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고성신계사비구니낙암당사신비문
高城神溪寺比丘尼洛庵堂思信碑文
(1664~1765)
있는 곳 : 강원도 고성군 신북면 창대리 금강산 신계사
세운 때 : 조선 영조 43년 정해(1767)
所 在 : 江原道 高城郡 新北面 倉垈里 金剛山 神溪寺1)
年 代 : 朝鮮 英祖 四十三年 丁亥(1767)
1) 신계사(神溪寺):금강산 외금강에 있다. 신라 법흥왕 6년(519) 보문(普문)이 창
건하고, 진덕여왕 7년(653) 김유신이 중수했다. 최근 대한불교조계종과 조선불
교도연맹이 협력하여 복원불사를 마쳤다.
낙암당 비구니 수좌 사신의 부도비[비양]2)
洛庵堂尼首座思信之浮屠碑 [碑陽]
2) 비양(碑陽):비의 전면(前面)을 말한다. 본 비문의 경우, 비의 전면에 비문의 제목
인 제액(題額)이 쓰여 있고, 뒷면(後面)에 비문의 전문(全文)이 새겨진 경우이다.
【碑陰】
스님은 경성3)사람으로, 속성은 강(姜)씨이며 □□□의 딸이다. 강희갑
술년4)에 태어났는데, 약관(弱冠)에 이미 일찍부터 세속에는 뜻이 없었다.
이에 스스로 발심하고 서울 외곽의 종남산5) 미타암6)을 찾아가 법찬(法
贊) 스님을 은사로 하여 스님이 되었다. 법찬은 교동인씨7)의 후손이다.
師京城人. 俗姓姜氏, □□□之女也. 師生于康熙甲戌, 而年至
弱冠, 早有厭世之志. 而自投於京外終南山彌陀庵, 法贊尼師
處, 削髮爲師. 法贊, 乃仁氏之後裔也.
3) 경성(京城):서울을 말한다.
4) 강희갑술(康熙甲戌):강희는 청나라 성조(聖祖:재위 1661~1722)를 말한다. 강희
갑술년은 조선의 숙종 20년(1694)이다.
5) 종남산(終南山):서울 남산의 옛이름이다.
6) 미타암(彌陀庵):현재의 서울 성동구 옥수동(두무개)에 소재한 대한불교조계종
소속 미타사를 말한다. 888년(신라 진성여왕2) 대원(大原)이 창건하였고, 1115년
(고려 예종10) 비구니 봉적(奉寂)과 만보(萬寶)스님이 금호동 골짜기에서 종남
산으로 사찰은 옮기고 극락전을 세웠다. 1827년(순조7) 환신(幻身)이 무량수전
(無量壽殿)을 세웠으며, 1862년(철종13) 인허(印虛)스님이 조대비(趙大妃)의 조
력에 힘입어 극락전을 중창했다. 서울의 사대문 밖 비구니 사대승방(四尼寺) 중
에 하나이다. 사대승방은 현 보문동의 탑골승방(普門寺), 숭인동의 새절승방(현
청룡사 靑龍寺), 석관동의 돌곶이승방(현 淸凉寺)과 두무개승방(현 彌陀寺)이다.
이 절들 중에 청룡사는 왕실의 여인들과 인연깊은 사찰이며, 단종이 유배시에
정순왕후와 이별한 곳이며 이후 궁녀들이 출가하여 말년을 보낸 곳이기도 하
다. 지금도 비구니대중의 수행도량으로 정갈하게 전승되고 있다.
7) 교동(喬桐):강화도의 서북 염주(塩州)의 남쪽.
스님의 나이와 뜻이 이미 어른이 되었으니, 뜻을 세운 장년의 나이에
염불과 독경을 부지런히 수행하였음은 물론 항상 베푸는 것(捨施)으로
공부를 삼았다. 부처님의 궁전을 고치는 불사에도 큰 공을 남겼다. 비록
비구니라 하지만, 장부의 사문(丈夫沙門)이라 함에도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었다. 가벼운 병을 앓더니, 건륭을유년8) 6월 10일에 고요히 적멸의 세
계에 돌아갔다.
師年志旣長, 勤于念誦, 捨施爲工, 亦有佛殿改建之功. 雖曰
尼師, 何愧於丈夫沙門也. 乾隆乙酉六月十日, 示微疾, 因以
歸寂.
8) 건륭을유(乾隆乙酉):건륭은 청나라 고종(高宗:재위 1735~1795)을 말하며, 을유
는 조선의 영조41년(1765)이다.
문하 제자로 태희(太熙)・대은(大訔) 등의 제자들이 불교의 사문법9)에
따라 미타사의 동쪽 산기슭에서 다비(茶毗)10)하였는데, 이날 밤 산중(山
中)에서 서광이 비쳐서 기이한 향기(異香)가 진동하므로 대중들이 이를
보고 경탄해 마지않았다. 화장 후 바위 사이의 소나무 가지에서 영골(靈
骨)사리 일과를 얻었다. 문인들이 외금강산(外金剛山) 동쪽 신계사(神溪
寺)의 아래쪽에 돌을 가려내어 부도를 세우고 사리를 봉안하였다. 건륭32
년11) 정혜 9월에 세우다.
門弟子太熙大訔等, 依沙門法, 茶毗于終南之東嶺, 是日夜, 山
中瑞□□, 有異香, 衆人驚異之. 收得一枚靈骨於岩松上. 門
人, 乃建浮屠, 藏骨於金剛之東神溪寺之下, 而伐石, 略記其顚
末云爾. 乾隆三十二年丁亥九月日立.
9) 사문법(沙門法):불교의 스님들이 행하는 다비의례(茶毗儀禮)를 말한다.
10) 다비(茶毗): jhāpita. 사비(闍毗)・사유(闍維) 등으로 음사(音寫)하고, 화장(火
葬)·분소(焚燒)·연소(燃燒) 등으로 한역(漢譯)한다.
11) 건륭삼십(乾隆三十二):건륭은 청나라 고종(高宗:재위 1736~1795)을 말하며, 30
년은 조선의 정조 43년(1767)이다.
[揭載 및 對校文獻] 『楡岾寺本末寺誌』 pp.257~258(亞細亞文化社刊, 1977).
02.영변보현사비구니정유여대사비문
寧邊普賢寺比丘尼定有女大師碑文
(1717~1782)
있는 곳 : 평안북도 영변군 북신현면 묘향산 보현사 칠성암(법왕대)
세운 때 : 미상(조선 정조 6년 임인(1782) 이후로 추정됨)
所 在 : 平安北道 寧邊郡 北薪峴面 妙香山 普賢寺 七星庵(法王臺)
年 代 : 未詳(朝鮮 正祖 六年 壬寅(1782) 以後로 推定됨)
여대사정유의 부도비명과 서
女大師定有浮屠碑銘 幷序
정유스님의 속성은 강(姜)씨이니 평양의 양반집 딸이다. 성품이 고결
하여 세상에 대한 욕심이 전혀 없었다. 어릴 적부터 불교에 귀의하여 어
육과 오신채는 입에 대지 않았다. 항상 낭랑한 목소리로 경전을 수지 독
송하되 밤낮으로 쉬지 않았다. 항상 마음에 명산 대찰을 찾아 다니기를
마치 자기 집 문지방 드나들 듯 하였다. 그러나 밤이면 반드시 뜰에 나와
북두칠성을 향해 예배를 올리고 방에 들어가서는 벽을 향해 고요히 앉아
정진하였으니, 마치 잠자는 듯하였지만 실은 선정에 들어 성성적적(惺惺
寂寂)하였다.
大師俗姓姜, 平壤良家女也. 性恬淨, 無人欲. 自少, 歸心佛祖,
口不近葷血, 喃喃誦貝葉書, 以忘晨夕. 意至行來名山水, 若踰
閾, 然夜分必庭拜北斗, 入室面壁, 寂然若坐睡, 實非睡也.
영조을미년1) 내가 관서(평안도)의 절도사에서 물러나 종남산2) 옛 집에
돌아와 있었다. 어느 날 정유스님이 찾아 왔거늘 내가 말하되, “오시느라
수고가 많았을 것이며 어디에 사시느냐”고 물었다. 정유스님이 대답하되
“관서지방 사람들이 절도사의 은택을 입지 않은 이가 없어 모두들 고마
워하고 있습니다. 제가 비록 여인의 몸이지만 어찌 한번 와서 감사의 인
사를 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英宗乙未, 余納關西節, 歸終南舊第. 一日師請謁. 余問曰,
“遠來良苦意, 何居.”師曰, “關西民 被老爺恩澤, 無終極. 身
雖女人乎, 安得不一來謝.”
1) 영조을미(英宗乙未):1775년(영조51)
2) 종남산(終南山):서울 남산(南山)의 옛이름
이에 나는 집 사람인 정경부인(貞敬夫人)과 함께 나의 집에서 같이 지
내도록 하였다. 몇 달이 지나가고 일년이 지나고 또 일년이 지나도 한결
같았으니, 조금도 권태로운 빛이 없었다. 나 또한 일찍이 머무는 바에 정
성을 다했다.
仍侍吾室貞敬夫人, 留數月以去, 明年如之, 又明年又如之, 其
容不少倦, 余嘗盡室居.
마침 명덕산(明德山)3)에서 어떤 젊은 비구니 스님이 찾아왔는데 이름
은 쾌호(快浩)였다. 강씨와 모자의 인연을 맺어 주었으니 늙어 의탁할 곳
이 생겼다. 춘성당(春星堂)을 청소하여 쾌호스님으로 하여 정유스님과 함
께 머물게 했다. 날마다 고요하고 깊은 밤이 되면 지팡이를 짚고 광영지
(光影池)4)에 서서 바라보니, 울창한 숲속 멀리 대사의 방에는 환한 등불
이 창문을 비추었고, 독경하는 소리의 높고 낮음에 따라 솔바람과 흐르는
물소리마저 서로 응답하였다. 늦은 밤까지 잠에 들지 않고 수행하고 있음
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문득 기꺼워 하였으니, ‘이 산 중에 기이한 일이 머
무는가’ 기뻐하였다.
明德山中師來言, 以僧快浩者. 結爲母子, 老身庶可有托. 仍以
快浩見余掃春星堂, 使師與快浩者留. 每夜深, 倚杖光影池, 上
望見萬木叢翳中, 孤燈炯然照窓, 經聲或高或低, 與松風澗響
相答應, 可知師不眠也. 余輒喜曰, ‘此山居奇事’.
3) 명덕산(明德山):1780년(정조4)에 사도세자의 신원을 주장하다 물러나 1788년
(정조12) 우의정에 오르기까지 번암이 8년간 은거하던 곳이다. 「명덕덕기明德德
記」(『번암집』권34, [한국문집총간]권236 p.106상).
4) 광영지(光影池):명덕동 시절 채제공이 가꾸던 연못.
얼마 되지 않아, 스님은 행장을 꾸리며 “스님이 되기 위해 장단의 화장
암5)으로 떠납니다.”하며 하직인사를 하였다. 이 때, 스님의 나이는 이미
육십여 세였다. 그 때 내가 위로하되 “어찌 그리 스스로 어려운 길(苦行)
을 가려고 하느냐”고 하니, 강씨가 말하기를 “앞으로 죽음이 멀지 않았습
니다. 지극한 원을 세워 열반에 이르고자합니다. 스님이 되지 않고서는
이 소원을 성취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하고는 눈물을 흘리었으니, “후
일을 기약할 수가 없어 매우 슬프다”고 하였다.
未幾, 師俶裝曰, “將歸長湍之華藏菴, 祝髮爲僧.” 從此辭時,
師年已六十餘. 余慰之曰, “何自苦乃爾.” 師曰, “死不遠, 至願
往涅槃, 不祝髮恐不得如願. 仍泣下曰, 後期有無, 以是悲耳.”
5) 화장암(華藏菴):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대원리 보봉산에 위치한 화장사로, 고려
조에 창건되었으며 대웅전, 명부전, 나한전 등의 전각이 보전되었으며, 지공화
상탑(指空和尙塔)이 있다.
그 후 몇 달이 지나 화장사로부터 한 장의 편지가 왔는데 ‘저는 모일(某
日)에 삭발하고 스님이 되었으며 법명은 정유이고 은사스님은 율암의 식
활’이라고 하였다. 그후 임인년6) 11월 15일에 입적하였으니 세수는 66세
였다. 화장한 후 사리가 출현하였다. 쾌호스님이 묘향산 보현사 칠성암7)
에 탑과 비를 세우고자 한다면서 나에게 글을 청하니, 옛일들을 생각하여
기록하였다.
後數月往華藏菴, 有書曰, ‘已於某日祝髮, 法名曰定有, 大法
師曰 律菴食活云’. 壬寅十一月十五日, 師化去, 臘六十六. 及
涅槃, 舍利珠跳出, 快浩將安塔於關西之七星菴, 乞余文以記
其事念.
6) 임인년(壬寅年):1782년(정조6)을 말한다
7) 칠성암(七星菴):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에 위치한 묘향산 보현사의 산내 암자
이다.
지난 무술년8) 여름 연경(燕京)으로 사신갔다가 돌아오는 날 밤에 청천
강(淸川江)9)을 건넜는데, 평양으로부터 이백여의 먼길을 도보로 와 배에
서 내리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로 반갑게 만나 수박(西瓜)을 잘라
서로 나누어 먹었다.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 후 모든 재앙을 물리치
는 양재(禳災)기도를 위해 깊은 산에 들어가 목욕재계하고 백일 간에 걸
쳐 철야하며 기도해주신 그 은혜 또한 잊을 수 없다. 아! 금생에 있어 언
제 다시 만날 수 있으랴! 나는 쾌호스님의 수양어머니 스님을 위한 간곡
한 청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붓을 잡아 기록한다. 명하여 가로되,
余戊戌夏, 使燕還夜, 渡淸川江, 師自平壤徒步二百里, 待我於
舟中. 相見喜甚, 剖西瓜, 以進其意, 何可忘也. 後又爲余禳灾,
入深山齋沐, 達曙禱神, 盡百日乃止, 觀其意事可以益, 余死亦
無辭. 嗚呼. 於今世, 何可復得也. 余不忍屓師强疾, 而爲之銘.
銘曰,
8) 무술년(戊戌年):1778년(정조2)을 말한다.
9) 청천강(淸川江):평안북도 적유령(狄踰嶺)에서 시작하여 희천(熙川)・영변(寧
邊)・정주(定州)・박천(博川)・안주(安州) 등을 거쳐 황해(黃海)로 흐르는 강. 고
구려(高句麗) 때의 이름은 살수(薩水).
이 세상은 어찌 고해(苦海)라 하며,
저 서방은 어찌 극락(極樂)이라 하는가.
관에 들음 어찌 싫어하고,
화장은 왜 하려 하는가.
此界何苦,
西方何樂.
棺槨何厭,
茶毘何欲.
곽에 들어가건 화장하건 할 것 없이,
마침내는 모두가 무로 돌아간다네.
필경에는 어느 틈에 머무는가,
나는 말하겠네.
無問棺槨與茶毘,
歸於無.
畢竟奚間,
吾故曰.
하늘과 땅에 가득한 백천만가지 세상사,
바랄 것도 바라지 않을 것도 없다네.
돌아가서 석가모니부처님 뵈옵거든,
내 말이 어떠한지 여쭈어 주시길.
盈天地百千萬事,
無可願亦無不可願.
歸謁釋迦牟尼,
試以吾言問之.
[揭載 및 對校文獻] 蔡濟恭, 『樊巖集』57, 「碑」(韓國文集叢刊235, 筆寫本1824).
03.정읍내장사비구니세만공덕기념비문
井邑內藏寺比丘尼世萬功德記念碑文
(1847~1932)
있는 곳 : 전라북도 정읍시 내장동 내장산 내장사
세운 때 : 일제 강점기 기묘(1939)
所 在 : 全羅北道 井邑市 內藏洞 內藏山 內藏寺
年 代 : 日帝强占期 己卯(1939)
내장산 비구니 세만 공덕기념비와 서
內藏山比丘尼世萬功德紀念碑 幷序
당나라 때 신주1)의 노행자2)가 황매산3) 오조 홍인대사(弘忍大師)
4)로부터 의법(衣法)을 전해 받은3)4) 후5) 대유령(大庾嶺)을 넘어 조계산에 이르니,
그곳에는 유지략(劉志略)6)의 고모인 무진장비구니스님이 있었다. 노행
자에게 『열반경涅槃經』에 대한 뜻을 물었다. 이에 비구니는 노행자가 비
범(非凡)한 사람인 줄 알아차리고 백부(伯父)에게 부탁하여 보림사(寶林
寺)7)를 중수하여 노행자를 그 곳에 머물도록 하였다.8)
在唐之新州盧行者, 得黃梅衣鉢, 踰嶺至曹溪, 有無盡藏比丘
尼. 問涅槃經義, 而知其非凡流, 乃白其父兄, 重脩寶林寺, 而
延居之.
1) 신주(新州):6조 혜능의 출생지. 신주는 당나라 때 영남도(嶺南道)에 속한, 일대
를 관할하던 주(州) 이름으로 지금의 광동성 신흥현(新興縣)이다. 『전법정종정
조도傳法正宗定祖圖』 권6(대정장51, p.772a28) “第三十三祖慧能 新州新興人姓
盧氏”.
2) 노행자(盧行者):선종의 6조 혜능(慧能)을 말한다. ‘노’는 혜능의 속성. ‘행자’란
스님이 되기 전 절에서 여러 가지 일에 종사하면서 수행을 하는 예비수행자를
말한다. 5조 홍인(弘忍)의 문하에서 행자로 있었기 때문에 노행자라고 불리었
다. 『종경록宗鏡錄』(대정장48, p.444c13) “黃梅門下有五百人 為甚麼 盧行者獨得
衣鉢 師云 只為四百九十九人 皆解佛法 只有盧行者一人 不解佛法 只會其道 所
以得衣鉢”.
3) 황매산(黃梅山):홍인대사가 주석하던 보림사가 있던 도량. 지금의 중국 호북성
(湖北省) 동부의 기주(夔州)에 위치한다.
4) 홍인대사(弘忍大師):중국 선종(禪宗)의 제 5조로 호북성 황매현 출신이다. 스승
이며 제4조인 도신(道信)을 만나 7세때 출가하여 51세에 대사(大師)가 되었다.
제6조인 혜능(慧能)의 법기(法器)를 알아보고 의발(衣鉢)을 전수하였다.
5) 황매의발(黃梅衣鉢):황매산(黃梅山) 홍인(弘忍)의 옷과 발우이니, 선종(禪宗)
에서는 전법(傳法)의 표시로 스승의 법의(法衣)와 발우(鉢盂)를 제자에게 전
한다. 5조 홍인대사 문하에 있던 신수(神秀)스님이 수법(受法)하리라는 대중
의 믿음을 깨고 뜻밖에 노행자가 홍인의 의발(衣鉢)을 전해 받아 제6조가 되었
다. 이에 신수지지자들의 반발을 염려한 오조홍인은 노행자의 야반주행을 독
려하였고 그는 피신하였다. 『육조대사법보단경六祖大師法寶壇經』(대정장48,
p.355a14)“黃梅門下有五百人 為甚麼 盧行者獨得衣鉢”. 『송고승전宋高僧傳』(대
정장50, p.754a14) “釋弘忍 姓周氏 家寓淮左潯陽 一云黃梅人也”.
6) 유지략(劉志略):당시 덕망이 높았던 거사(居士). 『육조대사법보단경六祖大師法
寶壇經』(대정장48, p.355a14) “有儒士劉志略 禮遇甚厚 志略有姑為尼 名無盡藏”.
7) 보림사(寶林寺):중국 광동성(廣東省) 곡강현(曲江縣)에서 남쪽으로 35km 지점
의 조계산(曹溪山)에 위치한 절. 지금은 남화사(南華寺), 남화선사(南華禪寺)라
고 한다. 502년 인도의 지약(智藥)스님이 창건했다. 677년(의봉2)에 육조혜능이
호북의 황매산(黃梅山)에서 오조홍인으로부터 법을 받고 이곳에 와서 주석한
이후, 남종선풍(南宗禪風)의 근거지가 되었다. 육조스님과 관련된 성보유적이
남아있다. 『육조대사법보단경六祖大師法寶壇經』(대정장48, p.347c).
8) 무진장비구니스님이 『열반경』을 독송하고 있다가 노행자에게 『열반경』의 뜻을
물었다. 노행자가 ‘나는 글은 알지 못하니 뜻만 물어보라’고 말했다. 비구니 스님
이 이상하게 여겨 ‘글을 모르는데 어찌 뜻을 알 수 있습니까?’라고 하자, 노행자
가 말하기를 ‘부처님의 오묘한 뜻은 문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라고 대답했
다. 이 말을 들은 비구니는 노행자가 비범(非凡)한 사람인 줄 알아차리고, 백부에
게 청하여 그 노행자를 보림사에서 머물게 했다. 『사법보단경師法寶壇經』(대정
장48, p.355a12) “師自黃梅得法 回至韶州曹侯村 人無知者 有儒士劉志略 禮遇甚厚
志略有姑為尼 名無盡藏”,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대정장51, p235b10)“尼無盡藏
者 即志略之姑也 常讀涅槃經 師暫聽之即為解說其義 尼遂執卷問字 師曰 字即不
識 義即請問 尼曰 字尚不識曷能會義 師曰 諸佛妙理非關文字 尼驚異之 遍告里中
耆德云 此是有道之士 宜請供養 有魏(魏一作晉)武侯玄孫曹叔良及居民 競來瞻禮
時寶林古寺 自隋末兵火已廢 遂於故基重建梵宇 延師居之”.
머문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자리를 피하기 위해 회주9)와 집주10)의 중
간(會集間)에 숨는 등 옮겨다니다가 법성사11)에 이르렀으며, 바람에 나부
끼는 깃발의 법담(法談)12)을 인연한 후 드디어 스님이 되었다.13) 마침내
조계산으로 돌아와13) 보림사에서 법(法)을 열어 종풍을 크게 진작하니 드
디어 제6조14)라 부르게 되었다. 대개 이러했으니 무진장비구니와의 인연
이 적지 않다고 할 것이다.
居無何, 行者遂避難于懷集間, 轉到法性寺, 因談風幡話己, 遂
爲僧. 而復回曹磎, 開法於寶林, 號爲六祖, 蓋有無盡藏尼之緣
因, 亦爲不淺矣.
9) 회주(會洲):사천성(四川省) 무현(茂縣)에 있었던 지명.
10) 집주(集洲):사천성(四川省) 남강현(南江縣)에 있었던 지명.
11) 법성사(法性寺):육조혜능스님이 득도한 곳. 중국 광주(廣州:廣東省) 북서부에
있는 절, 담마야사(曇摩耶舍), 구나발다라(求那跋陀羅), 달마(達磨)에서 육조혜
능까지 유명한 고승들이 자취를 남긴 도량이다. 705년에는 반야밀제(般若密諦)
삼장이 역주(譯主)가 되어 『능엄경楞嚴經』을 한역한 도량이며, 이어 진제(眞諦),
혜개(慧愷) 등이 주석하며 역경사업을 벌인 도량이다. 676년(의봉1)에 인종법사
(印宗法師)가 『열반경』을 강할 때, 6조혜능이 행자의 신분으로 법을 받은 이후
이곳에 들려 풍번(風幡)의 일화를 남겼다. 지금은 광효사(光孝寺)라 불리우며,
노행자 혜능이 득도할 때 깎은 머리카락을 넣은 예발탑(瘞髮塔), 육조전(六祖
殿) 등이 남아 전한다.
12) 풍번법담(風幡法談):노행자가 법성사에 머물 때, 대중 가운데 두 스님이 바
람에 나부끼는 깃발을 보며 논쟁하였다. 한 스님은 ‘깃발이 움직인다(幡動)’하
였고, 또 한 스님은 ‘바람이 움직인다(風動)’라고 하였다. 이를 지켜보던 육조
스님이 ‘움직이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自心動)’이라 하여 대중을 놀라게 하였
고, 이후 이곳에서 득도하였다는 고사이다.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대정장51,
p.235c3)“暮夜風颺剎幡 聞二僧對論 一云幡動 一云風動 往復酬答未曾契理 師曰
可容俗流輒預高論否 直以風幡非動動自心耳 印宗竊聆此語竦然異之 翌日邀師
入室. 徵風幡之義 師具以理告 印宗不覺起立云 行者定非常人師為是誰. 師更無
所隱直敘得法因由 於是印宗執弟子之禮請受禪要 乃告四眾曰 印宗具足凡夫 今
遇肉身菩薩即指坐 下盧居士云 即此是也”.
13) 혜능스님으로 득도한 날은 2월8일 열반재일이다.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대
정장51, p.235c11)“即此是也 因請出所傳信衣悉令瞻禮 至正月十五日 會諸名德為
之剃髮 二月八日就法性寺智光律師受滿分戒 其戒壇即宋朝求那跋陀三藏之所
置也”.
14) 육조(六祖):달마(達摩)를 제1로 하여 동토(東土)의 제육조(六祖)이니, 서천(西
天:인도 印度)으로 기원하면 삼십삼조(三十三祖)가 된다.
기묘년 3월15)에 내장사 주지 매곡(梅谷)스님16)이 내가 있는 화순(和順)
동림사(東林寺)17)로 나를 찾았다. 내장사18) 영은암19)에 주석하다가 입적
한 세만비구니스님이 영은암을 중흥한 공덕을 추모하여19) 공덕비를 세우
려 하니 비문을 지어달라는 청탁이었다. 부탁을 받고 그의 행적을 자세히
살펴보니, 세만비구니스님은 헌종정미년에20) 광주 금당리(金塘里)
21)에서 태어났다. 파평윤씨의 가문으로 아버지의 휘는 대흥(大興)이고 어머니는
김씨 부인이다.
若己卯三月日, 內藏寺住持, 梅谷上人, 訪鎬於東林道, 其內藏
山靈隱庵, 故比丘尼世萬, 有中興功德, 因請碑記. 謹按, 比丘
尼世萬, 憲宗丁未, 生于光州金塘里. 世族坡平尹氏, 考諱大
興, 妣金氏.
15) 기묘삼월(己卯三月):1939년 3월을 말한다.
16) 매곡(梅谷)스님:학명스님의 제자로 1934년 학명스님의 부도를 조성하였으며,
시왕전을 중건하였다. 1955년에는 내장사에 매곡스님의 부도가 세워졌다.
17) 동림사(東林寺):전라남도 오성현(烏城縣:지금의 화순) 북쪽 5리 지점에 있는
절. 이 절은 또한 정약용(丁若鏞, 1762 ~ 1836)이 그의 아버지가 오성현감으로 재
임 중이던 겨울, 형 정약전과 함께 40여 일 정도 독서하였는데, 이때 『동림사독
서기東林寺讀書記』를 남겼다.
18) 내장사(內藏寺):전라북도 정읍시 내장동 내장산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제
24교구 본사인 선운사(禪雲寺)의 말사이다. 창건기록은 뒤의 ‘주) 영은암’과 같
다. 1539년 조선왕실에 의해 강제소각되기 전부터 내장산 내 암자를 거느린 중
심사찰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1557년 희묵대사(希黙大師)가 새로이 전각을
짓고 사찰명을 복원했다. 1923년 서래봉 중턱의 백련암에 내장사가 소재하였다
가, 1938년부터는 영은암으로 내장사의 사명을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본 비
문에서도 1923년 영은암과 별도로 백련암에 소재했던 내장사 중창불사에 영은
암에 주석하고 있던 세만비구니스님의 적극적인 협력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듯
이, 세만비구니스님의 입적(入寂) 전까지는 내장사에 소속된 산내암자로 영은
암은 별도로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스님 입적(1983년) 후인 1954년 옛 영은
암 터에 향적원을 건립하였다고 전하고 있으나 현재 내장사 경내에 있다.
19) 영은암(靈隱庵):현재 내장사(內藏寺)가 소재한 터에 있었던 암자이름. 636년
(무왕37) 영은조사(靈隱祖師)에 의해 창건된 영은사를 창건기원으로 하지만, 내
장산내의 내장사의 이름이 등장하는 조선조이후에는 영은사를 내장사의 창건
기원으로 전한다. 전후사를 미루어 보건데, 본 비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1896년
~1898년 세만비구니스님이 주석하며 영은암을 중창하던 당시에는 내장사내
암자를 거느리던 수사찰(首寺刹) 내장사와는 별도로 비구니스님수행처로서의
영은암이 독립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0) 헌종정미(憲宗丁未):1847년(헌종13).
21) 금당리(金塘里):전남 광주시 규단리.
고종계유22)에 내장산 영은암으로 찾아가 영학(永學)비구니스님을 은사
로 하고 연곡화상(連谷和尙)을 계사로 하여 스님이 되었으니 세수 이십
칠세였다. 그로부터 스님은 계율을 엄하고 정결히 지켜 대중의 모범이 되
었다. 부처님의 명호를 칭념하되 육시(六時)23)로 정진하나 조금도 피곤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친정집이 넉넉한 편이어서 항상 베풀기를 좋아하
였고 여러 사찰과 세상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모습이 당당하고 강직
하지만, 사람을 대하여 대화할 때는 마치 봄바람처럼 부드럽고 온화(和
易)하여 대인군자(大人君子)의 기상(氣象)을 지녔다.
高宗癸酉, 出家于內藏山靈隱庵, 以永學比丘尼爲恩師, 受戒
法于蓮谷和尙. 時年二十七. 自是以後, 嚴潔持律, 爲範於衆.
念誦佛號, 六時無倦容, 且以經紀有度. 家頗不貧, 故樂施周
窮, 山野多頌聲. 望其儀貌偉骯髒, 卽之, 語言和易, 可有大人
君子氣象.
22) 고종계유(高宗癸酉):1973년(고종10) 스님이 27살 되던 때.
23) 육시(六時):하루를 12時로 하니, 하루 낮 즉, 12시간이다.
고종무자년24) 봄 영은암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암자 전체가 소실되고
말았다. 몇 년이 지나 병신년25) 가을에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3년만인 무
술년26)에 준공과 아울러 전요(殿寮) 20여칸도 함께 계획하였다. 총공사비
3천여량금(三千餘金)의 거액이었으나 단원들로부터의 모금은 하지 않고
오로지 자부담으로 건물이 윤환27)함을 나타내어 본래의 것보다 더욱 장
관이었다.
高宗戊子春, 本庵不戒火化灰土, 經年所, 及丙申秋, 經始重
造, 越明年戊戌, 告功並計殿寮二十餘架, 總費三千餘金, 儘不
扣檀扉, 專傾自槖, 以見輪奐, 興復舊觀.
24) 고종무자(高宗戊子):1888년(고종25)을 말한다.
25) 병신년(丙申年):1896년(고종33)을 말한다.
26) 무술년(戊戌年):1898년을 말한다.
27) 윤환(輪奐):장대하고 미려함(狀大美麗)을 말함.
계해갑자년28) 사이에는 학명(鶴鳴)선사29)가 행각을 멈추고 내장사 주
지로 있으면서 벽련전(碧蓮殿)인 염불당의 중창과 소림선실(少林禪室)을
창건하였는데, 이 때도 세만비구니스님은 5백량이나 되는 거액을 단독으
로 시주하여 마침내 불사를 원만히 성취할 수 있었다.
又屆癸亥甲子間, 鶴鳴禪師, 行脚己, 住持是寺, 出定暇日, 重
築碧蓮之古法殿, 新構少林禪室, 乃勉山中尼師 助緣 獨捨
五百餘金, 竟共成之.
28) 계해갑자간(癸亥甲子間):1923~1924년을 말한다.
29) 학명(鶴鳴):계종(啓宗)스님(1867~1929)의 호. 속명은 백씨이다. 전라남도 영광
출생으로 전라북도 순창 구암사에서 설두화상(雪頭和尙)의 강경(講經)하는 모
습을 보고 출가하기로 결심하고, 영광 불갑사(佛岬寺)로 가서 금화장로(錦華長
老)를 은사로 하여 스님이 되었다. 1900년에 선운사 강사로 취임하였으며, 1923
년 이후 내장사 주지로 있으면서 당우를 일신하였다. 1929년 3월 27일 세수 63,
법랍 43으로 입적하였다.
젊어서는 자순(慈諄)하고 늙을수록 더욱 건건(乾乾)30)하였다. 비록 비
구니의 처소이지만 오히려 옛 총림의 법도가 생생히 살아 있었다. 임신
년31) 11월 11일 가벼운 병을 앓다가 입적하니 세수는 86세요, 법랍은 69하
(夏)였다. 입적한지 8년이 지난 후 스님의 상좌인 정택(正澤)과 덕문(德
文) 등이 스님의 유업을 길이 전하고자 행적비를 세우고자 하였다.
率春慈諄, 老愈乾乾. 雖尼寺, 猶多古叢林風. 及夫壬申十一月
十一日, 示微疾, 歸寂, 世壽八十六. 沒后八年, 其上佐尼正澤
德文等, 爲其師, 樹石紀功, 圖不泯云爾.
30) 건건(乾乾):쉬지 않고 정진함(勉力不息).
31) 임신년(壬申年):1932년을 말한다.
아! 나는 일찍이 내장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주석하였으므로 세만스님
의 은혜로운 덕풍(德風)을 자세히 알고 있었으니 참으로 존경해 마지않
는 바이다. 이제 매곡스님으로부터 세만스님의 은혜로운 가풍을 들은 대
로 기록하였다. 비록 말세의 오탁악세에 처하고 있지만 자못 진인(眞人)
의 아류(亞流)가 될 만하니 어찌 조계산의 무진장비구니가 육조스님을
위해 행한 보림사의 기연만 못하리오! 이렇듯 세만비구니는 스스로 영은
암을 중창하여 법문을 널리 열어 선양하였고, 학명선사 또한 벽련선실을
창건하여 종풍을 크게 떨쳤다. 이어 매곡주지가 새롭게 도량을 개척하고
전료(殿寮)를 창건하였으니, 호남의 선풍을 중흥시킨 이분들의 공로를
어찌 널리 알리지 않으랴? 이에 그 전말을 적어 비석에 새기는 바이다.
嗚呼. 鎬曾住不遠山, 聞萬老之惠風, 靡不尙矣. 得今梅谷上人
亹亹說陳, 乃盡其眞詳. 雖處濁世近日, 殆古眞人流亞, 豈有遜
于曹磎無盡藏比丘尼, 重修寶林之機緣, 寔自萬老, 重造靈隱
后, 法門啓運, 鶴鳴禪伯, 刱碧蓮禪室, 以昌大之. 繼有梅谷住
持, 拓新道場, 開造殿寮, 南中禪風 且未艾, 寧可不知其所自
與, 於是乎書.
1939년 4월 일 석전정호 지음.
己卯四月日, 石顚鼎鎬, 撰.
[揭載 및 對校文獻] : 鼎鎬, 『石顚文鈔』 「石林草」(pp.25~26(法寶院刊, 1962)
'한국전통사상 > 한국고승비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12.회양표훈사백화암청허당휴정대사비문(淮陽表訓寺白華庵淸虛堂休靜大師碑文) (0) | 2018.08.06 |
---|---|
11.양주태고사원증국사탑비문(楊州太古寺圓證國師塔碑文) (0) | 2018.08.06 |
10.군위인각사보각국존정조탑비문(軍威4)麟角寺普覺國尊靜照塔碑 (0) | 2018.08.06 |
09.순천송광사불일보조국사비문(順天松廣寺佛日普照國師碑文) (0) | 2018.08.05 |
08.개성영통사대각국사비문( 開城靈通寺)大覺國師碑文0 (0) | 2018.08.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