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알리 경전의 자료

스리랑카 빨리.불교학

실론섬 2016. 1. 21. 22:03

스리랑카 빨리⋅불교학

‒ 역사적 고찰과 분석 ‒

김한상/스리랑카 켈라니아대학 박사

* 본 논문은 2015년 9월 12일 동국대학교 다향관 세미나실에서 열린 세계불교학연구소 개소기념

제1차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논문을 수정⋅보완한 것이다. 콜롬보 대학(University of Colombo)

의 아상가 틸라카라트네(Asanga Tilakaratne) 교수는 필자에게 스리랑카의 빨리⋅불교학에

대한 최신 정보를 제공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본 논문의 완성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필자를 격려해

주었다.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의 김서리 선생은 학술대회에서 논평자의 자격으로 필자의 졸고

에 훌륭한 논평을 해주었다. 이분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본 논문은 제대로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에 지면을 빌어 이분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Ⅰ. 들어가는 말

Ⅱ. 고대⋅중세의 빨리⋅불교학

Ⅲ. 근대(붓다 자얀띠 이전)의 빨리⋅불교학

Ⅳ. 현대(붓다 자얀띠 이후)의 빨리⋅불교학

Ⅴ. 나가는 말: 과제와 전망


[ 요 약 문 ]

본 논문의 목적은 고대와 중세에서 오늘날까지의 스리랑카 빨리⋅불교학을 고찰하고 분석하는 것이다. 빨리⋅불교학을 빨리어와 빨리 문헌들에 대한 학문적 연구라고 정의한다면, 그것은 테라와다의 전통에서 빠리얏띠(pariyatti)에 해당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빨리⋅불교학은 테라와다 불교가 마힌다 테라(Mahinda Thera)에 의해 인도에서 스리랑카로 전래되었을 때부터 사실상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빰수꿀리까(paṃsukūlika)와 담마까티까(dhammakathika) 사이의 논쟁과 빨리 성전(Pāli

tipiṭaka)의 문자화와 같은 역사적 사건들은 근현대 빨리⋅불교학의 초석이 되었다. 그러나 고대와 중세의 빨리⋅불교학은 바나까(bhāṇaka) 시스템을 통해서 승려들에 의해 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일반

인들이 접근하거나 참여하기 매우 어려웠다. 현대의 빨리⋅불교학은 스리랑카 승려들로부터 빨리어를 배운 초기 유럽 학자들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이는 빨리⋅불교학의 세계화와 대중화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동시에 19세기 말엽 스리랑카에서는 영국의 식민지주의와 기독교 선교에 대한 반발로 프로테스탄트 불교(Protestant Buddhism) 즉 불교부흥(Buddhist revival)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는 싱할라 불교도들 사이에 정체성과 자긍심을 고취하였을 뿐만 아니라 스리랑카의 빨리⋅불교학을 진흥시키고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빨리⋅불교학의 현대적 부흥의 이정표는 위드요다야 삐리웨나(Vidyodaya Pirivena)와 위드야랑까라 삐리웨나(Vidyālaṅkāra Pirivena)라는 양대 삐리웨나의 탄생이었다. 1948년 스리랑카의 독립과 1956년 붓다 자얀띠 (Buddha Jayanti) 기간 동안의 종교⋅문화적 르네상스로 빨리⋅불교학은 새롭게 도약한다. 빨리 성전과 그 주석서들의 편집과 번역은 이 시기의 주요 특징들 가운데 하나였다. 오늘날 스리랑카의 빨리⋅불교학은 대학, 연구소, 학회에 포진한 출가⋅재가 학자들에 의해 주로 행해지고 있다. 대학들의 설립, 영어와 같은 외국어의 습득, 외국 유학 등으로 스리랑카의 빨리⋅불교학은 전통적인 학문적 방법론과 서양의 학문적 방법론이 절묘하게 결합되어 질적으로 새로운 단계에 들어서게 되었다. 비록 오늘날 문헌학적 연구(philological studies)가 스리랑카 학자들에게 여전히 인기가 있고 빨리⋅불교학에서 중요한 분야로 남아있긴 하지만, 철학적 연구(philosophical studies)가 높은 수준에 도달하였다. 거시적인 안목으로 볼 때, 스리랑카 빨리⋅불교학의 전망은 어둡지 않은 것 같다. 그 이유는 스리랑카 정부 및 헌신적인 재가 신자들이 빨리⋅불교학에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으며, 수행과 교학을 추구하기 위해 스리랑카를 찾아오는 외국인들로 인해서 빨리⋅불교학은 새로운 활력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Ⅰ. 들어가는 말


기원전 2세기에 인도 아쇼까 왕(King Aśoka, 재위: 기원전 268~232 경)이 파견한 마힌다 테라(

Mahinda Thera)와 그 일행에 의해 스리랑카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로 지금까지 스리랑카는 그 법맥(monastic linage)을 면면이 이어 온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테라와다 불교국가이다. 뿐만 아니라 스리랑카는 기원전 1세기 바나까(bhāṇaka)라는 구전 전통(oral tradition)1)으로 전해오던 빨리 성전(Pāli tipiṭaka)2)이 처음으로 문자로 기록되고, 서기 5세기에 붓다고사(Buddhaghosa)가 인도에서 건너와 테라와다의 교학 체계를 집대성하고 성문화한 나라이다. 따라서 스리랑카는 테라와다 불교가 탄생한 산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정비되고 성문화된 테라와다 불교를 다시 미얀마와 태국에 전해준 나라라는 점에서 스리랑카는 모든 테라와다 불교국가들의 맏형이자 장손과도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1) 이에 대해서는 K.R. Norman(1997), pp.41~57 참조.

2) 테라와다의 전통에서 성전(聖典) 즉 캐논(canon)은 기본적으로 숫따 삐따까(Sutta-piṭaka),

나야 삐따까(Vinaya-piṭaka), 아비담마 삐따까(Abhidhamma-piṭaka)의 삼장(三藏, ti-piṭaka)을

뜻한다. 이에 대해서는 K.R. Norman(1997), pp.131~148과 김한상(2015) 참조


오늘날 스리랑카3)에서는 불교학(Buddhist Studies)이 그냥 불교학이 아니라 ‘빨리⋅불교학(Pāli and Buddhist Studies)’이나 ‘불교⋅빨리학(Buddhist and Pāli Studies)’이란 명칭들로 보편화되어 있다.(앞으로는 논술의 편의를 위해서 ‘빨리⋅불교학’이라고 통일하여 기술한다.) 빨리⋅불교학(Pāli and 

Buddhist Studies)은 빨리어(Pāli)와 불교학(Buddhist Studies)의 복합어이다. 빨리어(pāli-bhāsā)는

오늘날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등지에서 폭넓게 신봉되고 있는 테라와다 불교의 성전어(聖典語, tanti-bhāsā)이다. 붓다고사는 『위방가(Vibhaṅga)』에 대한 주석서인 「삼모하위노다니(Sammohavinodanī)」에서 붓다가 사용하는 유일한 언어라는 점을 들어 빨리어에 절대적 권위와 가치를 부여하고 있을 정도로4) 테라와다의 전통에서 빨리어의 권위는 가히 절대적이다.

3) 종전까지 사용되던 실론(Ceylon)이라는 국가 이름은 1972년에 공식적으로 ‘영광스러운 랑까’라는 뜻의 산스끄리뜨어 슈리 랑까(śrī-laṇkā)에서 유래한 스리랑카(Sri Lanka)라는 명칭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본 논문에서도 실론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고유명사를 제외하고는 스리랑카라는 국가 이름을 사용하기로 한다.

4) Vibh-a, p.388, “Tattha sesā Oṭṭa-Kirāta-Andhaka-Yonaka-Damiḷabhāsā-dikā aṭṭhārasa bhāsā parivattanti, 

ayam ev’ekā yathā-bhucca-brahmavohāra-ariyavohārasankhātā Māgadhabhāsā na parivattāti. 

Sammāsambuddho pi tepiṭakaṃ buddhavacanaṃ taniṃ āropento māgadhabhāsāya eva āropesi. Kasmā? 

Evaṃ hi atthaṃ āharituṃ sukhaṃ hoti.”


한편 불교학(Buddhist Studies)은 글자 그대로 불교에 대한 학문적 연구를 말한다. 문헌학적 엄밀성(philological rigidity)과 역사주의(historicism)5)를 특징으로 하는 근대적 개념의 불교학은 사실상 서구에서 동양학(oriental studies)의 일환으로서 시작되었지만, 테라와다의 전통에 불교학에 해당되는 개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바로 빠리얏띠(pariyatti)이다. 빠리얏띠란 붓다의 가르침이 기록된 빨리 성전을 공부하는 교학을 말하며, 그것은 빠띠빳띠(paṭipatti)와 함께 유기적으로 협력하여 궁극적으로 빠띠웨다(paṭivedha)를 지향한다. 요컨대 빨리⋅불교학은 빨리어와 빨리 문헌들6)에 대한 학문적 연구를 가리키는 용어이며, 이는 실질적으로 테라와다 불교의 교학 즉 빠리얏띠

(pariyatti)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7)

5) 역사주의(historicism)는 모든 사실과 현상은 역사적 생성 과정 속에서 파악해야 하며 그 가치와 진리도 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드러난다고 보는 학문적 입장을 말한다. 
6) 본 논문에서 가리키는 빨리 문헌(Pāli literature)은 빨리 삼장(Pāli tipiṭaka)과 그에 대한 주석서(aṭṭhakathā), 복주석서(ṭīkā), 빨리어 문법서, 그리고 디빠왐사(Dīpavaṃsa)마하왐사(Mahāvaṃsa)와 같은 고대 연대기(vaṃsa)들을 모두 포함한다. 만약 그것이 빨리 삼장(pāli ti-piṭaka)만을 가리키는 경우에는 빨리 문헌이라 하지 않고 빨리 성전이라 부르 기로 한다. 
7) 사실 스리랑카에서 불교학이 빨리어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산스끄리뜨어 학부, 싱할라어 학부, 역사학부, 고고학부, 언어 학부에서도 불교학의 다양한 분야들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포진해 있다. 오늘날 산스끄리뜨어는 스리랑카의 주요 대학들에서 교습되고 있으나 독립된 학부(department)로는 오직 켈라니야 대학
(University of Kelaniya)과 자프나 대학(University of Jaffna)에만 개설되어 있다. 그러나 본 논문의 목적은 스리랑카의 빨리⋅불교 학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산스끄리뜨학(Sanskrit studies), 역사학, 고고학으로서의 불교 학은 다루지 않는다.


사실상 오늘날 스리랑카의 빨리⋅불교학 동향을 논하기 위해서는 그 과거의 역사와 미래의 전망을 따로 떼어놓고서는 고찰할 수 없다. 왜냐하면 스리랑카의 빨리⋅불교학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단절되지 않고 면면히 이어져 온 살아있는 전통(living tradition)이며, 앞으로도 현재를 발판으로 발전될 것이기 때문이다. 편의상 본 논문은 빨리⋅불교학의 시기를 크게 고대⋅중세와 근현대로 나누고 후자는 다시 1956년 붓다 자얀띠(Buddha Jayanti)를 기점으로 근대와 현대로 나누어서 논의를 전개해나가기로 한다.


Ⅱ. 고대⋅중세의 빨리⋅불교학


1. 빨리⋅불교학의 시작

스리랑카의 빨리⋅불교학은 기원전 3세기 아쇼까 왕(King Aśoka)의 아들 마힌다 테라에 의해서 테라와다 불교가 스리랑카에 전래된 뒤부터 사실상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마힌다 테라가 스리랑카에 테라와다 불교를 전한 뒤에 일차적으로 몰두한 작업도 빨리어로 된 주석서들을 싱할라어로 번역한 일이었다. 『시할라앗타까타(Sīhalāṭṭhakathā)』로 알려진 이러한 싱할라어 주석서들은

바나까(bhāṇaka)8)라는 구전 전통을 통해서 후세로 전해졌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빨리⋅불교학의 높은 수준을 짐작하게 해준다. 당시의 王都 아누라다푸라(Anurādhapura)에 위치한 마하위하라

(Mahāvihāra)는 스리랑카에 테라와다 불교가 전래된 이래로 명실상부한 빨리⋅불교학의 센터이자 산실이었다. 마하위하라뿐만 아니라, 아바야기리(Abhayagiri)와 제따와나(Jetavana)도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빨리⋅불교학을 연구했던 스리랑카의 또 다른 빨리⋅불교학의 센터이자 산실이었다. 기원전 1세기 빨리 성전이 문자로 기록될때까지 빨리⋅불교학은 주로 바나까라는 구전 전통을 통해서 빨리 성전을 암송하는데 치중되었다. 그러나 빨리 성전이 문자로 기록되었다고 해서 빨리⋅불교학에서 바나까 시스템의 역할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빨리 성전의 문자화는 바나까들로 하여금 단순 암기라는 시간 소모적인 작업(time-consuming task)에서 벗어나 빨리 성전의 특정한 장르를 전문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분업의 길을 열어주었다.9)

8) 바나까(bhāṇaka) 체계에 대해서는 E.W. Adikaram(1994), pp.24~32와 Mahinda Deegalle(2006) 참조. 

9) Nance Richard F., Speaking for Buddhas: Scriptural Commentary in Indian Buddhism(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2), p.47.


2. 빰수꿀리까와 담마깟띠까 사이의 논쟁

바나까 시스템이라는 구전 전통에 의존하던 빨리⋅불교학은 기원전 1세기에 발생한 기근과 전쟁 등의 정치⋅경제적 상황으로 중대한 변화를 맞게된다. 먼저 스리랑카 남부의 로하나(Rohaṇa)에서 

띳사(Tissa)라는 바라문이 스리랑카 중부에서 재위에 오른 왓따가마니 아바야 왕(King Vaṭṭagāmani

Abhaya, 재위: B.C. 43~29년)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남인도에서 타밀족

(Tamil)들이 침략하여 왓따가마니 아바야 왕을 쫓아내고 아누라다푸라를 차지하였다. 이와 동시에 스리랑카의 역사에서 ‘브라흐마나 띳사 기근(Brāhmaṇa-Tissa famine)’ 즉 ‘바미니띠야사야

(Bāmiṇiṭiyāsāya)’라고 불리는 무시무시한 기근이 발생하였다. 이 고난의 시기에 수많은 승려들이

숲에서 배고픔으로 죽어 갔고, 왕국의 중심 역할을 했던 마하위하라(Mahāvihāra)와 마하뚜빠

(Mahā Thūpa)는 정글에 파묻혔다.10) 이러한 상황에서 700명의 비구들은 살아남기 위해 남인도로 피난을 떠났고, 60명의 비구들은 빨리 성전을 지키기 위해 섬에 남았다. 12년 뒤인 기원전 35년에 남인도로 피난했던 비구들이 스리랑카로 되돌아왔다. 그들은 자신들이 기억하고 있던 빨리 성전과 스리랑카에 남아 있었던 비구들의 것을 대조해보니 다행스럽게도 양자는 완전히 일치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때 이후 승려들 사이에 교법의 근본(sāsanassa mūlaṃ)이 교학(pariyatti)인지 아니면 실천(paṭipatti)인지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11) 빰수꿀리까(paṃsukūlika)12)들은 실천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했고, 담마깟띠까(dhammakathika)들은 교학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결국 논쟁은 교학이 교법의 근본이라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바로 이 논쟁이 스리랑카 불교에서 실천보다 교학에 더 비중을 두게 했던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가 되었으며, 이후 빨리⋅불교학의 중요성을 공식적으로 인가했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10) 마하왐사(Mahāvaṃsa)는 브라흐마나띳사 기근(Brāhmaṇa-Tissa famine)에 대해서 언급 하고 있지 않지만 붓다고사(Buddhaghosa)의 주석서들은 자주 암시하고 있다. 예를 들면, AN.I, p.92; III, pp.343~345; SN.II, p.111; Vbh-a. pp.445~451. 11) Mp.I, p.52, “pariyatti nu kho sāsanassa mūlaṃ udahu paṭipattī'ti.”

11) Mp.I, p.52, “pariyatti nu kho sāsanassa mūlaṃ udahu paṭipattī'ti.” 

12) 빰수꿀리까(paṃsukūlika)는 분소의(糞掃衣, paṃsukūla)를 입고 두따(頭陀, dhuta)를 실천 하는 수행자를 말한다. 하지만 이 용어는 넓은 의미로 사용되어 위나야(vinaya)를 지키는 수행자를 가리킨다. 


3. 빨리 성전의 문자화

이와 같이 스리랑카 교단은 처음부터 교학(pariyatti)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했기 때문에 기원전 1세기 스리랑카의 왓따가마니 아바야 왕(King Vattagāmanī Abhaya, 재위: 기원전 29~17)의 시대에 

아로까 위하라(Āloka-vihāra)13)에서 처음으로 빨리 성전이 문자로 기록된다. 그것은 노만(K.R. 

Norman)도 지적했듯이, 브라흐마나띳사 기근, 남인도로부터 타밀의 끊임없는 침략, 신흥 아바야기리(Abhayagiri)의 성장이 마하위하라에게 주는 위협과 같은 여러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14) 스리랑카의 아디카람(E.W. Adikaram, 1905~1985)이 말한대로, 이 사건은 비단 테라와다 불교의 미래뿐만 아니라 빨리⋅불교학의 미래까지도 결정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15) 왜냐하면 유럽에서 요하네스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 1398~1468)의 금속활자 인쇄술이 지식의 확산에 기여했듯이, 빨리 성전의 문자화는 빨리⋅불교학이 모든 사중(四衆, cattāro purisā)에게 그 문호가 개방되어 대중화하는 단초가 되었기 때문이다.

13) 아로까위하라(Āloka-vihāra)는 글자 그대로 ‘광명의 사찰’이란 뜻이다. 싱할라어로 알루 위하라(Alu-

vihāra)라고 하며, 스리랑카 중부의 마탈레(Matale)에 위치하고 있는 사찰이다. 이 사찰에서 암송으로만 전해오던 빨리 삼장이 기원전 1세기 제4차 결집을 통해 처음으로 문자로 기록되었다.

14) Norman K.R., A Philological Approach to Buddhism: The Bukkyō Dendō Kyōkai Lectures 1994(London: 

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 University of London, 1997), pp.77~78. 

15) Adikaram E.W., Early History of Buddhism in Ceylon(Dehiwala: Buddhist Cultural Center, 1994), p.79.


또한 서기 5세기에 인도에서 스리랑카로 건너온 붓다고사(Buddhaghosa)는 600년간 마하위하라에서 이루어진 빨리⋅불교학의 성과를 이어받아 빨리 성전의 거의 모두에 주석서를 쓰고, 테라와다 불교의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위숫디막가(Visuddhimagga)』를 저술하였다. 이렇게 붓다고사는 테라와다 불교의 빨리 성전을 집대성하고 성문화함으로써 빨리⋅불교학의 기틀을 탄탄하게 마련했다. 아바야기리와 제따와나도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빨리⋅불교학을 발전시켜 나갔다. 이와 같이 고대⋅중세의 빨리⋅불교학은 마하위하라, 아바야기리, 제따와나의 3대 위하라(vihāra)를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사원교육 시스템인 삐리웨나(pirivena)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11세기에 왕도 아누라다푸라가 남인도의 타밀(Tamil)에 의해 함락되고 폴론나루와(Polonnaruwa)로 왕도가 옮겨지면서 빨리⋅불교학도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위지야바후 왕(King Vijayabāhu, 재위: 1055~1110)과 빠라끄라마바후 왕(King Parākramabāhu, 재위: 1153~1186)과 같은 영명한 군주들의 보호를 받아 스리랑카의 빨리⋅불교학은 새로운 활력을 얻고 부활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다시 테라와다 전통의 본산으로서의 예전 지위를 회복하여 미얀마 등지에서 유학승들이 쇄도하였다. 하지만 15세기 말 최초의 유럽인들이 섬에 상륙할 당시에 스리랑카의 빨리⋅불교학은 이미 쇠락의 길에 접어들고 있었다. 16세기 유럽인들의 침탈과 식민 통치가 본격화되면서 전통적인 사원교육 시스템인 삐리웨나는 특히 스리랑카의 해안 지방에서 급격하게 쇠퇴하게 된다. 다만 싱할라 왕조가 마지막까지 독립을 유지한 중부 고원지대인 캔디(Kandy)에서는 삐리웨나가 그런대로 명맥을 유지하였다.


Ⅲ. 근대(붓다 자얀띠 이전)의 빨리⋅불교학


1. 초기 유럽 학자들의 빨리⋅불교학에 대한 공헌

앞서 살펴본 대로, 바나까 시스템에 따라 이루어져온 승가의 빨리⋅불교학은 빨리 성전의 문자화를 분기점으로 모든 사중에게 그 문호가 개방되는 단초를 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중세에는 승가 밖의 일반인들이 빨리⋅불교학에 여전히 접근하거나 참여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19세기의 서양 학자들이 근대적인 개념의 빨리⋅불교학을 일으킴으로써 상황은 급변하였다. 이들은 트렌크너

(V. Trenckner, 1824~1891), 로버트 스펜스 하디(Robert Spence Hardy, 1803~1868), 레기날드 스티븐 코플스톤(Reginald Stephen Copleston, 1845~1925), 칠더스(R.C. Childers, 1838~1876), 조지 터너(George Turnour, 1799~1843), 다니엘 고절리(Daniel Gogerly, 1792~1862), 제임스 데 월

리스(James de Alwis, 1823~1878), 리스 데이비스(T.W. Rhys Davids, 1843~1922)등과 같은 사람들로서 모두 스리랑카에 와서 빨리어를 공부하였다. 


칠더스는 2년간 스리랑카에 머물면서 와스까두웨 수부띠(Vaskaḍuvē Subhūti) 스님과 교류하고 야뜨라물레 담마라마(Yātrāmullē Dhammārāma) 스님에게 빨리어를 공부했다. 그는 1869년에 

『쿳다까빠타(Khuddhakapāṭha)』를 번역⋅출판했고, 1876년에 『빨리어 사전(Dictionary of the Pali 

Language)』을 완성했다. 


영국의 리즈 데이비스는 1864년에 스리랑카에 와서 칠더스와 마찬가지로 야뜨라물레 담마라마 스님에게서 빨리어를 배웠다. 그는 1872년에 영국으로 돌아가 빨리⋅불교학을 계속했으며, 1885년 빨리성전협회(Pāli Text Society, 약칭: PTS)를 창설하고 「빨리⋅영어 사전을 편찬했다. PTS는 서양의 불교학자들과 협력하여 로마자로 빨리 성전을 편집하고 출판하였으며, 이들의 영역본도 함께 출판하였다. 이러한 작업은 빨리⋅불교학의 세계화에 결정적 공헌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승가의 구성원들만이 독점하던 빨리 성전을 스리랑카의 지식인들도 접근할 수 있게 만들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그리고 이는 불교 모더니즘(Buddhist Modernism),17) 프로테스탄트 불교(Protestant Buddhism),

18) 불교부흥(Buddhist Revival), 불교 르네상스(Buddhist Renaissance)와 같은 용어들로 묘사되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의 스리랑카 불교를 특징짓는 운동의 기폭제로 작용한다. (앞으로는 논술의 편의를 위해서 이러한 용어들을 프로테스탄트 불교로 통일한다.)

17) 불교 모더니즘(Buddhist Modernism)은 독일의 하인즈 베헤르트(Heinz Bechert)가 사용한 용어이다. 이에 대해서는 Heinz Bechert and Richard Gombrich(1991), pp.273~285 참조.

18) 프로테스탄트 불교(Protestant Buddhism)라는 용어는 스리랑카의 인류학자인 구나나트 오베에세케레

(Gananath Obeyesekere)가 만들어내고, 영국의 불교 학자인 리처드 곰브리치 (Richard F. Gombrich)가 주로 사용하는 용어이다. 19세기 후반에 형성된 새로운 스리랑카 불교를 가리키는 이 용어는 서구화의 영향 아래에서 성장하고 부흥한 스리랑카 불교의 특수한 변용 현상을 담고 있으며 동시에 스리랑카 불교도의 근대적 정체성을 대변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서는 Richard Gombrich and Gananath Obeyesekere(1998) 참조. 


독일의 빌헬름 가이거(Wilhelm Geiger, 1856~1943)는 빨리⋅불교학뿐만 아니라 불교 역사학

(Buddhist Historical Studies)에도 기여하였다. 그는 유명한 빨리어 문법서인 Pāli Literatur und 

Sprache (Strasbourg: Karl J. Trübner, 1916)를 썼을 뿐만 아니라 스리랑카의 고대 연대기인 『마하왐사(Mahāvaṃsa)』와 『쭐라왐사(Cūlavaṃsa)』를 편집하고 영역하여 PTS에서 출판함으로써 빨리어와 스리랑카 고대사 연구의 권위자가 되었다. 1845년에는 이들이 주축이 되어서 왕실 아시아 협회의 실론 지부(Ceylon Branch of the Royal Asiatic Society)가 창설되었고, 여기서 펴내는 학술지를 통하여 그들의 연구 성과들이 발표되었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승가 안에서만 머물던 빨리⋅불교학은 일반인들에게도 그 문호가 개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근대 이전부터 이루어진 전통적 빨리⋅불교학에 서양 근대의 실증적, 객관적 학문체계와 방법론이 도입되게 되었다. 스리랑카의 불교학자들이나 승려들이 태국이나 미얀마에 비해서 영어를 잘하고 근대 불교학에 일찍 눈을 뜨게 된 것도 이러한 유럽의 동양학(oriental studies)에 고무되고 영향을 입은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빨리⋅불교학의 세계화와 대중화에 기여한 유럽인들의 공헌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19세기에 미얀마로부터 도입된 라만냐 니까야(Ramañña Nikāya)는 위나야(Vinaya)의 철저한 준수로 되돌아 갈 것을 강조하였고, 이는 와나와시(vana-vāsī)에 의한 숲속 수행의 전통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리고 이는 유럽인들을 스리랑카로 끌어들였고 이들 가운데 몇명은 빨리⋅불교학에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그러한 대표적인 인물들로는 독일 출신의 냐나틸로카 마하테라(Nyanatiloka Mahāthera, 1878~1957), 냐나포니카 테라(Nyanaponika Thera, 1901~1994), 빅쿠 아날요(Bhikku 

Anālayo), 영국 출신의 빅쿠 냐나몰리(Bhikkhu Ñāṇamoli, 1905~1960), 미국 출신의 빅쿠 보디

(Bhikku Bodhi), 그리고 네덜란드 출신의 반 제이스트(H.G.A. van. Zeyst, 1909~1989)와 빅쿠 냐나투시타(Bhikkhu Ñāṇatusita) 등이 있다.


2. 프로테스탄트 불교와 빨리⋅불교학

이에 자극되어 스리랑카 불교도들 가운데에도 빨리⋅불교학의 기운이 일어나지 않았느냐고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사정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원래 서양인들이 빨리⋅불교학을 연구한 계기는 불교가 얼마나 교리적으로 떨어지고, 미신에 가득 찬 것인지를 알리기 위해서였다. 초기의 서양 빨리⋅불교학자들의 상당수가 기독교 선교사였던 것도 그러한 이유였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불교를 핍박하기 위해서 빨리⋅불교학을 연구한 것이다. 스리랑카가 영국의 지배를 받는 동안에는 표면적으로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었지만, 실제로는 불교인들은 직⋅간접적으로 큰 압박을 받았다. 예를 들어 관리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미션스쿨(mission school)을 졸업하고 목사인 교장의 증명이 없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스리랑카인이 상당한 사회적 지위를 얻기 위해서는 적어도 표면적으로라도 기

독교인이 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리고 그들은 기독교의 미션 스쿨에서, 기독교가 세계 최고의 종교이며, 불교는 미개하고 야만적인 종교라고 가르쳐야 했다. 또 기독교 선교사들은 많은 교회를 세우고 학교나 강연에서 잡지나 팸플릿에서 활발하게 불교를 매도하고 공격하였다. 이러

한 분위기 속에서는 스리랑카에서 빨리⋅불교학의 기운이 생기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프로테스탄트 불교의 태동으로 극적으로 반전된다. 그리고 이 프로테스탄트 불교의 기폭제는 이른바 ‘파나두라 논쟁(Pānadurā Vādaya)’이었다. 모홋띠왓떼 구나난다

(Mohoṭṭiwattē Guṇānanda) 스님은 목사들에게 논쟁을 걸어 도전을 해 나갔다. 세 번의 유명한 공개 논쟁이 있는데, 제3차 공개 논쟁은 1873년 스리랑카 남부 파나두라(Pānadurā)에서 7일 동안 열렸다. 당시의 영자 신문 실론 타임즈(The Ceylon Times)가 매일 매일의 논쟁을 빠짐없이 기록하여 세계로 그 소식을 전했고, 양측의 배석인들이 증인으로 참석하고 수많은 관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결국 불교의 승리로 끝났다. 모홋띠왓떼 구나난다 스님은 기독교의 궤변에 뛰어나게 대답했을 뿐만 아니라, 불교의 교리를 그들에게 깨닫게 해주었다.


한편 신지학회(神智學會, Theosophical Society)를 창립했던 러시아인 헬레나 블라바츠키(Helena 

Blavatsky, 1831~1891)와 미국인 헨리 스틸 올코트(Henry Steel Olcott, 1832~1907)는 1880년 이 논쟁의 보도를 읽고서 스리랑카에 왔다. 헨리 스틸 올코트는 불교로 개종한 뒤에 스리랑카의 빨리⋅불교학의 중흥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하게 되었다. 그의 영향을 받은 아나가리카 다르마 팔라

(Anagārika Dharmapāla, 1864~1933)도 빨리⋅불교학의 부흥을 위해 분투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이 이 파나두라 논쟁에서의 승리는 스리랑카 불교도들에게 자신들의 종교에 대한 긍지를 심어 준 획기적인 사건이 되었고, 침체의 늪에 빠져 있던 스리랑카의 빨리⋅불교학은 이를 계기로 재도약을 하

게 되었다.


3. 양대 삐리웨나의 성립

스리랑카의 전통적인 사원교육 센터(Monastic Education Center) 또는 승가 대학(monastic 

college)인 삐리웨나(pirivena)도 프로테스탄트 불교의 시기에 근대적인 사원교육의 전당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된다. 그 효시는 1873년에 힉카두웨 스리 수망갈라 테로(Hikkaduwe Sri Sumangala 

Thero)가 설립한 위드요다야 삐리웨나(Vidyodaya Pirivena)와 1875년에 라트말라네 스리담마라마(Ratmalane Sri Dhammārāma) 스님이 설립한 위드야랑카라 삐리웨나(Vidyālaṅkāra Pirivena)라는 양대 삐리웨나였다. 양대 삐리웨나에서 승려들은 물론 일반인들도 교육을 받았으며, 얼마 뒤에 양대 삐리웨나의 명성이 인도, 네팔과 같은 이웃 나라들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양대 삐리웨나에서 저명한 빨리⋅불교학자와 인도학 연구자들이 배출되었다. 양대 삐리웨나의 수석 장로들인 힉까두웨 수망갈라 테로와 라뜨말라네 담마라마 스님은 대중들을 위해 빨리 문헌을 출판해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고 빨리 문헌들의 출판과 보급에 힘을 기울였다. 스리랑카의 고대 연대기인

『마하왐사(Mahāvaṃsa)』와 이의 싱할라어 번역본이 힉까두웨 수망갈라 스님에 의해서 나왔으며, 라뜨말라네 담마라마 스님은 『맛지마 니까야(Majjhima-Nikāya)』에 대한 주석서를 편집했다.


웰리가마 스리 수망갈라(Weligama Sri Sumangala, 1825~1905) 스님은 산스끄리뜨 책과 문법서들을 많이 번역하고 편집함으로써 산스끄리뜨학을 대중화시켰다. 와스카두웨 시리 수부티

(Vaskaduve Siri Subhūti) 스님은 1865년에 빨리어 어휘집인 『아비다나빱디삐까(Abhidhāna-

ppadīpikā)』에 영어와 싱할리어 해석을 달아서 출판하였고, 1876년에는 빨리어 문법서인 「나마

말라(Nāma-mālā)」를 각각 편집하여 출판했다. 이러한 사업을 통해서 빨리 문헌들이 일반인들에게 공개됨으로써 빨리⋅불교학이 대중화된다.


스리랑카의 독립 이후 양대 삐리웨나인 위드요다야 삐리웨나(Vidyodaya Pirivena)와 위드야랑카라 삐리웨나(Vidyālaṅkāra Pirivena)는 1959년에 정식 대학으로 승격되었다. 1966년엔 새로운 법률안이 통과되면서 이 두 대학은 켈라니아 대학(University of Kelaniya)과 스리 자야와르데나뿌라 대학

(University of Sri Jayawardhanepura)으로 각각 명칭을 바꿔 삐리웨나로부터 독립했다. 이미 있던 두 개의 삐리웨나는 전통적인 사원교육 센터로 존속되고, 새로 분리된 두 대학은 전통적인 빨리⋅불교학뿐만 아니라 일반 학문까지 받아들임으로써 명실상부한 스리랑카 현대 교육의 효시가 되었다.

이와 같이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프로테스탄트 불교의 기간에 이루어진 빨리⋅불교학의 발전은 실로 놀랄 만한 것이었다.27)

27)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스리랑카의 불교부흥 기간에 스리랑카 빨리⋅불교학의 성과 에 대해서는 G.P. Malalasekera(1994), pp.287~317 참조. 


Ⅳ. 현대(붓다 자얀띠 이후)의 빨리⋅불교학


1. 붓다 자얀띠와 불교 프로젝트

1948년 스리랑카의 독립과 1956년 붓다 자얀띠(Buddha Jayanti) 기간 동안의 종교⋅문화적 르네상스로 빨리⋅불교학은 새롭게 도약한다. 빨리 성전과 그 주석서들의 편집과 번역은 이 시기의 주요 특징들 가운데 하나였다. 1948년 스리랑카는 130여 년의 영국 식민지 통치로부터 독립함으로써 주권

을 회복하였다. 그리고 1955년부터 1956년에 걸쳐 佛紀 2500년을 경축하는 붓다 자얀띠(Buddha 

Jayanti)는 스리랑카의 불교도들에게 빨리⋅불교학의 중요성을 다시 일깨워준 계기가 되었다. 1956년 스리랑카 정부는 빨리성전을 싱할리어로 번역⋅출판하는 사업인 붓다 자얀띠 뜨리삐따까 가란타말라(Buddha Jayanti Tripiṭaka Granthamālā)29)와 불교백과사전(Encyclopedia of Buddhism)의 편찬 프로젝트를 공식적으로 시작하였다.

29) 빨리 성전을 싱할리어로 번역⋅출판하는 사업인 붓다 자얀띠 뜨리삐따까 가란타말라 (Buddha Jayanti Tripiṭaka Granthamālā)에 대해서는 정준영(2009), pp.315~345 참고


붓다 자얀띠 뜨리삐따까 가란타말라는 1956년에 시작되어 1989년에 끝났다. 24명의 저명한 학승들이 이 사업을 담당하도록 선정되었다. 텍스트는 몇 가지 판본(manuscript)들과 미얀마의 제6차 결집본(Chattha Sangāyana edition)과 대조되었다. 번역의 스타일은 고풍스런 싱할라어이며 그 내용은 붓다고사(Buddhaghosa)의 주석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불교백과사전(Encyclopedia of Buddhism)의 편찬 프로젝트는 1955년에 시작되어 2008년에 모두 

8권의 출판으로 종료되었다. 초대 편집장(Editor-inChief)으로는 저명한 불교 학자인 말랄라세케라(G.P. Malalasekera)가 임명되었고, 1976년에 그가 서거한 뒤로는 위제세케라(O.H. de A. Wijesekera), 조티야 디라세케라(Jotiya Dhirasekera), 판둘라 자야와르다나(Pandhula Jayawardhana), 위에라라트네(W.G. Weeraratne)가 계속해서 편집장을 맡았다.


붓다 자얀띠 뜨리삐따까 가란타말라와는 별도로, 빨리 삼장을 간명한 싱할라어로 번역하는 사업도 스리랑카 정부의 주도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사업은 1990년대에 스리랑카 정부가 새로 설립한 붓다사사나 부(Ministry of Buddha Sāsana)가 담당하였다. 이 사업을 위해 모두 학승인 5명의 고문(advisor)과 9명의 편집자들이 임명되었다.


스리랑카 정부 주도의 불교 프로젝트와는 별도로, 민간 주도의 불교 프로젝트도 활발히 진행되었다. 그 대표적인 프로젝트가 바로 헤와비타라나 주석서 프로젝트(Hewavitarana Commentary 

Project)와 조이사 번역 프로젝트(A.P. De Zoysa Translation Project)이다. 헤와비타라나 주석서 프로젝트는 시몬 헤와비타라나(Simon Hewavitarana, 1875~1913)의 기부금으로 진행된 빨리 주석서들의 편집과 출판 사업이다. 이 프로젝트에서 당대 학승들에 의해 빨리 성전에 대한 모든 주석서들이 편집되어 모두 49권의 책으로 출판되었다. 이와는 별도로, 『짜리야삐따까(Cariyāpiṭaka)』, 『빠라지까빨리(Pārājikāpāli)』, 『담마상가니(Dhammasaṇgaṇi)』, 『자따까빨리(Jātakapāli)』 (vols. Ⅰ&Ⅱ), 『쿳다까빠타(Khuddakapātha)』, 『담마빠다(Dhammapada)』, 『짜뚜반나와라빨리(Catubhānavārapāli)』와 같은 빨리 텍스트들도 출판되었다. 조이사 번역 프로젝트(A.P. De Zoysa Translation Project)는 조이사(A.P. De Zoysa) 박사가 단독으로 시작한 불교 프로젝트이다. 그것은 빨리 삼장과 그 주석서들을 싱할라어로 번역⋅출판하는 사업이었다. 대략 100여 권이 출판되었다. 이 프로젝트에도 스리랑카의 저명한 학승들이 다수 참여하였다.


2. 제도권의 빨리⋅불교학

오늘날 스리랑카의 빨리⋅불교학은 대학, 대학원, 학회와 같은 제도권에 포진한 출가⋅재가 학자들에 의해 주로 이루어지고 있다. 스리랑카의 대학은 대부분 국⋅공립대학이며, 빨리⋅불교학은 대체로 이러한 국⋅공립대학들 안에서 진행된다. 붓다스라와까 빅슈 대학은 스리랑카의 대학 시스템 안에서 오직 비구들을 위해 정부가 설립한 유일한 승가대학이다. 스리랑카불교⋅빨리 대학(Buddhist and 

Pāli University of Sri Lanka)은 빨리⋅불교학만을 전문적으로 교육하고 연구하기 위해 스리랑카 정부가 설립한 대학이다.


전통적인 빨리⋅불교학의 전당인 삐리웨나 체계가 테라와다 불교에만 그 범위를 한정시킨 것과 대조적으로, 스리랑카 대학들의 빨리⋅불교학부와 붓다스라와까 빅슈 대학(Buddhasravaka Bhikṣu 

University)의 커리큘럼에는 테라와다 불교 외에도 부파 불교와 대승 불교 등의 다른 불교 전통들도

개설되어 있다. 그러나 빨리⋅불교학이 근본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빨리⋅불교학부가 개설된 종합대학들로는 뻬라데니야 대학(University of Peradeniya), 켈라니야 대학(University of Kelaniya), 자야와르데네뿌라 대학(University of Sri Jayawardhanepura), 루후나 대학(University of Ruhuna), 콜롬보 대학(University of Colombo) 등이 있다. 그리고 스리랑카 불교⋅빨리 대학은 그 자체가 빨리⋅불교학을 전문적으로 교습하는 대학이므로 빨리⋅불교학부라는 학부는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필자는 오늘날의 스리랑카 빨리⋅불교학을 ① 문헌학적 연구(philological studies), ② 철학적 연구

(philosophical studies)의 둘로 크게 나누고서, 이에 따라서 스리랑카의 빨리⋅불교학자들을 살펴보고자 한다.31) 그리고 여기서는 제한된 지면으로 인해 빨리⋅불교학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는 불

교사학과 응용 불교학은 일단 제외하며, 마찬가지 이유에서 스리랑카의 모든 빨리⋅불교학자들과 그들의 저서들을 포괄하려고 시도하지 않을 것임을 밝혀둔다. 

31) 그러나 특정 학자의 연구 동향을 이러한 분류법에 따라 일률적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범주들 상호 간에도 중첩되는 부분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문헌학적 연구를 주로 하는 학자들 가운데에도 철학적 연구를 하는 학자가 없는 것이 아니며, 그 반대의 경우도 존재한다. 그러나 필자는 논술의 편의를 위해서 일단 이러 한 분류법에 따라서 논의를 전개하기로 한다.


3. 문헌학적 연구

빨리⋅불교학에서 문헌학적 연구(philological studies)는 주로 빨리 성전 및 빨리 문헌들에 대한 번역과 편집, 빨리 문헌들에 근거한 해석들이 주류를 이루는 학문적 방법이나 학풍을 말한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근대 이전의 빨리⋅불교학은 주로 승가 내에서 바나까 시스템을 통한 빨리 성전의 암송과 연구가 중심이었으며 이는 삐리웨나에서 이루어져 왔다. 오늘날에는 대학 등과 같은 제도권이 빨리⋅불교학의 주도권을 쥐게 되면서 문헌학적 연구가 많이 위축된 것은 사실이나 여전히 스리랑카의 빨리⋅불교학을 대표하는 학풍의 하나로 남아 있으며 몇몇 스리랑카 빨리⋅불교학자들은 이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왔다.


문헌학적 연구에서 단연 독보적인 학자가 바로 말라라세케라(G.P.Malalasekera, 1899~1973)이다. 그는 불교학자면서도 외교관, 사회 운동가, 교육가, 세계불교도우의회(World Fellowship of 

Buddhists, 약칭: WFB)의 창립 주역 등으로도 활약한 매우 독특하고 다채로운 경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그의 경력은 그가 단순한 불교학자가 아니라 이론과 실천을 모두 겸비한 불교 활동가였음을 말해준다. 그는 19세의 나이에 수석으로 학부를 마치고 1925년 런던 대학(University of 

London)의 동양학 스쿨(School of Oriental Studies)에서 ‘실론의 빨리 문헌(The Pāli Literature in Ceylon)’이라는 주제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영국에서 습득한 문헌학적 엄밀성과 역사주의를 특징

으로 하는 서구의 학문적 방법론은 그가 전 생애에 걸쳐 문헌학적 연구에서 발군의 능력을 보이게 된 탄탄한 밑거름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1942년에 뻬라데니아 대학에서 교수로 임용되어 1969년에 정년퇴임할 때까지 봉직했다. 또한 그는 동양학부(Faculty of Oriental Studies)의 학장과 빨리어 명예교수로서 스리랑카의 빨리⋅불교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연구 업적들로는 Mahāvaṃsa Ṭīkā (London: PTS, 1935), Dictionary of Pali Proper Names I⋅II (London: PTS, 

1937-1938), Extended Mahāvaṃsa(London: PTS, 1937), The Pāli Literature of Ceylon (London: 

PTS, 1928) 등이 있다. 특히 Dictionary of Pali Proper Names I⋅II는 비록 사전이란 이름이 붙었지만 모두 1,370페이지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분량을 지녀서 백과사전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빨리 문헌들에 나오는 모든 고유명사들을 표제어로 하고 있다. 한편 그는 스리랑카 정부의 주도로 1955년에 시작되어 2008년에 모두 8권의 출판으로 종료된 불교백과사전(Encyclopedia of 

Buddhism)의 편찬 프로젝트에서 초대 편집장으로 활동하였다. 이와 같은 연구 성과들에서 보듯이, 그는 스리랑카 빨리⋅불교학의 문헌학적 연구의 학풍을 조성하고 연구 기반을 마련하는 데 큰 역할

을 하였다.


문헌학적 연구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또 다른 학자로는 자야위끄라마(N.A. Jayawickrama, 1920~)를 들 수 있다. 그는 『붓다왐사(Buddhavaṃsa)』, 『짜리야삐따까(Cariyāpiṭaka)』, 『위마나왓뚜

(Vimānavatthu)』와 『뻬따왓투(Petavatthu)』, 『까타왓투빡카라나 앗타까타(Kathāvatthuppakaraṇa-

aṭṭhakathā)』 등의 빨리 문헌들을 편집하여 PTS본으로 출판하였다. 그가 영역한 『자따까(Jātaka)』

의 니다나까타(nidāna-kathā)는 Story of Gotama Buddha (London: PTS, 1990)라는 책으로 영국의 PTS에서 출판되었고, 그가 영역한 『위나야(Vinaya)』의 니다나까타도 The Inception of Discipline 

and Vinayanidāna, SBB vol. XXI (London, PTS, 1962)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다. 그가 영역한 『숫따니빠따(Suttanipāta)』는 Suttanipāta Text and Translation (Sri Lanka: PGIPBS, University of Kelaniya, 2001)이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다. 


올리버 아베나야케(Oliver Abeynayake)는 스리랑카의 위드야랑까라 대학(Vidyalankara University)에서 수석으로 학사를 졸업하고, 영국의 랑카스터 대학(University of Lancaster)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켈라니야 대학에서 빨리⋅불교학부의 학장을 역임했고 현재는 스리랑카 불교⋅빨리 대학의 연구부 학장으로 있다. 그의 주요 연구 분야는 빨리 성전 가운데서도 『쿳다까 니까야

(Khuddaka-Nikāya)』이다. 이러한 그의 연구 성과는 그의 저서인 A Textual and Historical Analysis of the Khuddaka Nikāya (Colombo:Karunaratne, 1984)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근현대에 스리랑카의 빨리⋅불교학계는 다수의 빨리어 대가들을 배출하였다. 그 가운데 단연 뛰어난 인물은 암발랑고다 뽈왓떼 붓다닷타(Ambalaṅgoḍa Polvattē Buddhadatta, 1887~1962)라고 할 수 있다. 스님은 위드요다야 대학(Vidyodaya University)에서 박사학위를 받고서 同 대학에서 불교 철학을 가르치는 교수로 활동하였다. 1954년 미얀마 정부로부터 스리랑카 승려로서는 처음으로 악가마하빤디따(Aggamahāpanditā) 칭호도 받았다. 스님은 영어로 많은 빨리어 학습서⋅사전들을 저술하여 스리랑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빨리⋅불교학의 확산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33)

33) 스님이 편찬한 빨리어 학습서들로는 Aids to Pāli Conversation and Translation (Ambalangoda: P.M.W. 

Piyaratna, 1951), The New Pāli Course Parts I & II (Dehiwala: Buddhist Cultural Center, 2006), The New Pāli Course Parts III (Dehiwala: Buddhist Cultural Center, 2005) 등이 있으며, 빨리어 사전으로는 English-Pāli 

Dictionary (London: Pali Text Society, 1979), Concise Pāli-English Dictionary (Delhi: Motilal Banarsidass, 

1989) 등이 있다. 


깍까빨리예 아누룻다 테라(Kākkāpalliye Anuruddha Thera, 1929~2013)는 스리랑카의 실론 대학(University of Ceylon)34)에서 빨리어와 빨리 문헌을 전공으로 학사와 석사를 졸업하고 영국의 랑카스터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스님은 켈라니야 대학(University of Kelaniya)에서 30년 이상을 훌륭하게 가르쳤으며, 스리랑카 불교⋅빨리 대학(Buddhist and Pali University of Sri Lanka)에서 첫 부총장(vice chancellor)으로 봉직하였다. 중국 홍콩의 비구니 사찰인 치린징위엔(志蓮淨苑) 부설의 치린야간대학(志蓮夜書院)에서 테라와다 불교와 빨리어를 가르치는 교수 및 홍콩대학(University of Hong Kong)에서 빨리어와 빨리 문헌을 가르치는 방문교수로 봉직하였다. 빨리⋅불교학에 기여한 스님의 공헌은 A Guide to the Study of Pāli: The Language of Theravāda Buddhism (Hong Kong: Center of Buddhist Studies, The University of Hong Kong, 2010), Dictionary of Pāli Idioms: An 

Aid to the Student of Pāli(Hong Kong: Chi Lin Lunnery, 2004) 등과 같은 빨리어 학습서들의 편찬에서 잘 나타난다.

34) 실론 대학(University of Ceylon)은 1942년부터 1972년까지 스리랑카(당시 이름은 실론)에서 유일한 대학이었다. 동(同) 대학은 스리랑카 전역에 산재한 몇 개의 분교를 지니고 있었다. 1972년 실론 대학 제1 법령에 의해 실론 대학은 1973년부터 1978년까지 스리랑카 대학 (University of Sri Lanka)으로 대체되었다. 1978년에는 다시 콜롬보 대학(University of Colombo), 뻬라데니야 대학(University of Peradeniya), 위드요다야 대학

(Vidyodaya University), 켈라니야 대학(University of Kelaniya)의 네 대학들로 나뉘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릴리 데 실바(Lily de Silva)는 스리랑카의 콜롬보 태생으로 실론 대학(University of Ceylon)에서 학사를 졸업하고 뻬라데니야 대학(University of Peradeniya)에서 박사를 졸업하였다. 그녀는 1994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뻬라데니야 대학의 빨리⋅불교학부(Department of Pāli and Buddhist Studies)의

학장으로 봉직하였다. 『디가 니까야 앗타까타 띠까(Dīgha Nikāya Aṭṭhakathā Ṭīkā)』 즉 『린앗타완나나(Līnatthavaṇṇanā)』를 감수하여 영국의 PTS에서 세권으로 간행하였다. 그녀의 책 Pāli Primer 

(Igatpuri: Vipassana Research Institute,1999)35)는 오늘날 전 세계에서 빨리어 입문서로 널리 사랑받고 있다. 

35) 이 저서는 필자에 의해 우리말로 번역되어 「빨리어의 기초와 실천」(서울: 씨아이알, 2015)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4. 철학적 연구

오늘날 스리랑카의 빨리⋅불교학에서 철학적 연구(philosophical studies)가 높은 수준에 도달하게 된 데에는 실질적으로 자야틸레케(K.N. Jayatilleke, 1920~1970)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는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University of cambridge)에서 유학하면서 2년 동안 분석 철학(analytic philosophy)의 대가인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1951) 밑에서 공부하였다. 이를 통해서 자야틸레케는 논리적 실증주의(Logical Positivism)라는 당시 유럽의 지성 전통에 그대로 노출되었으며, 이는 이후의 그의 학문적 캐리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의 역작 Early Buddhist Theory of Knowledge (London: George Allen & Unwin Ltd,1963)는 불교에 대한 현대적 해석의 대가(大家)로서 그의 이름을 국제적으로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 저서에서 그는 초기 불교는 그 지식론(theory of knowledge)에서 경험주의(empiricism)라고 설득력 있게 논증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자야틸레케는 지적으로 한창 왕성할 시기인 49세의 나이에 갑작스럽게 타계하였다. 하지만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타계하기까지 10년 남짓한 짧은 기간 동안 불교학계에 대한 미친 공헌 및 후학들에 대한 파급력은 어느 누구보다도 컸다. 왜냐하면 초기 불교에 대한 경험론적 해석과 불교와 서양 철학과의 비교연구가 특징인 그의 학풍은 그의 제자들인 데이비드 칼루파하나(David Kalupahana, 1936~2014), 파드마시리 데 실바(Padmasiri de Silva), 구나팔라 다르마시리(Gunapala Dharmasiri), 아상가 틸라카라타네(Asanga Tilakaratane) 등과 같은 차세대 불교학자들로 이어졌고 이들이 오늘날 스리랑카 빨리⋅불교학을 실질적으로 리드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칼루파하나(David Kalupahana, 1936~2014)는 1959년 뻬라데니야 대학에서 빨리, 산스끄리뜨, 철학을 전공으로 학사학위를 받고, 영국의 런던 대학(University of London)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뻬라데니야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72년부터 교수로 재직했던 하와이 대학(University of Hawaii)의 철학부(Department of Philosophy)의 학장을 지냈다. 그는 주로 초기 불교의 인식론과 언어 이론을 중심으로 다양한 주제들에 대해서 무려 20편 가량의 저서들을 썼을 만큼 지칠 줄 모르는 연구자였다. 초기 불교에 대한 그의 학문적 관점의 한 특징은 초기 불교가 실증주의적 경향을 지닌 경험주의(empiricism)의 한 형태를 대표한다고 해석하는 점이다. 그는 이점을 불교 철학에 대입시키는 데 학문적 에너지를 쏟았다. 그는 후기 불교의 철학적 텍스트들을 초기 불교의 텍스트들과 비교하고, 역사적으로 연관되고 초기 불교의 텍스트들과 양립될 수 있는 해석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그럼으로써 그는 테라와다 불교권의 학자들이 후대 대승 불교 텍스트들의 가치를 다시 인식하고 그들을 보다 호의적으로 보도록 고무하였다. 이것은 반대로 대승 불교권의 학자들에게도 적용되는 말일 것이다. 실제로 그는 직접 나가르주나(Nāgārjuna)의 『중론송(中論頌, Mūlamadhyamakakārikā)』을 번역⋅출판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는 스리랑카 학자들 가운데 동아시아의 대승 불교를 가장 잘 이해하는 학자로 손꼽힌다.


구나팔라 다르마시리(Gunapala Dharmasiri, 1956~2015)는 뻬라데니야 대학의 철학⋅심리학부

(Department of Philosophy and Psychology)에서 오랫동안학장으로 봉직하였다. 그의 기본 연구 분야는 실존주의(existentialism)와 다양한 현대 철학 사조들이었다. 또한 그는 산스끄리뜨어로 된 대승(大乘, mahāyāna)과 금강승(金剛乘, vajrayāna)의 핵심 텍스트들, 이를 테면 『능가경(楞伽經, Lankavatara-sūtra)』, 『화엄경(華嚴經, Avatamsaka-sūtra)』, 『묘법연화경 (妙法蓮華經, Saddharma 

Puṇḍarīka-sūtra), 능엄경(楞嚴經, Śūraṅgama-sūtra), 『대보적경(大寶積經, Ratnakūṭa-sūtra)』을 싱할리어로 번역함으로써 스리랑카의 빨리⋅불교학자들이 대승 불교의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아상가 틸라카라트네(Asanga Tilakaratne)는 스리랑카의 붓다스라와까 빅슈 대학(Buddhasravaka 

Bhikṣu University)에서 5년 동안 빨리 삼장, 빨리어, 산스끄리뜨어, 싱할라어, 기타 과목들을 배웠으며, 이 대학에서 첫 번째 학위를 받았다. 스리랑카의 뻬라데니야 대학(University of Peradeniya)에서 불교 철학(Buddhist philosophy)을 주전공으로, 빨리어와 산스끄리뜨를 부전공하였고,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동아시아센터의 장학금을 받아 하와이 대학(University of Hawaii)에서 서양 철학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비교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콜롬보 대학(University of Colombo)의 빨리⋅불교학부 교수이며 뉴질랜드의 오타고 대학(University of Otago)에서 불교를 강의하는 방문 교수이다. 그의 학문적 관심 분야는 현대 스리랑카의 사회 종교적 문제들, 불교에서 정의의 개념, 비교 종교학과 종교 철학, 언어와 논리이다.


파드마시리 데 실바(Padmasiri de Silva)는 미국의 하와이 대학(University of Hawaii)에서 비교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서 1980년부터 1989년까지 뻬라데니야 대학에서 철학과 교수 및 학장을 역임했다. 비록 지금은 정년 퇴임하였지만 여전히 왕성한 학문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그는 비교 철학적 관점에서 불교 심리학, 불교 인식론, 불교 윤리학에 관한 많은 저서와 논문들을 써왔다.


빨리⋅불교학의 철학적인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분야가 아비담마 연구(abhidhamma studies)일 것이다. 스리랑카의 빨리⋅불교학계는 아비담마 연구에서도 카루나다사(Y. Karunadasa), 수마나팔라 갈망고다(Sumanapala Galmangoda), 자야수리야(A.A. Jayasuriya)43) 등과 같은 여러 대가들을 배출하였다.


Ⅴ. 나가는 말: 과제와 전망


이제까지 우리는 스리랑카의 빨리⋅불교학을 역사적으로 고찰하고 분석해보았다. 스리랑카의 빨리⋅불교학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단절되지 않고 면면히 이어져 온 살아있는 전통(living tradition)이며, 앞으로도 현재를 발판으로 발전될 것이다. 그러나 양지가 있으면 음지도 있듯이 오늘날 스리랑카의 빨리⋅불교학도 몇 가지 과제들을 안고 있다.


첫째, 스리랑카의 빨리⋅불교학이 삐리웨나에서 대학교와 같은 제도권으로 그 주도권이 넘어가면서 전통적으로 빨리⋅불교학을 담당해온 승려들의 학풍이 다소 위축되어 있다. 스리랑카 사회에서 승려들은 여전히 가장 학식 있는 단일 그룹임에도 불구하고, 학사를 넘어서 석사 이상으로 공부하는 승려들은 많지 않은 실정이다.


둘째, 세속화의 물결에 따라서 유능한 젊은이들이 경제적으로 보다 가시적이고 실용적인 학문으로 몰리고 빨리⋅불교학과 같은 인문학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현상도 감지된다. 이에 따라 전반적인 빨리⋅불교학의 수준이 과거에 비해 저하되고 있다.


셋째, 스리랑카의 차세대 또는 신진 빨리⋅불교학자들이 영어와 같은 외국어 실력 부족이라는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 이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고 난 직후인 1950년대에 반다라나이케(S.W.R.D. Bandaranaike,1899~1959)가 싱할라 불교 민족주의(Sinhala Buddhist Nationalism)에 입각한 정책들을 밀고 나가면서 영어 대신 싱할리어를 공용어로 지정하였을 때부터 이미 예고된 현상이기도 하다.


넷째, 스리랑카의 빨리⋅불교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빨리어나 산스끄리뜨 이외에 고전 중국어나 티베트어와 같은 다른 불교 원전어들에 대한 능력이 거의 없거나 부족하다. 특히 오늘날에는 중앙아시아 등지에서 쁘라끄리뜨(Prākrit)나 간다라어 등과 같은 언어들로 쓰인 초기 불교의 텍스트들이 발굴됨으로써 초기 불교의 연구 반경이 넓어지고 있는 추세이지만 스리랑카의 빨리⋅불교학자들은 대체적으로 이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몇 가지 과제들을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보면 스리랑카 빨리⋅불교학의 미래는 어둡지 않은 것 같다. 아니 오히려 빨리⋅불교학은 앞으로 범세계적인 수행 열풍과 더불어 더욱 더 번창하고 인기를 얻어갈 것으로 보인다. 비록 빨리어 이외의 언어들로 쓰인 초기 불교의 텍스

트들이 발굴됨으로써 빨리 불교(Pāli Buddhism)에 대한 학문적 관심이 예전만 못하고 그 입지가 줄어든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테라와다라는 단일 부파에 의해서 완전한 상태로 보존되어온 유일한 초기 불교의 텍스트로서, 그리고 역사적 실존인물인 고따마 붓다의 육성(buddha-vacana)을 담고 있는 신빙성 있는 기록으로서 빨리 성전의 위상 자체가 부정되거나 흔들리는 것은 아니다. 빨리 성전에 우리를 최종적 목표인 열반으로 인도하는 수행 체계(system of practice)이자 정교하고 훌륭한 마음 치유법(mental therapy)이 설해져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빨리 성전을 근간으로 하는 테라와다 불교에 대한 관심은 범세계적으로 더욱 높아지고 있다. 우리가 2000년 이상 테라와다 불교의 종주국이었으며 일찍이 유럽학자들을 통하여 근⋅현대 빨리 불교학을 태동시킨 바 있는 스리랑카의 빨리⋅불교학의 전망을 어둡지 않게 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국의 빨리⋅불교학

에 대한 스리랑카 정부 및 국민들의 적극적인 지원, 태국, 미얀마와 같은 다른 테라와다 형제국가들과의 끈끈한 교류와 협력, 수행과 교학을 추구하기 위해 스리랑카를 찾아오는 외국 지성인들의 유입이 계속되는 한 스리랑카의 빨리⋅불교학은 앞으로 세계의 빨리⋅불교학계를 리드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