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평론 2004년 겨울호 제21호 홈 > 불교평론 21호
[권두언]
한국불교의 정체성과 세계화
최근 한국불교의 정체성이 다시 문제가 되고 있다. 통불교가 한국불교의 정체성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지금까지 주로 학계 내의 논쟁으로 국한되어 왔으나, 최근 조계종 종단의
세계화 종책과 관련하여 한국불교의 통불교 정체성이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정체성' '전통' 그리고 '특성'이란 문제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둘러싼 많은 문제가 바로 이 세
용어를 구별하지 않고 혼용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불교에 관한 대부분의 논의를 살펴보면 한국불교의 특성을 찾는 것이 다른 지역의 불교
전통과 구별되는 한국불교 고유의 전통을 찾는 것이고, 나아가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규명하는 것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한국불교 연구에 관련한 이러한 방법론적 전제는
사실 불교학 연구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한국사상 더 나아가 동양사상 연구의 일반적
태도이기도 하다. 한국사상과 관련한 이러한 방법론적 전제의 한 '원조'는 박종홍이다.
근대 이후 한국사상 연구의 태두로 꼽히는 박종홍은 1958년 <한국사상연구에 관한
서론적인 구상>이란 논문에서 한국사상을 '한국의 특색 있는 사상'이라 정의하고 있다.
한국불교 사상과 관련한 연구에서도 그는 이를테면 "우리는 이 지눌의 사상을 탐구
규명함으로써 한국불교 사상이 어떤 점에 있어서 그의 특색을 발휘 하고 있는가 밝혀질
것이 기대된다."고 하여 승랑, 원효, 지눌 등 한국불교사의 걸출한 몇몇 인물들의
연구를 통해 한국불교의 특색을 귀납적으로 규명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특색을 통해
한국불교 사상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박종홍의 방법론은 그 이후의 많은 한국불교학자들에
의해 답습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즉, 특색이란 다른 것과
구분되는 것을 일컫는 동시에 일정기간 지속되는 현상을 말한다. 일시적이거나 역사적 맥락
없이 돌발적으로 튀는 단발적 현상을 특색이라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부 학자들이
승랑, 원효, 원측, 의천, 지눌, 서산 등의 사상을 연구함으로써 한국불교의 특색을
규명하려 하고 있으나, 승랑에서 원측, 원효 등을 거쳐 지눌, 그리고 근대에까지 이르는
한국불교의 통사적 특징이란 것이 과연 실재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이러한 입장에서 우리는 최근 다시 논란이 되고 있는 통불교론과 그에 대한 비판론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상이한 교학을 '하나'의 관점으로 통합하려는 입장이 원효와 지눌
등에서 드러난다는 입장에서 통불교 옹호론을 지지할 수도 있지만 앞서 언급한대로 그러한
'해석학적 입장'이 한국불교의 통사적 특징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또한 통불교론란 것이 전적으로 최남선의 '창작'이라고 하는 극단적인 '구성주의'적 입장도
무리가 있다. 요컨대 '통불교'는 최남선의 '발견물'(discovery)이긴 하지만
'창작'이나 혹은 '발명품'(invention)은 아니라는 것이 역사적 사실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불교사의 특정 시기에 드러나는 원융 회통적인 특성을 최남선이 찾아내어
이를 한국불교 전체를 일관하는 특성/정체성으로 재가공/재구성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최남선과 그 입장을 따르는 많은 한국불교 후학들이 보고 있는 대로, 원효나
지눌의 교학적 특징은 종파성을 지양하는 원융적 입장에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러한 입장은 한국불교적 사유체계의 특성이 반영된 것이라기보다 한국불교사의 역사적
특수성에 의한 것이다.
통 불교의 원조격인 원효의 경우 중국에 갈 수 없었기 때문에 (혹은 가지 않았기
때문에) 동시대의 의상 등과 달리 중국의 여러 종파적 불교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자유로운 입장에 있을 수 있었다. 또한 고려시대 이래 조선을 거치면서 불교계는
세속 권력의 요구에 따라 통폐합이 끊임없이 이루어져 왔기 때문에 종파적 불교의
다양함이나 종파간의 섬세한 차이를 발전시킬 역사적 동기를 가지지 못했다.
그리고 원효의 초종파적 불교 이해가 보여주는 원융적 사고체계와 지눌이 선과 화엄의
통합적 이해에서 보여주는 원융적 사고체계가 동일한 것도 아니다. 더구나 이러한 원융적
사고는 대승불교 특히 화엄 불교적 사유의 한 특징이지 한국불교 고유의 사고 체계는
아니다.
따라서 원효나 지눌 그리고 서산 등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교학적 특징으로서
통불교라고 할 때 '통불교'란 어떤 구체적 내용을 가진 개념이 아니라 해석학적
전략으로서의 원융적 불교 이해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소위
통불교란 것은 한국불교의 특수성에 따른 한 특성이긴 하지만 한국불교의 전통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전통이란 과거로부터 현재로 이어지는 어떤 연속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고정 불변의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불교사만 보더라도 과거를 부정하고 현재적 입장에서
재해석함으로써 오히려 역설적으로 과거를 계승해온 것이 바로 불교의 역사이다. 통불교론의
한 문제점은 한국불교의 과거의 그리고 현재의 다양성을 간과하는 데 있다. 현재 조계종을
최대의 종단으로 가지고 있는 한국불교는 수행면에서는 간화선을 위주로 한 선종을 표방하고
교학이나 일반 신행적 측면에서는 통불교를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소위 통불교란 다양성을 인정하는 다원주의적 통불교가 아니라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어떤 '하나'로 흡수 통합하려는 헤게모니와 파워에 의한
통합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한편으로 선이 최상승이고 간화선이 최상근기의 최고 수행법을
주장하면서 여러 다른 것들도 (최선은 아니지만 근기와 시절인연에 따른) 방편으로
인정한다고 하는 것은 현대의 다원주의적 사고와 맞지 않을 뿐더러 여전히 종파적 불교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종파성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통불교가 가장 배격하려던 것이 아니었던가? 현대적
의미에서 통불교란 스스로의 입장을 중심으로 다른 것을 통합하려는 '수직적' '종파적'
원융성이 아니라 스스로의 입장 또한 '부분'일 수 있다는 '수평적' '다원주의적'
입장의 새로운 원융이라야 할 것이다.
더구나 세계화를 이야기하는 지금의 입장에서 우리는 원효나 지눌의 문제의식이 어디에
있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원효를 세계화하고 지눌을 세계화한다고 하지만
오히려 그들은 당시에 이미 세계화 되어 있던 사람들이었다. 당시의 동아시아의 불교담론
공동체에 직접 참여하고 있었고, 그들은 '한반도'를 넘어서 인도와 동아시아 전체를
포함하는 범불교권과 문제의식을 함께 공유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인류'라고 하는 보다 보편적 문제의식이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이들의 사상을 한국 '고유'의 특징 운운하고 다시 이를 세계화한다고 하는 것은
오히려 이들의 사상적 의미를 축소시키는 '세계화'가 아닌 '지방화'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화를 위한 한국불교의 정체성은 어디서 찾을 것인가? 앞서 언급한 대로
특색이 곧 전통일 수도 없고 정체성일 수는 더 더욱 없다. 정체성이란 '전통'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과거에서 찾아내는 것이 아니다. 정체성이란 '현재'의 모습이며
미래를 만들어 가는 모습이다. 한국불교의 현재 모습은 과거 인연의 총화이며, 미래
모습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한국불교의 현재 모습은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듯이 많은 문제점이 있고, 그 모습 그대로
한국불교를 세계화하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회의마저 든다. 국내에서의
문제점은 세계화하는 가운데 더욱 더 확대 재생산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불교가 그 정체성을 찾고 세계에 기여할 수 있기 위해서는 환골탈태한 새로운
모습이라야 할 것이다. 그 새로운 모습은 과거로부터가 아니라 지금 여기, 한국 현대
사회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과거 전통으로 돌아가 어떤 특정 인물이나 사상을 복원하는
것이어서는 곤란하다. 불교의 역사는 끊임없는 자기부정의 과정이었다. 변화하는 종교적
환경이 주체적으로 적응함으로써 붓다 본래의 메시지를 역사 속에서 직접적으로 실현해 왔던
것이다.
한국불교는 오래 동안 (근현대사만을 보더라도) 시대적 변화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함으로써 지금 일종의 집단적 위기감을 공유하게 되었다. 이러한 위기감의 근원은
한국불교가 붓다의 가르침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함으로써 발생한 불신과 새로운 종교 환경에
적응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빠지게 된 무기력에서 출발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찾는 작업은 잘못된 구습과 과거로부터의 구태의연함을 청산하고 현대라고 하는
새로운 종교 환경에 맞는 모습을 찾는 데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종교의 역할과 위상은 전통 사회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한국불교의 경우
근대 이후 교육받은 재가자의 등장은, 전통적 교단의 절대적 권위를 주장하는
출가자들에게는 위협적으로만 느껴질 수 있겠지만, 한국불교의 미래로 보아서는 가장 큰
기회이다.
이들과 더불어 출가자 중심의 종단이 좀더 문을 열고 다양화, 전문화, 현대화하는 길이
곧 한국사회 내에서의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찾는 길이고 세계화할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한다. 한국사회에서 불교는 더 이상 전통이고 유산이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에서
살아있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조성택
(본지 주간 / 고려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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