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알리어 경전/디가 니까야

확신경(確信經)(Sampasadaniya sutta. D28)

실론섬 2014. 4. 15. 02:00

D028.확신경(確信經. Sampasādanīya Sutta)
(믿음을 고양하는 경)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날란다에서 빠와리까 망고 숲에 머물고 계셨다. 그무렵 사리뿟따 존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사리뿟따 존자는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께 이런 분명함(흔들림 없는 믿음)이 믿음이 있습니다. 깨달음에 관한 한 세존을 능가하는 더욱 완전한 지혜를 가진 사문이나 바라문은 없었고, 없을 것이며, 지금도 없습니다.”

 

2. “사리뿟따여, 그대는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께 이런 분명함이 있습니다. 깨달음에 관한 한 세존을 능가하고 더욱 완전한 지혜를 가진 사문이나 바라문은 없었고, 없을 것이며, 지금도 없습니다.’라고 황소 같은 목소리로 출중한 말, 확신에 찬 사자후를 토한다. 사리뿟따여, 그대는 ‘그분 세존들은 이러한 계를 가졌다.'거나, '그분 세존들은 이런 법을 가졌다.'거나,  '그분 세존들은 이런 혜(慧)를 가졌다.'거나, 그분 세존들은 이렇게 머물렀다.'거나, '그분 세존들은 이렇게 해탈했다.'라고 이렇게 과거에 있었던 아라한∙정등각인 그분 세존들 모두를 마음으로써 마음을 잘 이해하여(분별하여) 일았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사리뿟따여, 그대는 ‘그분 세존들은 이런 계(戒)를 가질 것이다.’거나 ‘그분 세존들은 이런 법(法)을 가질 것이다.’거나 ‘그분 세존들은 이런 혜(慧)를 가질 것이다.’거나 ‘그분 세존들은 이렇게 머물 머물 것이다.’거나 ‘그분 세존들은 이렇게 해탈(解脫)할 것이다.’라고 이렇게 미래에 있을 아라한·정등각인 그분 세존들 모두를 마음으로써 마음을 잘 이해하여(분별하여) 일았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사리뿟따여, 그대는 ‘세존은 이런 계(戒)를 가졌다.’거나 ‘세존은 이런 법(法)을 가졌다.’거나 ‘세존은 이런 혜(慧)를 가졌다.’거나 ‘세존은 이렇게 머문다.’거나 ‘세존은 이렇게 해탈(解脫)했다.’라고.’라고 지금의 아라한·정등각인 나를 마음으로써 마음을 잘 이해하여 일았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사리뿟따여, 여기서 그대에게는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아라한∙정등각들의 마음의 질서에 대한 마음으로써 마음을 잘 이해하여 아는 지혜가 없다. 그런데 사리뿟따여, 이제 어떻게 그대는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께 이런 분명함이 믿음이 있습니다. 깨달음에 관한 한 세존을 능가하는 더욱 완전한 지혜를 가진 사문이나 바라문은 없었고, 없을 것이며, 지금도 없습니다.'라고 이처럼 황소 같은 목소리로 출중한 말, 확신에 찬 사자후를 토하는가?”

 

2. “세존이시여, 저에게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아라한∙정등각들을 마음의 질서에 대한 마음으로써 마음을 잘 이해하여 아는 지혜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법다운 추론으로 알았습니다. 예를 들면, 세존이시여, 왕의 국경에 있는 도시는 깊은 해자(垓子)와 튼튼한 성벽과 망루를 가지고 있고 하나의 성문이 있습니다. 거기에 현명하고 훈련된 지혜로운 문지기가 있어, 알려지지 않은 자들은 제지하고 알려진 자들만 들어가게 합니다. 그는 그 도시의 모든 다니는 길을 차례대로 순찰하면서 성벽의 이음새와 갈라진 틈으로 고양이가 지나다닐 수 있는 작은 틈새는 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에게 '누구든지 이 도시를 들어오거나 나가는 큰 생명체는 누구는 모두 이 대문으로 들어오거나 나간다.’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이처럼, 세존이시여, 저는 법다운 추론으로 알았습니다. 

세존이시여, 과거에 있었던 아라한∙정등각인 그분 세존들은 모두 혜(慧)를 무력하게 만드는 마음의 오염원인 다섯 가지 장애를 버리고서,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에 잘 확립된 마음을 가진 자로서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七覺支]를 있는 그대로 닦아서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깨달으셨습니다. 세존이시여, 미래에 있을 아라한∙정등각인 그분 세존들도 혜를 무력하게 만드는 마음의 오염원인 다섯 가지 장애를 버리고서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에 마음이 잘 확립된 마음을 가진 자로서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를 있는 그대로 닦으신 뒤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깨달으실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지금의 아라한∙정등각인 세존께서도 혜를 무력하게 만드는 마음의 오염원인 다섯 가지 장애를 버리고서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에 마음이 잘 확립된 마음을 가진 자로서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를 있는 그대로 닦으신 뒤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깨달으셨습니다."

 

*주석서에서는 법다운 추론(dhammanvaya)의 동의어로 추론을 통한 자각(anvayabuddhi), 추론자(anumana), 방법을 취함(nayaggaha)을 들고 있다.(DA.iii.876) 복주석서에서는 '법다운 추론(dhamma-anvaya) 이란 추론지(推論知, anumananana)이다(DAT.iii.72)라고 설명하고 있다.

사리뿟따 존자는 자신이 세존의 경지를 자신의 지혜의 수준으로는 다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지만, 드러난 여러 사실들을 통해서 추론해 볼 때, 바른 깨달음에 관한한 세존을 능가하는 사문.바라문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고 지금도 없다라는 결론에 도달한다는 말이다.

다른 말로는 알려진 방법에 의해서 법의 과정을 순서대로 거쳐서 세존의 경지를 안다는 말이다. 따라서 법다운 추론=알려진 법의 과정이라고도 옮길 수 있을 것이다.

 

3. "여기, 세존이시여, 저는 이전에 법을 듣기 위해 세존께 왔었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런 저에게 세존께서는 악(惡)과 선(善)의 대응에 의한 점점 더 높은 법, 더욱더 뛰어난 법을 설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저에게 악과 선의 대응에 의한 점점 더 높은 법, 더욱더 뛰어난 법을 설해 주실 때 마다 저는 그 법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안 뒤에, 여기 법들 가운데서 어떤 법에 대해 결론을 얻었습니다. ‘세존께서는 정등각이시다. 법은 세존에 의해서 잘 설해졌다.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올바른 길을 걷고 있다.’라고 스승에 대해 분명해졌습니다(흔들림 없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4. “더 나아가,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유익한(선한) 법들에 대한 가르침을 설하신 이것은 위없는 것입니다.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四念處], 네 가지 바른 노력[四正勤], 네 가지 신통의 요소[四如意足], 다섯 가지 근[五根]. 다섯 가지 힘[五力],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七覺支], 여덟 가지의 성스러운 올바른 길[八正道]의 이런 유익한 법들이 있는 여기에서, 세존이시여, 비구는 모든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心解脫]과 지혜에 의한 해탈[慧解脫]을 바로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뭅니다. 세존이시여, 유익한 법들에 대한 이것이 위없음입니다. 세존께서는 이것을 있는 그대로 완전하게 아십니다. 세존께서는 이것을 있는 그대로 완전하게 아시기 때문에 다른 사문이나 바라문들이 유익한 법들에 관한 한 이것을 능가하여 세존보다 더 있는 그대로 완전하게 안다고 주장할 다른 가르침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5. “더 나아가,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감각장소[處, 入]의 개념에 대한 가르침을 설하신 이것은 위없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여섯 가지 안팎의 감각장소[六內外處]가 있는데, 눈과 형상,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감촉, 마음과 법(마음현상)들입니다. 세존이시여, 감각장소의 개념에 대한 이것이 위없음입니다. 세존께서는 이것을 있는 그대로 완전하게 아십니다. 세존께서는 이것을 있는 그대로 완전하게 아시기 때문에 다른 사문이나 바라문들이 감각장소의 개념에 관한 한 이것을 능가하여 세존보다 더 있는 그대로 완전하게 안다고 주장할 만한 다른 가르침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6. “더 나아가,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입태(入胎. 태어남)에 대한 가르침을 설하신 이것은 위없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들 네 가지 입태가 있습니다.

여기, 세존이시여, 어떤 자는 알아차리지 못하면서 어머니의 자궁에 들어오고,  알아차리지 못하면서 어머니의 자구에 머물고, 알아차리지 못하면서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옵니다. 이것이 첫 번째 입태입니다.

다시 세존이시여, 여기 어떤 자는 알아차리면서 어머니의 자궁에 들어오고, 알아차리지 못하면서 어머니의 자궁에 머물고, 알아차리지 못하면서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옵니다. 이것이 두 번째 입태입니다.

다시 세존이시여, 여기 어떤 자는 알아차리면서 어머니의 자궁에 들어오고, 알아차리면서 어머니의 자궁에 머물고, 알아차리지 못하면서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옵니다. 이것이 세 번째 입태입니다.

다시 세존이시여, 여기 어떤 자는 알아차리면서 어머니의 자궁에 들어오고, 알아차리면서 어머니의 자궁에 머물고, 알아차리면서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옵니다. 이것이 네 번째 입태입니다.

세존이시여, 입태에 대한 이 가르침도 위없는 것입니다.”

 

*'입태(入胎)'는 gabbha-avakkanti의 옮긴 말이다. '태(gabbha)에 들어감(avakkanti)'의 직역이다. 

*'알아차리면서'는 sampajana 의 옮긴 말이고, '알아차리지 못하면서'는 asampajana의 옮긴 말이다.

 

7. “더 나아가,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남의 마음을 읽는 것에 대한 가르침을 설하신 이것은 위없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런 네 가지 남의 마음을 읽는 것이 있습니다.

여기, 세존이시여, 어떤 자는 드러난 모습(因相)을 통해서 남의 마음을 읽습니다. ‘그대의 생각은 이와 같으며, 또한 그대의 생각은 그와 같으며, 또한 그대의 마음은 저러하다.'라고. 그가 많은 것을 지적하지만, 바로 그와 같아서 틀림이 없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남의 마음을 읽는 것입니다.

다시 세존이시여, 여기 어떤 자는 드러난 모습을 통해서 남의 마음을 읽지 않습니다. 인간들이나 비인간들이나 신들의 말을 듣고 지적합니다. '그대의 생각은 이와 같으며, 또한 그대의 생각은 그와 같으며, 또한 그대의 마음은 저러하다.라고. 그가 많은 것을 지적하지만, 바로 그와 같아서 틀림이 없습니다. 이것이 두 번째 남의 마음을 읽는 것입니다. 

다시 세존이시여, 여기 어떤 자는 드러난 모습을 통해서 지적하지 않습니다. 인간들이나 비인간들이나 신들의 말을 듣고 지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을 통해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에 의한 소리를 듣고 지적합니다. ‘그대의 생각은 이와 같으며, 또한 그대의 생각은 그와 같으며, 또한 그대의 마음은 저러하다.'라고. 그가 많은 것을 지적하지만, 바로 그와 같아서 틀림이 없습니다. 이것이 세 번째 남의 마음을 읽는 것입니다. 

다시 세존이시여, 여기 어떤 자는 드러난 모습을 통해서 지적하지 않습니다. 인간들이나 비인간들이나 신들의 소리를 듣고 지적하지 않습니다.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을 통해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에 의한 소리를 듣고 지적하지 않습니다. 그는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이 고찰이 없는 삼매에 들어가 마음으로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이와 같이 그대의 마음의 형성력이 향하는 대로, 바로 그와 같이 그 마음의 직접적인 힘에 의해, 참으로 그와 같은 사유를 사유하게 될 것이다.'라고. 그는 많은 것을 지적하지만, 바로 그와 같아서 틀림이 없습니다. 이것이 네 번째 남의 마음을 읽는 것입니다. 이것이 네 가지 남의 마음을 읽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남의 마음을 읽는 것에 대한 이 가르침도 위없는 것입니다.”

 

8. “더 나아가,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견(見)의 증득에 대한 법을 설하신 이것은 위없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런 네 가지 견의 증득이 있습니다. 

여기, 세존이시여,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노력하고 정진하고 실천하고 방일하지 않고 이치에 맞게 마음을 기울인 것을 원인으로, 삼매를 닦을 때발바닥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며 머리카락으로부터 아래로 내려가며 이 몸에 대해 피부로 둘러싸여 있고 여러 가지 부정(不淨)한 것들을, ‘이 몸에는 머리카락∙털∙손발톱∙치아∙피부∙살∙힘줄∙뼈∙골수∙콩팥∙심장∙간∙근막∙지라∙허파∙큰창자∙작은창자∙위∙똥∙담즙∙가래∙고름∙피∙땀∙지방∙눈물∙기름∙침∙콧물∙관절활액∙오줌이 있다.’라고 관찰하는, 그런 마음의 삼매를 성취합니다. 이것이 첫 번째 견의 증득입니다. 

다시 세존이시여, 여기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노력하고 정진하고 실천하고 방일하지 않고 이치에 맞게 마음을 기울인 것을 원인으로, 삼매를 닦을 때발바닥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며 머리카락으로부터 아래로 내려가며 이 몸에 대해 피부로 둘러싸여 있고 여러 가지 부정(不淨)한 것들을, ‘이 몸에는 머리카락∙털∙손발톱∙치아∙피부∙살∙힘줄∙뼈∙골수∙콩팥∙심장∙간∙근막∙지라∙허파∙큰창자∙작은창자∙위∙똥∙담즙∙가래∙고름∙피∙땀∙지방∙눈물∙기름∙침∙콧물∙관절활액∙오줌이 있다.’라고 관찰하는, 그런 마음의 삼매를 성취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서 피부와 살과 피로 구성된 인간의 해골(뼈)을 관찰합니다. 이것이 두 번째 견의 증득입니다. 

다시 세존이시여, 여기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을 노력하고 정진하고 ··· 관절활액∙오줌이 있다.’라고 관찰하는, 그런 마음의 삼매를 성취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서 피부와 살과 피로 구성된 인간의 해골을 관찰합니다. 또한 이 세상에도 확고하게 머물고 저 세상에도 머물고, 양쪽에서 끊어짐이 없는 인간의 의식의 흐름을 철저히 압니다. 이것이 세 번째 견의 증득입니다.  

다시 세존이시여, 여기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노력하고 정진하고 ··· 관절활액∙오줌 등이 있다.’라고. 그리고 나아가서 살과 피로 구성된 인간의 해골을 관찰합니다. 또한 이 세상에도 확고하게 머물지 않고 저 세상에도 확고하게 머물지 않는, 양쪽에서 둘로 끊어짐이 없는 인간의 의식의 흐름을 철저히 압니다. 이것이 네 번째의 견의 증득입니다. 

세존이시여, 견의 증득에 대한 이 가르침도 위없는 것입니다.”

 

*'마음의 삼매(cetosamadhi)'란 초선의 삼매(pathamajjhana-samadhi)이다.

*첫 번째 견의 증득: 이것은 32가지 부정한 것으로 마음에 집중한 뒤 부정함을 통해서 생긴 초선을 증득하는 것이다. 

*두 번재 견의 증득: '뼈(atthi)'라고 관찰한 뒤 생긴 뼈를 대상으로 가진 하늘 눈(천안)의 기초가 되는 삼매를 증득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도 확고하게 머물고'라는 것은 욕탐을 톻해서 이 세상에 확고하게 머무는 것이다. '저 세상에도 확고하게 머물고'라는 두 번째 문장에도 같은 방법이 적용된다. 업과 업을 통해서 겪는 것이 이 세상에 확고하게 머무는 것이다. 업으로서의 존재를 끌어들여 재생연결식이 생긴 것이 저 세상에 확고하게 머무는 것이다.(Ibid)

*세 번째 견의 증득: 유학과 범부들에 속하는 남의 마음을 아는 지혜를 설한 것이다. 

*네 번째 견의 증득: 번뇌 다한 자(아라한)에 속하는 남의 마음을 아는 지혜를 설한 것이다.

 

9. “더 나아가,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인간의 규정에 대한 법을 설하신 이것은 위없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런 일곱 가지 사람이 있습니다.

양면으로 해탈[兩面解脫]한 자, 혜로 해탈[慧解脫]한 자, (몸으로) 체험한 자, 견해를 얻은 자, 믿음으로 해탈한 자, 법을 따르는 자, 믿음을 따르는 자입니다.

세존이시여, 인간의 규정에 대한 이 가르침도 위없는 것입니다.”

 

10. “더 나아가,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노력에 대한 법을 설하신 이것은 위없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七覺支]가 있습니다. 마음챙김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念覺支), 법의 선별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擇法覺支), 정진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精進覺支), 희열(기쁨)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喜覺支), 편안함(평온함)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輕安覺支), 삼매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定覺支), 평정으로 이루어진 요소(捨覺支)입니다.

세존이시여, 노력에 대한 이 가르침도 위없는 것입니다.”

 

*노력(padhana)'은 일반적으로 네 가지 바른 노력(사정근)으로 정리되어 나타나는데 여기서는 칠각지를 들고 있다.

 

11. “더 나아가,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실천에 대한 법을 설하신 이것은 위없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런 네 가지 실천이 있습니다. 괴롭고 실다운 지혜가 느린 실천, 괴롭고 실다운 지혜가 빠른 실천, 즐겁고 실다운 지혜가 느린 실천, 즐겁고 실다운 지혜가 빠른 실천입니다.

거기서, 세존이시여, 괴롭고 실다운 지혜가 느린, 대덕이시여, 이 실천은 괴롭다는 점과 느리다는 점의 양면에서 저열함이 알려집니다.

거기서, 대덕이시여, 괴롭고 실다운 지혜가 빠른, 대덕이시여, 이 실천은 괴롭다는 점에서 저열함이 알려집니다.

거기서, 대덕이시여, 즐겁고 실다운 지혜가 느린, 대덕이시여, 이 실천은 느리다는 점에서 저열함이 알려집니다.

거기서, 대덕이시여, 즐겁고 실다운 지혜가 빠른, 대덕이시여, 이 실천은 즐겁다는 점과 빠르다는 점의 양면에서 뛰어남이 알려집니다.

세존이시여, 실천에 대한 이 가르침도 위없는 것입니다.

 

12. “더 나아가,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언행((言行.말의 품행)에 대한 법을 설하신 이것은 위없는 것입니다. 

여기, 세존이시여, 어떤 자는 거짓을 말하지 않고, 이간하는 말을 하지 않고, 거친 말을 하지 않고, 꾸며대는 말을 하지 않고 이유가 분명하고 시기에 알맞는 지혜로운 말을 합니다.

세존이시여, 언행에 대한 이 가르침도 위없는 것입니다.”

 

13. “더 나아가,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사람의 계행(戒行.도덕적 품행)에 대한 법을 설하신 이것은 위없는 것입니다. 

여기, 세존이시여, 어떤 자는 진실하고 믿음이 있습니다. 사기 치지 않고, 꾸며낸 말을 하지 않고, 암시를 주지 않고, 비방하지 않고, 이득으로 이득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감각의 근을 단속하고, 음식에서 적당량을 알고, 몸과 말과 마음으로 바르게 행하며, 깨어있음에 전념하고,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고, 삼매를 닦고, 마음챙김을 가지고, 유익함을 알고, 바르게 행위하고, 열정적이고, 현명하고, 감각적 쾌락에 대해서 탐욕하지 않으며, 마음챙김과 신중함을 갖추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사람의 계행에 대한 이 가르침도 위없는 것입니다.”

 

14. “더 나아가,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가르침의 근본을 구성하는 것들에 대한 법을 설하신 이것은 위없는 것입니다. 여기, 세존이시여, 이런 네 가지 가르침의 근본을 구성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다음 사람을 이치에 맞는 마음의 기울임에 의해서 ‘배운 대로 실천하는 이 사람은 세 가지 족쇄를 완전히 부수고 [네 가지 악도에] 떨어지는 존재를 넘어섰고, 한 방향이고, 깨달음이 결정된 흐름에 든 자[예류자.預流者]가 될 것이다.’라고 아십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다음 사람을 이치에 맞는 마음의 기울임에 의해서 ‘배운 대로 실천하는 이 사람은 세 가지 족쇄를 완전히 부수고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엷어져서 한 번만 더 돌아올 자[일래자.一來者]가 되어, 한 번만 더 이 세상에 와서 괴로움을 끝내게 될 것이다.’이라고 아십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다음 사람을 이치에 맞는 마음의 기울임에 의해서 ‘배운 대로 실천하는 이 사람은 다섯 가지 낮은 족쇄를 완전히 부수고 화생할 것이다. 그곳에서 완전히 열반하는 자이니, 그 세계로부터 다시 돌아오지 않는 존재[불환자.不還者]가 될 것이다.'라고 아십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다음 사람을 이치에 맞는 마음의 기울임에 의해서 '배운 대로 실천하는 이 사람은 모든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心解脫]과 지혜에 의한 해탈[慧解脫]을 바로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물 것이다[아라한.阿羅漢]’라고 아십니다. 

세존이시여, 가르침의 근본을 구성하는 것들에 대한 이 가르침도 위없는 것입니다.”

 

 15. “더 나아가,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다른 사람의 해탈에 대한 앎에 대한 법을 설하신 이것은 위없는 것입니다. 여기, 세존이시여, 이런 네 가지 가르침의 근본을 구성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다음 사람을 이치에 맞는 마음의 기울임에 의해서 ‘배운 대로 실천하는 이 사람은 세 가지 족쇄를 완전히 부수고 [네 가지 악도에] 떨어지는 존재를 넘어섰고, 한 방향이고, 깨달음이 결정된 흐름에 든 자[예류자.預流者]가 될 것이다.’라고 아십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다음 사람을 이치에 맞는 마음의 기울임에 의해서 ‘배운 대로 실천하는 이 사람은 세 가지 족쇄를 완전히 부수고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엷어져서 한 번만 더 돌아올 자[일래자.一來者]가 되어, 한 번만 더 이 세상에 와서 괴로움을 끝내게 될 것이다.’이라고 아십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다음 사람을 이치에 맞는 마음의 기울임에 의해서 ‘배운 대로 실천하는 이 사람은 다섯 가지 낮은 족쇄를 완전히 부수고 화생할 것이다. 그곳에서 완전히 열반하는 자이니, 그 세계로부터 다시 돌아오지 않는 존재[불환자.不還者]가 될 것이다.'라고 아십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다음 사람을 이치에 맞는 마음의 기울임에 의해서 '배운 대로 실천하는 이 사람은 모든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心解脫]과 지혜에 의한 해탈[慧解脫]을 바로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물 것이다[아라한.阿羅漢]’라고 아십니다. 

세존이시여, 다른 사람의 해탈에 대한 앎에 대한 이 가르침도 위없는 것입니다.”

 

16. “더 나아가,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영속론(永續論)에 대한 법을 설하신 이것은 위없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런 세 가지 영속론이 있습니다. 

여기, 세존이시여,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노력하고 정진하고 실천하고 방일하지 않고 바르게 이치에 맞게 마음을 기울인 것을 원인으로, 삼매를 닦을 때 여러 전생의 갖가지 삶들을 기억하는 그런 마음의 삼매를 얻습니다. 즉 한 생, 두 생, 세 생, 네 생, 다섯 생, 열 생, 스무 생, 서른 생, 마흔 생, 쉰 생, 백 생, 천 생, 백 천생, 수많은 무너지는 겁(세상), 수많은 이루어지는 겁, 수많은 무너지고 이루어지는 겁데 대해 기억합니다. ‘거기에서 이름은 이러했고, 가문는 이러했고, 피부색(인종)은 이러했고, 음식은 이러했고, 즐거움과 괴로움의 경험은 이러했고, 목숨의 마침은 이러했으며, 그와 같이 그곳에서 죽어 저곳에 태어나 거기에서의 이름은 이러했고, 가문은 이러했고, 피부색(인종)은 이러했고, 음식은 이러했고, 즐거움과 괴로움의 경험은 이러했고, 목숨의 마침은 이러했으며, 그와 같이거기에서 죽어 다시 태어났다.'라고. 이와 같은 여러 특징을 지닌, 내력을 지닌, 다종 다양한 전쟁의 존재상태를 기억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세상은 수축하고 팽창했다(무너지고 이루어졌다).'라고 과거를 안다. '나는 세상은 수축하거나 팽창할 것이다.'라고 미래를 안다. ' 자아와 세계는 영속한다. 그것은 낳지 못하고, 산봉우리처럼 서 있고, 쇠기둥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그 중생들은 유전하고 윤회하고, 죽고, 태어난다. 그러나 영원히 존재한다.’라고. 이것이 첫 번째 영속론입니다.

 

다시, 세존이시여, 여기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노력하고 정진하고 실천하고 방일하지 않고 바르게 이치에 맞게 마음을 기울인 것을 원인으로, 삼매를 닦을 때 여러 전생의 갖가지 삶들을 기억하는 그런 마음의 삼매를 얻습니다. 즉 한번의 수축과 팽창도, 두 번의 수축과 팽창도, 세 번의 수축과 팽창도, 네 번의 수축과 팽창도, 다섯 번의 수축과 팽창도, 열 번의 수축과 팽창도 기억합니다. ‘거기에서 이름은 이러했고, 가문는 이러했고, 피부색(인종)은 이러했고, 음식은 이러했고, 즐거움과 괴로움의 경험은 이러했고, 목숨의 마침은 이러했으며, 그와 같이 그곳에서 죽어 저곳에 태어나 거기에서의 이름은 이러했고, 가문은 이러했고, 피부색(인종)은 이러했고, 음식은 이러했고, 즐거움과 괴로움의 경험은 이러했고, 목숨의 마침은 이러했으며, 그와 같이거기에서 죽어 다시 태어났다.'라고. 이와 같은 여러 특징을 지닌, 내력을 지닌, 다종 다양한 전생의(여러 이전의) 존재상태를 기억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세상은 수축하고 팽창했다(무너지고 이루어졌다).'라고 과거를 안다. '나는 세상은 수축하거나 팽창할 것이다.'라고 미래를 안다. ' 자아와 세계는 영속한다. 그것은 낳지 못하고, 산봉우리처럼 서 있고, 쇠기둥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그 중생들은 유전하고 윤회하고, 죽고, 태어난다. 그러나 영원히 존재한다.’라고. 이것이 두 번째 영속론입니다.

 

다시, 세존이시여, 여기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노력하고 정진하고 실천하고 방일하지 않고 바르게 이치에 맞게 마음을 기울인 것을 원인으로, 삼매를 닦을 때 여러 전생의 갖가지 삶들을 기억하는 그런 마음의 삼매를 얻습니다. 즉 열 번의 수축과 팽창도, 스무 번의 수축과 팽창도, 서른 번의 수축과 팽창도, 마흔 번의 수축과 팽창도 기억합니다. ‘거기에서 이름은 이러했고, 가문는 이러했고, 피부색(인종)은 이러했고, 음식은 이러했고, 즐거움과 괴로움의 경험은 이러했고, 목숨의 마침은 이러했으며, 그와 같이 그곳에서 죽어 저곳에 태어나 거기에서의 이름은 이러했고, 가문은 이러했고, 피부색(인종)은 이러했고, 음식은 이러했고, 즐거움과 괴로움의 경험은 이러했고, 목숨의 마침은 이러했으며, 그와 같이거기에서 죽어 다시 태어났다.'라고. 이와 같은 여러 특징을 지닌, 내력을 지닌, 다종 다양한 전생의(여러 이전의) 존재상태를 기억해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세상은 수축하고 팽창했다(무너지고 이루어졌다).'라고 과거를 안다. '나는 세상은 수축하거나 팽창할 것이다.'라고 미래를 안다. ' 자아와 세계는 영속한다. 그것은 낳지 못하고, 산봉우리처럼 서 있고, 쇠기둥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그 중생들은 유전하고 윤회하고, 죽고, 태어난다. 그러나 영원히 존재한다.’라고. 이것이 세 번째 영속론입니다. 

세존이시여, 영속론에 대한 이 가르침도 위없는 것입니다.”

 

17. “더 나아가,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이전의 존재 상태(전생)에 대한 기억의 앎에 대한 법을 설하신 이것은 위없는 것입니다. 

여기, 세존이시여, 여기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노력하고 정진하고 실천하고 방일하지 않고 바르게 이치에 맞게 마음을 기울인 것을 원인으로, 삼매를 닦을 때 여러 전생의 갖가지 삶들을 기억하는 그런 마음의 삼매를 얻습니다. 즉 한 생, 두 생, 세 생, 네 생, 다섯 생, 열 생, 스무 생, 서른 생, 마흔 생, 쉰 생, 백 생, 천 생, 백천 생, 수많은 무너지는 겁, 수많은 이루어지는 겁, 수많은 무너지고 이루어지는 겁에 대해 기억합니다. ‘거기에서 이름은 이러했고, 가문는 이러했고, 피부색(인종)은 이러했고, 음식은 이러했고, 즐거움과 괴로움의 경험은 이러했고, 목숨의 마침은 이러했으며, 그와 같이 그곳에서 죽어 저곳에 태어나 거기에서의 이름은 이러했고, 가문은 이러했고, 피부색(인종)은 이러했고, 음식은 이러했고, 즐거움과 괴로움의 경험은 이러했고, 목숨의 마침은 이러했으며, 그와 같이거기에서 죽어 다시 태어났다.'라고. 이와 같은 여러 특징을 지닌, 내력을 지닌, 다종 다양한 전생의(여러 이전의) 존재상태를 기억해냅니다. 

세존이시여, 계산이나 헤아림으로 수명을 헤아리는 것이 불가능한 신(神)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거듭 자기존재 안에 이전의(전생의) 삶이 있습니다. 물질을 가진 자들 가운데거나 물질을 가지지 않은 자들 가운데거나 인식이(상.想)이 있는 자들 가운데거나 인식이 없는 자들 가운데거나 비상비비상(非想非非想)이 있는 자들 가운데 있습니다. 이처럼 상태와 함께, 상세한 설명과 함께 여러 전생의 존재상태를 기억합니다.

세존이시여, 전생의 존재상태에 대한 기억의 앎에 대한 이 가르침도 위없는 것입니다.”

 

18. “더 나아가,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죽음과 다시 태어남의 앎에 대한 법을 설하신 이것은 위없는 것입니다. 

여기, 세존이시여, 여기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노력하고 정진하고 실천하고 방일하지 않고 바르게 이치에 맞게 마음을 기울인 것을 원인으로, 삼매를 닦을 때 인간을 뛰어 넘은 청정한 하늘과 같은 눈으로 죽고, 태어나고, 열등함하고 수승하고, 잘생기고 못생기고, 좋은 곳(선처.善處)에 가고 나쁜 곳(악처.惡處)에 가는 중생들을 보는 그런 마음의 삼매를 얻습니다. 그는 그와 같이 업에 따라 가는 중생들을 분명히 알아 차립니다. 그는 그와 같이 몸에 의한 악한 행위를 지녔고, 말에 의한 악한 행위를 지녔고, 마음에 의한 악한 행위를 지녔고, 성자들을 비방하고, 삿된 견해를 지녔고, 삿된 견해의 업[사견업.邪見業]을 지었다. 그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후 고통스러운 곳, 비참한 곳, 험난한 곳, 지공에 태어났다. 혹은 이들은 몸에 의한 선한 행위를 지녔고, 말에 의한 선한 행위를 지녔고, 마음에 의한 선한 행위를 지녔고, 성자들을 비방하지 않고, 바른 견해를 지녔고, 바른 견해의 업(정견업.正見業)을 지었다. 그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후 좋은 곳에 나아가 하늘의 세계에 태어났다.'라고. 이와 같이 인간을 뛰어 넘은 청정한 하늘과 같은 눈으로 죽고, 태어나고, 열등함하고 수승하고, 잘생기고 못생기고, 좋은 곳(선처.善處)에 가고 나쁜 곳(악처.惡處)에 가는 중생들을 봅니다. 그는 그와 같이 업에 따라 가는 중생들을 분명히 알아 차립니다.

세존이시여, 죽음과 다시 태어남의 앎에 대한 이것도 위없는 것입니다.”

 

19. “나아가,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신통(神通)에 대한 법을 설하신 이것은 위없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런 두 가지로 구성된 신통이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번뇌들과 함께 하고 몸과 생명들에 대한 갈망(집착)들과 함께한 신통이 있는데, '성스럽지 않은 것'이라고 불립니다. 세존이시여, 번뇌들과 함께 하지 않고 몸과 생명들에 대한 갈이 함께하지 않는 신통이 있는데, '성스러운 것'이라고 불립니다. 

세존이시여, 무엇이 번뇌들과 함께하고 몸과 생명에 대한 갈망들과 함께한 신통이어서 ‘성스럽지 않은 것’이라고 불립니까? 여기, 세존이시여, 여기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노력하고 정진하고 실천하고 방일하지 않고 바르게 이치에 맞게 마음을 기울인 것을 원인으로, 삼매를 닦을 때 다양한 신통을 실현하는 그런 마음의 삼매를 얻습니다. 하나가 된 후 여럿이 되기고 여럿이 되었다가 하나가 되기도 합니다. 나타나고 사라짐에 담장이나 성벽이나 산에 걸림없이 넘나드는 것이 마치 허공에서와 같습니다. 땅 속에서 걸림없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이 마치 물 속에서와 같습니다. 물 위를 거침없이 가는 것이 마치 땅위에서와 같습니다. 공중에서 가부좌를 행하는 것이 마치 날개 달린 새와 같습니다. 대신변과 대위덕을 지닌 달과 태양을 손으로 어루만지고 쓰다듬습니다. 브라흐마(범천)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몸으로써 위력을 미칩니다. 세존이시여, 번뇌들과 함께 하고 몸과 생명들에 대한 갈망(집착)들과 함께한 신통이어서 '성스럽지 않은 것'이라고 불립니다. 

 

세존이시여, 무엇이 번뇌들과 함께하지 않고 몸과 생명에 대한 갈망들과 함께하지 않는 신통이어서 ‘성스러운 것’이라고 불립니까? 세존이시여, 여기 비구가 만약 ‘혐오스러운 것에 대해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져 머물러야겠다.’라고 원하면,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져 거기에 머뭅니다. 만약 ‘혐오스럽지 않은 것에 대해 혐오하는 인식을 가져 머물러야겠다’고 원하면, 혐오하는 인식을 가져 거기에 머뭅니다. 만약 ‘혐오스러운 것과 혐오스럽지 않은 것에 대해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져 머물러야겠다.’고 원하면,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져 거기에 머뭅니다. 만약 ‘혐오스러운 것과 혐오스럽지 않은 것에 혐오하는 인식을 가져 머물러야겠다.’고 원하면, 혐오하는 인식을 가져 거기에 머뭅니다. 만약 ‘혐오스러운 것과 혐오스럽지 않은 것 둘 모두를 제거한 뒤에 평정과 마음챙기고 알아차림을 가지고 머물러야겠다.’라고 원하면, 평정과 마음챙기고 알아차림을 가지고 거기에 머뭅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이 번뇌들과 함께하지 않고 몸과 생명에 대한 갈망들과 함께하지 않는 신통이어서 ‘성스러운 것’이라고 불립니다.

세존이시여, 신통에 대한 이 가르침도 위없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이것을 있는 그대로 완전하게 아십니다. 세존께서는 이것을 있는 그대로 완전하게 아시기 때문에 다른 사문이나 바라문들이 유익한 법들에 관한 한 이것을 능가하여 세존보다 더 있는 그대로 완전하게 안다고 주장할 다른 가르침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20. “세존이시여, 믿음이 있는 좋은 가문의 아들이 열성적인 노력과 강함과 남자의 힘과 남자의 노력과 남자의 바램과 짐을 짊어짐으로써 성취해야 하는 것을 세존께서는 성취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저열하고 천박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가져오지 않는 감각적 쾌락들에 대한 탐닉에 몰두하는 것에 빠지지 않으셨습니다. 괴롭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가져오지 않는 자신에 대한 고행의 탐닉에 빠지지 않으셨습니다. 세존께서는 높은 마음에 속하며 바로 지금여기에서의 행복한 머묾인 네 가지 선정을 바라는 대로 얻고, 원하는 대로 얻고, 원하는 만큼 얻으시는 분이십니다.”

 

21. “세존이시여, 마약 누가 저에게 ‘도반 사리뿟따여, 깨달음에서 세존을 능가하는 더욱 실다운 지혜를 가진 다른 사문들이나 바라문들이 과거에 있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세존이시여, 이런 질문을 받은 저는 ‘없었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깨달음에서 세존을 능가하는 더욱 실다운 지혜를 가진 다른 사문이나 바라문이 미래에 있을 것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세존이시여, 이런 질문을 받은 저는 ‘없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도반 사리뿟다여, 깨달음에서 세존을 능가하는 더욱 실다운 지혜를 가진 다른 사문이나 바라문이 현재에는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세존이시여, 이런 질문을 받은 저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누가 저에게 ‘도반 사리뿟따여, 깨달음에서 세존과 대등한 다른 사문이나 바라문이 과거에 있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세존이시여, 이런 질문을 받은 저는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깨달음에서 세존과 대등한 사문이나 바라문이 미래에 있을 것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세존이시여, 이런 질문을 받은 저는 ‘있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깨달음에서 세존과 대등한 사문이나 바라문이 현재에는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세존이시여, 이런 질문을 받은 저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누가 저에게 ‘그러면 도반 사리뿟따는 왜 어떤 것은 전적으로 인정하고 어떤 것은 전적으로 인정하지 않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세존이시여, 이런 질문을 받은 저는 이렇게 설명할 것입니다. 

‘도반이여, 세존의 면전에서 나는 이것을 받아 지녔습니다. ‘과거에 나와 대등한 깨달음을 가진 아라한∙정등각들이 있었다.'라고. 도반이여, 세존의 면전에서 나는 이것을 받아 지녔습니다. ‘미래에 나와 대등한 깨달음을 가질 아라한∙정등각들이 있을 것이다.’라고. 도반이여, 세존의 면전에서 나는 이것을 받아 지녔습니다. ‘하나의 세계에 두 분의 아라한∙정등각들이 전도 아니고 후도 아닌 동시에 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이치에 맞지 않다. 그런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세존이시여, 이렇게 질문을 받고 이렇게 설명하면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세존을 거짓으로 비난하는 것이 아니고, 가르침에 일치하는 법을 설명하는 것이고, 이어서 말하는 동료 비구가 누구라도 비난의 조건을 만나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사리뿟따여, 이렇게 질문받고 이렇게 설명하면 그대는 내가 말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나를 거짓으로 비난하는 것이 아니고, 가르침에 일치하는 법을 설명하는 것이고, 이어서 말하는 동료 비구가 누구라도 비난의 조건을 만나지 않는다."

 

22.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 우다이 존자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참으로 놀랍습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여래에게는 원하는 바가 적음, 만족함, 더 높은 삶이 있습니다. 참으로 여래께서는 이렇게 큰 신통과 이렇게 큰 위력이 있지만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여기서, 세존이시여, 외도 유행승들이 자기 안에서 단 하나의 법이라도 관찰하게 된다면 그들은 그것 때문에 깃발을 드날릴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놀랍습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경리롭습니다. 여래에게는 원하는 바가 적음, 만족함, 더 높은 삶이 있습니다. 참으로 여래께서는 이렇게 큰 신통과 이렇게 큰 위력이 있지만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그대는 보라, 우다이여, 여래에게는 원하는 바가 적음, 만족함, 더 높은 삶이 있다. 참으로 여기서, 우다이여, 외도 유행승들이 자기 안에서 단 하나의 법이라도 관찰하게 된다면 그들은 그것 때문에 깃발을 드날릴 것이다. 그대는 보라, 우다이여, 여래에게는 원하는 바가 적음, 만족함, 더 높은 삶이 있다. 참으로 여래는 이렇게 큰 신통과 이렇게 큰 위력이 있지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우다이(Udayi)라고 이름하는 세 분의 장로가 있는데 랄루다이(Laludayi), 깔루다이(Kaludayi),마하우다이(Mahaudayi)이다. 여기서는 마하우다이 존자를 두고 한 말이다.(DA.iii.903)

마하우다이 존자는 빤디따우다이(Panditaudayi) 존자라고도 주석서에 나타나는데 그만큼 그는 지혜롭고 현명한(pandita)분이었다고 한다. 그는 세존의 고향인 까삘라왓투의 바라문 가문 출신이었다고 하며 세존께서 고향을 방문하셨을 때 세존의 덕성을 흠모하여 출가하였다고 한다.(ThigA.iii.7) 우다이 존자는 아라한이 되었다.

 

23. 그리고 세존께서는 사리뿟따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사리뿟따여, 그대는 이 법문을 자주 비구들과 비구니들과 청신사들과 청신녀들을 위해서 설해야 한다. 사리뿟따여, 여래에 대해 불확실이나 의심이 있는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이 법문을 듣고 여래에 대한 불확실이나 의심이 버려질 것이다.”

 

이처럼 사리뿟따 존자는 세존의 면전에서 확고한 믿음을 드러내 보였다. 그래서이 설명에게  sampasādanīya(믿어야 마땅한 것)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확신경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