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淨土學硏究」 제27집, 2017년 6월
염불선과 선정계위
- 청화스님의 염불선 위차 사상과 관련한 비판적 검토 -
(고려대학교에서 지원된 연구비로 수행되었음(Supported by a Korea University
Grant)).
조준호/고려대학교 철학연구소 연구교수.
• 목 차 •
Ⅰ. 들어가는 말
Ⅱ. 초기와 부파불교의 염불선정계위
1. 염불선정계위
2. 초기경전의 염불선정계위
3. 부파불교의 염불선정계위
4. 심사(尋伺 : vitakka-vicārā)와 선정계위의 문제
5. 심사와 염불선정의 문제
Ⅲ. 마치는 말
[한글요약]
초기불교에서 염불은 선 또는 삼매의 수행범위로 나타난다. 이는 이후
인도불교 전통과 현재의 다른 불교권 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동
아시아에서 염불 이해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정토종에서 염불은
칭명으로 극락왕생을 목표로 수행되어 온 것이 그것이다. 선정의 선종과
양립하여 전개된 이유이다. 이 같은 논의는 최근 본 논자에 의해 규명되
었다. 때문에 염불과 선정계위에 대한 논의는 더욱 생소하게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동아시아에서 염불은 선정계위와는 상관없는 정토사상과 관
련해 주로 논의되어왔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선정계위는 선종의 간화
선이 채용한 염불화두법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그런데 예외적인 경우
로 근현대 한국불교사에 있어 금타화상과 청화(1923-2003)는 염불을 선
정계위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 사상사 또는 불교 수행사에 있어 염불과 선정계위는 어
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초기불교에서 본래 염불은 칭명보다
는 선정으로 수행되었고 선정계위로 연결되어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붓
다의 반열반 이후에 전개된 여러 부파에서도 초기경전의 ‘염불이 선정’이
라는 정도까지는 인정한다. 그렇지만 부파불교는 염불을 초기불교의 근
본선인 사선 등과 관련시켜 설명하지 못한다. 가장 큰 이유는 교리의 엄
밀한 정합성을 따지는 아비달마 불교에서 염불과 선정과 관련한 교리[禪
理]적인 문제에 직면하였다.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염불선정은 시간이 지
날수록 구두(口頭)의 칭명(稱名) 신앙으로 자리를 잡아가면서 수행되었
다. 신행 상에 있어 현재 상좌불교권이나 대승불교권 에서도 칭명염불이
기본이 되어 있는 점에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런데 초기경전에서 근
본선인 사선의 초선은 말[vācā]이 소멸하는 경지로 설명된다. 더 나아가
제2선에서는 무심무사(無尋無伺)로 언어적 사유가 소멸하는 단계이다. 따
라서 부파불교는 기본적으로 말 즉 칭명이 개입된 당시의 염불은 초선은
물론 제2선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고 본 것이다. 초기경전에서 염불
은 선정계위로 설명되는 것에 반해 후대 부파에 이르러서는 본선정인 초
선 이전에 가능한 것으로 간주한다. 결국 부파불교는 초기불교에는 나타
나지 않는 초선 이전의 삼매 개념을 고안하여 염불을 설명할 수밖에 없
는 이유가 된 것이다. 이는 부파불교가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와 달리 칭
명의 염불에 따른 염불 선정 이해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Ⅰ. 들어가는 말
근본적인 의미에서 염불은 선으로 보아야함은 경론을 통해 증명되
었다. 이는 초기불교와 인도불교의 전반 그리고 현재의 여러 불교전
통에서 보더라도 지극히 타당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현재까지 대부분
의 염불 연구자에 있어 염불과 선정계위에 대한 논의는 생소하게 받
아들인다. 마찬가지로 염불수행에 대한 선행연구에 있어서도 선정계
위와는 상관없는 정토사상과 관련한 정토학 차원이 대부분이다. 특히
동아시아 정토종에서는 칭명에 의한 극락왕생에 관한 연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더 나아가 염불(선정)수행을 정토종이나 대승을 넘어
초기불교로 귀결시킨 연구는 본 논자에 의해 아주 최근에 이루어진
일이다.1) 그리고 염불의 기원과 전개가 선정수행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도 또한 논증되었다. 때문에 본래부터 염불선 이었고 실제로 염
불선의 다른 이름들이 이미 경론에 많이 사용되어왔음도 증명하였다.
1) 선과 염불의 관계 -염불선의 기원과 전개에 대한 비판적 고찰 , 「선문화
연구」 14집, 서울: 선리연구원, 2013.6.30.
그렇다면 여기서 다시 염불선학 정립을 위한 새로운 과제가 대두
된다. 불교 사상사 또는 불교 수행사에 있어 염불과 선정계위를 어떻
게 설명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정토학 연구자들에 따르면 염불과
선정계위를 논의는 찾아 볼 수 없다고 한다. 사실 칭명염불이 중심이
된 정토종의 염불 행법으로는 도저히 생각해 볼 수 없는 일일 것이
다. 마찬가지로 동아시아 조사선이나 간화선 우위의 불교 환경 속에
서 적용된 염불화두법에서 또한 선정계위를 찾는 일은 불가능할 것
이다. 때문에 동아시아 한중일 삼국의 불교사에서 단계 또는 계위를
제시한 염불화두법을 찾아 볼 수 있다고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인도에서 불교가 일어난 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염불과 선정계위가
비중 있게 논의된 경우가 있는가? 논자의 과문한 탓이겠지만 과거
종학 차원이나 일본 정토계 종단의 정토학 그리고 현대 불교학에서
는 찾기 힘들 것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놀랍게도 대단히 예외적인 경
우가 있다. 한국의 근현대 불교사에 있어 금타화상과 청화
(1923-2003)의 경우가 그러하다. 모두 염불선 차원에서 석가모니 붓
다의 근본선(根本禪)인 구차제정(九次第定)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
다. 금타나 청화 이외에 한국의 근현대 선승들 가운데에서 붓다의 근
본정인 구차제정에 관심을 보인 경우는 드물 것이다. 조사선이나 간
화선이 최상승선이라는 기치아래 사선 등은 소승선 등으로 폄하되었
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본정인 구차제정은 불교의 궁극과 직결된 불
교 출발 이래 가장 중요하고 핵심에 놓여있는 선정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놀라운 사실은 청화는 이러한 한국불교 상황에서 붓
다의 근본선에 대한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스스로의 수행을 통해
염불선의 선정계위를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논자는
청화선사처럼 붓다가 성도한 구차제정이 제대로 수용될 때 한국불교
의 수행문화는 온전해질 것이라 판단한다. 본고는 이러한 문제의식에
서 먼저 불교 교리사 또는 수행사에 있어 염불과 선정계위의 문제에
어떠한 굴곡이 있었는지를 집중적으로 검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결과적으로 선정속의 염불과 함께 염불선의 계위에 대한 비판적 검
토는 염불선의 차제적인 수행법을 체계화시키고 정착시키기는 근거
가 될 것이다.
Ⅱ. 초기와 부파불교의 염불선정계위
1. 염불선정계위
최근 염불선의 기본 이해를 위한 연구들이 청화선사와 관련하여
많이 진행되고 있다.2) 그런데 청화는 많은 설법에서 염불선을 수도
(修道)의 위차(位次)로 자주 반복해서 설한다. 예를 들면, 아비달마의
사가행(四加行) 또는 사선근(四善根)에 이어 유식오위(唯識五位)를 염
불선 수행에 적용시킨다.3) 청화는 특별하게도 더 근본으로 돌아가서
모든 불교의 공통인 구차제정(九次第定)과 같은 수행계위 또는 선정
계위로 염불선정을 연결시킨다.4) 그는 사선으로 시작하는 구차제정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하고 있다.
2) 조준호, 달마어록에 나타난 염불선 , 「淨土學 硏究」 제18집, 서울: 한국
정토학회, 2012.; 조준호, 선과 염불의 관계 -염불선의 기원과 전개에 대
한 비판적 고찰 , 「선문화연구」 14집, 서울: 선리연구원, 2013.; 고영섭, 원
효의 염불관과 청화의 염불선 , 「불교학보」 제71집, 서울: 동국대 불교문
화연구원, 2015.; 손병욱, 호흡명상적 염불선의 정립을 위한 시도 , 「동아
시아불교문화」 제26집, 부산: 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 2016.; 박경준, 육조
혜능의 선사상과 청화의 실상염불선 , 「불교연구」 39집, 서울: 한국불교연
구원, 2013.; 박경준, 「대지도론」에 나타난 대승의 염불과 선 -청화의 실
상염불선과 관련하여 , 「인도철학」 42집, 서울: 인도철학회, 2014.; 차차석,
정중무상의 인성염불과 청화선사의 염불선 , 「선문화연구」, 서울: 선리연
구원, 2015.; 최동순, 원통불법의 기반으로서 도신의 염불선 , 「淨土學 硏
究」 제18집, 서울: 한국정토학회, 2012.; 한보광, 純禪時代의 念佛禪에 대
한 몇 가지 문제 , 「淨土學 硏究」제18집, 서울: 한국정토학회, 2012.; 한
창호, 解悟와 四善根의 관련성에 대한 일고찰 -무주당(無住堂) 청화(淸
華)선사의 견해를 중심으로 , 「禪學」 제45집, 서울: 한국선학회, 2016. 등
3) 청화, 「圓通佛法의 要諦」, 곡성: 성륜각, 2003. pp.133-137.; 「실상염불선」,
서울: 광륜출판사, 2013, pp.352-362 등.
4) 청화대종사(김영동 역음), 「실상염불선」, 서울: 광륜출판사, 2013, pp.364-365.;
청화, 「圓通佛法의 要諦」, 곡성: 성륜각, 2003. pp.555-558.; 청화, 「正統禪의 香
薰」, 서울: 을지출판공사, 1989, pp.318-324 등.
"4선정법(四禪定法)에도 말씀이 나옵니다만 아함경(阿含經)에서 보면
석존께서 보리수하에서 성도하실 때도 사선정 멸진정(滅盡定)을 닦
아서 대각(大覺)을 성취했습니다. 또 열반 드실 때에도 역시 멸진정
을 거쳐서 4선정의 삼매에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그리고 아라한도
초선(初禪) 2선 3선 4선을 거쳐 멸진정에서 아라한도를 성취한다고
여러 군데에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달마 스님께서 중국에 오시기
전까지는 대체로 선이라 하면 4선정 멸진정 법을 닦았습니다.
그러면 달마 스님 뒤에는 필요가 없는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그러나 근본불교(根本佛敎)가 필요가 없다면 마땅히 4선정
멸진정이 필요가 없어 폐기를 해야겠지요. 그러나 근본불교도 필요
하다면 4선정 멸진정을 꼭 참고해야 합니다.5)
5) 청화, 「圓通佛法의 要諦」, 곡성: 성륜각, 2003. pp.277-278.
청화는 “사선을 외도선이라 폄하는 것은 근본선(根本禪) 도리를 이
해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그렇기에 사선(死禪)과 사정(死定)을 닦는다
고 한국불교계를 경책한다.6) 더 나아가 사선정과 사무색정을 설명하
면서 현재의 한국불교 상황을 다음과 같이 통탄하고 있다.
6) 청화, 「圓通佛法의 要諦」, 곡성: 성륜각, 2003. pp.558-559.
관법(觀法)을 관법 외도(外道)라고 폄(貶)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마
는 부처님의 모든 수행법도 관법이요 6조 스님까지 한결같이 관법
인데 관법이 외도일 수는 없습니다. 그런 것이 지금 한국 불교의 미
숙한 풍토입니다. 참 통탄할 일입니다. 우리는 그런 법집(法執), 불
경에도 의지하지 않고 자기 주관적으로 아무렇게나 국집 하는 그런
법집을 떠나야 합니다. 아함경이나 금강경이나 화엄경이나 다 관법
이 아닌 것이 있습니까?7)
7) 청화, 「圓通佛法의 要諦」, 곡성: 성륜각, 2003. pp.554-555.
논자가 알기로 한국 불교역사에서 이토록 석가모니 붓다의 구
차제정의 중요성을 진지하게 인지하고 여러 가지로 설명해 보려
는 시도는 찾아 볼 수 없다. 대부분 동아시아 선자(禪者)들이 그
래왔듯이 중국에서 성립된 조사선에 경도되어 붓다의 근본선에
특별한 주의를 보내지 않는다. 경론을 통해 설령 어느 정도 알았
더라도 간단하게 관법 외도나 소승법 정도로 무시하는 경향도 있
어왔다. 그러나 청화는 사선과 구차제정을 근본선(根本禪)으로 바
로 순선(純禪)이라고까지 규정한다.8) 청화는 이러한 입장에서 일
찍부터 사선을 포함한 다양한 수도의 위차로서 끊임없이 염불선
을 검증하려는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사선과 구차제정은 분명 붓
다로 시작하는 불교의 정통선(正統禪)이다. 현재 잡다한 선법으로
혼란을 야기하고 있는 한국 불교계는 근본으로 돌아가 붓다의 사
선과 구차제정으로 신중하게 걸러낼 필요가 있다. 청화는 석가모
니 붓다가 성불한 선법으로 염불선을 수행하였음을 보여준다. 때
문에 그의 법어에는 단순히 이론이 아니라 자신의 실제수행에서
기어코 증험(證驗)하려는 치열한 구도정신이 어디에서나 물씬 배
어있다. 불교경론의 거의 모든 수행 위차에 대한 종합적인 회통을
보여준다.9) 결국 청화선사는 오랜 수증 체험에 따라 구차제정 가
운데 제2선에서부터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에 이르기까지 염불선
정의 계위를 다음과 같이 설한다.
8) 청화대종사(김영동 역음), 「실상염불선」, 서울: 광륜출판사, 2013, p.363.
9) 청화, 「圓通佛法의 要諦」, 곡성: 성륜각, 2003. pp.542-545.; 청화대종사(김
영동 역음), 「실상염불선」, 서울: 광륜출판사, 2013, pp.351-366.
제2선 : … 이때 더욱 올라가면 우리 중생 같은 이런 몸이 아니라
광명신(光明身)입니다. 몸이 광명이기 때문에 그때는 몸뚱이 때문에
피차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음식도 먹고 싶으면 생각만 하는 걸로
배가 부르니까 많이 먹으려고 음식 때문에 다툴 필요도 없지요. 아
무튼 이렇게 올라가면 광명의 몸이기 때문에 하등의 갈등이 없습니
다. 그러나 같은 광명신(光明身)이지만 광도(光度)에는 차이가 있습
니다.
제3선 : 그렇게 돼 가다가 3선정(三禪定)이라, 여기 올라가면 오로지
한 마음만이 있습니다. 그때는 마음도 광명도 하나입니다. 이 밑에
는 같은 광명신이지만 몸도 광명이 되어서 광명이 그때는 하나의
광도가 차이가 있단 말입니다. 허나 3선정 지위에 올라가면 차이가
없습니다. 다 순수광명인 동시에 그때는 마음도 같습니다. 다만 같
으나 아직은 부처의 지위는 못되어 있습니다.
공무변처정 : 이렇게 되어 가다 그때는 우주가 텅 비어서, 광명도
하나의 질료가 있는 광명이 아니라 그야말로 참 텅 비어 있는 하나
의 순수 광명인 것이고, 즉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입니다.10)
10) 청화대종사(김영동 역음), 「실상염불선」, 서울: 광륜출판사, 2013, pp.
364-365.; 마찬가지로 비슷한 맥락에서 청화의 「圓通佛法의 要諦」, 곡성:
성륜각, 2003. pp.555-558 참고.
이 같은 염불선정계위의 설명은 불교교리사 또는 선정사상사로 볼
때 매우 놀라운 제시이다. 초기불교에 따르면 사선의 진입은 호흡관
을 통해서 가능하고 또한 자비관도 바탕이 된다. 마찬가지로 광명관
(光明觀)도 가능하다.11) 이는 아직까지 체계화되지 않은 염불선학(念
佛禪學)을 정립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주제로 염불선학의 기초가
될 것이다. 즉 앞으로 대승의 염불선정계위 사상과 비교 연구를 통해
염불선정과 불교의 근본선인 사선과 사무색정 등을 포함한 구차제정
이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에 대한 체계적인 염불선정학 또는 염불선
학의 정초를 확립하기 위한 바탕이 될 것이다.
11) 광명관과 선정의 관계는 초기불교에서부터 많이 나타나다. 특히 ‘광명은
곧 염불’이라는 사상은 대승의 「대반열반경」 제19권, p.22. 광명변조고귀
덕왕보살품(光明遍照高貴德王菩薩品)에 ‘광명은 대열반’이며 ‘광명은 곧
여래’이며 ‘광명은 곧 염불’로도 나타난다. 광명관과 염불관의 비교적 검
토는 다른 단독 연구로 준비되어있다.
2. 초기경전의 염불선정계위12)
12) 염불의 선정계위 연구는 김영동 교수가 새롭게 추가하여 역은 청화스님
의 법어집인 「실상염불선」, 서울: 광륜출판사, 2013, pp.364-366을 통해
완성도를 높일 수 있었다. 이에 김영동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염불선정을 설하는 초기경전에서도 염불(buddhānussati)은 ‘다섯 가
지 정(定)’ 중의 하나이며 마음을 늘 염불 삼매에 매어 두어야 한다
고 하는데 전거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너는 부처님을 보거나 보지 않거나, 친한 비구들을 보거나 보지 않
거나 간에, 너는 수시로 ‘다섯 가지 환희의 자리[五種歡喜之處]’를 닦
아 익혀야 한다. 어떤 것이 그 다섯 가지인가? 너는 여래에 대한 일
인 ‘여래․응공․등정각․명행족․선서․세간해․무상사․조어장부․
천인사․불세존’ 이심을 또 법에 대한 일과 승가와 제 자신이 지켜
야 할 계와 자신이 행해야 할 보시를 때에 따라 억념하라 …… 이
와 같아서 석씨 난제야, 이 ‘다섯 가지 선정[五支定]’에 머물거나 다
니거나 앉거나 눕거나 나아가 처자와 함께 있을 때에도, 항상 이 ‘삼
매에 대한 기억[三昧念]’을 마음에 매어 두어야 한다."13)
13) 잡아함권30(「大正藏」2 218,中)
선정과 삼매의 맥락에서 염불은 ‘다섯 가지 환희의 자리’14) 중의
하나라고 할 때 환희의 원어는 초선의 선지 가운데 가장 중심인 pīti
(喜)의 역어일 것이다. 또한 이렇게 환희의 대상을 ‘처(處)’로 옮긴 것
도 의미심장하다.15) 이는 일반적으로 염불로 pīti가 일어난다는 다른
경전과 다를 바가 없다. 이처럼 여래10호의 염불을 설하면서 직접적
으로 정(定)과 삼매가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역에서 정과 삼
매는 모두 samādhi의 의역과 음역일 수 있고, 정(定)의 경우는 사무
색정(四無色定)이나 멸진정(滅盡定) 등에 쓰이는 samāpatti가 그 원어
일 수 있다. 선(禪)으로 옮겨진 jhāna(Sk.dhyāna)나 samādhi 그리고
samāpatti는 선정사상에서 가장 핵심적인 용어이다. 어떤 경우이건
염불을 말하는 경전에서 염불을 선정과 삼매로 규정하고 있다. 다시
말해, 왜 ‘염불선’ 또는 ‘염불선정’ 인지를 불교의 시작부터 이미 분명
히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재가자에게 염불의 일상삼매
를 설하고 있다는 점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14) ‘다섯 가지 환희의 자리’이란 초기경전에서 흔히 불(佛)․법(法)․승(僧)․
계(戒)․시(施)․천( ) 등의 6념처(念處) 가운데 맨 뒤의 천( )을 제외
한 다섯 가지를 말한다.
15) 청화 또한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 여래 자리, 또는 부처님 자리” 등
을 대중 설법 시 많이 사용한다.
이러한 사선은 염불선정에 대표적인 선지(禪支)가 추출되어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이는 염불선정과 관련해서만이 아닌 열반으로
발전해가는 단계를 설명하는 경전에도 비슷하게 설해진다. 여기서는
염불선정과 관련한 대표적인 경전 하나를 들면 다음과 같다.
"마하나마여, 성스러운 제자는 다음과 같이 여래를 수념(隨念)해야만
한다. ‘세존(世尊)은 아라한(阿羅漢)이시며,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
신 분이시며[正等覺/正遍知], 지혜와 덕행을 잘 갖추신 분이시며[明
行足], 피안으로 잘 가신 분이시며[善逝], 세상을 잘 아시는 분이시
며[世間解], 위없는 분이시며[無上士], 하늘과 인간을 잘 이끄시는 분
이시며[調御丈夫], 하늘과 인간들의 스승이시며[天人師], 깨달으신 부
처(佛)로 세존(世尊)이시다’라고.
마하나마여, 이처럼 성스러운 제자가 여래를 수념(隨念)할 때 그의
마음은 탐욕에 얽매이지 않고, 성냄에 얽매이지 않고, 어리석음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렇게 될 때 마음은 여래에 확고하게 고정되고
그의 마음은 정직해진다. 마하나마여, 이렇게 여래를 발단으로 마음
이 정직해진 성스러운 제자는 의미의 밝아짐[의명(義明 : atthaveda)]
과 법의 밝아짐[법명(法明 : dhammaveda)]을 성취한다. 이러한 법은
환열(pāmojja)에 큰 희열(pamudita)을 성취하게 한다. 다시 큰 희열
은 환희로움(pīti)이 있게 하고 환희로움은 ‘몸의 경안(輕安 :
passaddhakāyo)’이 있게 하고, 몸의 경안은 행복[樂 : sukha]을 느끼
게 하고, 행복한 마음은 삼매[samādhi]에 들게 한다. 마하나마여, 이
것을 가리켜 성스러운 제자가 평정심이 없는 사람 가운데 평정심
[visama]을 얻었다하고, 악의(惡意)가 있는 사람들 가운데 악의 없음
에 머문다하고, 법의 흐름[dhammasota]에 이미 들어서 수념을 닦는
다고 한다."16)
16) Aṅguttara Nikāya vol.Ⅲ. p.285.
이처럼 염불을 설하는 경전은 내용상에 있어 “마음은 삼매[samādhi]
에 들게 한다.”라고 경문에서처럼 사선의 차제적인 전개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즉 초기불교 이래 삼매 또는 정정(正定)의 내용은 바로 사
선으로 제시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인용 경문에서 나
타나는 환열[pāmojja]이나 환희로움[pīti] 그리고 행복[樂 : sukha]으로의
고양단계는 바로 사선의 선지(禪支)의 단계를 그대로 보여준다. 이처
럼 염불을 설하는 경전은 내용 상에 있어 사선의 차제적인 전개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이 경전은 훗날 상좌 불교의 대표적인 논서로 붓
다고사(Buddhaghosa)가 저술한 「淸淨道論(Visuddhimagga)」에 인용된
경전이다. 여기서 붓다 수념 즉 염불선정은 사선의 계위에서 각각
대표되는 선지의 순서를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환열[pāmojja/pāmujja] → ②큰 희열[pamudita] → ③환희로움[pīti] →
④몸의 경안(輕安 : passaddhakāyo) → ⑤행복[樂 : sukha] → ⑥삼매
[samādhi]
①환열에서 ⑤행복[樂]까지는 초선에서 제삼선 까지의 선지이고, ⑥
삼매는 제이선에서 제사선 이후 구차제정에 공통되는 선지이다. 이러
한 차제적 선정 단계는 염불선정과 선정의 발달 과정을 잘 시사해준
다. pāmujja(歡悅)에서 pīti(喜)와 sukha(樂) 그리고 samādhi(三昧)로
의 순차적인 선지는 바로 사선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같
은 사실은 초기불교경전에 이미 석가모니 붓다의 염불의 선정계위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시기적으로 현재 이 세상에 출세
해 있는 붓다가 스스로 제자들에게 자신과 관련한 염불의 수행위차
를 구체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
다. 때문에 사선 등의 직접적인 선정계위를 적시하기보다 간접적으로
각각의 계위에서 일어나는 선지를 중심으로 제시하였다고 볼 수 있다.
3. 부파불교의 염불선정계위
붓다의 반열반 이후에 전개된 부파불교 시대에 염불과 선정계위를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가? 부파불교는 말 그대로 교리 등의 상이한
이해에 따라 분파하여갔다. 하지만 제파의 공통점은 경전에 나타난
붓다의 가르침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법(法 : dhamma)에
대한 철학적 연구에 몰두하였다. 때문에 아비다르마(Abhidharma) 또
는 아비담마(Abhidhamma)라는 말이 기본적으로 ‘법에 대한’ 이라는
뜻을 가진 이유이다. 즉 이 시기에는 삼보 가운데 불보나 수행적 측
면에서 염불선정보다는 법보의 이론적 타당성 연구에 집중했다는 의
미이다. 때문에 초기불교 전통을 잇는 현존하는 아비달마 논서에서
염불에 대한 비중 있는 논의를 많이 찾아 볼 수 없는 이유가 될 것이
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후에 대승불교의 시작이 불보 중심의 철학적
불타관과 함께 수행론으로 염불선정이 다양한 측면에서 강조되는 것
과 비교된다.
이러한 부파불교의 아비달마 환경에서 과연 염불선정이 어떻게 설
명되고 있는가라는 물음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아비달마 전
적에서 염불의 선정이 석가모니 붓다의 근본 선정인 사선과 관련하
여 논의되고 있는가도 문제이다. 그러나 대승불교와 비교하면 현격하
게 적고 초기불교 경전보다도 오히려 내용적으로 빈약하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불과 선정계위에 대한 중요한 단서로 분석할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상좌 불교의 대표적인
논서인 「淸淨道論(Visuddhimagga)」에서 붓다고사(Buddhaghosa)가
염불을 설명하는데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불타 수념 즉 염불을
앞에서 인용한 초기경전을 새롭게 설명하면서 염불과 선정계위에 관
계를 분명히 보여주는데 다음과 같다.
"이와 같이 탐욕(rāga) 등에 매이지 않아서 덮개[蓋 : nīvaraṇa]들을
제어하고, 그의 마음은 선정 주제[業處 : kammaṭṭhānā]를 향하고 정
직한 마음이 될 때 ‘붓다의 덕성’[buddhaguṇa]에 심(尋 : vitakka)과
사(伺 : vicārā)가 일어난다. 붓다의 덕성에 대한 계속되는 심사(尋
伺)는 희(喜 : pīti)가 일어난다. 마음에 희가 함께할 때 경안(輕安 :
passaddhi)의 가까운 원인으로서 희는 몸과 마음을 방해하는 것을
가라앉혀 고요하게 한다. 몸과 마음을 방해하는 것을 가라앉혀 고요
하게 될 때 몸과 마음에 있어 행복감[樂 : sukha]이 일어난다. 행복
감으로 마음은 붓다의 덕성을 대상으로 마음이 삼매(三昧 : samādhi)
에 든다. 이러한 차례의 선지(禪支 : jhānaṅgā)들이 한 찰라에 일어
난다. (하지만) 붓다의 덕성은 심심미묘(甚深微妙 : gambhīra)하기
때문에, 그리고 ‘여러 가지 종류의 덕성[nānappakāraguṇā] ’에 수념
하기 때문에 이러한 선[jhāna]은 단지 근접삼매(近接三昧 : upacāra
samādhi)에만 이르고 본삼매(本三昧 : appanā samādhi)에는 이르지
못한다. 이러한 근접의 선[jhāna]은 그 자체로 불타수념(佛陀隨念)으
로 알려졌다. 왜냐하면 근접삼매의 선은 붓다의 공덕을 수념하는 것
과 함께 일어나기 때문이다."17)
17) (eds.) Henry Clarke Warren & Dharmananda Kosambi, Visuddhimagga
of Buddhaghosacariya, Delhi: Motilal Banarsidass, 1989, pp.175-176,
“Iccassa evaṃ rāgādipariyuṭṭhānābhāvena vikkhambhitanīvaraṇassa
kammaṭṭhānābhimukhatāya ujugatacittassa buddhaguṇapoṇā vitakkavicārā
pavattanti. Buddhaguṇe anuvitakkayato anuvicārayato pīti uppajjati.
Pītimanassa pītipadaṭṭhānāya passaddhiyā kāyacittadarathā paṭippassambhanti.
Passaddhadarathassa kāyikampi cetasikampi sukhaṃ uppajjati. Sukhino
buddhaguṇārammaṇaṃ hutvā cittaṃ samādhiyatīti anukkamena
ekakkhaṇe jhānaṅgāni uppajjanti. Buddhaguṇānaṃ pana gambhīratāya
nānappakāraguṇānussaraṇādhimuttatāya vā appanaṃ appatvā upacārappattameva
jhānaṃ hoti. Tadetaṃ buddhaguṇānussaraṇavasena uppannattā
buddhānussaticceva saṅkhaṃ gacchati.
상좌불교의 대표적인 논서 또한 초기경전에서처럼 10호와 같은 부
처님의 덕을 계속 염불하면 탐진치 로부터 사로잡히지 않고 바른 마
음 자세가 되어 희열(喜), 경안(輕安), 락(樂)등의 선지(禪支)들이 차
례로 일어나 삼매에 든다고 설한다. 하지만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그
것은 바로 “붓다의 덕성[buddhaguṇa]에 심(尋 : vitakka)과 사(伺 :
vicārā)가 일어난다. 붓다의 덕성에 대한 계속되는 심사(尋伺)는 희
(喜 : pīti)가 일어난다.”라는 구절이다. 이같은 구절은 초기불교경전에
서는 찾아볼 수 없다. 다시 말하면, 淸淨道論의 저자인 붓다고사가
이 구절을 특별히 부가하고 있다. 이렇게 부가된 구절의 의미를 정리
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염불은 초기경전에서와 같이 선정 범위에 있다. 때문에 붓다
고사 또한 계속해서 염불을 삼매(三昧 : samādhi)나 선[jhāna] 용어
로 설명하려는 것은 같다. 더 나아가 초기불교에 없는 삼매개념으로
근접삼매(upacāra samādhi)등이 동원된다.
둘째, 초기경전의 선정계위와 마찬가지로 희(喜 : pīti), 경안(輕安 :
passaddhi), 행복감[樂 : sukha] 그리고 삼매(三昧 : samādhi)의 순서
로 선지 전개를 설명한다. 하지만 붓다고사는 이러한 선지 또한 초선
이전의 근접삼매까지의 선지로만 본다.
셋째, 문제는 초기경전에 나타나지 않는 심(尋 : vitakka)과 사(伺 :
vicārā)를 끌어와 심사(尋伺)를 조건으로 희(喜 : pīti) 등이 일어난다
고 한다.
넷째, 결국 염불은 초선을 의미하는 본삼매(appanā samādhi)에도
도달할 수 없고 다만 사선의 첫 단계인 초선 이전의 근접삼매
(upacāra samādhi)까지만 가능하다고 한다.
다섯째, 이유는 붓다의 덕성은 심심미묘(甚深微妙 : gambhīra)하기
때문에, 그리고 ‘여러 가지 종류의 덕성[nānappakāraguṇā] ’에 대한
수념 이기에 염불은 본삼매(appanā samādhi)에 도달할 수 없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淸淨道論」에서 염불은 선정 계위에 있어 초선 진입도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같은 논서의 설명이 어떤 문제가 있
는지를 비판적으로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초선 이전의 근접삼매(upacāra samādhi)까지만 가능하다고
하는 염불선정은 앞에서 본 바처럼 초기경전에서 수념(隨念 :
anussati)의 범위를 사선 등을 포함한 수행주제로 보고 있는 점과 상
충한다는 점이다.
둘째, 염불을 선정범위라 인정하면서도 초기경전에 없는 근접삼매
나 본삼매와 같은 새로운 삼매개념으로 초선에 진입하지 못한다고
한다는 점이다. 이 또한 초기불교의 염불과 선정 사상에 부합되지 않
는다.
셋째, 다시 말해 초기경전에서 찾아볼 수 없는 심사(尋伺 :
vitakka-vicārā)로 여래 9호를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염불과 선정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는 초기경전에서 찾아볼 수 없는 상좌불교만의
적용이다. 즉 염불이 여래 9호의 수념일 때 수념의 anussati를 심사
(尋伺)로 바꾸어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넷째, 상좌불교와 같이 anussati를 심사(尋伺)로 설명한 예는 다른
부파나 대승불교에서 찾아보기 힘들고 또한 교리적이나 수행론적 으
로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다시 다음과 같은 점이 문제가 된다.
첫째로 「淸淨道論」의 입장은 초기경전에서 수념(隨念 : anussati)을
사선과 사무색의 수행주제로 보고 있는 점과 배치된다는 점이다. 초
기경전에서 ‘수념의 대상‘ 또는 ‘수념의 수행주제‘ 또는 ‘수념의 장
(場)’으로 anussatiṭṭhāna라는 말이 한정적으로 쓰인다.18) 이는 사마타
수행 주제로 40가지가 제시되는 40업처(業處 : Kammaṭṭhāna)라는 말
처럼 「淸淨道論」에서 anussatiṭṭhāna도 같은 쓰임새의 용어이다. 초기
경전에서 anussatiṭṭhāna의 내용으로 여섯 가지가 한정적으로 제시된
다. 여섯 가지는 흔히 제사선 이후에 발현되는 숙명지(宿命知), 제삼
선(第三禪)의 행복감, 광명상(光明想 : ālokasañña) 그리고 부정관(不
淨觀)과 백골관(白骨觀)과 제사선(第四禪)이 그것이다. 사실 사선 계
위에 있어 sati는 나타나지만 anussati는 찾아 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선정 수행을 anussati 라고 한정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는 ‘이전에 경험했던 일을 떠올려 지속적으로 재현시키는 행법’으
로서 anussati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숙명지가 그 대상이고 제3선의
행복감과 광명상 그리고 부정관과 백골관 등이 제시되는 것이다. 다
시 말해, 이전에 선정체험의 내용을 떠올려 그러한 본질로 우리의 마
음을 바로 연결시켜 염염상속 계속적으로 지속시키는 행법이다. 염불
의 경우 이전에 숙지된 여래 9호의 총체성(總體性)을 떠올려 관념으
로 지속시킬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총체성의 관념이 제2선의 희(喜
: pīti), 제3선의 행복감[樂 : sukha] 그리고 제4선을 아우르는 삼매(三
昧 : samādhi)의 선정 계위로 발전해 나갈 수 있다. 때문에 같은 경
전에서 이같은 여섯 개의 anussati의 대상 또는 주제를 선과 삼매수
행의 정학(定學 : adhicitta)에 포함시키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로 보면 「淸淨道論」의 입장은 anussati로서 염불 또한 제3선이나
제4선에 수행주제로 포함될 수 없다는 점과 배치된다. 하지만 어디까
지나 부파불교 이전의 초기경전에서 정학의 내용은 기본적으로 사선
이고 구차제정이다.
18) Aṅguttara Nikāya Ⅲ, pp.322-325. 마찬가지로 참조 Dīgha Nikāya Ⅲ,
p.250, p.280.; Aṅguttara Nikāya Ⅲ, p.284, pp.312-317.
둘째로 이렇게 사선을 anussati의 수행대상이나 주제로 설하는 초
기경전에 반하여 염불이 초선 이전의 근접삼매까지만 가능하다는 주
장에 있어 근접삼매는 초기경전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 후대 상좌부
의 삼매개념이다. 초선부터를 정(定 : samādhi)으로 보았던 것에 반
하여 상좌부는 다시 초선 이전에 새로운 samādhi개념을 내세우고 있
는 것이다. 이렇게 후대의 개념을 가지고 초기경전의 선정 단계를 재
단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셋째로 마찬가지로 상좌부는 염불과 선정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있어 심사(尋伺 : vitakka-vicārā)로 여래 9호를 설명하고 있다. 이같
은 적용은 초기경전에서 찾아볼 수 없는 상좌불교만의 설명법이다.
염불의 buddhānussati는 원래 여래 9호를 anussati한다는 것이지 9호
에 대한 심사한다는 것, 즉 buddha-vitakketi나 buddha-vicāreti가 아
니다. 상좌부는 염불이 여래 9호의 수념(隨念 : anussati)일 때
anussati를 vitakka-vicārā로 바꾸어서 이해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이는 초기불교에서 용례를 찾기 힘들 것이며 또한 이러한 용어를
동의어로 보기도 힘들 것이다.
선정수행의 계위에서 심사는 제2선에서 제거된다. 무심무사(無尋無
伺 : avitakka-avicāra)가 그것이다. 초기불교 선정론에 의하면 초선
에서 말[vācā]이 소멸한다. 그렇게 되면 구두로 불명(佛名)이나 여래
10호의 칭명 또는 칭명염불은 아예 초선에도 진입할 수 없다고 보아
야한다.
넷째 상좌불교와 같이 염불의 anussati를 심사로 설명한 예는 초기
불교에서나 다른 부파나 대승불교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대승은 초기
불교를 따라 염불의 buddhānussati로서 사선을 말하고 있다.19) 마찬
가지로 청화 또한 상좌불교와는 달리 염불선정계위를 말하고 있다.
19) 조준호, 염불삼매는 어느 선정 단계까지 가능한가 : 대승불교의 염불삼
매 계위에 대한 경론 전거 ,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불교학보」79집,
2017.6.30., pp.85-104.
4. 심사(尋伺 : vitakka-vicārā)와 선정계위의 문제
이처럼 「淸淨道論」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상좌불교의 불교교학과
수행이론에서 심사에 대한 긍정적 설명이 이채롭다. 이후 설명되겠지
만 현재 미얀마 불교에서 위빠사나나 염불선정 등의 수행 상에 있어
이러한 점이 계승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먼저 초기경전에서 심사를 어떻
게 설하고 있는지를 살펴 보아야 한다. 초기경전에서 심사는 행온(行
蘊) 가운데 하나이다. 심사는 선법(善法 : kusala dhammā)과 불선법
(不善法 : akusala dhammā)으로 모두 적용된다. 그렇지만 초기경전
에서 심사는 범부들의 번뇌의 조건이 되는 ‘일상적인 사유분별 작용’
으로 많이 설해진다. 그리고 선정 수행의 계위와 관련해서는 초선에
는 유지되지만 제2선에서 지멸 되는 것으로 설명된다. 다음의 인용되
는 초기경전은 불교심리 전개론으로 심사의 발생기원과 조건을 잘
보여준다.
눈과 대상을 조건으로 안식이 일어나고 이들 세 가지 화합을 조건
으로 촉(觸)이 일어난다. 다시 촉에서 수(受)가 일어난다. 그는 그
의 수에 대한 상(想)이 일어나고, 상이 일어난 것에 심(尋 : vitakka)
이 일어나며, 심이 일어난 것에 망상(妄想 : papañca)이 일어나고,
망상을 연유하여 사람에게 과거․미래․현재에 눈으로 인식되는 대
상과 함께 분별망상(分別妄想 : papañca-saññā-saṅkha)이 일어난
다.20)
20) Majjhima Nikāya, vol.Ⅰ, pp.111-112.; 분별망상은 papañca-saññā-saṅkhā
의 번역으로 ‘망상에 의한 상(想)과 분별(分別)’를 의미한다. 졸고, 초기
불교에 있어 止․觀의 문제 , 「한국선학」, 서울: 한국선학회, 2000, pp.
352-354; Bhikkhu Nanananda, Concept and Reality in Early Buddhist
Thought, Kandy: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1997, 1971 참고.
여기서 심[vitakka]을 조건으로 일어나는 papañca는 흔히 희론(戱
論)이라는 한역어가 많이 사용하지만 허위(虛僞)나 망상(妄想)으로도
한역되었다. 붓다는 삼업(三業)의 구분 가운데 심사는 구행(口行)에
해당시킨다. 다시 말하면, 심사는 ‘언어를 통한 사유분별’을 의미한다.
그리고 심사가 조건이 되어 희론에 이어 분별망상 즉
papañca-saññā-saṅkha로 전개 된다는 것인데 다시 말하면, 언어를
통한 사유분별이 확대 재생산되어 조작과 왜곡 활동으로서 번뇌를
경험하는 것을 말한다. 즉 심사는 범부들이 일상에서 번뇌 망상으로
나아가는 조건이다. 심사가 있으면 분별망상이 있고 분별망상이 있으
면 심사가 있다고 할 정도로 양자는 쌍방향적 의존관계이다.21) 때문
에 심사는 사선에 들어 제2선에서 멈춘다. 하지만 초선에 이르기까지
는 유지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구행으로서 심사가 언어를 통한 사유
분별로 설명되는 이유는 언어를 매개로 전개되는 우리의 일상적인
논리적 사유, 분석적 사유, 추론적 사유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21) Dīgha Nikāya Ⅱ, p.227.
초선에서 언급되는 심사는 욕망에 따른 일상의 두서없는 사유분별
로서 심사가 아닌 오개(五蓋)의 그침을 조건으로 하는 안정되고 질서
잡힌 심사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심리적 국면은 이전과 다른 질서 잡
힌 의식의 통일성을 보여주기 때문에 후에 유심유사삼매, 무심유사삼
매 그리고 무심무사삼매라는 용어의 용례도 보여준다. 때문에 이때의
심사는 선지로 불선법이 아닌 선법의 심사로 보아야할 것이다. 그런
데도 사선의 계위에서 보여주듯이 심사는 계속 지속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지멸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심사는 제2선에서 제거된다. 어
떠한 경우라도 제2선에서 작용을 멈추는 심사는 선법과 불선법이든
일체를 포함한다고 보아야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언어적 사유분별이
지속하는 한 진정으로 삼매의 경지에 도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때
문에 대승의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는 심사를 잔물결이 출렁이는
것에 비유하는 각관풍(覺觀風)이라 한 이유이다.22) 마찬가지로 보기
드물게도 상좌불교권의 스리랑카의 학승인 Walpola Rahula도 심사가
있는 한 진정한 심일경성(心一境性: cittekaggatā)의 삼매는 불가능하
다고 주장한다.23) 그는 유식의 무착(無着)이 심사를 ‘manojalpa’(mental
babble, 마음의 재잘거림)으로 설명하는 것을 인용하고 있다. 논자는
Walpola Rahula의 선정수행과 관련한 심사의 문제는 지극히 타당한
견해라고 본다. 이 점에 있어 청화도 마찬가지로 선정수행 상에 있어
심사의 문제를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청화 또한 참선할 때 심사가
끊어지는 것을 강조하며 심사가 끊어지면 “말이 안 나오는 것”이라고
까지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24)
24) 청화, 「圓通佛法의 要諦」, 곡성: 성륜각, 2003, 1989, p.101.
"참선할 때는 심사(尋伺)를 잘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내나야
참선할 때 가장 골치 아픈 것이 분별시비 아니겠습니까, 분별시비를
떠나 버려야 삼매에 듭니다. 심사가 없어야 삼매에 듭니다. 그리고
공부 하다보면 거친 분별(尋)은 좀 떠났다 하더라도 미세한 분별
(伺)은 자기도 모르게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른바 선정 가운데
서 2선정에 들어가야 심사(尋伺)가 끊어집니다. 그때는 말도 별로
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분별하고 ‘좋다 궂다 네가 있고 내가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있어야 말이 나오는 것이지 모든 분별이 없
어져 버리면 말이 안 나오는 것입니다." 25)
25) 청화, 「圓通佛法의 要諦」, 곡성: 성륜각, 2003,; 출판공사, 1989, p.101
이같이 심사가 분별의 사유로 말[언어]과 관련한다는 이해는 불교
의 선정이론과 정확히 일치한다. 청화는 심사를 분별시비의 사유로
그리고 심과 사의 구분과 말[언어]과 관련 있음을 분명히 파악하고
있다. 동아시아 사종염불 가운데 첫 번째는 구두(口頭)의 칭명(稱名)
이다. 하지만 불교의 선리(禪理)에 따르면 “초선에 도달하면 말[vācā]
이 지멸 된다.”고 한다.26) 그렇다면 말 즉 칭명이 개입된 염불은 당
연히 초선조차도 관련지어 설명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초기경전에
서 염불은 분명히 선정으로 설해지고 있다는데 문제이다. 여기서 아
비달마불교는 궁여지책으로 교리의 정합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초선 이전의 ‘선정 개념’을 창안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어느 부파가 가장 먼저 초선 이전의 새로운 선정개념 또는 선정계위
를 제출했는지는 아직 결정할 수 없다.27) 본 선정에 도달하기 전의
상좌불교의 근접삼매(upacāra samādhi), 그리고 다른 부파의 미도선
(未到禪 : anāgamya-samādhi)․미지정(未至定) 등이 그것이다. 이러
한 새로운 선정개념의 창안에 따라 부파불교는 이제 선리의 정합성
을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초선 이전에는 말[vācā]이 작용
하고 계속적으로 말과 언어 그리고 심사가 직결된 여래 9호의 염불
선정으로 맞추게 된 것이다. 그래서 「淸淨道論」에서 말과 직결된 언
어적 사유분별인 심사(尋伺)로 염불한다고 주석하였던 이유일 것이다.
심사(尋伺)는 다름 아닌 말과 직결된 언어적 사유분별이다. 초기불교
의 선리에 따르면 초선에서 말이 지멸되고 제2선에서 ‘무심무사(無尋
無伺)’라 한다. 달리 말하면, 말이 지멸 됨으로써 일어나는 조건적 소
멸을 말한다. 결과적으로 「淸淨道論」은 염불선정의 anussati를 심사
작용으로 풀 수밖에 없었다.
26) Saṁyutta Nikāya Ⅳ, p.217. 등
27) 물론 사선 이전도 선정이 가능 하다고 대승불교도 이야기 하지만 논자
는 초선 이전의 선정개념 도입은 석가모니 붓다의 근본적인 선리상 재
고해야 될 점이 많다고 본다.
이렇게 염불과 선정 관계의 교리적 정합성이라는 모양새는 맞추었
을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염불선정의 무한한
가능성과 여지가 봉쇄되어 버렸다. 가정하건데 염불선정이 일찍이 아
비달마시대부터 제대로 행해졌다고 한다면 불교본래의 염불선정으로
인해 신앙의 질과 수준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매우 달라졌을 것이
라는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염불선정, 그 자체로 함장 되
어 있는 많은 가능성, 특히 불교신앙과 선정의 내용이 풍부해질 수
있는 것이 차단되어 버린 것이다.
5. 심사와 염불선정의 문제
이처럼 초기불교 심리론과 청화에 이르기까지 심사는 ‘언어적 사유
분별활동’을 말한다. 때문에 불교의 심사는 삼행 가운데 구행(口行)인
것이다. 하지만 상좌불교는 초기불교의 여래 9호에 대한 anussati를
언어적 사유분별활동으로 적용시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구체적
으로는 앞에서 인용한 「淸淨道論」에서 “붓다의 덕성[buddhaguṇa]에
심(尋 : vitakka)과 사(伺 : vicārā)가 일어난다고 보는 것이 그것이다.
붓다의 덕성에 대한 계속되는 심사(尋伺)는 희(喜 : pīti)가 일어난다.”
라는 구절에 잘 나타나 있다. 때문에 「淸淨道論」에서 염불선정의 방
법론으로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심사의 기능으로 각각의 붓다의 명
호(名號)가 붙여지게 된 이유와 근거(karana)를 장황하게 설명한다. 「淸
淨道論」의 전체 23장 가운데 제7장의 대부분이 각각의 수념(anussati)
방법론으로 사유분별 또는 분별사유 차원으로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淸淨道論」에서 제시하는 여래9호의 첫 번째인 아라한 명호에
대한 5가지 정의에 있어 첫째, 아라한은 멀리 떠났기 때문에, 둘째,
적을 물리쳤기 때문에 셋째, 바퀴살을 부수었기 때문에 넷째, 필수품
을 공양받을 만하기 때문에 다섯째, 숨어서 악을 행하지 않기 때문에
세존은 아라한이라고. 계속해서 다시 다섯 가지 명제에 대한 세부적
인 이유와 근거를 분별사유 한다.
이렇게 「淸淨道論」에서부터는 각각의 명호(名號)가 붙여지게 된 이
유와 근거(karana)를 사유분별 또는 분별사유 하는 것을 염불선정 즉
buddhānussati 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초기불교
에서 말하는 여래9호에 대한 염불선정은 높은 계위로 발전할 수 없
다. 앞에서 인용한 「淸淨道論」의 인용구에서 “여러 가지 종류의 덕성
[nānappakāraguṇā]’에 대한 수념이기에 염불은 본삼매(appanā samādhi)
에 들 수 없다”고 하며 근접삼매까지로 한정하는 결정적인 이유 가운
데 하나이다.28) 때문에 상좌불교는 여래9호를 중심으로 하는 염불선
정을 초선 이전의 근접삼매 정도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는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염불과 관련한 중요한 선정수행개념인
anussati를 심사 개념으로만 한정적으로 적용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29)
28) 앞의 인용문에 나타나듯이 왜 근접삼매이고 사선으로 진입할 수 없는가
는 다시 “붓다의 덕성은 심심미묘(甚深微妙 : gambhīra)하기 때문에” 라
는 이유를 「淸淨道論」은 제시한다. 이는 불타론(佛陀論)과 불신론(佛身
論)과 염불선정 이라는 또 다른 문제로 다음 기회의 논의로 미룬다.
29) 물론 붓다고사 이전의 C. E. 5세기 이전의 상좌부의 염불선정관에 대한
연구는 필요하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이 같은 붓다고사의 적용은 상좌불
교의 독특한 염불선정 방법으로 보인다. 이는 붓다고사의 「淸淨道論」의
저본으로 알려진 한역 「해탈도론(解脫道論: Vimuttimagga)」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때문에 anussati를 심사로 적용한 설명은 붓다고사 개인이
추가한 설명법인지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 더 필요하다.
이 같은 맥락은 초기경전에 비구나 재가인이 두려운 장소나 위험
에 처할 때 염불을 하라고 권유하는 경우와도 일치한다.30) 염불을 설
하는 여러 경전에서 넓은 벌판을 가다가 두려움이 생겨 마음이 놀라
고 털이 곤두서는 때에, 몸의 온갖 고통이 갈수록 더해갈 때, 병환에
고통스러울 때 또는 수행자가 텅 빈 한처나 빈집에서 마음이 놀라고
온몸의 털이 곤두설 때에 염불을 권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긴박한 상황에 처하여 여래9호에 대한 분석적 사유분별이 온전하게
가능할까는 의문이다. 놀라움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사유분별할 경황
이 없을 수도 있다. 인간에게 있어 두려움과 공포는 대개 상념으로
온다. 이러한 상황의 극복은 대치(對峙)되는 상념이 효과적이다. 하지
만 여래 9호의 분석적 사유분별은 무력하기 쉽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공포와 위험의 긴박한 상황에서 이유와 원인을 따지는 분별 자체가
힘들다. 때문에 이러한 상황에서 붓다는 여래의 덕성과 위신력의 상
념으로 극복할 것을 권한 것이다. 즉 인간 삶의 많은 상황이 의지적
인 사유분별보다 상념이 더 우세하게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상념으
로 이미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심리적 상황은 의지적 사유분별로 쉽
게 무마되거나 벗어나기가 힘들다. 붓다가 위험한 장소나 두려운 장
소에 가는 제자들에게 여래9호에 대한 심사(尋伺)가 아니라 anussati
를 권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염불을 설하는 대부분의 경전에서
‘9호라는 불성에 anussati하면 두려움이 곧 없어질 것이다’ 라는 맥락
이 그것이다. 비유적으로 유명한 잡아함 당경(幢經)에서처럼 재래
의 신화를 비유로 들어 아수라와 전쟁에서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이
면 제석천 등의 깃발을 ‘쳐다보아라(ullokayata)‘ 라는 말로 anussati
를 설명하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다. 깃발은 상념을 위한 상징적 의
미이다. 결국 염불선정의 anussati 행법은 淸淨道論에서처럼 심사
(尋伺)의 작용으로 이해할 수 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당
경(幢經)의 비유처럼 여래 덕성[佛性]의 총체성을 상념 하는 염불선
정은 기본적으로 여래 덕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바탕 해야 한다.
때문에 경전에서 ‘여래9호의 불성(佛性)’에 대한 믿음에 의지한 불타
선정임을 분명히 말한다.31) 경전의 많은 곳에서 붓다의 성질, 즉 불
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설해진다. 그리고 흔들림 없는 확고한 믿음
은 맑음과 동의어라는 의미에서 불괴정(不壞淨 : avecappasāda) 이라
고 하기도 한다. 나아가 믿음에 의지한 선정은 홀로 좌선하는 수행이
요구된다고 한다.32) 다시 말해, 여래 9호라는 불성의 믿음에만 만족
하고 더 이상(uttarim) 수행(좌선)하지 않으면 향상일로(向上一路)의
선리(禪理)를 경험할 수 없다고 한다. 반면에 여래의 덕성에 대한 확
고한 믿음에 바탕한 좌선 수행은 ①환열[pāmujja] → ②환희로움[pīti]
→ ③몸의 경안(輕安 : passaddhakāyo) → ④행복[樂 : sukha] → ⑤삼매
[samādhi]와 같은 차례의 상승일로를 경험하게 된다고 한다. 이는 그
대로 사선의 조건적 발생을 보여준다. 문제는 여래 덕성 또는 불성에
대한 믿음 정도로만 멈추고 염불 선정으로 발전할 수 없다는 점도
분명히 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수행을 통해 믿음에 그치지 않는 선
정으로 나아가야한다. 결국 믿음만으로는 마음이 삼매에 들지 못하고
삼매에 들지 못하기 때문에 ‘제법의 현현(顯現) 체험(dhammā
pātubhavanti)’도 할 수 없다고까지 한다.33) 즉 여래 덕성의 믿음이
염불선정으로 그리고 제법의 현현이라는 반야지혜와 어떻게 연결되
어 있는지를 단적으로 잘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염불선이
바로 신앙에 바탕한 선법임을 설하는 청화선사와 그대로 일치한다.
청화선사는 여래 덕성 즉 불성에 대한 신앙으로 갈앙심을 말한다. 이
는 신앙을 부정하는 것처럼 이야기되는 선수행 풍토에서 염불선은
신앙에 바탕한 선법임을 말한다. 현재 유통되는 선법이나 불교명상
가운데 불교신앙이 실종되었음을 지적하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본
질적으로 신앙에 바탕한 염불선은 한국불교계에 시사 하는바가 크다.
결론적으로 앞에서 anussati의 성격을 ‘이전에 이미 익힌 내용을 다시
떠올려 그러한 본질로 우리의 마음을 바로 연결시켜 염염상속 계속
적으로 지속시키는 것’이라고 논의했듯이 염불선정의 경우에서도 이
전에 숙지된 여래 9호에 담긴 의미의 총체성(總體性) 또는 ‘일합상(一
合相)의 통관(通觀)’을 지속시키는 것이라 정리할 수 있다.34)
30) 「잡아함」 권35, 「念三寶經」(大正藏2 254,c); 「잡아함」 20권, 「訶梨經」(大
正藏2 145,b-c); 「잡아함」, 「幢經」(大正藏2, 255,a); Saṁyutta Nikāya Ⅰ,
pp.219-220 등.
31) 「잡아함」 20권, 「訶梨經」(大正藏2, 145,b-c), “汝當依此四不壞淨修習六念。……
世尊說依四不壞淨。增六念處”
32) Saṁyutta Nikāya Ⅴ, p.39
33) 앞의 경전.
34) 금타/청화 편, 「金剛心論」, 聖輪閣, 2000, p.59.
Ⅲ. 마치는 말
역사적 맥락에서 청화의 염불선의 의미는 무엇인가? 청화는 염불
이 곧 선정으로, 더 나아가 염불선을 선정계위로 설명하고 있다. 불교
교리사와 선정수행사에서 대단히 새로운 시도이다. 하지만 청화처럼
대승불교에서도 염불의 선정계위를 말한다. 청화는 사선에 이어 사무
색 등의 구차제정과 맞물려 염불선정계위를 설명하고 있다. 언어와
사유분별[尋伺]을 넘어 불성광명에 대한 광명관으로 사선을 넘은 선
정단계까지 염불선정단계를 설한다. 이같은 제시는 그 동안 오랫동안
묻혀있던 염불과 선정의 관계를 복원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하
고 있다. 염불선정 수행의 무한한 가능성을 다시 열어 놓았다는 의미
이다. 청화는 경론속의 염불선정의 계위문제를 일깨워 주었다. 이는
동아시아 전통의 정토종 칭명염불과는 다른 차원의 염불선정법이다.
그리고 이러한 선정법은 오히려 불교의 근본선법에 더 맞닿아 있다
는 것이다.
다시 정리하면, 청화의 염불선정계위가 갖는 역사적인 의미는 초기
불교를 잇는 아비달마 불교에서 굴곡된 염불선정을 근본으로 복원시
키고 있다. 마찬가지로 동아시아 정토종에서 칭명염불과 분명한 대비
점을 갖는 함의가 있다. 정토종식 칭불(稱佛)은 기본적으로 소리 내
어 말하는 발화(發話) 때문에 깊은 선정의 단계로 발전할 수 없다.
이러한 내적인 이유 때문에 역사적으로도 선종과 정토종이 병립해
온 양상을 보여주었겠지만 청화는 구차제정으로 향하는 염불선정계
위로 정토종을 넘어 바로 불교의 근본 염불선정으로 바로 연결시키
고 있다.
본고는 이처럼 초기경전에서 ‘염불이 선정’으로 설해지고 있는데 반
면에 아비달마 전통의 여러 부파에서는 염불선정을 사선 등의 구차
제정과 관련하여 심도 있게 전개시키지 못한 교리적 이유를 논구해
보았다. 사실 아비달마 논서 에서는 염불선정을 비중 있게 다루지 못
한다. 더 아나가 선정계위 또는 선정위차로도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교조인 붓다와 관련하여 가장 다채롭고 심도 있게 전개될 법한데도
그렇지 못한다는 것이다. 고작 부파불교는 초기불교에는 나타나지 않
는 초선 이전의 삼매개념을 고안하여 염불을 설명하는 수준에 머물
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만약 부파불교에서부터 붓다의 근본선인 구차
제정과 염불이 제대로 연계되었다면 이후 전개된 교리나 신앙 그리
고 선정사의 전개 양상은 사뭇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한
국불교의 청화에 이르러서 염불선은 사선 등의 선정계위로 설하고
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본고에선 논의하고 있지 않지만 대승경론에
서도 청화와 같이 염불선정계위의 전거가 발견된다. 이는 불교교학에
서 염불선이 선정단계로 설해지고 있고 마찬가지로 청화에 의해 계
승되고 있다는 점은 대단히 주목할 만하다. 시대를 뛰어넘어 현대 한
국불교의 한 염불선 수행승에 의해 경론에 나타난 염불선정계위가
드러난 것이다.
이처럼 염불선정의 계위는 부파불교와 달리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그리고 한국의 청화선사에서 나타난다. 하지만 본고는 대승불교의 경
론에 나타나는 선정계위를 자세하게 논의하지 않고 있다. 이는 본 논
자의 또 다른 연구에서 이미 논의하였기 때문이다.35) 마찬가지로 언
급해야 할 점은 본고는 부파불교에서 심사(尋伺)와 관련하여 사선 등
의 염불선정계위로 전개될 수 없는 이유만을 한정하여 밝혔지만 사
실 부파불교는 불타관(佛陀觀)의 문제와도 관련하여 염불을 선정계위
로 전개시키지 못했다는 논의를 생략하였다는 점이다. 이 또한 본 연
구자와 다른 연구자의 계속되는 후속연구에서 구체적으로 밝혀질 것
이다. ■
35) 조준호, 앞의 논문, 「불교학보」 79집, 2017.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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