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산 스님의 법어
진언(眞言)
그믐 달 밤에 토끼 뿔다귀 지팡이를 짚고,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니
뒤에 한 사람이 있어 문득 나를 불러 묻기를
"어느 곳을 향해 가느냐?"
대답 하기를
"부처 없는 곳을 향해 가노라"
또 묻기를
"어느 곳에 부처가 없는고?" 하거늘 대답 하기를
"머리를 돌이켜 흰 갈매기에게 물어보라" 하니
또 묻기를
"세계 인류가 물 속에 있으면서 목마름을 부르짖으니 이 무슨 까닭입니까." 하거늘
대답 하기를
"막혔다." 하였으니
이 묻고 대답함이 바로 불교의 참된 모습을 드러냄이로다.
호살인자(好殺人者) - 마하연(강원도 회양군 내금강면에 있는 표훈사의 암자)에서
스님이 어느 날 만공 스님께 묻되
"천하에 살인 하기를 좋아하는 자가 있으니 그게 누굽니까?" 하니,
만공 스님게서 대답 하기를
"오늘 여기서 보았노라" 하였다.
효봉스님이 다시 이르되
"화상의 머리를 취하고 싶사온데 허락 하겠습니까?" 하니
만공 스님이 목을 길게 빼어 내미니 스님이 문득 예배를 드렸다.
다음은 만공 스님이 도로 묻되
"제석천왕이 풀 한 줄기를 땅세 꽂고 부처님께 여쭙기를 '범찰(梵刹)'을 지어 마쳤습니다'
고 하니 세존께서 웃으셨다고 하니, 그 듯이 무엇이겠는가?"
스님이 말씀하시되
"스님은 참으로 절 짓기를 좋아 하십니다." 하였더니 스님은 한바탕 웃어 버렸다.
시중(示衆)
이 주장자(柱杖子)를 주장자라 하면 주장자 하나를 더하는 것이요, 또 주장자 아니라 하면
머리를 끊고 살기를 구하는 것과 같다. 이말은 환하게 일러 준 말이요, 여간 가깝게 이른 소리가
아니다. 이말 한 마디에 물론 생사를 잊고 한 번 뜀에 바로 여래지(如來地)에 들어가는 것이다.
여기서 알차채야 하고, 이 소리에 알아채지 못하면 아니된다. 어떻게 해야 주장자라고도 아니하고,
또 아니라고도 하지 않고, 한 마디 이를 수 있겠는가.
청산의 다리를 치니
동해가 머리를 들고 이르도다
주장자를 세번 치고 말씀 하시길
사람이 다리를 쫓아 오는데
다리는 흘러도 물은 흐르지 않도다
고인이 이르기를 꿈도 없고 생각도 없을 때 내 주인공이 어느 곳에 있어서
안심입명(安心立命)하는고? 이렇게 물었다.
(좀 있다가)
이곳에서 대중의 근기를 따라 좌탈입망(坐脫立亡)하는 길이 있으며,
또한 가지는 모든 부처님의 몸을 내는 곳이 있다. 이곳에서 가려 낼 줄 알아야 비로소
얻는 것이다.
설령 좌탈입망 하더라도 그것은 "기이한 바위에 이상한 풀이 푸르기는 하나 또한
빼어난 대순이 없다." 기암(奇岩)에 이초청(異草靑)이나 차무추조순(且無抽條筍) 이로다.
그러면 어떠 하여야 '빼어난 대순'이 있는 도리인고?
앉아서 시방(十方)을 끊어도 오히려 이마에 점(點) 친 것이니
밀밀(密密)히 한 걸음 더 나아가야 나는 용(龍)을 보도다.
해제법어(解制法語)
오동 한 잎사귀가 금정(金井)에 떨어지니
이로 쫓아 천하가 가을인 줄 알겠도다
운문선사가 하루는 승을 돌아 보면서 '감(鑑)!' 하고 말하니, 승이 무어라고 우물대는 것을
곧 '이(이)!'라고 말했다. 이뜻을 직하에 승당(承當) 한다면 참으로 예를 아는 것이요,
비로소 참괴심(懺愧心)을 낼줄 아는 것이다. 이로부터 활구(活句) 총선(총禪)을 할 줄 알고
하게 되는 것이다. 이 뜻을 모르면 헛일이다. 어떻게 해서 한 말인가? 이 뜻을 알겠는가?
돌아보고 '감(鑑)!' 하고 '이(이)!'라고 했으니 고감이(顧鑑이)였다.
이뜻이 무엇인가? 오늘은 우리가 해제하는 날이니 이것을 모르면 해제를 헛한 것이다.
서로 보고도 누썹을 들지 않으니 그대는 동(東)이요
나는 또한 서(西)로다
붉은 안개는 푸른 바다를 둟고
흰 해는 수미산을 돌도다
(다시 대중을 보시고 주장자를 세번 두드리시고 나서)
도화는 조각 조각 깊은 근원에서 나오고
봉오리는 푸르고 푸르러서 색이 더욱 더 새롭도다
양귀비가 당 명황의 눈을 피해 가면서 안록산과 사귀어 오는데, 양귀비는 자주 시녀 소옥을
불렀다. 소옥을 부르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다만 안록산에게 제 소리를 알아 듣기를
요구한 것이다.
이 법문이 부처님 법과 사상이 똑 같아야 한다. 이것은 제불의 골수니, 이 뜻을 알면 천칠백
공안을 한 꿰미에 꿰는 것이다. 이것은 우스운 말 같지만 이 공안을 철저히 알아 맞춰야 한다.
두 사람의 마음 일으 ㄴ오직 두 사람만 알도다
이것이 불법의 적적(的的)한 대의(大意)다. 이것이 어째서 적적대의(的的大意)인고?
마음
... 우리의 마음 자리는 본래 편안하고 조금도 다른 것이 없다. 이 법신이 본래 스스로 남(生)이
없거늘 다시 어느 곳에다 의탁하려 하는가. 마음은 신령스럽고도 또렷하여 항상 모두를
알고, 쫓아 온바도 갈 바도 또한 본래도 없는 것이다.
옛적에 개오하여 아주 환하고 의심이 없으나, 다만 무시 이래의 번뇌 습기가 물론 다하지
아니 한다고 말한다면... 마음 밖에 나먼지 법이 없을진대, 번뇌 습기가 이것이 무슨
물건이건대 다하려고 하느냐. 도무지 마음 밖에 다시 한 물건도 없는 줄 알았을진대,
번뇌 습기가 무슨 물건이건대 그것을 다 하고자 하느냐는 말이다.
만약 터럭 끝 만큼이라도 제하여 버릴 번뇌 습기가 남아 있다면, 이것은 아직도 마음을
두렷이 깨치지 못한 까닭이니, 이런 사람은 다만 다시 분발하여 크게 깨치기를 기약할
따름인 것이다.
부처란
.. 다시 부처란 깨달음이니, 마음을 보고 마음인 줄 개달은 것이 부처이며, 그 마음을 깨닫지
못하고 미해 쓰는 것이 중생이다. 깨치고 미한 것은 다르나 마음은 한 가지다. 이 마음을
제하고는 마침내 다른 부처를 얻을 수 없으며, 보리니 열반이니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부처는 허물이 없거늘, 중새이 전도하여 자심(自心)이 부처인 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니,
자심이 부처를 찾지 않는 것이다. 불성은 스스로 있는 것이나, 스승을 인(因)하지
않으면 마침내 밝게 요달하지 못하나니, 만일 깨달아 알지 못하거든 급히 선지식을 찾아
힘써 참구하여야 하느니라.
성품을 보면 이것이 부처요, 성품을 보지 못하면 중생이다. 만일 중생을 여의고 따로
불성이 있다고 한다면, 부처는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 중생성(衆生性)이 곧 불성인
것이다. 성품 밖에 부처가 없고 부처가 곧 성품이니...
부처에 있어서 더하지 않고, 중생에 있어서 덜하지 않는 똑같은 마음이나, 부처님은
그 마음을 믿고, 중생은 그 마음을 믿지 못하는 것이니, 믿고 믿지 않는 것이 다를
뿐이요, 부처와 중생은 둘이 아닌 것이다.
마음 찾는 법
... 꿈도 없고 생각도 없을 때
내 주인공이 어느 곳에 있어서
안심입명 하는고.
여기에는 무엇이든지 어리대지를 못한다. 까딱 잘못하면 그만 미끄러지며,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이 들면 이미 그른 것이다. 공부를 지어 가는 데는 진실로 용심(用心)을 잘 하여야 하니,
"꿈도 없고 생각도 없을 바로 그때 내 주인공이 어느 곳에 있어 안심입명하는고."
이렇게만 지으면 단번에 여래 땅에 들어가며 백척의 장대 끝에서 한 걸음 나아가 몸을 날려
한 바탕 던질 것이다.
공부인은 계행을 깨끗이 하여야 한다. 더러 보면 계를 우습게 알고 불조의 말씀을 믿지 않는
이가 있다. 부처님께서 그렇게 행하신 일이 없고 조사가 그렇게 한 일이 없다. 해(解)와
행(行)이 분명해야만 한다.
만일 해와 행이 나누어지고 각각 다를 것 같으면 이것은 온전함이 아니다. 고인(古人)은
이렇게 분명히 일렀거늘 예사로 알고 또 무방반야(無妨般若)라 하여 망녕되이 걸림없는
행을 지어서야 되겠는가. 참으로 공부를 열심히 지어 나가면 저절로 계정혜 삼학이 원만해
진다.
계(戒)란 별 것이 아니다. 어리석어서 잃었던 내 마음을 다시 회복하는 그때가 곧 계이다.
그렇게 알면 곧 정(定)이 있고, 정이 있을 때 계(戒)가 나는 것이며, 도(道)가 있을 때
계가 나는 것이며,도가 있을 때 계가 함께 나는 것이니 정과 계와 도가 하나이기 때문이다.
선물
"내가 지난번 당신네 나라에 가서 후대를 받았는데..."
다보탑 앞의 돌 사자를 가리키며
"저 사를 보시오?"
"네 봅니다."
"그 소리를 듣습니까?"
"..."
"내가 당신네에게 선사할 것은 이것밖에 없습니다."
(태국불교 대표 승려 일행과 불국사에서)
노사자찬(老師自贊)
원래 일찍이 전(轉)한바 없거니 다시 어찌 제 2신(身)이 있으랴
백년이라 삼만 육천 날이 다못 이놈의 반복이라
일체법 일체심(一切法 一切心)
부처님이 일체법 설함심은 일체심을 건지고자 함이니
네 만약 일체심 없을진대 일체법 가져 무엇에 쓰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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