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아함경 제 26 권
9. 인품 제 4 ③
103. 사자후경(師子吼經) 제 7 [제2 소토성송]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세존께서 구루수(拘樓瘦)를 유행하실 적에 도읍인 검마슬담(劍磨瑟曇)에 머무셨다.
그곳에서 세존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가운데는 제1의 사문(沙門)과 제2 제3 제4의 사문이 있고, 이 밖에 다시 다른 사문 범지는 없다. 이도(異道 : 外道)는 모든 것이 공(空)해서 사문 범지가 없다. 너희들은 대중들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이렇게 바로 사자후(師子吼)를 하여라.
비구들아, 혹 어떤 이학(異學)이 와서 너희에게 묻기를 '여러분, 그대들은 어떤 행(行)이 있고, 어떤 힘[力]이 있으며, 어떤 지혜가 있어서, 그대들로 하여금 (여기에는 제1의 사문과 제2 제3 제4의 사문이 있고, 이 밖에 다시 다른 사문 범지는 없다. 이 도는 모든 것이 공해서 사문 범지가 없다)고 말하게 하는가? 그대들은 어떻게 대중들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이렇게 바로 사자후를 하는가?'라고 하거든
비구들아, 너희들은 마땅히 그 이학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여라.
'여러분 우리 세존께서는 지식[知]이 있으시고, 견해(見解)가 있으십니다. 여래 무소착 등정각께서는 네 가지 법을 말씀하셨는데, 이 네 가지 법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이 이렇게 말하게 하셨습니다.
(여기에 제1의 사문과 제2 제3 제4의 사문이 있고, 이 밖에 다시 다른 사문 범지는 없다. 이도는 모든 것이 공해서 사문 범지가 없다.)
우리들은 대중들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이렇게 바로 사자후를 합니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여러분, 우리는 스승님을 믿고, 법을 믿고, 계덕(戒德)의 구족(具足)을 믿고, 도를 같이 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공경하며 정성껏 받들어 섬깁니다. 여러분, 우리 세존께서는 지식이 있고 견해가 있으십니다. 여래 무소착 등정각께서는 이 네 가지 법을 말씀하시고, 이 네 가지 법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이 이렇게 말하게 하셨습니다.
(여기 제1의 사문과 제2 제3 제4의 사문이 있고, 이 밖에 다시 다른 사문 범지는 없다. 이도는 모든 것이 공해서 사문 범지가 없다.)
우리들은 대중들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이렇게 바로 사자후를 합니다.'
비구들아, 이학들은 혹 다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여러분 우리도 또한 스승님을 믿으니 곧 우리 스승을 말함이요, 법을 믿으니 곧 우리 법을 말하며, 계덕의 구족은 곧 우리 계율을 말하고, 도를 같이 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공경하며 정성껏 받들어 섬기니 곧 우리의 도를 같이 하는 출가자와 재가자들을 말합니다. 여러분, 사문 구담과 우리들의 이 두 가지 말에 어느 것이 낫고, 어떤 뜻이 있으며,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비구들아, 너희들은 마땅히 그 이학자들에게 이렇게 물어라.
'여러분 구경(究竟)을 하나라고 합니까? 구경을 많다고 합니까?'
비구들아, 혹 그 이학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한 구경이 있되, 많은 구경은 없습니다.'
비구들아, 너희들은 다시 이학들에게 물어라.
'여러분 욕심 있는 사람이 구경을 얻는 것을 옳다고 하겠습니까? 욕심 없는 사람이 구경을 얻는 것을 옳다고 하겠습니까?'
비구들아, 혹 이학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욕심 없는 사람이 구경을 얻는다는 것은 옳고, 욕심 있는 사람이 구경을 얻는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면 비구들아, 너희들은 다시 이학들에게 물어라.
'여러분, 성냄이 있는 사람이 구경을 얻는다는 것을 옳다고 하겠습니까? 성냄이 없는 사람이 구경을 얻는 것을 옳다고 하겠습니까?'
비구들아, 혹 이학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성냄이 없는 사람이 구경을 얻는다는 것은 옳고, 성냄이 있는 사람이 구경을 얻는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면 비구들아, 너희들은 다시 이학들에게 물어라.
'여러분, 어리석음이 있는 사람이 구경을 얻는 것을 옳다고 하겠습니까? 어리석음이 없는 사람이 구경을 얻는 것을 옳다고 하겠습니까?'
비구들아, 혹 이학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여러분 어리석음이 없는 사람이 구경을 얻는 것은 옳고, 어리석음이 있는 사람이 구경을 얻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면 비구들아, 너희들은 다시 이학들에게 물어라.
'여러분, 애욕이 있고, 집착[受]이 있는 사람이 구경을 얻는 것을 옳다고 하겠습니까? 애욕이 없고 집착이 없는 사람이 구경을 얻는 것을 옳다고 하겠습니까?'
그러면 비구들아, 혹 이학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여러분 애욕이 없고 집착이 없는 사람이 구경을 얻는 것은 옳고, 애욕이 있고 집착이 있는 사람이 구경을 얻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면 비구들아, 너희들은 다시 이학들에게 물어라.
'여러분 지혜가 없고 지혜를 말하지 않는 사람이 구경을 얻는 것을 옳다고 하겠습니까? 지혜가 있고 지혜를 말하는 사람이 구경을 얻는 것을 옳다고 하겠습니까?'
그러면 비구들아, 혹 이학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여러분 지혜가 있고 지혜를 말하는 사람이 구경을 얻는 것은 옳고, 지혜가 없고 지혜를 말하지 않는 사람이 구경을 얻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면 비구들아, 너희들은 다시 이학들에게 물어라.
'여러분, 미워함이 있고 다툼이 있는 사람이 구경을 얻는 것을 옳다고 하겠습니까? 미워함이 없고 다툼이 없는 사람이 구경을 얻는 것을 옳다고 하겠습니까?'
그러면 비구들아, 혹 이학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여러분 미워함이 없고 다툼이 없는 사람이 구경을 얻는 것은 옳고, 미워함이 있고 다툼이 있는 사람이 구경을 얻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면 비구들아, 너희들은 그 이학들을 위하여 응당 이렇게 말해야 한다.
'여러분, 그대들의 말처럼 한 구경이 있다는 것이 옳고, 많은 구경이 있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욕심이 없는 자가 구경을 얻는 것은 옳고 욕심이 있는 자가 구경을 얻는 것은 옳지 않으며, 성냄이 없는 자가 구경을 얻는 것은 옳고 성냄이 있는 자가 구경을 얻는 것은 옳지 않으며, 어리석음이 없는 자가 구경을 얻는 것은 옳고 어리석음이 있는 자가 구경을 얻는 것은 옳지 않으며, 애욕이 없고 집착이 없는 자가 구경을 얻는 것은 옳고 애욕이 있고 집착이 있는 자가 구경을 얻는 것은 옳지 않으며, 지혜가 있고 지혜를 말하는 자가 구경을 얻는 것은 옳고 지혜가 없고 지혜를 말하지 않는 자가 구경을 얻는 것은 옳지 않으며, 미워함이 없고 다툼이 없는 자가 구경을 얻는 것은 옳고 미워함이 있고 다툼이 있는 자가 구경을 얻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만일 어떤 사문 범지가 한량없는 견해에 의지하면 그는 모든 것에 대해 있다는 견해[有見]와 없다는 견해[無見]의 두 가지 견해에 의지한다. 만약 있다는 견해에 의지하면 그는 곧 있다는 견해에 집착하고, 있다는 견해만 쫓으며, 있다는 견해에 머물러 없다는 견해를 미워하고 비난한다. 만일 없다는 견해에 의지하면 그는 곧 없다는 견해에 집착하고, 없다는 견해만 좇으며, 없다는 견해에 머물러 있다는 견해를 미워하고 비난한다.
어떤 사문 범지가 인(因)을 모르고 습(習 : 集)을 모르며, 멸(滅)을 모르고 다함[盡]을 모르며, 맛[味]을 모르고 환(患)을 모르며, 출요(出要)를 사실 그대로 알지 못하면, 그는 모든 것에 욕심이 있고 성냄이 있으며, 어리석음이 있고 애욕이 있고 집착이 있으며, 지혜가 없고 지혜를 말하지 않으며, 미워함이 있고 다툼이 있다. 그는 곧 생 노 병 사를 떠나지 못하고, 또한 시름과 슬픔 울음 걱정 괴로움 번민을 벗어나지 못하며, 괴로움의 끝[苦邊]을 얻지 못하느니라.
만일 어떤 사문 범지가 이 두 견해에 대해서 인(因)을 알고 습(習)을 알며, 멸(滅)을 알고 다함[盡]을 알며, 맛을 알고 환을 알며, 출요를 사실 그대로 안다면, 그는 모든 것에 욕심이 없고 성냄이 없으며 어리석음이 없고, 애욕이 없고 집착이 없으며, 지혜가 있고 지혜를 말하며, 미워함이 없고 다툼이 없다. 그는 곧 생 노 병 사를 떠나게 되고, 또한 시름과 슬픔 울음 걱정 괴로움 번민을 벗어나게 되어, 곧 괴로움의 끝을 얻느니라.
혹 어떤 사문 범지는 집착[受] 끊기를 말하지만 모든 집착을 끊는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욕심에의 집착[欲受]을 끊으라고 말하지만 계에의 집착[戒受] 견해에의 집착[見受] 나에의 집착[我受]을 끊으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그 사문 범지는 3처(三處 : 戒受 見受 我受)를 사실 그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비록 집착 끊기를 말하지만 모든 집착을 끊는 것을 말하지는 않느니라.
또 어떤 사문 범지는 집착 끊기를 말하지만 모든 집착을 끊는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욕심[欲]에의 집착과 계[戒]에의 집착을 끊는 것은 말하지만, 견해에의 집착과 나에의 집착을 끊는 것은 말하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그 사문 범지는 2처(處)를 사실 그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비록 집착 끊기를 말하지만 모든 집착을 끊는 것을 말하지는 않느니라.
또 어떤 사문 범지는 집착 끊기를 말하지만 모든 집착을 끊는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욕심에의 집착 계에의 집착 견해에의 집착을 끊는 것은 말하지만 나에의 집착을 끊는 것은 말하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그 사문 범지는 1처(處)를 사실 그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비록 집착 끊기를 말하지만 모든 집착을 끊는 것을 말하지는 않느니라.
이러한 법(法)과 율(律)에 있어서는 혹 스승을 믿더라도 그것은 바른 것이 아니요, 제1이 아니다. 만약 법을 믿더라도 또한 바른 것이 아니요, 제1이 아니다. 혹 계덕(戒德)을 구족하더라도 또한 바른 것이 아니요, 제1이 아니다. 도를 같이 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공경하며 정성껏 받들어 섬기더라도 또한 바른 것이 아니요, 제1이 아니다.
만일 어떤 여래가 세상에 나오시면 그는 무소착(無所著) 등정각(等正覺) 명행성위(明行成爲) 선서(善逝) 세간해(世間解) 무상사(無上士) 도법어(道法御) 천인사(天人師) 불중우(佛衆祐)라 불린다. 그는 집착을 끊을 것을 말씀하시고, 현법(現法)에서 모든 집착을 끊을 것을 말씀하시며, 욕심에의 집착 계에의 집착 견해에의 집착 나에의 집착을 끊을 것을 말씀하신다.
이 4집착은 무엇을 인(因)하고 무엇을 습(習)하며, 무엇을 좇아 나고, 무엇을 근본으로 하는가?
이 네 가지 집착은 무명(無明)을 인으로 하고 무명을 습으로 하며, 무명을 좇아 나고 무명을 근본으로 한다.
만일 어떤 비구가 무명(無明)이 이미 다하고 명(明)이 이미 생겼다면 그는 곧 그로부터 다시는 욕심에의 집착 계에의 집착 견해에의 집착 나에의 집착을 가지지 않는다. 그는 집착을 가지지 않은 뒤에는 곧 두려워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은 뒤에는 곧 인연을 끊어 반드시 반열반(般涅槃)을 얻는다. 그리하여 생이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서며, 할 일을 이미 마쳐, 다시는 후세의 생명을 받지 않음을 사실 그대로 아느니라.
이러한 법과 율에 있어서는 만일 스승을 믿으면 그것은 바른 것이요, 그것은 제1이다. 만일 법을 믿으면 그것은 바른 것이요, 그것은 제1이다. 만일 계덕을 구족하면 그것은 바른 것이요, 그것은 제1이다. 만일 도(道)를 같이 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공경하며 정성껏 받들어 섬기면 그것은 바른 것이요, 그것은 제1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이렇게 말하라.
'여러분, 우리에게는 이런 행(行)이 있고 이런 힘[力]이 있으며, 이런 지혜[智]가 있습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은 (여기 제1의 사문과 제2 제3 제4의 사문이 있고, 이 밖에 다시 다른 사문 범지는 없다. 이도(異道)는 모든 것이 공해서 사문 범지가 없다)고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대중들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이렇게 바로 사자후를 합니다.' "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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