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구지(離垢地, vimalā-bhūmih)
이구지(離垢地, vimalā-bhūmih)는 보살 수행위의 10지 가운데, 제2위(位)로 수혹(修惑)을끊고 범계(犯戒)의 더러움을 제거하여 몸을 깨끗하게 하는 지위.
◎ 이전의(二轉依)
이전의(二轉依)는 2종의 전의(轉依, āśrayaparivrtti / āśrayaparāvrtti)로 소의(所依)의 변화과정을 의미하며 나아가 깨달음의 최종 목표로서 궁극의 상태를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번뇌 또는 번뇌와 결합된 제법이며, 또는 아뢰야식에서 소의를 찾을 수 있다. 깨달음의 법은 열반 또는 보리를 말한다. 소의(所依)라고 하는 것은 신체·개체·개인존재라는 의미로서 사용되나, 개체의 중심원리인 점에서 아뢰야식과 일치한다.『범망경고적기(梵網經古迹記)』는『성유식론(成唯識論)』권9의 이전의(二轉依)를 대열반(大涅槃)과 대보리(大菩提)로 이해하는 부분을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번뇌라는 장애를 배제하고 열반을 획득하고, 알아야 할 것에 대한 장애를 배제하고 보리를 증득하는 것이다. 또 유식을 성립시키는 것은 수행자가 두 가지 전의(轉依)의 과(果)를 증득하는 것이다. 『성유식론(成唯識論)』권9(大31 p.51a7-9)에 의하면, “번뇌를 전환하여 대보리를 얻고, 소지장을 전환하여 대열반인 무상각(無上覺)을 증득한다. 유식의 뜻이 성립된 것은 유정에게 이와 같은 두 가지 전의(轉依)의 과(果)를 증득토록 하기 때문이다. 由轉煩惱得大涅槃, 轉所知障證無上覺. 成立唯識意爲有情, 證得如斯二轉依果.” 그리고 『성유식론(成唯識論)』 권9(大31 p.51a20-21)에 “무엇이 두 가지의 전의를 증득하는 것인가? 십지(十地) 가운데 열 가지 뛰어난 수행인 십승행(十勝行)을 닦고, 열 가지 무거운 장애인 십중장(十重障)을 끊어 열 가지 진여를 증득한다. 두 가지의 전의에 의거하여 깨달음을 증득한다. 云何證得二種轉依. 謂十地中修十勝行, 斷十重障證十眞如. 二種轉依由斯證得.”라고 했다.
◎ 이숙(異熟. vipāka)
과보(果報)라고도 번역한다. 선 또는 악의 업인에 의해 이와는 성질이 다른 무기(無記,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님)의 결과를 내는 것, 또는 그 결과.
◎ 아나따삔디까(An āthapiṇḍika)
아나따삔디까(Anāthapiṇḍika)는 사왓티(Sāvatti)의 장자(長者, seṭṭi)로 부처님의 대표적인 남자신도였다. 원래 이름은 수닷따(Sudatta)인데 의지할 곳 없는 고독한 사람들(anātha)에게 먹을 것(piṇḍa)을 제공했으므로 아나따삔디까(Anāthapiṇḍika)라 불렸고, 한역으로는 급고독(給孤獨) 장자라고 알려졌다. 하루는 사업차 라자가하(Rājagaha)를 방문하였을 때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셨다는 말을 듣고는 감격하여 날이 채 밝기도 전에 부처님을 찾아뵈러 길을 나섰다. 하지만 길이 칠흑같이 어두웠기 때문에 순간 두려움이 생겼지만 시와까(Sīvaka)라는 야차가 용기를 북돋아 주어 계속 길을 가게 된다. 마침내 한림(寒林, Sītavana)에서 경행을 하고 계시는 부처님을 뵙고는 설법을 듣고 즉시 수다원과를 얻었다. 라자가하에서 돌아온 뒤에 제따 왕자의 소유인 사왓티(Sāvatthi)의 제따숲(祇園林, Jetavana)을 바닥에 황금을 깔아서 사들이고 그곳에 정사를 지어 승가에 헌납하였다. 이러한 아나따삔디까의 신심에 감복한 제따 왕자는 장자에게 받은 돈으로 정사의 대문을 만들었다. 이것이 기원정사(祇園精舍, Jetavana)의 시작이다. 장자는 매일 자신의 집에서 백 여 명의 비구를 초청하여 식사공양을 올렸으며, 언제 누가 오더라도 바로 접대할 수 있도록 오백 명의 자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AA.i.208-9) 장자는 부처님께 귀의한 뒤로 자신의 사업을 돌보지 않고 보시에만 마음을 쓰다 보니 그 많던 재산이 점점 줄어 나중에는 아주 가난해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좁쌀이나 신죽이라도 있는 대로 가져다 승가에 보시했다. 그때 장자가 사는 집의 문에 깃들어 살던 여신이 아나따삔디까에게 이제 그만 보시하고 사업에 힘을 쓰라고 충고했다. 하지만 아나따삔디까는 이러한 충고를 전혀 귀담아 듣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여신에게 자신의 집에서 나가라고 호되게 꾸짖었다. 수다원과를 얻은 성자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어 장자의 집을 나와 정처 없이 떠돌게 된 여신은 제석(Sakka)에게 장자에게 용서를 구할 방법을 물었다. 제석은 여신에게 다시 장자의 재산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면서, 이렇게 하면 장자의 용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여신은 임자가 없이 유실된 보물을 강변에서 찾아내어 장자의 집에 갖다 놓고, 또 오래전 다른 사람이 장자에게 빌린 채무를 장자에게 도로 갚도록 하는 방법으로 장자의 재산을 예전과 같이 회복시켜 주었다.(DhA.iii.10ff; J.i.227ff) 아나따삔디까는 임종이 가까워지자 사리뿟따(Sāriputta) 장로를 집으로 초대하여 법문을 들었다. 장로는 아난다 장로와 함께 그를 찾아가서 여섯 감각장소(六處, āyatana)로부터 시작하여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마음속에 집착을 품지 말라고 충고한다.(M.iii.258) 아나타삔디까는 그 심오한 설법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아나타삔디까는 곧 숨을 거두고 도솔천의 천인으로 다시 태어났다.
◎ 아(我)와 아소(我所)
아(我)와 아소(我所)에 관련해서는 두 가지 설명이 가능하다. 즉 ① 아(我)는 자기 자신, 아소(我所)는 자기의 소유로 보거나 자신에게 속한 것. 변함없는 영원의 주체아(主體我)로서 그 주체에 소속한 것. ② 아견(我見)과 아소견(我所見). 아견이란 자아가 실재(實在)한다고 여기는 그릇된 견해. 아소견이란 자아에 속하는 것이 실재한다고 여기는 그릇된 견해이다. 『유가사지론』 권2(大30 p.284b14), 『섭대승론』 권上(大31 p.133c21) 등에서 기술하고 있다.
◎ 아사리(阿闍梨, ācārya)
아사리(阿闍梨, ācārya)는 아차리야(阿遮梨耶) 또는 사리(闍梨)라고도 하며 번역하면 궤범(軌範)이다. 즉 제자의 행위와 위의를 바르게 지도하고 수계시 작법(作法)을 가르치는 스승이다. 『사분율(四分律)』 상권에서 오종아사리(五種阿闍梨)를 말하고 있는데,
①십계아사리(十戒阿闍梨)로서, 처음 출가할 때 계를 주는 아사리요,
②갈마아사리(羯摩阿闍梨)로서 구족계를 수계해 주는 아사리,
③교수아사리(敎授阿闍梨)로서, 수계할 때에 위의를 가르치고 지시하는 아사리,
④수경아사리(受經阿闍梨)로서, 경전의 뜻과 읽는 법 등을 가르쳐 주는 아사리,
⑤의지아사리(依止阿闍梨)로서, 기거를 함께 하며 지도하고 사사해 주는 아사리(阿闍梨)이다.
◎ 아난다
아난다(Ānanda) 장로는 부처님의 사촌동생이자, 부처님의 시자(侍者)였다. 도솔천에서 내려와 부처님과 같은 날에 태어났다고 하니 부처님과는 동년배이다. 아버지는 숫도다나왕의 형제인 아미토다나(Amitodana)왕이고, 마하나마(Mahānāma)와 아누룻다(Anuruddha)와는 배다른 형제였다. 부처님께서 성도 후 2년 뒤에 까삘라왓투(Kapilavatthu)를 방문하셨을 때, 밧디야(Bhaddiya), 아누룻다(Anuruddha), 바구(Bhagu), 낌빌라(Kimbila), 데와닷타(Devadatta) 등의 다른 석가족 청년들과 함께 부처님께 출가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 뿐나 만따니뿟따(Puṇṇa Mantāniputta) 장로의 법문을 듣고 수다원이 되었다. 부처님께서 성도 후 20년쯤 뒤부터 부처님 시자의 소임을 맡아서 부처님이 입멸하실 때까지 25년을 그림자처럼 한결같이 곁에서 모셨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부처님께서 몸이 편찮게 되면 자신도 그 걱정으로 몸이 아팠으며,(D.ii.99) 부처님의 몸에 일어나는 모든 변화를 감지하였다고 한다.(D.ii.204; D.ii.133) 한때 야심많은 데와닷따가 부처님을 시해하려고 왕실의 코끼리꾼을 꼬드겨 날라기리(Nālāgiri)라는 코끼리에게 술을 먹인 뒤에 부처님을 향해 풀어 놓게 하였다. 코끼리가 부처님께 돌진해 오는 것을 본 아난다는 서슴지 않고 부처님 앞에 섰다. 평소 부처님 말씀을 순종하던 아난다였지만, 그때만큼은 부처님께서 세 번이나 앞에 서있지 말라는 말씀에도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부처님께서는 신통력으로 대지를 뒤로 바꾸어 놓아 아난다가 코끼리에게 밟히지 않도록 하셨다.(J.v.335-6; DhA.i.119; Vin.ii.195). 부처님께서는 아난다가 과거 전생에도 부처님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고자 했었다며, 「쭐라함사 자따까(Cūḷahaṃsa Jātaka)」를 설하셨다. 부처님께서 여행 중이실 때도, 신도들이 부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보리수를 심기도 했으며, 여성의 출가를 그다지 허락하려 하지 않던 부처님을 설득하여 여성도 출가의 길을 걸을 수 있게 한 사람도 아난다였다. 나중에 부처님께서는 여성의 출가를 허락함으로써 1천 년간 지속될 교법(Sāsana)이 5백년간만 지속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여성을 승가에 입문하도록 한일은 나중에 제 1차 결집이 끝날 무렵 아난다가 도반들로부터 비판을 받게 된 이유 중의 하나였다. 앙굿따라 니까야의 주석서에 따르면 아난다는 매우 수려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AA.ii.533) 아난다는 사리뿟따(Sāriputta), 목갈라나(Moggallāna), 아누마하까사빠(Mahā-kassapa), 아누룻다(Anuruddha), 깐까레와따(Kaṅkhā-Revata) 등의 장로와 친한 사이였다.(M.i.212 f) 특히 아난다와 사리뿟따는 둘도 없는 절친한 도반이었다. 사리뿟따는 아난다가 자신이 부처님에게 해야 하는 일을 대신 도맡아 한다고 생각하고 아껴주었고, 아난다는 사리뿟따가 부처님의 상수제자이기 때문에 공경했다. 그리고 자신들 밑에서 출가한 비구들을 서로에게 보내서 배우게 했으며, 좋은 시주물이 들어오면 서로 나누었다. 주석서에 따르면 아난다가 춘다(Cunda)로부터 사리뿟따의 입멸소식을 전해 듣자 ‘고양이의 입에서 벗어난 공작과도 같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고 한다.(SA.i.180) 그리고는 부처님께 사리뿟따의 입멸소식을 전해 듣고 마치 전신이 마비된 듯하고, 감각이 혼미해지고, 마음이 공허해졌다고 슬픈 심정을 고백하였다.(S.v.161; Thag.1034-5) 아난다의 커다란 실수라면 부처님께서 아난다에게 세 번이나 입멸을 넌지시 내비치셨지만, 마라(Māra)에게 마음이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부처님께 입멸을 미루어 달라고 간청 드리지 않았다는 점일 것이다.(D.114-18)
비록 아난다는 부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셨지만 - 아마도 그 이유 때문에 - 부처님께서 반열반에 드시고 나서야 비로소 아라한과를 얻을 수가 있었다. 아난다는 비록 아라한이 아니었지만 유학(有學, sekhā)으로서는 아주 보기 드물게 무애해(無碍解, paṭisambhidā)를 갖추고 있었다.(VibhA.388) 부처님의 입멸 후 부처님의 가르침을 결집하기 위해 마하까사빠 존자와 다른 장로들은 제 1차 결집을 열기로 결정하고, 결집에 참석할 5백 명의 아라한 장로들을 선출하였는데, 그 속에는 아직 아라한과를 얻지 못한 아난다도 끼여 있었다. 그래서 다른 아라한 장로들은 아난다에게 결집이 열리기 전까지 반드시 아라한과를 얻어서 결집에 참여할 완전한 자격을 갖출 것을 요구하였다. 아난다는 결집이 있기 전날 밤까지 밤을 새워가며 정진했으나 여전히 아라한과를 얻을 수가 없었다. 너무 경행을 하여 피곤했으므로 잠시 바닥에 누우려는 순간, 즉 머리가 베게에 막 닿으려는 찰나, 발이 막 지면에서 들어 올려진 순간, 육신통(六神通, abhiññā)을 모두 갖춘 아라한이 되었다. 이렇게 아난다는 행주좌와(行住坐臥)의 네 가지 어느 자세에도 속하지 않는 자세로 아라한이 된 유일무이한 분이라고 한다. 아난다 장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는 뛰어난 능력으로, 세상에서 담마반다가리(Dhammabhaṇḍāgārika)라고 알려졌는데, 「유명대경(有明大經, Mahāvedalla-sutta)」주석서(MA.ii.336)에 따르면 짧은 시간에 수백 개의 게송을 외울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그가 자리에 있지 않아서 듣지 못한 가르침은 개인적으로 부처님께 여쭈어서 부처님이 하신 말씀은 빼놓지 않고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부처님의 입멸 후 제 1차 결집에서 부처님 말씀을 경장으로 확정짓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다. 「테라가따(Theragāthā)」에는 아난다가 지었다고 하는 일련의 게송들이 실려 있다.(Thag.1039) 아난다는 120세까지 장수하였다고 하며,(DhpA.99) 바꿀라 장로와 함께 장수를 누린 비구로 언급되고 있다.(AA.ii.596) 빨리 문헌에는 아난다의 최후에 대한 언급이 없다. 하지만 중국의 구법승 법현(法顯)은 아난다의 최후에 얽힌 전설을 소개하고 있다. 아난다가 입멸에 들기 위해 마가다에서 웨살리로 가자, 아자따삿뚜(Ajātasattu)왕이 이 소식을 듣고 군대를 이끌고 로히니(Rohiṇi)강까지 따라 왔다. 웨살리의 수장(首長)도 이 소식을 듣고 군대를 이끌고 로히니강의 반대편으로 존자를 마중 나왔다. 아난다는 자신으로 인해 양측이 충돌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강 중간의 허공에 올라 불의 까시나(tejo-kasiṇa)에 들어 입멸하였다. 그러자 사리가 둘로 갈라져 양쪽에 떨어졌고, 뒷날 그 자리에 사리탑이 각각 세워졌다고 한다.
◎ 아노마(Anomā)
아노마(Anomā)는 까삘라왓투(Kapilavatthu)에서 동쪽으로 30리그(90마일) 떨어져 있는 강의 이름이다. 하지만 북방불교의 불전인「랄리따위스따라(Lalitavistra)」에 따르면 이 강은 까삘라왓투에서 오직 6유순 정도만 떨어져 있다고 한다. 이 강가에서 보살은 머리카락과 수염을 자르고 범천 가띠까라(Ghaṭikāra)가 건네준 황색가사를 걸치고 사문이 되었다. 이 강은 ‘영광스러운’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자따까」주석서와 다른 문헌에 인용된 전승에 따르면 이 강은 보살의 서원을 성취하는 데 길조로 간주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보살이 마부 찬나(Channa)에게 이 강의 이름을 묻자, 찬나는 “아노마(영광스러운)”라고 답했다. 이를 들은 보살은 “나의 출가도 이 강의 이름처럼 영광스러울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J.i.64)
◎ 아는 마음
'아는 마음'이라고 번역한 윈냐나(viññāṇa)는 한역으로는 식(識), 영어로는 보통 consciousness라고 한다. 이 윈냐냐(viññāṇa)는 눈, 귀, 코, 혀, 몸, 마음의 육내처(六內處)와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 마음대상의 육외처(六外處)가 매순간 순간 맞닿을 때마다 생겼다가는 사라지고 생겼다가는 사라지고 하는 순간적인 현상이다. 즉 대상을 접했을 때 그냥 대상이 있음을 아는 마음(mere awareness)이다. 그래 본서의 영역자도 이를 awareness로 표현하고 있다.
◎ 아뜨만(atman)
아뜨만(atman)은 힌두교와 인도철학에서 말하는 자아(自我), 개아(個我), 진아(眞我)로 만물 속에 내재하는 영묘한 힘을 뜻한다. 인도의 철학자들은 이 말을 둘러싸고 많은 학설을 전개하였다. 우파니샤드나 베단타학파에서는 이것을 보편적 실재라고 생각하여 세계원리인 브라만[梵]과 같은 성질의 것이라고 하였으며, 현실의 나인 아뜨만은 브라만과 하나가 됨[梵我一如]으로써 최고의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상키아 학파에서는 아트만을 순수 정신원리인 푸루샤(purua)로 보고, 물질적 원리인 프라크리띠(prakti)와 대치시킴으로써 세계의 생성을 설명한다. 이들은 이러한 불변하는 아뜨만이 매생을 재육화 한다고 하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는 윤회의 주체가 없는 연기적 흐름을 가리키는 것이다. 즉, 힌두교의 윤회는 이 아뜨만의 전변이지만 불교의 윤회는 갈애를 근본원인으로 한 다시 태어남이다.
◎ 아라한(Arahan)
아라한(Arahan)은 동사 arahati(가치가 있다, 받을 만하다)의 ppr(현재분사)이다. 그래서 문자적으로 ‘대접과 존경을 받을 만한 분’이란 뜻이다. 중국에서 응공(應供)이라고 의역하거나, 아라한(阿羅漢)이라고 음역했다. PED에서 ‘Before Buddhism used as honorific title of high officials like the English “His Worship”; at the rise of Buddhism applied popularly to all ascetics. Adopted by the Buddhists as technical term for one who has attained the Summum Bonum of religious aspiration (Nibbāna).'라고 설명되듯이, 이 아라한이라는 술어는 원래 불교가 일어나기 전 부터 영어의 “His Worship”과 같이 고관(高官)에게 붙는 존칭어처럼 사용되었고, 나중에 불교가 일어날 즈음에 출가한 모든 사문들을 지칭하는 데 널리 사용되었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종교적인 이상의 최고선인 열반을 성취한 사람에게 붙는 전문술어로 정착되었다. 이 아라한은 모든 번뇌(kilesa)를 완전히 멸한 사람을 말하며, 제자(sāvaka)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깨달음이다. 부처님도 모든 번뇌를 멸했다는 점에서 아라한이고 이 점에서는 제자와 같다. 그러나 부처님의 깨달음의 지혜는 정등각의 지혜(sammā-sambodhi-ñāṇa)로 제자의 지혜보다 훨씬 월등하기 때문에 부처라고 불릴 뿐이다. 이 아라한은 중생을 삼계(三界)에 묶어놓는 열 가지 족쇄(結, saṃyojana)를 완전히 잘라버려 더 이상 어떤 존재로도 윤회하지 않는다. 즉 아라한은 존재를 욕계에 묶어두는 번뇌인 다섯 가지 거친 족쇄(五下分結, orambhāgiya-saṃyojana) 뿐만이 아니라, 다섯 가지 더 미세한 족쇄(五上分結, uddhambhagiya-saṃyojana), 즉 ➅ 색계에 대한 집착(rūpa-rāga), ➆ 무색계에 대한 집착(arūpa-rāga), ➇ 자만(māna), ➈ 들뜸(uddhacca), ➉ 무명(avijjā)까지도 완전히 잘라낸 분이다. 그리고 나머지 불선한 마음들, 즉 사견과 함께 하지 않은 탐욕에 뿌리를 둔 마음 네 가지와 들뜸과 함께 한 어리석음에 뿌리를 둔 마음까지 완전히 제거한 분이다. 이러한 아라한은 금생의 정신과 물질(名色, nāma-rūpa)의 무더기인 오온(五蘊)이 다하면 반열반(般涅槃, parinibbāna)에 들어 영원한 평화를 누리게 된다. 아라한은 나이나 성이나 신분이나 승속(僧俗)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경에는 7살의 나이 어린 사미가 아라한을 얻은 예가 있고, 주석서에는 셀라(Selā)와 산끼짜(Sankicca)라는 이름의 나이 어린 아라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ThaA.64; PvA.53) 또한 여성 아라한도 경에 많이 등장한다. 그리고 대략 400분의 남성 아라한들이 경에 등장하는데 그들 대부분이 비구이다. 하지만 앙굿따라 니까야(A.iii.451)에는 재가 아라한의 이름들이 열거되고 있고, 야사(Yasa) 존자, 케마(Khemā) 비구니, 산따띠(Santati) 장관, 숫도다나(Suddodana)왕과 같이 재가자인 채로 아라한이 된 사람들도 드물지만 있었다. 「밀린다빤하」(Mil.264~266)에서는 아라한과를 얻은 재가자는 그날에 바로 출가하여 비구나 비구니가 되거나 반열반에 드는 길밖에는 없다고 서술하고 있다.
◎ 아라한의 임종
아라한의 경우는 마지막의 임종 시에 과거에 지은 모든 업이 효력이 없어진다. 만일 아라한이 임종했는데도 모든 업이 효력을 상실한 업이 되지 않으면 아라한도 또 태어나는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업에 관한 한 아라한은 금생이 마지막 몸이 된다. 또한 아라한은 죽고 나면 어떻게 되는가는 세간의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기(無記, avyākata)이다.
◎ 아랸야(阿練若, aranya)
아랸야(阿練若, aranya)란 산림 혹은 황야라고 번역하고, 비구가 거주하며 수행하는데 적당한 곳으로 마을에서 떨어진 조용한 장소를 말한다. 한역에서는 원리처(遠離處)·적정처(寂靜處)·공한처(空閑處)·의요처(意樂處)·무쟁처(無諍處)라고 한다. 거기에 살아야 할 곳 혹은 사는 이를 아란야가(阿蘭若迦)라고 한다. 아란야에는 3종이 있어서 삼처아란야라고 한다. ① 달마아란야(dharmaaran
ya)는 깨달음을 구하기 위한 도량. ② 마등가아란야(matanga-aranya)는 총간처(塚間處)로 흙을 조그맣게 쌓아올린 묘 ③ 단타가아란야(dandaka-aranya)는 사적처(沙?處) 곧 인적이 없는 사원(沙源)을 말한다.
◎ 아비담마 칠론
상좌부 아비담마 칠론(七論)은 부처님이 입멸하신 뒤 부처님의 가르침을 법수(法數)별로 체계화하려는 제자들이 벌인 노력의 산물이다. 이미 부처님 재세시부터 이러한 노력의 흔적은 디가 니까야의 「합송경(合誦經, Saṅgīti-sutta)」(D33)과 「십상경(十上經, Dasuttara-sutta)」(D34)에서 보이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법수나 주제별로 분류되어 논모(論母, mātikā)로 전승되어 오다가 여기에 설명을 붙이면서 아비담마 체계로 발전되어 온 것이다. 즉, 아비담마 칠론은 이 논모에 대한 정의와 상세한 주석과 분석을 시도하면서 BC.250년 경부터 BC.50년 경 사이에 순차적으로 성립하였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해서 제 3차 결집을 기점으로 다음과 같은 상좌부 아비담마 칠론이 완성되어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1) 담마상가니(Dhamma-saṅgaṇi)‘법의 모음’이라는 글자 그대로의 뜻처럼, 아비담마의 모든 주제를 다 열거하고 있는 논서이다. 논장의 제 7권인 「빳타나」와 함께 전 아비담마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아주 중요한 논서이다. 「담마상가니」의 중요성은 특히 논장의 전체 골격을 드러내어 주는 논모(論母, mātikā)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담마상가니의 논모는 선(善, kusala), 불선(不善, akusala), 무기(無記, avyākata)로 시작하는 삼개 조(tika)로 된 22개의 목록과 두 개 조(duka)로 된 100개의 목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들은 부처님 가르침의 전체 법수를 일관성 있게 개괄한 것이다. 이렇게 전체 논모를 열거하고 나서 「담마상가니」는 선법과 불선법과 무기법의 순서로 욕계에서부터 시작해서 열거하고 있다. 「담마상가니」는 비록 논장 최초의 책이지만 꼭 제일 먼저 결집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이다. 오히려 논장에 관계된 다른 중요한 가르침을 결집하면서 이들을 요약하고 총괄하는 형식으로 제일 처음에 둔 책이라고 본다. 한역으로는 법집론(法集論)이라 한다. (2) 위방가(Vibhanga)부처님의 주요 가르침을 온(蘊), 처(處), 계(界), 근(根), 연기(緣起), 염처(念處)의 18가지 장으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다. 이런 경향은 이미 맛지마 니까야 등의 경장에서도 다수 등장하고 있는데 부처님 당시부터의 법을 분류하고 분석하여 이해하는 것이 불교인들의 가장 큰 관심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런 노력이 자연스럽게 위방가로 결집된 것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위방가」의 원형은 칠론 중에서 제일 먼저 결집되었다고 간주하며 3차 결집이나 그 이전에 결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역으로는 분별론(分別論)이라 한다. (3) 다뚜카타(Dhātu-kathā)‘요소(dhātu)들에 관한 가르침(kathā)’이란 뜻으로, 여러 가지 법들이 온(蘊), 처(處), 계(界)의 세 가지 범주에 포함되는가의 여부, 또한 관련이 있는가의 여부를 교리문답 형식으로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한역으로는 계론(界論)이라 한다. (4) 뿍갈라빤냐띠(Puggala-paññatti)아비담마 칠론 중에서 분량이 제일 적은 논서로, 여러 형태의 인간에 대해서 일부터 열까지의 법수로서 논의하고 있다. 여러 유형의 인간이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법수에 따라서 모아져 있다. 한역으로는 인시설론(人施設論)이라 한다. (5) 까따왓투(Kathā-vatthu)논장 칠론 중에서 부처님이 설하지 않으신 것으로 전승되어온 책이다. 이 논서는 제 3차 결집을 주도한 목갈리뿟따띠싸 장로가 다른 부파의 견해를 논파하고 상좌부의 견해를 천명하기 위해서 쓰인 책으로 부파불교를 연구하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귀중한 자료이다. 한역으로는 논사(論事)라 한다. (6) 야마까(Yamaka)아비담마의 전문술어에 대한 애매하고 잘못된 사용을 해결하기 위해서 결집된 논서이며, 문제 제기를 항상 쌍(yamaka)으로 하기 때문에 「야마까」라 이름지었다. 논장 가운데 「빳타나」다음으로 방대하다. 한역으로는 쌍론(雙論)이라 한다. (7) 빳타나(Paṭṭhāna)인습적으로 ‘자아’니 ‘나’라고 하는 정신과 물질의 복합체인 존재의 인과법과 연기를 다루고 있는 논서로, 아비담마에서 가장 방대하고 중요한 논서이다. 특히 미얀마 아비담마 전통에서 가장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다. 담마상가니에 나타나는 삼개 조(tika)로 된 22개의 목록과 두개 조(duka)로 된 100개의 논모 전체에 대해서 24가지 조건(paccaya)을 적용시키고 있는 매우 난해한 책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미얀마에서는 중요한 날에 이 「뺏타나」를 암송하고 있다. 하루 24시간 쉬지 않고 연속적으로 여러 스님 들이 번갈아가면서 총 80시간 이상을 독송해야 전체를 다 읽어낼 수 있다. 한역으로는 발취론(發趣論)이라 한다.
◎ 아비담마(abhidhamma)
각묵스님의 아비담마 길라잡이의 서문에 보면 4. 아비담마 문헌의 전개와 발전이라는 제목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 아비담마는 어떻게 발전되어왔는가를 간략히 살펴보자.
부처님의 생애를 보면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머물기 시작하시면서부터 후반 20여 년간은 법의 체계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셨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중요한 근본 가르침은 문답식으로 이미 정착화 되었다. 이런 노력의 흔적은 특히 『상응부(상유따 니까야, Sam*yutta Nikaaya)』에서 볼 수 있다. 『상응부(상윳따 니까야)』나 『중부(맛지마 니까야, Majjhima Nikaaya)』 경들의 절반 정도가 기원정사에서 설해졌다는 것은 이런 측면과 무관하지 않다. 한편 율도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하나하나 제정하여 점점 체계화되어왔으며 부처님 재세시부터 이미 「빠띠목카 숫따(Paatimokkha Sutta)」로 정착이 되어서 학습계(sekhiya)를 제외한 150여 조목은 비구들이 우뽀사타(포살)일에 함께 합송하여왔음이 분명하다. 한편 『숫따니빠따』의 4장과 5장에 해당하는 앗타까왁가와 빠라야나왁가 특히 앗타까왁가는 부처님 재세시에도 아주 일찍부터 비구들 사이에서는 널리 암송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런 과정을 거쳐 일차 결집에서 법(Dhamma)과 율(Vinaya)이란 타이틀로 합송되어서 전승된 것이다.
특히 부처님께서 강조해서 사용하신 무더기[蘊, khandha], 장소[處, aayatana], 요소[界, dhaatu], 진리[諦, sacca] 등의 술어는 이미 『중부』의 여러 경들에서 체계화되어서 거론되고 있을 정도로 부처님 후반부와 불멸 직후에는 이런 중요한 용어와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이해하려는 노력이 특히 중요시되었으며 『장부(디가 니까야, Diigha Nikaaya)』의 33번 경과 34번 경인 「상기띠 숫따(San#giiti Sutta)」와 「다숫따라 숫따(Dasuttara Sutta)」에서는 많은 법수(法數)들이 체계화되어서 나타난다. 이런 전통은 자연스럽게 남방 칠론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형태를 간직한다고 여겨지는 『위방가(Vibhan#ga, 分別論)』로 연결되었을 것이다.
이런 노력을 경장과 율장에서는 아비담마와 아비위나야(abhivinaya)로 부르고 있다. 먼저 『중부』에는 “두 비구가 법에 대하여(abhidhamme) 다른 교설을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로 나타나며 이럴 경우에 뜻(attha)과 문장(byanjana)으로 두 사람의 견해를 화합시켜야 한다고 세존께서는 말씀하고 계신다.
그리고 「굴릿사니 경(Gulissaani Sutta, M69)」에서 사리뿟따 존자는 숲 속 거주를 하는 비구는 abhidhamma와 abhivinaya에 몰입해야 한다고 대중들을 경책하고 있다. 그 외 율장과 『증지부(앙굿따라 니까야, An#guttara Nikaaya)』에서도 아비담마와 아비위나야라는 단어는 등장하고 있다. 이렇게 법과 율을 배우고 공부하고 지니는 것을 아비담마와 아비위나야로 부르고 있으며 이런 경향이 불멸후에는 자연스럽게 아비담마라는 문헌군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아비위나야 문헌은 발전이 되지 못했는데 그것은 율장 자체에서 이미 율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K.R. Norman, 97.)
특히 이런 경향은 論母로 옮기고 있는 마띠까(Maatikaa)로 자연스럽게 발전되었다고 본다. 마띠까는 문자적으로는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matrix(자궁, 모체)란 말과 같은 어원인데 어머니를 뜻하는 ‘maataa(Sk. maat/)’에서 파생된 말로 문자적인 뜻 그대로 ‘어머니에 속하는’의 의미이다. 이것은 부처님 말씀이나 계율의 조목을 요약한 것이다. 이 마띠까는 사실 율장에서 제일 먼저 나타나기 시작했다.(Hinuver, 65.)
초기에 율장에서는 빠띠목카(戒目)를 마띠까로 불렀다. 뒤에는 부처님 말씀도 법수(法數)나 주제별로 분류해서 마띠까로 전승되어 오다가 여기에 설명을 붙이면서 아비담마 체계로 발전되어 온 것이다. 그래서 3차 결집 때부터 이런 마띠까에 대한 정의와 상세한 주석과 분석을 시도하면서 자연스럽게 논장으로 정착되기 시작했다고 보여진다. 이렇게 해서 지금과 같은 남방칠론이 정착된 것이다. 지금의 남방 아비담마 七論이 최초로 완성된 형태로 언급되는 곳은 남방 소전의 『밀린다빤하(밀린다왕문경)』의 서문 부분이다.(Ibid. 64.)
논장에 포함되어야 할 『빠띠삼비다막가(無碍解道)』가 경장의 『소부(小部, Khuddaka Nikaaya)』에 포함된 것은 『빠띠삼비다막가』가 결집되었을 때에는 이미 논장이 닫혀 칠론으로 고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항상 열려 있는 『소부』의 바구니(pit*aka)에 넣은 것이다.(Ibid. 60.) 그리고 경장에 포함되어야 적당할 『뿍갈라빤냣띠(Puggalapan$n$atti, 人施設論)』가 결집되었을 때에는 경장에서는 4부 니까야가 완성되어 있었고 『소부(Khuddaka Nikaaya)』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논장에 포함되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점이다. 일부 학자들의 견해대로 『빠띠삼비다막가』가 늦어도 2세기 경에는 결집된 것이라면(Ibid.) 지금 형태의 논장은 늦게 잡아도 2세기 전에는 완전히 고착이 된 것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 아비담마따 상가하(Abhidhammattha-sa ṅgaha)
「아비담마따 상가하(Abhidhammattha-saṅgaha)」는 대략 10~11세기쯤에 아누룻다(Anuruddha) 스님에 의해서 쓰여진 아비담마 입문서이다. 영국 PTS에서 1910년 미얀마 학자 쉐 잔 아웅(Shew Zan Aung)이 자세한 주를 달아서 번역한 것을 리즈 데이비스 여사(C.A.F Rhys Davids)가 서문을 달고 교정을 하여 「Compendium of Philosophy」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그리고 스리랑카의 BPS에서도 1956년 스리랑카 나라다 스님(Narada Mahāthera)의 영문번역본 「A Manual of Abhidhamma」를 출판하였다. 그리고 다시 1993년 다시 BPS에서 보디 스님(Bhikku Bodhi)이 「A Comprehensive Manual of Abhidhamma」를 내놓았고 이는 현재 아비담마에 관한 최고의 지침서로 자리매김 되고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2002년 이 아비담마따 상가하를 「아비담마 길라잡이」란 이름으로 초기불전연구원에서 상·하 두 권으로 편역해서 출판하였다.
⊙ 아비위나야(Abhivinaya)
주석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여기서 ‘아비담마(abhidhamma)와 아비위나야(abhivinaya)에 대해서’란 담마(法)와 아비담마(對法)와 위나야(律)와 아비위나야(對律)의 네 가지라고 알아야 한다. 이 가운데서 담마(法)는 경장이요 아비담마(對法)는 칠론(七論)이요 위나야(律)는 [비구계와 비구니계의] 두 가지 분별이고 아비위나야(對律)는 칸다까(Khandhaka, 犍度)와 빠리와라(附錄, 補遺)이다. 혹은 경장과 논장이 담마(법)이고 도(道)와 과(果)는 아비담마(대법)이며, 모든 율장은 위나야(율)이고 오염원을 가라앉게 하는 것이 아비위나야(대율)이다. 이처럼 담마와 아비담마와 위나야와 아비위나야가 모두 여기에 해당된다.”(DA.īi.1047)
아비담마는 법에 대한 것[對法]이란 뜻이고 아비위나야는 율에 대한 것[對律]이란 뜻이다. 주석서의 설명처럼 일반적으로 담마(법)는 경장을, 아비담마(대법)는 논장을, 위나야(율)는 율장의 경분별(비구계목과 비구니계목)을, 아비위나야(대율)는 율장의 대품과 소품과 부록을 말한다. 아비위나야는 따로 독립된 장으로 결집하지 않고 율장에 포함시켰다.
◎ 아빈냐(abhiññ ā)
‘높은 지혜’로 옮긴 아빈냐(abhiññā)는 abhi(넘어서, 대해서)+√jñā(알다)에서 파생된 여성명사이다. ‘넘어서 안다’는 문자적인 뜻에서 보통의 여섯 감각기능으로는 알수 없는 것을 뛰어넘어 안다는 의미로 쓰였다. 중국에서는 범속한 앎을 넘어선 지혜란 뜻의 초범지(超凡智)라고도 번역했다. 보통 경에서는 높은 지혜로, 「청정도론」과 아비담마에서는 초월지(超越智)나 신통지(神通智)의 의미로 쓰인다. 그리고 신통지(神通智)의 의미로 쓰일 때는 오신통(五神通)을 지칭한다.
◎ 아소까(Asoka)왕
아소까(Asoka)왕은 인도 최초의 통일왕조인 마우리야 왕조의 제 3대 왕(B.C 268-232년경 재위)이다. 한역으로 아육왕(阿育王)이라고 하는데, a(부정접두어)+soka(근심, 슬픔)로 분해되듯이 ‘근심이 없는’이란 뜻이다.
전설에 의하면 아소까왕은 젊었을 때에는 매우 난폭하여 많은 사람을 죽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 불교에 귀의하여 선정을 베풀었으므로 ‘상서로운 아소까 법왕’이란 뜻의 ‘스리 담마 아소까(Sri Dhamma Asoka)’라고 불렸다. 그러나 처음 2년 반 정도는 열성적이지 않았고 즉위 8년이 지났을 때 지금의 인도 오리사주에 있던 칼링가국을 무력으로 정벌했다. 그 때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포로로 이송되어 부모를 잃거나 자식과 헤어지고 부부가 이별하는 등의 비참한 상태를 보고 전쟁의 죄악을 통감했다. 그리하여 폭력에 의한 승리는 진정한 승리가 아니며 ‘법에 의한 승리(dhamma-vijaya)'야말로 진정한 승리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로부터 법의 순행(巡行)을 시작하여 수많은 불적을 순례하였다. 왕이 열심히 수행을 하고 법의 수립과 증장을 위해 노력하고 백성들에게 천궁(天宮)의 광경 등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천계와 교섭이 없었던 세상 사람들도 천계와 교섭을 갖게끔 되었다고 한다. 왕은 또한 왕이 깨달은 법을 선포하고 후세에 남기기 위해 돌비석에 새기도록 했는데 이것이 암벽을 깎아 법칙을 새긴 ‘마애법칙(磨崖法則)’과 거대한 사암의 기둥을 깎아 거기에 법칙을 새긴 ‘석주법칙(石柱法則)’이다. 석주법칙에는 석주의 주두(柱頭)에 동물의 조각이 얹혀 있는데, 특히 사르나트의 석주에는 주두에 거대한 네 마리의 사자상이 조각되어 있으며 그 바로 밑에 법륜이 새겨져 있다. 매우 아름답고 훌륭한 조각으로 독립인도의 문장(紋章)이 되었다. 아소까왕이 모든 인간이 지켜야 할 법으로 생각한 것은 인간의 본질은 평등하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입각하여 생명을 사랑하고 진실을 말하며 관용과 인내를 발휘하고 가난한 사람을 돕는 등의 윤리적인 성실성과 자비의 이념이었다. 아소까왕은 이를 모든 사람이 지켜야 할 불변의 진리라고 굳게 믿고, 이를 자손만대에까지 전하고자 하여 법칙으로 새긴 것이다. 아소까왕은 이렇게 불법에 기초한 통치이념을 인도전역에 전파하였을 뿐만 아니라 스리랑카, 시리아, 이집트, 마케도니아 등의 주변 국가들에까지도 정법을 포교할 전법사를 파견하였다. 이로써 불교가 인도를 벗어나 세계종교로 발돋움하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아소까왕은 불교에 귀의했지만 다른 종교도 평등하게 취급했다. 또한 부처님의 사리를 공양하고 8만 4천의 불탑을 세우고 많은 사람들을 이익되게 했다고 한다. 게다가 룸비니, 사르나트, 부다가야, 쿠시나가라를 비롯한 많은 불적을 순례하고 그곳에 탑을 세웠으며 산치에 사리뿟따와 목갈라나의 탑도 세웠다. 왕은 승가가 법의 실천자임을 깊이 인식하고 승가를 아낌없이 원조했다. 그러나 승가에 막대한 보시를 하다 보니 국가경제가 압박을 받게 되었고 만년에는 태자나 대신들로부터 배신당하고 승가에 보시하는 것을 제지당하여 결국에는 아말라까 열매의 절반밖에 안 남았다고 한다.
◎ 아우소[벗, āvuso]
‘벗’이라고 번역한 아우소(āvuso)는 동등한 위치에서 존경하여 부르는 말이지만 제자가 부처님을 이렇게 부르는 법은 없다. 대신에 제자는 부처님을 존자란 뜻의 반떼(bhante)라고 불렀다. 그러나 부처님이 반열반(般涅槃)에 들기에 즈음해서는 젊은 비구는 장로비구에게 반떼(bhante)나 아유스마(āyasmā)라고 부르고 장로비구는 젊은 비구들에게 아우소(āvuso)라고 부를 것을 지시하셨다.
◎ 아웨짜빠사다(avecca-ppasādā)
흔들리지 않는 믿음 ‘흔들리지 않는 깨끗한 믿음’이라고 번역한 아웨짜빠사다(avecca-ppasādā)는 avecca(不壞, 절대적인, 무너지지 않는)+pasādā(淨信, 깨끗한 믿음)의 합성어이다. 부처님, 법, 승가, 계율에 대한 네 가지 확고부동한 믿음을 뜻하며, 중국에서는 불괴정(不壞淨), 증정(證淨), 증상심(增上心)이라고 번역하였다. 이는 성자의 반열에 든 수다원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러면 여기서 불교의 믿음과 관계된 빨리어 술어들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1) 빠사다(pasādā): ‘깨끗한 믿음’으로 번역되는 빠사다는 마음이 가라앉은 상태, 즉 ‘고요함, 편안함’을 나타낸다. 아울러 그런 고요함처럼 깨끗한 믿음을 뜻한다. 오까빠나(okappana)와 동의어이다. (2) 삿다(saddhā): ‘믿음’으로 번역되는 삿다는(saddha)는 전통적으로 srad(가슴)+√dha(놓다)로 분석한다. 그래서 ‘마음을 어떤 대상에 놓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믿음은 부처님의 깨달음을 믿고 삼보에 귀의할 때 생긴다. 하지만 이 믿음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조사와 탐구를 통한 합리적인 이해에 기반을 둔 확신을 뜻한다. 그래서 영어권에서도 faith, belief보다는 confidence로 많이 번역한다. 전통적으로 이 삿다는 모든 선법(kusala-dhamma)의 씨앗이라 불린다.(Sn.77) 주석서의 설명에 따르면 그 이유는 깨끗한 믿음(okappana/pasāda)과 신해(adhimokkha)가 마음에 일어나도록 고무하여 윤회의 폭류를 건너기 위한 여정(pakkhadhana)을 떠나도록 하기 때문이다. 또한 믿음은 다섯 가지 기능(五根, pañca-indriya)과 다섯 가지 힘(五力, pañca-bala) 중의 하나이다. (3) 아디목카(adhimokkha): ‘확신, 결단, 결심’으로 번역되는 아디목카는 adhi(향하여)+√muc(벗어나다. 해탈하다)에서 파생된 명사로 ‘해탈을 향한다는 것’이 그 기본의미이다. 즉 불·법·승 삼보에 확신을 가지는 것은 곧 해탈로 향하는 기초가 완전히 다져졌다는 의미라 할 수 있다. 이 용어는 경에서보다는 논서에서 많이 나타나는데, 믿음의 요소로 나타날 때는 삿다(saddhā)와 빠사다(pasādā)에 바탕한 확신이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중국에서는 신혜(信解)라고 옮겼다. 이처럼 불교에서 말하는 신앙은 합리적인 이해와 통찰에 기반을 둔 것으로 ‘와서 보라(ehipassika)’는 것이지 ‘와서 믿으라’는 것이 아니다. 무조건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고 와서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다. 빨리 경 도처에서는 깨달음을 일컬어 ‘티 없고 때 묻지 않은 법의 눈(法眼, dhamma-cakkhu)이 생겼다.(S.V.423)'라고 묘사하고 있고, 지혜인 냐나(ñāṇa)와 봄(dassana)의 합성명사인 냐나-닷싸나(智見, ñāṇa-dassana)라는 용어가 중요한 술어로서 많이 나타난다. 그만큼 불교에서는 맹목적 믿음보다는 보고 아는 것을 중요시하고 이것을 신행(信行)의 출발로 삼고 있다.
◎ 아자따삿뚜(Ajātasattu)
아자따삿뚜(Ajātasattu)는 빔비사라(Bimbisāra)왕의 아들이었으며 아바야(Abhaya) 왕자와는 이복형제 사이다. a(부정접두사)+jāta(태어난)+sattu(적)로 분해되듯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적’이란 뜻이다. 디가 니까야 주석서(DA.i.135~7)에는 그가 데와닷따와 역모를 꾸며서 그는 부친을 시해하고 데와닷따는 부처님을 시해하여 했던 사실이 상세하게 나타난다. 그는 아버지를 시해하고 왕이 되었기 때문에 그도 아들 우다이밧다
(Udāyibhadda)에 의해서 시해당할까봐 항상 두려워했다고 하며 그래서 아들이 출가하기를 원했다고 한다. (DA.i.153) 그러나 결국은 그의 아버지 빔비사라왕이 처참하게 죽던 날에 태어난 아들 우다이밧다에 의해 시해당하고 말았다고 한다.(Mhv.iv.1.26). 주석서에 따르면 부친을 시해하고 잠을 제대로 못 이루던 왕은 지와까(Jīvaka)를 통해서 부처님을 찾아뵙고 법문을 들어 잘못을 참회한 뒤에야 비로소 잠을 이룰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32년간 왕위에 있었다고 하며 왕으로 있을 때 왓지(Vajjī)를 정복하고 꼬살라를 병합했다. 그는 빠딸리뿟따를 큰 도시로 만들게 하였으며 나중에 이곳은 마가다국의 수도가 되었다. 디가 니까야 주석서(DA.i.237-8)에 따르면 아자따삿뚜는 죽어서 로하꿈비야 지옥(Lohakumbhiya niraya)에 태어나 6만년동안 고통을 당한 뒤에 인간계로 다시 와서 위지따위(Vijitāvī), 또는 위디따위세사(Vidita-visesa)라는 이름의 벽지불이 되어 열반을 증득할 것이라고 한다. 주석서들에 따르면 아지따삿뚜가 아버지를 죽인 죄업은 종종 선업의 과보를 상회하는 파괴업(upaghātaka-kamma)의 보기로 언급되고 있으며(AA.i.369), 어머니를 못살게 군 밋따윈다까(Mittavindaka), 부처님 몸에 피를 내고 승가를 분열시킨 데와닷따(Devadatta), 부처님의 제자들을 성가시게 한 꼬깔리까(Kokālika)와 함께 네 가지 삿된 짓거리를 행한 사람들의 보기로 들고 있다.(AA.iii.4)
◎ 아트만
힌두교와 인도철학에서 말하는 자아(自我), 개아(個我), 진아(眞我)로 번역되는 산스끄리뜨어 아트만(ātman)은 빨리어로는 아따(atta)라고 하는데, 만물 속에 내재하는 영묘한 힘을 뜻한다. 인도의 철학자들은 이 말을 둘러싸고 많은 학설을 전개하였다. 우파니샤드나 베단타학파에서는 이것을 보편적 실재라고 생각하여 세계원리인 브라만(brahman)과 같은 성질의 것이라고 하였으며, 자아인 아트만은 브라만과 하나가 됨으로써 최고의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이 소위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이다. 상키아 학파에서는 아트만을 순수 정신원리인 푸루샤(pursua)로 보고, 물질적 원리인 프라크리띠(prakti)와 대치함으로써 세계의 생성을 설명한다. 이들은 불변하는 아트만이 태어날 때마다 재육화(再肉化) 한다고 하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는 윤회의 주체가 없는 연기적 흐름을 가리키는 것이다. 즉, 힌두교의 윤회는 이 아트만의 전변(轉變)이지만 불교의 윤회는 갈애(taṇhā)를 근본원인으로 한 ‘다시 태어남’, 즉 ‘재생(再生)’이다. 히라카와 아키라 교수는 불교가 인도에서 사라진 주요한 이유는 불교가 아트만(atman)을 부정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Akira Hirakawa, A History of Indian Buddhism, Delhi, Motilal Banarsidass, 1993, p.6-7) 불교의 무아설(無我說)은 인도의 전통적인 아트만의 종교와 대립하는 것이다. 아트만의 존재는 윤회사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윤회사상은 인도인의 피와 살이 되고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이 때문에 인도에서는 불교 역시 윤회 사상을 받아들이고,윤회사상에 기초하여 교리를 발전시킨 것이다. 그러나 윤회사상을 인정한다면 윤회의 주체가 필요하게 된다. 이 때문에 후대로 내려오면서 불교에서는 무아를 설하면서도 윤회의 주체를 아트만과는 다른 형태로 인정하게 되었다. 유식사상의 아뢰야식(ālaya-vijñāna)이나 여래장사상의 여래장(如來藏tathāgatagarbha)은 아트만과 매우 유사한 개념이다. 그리하여 부파불교에서도 기계적인 무아를 주장하는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는 차츰 세력을 잃고, 일종의 아트만이라고 할 수 있는 ‘보특가라(補特伽羅,pudgala)’를 설하는 정량부(正量部)의 세력이 후대에는 대단히 강해졌다. 불교가 흥기하던 초창기에는 무아라든가 공사상이 강력하게 주장되었지만,시대가 변함에 따라 교리가 변용되면서 불교는 차츰 아트만사상에 동화되었고 이로서 인도에서 그 세력을 상실하게 되었던 것이다.
◎ 아홉 가지 갈애의 뿌리(nava tanhamulaka)
'아홉 가지 갈애의 뿌리(nava tanhamulaka)' 이란, ①갈애(tanha) ②갈애를 인연으로 한 구함(tanham paticca pariyesana) ③구함을 인연으로 한 얻음(pariyesanam paticca labha) ④얻음을 인연으로 한 분별(labham paticca vinicchaya) ⑤분별을 인연으로 한 욕심과 탐냄(vinicchayam paticca chandaraga) ⑥욕심과 탐냄을 인연으로 한 집착(chandaragam paticca ajjhosana) ⑦집착을 인연으로 한 간직(ajjhosanam) ⑧간직을 인연으로 한 인색(pariggaham paticca macchariya) ⑨인색을 인연으로 한 지킴(macchariyam paticca arakkha) 등을 말한다. 이들 아홉의 갈애의 뿌리에 수반되어 갖가지 인간사의 다툼과 죄와 허망한 말들이 생겨난다고 한다. PsA. p.118 참조.
◎ 아홉 가지 순서에 따른 머무름(nava anupubbavihara. 구차제주. 九次第住)
'아홉가지 순서에 따른 머무름(nava anupubbavihara)' 이란 물질적 현상의 계에 속한 네 가지 선정(색계사선. 色界四禪)에, 공간에 걸림이 없는 선정(공무변처정. 空無邊處定). 의식에 걸림이 없는 선정(식무변처정. 識無邊處定). 아무것도 없는 선정(무소유처정. 無所有處定).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선정(비상비비상처정. 非想非非想處定), 지각과 느낌이 소멸한 선정(멸진정. 滅盡定)을 합한 것을 말한다. DN. vol.3. p.265/AN, vol4. p.410/SN. vol.2. p.222등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나온다.
"비구들이여, 아홉 가지 순서에 따른 머무름이 있느니라. 아홉이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여기에 한 비구가 있어,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는 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를 지닌 분리(떠남. 멀어짐)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첫 번째 선정을 얻어 머문다.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부터 고요해져, 마음이 한곳에 고정된,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을 수반하는 두 번째 선정을 얻어 머문다.
기쁨으로부터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지킴(염.念)과 알아차림(정지.正知)를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지킴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고 하는 세 번째 선정을 얻어 머문다.
즐거움을 끊고, 괴로움을 끊어, 이전의 기쁨과 슬픔(근심)이 소멸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을 통한 마음지킴의 청정함(사념청정. 捨念淸淨)이 있는 네 번째 선정을 얻어 머문다.
일체의 물질적 현상에 대한 지각을 넘어 서고, 장애에 대한 지각을 소멸하고, 잡다한 지각에 마음을 내지 않아, '끝이 없는 허공(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는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를 얻어 머문다.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를 넘어선, '끝이 없는 의힉(무한한 의식)'이라고 하는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를 얻어 머문다.
일체의 이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를 넘어 선,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 아무것도 없는 경지를 얻어 머문다.
일체의 아무것도 없는 경지를 넘어,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를 얻어 머문다.
일체의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를 넘어, '지각과 느낌의 소멸'을 얻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아홉 가지 순서에 따른 머무름이니라.
◎ 아홉 가지 순서에 따른 소멸(nava anupubbanirodha)
'아홉 가지 순서에 따른 소멸(nava anupubbanirodha)'과 관련하여, PsA 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첫 번째 선정에 들어간 이에게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지각(慾想.욕상)이 사라진다. 두 번째 선정에 들어간 이에게는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소멸한다. 세 번째 선정에 들어간 이에게는 기쁨이 소멸한다. 네 번째 선정에 들어간 이에게는 들숨과 날숨이 소멸한다.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에 들어간 이에게는 물질적 현상에 대한 지각(色想.색상)이 소멸한다.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에 들어간 이에게는 공간에 걸림이 없음에 대한 지각이 소멸한다. 아무것도 없는 경지에 들어간 이에게는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에 대한 지각이 소멸한다.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에 들어간 이에게는 아무것도 없음에 대한 지각이 소멸한다. 지각과 느낌의 소멸에 들어간 이에게는 지각과 느낌이 소멸한다.' PsA. pp.137-138
◎ 아홉 가지 중생의 거처(sattāvāsa) -
① 도반들이여, 각자 다른 몸을 가지고 각자 다른 지각력을 지닌 의식으로 살아가는 중생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인간들과 어떤 신들과 어떤 악처에 떨어진 자들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중생의 거처입니다.
② 도반들이여, 각자 다른 몸을 가졌지만 모두 같은 지각력을 지닌 의식으로 살아가는 중생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여기서] 초선(初禪)을 닦아서 태어난 범중천의 신들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중생의 거처입니다.
③ 도반들이여, 모두 같은 몸을 가졌지만 각자 다른 지각력을 지닌 의식으로 살아가는 중생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광음천의 신들입니다. 이것이 세 번째 중생의 거처입니다.
④ 도반들이여, 모두 같은 몸을 가졌고 모두 같은 지각력을 지닌 의식으로 살아가는 중생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변정천의 신들입니다. 이것이 네 번째 중생의 거처입니다.
⑤ 도반들이여, 지각이 없는 중생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무상유정천의 신들입니다. 이것이 다섯 번째 중생의 거처입니다.
⑥ 도반들이여, 일체의 물질적 현상[色]에 대한 지각을 넘어서고, 장애에 대한 지각을 소멸하고, 잡다한 지각에 마음을 내지 않아, ‘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는 공무변처(空無邊處, ākāsanañc-āyatana)에 도달한 중생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여섯 번째 중생의 거처입니다.(공간에 걸림이 없는 의식으로 살아가는 것)
⑦ 도반들이여, 일체의 공간에 걸림이 없는 경지를 넘어선, ‘무한한 의식[識]’이라고 하는 식무변처(識無邊處, viññāṇañcāyatana)에 도달한 중생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일곱 번째 중생의 거처입니다.(의식에 걸림이 없는 의식으로 살아가는 것)
⑧ 도반들이여, 일체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를 넘어선, ‘아무것도 없다.’라고 하는 무소유처(無所有處, ākiñcaññāyatana)에 도달한 중생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여덟 번째 중생의 거처입니다.(아무것도 없는 의식으로 살아가는 것)
⑨ 도반들이여, 일체의 아무것도 없는 경지를 넘어선,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에 도달한 중생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아홉 번째 중생의 거처입니다.(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의식으로 살아가는 것)
◎ 아홉 가지 청정한 노력(nava parisuddhipadhana)
'아홉 가지 청정한 노력(nava parisuddhipadhana)'이란 구체적으로 '깨끗한 계(戒)에 의한 청정한 노력(silavisuddhi parsuddhipadhana)'. 깨끗한 마음에 의한 청정한 노력(cittavisuddhi parisuddhipadhana)'. '깨끗한 견해에 의한 청정한 노력(ditthivisuddhi parisuddhipadhana)'. '깨끗하게 의심을 극복함에 의한 청정한 노력(kanakhavitaranavisuddhi parisuddhipadhana)'. '길(道)과 길이 아님에 대해 지혜로써 분명하게 보는 것을 통한 청정한 노력(maggamaggananadassanavisuddhi parisuddhipadhana)'. 길에 대해서 지혜로써 분명하게 보는 것을 통한 청정한 노력(patipadananadassanavisuddhi parisuddhipadhana)'. '지혜로써 분명하게 보는 것을 통한 청정한 노력(nanadassanavisuddhi parisuddhipadhana)'. '혜에 의한 청정한 노력(panna parisuddhipadhana)'. '해탈에 의한 청정한 노력(vimutti parisuddhipadhana)' 등을 말한다. PsA. p.127 참조.
◎ 아홉 가지 화내는 일(nava aghatavatthu)
①나에게 이로움이 되지 못했다고 하여 화냄에 묶인다.
②나에게 이로움이 되지 못한다고 하여 화냄에 묶인다.
③나에게 이로움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하여 화냄에 묶인다.
④나에게 사랑스럽고 유쾌한 것이지만 이로움이 되지 못했다고 하여 화냄에 묶인다.
⑤나에게 사랑스럽고 유쾌한 것이지만 이로움이 되지 못한다고 하여 화냄에 묶인다.
⑥나에게 사랑스럽고 유쾌한 것이지만 이로움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하여 화냄에 묶인다.
⑦나에게 사랑스럽지도 유쾌하지도 않으면서 이로움이 되지 못했다고 하여 화냄에 묶인다.
⑧나에게 사랑스럽지도 유쾌하지도 않으면서 이로움이 되지 못한다고 하여 화냄에 묶인다.
⑨나에게 사랑스럽지도 유쾌하지도 않으면서 이로움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하여 화냄에 묶인다.
◎ 아홉 종류의 교만(navavidhamana)
나는 뛰어나고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교만. 나는 뛰어나되 동등하다고 생각하는 교만. 나는 뛰어나되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교만. 나는 동등하되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교만. 나는 동등하고 동등하다고 생각하는 교만. 나는 동등하되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교만. 나는 열등하되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교만. 나는 열등하되 동등하다고 생각하는 교만. 나는 열등하고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교만등을 말한다.
◎ 악처[나쁜 세계]
‘나쁜 세계’로 옮긴 아파야(apāya)는 apa(떨어져)+√i(가다)에서 파생된 남성명사로 문자적으로 ‘떨어져 나가다’라는 뜻에서 ‘분리, 손실, 타락’ 등의 뜻으로 쓰이며, PED에 ‘a transient state of loss and woe after death. Four such states are specified purgatory (niraya), rebirth as an animal, or as a ghost, or as a Titan (Asura).’라고 설명되듯이, 다음 생에 태어나는 손실과 불행의 일시적 상태를 뜻하는 전문술어로 정착되었다. 즉 고통과 비참함이 즐거움보다 훨씬 더 많은 세계로 불선업을 저지른 이들이 태어나는 곳들의 통칭이다. 두가띠(dugati)나 위니빠따(vinipāta)와 의미상 같은 말이다. 여기에는 ① 지옥(地獄, niraya), ② 아귀(餓鬼, peta), ③ 축생(畜生, tiracchānayoni), ④ 아수라(阿修羅, asura)의 네 가지가 있다. 중국에서는 악취(惡趣)로 옮겼으며, 영어권에서는 woeful course of existence, four nether worlds, four lower worlds 등이라 한다. (1) 지옥(地獄, niraya): 원어 니라야(niraya)는 nis(밖으로)+√i(가다)에서 파생된 남성명사로서 ‘밖으로 떨어져 나가다, 파멸하다’라는 문자적인 뜻에서 ‘지옥’을 뜻하게 되었다. 주석서(AAṬ)에서는 ‘아무런 즐거움이 없는 곳’으로 설명한다. 31가지 중생계의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세계로서 전생의 악업의 대가로 극심한 고통만이 있는 곳이다. 주석서들에 따르면 지옥에는 여덟 가지 대지옥, 즉 팔열지옥(八熱地獄)이 있는데 ➀ 등활(等活, Sañjīva), ➁ 흑승(黑繩, Kālasutta), ➂ 중합(衆合, Saṅghāta), ➃ 규환(叫喚, Roruva), ➄ 대규환(大叫喚, Mahā Roruva), ➅ 초열(焦熱, Tāpana), ➆ 대초열(大焦熱, Mahā Tāpana), ➇ 무간(無間, Avīci)지옥이 그것이다. 뒤의 지옥으로 갈수록 고통은 더 심해지며 이들 가운데 무간지옥이 제일 아래 있고 가장 무시무시한 곳이다. 이 팔열지옥의 사방은 다시 다섯 개의 작은 지옥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한다. 그래서 모두 5×4×8+8=168가지 지옥이 있게 된다. 맛지마 니까야,「우현경(愚賢經, Bālapaṇḍita-sutta)」(M129)과「천사경(天使經, Devadūta-sutta)」(M130)에 지옥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나온다. (2) 아귀(餓鬼, peta)원어 뻬따(peta)는 아버지를 뜻하는 pīta의 곡용형으로 ‘아버지에 속하는’이란 뜻으로 원래 조령신(祖靈神)을 뜻했다. 그런데 제사에서 후손들이 올리는 음식을 기다리는 자들이라는 뜻에서 불교에서 ‘굶주린 귀신’으로 정착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귀는 사는 영역이 따로 없이 숲이나 습지나 묘지 등 인간이 사는 세계에 같이 산다고 한다. 인간의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간혹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고 천안(天眼)으로 보이기도 한다.「밀린다빤하」에 따르면 아귀에는 ① 토한 것을 먹는 완따시까(Vantāsika), ② 굶주리고 목마른 쿠삐파시노(Khuppipāsino), ③ 타는 목마름으로 고통 받는 니자마딴히카(Nijjhāmatanhikā), ④ 사람이 주는 음식으로 살아가는 파라닷뚜파지위노(Paradattūpajīvino)의 네 가지가 있다고 한다. 「띠로꿋다경(Tirokudda-sutta)」에 따르면 이들 가운데 파라닷뚜파지위노만이 살아있는 친척들이 자신의 이름으로 행한 공덕을 나누어 줄때 그 공덕을 누릴 수 있고 더 나은 선한 세계로 갈수 있다고 한다. 쿳다까 니까야의 「뻬따왓투( petavatthu)」는 악업으로 인해 아귀로 태어난 중생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3) 축생(畜生): 원어 띠라짜나요니(tiracchāna-yoni)는 tiro(건너다)+√acchan(가다)+yoni(모태)로 분해된다. 동물들은 직립보행을 못하고 옆으로 즉 네 발로 걷거나 움직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축생계는 서로 죽고 죽이는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기 때문에 사랑, 연민과 같은 정신적인 가치가 들어설 자리가 없고 동물들은 대개 고통과 두려움에 휩싸여 죽기 때문에 다시 나쁜 세계에서 다시 태어날 확률이 크다. 드물기는 하지만 동물도 선한 마음을 일으켜서 내생에 인간계나 천상계에 태어날 수 있다. (4) 아수라(阿修羅, asura): 원어 아수라(asura)는 문자적으로 유희하거나 빛을 발하지 못하는 존재를 의미하고 경에서는 제석(Sakka)을 왕으로 하는 삼심삼천의 천인(deva)들과 싸우는 존재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러한 아수라는 나쁜 세계에 속하는 아수라와는 구별해야 한다. 이들은 괴물처럼 생기고 집채만한 배에 입이 너무 작아 제대로 먹거나 마실 수 없는 일종의 아귀이다. 이 가운데 깔라깐지까(Kālakañjika)가 가장 비참하고 고통이 심한 아수라이다.
◎ 악취(惡趣, durgati)
악취(惡趣, durgati)는 악업에 의해 태어나는 세계. 삼악취(三惡趣)·사악취(四惡趣)·오악취(五惡趣)·육악취(六惡趣)가 있다. 악취는 고통과 우치 때문에, 북구로 주는 무상(無常)을 감득할 기회가 없어서, 무상천은 외도(外道)가 최고의 단계로 믿기 때문에, 능히 성도(聖道)와 그 가행(加行)으로 나아가는 것을 장애한다.
◎ 안냐시 꼰단냐(Aññāsi-Koṇḍañña)
안냐시 꼰단냐(Aññāsi-Koṇḍañña)는 ‘완전하게 안 꼰단냐’라는 뜻이다. 냐나띨로까(Nyanatiloka) 스님은 그의 저서 「Buddhist Dictionary」에서 안냐(aññā)를 ‘highest knowledge, gnosis, refers to the perfect knowledge of the saint(Arahat; ariya-puggala)'(Ven. Nyanatiloka, Buddhist Dictionary, Kandy, BPS, 1980)라고 설명하고 있듯이, 성자(아라한)가 채득한 완벽한 지혜, 영지(靈智), 구경의 지혜를 뜻한다. 주석서에서도 “‘구경의 지혜’란 아라한과(arahatta)를 뜻한다.”(AA.iv.200)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아라한과를 얻은 뒤에 “태어남은 다 했다. 출세간의 삶은 다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선언하는 지혜를 뜻한다. 이러한 선언을 ‘구경을 지혜를 드러내다.’로 빨리 경의 여러 곳에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부처님께서 꼰단냐 존자가 수다원과를 얻은 것을 두고 이렇게 표현하고 계신다.
◎ 알아차림
‘알아차림’으로 번역한 사띠(sati)는 √smṛ(기억하다)에서 파생된 여성명사이다. PED에서 ‘memory, recognition, consciousness; intentness of mind, wakefulness of mind, mindfulness, alert!ness, lucidity of mind, self-possession, conscience, self-consciousness.’라고 설명되듯이, 그 1차적인 의미는 ‘기억(記憶), 억념(憶念), 유념(留念)’이고, 2차적인 의미는 ‘깨어있는 마음, 알아차림, 마음챙김, 각성, 명료한 마음, 침착함, 자각, 의식’ 등이다.
대상에 깊이 들어가고 대상을 파지하고 대상에 확립하고 그래서 마음을 보호하는 것으로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가능하게 하는 선한 마음의 작용이다. 그리고 다섯 가지 기능(五根, pañca-indriya)과 다섯 가지 능력(五力, pañca-bala) 중의 하나이며, 깨달음의 일곱 가지 요소(七覺支, bojjhaṅga)중의 하나이다. 또한 넓은 의미로는 선한 과보의 마음(kusala-vipāka-citta)과 아름다운 과보의 마음(sobhana-vipāka-citta)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마음의 작용(cetasika)들 가운데 하나이다. 중국에서는 염(念)이나 억념(憶念)으로 번역되었고 영어권에서는 보통 mindfulness라고 한다.그리고 이 알아차림과 함께 경에 빈번히 등장하는 술어로 삼빠쟌나(sampajañña)가 있다. PED에서 ‘attention, consideration, discrimination, comprehension, circumspection; Often combined with sati, with which almost synonymous.’라고 설명되듯이, ‘주의, 사려분별, 판별, 이해, 세밀한 주시’이란 뜻이고 종종 거의 유사한 의미를 지닌 사띠와 함께 쓰인다. 중국에서 정지(正知)로 옮겼고, 영어권에서는 clear comprehension, full awareness, clarity of consciousness 등이라 한다. 그리고 이 사띠와 삼빠쟌나는 경에서 sati-sampajañña와 같이 둘이 결합된 형태로 자주 나오며 중국에서 정념정지(正念正知)로 옮겼다. 본서는 사띠를 ‘알아차림’으로, 삼빠쟌나는 ‘분명한 앎’으로 옮기고 있다.
◎ 암시(kāya-viññatti)
아비담마에서는 마음이 일어나면 그것이 몸의 행위와 관계된 마음이면 몸의 암시(kāya-viññatti)를 일으키고 말과 관계된 것이면 말의 암시(vacī-viññatti)를 일으켜서 각각 몸의 행위와 말의 행위를 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암시(viññatti)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업의 정의를 분명히 해야 한다. 업이란 의도(cetanā)이다. 그리고 의도는 마음의 작용(cetasika) 가운데 하나다. 그러므로 업은 모두 정신적인 작용이다. 그런데 이 업은 업을 짓는 문(dvāra)을 통해서 짓게 된다. 그 문이 바로 몸, 말, 마음 이다. 마음은 mano의 번역인데 업을 짓는 마음의 문(意門, mano-dvāra)이다. 그래서 마음으로 짓는 업을 의업(意業)이라 한다. 그런데 문제는 몸과 말인데 몸(kāya)이란 아비담마의 최소단위인 82법에 포함되지 않는다. 사실 몸이란 것은 법이 아니라 개념(paññātti)일 뿐이다. 지, 수, 화, 풍과 안, 이, 비, 설, 신 등의 법들이 모여서 붙여진 몸이라는 개념일 뿐이다. 말도 마찬가지로 82법 가운데 소리의 법에 붙여진 개념이다. 업은 정신작용이지만 분명 우리는 몸으로도 업을 짓고 말로도 업을 짓는다. 몸으로는 살생 투도 사음 등을 짓고 말로는 망어 기어 양설 악구를 짓는다. (이 이외의 업은 모두 의업이다) 마음의 작용인,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의도적 행위인 이러한 업은 물질인 몸과 말로도 짓는다. 그러므로 마음의 작용인 업을 물질인 몸과 말로써 지을 때는 물질인 몸과 말에 업을 짓는 최소단위가 몸에도 있고 말에도 있기 때문에 그런 최소단위로서의 법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을 아비담마에서는 암시(viññatti)라고 한다. 이 암시를 중국에서는 표(表)로 옮겼고 영어로는 intimation이라 한다. 그래서 몸으로 업 등의 행위를 하는 최소단위를 몸의 암시(身表 kāya-viññatti)라 하고 말로써 업 등의 행위를 하는 최소단위인 법을 말의 암시(意表 vacī-viññatti) 혹은 구표(口表)라고 한다. 마치 마음이 마음으로 업을 짓거나 마음의 작용을 일으키는 문이 되듯이 상좌부에서는 이 신표와 어표를 각각 몸과 말로써 업을 짓는 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경에서 말하는 신업(身業)을 아비담마에서는 구체적으로 몸의 암시를 통해서 짓는 업인 신표업(身表業)이라 설명하고 경에서 말하는 구업(口業)을 아비담마에서는 말의 암시를 통해서 짓는 업인 구표업(口表業)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그것이 신표업이든 구표업이든 모두 의도 혹은 의도적 행위로 설명되는 업이며, 업은 마음의 작용이다.
◎ 야소다라(Yasodharā)
야소다라는 고따마 부처님이 출가하기 전 싯닷타 태자로 있을 때의 아내였다. 빨리 삼장에서는 주로 라훌라의 어머니란 뜻의 라훌라마따(Rāhulamātā)로 나온다. 보살과 같은 날에 태어나 16살의 나이에 그와 결혼하였다. 디빵까라(Dīpaṅkara) 부처님 당시에 보살이 수메다 수행자로 있을 때 야소다라는 수미따(Sumittā)라고 하는 바라문여인이었다. 그때 수미따는 보살에게 여덟 송이의 연꽃을 주었다. 디빵까라 부처님은 보살이 언젠가는 부처가 될 것이며 수미따도 여러 생에 걸쳐 보살의 배우자가 될것이라고 수기(授記)를 주셨다.
부처님이 여인들도 승가에 입문할 수 있도록 허락하시자, 마하빠자빠띠고따미(Mahāpajāpatī Gotamī)밑에서 구족계(具足戒, upasampada)를 받고 비구니가 되었다. 앙굿따라 니까야에서 부처님은 그녀를 비구니들 가운데 신통력이 으뜸인 비구니라고 칭송하셨다. 「아빠다나(Apadāna)」에서는 야소다라가 부처님께 마지막 작별인사를 드리고, 18만명의 아라한 비구니들과 함께 갖가지 기적을 나투면서 입멸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Ap.ii.592f)
◎ 야차녀(夜叉女)
야차녀(夜叉女)는 약키니(yakkhinī)의 음역으로 약차녀(藥叉女), 나찰녀(羅刹女)라고도 한다. 그리고 야차(夜叉, yakkha)는 이 야차녀의 배우자이다. 야차는 일반적으로 비인간(非人間, amanussa)으로 묘사되고 있다. 주석서에 의하면 이들은 아귀(餓鬼, peta)들보다 위의 존재로 묘사되고 있으며 선한 아귀들을 야차로 부르는 경우가 있다.(PvA.45;55) 이들은 특히「자따까」에 자주 등장하는데 하늘을 날아다니고 벽을 관통해 지나가는 등 초자연적인 힘을 지니고 있고, 공양(供養)을 잘하는 사람에게는 재보(財寶)나 아이를 갖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특히 야차녀는 매력으로 사내를 홀려서 잡아먹는 식인귀(食人鬼)로 묘사된다. 사대왕천(四大王天, Cātu-māha-rajikā) 중 북쪽 방위를 담당하는 비사문천(毘沙門天, Vessavaṇa)이 이들을 관장한다.
양지(楊枝, Dantakastha)
양지(楊枝, Dantakastha)는 탄다가슬탁(憚多家瑟託) ‘탄다(憚多)’는 치(齒)이고 ‘가슬탁(家瑟託)’는 나무이므로 ‘치목(齒木)’으로 번역. 엄지손가락 첫마디를 일지(一指)라고 하는데 치목은 보통 십이지(十二指)가 정수(正數)이다. 이 나무가지 끝을 오래 씹어서 미세해지면 그것으로 어금니와 혀 등을 문지르는데 『남해기귀전(南海寄歸典)』에는 ‘매일 아침에 나무를 씹어서 이를 닦고 혀를 움직임을 법과 같이 하며 세수하고 이를 닦아 청정하게 한 후 경례를 행한다.’고 하였다. 서역에 버드나무는 드물며 부처님의 치목수(齒木樹)도 양류(楊柳)가 아니다. 일체의 나무로 양지(楊枝)를 만들 수 있으나 다만 성질이 화유(和柔)하고 고미(苦味)가 없는 것으로 취한다. 『대일경소(大日經疏)』 5에는 ‘우담발라(優曇鉢羅)를 취하거나 혹은 다른 단정하고 곧은 나무로 거칠지도 가늘지도 않은 것으로 십이지(十二指) 가량의 길이로 잘라서 쓴다.’고 하였고 『관음참법』에는 ‘나 지금 양지(楊枝)와 정수(淨水)를 갖추고 다만 대비애련(大悲哀憐)으로 섭수(攝受)주시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 억압 (위캄바나. vikkhambhana)
‘억압’이라 번역한 위캄바나(vikkhambhana)는 vi(분리해서)+khambha(마비, 경직)+na(과거수동분사를 만드는 어미)의 합성어이다. PED에서 ‘withdrawal of support, stopping (the nīvaraṇas or any evil influences or corruptions: kilesa), arresting, paralysing; elimination, discarding.’이라 설명되듯이, 장애(nīvaraṇa)나 번뇌(kilesa)를 더 이상 지원하지 않고, 그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보통 ‘억압에 의한 버림(vikkhambhana-pahāna)’과 같이 합성어로 많이 나타난다.
◎ 업(業)
‘업(業)’이라고 번역되는 깜마(kamma/Sk. karmma)는 √kṛ(하다)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그래서 깜마는 광범한 행위 일반을 나타낸다 할 수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무슨 행위든 다 업이라고 하지 않는다. 행위 중에서도 의도(cetanā)가 개입된 행위를 업이라 한다. 앙굿따라 니까야에 “비구들이여 나는 의도적인 행위를 업 이 라고 말한다. 몸과 말과 뜻으로 의도하고서 업을 짓는다"(A6:63/iii.415)라고 나타나는데 업을 정 의하는 인용문으로 아주 잘 알려진 구문이다. 부처님과 아라한을 제외한 모든 의도적인 행위는 업이 된다. 부처님과 아라한의 경우에는 업의 근원이 되는 무명과 갈애를 남김없이 소멸해 버렸기 때문에 업을 쌓지 않는다. 그렇지만 부처님과 아라한도 정신과 물질(名色,nāma-rūpa)을 가지고 있는 한 그분들의 지난 생들에서 지은 업의 과보는 받아야 한다. 업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선(善, kusala)과 불선(不善, akusala)이다. 모든 의도는 선한 것 이 아니면 불선한 것 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선과 불선의 판단 기준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측면이다. 궁극적으로는 어떤 행위가 해탈과 열반에 유익한가 해로운가 하는 것 이 판단의 기준이 라 하겠다. 그리고 마치 씨앗을 심으면 그 종자에 고유한 열매가 열리듯이 의도적인 행위는 그 의 도한 선과 불선의 성질에 따라 각각 고유한 특성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업의 법칙(kamma-niyāma)이다. 이렇게 나타나는 업의 결과를 깜마위빠까(業異熟, kamma-vipāka)라 한다. 업의 과보라는 의미에서 업보(業報)라고 알려진 말이다. 업보는 업이 열매를 맺기에 적당한 조건을 만났을 때 일어나는 특정한 식의 상태나 정신적인 요인을 뜻한다. 물론 업은 중생들의 살아있는 육신에 특별한 형태의 물질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이것을 ‘업에서 생긴 물질(kamma-samuṭṭhāna-rūpa)’ 이라 한다. 「청정도론」(Vis.XIX.14~16)에서는 12가지로 업을 설명하고 있다. (1) 기능에 따라 ⓛ 생산업(janaka-kamma): 정신적이거나 물질적인 과보(vipāka)를 낳는 업을 말한다. 구체적으로 재생연결의 순간이나 삶의 과정에서 과보의 마음이나 업에서 생긴 물질을 생산하는 모든 선하거나 불선한 의도를 생산업이라 부른다. ② 돕는업(upatthambhaka-kamma): 스스로 과보를 생산해내는 기회를 가지지 못하지만 다른 업이 과보를 만들어 내는 기능을 수행할 때 그 업이 고통스럽거나 즐거운 업의 결과를 가져오도록 돕는 기능을 하는 업 이다. ③ 방해업(upapīḷaka-kamma): 스스로 과보를 생산해내는 기회를 가지지 못하지 만 다른 업이 과보를 만들어 내는 기능을 할 때 그것을 방해하고 좌절하게 하여 고통스럽거나 즐거운 과보에 대항하거나 그 기간을 단축시키는 기능을 하는 업이다. ④ 파괴업(upaghātaka-kamma): 다른 약한 업을 눌러 없애버려서 익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자신의 업이 익 게 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업이다. (2) 과보를 생산하는 순서에 따라 ⓛ무거운 업(garuka-kamma): 그 힘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다른 어떤 업도 이것을 없애고 재생연결식이 될 수 없는 업을 말한다. 선한 측면에서 보면 이 업은 선정을 증득하는 것이고 불선한 측면에서 보면 다섯 가지 무간업(無間業, ānantariya-kamma)과 어떠한 도덕적인 기준도 다 부정해버리는 삿된 견해(micchā-diṭṭhi)이다. ② 임종에 다다라 지은 업(ãsanna-kamma): 금생의 마지막 자와나의 과정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에 지은 강한 업을 뜻한다. ③ 습관적인 업(āciṇṇa-kamma): 습관적으로 반복해서 지어온 선업이나 악업으로, 무거운 업이나 임종에 다다라 지은 업이 없으면 이 습관적인 업이 재생연결식을 일어나게 한다. ④ 이미 지은 업(kaṭattā-kamma): 위의 세 가지 업에 속하지 않는 나머지 업들이다. 위의 세 가지 업이 없으면 재생연결시에 그 기능을 발휘한다. (3) 성숙하는 시간에 따라 ⓛ 금생에 받는 업(diṭṭha-dhamma-vedanīya-kamma): 같은 생에서 업의 과보를 내는 업을 뜻하며 만일 그 업이 금생에 익을 조건을 만나지 못하면 없어져 버리게 된다. ② 다음 생에 받는 업(upapajja-vedanīya-kamma): 업의 과보가 바로 다음 생에서 나타나는 것을 뜻하며 만일 그 업이 바로 다음 생 에 서 조건을 만나지 못하면 소멸되어 버린다. ③ 받는 시기가 확정되지 않은 업(順後業, aparāpariya-vedanīya-kamma): 세 번째 생부터 그 조건을 만나면 과보를 낳는 업이란 뜻이다. ④ 효력을 상실한 업(ahosi-kamma): 업이 있었지만 그 과보를 가져올 시간을 넘겨버린 업이다. 아라한의경우에 마지막의 임종시에 과거에 지은 모든 업은 효력이 없는 업이 되어 버린다. (4) 과보를 생산할 장소에 따라 ⓛ 불선업(akusala-kamma): 몸과 말과 행동으로 짓는 열 가지 불선업의 길(不善業道, akusala-kamma-patha)을 뜻한다. ② 욕계 선업(kāmāvacara-kusala-kamma): 몸과 말과 행동으로 짓는 열 가지 선업의 길(善業道, akusala-kamma-patha)을 뜻한다. ③ 색계 선업(rūpāvacara-kusala-kamma): 순전히 마음으로만 짓는 업이다. 근본집중(appanā-samādhi)에 이른 수행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선정의 각지의 분류에 따라 다섯 가지이다. ④ 무색계 선업(arūpāvacara-kusala-kamma): 순전히 마음으로만 짓는 업이다. 근본집중에 이른 수행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대상의 분류에 따라 네 가지다.
◎ 업(業)
업(業)으로 번역되는 깜마(kamma)는 광범한 행위 일반을 말하지만 그러한 행위 중에서도 의도(cetanā)가 개입된 행위를 업이라 한다. 부처님께서는 앙굿따라 니까야(A6:63/iii.415)에서 “비구들이여, 나는 의도적인 행위를 업이라고 말한다. 몸과 말과 뜻으로 의도하고서 업을 짓는다.”라고 하셨다.
◎ 업도(業道)
업도(業道)란 근본업도(根本業道)를 말하며 선악의 일을 저지른 때를 말한다.
그 업을 지을 때의 표업(表業)과 무표업(無表業)을 근본업도라고 한다. 이는 사업(事業)에 의해서 행하는 장소라는 뜻이다.
◎ 업,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살면서 지었던 행위의 회상인 업(kamma), 업과 연관된 주변 조건인 업의 표상(kamma-nimitta), 태어날 곳의 표상(gati-nimitta)이 나타난다. 업은 과거에 대한 회상이나 현재에 대한 환상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청정도론」과 같은 주석서들에 따르면 임종직전, 즉 죽음의 마음(cuti-citta)이 일어나기 직전에 일어나는 대상은 업(kamma), 업의 표상(kamma-nimitta), 태어날 곳의 표상(gati-nimitta)중의 어느 하나라고 설명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1) 업(kamma): 그 생에서 지은 선업이나 불선업이 나타난다. 아무리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고, 또 죽는 순간 아무리 주변환경을 의식하지 못한다 해도 죽음직전에 행한 중요하고 비중 있는 행위에 대한 기억이,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그에게 다가온다. 즉 죽음이 다가왔을 때 행한 그러한 행위를 ‘임종에 다다라 지은 업(āsanna-kamma)’이라고 한다. 죽음의 시간은 미리 알 수 없으므로, 대부분의 경우 죽음이 임박했을 때 아주 선한 행위를 행하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죽음직전의 두드러진 선행이나 악행이 없을 경우엔 과거에 습관적으로 해온 행위의 기억이 떠오른다. 이러한 행위를 ‘습관적인 업(ācinna-kamma)’라고 한다. 이렇게 임종에 다다라 지은 업 혹은 습관적인 업을 지을 때 경험했던 선한 마음이나 불선한 마음이 바야흐로 죽음의 찰나에 떠오른다. 예를 들면, 어부는 죽어가면서 마치 물고기를 잡는 것처럼 말하거나 보시를 많이 한 사람은 죽어가면서 보시를 행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2) 업의 표상(kamma-nimitta): 때로는 죽어가는 사람의 마음에 생전에 지은 업을 상징하는 표상들이 보일수도 있다. 그래서 백정의 눈앞에는 칼이, 술꾼의 눈에는 술병이, 순례자에게는 사원이 보이는 수가 있다. 또한 보시행과 관련된 가사, 승원, 비구, 불상 등과 같은 행한 업의 환경을 보거나 살인자의 경우 흉기, 범행 장소, 피해자를 본다. (3) 태어날 곳의 표상(gati-nimitta): 죽어가는 사람의 마지막 마음의 대상은 그가 다시 태어나게 될 곳에 대한 어떤 징후나 예측일수 있다. 예를 들면, 천상계에 태어날 사람은 천상의 궁전이나 천인들을 보기도 하고, 인간계에 태어날 사람은 미래의 부모가 될 사람, 거처 등의 표상을 본다. 축생계에 태어날 사람은 숲이나 들판을 보기도 하며, 지옥에 태어날 사람은 지옥의 불이나 지옥지기(niraya-pāla)를 보기도 한다. 스리랑카나 그 밖의 지역에서 가끔 죽어가는 사람이 자신이 경험한 그러한 환상에 관해 언급했다는 사실들은 잘 알려져 있다. 실제로 최근 스리랑카의 칼루따라(kalutara)에서 죽어가는 열두 살짜리 소녀가 슬픔에 잠겨 침대 맡에 서 있는 부모를 향해 화려하게 장식한 꽃마차가 자기를 데리러 와 있다고 즐거운 듯이 말한 일이 있었다. 임종직전에 자와나 과정(이생에서 지은 업의 과보가 나타나는 인식 과정)이 나타나는데, 이때 이러한 업,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 가운데 하나가 나타나며 이러한 것을 대상으로 다음 생에 최초의 식(識) 즉 재생연결식이 31가지 중생계 가운데 하나에 생겨나서 그 생의 식이 물 흐르듯 상속하면서 지속된다.
중생은 갈애(taṇhā)가 있는 한 끊임없이 윤회한다. 갈애가 완전히 소멸할 때 윤회도 끝이 나며, 윤회가 끝난 경지를 열반(nibbāna)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윤회하는 기간은 정해져 있지 않다. 윤회는 갈애가 소멸할 때 다하게 되며, 이러한 갈애는 팔정도를 닦음으로서 완전히 소멸하는 것이다.
◎ 업력(業力, 깜마웨가 kamma-vega)
‘업력(業力)’으로 옮긴 깜마웨가(kamma-vega)는 인간의 의도적 행위, 즉 업을 가속화한다는 뜻이다. 동일한 업은 한번 짓고 두 번 짓고 하면 계속 그러한 업을 짓게 되는 가속도가 되어 점점 그러한 업의 방향으로 가게 되고, 비슷한 상황에서는 그러한 업을 지속적으로 짓게 된다. 그래서 그러한 업은 힘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중국에서 업력(業力)으로 옮겼고, 영어권에서는 kammic energy로 옮기고 있다.
◎ 업을 짓는 마음(아비상카라-윈냐나 abhisaṅkhāra-vinñāṇa)
‘업을 짓는 마음’이라 번역한 아비상카라-윈냐나(abhisaṅkhāra-vinñāṇa)는 업을 만들고, 업의 조건을 만드는 마음이다. 중국에서는 업행식(業行識)이라 번역했고, 영어권에서는 kamma-forming consciousness라고 한다. 업(kamma), 업의 표상(kamma-nimitta), 태어날 곳의 표상(gati-nimitta)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임종이 임박한 자와나의 마음(maraṇāsanna-javana-vinñāṇa)이 바로 업을 짓는 마음이다. 그리고 이 업을 짓는 마음은 다음 생의 재생연결식에 이른다. 이를 12연기에서는 ‘행(行, saṅkhāra)을 조건으로 식(識, vinñāṇa)이 일어난다, saṅkhāra paccaya viññāṇa.’라고 표현하는데, 여기서의 행(行)은 ‘업의 존재(業有, kamma-bhava), 즉 업(kamma)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 업은 의도(cetanā)를 뜻한다. 그리고 이 12연기에서의 식은 재생연결식을 말한다.
◎ 업의 존재(業有, kamma-bhava)
‘업을 짓는 마음’이라 번역한 아비상카라-윈냐나(abhisaṅkhāra-vinñāṇa)는 업을 만들고, 업의 조건을 만드는 마음이다. 중국에서는 업행식(業行識)이라 번역했고, 영어권에서는 kamma-forming consciousness라고 한다. 업(kamma), 업의 표상(kamma-nimitta), 태어날 곳의 표상(gati-nimitta)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임종이 임박한 자와나의 마음(maraṇāsanna-javana-vinñāṇa)이 바로 업을 짓는 마음이다. 그리고 이 업을 짓는 마음은 다음 생의 재생연결식에 이른다. 이를 12연기에서는 ‘행(行, saṅkhāra)을 조건으로 식(識, vinñāṇa)이 일어난다, saṅkhāra paccaya viññāṇa.’라고 표현하는데, 여기서의 행(行)은 ‘업의 존재(業有, kamma-bhava), 즉 업(kamma)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 업은 의도(cetanā)를 뜻한다. 그리고 이 12연기에서의 식은 재생연결식을 말한다.
◎ 업의 존재[業有]
업의 존재[業有]에서‘존재[有]’로 옮긴 바와(bhava)는 √bhū(되다)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PED에 ‘becoming, (form of) rebirth, (state of) existence, a life.'라고 설명하듯이, 존재나 삶의 상태를 뜻하는 단어이다. 특히 becoming이라는 정의에서 보듯이, 바와는 그냥 존재가 아니고 갈애(taṇha)와 집착(upādāna)을 통해서 끊임없이 되어가는 과정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존재는 어떤 고정된 불변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되어가는 과정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존재는 어떤 고정된 불변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생멸하는 오온(五蘊)이 흐르는 진행과정 그 자체임을 암시한다. 이러한 바와는 빨리 삼장에서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난다. (1) 업의 존재(業有, kamma-bhava)업의 존재[業有]는 재생에 이르는 업(kamma)을 뜻한다.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낮은 욕계나 높은 색계와 무색계에 이르는 ① 공덕이 되는 행위(puñña-abhisaṅkhāra), ②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apuñña-abhisaṅkhāra), ③ 흔들림 없는 행위(aneñja-abhisaṅkhāra)로 설명하셨다. 부처님은 업의 존재[業有]를 새로운 생이 일어나게 하는 업과 동일하게 보셨다. 이 세 가지 행위 중 ① 공덕이 되는 행위(puñña-abhisaṅkhāra)는 욕계에서의 여덟 가지 선한 의도와 색계에서의 다섯 가지 선한 의도로 구성되어 있다. ②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apuñña-abhisaṅkhāra)는 12가지 불선한 의도로 구성되어 있다. ③ 흔들림 없는 행위(aneñja-abhisaṅkhāra)는 무색계에서의 네 가지 선한 의도를 뜻한다. 요컨대, 업의 존재[業有]는 재생에 이르는 선하거나 악한 의도이다. (2) 재생의 존재(生有, upāpatti-bhava)재생의 존재[業有]는 업에서 생긴 무더기, 즉 오온(五蘊)을 말하며 중생이라는 존재와 개체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업의 존재[業有]의 특징은 업(業)이고 재생의 존재[生有]의 특징은 업으로부터 생긴 무더기[蘊]이다. 이것은 각각 다시 태어남을 만드는 역할과 다시 태어나는 역할을 하며, 업의 존재[業有]는 유익하거나 해로운 것으로 나타나고 재생의 존재[生有]는 유익하다 혹은 해롭다고 할 수 없는 무기(無記, avyākata)로 나타난다. 재생의 존재[生有]는 다음과 같은 9가지 종류가 있다.① 욕계 중생의 정신과 물질, 즉 오온(五蘊)이다. 다른 말로 하면,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천인의 존재를 가리킨다.② 색계존재(色界有, rūpa-bhava)는 물질이 없는 범천의 오온(五蘊)이다.③ 무색계존재(無色界有, arūpa-bhava)는 물질이 없는 범천의 정신 무더기(名蘊, nāma-kkhanda)이다.④ 인식을 가진 존재(想有, saññi-bhava)는 거친 인식의 존재, 즉 무상유정천과 비상비비상천을 제외한 29가지 존재들의 정신과 물질이다.⑤ 무상유정의 존재(無想有情有, asaññri-bhava)는 무상유정천의 정신과 물질이다.⑥ 비상비비상의 존재(非想非非想有, nevasaññinasaññi-bhava)는 가장 높은 범천의 정신 무더기의 존재이다.⑦ 하나의 무더기를 가진 존재(一蘊有, ekavokāra-bhava)는 물질의 무더기(色蘊, rūpa-kkhanda) 뿐인 존재이다.⑧ 네 무더기를 가진 존재(四蘊有, catuvokāra-bhava)는 네 가지 정신의 무더기(名蘊, nāma-kkhanda)의 존재이다.⑨ 다섯 무더기를 가진 존재(五蘊有, pañcavokara-bhava)는 오온으로 구성된 존재이다. 요약을 하자면, 업의 존재[業有]의 특징은 업(業)이고 재생의 존재[生有]의 특징은 업으로부터 생긴 오온(五蘊)이다. 업의 존재[業有]는 다시 태어남을 일으키는 역할을 하고, 재생의 존재[生有]는 다시 태어나는 역할을 하며, 업의 존재[業有]는 선(善)하거나 불선(不善)한 것으로 나타나고 재생의 존재[生有]는 선하다 혹은 불선하다고 할 수 없는 무기(無記)로써 나타난다. 이에 대한 보다 상세한 것은 「청정도론」(Vis.XⅦ.251~269)을 참조할 것.
◎ 업자성정견
‘업이 자신이 것이라는 바른 견해’로 번역한 깜마사까따-삼마디띠(kammassakata-sammādiṭṭhi)는 ‘kamma(업)+sakata(자기, 자신)+sammā(바른)+diṭṭhi(견해)’로 분해가 된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업이 자기 자신의 것이라는 바른 견해’라는 의미이다. 이를 설명하는 표준적 정형구는 다음과 같다. “모든 존재는 자기가 지은 업의 주인이자 자기 업의 상속자이다. 그들 각자는 자기 업으로부터 솟아나는 것이며 자기 업에 매여 있고 자기 업으로 지탱된다. 선악 간에 어떤 업을 짓든 그들은 그 업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A10:206) 더 구체적이고 명확한 설명은 맛지마 니까야,「대사십경(大四十經, Mahacattarisaka-sutta)」(M117)에 나온다. 예컨대, 남에게 무엇을 주거나 보시를 하는 등의 덕스러운 행위는 도덕적 중요성을 안다는 것, 선행과 악행은 그에 상응하는 과보로 수반한다는 것, 누구나 그 어머니와 아버지를 섬길 의무가 있다는 것, 재생이 있으며, 눈에 보이는 세상을 넘어선 세계가 있다는 것, 또 스스로 체득한 높은 깨달음에 기초해서 법을 설하는 사문이나 바라문들이 세상에는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바로 업이 자신이 것이라는 바른 견해이다.
◎ 여래(如來)
‘여래(如來)’라 번역한 따타가따(Tathāgata)는 부처님께서 스스로를 호칭하시는 말이다. 디가 니까야 주석서(DA.i.59~60)에서는 여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여덟 가지 이유 때문에 세존께서는 여래이시다. (1) 여여하게(tathā) 오셨다(āgata)고 해서 여래이시다. (2) 여여하게 가셨다(gata)고 해서 여래이시다. (3) 사실대로의 특징으로(tathalakkhaṇaṁ) 오셨다고 해서 여래이시다. (4) 사실대로의 법을 확실하게(yāthāvato) 정등각(abhisambuddha)하셨기 때문에 여래이시다. (5) 사실대로 보시기(tathadassitā) 때문에 여래이시다. (6) 사실대로 말씀하시기(tathavāditā) 때문에 여래이시다. (7) 여여하게 행하시기(tathākāritā) 때문에 여래이시다. (8) 지배(abhibhavana)의 뜻에서 여래이시다.” 「청정도론」(Vis.Ⅶ.2) 등에 나오는 여래십호(如來十號)는 다음과 같다.① 아라한(應供, Arahan), ② 바르게 깨달으신 분(正等覺者, Sammā-sambuddha), ③ 명지와 실천을 구족하신 분(明行足, Vijjā-caraṇa-sampanna), ④ 피안으로 잘 가신 분(善逝, Sugata), ⑤ 세상을 잘 아시는 분(世間解, Lokavidū), ⑥ 가장 높으신 분(無上士, Anuttara), ⑦ 사람을 잘 길들이시는 분(調御丈夫, Purisadammasārathi), ⑧ 신과 인간의 스승(天人師, Satthā devamanussānaṃ), ⑨ 부처님(佛, Buddha), ⑩ 세존(世尊, Bhagavā).
◎ 여래장(如來藏, tathāgata-garbha)
여래장(如來藏, tathāgata-garbha)은 번뇌 속에 있어도 번뇌에 물들지 않고 본래 청정하고 영원하여 변함이 없는 깨달음의 본성이다. 염정(染淨) 등 모든 현상이 여래장에서 연기한다고 하는 것을 여래장연기(如來藏緣起)라고 하며 『여래장경(如來藏經)』(大16 pp.457a-460b)에서는 아홉 가지 비유를 들어 해석하고 있다. 여래는 ‘오염되지 않은 나의 법성’, 혹은 ‘여래지(如來智)’, ‘여래안(如來眼)을 갖춘 여래’ 라고 하는 것 이외에도, 제2의 비유에서는 ‘여래의 지견(知見)’, ‘여래법성(如來法性)’, ‘태아의 상태에 있는 여래의 법성’, ‘여래의 종성(種姓)’, ‘법장(法藏)’, ‘불체(佛體)’, ‘불괴(不壞)의 것’, ‘지장(智藏)’, ‘여래신(如來身)’, ‘여래지(如來智)’, ‘시방사무외(十方四無畏)’ 등 불타의 모든 덕성의 장(藏)을 말한다.
⊙ 여래십력(dasa tathagatabala. 如來十力)
1) 나는 조건을 조건으로 조건이 아닌 것을 조건이 아닌 것으로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안다. (thanan ca thanato atthanan ca atthanato yathabhutam pajanam)
2) 나는 과거, 미래, 현재의 업을 받을 때에 조건과 원인별로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안다.(atitanagptapaccuppannanam kammasamadananam thanaso hetuso vipakam yathabhutam pajanami)
3) 나는 모든 곳으로 인도하는 길에 관해 분명히 안다.(sabbatthagaminipatipadam yathabhutam pajanam)
4) 나는 수많은 요소, 다양한 세계의 세상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안다. (anekadhatunanadhatulokam yathabhutam pajanam)
5) 나는 중생들의 여러가지 경향에 관해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안다.(sattanam nanadhimuttikatam yathabhutam pajanam)
6) 나는 다른 중생, 다른 사람들의 능력의 높고 낮음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안다.(parasattanam parapuggalanam indriyaparopariyattim yathabhutam pajanam)
7) 나는 선정, 해탈, 삼매, 성취의 오염과 청정함 그리고 출정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안다. (jahanavimokkhasamddhisamapattinam sankilesam vodanam vutthanam yathabhutam pajanam)
8) 나는 전생의 여러가지 삶의 모습을 기억한다.(anekavihitam pubbenivasam anussarami)
9) 나는 인간을 뛰어넘는 청정한 나늘 눈으로 중생을 살펴보고 죽거나 다시 태어나거나 천하거나 귀하거나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업보에 따라서 중생들에 관한여 분명히 안. (dibbena cakkhuna visuddhena atikkantamanusakena satte passami cavamane upapajjamane hine panite suvanne dubbanne sugate duggate yathakammupagesatte pajanami)
10) 나는 번뇌가 부수어지고 번뇌없는 마음의 해탈, 지혜의 해탈을 현세에서 스스로 잘 알고 깨달아 성취한다.(asavanam khaya anasavam cetovimuttim pannavimuttim ditthevadhamme sayam abhinna sacchikatva upasampajja viharami)
◎ 여섯 다툼의 근본(chahi vivadamulehi)
①분노와 원한
②위선과 무자비함
③질투와 인색함
④교활함과 속임수
⑤악함과 욕심
⑥삿된 견해와 세속적인 이익에 대한 고집
◎ 여섯 욕계천상
‘여섯 욕계천상’은 깜마와짜라-데와(kāmāvacara-deva)의 역어로, 육욕천(六慾天)이라고도 한다. 욕계(慾界)에서 가장 높은 세계이며, 말 그대로 감각적 욕망(kāma)을 즐기는 천상세상이다. 보통 보시(dāna)와 지계(sīla)를 닦아서 태어난다. 여기에는 사대왕천(四大王天, Cātu-māha-rajikā), 삼십삼천(三十三天, Tāvatiṁsa), 야마천(夜摩天, Yāmā), 도솔천(兜率天, Tusitā), 화락천(化樂天, Nimmāna-rati),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 Paranimmita-vasa-vatti)의 여섯 하늘이 있다.
◎ 여섯 가지 위 없음(cha anuttariyani.육무상. 六無上)
'여섯 가지 위 없음(cha anuttariyani.육무상. 六無上)'이라는 말에 관련하여 PsA애 '비구들이여, 위와 같은 여섯의 위 없음이 있나니, 여섯이란 무엇인가? 봄에서의 위없음. 들음에서의 위 없음. 이익에서의 위없음. 배움에서의 위없음. 받듦에서의 위없음. 마음챙김에서의 위없음이니라.(chayimani, bhikkhave. anuttariyani. katamani cha? dassananuttariyam. savananuttariyam. labhanuttariyam. sikkhanuttariyam. paricariyanuttariyam. anussatanuttariyanti) 라는 설명이 있다. PsA. p.70
◎ 여섯 가지 갈애의 대상(cha tanhakaya)
'여섯 가지 갈애의 대상(cha tanhakaya)'이란 갈애의 대상으로서, '시각대상으로 이루어진 갈애의 대상(rupatanha)'. '소리로 이루어진 갈애의 대상(saddatanha)'. '냄새로 이루어진 갈애의 대상(gandhatanha)'. '맛으로 이루어진 갈애의 대상(rasatanha)'. '감촉으로 이루어진 갈애의 대상(photthabhatanha)'. '마음현상(法)으로 이루어진 갈애의 대상(dhammatanha)'이라고 하는 여섯을 말한다.
PsA. p.118참조.
◎ 여섯 가지 지속적인 떠올림의 대상(cha anussatitthanani)
'여섯 가지 지속적인 떠올림의 대상(cha anussatitthanani)'이란 여섯 대상을 지속적으로 생각하여 마음에 떠올리는 것으로 보통 '여섯 가지 지속적인 떠올림(六隨念. 육수념.cha anussati)'이라 부른다. 구체적으로는 '붓다에 대한 지속적인 떠올림(불수념.佛隨念. buddhanussati)'. '법에 대한 지속적인 떠올림(법수념. 法隨念. dhammanussati)'. '승가에 대한 지속적인 떠올림(승수념.僧隨念. sanghanussati)'. '계에 대한 지속적인 떨올림(계수념.戒隨念. silanussati)'. 포기에 대한 지속적인 떠올림.捨隨念. caganussati)'. 하늘에 대한 지속적인 떠올림(천수념. 天隨念. devatanussati)' 등이다.
◎ 여섯 가지 사악한 견해(chahi ditthigatehi)
①헝클어진 견해(ditthigahana)
②모순된 견해(ditthikantara)
③견해의 불일치(ditthivisuka)
④견해에 의한 분쟁(ditthivipphandita)
⑤견해에 의한 얽매임(ditthisannojana)
⑥
◎ 여섯 갈애의 몸뚱아리(chahi tanhakayehi)
①시각대상에 대한 갈애
②소리에 대한 갈애
③냄새에 대한 갈애
④맛에 대한 갈애
⑤감촉에 대한 갈애
⑥마음현상(法)에 대한 갈애
◎ 여 덟가지 견해의 일어남
다섯 온(蘊)을 원인으로 하고 다섯 온을 연(緣)으로 하여 여러 견햬에 집착하여 생겨나는 것이다.
무명을 원인으로 하고, 닿음(촉.觸)을 원인으로 하고, 지각(상.想)을 원인으로 하고, 사유를
원인으로 하고, 이치에 맞지 않은 마음냄을 원인으로 하고, 나쁜 친구를 원인으로 하고, 다른
사람의 말을 원인으로 하고, 여러 견해에 집착하여 생겨나는 것이다.
◎ 여덟 가지 수승한 장소(attha abhibhayatanani .팔승처. 八勝處)
여덟 가지 해탈을 가리킨다.
◎ 여덟가지 세간법(attha lokadhamma. 팔세간법. 八世間法)
'여덟가지 세간법(attha lokadhamma)'이란 '얻음(labha)'. '얻지 못함(alabha)'. '명예(yasa)'. '불명예(ayasa)'. '비난(nina)'. '칭찬(pasamsa)'. 즐거움(sukha)', 괴로움(dukkha)' 의 여덟 가지를 말한다.
◎ 여덟 가지 삿됨(attha micchatta)
'여덟 가지 삿됨' 이란 여덟의 바른 길(팔정도)에 반대되는 것으로 곧 '삿된 견해(micchaditthi)'.
'삿된 사유(micchasankappa)'. '삿된 말(micchavaca)'. '삿된 행위(micchakammanta)'. '삿된 삶(micchaajiva)'. '삿된 정진(micchavayama)'. '삿된 마음지킴(챙김)(micchasati)'. 삿된 삼매(micchasamadhi)'를 말한다.
◎ 여덟 가지 해탈(attha vimokkha)
이곳 '교리란'에 설명되어 있다.
◎ 역관(逆觀, paṭiloma), 12연기 역관
이것이 바로 12연기를 역관(逆觀, paṭiloma)하는 환멸문(還滅門)으로, 무명(無明, avijiā)이 소멸하면 행(行, saṅkhāra)이 소멸하고, 식(識, vinñāṇa)이 소멸하고, 명색(名色, nāma-rūpa)이 소멸하고, 육입(六入)이 소멸하고, 감각접촉(觸, phassa)이 소멸하고, 느낌(受, vedanā)이 소멸하고, 갈애(愛, taṇhā)가 소멸하고, 집착(取, upādāna)이 소멸하고, 존재(有, bhava)가 소멸하고, 노사(老死, jara-maraṇa)가 소멸하는 공식이다. 사성제 가운데 고성제는 오온에 대한 정확한 이해로 귀결되고, 집성제는 고의 원인을 규명하는 것으로 갈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멸성제는 고의 원인을 해소하여 실현되는 열반을 뜻하고 도성제는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팔정도를 설하고 있다. 집성제는 12연기의 유전문(流轉門)에 대한 통찰과 연결되고, 멸성제는 12연기의 환멸문(還滅門)과 연결된다. 그러므로 연기법을 깨달았다는 말은 사성제를 깨달았다는 말과 그대로 일치하고, 이는 다시 팔정도를 그 내용으로 하는 중도를 깨달았다는 말과도 같은 뜻이 된다.
◎ 연기법
‘12연기(十二緣起)’, 또는 ‘연기법(緣起法)’으로 옮기는 빠띠쨔사무빠다(paṭicca-samuppāda)에서 paṭicca는 paṭi(~를 대하여)+√i(가다)의 동명사로써 문자적으로는 ‘~를 향하여 가고서’이며, ‘의지하다’의 뜻을 나타낸다. samuppāda는 sam(함께)+ud(위로)+√pad(가다)에서 파생된 남성명사로 ‘함께 위로 간다’는 문자적인 뜻에서 ‘일어남, 발생, 근원, 기원’의 뜻을 나타낸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paṭicca-samuppāda는 ‘의지하여 일어남’을 뜻한다. PED에서 ‘"arising on the grounds of (a preceding cause)" happening by way of cause, working of cause &effect, causal chain of causation; causal genesis, dependent origination, theory of the twelve causes.’라고설명되듯이, 이 연기는 나고 죽는 윤회의 바퀴를 축으로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돌아가게 하는 원인과 조건들을 밝힌 것이다. 상윳따 니까야(S.ii.1)에 나오는 연기법의 정형구는 다음과 같다. “비구들이여, 무명(無明)을 조건으로 행行들이 일어난다. 행을 조건으로 식(識)이, 식을 조건으로 정신과 물질[名色]이, 정신과 물질을 조건으로 여섯 감각장소[六入]가, 여섯 감각장소를 조건으로 감각접촉[觸]이,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受]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愛]가,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取]이, 집착을 조건으로 업의 존재[有]가, 업의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生]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근심 탄식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이 일어난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가 일어난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일러 연기라 한다.” 여기서 무명과 행은 과거세에 속하고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은 미래세에 속한다. 중간의 여덟 가지 각지는 현재세에 속한다. 이를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라고 하는데 도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2연기(paṭicca-samuppāda)
여기서 무명과 행은 과거세에 속하고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은 미래세에 속한다. 중간의 여덟 가지 각지는 현재세에 속한다. 이를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라고 하는데 도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2연기(paṭicca-samuppāda)
삼 세 | 12 각지 | 20형태 및 4무리 |
과 거 | 1. 무명(無明, avijā) | 다섯 과거의 원인들: |
2. 행(行, saṅkhāra) | 1, 2, [8, 9, 10] | |
현 재 | 3. 재생연결식(識, viññāṇa) - 입태 | |
4. 정신과 물질(名色, nāma-rūpa) | 다섯 현재의 결과들 : | |
5. 여섯 감각장소(六入, saḷāyatana) | 3 ~ 7 | |
6. 감각접촉(觸, phassa) | ||
7. 느낌(受, vedanā) | ||
8. 갈애(愛, taṇhā) | 다섯 현재의 원인들 : | |
9. 집착(取, upādāna) | 8, 9, 10, [1, 2] | |
10. 업의 존재(有, bhava) | ||
미 래 | 11. 태어남(生, jāti) | 다섯 미래의 결과들 : |
12. 늙음과 죽음(老死, jarā maraṇa) | 3 ~ 7 |
◎ 열 가지 선행(十善業, kusalakamma-patha) <초전법륜경> 제2장 169쪽
열 가지 악행[十惡業] | 열 가지 선행[十善業] | |
몸(身)으로 짓는 것 | ➀ 살생(殺生) | ➀ 살생하지 않기(不殺生) |
➁ 도둑질(偸盜) | ➁ 도둑질하지 않기(不偸盜) | |
➂ 삿된 음행(邪淫) | ➂ 삿된 음행하지 않기(不邪淫) | |
입(口)으로 짓는 것 | ➃ 거짓말(妄語) | ➃ 거짓말하지 않기(不妄語) |
➄ 중상모략(不兩舌) | ➄ 중상모략하지 않기(不兩舌) | |
➅ 욕설(不惡口) | ➅ 욕설하지 않기(不惡口) | |
➆ 잡담(不綺語) | ➆ 잡담하지 않기(不綺語) | |
마음(意)으로 짓는 것 | ➇ 간탐(慳貪) | ➇ 간탐없음(不慳貪) |
➈ 악의(惡意) | ➈ 악의없음(不惡意) | |
➉ 사견(邪見) | ➉ 사견없음(不邪見) = 정견(正見) |
'열 가지 선행(十善業, kusalakamma-patha)'은 선업의 길이란 뜻의 선업도(善業道)라고도 한다. 이는 불선업의 길이란 뜻의 열 가지 악행(十惡業, akusalakamma-patha)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궁극적 실재(勝義, paramattha)의 관점에서 본다면 몸으로 짓는 세 가지 선행과 입으로 짓는 네 가지 선행은 두 가지 절제(virati), 즉 바른 행위와 바른 말의 마음의 작용에 해당한다. 물론 이런 절제와 관련된 의도(cetanā)와도 일치한다. 세 가지 마음으로 짓는 선행은 각각 탐욕없음(alobha), 성냄없음(adosa), 어리석지 않음(amoha)의 세 가지 선의 뿌리(善根, kusala-mūla)인 마음의 작용에 해당한다. 열 가지 악행과 이와 반대되는 열 가지 선행은 각각 다음과 같다.
◎ 열 가지 선한 법에 의한 길(dasa kusalakammapatha)
'열 가지 선한 법에 의한 길(dasa kusalakammapatha)' 이란,
생명을 죽이는 것을 멀리하는 것. 주지 않은 것을 취하는 것을 멀리하는 것. 성적으로 음란한 행위를 멀리하는 것 등의 세 가지 몸에 관련한 선한 행위. 거짓말. 이간하는 말. 난폭한(거친) 말. 꾸며대는 말을 멀리하는 것 등의 네 가지 말에 관련한 선한 행위. 탐내지 않은 것. 성내지 않는 것. 바른 견해의 세 가지 마음에 관련된 선한 행위.
◎ 열 가지 배움을 마친 이의 법(dasa asekha dhamma)
①배움을 마친 이의 바른 견해(asekkha sammaditthi)
②배움을 마친 이의 바른 사유(asekkho sammasankappa)
③배움을 마친 이의 바른 말(asekkha sammavaca)
④배움을 마친 이의 바른 행위(asekkha sammakammanta)
⑤배움을 마친 이의 바른 삶(asekkha samma-ajiva)
⑥배움을 마친 이의 바른 정진(asekkha sammavayama)
⑦배움을 마친 이의 바른 마음챙김(asekkha sammasati)
⑧배움을 마친 이의 바른 삼매(asekkha sammasamadhi)
⑨배움을 마친 이의 바른 지혜(asekkha sammanana)
⑩배움을 마친 이의 바른 해탈(asekkha sammavimutti)
◎ 열 가지 오염된 것(dasa kilesavatthuni)
탐냄. 성냄. 어리석음. 교만. 삿된 견해. 의심. 혼미함. 들뜸. 뉘우칠 줄 모름. 부끄러운 줄 모름.
◎ 열 가지 얽매임
앞서 언급한 '일곱가지 얽매임'에, '인색함에 의한 얽매임(macchariyasamyojana). 삿된 계에 대한 고집에 의한 얽매임(silabbataparamassamyujana). 질투에 의한 얽매임(issasamyojana)' 의 셋을 더한 것을 말한다.
◎ 열 가지 화내는 일(dasa aghatavatthu)
앞서 '아홉가지 화내는 일'에서 살펴 보았던 바, '나에게 이로움이 되지 못했다'는 등의 생각을 바꾸지 않아 또다른 화가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 열 가지 터전(dasayatanani. 십입처. 十入處)
'열가지 터전(dasayatanani. 십입처. 十入處)'이란, '눈의 터전(cakkhayatana)'. '시각대상의 터전(rupayatana)'. '귀의 터전(sotayatana)'. '소리의 터전(saddayatana)'. '코의 터전(ghanayatana)'. '냄새의 터전(gandhayatana)'. '혀의 터전(jivhayatana)'. '맛의 터전(ghanyatana)'. 몸의 터전(kayayatana)'. 감촉의 터전(photthabbayatana)' 이라고 하는 열 가지 터전을 말한다. PsA. pp.114 참조.
◎ 열 가지 삿됨(dasa micchatta)
'열가지 삿됨(dasa micchatta)' 이란 '여덟 가지 삿됨'에'삿된 지혜(micchanana)' 와 '삿된 해탈(micchavimutti)' 의 둘을 더한 것을 말한다.
◎ 열 여섯가지 견해
맛에 매인 견해. 자아를 주장하는 견해. 삿된 견해. 몸이 있다는 견해. 몸이 있다는 것에 근거한
항상함의 견해. 몸이 있다는 것에 근거한 단멸의 견해. 극단에 치우친 견해. 이전의 끝에 집착하는
견해. 이후의 끝에 집착하는 견해. 얽매임을 지닌 견해. '나'라는 교만에 묶인 견해. 자아에 관한
논리에 묶인 견해. 세계에 관한 논리에 묶인 견해. 있음의 견해. 있지 않음의 견해이다.
◎ 열 여덟가지 견해에 의한 매임
사악한 견해. 헝클어진 견해. 모순된 견해. 견해의 불일치. 견해에 의한 분쟁. 견해에 의한 얽매임. 견해의 화살. 견해에 의한 압박. 견해에 의한 장애. 견해에 의한 속박. 견해에 의한 어려움. 견해의 잠재적 성향. 견해에 의한 뜨거움. 견해에 의한 번뇌. 견해에 의한 묶임. 견해에 대한 집착.
견해에 의한 편향됨. 견해에 대한 고집.
◎ 열반
‘열반(涅槃)’으로 음역한 닙바나(nibbāna/Sk. nirvāṇa)의 문자적 의미는 두 가지로 해석된다. 하나는 nis(부정접두사)+vā(불다)의 과거분사이자 중성명사로 보아서 ‘불어서 꺼진’이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경에서는 탐욕(lobha), 성냄(dosa), 어리석음(moha)의 불이 완전히 꺼진 것을 열반이라고 정의한다. 한편으로 주석서(VṬ)에서는 갈애라는 얽힘(vāna)에서 떠남(nikkhantatta)이라고 열반을 정의한다. 이 열반은 진정한 불교인이라면 반드시 추구해야 하는 지복이자 최고선이다. 이 열반은 출세간이며 형성된 것을 완전히 벗어난 형성되지 않은 것이며 고요함을 특징으로 하는 하나의 본성을 가졌다. 비록 열반은 본성에 있어서는 하나지만 남음(upādi)이 있느냐 없느냐의 측면에서 보면 두 가지가 있다. (1)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 saupādisesa-nibbāna): ‘받은 것이 남아 있는 열반’이라는 뜻이며 아라한의 경우 번뇌는 완전히 소멸하였지만 수명이 남아 있고, 과거 집착의 산물인 오온(五蘊)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2)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 anupādisesa-nibbāna): ‘남음이 없는 열반’이라는 뜻이며 아라한의 수명이 다하고 입멸(入滅)을 하면 이러한 오온까지도 완전히 멸하기 때문에 이런 열반을 반열반(般涅槃, parinibbāna)이라고 한다.
◎ 열반(涅槃, nibbāna)
상좌부 아비담마에 따르면 마음(心, citta), 마음의 작용(心所, cetasika), 물질(色, rūpa), 열반(涅槃,
nibbāna)의 네 가지를 ‘궁극적 실재(勝義, paramattha)’라고 한다. 그리고 무상·고·무아의 세 가지 성품을 벗어나지 못하는 마음, 마음의 작용, 물질을 형성된 법이라는 뜻의 유위법(有爲法, saṅkhata-dhamma)이라고 하고, 열반(涅槃, nibbāna)은 형성되지 않은 법이라는 뜻의 무위법(無爲法, asaṅkhata-dhamma)이라고 한다.
◎ 열반의 요소[涅槃界, 닙바나 다뚜. nibbāna-dhātu)
‘열반의 요소[涅槃界]’는 닙바나 다뚜(nibbāna-dhātu)의 역어이다. 이렇게 요소(界, dhātu)라는 술어를 써서 열반을 표현하는 이유는 열반도 궁극적 실재(勝義, paramattha)의 하나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아비담마에서는 일체법(一切法, sabba-dhamma)을 81 가지 유위법(有爲法, saṅkhara-dhamma)과 한 가지 무위법(無爲法, asaṅkhara-dhamma)으로 분류하는데, 열반(nibbāna)은 이 무위법에 해당한다. 즉 열반도 이렇게 법의 요소(法界, dhamma-dhātu)에 포함시키고 있다. 이렇게 열반을 요소(界, dhātu)라는 술어를 사용하여 기술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자칫 열반을 아무 것도 없는 허무적멸의 경지로 오해할 소지를 없애기 위해서일 것이다.
◎ 열 가지 소멸하는 일(dasa nijjaravatthuni. 十滅事. 십멸사)
'열가지 소멸하는 일(dasa nijjaravatthuni)' 이란,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삶.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삼매. 바른 지혜. 바른 해탈. 로써 삿된 견해 내지 삿된 해탈로 가는 것을 소멸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PsA. pp.76-77 참조.
◎ 열 가지 까시나(dasa kasinayatani)
'열 가지 까시나(dasa kasinayatani)'란 '선관(禪觀)의 열 가지 대상'을 말하는데, 구체적으로는 '흙으로 이루어진 까시나(pathavikasina)'. '물로 이루어진 까시나(apokasina)'. '불로 이루어진 까시나(tejokasina)'. '바람으로 이루어진 까시나(vayokasina)'. '푸른색으로 이루어진 까시나(nilakasina)'. '노란색으로 이루어진 까시나(pitakasina)'. '붉은색으로 이루어진 까시나(lohitakasina)'. '하얀색으로 이루어진 까시나(odatakasina)'. '허공으로 이루어진 까시나(akasakasina)'. '의식으로 이루어진 까시나(vinnanakasina)'등이 있다.
◎ 염부주(閻浮洲, jambu-dvīpa)
염부주(閻浮洲, jambu-dvīpa)는 남염부제(南閻浮提, daksina-jambu-dvīpa)·염부제라고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천하(四天下)의 하나. 수미산의 남쪽에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이 부르기도 한다. 『화엄경삼보장원통기(華嚴經三寶章圓通記)』 권上(韓4 p.187a14)에서 “복덕의 수승함과 하열함을 묻는다면 북주는 수승하고 남염부제는 하열하다. 선근을 묻는다면 북주는 즐거움이 많고 고통이 적으므로 오히려 선근이 적고 남염부제는 고통이 많고 즐거움은 적어도 불법의 인을 즐겨 구하는 사람이 많으므로 수승하다. 若問福之勝劣, 北洲則勝, 南閻浮提則劣也. 若問善根, 北洲則樂多苦小故劣, 南閻浮提則苦多樂小, 多有樂求佛法之因故勝也.”고 한다.
◎ 염부제(閻浮提)
Jambu-dvīpa. 섬부제(贍部提)라고도 한다. 잠부(jambu)는 나무 이름이고 드비파(dvīpa)는 대륙의 뜻으로, 염부나무가 자라는 대륙이라는 뜻이다. 수미산을 중심으로 인간 세상을 동·서·남·북의 사대주(四大洲)로 나눌 때 남쪽의 땅을 말한다. 여기에 16 대국, 500 중국, 10만 소국이 있다고 하며, 부처가 출현하는 것은 오직 이 남염부제 뿐이라 한다. 남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흔히 남섬부주(南贍部洲)라고도 한다. 본래 인도 땅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뒤에 흔히 인간 세계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 오계(五戒, pañca-sīlāni)
오계(五戒, pañca-sīlāni)는 불교에 입문한 재가자들이 평생 동안 반드시 지켜야 하는 계율이다. 상좌부 불교국, 특히 스리랑카에서는 항상 삼귀의와 함께 이러한 오계를 합창하는 것으로 법회를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팔계(八戒, aṭṭha-sīla)는 한 달에 네 번, 그믐날, 상현달, 보름달, 하현달이 뜨는 포살일(布薩日, uposatha)이나 집중수행처에서 수행을 하는 동안 지키는 계율이다.
(1) Pāṇātipātā veramaṇī sikkhāpadaṃ samādiyāmi.빠나디빠따 왜라마니 식카빠담 사마디야미.산목숨을 죽이는 것을 금하는 계를 수지하겠습니다.
(2) Adinnādānā veramaṇī sikkhāpadaṃ samādiyāmi.아딘나다나 웨라마니 식카빠담 사마디야미.주어지지 않은 물건을 가지는 것을 금하는 계를 수지하겠습니다.
(3) Kāmesu micchācārā veramaṇī sikkhāpadaṃ samādiyāmi.까메수 밋차짜라 왜라마니 식카빠담 사마디야미.삿된 음행을 금하는 계를 수지하겠습니다.
(4) Musāvādā veramaṇī sikkhāpadaṃ samādiyāmi.무사와다 왜라마니 식카빠담 사마디야미.거짓말을 금하는 계를 수지하겠습니다.
(5) Surāmeraya-majja-pamādaṭṭhānā veramaṇī sikkhāpadaṃ samādiyāmi.수라메라야 맛자빠마다타나 왜라마니 식카빠담 사마디야미.술과 약물을 금하는 계를 수지하겠습니다.
(6) Vikālabhojanā veramaṇī sikkhāpadaṃ samādiyāmi.위깔라보자나 왜라마니 식카빠담 사마디야미.때 아닌 때 음식을 먹는 것을 금하는 계를 수지하겠습니다.
(7) Nacca-gīta-vādita-visukkadassanamālā-gandha-vilepana-dhārana-maṇḍaṇa-vibhūsanaṭṭhāna veramaṇī sikkhāpadaṃ samādiyāmi.닛싸, 기따, 와디따, 위수카 다싸나, 말라간다, 위레빠나, 다라나, 만다나, 위부사나타나 왜라마니 식카빠담 사마디야미.무용, 노래, 음악을 보고 듣거나 꽃이나 향으로 분장하고 장신구로 치장함을 금하는 계를 수지하겠습니다.
(8) Uccāsayana mahāsayanā veramaṇī sikkhāpadaṃ samādiyāmi.옥싸사야나 마하사야나 왜라마니 식카빠담 사마디야미.높은 침상이나 커다란 침상에서 자는 것을 금하는 계를 수지하겠습니다.
◎ 오개(panca nivaranani. 五蓋. 다섯 가지 장애)
'다섯 가지 장애(panca nivaranani)' 란 '감각적 쾌락(kama)'. '성냄(byapada)'. '혼침과 졸음(thinamiddha)'. '들뜸(uddhaccakukkucca)'. '의심(vidikiccha)' 의 다섯을 말한다.
◎ 오근五根과 오력五力
수행을 하는데 있어 꼭 필요한 다섯 가지 기능(五根, pañca-indriya)과 다섯 가지 힘(五力, pañca-bala)은 다음과 같다.
(1) 다섯 가지 기능(五根, pañca-indriya)
➀ 믿음(信根, saddhā-indriya), ➁ 노력(進根, vīriya-indriya), ➂ 알아차림(念根, sati-indriya), ➃ 집중(定根, samādhi-indriya),➄ 지혜(慧根, paññā-indriya).
(2) 다섯 가지 힘(五力, pañca-bala)
➀ 믿음의 힘(信力, saddhā-bala), ➁ 노력의 힘(進力, vīriya-bala), ➂ 알아차림의 힘(念力, sati-bala), ➃ 집중의 힘(定力, samādhi-bala), ➄ 지혜의 힘(慧力, paññā-bala).
기능(根, indriya)과 힘(力, bala)은 같은 다섯 가지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둘은 다른 역할을 한다. 즉, 기능은 그 각각의 영역에서 지배하는 요소이고 힘은 반대되는 것들에 의해서 흔들리지 않고 이들과 함께하는 법들을 강하게 만드는 요소들이다. 이 다섯 가지 기능들은 그들의 영역에서 각각 결심하고, 분발하고, 확립하고, 산만하지 않고, 식별한다. 이렇게 하면서 이와 반대되는 법들, 즉 우유부단, 게으름, 부주의, 동요, 미혹을 극복한다. 이들 오근五根과 오력五力은 서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즉 믿음(saddha)은 지혜(paññā)와 균형을 이루어야 하고, 집중(samādhi)은 노력(vīriya)과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알아차림(sati)은 다른 기능들과 균형을 이룰 필요는 없지만 지속적이어야 하고 강하고 한결같고 끊어짐이 없어야 한다. 이 알아차림은 다른 네 기능이 제각기 목적지에 이르도록 해주는 가장 중요한 기능이다. 「청정도론」(Vis.IV.47)에서는 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여기서 특별히 믿음과 지혜의 균등함을 권한다. 믿음이 강하고 지혜가 약한 자는 미신이 되고, 근거 없이 믿는다. 지혜가 강하고 믿음이 약한 자는 교활한 쪽으로 치우친다. 약으로 인해 생긴 병처럼 치료하기 어렵다. 두 가지 모두 균형을 이룸으로써 믿을 만한 것을 믿는다. 집중은 게으름으로 치우키기 때문에 삼매가 강하고 노력이 부족한 사람은 게으름에 의해 압도된다. 노력은 들뜸으로 치우치기 때문에 정진이 강하고 삼매가 약한 자는 들뜸에 의해 압도된다. 집중과 노력이 함께 짝이 될 때 게으름에 빠지지 않는다. 집중과 노력이 집중과 함께 짝이 될 때 들뜸에 빠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둘 모두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이 둘이 모두 균형을 이룸으로써 근본 집중을 얻는다.”
◎ 오도송(悟道頌)
이렇게 부처님께서는 정각을 이루고서 그 반조한 바를 오도송(悟道頌)으로 표현하셨다. 「법구경」(Dhp.153-154)에 나오는 부처님의 오도송(悟道頌)은 다음과 같다.
anekajātisaṃsāraṃ sandhāvissaṃ anibbisaṃgahakāraṃ gavesanto, dukkhā jāti punappunaṃ
많은 생을 윤회하면서 나는 헛되이 달려왔다. 집짓는 자를 찾으면서 거듭되는 태어남은 괴로움이었다.
gahakāraka diṭṭhosi, puna gehaṃ na kāhasisabbā te phāsukā bhaggā, gahakūṭaṃ visaṅkhataṃ
집 짓는 자여, (드디어) 그대는 보였구나. 그대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리. 그대의 모든 골재들은 무너졌고 집의 서까래는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visaṅkhāragataṃ cittaṃ, taṇhānaṃ khayamajjhagā
(이제)마음은 업의 형성을 멈추었고 갈애의 부서짐을 성취하였다.
여기서 집(gaha)이란 자기 자신(atta) 혹은 자아의 존재(atta-bhava)를 말하고 집 짓는 자(gahakāra)는 갈애(taṇhā)라고 주석서는 설명한다. 그리고 ‘마음은 업의 형성을 멈추었다’는 것은 마음은 업의 형성을 멈춘 열반을 대상으로 한다는 뜻이며 ‘갈애의 부서짐을 성취함’은 아라한과를 증득함이라고 주석서는 설명한다.
◎ 오인(五忍)
오인(五忍)은 『호국인왕경(護國仁王經)』에서 보살(菩薩)의 계위(階位)를 5종류로 나눈 것이다. 보살이 법리를 깨닫고 마음이 편안하게 머무는 정도에 따라 세운 계위로 복인(伏忍), 신인(信忍), 순인(順忍), 무생인(無生忍), 적멸인(寂滅忍)을 말한다. 복인(伏忍)은 번뇌를 끊지 못하였으나 관혜(觀慧)를 익혀 이것을 굴복시키고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지위(地位)로 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迴向)에 해당된다. 신인(信忍)은 관(觀)하는 마음이 더욱 진전(進展)되어 증득(證得)할 법(法)을 믿고 의심치 않는 지위로 곧 초지(初地), 이지(二地), 삼지(三地)의 보살(菩薩)이 여기에 속한다. 순인(順忍)은 앞에서의 믿음에 의지하여 다시 더 나은 지혜를 연마하여 무생(無生)의 증과(證果)를 순(順)하는 지위(地位)로 사지(四地), 오지(五地), 육지(六地)의 보살이 여기에 해당된다. 무생인(無
生忍)은 제법무생(諸法無生)의 진리(眞理)를 깨달아 아는 지위(地位)로 칠지(七地), 팔지(八地), 구지(九地)의 보살(菩薩)이다. 적멸인(寂滅忍)은 갖가지 번뇌(煩惱)를 끊어버리고 청정무위 담연적정(淸淨無爲 湛然寂靜)에 안주(安住)하는 지위로 곧 십지(十地), 등각(等覺), 묘각(妙覺)의 지위를 말한다. 『열반경(涅槃經)』16권(大12 p462a), 『법원주림(法苑珠林)』 66권(大53 p.793a) 참조.
◎ 오따빠(ottapa)
'도덕적 두려움'도덕적 두려움‘으로 번역한 오따빠(ottapa)는 ud(위로)+tap(타다)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문자적으로 보면 마음을 태우고 속을 끓이는 행위인데 몸과 말과 마음으로 행하는 악행을 두려워하는 마음이다.「뿍갈라뺜냐띠」(Pug.80)에서는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것을 두려워함과 악행과 불선을 행하기를 두려워함을 오따빠라고 한다.”라고 정의한다. 중국에서는 괴(愧)로 번역했고, 영어권에서는 fear of wrongdoing, moral dread라고 한다. 경과 주석서에서는 보통 hiri-ottapa와 같이 둘이 결합된 형태로 나타난다. 히리는 내적인 것이고, 오따빠는 외적인 것이다. 예를 들어, 여기에 한쪽 끝에는 시뻘겋게 달구어져 있고, 다른 한쪽 끝에는 똥이 범벅이 되어 있는 철봉이 있다. 똥으로 범벅이 된 철봉 끄트머리는 역겹기 때문에 손을 대려 하지 않을 것이고, 시뻘겋게 달궈진 철봉 끄트머리는 두렵기 때문에 손을 대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 비유에서 시뻘겋게 달궈진 철봉 끄트머리를 피하는 마음은 히리(잘못을 부끄러워함)이고, 똥으로 범벅이 된 철봉 끄트머리를 피하는 마음은 오따빠(도덕적 두려움)이다. 히리와 오따빠는 인류의 문명이 발달하지 않을 때에도 아들이 어머니와, 딸이 아버지와 성관계를 하는 것과 같은 불선행을 하지 않게 함으로써, 인간이 동물과 구별이 되도록 한다. 그래서 이 두 가지 마음의 작용을 ‘세상을 지키는 법(lokapāla-dhamma)’이라 한다.
◎ 오탁악세(五濁惡世)
사람의 수명이 차차 줄어드는 감겁(減劫)에 일어나는 다섯 가지 부정이 있는 시대. 오탁은 ①겁탁(劫濁, kalpa-kasāya). 감겁 중에 재앙이
일어나 중생들이 피해를 보지 않음이 없는 것. ②견탁(見濁, drsti-kasāya). 사견이 늘어나 선도를 닦지 않는 것. ③번뇌탁(煩惱濁, kleśa-kasāya). 애욕이 많아 삿된 법을 받아들여 심신이 어지러운 것. ④중생탁(衆生濁, sattva-kasāya). 폐악이 많아 효경하지 않고 과보를 두려워하지 않고 금계를 지키지 않는 것. ⑤명탁(命濁, āyu-kasāya). 수명이 줄어드는 것
◎ 오문전향식(五門轉向識, pañca-dv ār āvajjana-citta)
‘오문전향식(五門轉向識, pañca-dvārāvajjana-citta)’에서 전향(轉向)으로 옮긴 아와쟈나(āvajjana)는 ā(향하여)+√vṛj(돌다)에서 파생된 중성명사로서 ‘돌아 옴’, ‘돌아서 향함’의 일차적인 뜻을 가졌고 영어로는 adverting으로 정착되어 있다. 전향이란 마음이 그 대상이 되는 다섯 감각의 문이나 마음의 문으로 향하는 역할을 말한다. 즉 전향은 인식 과정(vīthi)에서 첫 번째 단계로 대상과 관련하여 조사하는 마음 상태로 일어난다. 전향에는 (1) 눈, 귀, 코, 혀, 몸의 다섯 문으로 향하는 오문전향(pañca-dvāra-āvajjana)과 (2) 마음의 문으로 향하는 의문전향(mano-dvāra-āvajjana)의 두 가지가 있다.
◎ 오안(五眼)
오안(五眼)은 다섯 가지 안력(眼力)이다.
① 육안(肉眼)은 육신(肉身)에 있는 눈.
② 천안(天眼)은 색계(色界) 천인(天人)의 눈으로 중생의 미래생사를 아는 능력이 있는 눈.
③ 혜안(慧眼)은 이승인(二乘人)의 안(眼)으로서 진공무상(眞空無相), 곧 일체의 현상은 공(空)에 있어서 결정된 특질이 없다고 꿰뚫어 보는 눈.
④ 법안(法眼)은 보살이 일체중생을 구제하기 때문에 일체의 법문(法門)을 조견(照見)하는 눈.
⑤ 불안(佛眼)은 앞의 네 가지 눈을 전부 갖춘 눈이다.
삼론종(三論宗)의 길장(吉藏)은 ① 육안(肉眼)은 인간(人間) ② 천안(天眼)은 천신(天神) ③ 혜안(慧眼)은 성문(聲聞), 연각(緣覺) ④ 법안(法眼)은 보살(菩薩) ⑤ 불안(佛眼)은 부처님의 눈으로 보고 있다.
◎ 오온(五蘊, pañca-kkhandā)
불교는 개인과 중생을 예외 없이 오온(五蘊, pañca-kkhandā)으로 해체하고 분석한다. 빨리어로 칸다(khanda)는 무더기, 더미, 적집(積集)이란 뜻으로 정신과 물질(名色, nāma-rūpa)을 이루는 5가지 무더기라는 의미에서 사용한 말이다. 또 오취온(五取蘊, pañca-upādāna-kkhandā)이라는 말은 중생들이 이러한 색·수·상·행·식의 무더기일 뿐인 자아를, 나, 나의 것이라고 집착하기 때문에 집착하는 무더기라는 의미에서 오취온이라고 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오온과 오취온은 욕계, 색계, 무색계 중생들의 입장에서는 동의어이다. 하지만 성자의 경우에는 오온에 대한 집착이 멸하였기 때문에 단순한 객관적 현상으로만 존재한다. (1) 색온(色蘊, rūpa-kkhandha) - 물질의 무더기물질이라 번역되는 루빠(rūpa)는 「앗타살리니」(Asl.2-3)에 따르면 ruppati(변형되다, 훼방놓다, 혹사당하다, 짓눌리다, 파괴되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말이라고 한다. 주석가들은 ‘물질을 루빠라고 하는 이유는 추위와 더위와 같은 혐오스러운 물리적 조건으로 인하여 변화를 격기 때문이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PED에서 ‘form, figure, appearance, principle of form, etc.’ 등으로 설명되듯이, 물질로 된 몸뚱어리, 형상, 모습 등을 의미한다. 더 구체적으로는 지·수·화·풍의 사대(四大), 안·이·비·설·신/색·성·향·미·촉의 오내외입처(五內外入處)와 같은 물질일반을 나타내며 아비담마에서는 이를 더 세분화하여 28가지 물질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중국에서 색(色)으로 번역했고, 영어로는 material body, corporeality라 한다. (2) 수온(受蘊, vedanā-kkhandha) - 느낌의 무더기느낌이라 번역되는 웨다나(vedanā)는 모든 마음에 공통되는 7가지 마음의 작용(sabbacittasādhāraṇa-cetasika) 중의 하나이다. PED에서 ‘feeling, sensation. Three modes of feeling (usually understood whenever mention is made of ‘tisso vedanā’): sukhā (pleasant), dukkhā (painful) adukkha-ma-asukhā (indifferent) or: kusalā, akusalā, avyākatā.’라고 설명되듯이, 웨다나(vedanā)는 감각의 육문(六門)을 통해 경험되는 즐거운 느낌(sukhā-vedanā), 괴로운 느낌(dukkhā-vedanā),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adukkha-ma-asukhā-vedanā)을 의미한다. 경장에서는 이렇게 세 가지 느낌으로 나타나지만 아비담마에서는 느낌을 느끼는 기관 혹은 기능(根, indriya)에 따라서 육체적인 느낌인 즐거움(sukkha)과 고통(dukkha),정신적인 느낌인 기쁨(somnassa)과 불만족(domanassa),중립적인 평온(upekkhā)의 다섯 가지 느낌을 설한다. 그리고 12연기(paṭṭicca-samuppāda)에서는 감각접촉(phassa)을 조건으로 갈애(taṇhā)를 일으키는 위치에 있다. 중국에서 수(受)라 번역했고, 영어로는 feeling, sensation이라 한다. (3) 상온(想蘊, saññā-kkhandha) - 인식의 무더기인식으로 번역되는 산냐(saññā)는 saṃ(함께)+√jñā(알다)에서 파생된 여성명사이다. 어원적으로 보면 ‘함께 아는 것’이라는 뜻이다. PED에서 ‘sense, perception, discernment, recognition, assimilation of sensations, awareness‘라고 설명되듯이, 개념적인 지각이나 파악을 뜻하는 마음의 작용이다. 다시 말해서 대상을 받아들여 개념작용을 일으키고 이름 붙이는 마음의 작용이다. 예를 들어 여기에 꽃이 있다면 그것을 그냥 꽃이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또는 어린이가 “이 분은 너의 아버지이고 이 분은 너의 어머니이다.”라는 말을 들으면 ‘아빠’, ‘엄마’라고 머릿속에 기억하고, 비행기를 보면 이것은 비행기이고 이것들은 날개이고 이것은 동체 등이라고 인식하는 것과도 같다. 이러한 산냐가 없으면 우리는 자신의 이름, 부모, 가족, 집 등을 기억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모든 마음에 공통되는 7가지 마음의 작용(sabbacittasādhāraṇa-cetasika) 중의 하나에 속하고 있다. 그리고 외적인 대상의 지향에 따라, 형상에 대한 인식, 소리에 대한 인식, 냄새에 대한 인식, 맛에 대한 인식, 감촉에 대한 인식, 마음의 대상에 대한 인식의 6가지로 구분된다. 즉 느낌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인식도 감각의 육문(六門)을 통해 일어나는 것이다. 중국에서 상(想)이라 번역했고, 영어로는 perception이라 한다. (4) 행온(行蘊, saṅkhārā-kkhandha) - 행의 무더기행이라 번역되는 상카라(saṅkhārā)는 우리말로 번역하기에 가장 어려운 불교술어중의 하나이다. 오온에서는 52가지 마음의 작용 가운데서 느낌(vedanā)과 인식(saññā)을 제외한 나머지 마음의 작용 모두를 뜻하는데 감각접촉(phassa), 의도(cetanā), 주의 기울임(manasikāra), 집중(ekaggatā), 의욕(chanda), 선한 마음(kusala-citta), 불선한 마음(akusala-citta)을 모두 포함한다. 그리고 오온에서 느낌(受, vedanā), 인식(想, saññā), 식(識, viññāṇa)은 항상 단수로 나타나지만 행(行)은 항상 복수로 나타난다.(12연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것만 보아도 행(行)이 우리의 정신영역 가운데서 수(受), 상(想), 식(識)을 제외한 모든 마음의 작용을 포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 행(行)으로 번역했고, 영어로는 mental activities, mental formation이라 한다. (5) 식온(識蘊, viññāṇa-kkhandha) - 식의 무더기식(識)이라 번역되는 윈냐나(viññāṇa)는 vi(분리해서)+√jñā(알다)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PED에서 ‘(as special term in Buddhist metaphysics) a mental quality as a constituent of individuality, the bearer of (individual) life, life-force (as extending also over rebirths), principle of conscious life, general consciousness (as function of mind and matter), regenerative force, animation, mind as transmigrant, as transforming (according to individual kamma) one individual life (after death) into the next. In this (fundamental) application it may be characterized as the sensory and perceptive activity commonly expressed by "mind."’라고 설명되고 있다. 감각의 육문을 통해 외부의 감각대상들을 ‘아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식은 느낌(vedanā), 인식(saññā), 행(saṅkārā)과 같은 마음의 작용의 도움으로 대상을 아는 것이다. 이러한 식은 아비담마에서 말하는 마음(心, citta)과 일치한다. 중국에서 식(識)이라 번역했고, 영어로는 consciousness라 한다. 이 가운데 식온(識蘊)은 아비담마의 마음(citta)과 일치하고 수온(受蘊), 상온(想蘊), 행온(行蘊)은 마음의 작용(cetasika)과 일치하며, 색온(色蘊)은 물질(rūpa)과 일치한다. 그러나 모든 수, 상, 행에는 식이 반드시 함께한다. 아니 한 개체 안에서 오온(五蘊)은 함께 일어나고 함께 소멸한다. 물론 아비담마에 의하면 물질(색)과 정신(수·상·행·식)의 생멸속도는 다르다. 정신은 물질보다 16배 혹은 17배 빠르다고 한다. 먼저 한 개체에 있어서 오온은 함께 일어나고 함께 소멸한다. 그리고 오온과 같은 개념으로써 명색(名色, nāma-rūpa)이라는 단어가 경에서는 주로 12연기의 하나의 구성요소로 많이 나타난다. 나라는 존재를 더미나 무더기, 적집(積集)의 측면을 강조해서 사용한 언어가 오온(五蘊)이고, 나라는 존재에 정신과 물질의 조합이라는 측면을 강조한 것이 명색(名色)이다.
◎ 오취온(五取蘊, pañca-upādāna-kkhandā)
불교는 개인과 중생을 예외 없이 오온(五蘊, pañca-kkhandā)으로 해체하고 분석한다. 빨리어로 칸다(khanda)는 무더기, 더미, 적집(積集)이란 뜻으로 정신과 물질(名色, nāma-rūpa)을 이루는 5가지 무더기라는 의미에서 사용한 말이다. 또 오취온(五取蘊, pañca-upādāna-kkhandā)이라는 말은, 중생들이 이러한 물질, 느낌, 인식, 행, 식의 무더기일 뿐인 자아를, 나, 나의 것이라고 집착하기 때문에 집착하는 무더기라는 의미에서 오취온이라고 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오온과 오취온은 욕계, 색계, 무색계 중생들의 입장에서는 동의어이다. 하지만 성자의 경우에는, 오온에 대한 집착이 멸하였기 때문에 단순한 객관적 현상으로만 존재한다.
(1) 색온(色蘊, rūpa-kkhandha) - 물질의 무더기물질이라 번역되는 루빠(rūpa)는 「앗타살리니」에 따르면 ruppati(변형되다, 훼방 놓다, 혹사당하다, 짓눌리다, 파괴되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말이라고 한다. 주석가들은 ‘물질을 루빠라고 하는 이유는 추위와 더위와 같은 혐오스러운 물리적 조건으로 인하여 변화를 격기 때문이다.’라고 해석하고 있다.(Asl.2-3) PED에서 ‘form, figure, appearance, principle of form, etc.’ 등으로 설명되듯이, 물질로 된 몸뚱어리, 형상, 모습 등을 의미한다. 더 구체적으로는 지·수·화·풍의 사대(四大), 안·이·비·설·신/색·성·향·미·촉의 오내외입처(五內外入處)와 같은 물질일반을 나타내며 아비담마에서는 이를 더 세분화하여 28가지 물질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중국에서 색(色)으로 번역했고, 영어로는 material body, corporeality라 한다.
(2) 수온(受蘊, vedanā-kkhandha) - 느낌의 무더기느낌이라 번역되는 웨다나(vedanā)는 모든 마음에 공통되는 7가지 마음의 작용(sabbacittasādhāraṇa-cetasika) 중의 하나이다. PED에 ‘feeling, sensation. Three modes of feeling (usually understood whenever mention is made of ‘tisso vedanā’): sukhā (pleasant), dukkhā (painful) adukkha-ma-asukhā (indifferent) or:kusalā, akusalā, avyākatā.’이라고 설명되듯이, 웨다나(vedanā)는 감각의 육문(六門)을 통해 경험되는 즐거운 느낌(sukhā-vedanā), 괴로운 느낌(dukkhā-vedanā),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adukkha-ma-asukhā-vedanā)을 의미한다. 경장에서는 이렇게 세 가지 느낌으로 나타나지만 아비담마에서는 느낌을 느끼는 기관 혹은 기능(根, indriya)에 따라서 육체적인 느낌인 즐거움(sukkha)과 고통(dukkha),정신적인 느낌인 기쁨(somnassa)과 불만족(domanassa),중립적인 평온(upekkhā)의 다섯 가지 느낌을 설한다. 그리고 12연기(paṭṭicca-samuppāda)에서는 감각접촉(phassa)을 조건으로 갈애(taṇhā)를 일으키는 위치에 있다. 중국에서 수(受)라 번역했고, 영어로는 feeling, sensation이라 한다.
(3) 상온(想蘊, saññā-kkhandha) - 인식의 무더기인식으로 번역되는 산냐(saññā)는 saṃ(함께)+√jñā(알다)에서 파생된 여성명사이다. 어원적으로 보면 ‘함께 아는 것’이라는 뜻이다. PED에 ‘sense, perception, discernment, recognition, assimilation of sensations, awareness‘라고 설명되듯이, 개념적인 지각이나 파악을 뜻하는 마음의 작용이다. 다시 말해서 대상을 받아들여 개념작용을 일으키고 이름 붙이는 마음의 작용이다. 예를 들어 여기에 꽃이 있다면 그것을 그냥 꽃이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또는 어린이가 “이 분은 너의 아버지이고 이 분은 너의 어머니이다.”라는 말을 들으면 ‘아빠’, ‘엄마’라고 머릿속에 기억하고, 비행기를 보면 이것은 비행기이고 이것들은 날개이고 이것은 동체 등이라고 인식하는 것과도 같다. 이러한 산냐가 없으면 우리는 자신의 이름, 부모, 가족, 집 등을 기억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모든 마음에 공통되는 일곱 가지 마음의 작용(sabbacittasādhāraṇa-cetasika) 중의 하나에 속하고 있다. 그리고 외적인 대상의 지향에 따라, 형상에 대한 인식, 소리에 대한 인식, 냄새에 대한 인식, 맛에 대한 인식, 감촉에 대한 인식, 마음의 대상에 대한 인식의 6가지로 구분된다. 즉 느낌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인식도 감각의 육문(六門)을 통해 일어나는 것이다. 중국에서 상(想)이라 번역했고, 영어로는 perception이라 한다.
(4) 행온(行蘊, saṅkhārā-kkhandha) - 행의 무더기행이라 번역되는 상카라(saṅkhārā)는 우리말로 번역하기에 가장 어려운 불교술어 중의 하나이다. 오온에서는 52가지 마음의 작용 가운데서 느낌(vedanā)과 인식(saññā)을 제외한 나머지 마음의 작용 모두를 뜻하는데 감각접촉(phassa), 의도(cetanā), 주의 기울임(manasikāra), 집중(ekaggatā), 의욕(chanda), 선한 마음(kusala-citta), 불선한 마음(akusala-citta)을 모두 포함한다. 그리고 오온에서 느낌(受, vedanā), 인식(想, saññā), 식(識, viññāṇa)은 항상 단수로 나타나지만 행(行)은 항상 복수로 나타난다.(12연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것만 보아도 행(行)이 우리의 정신영역 가운데서 수(受), 상(想), 식(識)을 제외한 모든 마음의 작용을 포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 행(行)으로 번역했고, 영어로는 mental activities, mental formation이라 한다.
(5) 식온(識蘊, viññāṇa-kkhandha) - 식의 무더기식(識)이라 번역되는 윈냐나(viññāṇa)는 vi(분리해서)+√jñā(알다)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PED에서 ‘(as special term in Buddhist metaphysics) a mental quality as a constituent of individuality, the bearer of (individual) life, life-force (as extending also over rebirths), principle of conscious life, general consciousness (as function of mind and matter), regenerative force, animation, mind as transmigrant, as transforming (according to individual kamma) one individual life (after death) into the next. In this (fundamental) application it may be characterized as the sensory and perceptive activity commonly expressed by "mind."’라고 설명되고 있다. 감각의 육문을 통해 외부의 감각대상들을 ‘아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식은 느낌(vedanā), 인식(saññā), 행(saṅkārā)과 같은 마음의 작용의 도움으로 대상을 아는 것이다. 이러한 식은 아비담마에서 말하는 마음(心, citta)과 일치한다. 중국에서 식(識)이라 번역했고, 영어로는 consciousness라 한다. 이 가운데 식온(識蘊)은 아비담마의 마음(citta)과 일치하고 수온(受蘊), 상온(想蘊), 행온(行蘊)은 마음의 작용(cetasika)과 일치하며, 색온(色蘊)은 물질(rūpa)과 일치한다. 그러나 모든 수, 상, 행에는 식이 반드시 함께한다. 아니 한 개체 안에서 오온(五蘊)은 함께 일어나고 함께 소멸한다. 물론 아비담마에 의하면 물질(색)과 정신(수·상·행·식)의 생멸속도는 다르다. 정신은 물질보다 16배 혹은 17배 빠르다고 한다. 먼저 한 개체에 있어서 오온은 함께 일어나고 함께 소멸한다. 그리고 오온과 같은 개념으로써 명색(名色, nāma-rūpa)이라는 단어가 경에서는 주로 12연기의 하나의 구성요소로 많이 나타난다. 나라는 존재를 더미나 무더기, 적집(積集)의 측면을 강조해서 사용한 언어가 오온(五蘊)이고, 나라는 존재에 정신과 물질의 조합이라는 측면을 강조한 것이 명색(名色)이다.
◎ 오취온(五取蘊)에 내재된 괴로움의 짐
이를 오취온의 괴로움, 즉 오취온고(五取蘊苦), 오음성고(五陰盛苦)라고 한다. 태어남(jāti), 늙음(jarā), 죽음(maraṇa), 슬픔(soka), 비탄(parideva), 육체적 고통(dukkha), 정신적 고통(domanassa), 절망(upāyāsa), 싫어하는 것과 만남(appiyasampayoga),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piyavippayoga),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icchitālābha)의 총 11가지의 괴로움은 모두 오취온(五取蘊)이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래서 이 오취온 자체가 바로 고성제(苦聖諦)이다. 다시 말해서 고성제의 핵심은 바로 이 오취온의 괴로움이다. 오온을 나, 나의 것으로 집착하는 것이 괴로움이라는 뜻이다. 중생계의 모든 정신과 물질(nāma-rūpa)은 반드시 집착(upādāna)과 연결되어 있다. 그것이 욕계든 색계든 무색계든 존재하는 모든 것(오온=오취온=일체유위법)은 반드시 집착을 야기하고 그렇기 때문에 괴로움을 바로 오취온고(五取蘊苦), 또는 오음성고(五陰盛苦)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미세한 집착은 아나함에 이르기까지 남아있으며 그래서 아나함과를 증득한 사람들은 정거천(淨居天)이라는 색계천(色界天)에 태어난다. 그러므로 오취온의 괴로움은 아라한이 되어서야 궁극적으로 해결되는 것이다.
◎ 욕취(欲取)
욕취(欲取)는 사취(四取)의 하나. 취(取, upāpāna)는 번뇌의 다른 이름으로 외계의 대상에 집착하는 것이다. 사취(四取)란 ① 욕취(欲取, kāmaupāpāna),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의 다섯 가지 대상에 집착하는 애욕(愛欲). ② 견취(見取, drstiupāpāna), 오온(五蘊)의 법(法)에 대해서 아견(我見)·변견(邊見) 등을 망집(妄執)으로 하는 그릇된 견해. ③ 계금취(戒禁取, śila-vrata upāpāna), 그릇된 계(戒)를 수행하는 것. ④ 아어취(我語取, ātma-vāda upāpāna), 아견(我見)·아만(我慢)에 집착하는 것이다. 『구사론(俱舍論)』에서는 백팔번뇌를 사취(四取)로 나눈다. 『연기경(緣起經)』 (大2 p.547c), 『집이문론(集二門論)』권8(大26 p.399c), 『구사론(俱舍論)』 권20(大29 p.107b24)에 보인다.
◎ 와서 보라
‘와서 보라’로 번역되는 에히빠시코(ehipassiko)에서 ehi는 ā([이곳을] 향하여) + √i(to go)의 명령형으로 ‘오라’는 뜻이고, passiko는 √dṛś(to see)의 명사형으로 ‘보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와서 보라’는 뜻이 된다. 불교에서 중요시하는 것은 신비주의나 맹목적으로 믿는 게 아니고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如實知見]이다. 주먹을 펴 보이면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명백히 알게 되고 그렇게 되면 믿음이나 맹신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그래서 불교는‘와서 믿으라’는 가르침이 아니고 ‘와서 보라(ehipassika)’는 가르침이다.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을 때는 끝까지 탐구해야 한다. 「깔라마경」(A3:65)에서 부처님은 "거듭 들어서 얻어진 지식이라 해서, 전통이 그러하다고 해서, 소문이 그렇다고 해서, 성전에 써 있다고 해서, 추측이 그렇다고 해서, 일반적 원칙에 의한 것이라 해서, 그럴듯한 추리에 의한 것이라 해서, 곰곰이 궁리해낸 견해이기에 그것에 대해 갖게 되는 편견 때문에, 다른 사람의 그럴듯한 능력 때문에 그대로 따르지는 말라. 그대 칼라마인들이여, 스스로 `이들은 나쁜 것이고, 이들은 비난받을 일이며, 이들은 지혜로운 이에게 책망 받을 일이고, 이들이 행해져 그대로 가면 해롭고 괴롭게 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것들을 버리도록 하라. … 어떻게 생각하는가, 칼라마인들이여. 사람의 마음속에 탐욕이 일어난다면 … 분노가 일어나면 … 어리석음이 일어난다면 그것이 그에게 이로움이 되겠는가 해로움이 되겠는가?”라고 하셨다. 보면 알게 되고 알면 속지 않는다. 보아서 알게 되어 생기는 편안함, 즐거움, 가벼움, 밝음, 고요함, 그래서 생기는 확신, 이런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믿음인 것이다. 불교 경전에서는 안다라는 뜻의 자나띠(jānāti)와 본다라는 뜻의 빳사띠(passati)라는 두 단어가 함께 수없이 많이 등장하고 이 두 단어가 합성해서 생긴 명사 냐나닷사나(ñāṇa-dassana)라는 용어도 중요한 술어로서 많이 나타난다. 그만큼 불교에서는 맹목적 믿음보다는 보고 아는 것을 중요시하고 이것을 신행의 출발로 삼고 있다 하겠다. 와서 보라는 법의 특성은 「청정도론」(Vis. VI.68~88)에 다음과 같이 잘 나타나 있다. "법은 세존에 의해서 잘 설해졌고,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시간을 벗어나 있고, 와서 보라는 것이고, 향상으로 인도하고, 지자들에 의해 직접 알아지는 것이다."
◎ 와소
와소(Wāso)는 대략 양력 6월~7월에 해당하는 미얀마력의 명칭으로 비가 많이 내리는 우기雨期에 해당한다. 이때 비구들은 여행을 삼가하고 3개월 동안 한곳에서 안주하며 수행에만 전념한다. 이 와소가 끝나면 비구들의 법랍法臘이 1년 추가되며, 안거가 모두 끝날 때 비구들에게 가사를 보시하는 까띠나(kaṭhina)의식이 미얀마 전역에서 성대하게 열린다.
◎ 와싸(Vassa)
‘우안거(雨安居)’라 번역한 와싸(Vassa)는 ‘비, 소나기, 우기(雨期)’를 뜻하는 말이다. 우안거란 비구들이 우기철에는 유행遊行을 하지 않고 한 곳에 머물면서 하는 수행 전통을 말한다.인도의 우기철은 (1) 아살하(Āsāḷha) (2) 사와나(Sāvaṇa) (3) 밧다라(Bhaddhara 혹은 Poṭṭhapāda) (4) 아사유자(Assayuja 또는 Pubba-kattikā) (5) 파찌마까띠까(Pacchima-kattikā)의 다섯 달로 구성된다. 그것은 대충 양력 6월부터 10월까지이다. 비구들은 아살하 달의 보름에 시작해서 앗사유자 달의 보름까지 석 달간의 결제를 한다. 우기철에는 초목이 자라고 곤충과 양서류 같은 작은 동물들이 활발히 활동하므로 이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 어느 종교집단에서나 외출과 여행을 하지 않고 일정한 곳에 머무르는 습관이 고대 인도에 있었다. 하지만 처음 승가가 성립될 무렵에는 이러한 우안거의 규정이 없었기 때문에 비구들은 시기에 구애됨이 없이 포교활동으로 분주히 돌아다녔다. 얼마 안 있어 외부로부터 비난의 소리가 높아지자 부처님께서 비로소 승가에도 우안거의 제도를 도입하신 것이다. 이 우안거 동안 비구들은 스승이나 선배로부터 설법을 듣고 지도를 받으며 정진한다. 대승불교권인 북방불교에서는 여름철의 안거 이외에 음력 10월 16일부터 다음해 정월 15일까지를 동안거(冬安居)라고 하여 하안거와 같이 행한다. 안거가 끝날 때는 자자(自恣, pavāraṇā)라는 의식이 거행되는데, 이때 모든 비구들은 지위나 서열에 관계 없이 안거 기간 동안의 부적절한 행동에 대해 승원 내의 다른 비구에게 기꺼이 훈계를 받는다. 모이는 비구의 수는 그때의 상황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으나 평상시에는 멀리 나가 있던 비구들도 한자리에 모이기 때문에 교단의 중요한 문제를 처리하는 데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우안거 기간에는 정해진 장소에서 함부로 외출하는 일이 금지되어 있었는데, 긴급을 요하는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특례가 인정되었다. 이를테면 비구가 병을 앓는다거나 일신상의 중대한 문제가 일어났을 때 또는 신자로부터 보시의 신청이 있을 때, 재난을 만났을 때가 여기에 해당된다. 그렇더라도 외출은 7일간의 한도이므로 그 기간 안에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된다. 다만 맹수나 화재나 수해 혹은 필요한 음식을 얻을 수 없을 경우, 또는 수행에 방해되는 사태가 생겼을 때에는 다른 장소로 옮기는 것도 허락되어 있었다. 또한 매년의 우안거는 승가에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안거를 몇 차례 겪었느냐 하는 것은 그 비구의 법랍(法臘)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안거를 계기로 승가는 기존의 유행생활에서 정주생활로 차츰 변해갔으며, 재가자들이 좀더 자주, 좀더 많은 보시를 하게 됨에 따라 승가는 경제적으로 윤택해졌다. 그에 따라 매년 안거 기간 동안 비구들이 거주할수 있는 영구적인 형태의 승원(vihāra)과 원림(ārāma)이 건축되어 명상과 연구의 중심지로 정착되어갔다. ◎ 외도(外道)‘외도(外道)’로 번역된 아냐티띠야(aññatitthiya)는 ‘다른 쪽 여울에 있는 자’라는 뜻이며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 이외의 다른 길을 가는 자라는 의미로 쓰인다. 그래서 중국에서 외도(外道)로 옮겼고 영역은 heretic이다. 부처님 당시의 이런 외도 수행자로는 주로 편력수행자(paribbājaka)들이 언급되고 있으며 그 외 사문(沙門, samaṇa), 바라문(bramaṇa), 나체 수행자(acela)들이 언급되고 있다. 아울러 경에서는 육사외도(六師外道)로 정리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들 가운데 바라문들은 주로 결혼한 자들이었으며 다른 자들은 대부분 독신 수행자로 이들은 모두 각 파에서 설정한 해탈을 추구하며 수행을 하던 자들이었다. 한편 주석서와 복주석서에는 bāhiraka(밖에 있는 사람)란 표현도 많이 사용하며 경에서도 드물게 나타나고 있다.
◎ 욕계의 선한 마음(kāmāvacara-kusala-cittā)
욕계의 선한 마음(kāmāvacara-kusala-cittā)은 세 가지 원칙에 기초하여 8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그 세 가지 원칙이란 (1) 기쁨(somanassa)과 평온(upekkhā)이라는 느낌의 마음의 작용, (2) 지혜(ñāṇa)의 있고 없음, (3) 자극(saṅkhārika)의 있고 없음이다.
◎ 우빠사카(upāsaka)
우빠사카(upāsaka)는 재가의 남자 신도를 이르는 말로 중국에서 우바새(優婆塞)로 음역하거나, 청신사(淸信士)라고 번역했다. 그리고 우빠시카(upāsikā)는 재가의 여신도를 이르는 말로 중국에서 우바이(優婆夷)로음역하거나, 청신녀(淸信女)로 번역했다. 우빠사카와 우빠시카는 모두 upāsati(가까이 앉다, 시중들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말이다. 재가 신도는 불∙법∙승 삼보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지니고 오계를 지키는 생활을 해야 하며, 무기, 산목숨, 고기, 술, 독을 다루는 생업에 종사해서는 안 된다.(A.v.177; A.viii.75)
“부처님께 귀의한 사람들은 나쁜 세계에 떨어지지 않고 사람의 몸을 벗어나 천인의 몸을 얻는다.” (D.ii.204; S.i.25)
◎ 우안거(安居)
‘우안거(安居)’라 번역한 와싸(Vassa)는 ‘비, 소나기, 우기(雨期)’를 뜻하는 말이다. 즉 우안거란 비구들이 우기철에는 유행遊行을 하지 않고 한 곳에 머물면서 하는 수행 전통을 말한다. 인도의 우기철은 (1) 아살하(Āsāḷha), (2) 사와나(Sāvaṇa), (3) 밧다라(Bhaddhara 혹은 Poṭṭhapāda), (4) 아사유자(Assayuja 또는 Pubba-kattikā), (5) 파찌마까띠까(Pacchima-kattikā)의 다섯 달로 구성된다. 그것은 대충 양력 6월부터 10월까지이다. 비구들은 아살하 달의 보름에 시작해서 앗사유자 달의 보름까지 석 달간의 결제를 한다. 우기철에는 초목이 자라고 곤충과 양서류 같은 작은 동물들이 활발히 활동하므로 이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 어느 종교집단에서나 외출과 여행을 하지 않고 일정한 곳에 머무르는 습관이 고대 인도에 있었다. 하지만 처음 승가가 성립될 무렵에는 이러한 우안거의 규정이 없었기 때문에 비구들은 시기에 구애됨이 없이 포교활동으로 분주히 돌아다녔다. 얼마 안 있어 외부로부터 비난의 소리가 높아지자 부처님께서 비로소 승가에도 우안거의 제도를 도입하신 것이다. 이 우안거 동안 비구들은 스승이나 선배로부터 설법을 듣고 지도를 받으며 정진한다. 대승불교권인 북방불교에서는 여름철의 안거 이외에 음력 10월 16일부터 다음해 정월 15일까지를 동안거(冬安居)라고 하여 하안거와 같이 행한다. 안거가 끝날 때는 자자(自恣, pavāraṇā)라는 의식이 거행되는데, 이때 모든 비구들은 지위나 서열에 관계 없이 안거 기간 동안의 부적절한 행동에 대해 승원 내의 다른 비구에게 기꺼이 훈계를 받는다. 모이는 비구의 수는 그때의 상황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으나 평상시에는 멀리 나가 있던 비구들도 한자리에 모이기 때문에 교단의 중요한 문제를 처리하는 데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우안거 기간에는 정해진 장소에서 함부로 외출하는 일이 금지되어 있었는데, 긴급을 요하는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특례가 인정되었다. 이를테면 비구가 병을 앓는다거나 일신상의 중대한 문제가 일어났을 때 또는 신자로부터 보시의 신청이 있을 때, 재난을 만났을 때가 여기에 해당된다. 그렇더라도 외출은 7일간의 한도이므로 그 기간 안에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된다. 다만 맹수나 화재나 수해 혹은 필요한 음식을 얻을 수 없을 경우, 또는 수행에 방해되는 사태가 생겼을 때에는 다른 장소로 옮기는 것도 허락되어 있었다. 또한 매년의 안거는 승가에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안거를 몇 차례 겪었느냐 하는 것은 그 비구의 법랍(法臘)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안거를 계기로 승가는 기존의 유행생활에서 정주생활로 차츰 변해갔으며, 재가자들이 좀더 자주, 좀더 많은 보시를 하게 됨에 따라 승가는 경제적으로 윤택해졌다. 그에 따라 매년 안거 기간 동안 비구들이 거주할수 있는 영구적인 형태의 승원(vihāra)과 원림(ārāma)이 건축되어 수행과 연구의 중심지로 정착되어갔다. ◎ 욱가(Uggā) 욱가(Uggā)는 키가 크고 덕스러운 성품을 지녔기 때문에 ‘고상한’이란 뜻의 욱가라고 불렸다 한다. 그는 세존을 처음 뵙고 수다원과를 얻었고 뒤에는 아나함과를 얻었다고 한다. 세존께서는 앙굿따라 니까야(A1:14)에서 욱가를 마음에 흡족한 공양을 올리는 자(manāpa-dāyaka)들 가운데 으뜸이라고 칭찬하셨다.
◎ 운명론(niyata-vāda)
운명론(niyata-vāda)이란 인간의 행위를 포함하여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것이 정해진 때와 장소에서 일어나도록 미리 정해졌다고 생각하는 철학사조이다. 숙명론(宿命論) 또는 결정론(決定論)이라고도 한다. 고대 인도에서는 육사외도(六師外道) 중 하나인 막칼리 고살라(Makkhali Gosāla)가 주장한 학설이었다.
◎ 원인
‘원인’이라 번역한 사무다야(samudaya)는 saṁ(함께)+ud(위로)+√i(가다)에서 파생된 남성명사로 ‘일어남,생겨남,발생,기원,원인’ 등을 뜻한다. 구체적으로는 괴로움의 원인, 즉 사제(四諦) 가운데 집제(集諦)를 뜻한다. ◎ 웨야까라나(veyyākaraṇa) ‘설명’으로 번역한 웨야까라나(veyyākaraṇa)는 PED에서 ‘answer, explanation, exposition.’이라 설명되듯이, ‘답변, 설명, 해설, 가르침’이란 뜻이다. 또한 구분교(九分敎, navaṅga-sāsana)에서 세 번째로 나타나는데 주석서에서는 “게송이 없는 경(niggāthaka-sutta)”라고 정의하고 있으며 “게송 부분이 없기 때문에 웨야까라나라 불린다.”(DA.i.130)라고 설명하고 있다. 대승경전에서는 ‘부처님이 수행자에게 내리는 깨달음의 약속’이라는 뉘앙스로 설명되기 때문에 빨리 원전에 나타나는 본래 개념과는 다소 동떨어져 있다. 중국에서는 화가라나(和伽羅那)로 음역하거나 수기(授記)나 수기(受記) 등으로 번역하였다.
◎ 완전한 앎(parinna)
다른 말로 '회득지(會得智)'로도 번역이 되는데, 번뇌를 소멸한 상태에서 지니는 앎을 가리킨다. SN. vol 3, pp26.160에 "비구들이여, 탐냄의 소멸, 성냄의 소멸, 어리석음의 소멸이 있다.
비구들이여, 바로 이것을 완전한 앎이라 한다(yo bhikkhaveragakkhayo dosakkhayo mohakkhayo. ayam vuccati bhikkhave parinnati)" 라는 구절이 있다.
◎ 위니빠띠까(vinipātika) 천인
위니빠띠까(vinipātika) 천인은 위니빠띠까 아수라(vinipātika-asura)라고도 하는데, 타락한 아수라라는 뜻이며 그들은 네 가지 나쁜 세계에 속하는 저급한 아수라가 아니라 선한 세계에 속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들은 노란색, 흰색, 검은색, 황금색, 검푸른 색 등이고 몸도 크거나 작거나 길어서 다르다. 인식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세 가지 원인을 가진 자가 있고, 두 가지 원인을 가진 자가 있고, 원인 없는 인식을 가진 자가 있다. 이들은 천인들처럼 큰 위력을 가지지는 못하였으며 가난한 인간들처럼 위력이 없고 겨우 몸을 가리는 천조차도 얻기 힘들고 괴로움에 압도되어 머문다. 어떤 자들은 상현(上弦)에는 고통을 받고 하현(下弦)에서 즐거움을 얻는다고 한다.(AA.iv.25~26) 이들은 마을이나 마을 가까운 곳에 살면서 마을 사람들이 버린 음식 등을 먹고 사는 정령들로 음식을 구하지 못하면 사람들을 괴롭히거나 홀린다고 한다.
◎ 위빠사나
위빠사나란 vi(분리해서)+passati(보다)에서 파생된 명사로 '분리해서 다르게 본다'는 뜻이다. 어원상으로 볼 때, 그냥 보는 것(sight)에 머무르지 않고 더 깊이 보는 것(in-sight)을 의미한다. PED에서도 ‘inward vision, insight, intuition, introspection.’이라 설명되듯이, ‘안으로 들여다 봄, 꿰뚫어 봄, 직관(直觀), 내관(內觀)’ 등을 의미한다. 그래서 영어권에서는 보통 insight라 옮기고, 중국에서는 과거에 관(觀)으로 옮겼는데 요즘은 어원에 더 충실하여 내관(內觀)으로 옮기고 있다. 위빠사나는 바로 지금 일어나는 정신과 물질의 현상에 대한 무상(anicca), 고(dukkha), 무아(anatta)의 세 가지 성품을 통찰, 혹은 꿰뚫는 것을 뜻한다. 오온(五蘊)의 무상·고·무아를 철견함으로써 탐욕, 성냄, 어리석음, 사견, 자만, 의심 등과 같은 열 가지 번뇌를 제거할 수 있고 그렇게 했을 때 모든 괴로움의 종식인 깨달음에 이룰 수 있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찰나집중(khaṇika-samādhi)이 필요한데 이러한 찰나집중은 오온(五蘊)에 대한 지속적이고 끊임없는 알아차림(sati)를 통해 얻어진다.
◎ 위빠시(Vipassi)
위빠시(Vipassi)는 과거 일곱 부처님 가운데 91겁 전에 출현한 맨 첫째 부처님이다. 주석서(DA.ii.454)에 따르면 위빠시라는 이름은 (1) 하늘 눈[天眼]으로 낮이든 밤이든 1유순 안에 있는 것을 두루 보았고, (2) 태어나면서부터 삼심삼천의 천인들처럼 눈을 깜빡이지 않고 보았고, (3) 왕자로 있을 때 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바른 방법으로 면밀하게 정무를 보았다고 해서 그렇게 불렸다고 한다. 과거의 부처님은 무수히 많지만 불전에서는 그 중에서도 비교적 가까운 시기에 출현하신 일곱 부처님과 행운의 겁에 출현하신 네 분의 부처님을 과거불로 정리하고 있다. 그러고 이러한 과거 부처님들의 일대기를 모은 것이 바로 「붓다왐사(佛種姓經, Buddhavaṃsa)」이다 과거 칠불은 ➀ 위빳시 부처님(毘婆尸佛, Vipassi Buddha), ➁ 시키 부처님(尸棄佛, Sikhi Buddha), ➂ 웻사부 부처님(毘舍浮佛, Vessabhu Buddha), ④ 까꾸산다 부처님(拘留孫佛, Kakusandha Buddha), ⑤ 코나가마나 부처님(拘那含牟尼佛, Konagamana Buddha), ⑥ 까사빠 부처님(迦葉佛, Kassapa Buddha), ⑦ 고따마 부처님(瞿曇佛, Gotama Buddha)이다. 이 중에서 현겁에 출현하신 부처님은 ④ 까꾸산다 부처님, ⑤ 코나가마나 부처님, ⑥ 까사빠 부처님, ⑦ 고따마 부처님의 네 분이다. 그리고 현겁이 아직 끝나지 않은 미래에 오실 부처님은 멧떼야 부처님(彌勒佛, Metteyya Buddha)이다. 주석서(DA.ii.410)에 따르면 멧떼야 부처님을 포함하여 다섯 분의 부처님들께서 출현하시어 장엄하시는 멋진 겁이요 핵심이 되는 겁이라고 세존께서 칭찬하셨기 때문에 현재의 겁을 ‘행운의 겁(賢劫, bhadda-kappa)’이라고 한다. 즉 부처님이 출현하시는 겁보다 출현하시지 않는 겁이 훨씬 더 많은데 현재의 겁에는 무려 5분의 부처님들이 출현하셨고 또 출현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 위사카(Visākha)
위사카(Visākha)는 부처님의 대표적인 재가 여신도였다. 앙가(Aṅga)국의 밧디야(Bhaddiya)에서 태어난 그녀는 7살 때 그 고장을 방문하신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수다원과를 얻었다. 남편인 미가라(鹿子, Migāra)는 원래 나형외도(裸形外道)인 니간타(Nigantha)의 열렬한 신자였는데 나중에 위사카의 설득으로 휘장 뒤에서나마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수다원과를 얻었다. 그래서 그의 아내에게 너무도 감사하여 "당신은 오늘부터 나의 어머니요."라고 하면서 아들처럼 그녀의 젖을 빨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위사카라는 이름보다 미가라의 어머니(鹿子母, Migāra-mātā)로 더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DhpA.i.387ff.; AA.i.220; MA.i.471f.)
위사카는 기원정사(祇園精舍, Jetavana) 동쪽에 녹자모강당(鹿子母講堂, Mīgāramātupāsāda), 즉 동원정사(東園精舍, Pubbārāma)를 지어 승가에 헌납하였고 매일 자신의 집에서 5백 명의 비구들에게 식사를 대접하였다. 세존께서는 그러한 위사카를 보시하는 여신도 가운데 으뜸이라고 칭찬하셨다.(A:1.26) 그녀는 10명의 아들과 10명의 딸을 두었고 그들은 각각 같은 수의 손자를, 손자들은 같은 수의 증손자를 두었다. 그녀는 다섯 마리 코끼리의 힘을 지녔다고 하는데, 하루는 사람들이 위사카의 힘을 시험해보려고 코끼리를 그녀에게 내보냈다. 그러자 그녀는 두 손가락만으로 코끼리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했다.(DhA.i.409) 그녀는 사왓띠(Sāvatthi)에서 행운을 불러오는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항상 그녀를 자신들의 집에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위사카는 평생 16살 소녀와 같은 젊고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한 채 120살까지 장수하였다.「위마나왐사」(Vv.iv.6)와 「위마나왐사」 주석서(VvA.189,191)에 따르면 위사카는 죽어서 화락천(化樂天, Nimmāna-rati)에서 수님미따(Sunimmita) 천왕의 왕비로 태어났다고 한다. 또 디가 니까야 주석서(DA.iii.740)에 따르면 위사카는 제석(Sakka)과 아나따삔디까(Anāthapiṇḍika)처럼 열반을 얻을 때까지 1백 31겁 동안 범천계에서 행복을 누릴 것이라고 한다.
◎ 위자(vijjā)
위자(vijjā)는 √vid(안다, 체험하다)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문맥에 따라 상당히 다양한 뜻을 나타내는 술어인데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무명(無明)으로 옮기는 아위자(avijā)의 반대말이기 때문에 통찰지를 뜻한다. 부처님의 10대 명호중의 하나인 명행족(明行足)은 vijjā-caraṇa-sampanna의 번역어로 ‘지혜와 실천을 구족한 분’이란 의미이다. 이러한 의미로는 중국에서 명(明)으로 한역했다. (2) 마법이나 주문을 뜻하는 말이다. 그래서 여기서 파생된 vijjādhara는 진언술사(眞言術士)나 마법사(魔法師)를 뜻한다. (3) 베다(Vedā)에 대한 지식을 뜻한다. 그래서 리그베다, 야주르베다, 사마베다에 능통한 자를 tevijjā(三明)라고 하고 있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숙명통(宿命通), 타심통(他心通), 누진통(漏盡通)의 세 가지를 삼명(tevijjā)이라 부르기도 한다.
◎ 유순(由旬)
‘유순(由旬)’으로 음역한 요자나(yojana)는 PED에서 ‘a measure of length: as much as can be travelled with one yoke (of oxen), a distance of about 7 miles.’라고 설명되듯이, 고대 인도의 길이 단위로서 소를 멍에 매어 쉬지 않고 한 번에 갈수 있는 거리이며 대략 7마일 즉 11km의 거리에 해당한다.
◎ 유신견(有身見)
‘유신견(有身見)’이라 번역한 사까야딧띠(sakkāya-diṭṭhi)는 sakkāya(존재의 무더기=오온)+diṭṭhi(견해)의 합성어이다. 사까야(sakkāya)는 다시 √sat(구분하다)+kāya(몸)로 분해된다. PED에 ‘the body in being, the existing body or group; as a technical term in Pāli psychology almost equal to individuality; identified with the five khandhas.'라고 설명되듯이, 존재를 이루는 몸, 존재하는 몸이나 무더기, 심리학의 전문용어로는 개인과 거의 같으며 오온(五蘊)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딧띠(diṭṭhi)는 어근 √dṛś(보다)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PED에서 ‘view, belief, dogma, theory, speculation, especially false theory, groundless or unfounded opinion.’이라고 설명되듯이 견해, 믿음, 사상, 교리, 주의, 추론, 그 중에서도 삿된 견해, 사실무근의 사론(邪論)을 가리킨다. 이러한 의미로는 ‘삿된 견해’란 뜻의 밋짜딧띠(miccha-diṭṭhi)와 같은 말이다. 반면에 바르고, 참되고, 훌륭한 견해는 삼마딧띠(sammā-diṭṭhi)라고 하는데, 이 바른 견해는 도에 들어서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받아들여야 하는 첫 번째 조건이다. 그래서 사까야딧띠(sakkāya-diṭṭhi)는 PED에서 ‘theory of soul, heresy of individuality, speculation as to the eternity or otherwise of one's own individuality.’라고 설명되듯이, 불멸하는 영혼이나 인격 주체와 같은 존재론적 실체가 있다고 믿는 그릇된 견해이다. 이러한 의미로 '자아에 대한 사견‘이라 번역되는 앗따딧띠(atthā-diṭṭhi)와 같은 말이다. 중국에서 유신견(有身見)이라고 번역했고, 영어권에서는 personality belief, wrong view of self 등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러한 유신견에는 네 가지가 있는데
(1) 오온(五蘊)이 바로 자아라는 생각, (2) 오온 안에 자아가 들어 있다는 생각, (3) 자아 안에 오온이 있다는 생각, (4) 자아가 오온의 주관자란 생각이다. 빨리 경에 나오는 유신견의 정형구는 다음과 같다.
“여기 배우지 못한 범부는 성자들을 친견하지 못하고 성스러운 법에 정통하지 못하고 성스러운 법에 인도되지 못하고 바른 사람들을 친견하지 못하고 바른 사람의 법에 정통하지 못하여 물질[色]을 자아라고 관찰하고, 물질을 가진 것이 자아라고, 물질이 자아 안에 있다고, 물질 안에 자아가 있다고 알아차린다. 느낌[受]을 … 인식[想]을 … 행[行]들을 … 아는 마음[識]을 자아라고 알아차린다. 아는 마음을 가진 것이 자아라고, 아는 마음이 자아 안에 있다고, 아는 마음 안에 자아가 있다고 알아차린다. 이와 같이 유신견이 있게 된다.”(M43) 이러한 유신견은 중생들을 윤회에 묶어두고 있는 10가지 족쇄(結, saṃyojana) 중 첫 번째로 성자(ariya-puggala)와 범부(puthujjana)를 판단하고 걸러내는 금강석이다. 왜냐하면 이 유신견을 타파하지 못하면 성자의 초보단계인 수다원도 될 수 없기 때문이고 유신견으로 대표되는 족쇄들이 풀리지 않으면 아무리 깊고 미묘한 천상에 태어나더라도 탐욕(lobha), 성냄(dosa), 어리석음(moha)의 불길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 유위법(有爲法, saṅkhata-dhammā)
‘세간의 정신과 물질로 형성된 모든 것들’이란 유위법(有爲法, saṅkhata-dhammā)이다. 아비담마에서는 마음(citta), 마음의 작용(cetasika), 물질(rūpa), 열반(nibbāna)의 네 가지 궁극적 실재(勝義, paramattha)를 설한다. 여기서 마음은 1가지이고, 마음의 작용은 52가지이며, 물질은 18가지이고, 열반은 1가지이다. 이렇게 해서 모두 72가지 궁극적 실재가 있는데, 이중에 마음, 마음의 작용, 물질은 유위법(saṅkhata-dhammā)에 해당하며, 열반은 무위법(無爲法, asaṅkhata-dhamma)에 해당한다.
◎ 유루법과 무루법
불교에는 일체법(一切法) 또는 제법(諸法)을 분류하는 여러 방식이 있는데, 그 중에는 크게 유루법(有漏法)과 무루법(無漏法)의 두 가지로 분류하는 방식이 있다. 이 분류 방식은 일체법을 크게 유위법(有爲法)과 무위법(無爲法)의 두 가지로 분류하는 방식과 더불어 불교 전반에서 널리 사용되는 분류법이다.
루(漏, āsava)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흐르다' 또는 '새어 나오다'이다. 루(漏)는 인간이 번뇌 때문에 각종의 악업을 행하고 그 결과 고(苦)가 그 사람의 삶에 누출(漏出: 새어나옴)되어 나타나고 번뇌와 고의 이러한 누출로 인해 그 사람은 혹(惑) · 업(業) · 고(苦)의 윤회 3도(輪廻三道)를 전전하면서 미혹의 세계[迷界]를 유전(流轉: 끊임없이 윤회함)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누(漏)를 곧 번뇌라고 할 수 있다.
번뇌 또는 고(苦)의 누출을 더욱더 증장시키고 있는 상태나 증장시키는 작용을 하는 법들을 유루(有漏, 산스크리트어: sāsrava) 또는 유루법(有漏法, 산스크리트어: sāsrava-dharma)이라고 한다.[1][2][6] 이러한 유루의 뜻과 반대의 경우를 무루(無漏, 산스크리트어: anāsravah) 또는 무루법(無漏法, 산스크리트어: anāsravah-dharma)이라고 하는데, 적극적으로 정의할 경우, 번뇌가 끊어진 상태나 번뇌가 끊어지게 하는 작용을 하는 법들을 무루 또는 무루법이라고 한다.
◎ 육화경
육화경을 육합염법(六合念法), 육화합(六和合), 육화(六和)라고도 한다. 수행자가 행위나 견해를 같이하여 화합하고 서로 존경하는 여섯 가지 방법을 말하는데, ①신화경(身和敬)은 예배 등을 같이 하는 것이며, ②구화경(口和敬)은 찬탄 가영(讚嘆 歌詠)등을 함께하는 것이고, ③의화경(意和敬)은 신심(身心) 등을 함께 하는 것이며, ④계화경(戒和敬)은 청정한 계를 함께 지키는 것이고, ⑤견화경(見和敬)은 공(空) 등의 견해를 함께 하는 것이며, ⑥이화경(利和敬)은 행화경(行和敬)이라고도 하며 이익이나 여러 가지 행을 함께 하는 것이다.
◎ 육념(六念)
육념(六念)은 염불(念佛)·염법(念法)·염승(念僧)·염계(念戒)·염시(念施)·염천(念天)이다. 『장아함경(大1 p.12a12-16.)』에 “부처님께서 비구에게 이르셨다. 또 여섯 가지 불퇴법(不退法)이 있어 법을 증장시키고 손실이 없게 한다. 첫 번째 염불(念佛), 두 번째 염법(念法), 셋째 염승(念僧), 네 번째 염계(念戒), 다섯번째 염시(念施), 여섯 번째 염천(念天)이다. 이 육염수(六念修)를 닦으면 법이 증장되고 손실이 없게 된다. 佛告比丘, 復有六不退法, 令法增長, 無有損耗. 一者念佛, 二者念法, 三者念僧 ,四者念戒, 五者念施, 六者念天. 修此六念, 則法增長, 無有損耗.”라고 했다. 『증일아함경』 (大1 p.779c26-28)에서는 “所謂十念 念佛, 念法, 念比丘僧, 念戒, 念施, 念天, 念休息, 念安般, 念身, 念死.”라 하여 십념(十念)이 보인다.
◎ 육재일
재가 신자가 한 달에 6일을 출가인과 함께 재계를 지키는 것을 말하며 매달 8, 14, 15, 23, 29, 30일이다. 적은 달은 28, 29일이 되며 이 육재일에 사천왕이 천하를 순행하면서 사람의 선악을 살피는 날이다. 8일과 23일은 사천왕이 사자를 보내서 순찰하고 14일과 29일은 사천왕이 태자를 보내서 순찰하며 보름과 그믐날은 사천왕이 직접 내려와 순찰을 하는데 인간세상 사람들이 재일도 안 지키고 나쁜짓만 하면 제석천왕이 ‘세상이 참으로 위태롭구나.’ 하고 통곡한다는 것이다.
◎ 육문(六門)
육문(六門)이라 할 때 문(門, dvāra)은 눈, 귀, 코, 혀, 몸, 마음이라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根, indriya)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이다. 왜냐하면 식(識, viññaṇa)이 대상을 인지하는 통로 혹은 문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식(眼識, cakkhu-viññaṇa)은 눈(cakkhu)을 문으로 하여 대상을 인지하고, 신식(身識, kāya-viññaṇa)은 몸(kāya)을 문으로 하여 대상을 인지한다. 같은 방법으로 의식(意識, mano-viññaṇa)은 마음(意, mano)을 문으로 하여 대상을 인지하는데 이때 의문(意門, mano-dvāra)은 구체적으로 바왕가(bhavaṅga)이다. 이처럼 마음, 즉 의문(意門)은 정신적인 영역이다. 그리고 의문(意門)으로 인지할 수 있는 법이라 불리는 대상은, 감성 물질, 미세한 물질, 과거의 마음, 52가지 마음의 작용, 열반, 개념 등이다. 그리고 이 여섯 마음과 마음의 작용이 일어나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때 이 여섯을 아야따나(āyatana)라고 하며 중국에서 육처(六處)나 육입(六入)이라고 번역했다. 각각의 영역에 해당하는 대상을 받아들이는 기능이나 능력의 측면에서 고찰할 때는 그것을 인드리야(indriya)라고 부르며 중국에서 육근(六根)이라고 번역했다. 이렇게 그 기능과 역할에 따라서 다르게 말한다. 그리고 마음(意, mano)은 정신적 대상을 아는 감각기능(根, indriya) 또는 감각장소(處, āyatana)이다. 눈(眼, cakku)이라는 감각장소를 통해서 형상이나 색깔(色, rūpa)이라는 대상에 대한 안식(眼識, cakku-viññaṇa)이 일어나고 귀(耳, sota)라는 감각장소를 통해서 소리(聲, saddha)라는 대상에 대해 이식(耳識, sota-viññaṇa)이 일어나듯이 마음(意, mano)라는 감각장소를 통해서 정신적인 대상에 대한 의식(意識, mano-viññaṇa)이 일어난다. 이처럼 마음은 정신적인 대상을 아는 감각장소 또는 기능이다. 즉 눈, 귀, 코, 혀, 몸은 물질적인 감각장소이지만 마음은 정신적인 감각장소다. 그리고 감각대상이란 식(識)이 일어날 때 의지하는 물질적 토대를 말한다. 그러므로 안식은 눈이라는 감성 물질을 토대로 하고 이식은 귀를, 비식은 코를, 설식은 혀를, 신식은 몸이라는 감성 물질을 토대로 한다. 그리고의식은 모두 심장의 물질(hadaya-rūpa)을 토대로 한다.
여기서 요점을 간추리면 전오식(前五識) 즉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은 모두 문과 토대가 같다. 즉 안식은 눈이라는 물질을 그 문으로 하고 눈이라는 감성을 토대로 하여 일어난다. 모든 의식에는 반드시 마음(意, māno)이라는 문이 있다. 즉 모든 의식은 반드시 심장의 물질을 토대로 하여 일어난다. 그러나 모든 의식은 그 문이 다르다. 그러므로 눈의 인식과정에서 일어나는 의식은 눈을 문으로 가지면서 심장을 토대로 한다. 귀의 인식과정에서 일어나는 의식은 귀를 문으로 가지면서 심장의 물질을 토대로 한다. 의문(意門)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모든 의식(意識)은 마음을 문으로 하고 심장을 토대로 한다.
◎ 육사외도(六師外道)
육사외도(六師外道)는 BC 5~3세기 인도 우파니샤드 철학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사상 가운데 세력이 컸던 여섯 유파를 이르는 말이다. 이들은 힌두교의 기본 성전인 베다와 우파니샤드에 배치되는 점이 많았고, 당시 전통의 문화에 대한 일종의 반문화 운동을 전개했었던 새로운 사상가들이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푸라나 까싸빠(Pūrana Kassapa) - 도덕 부정론노예의 아들로 태어난 푸라나는 원인과 업보를 부정하는 주장을 폈다. 악한 일을 하거나 선행을 하거나간에 둘 다 선악의 과보를 받지 않는다고 했다. 이는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자유로웠던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2) 막칼리 고살라(Makkhali Gosāla) - 숙명론아지비까(Ājīvika)교파의 개조인 막칼리는 삶의 모든 것이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결정된 숙명에 따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체 생명체의 윤회나 해탈도 원인이 없으며, 다만 자연의 상황과 결정에 따른다고 하였다. 부처님 당시에 상당한 세력을 가졌으며 후대의 아소까(Asoka)왕 비문에도 독립종교로 기록되었으나, 후에 자이나교에 흡수되었다. 아지비카(Ājīvika)란 생계수단을 뜻하는 ājiva(命)에서 파생된 단어로 그들은 바르지 못한 생계수단으로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이해했기 때문에 중국에서 사명외도(邪命外道)로 옮겼다. 이들은 나체수행자들이었다고 한다. (3) 아지따 케사캄발린(Ajita Kesakambalin) - 유물론아지따는 모든 것이 지·수·화·풍의 4요소와 활동하는 공간인 허공만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오직 현세만이 있을 뿐이며 선악의 행위에 대한 과보도 없으며, 생명체가 죽으면 신체구성의 4요소가 자연계로 환원한다고 보았다. 존재론적으로는 유물론이고, 인식론적으로는 감각론이며, 실천적으로는 쾌락주의인 아지따의 사상은 푸라나의 도덕부정론에 대한 철학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이러한 유물론의 전통은 그 후에도 인도에 존재했는데, 이것을 로까야따(Lokāyata)라 하며 불전에서 순세외도(順世外道)라고 하였다. 또한 후세에는 쨔르바카(Cārvāka)라고도 한다. (4) 빠쿠다 까짜야나(Pakudha Kaccayāna) - 7 요소설빠쿠다는 지·수·화·풍의 4요소 외에 괴로움, 즐거움, 영혼을 더해 7요소를 인정했는데, 이 영혼도 물질적인 것이므로 그의 사상도 유물론적이다. 이 7요소를 독립적이고 불변하는 실체로 보았으며, 칼로 사람을 베어도 칼이 다만 7요소 사이를 통과한 것뿐이어서 살인을 한 것이 아니라는 극단적인 주장을 펼치기도 하였다. 이러한 요소만의 실재를 인정하는 사고방식은 후세의 승론학파(勝論學派, Vaiśeṣika)로 계승 발전되어 갔다. (5) 산자야 벨라띠뿟따(Sañjaya Belaṭṭiputta) - 회의론산자야는 ‘내세, 선악의 과보, 윤회’ 등의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 인간의 인식능력으로는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不可知論)을 주장하였다. 당시 이러한 회의론은 폭넓게 확산되어 있었으며, 부처님 상수제자인 사리뿟따(Sāriputta)와 목갈라나(Moggalāna)도 처음에는 산자야의 제자였었다. (6) 니간타 나타뿟따(Nigantha Nātaputta) - 자이나교자이나교의 개조인 니간타의 생애는 부처님과 유사하며 비슷한 시대에 왓지국(Vajji)의 웨살리(Vesāli)에서 왕족의 아들로 태어나 30세에 출가하여 사문이 되었다. 12년의 고행 끝에 완전한 지혜를 성취하여 30년간 교화를 펼치다가 72세에 사망하였다. 모든 존재를 Jīva(영혼)과 Ajīva(비영혼)로 나누고, 비영혼을 다시 Dharma(운동의 조건), Adharma(정지의 조건), 허공, 물질로 나눈다. 업(karma)은 미세한 물질로서 외부에서부터 신체로 유입되어 영혼에 부착함으로써 윤회에 속박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윤회에서 벗어나려면 계율을 엄격히 지키고 고행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땅바닥의 벌레를 밟지 않도록 비를 들고 다니며, 공기 중의 미생물을 죽이지 않기 위해 마스크를 쓰고 다니기도 하였다. 또 무소유계를 지키기 위해 나체로 수행했기 때문에 나형외도(裸形外道)라 불리었다. 그 뒤에 자이나교는 힌두교, 불교와 더불어 인도의 3대 종교로 자리 잡았으며, 오늘날 인도에는 3백만 정도의 신도가 있다. 불살생계를 지키고자 농업을 버리고 상업을 해왔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부유한 편이다.
◎ 육십이견(六十二見)
육십이견(六十二見)은 62가지의 잘못된 견해로 자기와 세계에 관하여 불교의 정도에서 빗나간 삿된 견해의 총칭. 본래는 부처님 재세시(在世時)에 주장한 이교도의 사상을 모은 것으로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① 본겁본견(本劫本見)·말겁말견(末劫末見)에 대한 여러 가지 주장을 62종으로 나눈 것이다. 본겁은 과거시, 본견은 과거에 상견(常見)을 일으킨 것. 말겁말견은 미래에 단견(斷見)을 일으키는 것. 본겁본견의 설이 18종, 말겁말견의 설이 44종이어서 합하면 62견이다. ② 과거·현재·미래의 3세에 각각 5온이 있어, 곱하여 15가 되고, 낱낱이 4구의 이견(異見)이 있어 합하여 60견이 된 것에 근본인 단(斷)·상(常) 2견을 더한 것을 말한다. 『장아함경(長阿含經)』 권14(大1 pp.89c23-94a13),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 『열반경』 등에 기술되어 있다.
◎ 윤회
‘윤회’라 번역한 와따(vaṭṭa)는 √vṛt(굴리다)에서 파생된 중성명사이다. PED에서 ‘rolling on, the round of existences, cycle of transmigrations, saṃsāra, evolution(=involution)’이라고 설명되듯이, ‘존재의 회전’, 즉 ‘윤회(輪廻)’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와 반대되는 용어가 위와따(vivaṭṭa)인데, vi(분리)+vaṭṭa(회전)의 합성어이다. 그래서 원 의미는 ‘되돌림,’ ‘반대로 돌림’이란 뜻이며, 교리적으로 ‘회전이 없음’, ‘존재의 회전에서 벗어남’, ‘윤회로부터의 해탈’ 즉 ‘열반’을 뜻한다. 이 회전은 존재들이 윤회를 거듭하면서 돌고 도는 방식을 드러낸다. 즉 존재들은 번뇌의 회전(kilesa-vaṭṭa), 업의 회전(kamma-vaṭṭa), 과보의 회전(vipāka-vaṭṭa)을 통해 윤회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회전은 번뇌의 회전이다. 무명(avijā)으로 눈멀고 갈애(taṇhā)로 인해 내몰려서 중생은 여러 가지 불선업과 선업을 짓는다. 그러므로 번뇌의 회전이 업의 회전을 일어나게 한다. 이 업이 성숙하면 그것은 다시 과보로 익게 되고 그래서 업의 회전은 과보의 회전을 일어나게 한다. 이들 과보에 대한 반응으로 이미 무명에 휩쓸려있는 사람은 더 즐거운 경험을 즐기려는 갈애에 압도되어 자기가 이미 가진 즐거움에 집착하고 괴로운 것은 버리려고 애쓴다. 그래서 과보의 회전은 또 다른 번뇌의 회전을 낳는다. 이와 같이 세 가지 회전은 그것의 토대가 되는 무명이 위빠사나 지혜와 출세간의 도로 제거될 때까지 쉼 없이 계속 돌아간다. 「청정도론」(Vis.XVII)은 이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세 가지 회전을 가진 존재의 바퀴는 쉼 없이 굴러간다. 여기서 행(行)과 존재[有]는 업(業)의 굴레이고, 무명과 갈애와 집착은 번뇌의 회전이고, 식(識), 정신과 물질[名色], 여섯 가지 감각기관[六處], 감각접촉[觸], 느낌[受]은 과보의 회전이다. 세 가지 회전을 가진 존재의 바퀴는 번뇌의 회전이 끊어지지 않는 한 쉼이 없다. 왜냐하면 조건이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회전하면서 굴러간다고 알아야 한다.”
◎ 윤회(輪廻)
'윤회(輪廻)'라 번역한 삼사라(saṃsāra)는 saṃsarati(계속해서 돌아다니다, 윤회하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남성명사이다. 그리고 이 동사형인 saṃsarati는 saṁ(함께)+√sr(움직이다)로 분해된다. 그래서 문자적으로 ‘함께 움직이는 것, 함께 흘러가는 것’이라는 뜻이다. 중국에서 윤회(輪廻)라고 번역했고, 영어권에서는 round of rebirth라고 한다. 이외에도 윤회라고 번역되는 빨리어에는 회전을 의미하는 왓따(vaṭṭa)가 있다. 「앗타살리니」에서 오온(五蘊), 12처(十二處), 18계(十八界)가 연속하고 끊임없이 전개되는 것이라고 정의되듯이,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란 영혼(jīva)이나 자아(atta)와 같은 윤회의 주체가 없는 연기적 흐름을 가리키는 것이다. 근본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매 찰나 전개되는 오온의 생멸자체가 윤회이고, 생사의 입장에서 보자면 한 생에서의 마지막 마음, 즉 죽음의 마음(cuti-citta)이 일어났다 멸하고, 이것을 조건으로 하여 다음 생의 재생연결식(paṭisandhi-vinnñāṇa)이 일어나는 것이 윤회이다. 그래서 힌두교나 다른 종교에서 설하는 윤회설과는 구분지어야 한다. 힌두교의 윤회는 불변하는 아뜨만(atman)이 있어서 금생의 육신을 버리고 내생의 새로운 육신으로 옮겨가는 재육화(再肉化, reincarnation)를 뜻하지만 불교의 윤회는 무명(avijiā)과 갈애(taṇhā)를 근본원인으로 한 다시 태어남(再生, rebirth)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불교의 윤회는 전적으로 특정한 개체와는 무관하게 진행되는 연기적 흐름이다. 윤회는 “무명(avijiā)에 덮인 중생들은 갈애(taṇhā)에 속박되어 치달리고 윤회하므로 그 시작점을 꿰뚫어 알 수 없다.”(S15:13)는 등 여러 경에서 누누이 언급되고 있다. 또한 부처님은 「법구경」의 오도송(悟道頌)에서 “많은 생을 윤회하면서 나는 헛되이 치달려왔다. 집짓는 자를 찾으면서 거듭되는 태어남은 괴로움이었다. 집 짓는 자여, 마침내 그대가 보이는구나. 그대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리. 그대의 모든 골재들은 무너졌고 집의 서까래는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마음은 업의 형성을 멈추었고 갈애의 부서짐을 성취다.”(Dhp.153-154)라고 윤회가 종식된 데에 대한 감회를 말씀하셨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분명히 갈애와 무명이 윤회의 원인이라고 밝히셨고 그 중에서 갈애(taṇhā)를 ‘재생을 하게 하는 것(ponobhavikā)’이라고 하셨다. 갈애와 무명이 있는 한 시작과 끝을 알 수없는 생사윤회의 바퀴는 계속 굴러간다. 하지만 갈애로 대별되는 모든 번뇌들을 쳐부순 아라한에게는 더 이상의 윤회가 없다. 윤회는 갈애와 무명에 휩싸여 치달리고 흘러가는 중생들의 가장 생생한 모습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윤회를 설하셨으니, 이것이 고제(苦諦)이고, 윤회의 원인인 갈애를 설하셨으니 이것이 집제(集諦)이며, 윤회가 다한 경지인 열반을 설하셨으니 이것이 멸제(滅諦)이며, 윤회가 다한 경지를 실현하는 방법인 팔정도를 설하셨으니 이것이 도제(道諦)이다.
◎ 율장 전수자
‘율장 전수자’라 번역한 위나야다라(Vinaya-dhara)는 지율사(持律師)라고도 하며 율장만을 전문적으로 암송하고 공부하는 비구들을 가리킨다. 부처님의 입멸직후 부처님의 가르침을 송출하기 위해 라자가하(Rājagaha)의 칠엽굴(七葉窟)에서 제 1차 결집이 이루어졌다. 이때 교법(Dhamma)은 부처님을 항상 가까이 모시던 제자인 아난다(Ānanda)가 송출하고, 율(Vinaya)은 계율에 대한 이해가 깊었던 우빨리(Upāli)가 송출했다. 이렇게 해서 나중에 경장과 율장의 원형이 송출된 것이다. (논장의 성립은 더욱 나중의 일이다.) 이 법과 율은 기억하기에 편리하도록 중요한 교설이 간단한 단문인 수따(經, sutta)로 완성되거나 혹은 게송(gātha)으로 만들어져 전승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 교법과 계율을 암송하여 후대로 전하기 위해서 비구들 간에 분업이 행해졌다. 그래서 일찍부터 경사(經師, suttantika), 지율사(持律師, vinaya-dhara), 설법사(說法師, dhamma-kathika), 지논모사(持論母師, mātikā-dhara), 지법사(持法師, dhamma-dhara) 등과 같은 전문 학승들이 승가에 존재하고 있었다.
◎ 음식
‘음식’이라 번역되는 아하라(āhāra)는 āhārati(가져오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로 문자적으로 ‘강하게 지탱하는 상태로 떠받쳐 준다’는 의미이다. 이 음식에는 다음의 네 가지가 있다. (1) 단식(段食, kabaḷīkāra-āhāra): 덩어리로 된 먹는 음식을 말하며 육체적인 몸을 지탱해준다. (2) 촉식(觸食, phassa-āhāra):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덤덤한 느낌의 세 가지 느낌을 가져오는 감각접촉의 음식을 말하며 느낌을 지탱해준다. (3) 의사식(意思食, manosañcetana-āhāra): 중생계에서 재생연결을 가져오는 의도의 음식을 말하며 중생계에 태어나는 것을 지탱해준다. 의도는 업이며 업은 재생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4) 식식(識食, viññāṇa-āhāra): 재생연결의 순간에 정신과 물질을 가져오는 식의 음식을 말하며 정신과 물질의 합성체를 지탱해준다. 아비담마에 의하면 단식은 네 가지 원인으로 생기는 물질적인 현상을 지탱해주고, 나머지 셋은 그 각각과 함께 일어나는 정신과 물질의 현상을 지탱해준다. 단식은 물질이므로 무기(無記, avyākata)이고 나머지 세 가지 정신적인 음식은 선(善, kusala), 불선(不善, akusala), 무기(無記, avyākata) 셋에 다 해당된다.
◎ 음식에서 생긴 물질(āhāra-rūpa)
‘음식에서 생긴 물질(āhāra-rūpa)’이란 내부의 영양소는 외부에서 공급을 받아 유지가 되는데 음식을 삼키는 순간부터 머무는 순간에 생기는 물질을 말한다. 음식에서 생긴 깔라빠(물질의 무리) 가운데 있는 영양소는 그 다음의 순수한 팔 원소(suddha-ṭṭhamaka)를 생기게 한다. 이렇게 팔 원소는 열 번이나 열두 번까지 생긴다. 임신한 어머니가 섭취한 음식은 태아의 몸에 퍼져 들어가서 태아의 물질을 생기게 한다. 몸에 발라진 음식도 물질을 생기게 한다고 한다. 다른 세 원인들에 의해서 생긴 몸속의 깔라빠에 있는 영양소도 역시 잇달아서 여러 번 순수한 팔 원소를 생기게 한다. 하루에 섭취한 음식은 칠 일 동안 몸을 지탱할 수 있다고 한다.
◎ 음식을 혐오하는 인식(āhāre-paṭikkūla-saññā)
음식을 혐오하는 인식(āhāre-paṭikkūla-saññā)은 「청정도론」(Vis.Ⅺ.1)에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는데,
(1) 탁발 가는 것,
(2) 음식 찾는 것,
(3) 먹는 것,
(4) 분비물,
(5) 저장되는 곳,
(6) 소화되기 전,
(7) 소화된 후,
(8) 먹고 난 결과,
(9) 배출하는 것,
(10) 묻은 것의 열 가지 형태로 음식의 혐오스러움을 반조하는 수행이다.
이러한 수행을 닦으면 수행자는 맛에 대한 갈애 없이 오직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만 음식을 먹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음식이라 번역되는 아하라(āhāra)는 āhārati(가져오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로 문자적으로 ‘강하게 지탱하는 상태로 떠받쳐 준다’는 의미이다. 이 음식에는 다음의 네 가지가 있다.
(1) 단식(段食, kabaḷīkāra-āhāra): 덩어리로 된 먹는 음식을 말하며 육체적인 몸을 지탱해준다.
(2) 촉식(觸食, phassa-āhāra): 세 가지 느낌을 가져오는 감각접촉의 음식을 말하며 느낌을 지탱해준다.
(3) 의사식(意思食, manosañcetana-āhāra): 삼계에서 재생연결을 가져오는 의도의 음식을 말하며 삼계에 태어나는 것을 지탱해준다. 의도는 업이며 업은 재생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4) 식식(識食, viññāṇa-āhāra): 재생연결의 순간에 정신과 물질을 가져오는 식의 음식을 말하며 정신과 물질의 합성체를 지탱해준다.
아비담마에 의하면 단식은 네 가지 원인으로 생기는 물질적인 현상을 지탱해주고, 나머지 셋은 그 각각과 함께 일어나는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현상을 지탱해준다. 단식은 물질이므로 무기(無記, avyākata)이고 나머지 세 가지 정신적인 음식은 선(善, kusala), 불선(不善, akusala), 무기(無記, avyākata) 셋에 다 해당된다.
◎ 의(意, manas)
의(意, manas)는 제7식으로서 사량(思量)이라는 뜻으로, 제6의식과 혼란을 피하기 위하여 범어를 음역해서 말나식(末那識)이라 한다. 근본식인 아뢰야식을 자아(自我)라고 집착하고, 결국 아치(我癡)·아견(我見)·아만(我慢)·아애(我愛)의 네 가지 번뇌와 상응하는 심층적 자아의식이다.
◎ 의도 (쩨따나, cetanā)
‘의도’로 옮긴 쩨따나(cetanā)는 √cit(생각하다)에서 파생된 사역형 동사 cinteti(생각하게 하다)의 여성명사이다. PED에서는 ‘state of ceto in action, thinking as active thought, intention, purpose, will. Defined as action(kamma)’라고 설명되어 있듯이,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노력이 개입된 사고 작용이고, 그래서 행위(업)로 정의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쩨따나는 모든 마음에 공통되는 7가지 마음의 작용(sabbacittasādhāraṇa-cetasika) 가운데 하나이다.
앙굿따라 니까야(A6.63)에서는 “비구들이여, 나는 의도를 업이라고 말한다. 의도로써 업을 짓나니 몸과 말과 뜻으로써" 라고 나타나듯이 의도는 모든 의도적인 행위를 나타내며 오온(五蘊)의 행온(行蘊)과 동의어이다. 「위바위니 띠까(Vibhavinī Ṭīkā)」는 쩨따나를 행(saṅkāra)을 의미하는 것으로, 「빠라맛타디빠니(Paramatthadīpanī Ṭīkā)」는 대상을 얻는 행위의 성취를 위해서 작용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본문에서 마하시 사야도도 언급하셨지만 아비담마에서 쩨따나는 의도라기보다는 고무나 격려 혹은 자극의 뜻에 더 가깝다고도 할 수 있다. 아비담마에서는 이렇게 고무하고 격려하고 자극하는 마음의 성질을 나타내는 술어로 정착되었다. 주석서들에서 의도는 관련된 마음의 작용을 대상에 대해서 활동하도록 묶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중국에서는 과거에 사(思)로 번역했고 요즘은 의도(意圖)라고 번역하고 있다. 영어권에서는 volition, will이라 한다.
◎ 의식(意識, mano-vijñāna)
의식(意識, mano-vijñāna)이란 초기불교와 부파불교에서는 우리의 의식(意識)을 6종으로 분류하였다. 시각적 지각인 안식(眼識), 청각적 지각인 이식(耳識), 후각적 지각인 비식(鼻識), 미각적 지각인 설식(舌識), 촉각적 지각인 신식(身識)의 다섯 가지 지각을 종합해서 다음 찰나에 하나의 개념지로 형성하는 판단적 인식으로서 의식을 말한다.
◎ 의타기성(依他起性, paratantra-svabhāva)
의타기성(依他起性, paratantra-svabhāva)은 자기의 원인만으로는 생기기 어렵고 반드시 다른 연(緣), 곧 갖가지 연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고정된 영원불변의 속성이 아니므로 가유(假有)의 실무적인 것으로 유식설의 백법(百法) 가운데 94법이 여기에 속한다. 또 색법은 인연과 증상연(增上緣)으로 생기고 심법은 4연으로 일어난다고 한다.
◎ 의도적 행위
여기서 ‘의도적 행위’라 번역한 상카라(saṅkhāra)는 12연기의 두 번째 구성요소 즉 무명연행(無明緣行)으로 나타난다. 12연기에서의 행도 항상 복수로 나타나는데「청정도론」에서는 ‘공덕이 되는 행위(puñña-abhisaṅkhāra),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 흔들림 없는 행위’로 설명이 되듯이, ‘업지음’, ‘업형성력’, ‘의도적 행위’로 해석된다. 이 경우의 상카라는 업(kamma)이라는 뜻으로 쓰였고 이는 의도(cetanā)와 동의어로 간주한다.
◎ 의문인식과정(mano-dvārā-vīthi)
오문인식과정(pañcadvāra-vīthi)은 육체적인 감각의 문(pañca-dvāra)과 마음의 문(意門, mano-dvāra)이라는 두 가지 문이 실재로 개입된다. 물론 이때의 마음의 문은 잠재의식으로서 인식과정이 이 바왕가로부터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문에서의 인식과정이라 불리는 이 과정은 감각의 문이 전혀 개입되지 않고 오직 마음의 문[意門]에서만 일어난다. 그래서 이런 인식과정을 분명히 표현하기 위해 이 의문에서의 인식과정을 순의문인식과정(suddha-mano-dvāra-vīthi)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런 의문인식과정에는 (1) 제한된 자와나를 가진 욕계의 인식과정(제한된 자와나과정), (2) 색계, 무색계의 고귀한 마음(maha-ggata)과 출세간의 증득과 관계되는 근본집중에서의 인식과정(근본집중 자와나과정)의 둘로 나뉜다.
◎ 의요(意樂, āśaya)
의요(意樂, āśaya)는 아세야(阿世耶)라고 음역하며 한글 음으로 ‘의요’라고 통일한다. 휴식처(休息處)·주처(住處)·사의(思意)·의향(意向) 등의 의미가 있는데, ‘의요(意樂)’·‘의욕(意欲)’·‘지원(志願)’ 이라고 한역한다. 무엇인가를 하려는 생각을 말하므로 이 번역본에서는 일반적 이해를 위하여 ‘의욕’과 ‘의지’ 또는 ‘하고자 함’으로 번역하였다. 『구사론』 권14(大29 p.75a13-15)에는 선의요(善意樂) 와 불선의요(不善意樂)로 나누어서 “즉 악불선(惡不善)을 짓고자 하는 의요가 상속하여 사기(捨棄)되지 않음을 불율의(不律儀)라고 이름 하는 것이며, 이에 따라 그 후 비록 선심(善心)이 일어나더라도 불율의를 성취한 자라고 이름 하게되니, 이러한 아세야(阿世耶)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卽欲造惡, 不善意樂, 相續不捨, 名不律儀. 由此後時, 善心雖起, 而名成就不律儀者, 以不捨此阿世耶故.” 라고 하였고, 또 『(현양성교론顯揚聖敎論)』 권3(大30 p.493a16-19)에서는 “此貪行貪阿世耶, 此瞋行瞋阿世耶, 此癡行癡阿世耶, 此等分行等分阿世耶. 此昇進阿世耶, 此不昇進阿世耶, 此微薄塵垢賢善阿世耶.”라고 설명하고 있다.
◎ 의욕
‘의욕’으로 옮긴 찬다(chanda)는 √chanda/chad(기뻐하다)에서 파생된 남성명사로서 ‘자극, 고무, 열의, 의욕, 하고자 함, 의지’ 등의 뜻을 지녔다. 중국에서는 욕(欲)이라 번역했고, 영어권에서는 intention, desire, will이라 하고 있다. 여기서 의욕이란 하고 싶어 함을 뜻하는데 행위를 하여서 어떤 결과를 성취하고자 하는 것을 나타낸다. 이런 열의는 비난받아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탐욕(lobha)이나 갈망(rāga)과는 구별이 되어야 한다. 욕망과 갈망 등은 불선한 것이지만 열의는 다른 것과 같아지는 마음의 작용이어서 선한 마음의 작용들과 함께 하면 고결한 목표를 달성하려는 선한 바램의 역할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경에서는 종종 chanda가 lobha나 rāga의 동의어로 쓰이기도 하지만 아주 이로운 법으로 인정하고도 있다. 불선법들을 버릴 열의를 일으키는 것과 선한 법을 증득하는 것을 설하는 경우에 이 술어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 의식(識)의 일곱가지 머무름(satta vinnanatthitiyo)
'의식(識)의 일곱가지 머무름(satta vinnanatthitiyo)' 이란 유정들의 의식이 머무는 양태를 일곱 가지로 분류한 것으로, 곧 뭇삶들이 살아가는 방식 즉 세계가 각각 다름을 의미한다.
PsA에 따르면 이들 의식의 일곱 가지 머무름은 ①여러 몸과 각기 다른 지각력을 지닌 의식으로 살아가는 것(nanattakaya nannttasannino vinnanatthiti. 身異想異識住.신이상이식주) ②몸은 여럿이되 동일한 지각력을 지닌 의식으로 살아가는 것(nanattakaya ekattasannino vinnanatthiti. 身異想一識住.신이상일식주) ③몸음 동일하되 각기 다른 지각력을 지닌 의식으로 살아가는 것(ekattakaya nanattasannino vinnanatthiti. 身一想二識住.신일상이식주) ④동일한 몸과 동일한 지각력을 지닌 이식으로살아가는 것(ekattakaya ekattasannino vinnantthiti. 身一想一識住.신일상일식주) ⑤공간에 걸림이 없는 의식으로 살아가는 것(akasanancayatanupaga vinnanatthiti. 空無邊處識住.공무변처식주)
⑥의식에 걸림이 없는 의식으로 살아가는 것(vinnanancayatanupaga vinnanatthiti. 識無邊處識住.식무변처식주) ⑦아무것도 없는 의식으로 살아가는 것(akincannayatanuoaga vinnanatthiti. 無所有處識住.무소유처식주)의 일곱 가지를 말한다. PsA. pp.110-111 참조.
참고로 '중생들의 아홉 가지 머무름(nava sattavasa.九有情居. 구유정거)' 이란 위의 '일곱 가지 의식의 머무름'에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의식으로 살아가는 것(nevasannanasannayatanupaga ninnanatthiti. 非想非非想處識住.비상비비상처식주)' 과 '지각이 없는 중생(asannasatta. 無想有情.무상유정)' 의 둘을 더한 것을 말한다. PsA. pp.114 참조.
◎ 이것이 나의 것이다.
etaṁmama 경과 주석서(M22/i.35; S12:61/ii.91 등)는 ‘이것이 나의 것이다. etaṁ mama.’, ‘이것이 나다. esohamasmi.’, ‘이것이 나의 자아이다. eso me attā.’라는 구문을 각각 갈애(taṇhā)와 사견(diṭṭhi)과 자만(māna)의 3가지에 배대해서 설명한다. 중생은 나라는 존재, 즉 오온(五蘊)에 대해서 ‘이것은 나의 것이다’라고 하여 갈애를 일으킨다. 중생은 나라는 존재 혹은 오온을 두고 이것이 바로 ‘나다‘라고 자만을 일으킨다.(주석서는 내가 더 뛰어나다 나와 동등하다. 나보다 못하다는 세 가지 자만을 예로 들고 있다) 그리고 중생들은 이런 오온이야말로 나의 자아라는 사견을 일으킨다.
◎ 이시빠따나(Isipatana)
이시빠따나(Isipatana)는 지금의 인도 사르나뜨(Sarnath)로 와라나시(Vārāṇasi)에서 15km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세존께서 우루웰라(Uruvela)에서 고행을 그만두시자 다섯 비구는 이곳에 와서 머물렀다. 세존께서는 정등각을 성취하신 뒤 다섯 비구에게 법을 설하기 위해서 이곳으로 오셔서 중도로 표방된 팔정도를 내용으로 하는 최초의 가르침을 펴셨다. 맛지마 니까야의 주석서에 따르면 예전에 벽지불들이 간다마다나(香醉山, Gandhamādana)산에서 7일 동안 멸진정(滅盡定, nirodha-samāpati)에 들었다가 탁발을 하기 위해 허공을 날아, 이곳에 내려서 도시로 들어가 걸식을 하여 공양을 마친 후 다시 이곳에서 허공으로 올라 떠났다고 한다. 그래서 선인(仙人, isi)들이 이곳에 내리고 이곳에서 올라갔다고 해서 이시빠따나라고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MA.ii.188) 중국에서는 선인타처(仙人墮處)라고 번역했다.
◎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로 번역한 Evaṃ me sutaṃ에서 evaṃ은 부사로서 ‘이와 같이, 이처럼’이라는 뜻이며 영어로는 ‘thus’라고 한다. me는 ‘나’를 뜻하는 일인칭 대명사 asmad의 구격(具格, Instrumental) 단수형으로 ‘나에 의해서’란 의미다. sutaṃ은 과거완료(p.p)로써 ‘들어진’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원문은 수동태의 문장으로 ‘이와 같이 나에게 들리었다’는 뜻인데 상좌부와 대승의 양 전통에 속하는 경들은 모두 이 말로 시작된다. 중국에서는 여시아문(如是我聞)으로 옮겼으며, 영어권에서는 ‘Thus have I heard’라고 풀이 한다. 여기서 ‘이와 같이’는 ‘이 경에 설해진 그대로’라는 뜻이고 ‘나’는 아난다(Ānanda) 존자를 말한다. 남북 전통에서 모두, 1차 결집(結集)에서는 아난다 존자가 경(經, Sutta)을 외우고, 우빨리(Upāli) 존자가 율(律, Vinaya)을 먼저 외워서, 그 곳에 모인 오백 아라한들이 그것을 합송해서 부처님 말씀으로 인정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경과 율로 확정되었다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후대에 결집된 대승경전도 모두 이런 표현으로 시작해서 경의 권위를 확보하고 있다. 이것은 아난다 존자가 직접 세존으로부터 들은 말씀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 이욕(離慾)
‘이욕(離慾)’이라 번역한 위라가(virāga)는 vi(분리)+rāga(탐욕)의 합성이다. PED에서 ‘absence of rāga, dispassionateness, indifference towards (abl. or loc.) disgust, absence of desire, destruction of passions; waning, fading away, cleansing, purifying; emancipation, Arahantship.’이라고 설명되듯이, ‘탐욕의 부재, 탐욕의 빛바램, 공평무사함, 혐오에 대한 평온, 청정해짐, 해탈, 아라한과’ 등으로 정의할 수 있다.
◎ 인공(人空)
인공(人空)은 아공(我空)이라고도 한다. 아견(我見)에 의해 인식되고 집착된 인아(人我)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반야경』은 일체법이 공함을 밝힘으로서 인공(人空)과 법공(法空)을 모두 설한 대표적인 경전으로 간주된다. 소승에서는 인공만을 설하고 법공은 설하지 않았으나, 대승은 인법이공(人法二空)을 설한다. 또 삼공(三空)이 있으니 아공(我空)·법공(法空)·구공(俱空)이다.『금강경찬요간정기(金剛經纂要刊定記)』(大33 p.176b24-27)에 “세 가지의 공(空)이란 곧 아공·법공·구공이다. 아래 경에서 말한 것과 같다. 아상과 인상 등이 없기 때문에 곧 아공(我空)이다. 아상이 곧 상(相)이 아니기 때문에 법공(法空)이다. 모든 상(相)을 여읜 것을 제불(諸佛)이라 하며 구공(俱空)이라 한다. 三空者, 卽我空法空俱空也. 如下經云, 無我相人相等, 卽我空也. 我相卽是非相等, 卽法空也. 離一切相, 卽名諸佛, 是俱空也.”
◎ 인습적 용어
‘인습적 용어’라고 번역한 빨리어는 보하라 와짜나(vohāra-vacana)이다. ‘인습적 가르침’이란 뜻의 보하라 데사나(vohāra-desanā)나 ‘인습적 진리[俗諦]’라고 번역되는 삼뭇티 삿짜(sammuti-sacca)하고도 같은 말이다. 이와 반대되는 개념이 ‘궁극적 용어’란 뜻의 빠라맛타 와짜나(paramattha-vacana)나 ‘궁극적 가르침[勝義諦]’이란 뜻의 빠라맛타 데사나(paramattha-desanā)이다. 아비담마에 의하면 존재에는 세간의 인습(sammuti)과 궁극적 실재(paramattha)의 두 가지가 있다. 세간의 인습은 보통의 개념(paññatti)과 인습적 용어(vohāra-vacana)을 지칭한다. 예를 들면,중생,사람,남자, 여자, 동물 등의 생명체와 산,바위,나무,집 등의 무생명체가 모두 세간의 인습에 포함된다. 궁극적 실재는 그와는 반대로 그 자신의 고유한 성질(自性, sabhāva)을 가진다. 이것은 더 이상 분해 할 수 없는 존재의 구성 성분이며,존재의 궁극의 단위이다. 이것을 법(dhamma)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사람’ ‘남자’ ‘여자’ 등은 세간의 인습이지 궁극의 단위가 아니다. ‘사람’ 이란 땅, 물, 불, 바람의 사대와 그에서 파생된 물질인 눈, 귀, 코, 혀, 몸 등과 마음, 그리고 이 마음과 같이 일어나는 여러 가지 마음의 작용들이 한데 모여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을 구성하고 있는 땅의 요소나 물의 요소, 감각접촉,느낌,의도 등은 더 이상 분해되지 않는 그 자신의 고유한 성질을 가진 궁극의 단위이다. 그래서 인간이란 것은 세간의 인습에 해당하며 땅의 요소 등은 궁극적 실재라 부른다.
◎ 인식과정
'인식과정'으로 옮기는 위띠찟따(vīthi-citta)는 vīthi(길, 진로, 과정)+citta(마음)으로 분해된다. 그래서 마음이 진행되어 가는 진로나 과정을 뜻하는 전문술어이며, vīthi 단독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영어로는 progress of consciousness, thought-process, cognitive process라고 한다. 마음은 다섯 감각의 문이나 마음의 문에서 대상을 인식하면서 일어난다. 이들은 한 대상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분명하게 한 마음에서 다음 마음으로 규칙적이고 통일된 순서에 의해서 일어난다. 이런 순서를 아비담마에서는 마음의 법칙(citta-niyama)이라고 부른다.인식과정이 진행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필수 조건들이 반드시 현전해 있어야 한다.
(1) 눈의 문(cakkhu-dvāra)에서 일어나는 인식과정을 위해서는(가) 눈의 감성(cakkhu-pasāda)(나) 형상인 대상(rūpa-ārammaṇa)(다) 빛(āloka)(라) 주의 기울임(manasikāra)이 있어야 한다.
(2) 귀의 문(sota-dvāra)에서 일어나는 인식과정을 위해서는(가) 귀의 감성(sota-pasāda)(나) 소리인 대상(sadda-ārammaṇa)(다) 허공(ākāsa)(라) 주의 기울임(manasikāra)이 있어야 한다.
(3) 코의 문(ghāna-dvāra)에서 일어나는 인식과정을 위해서는(가) 코의 감성(ghāna-pasāda)(나) 냄새인 대상(gandha-ārammaṇa)(다) 바람의 요소(vayo-dhātu)
(4) 혀의 문(jivhā-dvāra)에서 일어나는 인식과정을 위해서는(가) 혀의 감성(jivhā-pasāda)(나) 맛인 대상(rasa-ārammaṇa)(다) 물의 요소(āpo-dhātu)(라) 주의 기울임(manasikāra)이 있어야 한다.
(5) 마음의 문(意門, mano-dvāra)에서 일어나는 인식과정을 위해서는(가) 심장토대(hadaya-vatthu)(나) 법인 대상(dhamma-ārammaṇa)(다) 바왕가(bhavaṇga)가 있어야 한다.
이런 여섯 가지의 인식과정은 (1) 다섯 감각의 문에서 일어나는 오문인식과정(pañcadvāra-vīthi)과 (2) 마음의 문에서 일어나는 의문인식과정(mano-dvāra-vīthi)의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오문인식과정을 다시 잡문인식과정(missaka-dvāra-vīthi)라고도 하는데 오문과 의문을 모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순전히 마음의 문에서만 일어나는 인식과정을 순의문인식과정(suddha-mano-dvāra-vīthi)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육체적인 감각의 문을 도구로 하지 않고 순전히 마음의 문인 바왕가에서만 일어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열거하고 있는 이런 일련의 마음의 흐름을 아비담마에서는 인식과정(vīthi-citta)이라고 하는데 다시 한 번 요점을 정리해본다. (1) 인식과정은 크게 외부의 대상을 인식하는 오문인식과정(pañcadvāra-vīthi)과 마음을 대상을 인식하는 의문인식과정(mano-dvāra-vīthi)으로 나누어진다. (2) 물질이 일어나서 머물고 멸하는 시간과 마음이 일어나서 머물고 멸하는 시간은 다르다. 한번 물질이 일어났다가 멸하는 순간에 마음은 17번 일어났다가 멸한다. (3) 그러므로 오문인식과정에서 예를 들면 눈에서 대상을 인식하는 과정에서는‘같은 대상’을 두고 17번의 마음이 생멸한다. 이것도 대상에 따라서 ① 매우 큰 것 ② 큰 것 ③ 작은 것 ④ 매우 작은 것의 크게 4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지며 이것은 다시 여러 등급으로 나누어져 총 15가지 경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여기서 크고 작다는 말은 물질적인 크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충격을 주는 힘의 강약을 나타낸다. (4) 매우 큰 대상일 경우에 17번 일어나는 마음들은 3가지 바왕가(지나간 바왕가, 바왕가의 동요, 바왕가의 끊어짐), 오문전향, 받아들임, 조사, 결정, 7가지 자와나, 2가지 등록이다. 이 가운데서 15가지 인식의 등급으로 나누어지는 핵심은 ‘지나간 바왕가(atīta-bhavaṅga)’인데 이것은 일단 대상이 나타났지만 그 대상의 충격이 미약하여서 마음이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나쳐 버리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면 충격이 매우 작은 대상들은 바왕가의 동요만 일으키고 인식과정이 끝나 버린다. 그 가운데서도 제일 마지막 15번째 경우에는 대상이 문으로 들어왔는데도 15번째의 마음 순간까지 그것을 알지 못하고 흘러가 버려 겨우 두 번만 바왕가의 동요가 일어나고서 인식과정이 끝나 버리는 경우이다. (5) 의문인식과정은 오문인식과정보다 단순한데 그 이유는 오문전향, 받아들임, 조사, 결정의 과정이 없고 의문전향 다음에 바로 자와나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마음의 대상은 이런 과정이 없이 즉각적으로 마음에 영향을 미친다는 말이다. 이것은 마음의 대상에 따라서 선명한 것과 희미한 것의 둘로 나누어진다. (6) 각각의 인식과정은 반드시 하나 이상의 바왕가를 거쳐서 그 다음의 인식과정으로 넘어간다. (7) 인식과정에 개입된 마음은 모두 7가지이다. 즉 오문전향의 마음, 식(眼識·耳識·鼻識·舌識·身識 중의 하나), 받아들이는 마음, 조사하는 마음, 결정하는 마음, 자와나, 등록하는 마음이다. 여기서 자와나는 7번 일어나고 등록은 2번 일어나므로 인식과정에서 모두 14가지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다. (지나간 바왕가와 바왕가의 동요와 바왕가의 끊어짐은 바왕가의 한 형태이기 때문에 육문으로 들어온 감각의 대상을 아직 자기의 대상으로 삼지 못한다.) 이런 인식과정을 이해하지 못하면 본문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본서의 도처에 이런 인식과정과 관련된 술어들이나 단편적인 인식과정이 언급되고 있으므로 반드시 인식과정에 대한 기본 개념을 파악하고 있어야 본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음을 밝힌다. 더 자세한 것은 본문 뒤편의 도표들을 참고하기 바람.
◎ 원성실성(圓成實性, parinispanna-svabhāva)
원성실성(圓成實性, parinispanna-svabhāva)은 의타기성의 진실한 체(體)인 진여를 말하는 것으로 모든 것에 원만하게 두루 하여 불생불멸(不生不滅)하는 그 체가 거짓이 없는 진실성(眞實性)이므로 원성실(圓成實)이라고 한다. 진여는 모든 상(相)을 여의어 무상(無相)이고, 모든 것의 본체(本體)로서 진실하기 때문에 진공묘유(眞空妙有)이며, 진리(眞理)를 깨달은 지혜로서만 알 수 있기 때문에 이유정무(理有情無)이다.
◎ 일곱 가지 교만
교만(mano). 거만(atimano). 매우 큰 거만(manatimano). 무례(omano). 자기도취(adhimano). 아만(asminamo). 삿된 교만(micchamano) 등을 말한다.
◎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七覺支]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七覺支]’로 옮긴 봇장가(bojjhaṅga)는 bodhi(覺, 깨달음)+aṅga(分, 요소, 인자)의 합성어이다. 그래서 깨달음으로 이끄는 요인, 또는 통찰지를 이끌어 내는 인자를 의미한다. 중국에서는 칠각지(七覺支)로 옮겼고 영어로는 seven factors of enlightment라고 한다. 이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는 다음과 같다. (1) 염각지(念覺支, sati-sambojjhaṅga) - 알아차림의 깨달음의 요소(2) 택법각지(擇法覺支, dhammavicaya-sambojjhaṅga) - 법을 검토하는 깨달음의 요소(3) 정진각지(精進覺支, viriya-sambojjhaṅga) - 정진의 깨달음의 요소(4) 희각지(喜覺支, pīti-sambojjhaṅga) - 희열의 깨달음의 요소(5) 경안각지(輕安覺支, passaddhi-sambojjhaṅga) - 편안함의 깨달음의 요소(6) 정각지(定覺支, samādhi-sambojjhaṅga) - 집중의 깨달음의 요소(7) 사각지(捨覺支, upekkhā-sambojjhaṅga) - 평정의 깨달음의 요소
◎ 일곱 가지 마음의 작용
여기서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은 웨다나(vedanā)이고, 대상에 대한 인식은 샨냐(saññā)이고, 보려는 노력은 쩨따나(cetanā)이고, 대상에 주의를 기울임은 마나시까라(manasikāra)이다. 상좌부 아비담마에 따르면 마음이 대상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7가지 마음의 작용들이 있어야 한다. 이를 모든 마음에 공통되는 마음의 작용(sabbacittasādhāraṇa-cetasika)이라고 한다. (1) 감각접촉(觸, phassa)(2) 느낌(受, vedanā)(3) 인식(想, saññā)(4) 의도(思, cetanā)(5) 집중(心一境, ekaggatā)(6) 생명기능(命根, jīvitindriya)(7) 주의 기울임(作意, manasikāra) 이러한 7가지 마음의 작용들은 마음이 일어나는 그 순간에 반드시 같이 일어난다. 첫째,마음이 일어날 때는 반드시 감각접촉이 같이 일어난다. 이 감각접촉의 기능이 없으면 마음은 결코 대상과 맞닥뜨릴 수 없다. 둘째,느낌이 없으면 마음은 결코 대상을 경험할 수 없다. 셋째, 인식이 없으면 마음은 결코 대상을 인식할 수 없다. 넷째, 의도가 없다면 마음은 대상을 알려는 어떤 행위도 행할 수가 없다. 다섯째,집중이 없으면 그 대상에 마음을 고정시키지 못한다. 여섯째,생명기능 즉 생명이 없으면 마음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일곱째,주의 기울임이 없으면 마음은 역시 대상을 알아차릴 수 없다. 그래서 ‘아는’ 기능뿐인 마음은 이러한 7가지 마음의 작용들의 도움을 받아서 감각의 육문에 나타나는 ‘대상을 아는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는 것이다.
◎ 일곱 가지 잠재적 성향(sattanusaya)
'일곱 가지 잠재적 성향(sattanusaya)' 이란 중생들이 내면적으로 자니는 일곱 가지 잠재적 성향을 의미하는데 구체적으로 말하면, '감각적 쾌락의 잠재적 성향(kamaraganusaya)'. '성냄의 잠재적 성향(patighanusaya)'. '교만의 잠재적 성향(mananusaya)'. '견해의 잠재적 성향(ditthanusaya)'.
'의심의 잠재적 성향(vicikicchanusaya)'. '있음에 대한 탐냄의 잠재적 성향(bhavaraganusaya)', 무명의 잠재적 성향(avijjanusaya)'. 등이다.
◎ 일곱 가지 배움을 지니는 이(satta sekha.七有學)
①흐름에 나아가는 이(예류도. sotapattimagga) ②흐름에 들어선 이(예류과. sotapattiphala) ③한번 돌아옴에 나아가는 이(일래도. sakadagamimagga) ④한번 돌아옴에 들어선 이(일래과. sakadagamiphala) ⑤돌아오지 않음에 나아가는 이(불환도. anagamimagga)
⑥들어오지 않음에 들어선 이(anagamiphala) ⑦아라한에 나아가는 이(아라한도. arahattamagga)
이들 일곱에 대해 '아라한에 들어선 이(아라한과. arahattaphala)' 배움을 마친 이(無學. asekha)의 지위에 속한다.
◎ 일곱 가지 얽매임(sattahi sannojanehi)
①친밀함에 의한 얽매임
②분노에 의한 얽매임
③견해에 의한 얽매임
④의심에 의한 얽매임
⑤교만에 의한 얽매임
⑥있음에 대한 탐냄에 의한 얽매임
⑦무명에 의한 얽매임
◎ 일곱 가지 최승[七種最勝]
일곱 가지 최승[七種最勝]은 온갖 보시 등의 행을 모두 바라밀다라 이름 할 수 없고, 반드시 그 가장 뛰어남을 갖추어야만 바라밀다를 이룰 수 있다.
① 안주최승(安住最勝)은 보살의 종성에 안주하는 것을 말한다.
② 의지최승(依支最勝)은 대보리심에 의지하는 것을 말한다.
③ 의과최승(意果最勝)은 모든 유정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을 말한다.
④ 사업최승(事業最勝)은 한 가지 행에만 그치지 않고 구족하게 모든 사업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⑤ 교편최승(巧便最勝)은 무상지에 머물러 온갖 법이 幻과 같음을 통달하여 집착을 여의는 것을 말한다.
⑥ 회향최승(廻向最勝)은 무상보리에 회향하는 것을 말한다.
⑦ 청정최승(淸淨最勝)은 번뇌장·소지장으로 인하여 어지러워지지 않는 것을 말한다.
◎ 일곱가지 탁월한 일(satta niddasavatthuni)
'일곱가지 탁월한 일(satta niddasavatthuni)'이란
①계를 받아 지니는 것(sikkahasamadana)
②법을 주의 깊게 관찰하는 것(dhammanisanti)
③욕심을 다스리는 것(icchavinaya) ④홀로 머무는 것(patisallana)
⑤부지런히 정진하는 것(viriyarambha)
⑥마음지킴(챙김)과 사려깊음(satinepakka)
⑦견해에 의한 꿰뚫음(ditthipativedha) 등으로 설명된다.
PsA. pp.73-74 참조. 또한 이들은 [장아함경 승집경]에 나오는 칠근법(七勤法)과 그 내용이 대동소이하다.
◎ 일어남(uppado. 生)
Vism(p. 649) 에서는 다음과 같이 부연하고 있다.
'거기에서 일어남(生)이란 과거의 업을 연(緣)하여 발생하는 것이다. 이어짐(流轉.유전)이란 그와 같은
일어남이 이어지는 것이다. 드러난 모습(因相.인상)이란 일체의 형성력에 의한 드러난 모습이다.
지속하는 힘이란 미래에 다시 태어나는 원인이 되는 업이다. 생명을 맺음(結生.결생)이란 새로운
발생이다. 다른 존재로 나아감이란 다른 존재로 나아가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생겨남(生成.생성)이란
구성요소(蘊.온)가 생성되는 것이다. 자라남(生起.생기)이란 도달하여 일어난다는 것으로, 씨뿌려진
것이 무르익어 발생하는 것이다. 태어나이란 늙음등 연에 의해 존재하는 것의 있음의 연으로서,
이것이 곧 태어남이다. 늙음과 죽음등은 알려진 대로이다.
◎ 일어남, 머뭄, 무너짐
아비담마에 따르면 정신(nāma)과 물질(rūpa)의 현상은 일어남(生, uppāda), 머뭄(住, ṭhiti), 무너짐(壞, bhanga)의 세 과정을 거치며 변화하는 흐름 속에 있다. 그리고 정신의 변화는 물질보다 16배 빠르다고 한다. 주석서에 따르면 이러한 마음의 단위는 눈 깜짝할 동안에 수백만 번 일어나고 사라진다고 한다.
◎ 일으킨 생각
‘일으킨 생각’으로 번역한 위딱까(vitakka)는 vi(분리해서)+√tark(생각하다)의 남성명사이다. 경에서는 단순히 생각을 나타내는 막연한 뜻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아비담마에서는 정확한 전문술어로 쓰이며 마음을 대상에 올려놓고 향하게 하는 마음의 작용(cetasika)이다. 마치 왕의 호위가 시골 사람을 궁궐로 안내하듯 위딱까는 마음을 대상으로 인도한다. 중국에서는 심(尋)으로 번역했고, 영어권에서는 thought, thought-conception, initial application 등이라 한다. 그리고 경에서는 vicāra(지속적인 고찰)와 함께 vitakka-vicāra로 쓰여 초선(初禪)의 각지로 정형화되어 나타나고 있다.
◎ 일체를 아는 지혜
‘일체를 아는 지혜’라 번역한 삽반뉴따 냐냐(sabbaññutā-ñāṇa)는 형성된 법(有爲法, saṅkhata-dhammā)과 형성되지 않은 법(無爲法, asaṅkhata-dhammā)의 모든 범위를 다 아는 지혜이다. 이러한 지혜를 지닌 분을 삽반뉴(一切智者, sabbaññū)라고 하며 부처님을 가리킨다. 중국에서 일체지(一切智)라고 번역했고, 영어권에서는 omniscience라고 한다.
◎ 일체지(一切智)
sarvajña. 일체의 법상을 아는 지혜. 모든 존재에 관해서 총괄적으로 다 아는 지혜. 일체 세계, 중생계, 유위 무위, 인과의 차별,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 이들을 모두 다 아는 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