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근본불교) 이야기

불교를 공부하는 이유

실론섬 2014. 3. 17. 02:55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게서는 코삼비국 고시타 동산에 계시었다. 존자 아난다도 거기 있었다. 때에 집을 나온 찬나 외도는 존자 아난다에게 나아가, 서로 문안한 뒤에 한 쪽에 앉아 물었다.


“무엇하려고 집을 나와 사문 고오타마 밑에서 범행을 닦습니까?”


아난다는 말하였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끊기 위해, 집을 나와 그 밑에서 범행을 닦는 것이다.”


[찬나 외도] “그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끊어야 한다고 합니까?”

[아난다 존자] “나도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끊어야 한다고 한다.”

[찬나 외도] “당신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서 어떤 허물을 보기에 그것을 끊어야 한다고 말하는가?”

[아난다 존자] “탐욕에 집착하면 마음을 덮기 때문에, 자기를 해치기도 하고 남을 해치기도 하며, 둘을 다 함께 해치기도 한다. 현세에서 죄를 받기도 하고, 후세에서 죄를 받기도 하며, 현세와 후세에서 다 죄를 받기도 한다. 그래서 그 마음은 언제나 근심하고 괴로워하는 감정을 가지게 된다. 또 만일 성냄에 덮이고 어리석음에 덮이면, 자기를 해치기도 하고 남을 해치기도 하며, 자기와 남을 함께 해치기도 한다. 내지, 언제나 근심하고 괴로워하는 감정을 가지게 된다. 또 탐욕은 장님이 되게 하고 눈을 없게 하며, 지혜를 없게 하고 슬기의 힘을 약하게 하며, 장애가 된다. 그것은 밝음이 아니요 평등한 깨달음이 아니며, 열반을 향하지 않는다. 성냄과 어리석음에 있어서도 그와 같다. 나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서 이러한 허물을 보기 때문에 끊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찬나 외도]“당신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끊으면 어떤 복과 이익이 있음을 보기에 그것을 끊어야 한다고 말합니까?”

[아난다 존자] “탐욕을 끊으면 자기도 해치지 않고, 남도 해치지 않고, 둘을 다 해치지 않는다. 현세에서도 죄를 받지 않고, 후세에서도 죄를 받지 않고, 두 세상에서 다 죄를 받지 않는다. 그래서 그 마음은 언제나 기쁘고 즐거운 감정을 가지게 된다. 성냄과 어리석음에 있어서도 그와 같다. 그리고 항상 현세에서 번뇌 떠나기를 기다리지 않고, 현재를 의지해 스스로 깨닫는 지견을 얻게 된다. 이런 공덕과 이익이 있기 때문에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끊어야 한다고 나는 말하는 것이다.” 


[찬나 외도]“존자 아난다여, 어떤 길을 많이 닦아 익히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끊을 수 있습니까?”

[아난다 존자] “그런 길이 있다. 즉 여덟 가지 바른 길이니, 이른바 바른 소견 내지 바른 선정이니라.”


찬나 외도는 존자 아난다에게 사뢰었다.

“그것은 성현의 길입니다. 그것을 많이 닦아 익히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찬나 외도는 존자 아난다의 말을 듣고, 기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갔다. [잡아함 35권 973경 [전타경(旃陀經)]


이 경전에서 아난다 존자는 자신들이 출가하여 붓다 밑에서 수행하는 이유를 간단명료하게 설명하고 있다. 즉 불교 수행의 목적은 탐진치 삼독을 끊기 위해서이며 그 방법으로는 팔정도를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경전의 가르침은 "불교를 공부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라고 자문했을 때 재가자들인 우리들에게도 적용된다. 불교에서는 탐진치 세가지를 삼독(三毒. 세가지 독소)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코브라 같은 맹독에게 물리면 사람들은 치명적인 손상을 입거나 죽음에 이른다. 이와 같이 우리들이 삼진치 세가지의 독에 한번 물리면 회복불가능한 치명적인 손상을 입는다는 뜻이다. 탐욕이란 만족이 없고 채워지지 않고 끝이 없으며 마침내 우리들을 파멸로 이끌고, 화(분노)란 불같이 일어나 우리를 휩싸면 전혀 예상치 못했던 끔찍하거나 후회스러운 결과를 가져오고야 만다. 어리석음은 우리를 수많은 악업으로 인도하고야 만다. 삼독심중  어느것 하나 우리들을 파멸과 후회와 악업으로 인도하지 않는 것이 없다.  


위 경에서 말하듯 삼독심은 우리를 장님으로 만들고 자기를 해치고 남을 해치고 자신과 남 둘다를 해치기도 하는 것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현세에서 죄를 받고 후세에서 죄를 받고 현세와 후세 모두에서 죄를 받게 된다. 


불교를 공부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삼독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이다. 불교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과언은 아닐 것이다. 우리들이 지금 당장 삼독심에서 벗어나 해탈을 이루지 못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불교를 배운다는 불자라면 이러한 삼독심을 조금씩 줄여 나가는 노력은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나를 행복하게 하고 남을 행복하게 하고 나와 남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며 또한 공덕을 쌓는 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