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불교문화」제16집
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 2013
지눌과 성철의 법맥 및 돈점논쟁 이후 남겨진 과제
김 방 룡(충남대)
국문초록
본고는 1990년대 한국불교계에 큰 쟁점으로 떠올랐던 ‘돈오점수․돈
오논쟁’에 대하여 현시점에서 철학적으로 회고해보고자 하는 것이 목적
이다. 성철이 지눌을 비판하면서 제기한 문제는 ‘한국불교의 법맥’과 ‘돈
오돈수’ 수행법이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문제는 서로 맞물려 있다.
본고에서는 법맥과 돈점문제와 관련하여 쟁점이 된 문제와 더불어 이
것이 그동안의 연구 성과를 통하여 밝혀진 사실 및 남겨진 과제가 무엇
인지를 중심으로 정리하여 보았다. 쟁점을 일으킨 주체를 성철로 상정
하고서, 논쟁의 핵심은 무엇이고 그것이 진행과정상에 있어서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으며, 그로 인하여 남겨진 과제가 무엇인지를 밝히고자
하였다.
법맥의 문제에 있어서 성철이 제기한 ‘임제-태고법통설’은 그 역사적
진실성은 입증할 수 없지만, 현재 조계종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
가 하는 문제와 맞물려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돈오돈수․돈오점수’
논쟁은 그동안 ‘보조의 돈오점수에 대한 성철의 비판이 정당한 것인가’
하는 문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면, 앞으로의 과제는 성철이「선문
정로」에서 제기한 ‘선문의 정로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주목해야 한
다는 점을 주장하였다.
Ⅰ. 서론
선(禪)은 통일신라 말 국내에 유입되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불교
의 큰 부분을 담당해 왔다. 처음 북종선이 유입되기도 하였으나 이후 구
산선문이 형성되는 과정에서는 남종선이 주류를 차지하였다. 고려 광종
당시 법안종이 들어와 유행하기도 하였고, 대각국사 의천 당시에는 천
태종이 선종으로 창종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자현에 의하여 능엄선이
한 때 유행하다가 보조국사 지눌 이후 수선사(정혜결사)의 활약으로 불
교계를 주도하게 되었다. 이후 여말 삼사인 태고보우․나옹혜근․백운
경한에 의하여 임제종의 법맥이 유입되었으며, 조선 중기 서산과 부휴
의 활약으로 문파를 중심으로 그 명맥을 유지해오다가 조선 후기 백파
와 초의 등에 의하여 삼종선․이종선(사종선) 논쟁이 크게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리고 구한말 경허와 용성 등의 선지식에 의하여 근대선의 중
흥이 있어 왔고, 현대 한암, 효봉, 성철 등 수많은 선지식들이 출현함으
로써 새로운 중흥을 누리고 있다.
근현대 한국 선사상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은 경허와 성
철이다. 그리고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영향을 미친 인물은 지눌이다.1)
보조선의 전통을 계승하는 가운데 한국의 선을 새롭게 중흥하려고 했던
인물이 경허, 한암, 만공, 효봉 등이었다면, 성철은 보조선에 대한 철저
한 비판과 배격을 통하여 한국의 선을 중흥하려고 하였다. 지눌과 성철
이 제시한 이론들은 수행과 깨달음의 체험 속에서 나왔으며, 정혜결사
(수선사)와 봉암사결사의 실천을 통하여 한국불교의 큰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는 점에서 강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1) 물론 성철의 경우 지눌을 비판하고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철은 한평생 누
구보다도 지눌을 의식하고 있었으며 보조선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멈추지 않았
다. 그러한 점에서 영향을 미쳤다고 말하는 것이다.
해방 이후 한국불교계는 한동안 비구․대처 간의 분쟁의 소용돌이 속
에 있었고 그 결말은 조계종과 태고종의 분종으로 마무리 되었다. 그리
고 그러한 와중에서 종조논쟁이 있어왔다. ‘보조종조설’, ‘태고종조설’이
조계종 내부에서 양립하는 가운데 1976년 성철은「한국불교 법맥」을 출
간하여 ‘임제-태고법통설’을 주장하고 나왔다. 그리고 1981년「선문정
로」를 출간하여 지눌의 ‘돈오점수설’을 선문의 이단사설로 규정하였다.
이후 10년이 지난 1990년대에 이르러 ‘돈오점수․돈오돈수 논쟁’이 한국
불교(학)계를 뜨겁게 달구었고, 이후 지속적으로 국내와 석학들에 의하
여 이와 관련되거나 파생되어진 논쟁과 연구가 진행되어 오고 있다.
본고의 주제는 ‘지눌과 성철의 법맥 및 돈점논쟁 이후 남겨진 과제’이
다. 1990년대 ‘돈오점수․돈오돈수 논쟁’이 일반인들, 즉 불교인은 물론
비불교인들의 관심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이유는 승가와 학계 및 일반
인들에게 깨침과 닦음에 관한 진지한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20여
년의 세월이 흘러가면서 그러한 열기는 식었지만, 그 논쟁이 함의하고
있는 의미의 중요성과 영향력은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
성철이 지눌을 비판하면서 제기한 문제는 한국불교의 법맥과 ‘돈오돈
수’ 수행법이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문제는 서로 맞물려 있다. 비록 법
맥의 문제보다 돈점논쟁이 학계와 사회의 주목을 더 받았지만, 스승과
제자 간의 사자상승을 중시하는 선종의 입장으로 볼 때 법맥(법통 계승)
의 문제 또한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본고에서는 법맥과 돈점문제와 관련하여 쟁점이 된 문제와 더불어 이
것이 그동안의 연구 성과를 통하여 밝혀진 사실 및 남겨진 과제가 무엇
인지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쟁점이 무엇인가?’하는 문제는 논쟁의 주체
를 누구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로서 관점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여기
에서는 성철이 제기한 문제를 ‘쟁점’으로 전제하고서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이와 관련된 주제로는 이미 1992년에 김호성 교수가 그리고 2003
년도에 이덕진 교수가 발표한 글이 있다.2) 그런데 이덕진 교수가 발표
한 글도 벌써 10년이 지나서 현재의 시점에서 다시 되돌아볼 필요성이
있다 하겠다.
2) 김호성, 돈점논쟁의 반성과 과제 (강건기․김호성 편저,「覺깨달음, 돈오점수
인가 돈오돈수인가, 서울: 민족사, 1992). 이덕진, 頓漸論諍이 남긴 숙제」,「보조
사상」20집, 2003.
Ⅱ. 법맥과 관련된 문제
1. 쟁점과 밝혀진 사실
성철의「한국불교법맥」은 제1부 법맥에 대한 정론, 제2부 거짓 지어
낸 주장들, 제3부 다른 주장에 대한 비판, 제4부 정통선의 이해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3) 성철이 이 책을 저술한 동기는 이 책의 후기를 쓴 원
택의 글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즉 성철은 해인사에 머물기 이전부터
“선종의 전통사상, 특히 임제종의 종풍은 돈오돈수사상이며, 한국불교
조계종의 종조는 태고 보우 국사이다.”라고 천명하였으며, 비구 대처 승
단의 정통성 싸움의 와중에서 태고종이 태고스님을 종조로 모시게 되어
조계종은 다르게 모셔야 한다는 생각에서 몇 몇 학자들에 의하여 보조
종조설이 주창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바로잡기 위한 이론적 저술이 바
로「한국불교법맥」이라고 밝히고 있다.4)
3) 퇴옹 성철,「한국불교의 법맥」, 경남: 장경각, 2000.(초판 5쇄 발행). 이 책은 1976
년 7월 15일 초판 발행된 책이나 본고에서는 5쇄 발행본을 참조하였다.
4) 상게서, pp.387~390.
그렇다면 성철이 이 책에서 주장하고 있는 핵심적 쟁점은 무엇인가?
첫 번째 주장은 ‘사법사에 의하여 법맥을 전수하는 것이 원칙’이란
것이다.
성철은 승가의 스승의 종류를 득도사(得度師: 삭발을 허락하고 계를
주는 스승)와 사법사(嗣法師: 마음을 깨우쳐 법을 이어받게 해주는 스
승)로 구분하고서, 사법사의 계통을 일러 법계(法系)․법맥(法脈)․종통
(宗統)․종맥(縱脈)이라고 말한다.5) 또 이 법맥이야 말로 종문의 생명줄
이라고 말한다.6) 즉 사법사를 통하여 법맥을 정의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5) 상게서, p.11.
6) 상게서, p.19.
두 번째 주장은 ‘임제-태고 법통설이 정론이다’라는 것이다.
성철의 「한국불교법맥」 제1부 법맥에 대한 정론에서 1625년 「편양집」
권2에 수록된 봉래산 운수암 중봉영당기 를 시작으로 이후에 나온 비
문 등을 증거로 하여 ‘(중국) 보리달마 … → 조계혜능 … → 임제의현
… → 석옥청공 → (한국) 태고보우 → 환암혼수 → 구곡각운 → 벽계정
심 → 벽송지엄 → 부용영관 → 서산 휴정․부휴 선수’등으로 이어지는
법통이 한국불교법맥의 정론임을 주장한다.
세 번째 주장은 ‘기타 법통설은 허구이다’라는 것이다.
성철의 한국불교법맥 제2부에서 ‘굴산-보조종통설’, ‘임제-보조종통
설’, ‘부휴파 백암성총의 보조 계승설’, ‘보조가 대혜를 염향하여 사법을
계승했다는 설’, ‘보조와 관련된 법신종승설(보조)’, 포광과 퇴경의 ’태고
이전에는 득도사를 기준으로 하여 도의의 법통을 계승하였고, 태고 이
후에는 사법사를 계승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설’ 등은 모두 허구라
고 주장한다.
성철이 제기하고 있는 이 세 가지 쟁점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첫째, 득도사와 사법사의 문제는 선종의 성격을 분명히 드러내 주는
장점이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보면 분명 성철의 지적대로 이불화
등의 ‘보조 종조설’은 사법전등에 맞지 않는다.
그러나 중국과 한국의 불교는 인도불교와 달리 국가에 의하여 불교교
단이 관리되는 체계로 되어 있다. 승관제도가 그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조선 초기까지 불교의 교단이 국가의 관리 체계에 있을 때
에는 득도사가 중시되어 왔으며, 이후 불교교단이 해체되면서 득도사의
중요성이 사라지면서 새롭게 문파중심의 교단이 불가피하게 운영되어
왔다. 사법사가 중요하게 대두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 상황의 불가피성
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신규탁 교수는 성철이 ‘깨달음의 계보’를 중요한 원칙으로 제시하면서
태고법통설을 지적하였지만 결과적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른 주장을 폈
다는 점에 동의하면서도 다음과 같이 성철의 입장을 변호하고 있다.
"여기서 해석의 문제가 제기된다. 필자는 이런 ‘치명적 오류’가 옳은 지
적이라면, 이것이야말로 퇴옹 선사는 종교적인 권위를 ‘깨달음의 계보’에
서 증거하려는 선승이며, 이 점은 인간적인 연결에 의한 권위를 부정하
는 이른바 종법제(宗法制)로부터의 탈피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의 이러한 의도는 임제 선풍을 통하여 한국 선 불교의 수행전통을 다시
세우고자 한 간절한 서원이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둘째, ‘임제-태고법통설’은 성철의 주장대로 정론일까? 법통설이 확립
된 것은 조선 중기 서산의 제자인 편향 언기의 문도들과 부휴의 문도들
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이 역사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1640년
혜안(海眼)이 찬한「유명조선국 자통광제존자 사명당송운대사행적」에
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못난 제자인 혜안은 오석령의 망주정의 변두리 말석에 앉은 보잘 것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사명)대사의 적통 제자인 혜구와 단헌 등이 전
국의 승려들과 서로 상의하여 말하기를 “청허는 능인(부처님)의 63대이
며, 임제의 25세 직계 자손이다. 영명은 곧 법안종의 승려이고, 목우자
(지눌)는 곧 별종의 승려이며, 강월헌(나옹)은 평산에게서 분파된 것이
다. 본 비(허균이 지은 사명당비)에는 우리 스승이 임제로부터 전해진
순서가 잘못되어 있으니, 만일 후세의 지혜에 눈이 멀고 귀가 먹은 자들
이 오래도록 이렇게 전한다면 눈과 귀를 놀라게 할 일이 어찌 없겠는가?”
하였다. 비록 혜안이 비록 외손의 변변치 못한 입장이나 또한 굳건하게
적는 직필이긴 하다. 이 비를 가지고 와서 제삼 청한 까닭으로 옮겨 적는
다."7)
7) 海眼撰, ‘有明朝鮮國慈通廣濟尊者四溟堂松雲大師行蹟’ (「韓國佛敎全書」권8, p.75
上~中) “秖如小弟子海眼烏石嶺望洲亭邊末席下穢滓者也. 而大師之室中節適弟
子惠球丹獻等與入表黌侶相爲之議曰. 淸虛是能仁六十三代臨濟二十五世直孫
也. 永明則法眼宗也. 牧牛子則別宗也. 江月軒則分派於平山本碑中吾師之傳於臨
濟昭穆失次若後世盲聾乎智者愈久而愈傳無乃有駭耳目者乎. 以海眼雖乏外孫
虀臼且有董狐直筆持其本碑再三爲請故.”
위의 혜안의 기록은 사명의 문도들에서 허균이 지은 ‘영명 → 지눌 →
나옹’으로 이어진 법통설을 폐기하고 편양의 문도들과 합의 하에 임제-
태고법통설을 확정하였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왜 사명의 문도들이 기
존의 법통설을 폐기한 것일까? 여기에는 지눌과 나옹이 영명의 법안종
선사일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또 임제-나옹-서산의 법통설을 제기할
수도 있었으나 나옹의 경우 중국에서 평산 처림과 지공화상으로부터 법
맥을 들여왔으므로 곤란한 점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임제-태고법통설’
은 혜안 이후에 이 땅에 정착하였음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또 다른 중요한 사실 하나는 ‘서산 스스로 어떠한 법통관을 가지고 있
었는가?’ 하는 점이다. 서산의 기록에 의거해 보면, 그 스스로「벽송당
대사행적(碧松堂大師行蹟)」과「부용당선사행적(芙蓉堂先師行蹟)」그리
고「경성당선사행적(敬聖堂禪師行蹟)」등을 저술하였다. 서산은 ‘완산
노부윤에게 올리는 글’에서 “일선대사(경성)를 수계사(受戒師)로 삼고,
석희법사와 육공장로와 각원상좌를 증계사(證戒師)로 삼았으며, 영관대
사(부용)를 전법사(傳法師)로 삼고 숭인장로를 양육사(養育師)로 삼았
다.”고 밝히고 있다.8)
8) 休靜,「淸虛集」권7, ‘上完山盧府尹書’, (「韓國佛敎全書」권7, p.720下) “以一禪大
師爲授戒師. 以釋熈法師六空長老覺圓上座爲證戒師. 以靈觀大師爲傳法師. 以崇仁
長老爲養育師也.” 일반적으로 승려의 득도시에는 三師七證의 원칙에 의하여 이
루어진다.
또「벽송당대사행적」과「경성당 선사행적」발문에 다음과 같은 기록
이 보인다.
"(벽송 지엄은) 먼저 연희교사를 찾아가 원돈교의를 물었고, 다음으로
정심선사를 찾아가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을 격발하여 현묘한 뜻을 함께
떨쳤으니 깨달음에 이익 되는 바가 많았다. 정덕 무진 가을에 금강산 묘
길상에 들어가「대혜어록」을 보다가 ‘개에게 불성이 없다.’는 화두에 의
심을 품어 오래지 않아 칠통을 타파하였다. 또한「고봉어록」을 보다가
‘다른 세상으로 날려버려야 한다.’는 말에 이르러 이전의 견해를 한꺼번
에 떨구었다. 그러므로 대사께서 평생 발휘한 것은 고봉과 대혜의 선풍
이다. 대혜화상은 육조대사의 17대 적손이고, 고봉화상은 임제선사의 18
대 적손이다. 아아, 대사께서는 (중국의) 바다 밖에 있는 사람으로서 은
밀하게 오백년 전의 종파를 이어왔으니 마치 정자(정이천)나 주자(주렴
계)가 천년 뒤에 멀리 공자와 맹자의 실마리를 이어온 것과 같으니, 유
교와 불교나 도를 전하는 것은 한 가지이다."9)
9) 休靜,「碧松堂大師行蹟」(「韓國佛敎全書」권7, pp.752中~753上) “先訪衍熈敎師
問圓頓敎義次尋正心禪師擊西來密旨俱振玄妙多所悟益. 正德戊辰秋入金剛山
妙吉祥看大慧語錄疑着狗子無佛性話不多時日打破漆桶. 又看高峯語錄至颺在
他方之語頓落前解. 是故師之平生所發擇者乃高峰大慧之風也. 大慧和尙六祖十
七代嫡孫也. 高峰和尙臨濟十八代嫡孫也. 吁師以海外之人密嗣五百年前宗派
猶程朱軰 生乎千載之下遠承孔孟之緖也儒也釋也傳道則一也.” : 박해당,「조계
종의 법통설에 대한 비판적 검토」,「철학사상」11집, 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2000, p.56 참조.
법으로써 파를 논하자면 벽송선사는 (나의) 할아버지이고, 부용선사
는 아버지이며, 경성선사는 삼촌이다.10)
10) 休靜,「敬聖堂禪師行蹟」(「韓國佛敎全書」권7, p.757中) “況以法論派則碧松祖
也芙蓉父也敬聖叔也” : 박해당, 조계종의 법통설에 대한 비판적 검토 ,「철
학사상」11집, 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2000, p.56 참조.
위의 인용문을 통해 보면 서산이 의식하고 있는 자신의 법통의 계보
를 유추할 수는 있다. 그의 원칙은 ‘전법사를 통한 계승’과 ‘사법전수(嗣
法傳受)의 허용’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으며, ‘임제의현 → 대혜종고․
봉원묘 → 벽송지엄 → 부용영관 → 청허휴정’으로 이어지고 있다.
셋째, 기타 법통설은 허구라는 주장을 살펴보면, 성철이 지적한 바와
같이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본다면 위에서 나열한 다양한 법통설은 모두
후대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점은 성철이 주장한
‘임제-태고 법통설’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또한 ‘보조-종조설’을 주장하
는 입장에도 구산선문 이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로 이어진 한국선의 정
체성을 확보하려는 당위가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2. 남겨진 과제
박해당 박사는 조계종의 법통설에 대한 비판적 검토 11)를 통하여
성철의 주장이 엄밀한 의미에서 역사적 진실성을 가지지 못하다는 점을
밝힌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철의 지적대로 조선후기 월저의 제
자인 사암 채영이 1764년「해동불조원류」를 작성한 이후, 선승들 사이
에서 ‘임제-태고 법통설’이 공론으로 유통되어 온 것은 사실이다. 조계
종과 태고종의 분립과정에서 보조를 종조로 해야 한다는 논이 있었을
때 태고종 쪽에서 ‘환부역조’한다고 공격한 사실을 상기해 보면, 성철의
‘임제-태고 법통설’의 주창은 조계종의 정체성 문제와 사상적으로 보조
의 돈오점수, 화엄선적 경향성에 대한 비판 내지 극복의지가 반영되어
있다.
11) 박해당,「조계종의 법통설에 대한 비판적 검토」,「철학사상」11집, 서울대 철학
사상연구소, 2000.
물론 선종에 각 종파에 있어서 법통설의 확립은 ‘이심전심’의 법맥전
수를 통하여 존립근거를 확보하는 선종의 특성상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
립하는 중요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정통’과 ‘비정통’의 구분은 자
신의 입장에서 바라본 것이어서 상대적인 가치를 띠는 것이지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해방이후 비구-대처 간의 분쟁의 와중에서 성철이 ‘임제-태고 법통설’
을 주창하고 나선 것은 한국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절박함
이 묻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철의 ‘임제-태고 법통설’에는 몇 가
지 난제가 도사리고 있다.
첫째, 한국 선종사를 돌아보면 법통설을 확정하는 문제는 상당한 어
려움이 있다. 그것은 ‘스승과 제자 간의 인가’를 전제로 한 것이 법통전
수라고 한다면, 인가를 해준 스승과 인가를 받은 제자 사이의 분명한 기
록과 증거가 있어야 할 터인데, 그것이 불문명하기 때문이다. 이는 가까
이 경허와 성철의 경우에도 뚜렷한 인가 사실을 확인할 수 없다는 점에
서 확인된다.
둘째, 설사 법통의 계보가 사실이라 하여도, 스승과 제자 간의 깨침의
내용, 선의 가풍, 교에 대한 입장 등이 동일하게 전수된 것이어야 하는
데 각 선사들 사이에 동일성이 확보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태
고와 서산 및 경허와 성철의 경우에 있어서 각각의 선풍과 선교관 등이
동일하지 않음에서도 알 수 있다.
셋째, 원나라 지배기 중국의 임제종에 속하는 석옥 청공으로부터 태
고 보우에게 법맥이 이어져 지금의 조계종이 성립하였다면 조선시대 이
전의 한국불교 전통과는 단절이 되는 문제를 안고 있다. 한국의 불교가
삼국시대에 들어와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 찬란한 문화를 이루었는데,
이 같은 한국불교의 전통을 무시하고 원나라 시기 중국 임제종의 법맥
을 이어와 지금의 한국불교가 성립되었다는 해석이 되는 것이다.
넷째, 현재 한국에는 조계종 말고도 수많은 종파가 존재한다. 그런데
조계종은 나말여초 구산선문이 들여와 선종과 교종을 모두 아우르는 통
불교의 계승자임을 자처하고 있다. 만약 성철의 입장을 고수한다면 조
계종은 간화선을 종지종풍으로 하는 임제종의 법맥을 계승한 선종으로
한정될 수밖에 없게 된다.
다섯째, 성철은 조계종의 정통성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조계종의 종
헌에서 종조를 태고보우로 하거나 적어도 ‘고려 보조국사의 중천을 거
쳐’ 대목을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철이 불교
사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선종의 5가 7종의 종풍이 모두 육조혜능의 사
상을 계승하고 있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즉 임제종의 종파로서 조
계종의 성격을 규정하지는 않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보면 하택
종과 법안종 등의 성격과 친밀성을 가지고 있는 보조의 선사상을 문제
삼는 것은 설득력이 약한 측면이 있다.
Ⅲ. 돈점 논쟁과 관련된 문제
최근 강경구 교수는「禪門正路」문장인용의 특징에 대한 고찰 12)을
통하여,「선문정로」에서 성철이 문장을 인용하는 경우에 일반적인 직접
인용 외에 문맥 및 의미의 조절, 생략, 추가, 수정, 문장의 재구성 등과
같은 주목할 만한 특징들이 발견된다고 주장하고 이러한 사례들을 상세
히 고찰한 바 있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문장인용에 그러한 학문적인 비
엄밀성이 발견된다 해서 그것이 진리와 수행에 대한 안목의 부재가 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12) 강경구,『「禪門正路」문장인용의 특징에 대한 고찰』,「동아시아불교문화」제15
집, 부산: 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 2013.
그렇다면 선사(禪師)의 ‘학문적 비엄밀성’은 비판의 대상에서 제외해
야 하는 것일까? 김호성 교수는 “보조국사의 깨달음이 그가 남긴 저술
속에 담겨져 있지는 않은 것처럼 성철스님의 깨달음도「선문정로」에 담
겨 있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은 그 속성상 문자와 언어 속에 담길 수 없
기 때문이다.”라고13) 말하고서 다음과 같은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13) 김호성,「돈점논쟁의 반성과 과제」, 강건기․김호성 편저,「覺깨달음, 돈오점수
인가 돈오돈수인가」, 서울: 민족사, 1992), p.15.
"깨달음은 절대적이다. 보조국사의 저술이나「선문정로」가 어느 한쪽으
로부터의 비평을 면치 못하는 것은 그것이 절대적인 깨달음이 아니라 깨
달음을 상대화시키는 언어와 문자를 빌리고 있기 때문이고, 더욱이 ‘사람
의 차원’에서 행하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 言表됨으로써 갖게 되는
숙명적인 주관성은 주관과 주관의 만남, 즉 비평을 통해 間主觀的으로
극복할 수 있을 뿐이다. 보조국사나 성철스님이 깨달은 깨달음은 시공을
초월하는 것이겠지만, 그분들의 학문적 견해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
는다. 텍스트에 대한 무오류성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학문적 차원에서
비평되고 또 되어야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14)
14) 상게서, p.16.
논자 또한 김호성 교수의 견해에 공감한다. 만약 성철이 저술한「선
문정로」의 문장인용에 학문적 비엄밀성이 발견되었다면 이는 분명 비판
의 대상이 될 수 있고, 그러한 내용을 근거로 제기된 주장은 타당성이
경감되거나 상실될 수 있는 것이다. 신규탁 교수는 “‘선의 체험’과 ‘機緣’
은 서로 다른 영역일 뿐만 아니라, 그에 접근하는 방법도 다를 수밖에
없다. 깨달음 자체가 수행의 영역이라면, 선서의 해석은 문헌학 내지는
인문학의 영역이다.”라고15) 말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경구 교수가 “수행에 대한 안목의 부재가 될 수 없다는 점
을 분명히 한다.”고 말한 것은, 성철의 깨달음의 세계를 학자의 입장에
서 왈가불가 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으로 보인다. ‘禪’은 언어를
떠난 세계이지만 ‘禪學’은 분명 언어와 사량의 세계이다. 그래서 선학자
들은 항상 ‘선’과 ‘선학’ 사이에 가로막힌 거대한 벽 앞에서 고뇌하지 않
을 수 없다. 또 체험에서 우러나온 선사들의 주장의 외피에 쌓인 권위에
도전하기가 쉽지 않다.
15) 신규탁,「中國禪書의 飜譯을 위한 文獻學的接近(1)」「백련불교논집」1, 백련불
교문화재단, 1991, p.174.
돈점논쟁은 1981년 성철이「선문정로」를 출간한 것을 계기로 출발하
였다. 1987년 ‘보조사상연구원’이 개원되어 1990년 깨달음과 닦음을 주
제로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촉발되었다. 이에 대한
논문들이「보조사상」제4집에 실려 있다.16) 이듬해인 1991년에는 해인
사측에서 ‘백련불교문화재단’에 연구기관을 설립하여「백련불교논집」을
발간을 지원하였고, 이에 힘입어 돈점논쟁이 가열화 되었다.
16) 이 책에 실린 내용을 중심으로 하여 1992년에 강건기․김호성 편저의「覺깨달
음, 돈오점수인가 돈오돈수인가」가 민족사에서 출간되었다.
그런데 지난 ‘돈오돈수․돈오점수’ 논쟁사를 되돌아 보건대, 성철이
「선문정로」에서 제기한 쟁점의 과녁이 정확히 일치하고 있는 것은 아니
다. 이는 문제를 제기한 성철의 입장에서 그를 지지하는 선승이나 혹은
학자들에 의하여 논쟁이 주도된 것이 아니라, 이를 비판하는 보조선의
연구자들에 의하여 논쟁이 출발되어진 데에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인
다.
성철은「선문정로」의 서언에서 “정법상전(正法相傳)이 세구연심(歲久
年深)하여 종종 이설이 횡행하여 조정(祖庭)을 황폐케하므로 노졸(老拙)
이 감히 낙초자비(落草慈悲)를 운위할 수는 없으나, 만세정법(萬世正法)
을 위하여 미모(眉毛)를 아끼지 않고 정안조사(正眼祖師)들의 수시법문
(垂示法門)을 채집(採集)하여 선문의 정로를 제시코자 한다.”고17) 밝히
고 있다. 즉 선문의 정로를 분명히 밝히고, 선문의 이단을 분명히 가려
내어 조정(祖庭)에서 잘라내고자 하는 것이 저술의 핵심적 의도였다. 따
라서 성철이 제기한 쟁점은 선문의 정로와 이단에 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7) 성철,「선문정로」, 경남: 장경각, 1990(초판 3쇄 발행). 이 책은 1981년 2월 15일
초판 발행된 책이나 본고에서는 3쇄 발행본을 참조하였다.
1. 쟁점
「선문정로」의 첫 번째 쟁점은 ‘선문의 정로는 무엇인가?’하는 것이
다. 이는 서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선문은 견성(見性)이 근본이니 견성은 진여자성(眞如自性)을 철견(徹
見)함이다. 자성은 그를 엄폐한 근본무명 즉 제8아뢰야식의 미세망념이
영절(永絶)하지 않으면 철견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선문정전(禪門正傳)
의 견성은 아뢰야의 미세가 멸진(滅盡)한 구경묘각(究竟妙覺) 원증불과
(圓證佛果)이며, 무여열반(無餘涅槃) 대원경지(大圓鏡智)이다.
이 견성이 즉 돈오(頓悟)이니, 오매일여(寤寐一如)․내외명철(內外明
徹)․무심무념(無心無念)․상적상조(常的常照)를 내용으로 하여 십지등
각(十地等覺)도 선문의 견성과 돈오가 아니다. 따라서 오후보림(午後保
任)은 구경불과(究竟佛果)인 열반묘심(涅槃妙心)을 호지(護持)하는 무
애자재의 부사의대해탈(不思議大解脫)을 말한다.
견성의 방법은 불조(佛祖) 공안(公案)을 참구(參究)함이 가장 첩경이
다. 불조 공안은 극심난해(極深難解)하여 자재보살(自在菩薩)도 망연부
지(茫然不知)하고 오직 대원경지(大圓鏡智)로써만 요지(了知)하나니 공
안(公案)을 명료(明了)하면 자성을 철견한다. 그러므로 원증불과(圓證佛
果)인 견성을 할 때까지는 공안 참구에만 진력하여야 하나니, 원오(圓
悟)가 항상 공안(公案)을 참구하지 않음이 대병(大病)이라고 가책(苛責)
함은 이를 말함이다.
공안을 타파하여 자성을 철견하면 삼신사지(三身四智)를 원만증득(圓
滿證得)하고 전기대용(全機大用)이 일시에 현전(現前)한다. 이것이 살활
자재(殺活自在)하고 종횡무진한 정안종사(正眼宗師)이니 정안이 아니면
불조의 혜명(慧命)을 계승하지 못한다. 마조(馬祖) 제자 80명 중에 정안
은 수3인이라고 황벽(黃檗)이 지적함과 같이 정안은 극난(極難)하다. 그
러나 개개가 본래 비로정상인(毘盧頂上人)이라 자경자굴(自輕自屈)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하면 정안을 활개(豁開)하여 출격대장부(出格大丈夫)가
되나니 참으로 묘법(妙法) 중 묘법이다."18)
18) 상게서, pp.2~3.
두 번째 쟁점은 ‘선문의 이단은 무엇인가?’하는 점이다.
"무릇 이설(異說) 중의 일례는 돈오점수(頓悟漸修)이다. 선문의 돈오점
수 원조는 하택(荷澤)이며, 규봉(圭峯)이 계승하고 보조가 역설한 바이
다. 그러나 돈오점수의 대종(大宗)인 보조도 돈오점수를 상술한 그의
절요(節要) 벽두에서 “하택은 지해종사(知解宗師)니 비조계적자(非曹
溪嫡子)”라고 단언하였다. 이는 보조의 독단이 아니고 육조(六祖)가 수
기(授記)하고 총림(叢林)이 공인한 바이다. 따라서 돈오점수사상을 신봉
하는 자는 전부 지해종도(知解宗徒)이다."19)
19) 상게서, p.3.
"원래 지해는 정법을 장애하는 최대 금기이므로 선문의 정안종사들은
이를 통렬히 배척하였다. 그러므로 선문에서 지해종도라 하면 이는 납승
(衲僧)의 생명을 상실한 것이니 돈오점수 사상은 이렇게 가공한 결과를
초래한다."20)
20) 상게서, pp.3~4.
성철은「선문정로」의 서언에서 선문의 대표적인 이단으로 ‘하택 –
규봉 - 보조’로 규정하고 그 핵심 사상을 돈오점수 그리고 이들의 사상
을 따르는 자를 ‘지해종도’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그 이유를 본문에서 상
세히 밝히고 있다. 그 중 핵심적인 내용을 간추려 소개하면 다음과 같
다.
* 견성은 현증원통(現證圓通)한 구경각이므로, 십신초위(十信初位)를
내용으로 하는 해오(解悟)인 돈오(頓悟)는 견성이 아니다.21)
21) 상게서, p.159.
* 선문의 견성은 원증무념(圓證無念)이요, 교가의 돈오는 해오유망(解
悟有妄)이다. 따라서 견성은 영단삼세(永斷三世) 해오는 미진육추(未盡
六鹿), 견성은 망멸증진(妄滅證眞) 해오는 번뇌여전(煩惱如前), 견성은
빙소수융(氷消水融) 해오는 식빙전수(識氷全水), 견성은 돈초지위(頓超
地位) 해오는 점역계급(漸歷階級), 견성은 보림무심(保任無心) 해오는
점제망상(漸除妄想), 이렇게 내용이 상반된 선문의 원증견성과 교가의
해오돈오를 동일하다고 주장함은 논리의 자살이다.22)
22) 상게서, pp.178~179.
* 돈오점수를 내용으로 하는 해오(解悟)인 원돈신해(圓頓信解)가 선문
의 최대의 금기인 지해(知解)임을 명지하였으면 이를 완전히 포기함이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므로 선문정전(禪門正傳)의 본분종사(本分宗師)
들은 추호의 지해도 이를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을 단절하는 사지악해
(邪知惡解)라 하여 철저히 배격할 뿐 일언반구도 지해를 권장하지 않았
다. 그러나 보조는 규봉(圭峯)의 해오사상(解悟思想)을 지해라고 비판하
면서도 절요 ․원돈성불론 등에서 해오사상을 연연하여 버리지 못하고
항상 이를 고취하였다. 그러니 보조는 만년에 원돈신해(圓頓信解)가 선
문이 아님은 분명히 하였으나, 시종 원돈사상을 고수하였으니 보조는 선
문의 표적인 직지단전(直旨單傳)의 본분종사가 아니요, 그 사상의 주체
는 화엄선(華嚴禪)이다. 선문은 증지(證智)임을 주장한 결의론의 결미에
서 원돈신해인 참의문(參議門)을 선양하였으니, 보조의 내교외선(內敎外
禪)의 사상은 여기에서도 역연하다.23)
23) 상게서, p.214.
2. 논쟁의 과정
이러한 성철의 문제 제기는 한국선의 정체성에 대하여 분명한 입장을
천명한 것으로서 한국선종사에 있어서도 기념비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
다. 그런데 엄밀한 입장에서 보면 현대 한국조계종의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이며, 그 주체는 선원수좌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순리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에 대하여 당시 선원수좌들 내부에서 목숨을 건 논쟁이 있어야
했다. 특히 깨달은 혹은 깨달았다고 주장하는 선승들 사이에서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치열한 법거량이 전개되어야 했다. 그러나 공개적
으로 그러한 논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설사 내부적으로 그러한 논쟁이
있어다 하더라도 대사회적인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성철은 1981년 조계종의 7대 종정으로 추대되어 1993년 열반에 들 때
까지 종정의 위치에 서 있었다. 그의 ‘돈오돈수’의 수증론 많은 수좌들에
게 철칙으로 받아들여지긴 하였지만, 조계종의 종단적 합의를 이끌어내
는 데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법정은 돈점논쟁을 게재한「보조사상」제4
집의 책 머리에 에는 성철의 돈오점수설에 대하여 간접적인 비판을 제
기하고 있다.
"깨달음(悟)과 닦음(修)은 독립된 체험이나 현상이 아니라 상호 보완한
다. 닦음 없이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고, 깨달음에 의해 닦음은 더욱 심
화될 수 있다. … 한꺼번에 단박 깨닫고 단박 닦는다(頓悟頓修), 혹은
더 닦을 것이 없는 깨달음, 말은 그럴 듯하지만 삶의 진실에서 벗어난 주
장이다. 불교의 교조 불타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도 그 전이나 다름없이 한결같이 닦음에 게으르지 않았다는 점을 우
리는 착안해야 한다. 닦음(修行)을 어떻게 일시에 마칠 수 있단 말인가?
중생계, 즉 사회적 의무와 나누어 가짐에 끝이 없는데 수행의 완성을 어
찌 일시에 이룰 수 있겠는가.
솔직히 말해서, 개인적으로는 종파주의적인 종교에는 관심이 없다. 또
한 어느 한 쪽 주장만을 가지고 전체인 것처럼 내세우는 분파주의적인
불교에도 관심을 갖고 싶지 않다. 종파주의나 분파주의에 집착할 경우,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아집으로 인해 전체를 바로 보지 못하고 맹목에 사
로잡힐 위험이 따르기 때문이다."24)
24) 법정, 책 머리에 ,「보조사상」제4집, 서울: 보조사상연구원, 1990.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법정은 성철의 돈오돈수설 제기에
대하여 ‘종파주의와 분파주의적인 불교’의 범주로 이해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 하나 주목해볼 내용은 2005년 조계종 선원수좌들이 주축이
되어 간행한「간화선」이다. 이 책은 조계종이 종단적 차원에서 처음으
로 내놓은 간화선의 지침서로서 현 조계종 선원수좌의 입장을 잘 알 수
있다. 전체의 구성은 제1부 기초 단계, 제2부 실참 단계(공부 단계), 제3
부 깨달음의 세계 등으로 되어 있다. 이 중 제3부 제2장 깨달음의 세계
에는 ‘돈오돈수와 돈오점수란?’이란 항목이 나온다. 우선 그 내용을 소
개해 본다.
"돈점의 문제는 깨침과 닦음에 대한 설명이다. 일찍이 “어떻게 깨닫는
것인가?”하는 문제를 두고 남돈북점(南頓北漸)이라 하여, 육조 혜능 선
사의 남종선에서는 돈오를 신수선사의 북종선에서는 점수이오(漸修而
悟), 즉 점오를 주장했다.
돈오돈수와 돈오점수가 있다. 돈오돈수란 단박에 깨치는 순간 더 이상
닦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요, 돈오점수란 단박에 깨달았더라도 미세한 습
기가 남아 있기에 점차 더 닦아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25)
25)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 전국선원 수좌회 편찬위원회편,「간화선」, 서울: 대
한불교 조계종교육원, 2005, p.392.
이는 성철이 선문의 정설로 제기한 ‘돈오돈수’가 선원수좌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것은 아니라는 단적인 증좌이다. 이미 돈오돈수․돈오점수
논쟁이 상당히 전개된 상황을 감안한다면, 이렇게 원론적인 수준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리둥절하다. 이에 대해 가능한 해석은 하나
는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의 장점을 모두 살리자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
는 논쟁에 말려들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성철의「선문정로」에 대한 논쟁을 촉발시킨 것은 송광사의 후원아래
1987년 보조사상연구원이 개원되고, 1990년에 순천 송광사에서 보조사
상연구원의 주최로 ‘불교사상에서의 깨달음과 닦음’이라는 주제로 한 국
제학술대회이다. 이 학술대회에서 주된 관점은 성철에 의하여 이단으로
단죄된 보조의 돈오점수설에 대한 구명작업과 더불어 보조사상의 특징
과 의의를 바로 드러내는 데에 있었다. 이 학술대회는 크게 성공하여 사
회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런데 되돌아보면 선원수좌 내부에서
무차대회 형식으로 일어났어야 할 사안이 학자들의 논쟁으로 전이된 것
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논쟁에 있어서 선승들이 학자들을 능가하기는 힘이 든다. ‘돈오돈수․
돈오점수’ 논쟁은 이후 성철의 의도와는 다르게 전개되어 갔다. 즉 ‘선문
의 정로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방점이 찍히기 보다는 ‘보조의 돈오
점수설은 선문의 이단이 아니다’란 문제에 방점이 찍히게 되었다. 따라
서 논쟁의 초점이 성철의 보조 비판에 대한 부당성에 대하여 맞추어졌
고, 그러한 과정에서 보조선에 대한 심도 깊은 연구가 다양하게 전개되
었다. 도대현 박사가「성철선사상」에서 “성철의「선문정로」가 출간된
이래, 그동안 학계의 논의는 성철선사상 전반에 대한 연구보다는 주로
보조선(普照禪)을 중심으로 한 돈점문제에 치우쳐 왔다. 따라서 돈오돈
수나 돈오점수 어느 한 쪽의 논리적 모순이나 오류에 관심을 두어, 성철
의 돈오돈수론과 중도(中道) 견성관(見性觀)이 지닌 진정한 의미를 파
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고26) 한 지적은 일리가 있다.
26) 도대현,「성철선사상」, 서울: 운주사, 2011, p.17.
1991년에는 해인사측에서 ‘백련불교문화재단’에 연구기관을 설립하고
성철의 선사상을 선양하려고 하였지만, 이미 논쟁의 주요쟁점은 도대현
의 지적대로 보조선을 중심으로 한 돈점문제에 치우쳐 있었다. 또「백
련불교논집」을 발간을 지원하였지만, 성철의 선사상을 통하여 한국의
불교계를 새롭게 하고자 하는 성철 문도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는 못하
였다.
‘돈오돈수․돈오점수 논쟁’의 주된 흐름은 선문의 정로와 이단을 가르
는 문제보다는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두고 보조선의 전통과 회통성을 계
승할 것인가? 아니면 임제선의 법맥을 토대로 한 성철의 선사상을 통하
여 새롭게 정립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변형되어 전개되었다.
목정배 교수는 선문정로의 근본사상 에 대하여 발표하였는데, 결론
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퇴옹이 선의 순수성, 전통성을 구현하기 위하여 보조국사에다 겨냥하
여 살펴 볼 것은 진리를 구현하려는 일념에서 비롯한 것이지 어느 누구
를 포폄하기 위한 것은 아닐 것이다. 보조국사가 고려시대에 조계선을
중흥하는데 그 공로가 지대하다 하더라도 원증돈오(圓證頓悟)와 거리가
있다면 수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울러 철두철미한 퇴옹의 정문적(正門
的) 선관이 한국의 남승들에 실수궁행(實修躬行)될 때 한국불교는 참다
운 선불교로 지향하는 분기점이 될 것이다."27)
27)「보조사상」제4집, 전게서, p.492.
이에 대하여 故심재룡 교수는 논문의 내용을 15가지로 요약한 후 조
목조목 반박을 하고 있는데, “불교의 몰역사성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법
맥의 적통을 내세우는 유사-역사적 의식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라
고28) 반박한다. 또 “이제 순수 적통을 내세우는 퇴옹은 대승의 대기방
편을 어디다 두고 맨날 영원의 노래로 우치한 중생을 호되게 꾸짖기만
하는지? 보조의 사상적 전환이라는 또 하나의 신설(新說)을 신설한 퇴
옹은 거기에 덧붙여 이제까지 한국불교의 전통이라는 회통성을 뒤엎고
중국선사(마조계열의 선) 순수성을 내세우려 한다. 과연 한국인들의 근
기에 알맞은 것일까? 논자(심재룡)는 회통성 못지않게 순수성을 주장하
는 퇴옹의 주장 역시 한국불교의 역사적 변화 즉 역사성을 무시한 종교
적 독단이라고 보여진다.”라고 말하고 있다.
28) 상게서, p.497.
위의 내용을 통하여 양자 사이의 관점의 차이를 분명히 볼 수 있다.
성철을 지지하는 입장에 선 학자들은 화엄선적인 보조선의 교학적인 입
장을 벗어나 한국선이 원증돈오의 돈오돈수로 바로 서야 한다고 주장한
다. 이에 반하여 보조를 지지하는 입장에 선 학자들은 보조선이야말로
한국선의 전통을 확립하고, 근기에 따른 수행의 다양성을 제시하였으며,
선과 교를 회통하고, 탈중국적 주체성을 지녔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강건기 교수는 “성철스님에 의하면 돈오점수는 교가의 수행방법으로 선
과 상반되며 따라서 이단사설이라고 말한다. 말씀처럼 돈오점수가 백번
양보하여 교가의 수행방법이라 하더라도 어찌 이단사설이라 할 수 있을
까. 모든 교가의 가르침이 이단사설이라 할 때 그 가르침을 설한 부처님
은 어떻게 되겠는가. 이는 ‘선문정전’이라는 이름으로 불교 자체를 편협
하게 하는 모순을 금치 못하게 한다. 지눌은 종파보다는 불교를, 불교보
다는 구체적인 인간을 문제 삼고 고뇌하였던 스승이었다. 그러므로 그
는 선종 출신이면서도 교를 무시하지 않았으며, 그것들은 결국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 가는 길로서의 의미를 가진다고 보았다.”라고29) 말하고
있다.
29) 강건기,「보조사상에 있어서 닦음의 의미」, 상게서, p.344.
돈점논쟁의 중심에 선 대표적인 인물로 박성배 교수를 들 수 있다. 그
는 보조와 성철의 두 입장에 대한 비판과 장점을 동시에 드러내면서 두
사상이 지닌 함의와 가치를 동시에 밝히고 있다. 그는 이 둘의 장점을
살려 돈오돈수적 점수설을 주창하였다.
"성철스님의 돈오돈수설은 우리들의 깨침에 대한 자세를 바로잡아주었
고 보조국사의 돈오점수설은 불교인의 삶의 폭을 넓혀주었다. 그래서 필
자는 보조국사의 돈오점수설을 ‘돈오돈수적 점수설’로 발전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돈오돈수적 차원이 없는 깨침은 선문의 깨침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보조국사의 돈오돈수는 성철스님의 돈오돈수와
전적으로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다음, 성철스님의 돈오돈수설도 보
조국사의 점수적 차원을 가지고 있어야 할 줄 안다. 깨친 다음에 보살행
하겠다는 종래의 태도는 근본적으로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30)
30) 박성배,「성철스님의 돈오점수설 비판에 대하여」,「覺깨달음, 돈오점수인가 돈
오돈수인가」, 전게서, p.276.
다음으로「선문정로」에서 보조에 대한 비판은 보조선의 전체적인 성
격에 관한 논쟁으로 이어졌다. 지눌이 주장하고 있는 돈오점수와 경절
문 간의 이질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또 성적등지문, 원돈신해문,
경절문의 삼문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그것이다. 이는 특
히 지눌의 만년작인 절요사기를 두고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물
론 이는 성철이 제기한 보조의 사상은 “돈오점수(해오점수, 화엄선)에서
경절문으로 전환이 이루어졌지만 그것도 불완전한 것이었다.”는 주장을
의식하고서 전개한 것이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성철의「선문정로」에서 주장하는 내용에 대한 중요
한 논거들을 비판함으로써 성철의 주장을 무력화시키려는 시도가 진행
되었다. 그중 ‘하택과 규봉과 지눌’의 사상을 한꺼번에 지해종도로 본 것
이 정당한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특히 하택의 선사
상에 대한 다양한 논의를 통하여 하택의 선사상과 혜능의 선사상이 상
반된 것이 아니라 동일하다는 관점이 제기되었다. 이는 돈황에서 출토
된 하택의 저서를 기반으로 그동안 선종사에 묻혀있던 하택선의 원형이
밝혀지면서 성철의 주장이 송대 이후 임제종의 종파적 관점에 근거하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이와 맞물려 혜능의 선사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단경」에 대한 텍
스트비평을 통하여「단경」에 입각하여 선사상의 종지를 피고 있는 성철
의 관점이 역사적 사실이 아닌 유사-역사적 의식에 입각한 것이라는 비
판이 이루어졌다.
또 다른 하나는 간화선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대혜의 선사상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가 이루어졌다. 이를 통하여 보조선의 돈오점수에
대한 비판이 일어남과 동시에 대혜의 간화선이 오히려 돈오점수라는 주
장도 나타나게 되었다.31)
31) 인경,「간화선과 돈점문제」,「보조사상」23집, 서울: 보조사상연구원, 2005.
이외에도 ‘무념’에 대한 비판, ‘오매일여의 가능성’에 대한 문제제기,
불교사 속에 등장한 돈점문제에 대한 종합적인 고찰 등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3. 남겨진 과제
동일한 주제를 다루는 본고가 기존의 김호성 교수 및 이덕진 교수의
논문과 차별성을 보이고 있는 점은 논쟁을 일으킨 당사자를 ‘성철’로 보
고 있다는 점이다. 즉 ‘선문의 정로와 이단의 구분’을 쟁점을 제기한 것
이 성철의 문제제기라고 파악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 설 때, 남겨진
과제는 보다 선명하게 나타난다.
첫째, 논쟁의 주체가 학자가 아닌 실제 선 수행을 하고 있는 선원수좌
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재 수행을 통하여 돈오돈수는 가능한 것인
지, 이에 대하여 간화선을 실참실수한 선승들의 목소리가 다양하게 나
올 때만이 진정한 논쟁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둘째, 성철이 한평생 고민했던 ‘선문의 정로가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
에 대해 새로운 논의가 필요하다. 그동안의 주된 논의는 선문의 이단으
로 지목된 보조선에 대한 성격과 실체를 밝히는데 집중되어 있었다. 성
철이 비판하였던 것은 어쩌면 당시 보조와 보조선사상을 무조건 추종하
고 있던 선승들일 수 있다. 특히 ‘견성’과 ‘구경각’에 대한 분명한 자각이
없이 스스로 깨달았다고 자만하는 자들에 대한 꾸지람일 수 있다. 따라
서 ‘선문의 정로가 무엇인가’하는 문제제기는 시의적절한 것이었다. 따
라서 이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일어나야 한다고 본다.
셋째, 성철이 제기한 교판론, 수증론, 견성론 등은 불교학적 관점에서
타당한 것인지의 검토가 본격적으로 일어나야 한다. 그동안 주된 논의
는 성철의 보조비판에 대하여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면, 앞으로의 논
의는 성철의 선사상 체계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일어날 필요가 있다.
성철이 이해하고 있는 하택의 선사상, 영명연수의 선사상, 대혜종고의
선사상, 혜능의 돈황본「단경」을 중시한 문제, 백파의 3종선에 대한 비
판, 화엄을 비판하면서 유식을 옹호하는 견해, 서산의 선사상에 대한 평
가 등등의 문제들은 이미 간헐적으로 학자들 사이에서 문제제기가 있어
왔다. 이러한 문제를 포함하여 종합적으로 성철의 선사상에 대한 다양
한 논의가 일어나야 한다고 본다.
Ⅳ. 결론
이상으로 보조와 성철의 법맥과 돈점논쟁을 나누어 쟁점과 논쟁의 전
개과정, 앞으로 남은 과제 등을 살펴보았다. 지금까지 보조의 선사상에
대한 문제가 논의의 중심에 서 있었다면 앞으로의 과제는 성철의 선사
상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철의 저술은 많이 있지만 생전에 스스로 저술한 것은「한국불교법
맥」,「선문정로」,「본지풍광」,「돈황본 육조단경」등이다. 이외에 녹취록
에 근거한 저술이 7편, 입적 후 출간된 저술이 두 편이 있다. 상당히 많
은 분량의 저술이자 여기에 인용된 내용들은 불교의 전반적인 지식은
물론 불교외적 지식이 총망라 되어 있다. 이 모두가 간화선 수행을 통하
여 29세 오도 이후, 중생의 교화를 위하여 교학적 체계를 만들어 간 것
이다. 이러한 성철의 선사상은 현대 한국 선사상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다.
성철이 제기한 임제-태고법통설과 돈오돈수는 한국불교 또는 조계종
의 정체성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 하는 고뇌의 산물이다. 한평생 철저한
수행과 절속(絶俗)의 입장을 견지하였고, 조계종의 종정으로서 불교계
를 대표하였던 성철이기에 그의 주장에 진실성과 힘이 묻어 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원효와 보조로 대표되는 한국불교한국불교의 회통적 성격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 한국불교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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