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근본불교) 이야기

불교는 존재론과 인식론

실론섬 2014. 5. 15. 15:33

불교는 인식론도 아니고 존재론도 아니다

 최근 연꽃님의 글에서 묘원 법사의 아래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불교는 존재론이 아니고 인식론이다"라고 단언을 했다. 불교 입장에서 보면 한마디로 외도의 말이며 일고의 가치도 없는 주장이다.


"여기서 조금 짚고 넘어 가야 될 것이 원론적인 이야기이지만, 불교는 존재론을 말하지 않습니다. 불교는 인식론이예요. 존재는 그것 자체가 하나의 실체를 가진 것을 말합니다. 사실 존재는 인식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때의 인식은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며 매 순간 변하기 때문에 실체가 없는 것으로 귀결 됩니다. 그래거 이렇게 알면 무아를 알아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해탈에 이르게 됩니다. 서양철학은 존재론입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이 이야기 우리 많이 들어 보았을 거예요. 그러나 이러한 존재는 지극히 사적인 것이예요. 존재의 실재는 인식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것이 관념(개념)과 실재의 문제이예요. 몸에 대한 이러한 인식이 바로 지수화풍이라는 사대입니다. 몸을 존재로 보면 관념으로 보는 것이라서 몸이 가진 성품을 볼 수가 없어요. 그러나 인식으로 보면 몸이 가진 성품을 보아서 사물을 바르게 통찰할 수가 있습니다."[묘원 법사]


불교의 존재/인식론적 입장은 중도로써 연기법이다

불교는 철학적/심리학적 관점에서 논할 때 존재론적 입장일까 아니면 인식론적 입장일까? 결론은 그 둘다 모두 아니라는 것이다. 불교는 존재를 말할 때 '오온'이라고 하고, 세계를 말할 때 '12처'라고 말한다.  


불교에서 존재란 무엇인가 : 오온

불교에서 세계란 무엇인가 : 12처 


그리고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오온과 12처는 모두다 연기법에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존재론이니 인식론이니 하는 말 즉 그 자체적으로 독립적인 실체를 갖는 그런 의미의 논리 자체가 애초에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불교는 한마디로 존재론도 아니고 인식론도 아니며 오직 연기법에 의한 중도일 뿐이다. 연기법에 의하면오온이나 12처는 어느것 하나 자체적으로 독립적으로 실체를 가지고 성립하지 않는다.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와 대승불교의 공관파와 유가행파 

끊임없이 무엇인가에 집착을 일으키는 우리의 마음은 어떤 존재인가? 붓다는 그것을 연기(緣起)의 원리에 의해 밝히고 있다. 집착 및 갈애에 의해 결과하는 고통이 의존하고 있는 조건들은 십이연기로 대표된다. 십이연기는 무명(無明), 의지적 행위(行), 의식(識), 개인적 존재(名色), 감각장소(六入, 六處), 감각적 접촉(觸), 느낌(受), 갈애(愛), 취착(取), 존재(有), 태어남(生), 노사(老死)를 말한다. 이들 열두 개의 연기는 서로간에 연하여 생기는 것으로서, 각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십이연기는 탐욕(貪), 증오(瞋), 미망(癡)이라는 근본적인 어리석음에 토대를 두고 있다.


갈애를 일으키고 욕심을 내는 이 몸과 마음이라는 것을 서양철학에서 말하는 존재론적 입장에서 파악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인식론적 입장에서 파악한 것도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이 몸과 마음이라는 존재를 연기법에 바탕을 두고 파악했다. 이것은 오온무아(五蘊無我)의 개념에 의해서도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고정적인 자아로 생각하는 것은 실은 오온(五蘊)에 불과하다.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의 모임이 바로 자아인 것이다. 그리고 색·수·상·행·식의 모임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으로서 무상(無常)이다. 그리고 신체와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자아는 고정적인 실체가 아니다. 단지 그때그때 물질적 요소와 심리적 요소가 연기의 관계에 의해 모여 있는 모임일 뿐이다.


부파불교에서는 법(dharma)의 유(有)를 말한다. 여기에서 법은 요소로서의 실재이다. 그러나 현상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으며 무상하다. 따라서 법은 실재이긴 하지만 영원한 실재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요소로서의 법유를 주장하는 설일체유부의 이론 등을 나가르주나(龍樹)는 구별(分別)의 철학이라고 비판하면서, 이것을 자신의 공의 논리를 가지고 논박한다. 그의 공사상은 중도 및 연기 이론과의 관계에서 전개된다. 그의 《중론(Madhyamaka-Sastra)》은 바로 이러한 공사상 이론을 담고 있다. 나가르주나는 그의 저작에서 설일체유부등의 여러 부파등을 원리를 비판한다. 


나가르주나는 연기의 공이 절대적인 공(악취공 惡取空)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철저히 배격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의 이론이 허무주의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었다. 유식(唯識)사상은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고자 했다. 나가르주나의 중관사상과 더불어, 원시불교의 연기론 및 공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부파불교의 아공법유 이론을 논박하는 유식사상은 중관파의 이론을 보완, 극복하는 데로 나아간다.


우리들이 체험하는 지각 현상들은 단지 연기의 관계로만 있을 뿐, 자성을 갖는 독립된 실체가 아니지만(空), 그래도 그와 같이 지각되는 현상들은 분명히 있지 않은가? 그와 같이 ‘있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도대체 어떠한 방식으로 ‘있는’ 것인가? 우리들이 지각하는 현상들은 우리의 마음이 의식, 인식하는 과정으로서만 있을 뿐이다. 있는 것은 오로지 식뿐(唯識)이다. 


우리의 의식, 인식을 말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이란 어떠한 존재인가를 말할 수밖에 없다. 원시불교 이래 우리의 마음은 심(心)·의(意)·식(識)으로 불리어 왔는데, 유식사상에서는 이것을 받아들여 더 심화시킨다. 심은 제8식, 의는 제7식, 식은 6개의 식(안.이.비.설.신.의식) 개념을 8식 개념에 의해 설명하는 과정을 통해서 확립되었다. 또한 식의 상태를 의타기성(依他起性: 의타성),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분별성), 원성실성(圓成實性)등 삼성(三性) 설명했다.


어떤 사람의 인식(의식) 현상은, 언제나 그 사람에게만 일어날 수 있는 동일한 법칙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때 그때의 주위 상황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자기 자신의 마음 상태와의 관계에서, 혹은 어떤 알 수 없는 우연적인 요인과의 관계에서 의식 현상으로 나타난다. 식은 그 자체로 “연기적 존재”이다. 우리 마음 속에서 생겨나는 식의 현상은 이미 무수한 요인들과의 관계에서 일어난다는 의미에서도 연기적 존재이지만, 우리 마음의 여러 차원과의 관계에서 일어난다는 점에서도 연기적 존재이다.  


불교에서는 인식 대상뿐 아니라 우리의 인식 주관도 단지 연기의 존재일 뿐이다(我空). 연기의 존재인 자아의 배후에, 혹은 근저에 실체적 정신, 마음, 영혼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경전의 가르침에서 정확한 지혜를 얻도록 

"세존이시여, 그러면 어떤 것이 존재이며 누구에게 존재가 있습니까(존재의 누구의 것입니까)?"

"비구여, 어떤 것이 존재이며 누구에게 존재가 있습니까?라고 말하거나, 존재가 다르고 존재하는 자는 다르다'라고 말하면 이 둘은 같은 것이며 표현만 다를 뿐이다. 비구여, '생명과 몸은 같다'라는 견해가 있으면 청정범행을 닦지 못한다. '생명과 몸은 다르다'라는 견해가 있으면 청정범행을 닦지 못한다. 비구여, 이러한 양 극단을 의지하지 않고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있다'라고 중도(연기법)에 의해서 여래는 법을 설한다."[S12:35 무명을 조건으로 함 경]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감각장소가, 여섯 감각장소를 조건으로 접촉이,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 우울,슬픔, 고통, 불쾌, 정말이 생겨난다."


불교의 입장은 연기법이다. 존재론이니 인식론이니 하는 양극단을 버린다. 오온이 연기이며 연기가 곧 무상인데 그 어디에 고정되고 확립된 존재(존재론)와 인식을 하는 자(인식론)가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