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념처경(Mahasatipahna sutta)에서 보이는
수념처의 실천과 이해
정 준 영 (경전연구소 상임연구원)
1. 시작하는 말
2. 수행대상으로써의 느낌(vedana)
3. 수념처의 느낌과 선정(jhna)
- 사미사(smisa) 느낌과 니라미사(nirmisa) 느낌
4. 내적으로(ajjhatta) 외적으로(bahiddha) 느낌을 관찰
5. 마치는 말
I. 시작하는 말
오늘날 명상수행(bhvan)의 실천을 위해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경전은 아마도 대념처경(, Mahasatipahna sutta)일 것이다. 대념처경은 염처경과 함께 수행자가 청정을 이루고 슬픔과 비탄을 넘어서 육체적, 정신적 괴로움을 벗어나 결국 열반을 얻을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수행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이 경전은 비교적 구체적인 방법을 통하여 수행자가 자신의 몸(kya), 느낌(vedana), 마음(citta), 그리고 법(dhamma), 네 가지를 지속적으로 관찰할 수 있도록 설명하고 있으며 이러한 구분에 의해 사념처(cattaro satipahana)라고 불린다. 대념처경에서 설명하는 사념처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학자들에 의해 학문적 연구가 세밀히 진행되었으며 실천적으로도 미얀마를 위시로 한 남방불교(Theravada) 수행자들의 위빠사나 수행(vipassana-bhvan)을 통하여 널리 행해지고 있다.
본고는 대념처경에서 설명하고 있는 네 가지 염처(satipahana)의 수행방법들 중, 두 번째에 해당하는 수념처(vedannupassana)에 주의를 기울이고자 한다. 이는 대념처경이 제시하는 21가지의 방대한 수행방법들의 세밀한 연구에 앞서, 가장 짧으면서도 간략하게 보여지는 수념처를 시작으로 느낌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상의 문제점들과 염처 수행의 실천적인 의문점들을 다루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은 경전을 통한 수념처의 문헌적인 이해뿐만 아니라 실천적인 이해의 시도라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대념처경에서 보이는 수념처에 대해서는 일중스님의 고엔카의 수행법과 이라는 논문을 통하여 설명되어진 바 있다. 이 논문은 고엔카지의 설명에 준하여 신념처와 더불어 수념처를 체계적 논의하였다. 논자는 이와 같이 대념처경에 관한 여러 논문들을 보면서 경전의 방대함으로 인해 자칫 소홀해질 수 있는 부분들을 다시 한번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초기경전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모호하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을 접할 때 주석서나 스승의 가르침에 손을 먼저 뻗게된다. 물론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어려운 부분들을 보다 세밀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나 늘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주석서나 청정도론을 바탕으로 하고있는 전통적인 해석에 의지하다보면 오히려 경전 자체의 의미를 간과하게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신념처(kynupassana) 수행의 방법 중에 네 번째인 여러 가지 부정한 것으로 가득 차 있음을 관찰(paiklamanasikra)을 잘 살펴보면 경전 상에는 분명히 31가지 대상으로 제시되어 있다. 후대에 붓다고사는 이에 뇌(mattha-lunga)를 첨가하여 32가지가 되었는데 대부분의 설명들은 이를 그대로 몸의 32가지 부위로 설명하고 있다. 이는 우리가 경전자체를 보기 이전에 전통적 해석에 의지한 예증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논자는 본고를 통하여 경전을 이해하는 과정에 있어 전통적인 해석이나 스승의 가르침을 지침서적인 역할로써 수용하되 수용 이전에 초기경전(Pali-Nikya)자체를 이해하려는 시도가 선행되어야 함을 지적하고자한다.
대념처경(Mahasatipahna sutta)에서 설명되는 수념처는 9가지 웨다나(vedana, 느낌, 감각)에 대한 관찰과 이를 통한 법(dhamma)에 대한 관찰의 두 가지 문단으로 구성된다. 논자는 본고를 통하여 경전 상에 두 문단으로 구성된 수념처를 세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첫 번째는 대념처경에서 보이는 수념처의 내용에 앞서 웨다나가 초기경전을 통하여 수행의 대상으로써 어떻게 설명되어지고 있는지 그리고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를 끊는 방법으로써 웨다나에 대한 관찰의 중요성 등을 알아보겠다. 두 번째는 수념처의 본문으로 들어와 9가지 느낌들에 대한 설명과 해석상의 문제점들 그리고 선정(jhna)의 얻음의 과정을 통한 수념처의 실천양상에 대해 살펴보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수념처를 통한 법(dhamma)에 대한 관찰이 내적으로(ajjhatta) 외적으로(bahiddha) 이루어지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 볼 것이다. 이는 수념처 뿐만 아니라 사념처의 모든 수행방법에 전반적으로 설명되는 정형구로써 전통적 해석방법과 실천적 이해의 과정에 있어서 차이점들을 보이게 된다.
2. 수행대상으로써의 느낌(Vedana)
대념처경의 두 번째 수행방법으로 나타나는 수념처는 빠알리어로 웨다나누빠사나(vedananupassan)이고 이는 웨다나(vedana)와 아누빠사나(anupassana)의 합성어이다. 용어 웨다나(vedana)는 알다, 느끼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어근 vid로부터 파생되어 느낌 혹은 감각이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아누빠사나(anupassana)는 을 따라서, 와 결합하여 등의 의미를 가진 anu와 보다라는 뜻의 passati가 결합된 아누빠사띠(anupassati)로부터 나온 명사형으로 따라가며 보기, 관찰, 응시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웨다나누빠사나(vedananupassan)는 vedana(느낌, 감각)에 대한 사띠(sati, 마음챙김, 지킴, 새김, 수동적 주의집중, 기억)의 확립이라는 의미로써 느낌을 따라가며 보는 것을 나타낸다. 이 장에서는 수념처(vedannupassana)의 실천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에 앞서 수행의 대상으로써의 vedan를 먼저 살펴 보고자한다.
Vedana는 느낌(feeling) 또는 감각(sensation)을 나타내는 용어로 감각의 기관들과 감각의 대상들 사이에 접촉이 일어났을 때 발생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접촉은 여러 종류의 느낌들을 발생시키는데 불교는 일반적으로 이러한 느낌들을 크게 세 가지 종류로 설명하고 있다. 상윳따 니까야(Samyutta Nikaya)는 느낌의 종류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
비구들이여, 세 가지 종류의 느낌들이 있다. 어떤 세 가지인가?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 이렇게 세 가지 느낌들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종류의 느낌들은 또한 육체와 정신의 양쪽 면을 모두 가지고 있다. 느낌을 육체적인 느낌과 정신적인 느낌으로 구분하는 것에 대해 몇몇의 수행자들은 빠알리 용어 vedana(느낌)를 오직 정신적인 면으로 이해해야한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이는 아마도 vedana(느낌)가 오온(pacaskhandha)이나 이에 관련한 아비담마(Abhidhamma)의 구분 속에서 육체나 물질(rupa)의 범위 안에 해당하지 않고 마음이나 정신 기능(cetasika) 영역 안에 해당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웨다나 상윳따(Vedansamyutta)는 vedan(느낌)가 육체와 정신의 양쪽 성질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선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두 가지 종류의 느낌인가?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이것들을 두 가지 종류의 느낌들이라고 한다.
더 나아가 경전에서 나타나는 느낌에 대한 종류는 위의 분류뿐만 아니라 3, 5, 6, 18, 36, 108가지 등으로 다양하게 나누어 설명되고 있다. 그리고 이들 중에 느낌의 종류로써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구분은 이미 위에 언급한 3가지 종류의 느낌들과 육체적 정신적 구분을 포함하는 5가지 종류의 느낌들이다. 이들은 1) 육체적으로 즐거운 느낌(kyik sukh- vedana = sukha), 2) 육체적으로 괴로운 느낌(kyik dukkh-vedana = dukkha), 3) 정신적으로 즐거운 느낌(cetasik sukh-vedana= somanassa), 4) 정신적으로 괴로운 느낌(cetasik dukkh vedana = domanassa), 그리고 5)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또는 중립의 느낌(adukkha-m-asukh vedana = upekkha)으로 나누어진다. 여기서 즐거운 느낌은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이 있으며 sukha vedana는 육체적으로 즐거운 느낌을, somanassa vedana는 정신적으로 즐거운 느낌을 나타낸다. 그리고 괴로운 느낌도 두 가지가 있는데 dukkha vedan는 육체적으로 괴로운 느낌을, domanassa vedana는 정신적으로 괴로운 느낌을 나타낸다. 그리고 adukkha-m-asukh vedana(= upekkha)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다. 그러므로 불교 안에서 나타나는 느낌이란 즐거운 것, 괴로운 것,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 그리고 이들은 다시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들로 나누어진다. 또한 이러한 느낌들은 시간의 흐름이나 상황의 변화에 따라 서로 융합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독립적으로 인지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디가나카 경(Dighanakha sutta)은 위의 세 가지 종류의 느낌이 동시에 인지되지 못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악기웨싸나여, 이러한 세 가지 느낌,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있습니다. 악기웨싸나여, 즐거운 느낌을 경험할 때에, 그 때에는 괴로운 느낌을 경험하지 않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지 않고, 그 때에는 즐거운 느낌만을 경험합니다. 악기웨싸나여, 괴로운 느낌을 경험할 때에, 그 때에는 즐거운 느낌을 경험하지 않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지 않고, 그 때에는 괴로운 느낌만을 경험합니다. 악기웨싸나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할 때에, 그 때에는 즐거운 느낌을 경험하지 않고, 괴로운 느낌을 경험하지도 않고, 그 때에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만을 경험합니다. 악기웨싸나여, 즐거운 느낌도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고 조건에 의해 생겨난 것이고 변화하는 것이고 쇠퇴하는 것이고 사라지는 것이고 소멸하는 것입니다...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도...
이 경전은 세 가지 느낌들이 서로 각각 독립적이며 이 세 가지 느낌들이 동시에 함께 인지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즉, 한 가지의 느낌이 나타난 순간에 다른 두 종류의 느낌은 인지될 수 없으며 세 가지 느낌이 섞인 느낌 같은 것 또한 존재하지 못하므로 각각의 개별적인 느낌들은 각각에 생성, 변화, 소멸에 따라 선명한 구별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개별적인 느낌들은 복잡한 인식의 과정 안에서 어떻게 일어나게 되는 것일까? 마두삔디까 경(Madhupindika sutta)은 이와 관련하여 설명하기를,
친구여, 눈이 있고 형상이 있고 안식이 있을 때, 접촉(phassa)이라고 불려지는 것이 나타날 수 있다. 접촉이라고 불려지는 것이 있을 때, 느낌(vedana)이라고 불려지는 것이 나타날 수 있다. 느낌이라고 불려지는 것이 있을 때, 지각(sa)이라고 불려지는 것이 나타날 수 있다. 지각이라고 불려지는 것이 있을 때, 생각(vitakka)이라고 불려지는 것이 나타날 수 있다. 생각이라고 불려지는 것이 있을 때, 희론(망상)에 오염된 지각과 관념(papacasasakha)의 생겨남이라고 불려지는 것이 나타날 수 있다.
이 경전은 시각, 형상 그리고 시각의식이 있을 때에 이 세 가지 요소의 결합, 즉 접촉(phassa)이 일어나고 이 접촉으로 인해 느낌(vedana)이 생겨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세 가지 요소들의 결합은 시각뿐만 아니라 몸과 마음을 원인과 조건으로 하여 청각, 후각, 미각, 촉각, 그리고 정신에서 모든 형태의 접촉을 만들어 내게 되며 이 접촉은 느낌의 원인과 조건이 되어진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위의 접촉을 통하여 느낌이 생성된 이후에 이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이 바르게 나타나지 않으면 희론(망상)에 오염된 지각과 관념(papacasasakha)의 생겨남 등으로 발전하여 결국에 나는 존재한다, 이것은 나이다 등의 자아관념으로 발전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느낌은 인간에게 관념을 발생시키는 조건이 될 수 있으며 동시에 인간이 노력을 통해 인지하기에 가장 좋은 대상이기도 한 것이다. 냐냐포니까 테라(Nanaponika Thera)는 이러한 느낌에 대해서 설명하기를 :
"감각적인 측면에서 느낌은 어떤 감각적 접촉에 대한 첫 번째 반응이기 때문에 마음을 정복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특별한 주의를 기울일 가치가 있다. 붓다가 설한 연기(paicca-samuppda)의 법칙으로 고통덩어리인 육신이 생겨나는 조건을 알 수 있고, 감각적 접촉이 느낌의 주요원인이 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육신의 기관에서 느낌은 갈애의 원인이 되며 그 결과 갈애가 강해지면서 갈애는 취함의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느낌은 다양한 형태의 격렬한 감정이 일어나게 하고 십이연기의 수에서 (윤회가) 연속되는 것을 깨뜨릴 수 있다는 점에서 고통의 조건을 만드는 중요한 문제이다. 만일 감각적인 접촉을 받아들일 때 느낌의 단계에서 잠시 쉬거나 멈추게 할 수 있거나 또는 그 첫 번째 단계에서 청정한 염을 통해 느낌을 바라본다면 느낌은 갈애나 다른 갈망의 원인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냐냐포니까 테라는 12연기의 과정을 통하여 느낌을, 고통이 발생하는 원인이자 동시에 고통을 멈추게 하는 조건으로 설명하고 있다. 불교는 몸과 마음으로부터 발생되는 모든 것들은 느낌으로 인지된다고 보고 있다. 그러므로 느낌은 여러 경전들을 통해 중요한 관찰의 대상으로 설명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불교적인 분석에 따르면 느낌은 갈애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한다. 마하니다나 경(Mahanidna sutta)과 니다나 상윳따(Nidnasayutta)에 따르면 느낌은 갈애를 발생하게 하는 조건으로써 설명되어진다. 그러므로 여섯 가지 감각기관들을 통하여 느낌이 완전하게 통제된다면 갈애는 나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느낌(vedana)을 조건으로 갈애(taha)가 생긴다고 불려진다. 아난다여, 어떤 방법을 통하여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일어나는지가 이해될 수 있는가. 가령 눈의 접촉으로 생겨나는 느낌, 귀, 코, 혀, 몸의 접촉... 마음의 접촉으로 생겨나는 어디에서든 느낌이 없다면, 느낌의 제거됨으로써 갈애가 나타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스승님, 그러므로 아난다여, 이것은 갈애의 원인, 근원, 기원, 그리고 조건이다. 그것이 느낌이다.
불교 안에서 느낌을 전제로 한 갈애(taha)는 다시 집착(updna)의 원인이 되고, 이는 고통이 발생하는데 매우 현저한 요소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통제가 가능한 느낌을 이해하고 조절하는 것이 고통의 원인이 되는 갈애를 줄이고 더 이상 발생되지 않도록 도움을 준다고 지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느낌과 집착의 관계에 대해서 브라흐마잘라 경(Brahmajla sutta)은 부처님께서 느낌의 발생과 소멸의 바른 이해를 통하여 집착을 여의고 해탈을 얻게되었다고 설명하고있다.
여래는 그것을 완전히 안다. 거기로부터 더 나은 것을 안다. 그것을 완전히 알면서 그는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는 그에게 멸이 스스로 이해된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느낌들의 일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면서 집착하지 않고 해탈된 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수행을 통하여 느낌을 조절하고 바르게 이해한다면 느낌은 갈애의 원인으로 발전되지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실천을 통하여 우리는 느낌의 본래의 성질인 무상함 역시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니다나 상윳따(Nidnasayutta)는 세 가지 종류의 느낌(dukkha, sukha, adukkhamasukh vedana) 모두가 무상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것이 아무리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이라고 할지라도 이들은 모두 무상하며 이러한 무상함을 알게되었을 때, 느낌에 대한 기쁨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게 된다. 느낌의 무상함에 대한 관찰은 느낌에 대한 본래 성질을 봄으로써 지혜로 이끌어준다. 웨다나 상윳따(Vedanasamamyutta) 역시 느낌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
만약 그가 즐거운 느낌을 느끼면 그것이 무상하다고 안다. 그것이 집착할 것이 아니라고 안다. 그것이 기뻐할 것이 아니라고 안다. 만약 괴로운 느낌을 느끼면...(반복) 만약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면... 만약 그가 즐거운 느낌을 느끼면 그는 그것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그것을 느낀다. 만약 괴로운 느낌을 느끼면...(반복) 만약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면...
느낌을 통해서 일어나는 어떤 즐거움과 기쁨은 느낌이 주는 만족이다. 느낌이 무상하고 고통이고 항상 변화한다는 법칙은 느낌이 주는 불리함이다. 느낌에 대한 갈망과 욕망의 제어와 버림은 느낌을 통한 수행의 완성이다.
이렇게 고통의 원인이 되는 느낌은 수행을 통하여 통제와 조절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현상의 진정한 실체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느낌은 수행 안에 중요한 주제의 하나로써 제공될 수 있는 것이다. 앙굿따라 니까야(Aguttara Nikya)는 느낌을 집중(samdhi)과 사띠(sati)를 위한 중요한 대상의 하나로 보여주고 있다.
친구여, 모든 법들(가르침, dhamma)은 의욕을 근본으로 한다(chandamlaka), 모든 법들은 주의 깊은 생각으로(manasikra) 일어난다, 모든 법들은 접촉으로(phassa) 인해 생긴다, 모든 법들은 느낌으로 모아진다, 모든 법들은 집중을(samdhi) 우선으로 한다, 모든 법들은 사띠를(sati) 주인으로 한다, 모든 법들은 지혜가 최상이다, 모든 법들은 해탈을(vimutti) 핵심으로 한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수행의 대상으로써 느낌을 응시할 수 있고 이러한 관찰의 과정을 통하여 느낌이 갈애로 발전하는 것을 방지하고 또한 존재가 고통스럽게 되는 현상을 이해하게된다. 이러한 실천 수행은 수행자가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느낌의 진정한 실체를 이해하도록 돕는다. 그러므로 대념처경의 두 번째 수행방법으로 설명된 수념처(vedannupassana)는 느낌에 대한 집중(samdhi)과 사띠(sati)를 통하여 갈애의 발생을 조절하는 실천 방법이다.
3. 수념처(Vedannupassana)의 느낌과 선정(jhna)
느낌을 대상으로 하는 수행 방법인 수념처(vedannupassana)의 설명을 보면 염처를 위한 대상으로써의 느낌을 9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비구가 느낌에서 느낌을 따라 관찰하며 머무는 것인가? 비구들이여, 여기에 비구는 1) 즐거운 느낌(sukha)을 느끼면서나는 즐거운 느낌을 느낀다고 분명히 안다. 2) 괴로운 느낌(dukkha)을 느끼면서나는 괴로운 느낌을 느낀다고 분명히 안다. 3)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adukkhamasukha)을 느끼면서 나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낀다고 분명히 안다. 4) 육체적인 즐거운 느낌(smisa sukha)을 느끼면서 나는 육체적인 즐거운 느낌을 느낀다고 분명히 안다. 5) 정신적인 즐거운 느낌(nirmisa sukha)을 6) 육체적인 괴로운 느낌(smisa dukkha)을 7) 정신적인 괴로운 느낌(nirmisa dukkha)을 8) 육체적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smisa adukkhamasukha)을 9) 정신적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면서 나는 정신적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nirmisa adukkhamasukha)을 느낀다고 분명히 안다.
대념처경에 나타나는 위의 설명은 수념처에 대한 두 문단의 설명 중에 첫 번째 것으로, 두 번째 문단이 법념처를 통한 정형구로 경전 내에서 여러 번 반복된다고 볼 때, 수념처의 유일한 설명이기도 하다. 경전 내에 수념처에 대한 설명은 9가지 느낌들과 이 느낌들을 따라가며 관찰하는 간략한 설명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 간략한 설명은 견해에 따라 여러 가지 해석들을 낳았다. 그러므로 이 장에서는 9가지로 설명된 느낌들이 어떻게 다양하게 해석되고 있는지 그리고 과연 적절한 해석 방법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느낌을 대상으로 하는 수념처와 선정(jhna)통한 수행의 과정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알아볼 것이다. 수념처에 설명된 바와 동일한, 느낌의 다양성은 앙굿따라니까야(Aguttara-Nikya)에서 역시 보여지는데 이 경전 역시 즐거운 느낌(sukha), 괴로운 느낌 (dukkha),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3가지를 기본으로 두고 6가지 느낌을 설명하고 있다. 이는 대념처경에서 보여지는 느낌들과 일치한다.
비구들이여, 세 가지 느낌들이 있다 : 즐거운 느낌(sukha), 괴로운 느낌 (dukkha),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다(adukkhamasukha). 무엇이 느낌들의 원인인가? 촉(phasso)이 느낌들의 원인이다. 무엇이 느낌들의 다양함인가? 육체적 즐거운 느낌(smisa sukha)이 있고, 정신적 즐거운 느낌(nirmisa sukha)이 있다. 육체적 괴로운 느낌(smisa dukkha)이 있고, 정신적 괴로운 느낌(nirmisa dukkha)이 있다. 육체적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smisa adukkhamasukha)이 있고, 정신적으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nirmisa adukkhamasukha)이 있나니 이를 일러 느낌들의 다양함이라 한다... (중략). 무엇이 느낌들의 소멸인가? 촉의 소멸이 느낌의 소멸이다. 그리고 이 성스러운 여덟 가지 길(팔정도 : ariyo ahagiko maggo)이 느낌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니 즉, 바른 견해, ...(팔정도)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느낌을 대상으로써 주시하는 것이 느낌에서 느낌을 따라 관찰하며 머무는 것인가? 또한 어떤 것이 지혜를 통하여 느낌을 있는 그대로 보고 알 수 있는 것인가? 웨다나 상윳따(Vedanasayutta)의 설명에 따르면 수행자는 위와 같은 다양한 느낌들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보아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즐거운 느낌은 괴로움으로 이해되어져야만 하며, 괴로운 느낌은 화살로 이해되어져야만하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무상한 것으로 이해되어져야만 한다. 비구가 즐거운 느낌을 괴로움으로 이해하고 괴로운 느낌을 화살로 이해하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무상한 것으로 이해하면 그 비구는 바르게 보는 자라고 불려진다. 그는 갈애를 끊었고, 족쇄를 벗겨냈으며, 아만을 완전히 이해했기 때문에 괴로움을 끝낸 것이다.
여기서 즐거운 느낌을 괴로움으로 본다는 것은, 즐거운 느낌 역시 항상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겪어야하는 무상한 것이므로 결국에 괴로움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괴로운 느낌을 화살로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은, 괴로운 느낌은 화살에 맞은 것과 같이 육체적인 괴로움을 만들고 다시 이 고통은 멈추지 않고 정신적으로까지 발전하여 슬픔, 근심 그리고 걱정들을 일으키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육체적인 고통에서 정신적인 고통으로의 변화는 곧 화살을 두 번 맞는 것과 같은 것으로, 바른 수행자는 괴로운 느낌에 접하더라도 이 고통을 피하기 위하여 감각적 즐거움을 대체물로 갈구한다거나 슬퍼하거나 근심하는 2차적인 고통을 새로 만들어 내지 않고 그 발생된 느낌 자체만을 통하여 무상함으로 알아차린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팔정도의 실천을 통해 여러 가지 느낌들의 현상을 완전히 이해하여 갈애와 집착 그리고 결국에 생로병사의 고통으로 이끄는 과정을 중지 할 수 있다는 설명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수행자는 느낌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수념처)을 통하여 고통의 발생을 막을 수 있다. 그렇다면 경전에서 설명하는 관찰대상으로써의 느낌들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가? 우리는 여기서 수념처에 제시된 느낌들에 대한 해석의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 봐야할 필요가 있다.
-사미사(samisa) 느낌과 니라미사(niramisa) 느낌
대념처경에서 보이는 9가지 느낌들 중에서 1) 즐거운 느낌(sukha), 2) 괴로운 느낌(dukkha), 3)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adukkhamasukha)을 바탕으로 나머지 6가지 느낌들은 느낌 앞에는 사미사(samisa)와 니라미사(niramisa)라는 형용사가 붙는다. 빠알리-영어 사전에 따르면 samisa는 소유의미의 접두사 sa와 날고기, 살, 물질, 육체, 영양물 등의 의미를 지닌 misa가 합성되어 양분을 가지고 있는, 육체적인, 물질의, 현세적인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niramisa는 없이, 밖에, 반대 등의 의미를 가진 접두사 nis(r)와 misa의 합성어로 정신적인, 양분을 가지고있지 않은, 감각적 욕망들로부터 벗어난, 비육체적인, 관심 없는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samisa vedana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오근( : 눈, 귀, 코, 혀, 몸)을 통하여 얻어지는 육욕에 집착이 있는 느낌으로 육체적인 느낌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수념처에서 설명하는 samisa sukha vedana는 육체적으로 즐거운 느낌, samisa dukkha vedana는 육체적으로 괴로운 느낌 그리고 samisa adukkhamasukha vedana는 육체적으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niramisa vedana 역시 육체적이지 않은 또는 오근을 통해서 얻어지지 않는 느낌이기에 육욕에 집착을 떠난 느낌, 비육체적인 느낌 혹은 정신적인 느낌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므로 niramisa sukha vedana는 정신적으로 즐거운 느낌인 somanassa vedana와 같은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며 niramisa dukkha vedana는 정신적인 괴로운 느낌인 domanassa vedana와 같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모두가 수념처에서 보이는 samisa를 육체적인 그리고 niramisa를 정신적인으로 번역하는 것은 아니다. 각묵 스님은 samisa를 세간적인 그리고 niramisa를 출세간적인으로 번역하고 일중 스님은 고엔카지의 설명에 따라 samisa를 집착(욕망)이 있는 그리고 niramisa를 집착이 없는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러한 번역의 차이는 초기경전 자체에 대한 해석과, 주석서나 스승의 가르침에 의지한 해석의 차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대념처경자체만을 보았을 때, 수념처에서 보이는 samisa를 육체적인 그리고 niramisa를 정신적인으로 해석하는 데는 커다란 어색함이 없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이 전통적, 주석서적 방법에 따른 해석과 비교될 시에는 두 해석간에 많은 차이점들을 나타내게된다. 우선 samisa vedana를 세간적인 느낌 그리고 niramisa vedana를 출세간적인 느낌으로 번역하는 경우, 이는 크게 두 가지 의미를 지니게된다. 하나는 세간적인 느낌을 재가자의 느낌으로 출세간적인 느낌을 출가자의 느낌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느낌을 외형상의 복장이나 겉으로 보이는 조건에 의해 재가와 출가로 구분한다는 것은 조금 어색하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세간적인 느낌을 집착(욕망)에 사로잡힌 느낌 그리고 출세간적인 느낌을 집착(욕망)에서 벗어난 느낌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 경우는 느낌을 신체적인 외양이나 사회적인 신분에 의해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느낌 자체의 기질이나 경향성에 준하는 구분이 되기에 좀 더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이 niramisa vedana를 출세간적인 느낌 혹은 집착(욕망)이 없는 느낌으로 해석하면 이전의 정신적인 느낌의 의미로써 해석을 하는 것과 확연한 차이를 보이게된다.
우선 niramisa vedana를 출세간적인 느낌 혹은 집착(욕망)이 없는 느낌으로 해석하는 경우를 살펴보면, 이는 일반 수행자들이 가지고 있는 느낌이라기보다 성인(Ariya-puggala) 혹은 아라한(Arahat)의 느낌으로 해석이 제한될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어 유여열반(saupdises nibbana)의 상태에 있는 아라한은 오온과 함께 느낌들을 가지고 있으나 발생하는 느낌들에 대하여 집착한다거나 욕망을 일으키지 않는다. 물론 이전에 살펴보았듯이 느낌은 고통의 원인이 될 수 있고 아라한들 역시 느낌을 가지고 있지만 이들은 이러한 느낌이 갈애의 원인이 되지 않도록 개발되어있다. 이에 관련하여 앙굿따라 니까야(Anguttara Nikya)는 아라한이 살아가는 10가지 길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 중에 하나로 여섯 가지 감각기관에 대한 지킴이 있는데 이 지킴은 살아가는데 필수 불가결한 여섯 가지의 감각과 느낌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고스란히 가지되 평정(upekkha) 그리고 사띠(sati)와 알아차림(sampajana)을 통하여 관찰함으로써 육근의 접촉으로 발생한 느낌이 더 이상 고통으로 발전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어떻게 비구들이여, 비구는 여섯 가지 요소들을 가지고 있는가? 여기서 비구는 눈으로 물질을 보면서 좋아하지 않고 싫어하지 않으며 사띠(sati), 알아차림, 평정함으로 머문다.
그러므로 이러한 느낌은 집착(욕망)으로부터 벗어난 느낌과 유사하며 이러한 아라한이나 성인의 느낌을 출세간적인 느낌이나 집착이 없는 느낌(niramisa vedana)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테라가타(Theragtha)는 깨달음을 얻은 아라한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에게 오온은 남아있으며 다만 오온에 대한 집착이 사라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아라한에게 탐, 진, 치의 삼독과 번뇌가 제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인간의 구성요소인 오온 그리고 느낌은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아라한에게는 육체적인 느낌만이 있고 정신적인 느낌은 없다는 것인가? 웨다나 상윳따는 잘 배운 고귀한 제자(sutav ariyasvaka)를 통하여 아라한의 육체적, 정신적 느낌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잘 배운 고귀한 제자는 괴로운 느낌과 접촉해도 슬퍼하지 않고, 근심하지 않고, 통탄하지 않고, 통곡하지 않고, 혼미해지지 않는다. 그는 정신적이 아닌 육체적인 한가지 느낌만을 느낀다.
이 경전의 설명에 따르면 성인은 육체적으로 괴로운 느낌만을 느끼며 정신적으로 괴로운 느낌을 느끼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곧 아라한에게는 오온을 통한 육체적인 느낌들(sukha, dukkha)만이 있을 뿐 이에 의한 정신적인 느낌들(somanassa, domanassa)을 가지고있지 않다는 설명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과연 수념처에서 관찰의 대상으로써 제시되는 느낌들 중에 집착이 없는 느낌으로 해석한 niramisa의 3가지 느낌은 아라한이 가지고 있는 느낌만을 나타내는 것일까? 대념처경의 주석서인 수망갈라윌아시니(Sumangalavilsini)는 nirmisa vedan를 집착을 떠난 출가의 느낌으로 설명하고 있다. 붓다고사는 smisa를 세속의 삶과 연관된, 세속의 삶에 집착하는, 세간적인 등의 세속의 의미를 지닌 gehasita로 설명하고 있으며 niarmisa를 세속의 삶에서 벗어난, 감각적 욕망에서 벗어난, 성스러운 삶을 향하는, 출세간적인 등의 출가의미를 지닌 nekkhammasiti로 설명하고 있다.
"세간적(육체적, smisa)인 즐거움, 기타 등등에서세간적(육체적, smisa)인 즐거움은 5가지 욕망에 의존하는 6가지 세속의 삶과 연관된 (정신적)즐거운 느낌이다. 출세간적(정신적, niramis)인 즐거움은 6가지 세속의 삶에서 벗어난 (정신적)즐거운 느낌이다. 세간적(육체적, smisa)인 괴로움은 6가지 세속의 삶과 연관된 (정신적)괴로운 느낌이다. 출세간적(정신적, niramis)인 괴로움은 6가지 세속의 삶에서 벗어난 (정신적)괴로운 느낌이다. 세간적(육체적, smisa)인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6가지 세속의 삶과 연관된 평정한 느낌이다. 출세간적(정신적, niramis)인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것은 6가지 세속의 삶에서 벗어난 평정한 느낌이다."
여기에서 smisa와 niramisa를 세간적인 그리고 출세간적인의 의미로 설명하기 위해 제시된 geha와 nekkhamma는 단순히 세속적 삶과 출가의 삶을 나타내고자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 욕망과 연관된 느낌 그리고 감각적 욕망에서 벗어난 느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맛지마니까야(Majjhima Nikya)의 살아야타나위방가경(Sayatana- vibhanga Sutta)은 세속 그리고 출가의 느낌들을 6가지로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거기에서, 무엇이 세속의 삶과 연관된(gehasitni) 여섯 가지 종류의 (정신적)즐거움인가? 눈으로 인식되어지는 기쁘고 즐겁고 마음에 들고 마음을 즐겁게 하고 세속적 물질과 연관된 형상들의 얻음을 얻은 자 또는 전에 얻음을 얻었던 것을 보는 자 또는 과거에 소멸되고 변화한 것을 기억하는 자에게 즐거움은 일어난다. 이와 같은 즐거움을 세속의 삶과 연관된 즐거움이라고 불리어진다. 귀로 코로 혀로 몸으로 생각으로 이와 같은 즐거움을 세속의 삶과 연관된 즐거움이라고 불리어진다. 이것이 6가지 세속의 삶과 연관된 즐거움이다.
거기에서, 무엇이 세속의 삶에서 벗어난(출세간의, nekkhammasitni) 삶과 연관된 6가지 종류의 즐거움인가? 형상들의 무상함과 변화에 대한 집착의 소멸을 알면서 : 예전에 형상을 그리고 지금의 모든 형상들이 무상하며 고통이며 변화를 수반한다라고 이와 같이 이것을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를 통해 보는 자에게 즐거움은 일어난다. 이와 같은 즐거움을 세속의 삶에서 벗어난 삶과 연관된 즐거움이라고 불리어진다.
귀로 코로 혀로 몸으로 생각으로 무엇이 세속의 삶과 연관된 여섯 가지 종류의 (정신적)괴로움인가? 눈으로 인식되어지는 기쁘고 즐겁고 마음에 들고 마음을 즐겁게 하고 세속적 물질과 연관된 형상들의 얻음을 얻지 않은 자 또는 전에 얻음을 얻지 않았던 것을 보는 자 또는 과거에 소멸되고 변화한 것을 기억하는 자에게 괴로움은 일어난다. 이와 같은 괴로움을 세속의 삶과 연관된 괴로움이라고 불리어진다.
귀로 코로 혀로 몸으로() 생각으로 무엇이 세속의 삶에서 벗어난(출세간의) 삶과 연관된 6가지 종류의 괴로움인가? 형상들의 무상함과 변화에 대한 집착의 소멸을 알면서 : 예전에 형상을 그리고 지금의 모든 형상들이 무상하며 고통이며 변화를 수반한다라고 이와 같이 이것을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면서 위없는 해탈에 대해 열망을 확고히 확립시킨다 : 성인들은(ariy) 지금 그 영역을 성취하여 머무르는 그 영역을 언제나는 성취하여 머무를까 라고 하면서 위없는 해탈에 대해 열망을 확립시키는 자에게 열망으로 인해 정신적 괴로움은 세속의 삶을 벗어난 (출세간의)삶과 연관된 괴로움이라고 한다.
여기서 무엇이 세속의 삶에(gehasita)에 연관된 평온인가? 눈으로 형상을 보고서 어리석고 미혹한 범부(puthujjana)에게 한계를 정복하지 못했고, 업의 과보를 정복하지 못했고, 위험함을 보지 못한 배우지 못한 범부에게.
이 경은 세속의 삶과 연관된(gehasitni) 느낌들이 감각적 즐거움에 연관되어 있으며 세속의 삶에서 벗어난(nekkhammasitni) 느낌들은 감각적 욕망에서 벗어난 느낌들로써 모든 것들이 무상하며, 고통스럽고, 변화한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를 통하여 본다는 설명을 하고 있다. 이는 감각적 욕망에서 벗어난 느낌들에 대한 관찰이 곧 지혜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수행자는 감각적 욕망에서 벗어난 느낌(nekkhammasitni, 세속의 삶에서 벗어난) 안에서 고귀한 분(ariy)이 가지고 있는 위없는 해탈(자유, anuttaresu vimokkhesu)을 추구하게 됨으로써, 이 느낌과 해탈을 향한 열망을 가지고 있는 성인(혹은 아라한)의 느낌 사이에는 매우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대념처경의 주석서인 수망갈라윌아시니에서 붓다고사는 smisa를 세간적인 또는 집착(욕망)이 있는으로, niramisa를 출세간적인 또는 집착이 없는으로 해석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살아야타나위방가 경을 응용하였고 smisa를 gehasita로 nirmisa를 nekkhammasit로 연관지어 설명하였다. 하지만 붓다고사의 설명처럼 수념처의 smisa를 집착(욕망)이 있는 혹은 세간적인으로, nirmisa를 집착이 없는 혹은 출세간적인으로 해석하는 것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의문을 남긴다. 붓다고사가 주석서를 통해 설명하는 9가지 수념처의 느낌들은 다음과 같다.
1) (육체적, 정신적) 즐거운 느낌 (sukha vedana)
2) 괴로운 느낌 (dukkha vedana)
3)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 (adukkhamasukha vedana)
4) 집착이 있는(세속의 삶과 연관된) 정신적 즐거운 느낌
(smisa sukha vedana gehasita-somanassa vedana)
5) 집착이 없는(세속의 삶에서 벗어난) 정신적 즐거운 느낌
(nirmisa sukha vedana nekkhammasit-somanassa vedana)
6) 집착이 있는 정신적 괴로운 느낌
(smisa dukkha vedana gehasita-domanassa vedana)
7) 집착이 없는 정신적 괴로운 느낌
(niramisa dukkha vedana nekkhammasit-domanassa vedana)
8) 집착이 있는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
(smisa adukkhamasukha vedana gehasita-upekkh vedana)
9) 집착이 없는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
(nirmisa adukkhamasukha vedana nekkhammasit-upekkha vedana)
우선 붓다고사는 위와 같이 smisa를 gehasita로 nirmisa를 nekkhammasiti로 번역하고 있기에 이들 9가지 느낌들 중에 nirmis로 설명되는 5), 7), 9)의 느낌들은 일반 수행자들의 느낌이라기보다 집착을 가지고 있지 않은 아라한(혹은 성인)의 느낌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해석하면 smisa sukha (dukkha) vedan는 집착을 가지고 있는 수행자 혹은 일반 수행자(puthujjana)의 몫이 되는 것이며 nirmisa sukha (dukkha) vedana는 집착을 가지고있지 않은 잘 배운 고귀한 제자(sutav ariyasvaka arahat)의 몫이 된다는 해석을 하게된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주석서 이전에 니까야(Nikaya) 상의 의미로 smisa를 육체적인 그리고 niramisa를 정신적인으로 해석한 경우와 상반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smisa sukha (dukkha) vedana를 육체적인 즐거운 (괴로운) 느낌으로 해석하면 육체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는 일반 수행자 뿐만 아니라 아라한 역시도 포함하게되고 niramisa sukha (dukkha) vedana를 정신적인 즐거운 (괴로운) 느낌으로 해석하면 아라한이 제외된 일반 수행자만을 의미하게 된다. 아라한의 집착(욕망)이 없는 느낌 안에는 정신적인 느낌이 없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두 용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nirmisa sukha (dukkha) vedana는 아라한(arahat)만의 느낌이 되기도 하고 일반 수행자만의 느낌이 되기도 하는 상대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리고 위 주석서의 느낌에 대한 설명은 해석상의 모호함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웨다나 상윳따의 설명을 통하여 아라한에게는 중립의 느낌을 제외하고 정신적인 느낌이 없고 오직 육체적인 느낌만이 나타난다고 설명한 바 있다. 그러므로 집착이 없는 느낌을 가지고 있는 아라한의 경우, 이 느낌은 육체적인 느낌들(kyika vedana)이어야하지 정신적인 느낌들(cetasika vedana)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주석서에서 붓다고사가 설명하는 smis와 nirmis의 느낌들은 중립의 느낌을 제외하고 모두가 정신적으로 즐거운 혹은 괴로운 느낌(somanassa, domanassa vedana)들로 설명 되고있다. 그러므로 위의 집착이 있고 없는 모든 느낌들은 정신적인 느낌들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에 따르면 아라한은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는 집착이 없는 정신적 즐거운 혹은 괴로운 느낌들(somanassa vedan, domanassa vedan)을 느껴야하고 나는 정신적인 느낌을 느낀다고 분명히 안다(cetasika vedana vediymti pajnti)라는 관찰을 행해야 한다는 어색한 설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또 다른 질문을 제시하게 된다. 집착이 있는(세간적인) 혹은 집착이 없는(출세간적인) 느낌을 관찰한다는 주석서의 설명을 통해서 우리는 과연 대념처경은 어떤 대상을 위한 수행방법이었나 하는 의문을 품게되는 것이다. 대념처경의 주석서인 수망갈라윌아시니(Sumagalavilsin)에서 붓다고사는 대념처경의 도입부에 설명되는 비구들이여, 이 길은 유일한 길이니(ekyano aya bhikkhave maggo)의 유일한 길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사념처 수행은 성인(ariyasvaka)을 위한 수행방법이 아니라 성인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예비단계의 방법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길의 예비단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몸 등의 네 가지 대상의 기능인 염처는 예비단계의 길을 의미하고 출세간적이 아니다. 그는 여러 번 행하고, 그의 행은 여러 번이다.
이와 더불어 붓다고사는 삼장(법사) 출라나가 장로(canga-tthero)와 삼장(법사) 출라수마 장로(casuma-tthero)와의 일화를 예로 들어 사념처 수행의 대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일화 속에서 제자인 출라나가 장로는 염처 수행을 예비의 길로 세간의 수행자를 위한 길이라고 주장했고 스승인 출라수마 장로는 염처 수행을 혼합된 길로 세간(puthujjana)과 출세간(ariyasvaka)에 있는 모든 수행자들을 위한 길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스승인 출라수마 장로는 이 방법이 출세간을 위한 방법이라면 이미 출세간을 얻은 수행자들이 7년, 6년, 5년...을 닦으며 성인(anagma, arahat)이 되기 위해 머무른다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파악하고 제자 출라나가 장로를 찾아가 자신이 주장했던 혼합된 길이 틀렸으며 사념처 수행은 세간의 수행자를 위한 방법이라고 전한다.
친구 출라나가여, 나에 의해 일컬어진 혼합된 길은 가능하지 않다. 너에 의해 일컬어진 사념처가 예비단계의 길이라는 것이 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붓다고사는 이 주석서를 통해 느낌에는 크게 3가지가 있으며 수념처의 대상으로써 이들 느낌은 모두 세간적(lokiya)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며 또한 이들 느낌은 관찰의 대상으로 육체적, 정신적 그리고 물질적 수행주제와 정신적 수행주제 두 가지로 나누어 관찰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붓다고사는 이처럼 사념처의 수행은 세간의 수행자를 위한 것이며 수념처를 위한 대상으로서의 느낌들 역시 세간적이라고 설명한 연후에 정작 9가지 종류의 느낌들을 설명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느낌을 살아야타나위방가경 Sayatanavibhanga Sutta과 비교하여 세간적(gehasita)인 것과 출세간적인(nekkhammasita) 것으로 나누어 관찰된다고 설명하였다. 결과적으로 붓다고사는 스스로 세간적인 방법 안에서 출세간적인 의미의 느낌들을 관찰한다는 모순점을 드러냈고 여러 현대학자들은 이 가르침을 여과 없이 수용함에 따라 수념처의 느낌들을 세간적인 느낌과 출세간적인 느낌으로 번역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수념처의 대상으로 설명되는 smisa와 niramisa의 느낌을 집착이 있는(세간적인)이나 집착이 없는(출세간적인)으로 해석하는 것은 재 고찰을 필요로 하며 대념처경의 수념처에 대한 느낌들에 대해서는 실천적으로도 육체적인과 정신적인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욱 적당하다고 여겨진다.
수념처의 대상으로 보여진 smisa와 niramisa의 느낌들은 웨다나 상윳따(Vedansamyutta)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되어진다. 웨다나 상윳따는 느낌에 대해 육체적인(smisa), 정신적인(niramisa) 그리고 그보다 더 정신적인(niramisa nirmisatar)이라는 세 가지 분류를 통하여 희열(pti ), 즐거움(sukha ), 평정함(upekkh) 그리고 해탈(자유, vimokkha)과 연관하여 설명하고 있다. 경전은 첫 번째로 육체적인(smisa) 희열, 즐거움, 평정함에 대해서 이들 모두를 오근과 관련된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pacime kmagu)과 관련짓고 이들을 육욕에 집착이 있는 느낌(육체적인 느낌)으로 마음에 들고, 매력있고, 욕심과 탐심을 일으키는 것들로 나타낸다. 그리고 해탈(자유)에 대해서는 물질(rupa)과 관련된 것을 육체적인 해탈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두 번째로 정신적인(niramisa) 희열, 즐거움, 평정함에 대해서는 모두 육욕에 집착이나 감각적 욕망으로부터 벗어나고 향상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법을 멀리한 상태를 말하는데 정신적인 희열(nirmisa pti)은 감각적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초선(pathama jhna : )을 거쳐 이선(dutiya jhna)에 머무는 것이고 정신적인 즐거움(niramisa sukha)은 같은 과정을 거쳐 삼선(tatiya jhna)에 머무는 것, 정신적인 평정함(nirmisa upekkh)은 괴로움도 즐거움도 없으며 사띠(sati)가 평온과 함께하여 청정한 사선(catuttha jhna)에 머무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정신적인 해탈(자유)(nirmiso vimokkha)은 무색(arpa)과 관련된 해탈(자유)을 정신적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보다 더 정신적인(nirmisa nirmisatar) 상태는 번뇌를 완전히 소멸한(khsava) 비구가 탐욕(rg), 성냄(dos), 그리고 어리석음(moh)으로부터 해탈(자유)된 마음을 관찰할 때 일어나는 희열, 즐거움, 평정함, 해탈을 그보다 더 정신적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이 경전에 따르면 smisa는 오근과 관련, 혹은 육체와 관련하여 감각적 욕망이 생기고 욕심을 일으키게 되는 것을 의미하고 niramisa는 감각적 욕망들을 멀리하고 정신적 단계의 선정을 얻는 것을 그리고 niramisa nirmisatar는 탐, 진, 치로부터 해탈된 아라한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정신적인 느낌(niramisa vedana)과 선정의 관계를 볼 수가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느낌들은 수행의 발전에 따라 어떻게 변화되는 것일까? 빠알리 니까야에서 보여지는 수행의 단계와 느낌에 대한 설명은 선정의 과정을 통하여 나타난다. 아리야빠리예사나 경(Ariyapariyesana sutta)의 설명에 따르면 깨달음을 얻기 이전의 부처님께서는 두 스승으로부터 사마타를 통하여 색계 선정 네 가지와 무색계 선정 네 가지를 지도 받았다. 그리고 두 스승을 떠나 깨달음을 얻은 후의 부처님은 다시 제자들에게 8정도를 위시로 하여 선정의 단계를 지도하셨다. 이들은 색계 선정 네 가지와 무색계 선정 네 가지 그리고 상수멸정(Savedayitanirodha)이다. 경전에 언급되는 선정들은(상수멸정을 제외하고) 내용상 부처님의 깨달음 전후에 차이를 보이지 않으나 깨달음을 얻은 후의 부처님께서는 사마타 만으로 얻어지는 선정의 과정에 만족하지 않고 이 진행과정 안에서 지혜(p)를 통해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하신 것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수행의 단계와 느낌에 대한 설명은 색계 선정 네 가지에서 자세히 보여진다. 까싸빠 상윳따(Kassapasayutta), 깐다라까 경(Kandaraka sutta),까야가따사띠 경(Kyagatsati sutta), 아누빠다 경(Anupada sutta)등의 경전들은 선정의 성취와 느낌의 관계를 보여준다.
그는 마음의 번뇌들이며 또 지혜를 약화시키는 이 다섯 가지 장애들을 버리고,
1) 감각적 욕망에서 벗어나고 불선한 법으로부터 떠나서, 생각(거친 사유, vitakka)이며 숙고(미세한 사유, vicra)이며, 벗어남(viveka)에서 일어난 희열(pti)과 즐거움(sukha)인 첫 번째 선정을 성취하며 머무른다.
2) 생각(거친 사유, vitakka)과 숙고(미세한 사유, vicra)가 가라앉음으로써 내적인 고요와 마음이 한곳으로 집중된, 생각과 숙고가 없는 집중에서 생겨나는 희열(pti)과 즐거움(sukha)을 갖춘, 두 번째 선정을 성취하며 머무른다.
3) 희열(pti)이 사라짐으로써, 평정(upekha)과 사띠(sati)와 바른 알아차림(sampajano)으로 머문다. 그리고 몸으로 즐거움(sukha)을 느낀다. 성인들은 이것을 일컬어 평정(upekha)과 사띠(sati)가 있는 즐거움으로써 머무는 자라고 말한다. 세 번째 선정을 성취하며 머무른다.
4) 즐거움(sukha)과 괴로움(dukkha)이 끊어짐으로써 그리고 예전의 정신적인 즐거움(somanassa)과 정신적인 괴로움(domanass)이 제거됨으로써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adukkha asukha), 맑고 청정한 평정(upekha)과 사띠(sati)인 네 번째 선정을 성취하며 머무른다.
이와 같이 선정의 진행과정은 첫 번째 선정에서 선정의 요소로 나타난 즐거운 느낌(sukha)과 이와 관련된 정신적 만족의 요소인 희열(pti)이 수행의 발전에 따라 점차적으로 상승했다 소멸하는 것을 보여준다. 첫 번째 선정에서 나타난 즐거운 느낌(sukha)은 두 번째 선정에서 집중(samdhi)을 통하여 부각되고 세 번째 선정에서 온 몸으로 느껴지는 절정의 시기를 지나 네 번째 선정에서 소멸하게된다. 특히 네 번째 선정의 설명은 느낌의 다섯 가지 요소들 중에 육체적으로 즐거운 느낌(sukha vedana), 육체적으로 괴로운 느낌(dukkha vedana), 정신적인 즐거운 느낌(somanassa vedana), 정신적인 괴로운 느낌(domanassa vedana)의 네 가지 느낌들이 네 번째 선정과 함께 모두 사라지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와 관련하여, 바후웨다니야 경(Bahuvedanya sutta)은 느낌에 대한 분석에 그치지 않고 선정의 성취와 함께 얻어지는 상승적인 즐거움을 설명하였다. 이 경은 네 가지 느낌들이 사라지고 중립적인 느낌(adukkhaasukha)만이 남은 네 번째 선정의 위치를 즐거움의 일종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즐거움은 육체적으로 즐거운 느낌(sukha vedana)이나 정신적으로 즐거운 느낌(somanassa vedana)과 다른, 희비를 초월한 고원의 즐거움이라고 한다.
존자여, 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라는 것은 평정(santa)을 얻고 높은 즐거움(sukha)을 얻은 자에게서 (보여진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난다여, 비구가 즐거움(sukha)과 괴로움(dukkha)이 끊어짐으로써 그리고 예전의 기쁨(somanassa)과 슬픔(domanass)이 제거됨으로써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adukkha asukha), 맑고 청정한 평정(upekh)과 사띠(sati)인 네 번째 선정을 성취하며 머무른다. 아난다여, 이것이 이전의 즐거움보다 훨씬 훌륭하고 탁월한 다른 즐거움이다.
이 경전은 상승하는 선정의 과정을 통하여 상수멸정까지 점차적으로 발전하는 고원의 즐거움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사선정의 상태에서는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adukkhamasukh vedan) 하나 만이 남게되며 이는 훨씬 탁월한 즐거움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사선정의 얻음을 통한 네 가지 느낌의 소멸은 결국에 수행자가 집착과 고통으로 이끄는 갈애를 만들어내지 않기 위해 관찰의 대상으로 삼았던 여러 가지 느낌 역시도 고요와 평정으로 이끄는 선정 수행을 통하여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느낌들의 사라짐은 곧 수행의 발전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느낌들의 사라짐은 결국 갈애로 이끄는 조건요소들의 사라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전들의 설명을 통하여 우리는 네 번째 선정을 얻은 후에는 더 이상의 (육체적, 정신적으로) 즐거운 느낌이나 고통스런 느낌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네 번째 선정 이후에 나타나는 모든 무색계 선정들(ksnacyatana, viacyatana, kicayatana, nevasansa-yatana)에는 오직 정신적으로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adukkha asukha vedan) 또는 평온의 기능(upekkhindriya)만이 느낌으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부분은 팔정도의 바른 사띠(samm-sati, )의 범주 안에 설명되는 수념처의 느낌들과 바른 집중(samm-samdhi, )을 통하여 얻게되는 - 사선정에서 설명되는 - 느낌의 관계이다. 우선 수념처에서 설명하는 느낌들 중에 9번째로 설명된 정신적으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nirmisa adukkhamasukha vedan)을 제외한 모든 느낌들은 네 번째 선정을 얻은 이후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수행자는 네 번째 선정의 얻음을 통하여 신행(kya-sankhra)의 중지와 더불어 모든 육체와 관련된 느낌(sukha, dukkha)들을 중지하게되고 정신적으로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somanassa, domanassa)마저 중지하게 된다고 설명되기 때문이다. 이는 선정의 단계가 발전함에 따라 수념처의 관찰대상이 줄어들어 수념처를 행하는 수행자가 네 번째 선정을 얻게되면 그에게는 오직 정신적으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nirmisa adukkhamasukha vedan)만이 수념처의 대상으로 남게된다는 것을 뜻한다. 즉 대념처경에 명시된 수념처의 모든 대상들은 네 번째 선정을 얻기 이전의 수행자들만이 관찰 가능하다는 것이다.
4. 내적으로(ajjhatta) 외적으로(bahiddha) 느낌을 관찰.
대념처경(Mah-satipahna sutta)과 염처경(Satipahna sutta)은 수념처(vedannupassana)의 실천을 위하여 세부적인 설명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이 내적으로(ajjhatta) 느낌들에서 느낌을 따라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외적으로(bahiddha) 느낌들에서 느낌을 따라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내적으로 외적으로 느낌들에서 느낌을 따라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느낌들에서 일어나는(samudaya) 현상을 따라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느낌들에서 사라지는(vaya) 현상을 따라 관찰하며 머문다. 혹은 느낌들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따라 관찰하며 머문다. 느낌이 있다라고 하면서 사띠(sati)가 지혜(a)와 지혜를 가진 사띠(patissati)정도까지 그에 의해 확립된다. 이제 그는 의지하지 않고 머문다. 그는 세상에 어떤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와 같이 느낌에서 느낌을 따라 관찰하며 머문다.
이 경전의 설명에 따르면 수행자는 처음으로 그의 내적인느낌에 대해서 관찰하고 외적인느낌에 대해, 그리고 내외적 느낌 모두를 관찰한다. 여기에서 보여지는 내적, 외적 그리고 내외적으로 관찰하는 방법은 대념처경의 수념처(1번) 뿐만이 아니라 신념처(9번), 심념처(1번), 그리고 법념처(5번)에도 모두 16번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네 가지 염처의 수행방법은 모두 내적, 외적, 그리고 내외적의 관찰방법을 제시하여 수행실천의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그러므로 경전에서 설명되는 사념처 수행을 보다 실천적인 측면으로 살펴보기 위해서는 내적인것과 외적인 것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본고에서는 수념처를 모델로 내적인 것과 외적인 관찰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보려 한다. 웨다나 상윳따(Vedanasamyutta)는 느낌을 내적, 외적의 느낌으로 구분하고 있다.
즐거움이든 괴로움이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이든 내적으로 그리고 외적으로 경험한 어떤 것이든 간에 그것은 괴로움이다 라고 알면서 멸하고 분해되며 접촉과 접촉의 멸함을 보면서 이와 같이 바로 그곳에서 집착하지 않는다.
이 경전을 통해 내적인 느낌과 외적인 느낌이 서로 다른 종류의 느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보여지는 내적, 외적의 의미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과 수행자들 사이에서 (신념처의 호흡관등을 통해) 다양한 해석들이 보여지고 있다. 이러한 해석들을 종합해보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내적이던 외적이던 대상들은 모두 수행자 자신의 것이라는 해석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내적 대상은 수행자 자신의 것이며 외적 대상은 수행자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해석이다. 이러한 구분으로 수념처를 본다면 수념처에 대한 해석 역시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로 내적인 느낌과 외적인 느낌을 모두 수행자 자신의 것으로 볼 때, 내적인(ajjhatta)느낌은 수행자의 정신적 느낌들로 정신적으로 즐거운 느낌(somanassa vedana), 정신적으로 괴로운 느낌(domanassa vedana) 그리고 정신적으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upekkh)을 얘기하고 외적인 느낌은 수행자의 육체적인 느낌들로 육체적으로 즐거운 느낌, 육체적으로 괴로운 느낌, 그리고 육체적으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쉽게 말해 정신이 몸 안에 있다고 볼 때 정신을 내적 그리고 몸이 정신을 둘러싸고 있다고 볼 때에 몸을 외적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구분은 인간의 육체와 정신이 개별적으로 분리되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몸과 마음에서 나타나는 현상이 구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느 수행자에게 있어 아주 가깝고 친밀한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수행자는 슬픔이나 비탄의 느낌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느낌들은 아주 격렬한 괴로움 중에 하나이지만 이 괴로움이 육체적인 고통을 포함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이 괴로움은 정신을 근원으로 하여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괴로움을 정신적인 괴로움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수행자가 다리를 꼬고 몸을 고정된 자세로 얼마간 앉아 있게되면 그는 다리, 등, 그리고 허리 등지에서 다양한 종류의 육체적 통증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괴로운 느낌은 마음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를 근원으로 하여 발생하게 되는 것이므로 이 괴로운 느낌을 육체적으로 괴로운 느낌이라 부를 수 있다. 그러므로 수행자에게 있어서 내적이란 정신적으로 나타나는 느낌들을 대상으로 놓고 관찰하는 것이며 외적이란 육체적으로 나타나는 느낌들을 대상으로 놓고 관찰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다른 두 종류의 느낌들이 마음과 몸이라는 두 가지 다른 근원에 의해서 발생하지만 이들은 서로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매우 얽혀있는 관계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내적, 외적에 대한 첫 번째 해석은 내적, 외적의 모든 관찰이 수행자 자신에게 나타나는 직접관찰의 대상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해석은 문자상의 의미를 따르는 것으로 내적인 느낌은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수행자 그 자신에게 나타나는 느낌으로, 외적인 느낌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여기서 다른 사람의 느낌을 관찰한다는 것은 아마도 수행자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서 다른 사람의 느낌을 추측한다거나 상상한다는 것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과연 수행자가 다른 사람들의 정신적, 육체적인 느낌들을 있는 그대로 자신의 느낌처럼 관찰하면서 머무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있다. 이에 대해 소마 테라(ven. Soma Thera), 피야다시 테라(ven. Piyadassi Thera), 그리고 냐냐포니까 테라(ven. Nyanaponika Thera)등 해외의 저명한 학승들 역시도 외적으로(bahiddh)의 용어를 위와 같이 다른 사람의 느낌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냐냐포니까 테라 스님(ven. Nyanaponika Thera)은 ;
"(수행)지침의 첫 번째 단계에 의하면 각각의 수행은 처음에는 자신에게, 다음에는 다른 사람에게(일반인이나 관찰하는 특정한 사람에게), 그리고 마지막으로 양쪽 모두에게 적용해야한다. 이렇게 수행을 세 가지로 적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다. 그래서 이것은 다른 여러 경전들과 후기 팔리어 경전에서도 서로 다른 연관성을 지니며 여러 가지로 적용되었다. 지침을 따르면 염처를 충분히 수행하지 않거나 치우친 태도를 가지는데서 기인한 불안정한 상태와 잘못된 판단이 없어질 것이다."
이러한 설명을 가능하게 하는 이유는 아마도 이들의 해석이 붓다고사(Buddhaghosa)의 주석서인 수망갈라윌아시니(Sumagalavilsini)의 설명에 기본을 두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주석서는 내적으로 그리고 외적으로에 대해 설명하기를 :
"이와 같이 내적이란, 즐거운 느낌 등에 관한 이해를 통하여 자신의 느낌들과 다른 사람의 느낌들, 때때로 자신과 다른 사람의 느낌들에서 느낌을 따라 관찰하며 머문다."
붓다고사는 내적으로(ajjhatta)는 수행자 자신의(attano) 느낌에 관한 것으로, 그리고 외적으로는 다른 사람의 느낌에 관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는 수행자가 수념처를 통하여 자기 자신의 느낌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느낌들 역시도 관찰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다른 사람의 느낌(parassa)을 관찰한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실천적인 문제점이 나타난다. 왜냐하면 이는 외부적인 대상을 의미하는 것을 통하여 다른 사람에게 소유된 느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다른 사람의 느낌(몸, 마음, 법)을 관찰하는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수행자가 다른 사람의 느낌을 관찰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가정할 수 있다.
우선 하나는 수행자가 가지고 있는 감각적 기능들을 통하여 외부적 대상에 대한 직접적인 인식(지각)을 하는 것이다. 인간은 그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부터 외부적인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 감각기관을 사용하는데 예를 들어 포도(과일)의 색, 냄새, 맛, 감촉 등을 통하여 포도의 성질을 알 수 있듯이 인간은 자기 자신의 감각기관들을 통하여 다른 사람의 얼굴, 목소리, 성격, 능력, 생각 등을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이 가능하다. 우리는 우리의 눈을 통하여 다른 사람의 얼굴 표정을 보고 또 귀를 통하여 목소리의 높낮이 등을 들은 후에 외부적인 대상인 다른 사람이 즐거운 상태인지 괴로운 상태인지를 쉽게 인지할 수 있다. 하지만 감각기관들에 의해서 얻어진 자료를 통해 다른 사람의(parassa) 느낌에 대한 실체를 이해하는 것은 충분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얼굴표정과 목소리 톤 등을 상황에 따라 가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배우가 연기를 하듯이 사람은 상황에 따라 자기 자신의 느낌이나 감정이 외부로 노출되는 것을 실제와 다르게 조절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감각기관을 통하여 다른 사람의 느낌의 실체를 관찰한다는 것은 어렵다. 물론 몇몇 사람들은 그들에게 마치 X-레이와 같은 눈이 있어 다른 사람의 몸 안을 들여다보고 질병이나 고통의 유무를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수술이나 약물처리 없이 맨손으로 그 병을 제거한다는 사람도 있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거나 원하는 대로 조절한다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람들의 능력에 대한 사실 여부를 떠나 과연 이러한 능력을 위해 경전에서 외적으로(bahiddh) 관찰하여 머문다 라고 설명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수행자가 가지고 있는 감각적인 기관들을 통하여 다른 사람의 느낌에 대한 실체를 이해한다는 것은 실천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리고 외적으로 다른 사람의(parassa)로 해석하는 경우, 또 다른 가능한 해석은 수행자가 외부적인 대상인 다른 사람의 느낌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자신이 경험한 사실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의 느낌(몸, 마음, 그리고 법)을 추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그의 가르침 안에서 진정한 실체를 이해하기 위한 방법으로 추론의 유효성을 부정하지 않으셨다. 이와 관련하여 자야틸레케(K. N. Jayatilleke) 선생은 말하기를 : 불교의 귀납적 추론은 그러므로 연기의 이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러한 추론들은 표준과 비표준 인식의 자료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성립된 지식으로 고려되어야 하는 것은 이러한 인식들의 자료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직접추론이라는 것이다. 붓다와 그의 제자들은 이 세상에 나타나는 모든 지식은 열반을 제외하고 앎과 봄 안에서 가지게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태어남으로 인한 늙음과 죽음이란 진술은 모든 사람들이 태어나면 결과적으로 성장하여 늙고 죽게된다는 것이 알려지고 보여진 (인식으로) 관찰에 근거한 경험적 일반화이다. 이렇게 관찰된 경우들로부터 과거에서든 미래에서든 태어난 사람들은 모두 성장하야 늙고 죽는다는 귀납적 추론(anvayaa-)을 만들게 된다.
우리는 위와 같은 종류의 귀납적 추론이 불교에서 어떻게 이용되었는지 담마빠다(Dhammapada)를 통하여 볼 수 있다. 누구나 매를 두려워하고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한다. 자기의 처지를 바꿔 생각한다면 남을 때리거나 죽이지 못한다. 이러한 경구는 사람이 그 자신의 특정 경험에 의하여 다른 사람의 일반적인 느낌들을 추론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해석방법에 따라 수행자는 자기 자신의 느낌에 대한 특별한 이해를 통하여 그의 느낌을 괴롭거나 무상하다고 관찰할 수 있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의 느낌 역시도 그와 같이 괴롭고 무상하다고 추론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 그는 다른 사람들의 느낌들 또한 자신의 것과 같은 현상일 것이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이러한 추론의 방법에 대해 우 실라난다 사야도(Ven. U. Slnanda)는 추론적 위빠사나라는 새로운 이름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외적으로 관찰에 대해 수행자가 자신의 몸을 관찰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몸에 대하여 관찰하는 것이 몸에 대하여 몸을 내적으로, 외적으로 함께 관찰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우 실라난다 사야도 역시도 외적으로의 의미를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것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한 관찰은 의도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수행자가 수행 중에 어떤 다른 사람을 생각할 때 가능하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을 추론적 위빠싸나(Inferential vipassana)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종류의 위빠싸나를 가지고 있다. 직접적인 위빠싸나(direct vipassana)와 추론적인 위빠싸나(inferential vipassana). 직접적인 위빠싸나를 수행하는 수행자는 자신의 가는 것, 앉는 것, 서있는 것, 누워있는 것에 대하여 수행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가는 것 등을 명상할 때, 수행자는 추론적인 위빠싸나를 수행하는 것이다. 마치 나의 가는 것이 무상하듯이, 다른 사람의 가는 것도 그럴 것이다. 추론에 의하여, 수행자는 다른 사람의 가는 것, 앉는 것, 서있는 것, 그리고 누워있는 것에 대하여 관찰한다.
하지만 과연 생각의 하나인 추론을 위빠사나 수행의 한 방법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좀더 깊은 고찰을 필요로 한다. 마하시 사야도(Ven. Mahasi Sayadaw) 역시도 외적인 관찰에 대하여 추론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마하시 사야도의 외적인 관찰에 대한 가르침은 우 실라난다 사야도와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
내적통찰 수행(위빠사나)의 발전에서는 자신 안의 직접적 지각에 의한 지혜(paccakkha-a)가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계발되어야 한다. 이것은 수행자가 자신 안에서 주목되는 육체적 정신적 진행과정들, 내적 관찰에 집중해야 한다는 뜻이다. 오직 내적 통찰의 진보가 뚜렷한 수준에 도달했을 때 외적인 관찰은 내적인 관찰과 더불어 시작하게 될 것이다. 이렇다고 하더라도, 외부적인 관찰은 개별화되고 특별한 방식이 아닌 일반적 추론의 방법에 의해 시작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적 관찰을 위한 노력이 만들어져야한다. 이것이 자신 안의 현상에 주의를 집중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마하시 사야도는 외적인 관찰의 방법이 추론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위의 글을 통하여 그가 내적통찰의 수행(위빠사나)을 추론으로써 실천하는 것에 대해 그리 장려하는 것으로 보여지진 않는다. 뿐만 아니라 어떤 수행자가 외부적인 무언가를 추론할 때에 과연 이 추론을 아누빠사나(anupassana) 한다고 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대념처경은 외적 관찰에 대하여 외적으로 느낌에서 느낌을 따라 관찰하면서 머문다라고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누빠사나(anupassana)는 따라가며 본다는 의미로 매우 실제적이고 세밀한 관찰, 응시 등을 의미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느낌에 대한 추론은 실제적으로 자기 자신의 느낌에 대한 세밀한 관찰을 부여하는 것과 많은 차이를 지닌다. 예를 들어, 열대지역에 사는 어떤 사람은 눈(snow)을 직접 만지거나 보지 않아도 간접적인 정보를 통하여 눈에 대해 추론한다거나 상상할 수 있다. 때로는 눈을 직접 경험한 사람보다도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간접적인 경험은 눈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과 비교될 수 없으며 실제적으로 만지고 밟고 느끼는 것과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냐냐포니까 스님(Ven. Nyanaponika Thera)은
"체계적인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내적 대상물만이 청정한 염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 유념해야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의 육체적정신적 과정만을 직접경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직접경험에 의한 지식이야말로 엄격한 의미에서 불교의 위빠사나 수행이 목표로 하고 있고, 다른 것과 구별되는 점이다. 추론이나 직감 등은 수행초기에는 모두 배제되고 나중의 단계에서만 제한적으로 허용된다. 그것도 그 추론이 현재사실에 대한 관찰로부터 과거나 미래의 동일유형의 사건으로 전개될 때까지의 잠시뿐이다. 그러나 외부의 대상에 대한 심사숙고는 엄격한 명상수행 밖에서 수행될 것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
더 나아가 사띠빳타나-쌍윳다(Satipathana-Samyutta)의 부처님께서는 아난다에게 사념처수행의 발전을 위해서는 마음을 외부대상으로 지향해서는 안되며 내부대상으로 깊이 새겨야 한다고 설명하고 계시다.
아난다여, 어떤 비구나 비구니나 사념처들에서 마음을 확고히 하여 산다... 느낌에 대하여 느낌을 관찰하는데 느낌에 대하여 느낌을 관찰하면서 육체적인 대상, 육체적인 불편, 마음의 위축이 생겨나서 외적으로 마음이 산란해지면, 아난다여, 그 비구는 무언가 기쁘게 하는 특징에 마음을 지향해야 하는데 무언가 기쁘게 하는 특징에 마음을 지향하면 즐거움이 생기고 즐거움이 생기면 희열이 생겨나고... 그는 그 마음을 철수하여 사유와 숙고에서 벗어나면 나는 사유를 벗어나고 숙고를 벗어나 내적으로 깊이 새겨 지복을 느낀다 라고 분명히 안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지향하는 수행이 있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지향하지 않는 수행은 어떠한 것인가? 아난다여, 비구가 외적으로 마음을 지향시키지 않으면서 나의 마음이 외적으로 지향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안다...아난다여, 이와 같이 지향하지 않는 수행이 있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나는 지향하는 수행도 설하고 지향하지 않는 수행도 설한다.
이 경전을 통하여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염처수행의 대상을 외적으로 두는 것을 장려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외적으로란 용어를 다른 사람의 느낌으로 설명하고 있는 수망갈라윌아시니(Sumagnalavilsin)의 설명은 느낌을 직접경험 하기 위한 방법으로 적절하지 못하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용어의 더욱 적절한 해석을 위해서는 내적으로, 외적으로 모두가 수행자 자신의 느낌과 연관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느낌에 대한 관찰이 아누빠사나(anupassana)로 직접경험을 통해 수행자 자신과 연관되어야 한다면 첫 번째 해석의 방법(그림 1)이 가장 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즉, 내적인 관찰을 수행자의 정신적인 느낌으로, 외적인 관찰을 수행자의 육체적인 느낌으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해석 역시 또 다른 문제점을 만든다. 수념처의 실천을 위한 위의 해석방법은 설명이 가능하지만 수념처를 떠나 다른 세 가지 염처의 실천에 적용해 보았을 때 적절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네 가지 염처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정형구, 내적으로, 외적으로, 내외적으로 느낌(몸, 마음, 법)을 따라 관찰하며 머문다는 설명은 어떻게 해석되어야하는 것인가?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대념처경의 본문 안에서, 16번 반복되는 정형구들을 제외하면 외적으로 관찰한다는 설명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법념처의 설명 중에 오장애(paca-nvaraa)와 칠각지(satta-bojjhanga)를 살펴보면, 오장애는 불교수행을 위하여 가장 기본적으로 제거되어야 하는 요소들로 수행의 도입부에 나타나고 칠각지는 사념처 수행의 발전을 통해 얻어지는 요소들로 수행의 많은 발전을 이룬 상태에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법념처는 이처럼 염처수행의 전반적인 과정들을 모두 내적인 관찰로 설명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여기에 한 비구가 내적으로 1.감각적 욕망(2.악의, 3.혼침과 해태, 4.흥분과 회한, 5.회의적 의심)이 있으면,나에게는 내적으로 감각적 욕망이 있다라고 분명히 안다. 또는 내적으로 감각적 욕망이 없으면,나에게는 내적으로 감각적 욕망이 없다라고 분명히 안다. 그와 같이 아직 생겨나지 않은 감각적 욕망이 생겼을 때 그것을 분명히 알고, 생겨난 감각적 욕망이 버려지면 그것을 분명히 안다. 그리고 이미 버려진 감각적 욕망이 이후에 일어나지 않으면, 그것 또한 분명히 안다.
비구들이여, 여기에 한 비구가 내적으로 1.깨달음의 요소인 사띠(2.법의 고찰, 3.정진, 4.기쁨, 5.평안, 6.집중, 평온)가 있으면,나에게는 내적으로 깨달음의 요소인 사띠가 있다라고 분명히 안다. 또는 내적으로 깨달음의 요소인 사띠가 없으면,나에게는 내적으로 깨달음의 요소인 사띠가 없다라고 분명히 안다.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깨달음의 요소인 사띠가 생기면 그것을 분명히 알고, 생겨난 깨달음의 요소인 사띠가 발전되고 충만 되었을 때 그것을 분명히 안다.
즉, 정형구를 제외한 상태에서 염처수행을 위한 구체적인 설명으로 외적으로 관찰한다는 설명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므로 염처수행의 외적인 관찰에 대해서는 더욱 많은 연구를 필요로 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분명한 것은 외적인 관찰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소유된 느낌(몸, 마음, 법)의 관찰이라는 주석서적인 해석은 적절하다고 보기 어려우며 내적, 외적 관찰은 모두 수행자 자신에게 나타나는 대상들로 설명되어야 할 것이라는 점이다.
5. 마치는 말
본고에서는 대념처경을 통한 수념처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여러 가지 경우들을 장황하게 설명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간단히 3가지로 요약된다. 첫 번째, 느낌(vedan)은 수행의 대상으로 사용되며 수념처를 통한 느낌의 관찰은 느낌이 더 큰 고통으로 발전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수념처에서 설명하는 느낌들은 육체적인 느낌들과 정신적인 느낌들로 구분, 해석되어야하며 이 느낌들을 주석서적인 설명에 따라 단순히 집착이 있는(또는 세간적인)느낌과 집착이 없는 (또는 출세간적인)느낌으로 해석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이러한 모든 느낌들의 관찰은 네 번째 선정을 얻기 이전에만 관찰 가능하다는 설명을 하였다. 그리고 세 번째, 수념처 역시도 대념처경에서 반복되는 정형구를 통해 내적으로, 외적으로, 내외적으로 느낌에서 느낌을 따라 관찰하게 되는데 여기서 설명하는 외적으로를 주석서의 설명에 따라 타인의 느낌으로 해석하는 것, 또한 적절하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점은 수념처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염처수행에 해당하는 것이기에 염처수행자는 그것이 내적이든 외적이든 수행자 자신에게 나타나는 직접관찰의 대상으로 봐야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논자는 대념처경에서 설명되는 수념처의 두 문단 모두에서 경전자체의 의미와 주석서의 해석사이에 많은 차이가 있음을 지적했다. 만약 이러한 해석의 차이가 개인적 역량에서 오는 학문적 이해의 차이에 국한된다면 크게 염려할 바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의 차이는 불교명상의 수행이라는 실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에 더욱 신중해야 할 것이다. 주석서나 스승의 가르침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라면 쉽게 이해하도록 이끌어 주는 것까지로 그 역할을 다해야 한다. 만약 주석서가 불교수행의 실천을 돕기 위해 새로운 수행방법을 만들어 낸다면 이는 많은 혼동을 부가할 것이다. 추론적 위빠사나라는 새로운 도우미가 나타난 오늘날, 잠시나마 전통적인 해석이나 스승의 가르침을 뒤로하고 초기경전 자체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좀 더 가까워지려는 노력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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