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 스님의 법어
어떤 도적놈이
어떤 도적놈이
나의 가사 장삼을 빌려 입고
부처님을 팔아
자꾸 죄만 짓는다
머리를 깎고, 부처님의 의복 가사 장삼을 빌려 입고, 중 탈을 쓰고 부처님을 팔아서
먹고 사는 사람을 부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냐 하면, 모두 도적놈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승려가 되어 가사 장삼을 입고 도를 닦아 도를 깨쳐 중생을 제도 하지는 않고
부처님을 팔아 먹고 사는 사람은 부처님 제자도 아니요, 승려도 아니요, 모두 다
도적놈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 하셨습니다.
이는 부처님 말씀인데, 불교 법문에 많이 인용하는 말씀 입니다. 우리가 승려가 되어 절에
살면서 부처님 말씀 그대로 살행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가까이는 가 봐야
되고, 근방에는 가봐야 하는 것 입니다.
설사는 그렇지는 못하더라도 부처님 말씀의 정반대 방향으로는 안되가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요즘 보면 부처님 말씀에 가까이 가기는 고사하고 대개 반대 방향이 많습니다.
내가 자주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사람 몸 얻기 어렵고
불법 만나기 어렵다.
다행이 사람 몸 받아서 승려가 되어, 불법을 성취하여 중생 제도는 못 할지언정 도적놈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만약 부처님을 팔아서 먹고 사는 그 사람을 도적놈이라고 한다면,
그런 사람이 사는 처소는 무엇이라 해야 할 것 입니까?
그곳은 절이 아니고 도적놈 소굴 입니다. 적굴(賊窟)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부처님은 무엇이 됩니까?
부처님은 도적놈 앞잡이지 뭡니까? 부처님이 도적놈에게 팔려 있으니 부처님이 도적놈
앞잡이 아닙니까?
그러면 다른 나라는 그만두고, 대한 민국에 절도 많고 승려도 많지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도적놈의 딱지를 면할 수 있는 승려가 얼마나 되며, 도적놈 적굴을 면할 수 있는 절이
몇군데나 되는지, 또 도적놈 앞잡이를 면할 수 있는 부처님은 몇분이나 될는지, 참으로
의문 입니다.
우리가 승려 노릇 잘 못하고 공부를 잘 못해서 생함(生陷) 지옥을 갈지언정, 천주 만고에
우주 개벽이래 가장 거룩하다는 부처님을 도적놈 앞잡이로 만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자신이 도적놈이 되는 것은 나의 업이라 어쩌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지옥으로
간다 할지라도 달게 받겠지만, 부처님까지 도적놈 앞잡이로 만들어서 어떻게 살겠느냐
이것 입니다. 어떻게 하든 우리가 노력해서 거룩하신 부처님이 도적놈 앞잡이 노릇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지 않겠느냐 이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 파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불공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순전히 부처님을 파는 행위 입니다.
"우리 부처님 영험하여 명(命)도 주고, 복도 주고, 그러니 우리 부처님께 와서 불공하여
명도 받고 복도 받아가라."
그리고 승려는 목탁을 칩니다. 목탁이란 본시 법을 전하는 것이 근본 생명입니다. 이는
유교에도 있는 말인데, 공자는 자기 제자들에게 " 세상의 목탁이 되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바른 법을 전하여 세상 사람이 모두 바로 살게 하라는 말 입니다. 목탁이란
바른 법을 전하여 세상 사람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이 그 근본 사명인데, 그 목탁을
두드려 부처님 앞에서 명 빌고 복 빌고 하여 돈 벌이 하는데 이요하게 되면 이것은
곤란한 일 입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 실정에서 목탁이 돈 벌이에 이용 안되는 절은 별로 없습니다. 부처님
앞에서 목탁 치면서 명 빌고 복 빌고 하는 것-- 그것은 장사 입니다. 장사! 부처님을
파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허물없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허물이 있는 것을 반성하여
고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입니다. 허물 있는 줄 알면서도 반성하여 못 고치면 그것은
생함(生陷) 지옥 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참다운 불공이 되는 것인가?
광수공양(廣修供養)
내가 전부터 자주 불공 이야기를 해 오지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불공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교에서는 바이블 한 권이면 되지만, 불교에서는 팔만대장경이라 하여 듣기만
하여도 엄청나지요. 장경각에 가 보십시오. 그 많은 경판은 쳐다 보기만 해도 겁이 날
것 입니다.
언제 그 많은 것을 보아 불교의 근본 진리를 찾을 수 있는 것인지 호호망망(浩浩茫茫)
합니다, 그런데 우리 불교에는 전통적으로 정설이 있습니다. 경(經)중에서도 어떤 경,
어떤 부처님 말씀이 근본적이고 가장 소중하느냐 할때 [화엄경],[법화경]이 경중왕
(經中王)이요, 불교의 표준 입니다.
그 중에서도 [화엄경]이 [법화경]보다 진리면에서 더 깊고 더 넓다 하는 것이 불교의
정설 입니다. 그러나 [화엄경]도 보편적으로 80권인데 어떻게 다 보겠습니까.
더욱이 어려운 한문 입니다. 다행히도 [화엄경]을 요약한 경이 또 한권 있습니다.
[보현보살 행원품]이란 것 입니다.
[약(略) 화엄경]이라고 하는 것인데, 요새 말로 하면 화엄경의 엑기스 입니다.
[보현보살행원품]에 불교의 근본 진리가 모두 포함되어 있으며 불교인 어떻게 행동해야
될 것인가 하는 것이 모두 규정되어 있습니다. 간단하면서도 세세하게!
거기에 불고에 관한 말씀도 있습니다. 보현보살 십대원(十大願)의 그 광수공양편 편에!
물론 다 알겠지만 거기에서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신심을 내어 온 천하의 좋은 물건을 허공계에 가득 차도록 다 모으고,
또 여러 촛등을 켜되 그 촛불 심지는 수미산 같고 기름은 큰 바닷물 같이 하여 두고서
수많은 미진수 불(佛)에게 한없이 절을 한다면 이보다 더 큰 불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는 불공중에서도 가장 큰 불공으로 그 공덕 또한 많지 않겠습니까? 공덕도 많겠지요.
그러나 그것보다도 법공양이란 것이 있습니다. 법공양은 일곱가지가 있는데, 근본
골자는 어디 있느냐 하면,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
하셨습니다.
"아무리 좋은 물자를 갖다 놓고 예불하고 공을 드린다고 해도 잠깐동안 중생을 도와
주는 것이, 중생에게 이익되게 하는 것이, 재물을 차려 놓고 공양하는 것 보다
몇 천만배 더 낫다."
예컨대 장사를 할 때 밑천 많이 들여서 이익 적은 일을 할 것인가, 아니면 밑천 적게
들여 이익 많은 장사를 할 것인가 하는 것과 같습니다. 세살 먹은 어린애라도 밑천
적게 들이고 이익 많은 장사를 하려고 하지, 밑천 많이 들이고 이익 적은 장사를
하려고 안할 것입니다.
그렇듯이 부처님께 많은 물자를 올려 놓고 불공을 하는 것이 비용이 많이 드는
공양이라면, 이익 중생 공양 즉 중생을 잠깐 동안이라도 도와주는 것은 크게 힘이
안 들므로 밑천 적게 드는 공양이라는 말 입니다.
그런데 결국의 이익은 어떻게 되느냐 할 때, 부처님께 비용 많이 들여서 하는
불공은 중생을 잠깐 도와 주는 그 불공에 비교할 것이 같으면 천분의 일, 만분의 일,
억만 부의 일 - 비유도 할 수 없을 만큼 보잘 것 없는 것 입니다.
부처님은 "누구든지 나에게 돈 갖다 놓고 명 빌고, 복 빌고 하지 말고 너희가 참으로
나를 믿고 다른다고 하면 내 가르침을 실천 하라." 고 말씀 하셨습니다. 중생을 도와
주라 이 말입니다. 이것은 행원품의 다른 곳에서도 많이 말씀 하셨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이렇게도 말씀 하셨습니다.
"길 가에 병들어 거의 죽어가는 강아지가 배가 고파 낑낑댈 때, 조그마한 식은 밥
덩어리 하나를 그 강아지에게 주는 것이 부처님께 진수 성찬을 차려 놓고 무수
백천만 배 절을 하는 것보다 훨신 더 공이 크다."
이러한 분이 부처님이십니다. 우리 인간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적어도 인격을
갖춘 사라이라고 한다면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도 "내 앞에 돈 갖다 놔라,
복 주마. 내 앞에 돈 갖다 놓아라, 명 주마." 하는 소리를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그것은 도적놈 아니겠습니까?
보통 사람이라도 이런 소리를 할 수 없는데 하물며 천추 만고에 우주 개벽이래
가장 인격자이신 분이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는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십니다. 또 할 수도 없는 것 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오직 중생을 도와주는 이것이 참으로 불공이요, 이것을 행해야만
참으로 내 제자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세가지 불공
요즈음 학생들에게 불공하라고 자주 이야기하며 권하고 있는데,학생들은 혹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용돈을 타 쓰고 있는데 어떻게 불공을 할 수 있습니까?"
그것도 당연히 할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그러나 불공이란 꼭 돈으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몸으로, 정신으로, 물질적으로 남을 도와 주는 것은 모두 불공 입니다.
예를 들어, 버스 안에서 노인이나 어린이에게, 혹은 병든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해
주는 것, 그것도 불공 입니다. 또 정신적으로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이나, 혹은
어떤 사람을 좋은 길로 인도해 주는 것, 그것도 불공 입니다. 길거리에 앉아서
적선을 비는 눈 먼 사람에게 10원짜리 한 푼 주는것. 그것도 불공 입니다.
이처럼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남을 도와 주는 것은 모두
불공 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몸으로 마음으로 물질로- 세가지로써 불공을 하려고 하면
불공할 것이 꽉 찼습니다. 이 세상 모두가 불공거리, 불공 대상 입니다.!
단지 우리가 게을러서, 게으른 병 때문에 못할 뿐입니다. 이렇게 불공 하여야만 결국에
가서 성불하게 되는 것입니다.
학생들이 수련 대회 때, 3천배 하고 백련암에 올라와서 화두 배워 달라고 하면
이렇게 말합니다.
"자, 모두 화두 배우기 전에 불공하는 방법 배워 불공부터 시작한 후, 화두 배우자."
이렇게 말하면 처음에 모두 눈이 휘둥그래집니다. 우린 돈도 없는 부처님 앞에 돈
놓고 절 하라는 이야기인가 하고. 그런데 나중에 알맹이를 듣고 보면 그것이 아니고
남 도와 주는 것이 참 불공이라는 애기임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끝에 가서 "모두
불공 합시다." 하면 "예." 하고 대답 하는데 진정 그러는 것 같습니다.
남 모르게 남 도울 것
그런데 한 가지 특별한 주의를 시킵니다. 그것은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남을
도와주는 것은 착한 일이지만 자랑하는 것은 나쁜 일 입니다. 몸으로써, 마음으로써,
물질로써 좋은 불공 해 놓고 입으로 자랑하면 모두 부수어 버리는 것 입니다.
자랑하기 위해, 자기 선전하기 위해 불공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돈 푼이나
기부해 놓고 신문에 크게 선전해 달라고 하며, 또 그 재미로 돈 쓰는 사람도 많은가
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공이 아닙니다. 남 도와 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랑할
재료 장만하는 것이지!
참 불공이란 남을 아무리 많이 도와 주었다고 해도 절대로 자랑해서는 안됩니다.
말 안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근본 조건이 어디 있느냐 하면 ' 남 모르게 남
도와 주라' 이것입니다.
"남 모르게 남을 도울 것!"
예수도 이런말을 했습니다.
"왼 손이 하는 일을 바른 손이 모르게 하라."
기막힌 소리 아닙니까! 자기 왼 손으로 남을 도우면서 자기 오른손도 모르게 하라고
했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이 알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즘 학생들에게 이 말이 좋게
들리는가 봅니다. 편지 자주 오니다.
"스님 말씀하신 남 모르게 남 돕자는 그 말씀을 평생 지키고 노력 하겠습니다."
내가 인용하는 예가 하나 있습니다.
6.25사변 이후 마산 근방 성주사라는 절에 가서 서너 달 머물렀습니다. 처음 가보니
법당 위에 큰 간판이 붙었는데 '법당 중창 시주 윤00' 라고 굉장히 크게 써
있었습니다. 저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니 마산에 '윤약국'이라고 있는데 그사람 신심이
있어 법당을 모두 중수 했다는 것 입니다. 다른 말은 안하고 "그 사람 언제 여기
오는가?" 물으니 "스님께서 오신 줄 알면 내일이라도 인사하러 올 것 입니다." 하고
대답 했습니다. 그 이튿날 과연 왔습니다. 인사를 하길래 말 했습니다.
"소문을 들으니 당신 퍽 신심 있다고 다 칭찬하던데, 나는 처음이라 잘 모르지만
여기 와서 보니 당신 신심 있는줄 알겠어. 법당 위에 보니 돈을 많이 내서 중창 했다고
그 표가 얹혀 있는데 그것으로 당신 신심 있다는 것 증명 되는 것 아니겠어."
처음에는 칭찬 많이 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생각에 무척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나중에 무슨 소리가 나올줄 모르고.
"그런데 간판 붙이는 위치가 잘못된 것 같애."
"왜 그렇습니까?"
"간판이란 남 많이 보기 위해 한 것인데, 이 산 중에 붙여 두어야 몇 사람이나 와서
보겠어? 그러니 저 간판 떼어서 마산 역 앞 광장에 갖다 세우자고, 그러면 몇천만명이
보고서, '마산 윤00 라는 사람이 법당을 고쳤어'하고 칭찬해 줄 것 아닌가. 이 산중에
붙여 두고 구구하게 이럴 것 무엇 있어. 내일이라도 당장 옮기자고."
"아이고 스님, 부끄럽습니다."
"부끄러운 줄 알겠어? 알겠느냐 말이다. 당신이 참으로 신심에서 돈 냈어? 저 간판
얻으러 돈 낸 것 아니야?"
이것이 사실 입니다. 어떤 절에서는 시주를 할 때 미리 조건을 냅니다. 비석을 세워
달라는 것 입니다. 그래서 비석을 먼저 세워 줍니다. 그러면 돈을 내지 않고 비만 떼어
먹어 버립니다. 실제로 그런 것을 내가 보았습니다.
"간판 내걸어 자랑하려는 것 아닌가? 그게 무슨 신심이야. 꼭 그런 생각이라면
지금이라도 저 간판 떼어서 마산역으로 싣고 가자구."
"잘못 되었습니다. 제가 몰라서 그랬습니다."
"몰라서 그랬다구? 몰라서 그런 것이야 허물 있나, 고치면 되지. 그럼 이왕 잘못된
것을 어떻게 해야지?"
그랬더니 자기 손으로 그 간판을 떼어 내려 탕탕 부수어 부엌에 넣어 버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불공하는 예
내가 남 모르게 도운다는 이 불공을 비밀히 시작한 지가 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불공
하라고 시켰습니다. 개인적으로도 하고 단체로도 하라고 의무적으로 시켰습니다. 만약
내 시키는대로 불공 할 수 없는 사람은 내게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요즈음 불공하는 방법에 대해 여러 가지 예를 들어 학생들에게 이야기해 주면 이렇게
질문하는 학생도 있습니다.
"스님은 불공 안 하시면서 어째 우리만 불공하라고 하십니까?"
"나도 지금 불공하고 있지 않은가. 불공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이것도 불고 아닌가."
비밀히 불공하라는 것을 예를 들어 말했더니 이런 말을 했습니다.
"비밀히 하라고 하시면서 스님은 그것을 자랑하는 것 아닙니까?"
"허허, 그것 참 좋은 의견인데, 허나 자랑하는 것이라고볼 수도 있지만, 예를 들어
말하자면 이렇게 한다는 말이고 그 뜻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불공의 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20년 전에만 해도 서울이나 부산 등 도시 변두리에는 못 사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요새는 좀 살기가 나아졌지만, 그런 동네 사람들에게 양식을 나누어주고 싶은데
어떤 방법으로 하면 소문이 안 나게 할 수 있는지 어느 사람이 나한테 물어 왔습니다.
"우선 두어 사람이 그 동네에 가서 실태 조사를 해, 배고픈 사람을 조사하여 명단을
만든단 말이야. 또 다른 몇 사람이 그 동네에서 가장 가까운 쌀집에서 쌀을 사서
쌀표를 만들거든. 쌀 지고 다니다간 소문 다 나 버려. 한 말이든 두 말이든 표시해서
그 쌀표만 가져가면 쌀을 주도록 그렇게 준비해 놓지. 또 다른 사람이 명단을 가져
가서 그 쌀표를 나누어 주거든. 그러면 사람이 자꾸 바뀌니 어떤 사람이 쌀표를
나누어 주는지 모르지. 또 누가 물어도, '우리는 심부름 하는 사람이다'라고 하면
되니까."
처음에는 쌀표를 주면서 쌀집에 가라고 하니 잘 안 믿으려 하더랍니다. 쌀집이 별로
멀지 않으니 한번 가 보기나 하라고 자꾸 권했다는 것 입니다. 가보니 과연 쌀을
주거든요. 그 후 어린 아이들이 학교에 와서 말하더라고 합니다.
"요새 우리 동네에 이상한 일이 생겼어. 어디서 온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는데 그
사람들이 쌀표를 주어서 신나게 먹었어. 그런데 누군지 알 수 있어야지. 아마 그
사람들은 하늘에 내려온 부처님인가 봐."
또 한번은 추석이 되어서 마산의 어느 신도가 쌀을 트럭으로 싣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원주인은 쏙 빠져 버렸지요. 그런데 그만 발목이 잡혀
버렸습니다. 신문 기자들이 어떻게 어떻게 하여 찾아 신문에 냈습니다. 그후
그 사람이 내게 왔습니다. 그래서 말 했습니다.
"요새 불공 잘 하던데. 신문에 굉장하던데. 불공을 남 모르게 하라고 했지. 신문에
내라고 하던가. 당신 불공했어? 신문에 낼 자료 장만 했지. 다시는 오지 마라."
"원래 그렇게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럼, 기자들이 어떻게 알아서 신문에 냈어?"
"기자들, 말도 마십시요. 비밀히 해도, 그 사람들 호기심에서 이리 파고 저리 파고
결국에는 알아 버렸습니다. 결국에 기자들이 알아 버렸으니 방법이 잘못되었지만,
결코 신문에 낼 생각하고 한 것은 아닙니다."
"글쎄, 아무리 기자가 와서 파도 발목 잡히지 않도록 불공해야 된다 이말이야."
어느 동네에 부자 노인이 있어 불공을 잘 하므로 이웃에 사는 청년이 와서 인사를
했습니다.
"어른신 참 거룩하십니다. 재산 많은 것도 복인데 남을 잘 도와 주시니 그런 복이
어디 있습니까."
"(노인, 눈을 부릅뜨며)이 고약한 놈! 내가 언제 남을 도왔어? 남을 돕는 것은
귀울림과 같은 거야. 자기 귀 우는 것을 남이 알 수 있어? 네가 알았는데 좋은 일은
좋은 일이야. 그런 소리 하려거든 다시는 오지 말아."
이것이 실지로 불공하는 정신 입니다. 한 쪽으로 보면 남 돕기 어렵지만, 또
한편으로 보면 남 돕기는 쉬운데 소문 안 내기는 참으로 어려운 것 입니다. 그래서
내가 자꾸 예를 들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랑은 여자들이 더 많이 합니다. 여자는 사실 입이 좀 가볍습니다. 남자
보다는 여자는 본시 몸도 좀 약하고 또 마음도 약합니다. 어떤 사람은 "스님은
어째서 여자를 약하고 모자란다고 말씀하십니까?" 하는데 생각해 봅시다.
힘따라 짐을 져야지, 안 그렇습니까? 키따라 옷을 해 입혀야지요. 키 큰 사람은
옷을 크게 입히고 키 작은 사람은 옷을 짧게 입히는 것입니다. 그게 평등 입니다.
그렇듯이 약한 사람에겐 약한 걸 말해서 힘을 내도록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는 자랑 안하게 더 주의해야 되지 않겠느냐 이것 입니다.
이제 예 하나만 더 들겠습니다.
미국의 보이스라는 사람이 영국 런던에 가서 어느 집을 찾는데 안개가 꽉 끼어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서 이곳 저곳을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열 두어살 되는
소년이 나타나서 물었습니다.
"선생님, 누굴 찾습니까?"
"어느 집을 찾는데 못 찾았어."
"저는 이 동네에 사는데 혹시 제가 아는지 주소를 보여 주시겠습니까?"
신사는 주소를 주었습니다.
"이 집은 마침 제가 알고 있습니다. 이리로 오십시요."
어린이가 인도하여 안내해 준 집에 도착하니 찾아 헤매던 바로 그 집이었습니다.
하도 고마워서 돈을 주었더니 그 소년은 사양하고 결코 받지 않았습니다. 이름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 했습니다.
"제게는 선생님이 참으로 고맙습니다. 저는 소년단원 회원인데 우리 회원은 하루에
한가지씩 남을 도와 주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오늘 선생님을 도와 드릴 수 있었으니,
오히려 제가 감사 드려야 됩니다. 참 고맙습니다."
그리고서 소년은 달아 나 버렸습니다.
신사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국에 와 보니 어린이도 남을 돕는 정신이 가득하여 돈도 받지 않고, 이름도
가르쳐 주지 않고 남을 도우면서 오히려 일과를 할 수있게 해주어서 고맙다고 하니
이런 정신을 배워야 겠다."
그래서 미국에 돌아가 미국에서도 소년단을 시작 했는데, 온 미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보급되엇 지금은 우리 나라도 소년단(boy scout)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 뒤에 이
소년을 찾으려고 아무리 애써도 결국 찾지 못했습니다. 소년이 나타나질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이름 모르는 소년을 기념하기 위해 영국의 그 마을에 큰 들소 동상을
세워주고 그 기념비에는 이렇게 새겼습니다.
"날마다 꼭 착한 일을 함으로써 소년단이라는 것을 미국에 알려 준 이름 모르는
소년에게 이 동상을 바치노라."
일체 중생이 불공 대상
간디 자서전에서 이런 내용을 본 적이 있습니다.
"영국에 유학가서 예수교를 배웠는데 예수교에서 사람 사랑하는 것을 배우고, 그 후
불교에서는 진리에 눈을 떠 일체 생명 사랑하는 것을 배웠다."
그래서 그 사람 말이 남의 종교를 말하는 것은 안되었지만, 비유하자면 예수교는
접시물이라면 불교는 바다와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 불교에서는 사람만이 상대가 아닙니다.
일체 중생이 상대 입니다. 물에 떠내려 가는 개미 하나 건지는 것도 불공이고, 변소에
빠진 파리 새끼 한 마리 건져 주는 것도 불공 입니다.
불교에서는 사람이고, 짐승이고, 미물이고 할 것 없이 일체 중생 모두다 불공 대상
입니다. 사람에 한정 한다면 너무 범위가 좁지 않습니까? 사람을 돕는 것만이 불공이
아닙니다. 일체 중생을 돕는 것이 불공 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실천하고 또
행해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되어야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도적놈 소리를 면할지
모르겠습니다.
불법 전하다 죽는 것은 영광
6.25 사변 전 문경 봉암사에 좀 살았는데, 지금은 죽은 향곡 스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산 신도들 신심이 많은데 법문 한번 해줘."
"내 말 들을까?"
"듣든 안 듣든 법문이나 한번 해줘. 내가 사람들을 모을테니."
가보니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불공하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불공이란
남을 도와주는 것이지 절에서 목탁 두드리는 것이 불공이 아니라고, 결국 절이란
불공하는 곳이 아니고 불공 가르치는 곳이라고. 불공은 밖에 나가서 해야 되는 것이라고.
남을 돕는 것이 불공이니까. 그리고 [행원품] 이야기도 많이 해 주었습니다. 듣고
기뻐하는 사람도 많이 보였습니다. 그리고는 봉암사로 돌아 왔습니다.
며칠 후 부산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큰일 났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각 도마다
종무원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경남 종무원에서 긴급 회의를 했다는 것입니다.
"성철인가 뭔가 하는 놈이 '절에서 하는 것은 불공이 아니고, 절은 불공하는 것을
가르쳐 주는 곳이다. 불공이란 남을 돕는 것이다.' 라고 말하니 이것은 절에 돈
갖다 주지 말라는 것이 되는데, 그러면 우리 중들은 모두 굶어 죽게 될 터이니 저놈을
없애든 죽이든 미국으로 쫓아 버리든 해야 된다 하며 야단들이 났으니 앞으로 다시는
그런 소리 하지 마시오."
하는 것 입니다.
조금 있으니 서울에서도 누가 내려 왔습니다. 서울의 총무원에서도 회의를 했다고 하며
또 그런 소리를 하는 것 입니다. 내가 그런 소리 한 것이 영향이 좀 있다고 보았던가
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 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말할까? 당신들 뜻대로 하자면 부처님 영험하고 도력 있으니 누구든지
돈 많이 갖다 놓으면 많이 놓을수록 복이 많이 온다고, 절에 돈벌이 많이 되도록,
그렇게 자꾸 선전할까? 그러면 나를 금방석에 올려 앉혀 줄 것인가?"
대꾸를 못하더군요.
"당신도 천년 만년 살것 같아? 언제 죽어도 죽는 건 같애. 꼭 한번 생각해 보라구.
세상 사람들은 탁주 한잔 먹고도 싸움하여 죽는 사례가 흔하지 않은가? 부처님
말씀 전하다 설사 맞아 죽는다고 한들 원통할 것이 무엇 있는가? 그런 영광이 어디
있어! 천하의 어떤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해도 나는 부처님 말씀 그대로 전하지, 절대로
부처님 말씀을 어기고 단 소리는 할 수 없으니 그런 걱정하지 말고 당신이나 잘 하시오!"
우리 대중 가운데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습니까?
"방장 스님은 법문 해 달라고 했더니 결국 우리 먹고 살지도 못하게 만드는 건 아닌가?
절에 불공 안 하면 우리는 뭘 먹고 살라는 말인고?"
걱정 좀 되지요?
암자 승려들이 더 걱정될 것 입니다. 큰 절이야 매표소 수입도 있고 추수 받는 것도
있어서 걱정 없지만, 큰 절이야 땅 짚고 헤엄치기지만, 암자에셔는 순전히 불공해서
먹고 살아야 하니까.
나도 걱정이 조금 됩니다. 백련암에 불지르러 올까 싶어서... 이것은 우스개로 하는
소리고, 물론 우리 해인사 대중뿐 아니고 다른 곳에서도 이런 생각들 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내가 항상 하는 말이 있습니다. 불교를 믿든지 예수교를 믿든지 자기의 신념대로
하는데, 예수교를 믿으려면 예수를 믿어야지, 신부.목사를 믿으면 안 됩니다.
그 사람들 믿다가는 천당이 무엇입니까, 지옥 입니다, 지옥.
그러면 불교는?
불교를 믿는다면 부처님 말씀을 믿어야지 승려 따라가다가는 거구로 간다는 말 입니다.
극락이 무엇입니까, 지옥이지요!
아무쪼록 예수교를 믿으면 예수 말씀이 표준이 되어야 하고, 불교를 믿으면 부처님
말씀이 표준이 되어야 하는 것 입니다. 지금 내가 말하는 것은 부처님 말씀을
중간에서 소개하는 것이지, 내 말이라고 생각하면 큰일 납니다. 달을 가리키면 저
달을 보아야지,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우리 대중도 다 알겠지만, 승려란 부처님 법을 배워 불공 가르쳐 주는 사람이고,
절은 불공 가르쳐 주는 곳입니다. 불공 대상은 절 밖에 있습니다. 불공 대상은
부처님이 아닙니다. 일체 중생이 불공 대상 입니다. 이것이 불공 방향이란 말 입니다.
내가 생각할 때는 절에 사는 우리 승려들이 목탁치고 부처님 앞에서 신도들 명과
복 빌어 주는 이것이 불공이 아니고, 남을 도와 주는 것이 참 불공이라는 것을
깊이 이해하고 이것을 참으로 실천하게 될 때, 그때 비로소 우리 불교의 새 싹이
트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생활 기준을 남 돕는데
진리적으로 볼 때, 남의 종교를 비판할 것은 아니지만, 예수교와 불교는 상대가
안됩니다. 그것은 양심있는 학자는 모두다 말하는 것입니다. 또 개인적으로 볼 때,
예수교에서 보면 불교가 아무것도 아니고 불교에서 보면 예수교가 별 것 아닐
것 입니다. 그러나 제 3자가 참으로 양심적인 면에서 말할 때 예수교와 불교는 서로
상대가 안 됩니다.
서양의 유명한 쇼펜하우어 같은 사람은 어떻게 평했느냐 하면 "예수교와 불교가
싸움을 한다고 가정하면 예수교가 불교를 공격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두드리는
것과 마찬가지요, 절벽을 향해 총알을 발사하는 것과 같다."고 극단적으로 말했습니다.
아니, 극단이 아니고 사실 입니다.
진리로 보면 그러한데, 그러나 실천 면에서 보면 거꾸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교 사람은
참으로 종교인 활동을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불교는 예수교 사람 못 따라 갑니다.
불교의 자비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고, 남에게 베푸는 것 입니다. 자기 욕심만
차리는데 무슨 자비가 있겠는가? 참으로 자비심을 가지고 중 노릇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며, 남 돕는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자비란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사회에 봉사하는 것 입니다. 아마 승려가 봉사 정신이
가장 약할 것입니다. 사회에 봉사하는 정신이 승려에겐 없다고 본단 말입니다. 예수교
사람들 보면 참으로 봉사활동 많이 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갈멜 수도원에 관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정월 초 하룻날 모여서 무슨 제비를 뽑는다고
하니다. 무슨 제비인지 아십니까? 그 속에는 양로원, 고아원, 교도소 등 어려움을
겪는 각계 각층이 들어 있습니다. 어느 한 사람이 양로원 제비를 뽑으면 1년
365일 자나 깨나 양로원 사람을 위해 기도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기도 대상 분담
제비인 것입니다.
고아원에 해당하면 내내 고아원, 교도소에 해다하면 내내 교도소 사람을 위해 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생활이 기도로써 이루어지는데 자기를 위해서는
기도 안 합니다. 조금도 안 합니다. 1년 내내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만 기도 합니다.
이것이 참으로 남을 위한 기도의 근본 정신 입니다. 이것이 종교인 것입니다.
아무리 남의 종교이지만 잘 하는 것은 본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먹고 사는 것은
양계와 과자를 만들어 내 팔아서 먹고 산다고 합니다.
먹고 사는 것은 자기들 노력해서 먹고, 기도는 전부 남을 위해 하고! 그런데
불교에서는? 불교에서도 소승이니 대승이니 하는데, 소승은 자기만을 생각하는
것 입니다. 남이야 죽든 말든, 대승은 남만 위해 사는 것입니다. 자기야 죽든 말든.
우리 불교의 근본은 대승이지 소승이 아닙니다. 원리는 이러한데 실천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쪽 사람들은 내 밥 먹고 남만 위하는데, 우리 불교에서는 이것이
아주 없다고 할 수 없지만, 아마 99%는 없다고 보아야 할 것 입니다. 내 계산이
틀렸는지 모르지만.
우리 불교하는 사람은, 더구나 승려들은 봉사 정신이 없지 않느냐 이렇게 봅니다.
예수교를 본 받아서가 아니고, 불교는 자비가 근본이므로 남을 돕는 것이 근본 입니다.
부처님 말씀처럼 불공이란 남을 돕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생활이 남을 돕는데에
기준을 두어야 합니다.
일체 중생을 위해 절하자
얼마 전 학생들이 절을 한 후 백련암에 올라 왔을 때 앞에 앉은 여학생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너는 무슨 생각으로 절 했나?"
"스님, 저는 저를 위해 절하지 않습니다. 남을 돕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절
합니다."
"그래, 너는 어째서 뺑뺑 두르기만 하지? 바로는 못 가나? 남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하지 말고 직접 '일체 중생이 행복하게 해 주십시요.' 하면
어때. 이렇게 하면 절하는 이 자체가 바로 남을 돕는 것 아니겠어? 모든 중생이
행복하게 해 달라고 비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는 거와는 다르지.
절은 한번 해도 남을 위해서 '일체 중생이 행복하게 해 주십시오.'하고 원을
세우고 절을 하는 것 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절을 하지 말고, 절하는 것부터가
남을 위해 해야 된단 말 입니다. 그리고 생각이 더 깊은 사람이면 남을 위해
아침으로 기도를 해야 됩니다. 어느 정도 인격이 있는 사람이면 '내 복만을 위해,
내 배만을 위해서' 기도는 못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남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기도
할 수있는 것 아닙니까.
내게 항상 다니는 사람에게는 의무적으로 절을 시킵니다.
"108배 절을 하라."
참으로 남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그런 생활을 하려면 날마다 아침에 20분 동안
108배 기도를 해야 합니다. 남을 위해 108배 기도하는 정성이 없으면, 아무리 불공
한다고 해도 그것은 많이 다릅니다.
나는 새벽으로 꼭 108배 합니다. 그 목적이 어디 있는가? 시작할 때 조건이 나를
위해 절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제 발심하여 예배하옴은 제 스스로 복 얻거나
천상에 나며... 구함 아니요
...모든 중생이 함께 같이 무상보리 얻어지이다.
이제 발심하여 108배를 하는데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나를 위해 절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체 중생이 모두 다 성불하게 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끝에
가서는,
...중생들과 보리도에 회향 합니다.
일체 중생을 위해, 남을 위해 참회하고 기도 했으므로 기도한 공덕이 많습니다. 이것이
모두 일체 중생에게 가 버려라 이것 입니다. 그러고도 부족하여,
원하노니 수승하온 이 공덕으로
위 없는 전법계에 회향 하오며
예불 참회한 이 공덕이 모두 남에게로 다 가라는 말 입니다. 그래도 혹 남은 것이
있어서 나한테로 올까봐, 온갖 것이 무상 전법계로, 온 법계로 돌아가고 나한테는
오지 말라는 말 입니다.
이것이 저 인도에서부터 시작해서 중국을 거쳐 신라, 고려에 전해 내려온 것입니다.
중국도 중공 적화 이전에는 총림에서만이 아니고, 모든 절에서 다 '참회'해 온
것 입니다. 일체 중생을 위해서, 일체 중생을 대신해서 모든 죄를 참회하고
일체 중생을 위해 모두 기도 했습니다. 그리고는 모두 법계에 회향하고, 모두
남에게 다 가버려라 한 것 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불교 믿는 사람의 근본 자세이고,
사명이며, 본분 아니겠습니까!
우주의 근본은 인과법칙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스님도 답답 하시네. 내가 배가 고파 죽겠는데 자꾸 남의 입에만 밥을 떠 넣으라
하니 나는 굶어 죽고?"
인과법칙이란 불교뿐 아니고 우주의 근본 원리 입니다. 인과 법칙은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듯이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 입니다. 선한 일을
하면 좋은 결과가 오고, 악한 일을 하면 나쁜 과보가 오는 것입니다.
병이 난다든지, 생활이 가난하여 어렵다든지 하는 것이 악한 과보 입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악의 원인이 있는 것 입니다. 물론 지금 그것이 기억 안 날 것입니다.
세세생생을 내려오며 지은 온갖 악한 일들이 다 기억 나겠습니까? 그러나 기억 안
난다고 해도 그 과보의 원인이 있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그것이 무엇이냐? 남을
해치는 것 아니겠습니까?
선인 선과란, 이번에는 착한 일을 자꾸 행합니다. 그려면 좋은 결과가 오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선이냐? 남을 돕는 것입니다. 남을 자꾸 도우면, 남을 위해 자꾸 기도하면
결국에 그 선과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도로 자기에게 모두 돌아 옵니다.
그러므로 남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결국 나를 위한 것이 되고, 남을 해치면 결국에는
나를 해치게 되는 것 입니다. 그래서 남을 도우면 도운 그만큼 내가 아무리 안
받으려 해도 또 내게 오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 기도하고 생활하면 남을 내가 도우니
그 사람이 행복하게 되고, 또 인과 법칙에 의해 그 행복이 내게로 전부 다 오는
것입니다.
생물 생태학에서도 그렇다고 합니다. 조금이라도 남을 해치면 자기가 먼저 손해를
본다고. 농사를 지어도 그렇습니다. 곡식이 밉다고 곡식을 헤쳐 보십시요. 누가
먼저 배고픈가. 자기부터 배고프지. 남을 도우면 남이 행복한 동시에 나도 배부르고,
남을 해치면 남이 배고픈 동시에 나도 배고픈 것 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배고파 굶어
죽을까 걱정하지 말고 부처님 말씀 같이 불공을 잘 하도록 애써야 할 것입니다.
한 가지 비유를 말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불공할 줄 모르고 죄를 많이 지어서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지옥문 앞에 서서 보니 지옥 속에서 고통받는 중생들 모습이
하도 고통스럽게 보여서 도저히 눈 뜨고 못 보겠거든요.
보통 같으면 '아이구 무서워라'. 나도 저 속에 들어가면 저렇게 될텐데. 어떻게
하면 벗어날까. 어떻게 하여 도망갈까' 이런 생각이 먼저 날텐데 이 사람은 생각이
좀 달랐습니다.
'저렇게 고생하는 많은 사람의 고통을 잠깐 동안이라도 나 혼자 대신 받고 저 사람들을
쉬게 해 줄수는 없을까? 편하게 해 줄 수는 없을까? 하는 착한 생각이 들었던
것 입니다. 이생각을 하고 보니 지옥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 순간에 천상에 와
있었습니다. 중생을 대신해서 지옥고를 받으려고 하는 생각을 하니 지옥은 없어지고
자기부터 천당에 먼저 가 버렸단 말 입니다.
모든 것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입니다. 착한 생각을 하면 자기부터 먼저 천상에
가 버린다 말입니다.
중생을 위해 사는 사람
요즈음 사회에서도 봉사활동을 많이 하고 있는데 우리 스님들은 산중에 살면서 이런
활동에는 많이 뒤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오직 부탁하고 싶은 것은 부처님 말씀에 따르는
불공을 해 보자 이것 입니다. 그리하여, 조석으로 부처님께 예불하는데 꼭 한가지
축원이 있습니다. 간단 합니다.
일체 중생이 다 행복하게 해 주십시오
일체 중생이 다 행복하게 해 주십시오
일체 중생이 다 행복하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세번 하는 것입니다.
매일 해보면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 참으로 좋은 것이 있습니다.
절을 한번 하든, 두번 하든 일체 중생을 위해 절하고, 일체 중생을 위해 기도하고
일체 중생을 돕는 사람, 일체 중생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어야만, 맨 처음에 말한
부처님을 팔아서 사는 도적놈 속에 안들어간단 말입니다. 도적놈은 면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러니 서로서로 힘써 불공을 잘해서 도적놈 속에 안 들도록 노력해
봅시다.
++++
1.
두렷이 깨달음 널리 비치니
고요함과 없어짐(滅)이 둘 아니로다
보이는 만물은 관음(觀音)이요
들리는 소리마다 묘한 이치로다
보고 듣는 이것 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아아 여기 모인 대중은 알겠는가?
산은 그대로 산이요
물은 그대로 물이로다
2.
말이 있고 말이 없는 것이 큰 나무를 의지한 것 같음이여
입이 벽에 걸렸으며
나무도 자빠지고 또한 말랐으니
말은 어디로 갔단 말인고
칼 밑에 쪼개진 몸이로다
알겠는가
따라 오너라
덕산이 대중에게 이르되 "오늘 밤에는 말 대답을 하지 않겠으니 만일 말을 묻는 자가
있으면 몽둥이로 서른 번 때릴 것이니라."
그때 어떤 중이 나와 절을 하거늘 덕산이 문득 때렸더니 중이 가로되 "내가 미처
말을 끄집어 내기도 전에 어찌하여 나를 때리나이까?"
덕산이 가로되 "너는 어디서 온 놈인고?"
중이 가로되 "신라에서 왔나이다."
덕산이 가로되 "뱃전을 밟기도 전이니 서른 번 때리기에 꼭 알맞도다."
법안이 이르되 "크고 작은 덕산이 말로써 두 가지 문지방을 만들었다." 하였으며,
단명이 이르되 " 크고 작은 덕산이 용 머리와 뱀 꼬리 하나 서로 따르는 것이로다."
원오극근이 이르되 "큰 도가니에서는 금을 녹이고 갑작스런 번개는 봄을 깨우치니,
풀과 나무가 피어나고 찬란한 빛이 스스로 새로워라. 작은 힘도 들이지 않고
하늘 기린을 잡았으니 죽이고 살리는 것이 자재하여 천고의 광명이 영겁 빛나도다.
말로써 두가지 문지방을 만든 것이며, 말 가운데 죽이고 살리는 것이라 할 수 있고,
용머리 뱀 꼬리여 손가락으로 손가락을 비유함이로다. 드러난 기둥을 잘못 잡는
애꾸눈 중이 목구멍이 막혀 말이 나오지 않는도다. 생각을 찾다보니 산이 겹겹
막혀 있고, 말을 더듬다 보니 혀 끝이 삼천리라 하니 서로가 따르는 것이로다."
고목 성이 이르되
"더듬어 금을 만지면서 밖의 소식을 들으니 이때를 당하여 누가 감히 깊은 정(定)에
들 것인고. 신라의 한 사람 중이 그 위엄 어둠을 깨고 광명이 빛나는 것을 부러워
하노니 이것이 서로가 따르는 것이로다.
설두 중현이 이르되
" 이 이야기를 들어 법의 눈이 둥글게 밝아 졌다 하였으며 이르되, 두 늙은이가 비록
잘 마음을 다듬으나 신기가 짧고 무거운 것을 버리고 가벼움을 쫓나니, 덕산에 대해
보건대 옳지 못한지라 무슨 까닭인고. 덕산은 산처럼 크고 위엄이 있어 마땅히
끊을 것을 당해 끊지 아니 하면 도리여 어지러운 칼을 부르게 될 것이니라.
모든 사람들은 신라의 중을 잘 아는가?
다만 이 드러난 기둥을 잘못 잡은 애꾸눈 중이라 하니 서로가 따르는 것이로다."
대우 지가 말하되
" 요즈음 사람들이 말하기를, 덕산은 완성된 사람이므로 그 법을 쓰니 훌륭한지라.
만일 그럴진대 도리여 일찍 꿈에라도 본 일이 없는가?"
대우 이르되, "덕산이 이 중의 한 방망이를 입어 곧 얼음이 녹아 내렸도다."
비록 그러하나 지금 한 개의 잘 만한 곳을 찾기가 지극히 어렵다 하니, 서로가
따르는 것이로다. 대중아 다자탑 앞에서 반 자리를 나눈 것이여 서로가 따르는
것이로다.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었으니 서로가 따르는 것이로다. 사라 나무 아래에서
두 발등을 보였으니 서로가 따르는 것이로다. 뜰 앞의 잣나무와 동쪽 산이 물위로
가는 것이여 서로가 따르는 것이로다. 서천의 이십 팔 조사와, 동토의 여섯 조사가
서로가 따르는 것이로다.
만일 이 이치를 알게 되면 석가와 달마가 지옥에 빠질 것이며, 그렇지 못하다면
조주와 운문이 머리를 조아리고 명령을 기다릴 것이니, 알겠는가 서로가 따르는 것이로다.
악!
또 악!
3.
법상에 올라 주장자를 잡고 한참만에 이르되,
이렇다 이렇다 하니 하늘은 무너지고
땅은 꺼졌으며 해와 달이 어두움이요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다 하니
새는 날고 토끼는 뒤며 국화는 누르도다
기와쪽이 모두 빛을 내고
금덩어리는 빛을 잃었도다
석가는 3천리나 물러가고
달마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도다
이 소식을 알아 들은 즉 일곱 번 자빠졌다가 여덟번 일어나는 것이며
알아듣지 못하면 머리는 셋인데 팔은 여섯이니
이것이 무엇인고 또한 무엇인고?
붉은 안개는 푸른 바다를 뚫고
밝은 태양은 수미산을 둘렀도다.
여기에 있어 밝은 눈을 갖춘 자 있으면
장부의 일을 능히 마쳤다 할 수가 있는 것이니라
그리고 부처와 조사의
참된 면목을 얻었다 할 수 있느니라
만일 그렇지 못할 때는
바기지에 찬물을 떠서
머리 위에 뿌리리라.
옛부터 조사 문중의 영웅은 임제와 덕산이라 하는데, 두 분은 실로 천고의 커다란
태양이라는 것을 총림에서는 정론으로 삼고 있다. 그 가운데 덕산은 두 제자를
두었는데, 그 하나는 유명한 암두와 설봉이다.
덕산 회상에서 하루는 공양 시간이 늦어 할 수 없이 덕산이 바루를 들고 걸식하러
나가려 하였다. 이때 공양주인 설봉이 그것을 보고 큰소리로 "아직 북소리도 나지
않았는데 바루를 들고 어디로 가려하오?"
덕산은 이 소리를 듣고 한 마디 대답도 없이 머리를 숙이고 방장실로 들어갔다.
암두가 그말을 전해 듣고 크고 작은 덕산이 끝 귀절을 몰랐구나 하였다는 것이다.
하루는 덕산이 암두를 불러 문책하기를, "이 못난 중아" 하였던 바, 암두는 그
자리에서 그 뜻을 알았다는 것이다. 다음날 덕산이 법상에 올랐으나 여느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이때 암두가 손바닥을 치면서 크게 웃으며 " 늙은 중이 끝
귀절을 알기는 하였으나 그것이 3년 뒤의 일이도다." 하였던 바, 과연 3년 뒤에
덕산은 열반에 드시었다.
이것이 종문의 향상 귀절로서 유명한 '덕산 탁발 이야기'인 것이다. 여기에 네가지
어려운 점이 있으니, 첫째 조사 가운데 영웅이라는 덕산이 어찌하여 설봉의 한 마디에
머리를 숙이고 방장실로 들어 갔을까? 덕산이 과연 대답할 능력이 없었을까? 그렇지
않으면 다른 뜻이 있었을까?
둘째, 덕산이 과연 끝 귀절을 몰랐을까? 끝 귀절도 모르는 사람이 어찌 조사라
할 수 있을까?
셋째, 암두가 그 뜻을 알았다 하였으니 무슨 말을 하였을까?
넷째, 덕산이 암두의 법문에 의하여 끝 귀절을 알았다 하였으니 암두의 수기를 받은
것인가? 그렇다면 암두는 덕산보다 훨씬 뛰어난 큰 조사가 아닐까?
이 공안은 그 독이 비상과 같으므로 이유 여하를 묻지 말고 몸을 상하게 하고 목숨을
잃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한가로운 견해를 내어 조사의 높은
마음을 묻어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사량과 분별심은 말할 것도 없으며, 허통
공적한 마음으로도 그 참 뜻은 절대 모르는 것이므로, 오직 끝의 관문을 타파하여
확실히 깨달은 다음에야 옛 사람의 깊은 가슴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공안을 바로 알면 모든 부처와 조사의 공안을 일시에 알아 우주 밖에 우뚝 솟은
장부로서 금강보검을 높이 들고 천하에 두루 다니며 죽이고 살리는 것을 자재하게
할 것이니, 어찌 퀘하지 않겠는가?
어느 날, 어느 중이 허당에게 묻되, "덕산이 바루를 들고 탁발하러 나가다가
설봉의 한 마디에 말없이 돌아 섰으니, 그 뜻이 어떠한고?" 하였던 것이다.
이에 허당은 "곧 돈과 보배를 샀느니라."
중은 다시 물었다.
"끝 귀절을 물랐다 하니 이 무슨 뜻인고?"
허당은 또 이렇게 대답 하였다.
"한가로운 시장에서 고요히 주장자를 쳤느니라."
중은 또 물었다.
"가만히 뜻을 알았다는데 그것은 무엇인고?"
"귀신은 곡식을 드리우고 부처는 담을 뛰어 넘었도다."
허당의 대답이었다.
중은 또 묻는다.
"늙은 중이 알기는 하였으나 끝 귀절을 어찌 할꼬?"
"칼과 창은 이미 없어 졌으나 악한 말은 없애기 어렵느니라."
중은 또 묻는다.
"덕산이 머리를 숙이고 방장실로 들어간 뜻이 무엇인고?"
허당의 대답은 이러하다.
"번갯불이 번쩍 하였다."
중은 또 이렇게 물었다.
"끝 귀절을 몰랐다 하였으니 무슨 뜻인고?"
허당은 "서로가 따름이로다."
중은 또 묻는다.
"가만히 뜻을 알았다니 무슨 뜻인고?"
허당의 대답은 이러 하였다.
"만년 늙은 솔은 축륭봉에 있으니까."
중은 또 물었다.
"과연 3년 뒤 열반에 드셨으니 정말 열반에 드신 것인가 아닌 것인가?"
허당은 이렇게 대답 하였다.
"옴 마니 다니 훔바탁."
이 두 늙은이의 문답이야말로 덕산의 탁발 이야기 가운데 골수를 관철 하였으니 자세히
참고하여 소홀함이 없도록 하라.
또한 설봉이 암자에 머무를 때 암두 사람의 중이 와 절을 하였다. 설봉은 문을 박차고
나가면서 "이 무엇인고." 하였던 바, 중도 "이 무엇인고." 하였더니, 설봉은 머리를
숙이고 앉았느니라.
어느 중이 암두를 찾았더니 암두가 말하기를 "슬프다 내가 당초에 끝 귀절 모르는 것을
후회 하였노라. 만일 이 뜻을 알았던들 천하 사람이 어찌 설봉을 탓하였으랴?"
중이 법문을 청하거늘 암두가 이르되 "설봉이 비록 나와 더불어 같이 났으나 나와
더불어 같이 죽지는 못할 것이니, 끝 귀절을 말하려 하면 바로 이것이니라."
이것도 덕산의 탁발 이야기와 서로 통하는 것이니라.
내가 어질지 못하여 화가 자손에까지 미쳤도다.
다음 날 운문의 적손되는 설두가 노래 하기를
"끝 귀절을 너에게 설 하노니
밝고 어두움이 서로 짝을 짓는 시절이라
나기는 같이 났으나
죽는 것은 같지 아니하니
그 같지 않음이여 석가와 달마도 분별 할 수 없느니라.
동서남북으로 돌아 다니니
깊은 밤에 다같이 바위를 보는구나."
이러한 공안은 천하 총림에 널리 퍼진 것이나 산승의 보는 바로는 장래를 생각하매
덕산 3부자가 끝 귀절은 알지 못하는 것이며 설두의 군말은 지옥에 떨어질 일이로다.
4.
하늘과 땅의 뚜껑을 여니
눈은 멀고 귀는 어둡도다
뭇 흐름을 끊음이여
손으로 춤을 추고
발로 뛰는도다
물결따라 흐름이여
일만 이천 봉이오
활촉 하나로 새 관문을 뚫으니
시월 상사일이도다.
알겠는가
저쪽 천성 밖에 손을 뻗히니
돌아오는 길에 불 속 연꽃이 피었도다.
운문에게 어떤 중이 물었다.
"나무가 말라지고 잎이 떨어질 때 어떠한고?"
운문이 이르되
"가을 바람이 불어 온다.
바위 꽃 가루여
벌은 꿀을 만들고
들풀이 살쪘으니
사슴 배꼽에 향기가 나는도다."
설두현이 이르되
"물으면 이미 뜻이 생기는 것이며 답하는 것도 또한 같은 것이니 라.
새 귀절을 가히 판단함이오 화살 한개 멀리 허공에 날았도다.
넓은 들이여
서늘한 바람 불어 오고
긴 하늘이여
성긴 빗방울이 듣는도다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소림굴에 오래 앉아 돌아가지 못한 손이 고요한 속 큰 귀가 드리워 졌도다
한밤중 달빛어린 냇물에
계수나무 그림자 떴고
가을 바람 눈 날리는데
흰 갈꽃 더욱 희기만 하다."
황룡신이 법상에 앉아 이 이야기를 말하였다.
"크고 작은 운문이 모두 죽어 자빠졌도다."
운암이 "그렇지 않다" 하면서
"나무는 말라지고 잎은 떨어진 때가 어떠한고?
고운 가지에 달이 비추었도다.
화관 쓴 무당은
쇄 요령을 흔들고
나무 칼 찬 선비는
단상에 오르는도다"
육왕담이 말하되
"운문은 사람의 반근을 얻어 가지고
도리어 남에게 여덟 양을 주었으니
별을 그릇 헤아렸다는 비방을 면하기 어렵도다.
육왕은 오늘 또한 어떠한고?
성긴 오동잎에 가을 달이 희고
돌 연꽃 맑은 물에 향기 더욱 새로워라
돌 호랑이 소리 지르며 하늘에 날아가고
진흙에 소는 뛰며 바다에 들어 가도다."
송원이 법상에 올라 이 이야기를 하면서 주장자를 놓으며 말하되
"운문은 도둑놈의 말을 빼앗아 타고 도리어 도둑의 칼을 빼앗아 도둑놈을 죽였도다."
대중들은 이 뜻을 알지 못하니 어찌된 일인고?
목숨이 가는 실 같도다.
그럼 누각 첫 새벽 피리 소리는
천 봉우리 깊은 산 구름 속 사람이로다.
대중아
도둑놈 몇 사람이 남쪽을 북쪽이라 하면서
사슴을 말이라 하고
일체 중생의 밝은 눈을 가리웠도다
문득 어떤 사람이 중에게 묻되
"나무는 말라지고 잎이 떨어진 때가 어떠한고?"
거기에 대하여 대답하되
"옴마니달리우발탁이라" 하였으니
"다시 말하라 옛 사람으로 더불어 거리가 얼마나 되는고?"
한참만에 이르되
"늠름한 위엄이
번개 속으로 달아 나는데
사방의 오랑캐가
모두 항복하도다."
5.
무심히 내 마음 가라 앉히니 도리어 형상과 그림자 서로 따르는도다.
어두운 곳에서 밝음을 얻었으나 어찌 햇빛은 나날이 새롭기만 하던고?
구비구비 푸른 물 찬 어름은 불꽃을 품고
천년 마른 나무에 옛 줄기 꽃이 피도다
백장은 귀먹었으며 황벽은 말하고 있으니 영산의 바른 명령이요
소림굴의 신스런 부작이라
알겠는가?
푸른 구슬이 쟁반에 구르고
유리집 위에 달이 돌고 있도다.
협산에게 중이 물었다. " 어떤 것이 협산의 경계인고?"
산이 이르되
"원숭이는 이미 청산으로 돌아가고
새 소리 떨어진 꽃은 바위 앞에 흐르도다."
뒤에 법안이 말하되
"나의 20년을 모아 말하라 하니
오직 하나가 되어 등진 일이 없으매
서천의 부처는 바로 이 늙은 구답이로다."
몰자처잉 이르되
"푸른 솔 달 밝은 밤 학의 꿈이 긴데
한밤중 계수나무 염소 뿔에 걸렸구나
바위는 천길이나 높은데 봉우리마다 흰 눈이로다."
석순이 이르되
"정에 드니 병 속에 해와 달이 길고
갑 속에 들어 있는 푸른 뱀 고함을 지르도다."
보봉상이 이르되
"옛 거울 또 닦아서 새로워지니
한 번 내 놓으매 모든 사람 놀라도다
돌 머리 성 밑에 바람이 불고
늙은 중 정에 들어 졸고 있도다.
흰 머리 검은 머리여
문 밖 금강이 웃기도 하고 성내기도 하도다."
천동각이 법상에 올랐는데 중이 묻되
"협산이 이르기를, 원숭이 새끼 청산으로 돌아가고
새 소리 떨어진 꽃은 바위 앞에 흐르도다, 하였으며
법안이 말하기를 " 나의 20십년을 모아 말하라, 하였으나
이것을 말하지 않았으니 또한 무슨 까닭인고?"
각이 이르기를
"조각 달 성긴 숲에 떨어지고 흰 구름 깊은 돌을 안았도다."
중이 이르기를 "가면 공이 없고 오면 묘를 얻으리로다."
각이 말하되
"뿌리를 비빈 놈이 어떻게 갈 것인고?"
중이 말하되
"가지 못하는 그때가 어떠한고?"
각이 대답하되
"한가닥 봄 냇물이 꽃을 안고 흐르도다."
중이 또 이르기를
"뿔에 무늬 놓아 활 만들고, 코끼리 번개 소리에 놀라 꽃속에 어금니를
감춘다 하니 이건 어떠한고?"
각이 대답하되
"이것은 떡 위에 꿀을 치는 것이로다.
높이 칼을 휘둘러도 자취가 없는데
달 속의 아가씨는 반 몸을 나투는구나."
고봉묘가 이르되
"바로 넉넉히 이 뜻을 아는 자라도 법안을 보면 쉽고 협산을 보면 어렵다.
동쪽 마을 버들 빛은 연기에 푸르르고
서쪽 거리 복숭아는 서로 비춰 붉었구나."
대중아
순한 것은 작고 거슬리는 것 많으며 장수는 적고 적은 많으니
숨고 나타남이 같은 길이요 잃고 얻어짐이 비슷하도다
옛부터 고덕들이 협산 늙은이가 있는 것을 몰랐으니
필경 어떠한고?
한밤중 한 무리 적을 만났으니
이것은 본래 동쪽에 사는 왕태백이로다.
악!
또 악!
6.
가령 몽둥이가 비오듯 쏟아지고 고함소리 천둥같이 울려와도 향상(向上)의 한 귀절을
바로 깨지 못할 것이니, 여기에 이르러서는 석가나 달마도 다시 30년을 참구하여야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니라.
그 밖의 역대 선지식과 천하 대종사는 모두가 풀이나 나무에 붙어 다니는 도깨비들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니, 뜰 앞의 잣나무와 개는 불성이 없다는 것도, 이 모두 무슨 말라빠진
똥막대기란 말이냐! 이 소식을 알겠는가?
돌 여자가 문득 아기를 낳으니 4월 보름날이더라.
반산이 대중에게 일러 가로되 "향상의 한 길은 천성도 전할 수 없다거늘, 공부하는
사람들 부질없이 애를 쓰나니 마치 원숭이가 달 만지는 것 같도다."
자명이 말하되
'향상의 한 길은 천성(千聖)도 전할 수 없는 것이니라' 말한 것을 운문 스님이 이르기를
'전할 수도 갈 수도 없는 것이여 바다같은 입이라도 말하기 어려운 대목'이라 하였다.
수미산 꼭대기에 쇠 배를 띄운다 하니 어지러히 꽃피는 길가가 아니면 버들가지에
꾀꼬리를 어찌 알리요.
육조에게 어느 중이 묻되 "황매의 뜻을 누가 감히 알 수 있으리오?"
육조 대답하되 "불법을 아는 사람이 알게 되느니라."
중이 묻되 "스님은 불법을 아시나이까?"
육조가 대답하되 " 나도 모르느니라." 하였느나 문 앞의 깃대가 거꾸러진 것이로다.
이 소식을 말한다면 이러하도다.
"소로 소로 사실이로다."
황용남이 법상에 올라 이르되 "부처님께서 저 연등불에게 한 법도 얻은 것이 없거늘
육조는 밤중에 황매의 법을 얻었으니 왠 일인고?"
이것을 노래해 가로되
"전할 것도 없으며 전할 수도 없는데 이치를 알았다는 것은 다시 무슨 말인고?
높고도 큰 산에서 물이 새고 신부는 나귀 타고 신랑 집에 가도다.
닭은 삼경 달 아래 울고 봉황이 깃든 곳에 한 낮에 눈이 내리도다."
대중아
비춤과 활용이 같은 때이며 주관과 객관이 모두 없으니 향상의 한 구멍은 동쪽 산
서쪽 재로다. 부처와 조사도 세우지 못하며 범부와 성인의 자취가 끊어 졌는지라
깊은 이치와 묘한 활용은 땅을 파고 하늘을 찾음이로다.
큰 도둑과 작은 도둑이 창자를 안고 울부짖으나 寒山(한산)과 拾得(습득)이 크게
웃는도다.
악!
또 악!
큰 칼을 바로 잡아 正令(정령)을 세울 때 태평스런 집 속에 어리석은 놈이 자빠졌도다.
악 !
또 악!
법상에서 내려오시다.
7.
전부가 보배요 전부가 주인이며, 모두가 당체이며 모두가 활용일세
모두 놓고 모두 거두며 모두 죽이고 모두 살리니
가섭과 아난이요 임제와 덕산이로다.
알겠는가?
개는 불성이 없다고 한 것이여 그러나 업식(業識)은 있느니라
암두가 사태를 만나 호수가에 떠내려 가다가 건너 갔느니라.
양쪽 언덕에 판자를 걸고 누가 건너 갈 때, 판자를 치게 되면 암두는 반드시 누구냐
할것이다. 그리고 어디로 가는 사람인가 할것이다. 그럴때 암두는 춤추면서 돛대를
가지고 맞이 할 것이다.
여느날 어떤 여자가 아이를 안고 찾아와 춤추며 돛대를 가지고 맞이 하였다는 것을
듣지 못 했으니, 말하라. 나는 정녕 어디로부터 왔을꼬? 암두는 주장자를 가지고
여자를 쳤던 것이다. 그때 여자는 말하되 "내가 아들 일곱을 낳아 여섯 놈은
눈 밝은 친구를 만나지 못했으며, 마지막 이 한 놈도 신통치 못하다." 하면서
문득 물속으로 들어 갔으니 귀한 문중에 반드시 용기 있는 장부가 있음이라.
낭낭각이 이르되 "적을 속인자가 바로 내라." 하니, 크고 작은 덕산이 끝 귀절을
알지 못함이로다.
응암화에게 어느 중이 묻되 "춤추며 돛대를 가지고 맞이 하였다." 하니 다시
일러라. "여자가 그 아이를 어디서 얻어 왔을꼬? 그리고 암두는 뱃전을 세 번
쳤다고 하는데, 그 뜻은 무엇일까?" 여기에 대하여 이렇게 대답 하였다.
"걸린 것을 끊으매 얼음은 계속되느니라." " 그때 만일 스님에게 물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대답은 이러하다. "몽둥이로 쳐 죽일 것이니라."
가로되 "늙은 스님이 큰 모자를 쓰고 갔으니 어느 곳을 향하여 암두를 본
것인고?"
또 이르되 "여자가 아들 일곱을 낳아 여섯은 눈 밝은 친구를 만나지 못했으며,
남은 하나도 시원치 못하다 하면서 물 속으로 들어 갔다니 이 뜻은 무엇인고?"
"그리하여 암두는 작은 우물을 팔았다 하였느니라."
또 암두가 뱉고 삼키는 것을 몰랐다 하니 그 뜻은 무엇인고?"
"기쁘면 그 수가 같나니라." 라고 대답 하였다.
북 치고 비파를 타는 것이여, 두 집이 서로 만남이로다.
천동민이 이르되 "기이 하도다. 그 여자가 비록 여자이기는 하나 스님의
기개가 있는지라 두 집이 서로 만나는 것을 보건대 번개불이 번쩍이는 것
같은지라. 이제 이 중은 아는 것을 다해 이르기를 아기를 안은 것이 기특하다
하였으니 그 허물이 지나치도다."
여자는 물 속으로 들어 간 것을 모르고 암두는 바람을 거슬러 돛을 쳤으니
동서남부을 돌아와서 깊은 밤 다 같이 눈 덮인 바위를 보는 것이로다.
대중(大衆)아, 주장자를 잡았으나 활용은 거꾸러지고 거슬러서는 놓고
순하게는 돌아오니 솜에는 돌을 싸고 쇠와 진흙이 같이 뭉쳤도다.
암두의 몽둥이는 물을 것 없거니와, 또한 일러라. 여자의 안은 아이는 이
무엇인고?
(한참 뒤) 늙은 나귀는 바른 법이 없고 임제의 아이들은 천하에 가득 하도다.
악!
또 악 !
8.
말이 있음이여 말이 없음이여, 부처와 조사를 초월했네
칡이 나무에 의지함이여, 하늘은 무너지고 땅은 꺼지도다.
나무가 자빠지고 칡이 말랐도다. 용은 자고 봉은 깃들었으니
귀절은 어디로 돌아 갔는고? 구슬이 금반에 달리도다.
향과 꽅이 비단에 수 놓였는데 칼과 창이 서로 엇갈리도다
사자는 소리 지르고 코끼리는 돌고 있도다.
이 한 귀절은 그만 두고, 귀 한 귀절은 무슨 일고
옴나니 발누명 훔이로다.
풍혈에게 어떤 중이 묻되
"말과 묵묵함이 거리가 없는데 무엇을 가지고 통함과 통하지 못함을 말 하는고?
혈이 이르되
"강남 3월 속에 꾀꼬리 우는 곳에 백 가지 꽃이 향기롭도다.
칼 산에 길이 험하나 한밤중 가는 사람이 많도다."
불감근이 말하되
"비단 구름 그림자 속에 신선이 나타나니 손에 잡은 고운 부채 얼굴을 가리도다.
급히 눈을 돌려 신선을 보고 신선의 손에 부챈느 보지 말라 하였으니
서너 집 마을 속에 맹서방이 사는구나."
죽암규가 이르되
"말을 타고 급히 달려 누각에 올라 가니 동서남북에 자유를 얻었구나.
허리에는 십만관 돈을 차고 다시 학을 타고 양주에 내려간다 하였으니,
고깔에 삼베 옷 입은 중은 청산 밖에 없고 한 동이 잠긴 물에 구름 속
달 이로다.
설두현이 이르되
"어떤 사람이 설두에게 묻거늘 팔과 배가 마음에 있다 하였느니라."
다시 또 무엇인고
바람 따라 물을 부니 모두가 한 집이요
상한 거북 죽은 자라는 반드시 주인이 있다 하였으니
산중의 90일이요 구름 밖의 천 년이로다.
백운명이 이르되
"풍혈 스님은 숲에 들어가도 풀이 움직이지 아니 하고 물에 들어가도 물결이
일지 않는도다."
눈 속에 수미산 거꾸러지고 눈썹에 세계가 가로 놓였으니
필경 어느 곳에 떨어 졌는고? 다만 늙은 첨지가 알 것이요.
늙은 첨지가 아는 것을 허락지 않으니 어둠 속에 해골이 세계를 밝히는 도다.
심문분이 이르되
"화로 속에서 한 점 별을 찾아 내니
많은 사람들이 피할 수 없어 문을 부수었다 하니
모든 성인이 눈을 뜨게 되었으며 위엄있는 소리가 집 밖의 봄에 가득하도다."
대중아
우주에 가득하고 시방을 뱉았으니
보고 들음이 끊어졌으며 나쥐 소리가 천지를 덮었도다.
영산의 싱그러운 풀이요 소림의 늙은 뼈로다.
홀로 천봉의 꼭대기를 점거 하였으며 위엄이 백 가지 풀 머리에 뻗히었도다.
알겠는가?
종 머리 젊은 계집은 삼태성을 춤추며
여덟개 팔 가진 신장은 쇠를 한창 먹고 있다.
9.
첫 귀절에 깨달아 얻으면 부처님과 조사의 스승이 되는 것이며,
둘째 귀절에 깨달아 얻으면 인간 세계와 하늘 세계의 스승이 되는 것이며,
셋째 귀절에 깨달아 얻으면 내 몸을 구제하기도 어렵다 하였으니 임제 늙은 스님의
말씀이여 남쪽을 북쪽이라 하고 도둑놈을 아들이라 하였으니, 이것은 천하 사람의
눈을 어둡게 한 것이요, 또한 이에 자기 목숨을 손상시킨 것이로다.
나는 그렇지 않아 첫 귀절에 깨달아 얻으면 지옥에 빠지는 것이요, 둘째 귀절에
깨달아 얻으면 태평 성대가 되는 것이며, 셋째 귀절에 깨달아 얻으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이는 것이로다.
비록 그러하나 독사가 몸을 감으매 해골이 땅에 떨어지니 이 한 귀절을 어떻게
벗어날 것인고?
한참만에 이르되, 달이 배를 따라 감에 강은 더욱 밝고, 봄은 푸른풀을 따라 가되
그 자취를 남기지 않는구나.
임제가 용광에게 묻되 "창을 쓰지 않고 어찌 이기기를 바라리오."
용광이 자리에 앉거늘 임제 이르되 "큰 선지식이 어찌 방편이 없나이까?"
용광이 이에 눈을 찡그리며 목 쉰 소리를 지르니, 임제가 손으로 가리키며
"저 늙은이가 오늘은 한가하지 않은 모양일세." 하고 가 버렸으니 가히 슬픈
일이로다. 이것이야말로 뒤통수에 박힌 화살을 빼는 것이도다.
또 일러라. 용광의 뒤통수의 화살을 빼는 것인가, 임제의 뒤통수의 화살을 빼는
것인가? 화살 한 개로 두 갈매기를 쏜 것이 결코 기이하지 않는지라 바다속
진흙 소가 달을 삼키고 달아 나도다.
대비가 이 이야기를 말하면서 "가석하도다. 용광이 때를 놓침이로다. 마땅히
임제의 말을 들어야사 옳다고 하니 한 때의 영광을 자랑하지 말라.
두발을 다 같이 잃음이로다."
공여가 이르되 " 두 늙은이가 서로 만남에 한 사람은 용이 뿔 없는 것 같고,
한 사람은 뱀이 발 있는 것 같다." 하였으니, 호반은 보기 쉬울 것이나 일반은
통하기 어려운 것이로다.
꿀 속에 비둘기 독이요 진흙 가운데 흰 옥이로다. 천하를 두루 다녀도 물을 곳이
없거니와 어떤 것이 본분의 손과 다리일꼬?
한참만에 이르되, 빛나는 칼빛이 북두칠성은 쏘는데 죽음의 산과 피 바다가 대천
세계에 가득하도다.
악! 또 악!
법상에서 내려오다.
주장자를 가졌으나 주장자를 주었으며 주장자가 없으니 주장자를 빼앗았도다.
호랑이를 쫓아 버리고 사자는 개가 되었으니, 쇠를 팔아 금을 얻었으며 재주를
팔아 어리석음을 이루었도다. 남쪽 산에 구름이 일어나매 북쪽 산에서는 비가
내리고, 동쪽 집에서는 노래와 춤이 한창이로다.
양이 대중에게 이르되
"주장자의 뜻을 알게 되면 한 평생 공부는 끝이 나는 것이니라."
담이 이르되
"말로써 주장자의 뜻을 얻으면 지옥에 들어가 활에 쏘이는 것 같다고 하니
관(官)에서는 바늘도 용납되지 않으나 사사로는 수레가 통하는 것이로다.
노래해 가로되
"주장자여 천하의 참선하는 무리에 달려가는 것이로다. 가을 바람은 급하기 살과
같고, 봄비는 기름처럼 부드러워라. 그대는 소생 강으로 가고 나는 진나라로
향하는도다."
지해일이 법상에 올라 이 이야기를 말하되 " 이 두 늙은이가 하나는 나가고 하나는
들어고 반쯤 합하고 반쯤 열리니 마치 방패와 창이 서로 대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천복은 그렇지 않아 주장자의 뜻을 잘 알았으니, 달이 뜨매 차가운 빛이 흐르고
구름을 가리키매 조각 가을이 옮기는 도다. 차가운 곳에 불을 잡고 저자가 열리매
고요가 깨어지도다.
운문이 주장자를 잡고 대중에게 이르되 "이 주장자가 용이 되어 하늘과 땅을
삼킬 것이로다. 이때를 당하여 산하대지는 어떻게 될 것인고?"
가다가 물이 끊어진 곳곳에 이를 것이며 앉아서 구름이 일어나는 때로다.
운계익이 노래해 가로되
"산은 높고 물은 가득하니 나그네 머나 먼 길을 돌아오는 길이로다."
큰 문을 뚫고저 할 때 복숭아 꽃 물결치고, 바람과 번개는 어느때나 얻어질꼬?
내 집에 돌아오매 그 일이 그 일인데, 아지랑이 엎인 마을 두견 울음 뿐이로다.
한 방울 수묵색이 두 곳에서 용(龍)을 이루도다. 또 한번 주장자를 치며 세워
이르되 운문의 주장자의 뜻은 묻지 않겠다. 주장자를 한번 치면서 이르되, 벽력
한 소리에 천지가 무너지니 가가 호호 집집마다 활짝 문이 열렸도다.
문득 법상에서 내려가다.
10.
조주가 차를 마심이여 안량이 관우를 만났도다
오호의 선객이 백골 되어 올아오지 않으니
알겠는가?
세 머리 여섯 팔이 성내는 그 때만 백성 대문마다 활짝 열리는 도다.
보자에게 어떤 중이 묻되 "지혜보다 정(情)이 먼저 나고 생각이 변함에 몸이
다르나니, 정이 나지 않을 때 어떠한고?"
보자가 대답하되
"정이 아직 나질 않았거늘 생각이 변한다는 것은 무엇인고? 그대가 아직 사람을 만나지
못했으니 주장자 끝에 해와 달이 뛰는도다."
천야희가 노래하되
"옛 사람이 한 번 간 다음 내가 명맥을 잇는도다. 한양 돈을 알려하면 두 개가
오백이라 하니 임제와 덕산이로다."
대중아 보라, 늙은이가 마음은 뱀이요 입은 부처이니, 사람을 죽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또 한 사람을 살리기도 하는도다. 부처님이 밤낮으로 광명을 놓으니 소림굴
바위 앞에 얼음 눈이 차가와라.
이 소식이 어디로 떨어졌는고?
사람이 가난함에 지혜가 짧고 말이 야위매 털이 길도다.
악!
또 악!
11.
천고(千古)에 일 없으니 험난이 눈앞에 이르렀다. 실전(失錢)의 죄를 만나니 벗어나기
어렵도다.
알겠는가!
앞으로 삼일이 가고 뒤로 삼일이 남았더라.
이 깊은 뜻이야말로 우리 종단이 짊어진 큰 짐이요 풀어야 할 숙제 입니다. 만일 종단의
재건에 추호라도 뜻을 달리 하거나 다른 뜻을 품는다면 그것은 부처님의 적자가 아니요
불법을 훼방하는 마군임이 분명할 것입니다.
종단의 시비가 끊어지지 않고, 승려 교육이나 포교 활동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모두
깊이 반조(返照)하고 자성할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종단이 선적(善積)하고 있는 무한한 잠재 능력을 소홀히 평가해서는 안됩니다.
종회는 시비의 도량이 아니라, 고준한 기변(機變)을 격률(格律)하고 납자(衲子)의
명안(明眼)으로 종단의 근본 살림을 논하는 법다운 거양처(擧揚處)가 되어야 합니다.
불가에 거(居)하되 불법을 멀리하고, 산 속에 거하되 산을 떠나 살았으니 오늘날 백천간두의
험난에 빠졌음을 부처님 말씀대로 '업(業) 짓는대로 보(報)를 받음이라' 이제 종회의원
여러분은 현대 불법의 장을 획(劃)하는 주인공이 되어야 하며, 또 그렇게 하는 것만이
이 종단의 활로임을 천만 당부하노니, 불법 중흥의 불사에 용맹정진 있기를 바랍니다.
12.
약과 병이 서로 다스리니
석가는 병이요, 가섭은 약이라.
아미타불이 어찌하여 가시넝쿨 수풀 속에 드러 누웠는고?
한 뒤에 말하되
같은 문으로 드나드나 옛적부터 원수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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