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론』의 불토관 고찰
김 지 곤(동아대)
[국문초록]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성불에 있다. 그리고 그 성불은 석존의 중생교화 활동을 통해서도 알려지듯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불의 길이 결코 쉬운 것만은 아니다. 더구나 중생들은 자신의 감각에 집착하는 경향마저 있다. 결국 중생들로 하여금 성불의 길로 나아가게 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방편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방편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극락정토에의 왕생을 통한 성불의 목적을 완성하고자 한 것이 정토사상이다. 여기서 극락정토란 아미타불의 깨달음을 시공을 빌어 나타낸 것이다. 물론 그 이유는 시공 속에서 감각에 의존하며 살아가고 있는 중생들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세친도 「정토론」을 통해서 극락정토의 양상을 29종의 장엄[불국토 장엄 17종․불(佛) 장엄 8종․보살 장엄 4종]으로 나누고, 특히 불국토의 장엄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는데, 이것 역시 감각에 의존하는 중생의 입장을
고려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세친에 있어 극락정토는 보통의 종교에서 말하는 이상세계는 아니다. 즉 세친이 말하는 극락정토는 ‘진실지혜(眞實智慧)’와 ‘무상(無相)’의 세계로서, 이러한 진실지혜와 무상의 세계를 펼쳐 보인 것이 아미타불과 극락정토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17종의 불국토 장엄도 이러한 진실지혜와 무상의 세계, 곧 진리의 세계를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시공을 초월한 진리의 세계를 유상(有相)의 세계로서 나타낸 것은 모두 중생구제를 위해서이다. 다시 말해 시공 속의 중생은 기본
적으로 자신의 감각에 의존하기 때문에 일단 유상(有相)의 세계로서 그들을 유인한 다음, 최종적으로 무상(無相)의 세계, 즉 절대 진리의 세계로 나아가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세친이 말하는 17종 장엄이란 결코 특수한 사상이 아니라 대승불교 일반에서 추구하는 깨달음의 세계를 무량수경의 극락정토와 상응시켜 기술한 것으로서, 이것은 모두 중생들을 깨달음의 세계로 이끌기 위한 방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Ⅰ. 들어가는 말
불교는 석존(釋尊)의 교설을 토대로 성립한 종교이다. 그 교설이란 다름 아닌 석존 자신의 깨달음에 근거한 성불의 가르침이라는 데 크게 이견은 없다. 그리고 그 성불에의 교설은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만 한정된 것도 아니었다. 석존이 6년간의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이후 입멸할 때까지 45년간 중생교화를 위해 전력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만약 석존이 자신의 교설을 어떤 특별한 자질의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것으로 인식했다면 그와 같은 행위는 불필요한 것이다. 결국
석존의 교설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것이었고, 또한 그 목적이 성불이었다는 점에서 만인성불의 가르침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석존의 교설이 누구에게나 쉽게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흔히 석존의 교설을 말할 때 시공초월의 절대적인 진리라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만큼 시공 속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중생들에게는 이해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더구나 중생들은 자신의 감각에 집착하는 경향마저 있다. 이렇게 보면 석존의 교설은 비록 시공초월의 절대적 진리라 할지라도 중생으로 하여금 그러한 진리의 세계로 나아가게 하기 위해서는 어떤 특별한 방편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불교사적으로 볼 때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을 갖고 출범한 것이 대승불교운동이다. 대승불교란 기존의 불교가 전문적인 교학연구에 몰두하며 중생구제에 다소 소극적일 때 석존이 의도한 불교의 진정한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일종의 불교부흥운동이었다. 특히 그들은 자신만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기존의 불교를 ‘소승(小乘)’이라고 비판하고, 깨달음을 구하면서 중생을 제도[上求菩提 下化衆生]하는 자리이타적인 보살을 이상적인 모델로 내세웠는데, 이것은 불교의 궁극적 목적, 즉 석존
교설의 진정한 뜻이 모든 중생의 성불에 있다고 본 까닭이다. 그리고 필자는 이러한 대승불교의 정신에 가장 충실한 사상 가운데 하나가 정토사상이라고 보고 있다.
정토사상에 있어 핵심은 ‘아미타불’과 ‘극락정토’, 그것들의 성립근거인 ‘본원(本願)’, 그리고 그 정토에 누가 어떻게 ‘왕생’하느냐에 있다. 여기서 왕생이란 왕생자의 자력이 아니라 중생구제를 본질로 하는 아미타불의 본원력, 즉 타력에 의한 것으로서, 그 왕생자를 수용하는 극락정토 역시 중생을 구제하지 않을 수 없는 아미타불의 지혜와 자비가 그대로 표출된 것이다. 이처럼 정토사상의 본질은 가장 원만한 수행환경이 갖추어진 극락정토에 왕생하여 아미타불의 가르침을 듣고 성불하는데 있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골자로 하는 정토사상의 대표적인 경전은 『무량수경』2권(강승개 역), 『관무량수경』 1권(강량야사 역), 『아미타경』 1권(구마라집 역)의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 이다. 이들 경전은 주로 아미타불과 그의 극락정토가 있게 된 내력과 장엄상, 그 정토에 왕생하는 방법 등을 설하고 있는데, 아미타불의 본원력에 의해 극락정토에 왕생하고, 궁극에는 깨달음을 이룬다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본고에서 다루고자 하는 세친(世親, 4∼5세기경)의 「정토론(淨土論)」은 인도의 대표적인 정토계 논서(論書)로서, 이후 중국, 한국, 일본으로 전파되면서 발전하는 제반 정토사상의 기본 틀을 제공한 것이다. 특히 세친은 『무량수경』에 나타난 극락정토의 양상을 29종의 장엄[불국토 장엄 17종․불(佛) 장엄 8종․보살 장엄 4종]으로 나누고, 그 가운데서도 불국토의 장엄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이에 필자는 세친이 분류한 불국토 장엄 17종을 중심으로 각 장엄의 의미를 고찰하고,
그것에 대한 세친의 의도를 분석해보고자 한다.
(정토론의 원명(原名)은 「무량수경우바제사원생게(無量壽經優婆提舍願生偈)」로서, 세친이 『무량수경』에 주석을 붙인 논서이다. 현재 산스크리트본과 티베트역본은 산실되어 없고 보리유지(菩提流支)의 한역(529-531년)만이 남아 있다. 「무량수경론」, 「왕생론」, 「정토론」이라고도 하는데, 이하에서는 「정토론」으로 약칭한다.
Ⅱ. 극락정토의 의미
앞서 정토사상이란 최적의 수행환경을 갖춘 극락정토에의 왕생을 통해 불교의 궁극적 목적인 성불을 달성하고자 하는 가르침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왕생의 대상 및 성불의 장(場)으로서의 극락정토이다. 도대체 극락정토가 어떤 곳이기에 중생으로 하여금 왕생에의 뜻을 내게 하고, 또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일까?
일반적으로 아미타불의 본원이 성취되어 건립된 세계를 극락정토라고 부른다. 여기서 극락정토는 ‘극락’과 ‘정토’의 합성어라고 할 수 있는데, 말 그대로 ‘지극한 즐거움만이 있는 청정한 국토’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이것에 상당하는 산스크리트어는 발견되지 않는다.
먼저 ‘극락’은 산스크리트어 ‘Sukhāvatī’에 해당하는 말로서 ‘즐거움이 있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여러 산스크리트어 경전에서도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인도에서 성립한 용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중국에서 ‘안양(安養)’, ‘안락(安樂)’, ‘극락(極樂)’ 등으로 한역하였는데, 역경사 상에서 보면 극락이라는 말은 구마라집(鳩摩羅什)이 『아미타경』에서 사용한 것이 최초이며, 『관무량수경』에서도 극락이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강승개(康僧鎧) 역의 『무량수경』에는 극락이라는 말 대신에 ‘안락’과 ‘안양’이라는 역어가 사용되고 있다. 이후 시대가 흐르면서 ‘안양’이라는 말이 점점 줄어들고, ‘안락’과 ‘극락’이 비슷한 양상으로 병행되다가 현장(602-664년)의 번역 이후 ‘극락’이 대표적인 용어로 정착하게 되었다.
반면 ‘정토’란 ‘불국정토(佛國淨土)’ 또는 ‘정불국토(淨佛國土)’의 줄임 말로서, 이것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는 없고, 단지 ‘불국토(佛國土)’라는 의미의 ‘buddhakṣetra’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이 ‘buddhakṣetra’에는 ‘정(淨)’이라는 의미가 없다. 이렇게 보면 정토라는 말은 인도가 아니라 중국에서 성립된 용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정토라는 말에는 ‘국토를 청정하게 한다’는 의미와 ‘청정한 국토’라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여기서 전자는 부정한 이 세계를 청정한 국토를 만드는 불(佛)의 교화활동과 이 세계[예토]와는 다른 청정한 국토[정토]를 만들고자 하는 보살의 활동을 말하고, 후자는 보살이 발원하여 수행을 완성하고 마침내 성불하여 이루어진 청정한 세계를 말한다. 이 가운데 오늘날 보통 정토라고 하면 후자, 예컨대 보살의 성불을 통해 이루어진 불국토라는 의미에 중점을 둔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
서 보면 불국토란 제불(諸佛)이 성불 이전의 서원에 따라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건립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중생구제를 위한 서원을 세우고, 또 그것을 완성하여 불(佛)이 된 존재는 당연히 중생을 수용하기 위한 불국토를 건립할 수밖에 없다. 아미타불의 극락정토를 비롯한 약사여래(藥師如來)의 동방정유리세계(東方淨瑠璃世界), 아촉불(阿閦佛)의 동방묘희세계(東方妙喜世界) 등은 바로 이러한 이유로 건립된 것들이다. 그리고 이처럼 불(佛)에 따라 서로 다른 이름과 양상의 정토가 존재하는 것은 불(佛)마다의 서원이 다르기 때문인데, 이렇게 보면 정토도 제불(諸佛)의 수만큼, 또한 그 서원
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된다.
이상과 같이 극락정토라는 말은 비록 인도에서의 용례는 없지만,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세계, 즉 예토(穢土)의 상대적인 개념으로서 일반화되어 있다. 여기서 예토란 괴로움으로 가득 찬 세계이며, 또 그 괴로움을 참아낼 수밖에 없는 세계를 말한다. 그런데 예토가 이처럼 괴로움의 세계라고 하면 그러한 중생을 구제하고자 건립한 정토는 당연히 그 반대인 괴로움이 없는 세계, 즉 즐거움만이 있는 세계여야만 한다. 이처럼 극락정토는 일차적으로 일체의 괴로움이 없는 세계, 지극한 즐거움
만이 있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
Ⅲ. 『무량수경』에 나타난 극락정토의 양상
그러면 과연 극락정토는 어떠한 양상의 세계일까? 정토계 경전 중에서 이것에 대해 가장 상세하게 설하고 있는 것은 『무량수경』이다. 먼저 『무량수경』에는 아미타불이 건립한 극락정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법장보살은 이미 성불하여 현재 서방에 있는데, [그곳은] 여기서 10만억의 국토를 지난 곳이며, 그 불(佛)의 세계를 이름하여 안락이라고 한다.
(『大正藏』 제12권, p.270상, “法藏菩薩。今已成佛現在西方。去此十萬億刹。其佛世界 名曰安樂)
이 인용문에 의하면, 아미타불의 극락정토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로부터 서쪽으로 10만억의 불국토를 지난 곳에 위치한다. 이와같은 내용은 『아미타경』에도 그대로 기술되고 있는데, 다만 ‘법장보살’과 ‘아미타불’, ‘극락’과 ‘안락’이라는 표현만이 다를 뿐이다.
그러면 상기의 인용문처럼 극락정토는 과연 실재하는 곳일까? 주지하듯이 극락정토의 주재자인 아미타불은 그 원어 ‘Amitāyus(무량한 수명을 가진 자)’와 ‘Amitābha(무한한 광명을 가진 자)’에서 보듯이, 시공을 초월한 무량한 광명[無量光]과 수명[無量壽]을 그 덕성으로 삼는다. 그런데 집주인의 성향에 따라 그 집의 양상도 달라지듯이, 불국토 역시 그 불(佛)의 덕성을 따르는 것은 당연하다. 다시 말해 극락정토도 아미타불과 마찬가지로 무한한 시간과 공간을 그 성질로 하는, 이른바 시공을 초월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상기의 극락정토에 대한 표현도 실제 상의 위치를 나타낸 것이라기보다는 석존의 대기설법이 그러하듯이, 미혹한 중생들을 유인하기 위한 방편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것이다. 다시 말해 감각에 의존하며 살아가는 중생들에게 시공을 초월한 진리란 너무나 요원한 것이기에, 그들을 이러한 진리의 세계로 이끌기 위한 일종의 감각적인 이정표로서 이와 같이 설해졌다는것이다. 그리고 이것에 이어 극락정토의 모습을 화려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내용의 대강을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무량수경』에 의하면 극락정토의 대지는 끝없이 광활하며, 금․은․유리․산호․호박․자거․마노의 칠보(七寶)로 아름답게 빛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수미산과 철위산 같은 산이나 바다, 골짜기 등이 없다. 또한 지옥․아귀․축생 등의 고통이 없고, 춘하추동 사계절의 변화가 없어 춥지도 덥지도 않고 항상 온화하다.
또한 극락정토에는 칠보로 된 갖가지의 나무들이 즐비한데, 그 사이로 바람이 불면 미묘한 음악이 연주되며, 아미타불이 깨달음을 연 높이 4백만리, 밑동의 둘레가 50유순인 칠보의 보리수가 월광마니(月光摩尼)와 지해윤보(持海輪寶)라는 최고의 보배로 장엄되어 있다. 그리고 칠보로 장엄된 궁전과 누각이 있고, 또 이 건물의 안팎과 좌우에는 팔공덕수로 가득 찬 칠보의 연못이 있는데, 그 맛은 감로수와 같다 .(『大正藏』 제12권, pp.270상-272중.)
이상과 같이 『무량수경』은 극락정토의 모습을 온갖 미사여구를 다해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 왜 이처럼 극락정토를 화려하고, 안락하고, 깨끗한 세계로서 묘사한 것일까?
앞서 정토란 ‘청정한 국토’를 의미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이른바 국토를 청정하게 함으로써 실현되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국토를 청정하게 한다’는 것은 국토의 일체를 청정하게 하는 것, 곧 청정한 업을 닦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청정한 업의 완성자를 불(佛)이라고 할 때, 정토란 결국 불(佛)의 깨달음을 나타낸 세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량수경』의 극락정토도 『관무량수경』의 다음 문장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바로 이런 의미의 정토임은 분명하다.
“그대[위제희]는 마땅히 생각을 집중하여 청정한 업으로 이루어진 저 국토를 분명히 관찰하도록 하여라.”
(『大正藏』 제12권, p.341하, “汝當繫念諦觀彼國淨業成者”)
이것에 의하면, 극락정토란 아미타불의 전신인 법장보살의 청정한 업이 완성되어 이루어진 세계, 곧 깨달음의 세계이다. 여기서 깨달음의 세계란 이른바 시공을 초월한 절대진리의 세계를 말하는데, 또한 그 때문에 시공 속의 중생들에게는 접근하기가 쉽지 않는 세계이기도 하다. 그런데 문제는, 앞서 법장보살의 수행과 성불의 목적이 중생구제에 있었다고 하였듯이, 그 세계는 결코 중생이 접근할 수 없는 세계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극락정토의 모든 것은 중생을 위한 차원의 것이라는 말이 된다. 다시 말해 『무량수경』에 묘사된 극락정토의 화려한 장엄은 중생을 위한 방편, 즉 형상화할 수 없는 깨달음의 세계를 중생들이 접근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도 유형적으로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앞서 극락정토가 서쪽에 실재하며, 칠보로 장엄된 나무와 궁전, 팔공덕수의 연못 등이 있다고 한 것도 모두 이런 의미이다. 결국 극락이란 본래 깨달음의 즐거움을 나타낸 말이지만, 중생들로 하여금 그러한 즐거움을 동경하는 마음, 곧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을 일으키기 위해 유형적으로 나타낸 것이 극락정토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세친은 이러한 극락정토의 양상을 17종의 불국토 장엄으로 정리하고 있는데, 이제 이것을 중심으로 그 각각의 의미를 살펴보기로 한다.
Ⅳ. 『정토론』의 불토관
1. 29종 장엄의 성립근거
앞서 정토사상에 있어 핵심은 아미타불과 본원, 그리고 그 과(果)로서의 극락정토에 누가 어떻게 ‘왕생’하느냐에 있다고 하였다. 지금까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불국토의 전형을 보여주는 『무량수경』을 중심으로 고찰했는데, 여기서는 세친의 「정토론」에 나타난 29종을 중심으로 극락정토의 성립근거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앞서 『무량수경』에 있어 극락정토의 성립근거는 먼저 그 청정성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였는데, 담란의 「정토론주」에 의하면 중생구제를 위한 법장보살의 원심(願心)이 청정하기 때문에 그 결과로서의 극락정토도 청정하다고 한다.13) 세친은 이러한 청정성을 정토의 근본으로 삼고 그것을 재구성하는데, 무착(無着)의 「섭대승론」에 제시된 18원정(圓淨)14)을 확장하여 불국토 장엄 17․불(佛) 장엄 8종․보살 장엄 4종의 총 29종 장엄으로 분류한다. 그리고 세친은 다음과 같이 이들 모두가
법장보살의 원심에 의해 장엄된 것이라고 하여 이것이 『무량수경』의 본의에 따른 것임을 밝히고 있다.
(『大正藏』 제40권, p.841중, “이들 3종의 장엄성취[불국토 장엄 17종․불(佛) 장엄 8종․보살 장엄 4종]는 [법장보살] 인위(因位)의 48원 등의 청정한 원심에 의해 장엄된 것으로, [정토건립의] 인(因)이 청정하기 때문에 그 과(果)[인 정토의 장엄]도 청정한 것이다.(此三種莊嚴成就由本四十八願等淸淨願心之所莊嚴。因淨故果淨)
(이외 기원후 3-5세기 사이에 성립된 『해심밀경』의 서품에는 12종의 정토상이 기술되어 있고, 이 『해심밀경』의 12정토상을 다시 18원정으로 설한 것이 세친의 형 무착의 「섭대승론」이다. 18원정이란 ‘色相圓淨․
形貌圓淨․量圓淨․處圓淨․因圓淨․果圓淨․主圓淨․助圓淨․眷屬圓淨․持圓淨․業圓淨․利益圓淨․無怖圓淨․住處圓淨․
路圓淨․乘圓淨․門圓淨․依止圓淨’으로서, 이것을 다시 29종의 장엄으로 정리한 것이 세친의 「정토론」에 나오는 정토상이다.)
또한 앞서 불국토 공덕장엄의 성취와 불(佛) 공덕장엄의 성취, 보살 공덕[장엄]의 성취에 대해 설하였는데, 이들 3종의 성취는 [법장보살의] 원심(願心)에 의해 장엄된 것이다.
(『大正藏』 제26권, p.232중, “又向說佛國土功德莊嚴成就。佛功德莊嚴成就。菩薩功德成就。
此三種成就願心莊嚴)
단 여기서 주의할 것은, 『무량수경』은 법장보살의 중생구제를 위한 원심(願心), 즉 인(因)의 청정에 중점을 두는 반면, 세친은 극락정토라는 그 과(果)로서의 청정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할 것이다.
이상과 같이 세친에 있어 극락정토 성립의 일차적 근거는 법장보살의 청정한 원심(願心)에 있으며, 또한 그로 인해 그 과(果)로서의 극락정토도 청정한 것이다. 그런데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극락정토란 깨달음의 세계, 즉 시공을 초월한 절대 진리의 세계를 시공을 빌어 나타낸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세친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인데, 이것은 다음의 인용문을 통해서 확인된다.
이것[29종]을 줄여서 말하면 일법구(一法句)에 들어가는데, 일법구란 이른바 청정구(淸淨句)이다. 청정구란 진실지혜무위법신(眞實智慧無爲法身)을 말한다.
(『大正藏』 제26권, p.232중, “略說入一法句故。一法句者。謂淸淨句。淸淨句者。謂眞實智慧無爲法身故)
이것에 의하면 극락정토의 29종 장엄이란 아미타불의 진실지혜에 근거한 일법구(一法句), 즉 절대 진리의 세계이다. 그리고 「정토론주」에서 담란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진실지혜’란 실상(實相)의 지혜이다. 실상은 [일정한 형상이 없는] 무상(無相)이기 때문에 진실지혜는 [분별지를 초월한] 무지(無知, 무분별지)이다. 무위법신이란 법성신(法性身)이다. 법성은 적멸한 것이기 때문에 법신도 무상이다. 무상이기 때문에 [법신은] 능히 어떤 상이라도 될 수 있다. 이때문에 [여래의] 상호[32상]와 [정토의] 장엄[29종]은 곧법신이 된다. 무지이기 때문에 [그 지혜는] 능히 모르는 것이 없다. 이 때문에 [불(佛)의 지혜인] 일체종지는 곧 진실지혜이다.
(『大正藏』 제40권, p.841중, “眞實智慧者實相智慧也。實相無相故眞智無知也。無爲法身者法性身。法性寂滅故法身無相也。無相故能無不相。是故相好莊嚴卽法身也。無知故能無不知。是故一切種智卽眞實智慧也”)
담란에 의하면, 세친이 말한 ‘진실지혜’란 있는 그대로의 실상(實相)을 깨닫는 지혜이자 우리들의 분별지를 초월한 무분별지[無知]로서, 이것은 불(佛)의 지혜인 일체종지(一切種智)와 다르지 않다. 그리고 이 무분별지로서의 지혜의 덕을 갖춘 몸이 바로 아미타불과 극락정토이다. 이렇게 보면 세친이 정리한 29종의 장엄도 진실지혜의 세계, 곧 진리의 세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무위법신(無爲法身)이라는 말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담란에 의하면 무위법신이란 법성신(法性身)으로서 일정한 상(相)이 없는 무상(無相)이기 때문에 어떠한 상이라도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정해진 상이 없기 때문에 어떤 상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친이 말한 극락정토의 29종 장엄인데, 여기서 말하는 무상으로서의 상이 불국토이며, 무상의 법신이 아미타불이다. 결국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깨닫는 진실지혜, 적멸의 무위법신 그대로가 극락정토에 현현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극락정토의 29종 장엄이란 적멸무상의 법성법신을 감각적으로 표현한 것으로서, 그것이 모두 중생구제를 위한 방편적 차원임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시공 속의 중생은 일차적으로 자신의 감각에 의존하기 때문에 일단 유상(有相)으로서 그들을 유인한 다음, 최종적으로 무상의 법성법신, 즉 절대 진리의 세계로 이끌고자 한다는 것이다.
극락정토를 청정한 세계로 묘사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는데, 특히 세친은 이러한 극락정토의 청정을 기세간과 중생세간으로 나누고, 그것이 모두 일법구(一法句), 곧 진리의 속성임을 밝히고 있다.
이 청정에는 2종류가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2종류란 무엇인가? 첫째는 ‘기세간 청정’이며, 둘째는 ‘중생세간 청정’이다. ‘기세간 청정’이란 앞서 말한 17종의 불국토 공덕장엄의 성취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기세간 청정’이라고 한다. ‘중생세간 청정’이란 앞서 말한 8종의 불(佛) 공덕장엄의 성취와 4종의 보살 공덕장엄의 성취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중생세간 청정’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일법구에는 2종류의 청정이 포함되어 있으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大正藏』 제26권, p.232중-하, “此淸淨有二種應知。何等二種。一者器世間淸淨。二者衆生世間淸淨。器世間淸淨者。向說十七種佛國土功德莊嚴成就。是名器世間淸淨。衆生世間淸淨者。如向說八種佛功德莊嚴成就。四種菩薩功德莊嚴成就。是名衆生世間淸淨。如是一法句。攝二種淸淨應知”)
담란에 의하면, 세친이 이처럼 2종류의 청정으로 나눈 것은 극락정토의 일체가 청정함을 보다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이른바 저 [극락]정토는 바로 저 청정한 중생[아미타불과 보살들]을 수용하는 곳이기 때문에 이름하여 기(器)라고 한다. 마치 청정한 음식을 부정한 그릇(器)에 담으면 그릇이 부정하기 때문에 그 음식 또한 부정해지고, 부정한 음식을 청정한 그릇에 담으면 음식이 부정하기 때문에 그 그릇 또한 부정해진다. 결국 [음식과 그릇] 둘 다 깨끗할 때 곧 청정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과 같다. 이리하여 하나의 청정이라는 이름에 반드시 [중생세간청정과 기세간청정이라는] 2종류가 포함되는 것이다.
(『大正藏』 제40권, p.841하, “謂彼淨土是彼淸淨衆生之所受用故名爲器。如淨食用不淨器。以器不淨故食亦不淨。不淨食用淨器。食不淨故器亦不淨。要二俱潔乃得稱淨。是以一淸淨名必攝二種”)
이외 필자는 여기에 또한 중생의 속성을 감안한 세친의 세심한 배려도 있다고 본다. 앞서 극락정토를 건립한 법장보살의 원심이 청정한 까닭에 그 과(果)로서의 극락정토도 청정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정토사상은 이러한 극락정토의 청정성을 매개로 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그 세계에 관심을 갖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시공을 초월한 극락정토의 특성상 중생들이 그 청정성을 가늠하기란 결코 쉽지가 않다. 결국 중생구제가 그 목적인 이상, 중생들이 접근하기 쉽도록 하나하나 나누어서
설명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극락정토의 청정성을 중생구제를 위한 배려로서 이해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담란의 주석에서도 나타난다.
[아미타]불이 본래 이 장엄청정공덕을 일으킨 까닭은 삼계를 보건데, 허위의 모습, 유전하는 모습, [미혹이] 끝없는 모습이어서 마치 자벌레가 [둥근 가장자리를] 순환하는 것과 같고, 누에가 [자신의 누에고치로] 스스로를 속박하는 것과 같다. 가엽도다! 중생들은 이 삼계에 묶여 전도되고 부정하다. [법장보살은] 중생들을 허위이지 않은 곳, 유전하지 않는 곳, 끝없는 [미혹이] 없는 곳에 두어 필경 안락하고 더할 나위 없이 청정한 곳을 얻게 하려고 하였다. 이 때문에 이 청정장엄공덕을 일으킨 것이다.
(『大正藏』 제40권, p.828상, “佛本所以起此莊嚴淸淨功德者。見三界。是虛僞相。是輪轉相。是無窮相。如蚇(尺音)。蠖(屈伸蟲。一郭反)。循環。如蠶(才含反)。繭(蠶衣。公殄反)。自縛。哀哉衆生締(結不解。帝音)此三界。顚倒不淨。欲置衆生於不虛僞處。於不輪轉處。於不無窮處。得畢竟安樂大淸淨處。是故起此淸淨
莊嚴功德也”)
이것에 의하면, 중생들을 전도되고 부정한 삼계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이른바 허위이지 않고, 유전하지 않고, 미혹이 없는 안락하고 청정한 정토를 건립한 것이다. 그리고 『유마경』에 “그 마음이 청정함에 따라 곧 불국토도 청정하다.”고 하듯이, 청정한 극락정토란 왕생자로 하여금 청정한 마음을 갖게 하는데, 이렇게 보면 극락정토의 청정성은 중생으로 하여금 청정심을 갖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극락정토를 중생으로 하여금 청정심을 갖도록 하는데 있다고 하면, 그 세계는 결코 중생계와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중생들과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 목적의 달성도 그만큼 멀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량수경』에 비록 여기서 10만억 불국토를 지난 곳에 있다고 하지만, 이것은 결코 중생들이 도달할 수 없는 이상적인 세계를 나타낸 것이라기보다는 불도(佛道)에 마음을 열면 곧 도달할 수 있는 세계로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2. 불국토 장엄 17종의 분석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불교의 목적은 깨달음을 얻는데 있고, 그 깨달음의 세계란 『무량수경』에서 말하는 이른바 극락정토의 세계와 다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극락정토가 청정성을 그 본질로 한다는 점에서 깨달음의 세계란 곧 청정한 세계이며, 그곳에 태어난다는 것은 곧 청정심의 획득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깨달음을 청정심의 획득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하면 「성유식론」의 다음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지금 이 논(論)을 짓는 것은 2공(空)에 대해 미혹한 자에게 바른 이해를 갖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바른 이해를 갖도록 하는 것은 2가지의 무거운 장애[번뇌장 소지장]를 끊게 하기 위해서이다. 아(我)와 법(法)에 집착함으로 말미암아 2가지 장애가 함께 일어난다. 2공(空)을 증득하면 그 장애
도 따라 끊어진다. 장애를 끊는 것은 2가지 뛰어난 증과[보리 열반]를 얻기 위해서이다. [윤회의] 생을 계속하게 하는 번뇌장을 끊음으로 말미암아 진실한 해탈[眞解脫]을 증득한다. 지혜[解]를 장애하는 소지장을 끊음으로 말미암아 대보리를 얻는다.
(『大正藏』 제31권, p.1상, “今造此論爲於二空有迷謬者生正解故。生解爲斷二重障故。由我法執二障具生。若證二空彼障隨斷。斷障爲得二勝果故。由斷續生煩惱障故證眞解脫。由斷礙解所知障故得大菩提”)
이것에 의하면, 아법이공(我法二空)을 바르게 이해하고 번뇌장과 소지장을 끊으면 대보리를 얻어 해탈할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 번뇌장과 소지장을 끊는다는 것은 곧 모든 오염으로부터 벗어나 몸도 마음도, 또한 자신의 주변 환경까지도 완전히 청정해지는 이른바 청정성의 획득을 의미한다.
그리고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극락정토가 이러한 청정성을 그 본질을 삼는다는 점에서 극락정토란 곧 깨달음의 세계이며, 그 세계에 태어난다는 것은 성불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세친은 이러한 깨달음의 세계를 29종의 장엄으로서 이해하는데, 특히 다음과 같이 번뇌장과 소지장이 단절되어 나타난 세계를 17종의 불국토 장엄이라고 한다.
저 무량수불의 국토장엄은 제일의제(第一義諦)의 묘한 경계이다. [이것을] 16구(句)와 1구(句)의 차례로 설한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大正藏』 제26권, p.232상, “彼無量壽佛土莊嚴。第一義諦妙境界。十六句及一句次第說。應知”)
이 인용문에 의하면, 제일의제((第一義諦) 곧 절대적 진리의 묘한 세계상이 곧 17종의 불국토 장엄으로서, 이것은 상기의 번뇌장과 소지장이 단절된 깨달음의 세계와 결코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러면 이제 세친이 불국토 장엄으로 분류한 17종25)을 중심으로 그 각각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앞서 말했듯이, 세친은 『무량수경』에 나타난 극락정토의 양상을 29종의 장엄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그 구성상 17종 장엄이 먼저 나오고, 또 그것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친이 그만큼 17종 장엄을 중시하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 특히 담란은 17종의 제1인 “저 [안락]세계의 모습을 관하건대 이미 삼계의 도를 저 멀리 벗어났다(觀彼世界相 勝過三界道).”라는 ‘청정(淸淨)공덕의 성취’에 대해 29종 장엄에 공통된 ‘총상’26)으로서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청정을 미혹한 삼계를 벗어난 것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극락정토란 이른바 삼계의 오염을 벗어난 청정한 세계이자 깨달음의 세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大正藏』 제40권, pp.827하-828상, “저 세계의 모습을 관찰하건데, 삼계의 도를 이미 벗어났다. … 이 2구는 곧 [불국토 장엄의] 첫 번째로서 이름하여 ‘관찰장엄청정공덕성취’라고 한다. 이 청정은 [29종 장엄의] 총상이다(觀彼世界相 勝過三界道 ... 此二句卽是第一事。名爲觀察莊嚴淸淨功德成就。此淸淨是總相")
이렇게 보면 세친이 말하는 29종 장엄의 극락정토란 결코 특수한 사상이 아니라 대승불교 일반에서 추구하는 깨달음의 세계를 나타낸 것이라고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정토론」의 29종 장엄이란 대승경전에서 설하는 깨달음의 세계를 『무량수경』의 극락정토와 상응시켜 기술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원생게의 다음 문장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나는 수다라의 진실한 공덕의 모습에 의지하여 원[생]게를 설하고 총지해서 불(佛)의 가르침에 상응코자 한다.
(『大正藏』 제26권, pp.230하, “我依修多羅 眞實功德相 說願偈總持 與佛敎相應”)
이처럼 29종 장엄은 앞서 말한 섭대승론의 18원정을 『무량수경』과 상응시켜 전개한 것으로서, 17종의 장엄 역시 깨달음의 세계를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이런 의미에서 17종의 장엄을 분석하면 모두 중생을 깨달음의 세계로 이끌기 위한 방편임은 분명해진다.
먼저 원생게의 “그 끝은 허공과 같이 광대하고 경계가 없다(究竟如虛空 廣大無邊際).”에 해당하는 제2 ‘양(量)공덕의 성취’는 극락정토의 공간적인 무한성을 나타낸 것이다. 앞서 극락정토는 삼계(三界)를 벗어났다고 하였는데, 삼계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중생들을 모두 수용할 수도 또 그들의 바람을 성취할 수도 없다. 결국 여기서 말하는 양(量)공덕이란 다음과 같은 담란의 말처럼, 극락정토가 중생들의 모든 심행(心行)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으로서 중생들의 바람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 가능한 것임을 나타낸 것이라고 할 것이다.
저 세계는 항상 허공과 같이 비좁아 답답한 모습이 없다. 그 속의 중생도 이와 같은 양[무량] 속에 머물며, 그 지원(志願)의 광대함 또한 허공과 같이 한량이 없다. 저 국토의 양[무량]은 능히 중생들의 무량한 심행(心行)을 성취하는 것이다.
(『大正藏』 제40권, pp.836-837상, “而彼世界常若虛空無迫迮相。彼中衆生住如此量中。志願廣大亦如虛空無有限量。彼國土量能成衆生心行量”)
이처럼 극락정토가 모든 중생의 바람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임은 “중생들이 바라고 좋아하는 바 일체를 능히 만족시킨다(衆生所願樂 一切能滿足).”라는 제17 ‘일체소구만족(一切所求滿足)공덕의 성취’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이런 차원에서 보면 “[정토는] 온갖 진귀한 보배의 성을 갖추고 미묘한 장엄을 구족하였다(備諸珍寶性 具足妙莊嚴).”라는 제5 ‘종종사(種種事)공덕의 성취’와 “꽃 같은 옷을 비처럼 내려 장엄한다(雨華衣莊嚴).”라는 제9 ‘우(雨)공덕의 성취’도 중생들의 바람을
모두 만족시키는 극락정토의 양상을 나타낸 것이라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종종사공덕의 성취에서 ‘사(事)’라든가 우공덕의 성취에서 옷[衣]은 표면상으로 보면 객체적인 사물을 의미하지만, 아래와 같이 ‘마음대로 생각대로 구족한다’라든가 ‘마음은 자유자재를 얻는다’는 담란의 해석에 따르면 그것들은 또한 중생의 바람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저곳[정토]의 온갖 사물들 혹은 한 가지의 보배, 열 가지의 보배, 백 천가지의 보배는 마음대로 생각대로 구족되지 않음이 없다. 만약 [그것들을] 없애고자 하면 홀연 사라진다. 마음은 신통을 넘어선 자재를 얻는다.
(『大正藏』 제40권, p.837상, “彼種種事或一寶十寶百千種寶隨心稱意無不具足。若欲令無儵焉化沒。心得自在有踰神通”)
다음으로 원생게의 “한 점 더러움 없는 광염이 타올라 밝고 맑게 세간을 비춘다(無垢光焰熾 明淨曜世間).”라는 제6 ‘묘색(妙色)공덕의 성취’에서 ‘무구(無垢)’은 극락정토에 일체의 오염이 없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러한 오염이 욕망으로부터 유래한다는 점에서 보면 결국 극락정토에는 일체의 욕망이 없다는 말로서, 이것은 “청정한 광명이 두루 충만하매 마치 거울과 해, 달과 같다(淨光明滿足 如鏡日月輪).”라는 제4 ‘형상(形相)공덕의 성취’에서 말하는 ‘청정[淨]’과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여기서
광명은 깨달음의 지혜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그 다음의 ‘마치 거울과 해, 달과 같다(如鏡日月輪).’라는 게송은 이러한 깨달음의 경지를 나타낸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한편 세친은 원생게의 “보배의 성을 갖춘 공덕의 풀이 유연하게 좌우를 두르고 …(寶性功德草 柔軟左右旋 …)”를 제7 ‘촉(觸)공덕의 성취’라고 한다. 주지하듯이 욕망은 집착을 그 본성으로 하는 까닭에 흔들리지 않는 견고함이 있다. 상기의 유연이란 바로 이와 정반대인 상태로서, 극락정토에는 그러한 집착심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점은 제8 ‘삼종(三種)공덕의 성취’ 가운데 “궁전의 모든 누각은 시방을 관하는데 아무런 걸림이 없다(宮殿諸樓閣 觀十方無礙).”라는 ‘지(地)공덕의 성취’에
도 그대로 드러난다. 이것에 대한 담란의 주석에 따르면, 극락정토는 시공을 초월한 세계인 동시에 일체의 번뇌장과 소지장이 단절된 깨달음의 세계이다.
저 [궁전 등의] 온갖 사물들은 혹은 하나의 보배, 열의 보배, 백의 보배, 무량한 보배로서 마음대로 생각대로 장엄을 구족하고 있다. 이렇게 장엄된 사물들은 청정한 명경(明鏡)과 같이 시방국토의 온갖 깨끗하고 더러운 모습과 선업ㆍ악업의 인연 등 모든 것을 다 보여준다. … 이(궁전 등의 장엄에 의해 비춰지는) 영상은 [중생을 구제하는] 불사(佛事)를 행한다.
(『大正藏』 제40권, p.837하, “彼種種事或一寶十寶百寶無量寶隨心稱意莊嚴具足此莊嚴事。如淨明鏡十方國土淨穢諸相善惡業緣一切悉現。… 此影爲佛事”)
이렇게 보면 “[안락정토라는] 청정한 이름이 심원하고도 미묘하게 시방[세계]에 들린다(梵聲語深遠 微妙聞十方).”라는 제11 ‘묘성(妙聲)공덕의 성취’도 시공을 초월한 극락정토를 의미하며, 또 극락정토가 무분별지를 그 본질로 한다는 점에서 “부처님의 지혜는 밝고 맑은 해와 같이 이 세상의 어리석은 어둠을 다 없앤다(佛慧明淨日 除世癡闇冥).”라는 제10 ‘광명(光明)공덕의 성취’와 “영원히 심신의 고뇌를 여읜다(永離身心惱).”라는 제15 ‘무제난(無諸難)공덕의 성취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극락정토가 깨달음의 세계라는 것은 “[안락정토는] 정도(正道)의 대자비인 출세간의 선근에서 생겨났다(正道大慈悲 出世善根生).”라는 제3 ‘성(性)공덕의 성취’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성(性)’이란 담란에 의하면 ‘성종성(聖種性)’31)으로서,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
(성종성이란 본래 이것은 십지(十地)의 깨달음을 열 소질이 있는 종자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법장보살의 지위에 적용시키고 있다. 『보살영락본업경(菩薩瓔珞本業經)』 (『大正藏』 24권, p.1012중)에는 “性者。所謂習種性性種性道種性聖種性等覺性妙覺性”이라고 있다.)
‘성(性)’이란 ‘성종성(聖種性)’이다. 처음 법장보살이 세자재왕불에게서 무생법인(無生法忍)을 깨닫게 되었는데, 이때의 지위를 이름하여 성종성이라고 한다. 이 성(性) 속에서 [법장보살은] 48대원을 일으켜 수행하여 이국토를 세웠다. [이것을] 곧 안락정토라고 한다.
(『大正藏』 제40권, p.828하, “性者是聖種性。序法藏菩薩於世自在王佛所悟無生法忍。爾時位名聖種性。於是性中發四十八大願修起此土。卽曰安樂淨土”)
이것에 의하면, ‘무생법인→본원→정토건립’이라는 등식이 성립하게 되는데, 상기의 ‘출세간의 선근’이란 바로 ‘무생법인의 깨달음에 의한 본원’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극락정토는 제12 ‘주(主)공덕의 성취’에서 “[안락정토는] 정각의 아미타법왕이 잘 주지하고 계신다(正覺阿彌陀 法王善住持).”라고 하듯이, 그 본원을 완성하여 성불한 아미타불이 주재하는 깨달음의 세계인 것이다. 또 그런 까닭에 “[아미타]여래를 둘러싼 청정한 꽃 같은 대중은 [여래의] 정각의 꽃에서 화생한다(如來淨華衆 正覺華化生).”라는 제13 ‘권속(眷屬)공덕의 성취’와 “[모두] 불법의 맛을 좋아하고 즐기며 선정삼매를 밥으로 삼는다(愛樂佛法味 禪三昧爲食).”라는 제14 ‘수용(受用)공덕의 성취’에서 보듯이, 그곳에 태어난 중생들도 모두 청정한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극락정토의 17종 장엄은 깨달음의 세계를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다음의 인용문은 이것을 보다 분명하게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지금까지] 간략하게 저 아미타불의 국토장엄 17종 공덕에 대해서 말하였다. [그 장엄은] 여래 자신을 이롭게 하는 대공덕력[자리]의 성취와 남을 이롭게 하는 공덕[이타]의 성취를 나타낸 것이다.
(『大正藏』 제26권, p.232상, “略說彼阿彌陀佛國土莊嚴十七種功德。示現如來自身利益大功德力成就利益他功德成就故”)
이것에 의하면, 극락정토의 17종 장엄은 아미타불의 자리이타 공덕이 성취되어 나타난 것이다. 앞서 17종 장엄의 제1 ‘청정(淸淨)공덕의 성취’에서 ‘청정’이란 29종 장엄에 공통된 총상으로서의 깨달음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라고 하였는데, 위의 인용문에서 극락정토가 아미타불의 자리이타의 공덕을 성취했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 청정의 기본적인 존재방식을 나타낸 말이다. 이렇게 보면 17종의 장엄은 단지 객체적인 대상세계로서의 극락정토의 양상이 아니라 청정의 기본적인 존재방식을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는 17종의 불국토 장엄을 “제일의제(第一義諦) 곧 절대적 진실의 묘한 경계이다.”이라고 말한 부분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제일의제’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대승불교의 기본적인 이해는 「중론」에서 말하는 ‘희론적멸(戱論寂滅)하고 불생(不生)인 공성진여(空性眞如)’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이것은 원생게의 제2 게송 “진실한 공덕의 모습(眞實功德相)”과 같은 의미로서, 공성진여인 제일의제가 세간적으로 나타난 상태가 바로 극락정토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원생게의 “대승 선근의 세계는 평등하여 비난받거나 싫어하는 이름이 없다. [안락정토에는] 여인 및 신체장애자, 이승[성문․연각]의 종자가 태어나지 않는다(大乘善根界 等無譏嫌名 女人及根缺 二乘種不生).”라는 제16 ‘대의문(大義門)공덕’에서 세친은 다른 16종과 달리 약간의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먼저 ‘대승의 선근’이란 앞서 말한 ‘출세의 선근’과 같은 의미로서, 이른바 극락정토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 대승선근의 세계인 극락정토가 평등하여 현실상에서 비난당하는 여인이나 신체
장애자, 대승에서 소승이라고 폄하하는 성문․연각의 이승(二乘)은 물론 그 이름조차 없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법장보살의 48원 가운데 제35 여인성불의 원과 제4 무유호추(無有好醜)의 원에 따른 것으로서, 『무량수경』에서 정토의 성중(聖衆)들을 설명하면서 “모두 다 같은 무리로서 형상의 다름이 없다.”고 한 것에 상응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극락정토는 청정을 본성으로 하는 깨달음의 세계이자 평등한 세계로서 누구라도 거기에 태어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세계이다. 그리고 세친이 말하는 17종의 불국토 장엄이란 바로 그러한 깨달음의 세계를 유형적으로 펼쳐놓은 것으로서, 그것은 모두 시공 속에서 감각에 의존하며 살아가고 있는 중생들을 위해서이다. 또한 그런 까닭에 세친은 17종의 장엄을 열거한 다음 그 결말로서 “이 때문에 나는 아미타불의 국토에 왕생하려고 한다(故我願往生 阿彌陀佛國).”고 하고, 원생게의 마지막에 “널리 모든 중생들과 함께 안락국에 왕생코자 한다(普共諸衆生 往生安樂國).”고 한 것이다.
Ⅴ. 나가는 말
정토와 관련하여 용수의 「십주비바사론」에는 “이 청정한 국토는 마땅히 제보살 본원의 인연에 따른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 하며, 그 정토의 모습을 10종의 구족(具足)으로서 정리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무량수경』의 극락정토도 법장보살의 본원이 성취되어 장엄된 세계로서, 법장보살이 본원을 세우고 영겁의 수행을 통해 모든 공덕을 성취하여 구족한 모습을 장엄이라고 한다. 이것을 「정토론」에서는 ‘장엄공덕의 성취’ 또는 ‘원심장엄’이라는 말로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앞서 말했듯이, 이러한 본원 내지 장엄공덕의 성취는 모두 중생구제를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해 정토란 보살이 자리이타의 실천을 위해서 본원을 세우고, 수행을 통하여 쌓은 공덕의 장(場)으로서, 그러한 공덕의 작용을 중생구제를 위해 공간적, 시간적인 형태로 표현한 것이 장엄인 것이다. 그리고 세친이 불국토의 장엄을 17종으로 나눈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는데, 모든 중생을 섭취하여 깨달음의 세계로 이끌기 위해서는 그들의 다양한 바람을 수용할 수 있는 세계를 보여줄 필요
가 있다는 인식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세친에 있어 극락정토는 보통의 종교에서 말하는 이상세계는 아니다. 즉 세친이 말하는 극락정토는 ‘진실지혜(眞實智慧)’와 ‘무상(無相)’의 세계로서, 이러한 진실지혜와 무상의 세계를 펼쳐 보인 것이 아미타불과 극락정토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17종의 불국토 장엄도 이러한 진실지혜와 무상의 세계, 곧 진리의 세계를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시공을 초월한 진리의 세계를 유상(有相)의 세계로서 나타낸 것은 모두 중생구제를 위해서이다. 다시 말해 시공 속의 중생
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감각에 의존하기 때문에 일단 유상(有相)의 세계로서 그들을 유인한 다음, 최종적으로 무상(無相)의 세계, 즉 절대 진리의 세계로 나아가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세친이 말하는 17종 장엄이란 결코 특수한 사상이 아니라 대승불교 일반에서 추구하는 깨달음의 세계를 무량수경의 극락정토와 상응시켜 기술한 것으로서, 이것은 모두 중생들을 깨달음의 세계로 이끌기 위한 방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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