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파다(법구경)

『法句經』(Dhammapada)의 사상

실론섬 2016. 12. 29. 17:17

동아시아불교문화」제6집

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 2010

『法句經』(Dhammapada)의 사상

( “이 논문은 부산대학교 자유과제 학술연구비(2년)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1)김 용 환/부산대학교 철학과 교수

 

국문초록

불교 최고(最古)의 문헌인『법구경』에 나타나 있는 사상의 체계적 고

찰을 통해 최초기의 불교 사상과 불타사상의 원형을 규명하려고 시도한

논문이다. 즉,『법구경』에 나타난 인생관(人生觀)과 행복론, 행위와 업보

(業報), 업(業)과 윤회(輪廻), 심청정(心淸淨)과 번뇌(煩惱), 지혜(智慧)와

열반(涅槃)를 통하여 불교 사상의 핵심과 불타가 추구하고자 한 진리가

무엇인가를 본 논문에서 밝혀내고자 하였다. 불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

는 것은 ‘바른 진리’(saddhamma)를 깨달아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는 것이다.『법구경』에는 이와 같은 진리를 깨닫기 위해 필요한 수행덕

목으로 계정혜(戒定慧)와 팔정도(八正道)를 설하고 이를 통해 사성제(四

聖諦)와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의 도리를 통찰하여 번뇌를 끊

고 심청정(心淸淨)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인과업

보(因果業報)와 그로 인한 생사윤회의 결정론의 세계․고통의 세계로부

터 해탈을 얻는 열반의 길이며, 바른 삶의 방식임을 가르치고 있다.

 

『법구경』에 나타나 있는 이러한 사상은 역사적으로 소급할 수 있는 불

교사상의 원점이며, 이후에 전개된 다양한 불교사상의 이론적 토대가

된다.

 

1. 서언(序言)

 

『법구경』은 불교의 경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역사적인 불타의

원음(原音)이 시(詩)의 형태로 잘 보존되어 있다. 불타를 만나 본적은

없지만,『법구경』을 읽으면 그가 얼마나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였는가

하는 것이 법구(法句)의 행간 속에서 느껴져 온다. 그것은 문체의 세련

됨이나 시의 아름다움에서 오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말씀에 담긴 진실

(Dhamma)의 힘이 읽는 사람 자신의 마음과 생존방식을 끊임없이 되돌

아보고 반성하게 한다. 그것이 시공(時空)을 뛰어넘어 현대인에게도 유

의미(有意味)한 것으로 다가오는『법구경』의 사상이 가지고 있는 보편

성이다.『법구경』에는 불타의 금언(金言)을 근거로 초기불교의 수행자

들이 지향(指向)한 인생관과 세계관 그리고 윤리적 교의(敎義)가 담겨

있다. 그것은 불교 교학의 가장 초기형태를 반영하며, 불타정신의 진수

를 전하고 있다.

 

『법구경』에 대한 문헌학적인 연구는 그 동안 많이 이루어져 왔으나,

『법구경』의 사상을 독립적으로 다룬 연구는 의외로 드물다. 불타의 말

씀(法句)을 이와 같은 형태로 모아 편찬한데는 그 나름의 분명한 의도

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소론(小論)은 원래 일반인들을 상대로 불교사상사에 나타나는 주요한

문헌의 내용을 소개하는 기획의 일환으로 집필된 것이다. 따라서 엄밀

한 논증이나 자료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부분이 적지 않다. 그리고

『법구경』에 대한 후대의 주석경(注釋經)을 참조하지 않고 빨리(pāli)어

법구경그 자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체 내용과의 연관성 속에서

파악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후대 아비담마의 교학체계에

의해 해석되고 조직된 것이 아닌『법구경』그 자체의 순수한 사상을 파

악하고자 하였다.

 

2. 인생관(人生觀)과 행복론

 

인생을 어떻게 규정하든지 간에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게 오랫동안 살

기를 원한다. 그런데 행복의 정의(定義)와 내용은 시대사조(時代思潮)와

개인의 인생관에 따라 다르게 규정될 수 있다. 어느 경제학자는 행복을

욕망분의 소유로 (행복 = 소유/욕망) 규정한 바 있다. 이 공식에 따르면

소유의 양이 늘면 늘수록 행복은 커지고 반대로 소유의 양이 줄면 줄수

록 행복은 적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행복을 욕망과 소유와의 관

계에서만 규정한 것으로, 자본주의적 시대사조에 근거한 행복론이라 할

수 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예외 없이 이러한 행복론

의 영향하에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이 행복론이 전제하고 있는 것은 인간을 욕망의 존재로 보고 소유의

증대를 통해 욕망을 최대한으로 충족시키는 것을 행복으로 간주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생각의 배후에는 자본주의 이념이 있고, 또 자본주의 이

론의 성립 배경에는 근대 서양의 인간관이 자리하고 있다. 인간적인 것

을 원죄(原罪)의 소산으로 보는 기독교적 인간관에 있어 욕망은 절제되

고 극복되어야 하는 부정적인 가치였다. 거기에 반해 신중심(神中心)에

서 인간중심으로 전회한 서양의 근대정신은 고대 그리스 정신의 부활

(復活, Renessance)을 통해 인간적인 것을 긍정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것에 가치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근대 사조의 흐름 속에 출현한

것이 절대적 인식의 근거를 성서(聖書)에서 구하지 않고 인간에서 찾는

합리론(合理論)과 경험론(經驗論)이며, 인간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

론으로 모색된 것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등의 이념인 것이다.

 

이러한 서양의 사조는 서양을 넘어 오늘날의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

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은 소유를 많이 한 부자가 되기를 갈망하며, 거

기에서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구하려고 한다. 거기에 행복이 있다고 믿

기 때문이다.

 

불타(佛陀)는 태어난 사람이면 누구나 경험하게 되는 생로병사(生老

病死)의 실존적 현실을 자각하고 그러한 고통을 궁극적으로 극복하는

길을 모색하기 위해 출가 수행자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 그도 또한 고통

을 피하고 행복을 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행복은 욕망이라는 현

실을 인정하고 그 욕망의 충족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 아니었다. 비록 욕

망이 실현되어 행복하게 된다고 할지라도, ‘생로병사’를 극복할 수 없다

면, 그러한 행복은 일시적일 뿐 지속성이 없기 때문에 유한하고 불완전

한 것이다. 불타는 그것이 어떠한 존재든 무상(無常)한 것은 고(苦)로

보았다. 그리고 무상한 존재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때 거기에 참다운

영원한 행복이 실현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면 현실적으로 무상한 존재인 우리가 그 무상한 현실 (生․老․

病․死)로부터 어떻게 하면 자유로울 수 있을까? 불타는 이 의문을 풀

기 위해 출가하였고, 6년 고행(苦行) 끝에 비로소 그 해답을 얻었다. 불

타는 삶의 의미와 삶 속에서 구해야 할 가치를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

다.

 

비록 백년을 살지라도 파계(破戒)를 하고 선정(禪定)이 없다면

(asamāhito), 계(戒)를 지니고 선정에 든 사람(jhāyino)이 하루를 사는 것

이 더욱 뛰어나다.1)

1) Dhp, 110.(앞으로『法句經』(Dhammapada)은 본문에서는『法句經』으로, 그리고

 

각주에서는 Dhp로 표시함)

 

비록 백년을 살지라도 지혜(智慧)가 없고 선정이 없다면, 지혜를 가지고

 

(paññāvantama) 선정에 든 사람이 하루를 사는 것이 더욱 뛰어나다.2)

2) Dhp, 111.

 

비록 백년을 살지라도 게으르고 정진(精進)하지 않는다면 열심히 노력하

는(viriyam) 하루를 사는 것이 더욱 뛰어나다.3)

3) Dhp, 112.

 

비록 백년을 살지라도 생멸(生滅)의 도리를 보지 못한다면 생멸의 도리를

보고(passato) 사는 하루가 더욱 뛰어나다.4)

4) Dhp, 113.

 

비록 백년을 살지라도 불사(不死)의 경지를 보지 못한다면, 불사의 경지

를 보고 사는 하루가 더욱 뛰어나다.5)

5) Dhp, 114.

 

비록 백년을 살지라도 ‘최상의 진리’((Dhammam uttamaḿ)를 보지 못한

다면, 최상의 진리를 보고 사는 하루가 더욱 뛰어나다.6)

6) Dhp, 115.

 

이 게송들은 백년이라는 긴 수명을 누리고 장수(長壽)하는 것보다는

하루를 살아도 계(戒), 선정(禪定), 지혜, 정진 등의 수행을 통해 ‘생멸의

도리’, ‘불사의 경지’, ‘최상의 진리’를 볼 수 있는 하루의 삶이 훨씬 의미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는 인생을 통해 구현해야 할 궁극의 가치가 ‘최

상의 진리’를 깨닫고 그를 통해 ‘불사(不死)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임을

시사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계(戒)·정(定)·혜(慧)의 덕목이 요청

됨을 설하고 있다. 불사(不死, amata)는 불교 성립 이전의 ‘우파니샤드’7)

에 절대적인 경지와 관련하여 이미 사용되고 있지만, 불교에서는 열반

(涅槃)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7) Bṛhad-āraṇyaka Upa. Ⅱ. 4. 2. “그 때 마이트레이가 말했다. 스승이여! 만약에

   재화로 가득한 이 모든 땅이 나의 소유가 된다면, 그것으로 인해 내가 불사(不死,

   amṛta) 할 수가 있습니까?”

 

『법구경』은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두 가지 길이 있음을 말하

고 있다.

 

하나는 ‘이득(利得)에 이르는 길’(lābhūpanisā)이요 다른 하나는 ‘열반에

이르는 길’(nibbāṇagāminī)이다. 불타의 제자인 수행승은 이것을 이와 같

이 알고, 공경(恭敬)을 즐거워하지 말라. 고독의 경지에 전념하라.8)

8) Dhp, 75.

 

이득에 이르는 길이란 소유의 획득을 통해 욕망을 실현해 가는 세속

적 삶의 방식을 말하고, 열반의 길은 계(戒)․정(定)․혜(慧)의 수행 실

천을 통해 ‘최상의 진리’를 깨닫고 ‘불사(不死)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목

표로 하는 불교 수행자 (혹은 佛子)의 삶의 방식을 말하고 있다. 불교에

있어 인생의 궁극적 행복이란 욕망의 실현에 있지 않고, 수행을 통한 열

반의 증득(證得)에 있는 것이다.

 

일상의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끊임없이 다양한 형태의 욕구와 욕망을

충족시켜 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불타는 그 문제에 대해 어떻

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불타의 사상과 가르침은 자연현상의 배후에 있는 원리나 형이상학적

존재에 대해 어떠한 관심도 보이고 있지 않다. 그의 근본적 관심사는 인

간의 문제이고, 그 중에서 특히 마음의 문제가 그 핵심이라고 할 수 있

다. 그의 어떠한 가르침도 마음을 떠나서 이야기하는 것은 없다고 하여

도 과언이 아니다.

 

『법구경』제3장은 그 제목이 「心品(cittavagga)」인데 거기에서 마음

(citta)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마음은 동요하고 들떠 ‘지키기 어렵고’(dūrakkha) ‘억제하기 어렵

다’.(dunnivāraya)9)

9) Dhp, 33.

 

마음은 붙잡기 어렵고, 가볍게 흔들리고, 욕망하는 데로 향한다. 마음을

‘다스리는 것’(damatho)은 좋은 일이다. 마음을 다스리면 안락을 가져온

다.10)

10) Dhp, 35.

 

마음은 매우 보기 어렵고, 매우 미묘하며, 좋아하는 것을 따라 움직인

다.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을 ‘지켜야 한다’.(rakkhetha) 잘 지켜진 마음이

안락을 가져온다.11)

11) Dhp, 36.

 

마음은 멀리 가고, 홀로 움직이고, 형체 없이 가슴 속의 동굴에 숨어 있

다. 이 마음을 억제하는(saññamessanti) 사람들은 죽음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것이다.12)

12) Dhp, 37.

 

마음이 안심되지 않고, 바른 진리를 모르며, 신심(信心)이 흔들린다면 지

혜(pañña)는 완성되지 않는다.13)

13) Dhp, 38.

 

마음이 번뇌에 물들지 않고, 생각이 혼란됨이 없이 선악(puññapāpa)을

버린 깨어있는 자에게 어떠한 두려움도 없다.14)

14) Dhp, 39.

 

미워하는 사람이 미워하는 사람에 대해서, 원한을 가진 사람이 원한을

가진 사람에 대해서 하는 어떠한 것보다도 삿된 마음은 그것보다 심한

것을 한다.15)

15) Dhp, 42.

 

부모나 친척이 해주는 것보다 더욱 뛰어난 것을 바른 마음이 해 준다.16)

16) Dhp, 43.

 

여기에 나타나는 마음(citta)은 대승불교의 ‘마음이 곧 부처’(心卽是佛)

인 마음도 아니며, 유식(唯識)사상의 ‘모든 현상세계를 일으킨 원인으로

써의 마음’(一切唯心造)도 아니다. 이 마음은 누구나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그러한 마음이다. 자기 자신의 마음이지만 마음대로 잘 되지

않는 바로 그 마음이다. 때로 욕심을 부리기도 하고, 남을 미워하기도

하며, 서운해 하기도 불쾌해 하기도 한다. 삐뚤어진 마음도 있고 곧고

바른 마음도 있다. 착하고 선한 마음도 있으며 악하고 나쁜 마음도 있

다. 밝고 명랑한 마음도 있으며 어둡고 침울한 마음도 있다. 사람마다

마음씀이 다르며, 같은 사람 속에도 때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마음이

일어난다. 그리고 제각각 좋아하는 것이 달라 거기에 따라 움직인다.

 

불타는 사람들의 그러한 마음을 잘 고찰하고 있다. 그래서 마음이 지

키기 어렵고, 억제하기 어렵고, 붙잡기 어렵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잘못

된 마음은 커다란 고통을 가져오고, 바른 마음은 큰 행복을 가져온다고

보아 마음을 지키고 억제하고 다스릴 것을 설하고 있다. 생사(生死)윤회

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도, 생사윤회의 원인인 번뇌(煩惱)를 지혜

에 의해 제거하여 열반에 이르는 것도 모두 마음의 문제요, 마음을 떠나

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에 있어 궁극적인 행복은 물질과 그 소

유의 극대화로 인해 맹목적인 욕망을 충족시킴으로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것을 동경하는 그 마음을 지키고 억제하고 바르

게 다스릴 때 얻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불타는 인간의 삶이 지향해야 할 가치의 근본을 제불(諸佛)의 이름으

로 다음과 같이 교시(敎示)하고 있다.

 

모든 악한 일(pāpa)을 하지 말고, 선한 일(kusala)을 행하고, 자기의 마음

‘정화(淨化)하게 하는 것’(pariyodapanaṃ),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

침이다.17)

17) Dhp, 183.

 

이 짧은 구절을 흔히 칠불통계게(七佛通誡偈)라고 하는데, 그 가운데

초기불교의 실천․수행과 그 사상의 핵심이 전부 망라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질 수가 있다.

 

1) 악한 일과 선한 일은 무엇을 의미하며 왜 악한 일은 하지 말아야

하며, 선한 일은 행해야 하는가?

 

2) 왜 마음을 청정하게 하여야 하는 것일까?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어떻게 하면 그것이 실현 가능할까?

 

3. 행위와 업보(業報)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행위’ 또는 ‘일’에 해당하는 인도의 산스크리

트어가 카르마(karma)이고 이를 한역(漢譯)한 것이 업(業)이라는 말이

다. 이 말은 불교를 통해 전래된 이래로 우리의 삶과 윤리의식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우리가 흔히 예상치도 못한 일을 당했을 때, 그것

을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든가 ‘업보(業報)’ 또는 인과응보(因果應報)

라고 하여 그 일을 남이나 환경 탓으로 돌리지 않고 자신의 탓으로 보

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자신과 또는 자신과 관

련된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우연적인 것도 숙명적이거나 절대

적인 신(神)의 뜻에 의한 것도 아닌, 자신이 과거에 했던 ‘행위의 결과’

(業報)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원인으로써의 행위(業)와 그 행위의 결과

(業報) 사이에는 마치 자연현상과 마찬가지로 필연적인 인과관계가 있

다고 보는 것이 인과업보 사상인 것이다. 우리 속담에 ‘콩 심은 데 콩 나

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인과관계의 필연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업사상은 사상사적으로 불교성립 이전부터 존재하였으며 불

교에서도 이를 수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치 자연현상의 생성변화에

그것을 일정하게 지탱하고 있는 불변의 법칙이 있듯이, 인간의 다양한

행위를 지탱하는 보편의 원리가 있는데 이를 업(karma)이라고 부른 것

이다. 그러므로 불교를 포함한 인도윤리사상 일반의 이론적 기초에는

업사상이 전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모든 일은 의지(manas)를 근거로 하고, 의지를 주로 하여, 의지에 의해

이루어진다. 사악한 마음(manas)으로 ‘말하거나’(bhāsati) ‘행동하면’

(karoti) 고통(dukkha)이 그를 따른다. 수레바퀴가 차를 끄는 (소)의 발자

국을 따르듯이.18)

18) Dhp, 1.

 

모든 일은 의지를 근거로 하고, 의지를 주로 하여, 의지에 의해 이루어

진다. 맑은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행복(sukha)이 그를 따른다. 그

림자가 (몸에서) 떠나지 않는 것처럼.19)

19) Dhp, 2.

 

『법구경』의 맨 처음에 나오는 이 게송은 인과업보(因果業報)사상의

기본원리를 말하고 있다. 우선 행위를 ‘의지’와 ‘말’과 ‘행동’의 세 가지로

분류하고 그러한 행위의 동인(動因)에는 의지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왜

냐하면 일반적인 인간의 행위는 먼저 마음속에서 생각하여 하려고 하는

의지(意)를 일으켜, 이를 입을 통한 말(口)과 몸(身)을 매개로 한 행동으

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를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이라고 한

다.

 

행위의 내용은 ‘사악한 것’(paduṭṭha)과 ‘맑은 것’(pasanna)으로 나누

고 있는데, 이들은 그러한 행위의 결과로써 그 행위자에게 필연적으로

고통과 행복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한역『법구경』20)에는 전자(前者)를

악(惡), 후자를 선(善)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렇게 보면 불교에 있어 선

과 악이란 구체적 행위와 분리된 추상화된 윤리적 개념이 아니라, 행위

자에게 행복(sukha, 樂)을 가져오는 행위가 선이며, 고통(dukha, 苦)을

가져오는 행위가 악인 것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선인낙과(善因樂果),

악인고과(惡因苦果)가 된다. 따라서 악한 행위는 하지 말고 선한 행위를

해야 하는 이유는 그 업보(業報)로 고(苦)와 낙(樂)을 반드시 받기 때문

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법구경』에서는 전술한 칠불통계게(七佛通

誡偈)뿐만 아니라 다른 게송에서도 신구의(身․口․意)에 의한 선행을

강조하고 있다.

20) 巴利語ㆍ漢文 對照法句經, p. 1.

 

신체(kāya)의 성냄을 막고, 신체를 억제하라. 신체의 악행(duccaritaṁ)을

버리고, 신체를 가지고 선행(sucaritaṁ)을 행하라.21)

21) Dhp, 231.

 

말(vācā)의 성냄을 막고, 말을 억제하라. 말의 악행을 버리고, 말을 가지

고 선행을 행하라.22)

22) Dhp, 232.

 

마음(manas)의 성냄을 막고, 마음을 억제하라. 마음의 악행을 버리고, 마

음을 가지고 선행을 행하라.23)

23) Dhp, 233.

 

지혜로운 사람은 신체를 ‘억제하고’(saṁvuta), 말을 억제하고, 마음을 억

제한다. 이와 같이 실로 그는 자신을 잘 억제한다.24)

24) Dhp, 234.

 

몸(kāyena)과 말(vācāya)과 마음(manasā)으로 악행을 짓지 않고, 이 세

가지를 억제하는 사람, 나는 그를 바라문이라 부른다.25)

25) Dhp, 391.

 

신체를 ‘자제하는 것’(saṁvaro)은 좋은 일이다. 말을 자제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마음을 자제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모든 것에 대해 자제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모든 것에 자제하는 비구승은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

난다.26)

26) Dhp, 361.

 

불타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불교의 출가수행자인 비구승도 바라문

교(Brahmanism)의 사제인 바라문도 아니다. 비구승을 비구승답게 바라

문을 바라문답게 하는 것은 외형(外形)도 소속된 집단도 아닌 행위에

그 근본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누구이든 그가 한 행위로부터 자

유로울 수는 없는 것이다.

 

내가 악(pāpa)을 행하면 스스로 ‘더러워지고’(saṅkilissati), 내가 악을 행하

지 않으면 스스로 ‘청정해진다’(visujjhati). 청정하고 청정하지 않음은 각자

에 달린 것, 아무도 남을 청정하게 해줄 수 없다.27)

27) Dhp, 165.

 

허공 중에도, 바다 가운데에도, 산속의 동굴에 들어갈지라도 악업

(pāpakammā)으로부터 자유로운 그런 곳은 없다.28)

28) Dhp, 127.

 

쇠에서 나온 녹이 쇠로부터 나와서 쇠를 손상하는 것처럼 악한 일을 하면

자신의 행위가 악처(惡處, dugati)로 이끈다.29)

29) Dhp, 240.

 

비록 이러한 업의 도리를 머리로는 잘 이해한다고 해도 사람은 제각

각 타고난 성향이 달라 좋은 일을 하려고해도 좀처럼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 때로는 잘못된 과오를 범하기가 쉽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하면 되는 것일까?

 

화내지 않는 것으로 화를 이기고,

선한 것으로 선하지 않는 것을 이기고,

보시(布施)로 인색함을 이기고,

진실로 거짓을 이겨라.30)

30) Dhp, 223.

 

사람이 만약 악한 일(pāpa)을 했다면 그것을 되풀이 하지마라 그것을 즐

겁게 여기지마라. 악한 일이 쌓이는 것은 고통이다.31)

31) Dhp, 117.

 

사람이 만약 선한 일((puñña)을 했다면 그것을 되풀이 하여라. 그것을 즐

겁게 여기라. 선한 일이 쌓이는 것은 행복(sukha)이다.32)

32) Dhp, 118.

 

세계화의 커다란 시대적 흐름 속에 현대인들은 끊임없이 타자(他者)

를 이길 것을 강요받고 거기에 몰두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만이 이 세계

에서 살아남아 승리자가 되는 유일한 길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

다. 그러나 불타에게 있어 참된 승리는 ‘자기자신을 이기는 것’(自勝,

atthā have jitaṁ)33)으로 이것이 악과 거짓, 분노와 탐욕을 벗어나 선

(善)과 진실, 사랑과 베품으로 나아가는 길임을 설하고 있다.

33) Dhp, 104.

 

전쟁터에서 백만명의 사람에게 이긴다고 하여도, 하나뿐인 자기자신에 이

기는 것이야말로 최상의 승리자이다.34)

34) Dhp, 103.

 

자기 자신을 이겨 고통을 가져오는 악한 일을 쌓지 않고 선한 일을

쌓는 것이 참다운 행복에의 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상살

이를 하면서 이러한 인과응보의 원리와는 모순되게 악하고 나쁜 짓하는

사람이 잘 살고, 선하고 정직하게 사는 사람이 못사는 그런 경우를 종종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비단 오늘 날 뿐만 아니라 불타 당시에도 있었을

것이다. 불타는 업보(業報)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에게 다름과 같이 설하

고 있다.

 

악행(惡行)을 할지라고 그 업은 새로 짠 우유처럼 곧 굳어지지 않는다.

그 업은 재에 덮힌 불씨처럼 (서서히) 타면서 어리석은 자를 따른다.35)

35) Dhp, 71.

 

악의 (과보가) 익기 전에는, 악인이라도 복을 만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악의 (과보가) 익었을 때, 악인은 재앙을 만난다.36)

36) Dhp, 119.

 

선(bhadra)의 (과보가) 익기 전에는, 선인(善人)이라도 화(禍)를 만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선의 (과보가) 익었을 때 선인은 복을 만난다.37)

37) Dhp, 120.

 

배가 고플 때 밥을 먹으면 배가 부르듯이 그 행위의 결과가 바로 나

타나는 경우도 있지만, 씨앗을 땅에 심고 이것이 발아 성숙하여 결실을

거두는 것과 같은 경우는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 업보(業報)도 이

와 같아서 그것이 결실을 맺는데, 시차(時差)는 있을지라도 필연적이라

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다.

 

‘그 업보가 내게는 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여 악(pāpa)을 가볍게 여기지

마라, 한 방울씩 모인 물이 물병을 채운다. 어리석은 자가, 물을 조금씩

모으는 것처럼, 악을 쌓으면 이윽고 큰 죄악을 이룬다.38)

38) Dhp, 121.

 

‘그 업보가 내게는 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여 선(puñña)을 가볍게 여기

지마라. 한 방울씩 모인 물이 물병을 채운다. 지혜로운 사람이, 물을 조금

씩 모으는 것처럼, 선을 쌓으면 이윽고 큰 복덕을 이룬다.39)

39) Dhp, 122.

 

『법구경』에 “진실(sāra)이 아닌 것을 진실로 보고, 진실인 것을 진실

이 아닌 것으로 보는 사람들은 그릇된 생각에 붙잡혀 끝내 진실에 이르

 

지 못한다.”40)는 게송이 있다. 이는 사람이 진실을 진실로, 진실이 아닌

것을 아닌 것으로 본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이야기 한다. 선인낙과(善因

樂果) 악인고과(惡因苦果)의 인과업보의 도리를 원리적으로 이해한다고

하여도 이는 매우 추상적이라, 실제 현실의 구체적인 상황에 부딪쳤을

때 선악을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고, 더구나 그것이 어떤 업보를 가

져올지 판단하기 대단히 애매하다. 그러한 문제제기를 의식했음인지 업

과 업보의 상관관계를 구체적으로 설하고 있는 게송이 있다.

40) Dhp, 11.

 

모든 생명(bhūtani)은 행복을 바라는데, 폭력에 의해 이들을 해치면, 자신

의 행복을 구할지라도 내세에는 행복을 얻지 못한다.41)

41) Dhp, 131.

 

잘못이 없는 사람에게 벌을 가해 해치면, 다음에 드는 열 가지 가운데 어

떤 것의 갚음을 만나게 될 것이다.42)

42) Dhp, 137.

 

심한 고통, 노쇠, 신체의 상해, 무거운 병, 정신착란, 국왕으로부터 받

은 재앙, 무서운 모함, 친족의 멸망, 재산의 손실, 그 사람의 집을 태운다.

이러한 어리석은 사람은 죽은 뒤에 지옥에 태어난다.43)

43) Dhp, 137, 138, 139, 140.

 

방일하여 남의 아내를 가까이하는 자는 네 가지 일을 만난다. 곧 화를 부

르고, 누워도 즐겁지 않으며, 세 번째는 비난을 받으며, 네 번째 지옥에

떨어진다.44)

44) Dhp, 309.

 

살아있는 모든 생명을 해치거나, 아무런 잘못이 없는 사람에게 위해

(危害)를 끼치는 행위, 남의 아내와 부정한 관계를 맺는 행위에 의해 받

게 되는 업보의 공통점은 현생에서 받는 불이익과 고통 그리고 내생(來

 

生)에 지옥에 태어나거나 불행해진다는 점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행위의 결과로써의 업보가 현생에서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윤

회를 통해 내생인 지옥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4. 업(業)과 윤회(輪廻)

 

어떤 사람들은 (사람의) 태(胎)에 들어가고, 악행(pāpakammino)을 한 사

람은 지옥에 떨어지고, 선행자(sugatino)는 천상(sagga)에 오르고, ‘번뇌

가 없는 사람들은’(anāsavā) 열반에 든다.45)

45) Dhp, 126.

 

이 게송은 업에 의한 윤회의 형태를 모태(母胎), 지옥, 천상의 세 가지

로 분류하고 있다. 그리고 번뇌가 없는 사람만이 윤회를 벗어나 열반에

든다고 한다. 악행자는 지옥에, 선행자는 천상에 태어나 윤회하므로, 비

록 선행을 많이 쌓는다고 하여도 윤회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윤회를 벗어나는 길은 선행이라는 윤리적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마음속의 번뇌(āsava)를 제거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 전제되

어있다.

 

업이 윤회의 형태를 규정하고 업보가 현생에서 뿐만 아니라 윤회를

통해 사후(死後)에서도 실현된다는 생각은 여러 게송에 나타나고 있다.

악한 짓을 한 사람은(pāpakārī) 이 세상에서 근심하고 내세에서도 근심한

다. 양쪽에서 근심한다.46)

46) Dhp, 15.

 

선한 일을 한 사람은(katapuñño) 이 세상에서 기뻐하고 내세에서도 기뻐

한다. 양쪽에서 기뻐한다.47)

47) Dhp, 16.

 

악한 짓을 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괴로워하고, 내세에서도 괴로워한다.

양쪽에서 괴로워한다.48)

48) Dhp, 17.

 

선한 일을 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즐거워하고, 내세에서도 즐거워한다.

양쪽에서 즐거워한다.49)

49) Dhp, 18.

 

윤회와 윤회하는 세계 및 형태에 대한 언급은 50여 게송에 나온다. 이

가운데 윤회의 근본원인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게송이 있다.

 

잠 못 드는 사람에게는 밤이 길고 지쳐있는 사람에게는 지척도 멀다. ‘바

른 진리’(saddhamma)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윤회

(saṃsāra)의 길이 아득하다.50)

50) Dhp, 60.

 

집을 지은이를 찾아 무수한 생(生)을 윤회하며 보냈지만 찾지 못하였다.

생존(Jāti)을 반복하는 것은 고통이다.51)

51) Dhp, 153.

 

집을 지은이여! 그대를 알게 되었다. 그대가 더 이상 집을 짓는 일이 없

을 것이다. 기둥은 모두 부러지고 지붕은 내려앉았다. 마음은 형성작용

(saṅkaāra)을 떠나고 애욕(taṇha)은 완전히 멸하였다.52)

52) Dhp, 154.

 

(깨달음의) 구극에 이르러, 두려움이 없고, 애욕(taṇha)을 떠나 더러움이

없는 사람은 ‘생존의 화살(bhavasalla)을 꺾어 버렸다. 이것이 마지막 몸

이다.53)

53) Dhp, 351.

 

이들 게송에서는 끝없이 생사윤회를 반복하는 고통에 대해 말하고,

윤회를 일으키는 원인으로 ‘바른 진리’(saddhamma)에 대한 무지(無知)

와 애욕(taṇha)을 들고 있다. 이는 전술한 업을 윤회의 원인으로 보는

견해와는 다른데 내용적으로 보면 이 삼자는 불가분의 상관성을 가지고

있다. ‘바른 진리’에 대한 무지는 우리가 일상으로 경험하는 존재의 실상

(實相)을 여실(如實)하게 통찰하는 지혜(paññā)가 결여된 상태라고 할

수 있는데,54) 이는 심리적으로 자아(自我)에 대한 ‘맹목적 집착과 모든

욕망(taṇha)’을 일으키는 토대가 된다. 그리고 그러한 정신적 기반 위에

다양한 업을 짓게 되는 것이며, 그에 따라 생사윤회를 반복하게 되는 것

이다. 이를 도식으로 표현하면 ‘바른 진리에 대한 무지’→애욕(愛慾)→업

→윤회가 되고, 달리 말하면 혹업고(惑業苦) 삼도(三道)라고 할 수 있다.

54) 바른 진리와 지혜의 상관관계를 말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마음이

    안정되지 않고, 바른 진리’(saddhamma)를 모르며 신심이 흔들리는 사람에게 지

    혜(paññā)는 완성되지 않는다.”(Dhp, 38.)

 

그런데『법구경』에서는 업과 업보 그리고 윤회를 이야기 하면서 행위

의 주체(主體), 업보를 받기 위해 윤회하는 주체에 대한 명확한 설명은

보이지 않는다. 업을 짓고, 업보를 받기 위해 이승에서 저승으로 윤회하

는 주체가 불변의 자기동일성(自己同一性)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자업

자득(自業自得)의 원리에 반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 무기(無記)의 입장을 취하는 불타는 이 문제에 관해 명확한 답변

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는데, 후대 아비달마불교에 이르면 다양한 논의

가 전개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불타는 단지 앞의 게송에서 ‘생존의 화

살’(bhavasalla)을 꺾은 것을 마지막 몸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생존으로

번역한 bhava는 유(有), 존재, 생존으로 번역되며 영어로는 ‘becoming’,

‘process of existence’로도 번역된다. 마지막 몸이란 더 이상 새로운 몸

을 받아 태어나지 않는 윤회의 종식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생존의 화살’(bhava-salla)을 꺾으므로 가능하다는 것은 이 말

(bhava)이 윤회의 기체(基體)가 되는 존재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후대 아비달마불교의 사유설(四有說)55)은 이러한

설을 토대로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55) 중생들이 윤회전생하는 것을 사유(四有)로 나눈 것으로, 중유(中有), 생유(生有),

    본유(本有), 사유(死有)를 말한다.

 

윤회하는 세계에 대한 많은 표현이『법구경』에 나오는데, 아직 후대

에서처럼 육도(六道)윤회의 형태는 보이지 않는다. 이를 정리해 보면 다

음과 같다.

 

1) 이승(idha) ― 저승․내세 (pecca)

2) 이승(idha) ― 타계․타세(hura)

3) 차안(此岸, itarā tiram, apara) ― 피안(彼岸, pāra, para)

4) 이 세상(今世, asmin loke) ― 저 세상(後世, paramhi)

5) 악취(惡趣, duggati) ― 선취(善趣, suggati)

6) 천상(天上, sagga) ― 천계(devaloka)

7) 나쁜 곳(gatī ca pāpikā) ― 지옥(niraya)

8) 천상(sagga) ― 고계(苦界, āpāya)

9) 신과 함께하는 세계(sadevaka) ― 염마(閻魔)의 세계(yamaloka)

10) 태(胎,gabbha) ― 지옥(niraya) ― 천상(sagga)

 

이 분류 가운데 표현은 다르지만 같은 뜻을 가진 것이 많아 이를 단

순화시켜 분류하면 윤회하는 세계를 공간적으로는 이승과 저승, 차안과

피안, 이 세상과 저 세상 등으로 나누고, 내용적으로는 선취(善趣) - 천

상․인간․천계와 악취(惡趣) - 지옥․고계(苦界)로 대별할 수 있다. 악

취에는 지옥 이외에 다른 형태가 더 있을 가능성이 있지만 구체적인 언

급이 없어 알 수 없다. ?법구경?에 한정해서 보는 한 아마도 이것이 생

사윤회하는 세계의 원초적인 형태일 가능성이 높고, 그것은 불교이전의

내세(來世) 사상과 별반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업에 따라 윤회하는 가운데 선취에 태어나는 것이 대단히

어렵다는 생각이 나타나 있다.

 

사람몸 받기 어렵고(得生人道難),

죽어야만 하는 사람이 수명을 보존하기도 어렵다(生壽亦難得).

바른 진리(saddhamma)를 듣기도 어렵고(佛法難得聞),

부처님들이 출현하기도 어렵다(世間有佛難).56)

56) Dhp, 182.

 

사람으로 태어나기가 매우 어렵다(人身難得)는 생각은『涅槃經』의 맹

구우목(盲龜遇木)의 비유에 의해서도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따라서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므로, 그 기회를 최대한

살려, 만나기 어려운 바른 진리(佛法)를 배워 생사윤회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인생에 있어 가장 긴요한 일[人生一大事]이라는 인식이 나타나 있

다. 윤회의 큰 흐름 속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이 짧은 인생을 바라보는

절박감, 위기감이 초기불교의 출가주의(出家主義)와 금욕주의의 배경에

는 있다.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인 바른 진리를 만나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필연성이 바로 거기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높이 쌓인 꽃 더미에서 많은 꽃다발을 만들 수 있듯이, 사람으로 태어났

을 때 많은 ‘선한 일(kusala)’을 해야 한다.57)

57) Dhp, 53.

 

이 세상은 암흑이다. 여기서 분명하게 관찰하는 이가 드물다. 그물에서

벗어 난 새처럼 천상(sagga)에 오르는 사람은 매우 적다.58)

58) Dhp, 174.

 

욕심이 많은 사람은 천계(devaloka)에 갈 수 없다. 어리석은 자들은 보시

를 찬양하지 않는다. 지혜로운 사람은 보시를 즐긴다. 그 때문에 내세

(parattha)에는 행복하게 된다.59)

59) Dhp, 177.

 

불타는 불교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단계적으로 가르침을 권하는 차

제설법(次第說法)을 했다고 하는데, 그것이 소위 계론(戒論), 시론(施論),

생천론(生天論)이다. 계를 지키고 선한 일을 하며, 널리 보시를 베푸는

삶을 살면 죽어서 천상에 태어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인데, 바로 그러

한 내용이 이들 게송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불타의 가르침은 결코

천상에 태어나는 것을 목표로 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윤회

하는 세계일 뿐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인용한 여러 게송을 통해 살펴보았듯이 악행이든 선행이든

그것은 인과업보의 원리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아무리 선행을 많이

하더라도 행위에 의해서는 결코 윤회로 보터 해탈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악한 일을 하지 말고 선한 일을 많이 할 것을 권장

하기는 하되’(諸惡莫作 衆善奉行) 궁극적으로는 이 양자를 초월할 것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citta)이 번뇌에 물들지 않고, 생각이 흔들리지 않으며 선악

(puññapāpa)을 초월한 깨어있는 사람에게 두려움은 없다.60)

60) Dhp, 39.

 

이 세상에서 선과 악을(puññañ ca pāpañ) 다 버리고 ‘청정한 수행’

(brahmacaritavā)을 하며 신중하게 처세하면 그야말로 비구승이라 불린

다.61)

61) Dhp, 267.

 

이 세상의 선과 악(puññañ ca pāpañ) 어떤 것에도 집착함이 없이 근심이

없고, 더러움이 없이 청정한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62)

62) Dhp, 412.

 

선과 악을 초월하거나 집착하지 말라는 것은 선악의 모든 행위를 하

지 말라는 뜻이 결코 아니다. 전술한 칠불통계게에서는 악한 일을 하지

말고 선한 일을 행하라고 분명히 설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번뇌에 물

든 마음으로 선과 악을 분별하여 나누고 거기에 집착하여 하는 행위는

비록 그것이 선행일지라도 번뇌를 수반하는 유루(有漏)의 선이고 유심

(有心)의 선일뿐이다. 그러한 선은 필연적으로 업보를 낳고, 업보를 받

기 위해서는 윤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악을 초월한 절

대선(絶對善)은 선을 행하되 무심(無心)에서 하는 선이며, 번뇌의 마음

이 끊어진 청정한 마음자리에서 하는 무루(無漏)의 선으로 이것은 업보

를 낳지 않는다. 따라서 그러한 경지에 이른 사람이 생사(生死)를 초월

하게 된다.

 

대지와 같이 너그럽고, 문기둥처럼 의무를 다하고, 흙탕이 없는 (맑은)호

수와 같은, 그러한 경지에 있는 사람에게는 윤회가 없다.63)

63) Dhp, 95.

 

‘바른 지혜에 의해’(sammadaññā) 해탈하고 고요에 이른 사람, 그의 마음

도 고요하고(santa), 그의 말도 고요하고, 그의 행동도 고요하다.64)

64) Dhp, 96.

 

집착함이 없고, 다 깨달아 의혹이 없이 불사(不死)의 밑바닥에 도달한 사

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65)

65) Dhp, 411.

 

5. 심청정(心淸淨)과 번뇌(煩惱)

 

불타의 가르침으로써의 불교(佛敎)는 왜 필요하며 무엇을 위해 존재

하는 것일까? 그것은 칠불통계게(七佛通戒偈)에서 ‘자기의 마음을 정화

(淨化)하는 것’(pariyodapanam, 自淨己意)이 모든 부처님들의 공통된 가

르침이라 하였고, 또 번뇌가 없는(anāsava) 사람이 열반에 든다는 게송

(Dhp, 126)속에 그 요지(要旨)가 이미 다 드러나 있다. 마음에 번뇌가

없는 것이 심청정이고 그를 통해 마음이 일체의 속박과 장애로부터 자

유로워지는 것이 열반인 것이다.

 

현자(paṇḑita)는 욕망(kāma)을 버리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마음의 번

뇌’(cittaklesa)를 버려 자신을 청정하게 하라.(pariyodapeyya)66)

66) Dhp, 88.

 

깨달음의 방법으로 마음을 바르게 닦고 집착 없이 탐욕을 버리는 것을

즐거워하며, ‘번뇌가 멸하여’(khiṇāsavā) 빛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열반

의 경지에 든다.67)

67) Dhp, 89.

 

여기에 번뇌와 관련하여 두 가지 술어(術語)가 사용되고 있는데,

kleśa와 āsava이다. kleśa의 빨리어는 kilesa인데 이를 번뇌(煩惱), 염

(染), 욕념(欲念)등으로 번역한다.『법구경』에서는 kleśa의 용례(用例)가

이 게송에서만 단 한번 나타나고 이에 대한 개념적 설명은 보이지 않는

다. 후대의 논서68)에서는 이를 열 가지 번뇌로 규정하고 있다. 즉 탐(貪,

lobha), 진(瞋, dosa), 치(痴, moha), 만심(慢心, māna), 견(見, diṭṭhi), 의

혹(疑惑, vicikicchā), 혼침(惛沈, thīna), 도거(掉擧, uddhacca), 무참(無

慚, ahirika), 무괴(無愧, anottappa)이다.

68) Visuddhi Magga ⅩⅩⅡ, 49, 65.

 

불타가 kleśa의 개념을 후대 논서에서와 같이 이해하고 있었는지 확

인하기 어렵지만『법구경』에도 위와 동일하거나 유사한 술어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비록 도움이 되는 말은 적게 한다 할지라도, 진리(Dhamma)에 따라 실

천하고, 탐(rāga) 진(dosa) 치(moha)를 버리고, 바르게 깨달아 마음이 해

탈하여 집착하는 바가 없는 사람은 수행자(sāmañña)의 대열에 든다.69)

69) Dhp, 20.

 

분노(kodha)를 버리고, 만심(慢心, māna)을 제거하라. 모든 속박을 초

월하라. 현상계(nāmarūpa)에 집착이 없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면

그는 고통에 쫓기지 않는다.70)

70) Dhp, 221.

 

사람의 마음이 일반적으로 이러한 번뇌에 덮여 오염되어 있다고 보았

기 때문에 번뇌를 버려 ‘청정하게 하라’(pariyodapeyya)고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pariyodapeyya는 ‘두루 청정하게 한다.’ ‘정화(淨化)한다’는 뜻

의 동사 pariyodapeti의 원망법(願望法, optative) 단수 2인칭이며, 명사

형이 pariyodapana이다. 이 말은 번뇌를 마음에 본유적(本有的)인 성질

이나 속성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조건하에 영향을 미치는 외적

인 요소로 보아, 정화를 통해 그것을 제거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전제로 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후대 번뇌를 마음 밖에서 들어온 먼지

와 같다고 보는 ‘심성본정(心性本淨) 객진번뇌(客塵煩惱)’ 사상의 토대

가 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āsava는 루(漏), 유루(有漏), 번뇌 등으로 한역(漢譯)되며, 부정형인

anāsava는 무루(無漏)로 번역된다. 이 말은 쟈이나교의 사상에서도 중

요한 교의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불교 이전부터 사용되던 말을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 사람의 번뇌(āsava)는 끊어지고, 음식물에 구애받지 않는, 그런 사람

의 해탈(vimokha)의 경지는 공(空, suññata)하고 무상(無相, animitta)하

여, 허공을 나는 새의 발자취처럼 그의 자취를 알아보기 어렵다.71)

71) Dhp, 93.

 

범부로써 맛보기 어려운 이욕(離欲, nekkhamma)의 기쁨을 나는 얻었

다. 그것은 계율과 서원(誓願, bata)만에 의해서도, 또 박학(博學)에 의

 

해서도 또 삼매(三昧, samādhi)에 들어도, 또 홀로 떨어져 누워 있더라

도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비구들이여! 번뇌가 다 끊어지기(āsavakkhaya)

전에는 방심하지 말라. 72)

72) Dhp, 271, 272.

 

앞에서 인용한 89게송을 포함하여『법구경』에 나타나는 āsava의 용

례(用例)73)를 살펴보면, 열반과 해탈의 필수적인 전제로 āsava의 소멸

을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측면은 불교수행의 구

극의 경지가 계율, 서원, 경율론(経律論)의 삼장(三藏)에 대한 박학이나

삼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번뇌의 소멸(āsavakkhaya)에 있다는 위의 게

송에 잘 드러나 있다. 불교의 모든 수행은 궁극적으로 번뇌의 소멸을 위

한 수단이며 방법론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번뇌가 멸한 사람’이라는 뜻

의 khīṇāsava가 최고의 깨달음에 도달한 아라한(arahat)과 동일한 뜻으

로 사용되는 점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후대의 경론(経論)에는

āsava를 욕루(欲漏, kāmāsava), 유루(有漏, bhavāsava), 견루(見漏,

diṭṭāsava), 무명루(無明漏, avijjāsava)의 4종으로 분류하고 있는데,『법

구경』에서는 그러한 형태를 찾아보기 어렵다.

73) Dhp, 226.

 

우리는 앞에서 사람들의 선행(善行)과 악행(惡行)의 토대에는 번뇌라

는 심리현상이 있고, 이 번뇌의 마음에 근거해 일으킨 모든 행위는 필연

적으로 업보(業報)를 받게 된다는 것과 또 그러기 위해 윤회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 한 바 있다. 거기에 반해 마음에서 일체의 번뇌

가 소멸하면 윤회를 벗어나 열반에 들고, 그러한 무루(無漏)의 마음으로

행한 행위는 업보로부터 자유롭다고 했다.

 

그렇다면 인간으로써의 우리 존재의 근거에는 번뇌가 가로놓여 있다

는 것인데, 그러한 번뇌는 어떻게 생겨나며, 어떻게 하면 소멸될 것인가

하는 것을 묻지 않을 수 없다.

 

그 물음에 대해 체계적이고 근본적인 해답은 아니지만『법구경』는 다

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다른 사람의 죄과(罪過)를 살피며, 항상 불만을 품는 사람은 번뇌

(āsava)가 늘어난다. 번뇌의 소멸(āsavakkhaya)로부터 멀어진다.74)

74) Dhp, 253.

 

해야만 할 일을 소홀히 하고,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교만과 방종에 빠

진 사람에게 번뇌(āsava)가 늘어난다.75)

75) Dhp, 292.

 

항상 신지념(身至念, kāyagatā sati)을 노력하여 행하며, 해서는 안 될 일

을 하지 않고, 해야만 할 일을 항상 하며 스스로 조심하는 사람에게 번뇌

(āsava)는 없어진다.76)

76) Dhp, 293.

 

번뇌(āsava)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나 수행여하에 따라

늘어나기도 하고 또 소멸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번뇌소멸의 방법으

로 신지념(身至念, kāyagatā sati)을 설하고 있는데, 이는 사념처(四念處,

catur satipaṭṭhāna) 첫 번째인 신수관(身隨觀, kāyānupassanā)을 의미

하기도 한다. 신체의 제상(諸相)을 관(觀)하여 그 실상(實相)을 알아차

리는 수행방법으로 그 결과 지혜를 얻게 된다. 지혜의 증득을 통해 번뇌

(āsava)를 근원적으로 소멸하게 하는 것이 초기 불교수행의 핵심적인

요소라 할 수 있다.

 

『법구경』에 번뇌와 관련하여 가장 많이 나타나는 술어(術語)가 taṇha

이다. 이 말은 산스크리트어로는 tṛṣṇā인데 어원적으로 영어의 thirst(목

마름, 갈증)과 동일한 단어이다. 이를 갈애(渴愛), 애(愛), 애욕(愛欲) 등

으로 번역한다.『법구경』의 제 24장의 명칭이 taṇhavagga(渴愛의 品)인

데 그 가운데 다음과 같은 불타 자신의 선언적 게송이 들어 있다.

 

나는 모든 것을 이겼고, 모든 것을 알았으며, 모든 것에 더렵혀지지 않는

다. 모든 것을 버리고, ‘갈애가 다해’(taṇhakkhaya) 마음은 해탈하였

다.(vimutto) 누구를 (스승이라) 부를 것인가?77)

77) Dhp, 353.

 

이 게송은 역사적 불타의 깨달음의 성격과 내용을 두 가지 측면에서

전해 주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하나는 불타의 깨달음이 스승이나 기

존의 사상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터득되었다는 소위 무사독오

(無師獨悟)의 측면을 말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그러한 깨달음의 내용이

다름 아닌 ‘갈애의 소멸’(taṇhakkhaya)로 갈애에 의해 물들어 거기에 속

박되어 있든 마음이 자유로워진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소위 심해

탈(ceta-vimutti)이다. 여기에는 형이상학적 존재에 대한 어떠한 언급과

논의도 찾아 볼 수 없다. 그것이 불교적 깨달음의 원점이다.

 

『법구경』의 어디에도 갈애(taṇha)에 대한 개념적 설명은 없다. 간접적

으로 그 의미를 추론해 볼 수 있는 게송이 몇몇 있을 뿐이다.

 

천상의 욕낙(欲樂, kāma) 조차도 즐거워하지 않는다. 바르게 깨달은 사람

(正覺者, sammāsambhuddha)의 제자는 ‘갈애의 소멸’(taṇhakkhaya)을 즐

긴다.78)

78) Dhp,187

 

탐욕(rāga)과 같은 불이 없고, 성냄(dosa)과 같은 포박은 없으며, 어리석음

(moha)과 같은 그물은 없고, 갈애와 같은 강은 없다.79)

79) Dhp, 251.

 

욕낙(kāma) 및 탐진치(rāga, dosa, moha)와 갈애의 상관관계가 명확

히 규정되어 있지는 않으나, 전자에 비해 갈애가 보다 더 근원적이고 본

질적인 것이라는 해석은 가능해 보인다. 그와 같은 해석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taṇha가 주로 윤회의 원인으로 언급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전술한 āsava의 소멸이 주로 열반의 원인으로 나타나는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비록 나무를 베어도, 견고한 뿌리를 자르지 않으면 다시 성장하는 것처

럼, ‘갈애의 잠재력’(taṇhānusaya)을 쳐부수지 않으면 (윤회의)고통은 되

풀이 된다.80)

80) Dhp, 338.

 

방종한 사람에게 갈애는 덩굴처럼 자란다. 숲속에서 원숭이가 열매를 찾

는 것처럼 (이승에서 저승으로)이곳 저곳을 헤맨다.81)

81) Dhp, 334.

 

깨달음의 완성에 이르러, 두려움이 없고 ‘갈애를 떠나’(vītataṇha) 때가 없

는 사람은 ‘생존의 화살’(bhavasallā)을 잘랐다. 이것이 마지막 몸이다. 82)

82) Dhp, 351.

 

이와 같은 윤회의 원인으로써의 갈애를 체계적으로 전개시킨 것이 후

대에 성립된 것으로 보이는 욕계애(欲界愛, kāma-taṇha), 색계애(色界

愛, rūpa-taṇha), 무색계애(無色界愛, arūpa-taṇha) 사상이다. 이는 윤회

하는 세계인 삼계(三界) 즉 욕계, 색계, 무색계에 태어나는 원인을 갈애

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감각적인 대상에 대한 갈애와 생존에 대한 갈애

및 윤회하는 생존을 벗어나려는 인간의 모든 갈애를 포괄적으로 정리한

것이 욕애(欲愛, kāma-taṇha), 유애(有愛, bhava-taṇha), 무유애(無有愛,

abhava-taṇha)이다. 뿐만 아니라 사성제(四聖諦)에 있어 고제(苦諦)의

원인인 집제(集諦)의 내용이 갈애이며, 12지연기(十二支緣起)사상의 애

지(愛支)의 원어가 갈애(taṇha)인 점을 살펴볼 때 갈애가 교리적으로 대

단히 중요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갈애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욕망의 근원에 있는, 마치 목마른

자가 물을 갈구하는 것과 같은 맹목적인 충동과 의지라면 그것이 현실

태로서 드러나는 양태 가운데 하나가 kāma이다. 사람은 누구나 몸을 가

지고 태어나고, 몸에는 의식을 포함한 눈, 귀, 코, 혀, 피부 등의 감각기

관이 있다. 이들을 통해 몸 밖의 외계의 사물과 변화에 대한 인지작용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끊임없이 감각적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노력한다.

그것이 곧 kāma로 욕(欲), 애욕(愛欲), 욕념(欲念), 욕정(欲情), 욕낙(欲

樂)등으로 번역된다.『법구경』에는 많은 용례들이 나타나는데 그 몇 가

지만 소개한다.

 

비록 화폐의 비가 내릴지라도 욕망(kāma)에는 만족이 없다. 쾌락의 맛은

짧고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현자는 안다.83)

83) Dhp, 187.

 

연잎 위의 이슬처럼, 송곳 끝의 겨자씨처럼, 어떠한 애욕(kāma)에도 더럽

혀지지 않는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84)

84) Dhp, 401.

 

6. 지혜(智慧)와 열반(涅槃)

 

우리는 누구나 번뇌와 갈애에 의해 물든 마음의 눈으로 자기와 세상

을 보기 때문에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는 것이 불타의 가르침

이다. 달리 말하면 번뇌는 세상과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고 통찰하

는 ‘지적(知的) 결여’(無明)를 근본원인으로 하여 마음에 나타나는 심상

(心相)이며 인간 존재 그 자체의 존립기반이다. 나라고 하는 자아의식을

맹목적으로 긍정하고, 세상을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나

대상으로 집착한다. 자기를 포함한 이 세상을 참으로 물거품과 같이 무

상하여 영속적인 실체가 없는 것으로 볼 수만 있다면 거기에 집착하는

사람은 아마도 많지 않을 것이다.

 

세상을 물거품처럼 보아라. 세상을 신기루처럼 보아라. 이와 같이 세상을

보는 사람은 죽음의 왕도 그를 보지 못한다.85)

85) Dhp, 170.

 

이 게송의 내용은 세상을 물거품이나 신기루와 같이 무상(無常)하거

나 실체가 없는 것으로 보게 되면 번뇌와 갈애가 사라져 윤회를 벗어나

게 된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때 세상을 물거품처럼 본다고 하

는 것은, 개념적으로 그렇게 인식하거나, 불타의 가르침이니까 그렇게

믿는다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게 하여 번뇌와 갈애가 마음에서 완전

히 소멸된다면 누구나 열반에 쉽게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는 힘든 수행도 필요가 없을 것이다.

 

불타는 번뇌와 갈애를 제거하는 근본적인 방법으로 지혜(paññā)를 제

시하고 있다.

 

(갈애의) 물결은 사방으로 흐르고 (욕정의) 덩굴은 뻗어간다. 덩굴이 뻗어

가는 것을 본다면, 지혜(paññā)에 의해 그 뿌리를 도려내라.86)

86) Dhp, 340.

 

이 게송과 앞의 인용문을 종합하여 보면, 전술한 세상을 물거품처럼

본다는 것은 다름 아닌 지혜의 안목으로 세상을 물거품과 같이 통찰하

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불타가 깨달은 궁극적인 지혜는 누구로부터 배워

서 알거나, 번뇌에 물든 마음에 의해 일체의 존재를 사유의 대상으로하

여 분별하여 알거나, 절대자의 계시를 통해 터득되는 것이 아니다. 번뇌

가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는 심작용(心作用)이듯이 지혜 또한 심의 작용

이다. 그런데 그 심작용이 외부세계와 단절된 상태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내외(內外), 자타(自他), 주객(主客)등으로 존재를 이분법적으로

분별하지 않고, 경험되어지는 모든 현상을 맑고 청정한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 집중하여 바라볼 때 통찰되는 지(知)의 형태라 할 수 있다. 맑고

청정한 마음이란 번뇌에 물든 마음이 선정(禪定, jhāna)을 통한 심(心)

의 통일, 집중에 의해 유루(有漏)의 심작용에서 벗어난 상태로, 그 상태

에서는 경험되어지는 모든 것이 왜곡됨이 없이 그 여실(如實)한 모습대

로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하여 증득된 지혜는 다시 ‘잠재적인

형태의 갈애’(taṇhānusaya)를 그 근원(뿌리)에서 제거하여 심(心)을 청

정하게 하며 더불어 지혜가 증장하여 ‘깊은 지혜’(gambhīrapaññā)87)에

이르게 된다. 이 선정과 지혜의 상호작용과 불가분의 관계를 다음과 같

이 설하고 있다.

87) Dhp, 403.

 

마음의 통일(yoga)에서 지혜(bhūrī)가 생기고, 마음이 통일되지 않으면

(ayoga) 지혜가 사라진다. 생기고 사라지는 두 가지 길을 알고, 지혜가 늘

도록 자신을 일깨우라.88)

88) Dhp, 282.

 

지혜(paññā)가 없는 자에게는 선정(禪定, jhāna)이 없고, 선정이 없는 자

에게 지혜가 없다. 선정과 지혜를 갖춘 사람이야말로 열반의 가까이에 있

다.89)

89) Dhp, 372.

 

이 게송에서 열반에 이르는 방법으로 선정(禪定)과 지혜의 중요성을

설하고 있는데 이들을 포함하여 불교수행의 요체를 정리한 것이 팔정도

(八正道)이다.

 

여러 가지 길 가운데 팔정도(八正道)가 뛰어나며, 여러 가지 진리(sacca)

가운데 사성제(四聖諦)가 뛰어나다.90)

90) Dhp, 273.

 

사성제는 주지(周知)하는 바와 같이 불타가 초전법륜(初轉法輪)시에

다섯 제자에게 최초로 가르친 진리로 불타사상의 근본적 가르침을 담고

있다.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과 불행의 원인은 마음의 갈애(taṇha)에 있

고, 팔정도의 실천수행을 통해 고(苦)의 원인인 갈애를 제거함으로써 고

멸(苦滅) 즉 열반에 이르게 된다는 가르침이다. 팔정도의 수행내용을 달

리 표현한 것이 계(戒, sīla), 정(定, samādhi), 혜(慧, paññā) 삼학(三學)

인데 이것이 불타 이래로 불교실천수행의 근본이다. 따라서 불타는 선

정(禪定)과 지혜에 못지않게 계율의 중요성도 강조하고 있다.

 

전단(栴檀), 타가라, 청련화(靑蓮華), 밧시키, 이들 향기가 있는 것 중에

계행(戒行, sīla)의 향기가 가장 뛰어나다.91)

91) Dhp, 55.

 

비록 백년을 살지라고, 파계(破戒, dusīla)를 하고 ‘선정에 들지 않는다

면’(asamāhito) 계를 지니고 ‘선정에 든 사람’(jhāyino)이 하루를 사는 것

만 못하다.92)

92) Dhp, 110.

 

현자는 이 도리를 알고 계율을 지켜 열반에 이르는 길을 어서어서 청정

하게 하라.93)

93) Dhp, 289.

 

우리는 여기에서 다시 자문(自問)하게 된다. 계율과 선정의 수행실천

을 통해 얻게 되는 지혜, 그리고 그 지혜로 번뇌와 갈애를 제거하여 얻

게 되는 열반은 과연 어떠한 것일까?『법구경』는 초기경전 가운데서도

가장 명료하게 불교적 지혜의 근간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다.

 

부처님(Buddha)과 교법(Dhamma)과 승가(Samgha)에 귀의한 사람은 ‘바

른 지혜’(sammappaññā)로 사성제(四聖諦)를 본다.(passati)94)

94) Dhp, 190.

 

고(苦)와 고의 일어난 원인과 고의 초극과 고의 멸(滅)에 이르는 여덟 가

지의 성스러운 길이다.95)

95) Dhp, 191.

 

“모든 형성되어진 것은 무상(無常)하다”고 ‘지혜를 가지고 볼 때’(pannāya

passati) 그는 고(苦)를 싫어한다. 이것이 ‘청정에 이르는 길’ (visuddhimagga)

이다.96)

96) Dhp, 277.

 

“모든 형성되어진 것은 고(苦)이다”고 지혜를 가지고 볼 때, 그는 고를 싫

어한다. 이것이 청정에 이르는 길이다.97)

97) Dhp, 278.

 

“모든 사물은 내가 아니다”라고 지혜를 가지고 볼 때, 그는 고를 싫어한

다. 이것이 청정에 이르는 길이다.98)

98) Dhp, 279.

 

불법승(佛法僧)은 불교의 세 가지 보배 즉 삼보(三寶)로, 여기에 귀의

한다는 것은 곧 불교도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불교도가 된다

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 물음에 대해 ‘바른 지혜로 사성제를 본다’

고 대답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불교를 믿고, 그 가르침에 따라 실천

수행하는 궁극의 목적은 다름 아닌 ‘바른 지혜로 사성제를 보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다시 ‘바른 지혜로 사성제를 보는 것’은 무엇

을99) 말하는 것일까? 우리는 경전에 설해진 사성제의 가르침을 읽고 어

느 정도 그 의미를 이해할 수도 있고 또 연구서적을 읽고 그 개념을 더

욱 정확하게 알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사상에 공감하여 자신도 팔정도를

실천하며 욕심을 줄이고 성냄을 자제할 수도 있다. 그러한 한에서 그것

을 지혜가 전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聞慧․思慧의 차원), 지혜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어 ‘깊은 지혜’(gambhira-pañña)가 완성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100) 지혜가 완성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증거는 자신의 마음 가운데 있는 번뇌와 갈애가 완전히 소멸된 상태라

고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성제의 진리를 지식의 내용으로써가

아니라 주체적 내적 체험의 내용으로써 직접 자내증(自內證)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불타가 설한 언설(言說) 즉 사성제의 교법

(敎法)을 매개로 하여 불타가 깨달은 진리(理法)를 불타와 같이 있는 그

대로 재체험하는 것이다. 이것이 전술한 ‘바른 지혜로 사성제를 보는

것’(cattāri ariyasaccāni sammappaññāya passati)의 참뜻이며 또한 불

교의 사자상승(師資相承)의 원형이다. 또 삼보에 귀의한 불교도가 인생

을 통해 실현해야 할 근본과제(人生一大事)이며 깨달음의 내용이 되는

것이다.

99) Dhp, 110.

100) Dhp, 38에 마음이 안주하지 않고, 正法을 알지 못하고, 信心이 흔들리면 ‘지혜

     가 완성되지 않는다’(paññā na paripūrati)는 표현이 나온다. 또 Dhp, 403에는

     ‘깊은 지혜’(gambhira-pañña)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사성제가 인생의 현실태(苦․集諦)와 지향해야 할 가능태(滅․道諦)

의 인과(因果)의 진실을 포괄하고 있는 ‘인생의 실상(實相)’이라면, 제행

(諸行)의 무상과 고(苦), 제법(諸法)의 비아(非我)를 지혜에 의해 보는

것이 청정에 이르는 길이라고 하는 게송은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 것일

까? 윤회하는 생존(bhava)의 근본핵이 되는 것이 마음의 번뇌와 갈애인

데, 이를 청정하게 하는 직접적인 원인으로 경험 가능한 일체 제현상의

실상인 무상․고(苦)․비아(非我)의 지혜가 제시되어 있음을 알 수 있

다. 그리고 그러한 지혜를 얻을 때 고(苦)의 생존에 대한 집착을 벗어나

해탈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의 근저에는, 모든 생명체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자

기 자신과 생(生)에 대한 맹목적인 태도와 집착의 근원에 ‘사물의 실상’

에 대한 무지(無智)를 전제(前提)로 하고 있으며 무지의 주체적 전환이

다름 아닌 지혜이다. 그리고 지혜의 내용이 곧 전술한 ‘최상의 진리

(Dhamma uttama)이며 그것을 교법으로 설한 것이 사성제이며 무상․

고․무아인 것이다.

 

이상에서 ‘열반에 이르는 길’(nibbāṇagāminī)에 관한 「법구경」의 가르

침을 정리해 보았다.『법구경』은 행위의 윤리적 근거로써 인과업보(因

果業報)사상을 설하고, 그 원리가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통해 실현됨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이 윤회하는 고통의 세계를 초월하여 참다운 행

복을 얻기 위한 토대가 사람의 마음 가운데 있음을 밝히고 있다. 번뇌와

지혜는 마음의 야누스적인 두 측면으로, 마음이 경험하는 현상의 세계

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현상계를 있는 그대로 여실(如實)하게

볼 때 지혜는 늘어나고 번뇌는 줄어들지만, 여실하게 보지 못할 때는 그

반대가 된다. ?법구경?은 마음이 지혜를 얻어 잘못된 집착과 번뇌로부

터 벗어나는 수행을 ‘열반에 이르는 길’이라고 부르고 있다.

 

『법구경』에서는 열반이라는 술어(術語) 이외에 이와 같은 의미로 피안

(彼岸, pāragāmino param)101), 해탈의 경지(vimokha gocara)102), 불사

(不死)의 경지(amataṁ padaṁ, accuta-ṭhāna)103), 적정(寂靜, santi)104),

적정의 경지(padaṁ santaṁ)105), 불타의 경지(Buddham-gocaraṁ)106)

등의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 가운데 피안은 ‘윤회와 미망’(saṁsāraṁ

moham)을 넘어선 영역임을 명시한 예107)도 있어 이것이 공간적인 어

떤 장소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

101) Dhp, 85, 414.

102) Dhp, 92, 93.

103) Dhp, 93, 225.

104) Dhp, 202, 285.

105) Dhp, 368, 381.

106) Dhp, 179, 180.

107) Dhp, 414.

 

『법구경』에 나오는 열반에 대한 묘사는 대강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

가 가능하다. 하나는 다음 게송처럼 열반을 적극적으로 번뇌의 소멸과

행복(sukha), 안은(安隱, yogakkhema) 등으로 규정하는 경우이다.

 

‘번뇌가 멸하여’(khīṇāsavā) 빛나는 사람은 현세에 있어 열반에 이른 것이

다.(parinibbuta)108)

108) Dhp, 89.

 

탐욕과 분노(rāgan ca dosañ)를 끊으면 너는 열반에 이를 것이다.109)

109) Dhp, 369.

 

배고픔은 가장 큰 병이고, 형성되어진 것(신체)은 최고의 고통이다. 이 이

치를 있는 그대로(yathābhūtam) 안다면 최상의 행복(paramaṁ sukham)

인 열반이 있다.110)

110) Dhp, 203.

 

선정(禪定, jhāyino)에 들고, 참고 견디며 항상 노력하는 현자(賢者)들은

최상의 안은(yogakkhemam anuttaram)인 열반을 얻는다.111)

111) Dhp, 23.

 

초기불교의 모든 수행이 지향하는 궁극의 목표가 마음의 번뇌를 제거

하는 ‘마음의 정화(淨化)’(sacittāpariyodapanam)112)를 통해 심청정(心淸

淨, citta-visuddhi)113)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법구경?에서는 이를

청정도(淸淨道, maggovisuddhiyā)114)라고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번뇌

의 소멸이 열반(혹은 해탈)이라는 것은 ?법구경?115)가운데 기본적으로

전제되어 있다.

112) Dhp, 183.

113) Dhp, 165, 412, 413.

114) Dhp, 277, 278, 279.

115) Dhp, 93, 226.

 

그러면 번뇌가 소멸된 마음의 상태는 어떠한 것일까? 열반을 ‘최상의

행복’(paraā sukham)이라는 것은 번뇌가 완전히 소멸된 심적 상태를 표

현한 것이 아닐까 한다. 만약 그러한 해석이 타당하다면 이 양자를 종합

한 개념이 yogakkhema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yogakkhema는 한

역『법구경』116)에서는 길상(吉祥)이라고 번역되고 있는데, yoga와

 

khema가 결합된 복합어이다. 이 용어는 이미 veda 문헌117)에 ‘재산을

지니는 것’, ‘재산’, ‘생계(生計)’, ‘안녕’, ‘행복’ 등의 의미로 자주 사용되

고 있다. 이를 불교에서 차용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법구경』의 주석

경(注釋經)118)에서는 속박, 결박 등의 의미가 있는 yoga를 네 가지 번

뇌로 해석하여, 번뇌로부터 마음이 해탈하여 안은(安隱)한 상태인 것으

로 주석하고 있다.

116) 巴利語ㆍ漢文 對照法句經, p. 3.

117) 中村元 譯, ?ブッダの眞理のことば, 感興のことば?, p. 77.

118) R.C.Childers, Dic. of Pali language, p. 604.

 

그러면 생사윤회를 벗어난 그 마음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만약 생사

윤회계를 벗어나 영원히 존재한다면 상주론(常住論)에 떨어질 것이요,

몸이 죽은 다음에 몸과 더불어 사라진다면 단멸론(斷滅論)에 떨어질 것

이다. 이미 불타는 여래(如來) 사후(死後)의 유무(有無)의 문제에 대해

서 무기(無記, Avyakta)의 태도를 취하고 있다.119)

119) 김용환, 「佛陀と形而上學」, pp. 71-87.

 

이러한 의문에 대답을 해주고 있는 것이 열반에 대한 다음 유형의 묘

사가 아닐까 한다.

 

재산을 모으지 않고, 음식에 대해 그 본성을 아는, 그 사람들의 해탈의 경

지는 ‘공(空)하고 상(相)이 없어’(suññato animitto) 그들이 가는 길은

기 어렵다. 마치 허공을 나는 새의 자취를 알기가 어려운 것처럼.120)

120) Dhp, 92.

 

불타의 경지는 넓어서 끝이 없다.(anantagocaraṁ), 족적이 없는 그를 어

떠한 도(道)로써 유혹할 수 있을까?121)

121) Dhp, 179, 189.

 

‘말로 설할 수 없는 경지’(anakkhāte)에 대하여 뜻을 세우고, 마음은 충만

하여 모든 애욕(kāma)에서 벗어난 사람은 (흐름을 거스러는 사람)이라

불린다.122)

122) Dhp, 218.

 

해탈의 경지가 공하다(suññato)는 것은 Nikāya의 용례에 따르면 무아

(無我, anattā)나 무아소(無我所, anattaniya)123)를 의미하기도 하고 또

는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러 마음 가운데 일체의 번뇌가 소멸된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124) 그러한 의미라면 앞의 유형과 다르지 않다.

123) Saṃyutta Nikāya, ⅩⅩⅩⅤ, 85.

124) Majjhima Nikāya, 121.

 

상(相)이 없다(animitta, 無相)는 것은 마음이 탐․진․치의 번뇌의 속

박으로부터 해탈한 상태이므로 무량심(無量心, appamāṇa-citta), 무상심

(無相心, animittā-citta), 무소유심(無所有心, ākincañña-citta)이라는

것125)인데, 이것 역시 번뇌의 소멸 상태를 가르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

런데 그들이 가는 길이 새의 자취와 같이 ‘알기 어렵다’든가, 불타의 경

지는 ‘넓어서 끝이 없다’든가, ‘말로 설할 수 없다’는 표현은 열반이 궁극

적으로는 언어적 개념에 의해 규정하거나 한정할 수 없는 영역임을 말

하고 있다. 열반의 이러한 측면은 궁극적 실재인 Brahman(梵)이나

Ātman(自我)이 개념적으로 규정할 수 없는 것으로 보는 우파니샤드의

사상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으나, 이를 존재론적인 관점에서 논하고 있

지 않는 것은 매우 불교적이며, 전술한 불타의 무기(無記)의 입장과 상

응하는 것이다.

125) Nyanatiloka, Buddhist dic. p. 47.

 

7. 결어(結語)

 

『법구경』은 매우 간결한 시구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자체로 완전한

사상적 체계를 갖추고 있어 별도의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문헌적

연구에 의하면『법구경』은 23품 423개의 게송 가운데 상당 부분이 다른

경전 가운데에도 산견(散見)되는 것으로 보아, 일정한 시기에 불타의 금

언(金言)으로 전승되던 것을 현재와 같은 형태로 편찬한 것일 것이다.

각 품의 명칭은 게송의 내용을 참작하여 붙인 것으로 이들 배열과 순서

에 특별한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가운데는 초기

불교의 주요한 기본교리가 거의 망라되고 있다.

 

불교의 근본인 불ㆍ법ㆍ승(佛ㆍ法ㆍ僧) 삼보(三寶)와 삼보귀의(三寶

歸依)의 본질이 ‘바른 지혜에 의해 사성제(四聖諦)를 관(觀)하는 것이다.’

라는 명제와 ‘모든 현상이 무상(無常)ㆍ고(苦)ㆍ비아(非我)임을 지혜를

가지고 보는 것이 청정(열반)의 길’이라는 명제는 초기불교에서 지혜의

의의와 그 내용을 천명한 것으로 주목할 가치가 있다.

 

인과업보(因果業報)와 윤회(輪廻)를 기본원리로 전제하는 불교의 실

천윤리는 인과업보에 따라 생사윤회하는 고(苦)의 세계로부터 해탈하는

것을 근본 관심사로 하고 있다. 마음의 번뇌를 윤회의 원인으로 보기 때

문에 그것을 제거하는 실천방법으로 팔정도(八正道)와 계정혜(戒定慧)

를 제시한다. 따라서 초기불교의 실천 윤리는 인간과 인간관계의 원리

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존재방식과 그 내적 변화에 주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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