에서 보살은 관행이 성취될 경우 저절로 관심을 알아 순리로 수행하되 발생하는 유생의 심도 없고 무생의 심도 없으며 또한 유행도 없고 또한 무행도 없다. 때문에 무생과 행을 드러낸다. 이윽고 행과 무생이어야 바야흐로 본각을 알게 된다.
본각에 의하여 중생을 교화하여 본각의 이익을 터득하도록 하므로 셋째로 본각리문을 설명한다. 일체의 유정은 무시이래로 무명의 長夜에 빠져있어 망상의 대몽을 꾼다. 이에 보살은 관행을 닦아 무생법인을 터득하고서 중생은 본래 적정하여 그대로 본각인 줄을 통달하고, 일미의 침상에 누워 본각의 이익으로 중생을 제도한다. 본품에서는 이러한 도리를 드러내므로 본각리품이라 말한다.
만약 본각에 의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면 중생이 곧 허상으로부터 실제에 들어가는 까닭에 넷째로 입실제에 대하여 설명한다. 여기에서 實際란 虛幻을 떠나 있음을 지칭한 것으로 구경의 뜻이고, 入은 깨침으로서 실제를 터득하는 것이다. 敎에 의거하여 理를 닦아 理入하고 行入하므로 그 깨침의 실천으로 二入이라 말한다. 그러나 실제는 無際를 실제로 삼고, 이입은 無入을 입으로 삼는다.
이와 같이 『금강삼매경』 에서 설한 내용은 무상법품에서 말하는 무분별행, 무생행품에서 말하는 무집착행, 본각리품에서 말하는 본래성불의 자각, 입실제품에서 말하는 이입과 행입 곧 깨침과 깨침의 실천, 진성공품에서 말하는 공에 대한 실천, 여래장품에서 말하는 진제와 속제가 둘이 아닌 一實의 여래장으로의 귀일, 총지품에서말하는 일체의 의문점에 대한 해결과 文義多羅尼의 터득 등이 모두 선수행의 원리와관련되어 있다.
바로 그 집착이 없고 분별이 없는 평등한 경지인 無所得의 일미야말로 바로 『금강삼매경』 의 宗이고 要이다. 제목으로 보아 알 수 있듯이 금강삼매경 은 수행 특히 선수행과 밀접한 선경에 속한다. 때문에 원효는 『능가경』 , 「대승기신론」 , 『여래장경』 , 『법화경』 , 『화엄경』 기타 많은 선경을 인용하여 무집착과 무분별의 도리 및 그 행위 방식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선리에 착안하는 것은 『금강삼매경』 및 「금강삼매경론」 의 선수행론을 읽어내는 안목 가운데 하나이다.
2. 向上門의 선수행론
『금강삼매경』 에서 제시하는 수행론은 향상의 수행문과 향하의 수행문으로 대별된다. 향상의 수행문은 곧 內行으로 여기에는 무상법과 무생행이 해당하고, 향하문의 수행문은 곧 外化로서 본각리와 입실제가 해당한다. 이처럼 내행과 외화의 두 가지 방식[二利]으로 만행을 갖추어 동일하게 진성을 도출하고 모두 진공을 추구한다.
이런 까닭에 다섯째로 진성과 진공을 설명한다. 진여법은 모든 공덕과 더불어 모든 수행덕을 갖추고 본성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진여본성이라 말한다. 그리고 진성은 모든 명칭[名]과 형상[相]을 단절해 있으므로 진여의 본성은 본디 공하다는 의미에서 진성공이라 말한다. 이 진성은 상을 떠나 있고 성을 떠나 있는데, 상을 떠나 있다는 것은 허망한 상을 떠나 있는 것이고 성을 떠나 있다는 것은 진성을 떠나 있는 것이다. 허망한 상을 떠나 있으므로 허망한 상이 공하고 진성을 떠나 있으므로 진성도 역시 공하다.
이처럼 진성에 의하여 만행이 갖추어져야 여래장 곧 일미의 근원에 들어가는 까닭에 여섯째로 여래장을 드러낸다. 곧 진제와 속제가 둘이 아닌 一實의 법은 제불이 돌아가는 곳으로 여래장이라 말한다. 무량법과 일체행이 여래장에 귀입하지 않음이 없음을 설명한다. 이리하여 마음의 근원에 돌아가면 곧 무위가 된다. 무위이기 때문에 되지 않는 것이 없다. 때문에 여섯 가지 품을 설하여 대승을 섭수한다.
마지막으로 총지품에서는 앞의 모든 품 가운데 의문점을 해결하고 요의를 총지하여 잊지 않도록 한 것인데 이런 점에서 총지품이라 말한다. 또한 지장보살이 이미 문의다라니를 터득한 까닭에 모든 품에 들어 있는 문의를 총지하고 대중이 일으킨 의심의 내용을 기억해서 질문한 차례대로 모든 의심을 잘 해결하기 때문에 能問의 입장에서 총지품이라 말한다.
『금강삼매경론』 은 “일체중생은 본래 일심과 본각이건만 단지 무명으로 말미암아 환상을 따라 유전할 뿐으로 모두 여래의 일미의 설법을 좇아 마침내 모두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을 설명하려는 것이다.”는 것을 기본적인 입장으로 취한다. 이것은 곧 二種入 을 통해서 보리달마가 말한 내용과 동일하다.
여기에서 이입은 깨침에 들어가는 이론이라든가 수행의 과정이 아니다. 곧 불교의 근본적인 취지를 깨치는 것을 말한다. 그 방법은 ‘불법의 가르침에 의해서’ 처럼 불법의 가르침에 의해서 불법의 가르침인 그 근본 취지를 깨치는 것이다. 이것은 불법으로서 불법을 깨치는 것이다. 여기에서 불법이란 깨침이다. 바꾸어 말하면 깨침으로 깨침을 얻는 것이다. 이미 불법이 깨침으로서 출발하여 깨침을 얻는 것이다. 이것이 달마 조사선의 수행 방식이다.
원효의 이와 같은 일미관행의 입장은 중생이 心과 我를 벗어나는 방식에 대하여 정관행에 는 본래 분별상이 없음[無二相]을 설명하였다. 곧 정관행으로 所取와 能取를 벗어나도록 하기 때문이다.
(人은 我를 가리키고, 法은 心을 가리킨다. 심은 제법이 의지하는 主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 과 법이 본래 공한 줄을 통달할 경우에 바로 그때 이전에 집착한 분별상도 일어나지 않는다.)
소취를 벗어난다는 것은 일체의 인상과 아상을 벗어나는 것인데 그 방식으로 遣離와 泯離를 언급한다. 견리는 이전에 집착한 분별상을 지금 없애는 것이고, 민리는 이전에 집착한 분별상이 본래 공한 것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능취를 벗어난다는 것은 일체의 능취하는 분별을 벗어나는 것으로 本離와 始離가 있다. 본리란 심과 아가 본래 공한 줄을 터득할 경우 바로 본각의 공적한 심을 터득하는 것이고, 시리란 본각의 공적심을 터득할 경우 능취하는 분별이 다시는 생겨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시리의 능취는 始覺의 뜻이고, 본리의 공적심은 本覺의 뜻이다. 뜻에는 비록 시리와 본리가 있지만 시리와 본리가 어울려야 일각이 성취된다. 能과 所를 벗어나는 것은 新[始覺]과 舊[本覺]를 벗어나는 것과 같다. 그래서 기신론에서는 “시각은 곧 본각과 같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다시 일각에 본각과 시각의 뜻이 있다. 본각에는 본래 있는 것을 드러낸다[顯成]는 뜻이 있으므로 본래적인 수행[眞修]이라는 말이고, 시각에는 수행을 통하여 성취한다[修成] 는 뜻이 있으므로 새로운 수행[新修]이라는 말이다.)
무상법품에서 無相이란 無相觀을 의미하는데 곧 모든 분별상을 타파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法이란 말하자면 관찰되는 법[所觀法]으로 일심법을 가리킨다. 이처럼 무상법품에서는 무상과 법의 두 가지 뜻을 드러냈기 때문에 무상법품이라 말하였다.
이런 까닭에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중생의 심성은 본래 공적합니다. 공적한 심체에는 色과 相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수습해야 본래 공적한 심을 터득할 수 있습니까. 바라건대 부처님의 자비로 저희에게 설해 주십시오.” 라고 묻는다. 이것은 중생의 심성은 본래 공적하지만 무시이래로 망념을 움직여 유전하는데 어떤 방법으로 수행해야 그 본래심을 터득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여기 중생심은 능가경에서 말한 “적멸이란 일심을 말한다. 일심이란 여래장을 말한다.”는 것에 해당한다. 그에 대한 구체적인 수행론은 다음과 같이 제시되어 있다.
보살이여, 일체의 心과 相에 본래 근본이 없고 본래 본처가 없어서 공적하고 무생이다. 이에 심을 무생케 하면 곧 공적에 들어간다. 왜냐하면 공적한 심지야말로 곧 心空이기 때문이다. 선남자여, 無相한 심에는 심도 없고 아도 없다. 일체의 법상도 또한이와 같다.
『金剛三昧經』 無相法品第二(大正藏8, p.366中) “菩薩一切心相本來無本 本無本處空寂無生 若
心無生卽入空寂 空寂心地卽得心空 善男子 無相之心無心無我 一切法相亦復如是”
이것은 공적한 심지야말로 모든 중생이 본래부터 유전하여 항상 유상에 집착할지라도 이 공적문을 추구하고 관찰함으로써 본래의 공적한 심을 터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금강삼매경 에서는 일체중생이 我 및 心의 결박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두 가지로 설명을 한다. 먼저 我에 대해서는 “我가 있는 자에게는 십이인연을 관찰토록 하라.”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에도 다시 無作緣生을 관찰하는 것으로 作者에 대한 집착을 대치하는 방식이 있다. 마치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고 설하는 경우와 같다. 또한 無常緣生을 관찰하는 것으로 常住에 대한 집착을 대치하는 방식이 있다. 마치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고 설하는 경우와 같다. 아에 대한 집착이 남아있는 것은 작자와 상주가 근본이 된다. 그 근본이 없어지기 때문에 모든 지말도 따라 멸한다.
다음으로 心에 대해서는 “만약 마음이 발생하는 경우에는 滅性으로 없애주고, 만약 마음이 소멸하는 것이라 한다면 生性으로 없애줘야 한다. 없애주는[滅] 것이야말로 곧 견성으로 실제에 들어가는 것이다.”20) 고 말한다. 이것은 만약 마음이 발생하여 병이 되는 자에게는 위의 滅性으로 타파해준다. 요컨대 저 멸성에 의거하여 지금 발생한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후 미래에 소멸하는 것을 보고 이전 현재의 마음이 있다고 집착한다면 그것은 마음이 설령 불멸한다해도 토끼의 뿔과 같은 경우일 뿐이다. 때문에 이와 같은 견해를 타파하여 生性을 없애준다. 발생하는 것이 없다면 소멸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중생이 법은 생겨난다고 보는 경우에는 無見으로 없애주고, 법은 소멸한다고 보는 경우에는 有見으로 없애준다. 이에 법에 대한 생견과 멸견이 사라지면 법의 眞無를 터득하여 결정성에 들어가 결정무생이 되기 때문이다. 결정무성은 곧 여래장의 적연부동한 자성으로서 이것을 터득하는 방식에 대하여 “여래장은 生滅慮知相인데 감추어진 도리가 드러나지 않고 있다. 이것이 여래장의 적연부동한 자성이다.” 고 말한다. 이에 대하여 원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생멸여지상’이란 말은 곧 공여래장인데, 다만 이 경문에서는 能隱의 뜻을 드러낼 뿐 그것을 여래장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감추어진 도리가 드러나지 않고 있다. 이것이 여래장이다.’는 말은 불공여래장인데, 所隱의 뜻에 의하여 여래장이라 말한다. ‘적연부동한 자성이다.’는 말은 그 여래장의 자성이 비록 감추어져 있을 뿐이지 바뀌지 않는다는 도리를 드러낸다.
『金剛三昧經論』 卷上(韓國佛敎全書1, p.617上) “生滅慮知相者卽是空如來藏 但此文中顯能隱
義而不名此爲如來藏 言隱理不顯是如來藏者 是不空如來藏 約所隱義名如來藏 言性寂不動者
顯此藏性 雖隱不改”
그리고는 「무상론」 을 인용하여 여래장의 자성에 다섯 가지 뜻이 있음을 설명한다.
(「無相論」 은 三無性論 ․ 現識論 ․ 轉識論 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現識論 (大正 藏31, pp.881下-882上) 그 다섯 가지 뜻은 自性種類․因性․生․不壞․袐密藏이다)
첫째는 種類의 뜻으로 자성의 뜻을 삼는다. 마치 병과 옷 등 일체의 색법이 사대의 종류를 떠나지 않고 모두 사대로써 자성을 삼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중생은 여래장이라는 일계를 벗어나지 않고 모두 일계를 종류로 삼기 때문이다. 섭대승론 에서는 體類의 뜻이라 말한다. 불성론 에서는 自性의 뜻이라 말한다.
(「佛性論」 , 卷2(大正藏31, p.796中) 다섯 가지는 如來藏自性․正法藏因․法身藏至得․出世藏 眞實․自性淸淨藏秘密이다.)
둘째는 因의 뜻으로 자성의 뜻을 삼는다. 마치 나무 가운데 있는 불의 자성과 같아서 불이 일어나는 인이 되므로 자성이라 말한다. 이와 같이 성인의 모든 무루법도 이것이 인이 되어 이루어진다.
셋째는 生의 뜻으로 자성의 뜻을 삼는다. 마치 진금을 단련하여 장엄구를 생성할 경우 장엄구가 생성되는 것은 진금을 자성으로 삼는 것과 같다. 이 여래장계도 또한 그와 같이 과지의 오분법신을 생성한다. 법신의 생성은 여래장계를 자성으로 삼는다.
넷째는 不改의 뜻으로 자성을 뜻을 삼는다. 마치 금강보배의 성질이 일겁 동안 머물러도 증감도 없고 감소도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여래장계도 삼세에 평등하게 머물러 세간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출세간에서도 끝이 없다.
다섯째는 密藏의 뜻으로 자성의 뜻을 삼는다. 누런 돌에 들어 있는 진금의 성질과 같다. 이런 까닭에 여래장의 자성은 隱藏의 뜻이다. 여래장의 자성도 또한 이와 같은줄 알아야 한다. 그 얽혀 있는 것을 부수지 않은 경우에는 外가 되고 染이 되지만 얽혀 있는 것을 부수어 상응하면 內가 되고 淨이 된다. 때문에 여래장의 자성이 밀장의 뜻인 줄 알아야 한다.
여기의 생멸여지상은 구체적으로 本․性의 모습을 관찰해보면 그 도리가 애초부터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도리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만약 옳고 그름이 있으면 온갖 망념이 발생한다. 그 천만 가지 사려분별이 곧 생멸상이다. 그래서 만약 사려분별이 없으면 곧 생멸이 없고, 여실하여 起動이 없으며, 諸識이 安寂하고, 流注가 발생하지 않아 五法이 청정해진다. 이것을 소위 대승이라 한다. 대승에 들어가는 방법은 心源에 돌아가는 경우에 망념의 불각이 없어지고, 불각이 없는 경우에 곧 始覺에 해당하는 圓智의 경지에 들어가는데 이것은 곧 불각에 상대하여 시각의 충만을 드러낸 것이다. 또한 시각이 충만할 경우에는 生․住․異․滅의 사상으로 기동되는 망념의 불각이 본래 불생임을 能知하는데 이것이야말로 곧 본래 망상이 없음을 아는 것이다.
이리하여 원효는 망상이 공적한 법을 닦는 자는 보시바라밀을 갖추어 삼계에 의지하지 않고, 지계바라밀을 갖추는 자는 계상에 집착하지 않으며, 인욕바라밀을 갖추는 자는 청정하여 무념하고, 정진바라밀을 갖추는 자는 섭수함도 없고 방기함도 없으며, 선정바라밀을 갖추는 자의 성품은 금강과 같고, 반야바라밀을 갖추는 자는 삼보를 저버리지 않는다고 말한다.26)
이와 같이 육바라밀은 곧 해탈일 뿐만 아니라 또한 열반이기도 하다. 그것은 곧 육바라밀의 수행에 전혀 기동도 없고 또 산란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쯤에서 육바라밀과 해탈과 열반은 처음 초지로부터 시작하여 마침내 불지에 이르게 된다. 여기에서 말한 열반이란 本來自性淸淨涅槃, 有餘依涅槃, 無餘依涅槃, 無住處涅槃 등 4종열반 가운데 본래자성청정열반을 가리킨다. 바로 이것은 불가사의해탈로서 자재하여 걸림이 없다는 뜻이다.
『金剛三昧經論』 卷上(韓國佛敎全書1, p.620上-中) “此中六度解脫涅槃 始從初地乃至佛地 言 涅槃者 四種之中卽是本來淸淨涅槃 正是不可思議解脫 依其自在無障礙義”
이로써 보살에게 관행이 성취될 경우 저절로 관심을 알아 순리로 수행하되 발생하는 유생의 심도 없고 무생의 심도 없으며 또한 유행도 없고 또한 무행도 없다. 다만 增益邊을 떠나기 위하여 무생이라 가설한 것으로서 유생에 대해서도 마음을 발생하지 않고 무생에 대해서도 마음을 발생하지 않는다. 그리고 損減邊을 떠나기 위하여 또한 유생을 가설한 것으로서 비록 유행의 행은 없을지라도 무행의 행까지 없는 것은 아니다. 무생행품에서 말하는 무생법인은 법이 본래 무생하다는 것이다. 제행이 무생이지만 무생이라는 행이 없어야 한다. 그러므로 무생법인을 터득한다는 것도 곧 허망이다. 그래서 「법화론」 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팔생 내지 일생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터득한다는 것은 말하자면 초지의 보리를 증득한다는 것이다. … 삼계의 분단생사를 떠나 분수에 따라서 진여불성 곧 법성을 볼 수 있으므로 보리를 터득한다고 말하는 것이지 구경에 만족한 여래의 방편열반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妙法蓮華經憂波提舍」 卷下(大正藏26, pp.9下-10上) “팔생 내지 일생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를 터득한다는 것은 말하자면 초지의 보리를 증득한다는 것이다. 팔생과 일생이란 말하자면 모든 범부가 결정코 초지에서 증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각자의 역량 내지 분수에 따라서 팔 생 내지 일생에 모두 초지를 증득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란 삼 계의 분단생사를 떠나 분수에 따라서 진여법성을 볼 수 있으므로 보리를 터득한다고 말하는 것이지 구경에 만족한 여래의 방편열반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八生乃至一生得阿耨多羅三藐 三菩提者 謂證初地菩提法故 八生一生者 謂諸凡夫決定能證初地故 隨力隨分 八生乃至一生皆 證初地故 此言阿耨多羅三藐三菩提者 以離三界分段生死 隨分能見眞如法性名得菩提 非謂究 竟滿足如來方便涅槃也”)
이것은 진여불성 곧 법성에 의거하여 설하므로 보리라 말하는 것이고, 증득하여 보기 때문에 보리를 터득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무생이란 무생행으로 능증과 능득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이에 『금강삼매경』 에서는 이 무생을 터득하기 위한 방식을 좌선으로 내세운다.
보살이여, 좌선은 곧 좌선을 한다고 말하면 곧 움직임[動]이 된다. 그래서 움직임[動]도 아니고 고요함[禪]도 아니어야 곧 무생선이다. 좌선의 자성은 무생으로서 유생을 떠나 있는 것이 좌선의 모습이다. 좌선의 자성은 무주로서 집착을 떠나 있는 것이 좌선의 작동이다. 좌선의 자성에는 동과 정이 없음을 아는 것이 곧 무생법인의 터득이다. 무생법인의 반야도 역시 집착에 의지하지 않고, 무생법인의 마음도 역시 움직임에 의지하지 않는다. 좌선은 바로 이러한 지혜이기 때문에 무생법인의 반야바라밀을 터득한다.
『金剛三昧經』 無生行品第三(大正藏9, p.368上) “菩薩禪卽是動 不動不禪是無生禪 禪性無生
離生禪相 禪性無住 離住禪動 若知禪性無有動靜 卽得無生 無生般若 亦不依住 心亦不動 以是智故
故得無生般若波羅蜜”
곧 무생법인을 터득하는 방식으로 제시된 좌선은 다름아닌 선정을 의미한다. 때문에 유생을 떠나 있는 것이 좌선의 모습이고, 집착을 떠나 있는 것이 좌선의 작동이다. 좌선의 자성에는 動相이 없음을 아는 것은 좌선의 자성이 무생인 줄을 아는 것이고, 좌선의 자성에는 靜相이 없음을 아는 것은 좌선의 자성이 무주인 줄을 아는 것이다. 이에 좌선의 도리가 무생인 줄을 터득하고 좌선의 수행이 무생인 줄을 터득한다. 이와 같은 좌선을 통하여 무생법인의 반야를 말미암아 피안에 도달한다. 이것은 곧 보살의 향상문의 수행론을 설명한 것이다.
3. 向下門의 선수행론
원효는 이를 바탕으로 하여 향하문의 수행론, 곧 선의 실천론으로서 교화행을 설명하는데 그것은 주로 이타의 정신에 입각한 수행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체의 유정은 무시이래로 무명의 長夜에 빠져있어 망상의 大夢을 꾼다. 이에 보살은 관행을 닦아 무생법인을 터득하고서 중생은 본래 적정하여 그대로 본각인 줄을 통달하고, 일미의 침상에 누워 본각의 이익으로 중생을 제도한다. 이러한 이타의 도리를 드러내므로 본각리품이라 말한다.
그리고 입실제품의 實際란 虛幻을 떠나 있음을 지칭한 것으로 구경의 뜻이고, 入은 깨침으로서 실제를 터득하는 것이다. 敎에 의거하여 理를 닦아 理入하고 行入하므로 그 깨침의 실천으로 二入이라 말한다. 그러나 실제는 無際를 실제로 삼고, 이입은 無入을 入으로 삼기 때문에 입실제품이라 말한다.
무생행에 의해서 본각을 제대로 알아야 바야흐로 일체중생을 널리 교화하고 요익할 수 있다. 이에 부처님은 “그대는 어디에서 왔고, 지금 어디에 도달했는가.” 라고 묻자 무주보살은 “저는 본디가 없는 곳에서 왔고, 지금 본디가 없는 것에 도달했습니다.” 라고 답한다. (金剛三昧經 本覺利品第四(大正藏9, p.368中) 이것은 예전 범부의 지위에서 처음으로 발심했을 경우는 자기의 마음이 본래 기동이 없어 기동의 본디를 불가득한 것이라고 스스로 믿었었는데 지금 성인의 지위에서 무생을 터득하고 보니 자기의 마음이 본래 무생하여 생기의 본디를 무소득한 것이라고 깨쳐 알았다는 것이다.
곧 처음에 본디가 없는 곳으로부터 와서 지금 도달한 곳도 또한 본디가 없는 곳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본디가 없다는 것을 언급하였으므로 종말도 없는 줄을 알아야 한다. 종말도 없고 본디도 없는 것은 온 곳도 없고 도달한 바도 없다. 그래서 온 곳과 도달한 곳이 이미 똑같이 본디가 없다. 본디가 없다는 점이 똑같은즉 온것도 도달한 것도 없다. 왜냐하면 온 곳이 도달한 곳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본래 온 곳이 없고, 도달한 곳이 이미 온 곳과 똑같기 때문에 지금에야 바야흐로 도달한 곳도 없다. 이것을 교화의 측면으로 말하면 보살은 일체중생을 무여열반에 이르게 했지만 멸도된 중생은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곧 이미 터득한 본리야말로 자리이고 이타임을 말한다. 이에 관련하여 교화의 방식으로 『금강삼매경』 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제불여래는 늘상 일각으로 제식을 전변시켜 암마라식에 들어가게 한다. 왜냐하면 일체중생의 본각에 대하여 늘상 일각으로써 모든 중생을 일깨워 저 중생으로 하여금 다 본각을 터득케 하고, 모든 정식은 공적하여 무생임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결정본성은 본래 기동이 없기 때문이다.”
『金剛三昧經論』 本覺利品第四(大正藏9, p.368中) “佛言 諸佛如來 常以一覺而轉諸識入唵摩羅
何以故 一切衆生本覺 常以一覺 覺諸衆生 令彼衆生 皆得本覺 覺諸情識 空寂無生 何以故 決定本性
本無有動
이것은 교화하는 사람의 일각과 교화받는 일체중생의 본각이 동일함을 말한다. 보살은 본각으로써 남을 일깨워주기 때문에 늘상 일각으로써 모든 중생을 일깨운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중생을 구성하고 있는 오음과 십팔계 등의 존재는 본래 자체적으로 ‘나는 색이다.’ 등이라 말할 수가 없다. 다만 망심을 말미암아 색 등이라 말할 뿐이다. 이런 까닭에 일체의 모든 것은 다 공적하다는 것이 곧 일각이고 본각이다. 『금강삼매경』 에는 이와 같은 일체의 각이 공적한 도리를 일깨우는 방식이 다음과 같이 제시되어 있다.
자성에는 각이 없지만 그 도리를 깨치면 각이 된다. 선남자여, 각이 없음을 깨치고 알면 제식이 그대로 공적에 들어간다. 왜냐하면 금강지의 경지[金剛智地]에서 해탈도가 초월되고[斷], 해탈도가 초월된[斷] 이후에는 무주의 경지[無住地는 妙覺의 경지]에 들어가 출입이 없고 마음의 처소가 없는데 그것은 결정자성이기 때문이다. 그 경지는 청정하여 마치 유리처럼 맑고, 자성은 늘상 평등하여 마치 저 대지와 같으며, 묘관찰지의 깨침은 마치 지혜의 햇살과 같고, 이익을 성취하여 본각을 터득함은 마치 大法雨와 같다. 이 四智의 경지에 드는 것은 불지혜의 경지에 드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지혜에 드는 것이야말로 제식의 불생이다.
『金剛三昧經』 本覺利品第四(大正藏9, p.368下) “性無有覺 覺則爲覺 善男子 覺知無覺 諸識則入
何以故 金剛智地解脫道斷 斷已入無住地 無有出入 心處無在 決定性地 其地淸淨 如淨琉璃
性常平等 如彼大地 覺妙觀察 如慧日光 利成得本 如大法雨 入是智者 是入佛智地 入智地者
諸識不生”
여기에서 금강지의 경지는 말하자면 등각위로서 원효의 견해에 따르면 시각의 인이 원만한 金剛喩定의 경지이다. 이로써 일심이 현현할 경우에는 팔식이 모두 轉依하기 때문에 이 경우 四智가 원만해진다. 이에 그 경지가 청정하여 마치 유리처럼 맑다는 것은 대원경지이다. 그리고 자성은 늘상 평등하여 마치 저 대지와 같다는 것은 평등성지이다. 이와 같은 일심은 관찰되지도 않기 때문에 제법문을 관찰하지 못함이없다. 그리고 깨침은 마치 지혜의 햇살과 같다는 것은 묘관찰지이다. 그래서 이익을 성취하여 본각을 터득함은 마치 대법우와 같이 만물을 적셔 과실을 성숙시키는 것처럼 묘관찰지도 또한 그와 똑같이 이타행으로 본각을 터득토록 하는데, 이것은 성소작지이다. 이처럼 사지가 이미 원만한 것이 곧 시각의 원만이다. 그래서 이처럼 사지의 경지에 드는 것이 곧 불지혜의 경지에 드는 것이고, 일심의 본원에 돌아가는 것이곧 제식의 불생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중생의 경우 비록 번뇌를 떠나 있는 경우일지라도 아직 법집의 분별은 남아있고, 번뇌와 함께 할 경우에는 곧 번뇌에 오염되기가 쉽다. 때문에 다시 地前에서 다스려야 할 煩惱障[我執] 所知障[法執]을 설한다. 이에 見道에서 見惑을 다스리고 修道에서 修惑을 다스리는 伏道를 말미암아 見道에서 見惑을 완전히 단제하고 修道에서 修惑을 완전히 단제하는 斷道의 지위에 들어가 점차 번뇌의 종자를 없애간다. 이로써 종자가 완전히 사라질 경우 四魔를 완전히 떠나서 번뇌의 속박으로부터 해탈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탈에 머문다면 그것은 無住가 아니다. 때문에 『금강삼매경』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데 열반에 상주한다는 것은 곧 열반에 속박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열반은 본각리로서 본각리가 본래 열반이고, 열반의 각분은 곧 본각의 각분이며, 본각의 자성은 不異로서 열반의 자성과 無異하고, 본각은 본래 무생인데 열반도 무생이고 본각은 본래 무멸인데 열반도 무멸이기 때문이다.
『金剛三昧經』 本覺利品第四(大正藏9, p.368下) “常住涅槃 是涅槃縛 何以故 涅槃本覺利 利本涅槃
涅槃覺分 卽本覺分 覺性不異 涅槃無異 覺本無生 涅槃無生 覺本無滅 涅槃無滅
이것은 유주의 집착을 제대로 없애주려는 것으로 해탈에 대한 집착을 타파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본각의 도리는 무주인데 유주라고 간주하면 도리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도리에 어긋나는 마음은 곧 속박이다. 때문에 원효는 본각 및 시각에 대하여 無住이어야 함을 설명한다.
본각의 무주에 대해서는 本理無異․覺分無異․一味無異․無二無異이 사종무이로 설명하고, 시각의 무주에 대해서는 생사가 본래 무생인 줄을 깨쳐 아는 것이다. 때문에 생사의 번뇌에 집착하는 것을 떠나고, 열반도 본래 적정이 아닌 줄을 깨쳐 알기 때문에 열반에 들어간다는 동념을 떠난다고 말한다. 이리하여 본각리의 입장에서는 四相이 발생하지 않음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념이 불생임을 깨쳐 그 일심이 편안하고 태연한 것이야말로 곧 본각리입니다. 본각리에는 四相의 동념이 없고, 시각과 본각이 늘상 존재하므로 없지도 않으며, 시각은 없지만 본각조차 없는 것은 아니고, 본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구경각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에 시각이 없음을 깨치고 알면 그것이 곧 본각리이고 본각입니다. 본각은 청정하고 무염이며 불변이고 불역입이다. 이처럼 결정자성인 까닭에 참으로 불가사의합니다.
『金剛三昧經』 本覺利品第四(大正藏9, p.369上) “覺念不生 其心安泰 卽本覺利 利無有動 常在不無
無有不無 不無不覺 覺知無覺 本利本覺 覺者淸淨無染不變不易 決定性故 不可思議”
본각리는 마치 어려서 집을 잃은 아이가 어른이 된 후에 자기의 집에 돌아온다는 비유와 같다. 본래 떠나 있는 모습도 없고 지금 들어간 것도 아니며, 옛적부터 미혹하다고 해서 없던 것도 아니고 지금 깨쳤다고 해서 들어간 것도 아니다. 그 사람이 시방을 떠돈 것은 원행으로 널리 계탁한 것을 비유한 것이다.
이것은 곧 일념지간에 널리 제법을 계탁한 것으로 이 일념지간에 그 아버지가 알려준 것에 계합된 것이다. 원효는 이에 대하여 알려준[告言] 바로 그 때는 깨침을 터득한 것이고, 망념이 모두 사라진[究竟] 그 때는 무소득을 터득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마치 금전을 알아차린 것일 뿐이지 새삼스레 획득한 바가 아닌 것과 같다. 때문에 아버지가 알려준 것은 오십 년의 오랜 세월이 경과했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일념지간에 오십 가지 악을 모두 갖추었다는 것을 드러낸 것일 뿐이다. 이것이야말로 본각리의 도리를 보여준 것이다.
(「金剛三昧經論」 의 “告言之時卽得醒悟 念究竟時得無所得”의 대목에 대하여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는 “알려준[告言] 바로 그 때는 깨침을 터득한 것이고, 망념이 모두 사라진[究 竟] 그 때는 무소득을 터득한 것이다.”는 것으로 “알려준[告言] 바로 그 때는 깨침을 터득한 것”은 돈오에 해당하고, “망념이 모두 사라진[究竟] 그 때는 무소득을 터득한 것이다.”는 것은 점수에 해당한다. 둘째는 “알려준 바로 그 때 깨침을 터득한 것이지, 후에 망념이 모두 사라진 그 때에야 비로소 터득한다는 것은 소득이 아니다.”는 것으로 돈오돈수의 입장에 해 당한다. 둘째의 해석은 바로 뒤에 이어지는 금전의 비유 곧 “마치 금전을 알아차린 것일 뿐 이지 새삼스레 획득한 바가 아닌 것과 같다.”는 것에 합치된다. 금전의 비유와 관련하여 첫 째에 대한 해석은 다음과 같다. “알려준 바로 그 때는 깨침을 터득한 것”이란 일념지간에 알 아차린 것에 해당하고, “망념이 모두 사라진[究竟] 그 때는 무소득을 터득한 것이다.”는 것은 오십 년 동안 떠돈 것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하에서 “때문에 아버지가 알려준 것 은 오십 년의 오랜 세월이 경과했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일념지간에 오십 가지 악을 모두 갖추었다는 것을 드러낸 것일 뿐이다.”는 대목으로 보면 일념과 오십 년이 시간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더불어 수행의 완성을 의미한다. 때문에 금전의 비유와 관련해도 첫째의 경우 하등의 모순이 아니다. 다만 일념이라는 대목과 오십 년 동안이라는 대목의 어디에 중점을 두고 해석하고, 일념과 오십 년을 수행의 과정 내지 완성의 어디에 중점을 두고 해석하는가 의 문제로서 모순대립의 문제로 볼 필요는 없다. 이에 여기에서 본 역자는 첫째의 입장으로 해석을 진행한다.)
그리고 행입에 대해서는 地前位에 해당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곧 도리를 증득한 수행으로 무생행에 들어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금강삼매경론 에서 이 二入은 모두 육행의 보살이어야 여여의 경지를 아는 단계로 설정되어 있다. 그리하여 이입은 자리행이고 행입은 이타행으로 설정하였다. 이로써 중생이 실제에 들어갈 수가 있다. 거기에는 반드시 방편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여여의 마음과 지혜는 변제가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중생이 실제에 들어가는 방편의 계위는 우선 十信․十住․心行․十廻向에서 이루어지는 理入門의 방편관이 필요하다.38) 이에 대하여 『금강삼매경』 에서는 들떠 있는 마음을 다스리는 방편으로 存三守一의 방편을 언급한다.
(왜냐하면 중생의 마음이 들떠 있는 것은 안팎의 번뇌와 隨煩惱 때문인데 그 중생으로 하여 금 세 가지에 통하고 하나를 유지하여[存三守一] 여래선에 들도록 해야 그 선정으로 인하여 들뜬 마음이 곧 사라지기 때문이다.)
세 가지에 통하고 하나를 유지하여 여래선에 들어간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세 가지에 통한다는 것은 세 가지 해탈을 통한다는 것이고, 하나를 유지한다는 것은 일심의 여여를 유지하는 것이며, 여래선에 들어간다는 것은 일심의 여여를 理觀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 곧 실제에 들어가는 것이다.
『金剛三昧經』 入實際品第五(大正藏9, p.370上) “何謂存三守一 入如來禪 佛言 存三者 存三解脫
守一者 守一心如 入如來禪者 理觀心如 入如是地 卽入實際”
세 가지 해탈은 허공해탈․금강해탈․반야해탈이다. 『보살영락본업경』 에 의하면 십주에서 이루어지는 팔해탈 가운데서 문혜로 內假와 外假의 두 모습은 불가득임을 터득하는 것이 첫째 해탈이고, 사혜로 안의 오법과 밖의 일체법이 불가득하게 되는 것이 둘째 해탈이며, 수혜로 住觀․行觀․向觀․地觀․無相觀․一切種智觀 등 六觀을 구족하여 색계의 오음이 공해지는 것이 셋째 해탈이다.(菩薩瓔珞本業經 卷上(大正藏24, p.1013中)
여기에서 첫째의 허공해탈은 안으로는 색상을 두고 밖으로는 색 등을 관찰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안에 색․수․상․행․식의 오음법상을 두고서 안으로 아공을 관찰하고, 밖에 색․성․ 향․미․촉․법을 두고 중생공을 관찰하는 것이다.
둘째의 금강해탈은 안의 색상은 없애고 밖에 색․성․향․미․촉․법을 관찰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안으로 색․수․상․행․식 의 오음법상을 없애고 밖으로 일체의 산하대지 등이 공하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뒤의 여섯 가지 해탈은 위의 색계와 무색계의 일체법이 공하다고 관찰하므로 수혜라 말한다. 육관은 모두 수혜로서 선정에 의하여 발생되는 까닭에 여섯 가지 해탈을 모두 반야해탈이라 말한다.
(菩薩瓔珞本業經 卷上(大正藏24, p.1013上)
이리하여 세 가지 해탈을 성취한 사람은 시각이 완성되어 만덕이 원만해진 과만족 덕불과 일체중생이 본래 본각이라는 여래장불을 성취하여 보리심을 내고, 나아가서 대승의 삼취정계에 들어가면서도 그에 대한 상을 초월한다. 삼취정계의 수행에 대해서는 진성공품을 통하여 제시하고 있다.
진여법은 모든 공덕과 더불어 모든 수행덕을 갖추고 본성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진여본성이다. 이와 같은 진성은 삼취정계의 상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곧 일본각이 기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삼취정계의 근본인 일본각은 본래 적정하기 때문이고, 삼취정계의 작용이 시행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은 이미 본각에 의하여 삼취정계의 작용이 성취되었지만 그 작용에는 위의로 행해지는[施作] 형상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
4. 반야바라밀의 실천
이와 관련하여 원효는 사연에 대하여 말한다. 첫째는 擇滅 곧 열반을 작용시키는 힘으로 별해탈계를 취하는 연인데 말하자면 섭율의계이고, 둘째는 본각리의 청정한 근본의 힘으로 모든 선법을 집기하는 연인데 말하자면 섭선법계이며, 셋째는 본각의 지혜인 대비의 힘을 일으키는 연인데 말하자면 섭중생계이고, 넷째는 일본각으로 삼취정계를 두루 꿰뚫어보는 지혜력의 연인데 말하자면 진여를 따라 머무는 것이다.
(四緣은 말하자면 일심의 본각리 가운데 갖추어진 사대연력이 작용하여 만들어내는 삼취정 계의 연이다. 첫째는 멸의지연이고, 둘째는 생의지연이며, 셋째는 섭의지연이고, 넷째는 이 의지연이다.)
이로써 원효는 일체중생이 본래 일심과 본각이건만 단지 무명으로 말미암아 환상을 따라 유전할 뿐으로 모두 여래의 일미의 설법을 좇아 마침내 모두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으로부터 삼취정계의 성취에 이르기까지 보살의 계위는 모두 본각리로부터 나온 것임을 일천제로부터 보살에 이르기까지 다섯 가지 계위의 분제가 있음을 말한다.
제일의 信位는 십신행에 해당한다. 비록 불퇴의 경지는 아니지만 대승심을 일으킨 것이다. 이것을 『본업경』 에서는 信想菩薩이라 말한다. 제이의 思位는 三十心에 해당하는데 제법이 유식의 도리임을 사량하지만 아직은 무분별수행을 일제히 眞證한 것은 아니다. 제삼의 修位는 십지행에 해당하는데 무분별수를 眞證하여 十障46)의 대치를 터득하는 것이다. 제사의 行位는 등각행에 해당하는데 인행은 이미 원만하지만 과지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제오의 捨位는 묘각행에 해당하는데 적멸에도 잡착하지 않고 대비로 널리 교화하는 것이다.
(信想菩薩이란 보살이 十地에서 점차 단제하는 十重障을 가리킨다. 첫째는 異生性障, 둘째는 邪行障, 셋째 는 闇鈍障, 넷째는 微細煩惱現行障, 다섯째는 於下乘般涅槃障, 여섯째는 粗相現行障, 일곱째 는 細相現行障, 여덟째는 無相中作加行障, 아홉째는 利他中不欲行障, 열째는 於諸法中未得 自在障이다.)
이 다섯 가지 계위는 일본각으로 본각리를 통해 들어가는데 본래 본각의 도리라는 자성이 없기 때문에 불가득이고, 본각의 도리가 본래 없다는 그것이 없지는 않기 때문에 불가득도 아니다. 따라서 『금강삼매경』 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리불이 여쭈었다. 존자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교화하기[事] 이전에 먼저 본리를 취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본리를 취한다는 생각도 적멸하고 적멸도 곧 여여합니다. 그래서 모든 공덕을 두루 지니고 모든 법을 빠짐없이 담고 있어서 원융하고 불이하여 불가사의합니다. 그법이야말로 곧 마하반야바라밀로서 대신주이고 대명주이며 무상주이고 무등등주일 것입니다.
『金剛三昧經』 眞性空品第六(大正藏9, p.371中) “舍利弗言 如尊所說 在事之先 取以本利 是念寂滅
寂滅是如 總持諸德 該羅萬法 圓融不二 不可思議 當知 是法卽是摩訶般若波羅密 是大神咒 是大明咒 是無上明咒 是無等等咒”
여기에서 반야바라밀은 모든 공덕을 두루 지니고 모든 법을 빠짐없이 담고 있어서 원융하고 불이하여 불가사의한 것으로 대신주이고 대명주이며 무상주이고 무등등주이다. 이에 대하여 원효는 “바라밀을 분별하면 두 가지 바라밀이 있다. 곧 등각위에서는 만행의 피안에 도달하는 바라밀이고, 묘각위에서는 만덕의 피안에 도달하는 바라밀이다.”고 말한다.
(「金剛三昧經論」 卷下(韓國佛敎全書1, p.656中) “別而言之有二種到 在等覺位到萬行之彼岸故 在妙覺時到萬德之彼岸故”)
바로 선정바라밀의 내용은 구체적으로는 大空의 터득이다. 大空은 소승의 偏空에 상대되는 말로서 대승구경의 공적을 말한다. 空도 또한 空하다는 것이 구경의 대공이다. 곧 대승의 열반을 가리킨다. 이 대공에는 대략 다섯 가지의 뜻이 있다. 첫째는 인공과 법공의 이공을 대공이라 말하는데 잡아함경 가운데 대공경의 설명과 같다. 둘째는 반야바라밀이 공한 것을 대공이라 말하는데 『열반경』 의 설명과 같다. 또 『능가경』 에서도 같은 설명을 한다. 셋째는 器世界가 공한 것을 대공이라 말하는데 『해심밀경』 의 설명과 같다. 넷째는 아뢰야식이 공한 것을 대공이라 말하는데 「십지론」 의 설명과 같다. 다섯째는 시방의 모습이 공한 것을 대공이라 말하는데 「대지도론」 의 설명과 같다. 이에 대공의 성취는 반야바라밀인데 반야바라밀은 열반이고 열반은 해탈로서 반야와 열반과 해탈이 서로 통하는 모습이다. 이에 『금강삼매경』 에는 육바라밀이 다음과 같이 설정되어 있다.
선남자여, 이 육바라밀이야말로 모두 본각의 이익을 획득하는 것이고 결정성에 들어가는 것이며 출세를 초연하는 것이고 걸림이 없는 해탈이다. 선남자여, 이와 같이 해탈의 법상은 전혀 相도 없고 行도 없으며, 또한 解도 없고 不解도 없으므로 해탈이라 말한다. 왜냐하면 해탈의 모습은 無相이고 無行이며 無動하고 無亂하여 적정한 열반이지만 또한 열반의 모습에도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金剛三昧經』 無相法品第二(大正藏9, p.367上) “善男子 是六波羅密者 皆獲本利 入決定性 超然出世 無礙解脫 善男子 如是解脫法相 皆無相行 亦無解不解 是名解脫 何以故 解脫之相 無相無行 無動無亂 寂靜涅槃 亦不取涅槃相”
이 경우 반야바라밀은 텅빈 마음의 공성에 집착하지 않는 證道의 지혜이고, 일체행이 본래 발생이 아님을 통달하여 무생에 집착하지 않고 늘상 밖으로 교화하는 敎道의 지혜를 가리킨다. 그리고 이 경우의 열반은 사종열반 가운데 본래청정열반을 가리킨다. 이 경우의 해탈은 法身․般若․解脫의 열반삼덕이 하나로서 해탈을 가리킨다. 육바라밀의 수행과 法身․般若․解脫의 덕은 초지에서 이미 터득되지만 이에 묘각위에 이르러 구경원만해지기 때문에 해탈이 그대로 열반이다.
이런 점에서 육바라밀은 곧 출세간의 것으로 세간의 유상․유위와는 같지 않다. 그렇지만 그것이 중생세간에서 실현되기 위해서는 세간적인 유상․유위에 걸맞는 가르침으로 제시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이 원효의 교화방식에 있어서는 向上의 證道波羅蜜과 向下의 敎道波羅蜜 운동으로 설정되었다. 이 가운데 특히 『금강삼매경』에서는 둔근기의 사람들에 대한 교화행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저 둔근자에게 하나의 사구게를 수지하도록 하면 곧 실제에 들어간다. 왜냐하면 일체의 불법은 하나의 게송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에 존자께서 게송을 설하여 말씀하셨다.
인연으로 발생한다는 말의 뜻은
소멸이란 뜻이지 발생은 아니다
일체의 생멸이 소멸한다는 뜻은
발생이란 뜻이지 소멸은 아니다
『金剛三昧經』 眞性空品第六, (大正藏9, p.371下) “佛言 令彼鈍根 受持一四句偈 卽入實諦
一切佛法 攝在一偈中 於是尊者 而說偈言 因緣所生義 是義滅非生 滅諸生滅義 是義生非滅”
원효는 여기에서 제시된 하나의 게송은 불법의 요체로서 모든 불법을 섭수하는 것이라 말한다. 곧 일체 세제의 모든 법은 속제를 융합하여 진제로 삼는다. 말하자면 발생한다는 말의 뜻도 본래 적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발생의 뜻이 곧 소멸인 연유를 드러낸다. 그 발생의 뜻은 곧 발생이 아님을 말미암은 까닭에 그 발생을 추구해도 곧 성취되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발생의 뜻은 곧 적멸이다.
말하자면 적멸법이 연으로부터 생기한다는 것은 불생의 생이고 불멸의 멸이다. 그것을 합하여 말하면 발생이 곧 적멸이지만 적멸을 고수하지 않고, 적멸이 곧 발생이지만 발생에 집착하지 않는다. 발생과 소멸이 둘이 아니고 기동과 적멸이 다르지 않다. 이와 같은 것을 일심법이라 말한다.
때문에 보통의 중생에게는 본각리를 터득하고 내지 삼취정계를 실천할 것을 언급하면서, 둔근기의 경우에는 게송 하나를 암송하여 발생과 소멸의 분별을 벗어남으로써 그 적멸과 발생의 반야는 자성이 공적한 지혜의 바다임을 터득한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수행을 완성함으로써 비로소 여래장에 들어가는데 그 여래장은 일체중생의 본래성불이 실현된 장이기도 하다. 곧 무량법과 일체행이 여래장에 귀입하지 않음이 없다.
Ⅳ. 결어
조사의 발원과 그 이념은 보리달마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혜능 이후에 본격적으로 전개된 일군의 선풍을 조사선이라 말한다. 이와 같은 조사선의 본래성불에 기초한 일상에서의 실천적인 가르침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승되어 오고 있다. 그에 따라서 변화하는 세상에 부합되어 순수한 정법의 가르침보다는 상법 및 말법시대에 부응하는 가르침도 아울러 출현하였다. 곧 이전에 널리 설해진 경전은 정법시절의 이익이었음에 비하여 본 금강삼매경 은 상법시절의 교화를 가리킨다. 곧 시절에 따라서 시설된 설법에 깊고 얕음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금강삼매경』 은 상법 및 말법의 중생들을 위하여 설해진 경전이기 때문이다.
(「金剛三昧經」 無相法品第二, (大正藏9, p.366中) “尊者 若佛滅後 正法去世 像法住世 於末劫 中 五濁衆生 多諸惡業輪迴三界無有出時 願佛慈悲爲後世衆生 宣說一味決定眞實 令彼衆生等 同解脫.)
곧 일체중생은 본래 일심과 본각이건만 단지 무명으로 말미암아 환상을 따라 유전할 뿐으로 모두 여래의 일미의 설법을 좇아 마침내 모두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경우에 그것이 무소득이기 때문에 일미라 말하는데 그것이 곧 일승이다. 저 『능가경』 에서는 “적멸이란 일심을 가리키고, 일심이란 여래장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지금 부처님이 들어간 실제와 법상은 적멸의 뜻이고, 일각과 요의는 일심과 여래장의 뜻이다. 법화론 에서는 “제불여래는 저 법이 구경과 실상임을 안다. 실상이란 여래장과 법신의 체가 불변의 뜻임을 말한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일각은 일체의 제법은 오직 일심일 뿐이고, 일체의 중생은 곧 일심의 본각이다. 이런 뜻으로 말미암아 일각이라 말한다. 이에 부처님이 중생으로 하여금 본각의 이익을 통하여 해탈법을 터득하도록 가르쳐주기 위하여 제시한 “제불세존이 오직 일대사인연으로 세상에 출현하셨다.”는 말에 대하여 세친은 네 가지로 말한다.
(妙法蓮華經憂波提舍 卷下(大正藏26, p.7上-中) “ 첫째는 無上의 뜻이다. 여래의 一切智智 를 제외하고 달리 그 누구에게도 없다는 것이다. 법화경 의 ‘부처님의 지견을 열어 중생의 지견을 청정케 하려는 까닭에 세상에 출현하셨다.’는 내용을 가리킨다. 불지견이란 여래께서 증득한 여실지로써 중생의 뜻을 아는 것이다. 둘째는 같다는[同]의 뜻이다. 모든 성문과 벽 지불과 부처님은 평등한 법신이다. 이것은 저 법화경 의 ‘중생에게 불지견을 보여주려는 까 닭에 세상에 출현하셨다.’는 내용을 가리킨다. 평등한 법신이란 불성과 법신이 무차별하기 때 문이다. 셋째는 모른다[不知]는 뜻이다. 모든 성문과 벽지불 등은 그 진실한 도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진실한 도리를 모른다는 것은 구경에는 오직 일불승 뿐인 줄을 모르는 것이다. 저 법화경 의 ‘중생에게 불지견을 깨우쳐주려는 까닭에 세상에 출현하셨다.’는 내용을 가리킨 다. 넷째는 불퇴전지를 증득케 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무량한 智業을 시현해주려는 것이다.")
원효는 이에 대하여 “만약 중생을 교화하려면 교화한다는 분별상이 없어야 하고 교화하지 않았다는 분별상도 없어야 한다. 그래야 그 교화가 훌륭하다. 그리고 저 중생들에게도 모두 心과 我를 벗어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心과 我는 구체적으로 법공과 아공을 터득하는 것인데 이것은 보살이 방편관을 닦을 경우부터 모든 有相을 타파하여 교화한다는 미혹한 분별상[幻相]까지도 마음에 생겨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아울러 이미 교화한다는 분별상을 타파하고 이어서 교화하지 않았다는 空相마저 버리는데. 이 이유는 중생은 본래부터 마음이 분별상을 벗어나 있음을 모르고 끝없이 모든 분별상에 집착하여 망념을 일으키기 때문이다.그러므로 먼저 모든 분별상을 타파하여 분별상에 집착하는 마음을 없애야 한다.
그리고 보살의 입장에서도 비록 이미 교화했다는 미혹한 분별상은 타파했을지라도 아직 교화하지 않았다는 공성에는 집착한다. 공성에 집착하기 때문에 공에 대하여 마음을 일으킨다. 때문에 다시 교화하지 않았다는 공성도 없애야 한다. 이런 경우에야 바야흐로 공에 집착하는 마음이 생겨나지 않아 반드시 無二中道를 터득하여 부처님과 더불어 제법실상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일체중생에게 我와 心이 있으면 우선 我가 있는 자에게는 십이인연을 관찰토록 한다. 십이지인연의 관찰에서 無作緣生을 관찰하는 것은 作者에 대한 집착을 대치하는 것으로 마치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고 설하는 경우와 같다. 또한 無常緣生을 관찰하는 것은 常住에 대한 집착을 대치하는 것으로 마치 ‘이것이 생겨나므로 것이 생겨난다.’고 성하는 경우와 같다. 왜냐하면 아에 대한 집착이 남아있는 것은 작자와 상주가 근본이 되는데 그 근본이 없어지기 때문에 모든 지말도 따라 멸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아에 대하여 집착하는 생멸상의 사려분별이 사라진다. 그 사려분별이 없으면 곧 생멸이 없고, 여실하여 기동이 없으며, 분별사식이 安寂하고, 번뇌가 발생하지 않아 안․이․비․설․신의 오법이 청정해진다. 오법이 청정한 경지에 들어가면 마음에 곧 망념이 없고, 망념이 없으면 여래의 자각성지의 경지에 들어가며, 자각성지의 경지에 들어가면 일체법이 본래 불생임을 제대로 알아서 망념이 사라진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마음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경우에 망념의 불각이 없고, 불각이 없는 경우에 시각의 충만이 드러나며, 시각이 충만할 경우에는 生․住․異․滅의 사상으로 일어나는 망념의 불각이 본래 불생임을 能知하는 것이다. 곧 본래 망상이 없음을 아는 것으로 이것이야말로 시각이 본각과 다르지 않음을 드러낸 것이다.
이처럼 십이인연의 도리를 관찰함으로써 공적심으로 부동의 경지에 도달하면 일체중생이 지니고 있는 유일의 본각을 통하여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일각에 함께 돌아가 삼계에 의지하지 않는 보시바라밀을 갖추고, 범부와 성인의 戒相에 집착하지 않는 지계바라밀을 갖추며, 공의 도리에 안착하여 적정한 삼업으로 몸과 마음에 집착이 없어지는 청정하고 무념한 인욕바라밀을 갖추고, 명칭[名]과 법수[數]를 멀리 떠나고 공견과 유견을 단제하며 오음의 공에 깊이 들어가서 섭수함도 없고 방기함도 없는 정진바라밀을 갖추며, 공적을 모두 떠났으면서도 모든 공에 집착이 없고 성품이 금강과 같은 선정바라밀을 갖추고, 마음에 마음의 모습이 없어서 허공처럼 집착하지 않고 제행도 발생하지 않으며 적멸도 증득하지 않고 지혜에도 머물지 않는 반야바라밀을 갖추어 삼보를 저버리지 않는 반야바라밀을 갖춘다.
이로써 「금강삼매경론」 에서 제시한 선수행론을 각 품의 차제에 따라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첫째의 무상법품은 분별상이 없는 관찰을 설명한 것이다. 둘째의 무생행품은 무생과 무생을 터득하는 수행을 드러낸 것이다. 셋째의 본각리품은 본각에 의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넷째의 입실제품은 허상으로부터 실제에 들어가는 것이다. 다섯째의 진성공품은 일체행이 진성과 진공에서 나왔음을 변별한 것이다. 여섯째의 여래장품은 무량한 법문이 여래장에 들어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이와 같은 여섯 품은 모두 관행이다. 왜냐하면 무릇 무시이래로 유전하는 모든 망상은 단지 형상에 집착하고 분별하는 병폐 때문이다.
이들 각 품의 선수행론의 관계에 대하여 말하면 먼저 모든 분별상을 없애야 한다고 말한다. 때문에 첫째로 분별상이 없는 법을 관찰할 것을 설명하였다. 비록 모든 분별상을 없앴더라도 만약 관찰하는 마음이 남아있으면 그 관찰하는 마음 때문에 오히려 본각을 모르게 되므로 관찰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도 없앤다. 이런 까닭에 둘째로 무생과 행을 드러낸다. 이윽고 행과 무생이어야 바야흐로 본각을 알게 된다. 無相과 無生은 向上의 상구보리에 해당한다.
그 본각에 의하여 중생을 교화하여 본각의 이익을 터득하도록 하므로 셋째로 본각리문을 설명한다. 만약 본각에 의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면 중생이 곧 허상으로부터 실제에 들어가는 까닭에 넷째로 입실제에 대하여 설명한다. 內行에는 곧 무상법과 무생행이 해당하고, 外化에는 곧 본각리와 입실제가 해당한다. 본각리와 입실제는 향하의 하화중생에 해당한다. 그러나 결국 향상과 향하는 모두 본래성불에 근거한 자리의 수행이고 깨침의 회향이기 때문에 결국 진성공으로 나아갈 수가 있다.
이처럼 내행이 향상과 외화의 향하라는 두 가지 방식[二利]으로 만행을 갖추어 동일하게 진성을 도출하고 모두 진공을 따른다. 이런 까닭에 다섯째로 진성과 진공을 설명한다. 이리하여 진성에 의하여 만행이 갖추어져야 여래장 곧 일미의 근원에 들어가는 까닭에 여섯째로 여래장을 드러낸다. 그래서 마음의 근원에 돌아가면 곧 무위가 된다. 무위이기 때문에 되지 않는 것이 없다. 때문에 여섯 가지 품을 설하여 대승을 섭수한다. 이처럼 집착이 없고 분별이 없는 평등한 경지인 무소득의 일미야말로 바로 반야바라밀의 수행론으로 향하는 금강삼매경 의 宗이고 要이다. 제목으로 보아 알 수 있듯이 『금강삼매경』 은 수행 특히 선수행과 밀접한 선경에 속한다. 때문에 원효는 『능가경』 , 「대승기신론」 , 『여래장경』 , 『법화경』 , 『화엄경』 기타 많은 선경을 인용하여 무집착과 무분별의 도리 및 그 행위방식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대승불교·한국불교 논문및 평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법화경』에 나타난 행함과 구원의 상관성 고찰 (0) | 2015.08.30 |
---|---|
하택신회의 생애와 저작 (0) | 2015.08.03 |
선종의 印可證明 연구(2) - 傳法偈의 성립과 발전을 중심으로 - (0) | 2015.08.03 |
선종의 印可證明 연구(1) (0) | 2015.08.03 |
선종의 법맥의식과 전등사서의 형성 (0) | 2015.07.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