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근본불교) 이야기

빠알리어 경전의 반복구문에 대하여

실론섬 2014. 3. 16. 13:12


1) 빠알리어 경전의 반복구문의 이유

빠알리어 경전을 접해 본 불자들은 모두다 아는 사실이지만 같은 정형구가 지루할 정도로 반복되고 있다. 각 경의 내용에 따라서 정형구가 반복됨으로써 내용이 확실해지는 것도 있지만 어떤 경들은 정형구의 반복으로 인하여 주된 내용이 흐려지거나 집중이 잘 안되는 것들도 있는게 엄연한 사실이다. 


빠알리어 경전이 왜 이렇게 같은 정형구를 반복하는 형식을 띄게 되었을까? 그 주된 이유는 경전이 합송으로 결집이 되어 구두로 전승되어 온 것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쉽게말해서 외우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입장에서 본다면 같은 정형구를 되풀이 함으로써 외우기 편리하고 듣는 사람도 반복해서 들음으로해서 쉽게 잊어버려지지가 않는다. 또한 같은 정형구를 반복함으로써 경전의 내용을 정확하게 전승하는 효과가 있다.


2) 정형구의 삭제가 과연 잘못된 것일까?

제가 글을 올리는 방에 가면 161번 "영국빠알리 성전협회" 라는 글이 있는데 그곳에서도 짤막하게 밝히고 있지만 처음 빠알리어를 현재의 로마자와 특수문자를 조합하여 편찬할 때 정형구의 삭제 문제가 논의가 된 적이 있다. 하지만 스리랑카 스님들은 붓다의 전승된 가르침을 단 한자도 삭제할 수 없다는 강력한 반대에 부딛혀서 결국 정형구를 모두다 삽입하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 있다. 즉 싱할라 문자로 음사된 빠알리어 경전이나 영국빠알리 성전협회에서 로마 알파펫과 특수문자를 조합하여 편찬한 것은 국제적으로 공인되고 인정된 원본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각 나라별로 영어나 한글로 번역이 된 것은 원본에 의한 번역본이지 원본 그 자체가 아니다. 따라서 원본은 정형구를 단 한자라도 삭제하지 못할수도 있지만 그 원본을 곁에 두고 번역본을 발간하는 경우에는 얼마든지 정형구를 삭제할 수 있고 이것은 시대의 흐름이나 현실적인 상황을 감안해 본다면 오히려 권장해야 하는 일이다.


우리가 아직도 많이 참조하는 아함경 같은 경우는 정형구가 거의 삭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한문 아함경의 원본인 산스크리트어로 씌여진 아함경 또한 반복되는 정형구가 삭제되어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다시말해서 산스크리트어를 한문으로 번역시 정형구를 삭제하였다기 보다는 산스크리트어 원본 자체에 반복되는 정형구가 상당부분 삭제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한글로 번역하는 한글본을 굳이 원본대로 100% 정형구를 반복하여 경전으로 출간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1-2권이면 되는 경전의 분량을 7-8권으로 만드는 것은 시간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상당한 손실이며 불자들이 공부를 하는 입장에서 보더라도 불필요한 낭비라고 생각한다. 또한 경전은 출가자용과 재가자용으로 나누어서 원본은 그대로 둔채 출가자용은 정형구를 100% 살리고 재가자용은 정형구를 삭제하여 축약용으로 만드는 것이 결코 나쁜일이 아닐 것이다. 물론 반복되는 구문을 삭제할시에는 자의적이거나 번역자에 의한 무분별한 삭제보다는 불교계 차원에서 지혜를 모아 합의된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3) 무엇이 자주불교인가?

자주(自主)라는 사전적 의미는 1)남의 도움이나 간섭을 받지 않고 스스로 자기 일을 처리하는 것. 2)자기 뜻대로 처리함. 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다른 사람과의 협의나 합의가 없이 혼자서 독불장군식이라는 것이다. 


불교에는 세계불교도대회(WBA)라는 것이 있다. 작년 여수 엑스포 기간중에 한국에서도 개최가 되었다. 그리고 세계불교도우의회(WBF. World Fellowship of Buddhists)라는 단체도 있다. 세계 40-50여개국 불교지도자들이 모이는 회의가 세계불교도대회라는 것이다. 이 대회에서는 불교와 관련된 여러가지 사안들을 협의하고 또한 통일하는 목적을 가지고 개최된다. 세계불교도대회에서 합의된 주요 내용들 중에는 1) 불기 기원의 년도를 통일, 2) 불교기(오색기) 채택, 3) 카렌다 월력(양력)으로 5월 보름날을 붓다 탄신일로 통일하고 이를 UN에 상정하여 크리스마스와 함께 세계인의 축제일로 공식 등록등등을 결의했다.


그런데 유독 중국.한국.일본만이 이를 따르지 않고 있다. 쉽게 말해서 자주불교 즉 독불장군식으로 나가는 것이다. 어차피 대처승 위주의 일본불교는 전통적인 불교로써 생각하지 않는다. 중국/대만은 중국식 불교(대승불교)라는 독특한 문화과 오랫동안 자리잡고 있었기에 바꾸기에는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그런데 한국불교는 중국불교를 답습한 불교이다. 한국만의 독특한 정체성은 없다고 보는게 옳다. 혹 짬뽕불교 무당불교를 한국불교의 독특한 정체성이라고 주장한다면 모를까. 


세계 어느나라이든 자주불교라는 말은 없다. 붓다의 가르침은 누구 특정인이나 국가를 상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중생들과 국가들에게 평등한 가르침이다. 그 가르침이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니까 세계불교도대회에서 주요한 사안들은 논의하여 합의하고 채택하여 시행하는 것이다. 한국식의 불교가 자주불교인가? 한국식의 불교라는게 도대체 있기나 한가? 스리랑카를 불교의 종주국이라고 칭할 뿐 스리랑카 자주불교라고 칭하지 않는다. 스리랑카 불교도 결국 인도에서 건너온 것이기 때문이다. 


4) 무엇이 자주번역인가?

원본 경전을 가져와서 한국말로 번역하는게 자주번역인가? 한자말을 따르지 않고 전혀 생뚱한 한국말을 새로이 만들어 내는게 자주번역인가? 우리 한글에 한자어를 빼면 뭐가 남는가? 자주 주장하는 내용이지만 각묵 스님과 전재성 박사님은 지금이라도 경전 번역용어를 통일하는 대승적인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각자의 선명성을 주장하느라고 이상한 단어를 만들거나 억지춘향격의 단어들을 경전 번역에 사용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 간절하다. 


그리고 교리 용어는 가능하면 원문을 그대로 사용하면 좋겠다. 중국에서도 한문으로 번역시 마땅한 단어가 없을때는 이를 소리나는대로 한문을 가지고 음사했다. 처음에는 생소한 원어가 익숙하지 않을지 몰라도 계속하여 접하다보면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핸드포이니 모바일폰이니 인터넷이니 웹사이트니 트위트니 페이스북이니 하는 말들이 이제는 오히려 한국말보다 더 익숙한게 현실이 아닌가?     


그리고 원문의 단어들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억지로 번역을 하게 되면 단어가 가지는 의미속에 갇혀 버리게 되어 본래의 뜻이 제대로 전달이 안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원문대로 옮기고 밑에 주석을 달면 충분한 문제이다. 그런데도 우리말로 옮겨서 하늘사람이나 천신이라는 것을 하느님으로 옮기는게 자주번역은 절대로 아니다. 말그대로 독불장군식 번역일 뿐이다. 


우리나라의 불교 번역자들도 성경 번역의 모범을 본 받아야 한다. 


5) 번역은 고도의 전문성과 종합적 사고를 요하는 것이다

말과 문화가 다른 나라의 언어를 자국어로 번역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언어학과 문학적 소양없이는 불가능한 작업이다. 그런데도 번역을 하고자 하니까  직역할 곳은 의역하고 의역할 곳은 직역등을 함으로써 경전을 읽다보면 굉장히 어색한 부분들이 한둘이 아닌 것을 느낀다. 나같은 문외한도 그정도 느낄 정도이면 전문가가 봤을 때는 다듬고 손을 봐야 하는 부분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먼저 번역작업을 끝내고 책으로 발간해야지 또는 저 사람이 이런 용어를 사용했으니 나는 다른 용어를 사용해야지 하는 것과 같은 좁은 사고방식을 버리고 툭하면 수정본이니 보완본이니 하면서 두번 세번 경전을 바꾸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될 것 같다. 한번을 번역하더라도 후손대대로 물려줄 수 있는 완벽한 번역이 되도록 지혜를 모았으면 하는 바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