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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국불교 10대 논쟁 - 사띠(sati) 논쟁

실론섬 2016. 2. 11. 21:28

사띠(sati) 논쟁 / 정준영

특집 | 현대 한국불교 10대 논쟁

불교평론 [62호] 2015년 06월 01일 (월)



1. 사띠 논쟁의 시작과 전개

         

초기불교에서 등장하는 빠알리(pāli)어 사띠(sati)는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는 ‘기억’한다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 현재에 나타나는 현상에 ‘마음을 두어 자세히 살피는’ 것을 말한다. 초기경전 안에서 사띠는 후자의 경우로 자주 나타나며, 현재까지도 불교수행의 핵심 기능 중 하나로, 명상을 통한 심신치유의 기제로 활용되는 추세이다. 사띠는 계정혜 삼학의 정학(正學) 안에 포함되는 심리적 기능으로 집중의 특성이 있으며 수행자의 마음이 방황하지 않고 현재 나타나는 대상을 자세히 살피는 역할을 한다. 또한 팔정도로 세분화했을 때는 ‘올바른 사띠(sammā sati)’ 혹은 ‘정념[正念]’이라는 용어로 ‘올바른 노력[正精進]’과 ‘올바른 집중[正定]’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고 있다. 더 나아가 초기경전 안에서 ‘올바른 사띠’는 ‘사념처(cattaro satipaṭṭhāna)’를 통해 그 역할을 구체화며, 오늘날 상좌부불교전통에서 위빠사나(Vipassanā) 수행의 핵심 방법으로 그 의미가 확대되었다.


사띠는 사마디(samādhi)와 함께 불교수행에서 핵심적인 기능을 담당한다. 그러다 보니 여러 수행자와 학자들 사이에서 그 의미와 기능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이 나타났으며, 때로는 이견들로 인해서 첨예한 논쟁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2000년대 초반부터 진행된 국내 불교학계의 사띠 논쟁은 김준호의 〈초기불전에 나타난 지관개념(止觀槪念)〉을 시작으로, 김형준의 〈원시선(原始禪)의 본질 및 수습구조(修習構造)에 관한 일고(一考)〉를 거쳐 조준호, 임승택, 김재성 등으로 이어지면서 초기불교 전공자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이 시기에 시작된 사띠 논쟁은 2004년 무렵까지 첨예하게 발전했고, 이후부터 현재까지 학자들의 대거 참여로 인해 다양하고 풍성한 연구물들이 지속적으로 발표되고 있다. 지난 2008년, 김준호는 〈‘사띠(sati) 논쟁’의 공과(功過)〉를 통해 사띠 논쟁의 개요와 전개 과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특히, 그는 사띠를 ‘수동적 주의집중’ ‘마음챙김’ ‘마음지킴’ ‘알아차림’ ‘주시’ ‘새김’ 등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특정집단의 이익과 상관없이 학문적 견해차이로 순수한 논쟁이 진행되었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또한 그 당시 사띠 논쟁을 주도한 조준호, 임승택, 김재성 등이 빠알리 경전의 구체적인 근거자료를 제시하면서 초기불교의 본격적인 원전연구를 시작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동시에 그는 사띠 논쟁의 문제점 역시 지적하는데, 먼저 아함경(阿含經)의 대조 없이 니까야(Nikāya)만을 중심으로 진행된 논의, 그리고 경전 자체의 문제점을 성찰하기에 앞서 자신이 선호하는 특정의 경전에 치중하여 경증으로 삼은 태도를 문제 삼았다. 그리고 위빠사나의 위상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지 않고, 붓다가 깨달은 유일한 방법이라는 식의 일방적인 우위론이 주장되었다고 지적하는 등, 사띠 논쟁의 득과 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 


그 이후 2009년 12월, 〈법보신문〉을 통해 한동안 잠잠했던 사띠 논쟁이 재점화되었다. 기존의 사띠 논쟁이 학술 장면에서 진행되었던 전문적인 논의였다면, 〈법보신문〉에서는 대중매체를 통한 기고 형식을 빌려 일반화된 표현으로 사띠 논쟁이 전개됐다. 인경은 사띠의 우리말 번역어인 ‘마음챙김’이라는 용어에 문제를 제기했으며, 김재성은 이를 반박한다. 14회에 걸쳐 9명의 전문가가 참여한 기고 형식의 논쟁은 사띠 논쟁의 재점화로 보기에 충분했다. 참여자들은 기존의 사띠를 다양한 수행론으로 확대하던 해석 방식에서 벗어나, 사띠의 의미와 해석 문제로 논의를 한정시켰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 외에도 국내에서 진행된 사띠와 관련된 논의들은 여러 형태가 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크게 두 가지로 사띠 논쟁을 한정하여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 하나는 2000년에서 2004년 사이 불교학계에서 진행된 논문발표 식의 논쟁이고, 다른 하나는 2009년에서 2010년 사이 대중매체를 통한 기고 형식의 논쟁이다. 또한 이 안에구분 내용 기간

불교학회 사띠의 의미와 번역용어 문제 2000년~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의 관계 문제 

대중매체

[법보신문] 사띠의 의미와 우리말 번역 문제

: 초기불교의 사띠와 현대 심리치료의 mindfuln-ess 문제  2009년~

서 진행된 논쟁 역시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될 수 있다. 하나는 사띠의 우리말 번역에 대한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사띠를 통한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의 관계에 대한 논쟁이다. 그리고 사띠의 우리말 번역용어 문제는 초기불교 안에서의 사띠의 의미에 대한 논쟁과 현대 심리치료 영역에서 마음챙김(mindfulness)의 활용 문제로 구분될 수 있다.


2. 불교학계에서 진행된 사띠 논쟁


국내외에서 초기불교를 연구한 전공자들은 불교수행의 핵심 요소인 사띠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했다. 첫 번째로 사띠의 번역 문제는 빠알리어 사띠의 의미와 부합하는 적절한 번역어 찾기에서 비롯되었다. 조준호는 사선정(四禪定)의 상태에서 수행자의 노력 여하에 상관없이 자동적으로 진행되는 사띠의 역할에 무게를 두어 ‘수동적 주의집중’이라고 번역했다. 임승택은 육근을 통하여 외부로부터 들어오려는 불선함을 막으려는 문지기 역할을 강조하여 ‘마음지킴’으로 번역했고, 각묵과 김재성은 대상에 마음을 두어 놓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마음챙김’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그리고 전재성은 사띠 본래의 의미인 ‘기억’과 ‘현재와 관련된 주의 깊음’의 의미 모두를 살리기 위해서 ‘새김’이라고 번역했다. 임승택과 김재성은 사띠가 수동적으로 진행된다는 것을 부정했고, 조준호는 본격적인 사띠가 네 번째 선정 이전에도 진행될 수 있다는 주장을 거부했다. 


이러한 논쟁은 번역 문제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띠의 역할이나 기능적인 문제로 확장되었다. 임승택과 김재성은 사띠가 초선 이전에서부터 색계 선정과 무색계 선정을 통해 진행될 수 있으며, 사띠는 수행자가 의도하여 대상으로부터 마음을 지키거나[마음지킴], 대상에 마음을 챙겨야 하는[마음챙김] 능동적인 작업이라 주장했다. 반면에 조준호는 온전한 사띠는 수행 중에 의도적으로 힘을 주어 대상에 마음을 두는 것이 아니라, 능숙하고 익숙해져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것이며 사선정이 가장 적절한 위치라고 주장하였다. 이들의 주장은 첨예하게 대립했고 그 간극은 좀처럼 좁혀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와 같은 사띠의 번역 문제는 현재까지도 통일되지 않고 각자 자신의 번역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이러한 논의는 사띠가 선정 안에서 진행되느냐 선정 밖에서 진행되느냐의 문제로까지 확장되었다. 사띠에 대한 번역상의 문제는 사띠를 통해 진행되는 수행의 문제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두 번째는 사띠를 통해 진행되는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의 관계에 대한 문제이다. 먼저 조준호는 사마타를 통하여 사선정을 얻어 사띠가 수동적 주의집중의 역할을 해야 비로소 사념처의 온전한 수행과 위빠사나가 진행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사마타에서 위빠사나로 이어지는 지관(止觀)의 차제를 강조하였다. 임승택은 사마타를 통한 사선정의 체계 중에서 언어적 사유(vitakka vicāra, 尋伺)가 진행되는 첫 번째 선정에서 위빠사나가 가장 온전하게 진행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선정 없는 위빠사나, 혹은 초선에서 무소유처정까지의 어떤 선정에서도 위빠사나로 전환이 가능하나 초선이 최적의 상태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사선정 이후에 위빠사나가 진행된다는 조준호의 의견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김재성은 사마타 수행을 통한 선정의 성취 없이도 위빠사나 수행[純觀]이 가능함을 강조했다. 하지만 사마타를 통한 선정의 성취 없이, 선정 밖에서 위빠사나가 온전히 진행된다는 주장은 조준호의 의견에 반할 뿐만 아니라, 임승택의 주장과도 상충되었다. 물론 임승택은 선정 없는 위빠사나[純觀]에 대해서 완강히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언어적 사유가 없는 상태에서 진행되는 위빠사나를 반기지는 않았다. 특히, 조준호는 니까야를 벗어나 주석서를 논거로 삼는 순관을 반대했으며, 김재성은 니까야 안에서도 순관의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논쟁은 니까야의 다양한 설명뿐만 아니라, 주석서와 《위숫디막가(Visuddhimagga, 淸淨道論)》에 나타난 설명이 가미되면서 더욱 뜨거워졌다. 사마타 및 위빠사나와 선정의 성취 위빠사나의 진행 연구자

색계 네 번째 선정 온전한 위빠사나가 진행 조준호

세 번째 선정  

두 번째 선정  

첫 번째 선정 가장 온전한 위빠사나가 진행 임승택

욕계 선정의 성취 이전 가장 온전한 위빠사나가 진행 김재성

관련된 대부분의 경전이 검색되었고, 수행과 관련된 다양한 문헌들이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논쟁이 거듭되면서 분위기가 격렬해질수록 불교학계는 풍성한 문헌정보를, 그리고 연구자 개인은 학계의 인지도를 동시에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반면, 이들의 논쟁 안에서도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사념처와 위빠사나 수행을 동일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3. 불교학계 사띠 논쟁의 과제


사띠를 통한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의 관계와 관련하여, 필자는 개인적으로 기존의 논쟁과는 또 다른 형태의 주장을 제기하였다. (사띠의 의미와 번역용어 문제는 4, 5장에서 함께 다루겠다.) 먼저, 초기불교를 기준으로 사념처와 위빠사나 수행을 동일시하는 것은 문제가 있음을 주장해 왔다. 왜냐하면 삼학의 수행 중에 사념처는 정학에 해당하고 위빠사나는 혜학(慧學)에 해당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띠는 집중수행의 범주 안에 해당하고 위빠사나는 지혜수행이다. 물론 사념처가 지혜를 계발하는 데 기여하겠지만 사념처 자체가 지혜수행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위빠사나는 붓다가 깨달은 수행법이며 그것이 중도(中道)이자 삼학(三學)의 구성요소다. 결국 팔정도가 온전히 함께 진행되어야 위빠사나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필자는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차제에 대해서도 기존의 논쟁과는 다른 주장을 해왔다. 먼저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의 관계를 논하기 위해서는 니까야와 주석서를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석 전통이나 《위숫디막가》에는 초기경전에 없는 새로운 개념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초기경전을 기준으로 했을 때 사마타 없는 위빠사나는 불가능하다. 이러한 주장은 김재성의 설명뿐만 아니라, 오늘날 진행되는 상좌부불교의 위빠사나 수행전통에 반한다. 초기경전의 설명에 따르면 첫 번째 선정을 성취해야만 오장애가 제거된다. 수행자가 장애를 가지고 여실지견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근접삼매(upacāra samādhi)와 찰나삼매(khaṇika samādhi)를 통해 초선의 성취 이전에도 오장애를 제거할 수 있다고 하지만 이들이 초기불교의 개념은 아니다. 이러한 설명은 마치 지관의 차제를 주장하는 조준호의 의견과 유사한 것 같다. 하지만 꼭 그러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여실지견은 사선정 이후만이 아닌 초선 이후부터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선정이 점진적으로 상승하는 것은 위빠사나를 수행하기에 더욱 좋은 조건을 만들어 준다. 왜냐하면 선정의 단계가 오를수록 여실지견 하는 데 있어 장애가 되었던 요소들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일례로 언어적 사유는 오히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데 방해가 된다. 언어적 개념으로 대상을 알려 할 때, 그 순간 마음은 실재의 대상보다 이름을 붙이려 들기 때문이다. 마치 수식관에서 집중을 키우기 위해 호흡에 숫자를 붙이다가 익숙해지면 숫자 붙이기를 떼는 것과 같은 원리다. 이러한 필자의 이해는 임승택의 주장에 반하게 된다. 결국 필자 역시 사선정 이후에 위빠사나가 가능하다는 조준호의 주장, 초선이 위빠사나의 최적 위치라는 임승택의 주장, 그리고 초선 이전에도 위빠사나가 가능하다는 김재성의 주장과는 또 다른 주장을 하는 셈이다.


다만,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의 관계에 대한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니까야와 주석서의 시대적 구분이 전제되어야 한다. 시대적 구분과 더불어 차이점이 아닌 다양성을 강조하면 다음과 같은 해석이 가능해진다. 


니까야를 기준으로 사선정은 세밀한 집중에 방해가 되는 다양한 선지(jhānaṅga)들이 사라지고 사띠와 우뻬카(upekhā)만 온전하게 남은 상태이기에 위빠사나 수행을 위한 적절한 자리가 될 수 있다. 니까야의 여러 곳에서도 깨달음의 필수조건인 삼명(三明)을 얻는 자리로 사선정이 강조되고 있다. 사선정 이후에만 위빠사나가 된다는 주장을 내려놓으면 공감하는 내용이다. 또한 주석서를 기준으로 사마타 없는 순수 위빠사나는 혜해탈을 얻는 데 도움을 주고 있으며, 500명의 아라한 중에 320명이 혜해탈자라고 불릴 정도로 지혜는 중요한 요소이다. 니까야와 주석서의 설명을 구분하면 동의할 수 있다. 오늘날의 대표적인 위빠사나 수행처에서는 수행자의 사띠를 돕기 위해 명칭 붙이기를 사용하고 있다. 수행의 시작에 있어 언어적 사유는 망상을 내려놓고 마음이 현상과 밀착할 수 있도록 돕는다. 수행방법상의 이점을 설명하는 것이라면 동의할 수 있다. 이처럼 연구의 범주를 초기경전이나 주석서 등으로 한정하여 진행한다면 미세한 차이점들은 남겠으나, 각자가 주장하는 맥락에서 설득력을 가질 수 있게 된다.  


4. 대중매체에서 진행한 사띠 논쟁  


2009년 12월, 인경은 불교수행의 핵심기능이자 심리치료의 치유적 기제로 활용되는 사띠가 ‘마음챙김’으로 번역되는 것은 그 의미를 심각하게 왜곡시킬 위험이 있다는 의미로 〈법보신문〉에 기고를 한다. 2004년 이후에 한동안 휴지기를 가졌던 사띠 논쟁은 불자들이 보는 신문을 통해 기고 형식으로 재점화되었다. 초기와 부파불교의 전문가뿐만 아니라 타 전공자들까지도 참여하여 14회에 걸쳐 각자의 의견을 개진하게 된다. 〈법보신문〉의 사띠 논쟁은 기존에 사띠를 다양한 수행론으로 확대해석하려던 방식에서 탈피하여, 사띠의 우리말 번역과 심리치료와의 관계에 한정하려 노력했다. 기존의 학술 장면에서 진행되었던 전문적인 논쟁에 비해 일반화된 표현으로 전개되었으며, 사띠와 삼빠잔냐(sampajañña)의 우리말 번역 문제 그리고 초기불교의 사띠와 현대심리학의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에 대한 관계 문제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법보신문〉을 통해 기고된 사띠 논쟁의 주요쟁점들을 순서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인경은 사띠를 ‘마음챙김’으로 번역하는 것은 정체불명의 수행방법을 진행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특히, 마음챙김에서 ‘챙김’은 자기를 관리하고 통제하는 방식을 강화시킬 수 있기에, 자칫 어떤 주체를 상정할 수 있어 무아(無我)설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또한 챙기는 것은 명상의 기술이 아니라 오히려 소유하려는 번뇌의 일부이기에 적절한 술어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띠는 어떤 판단도 없이 지켜본다는 의미로 ‘알아차림’이 적절한 역어라 제안한다.


(2) 마음챙김이라는 번역어를 활용하고 있는 김재성은 ‘마음’과 참선의 화두를 드는 정신이 배인 말인 ‘챙김’을 결합시켜 ‘마음챙김’을 만들어 냈으며, ‘챙김’이란 대상에 대한 접근방식을 의미하는 것이지 ‘챙겨서 지닌다’는 소유의 의미를 내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는 ‘마음챙김’이 현재 국내에서 가장 많이 활용하는 사띠의 번역어라고 설명한다.


(3) 인경은 화두와 다르게 끊임없이 변하는 마음은 챙길 수 없으며, 이러한 용어의 선택은 격의불교적(格義佛敎的) 태도라고 반박한다. 또한 서양의 번역이나 심리학자들이 ‘mindfulness’를 활용하는 것은 사띠의 번역이라기보다 위빠사나의 번역에 가까우며, 국내 심리학자들도 통찰수행인 위빠사나를 포함하여 마음챙김이라는 번역어를 사용한다는 설명이다. 사띠는 사마타에는 ‘주의’ ‘머물기’ ‘지킴’ 등으로, 위빠사나에는 ‘알아차림’ ‘자각’ ‘깨어있음’ 등으로 역할을 하지만, 마음챙김이라는 신조어는 양쪽에 모두 적용하기 어려운 용어라는 설명이다.


(4) 김재성은 초기경전의 사띠 활용 사례를 통해 반론한다. 그는 사띠의 사용범주를 7가지 용례로 설명하고, 《자애경》의 경구를 예로 들어 사띠가 알아차림으로 번역되었을 때의 어색함을 지적한다. 또한 경전에서 ‘항상 사띠를 지니고’는 ‘대상을 놓치지 않고 잘 챙기고 있다’는 의미로 마음챙김이 적절하며, 인경이 제시하는 ‘알아차림’은 사띠보다 삼빠잔냐에 대한 번역이라 설명한다. 그리고 마음챙김은 대상을 소유물로 생각하고 통제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놓치지 않고 포착’하는 것이며, 이렇게 마음을 챙겨서 알게 된 것이 ‘알아차림’이라고 설명한다.


(5) 인경은 알아차림이 개별적 대상에 대한 현재의 자각이며, 아직 ‘분명한 앎[正知]’이 없는 상태이기에 사띠의 정확한 번역이라 주장한다. 그는 신수심법(身受心法)의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이 사띠, 이렇게 대상의 전체적인 속성을 확인하는 것이 삼빠잔냐(분명한 앎) 그리고 이들이 본래 존재하지 않음을 통찰하여 소유를 내려놓는 것이 위빠사나라고 한다. 따라서 그는 ①마음챙김은 소유의 행위방식으로 집착을 내려놓는 명상의 바른 목적이라 보기 어렵고, ②마음이 대상으로 하는 다른 마음의 존재를 상정해야만 하고, ③호흡관의 경우 긴장과 불안을 야기하여 더욱 산란하게 만들기에, ④사띠는 마음챙김과 같은 능동적인 활동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스스로 드러나는 수동적인 알아차림이라 주장한다.


(6) 김재성은 ‘챙김’을 번뇌이자 결핍된 상태라고 표현하는 것은 실제 수행과는 다른 기우라 설명한다. 그리고 삼빠잔냐를 알아차림의 범주를 넘어서 ‘무상(無常)함에 대한 이해’로 보는 것은 고엔카(Goenka)의 해석이지 일반적 해석이 아니라는 지적이다. 또한 ‘명상은 인위적인 조작이 아니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설명은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 인위적으로 노력해야 하는 위빠사나 수행에는 적절하지 않은 표현이라고 반박한다.


(7) 인경은 ①사띠와 챙김은 동일한 개념이 아니다. ②마음챙김을 《숫타니파타》 151게송에 적용해 보았을 때 의미가 중첩되고 헷갈린다. ③호흡관의 경우에도 사또(sato)가 과거분사형이기에 번역상 마음챙김을 먼저 하고 호흡을 하는 이해하기 어려운 해석이 된다. ④삼빠잔냐에 대한 이해는 고엔카의 독특한 견해가 아니라 상좌부불교의 전통적인 해석이다. ⑤심리치료의 mindfulness는 사띠를 포함할 뿐만 아니라 위빠사나와 상응하는 개념이며 넓은 의미에서 명상이라 번역해야 한다고 정리하며 김재성과의 논쟁을 마무리한다. 그리고 사띠 논쟁은 다른 전문가 7명으로 확장된다. 


(8) 지운은 인경과 김재성의 대론에 대해, ‘마음챙김’이 소유의 개념으로 이해할 소지가 있다고 설명한다. 또한 대상을 포착한다는 의미로 챙김을 사용한다면, 사마타에는 적절할지 모르나 순간에 변하는 위빠사나의 대상을 포착한다고 보기는 어렵기에 ‘알아차림’이 더 적절하다는 설명이다. 또한 《청정도론》과 한역 경전을 중심으로 사띠에는 ‘기억’이라는 의미가 있기에 ‘앎’을 포함하고 있으며, 사띠는 ‘알아차림’, 삼빠잔냐는 지혜의 의미로서 ‘바른 앎’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주장이다. 또한 사띠는 인위적 과정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9) 임승택은 인경이 주장하는 마음챙김의 문제점을 공감하면서, 동시에 인경의 주장에 이견을 제시한다. 서구의 심리학자들이 구축한 mindfulness와 사띠의 의미는 동일하지 않으며, 알아차림은 사띠를 통한 결과로 얻는 것이지 사띠에 알아차리는 인지적 측면은 없다는 설명이다. 사띠의 인지적 측면에 초점을 모으는 입장은 초기불교가 아닌 서구심리치료자들의 견해를 대변하는 것이며, 초기경전을 통해 사띠의 실천에는 의지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마음지킴’이 적절한 우리말 번역어라고 주장한다.


(10) 안양규는 습관적 혹은 기계적 행동을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사띠라고 말한다. 사띠는 염불, 부정관 등의 수행을 통해 기억으로 활용되며, 《염처경》처럼 대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기능도 가지고 있다. 서구의 심리치료에서는 주로 ‘주의’와 ‘관찰’의 의미로서 mindfulness를 활용하기에 ‘주의’ ‘관찰’ ‘기억’이라는 초기불교의 사띠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설명이다. 또한 삼빠잔냐는 관찰된 내용을 통찰하는 것이기에 사띠는 정학, 그리고 삼빠잔냐는 혜학에 포함된다는 주장이다.


(11) 이필원은 일본의 불교학자들이 사띠를 염(念), 기억, 집중, 있는 그대로의 자각, 주의, 알아차림 등으로 번역하고 있으며, 사띠와 위빠사나를 엄밀히 구분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알아차림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짙다고 설명한다. 그는 《숫타니빠타》를 통해 사띠 자체에는 의식, 판단, 사유의 작용이 없다고 한다. 또한 사띠와 삼빠잔냐가 함께할 때는 사띠라는 간단한 알아차림 작용 뒤에 삼빠잔냐라는 명확한 앎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12) 김준호는 초기불교의 사띠와 치유 프로그램의 mindfulness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초기경전이 붓다의 직설이 아닌 부파불교의 산물이라고 보며, 사띠는 사마타와 위빠사나 모두에 사용되기에 위빠사나적인 성격으로 활용될 때는 ‘알아차림’, 사마타에서는 ‘주의집중’이 적절하다고 한다. 또한 사띠와 함께하는 삼빠잔냐에 대해서는 지혜로 연결되지만 지혜 자체와는 다르다고 설명한다. 그는 불교수행의 핵심은 사띠나 삼빠잔냐보다도 계정혜의 삼학에 있음을 강조한다.


(13) 김정호는 심리학자의 입장에서 사띠를 이해한다. 사띠는 일반적 주의와는 다른, 욕구나 생각이 없는 순수한 주의이며, 일반적 주의에 주의를 주는 초주의(meta-attention)라고 표현한다. 그는 마음챙김이라는 번역에 동의하면서, 사띠를 치료법으로 적용하는 사람들은 mindfulness와 사띠를 다르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그는 사띠의 개념을 분명히 하고 현대 요구에 맞는 응용 방법을 개발해야 함을 강조한다.


(14) 마지막으로 권오민은 사띠에 대해 본질[깨달음]과 응용[심신치유]을 구분할 것을 제안한다. 그는 설일체유부, 상좌부, 유가행파의 위치에서 심소와 함께 사띠를 살핀다. 혜에 근거한 알아차림이라고 하든, 염에 근거한 마음챙김이라고 하든 사념처의 온전한 의미를 드러내기 어렵기에 사띠를 정념으로 쓸 수밖에 없으며, 번역은 각자의 몫이라고 한다. 그는 사념처를 유일한 길이라고 번역하는 데 대한 우려와 함께 논사들의 논의를 간과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법보신문〉에서 진행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들은 사띠를 ‘알아차림’ ‘마음챙김’ ‘마음지킴’ ‘주의-관찰’ ‘주의집중’ ‘순수한 주의’ ‘정념’으로 번역했으며, 9명 사이에서 7개의 다른 번역어가 나타났다는 것은 사띠를 번역어로 통일하기에 어려움이 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고 볼 수 있다. 수행자가 대상을 사띠 함에서도 능동적인 노력이 필요한지 아니면 수동적으로 살펴지는지에 대해서도 이견이 나왔다. 삼빠잔냐를 번역함에서도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으로 양분되었고, 삼빠잔냐가 정학의 집중 요소인지, 아니면 혜학의 지혜(paññā) 요소인지에 대해서도 의견은 나뉘었다. 그리고 초기불교의 사띠와 현대심리학의 mindfulness에 대한 논의에서도 위빠사나 수행과 현대 심리치료의 mindfulness 명상을 분리해야 한다는 의견과 동일한 위치로 봐야 한다는 의견으로 양분되었다.


구분       

내용

            

인경         

김재성    

지운      

임승택    

안양규 

이필원 

김준호 

김정호 

권오민

사띠      

알아차림   

마음챙김 

알아차림 

마음지킴 

주의    

관찰    

기억    

正念 

알아차림        

알아차림    

주의집중

 마음챙김 

순수한

주의 

正念

삼빠잔냐 분명한 앎 알아

차림 바른앎 알아

차림 통찰 명확한 앎 알아

차림 × 正知

사띠의 

기능 수동적 능동적 수동적 능동적 × × 능동적 × ×

삼빠잔냐의 

기능 혜학 정학 혜학 정학 혜학 혜학 정학 × ×

위빠사나와minndfulness명상의 관계 같다 다르다 × 다르다 다르다 × 다르다 같다 다르다


5. 대중매체 사띠 논쟁의 과제


언어는 시대와 지역의 산물이다. 〈법보신문〉을 통해 진행된 사띠 논쟁은 초기불교뿐만 아니라, 현대심리학의 mindfulness 활용까지 그 의미와 폭이 상당히 넓었다. 따라서 사띠가 활용되는 문헌을 한정하여 논의한다면 그 의미를 분명히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사료된다. 상좌부불교의 전통 안에서도 니까야와 《위숫디막가》나 주석서의 성립 시기는 1차 결집을 기준으로 1,000여 년이 차이가 나고, 스리랑카의 4차 결집을 기준으로 한다고 해도 600여 년의 차이가 있다. 게다가 후에 만들어진 아비담마적 논서와 현대 수행지도자들의 의견까지 고려한다면, 붓다의 사띠와 현대의 사띠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따라서 사띠와 삼빠잔냐의 다양한 해석을 나열하기보다 시대적 구분에 따른 의미 변화를 살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필자가 이해하는 한 사띠는 아는 힘이 없다. 원하는 대상에 마음이 머물러 자세히 살피는 것이 사띠의 역할이다. 《사띠빳타나 숫따(Satipaṭṭhāna Sutta, 念處經)》의 설명에 따르면, 사띠를 지닌 후에 ‘분명히 안다(pajānāti)’라는 동사가 따로 나온다. 이처럼 사띠와 빠자나띠의 역할은 다르다. 사띠는 대상에 머무르고 살피는 역할을 할 뿐이다. 이러한 이해는 김재성, 임승택의 설명과 유사하다. 따라서 ‘알아차림’과 같이 아는 역할은 사띠의 주기능이라고 보기 어렵다. 사띠를 알아차림으로 번역한 것은 사띠에게 삼빠잔냐 혹은 빠자나띠의 역할을 기대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띠를 알아차림으로 번역하는 것은 문제의 소지가 있다. 뿐만 아니라, 어원적으로 사띠에는 ‘마음’이라는 의미도 ‘챙김’이나 ‘지킴’이라는 의미도 없다. 단지 대상을 주시하는 것이 사띠 본연의 임무이다. 따라서 사띠의 기능적 의미를 강조하여 ‘챙김’ 혹은 ‘지킴’이라고 번역한다면 인경의 주장처럼 해석상의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사띠를 주시(注視)라고 자주 사용하나 한역이라 권장하지 않고 있다. 


사띠를 빤냐로 연결해주는 역할은 삼빠잔냐가 한다. 삼빠잔냐는 ‘삼(sam)’과 ‘빠자나(pajāna)’가 합성된 명사로 ‘알아차림’ ‘분명한 앎(正知)’ 등으로 번역되고, ‘awareness’ ‘clear comprehension’ 등으로 영역된다. 빠알리어 ‘sam’은 ①바르게, 정확히, 분명히, ②전체로써, ③평등하게, 고르게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pajāna’는 ‘빠자나띠’를 기본형으로 ‘분명히 알다’ ‘알다’ ‘이해하다’의 의미를 지닌다. 또한 ‘빠자나띠’는 그냥 아는 것이 아니라 강조나 지혜의 의미를 지니는 ‘pa’와 함께 ‘jānāti’가 합성되어 보다 분명한 알아차림을 나타낸다. 따라서 ‘삼빠잔냐’는 ‘바르게 분명히 아는 것’을 나타낸다. 우리말 번역에서 ‘삼빠잔냐’는 ‘알아차림’ 혹은 ‘분명한 앎’으로 번역되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알아차림’이라는 번역어는 인경이 주장하는 ‘사띠’의 우리말 번역과도 혼용될 수 있는데, ‘사띠’라는 말에는 어원적으로 ‘안다(jānāti)’는 의미가 들어 있지 않다. 하지만 ‘삼빠잔냐’에는 ‘안다’는 의미가 포함된다. 예를 들어, 농부가 땅을 고를 때 호미의 역할이 ‘사띠’라면, 잡석의 많고 적음을 판단하는 일은 ‘삼빠잔냐’에 가깝다. 따라서 ‘앎’의 의미를 지닌 ‘알아차림’은 ‘사띠’보다 ‘삼빠잔냐’에 가깝다. 삼빠잔냐 외에도 대상을 아는 것에는 크게 3가지가 있다. 이들은 ‘산냐(saññā, 想)’ ‘윈냐나(viññāṇa, 識)’ 그리고 ‘빤냐(慧)’이다. 이들은 모두 ‘삼빠잔냐’처럼 ‘jānāti’ 즉 ‘알다’에서 파생된 명사들로 어원적으로 ‘앎’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띠가 이들 ‘삼빠잔냐’ ‘산냐’ ‘윈냐나’ 그리고 ‘빤냐’와 함께할 때는 앎을 포함한다. 이와 같이 사띠는 어떤 것과 함께하느냐에 따라 그 힘이 달라진다. 따라서 사띠를 알아차림이라고 번역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붓다는 사띠를 정학에 포함시키고 있다. 삼빠잔냐 역시 사띠와 함께 정학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정학의 특징 중 하나는 대상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육근을 통해 나타나는 대상이 없다면 사띠와 삼빠잔냐는 활동하기 어렵다. 여기서 삼빠잔냐는 사띠와 빤냐를 연결하는 교량 역할을 한다. 하지만 혜학은 정학과는 다르게 대상이 없는 경우에도 작용할 수 있다. 《삼마딧티 숫따(Sammādiṭṭhi Sutta, 正見經)》의 설명에 따르면 지혜는 삼독심의 잠재 성향마저도 알 수 있다고 한다. 즉, 빤냐는 표면으로 드러나는 삼독심뿐만 아니라, 내재하고 있는 잠재성향마저도 제거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 빤냐는 조건을 파악하는 지혜를 가지고 있기에 대상화되지 않은 숨어 있는 번뇌도 제거할 수 있다. 따라서 삼빠잔냐는 이러한 지혜의 힘을 키워주는 것이지 지혜와 동일한 의미는 아니다. 물론 삼빠잔냐의 폭은 상당히 넓다. 삼빠잔냐는 정학뿐만 아니라, 본격적인 수행이 진행되기에 앞서 예비적인 수행법으로도 소개된다. 《가나까목갈라나 숫따(Gaṇakamoggallāna Sutta)》는 불교수행을 처음 시작하는 초심자를 위한 점진적인 수행의 과정을 설명하며, 본격적으로 오장애를 제거하고, 선정수행을 진행하기 이전에 예비적 수행법으로 삼빠잔냐 수행을 소개한다. 이 경우 삼빠잔냐를 지혜의 범주 안에 넣기에는 무리수가 따른다. 물론 정학을 통해 세 번째 선정의 상태 안에서 삼빠잔냐의 기능이 본격적으로 발휘되기도 한다. 결국 사띠를 알아차림으로 번역하거나 삼빠잔냐를 혜학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은 사띠와 삼빠잔냐 자체의 의미보다, 이들을 통해 기대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또한 인경은 〈법보신문〉을 통해 심리치료에서 사용하는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는 사띠를 포함할 뿐만 아니라 위빠사나와 상응하는 개념이며, 넓은 의미에서 ‘명상’이라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반대로 심리치료의 영역에서 사용하는 마음챙김 명상을 사성제와 삼법인을 통찰하는 위빠사나라고 부르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초기불교의 수행법인 위빠사나를 모태로 하여, 오늘날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마음챙김 명상’ 혹은 ‘알아차림 명상’ 안에도 ‘mindfulness’와 ‘awareness’의 의미가 혼재(混在)되어 있다. 이와 같은 혼용은 불교와 심리학 관련의 모든 분야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심리학자들은 알아차림이 mindfulness의 행위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이기에 마음챙김과 별도의 기능으로 볼 필요는 없다는 입장을 취한다. 또한 심리학자들 사이에서 사띠는 attention으로도 번역되는데 현상에 대한 주의나 집중의 의미를 동시에 내포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 같다. 브라운(Brown)과 라이언(Ryan)이 마음챙김 측정 도구로 개발한 ‘마음챙김 주의 알아차림 척도(Mindful Attention Awareness Scale: MAAS)’의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이들은 마음챙김과 주의 그리고 알아차림을 혼용하여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초기불교의 수행은 다르다. 수행자는 원하는 대상으로 마음을 향하여(manasikāra, 作意), 그 대상을 주시하고(sati), 그 대상을 분명히 알아차리는(sampajañña) 과정을 경험한다. 이들이 모두 동시에 일어나는 것 같지만 서로 다른 내적 기제로 구분된다. 


수행자는 주의 기울임을 통하여 사띠를 얻고, 사띠로 알아차림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알아차림은 지혜로 이끌어준다. 이처럼 초기불교는 수행자의 관찰 과정에 대해 보다 면밀하게 분석하고 있다. 지혜로 이끌어주는 위빠사나 수행은 수행자가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의 진정한 실재를 이해하도록 돕는다. 따라서 심리치료에서 사용하는 mindfulness가 사띠를 포함할 뿐만 아니라 위빠사나와 상응하는 개념이라는 주장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법보신문〉을 통해서 진행된 사띠 논쟁에서는 김재성, 임승택, 김준호의 설명이 초기불교의 가르침과 좀 더 부합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6. 사띠 논쟁의 평가와 의의


지금까지 국내에서 진행된 사띠 논쟁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불교학계에서 진행한 사띠 논쟁은 먼저 사띠의 번역어 문제에 집중했다. 이들 번역어의 대부분은 사띠 자체의 언어적 의미보다 니까야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사띠의 기능적인 측면을 고려한 번역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사띠를 능동과 수동적인 작용으로 구분하기에 앞서, 선정의 위계에 따라 사띠의 수준이 달라진다고 이해하면 해결될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와 같은 사띠의 역어 문제는 자연스럽게 사띠를 통해 진행되는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의 관계 문제로 연결되었다. 학자들의 상이한 주장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연구의 공통점을 찾으려 하기보다 각자의 차이점을 강조하여 독보적인 영역을 확보하려는 듯 보이기도 했다.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의 차제에 대한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사념처와 위빠사나의 관계에 대한 정의가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논거로 삼고 있는 빠알리 니까야와 주석서의 시대적 구분을 전제하고 진행했더라면,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을 더 쉽게 찾을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해본다.


대중매체[법보신문]에서 진행한 사띠 논쟁은 초기불교 전공자들뿐만 아니라, 타 전공자들까지 참여했다. 사띠의 번역에서 인경, 지운, 이필원은 ‘알아차림’, 김재성과 김정호는 ‘마음챙김’, 임승택은 ‘마음지킴’, 김준호와 권오민은 사용 맥락에 따른 차별적 용어 선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삼빠잔냐의 번역에서는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으로 양분되었으며, 사띠가 아는 기능이 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초기불교 전공자와 타 전공자들 사이에 뚜렷한 차이점이 나타났다. 초기불교 전공자들은 사띠와 삼빠잔냐를 구분하려는 경향이 짙었고, 사띠의 심리치료적 기능을 활용하는 연구자들은 사띠에 인지적 기능을 포함하여 폭넓은 의미로 사용하려 했다. 위빠사나와 mindfulness 명상의 상호관계에서도 초기불교 전공자들은 다르다는 차이점을 강조했으며, 심리치료적 입장의 연구자들은 동일한 상태로 보려는 경향이 강했다. 물론 붓다의 사띠와 현재의 사띠는 그 활용에서 차이점이 나타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사띠와 삼빠잔냐의 해석을 위해서는 함축적 의미에 집중하기보다 용어 자체의 언어적 의미에 대한 논의가 선행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지금까지 진행된 사띠 논쟁은 불모지와도 같았던 국내 빠알리 원전 연구의 반석이 되었으며, 동시에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 연구가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사띠 논쟁에 참여한 연구자들의 노력에 의해 초기불교와 심리치료의 관계 연구 역시 한층 더 성장하게 되었다. ■


 


정준영 /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불교학과 명상학 전공 교수. 스리랑카 국립 켈라니아대학교에서 위빠사나 수행을 주제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얀마의 명상센터, 스리랑카, 태국과 캐나다 등지에서 수행했다. 주요 논문으로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의미와 쓰임에 대한 일고찰〉 〈상수멸정의 성취에 관한 일고찰〉 〈인간성향에 따른 수행방법 연구〉 등과 저서로 《위빠사나》 《다른 사람 다른 명상》 《어려울 때 힘이 되는 8가지 명상》 《몰입이 시작이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