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해 모음

주해 모음 - ㅅ

실론섬 2014. 7. 23. 17:26

 

◎ 사(捨, upeksā)
사(捨, upeksā)는 『구사론』에서 심소(心所) 중 대선지법(大善地法)의 하나이다.유식설에서는 선심소(善心所) 가운데 하나로, 마음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혼침과 도거를 여의어서 생각에 잠기거나 들뜨지 않고, 평등·평정을 유지하는 평등한 마음 작용을 말한다.


◎ 사(捨)
사(捨)는 평정(平靜), 고려(顧慮)라 한다. 『구사론』의 심소법 중에서 대선지법(大
善地法)의 하나이다. 유식설(唯識說)에서는 선심소(善心所)의 하나인데, 마음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혼침과 도거를 여의어서 생각에 잠기거나 들뜨지 않고, 평등·평정을 유지하는 마음의 작용.

 

◎ 사도(四倒)
사도(四倒)는 사전도(四顚倒)라고도 하며 유위사전도(有爲四顚倒)와 무위사전
도(無爲四顚倒)를 합하여 팔전도(八顚倒) 또는 팔도(八倒)라고도 한다. 

① 유위사전도(有爲四顚倒)는 범부가 이 세계의 참된 모습을 알지 못하고 무상(無常)을 상(常)이라 하고 고(苦)의 현실을 락(樂)이라고 하며, 부정(不淨)을 정(淨)이라고 하고, 무아를 아(我)라고 집착하는 것. 

② 무위사전도(無爲四顚倒)는 성문·연각은 유위의 4전도에 대해서는 바른 견해를 가지고 있어도 깨달음의 경계에 있어서 모든 것이 없어진 무존재(無存在)의 세계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깨달음의 세계는 상·락·아·정임을 알지 못하고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부정(不淨)이라고 하는 것이다.


◎ 사지(四智)

사지(四智)는 『대승장엄경론(大乘莊嚴經論)』 3권 「보리품(菩提品)」(大31pp.606c23-607a2)에서 대원경지(大圓鏡智)·평등성지(平等性智)·묘관찰지(妙觀察智)·성소작지(成所作智)의 사지(四智)가 설해진다. 그런데 아직 ‘모든 식의 전변’ 과 ‘네 가지 지혜를 얻는다.’는 두 개념이 결합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제42송·제43송에서 전식(轉識)과 득지(得智)의 결합을 예상시키는 사상이 인정되고 있으므로, 『대승장엄경론(大乘莊嚴經論)』은 ‘전식득지(轉識得智)’ 상이 형성되는 과도기라고 할 수 있다. 『섭대승』하권(大31 p.149b29-c7)에서 비로소 팔식(八識)과 사지(四智)가 결합되어 나타난다.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에 “식온(識薀)의 의지처를 전환하기 때문에 대원경지·평등성지·묘관찰지·성소작지를 얻는다. 이중에서

① 대원경지(大圓鏡智)는 잃어버림이 없는 법으로서, 알아야 할 경계가 현전하지 않더라도 또한 능히 기억하여 아는 경지이다. 논서를 잘 익히고 독송하는 자는 이전부터 밝게 알았던 자다.

② 평등성지는 먼저 진정한 법계에 통달할 때 모든 유정의 평등심을 얻는 등이니 이 가운데에서 궁극적으로 청정함을 알아야 한다.

③ 묘관찰지는 창고의 주인처럼, 그 원하는 대로 어떠한 다라니문·삼마지문에 따라 작의하고 사유하면 곧 자재하고 걸림이 없는 지혜가 전전함을 얻는 것이다.

④ 성소작지는 능히 도솔천에서 생을 마치는 데서 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 시현하는 갖가지 불사에 대해 자재함을 얻는 것이다.”라고 한다.

『섭대승논석(攝大乘論釋)』9권(大31 p.372a12-21) 由轉識蘊依故, 得大圓鏡智 平等性智 妙觀察智 成所作智. 此中大圓鏡智者, 謂無忘失法, 所知境, 雖不現前亦能記了鏡智. 善習誦書論光明. 平等性智者, 謂先通達眞法界時, 得諸有情平等心等, 應知此中究竟淸淨. 妙觀察智者, 謂如藏主如其所欲, 隨於何等陀羅尼門, 三摩地門作意思惟, 卽得自在無礙智轉. 成所作智者, 謂能示現從睹史多天宮, 而沒乃至涅槃, 種種佛事皆得自在. 또한 『성유식론』10권(大31 p.56a12-28)에는 4지에 대해서 더욱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 사미(沙彌. śrāmanera) 

출가하여 20세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아 비구가 되기 전에 십계 곧 살생하지 않고, 훔치지 않고, 음행하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고, 술 마시지 않고, 높고 넓은 상을 멀리 하고, 꽃 장식 등을 멀리 하고, 춤과 노래를 멀리 하고, 보물을 멀리 하고, 때가 아니면 먹지 않는 계행을 수행하는 7세부터 20세 사이의 남자 출가자를 말한다. 같은 단계의 여자인 사미니, 구족계를 받은 비구·비구니, 그리고 4 근본계와 6법을 배워 도심의 견고함을 평가받는 비구니되기 2년 전의 식차마나(式叉摩那, śiksamāna)와 함께 출가오중(出家五衆)을 이룬다.

 

◎ 소의(所依, āśraya)

소의(所依, āśraya)는 『대승장엄경론(大乘莊嚴經論)』에서 9종의 의미로 분류할 수 있다. ① 기체지지(基體支持) ② 근저(根底) ③ 귀의소(歸依所) ④ 근원(根源)·원천(源泉) ⑤ 문법상의 주어로서 동작의 주체 ⑥ 육체(肉體), 때로는 육근(六根) ⑦ 인간의 총괄적인 존재방식 ⑧ 법계(dharmadhātu) ⑨ 전환되어야할 존재의 근저(根底)라고 한다. 여기서 소의(所依)가 여러 가지로 번역되나, 전의란 해탈(moksa) 자유(svatantra) 완성(parinispanna)이다. 나아가 견도에 들어가는 것이고, 수도의 정점에 위치하여 불지에 이르고, 법신을 달성한다고 서술하고 있다. 『섭대승론(攝大乘論)』에는 의타기성(依他起性)의 별명이라고 서술되고 있다. 『유가사지론』의 「보살지(菩薩地)」 이후에는 소의가 아뢰야식과 관련되어 법신 또는 진여로서의 소의를 기술하고 있다.

 

◎ 32가지 상 
‘32가지 상’은 부처님과 전륜성왕만이 갖추고 있는 훌륭한 신체적 특성이다. 디가 니까야, 「대전기경(大傳記經, Mahāpadana-sutta)」(D14)과 「삼십이상경(三十二相經, Lakkhaṇa-sutta)」(D30) 등에 나타나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1) 비구들이여, 여기 대인은 발바닥이 편평하다. 비구들이여, 대인의 발바닥이 편평한 이것 역시 대인에게 있는 대인상이다.

(2) 다시 비구들이여, 대인에게는 발바닥에 바퀴[輪]들이 (나타나) 있는데 그들 바퀴에는 천 개의 바퀴살과 테와 중심부가 있어 일체를 두루 갖추었다. 비구들이여, 대인에게는 발바닥에 바퀴들이 (나타나) 있는데 그들 바퀴에 천 개의 바퀴살과 테와 중심부가 있어 일체를 두루 갖춘 이것 역시 대인에게 있는 대인상이다.

(3) 속눈썹이 길다. …

(4) 손가락이 길다. …

(5) 손과 발이 부드럽고 섬세하다. …

(6) 손가락과 발가락 사이마다 얇은 막이 있다. …

(7) 발꿈치가 발의 가운데 있다. …

(8) 장딴지가 사슴 장딴지와 같다. …

(9) 꼿꼿이 서서 굽히지 않고도 두 손바닥으로 두 무릎을 만지고 문지를 수 있다. …

(10) 음경이 감추어진 것이 마치 말과 같다. …

(11) 몸이 황금색이어서 자마금紫磨金과 같다. …

(12) 살과 피부가 부드러워서 더러운 것이 몸에 붙지 않는다. …

(13) 각각의 털구멍마다 하나의 털만 나있다. …

(14) 몸의 털이 위로 향해 있고 푸르고 검은 색이며 [소라처럼] 오른쪽으로 돌아 있다. …

(15) 몸이 넓고 곧다. …

(16) 몸의 일곱 군데가 풍만하다. …

(17) 윗몸이 커서 마치 사자와 같다. …

(18) 어깨가 잘 뭉쳐져 있다. …

(19) 니그로다 나무처럼 몸 모양이 둥글게 균형이 잡혔는데, 신장과 두 팔을 벌린 길이가 같다.

(20) 등이 편평하고 곧다. …(21) 섬세한 미각을 가졌다. …

(22) 턱이 사자와 같다. …

(23) 이가 40개다. …

(24) 이가 고르다. …

(25) 이가 성글지 않다. …

(26) 이가 아주 희다. …

(27) 혀가 아주 길다. …

(28) 범천의 목소리를 가져 가릉빈가 새 소리와 같다.

(29) 눈동자가 검푸르다. …

(30) 속눈썹이 소와 같다. …

(31) 두 눈썹 사이에 털이 나서, 희고 가느다란 솜을 닮았다.

(32) 다시 비구들이여, 대인에게는 정수리에 육계가 솟았다. 비구들이여, 대인은 정수리에 육계가 솟았다는 이것 역시 대인에게 있는 대인상이다. 

이러한 32상은 디가 니까야, 「삼십이상경」(D30)에서 설명하듯이 부처님이 갖추신 지와 덕과 자비 등을 몸의 모습 32가지로 형상화하여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 사선근(四善根)

사선근(四善根)은 설일체유부에서 처음으로 무루의 지혜가 생겨서 사제(四諦)의 이치)를 명확하게 보는 자리를 견도(見道)라고 한다. 이것은 무루의 성자위로서 견도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적 수행단계이므로 순결택분이라 한다. 유가행파의 5位설에서는 가행위(加行位)라고도 부른다. 사선근위는 난위(煖位, usmagata)·정위(頂位, mūrdhan, mūrdhāna)·인위(忍位, ksānti)·세제일법위(世第一法位, laukikāgradharma)의 선근이 생기는 위(位)를 말한다. 사선근(四善根)은『근본설일체유부비내야(根本說一切有部毘奈耶)』 권35(大23 p.819a5-6)에서 처음으로 이 용어가 보인다. 특히 『구사론』 권23(大29 pp.119b-121a5)에서 사선근위(四善根位)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으며, 『유가사지론』 권28(大30 p.439b17) 등에도 보인다. 또 『성유식론』 권9(大31 p.49a25)에 의하면, “논하여 말한다. 보살(菩薩)은 먼저 무수겁 동안 복덕과 지혜의 자량을 잘 비축하여 순해탈분을 이미  원만하게 마쳤다. 견도에 들어가서 유식의 성품에 안주하기 위하여 다시 가행(加行)을 닦아 이취(二取)를 조복하고 제거한다. 곧 난(煖)·정(頂)·인(忍)·세제일법(世第一法)을 말한다. 이 네 가지를 총히 순결택분이라고 한다.

論曰, 菩薩先於初無數劫, 善備福德智慧資糧, 順解脫分旣圓滿已. 爲入見道, 住唯識性, 復修加行, 伏除二取, 謂煖頂忍世第一法. 此四總名順決擇分.”

 

◎ 사위의(四威儀)
사위의(四威儀)란 일상의 기거동작(起居動作)인 행(行)·주(住)·좌(坐)·와(臥)
에서 지켜야 할 제약을 계율로 정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행법(行法)은 여인(女人)이나 혹은 술 취한 사람과 함께 가지 말며, 손을 드리우거나, 좌우를 돌아보지 말고 7척 전방의 땅을 곧바로 보라는 등이다. 주법(住法)은 똑바로 앞에 서지도 말고, 똑 바로 뒤에 서지 말라는 등으로 정해져 있다. 좌법(坐法)은 좌구(坐具)를 깔고 결가부좌(結跏趺坐)하거나 혹은 반가부좌(半跏趺坐)하는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피로하여 다리를 뻗을 때에도 한 다리만 뻗어야 하고, 두 다리를 같이 뻗지 못하는 등의 규정이 있다. 와법(臥法)은 와구(臥具)를 깔고 바른 손을 베개로 하고 우협(右脥)을 바닥에 대고 누워야 하며, 두 발은 겹쳐야 한다는 등의 규정이 그것이다.

 

◎ 사념처(四念處) 
‘사념처(四念處)’로 번역한 사띠빠따나(sati-paṭṭhāna)는 sati(알아차림)+paṭṭhāna(확립)의 합성어로 몸(身, kāya), 느낌(受, vedanā), 마음(心, citta), 마음의 대상(法, dhamma)의 네 가지에 대한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수행을 뜻한다. 중국에서 사념처(四念處)라 했고, 영어권에서는 four foundation of mindfulness라 하며, 우리말로는 ‘네 가지 알아차림의 확립’으로 옮길 수 있다. 이러한 사념처는 다음과 같다.

(1) 몸에 대한 알아차림의 확립(身念處, kāyānupassanā): 14가지

① 들숨날숨[出入息]

② 네 가지 자세

③ 네 가지 분명한 앎

④ 32가지 몸의 형태

⑤ 사대四大를 분석함

⑥-⑭ 아홉 가지 공동묘지의 관찰

(2)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의 확립(受念處, vedanānupassanā): 9가지

① 즐거운 느낌

② 괴로운 느낌

③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④ 육체적으로 즐거운 느낌

⑤ 육체적으로 괴로운 느낌

⑥ 육체적으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⑦ 정신적으로 즐거운 느낌

⑧ 정신적으로 괴로운 느낌

⑨ 정신적으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3) 마음에 대한 알아차림의 확립(心念處, cittānupassanā): 16가지

① 탐욕이 있는 마음

② 탐욕이 없는 마음

③ 성냄이 있는 마음

④ 성냄이 없는 마음

⑤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

⑥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

⑦ 위축된 마음

⑧ 산만한 마음

⑨ 커진 마음

⑩ 커지지 않은 마음

⑪ 향상된 마음

⑫ (더 이상) 향상될 수 없는 마음

⑬ 집중된 마음

⑭ 집중이 안 된 마음

⑮ 자유로워진 마음

⑯ 자유로워지지 않은 마음

(4) 마음의 대상에 대한 알아차림의 확립(法念處, dhammānupassanā): 5가지

① 오개(五蓋)를 파악함

② 오온(五蘊)을 파악함

③ 십이처(十二處)를 파악함

④ 칠각지(七覺支)를 파악함

⑤ 사성제(四聖諦)를 파악함

 

◎ 사대왕천(四大王天, Cātu-mahārājika)

사대왕천(四大王天, Cātu-mahārājika)은 원래 고대 인도에서 세계의 수호신(Loka-pāla)이었던 것을 불교가 수용한 것이다. 불교의 우주관에 의하면 세계의 중앙에 우뚝 솟은 수미산(須彌山, Sineru)의 정상에는 삼심삼천(三十三天, Tāvatiṁs)이라 불리는 신들의 세계가 있고, 이 수미산의 중턱을 둘러싸고 사방에 사천왕의 세계가 있다. 동쪽의 천왕은 지국천(持國天, Dhataraṭṭha)인데 천상의 음악가인 간답바(Gandabba)들을 통치하고, 남쪽의 천왕은 증장천(增長天, Virūḷhaka)인데 숲이나 산이나 숨겨진 보물을 관리하는 꿈반다(Kumbhaṇḍa)들을 통치하고 서쪽의 천왕인 광목천(廣目天, Virūpakkha)은 용들을 통치하며, 북쪽의 천왕인 비사문천(毘沙門天, Vessavaṇa)은 야차(Yakkha)들을 통치한다고 한다. 이들은 위로는 제석(Sakka)을 섬기고 아래로는 팔부중(八部衆)을 지배하여 불법에 귀의한 중생을 보호한다고 한다.

 

◎ 사두(Sādhu) 
사두(Sādhu)는 √sad(즐기다, 맛보다, 향유하다)에서 파생된 명사형이다. PED에서 ‘sweet, nice, pleasant.’라고 설명되듯이 원래는 감미롭고, 좋고, 기분 좋은 것을 뜻하는 말이었는데, 상좌부 불교국에서 누군가가 어떤 공덕 행을 하거나, 법문이 끝나면 이 말을 3번씩 합송함으로써 선업을 다 함께 기뻐주는 말이 되었다. 이럴 때에는 ‘장하구나. 착하도다. 선재(善哉)’ 등의 뜻이다. 이렇게 하는 사두라고 세 번 합송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의 선행을 진심으로 기뻐해줌으로써 그 공덕을 함께 나누려는 의미가 있다.  

 ◎ 사리뿟따(Sāriputta) 장로 

사리뿟따(Sāriputta) 존자는 부처님의 법을 가장 잘 이해하고 지혜가 으뜸이었기 때문에 법의 장군(法將, Dhamma-senāpati)이라고 불렸다. 그는 날란다 지방의 큰 바라문 가문에 태어났으며 출가 전 이름은 우빠띳사(Upatissa)라고 불리었다. 사리뿟따라는 이름은 존자의 어머니 이름이 사리(Sārī)였기 때문에 사리의 아들이란 뜻인 사리뿟따로 불리게 되었다. 목갈라나(Moggalāna) 존자와는 어렸을 적부터 친한 친구였으며 어느 날 라자가하(Rājagaha)의 산마루 축제를 보러 갔다가 갑자기 삶의 덧없음을 느끼고는 함께 출가하여 사문이 되었다. 처음 출가해서는 불가지론(不可知論)을 펴던 산자야 벨랏티뿟따(Sañjaya Belaṭṭhiputta)의 제자였는데 다섯 비구 가운데 한 분이었던 앗사지(Assaji) 존자가 읊는 게송의 첫 번째 두 구절을 듣고 수다원과를 얻었다. 그리고는 그 게송을 도반인 목갈라나에게 전해주어 그도 수다원과를 얻게 하고는 함께 승가에 들어와 부처님의 상수제자가 되었다. 부처님께서는 사리뿟따 존자와 목갈라나 존자를 비구들이 본받아야 할 이상적인 제자라고 선언하셨다.(S.ii.235; A.i.88). 부처님은 「제분별경(諸分別經, Saccavibhanga-sutta)」(M.iii.248)에서 두 상수제자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설명하셨다. “사리뿟따는 아이를 낳는 어머니와 같고 목갈라나는 갓난아이를 돌보는 유모와 같다. 사리뿟따는 제자들을 가르쳐 수다원과에 들게 하고 목갈라나는 더 높은 단계로 이끌어 올려준다.”세존께서는 두 상수제자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로 하여금 승가의 일을 분담하여 보살피도록 하시고, 여래가 안 계실 때에는 그들이 승가의 일을 책임지도록 하셨다. 또한 부처님은 긴요한 상황이 생기면 특별한 임무를 두 상수제자에게 부여하시는 일이 자주 있었다. 예컨대 데와닷따(Devadatta)가 웨살리(Vesāli) 출신의 갓 출가한 비구들을 꼬드겨서 가야시사(象頭山, Gāyasīsa)로 데리고 가자, 부처님께서는 두 상수제자를 보내어 데와닷따가 잠시 잠들어 있는 틈을 타 500명의 비구들을 설득하여 모두 되돌아오게 하셨다. (Vin.2:199-200) 주석서에 따르면 사리뿟따 존자가 마지막 생에 고따마 부처님의 상수제자가 된 것은 1아승지 10만겁 전 아노마닷시(Anomadassī) 부처님 당시 사라다(Sarada)라는 바라문이었을 때 목갈라나 존자의 전신인 시리왓다나(Sirivaddhana)와 함께 미래 부처님의 상수제자가 되고자 원을 세웠기 때문이라고 한다.「자따까」를 보면 사리뿟따는 보살과 함께 생사윤회를 반복하면서 위기에 처한 보살을 여러 번 구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보살이 바라밀을 완성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밀린다빤하」에 따르면 사리뿟따 존자는 수천수만 생 동안 보살의 아버지, 할아버지, 삼촌, 형, 아들, 조카, 그리고 친구였다고 한다. 부처님은 종종 법의 주제만 제시하고, 그러면 사리뿟따 존자는 그 주제에 대해 상세하게 설법을 하였고 그러한 법문은 부처님의 최종 승인을 얻었다고 한다.(M.i.13; iii.46, 55, 249). 그래서 법의 장군(法將, Dhamma-senāpati)이라고 불렸다. 상수제자로서 사리뿟따가 한 주요한 임무는 불법을 체계화하는 일이었고 이것이 아비담마의 시작이었다. 부처님께서는 삼십삼천에 임하여 마야부인을 위시한 천인들에게 아비담마를 설하셨다. 그때 부처님은 제석(Sakka)의 보좌에 여래의 표상으로 만들어 놓고 그로 하여금 계속 법문을 하게하고 히말라야의 아노아따(Anoatta) 호수로 매일 내려 오셔서 목욕을 하시고 쉬시곤 했다. 이때 사리뿟따가 와서 부처님에게 아비담마를 듣고서 다시 이를 오백 명의 제자들에게 전수하였다고 한다. 사리뿟따의 뛰어난 지혜는 부처님께서 삼십삼천에서 상까사(Saṅkasa)로 내려온 뒤에 대중들에게 각각의 지적 수준에 맞는 질문을 하셨는데 마지막 최상의 질문은 아무도 답변하지 못하고 오직 사리뿟따만이 답변을 할 수 있었던 데에서 잘 드러난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사리뿟따를 큰 지혜를 가진 이들 가운데 으뜸이라고 선언하셨고(A.i.23), 지혜에 있어서 여래 바로 다음이라고 칭찬하셨다.(SA.ii.45) 사리뿟따는 제자를 가르칠 때에도 한량없는 인내심을 보여주었다. 그는 제자들이 수다원과를 성취할 때까지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일깨우고 가르치곤 했다. 그런 다음에라야 그는 새 제자를 받아들였다. 그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라 아라한과를 성취한 이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사리뿟따 존자는 지혜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한량없는 자비심을 가졌다. 또한 의지할 곳 없고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 데도 으뜸이었다.「로사까 자따까(Losaka Jātaka)」(J.No.41)에 따르면 어느 날 사왓티(Sāvatthi) 시내를 탁발하다가 남의 집 하수도에서 밥알을 주워 먹는 로사까 띳사(Losaka-tissa)를 보고 매우 불쌍히 여겨서 그를 승원에 데리고 와 손수 목욕을 시키고 출가시켰다.「까란디야 자따까(Kāraṇḍiya Jātaka)」(J.No.356)에 따르면 사리뿟따는 어부와 사냥꾼처럼 생계 때문에 도저히 오계를 지킬 수 없는 사람들에게도 오계를 주면서 사람들을 바른 도로 인도하려고 노력했다. 존자는 또한 설법에 있어서도 누구보다 으뜸이었다. 임종의 병상에 누워 있던 아나따삔디까(Anātha-piṇḍika)에게 심오한 설법을 하였고, 존자의 설법에 감동한 그는 눈물을 흘리며 이에 견줄만한 법문은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노라고 고백했다.(M143). 사리뿟따 존자는 또한 한번 결의한 것은 두 번 다시 행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때 신자들이 비구들을 위해 과자를 가져왔는데 같이 있던 젊은 비구가 탁발을 나가 자리에 없었으므로 신자들은 그 비구를 위해 남겨놓은 여분의 과자마저 존자에게 마저 드시게 하였다. 그때 젊은 비구가 돌아와 자신 몫의 과자가 없어진 것을 알고는 불평을 하였다. 사리뿟따 존자는 무안하여 두 번 다시는 그 과자를 입에 대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실제로 존자는 그 이후로 평생 과자를 들지 않았다고 한다.(J.i.310) 사리뿟따 존자는 감사하는 마음과 친절, 남을 돕는 마음과 인욕 같은 훌륭한 성품 덕분에 출가자로서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깊은 교우관계를 많이 맺을 수 있었다. 그 중에 또 다른 한분의 상수제자인 목갈라나와는 어렸을 때부터 친구이자 도반으로 아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그 친분은 부처님의 말년 죽음이 그들을 갈라놓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한편 사리뿟따 존자의 어머니는 삼보에 대해서 내내 증오심을 품어왔던 고집 센 바라문이었다. 입멸할 때가 왔음을 안 존자는 부처님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는 고향마을 날라까(Nālaka)로 돌아와서 자신의 어머니에게 설법을 하여 수다원과를 얻게 하고는 태어난 방에서 반열반에 들었다. 보름 뒤 목갈라나도 입적하였으며, 그로부터 반년 후에 부처님께서 무여의열반에 드셨다고 한다. 법의 스승으로서 누렸던 사리뿟따의 위대한 명성은 사후에도 존속되어 후대의 불자들 사이에서 하나의 귀감이 되고 있다.「밀린다빤하」에서 밀린다왕은 나가세나 존자를 사리뿟따 존자와 비교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 부처님 문하에서 법의 장군, 사리뿟따 존자를 제외하고는 존자만큼 질문에 잘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소."(Miln.420) 19세기 중엽 영국의 커닝햄(Cunningham)에 의해 인도의 산치(Sanchi) 대탑에서 사리뿟따와 목갈라나의 사리가 들어있는 두 개의 석재 사리함이 발굴되었고 두 존자의 사리 중 일부가 1950년 10월 20일 미얀마에 전해져 제6차 결집의 사적지에 세워진 양곤의 까바예(Kabaye) 파고다에 안치되었다.

 

◎ 사마타(samatha) 
사마타(samatha)는 산스끄리뜨어 어근 √śam(고요하다, 평온하다, 그치다, 적멸하다)에서 온 명사이다. PED에서 ‘calm, quietude of heart.’이라고 설명되듯이, ‘고요함, 맑음, 적정’ 등을 뜻한다. 모든 불선법(不善法)이 가라앉고 그친다는 의미에서 중국에서 지(止)로 옮겼고, 영어권에서는 calm이라 한다. 이 사마타는 선정(jhāna)를 가리키면서, 삼매(samādhi)와 동의어인 술어이다. 아비담마에서 사마타는 네 가지 색계선(色界禪)과 네 가지 무색계선(無色界禪)이라는 8가지 선정의 경지에서 하나로 집중된 마음(心一境性, cittassa-ekaggatā)으로 정의한다. 이런 경지들은 마음이 한끝으로 집중되어서 마음의 떨림이나 동요가 가라앉았고 끝이 났기 때문에 고요함(사마타)이라 불리는 것이다. 그래서 사마타 수행은 근본집중(appanā-samādhi)과 근접집중(upacārā-samādhi)과 같은 깊은 집중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경에는 사마타를 위한 다양한 수행대상이 언급되고 있는데 주석서에서는 38가지로 정리되어 나타나고 「청정도론」에서는 최종적으로 40가지로 정리되어 있다. 그리고 사마타 수행의 핵심은 표상(nimitta)이라는 개념인데 대상에 집중을 해서 그 대상에서 익힌 표상을 일으키고, 이것이 더욱 발전되어 닮은 표상(paṭibhāga-nimitta)이 될 때 이 닮은 표상을 대상으로 하여 다섯 가지 장애(五蓋, pañca-nīvaraṇa)가 극복되고 마음이 집중되는 것을 근본집중(appanā-samādhi)이라고 한다. 이것이 사마타 수행의 핵심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마타수행만으로는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기 때문에 탐욕(rāga), 성냄(dosa), 어리석음(moha)으로 대표되는 근본 번뇌들을 꿰뚫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사마타란, 마음과 대상이 온전히 하나가 된 그런 밝고 맑고 고요함에 억눌려서 이런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잠복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집중의 상태를 풀면 다시 이러한 번뇌의 공격을 받는다. 그러므로 위빠사나의 강력한 통찰지혜를 계발하여 이 지혜의 힘으로 그 뿌리를 뽑아,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 사무애해(四無碍解) 

‘사무애해(四無碍解)’라 번역한 빠띠삼비다(paṭismbhidā)는 paṭi(~에 대하여)+saṃ(함께)+bhid(분할하다, 해체하다)의 합성어로 자유자재하며 거리낌 없는 이해능력 및 언어적 표현능력을 가리킨다. 중국에서 무애해(無碍解)라고 번역했고, 영어권에서 analytical knowledge, analytic insight라고 한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은 「청정도론」(Vis.ⅪV.21)을 참고할 것.

(1) 의무애해(義無碍解, attha-paṭisambhidā): 의미를 통달한 분석지로,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의 의미, 목적, 결과와 기능적 필요성을 이해하는 능력이다.

(2) 법무애해(法無碍解, dhamma-paṭisambhidā): 법에 대한 분석지로,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다는 것(인과법, 연기법), 고귀한 팔정도, 설해진 법, 법과 관련된 범위 내에서 있는 모든 지식을 이해하는 능력이다.

(3) 사무애해(詞無碍解, nirutti-paṭisambhidā): 언어에 대한 분석지로, 실재를 표현하는 언어에 관한 지식으로서 언어로 표현하는 데 걸림이 없는 능력이다.

(4) 변무애해(辯無碍解, paṭibhāna-paṭisambhidā): 언어 구사력에 대한 분석지, 즉 임기응변에 능한 분석지인데, 법의 의미에 대해 미사여구를 자유자재로 사용하여 누구나 쉽게 알아듣도록 설명하는 능력이다. 

◎ 사문(沙門)

‘사문(沙門)’으로 음역한 사마나(Samaṇa/Sk. Śramaṇa)는 ‘구도자’, ‘도인(道人)’ 등을 의미한다. 중국에서 사문(沙門)이라고 음역했고, 영어로는 recluse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비구와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지만, 원래 사문은 고대 인도에서 반(反)베다적이고 반(反)브라만적인 출가 수행자를 가리켰다. 그들은 종래의 전통적인 정신원리인 베다 성전이나 사제인 바라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비전통적인 사상가였으며, 이런 의미에서 자유사상가라고도 말할 수 있다. 불교의 개조인 고타마 부처님도 이런 사문 중의 한 분이셨고, 동시대 외도들로부터 사문 고따마라고 불렸다. 불교가 흥기할 무렵인 BC 6~5세기의 인도 사회는 인도에 침입한 아리안족의 정착이 마무리되면서 농업 생산의 증대와 더불어 상공업이 발달하여 도시의 발전을 촉진하고, 이 도시들을 중심으로 하는 많은 국가들이 형성되었다. 이 결과 브라만 계급을 대신하여 왕족 계급이 발흥하고, 상공업자의 경제적 실권이 증대하게 된다. 결국 기존의 계급제도와 종교의 권위가 실추된 시대적 상황에서 등장한 신흥종교가 또는 사상가가 사문이다. 사상적으로 보면 이들은 베다 종교의 제식(祭式) 만능주의에 반대하고, 극단적인 유물론자들도 있지만 대체로 업(業)과 윤회(輪廻)의 사상에 입각하여 고(苦)의 세계인 윤회로부터 벗어나 해탈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불전(佛典)에서 전하는 육사외도(六師外道)가 당시의 대표적인 사문들이다. 불교에서 비구를 사문이라 칭하는 이유는 사문들의 특징이 출가주의를 지향한 점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 사문(沙門, sāmañña)

부처님 당시의 고대 인도에는 바라문(婆羅門, brāmaṇa)과 사문(沙門, sāmañña)이라는 두 부류의 종교인이 있었다. 바라문은 전통적인 종교인으로 베다 종교를 신봉하고 제사를 지내지만 동시에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철학에 심취하여 거기서 불사의 진리를 얻으려 했던 것이다. 그들은 소년기에 스승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학생기에 베다를 학습한다. 그리고 난후 결혼하여 가장으로서의 의무를 완수하는 가주기(家住期)에 들어간다. 그리고 노년이 되면서 집안의 모든 것을 아들에게 양도하고 숲속으로 들어가 임주기(林住期)를 지낸다. 최후에는 숲속의 거처까지도 버리고 일정한 곳에 머물지 않는 유행기(流行期)에 들어가 정처 없이 떠돌다가 일생을 마치는 것이다. 이러한 바라문외에 전혀 새로운 형태의 종교수행자도 나타났는데 이들을 사문이라고 한다. 그들은 집을 버리고 걸식생활을 하면서 곧바로 유행기의 생활로 들어간다. 그리고 청년기부터 금욕생활을 하고 숲속으로 들어가 요가(yoga)수행을 하거나 혹독한 고행에 몸을 바쳤다. 그렇게 함으로써 불사의 진리를 체득하려 했다. 즉 사문이라는 말은 당시의 인도의 일반적인 수행자를 지칭한다. 꼰단냐를 비롯한 다섯 수행자들은 이러한 사문으로 출가한 상태였기 때문에 불교 승가의 정식구성원인 비구는 아니었던 것이다.

◎ 사바세계(娑婆世界, sahā-loka-dhātu)

사바세계(娑婆世界, sahā-loka-dhātu)는 인토(忍土)·인계(忍界)·감인토(堪忍土)라고도 한다. 인간이 머무는 현실세계. 곧 이 현실세계를 살고 있는 중생은 탐·진·치 3독과 모든 번뇌를 참고 견디어 내며 또한 모든 보살이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피로와 권태를 참고 견디어 내야하므로 감인세계라고 한다.

 ◎ 사부대중(四部大衆, cattāri-parisadāni) 

‘사부대중(四部大衆, cattāri-parisadāni)’이란 사중(四衆) 또는 사부중(四部衆)이라고도 하며, 불제자를 총칭하는 말이다. 사부는 출가와 재가, 남자와 여자에 따른 구분인데, 우선 출가의 두 무리와 재가의 두 무리로 나뉜다. 출가의 두 무리는 비구(比丘, bhikkhu)와 비구니(比丘尼, bhikkhuni), 재가의 두 무리는 우바새(優婆塞, upãsaka)와 우바이(優婆夷, upāsika)이다. 우바새와 우바이는 삼보(三寶)에 귀의하고 오계(五戒)를 받은 사람으로, 출가자를 받들고, 그들에게 생활의 필수품을 보시하고 그 지도를 받아 재가생활을 영위하면서 수행한다. 비구와 비구니는 각각 출가한 남성 수행자와 출가한 여성 수행자를 지칭하며, 공히 구족계(具足戒, upasampadā)를 받는다.

 

◎ 사사나(sāsana)
‘교법(敎法)’이라 번역한 사사나(sāsana)는 PED에서 ‘order, message, teaching'이라고 설명되듯이, 일차적으로 ‘명령, 메시지, 전갈'의 뜻이며, 부처님께서 설하신 구분교(九分敎, navaṅga-sāsana)를 지칭한다. 경장(經藏)으로 완성되기 이전의 교법을 서술의 형식이나 내용에 따라 분류하던 방식이었다. 주석서들에 따르면 율장과 논장도 이러한 구분교에 포함된다고 한다.

(1) 계경(契經, Sutta): 경 가운데 장행 내지 산문의 부분.

(2) 중송(重頌, Geyya): 먼저 산문으로 서술한 후 다시 운문으로 읊고 있는 경의 부분.

(3) 수기(授記, Veyyākarana): 주석(註釋). 수역(授譯) 또는 별기(別記)라 번역. 불제자들의 생사인과를 적거나 불법의 심의(深意)를 분명히 적은

부분.

(4) 고기송(孤起頌, Gāthā): 운문체의 경문.

(5) 감흥어(感興語, Udāna): 질문을 받지 않았는데도 부처님 스스로 감흥이 일어나 설한 시의 문구.

(6) 여시어(如是語, Itivuttaka):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로 시작하는 경으로 감흥어와 유사하다. 이는 주로 부처님의 윤리적인 가르침을 담고 있다.

(7) 본생담(本生譚, Jātaka): 부처님의 전생담을 실은 경.

(8) 미증유법(未曾有法, Abbhuta-dhamma): 부처님의 공덕의 위대함을 찬탄한 부분. 또는 신비하고 불가사의한 미증유의 일들을 기록한 부분.

(9) 교리문답(方廣, Vedalla): 인명(因明), 정리(正理)에 의거, 불법의 깊은 뜻을 자세히 설한 부분상좌부(上座部)와 대중부(大衆部)에서는 아주 초기의 분류법인 구분교(九分敎)를 채택한 반면, 다른 부파들 특히 대승불교 계통에서는 일반적으로 12분교(十二分敎, dvādasāṇga-dharma-pravacana)를 채택했다. 12분교로 분류할 경우는 여기에

(10) 인연담(因緣譚, Nidāna),

(11) 비유(譬喩, Apadāna).

(12) 논의(論議, Upadesa)가 포함된다.

이와 같이 사사나(sāsana)는 부처님이 평생 설하신 교설을 통틀어 일컫는 말로써 부처님의 가르침 또는 종교적 체계로서의 불교를 뜻한다. 

◎ 사성제(四聖諦) 
불교의 가르침은 모두 사성제(四聖諦, cattari-ariya-saccani)로 집약되고 종합된다. 그래서 맛지마 니까야의 「상적유대경(象跡喩大經, Mahāhatthipadopama-sutta)」(M28)에서 사리뿟따(Sāriputta) 존자는 이렇게 설하였다.

“도반들이여, 예를 들면 움직이는 모든 생명들의 발자국들은 모두 코끼리 발자국에 포괄되고 코끼리 발자국이야말로 그 크기로서 최상이라고 불리는 것과 같습니다. 도반들이여, 그와 같이 어떤 유익한 법이던 그것들은 모두 사성제(四聖諦)에 포괄됩니다. 무엇이 넷인가?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苦聖諦],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集聖諦],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滅聖諦],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도의 성스러운 진리[道聖諦]입니다.”
이처럼 사성제는 불교의 초석이라 할 수 있으며 깨달음이란 바로 이 사성제를 깨닫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 스스로도 “나는 알아야 할 바를 알았고, 닦아야 할 바를 닦았고, 버려야 할 것을 버렸노라. 바라문이여, 그래서 나는 부처, 즉 깨달은 사람이노라.”(Sn.558)라고 말씀하셨다.
사성제는 괴로움(현실)을 철저하게 알고(pariññā) 그 원인인 갈애를 제거하고(padhāna) 괴로움의 소멸(열반)을 실현하고(sacchikiriya) 그러기 위해서 팔정도를 수행하는 것(bhāvanā)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리고 고성제와 집성제는 12연기의 순관(順觀, anuloma) 즉 유전문(流轉門)과 동의어이고 멸성제와 도성제는 12연기의 역관(逆觀, paṭiloma) 즉 환멸문(還滅門)과 동의어이다. 그러면 사성제를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한다.

(1) 고성제(苦聖諦, dukkha-ariyasacca) -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
고성제는 먼저 괴로움의 현실을 철견하는 것으로 시작되어 오온에 대한 정확한 이해로 귀결된다. 괴로움에는 다음과 같은 8가지가 있다.
➀ 태어남(jāti), ➁ 늙음(jarā), ➂ 죽음(maraṇa), ➃ 슬픔(soka), ➄ 비탄(parideva), ➅ 육체적인 고통(dukkha), ➆ 정신적인 고통(domanassa), ➇ 절망(upāyāsa), ➈ 싫어하는 것과 만나는 것(appiyasampayoga), ➉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piyavippayoga), ⑪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icchitālābha), ⑫ 집착하는 무더기(upādāna-kkhandha).
그리고 다음의 세 가지 성질로 설명된다.
➀ 고고성(苦苦性, dukkha-dukkhatā): 삶은 고통스럽기 때문에 괴로움이다.
➁ 괴고성(壞苦性, viparinnāma-dukkhatā): 아무리 큰 행복일지라도 결국은 변하기 때문에 괴로움이다.
➂ 행고성(行苦性, saṅkhāra-dukkhatā): 본질적으로 오온으로 형성되어 있는 것을 ‘나’, ‘나의 것’으로 집착하기 때문에 괴로움이다.

(2) 집성제(集聖諦, dukkha-samudaya-ariyasacca) -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
집성제는 고의 원인을 규명하는 것으로 갈애(taṇhā)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이 갈애는 다음의 3가지로 설명된다.
➀ 욕애(慾愛, kāma-taṇhā):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
➁ 유애(有愛, bhava-taṇhā): 상견(常見)과 함께하는 존재에 대한 갈애
➂ 무유애(無有愛, vibhava-taṇhā): 단견(斷見)과 함께하는 비존재에 대한 갈애

(3) 멸성제(滅聖諦, dukkha-niroda-ariyasacca)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 멸성제는 이러한 갈애의 완전한 소멸인 열반(nibbāna)의 실현을 뜻한다.

(4) 도성제(道聖諦, dukkha-niroda-gāmiṇī-paṭipadā-ariyasacca) -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도의 성스러운 진리.
도성제는 이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중도(中道, majjhima-paṭipadā)인 팔정도(八正道, ariya-aṭṭhaṅgika-magga)를 제시하고 있다.

도성제(道聖諦, dukkha-niroda-gāmiṇī-paṭipadā-ariyasacca)
  팔정도(八正道, ariya-aṭṭhaṅgika-magga) = 중도(中道, majjhima-paṭipadā)
삼학(三學,
ti-sikkhā)
계온(戒蘊,
sīla-kkhandha)
바른 말(正語, sammā-vācā) 거짓말하지 않기, 중상모략하지 않기, 욕설하지 않기, 잡담하지 않기
바른 행동(正業,
sammā-kammanta)
살생하지 않기, 주어지지 않은 것을 가지지 않기, 사음하지 않기,
바른 생계(正命,
sammā-ajiva)
그릇된 생계수단을 버리고 바른 생계수단으로 살아가기
정온(定蘊,
samādhi-kkhandha)
바른 정진(正精進,
sammā-vãyama)
사정근(四正勤)
바른 알아차림(正念,
sammā-sati)
몸, 느낌, 마음, 마음대상의 사념처(四念處)
바른 집중(正定,
sammā-samãdhi)
초선(初禪), 이선(二禪), 삼선(三禪), 사선(四禪)
혜온(慧蘊,
paññā-kkhandha)
바른 견해(正見,
sammā-diṭṭhi)
고제, 집제, 멸제, 도제를 아는 것
바른 사유(正思惟,
sammā-saṅkappa)
출리의 사유, 악의없음의 사유, 해치지 않음의 사유

 

◎ 사슴동산 
‘사슴동산’이라 옮긴 원어는 미가다야(Migadāya)이다. 맛지마 니까야의 주석서(MA.ii.188)는 “사슴들(Miga)에게 두려움 없이 머무는 장소로 주어졌기(dāya) 때문에 미가다야(Migadāya)라고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중국에서 녹야원(鹿野苑)이라 번역했고, 영어로는 Deer park라고 한다. 이곳은 부처님이 다섯 비구에게 첫 설법을 하신 유서 깊은 곳으로 이들의 귀의로 승가가 비로소 성립되었다.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이곳은 부처님이 태어나신 룸비니(Lumbini), 깨달음을 얻으신 보드가야(Bodhgaya), 열반에 드신 쿠시나가라(Kusinagara)와 더불어 불교인들이 순례해야 할 사대성지(四大聖地) 가운데 하나로 설해졌다. 이후 아소까(Asoka)왕이 불교성지를 순례하면서 이곳에 탑과 석주(石株)를 세운 뒤 더욱 뭇신도들의 숭앙을 받아왔으며, 8세기초 중국의 구법승 현장(玄奘)이 순례할 당시만 해도 이곳은 약 30m 높이의 정사(精舍)가 하늘 높이 솟아 있고 그 주위 100여 단이나 되는 감실(龕室)에는 황금 불상과 부조가 있었다고 한다. 안쪽에도 등신대(等身大)의 초전법륜상(初傳法輪像)이 줄지어 있고 1,000여 명의 비구가 거주하는 등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3세기 무렵 이슬람교도에게 유린되어 폐허가 되었다. 현재는 다메크탑과 부러진 아소까왕의 석주 등이 남아 있으며 많은 불상이 출토되고 있다. 이 가운데 아소까왕의 석주 머리에 있던,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 4마리의 사자상은 현재 인도의 국장(國章)으로 사용되고 있다.

 

◎ 사야도(Say ādaw)

미얀마에서는 스님들을 부를 때, 법랍이 20년 미만인 스님은 폰지(pongyi), 20년 이상 된 스님은 사야도(Sayādaw)라고 한다.

 

◎ 사왓티(Sāvatthi) 
사왓티(Sāvatthi)는 꼬살라(Kosala)국의 수도였다. 이 도시의 이름은 선인 사왓타(Sāvattha)가 살았던 데서 유래한다고도 하고, 상업도시이므로 대상(隊商)들이 만나서 “어떤 상품이 있는가?(kim bhandan atthi)”라고 물으면 “모든 것이 다 있다(sabham atthi)”라고 대답한 데서 유래한다고도 한다. 한역은 사위성(舍衛城)이라고 한다. 꼬살라는 부처님의 재세시에 인도에 있었던 16개국 가운데 하나였으며 16국은 점점 서로 병합되어 나중에는 마가다(Magadha)와 꼬살라(Kosala) 두 나라로 통일되었다. 부처님 재세 시에는 빠세나디(Pasenadī)왕이 꼬살라를 통치하였고, 그의 아들 위두다바(Viḍūḍabha)가 계승하였다. 부처님께서 말년에 24년 정도를 이곳 사왓티의 기원정사(Jetavana)에서 머무시는 등 부처님과 아주 인연이 많았던 곳이다.

 

◎ 사정근(四精勤)
'사정근(四精勤)'으로 옮긴 삼마빠다나(sammā-ppadhāna)는 sammā(바른)+padhāna(노력, 애씀, 정근)의 합성어이고 다시 이 padhāna는 pra(앞으로)+√dhā(내딛다)로 분해될 수 있다. PED에서는 ‘exertion, energetic effort, striving, concentration of mind.’라고 풀이하고 있다.이 사정근은 팔정도의 6번째인 정정진(正精進)의 내용이며, 5가지 기능(五根, pañca-indriya)과 5가지 힘(五力, pañca-bala)의 두 번째인 노력(viriya)의 내용이기도 하다. 5가지 기능은 ① 믿음(saddhā)의 기능, ② 노력(viriya)의 기능, ③ 알아차림(sati)의 기능, ④ 집중(samādhi)의 기능, ⑤ 지혜(paññā)의 기능을 말하고, 다섯 가지 힘은 ① 믿음(saddhā)의 힘, ② 노력(viriya)의 힘, ③ 알아차림(sati)의 힘, ④ 집중(samādhi)의 힘, ⑤ 지혜(paññā)의 힘을 말한다. 이처럼 5가지 기능과 5가지 힘은 같은 다섯 가지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이 둘은 다른 역할을 한다. 기능들은 그 각각의 영역에서 지배하는 요소들이고 힘들은 반대되는 것들에 의해서 흔들리지 않고 이들과 함께하는 법들을 강하게 만드는 요소들이다. 이 5가지 기능은 그들의 영역에서 각각 결심하고, 분발하고, 확립하고, 산만하지 않고, 식별한다. 이렇게 하면서 이와 반대되는 법들, 즉 우유부단함, 게으름, 부주의함, 동요, 미혹을 극복한다. 5가지 힘은 이것들과 같은 상태인데, 흔들리지 않고 이와 반대되는 법이 이것들을 압도하지 못하도록 한다.

 

◎ 선근(善根, kuśala-mūla)
선근(善根, kuśala-mūla)은 선본(善本)·덕본(德本)과 같다. 그것이 뿌리가 되어 모든 선(善, kuśala)을 낳는다는 것이다. 무탐(無貪)·무진(無瞋)·무치(無癡)를 삼
선근(三善根)이라 한다. 『구사론(俱舍論)』에서는 수행자가 견도(見道)에 들어가 무루지(無漏智)를 일으키는 근본이라고 한다.

『금강경(金剛經)』(大8 p.749b) ;『아미타경(阿彌陀經)』(大12 p.347b); 『보성론(寶性論)』(大31 p.831b); 『화엄경(華嚴經)』(大9 p.395b) 등에서 기술되고 있다.

 

◎ 산냐(saññā)
산냐(saññā)는 경과「청정도론」 등의 주석서들에서 ‘항상하다, 즐겁다, 자아다, 깨끗하다.’는 네 가지 전도된 인식(vipallāsa-saññā)으로 정형화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무상, 고, 무아, 부정이라는 유위법(有爲法, saṅkhata-dhamma)의 네 가지 특징을 잘못 인식한 것이다. 그래서 「청정도론」(Vis. XXII.68)에서도 “① 무상(anicca)을 관찰하여 영원하다는 인식(nicca-saññā)을 버린다. ② 괴로움(dukkha)을 관찰하여 행복하다는 인식(sukha-saññā)을 버린다. ③ 무아(anatta)를 관찰하여 자아라는 인식(atta-saññā)을 버린다. ④ 더러움(asubha)을 관찰하여 깨끗하다는 인식(subha-saññā)을 버린다.”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 산따띠(Santati) 장관
산따띠(Santati) 장관의 이야기는 「법구경」의 주석서(DhA.iii.78) 등에 나온다. 산따띠는 꼬살라(Kosala)국의 빠세나디(Pasenadī)왕의 장관이었는데, 왕의 명령을 받아 국경지방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고 돌아온다. 왕은 그에게 7일동안의 큰 축제를 베풀어 그의 공로를 치하하였다. 7일째 되는 마지막 축제일에 산따띠는 왕실의 코끼리를 타고 가다가 길에서 부처님과 마주쳤지만 술에 취했기 때문에 코끼리를 탄 채로 내려오지도 않고 그냥 눈인사만 드렸다. 그것을 보신 부처님이 가만히 미소를 지으시자 아난다존자가 그 이유를 물었다. 부처님께서는 오늘 산따띠 장관이 이런저런 이유로 열반을 얻을 것이고 바로 입멸할 것이라고 예언을 하신다. 그 뒤 연회장에서 사랑하던 무희(舞姬)가 갑작스럽게 죽게 된데 큰 충격을 받은 산따띠 장관은 울부짖다가 위안을 찾으러 부처님을 찾아왔다. 부처님의 다음 게송을 듣고 그는 무애해(無碍解, paṭisambhidā)를 갖춘 아라한이 되었고 곧바로 공중에서 불의 까시나(tejo-kasiṇa)에 들어 입멸하였다. “과거에 속하는 것을 깨끗이 하라.미래에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라.중간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으면고요하게 유행할 것이다.”(Sn.949) 

◎ 삼귀의(三歸依)  
삼귀의(三歸依)의 빨리어 원어는 띠사라나(ti-saraṇa)이다. Ti는 셋을 뜻하는 서수이고 saraṇa는 보호, 피난처를 뜻한다. 그래서 한역에서는 삼귀의(三歸依)라고 옮기고 있다. 물론 여기서 삼은 불·법·승 삼보를 뜻한다. 삼귀의의 빨리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Buddhaṃ saraṇaṃ gacchāmi (붓담 사라남 갓차미)
Dhammaṃ saraṇaṃ gacchāmi (담맘 사라남 갓차미)
Sanghaṃ saraṇaṃ gacchāmi (상감 사라남 갓차미)

Dutiyaṃ pi (두띠얌 삐)
Buddhaṃ saraṇaṃ gacchāmi (붓담 사라남 갓차미)
Dhammaṃ saraṇaṃ gacchāmi (담맘 사라남 갓차미)
Sanghaṃ saraṇaṃ gacchāmi (상감 사라남 갓차미)

 

Tatiyaṃ pi (따띠얌 삐)
Buddhaṃ saraṇaṃ gacchāmi (붓담 사라남 갓차미)
Dhammaṃ saraṇaṃ gacchāmi (담맘 사라남 갓차미)
Sanghaṃ saraṇaṃ gacchāmi (상감 사라남 갓차미)

영역은:
I take refuge in the Buddha.

I take refuge in the Dhamma.
I take refuge in the Sangha.
  
여기서 buddhaṃ(붓담) 등은 buddha등의 목적격이다. saraṇaṃ(사라남)도 saraṇa의 목적격이며 뒤의 동사 gacchāmi(갓차미)가 목적격을 지배하므로 목적격으로 나타나고 있다. 사라남 갓차띠가 일종의 숙어로 쓰여서 '의지한다. 귀의한다'는 뜻을 나타낸다. 직역을 하자면 ‘부처님을 의지처로 하여 갑니다’라고 옮길 수 있겠다. 
동사 gacchāmi(갓차미)는 어근 √gam(가다)의 현재 일인칭 단수형이다. 그리고 이 동사는 영어와는 달리 타동사로 쓰여서 목적격을 지배한다. 즉 영어는 go가 자동사이므로 go to school이라고 전치사 to를 넣어서 표현하지만 빨리어에서는 목적격을 사용하여 그냥 쓴다.
그리고 dutiyaṃ pi는 '두번째(dutiyaṃ) 역시(pi)'라는 말이고 tatiyaṃ pi는 '세번째(tatiyaṃ) 역시(pi)'라는 표현이다. 이렇게 삼귀의는 세 번을 한다. 

불교의 믿음과 관계된 빨리어 술어들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1) 빠사다(pasādā): ‘깨끗한 믿음’으로 번역되는 빠사다는 마음이 가라앉은 상태, 즉 ‘고요함, 편안함’을 나타낸다. 아울러 그런 고요함처럼 깨끗한 믿음을 뜻한다. 오까빠나(okappana)와 동의어이다.
(2) 삿다(saddhā): ‘믿음’으로 번역되는 삿다는 전통적으로 srad(가슴)+√dha(놓다)로 분석한다. 그래서 ‘마음을 어떤 대상에 놓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믿음은 부처님의 깨달음을 믿고 삼보에 귀의할 때 생긴다. 하지만 이 믿음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조사와 탐구를 통한 합리적인 이해에 기반을 둔 확신을 뜻한다. 그래서 영어권에서도 faith, belief보다는 confidence로 많이 번역한다. 
전통적으로 이 삿다는 모든 선법(kusala-dhamma)의 씨앗이라 불린다.(Sn.V.77) 주석서의 설명에 따르면, 그 이유는 깨끗한 믿음(okappana/pasāda)과 신해(adhimokkha)가 마음에 일어나도록 고무하여 윤회의 폭류를 건너기 위한 여정(pakkhadhana)을 떠나도록 하기 때문이다. 또한 믿음은 다섯 가지 기능(五根, pañca-indriya)과 다섯 가지 힘(五力, pañca-bala) 중의 하나이다.
(3) 아디목카(adhimokkha): ‘확신, 결단, 결심’으로 번역되는 아디목카는 adhi(향하여)+√muc(벗어나다. 해탈하다)에서 파생된 명사로 ‘해탈을 향한다는 것’이 그 기본의미이다. 즉 불·법·승 삼보에 확신을 가지는 것은 곧 해탈로 향하는 기초가 완전히 다져졌다는 의미라 할 수 있다. 이 용어는 경에서보다는 논서에서 많이 나타나는데, 믿음의 요소로 나타날 때는 삿다(saddhā)와 빠사다(pasādā)에 기초한 확신이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중국에서는 신혜(信解)라고 옮겼다. 

이처럼 불교에서 말하는 신앙은 합리적인 이해와 통찰에 기반을 둔 것으로 ‘와서 보라(ehipassika)’는 것이지 ‘와서 믿으라’는 것이 아니다. 무조건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고 와서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다. 빨리 경 도처에서는 깨달음을 일컬어 ‘티 없고 때 묻지 않은 법의 눈(法眼, dhamma-cakkhu)이 생겼다.(S.V.423)'라고 묘사하고 있고, 지혜인 냐나(ñāṇa)와 봄(dassana)의 합성명사인 냐나-닷싸나(智見, ñāṇa-dassana)라는 용어가 중요한 술어로서 많이 나타난다. 그만큼 불교에서는 맹목적 믿음보다는 보고 아는 것을 중요시하고 이것을 신행(信行)의 출발로 삼고 있다.

 

◎ 삼마삼보디(sammā-sambodhi) 
삼마삼보디(sammā-sambodhi)는 sammā(바르게)+sam(함께)+bodhi(깨달음)의 합성어이다. 중국에서는 정등각(正等覺)이라고 번역하였고, 영어권에서는 perfect enlightenment, supreme Buddhaship 등이라 번역한다. 이는 정등각자(正等覺者, sammā-sambuddha)가 얻는 깨달음을 말한다.

◎ 삼마삼붓다(sammā-sambuddha)
삼마삼붓다(sammā-sambuddha)는 sammā(바르게)+sam(스스로)+buddha(覺者, 깨달은 이)의 합성어이다. 그래서 혼자 힘으로 바르게 깨달은 분, 즉 정등각자(正等覺者)를 뜻한다. 중국에서는 정변지(正遍知)와 정등각(正等覺)으로 옮겼다. 영어로는 보통 The Fully Enlightend one이라 표현한다.   

◎ 삼모하 위노다니(Sammoha-vinodanī)  

「삼모하 위노다니(Sammoha-vinodanī)」는 붓다고사(Buddhagosa)의 저작으로, 아비담마 칠론 중의 하나인 「위방가(Vibhanga)」에 대한 주석서이다. 

◎ 삼모하위노다니(Sammohavinodani)
[삼모하위노다니(Sammohavinodani)」는 아비담마 칠론 중의 하나인「위방가(Vibhanga)」의 주석서이다.

◎ 삼매(Samadhi)
삼매(三三昧, 산스크리트어: trayaḥ samādhayaḥ)는 3가지 종류의 삼매 또는 3가지 삼매를 말한다. 3삼마지(三三摩地) · 3등지(三等持) 또는 3정(三定)이라고도 한다.
'3삼매'에서의 삼매(三昧)는 선정의 다른 이름이다. 삼매는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로는 동일하게 사마디(samādhi)라 하며 한자로는 삼마지(三摩地) · 삼마제(三摩提) 또는 삼마제(三摩帝)로 음역하며, 등지(等持) · 정정(正定) · 정의(定意) · 조직정(調直定) · 정심행처(正心行處) 또는 식려응심(息慮凝心) 등으로 번역한다. 영어로는 삼매를 meditation, self-effacement, concentration, absorption, contemplation 등으로 번역한다.
삼매는 마음을 한 경계에 집중해 쏟아 혼침(惛沈)과 도거(掉擧), 즉 가라앉은 마음과 들뜬 마음을 벗어나고, 이 번뇌성의 마음상태를 벗어난 상태에서 살피고 생각하여 비추어 봐서 지혜가 밝아져 능히 일체 번뇌를 끊고 진리를 깨달아 얻는 정신작용 또는 마음작용을 말한다.
이 삼매를 구분함에서 있어 3가지 종류로 구분하여 3삼매라고 하는데 산스크리트어로는 트라야 사마다야(trayaḥ samādhayaḥ), 팔리어로는 타요 사마디(tayo samādhī)라고 하며 영어로는 three meditation, three samādhis, 또는 samādhi on three subjects로 번역된다.
공삼매불교 용어로서의 한자어 공(空)에는 허공 · 공간을 의미하는 공(空, 산스크리트어: ākāśa)이 있는데 지수화풍공식의 6대에서의 공이 이 경우이다. 또한, 어떤 것의 실제 내용을 얻을 수 없으므로 공하다고 할 때의 공함[空, śūnyatā]을 표현하는 경우가 있는데 예를 들어 일체개공에서의 공이 이 경우이다. 공삼매(空三昧, 산스크리트어: śūnyatā-samādhi, 영어: samādhi of emptiness)에서의 공은 후자의 경우이다.공삼매는 일체 모든 현상[일체제법]이 다 공함[śūnyatā]을 보는 것을 말한다. 이는 불교의 4성제 가운데 고제(苦諦) 즉 '일체가 다 고다'라는 진리의 네가지 모습[행상(行相)] 가운데에서 공, 무아 2 모습을 보는 것과 상응하는 삼매이다. 이 삼매를 통해 모든 현상이 인연으로 일어나며, 나와 나의것 둘이 모두 공함을 본다.
무상삼매무상삼매(無相三昧, 산스크리트어: animitta-samādhi, 영어: samādhi of no-marks)는 일체제법에 생각 기억이 없고, 볼 수 없으며, 불교의 4성제 가운데 멸제(滅諦) 즉 고통이 사라짐의 진리와 관계하여 그 멸[滅] 정[靜] 묘[妙] 리[離] 4가지의 모습에 상응하는 삼매이다. 열반은 색성향미촉 5가지법을 떠나며 남녀 2가지모습 및 생하고 머무르고 멸하는 3가지 유위의 모습을 떠나므로 무상(無相)이라 칭한다.
무원삼매무원삼매(無願三昧, 산스크리트어: apraṇihita-samādhi, 영어: samādhi of non-contrivance)는 무작삼매(無作三昧) 또는 무기삼매(無起三昧)라고도 한다.일체제법에 대해 바라고 구하는 바가 없어, 불교의 4성제 가운데 고제(苦諦), 즉 모든 것이 고통이다는 진리에서 고(苦)와 무상(無常)의 2 모습과 집제(集諦) 즉, 고가 쌓이는 원인의 진리의 인[因]집[集]생[生]연[緣]의 4가지 모습에 상응하는 삼매를 말한다. 영원하지 않고 고통스러움, 그 원인등은 싫어할 바이며, 도[道]는 뗏목과 같아 마땅히 이를 버려야 하는데 이것이 이 삼매에 의하여 가능하다.
참고로 불교의 4성제의 16행상(十六行相)은 4제(諦)를 관찰하는 16종의 관법(觀法)을 말하며, 다음과 같다.
고제(苦諦)의 4행상. 만유의 현상은 생멸 변화하는 것이며, 고(苦)ㆍ공(空)ㆍ무상(無常)ㆍ무아(無我)라 관함.

집제(集諦)의 4행상. 온갖 번뇌와 업(業)은 고과(苦果)를 내는 인(因)이며, 고과를 모아(集) 나타나게 하며, 상속하여 나게(生) 하며, 고과를 이루게 하는 연(緣)이라 관함.멸제(滅諦)의 4행상.

멸제는 물(物)ㆍ심(心)의 속박이 없는 진리며(滅), 번뇌의 시끄러움이 없으며(靜), 3계를 벗어나 온갖 근심이 없으며(妙), 온갖 재액(災厄)을 여의었다고(離) 관함.
도제(道諦)의 4행상, 도제는 진리에 들어가는 길이며(道), 올바른 이치에 계합하며(如), 열반 적정한 경지에 가게 하며(行), 생사계를 뛰어나게 하는(出) 것이라고 관함.

 

◎ 삼보다(saṃbodha) 
삼보다(saṃbodha)는 saṃ(함께)+bodha(깨달음)의 합성어로, 정각(正覺)을 의미하는 sambodhi와는 동의어이다. PED에서는 ‘enlightenment, highest wisdom, awakening; the insight belonging to the tree higher stages of the Path’라고 설명되듯이, 수다원 이상의 ‘꿰뚫는 지혜, 통찰지, 바른 깨달음’을 말한다. 

◎ 삼십삼천(三十三天, 따와띰사 Tāvatiṃsa) 
삼십삼천(三十三天)은 따와띰사(Tāvatiṃsa)의 역어이다. 육욕천(六欲天) 중의 두 번째 하늘로, 수미산(須彌山, Sineru)의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제석(Sakka)은 사대왕천과 삼십삼천 양쪽의 왕이지만 삼심삼천에만 거주한다. 원래 삼십삼천은 아수라(Asura)의 영역이었지만, 전생의 선업으로 인해 마가(Māgha)가 제석이 되어 동료 32명과 함께 이 하늘에 살게 되었다. 하지만 제석은 아수라의 무리들과 함께 있는 것을 싫어하여 아수라들을 술에 잔뜩 취하게 한 뒤에 수미산 아래로 내던졌다. 삼십삼천에는 파하루사카(Phārusaka), 찟따라따(Cittalatā), 미싸카(Missaka), 난다나(Nandana)의 다섯 정원과, 웨쟈얀따빠사다(Vejayantapāsāda), 빠리짜따(Pāricchatta)나무, 에라와나(Erāvaṇa)라고 하는 코끼리왕, 수담마(Sudhamma)라는 대회당이 있다. 모든 부처님들은 쌍신변(雙神變, yamaka-pāṭihāriya)를 나투신 뒤 삼십삼천(三十三天)에 가서 우안거를 지내신다. 고따마 부처님도 이곳의 남신으로 재생한 마하마야를 비롯한 천인들에게 아비담마를 설하셨다. 삼십삼천에 사는 천인들의 평균수명은 인간세계와 비교했을 때 삼백만년이고, 삼십삼천의 하루는 인간세계의 백년에 해당한다. 주석서들(SA.i.23; AA.i.377)에 따르면 삼십삼천이라 불리게 된 이유는 제석이 인간세계에서 마가(Māgha)라는 청년으로 있을 때, 32명의 동료와 함께 실천한 7가지 선행으로 그들과 함께 이 하늘에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 삼십칠조도품(三十七助道品, bodhi-pāksika-dharma)
삼십칠조도품(三十七助道品, bodhi-pāksika-dharma)의 조도품(助道品)은 보리분(菩提分)·각지(覺支)·각분(覺分)이라고도 번역한다. 불교 최고의 목적인 깨달음의 경지[涅槃]를 실현하는 지혜를 얻기 위한 실천도라는 뜻으로, 여기에 37항이 있으므로 삼십칠도품(三十七道品)이라 하며, 삼십칠보리분법(三十七菩提分法)·삼십칠각지(三十七覺支)·삼십칠각분(三十七覺分)이라고도 한다. 
사념처(四念處, 4念住)·사정근(四正勤, 四正斷)·사여의족(四如意足, 四神足)·오근(五根)·오력(五力)·칠각분(七覺分)·팔정도(八正道, 八聖道)를 합한 것이다.

◎ 삼정육(三淨肉)

① 죽이는 것을 보지 않은 것[不見殺]

② 죽이는 소리를 듣지 않은 것[不聞殺]

③ 나를 위해 죽였는가 하는 의심이 없는 것이다[不疑爲我殺]. 

삼정육(三淨肉)에 모든 짐승이 명(命)이 다해 스스로 죽은 것과, 새가 먹다 남긴 것을 덧붙인 오정육(五淨肉)도 있고, 구정육(九淨肉)도 있다.

 

◎ 삿담마(saddhamma)
삿담마(saddhamma)에서 sad/sat는 주로 합성어의 앞에 놓여서 ‘바른, 참다운, 진실한’ 등의 의미로 쓰인다. 그래서 sad(바른)+dhamma(법)으로 분해되며 ‘바른 법, 참된 법, 정법(正法)’을 뜻하고 주석서들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 바른 법은 교학(pariyatti), 수행(paṭipatti), 통찰(paṭivedha)의 세 가지 측면으로 나뉜다. (1) 교학(pariyatti)이란 부처님의 가르침이 기록된 삼장(ti-piṭaka)을 공부하는 것이고, (2) 수행(paṭipatti)이란 계·정·혜 삼학을 닦는 것이며, (3) 통찰(paṭivedha)이란 출세간도를 통찰하고 성스러운 과를 증득하는 것이다.

 

 상락아정(常樂我淨)

대승의 열반이 경지와 여래의 법신이 갖추는 네 가지의 덕. 열반사덕(涅槃四德)이라고도 한다. 열반의 경계에 이른 깨달음은 영원불변하는 깨달음인 것을 상(常)이라 하고, 그 경계에서는 고통이 없고 안락함만 있는 것을 낙(樂)이라 하며, 자유자재로워 조금도 구애됨이 없는 것을 아(我)라고 하고, 번뇌의 오염됨이 없는 것을 정(淨)이라 한다.

 

◎ 상견(常見, 사싸따딧띠. sassata-di ṭ ṭhi) 
‘상견(常見)’으로 번역한 사싸따딧띠(sassata-diṭṭhi)는 sassata(영원, 항상함)+diṭṭhi(견해)의 합성어이다. 영혼이나 자아는 절대 죽거나 분해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한다고 믿는 삿된 견해이다. 즉 거친 육신이 소멸되어도 살아있는 실체인 영혼은 소멸되지 않고 다른 새로운 몸속으로 들어가서 계속해서 존재하며, 설령 세계가 무너지고 파괴될지언정 영혼은 영원히 존속하고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교외의 다른 종교는 대부분 이러한 상견을 취하고 있다. 요컨대, 영혼이나 자아가 죽은 뒤에도 소멸하지 않고 다시 새로운 존재로 옮겨간다고 보는 믿음들은 모두 상견이다. 그리고 이 상견과 결부된 갈애를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 bhava-taṇhā)라고 한다. 

◎ 상속(相續) 

‘상속(相續)’이라고 번역한 산따띠(santati)는 saṁ(함께)+√tan(펴다, 뻗다)에서 파생된 여성명사로 ‘함께 퍼져나가다’라는 문자적인 뜻에서 ‘연속, 지속, 흐름, 생존’ 등의 뜻으로 쓰인다. 영어로는 continuity라고 한다. 정신과 물질로 이루어진 존재는 서로 연결되어 연속적으로 흘러간다는 것을, 즉 순간적으로 일어나고 순간적으로 멸한다는 것을 가리키는 아비담마의 전문술어이다. 마음의 경우를 보면, 우리가 세간적인 차원에서 마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실제적으로는 마음들의 흐름(citta-santati)이 찰나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다. 마음은 한순간에 일어나서 대상을 아는 기능을 수행하고 사라진다. 그러면 그 다음 마음이 조건에 따라 일어난다. 이렇게 마음은 흘러간다. 이들은 너무나 빠르게 상속하기 때문에 보통의 눈으로는 각각을 분간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 쌍신변
여기에서 여래는 성문들에게 공통되지 않는 짝을 이룬 신통(쌍신변)을 행한다. 몸의 정수리로부터 불덩이를 일으키며, 몸의 맨 아랫 쪽으로부터 품어져 나오는 물을 일으킨다. 몸의 맨 아래 쪽으로부터 불덩이을 일으키며, 몸의 정수리로부터 품어져 나오는 물을 일으킨다. 몸의 앞쪽으로부터 불덩이를 일으키며, 몸의 뒷쪽으로부터 품어져 나오는 물을 일으킨다. 몸의 뒷쪽으로부터 불덩이를 일으키며, 몸의 앞쪽으로부터 품어져 나오는 물을 일으킨다. 오른쪽 눈으로부터 불덩이를 일으키며, 왼쪽 눈으로부터 품어져 나오는 물을 일으킨다. 왼쪽 눈으로부터 품어져 나오는 불덩이를 일으키며, 오른쪽 눈으로부터 품어져 나오는 물을 일으킨다.
오늘쪽 귓구멍으로부터 불덩이를 일으키며, 왼쪽 귓구멍으로부터 품어져 나오는 물을 일으킨다. 왼쪽 귓구멍으로부터 불덩이를 일으키며, 오른쪽 귓구멍으로부터 품어져 나오는 물을 일으킨다. 오른 쪽 콧구멍으로부터 불덩이를 일으키며, 왼쪽 콧구멍으로부터 품어져 나오는 물을 일으킨다. 왼쪽 콧구멍으로부터 불덩이를 일으키며, 오른쪽 콧구멍으로부터 품어져 나오는 물을 일으킨다. 오른쪽 어깨로부터 불덩이를 일으키며, 왼쪽 어깨로부터 품어져 나오는 물을 일으킨다. 왼쪽 어깨로부터 불덩이를 일으키며, 오른쪽 어깨로부터 품어져 나오는 물을 일으킨다. 오른손으로부터 불덩이를 일으키며, 왼손으로부터 품어져 나오는 물을 일으킨다. 왼손으로부터 불덩이를 일으키며, 오른손으로부터 품어져 나오는 물을 일으킨다. 오른쪽 옆구리로부터 불덩이를 일으키며, 왼쪽 옆구리로부터 품어져 나오는 물을 일으킨다. 왼쪽 옆구리로부터 불덩이를 일으키며, 오른쪽 옆구리로부터 품어져 나오는 물을 일으킨다. 오른발로부터 불덩이를 일으키며, 왼발로부터 품어져 나오는 물을 일으킨다. 왼발로부터 불덩이를 일으키며, 오른발로부터 품어져 나오는 물을 일으킨다. 손가락 발가락에서 불덩이를 일으키며, 손가락 발가락 사이에서 품어져 나오는 물을 일으킨다. 각각의 체모에서 불덩이를 일으키며, 각각의 털구멍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을 일으킨다. 각각의 털구멍에서 불을 일으키며, 각각의 체모에서 품어져 나오는 물을 일으킨다.
푸른 색, 노란 색, 붉은 색, 하얀 색, 진홍 색, 찬란한 색의 여섯 비밀스러운 빛깔을 지니고서 세존께서 경행을 하신다. 그때 화인은 서 있거나 앉아 있거나 누워 있는다. 세존께서 서 계신다. 그때 화인은 경행하거나 앉아 있거나 누워 있는다. 세존이 앉아 계신다. 그때 화인은 경해하거나 서 있거나 누워 있는다. 세존께서 누워 계신다. 그때 화인은 경행하거나 서 있거나 앉아 있는다. 화인이 경행한다. 그때 세존께서는 서 있거나 앉아 있거나 누워 계신다. 화인이 서 있는다. 그때 세존께서는 경행하거나 앉아 있거나 누워 계신다. 화인이 앉아 있는다. 그때 세존께서는 경행하거나 서 있거나 누워 계시다. 화인이 누워 있는다. 그때 세존은 경행하거나 서 있거나 앉아 계신다. 이것이 여래의 짝을 이룬 신통의 지혜이다.주) 화인(化人 nimmito)란 nimminati(만들다, 조작하다)에서 유래한 말로 '거짓으로 사람의 형상을 취하여 드러나 있는 모습'을 의미한다.

 

◎ 새겨들음(sotavadhane)

'새겨들음(sotavadhane)'이란 'sota(귀)' 와 avadhana(마음챙김.마음새김. 주의집중)'가 합성된 말이다. 'avadhana'는 산스끄리뜨어로서, 이러한 경우에는 보통 빨리어의 'odhana'가 쓰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와 관련하여 그러한 예를 보이는 빨리어 구절로 'ohitasoto(MN. vol.1. p.480, vol.3. p.201등)' 와 'sutam odahanta(MN. vol.3. p.221)'를 찾아 볼 수 있다. 이 둘은 'sota(귀)'에 'odahati(마음 새기다. 집중하다)'의 활용형이 쓰인 경우로, 그 의미는 'sotavadhana' 와 동일한 '새겨들음'으로 번역 할 수 있다. 

 

◎ 색계선

네 가지 색계선은 ➀ 초선(初禪), ➁ 이선(二禪) ,➂ 삼선(三禪), ➃ 사선(四禪)이고 무색계선은 ➄ 공무변처(空無邊處), ➅ 식무변처(識無邊處), ➆ 무소유처(無所有處), ➇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이다.
원래 경장에서는 앞의 4가지 선만을 선정(禪定)이라 불렀으나 뒤에 아비담마와 그 주석서에서는 이를 더 확장하여 앞의 네 가지 선은 색계선정이라 명하고 뒤의 4처는 무색계선정이라 칭하게 된다. 이를 각각 사종선(四種禪)과 오종선(五種禪)이라 한다. 
여기서 알아두어야 할 것은 4선정 자체로는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고 그것들을 토대로 반드시 통찰지를 계발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한 수행이 바로 위빠사나이다. 비록 경에서 통찰지를 계발하기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될 요소로 집중(samādhi) 혹은 선정(jhāna)수행을 강조하고 있긴 하지만 주석서들에 따르면 이러한 4선정의 체험 없이도 통찰지의 실현은 가능하다고 한다. 이러한 수행을 하는 자를 주석서에서는 순수 위빠사나 수행자(suddha-vipassanā-yānika)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이러한 순수 위빠사나를 수행하는데 필요한 집중을 찰나집중(khaṇika-samādhi)이라고 한다. 위빠사나 수행은 초선, 이선, 삼선, 사선이 토대가 될 수 있고 이러한 근본집중(appanā-samādhi)이 없이도 가능하다. 근본집중을 토대로 하지 않은 순수 위빠사나를 닦을 때에 매 순간마다 근접집중에 해당하는 고도의 집중이 생기는데 이를 찰나집중이라고 하는 것이다. 빨리 경에서는 사선정을 두루 닦는 사마타 수행의 힘으로 여러 신통지를 얻는 것을 심해탈(心解脫, ceto-vimutti)이라고 하고 위빠사나를 통해서만 해탈을 성취하는 것을 혜해탈(慧解脫, paññā-vimutti)이라고 한다. 또 이 둘을 다 갖춘 것을 양면해탈(兩面解脫, ubhatobhāga-vimutti)이라고 한다. 

◎ 생겨난 것은 모두 소멸하기 마련이다
이 게송은 나중에 불교에서 가장 많이, 그리고 넓게 유포된 게송이 되었으며 사리뿟따(Sāriputta)와 불법의 첫 만남과 동시에 그의 위대한 스승인 아라한 앗사지(Assaji)를 기억하게 하는 귀중한 게송이 되었다. 연기법(paṭicca-samuppāda)에 딱 들어맞는 게송이 없던 시기에 설해진 이 게송은 오늘의 철학적 사고로 음미해 보아도 초기 불교도들의 마음에 가히 혁명적인 영향을 끼쳤으리라 짐작된다. 부처님 당시 라자가하(Rājagaha)는 새로운 사조의 중심지로서 많은 철학유파가 번성하고 있었다. 그 중에 산자야라는 사상가가 이끄는 학파가 있어 250명의 추종자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 중 우빠띠싸와 꼴리따는 뒤에 부처님께 귀의하여 2대 수제자가 되었으니 사리뿟따(Sāriputta)와 목갈라나(Moggalāna)가 바로 그들이다.
어느 날, 라자가하의 거리를 거닐고 있던 우빠띠싸는 한 사문의 엄숙한 용모와 고요하고도 위엄 있는 거동을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이 사문은 부처님의 최초의 다섯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아라한과를 성취한 앗사지였다. 우빠띠사는 이 거룩한 사문이 누구의 제자이며 어떤 가르침을 받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 아라한이 탁발을 마칠 때까지 계속 따라갔다. “벗이여, 당신의 모습은 우아하고, 당신의 눈빛은 맑게 빛납니다. 누가 당신을 출가하도록 설득했습니까? 당신의 스승은 누구시며, 어떤 가르침을 따르고 계십니까?” 하고 묻자, 아싸지 존자는 겸손하게 말했다. “나는 교의와 계율을 길게 설명하지는 못하고 그 대의만 간략히 말해 줄 수가 있습니다.” 이에 우빠띠싸는 이렇게 말했다. “좋습니다. 벗이여, 적든 많든 좋으실 대로 말해 주십시오. 제가 원하는 것도 그 대의입니다. 장황한 말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그러자 아싸지는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을 포용하는 연기법을 한마디로 요약하여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 Ye dhammā hetuppabhavā tesam hetum tathāgato āha Tesam ca yo nirodho Evaṃ vādi mahā samano. “원인에서 발생하는 그 모든 법들, 그들에 관해 여래께서는 그 원인을 밝혀주셨네.또 그들의 소멸에 대해서도 설명하셨나니, 이것이 대 사문의 가르침이라네.” (Vin.i.40) 우빠띠싸는 이 게송을 듣자마자 ‘생겨난 것은 모두 소멸하기 마련이다’라는 것을 그 자리에서 깨닫고 수다원과를 성취했다.

 

◎ 생주이멸(生住異滅)

생주이멸(生住異滅)은 유부(有部)의 사상(四相)으로 생(生)·주(住)·이(異)·멸(滅)의 네 가지를 말한다. 일체의 유위법은 모두 무상(無常)한 존재로서, 미래의 위(位)로부터 인연의 힘으로 현재의 위(位)에 생겨나지만 그 태어난 다음 순간에 멸하여 과거의 위(位)로 사라져 버린다. 이와 같이 유위법(有爲法)은 무상하며, 미래·현재·과거의 삼세(三世)로 흘러간다. 그 때 미래의 위(位)에서 현재의 위(位)로 태어나는 것을 생(生)이라 하고 생상(生相)이라 한다. 이와 같이 유위법으로서 현재의 위(位)에서 머물게 하는 것을 주(住) 또는 주상(住相), 현재의 자리에서 변이(變異)케 하는 것을 이(異) 또는 이상(異相), 현재의 위(位)가 과거의 위로 멸하는 것을 멸(滅) 혹은 멸상(滅相)이라고 한다. 이 사상(四相)은 자체가 유위법이므로 이것을 생주이멸 시키는 법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 생명의 기능(命根, jīvitindriya)으로서의 물질
‘생명기능이라 불리는 물질(jīvata nāma rūpa)’은 28가지 물질 가운데 하나인 생명의 기능(命根, jīvitindriya)으로서의 물질을 뜻한다. 아비담마에서는 정신적인 생명기능과 물질적인 생명기능의 두 가지 생명기능을 설하고 있다. 정신적인 생명기능이란 관련된 마음의 작용에 생기를 불어넣어주고, 물질적인 생명기능은 물질에 생기를 불어 넣어준다. 이 생명기능 없이는 마음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아비담마에서는 이를 모든 마음에 공통되는 7가지 마음의 작용(sabbacittasādhāraṇa-cetasika)에 포함시키고 있다.

 ◎ 석가의 제자

‘석가의 제자’라고 번역한 삭까야뿟띠야(Sakkya-puttiya)는 Sakya-puttiya(석가의 아들)에다 어미 -iya를 붙여서 만든 것으로 ‘석가의 아들에 속하는’ 이라는 뜻이다. 물론 여기서 석가의 아들은 석가족(Sakkya) 출신의 성자인 석가모니 부처님을 뜻한다. 이미 초기교단에서부터 비구들은 자신을 이렇게 불렀던 것 같고 이런 전통은 중국에도 고스란히 전해져 중국에서는 출가자의 성을 모두 석씨(釋氏)로 바꾸어서 부르고 있고 불교교단을 석씨문중(釋氏門衆)이라고 한다.

◎ 선(善, kusala), 불선(不善, akusala), 무기(無記, avyākata)

상좌부 아비담마에서는 사람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모든 마음의 작용을 선(善, kusala), 불선(不善, akusala), 무기(無記, avyākata)로 나누고 있다. (1) 선(善)으로 옮기는 꾸살라(kusala)는 PED에서 ‘1. clever, skilful, expert; good, right, meritorious. Especially. applied in moral sense (=puñña), whereas akusala is practically equivalent to pāpa. 2. a good thing, good deeds, virtue, merit, good consciousness.’라고 설명되듯이, 원래의 의미는 ‘유익한, 숙련된, 능숙한, 이로운’ 등으로 기본적으로 도덕적으로 선하고 해탈과 열반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반대어인 아꾸살라(akusala)는 ‘악’이라 번역되는 빠빠(pāpa)와 실제로 같은 말이다. 「앗타살리니(Atthasālini)」(Asl.39)에서는 이 꾸살라의 어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① ku(나쁜)+√sal(흔들다. 파괴하다)나쁘고 삿된 법들을 흔들어 버리고, 동요하게 만들고, 떨게 만들고, 쓸어버린다고 해서 꾸살라이다.

② kusa+√lu(자르다)꾸사(kusa)는 ku(나쁜)+√si(눕다)의 합성어이다. 그래서 꾸사는 나쁘게 누어있는 법을 뜻하며 kusala는 이러한 삿된 법을 잘라내는 것을 뜻한다.

③(3) a. ku(나쁜, 사악한)+√su(줄이다)지혜로써 악을 줄이거나 제거하는 것이 꾸사이다.b. kusa+√la(취하다, 갖다, 알다)이런 꾸사로 얻어져야 한다, 생겨야 한다고 해서 꾸살라이다.

④ 꾸사풀이 자신을 거며쥐는 손의 양면을 베어버리듯이 이미 생겼거나 아직 생기지 않은 번뇌를 모두 베어 버린다. 그러므로 꾸사풀처럼 베어 버린다고 해서 꾸살라이다.

중국에서는 꾸살라(kusala)를 선(善)으로 아꾸살라(akusala)를 불선(不善)으로 옮겼다. 하지만 꾸살라는 단지 ‘착한’으로 이해하면 문제가 많다. 왜냐하면 위에서 보았듯이, 꾸살라는 도덕적으로 좋은 것을 뜻하기는 해도 원 의미는 ‘유익한, 숙련된, 능숙한, 이로운,좋은’ 등의 여러 의미를 내포하기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아비담마에서 꾸살라는 해탈과 열반에 도움이 되 는 것이고 아꾸살라는 그와 반대 되는 것이다.

(2) 불선(不善)으로 옮기는 아꾸살라(akusala)는 이와 반대로 도덕적으로 불선하고 해탈과 열반에 해로운 것이다.

(3) 무기(無記)로 옮기는 아비야까따(avyākata)는 ‘설명되지 않은 답하지 못하는 결정하지 못하는’의 의미다. 즉 선과 불선으로 판단할 수 없는 심리현상을 뜻한다. 마음(citta)과 마음의 작용(cetasika)에서 무기는 과보의 마음(vipāka-citta)과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kiriya-citta)이다. 과보로 나타났을 뿐이므로 무기이고, 단지 작용만 하므로 역시 무기인 것이다. 

◎ 선인(仙人)

‘선인(仙人)’이라 번역한 이시(isi/Sk.ṛṣi)는 ‘진리를 찾아다니는 자’라는 의미이다. PED에 ‘a holy man, one gifted with special powers of insight &inspiration, an anchoret, a Seer, Sage, Saint’라고 설명되듯이, 통찰지혜와 신통력을 지닌 거룩한 사람, 은둔자, 은사(隱士), 도사(道士), 현인(賢人)을 뜻한다. 주석서들에서는 “제어와 절제 등을 찾는다는 뜻에서 선인이라 한다.”(PvA.98)라거나 “선정 등의 공덕을 찾는다는 뜻에서 선인이라 한다.”(PvA.163)라거나 “무학(無學)들의 계온(戒蘊) 등을 찾는다는 뜻에서 선인이라 한다.”(PvA.265)라는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 선정(禪定)

'선정(禪定)'이라 번역한 쟈나(jhāna/Sk.dhyāna)는 jhāyati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중성명사이다. 그리고 이 jhāyati라는 동사는 ➀ 명상하다. 숙고하다, ➁ 태우다는 두 가지 뜻이 있다. 그래서「청정도론」(Vis.IV.119)에서는 "대상을 명상하기 때문에, 혹은 반대되는 것을 태워 버리기 때문에 쟈나라 한다, arammaṇ ūpanijjhānato paccanīka jhāpanato vā jhānaṃ.”고 두 가지로 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반대되는 것이란 ➀ 감각적 욕망(kāmāchanda), ➁ 악의(vyāpāda), ➂ 해태와 혼침(thīna-middha), ④ 들뜸과 후회(uddhacca-kukucca), ⑤ 회의적 의심(vicikichā)의 다섯 가지 장애(五蓋, pañca-nīvaraṇa)를 뜻한다. 이러한 선정은 사마타 수행(samatha-bhāvana)으로 얻어진다. 이런 수행은 집중을 강화시키는 것을 포함한다. 마음을 한 가지 선택된 대상에 고착시킴으로써 모든 정신적인 혼란이 제거되는 것이다. 장애는 억압되고 마음은 그 대상에 완전히 몰입된다. 경장에 따르면 선은 초선에서 사선까지 4가지로 정의되는 마음의 상태이고 이것을 바른 집중[正定]이라고 한다. 논장에서는 이것을 색계선(色界禪)으로 정의하고 경장에 나타나는 공무변처 등의 4처를 무색계선(無色界禪)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러므로 선정과 집중은 동의어로 취급된다. 

경에서 말하는 네 가지 색계선은 ➀ 초선(初禪), ➁ 이선(二禪), ➂ 삼선(三禪), ➃ 사선(四禪)이고 네 가지 무색계선은 ➄ 공무변처(空無邊處), ➅ 식무변처(識無邊處), ➆ 무소유처(無所有處), ➇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이다. 

경에서의 네 가지 색계선을 다시 살펴보면, 초선(初禪)은 일으킨 생각(尋, vitaka), 지속적 고찰(伺, vicāra), 희열(喜, pīty), 행복(樂, sukha)의 네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다. 이선(二禪)은 일으킨 생각(尋, vitaka)과 지속적 고찰(伺, vicāra)이 가라앉고 희열(喜, pīty)과 행복(樂, sukha)만 있고, 삼선(三禪)은 행복(樂, sukha)만 있고 사선(四禪)은 행복(樂, sukha)도 사라지고 평온(捨, upekkhā)이 완성된다. 물론 이 넷에 하나로 집중된 마음(心一境性, cittassa-ekaggatā), 즉 집중(定, samādhi)은 두루 하고 있다. 

아비담마에서는 이를 다섯 가지로 분류하는데, 이는 초선(初禪)의 일으킨 생각(尋, vitaka)이 가라앉고 평온(捨, upekkhā), 희열(喜, pīty), 행복(樂, sukha)이 있는 경우를 이선(二禪)으로 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선정은 결코 출세간의 경지가 아니라는 점이다. 선정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중요하고 강력한 토대지만 사마타의 경지이기 때문에 번뇌가 소멸하지는 못한다. 번뇌(kilesa)를 완전히 없애기 위해서는 모든 유위법(有爲法, saṅkhata-dhammā)의 무상·고·무아를 꿰뚫어 보는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만 하는데 이렇게 선정 없이 위빠사나만 닦는 것을 순수 위빠사나(suddha-vipassanā)라고 하고 사마타 수행에서의 선정상태에 해당하는 순간적인 마음집중의 상태를 찰나집중(khaṇika-samādhi)이라 하고 있다. 
경장에서 말하는 네 가지 색계선[四種禪]

①초선(初禪)일으킨 생각(尋, vitakka), 지속적 고찰(伺, vicāra), 희열(喜, pīti), 행복(樂, sukha), 집중(定, samādhi)

②이선(二禪)희열(喜, pīti), 행복(樂, sukha), 집중(定, samādhi)

③삼선(三禪)행복(樂, sukha), 집중(定, samādhi)

④사선(四禪)평온(捨, upekkhā), 집중(定, samādhi)

논장에서 말하는 다섯 가지 색계선[五種禪]

①초선(初禪)일으킨 생각(尋, vitakka), 지속적 고찰(伺, vicāra), 희열(喜, pīti), 행복(樂, sukha), 집중(定, samādhi)

②이선(二禪)지속적 고찰(伺, vicāra), 희열(喜, pīti), 행복(樂, sukha), 집중(定, samādhi)

③삼선(三禪)희열(喜, pīti), 행복(樂, sukha), 집중(定, samādhi)

④사선(四禪)행복(樂, sukha), 집중(定, samādhi)오선(五禪)평온(捨, upekkhā), 집중(定, samādhi)

 

◎ 선정을 얻은 수행자' - 쟈나라비(jhãna-lābhi)  
'선정을 얻은 수행자'라고 옮긴 쟈나라비(jhãna-lābhi)라는 술어는 경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지만 주석서와 복주서 문헌에는 아주 많이 나타나고 있다. 즉 색계선을 증득한 자, 무색계 선을 증득한 자, 까시나(kasiṇa)로 선을 증득한 자 등등의 용어로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순수 위빠사나 수행자(suddha-vipassanā-yānika)가 아닌 선정(jhãna) 혹은 집중(samādhi)을 먼저 닦고 이를 토대로 하여 위빠사나를 닦아서 도과를 성취하는 사마타 수행자(samatha-yānika)로 보면 되겠다. 그리고 선정을 얻지 않은 수행자로 옮긴 아쟈나라비(a-jhãna-lābhi)는 이와 반대되는 순수 위빠사나 수행자로 보면 되겠다.

◎ 선한 세계
‘선한 세계’라고 번역한 수가띠(sugati)는 ‘나쁜 세계’로 번역하는 두가띠(dugati)와 반대되는 술어로서 su(좋은)+√gam(가다)에서 파생된 여성명사이다. 중국에서는 선취(善趣)로 번역했고 영어로는 good bourn, realms of happiness, happy course of existence라고 한다. 이 선처는 인간계(manussa-loka)와 욕계, 색계, 무색계의 천상계(deva-loka)에 해당한다. 

◎ 설해지는(bhaññamāne)

여기서 bhaññamāne라는 단어는 동사 어근 √bhaṇ(이야기하다)에서 파생된 수동 현재분사이다. 이 단어는 동사 현재 삼인칭 단수형인 bhaṇati의 수동형인 bhaññati에서 파생된 것으로 수동형 어근인 bhañña에다 현재분사형 어미인 māna를 붙여서 만든 것이다. 빨리어에서는 수동형이 되면 반조태로 취급이 되기 때문에 어미 māna가 붙은 것이다. 그래서 원형은 bhaññamāna 이고 bhaññamāne는 이것의 처소격(Locative)으로 쓰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의미는 ‘설해지는’이 된다. 빨리어에서 과거분사(Past Participle)는 기본적으로 과거의 뜻이고 현재분사(Present Participle)는 기본적으로 현재의 뜻이다. 그러므로 이 분사도 엄격히 시제를 적용시키자면 현재이다. 그리고 imasmiṃ veyyākaraṇasmim bhaññamāne는 절대 처소격(Locative Absolute)이라 한다. 빨리어에서는 처소격을 사용하여 ‘~할 때(when~)’나 ‘~하는 동안(while~)’이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그러므로 이 구문도 imasmiṃ(이) veyyākaraṇasmim(授記, 설명) bhaññamāne(설해짐)이 모두 처소격으로 쓰여서 ‘이 설명이 설해지자’라는 의미가 된다. 그런데 이것을 영어로 정확히 표현하자면 막 부처님의 가르침이 설해졌을 때라는 현재완료나 과거의 의미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설해졌을 때, 설해져 마쳤을 때 법의 눈이 생긴 것으로밖에 해석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부처님의 말씀이 먼저 있었고 그 다음에 법의 눈이 생긴 것이지 부처님 말씀과 법의 눈이 동시에 현재로 생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영어로는 ‘while this discourse was being expounded or has just been expounded.’라고 밖에 표현하지 못할 것이다. 비구 보디 스님(Bikkhu Bodhi)도 ‘while this discourse was being spoken.’으로 옮겼는데 현재수동분사의 의미를 잘 살린 번역이라 할 수 있겠다. 

 

◎ 성문(聲聞) (사와까. sāvaka)

‘성문(聲聞)’으로 번역한 사와까(sāvaka)는 √śru(듣다)에서 파생된 남성명사이다.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듣고 배운 제자라는 의미이다. 중국에서 성문(聲問)이라 직역했고, 영어권에서는 hearer, disciple이라고 번역한다. 초기불교에서는 출가와 재가의 구별 없이 불제자(佛弟子)를 의미했으나, 나중에는 출가한 수행승만을 의미하게 되었다. 특히 대승불교에서는 깨달음을 구하는 불제자들의 태도에 가치를 개입시켜 자기의 깨달음만을 얻는 데 전념하여 이타행(利他行)이 결여된 출가수행승을 성문이라고 하여 소승(小乘)의 무리에 속하는 것으로 폄하한다. 즉 자기의 깨달음밖에 생각하지 않는 성자, 자기의 완성만을 구하여 노력하는 출가승을 가리킨다. 보다 넓은 의미로는 가르침의 음성을 듣고서야 비로소 수행할 수 있는 제자를 가리킨다. 이런 성문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오랜 시간에 걸쳐 수행한 결과로서 아라한의 지위에 도달한다.

 

◎ 성인(ariya-puggala) 
상좌부 불교에서 말하는 성인(ariya-puggala)이란 수다원(須陀洹, sotāpanna), 사다함(斯陀含, sakadāgāmi), 아나함(阿那含, anāgāmi), 아라한(阿羅漢, arahatta)의 네 가지이다. 여기에 도(道, magga)와 과(果, phala)를 각각 곱하면 8가지가 되는데 이를 사향사과(四向四果) 또는 사쌍팔배(四雙八輩)라고 한다. 도(道)란 그에 상응하는 과(果)에 들어서기 직전의 한 순간의 체험을 말한다. 과는 도의 결과 즉시 뒤따르는 의식의 순간을 의미한다. 즉 도를 깨달음을 얻는 순간의 체험이라 한다면, 과는 그 순간적인 체험의 다음 순간에 얻어지는 깨달음이라는 결과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여덟 가지를 출세간의 도과라 하고 이들의 마음을 출세간의 마음(lokuttara-citta)이라 한다.

(1) 수다원(須陀洹, sotāpanna): 거스를 수 없는 열반의 ‘흐름에 들어선 이’란 뜻이다. 중국에서 예류(預流)로 의역하거나 수다원(須陀洹)이라 음역했다. 영어권에서는 stream-winner라고 한다. 중생들을 윤회의 바퀴에 붙들어 매어놓는 열 가지의 족쇄(結, saṃyojana) 가운데에서 처음의 세 가지 족쇄인 ➀ 유신견(有身見, sakkāya-diṭṭhi), ➁ 회의적 의심(vicikicchā), ➂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戒禁取, sīlabbata-parāmāsa)에서 벗어난 분이다. 수다원은 또한 나쁜 세계(惡趣, apāya)로 인도할 만큼 강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잘라버리며 다른 다섯 가지 불선한 마음, 즉 사견과 함께 하는 탐욕에 뿌리를 둔 네 가지 마음, 그리고 의심과 함께하는 어리석음에 뿌리를 둔 마음을 영원히 제거해버린다. 수다원은 구경의 열반에 도달하는데 까지 최대 일곱 생이 더 남아 있으며 나쁜 세계에는 결코 태어나지 않는다.

(2) 사다함(斯陀含, sakadāgāmi): ‘한 번만 더 되돌아올 이’란 뜻이다. 중국에서 일래(一來)로 의역하거나 사다함(斯陀含)이라 음역했다. 영어권에서는 once-returner라고 한다. 수다원이 제거한 세 가지 족쇄이외의 다른 족쇄들을 더 제거하지는 않지만 거친 형태의 감각적 욕망과 악의를 희박하게 만든다. 이러한 경지에 도달한 이는 해탈하기 전에 오직 한 번만 더 이 욕계에 태어난다.

(3) 아나함(阿那含, anāgāmi):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이’란 뜻이다. 중국에서 불환(不還)으로 의역하거나 아나함(阿那含)으로 음역했다. 영어권에서는 none-returner라고 한다. 이러한 경지에 도달한 이는 욕계에는 다시 태어나지 않고 색계(色界)의 정거천(淨居天)에 태어나 거기서 반열반(般涅槃)에 든다. 아나함은 ➃ 감각적 욕망(kāma-rāgā)과 ➄ 적의(paṭigha)의 족쇄를 잘라 버리며 성냄에 뿌리를 둔 두 가지 마음을 영원히 제거한다. (4) 아라한(阿羅漢, arahatta): 아라하따(arhatta)는 아라한의 과위와 상태를 추상적으로 나타낼 때 쓰는 술어이고, 아라한과를 얻은 이를 구체적으로 통칭할 때에는 아라한(arahant)이란 술어를 쓴다. 이 아라한은 동사 arahati(가치가 있다, 받을 만하다)의 ppr(현재분사)이다. 그래서 문자적으로 ‘대접과 존경을 받을 만한 분’이란 뜻이다. 중국에서 응공(應供)이라고 의역하거나, 아라한(阿羅漢)이라고 음역했다. PED에서 ‘Before Buddhism used as honorific title of high officials like the English “His Worship”; at the rise of Buddhism applied popularly to all ascetics. Adopted by the Buddhists as technical term for one who has attained the Summum Bonum of religious aspiration (Nibbāna).'라고 설명되듯이, 이 아라한이라는 술어는 원래 불교가 일어나기 전 부터 영어의 “His Worship”과 같이 고관(高官)에게 붙는 존칭어처럼 사용되었고, 나중에 불교가 일어날 즈음에 출가한 모든 사문들을 지칭하는 데 널리 사용되었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종교적인 이상의 최고선인 열반을 성취한 사람에게 붙는 전문술어로 정착되었다. 이 아라한은 모든 번뇌(kilesa)를 완전히 멸한 사람을 말하며, 제자(sāvaka)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깨달음이다.

 

부처님도 모든 번뇌를 멸했다는 점에서 아라한이고 이 점에서는 제자와 같다. 그러나 부처님의 깨달음의 지혜는 정등각의 지혜(sammā-sambodhi-ñāṇa)로 제자의 지혜보다 훨씬 월등하기 때문에 부처라고 불릴 뿐이다. 이 아라한은 중생을 삼계(三界)에 묶어놓는 열 가지 족쇄(結, saṃyojana)를 완전히 잘라버려 더 이상 어떤 존재로도 윤회하지 않는다. 즉 아라한은 존재를 욕계에 묶어두는 번뇌인 다섯 가지 거친 족쇄(五下分結, orambhāgiya-saṃyojana) 뿐만이 아니라, 다섯 가지 더 미세한 족쇄(五上分結, uddhambhagiya-saṃyojana), 즉 ➅ 색계에 대한 집착(rūpa-rāga), ➆ 무색계에 대한 집착(arūpa-rāga), ➇ 자만(māna), ➈ 들뜸(uddhacca), ➉ 무명(avijjā)까지도 완전히 잘라낸 분이다. 그리고 나머지 불선한 마음들, 즉 사견과 함께 하지 않은 탐욕에 뿌리를 둔 마음 네 가지와 들뜸과 함께 한 어리석음에 뿌리를 둔 마음까지 완전히 제거한 분이다. 이러한 아라한은 금생의 정신과 물질(名色, nāma-rūpa)의 무더기인 오온(五蘊)이 다하면 반열반(般涅槃, parinibbāna)에 들어 영원한 평화를 누리게 된다. 아라한은 나이나 성이나 신분이나 승속(僧俗)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경에는 7살의 나이 어린 사미가 아라한을 얻은 예가 있고, 주석서에는 셀라(Selā)와 산끼짜(Sankicca)라는 이름의 나이 어린 아라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ThaA.64; PvA.53) 또한 여성 아라한도 경에 많이 등장한다. 그리고 대략 400분의 남성 아라한들이 경에 등장하는데 그들 대부분이 비구이다. 하지만 앙굿따라 니까야(A.iii.451)에는 재가 아라한의 이름들이 열거되고 있고, 야사(Yasa) 존자, 케마(Khemā) 비구니, 산따띠(Santati) 장관, 숫도다나(Suddodana)왕과 같이 재가자인 채로 아라한이 된 사람들도 드물지만 있었다. 「밀린다빤하」(Mil.264~266)에서는 아라한과를 얻은 재가자는 그날에 바로 출가하여 비구나 비구니가 되거나 반열반에 드는 길밖에는 없다고 서술하고 있다.

 

◎ 성향
‘성향’으로 옮긴 짜리따(carita)는 원래 √car(옮기다)의 과거분사로 ‘옮기는, 가는’ 등의 뜻인데 중성명사로 쓰이면 ‘행동, 성향, 처신, 기질’ 등의 뜻으로 쓰인다. 그래서 중생이 가지는 성벽이나 기질을 뜻하게 되었다. 영어로는 disposition, nature, character라고 한다. 중생의 기질은 그들의 전생의 업이 다양하기 때문에 각각 다르다. 주석가들은 재생연결식(paṭisandhi-vinñāṇa)의 생산업(janaka-kamma)에 따라 성향이 결정된다고 한다. 「청정도론」(Vis.Ⅲ.74~102)에서는 (1) 탐하는 성향, (2) 성내는 성향, (3) 어리석은 성향, (4) 믿는 성향, (5) 지적인 성향, (6) 사색하는 성향의 여섯 가지로 성향을 분류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중생들의 다양한 근기에 맞게 설하진 부처님의 법문을 방편설(方便說), 또는 대기설법(大機說法, pariyāya-desanā)이라 한다.

◎ 세 가지 마음(tinnam cittanam)

①기쁨과 함께 하는 마음(somanassa-sahagatacitta)

②근심과 함께 하는 마음(domanassa-sahagatacitta)

③평정과 함께 하는 마음(upekka-sahagatacitta)

 

◎ 세 가지 무루근(三無漏根.삼무루근)

①완전한 지혜를 이루고자 하는 이의 근(anannatannassamitindriya)

②완전한 자혜에 이른 이의 근(annindriyassa)

③완전한 지혜를 이미 갖춘 이의 근(annatavindriyassa)

 

이들 세 가지 근은 더러움을 떠난 '거룩한 법'을 내는데 강한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근(根.indriya)'이라 불리운다고 한다.일반적으로 마음의 근. 즐거움의 근. 기쁨의 근. 평정의 근. 믿음의 근. 정진의 근. 마음챙김의 근.삼매의 근. 혜의 근 등의 아홉 근이 진리를 보는 경지에 속하는 흐름에 나아가는 경지(예류도)에있을 때를 '완전한 지혜를 이루고자 하는 이의 근'이라 한다.다음으로 닦아 나가는 경지에 속한 것으로 흐름에 들어선 경지(예류과). 한번 돌아옴에 나아가는 경지(일래도). 한번 돌아옴에 들어선 경지(일래과). 돌아오지 않음에 나아가는 경지(불환도).돌아오지 않음에 들어선 경지(불환과). 아라한에 나아가는 경지(아라한도)에 있을 때를 '완전한지혜에 이른 이의 근'이라 한다.그리고 마지막으로 배움을 마친 경지에 속한 아라한에 들어선 경지(아라한과)에 도달했을 때'완전한 지혜를 이미 갖춘 이의 근'이라 한다.

 

◎ 세 가지 계(tayo dhatuyo. 三界)
'세 가지 계(tayo dhatuyo. 三界)'란 일반적으로 '감각적 쾌락의 계(욕계.kamadhatu)' . 물질적 현상의 계(색계.rupadhatu)' . '물질적 현상을 지니지 않은 계(무색계.arupadhatu)' 를 가르키지만 PsA에서는 이것 이외에 '떠남에 의한 계(출리계.nekkhammadhatu)' . 성냄이 없는 계(abyapadadhatu)' . 해로움이 없는 계(avihimsadhatu)' 와 '물질적 현상의 계(rupadhatu)' . '물질적 현상을 지니지 않은 계(arupadhatu)' . '소멸에 의한 계(nirodhadhatu)라고 하는 두 가지 종류의 '세 가지 계'를 덧붙여 설명하고 있다.

 

◎ 세 가지 갈애(tisso tanha)

'세 가지 갈애(tisso tanha)' 란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애(kamatanha)'. '있음에 대한 갈애(bahvatanha)'. '있지 않음에 대한 갈애(ditthogha)' 의 셋을 말한다.

 

◎ 세 가지 공부방법
세 가지 공부방법이란 팔정도의 세 번째 도인 통찰지(慧, paññā)를 얻기 위한 세 가지 단계를 말한다.

(1) 문혜(聞慧, suta-maya-ñāṇa): 책과 경을 읽거나 법문을 들어서 얻는 지혜로 문소성지(聞所成智)라고도 한다.

(2) 사혜(思慧, cintā-maya-ñāṇa): 책과 경을 읽거나 법문을 들은 것을 스스로 생각하고 사유하여 얻는 지혜로 사소성지(思所成智)라고도 한다.

(3) 수혜(修慧, bhāvanā-maya-ñāṇa): 읽고 듣고 생각한 바를 실 수행을 닦아서 얻는 지혜로 수소성지(修所成智)라고도 한다.

문혜(聞慧)는 다른 사람의 법문을 듣거나 경과 책을 읽어서 생기는 지혜이다. 이렇게 얻은 지혜는 올바른 방향으로 향하게 하기 때문에 매우 유익하다. 그러나 그 지혜만으로는 해탈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는 단지 빌려온 지혜이기 때문이다. 들어서 얻은 지혜의 역할은 그 다음 단계인 사혜(思慧)로 가야 한다. 이성적으로 우리는 들었던 것과 읽었던 것이 논리적이고 실제적이며 유익한 것인지 아닌지를 점검하고 받아들인다. 이러한 이성적이고 지적인 이해의 역할은 그 다음 단계의 지혜로 이끌어주는 것이다. 그 다음 단계의 지혜는 수혜(修慧)인데, 수행을 통한 경험적인 차원에서 자기 자신 안에서 계발한 지혜를 말한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지혜이다. 들어서 생기는 문혜나 사유해서 아는 사혜는 우리에게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영감을 주고 길안내를 해주지만 진정으로 깨달을 수 있는 지혜는 오직 수혜 뿐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자기 자신의 경험에 바탕을 둔 지혜이기 때문이다. 

◎ 세 가지 괴로움

고고성(苦苦性, dukkha-dukkhata), 괴고성(壞苦性, viparināma-dukkhata), 행고성(行苦性, saṇkhāra-dukkhata)은 괴로운 느낌[苦受], 즐거운 느낌[樂受], 덤덤한 느낌[不苦不樂受]의 세 가지 느낌으로 설명이 되고 있다. 세 가지 느낌 가운데 고고성(苦苦性)은 괴로운 느낌에 대한 것이다. 괴로운 느낌은 그 자체가 괴롭기 때문에 고고성이다. 즐거운 느낌은 변하면 괴로움이기 때문에 괴고성이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중생들이 이것의 속성을 모르고 무지하기 때문에 행고성이다. 이렇듯 3가지 괴로움은 3가지 느낌으로 설명된다. 「디가 니까야 주석서」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고고성(dukkha-dukkhata)은 고통스럽기 때문에 괴로운 상태다. 이것은 괴로운 느낌의 이름이다. 행고성(saṇkhāra-dukkhata)은 행(行)이 있기 때문에 괴로운 상태다. 이것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의 이름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고유한 성질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형성되었다는 이유로, 그리고 생겨남, 늙음, 변함에 의해서 짓눌렸기 때문에 행고성이라고 한다. 괴고성(viparināma-dukkhata)은 변하기 때문에 괴로운 상태다. 이것은 즐거운 느낌의 이름이다. 즐거움이 변할 때 괴로움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즐거움을 괴고성이라고 한다. 그리고 괴로운 느낌과 즐거운 느낌을 제외한 삼계의 모든 법에 대해서는 ‘모든 형성된 것들은 괴로움이다.’라는 말씀이 있기 때문에 행고성이라고 알아야 한다.”(DA.iii.992)

◎ 세 가지 밝음(tisso vijja. 삼명. 三明)
'세 가지 밝음(tisso vijja)' 이란, 전생에 대해 기억하는 지혜(pubbenivasanussatinana)'. '하늘과 같은 눈의 지혜(dibbacakkhunana)'. '루가 다한 지혜(asavanam khaye nana)' 를 말한다.

◎ 세 가지 삼매(tayo samadhi)
'세 가지 삼매(tayo samadhi)'는 두 가지 부류로 설명되는데, '공성에 의한 삼매(sunnato samadhi. 공삼매.空三昧)'. '드러난 모습을 지니지 않은 삼매(animitto samadhi. 무인상삼매.無因相三昧)', '바램없음의 삼매(appanihito samadhi. 무원삼매.無願三昧)' 에 의한 분류(PsA. p.125)가 첫 번째의 것이며, '거친사유와 미세한 사유를 지닌 삼매(savitakkasavicara samadhi)'. '거친 사유가 없되 미세한 사유를 지닌 삼매(avitakkavicaramatta samadhi)'.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를 지니지 않은 삼매(avitakkavicara samadhi)' 에 의한 분류(PsA. p.544)가 두 번째의 것이다.

◎ 세 가지 성품 

‘세 가지 성품’으로 번역한 띠락카나(ti-lakkaṇa)는 오온(五蘊)과 모든 유위법(有爲法, saṅkhata-dhammā)의 보편적 속성인 무상·고·무아를 가리킨다.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려면 위빠사나를 통하여 이러한 세 가지 성품을 반드시 철견해야 한다. 

(1) 무상(無常, anicca) - 무상함, 덧없음, 또는 영원하지 않음이란 뜻으로 모든 유위법(有爲法, saṅkhata-dhamma)이 변화하고 영원하지 않다는 뜻이다. 영어권에서는 impermanence라고 한다.

(2) 고(苦, dhkkha) - 불만스러움, 괴로움, 고통으로 모든 윤회하는 존재의 보편적 특성은 고(苦)라는 것, 즉 존재의 전반적 불만족성을 나태나는 말이다. 영어권에서는 suffering, unsatisfactoriness라고 한다.

(3) 무아(無我, anatta) - 영원한 자아는 없고 실재하지 않음을 가리킨다. 영어권에서는 not-self, non-ego, egolessness, impersonality라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경의 도처에서 이러한 무상·고·무아를 설하셨는데 특히 이는 대부분 오온의 무상·고·무아의 문맥에서 나타나며 오온으로 대표되는 모든 개념적 존재를 분석하고 분해하고 해체해서 드러나는 유위법의 무상·고·무아를 철견할 때 해탈과 열반은 실현된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유위법의 무상을 꿰뚫은 해탈을 무상해탈(無常解脫)이라 하고 고를 꿰뚫어 실현한 해탈을 무원해탈(無願解脫)이라 하고 무아를 꿰뚫어서 실현한 해탈을 공해탈(空解脫)이라 부른다. 그런데 우리에게 익숙한 삼법인(三法印)이라는 용어는 빨리 경이나 상좌부 아비담마나 주석서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법인(法印)이라는 말은 산스끄리뜨 dharma-mudra의 번역어로 설일체유부(設一切有部)의 율장과 「아비달마법온족론(阿毘達磨法蘊足論)」과 같은 설일체유부 논장에서 제일 먼저 사용한 술어이며 이것이 반야부(般若部)의 「대지도론(大智度論)」 등에서도 채용되었고 후대의 많은 중국 주석가들이 이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대승불교의 삼법인은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적정열반(寂靜涅槃)으로 여기에 일체개고(一切槪苦)를 넣어 사법인(四法印)이라고 하기도 한다. 설일체유부는 인도의 부파불교 내에서 가장 활발하게 독특한 종지를 내세워 대승불교와 각축했던 교파였는데, 이들은 이론투쟁을 많이 겪었던 만큼 자신과 남들과의 차이점을 분명히 할 필요성에서 법의 도장[法印]과 같은 확고한 잣대가 요구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띠락카나(ti-lakkaṇa)를 원 의미에 가깝게 번역한다면 삼법인보다는 ‘세 가지 성품’이나 ‘세 가지 특징’이 더 타당하다고 하겠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삼법인은 수행에 대한 강한 메시지보다는 불교 전반의 가장 큰 특징을 천명하는 의미가 더 크다고 하겠다.

 

◎ 세 가지 지혜
이 세 가지 지혜는 「초전법륜경」에서 ‘세 가지 양상(ti-parivaṭṭa)’과 ‘열두 가지 형태(dvādas-ākāra)’로써 설명되고 있다. 세 가지 양상이란 다음과 같다.

(1) 진리를 아는 지혜(saccā-ñāṇa) - 사성제 각각에 대한 여실한 지혜를 뜻한다.

(2) 역할을 아는 지혜(kicca-ñāṇa) - 사성제를 철저히 알아야 하고, 버려야 하고, 실현해야 하고, 닦아야 하는 것을 아는 지혜를 뜻한다.

(3) 성취를 아는 지혜(kata-ñāṇa) - 사성제에 대하여 그 기능이나 역할을 이루었음을 아는 지혜를 뜻한다.

열두 가지 형태(dvādas-ākāra)란 사성제 각각에 위의 세 가지 지혜를 곱하면 다음의 12가지 형태가 되는 것을 말한다.

세 가지 양상(ti-parivaṭṭa)과 열두 가지 형태(dvādas-ākāra) 진리를 아는 지혜(saccā-ñāṇa)역할을 아는 지혜(kicca-ñāṇa)성취를 아는 지혜(kata-ñāṇa)고제(苦諦,dukkha-saccā)

① 고제를 아는 지혜② 고제의 역할을 아는 지혜③ 고제의 성취를 아는 지혜집제(集諦,samudaya-saccā)④ 집제를 아는 지혜⑤ 집제의 역할을 아는 지혜⑥ 집제의 성취를 아는 지혜멸제(滅諦,nirodha-saccā)⑦ 멸제를 아는 지혜⑧ 멸제의 역할을 아는 지혜⑨ 멸제의 성취를 아는 지혜도제(道諦,magga-saccā)⑩ 도제를 아는 지혜⑪ 도제의 역할을 아는 지혜⑫ 도제의 성취를 아는 지혜

◎ 세 가지 마음(tinnam cittanam)

주석서인 [빠띠삼비다막가]에는 타심통(다른 이의 마음을 아는 지혜]를 설명하는 구문에서 '이러한 모습은 기쁨의 근을 일으키는 것이고, 이러한 모습은 근심의 근을 일으키는 것이고, 이러한 모습은 평정의 근을 일으키는 것이다(idam rupath somanassindriyasammutthitam. idam rupam domanassindriyasamutthitam. idam rupam upekkhindriyasamutthitan)'라고 알아차리는 마음을 말하다. 이를 남전장 40(p.191)에서는 '기쁨과 함께 하는 마음(somanassa-sahagatacitta)'. 근심과 함께하는 마음(domanassa-sahagatacitta)'. 평정과 함께하는 마음(upekkha-sahagatacitta)'의 셋으로 구분하고 있다.

 

◎ 세계(loka) 
아비담마에 의하면 세계(loka)는 다름 아닌 우리 마음에 있는 미세한 여러 계층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서 구현된 것이다. 중생들이 거주하는 세계의 계층조직은 마음의 계층조직을 그대로 복사한 것이어서 이 둘은 서로서로 상응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중생이 왜 특정한 세계에 태어났는가 하는 것은 그가 전생에 그 세계에 태어나기에 적합한 업을 산출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계(loka)와 마음(citta)은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 

◎ 세존
세존으로 옮긴 원어는 바가완(Bhagavan)이다. 원어의 의미는 바가(bhaga)를 가진 분(-vat)이다. 여기서 바가란 ‘복, 행운’을 뜻하기 때문에 Bhagavan은 복자(福者)라는 의미이다. 중국에서는 세존(世尊)이라고 뜻 번역을 하였고 박가범(薄伽梵)이라 음역하였다. 영어권에서는 Blessed one, Exalted one이라고 한다. 세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청정도론」(Vis.Ⅶ.53~)을 참조 할 것.

◎ 소레야(Soreyya) 
소레야(Soreyya)는 부처님 당시 한 장자의 아들이었다. 어느 때 한 친구와 함께 시종들을 데리고 강가에 멱을 감으러 성 밖을 나올 때 마하깟쨔야나(Mahā-kaccāyana) 존자가 탁발을 위해 성으로 들어가기 전 가사를 고쳐 입는 것을 보았다. 소레야는 존자의 몸을 바라보고는 존자가 자신의 아내가 되거나 자기 아내의 몸 빛깔이 존자의 몸 빛깔처럼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일으켰다. 그 순간 소레야는 여자로 변했고 소레야는 일행들을 피해 마침 주위를 지나던 한 대상(隊商)과 함께 딱까실라(Takkasilā)로 갔다. 딱까실라에 도착하여 그 도시의 한 재정관의 아내가 되었고 두 명의 아들도 낳았다. 그런데 남자로 있을 때 소레야는 이미 두 명의 아들 두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지나서, 소레야는 옛 친구가 마차를 몰고 딱까실라를 지나는 것을 보았다. 소레야는 여자시종을 보내서 옛 친구를 자기집에 초대하고 접대하였다. 친구는 자초지종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소레야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소레야는 마하깟쨔야나 존자를 식사공양에 초청하고 존자의 발앞에 무릅을 꿇고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빌었다. 존자가 소레야를 용서해주자 다시 남자로 돌아왔다. 소레야는 존자 밑에서 출가하여 함께 사왓티(Sāvatthi)로 왔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몰려와 갖가지 질문으로 소레야를 피곤하게 했다. 그래서 소레야는 혼자 조용한 곳으로 가서 위빠사나 수행을 하여 아라한이 되었다. 소레야가 아라한이 되기 전에 사람들은 어느 쪽의 아이들을 더 사랑하는지를 물었는데, 그때마다 소레야는 “여자였을 때 낳은 아이들을 더 사랑합니다.”라고 답하곤 했었다. 하지만 아라한과를 얻고 난 뒤에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제 어느 쪽 아이들에도 애정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DhA.i.324ff)  

◎ 소멸 
‘소멸’로 번역한 니로다(nirodha)는 ni(아래로)+√rudh(막다, 억압하다)에서 파생된 남성명사로서 문자적으로 ‘아래로 내려 누룸’ 이라는 뜻이다.PED에서 ‘oppression, suppression; destruction, cessation, annihilation (of senses, consciousness, feeling &being in general: sankhārā).’라고 설명되듯이, ‘(마음, 느낌, 전반적인 존재로서의 행의) 억압, 지멸,소멸, 적멸’ 등의 뜻한다. 경에서는 문맥에 따라서 ‘일어남’을 뜻하는 ‘사무다야(samudaya)'의 반대어로 ‘없어짐,사라짐’의 뜻으로 쓰이기도 하고 열반(nibbāna)의 동의어로 쓰이기도 한다. 존재의 원인을 능동적으로 파괴하는 측면에서는 이 니로다가 닙바나보다 훨씬 더 강한 표현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멸진정(滅盡定, nirodha-samāpatti) 등의 문맥에서도 쓰이고 있다. 이 멸진정은 몸은 살아있지만 인식과 느낌으로 대표되는 모든 마음과 마음의 작용들이 멸해 버린 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니로다는 육문(六門)에서 일어나는 정신과 물질의 모든 현상들을 위빠사나 수행을 통하여 면밀히 관찰함으로써 갈애나 번뇌가 일시적으로 사라지는 일시적 소멸(tadanga-nirodha)과 아라한과를 증득하여 갈애나 번뇌가 철저히 소멸하여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완전한 소멸(samuccheda-nirodha)로 나눌 수 있다.

 소지장(所知障)

소지장(所知障)은 알아야 할 것에 대하여 방해하는 것. 일체의 소지(所知)에 대해서 지혜의 활동이 방해되는 불오염(不染汚)의 무지(無知)를 말한다. 이것이 멸(滅)할 때에 일체의 지자(智者)가 되는 것, 또는 보리를 얻는다고 해석하고 있다. 『성유식론(成唯識論)』 권9(大31 p.48c9-11)에 “소지장이란 변계소집인 실체의 법으로 집착하는 아견을 첫째로 하는 악견·의심·무명·탐애·성냄·교만 등이다. 인식의 대상과 전도됨이 없는 본성을 덮어서 능히 깨달음을 장애하는 것을 소지장이라고 한다.

所知障者, 謂執遍計所執實法, 薩迦耶見而爲上首, 見疑無明愛?慢等. 覆所知境無顚倒性, 能障菩提名所知障.”라고 하였다. 

 

◎ 소의(所依, āśraya)

소의(所依, āśraya)는 『대승장엄경론(大乘莊嚴經論)』에서 아홉 가지 의미로 나누고 있는데, 아홉 가지란 ① 기체(基體)·지지(支持), ② 근저(根底), ③ 귀의소(歸依所), ④ 근원(根源)·원천(源泉), ⑤ 문법(文法)상의 주어로서 동작의 주체, ⑥ 육체(肉體) 때로는 육근(六根), ⑦ 인간의 총체적인 존재방식, ⑧ 법계(dharmadhātu), ⑨ 전의(轉依). 전환되어야 할 존재의 근저(根底)이다. 여기서 소의(所依)는 여러 가지로 번역되나, 전의(轉依)는 해탈(moksa), 자유(svatantra), 완성(parinispanna)의 의미이다. 나아가 견도(見道)에 들어가는 것이고, 수도의 정점에 위치하여 불지(佛地)에 이르고 법신을 달성한다고 서술하고 있다. 『섭대승론』에서 소의(所依)는 의타기성의 별명이라고 하고 있으며 『유가사지론』의 「보살지」 이후에는 소의가 아뢰야식과 관련되어 법신 또는 진여로서의 소의로 기술되고 있다.

 

◎ 소연(所緣, ālambana)

소연(所緣, ālambana)이란 마음으로 인식하는 대상을 말한다.

 

◎ 속박 (요가. yoga) 
‘속박’이라 번역한 요가(yoga)는 √yuj(매다)에서 파생된 남성 명사로서 ‘속박,구속,얽맴,족쇄’를 뜻한다. 중국에서는 액(軛)으로 번역되었고, 영어권에서는 yoke, bound라고 한다. 마치 수레에 얽매인 소가 수레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존재라는 기계와 윤회의 바퀴에 얽매인 중생은 그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속박이라고 한다. 주석서에서는 동의어로 번뇌(漏, āsava) 또는 폭류(暴流, ogha)가 나오기도 한다. 이러한 속박에는 다음의 네 가지가 있다.

(1) 감각적 욕망의 속박(慾漏, kāmā-yoga),

(2) 존재의 속박(有漏, bhava-yoga),

(3) 사견의 속박(見漏, diṭṭhi-yoga),

(4) 무명의 속박(無明漏, avijjā-yoga). 

◎ 수가띠(sugati)
‘욕계의 선한 세계’로 옮긴 까마 수가띠(kāma-sugati)에서 수가띠(sugati)는 두가띠(dugati)의 반대되는 술어로서 sμ(좋은)+√gam(가다)에서 파생된 여성 명사이다. 중국에서 선취(善趣)로 번역했고 영어권에서는 happy destination, happy course of existence라고 한다. 이러한 선한 세계는 다시 욕계의 선한 세계(kāma-sugati)와 색계의 선한 세계(rūpāvacara-sugati)와 무색계의 선한 세계(arūpāvacara-sugati)로 나누어 진다.

욕계의 선한 세계는 모두 일곱 가지로서

(1) 인간(人間, manussa),

(2) 사대왕천(四大王天, cātu-māha-rajikā),

(3) 삼십삼천(三十三天, tāvatiṁsa),

(4) 야마천(夜摩天, yāmā), (

5) 도솔천(兜率天, tusitā),

(6) 화락천(化樂天, nimmāna-rati),

(7)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 paranimmita-vasa-vatti)을 가리킨다. 

◎ 수낙캇따 

주석서(DA.i.312-313)에 따르면 수낙캇따는 천상의 모습을 보고자 해서 세존께 그 방법을 여쭈었다. 세존께서는 그 방법을 가르쳐 주셨으며 그는 그대로 집중(samādhi)을 닦아서 신통을 얻어 신들의 모습은 볼 수 있었다. 그런 다음에 천상의 소리를 듣고자 하여 세존께서 알려주신 대로 하였지만 전생에 계를 지닌 비구의 귀를 때려 귀머거리를 만들었기 때문에 천상의 소리는 듣지 못했다고 한다. 

◎ 수낙캇따(Sunakkhatta) 

수낙캇따(Sunakkhatta)의 이야기는 디가 니까야, 「빠띠까경(Pāṭika-sutta)」(D.24), 맛지마 니까야, 「수낙캇따경(Sunakkhatta-sutta)」(M105), 쿳다까 니까야, 「로마함싸 자따까(Lomahamsa Jātaka)」(J.No.94) 등에 보인다. 그는 밖으로 남들이 행하는 신통, 기적, 고행이나 우주의 기원 따위에 지나치게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지금 여기(here and now)에서 괴로움을 소멸하고 열반을 실현하는 것을 근본으로 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성에 차지 않았고 제대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결국 그는 환속을 하고 부처님을 비방하면서 돌아다녔다. 한편 수낙캇따(Sunakkhatta)는 개(suna)-꼬리(khatta)라는 뜻이다.

 

◎ 수다원의 특징 
빨리 경에서는 수다원의 특징을 부처님, 법, 승가, 계율에 대한 확고부동한 신앙을 뜻하는 사불괴정(四不
壞淨, attāro-avecca-ppasādā)으로 설명하고 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수다원과를 증득할 때에 비로소 부처님의 진정한 제자가 된다. 왜냐하면 그때에 비로소 삼귀의의 진정한 의미와 바른 계행의 결정적 중요성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레디 사야도(Ledī Sayādaw)는 그의 저서 「The Manual of the Dhamma」에서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사성제를 체득했을 때만이 진정한 불교인이고, 그러한 성자를 수다원이라고 한다. -중략- 수다원은 내생에 비불교인의 가정에 태어날 수도 있지만 설사 당장 죽는 고통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다른 종교를 믿는다고 선언하지 않을 것이다. 수다원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버리느니 차라리 산채로 불에 타는 것을 선택할 것이다. 이러한 수다원의 믿음은 절대 흔들리지 않고 열반을 얻기까지 계속 커나간다."

Ledi Sayādaw, The Manual of the Dhamma, Yangon, Mother Ayeyarwaddy Publishing house, 2004, p.596)

 

◎ 수면(隨眠, anuśaya)

수면(隨眠, anuśaya)은 ‘본래 행위로서 표면에 나타나던 번뇌에 대하여, 아직 행위로서는 나타나지 않고, 마음 속에 잠재한 불선(不善)의 경향’을 의미한다. 초기경전인 니까야(Nikāya)에서 수면의 용어가 경장 중에 단독으로 나타나는 경우 모든 ‘잠재되어 있는 악의 경향’이라고 한다. 수면은 업과 함께 중생을 생사·윤회시키는 근본원인이다. 유부에서는 108번뇌설로서, 이것은 98종의 수면에 10종의 전(纏)을 더해 이루어진 것이다. 유가행파는 유부와 달리 128종의 수면설을 채택하고 있다. 이 128종의 수면설은 유가행파의 최초기 논서인 『유가사지론』 권8(大30 p.313b7-16) 등에서 분류, 설명되고 있고 뒤를 이은 논서 들에 의해 유가행파의 정통설로서 수용되고 있다.

 

◎ 수명의 행 (아유상카라, āyu-saṅkhāra)
'수명의 행'이라 번역한 아유상카라(āyu-saṅkhāra)는 āyu(수명, 목숨)+saṅkhāra(行, 의도적 행위, 업)의 합성어이다. 수명을 유지시키는 힘, 생명현상, 살려는 의지를 뜻하고, 아비담마에서는 생명기능(命根, jīvitindriya)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이 생명기능은 다시 물질적인 생명기능과 정신적인 생명기능으로 나누어진다. 정신적인 생명기능이란 관련된 마음의 작용에 생기를 불어넣어주고, 물질적인 생명기능은 물질에 생기를 불어 넣어준다. 이 생명기능 없이는 마음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아비담마에서는 이를 모든 마음에 공통되는 7가지 마음의 작용(sabbacittasādhāraṇa-cetasika)에 포함시키고 있다.

◎ 수브라흐마(Subrahma)  
주석서(SA.i.88f.; DA.iii.750; MA.i.190f)에 따르면 수브라흐마(Subrahma)는 삼십삼천의 천인이었는데 하루는 1천명의 요정들을 거느리고 난다와나(Nanda-vana)로 놀러 갔다. 5백 명의 요정들은 나무아래에 앉아 있었고, 다른 5백 명의 요정들은 나무위에 올라가서 화환을 던지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바로 그 때 나무위에 있던 5백 명의 요정들은 순식간에 사라져서 무간지옥에 태어났다. 수브라흐마는 사라진 5백 명의 요정들이 모두 무간지옥에 태어났음을 발견하고 자기 운명을 조사해보니 자신도 7일 밖에 더 살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두려움과 슬픔에 휩싸인 수브라흐마는 위안을 얻기 위해 부처님을 찾아왔고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수다원과를 얻었다. “깨달음의 구성요소[七覺支]와 두타행(頭陀行)이외에는감각기능[根]을 단속하는 계 이외에는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것[出離] 이외에는중생들의 안전을 나는 보지 못하노라.”(S.i.53)

◎ 수완나부미(Suvaṇṇabhumi)
수완나부미(Suvaṇṇabhumi)는 suvaṇṇa(황금)+bhūmi(땅)의 합성어로 ‘황금의 땅’이란 뜻이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금지국(金地國)이라 번역했다.「자따까」에 보살이 보물을 찾으러 이 수완나부미로 여행을 떠나는 일화가 소개되어 있을 정도로, 일찍부터 수완나부미와 인도와는 물적, 인적, 문화적 교류가 있었던 것 같다. 학자들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이 수완나부미는 대략 지금의 양곤, 따톤, 바간이 위치한 하부 미얀마에서 태국의 니콘파톰과 말레이반도 서해안을 아우르는 지역이라고 추정된다. 제 3차 결집 후 인도의 아소까(Asoka)왕이 이 지역에 소나(Sona)와 웃따라(Uttara) 장로를 보내 「범망경」(D1)을 설하여 처음으로 불교를 전파하기도 하였다. 황금의 땅이란 의미 때문에 수완나부미가 위치했던 미얀마를 영어로 Golden land라는 미칭으로 부르기도 하고, 태국도 역사적인 연고성을 주장하여 자신들의 신 국제공항을 수완나부미라고 이름 지었다. 

 

◎ 수행
‘수행’으로 옮긴 바와나(bhāvanā)는 √bhū(되다)의 사역형 동사 bhābeti(되게 하다)에서 파생된 여성명사이다. 그래서 문자적으로 ‘(마음을) 되게 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PED에서 ‘producing, dwelling on something, putting one's thoughts to, application, developing by means of thought or meditation, cultivation by mind, culture.’라고 설명되듯이, ‘뭔가를 골똘히 생각함, 생각을 대상으로 향하게 함, 수행, 명상, 마음닦음, 마음수련’ 등을 뜻하는 불교수행의 전문술어로 정착되었다. 이러한 바와나는 사유를 쫓아다니지 않고 정신집중에 의해 직관적 통찰을 얻음으로써 궁극적으로 사유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 즉 무상·고·무아의 세 가지 성품을 철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러한 불교수행법은 크게 사마타(samatha)와 위빠사나(vipassanā)로 구분되는데 전자는 집중(samādhi)인 정(定)을 닦는 집중수행을, 후자는 통찰지혜(paññā)인 혜(慧)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청정도론」에서도 사마타에 대해서는 정품(定品)에서, 40가지 수행주제를 통해서, 익힌 표상(uggaha-nimitta)과 닮은 표상(paṭibhāga-nimitta)을 일으키고 이것에 집중하여 근본집중(appana-samādhi)을 증득하는 삼매수행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위빠사나에 대해서는 혜품慧品에서, 82법의 고유한 성질과 연기성을 각각 찰라(khaṇika)와 조건(paccaya)으로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7청정을 닦아서 16가지(또는 10가지) 위빠사나 지혜를 체득하여 해탈열반을 성취하고 성자가 되는 통찰지혜 수행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렇듯 사마타와 위빠사나는 불교 수행을 대표하는 개념이다.

이 두 용어는 일찍이 중국에서 각각 지(止)와 관(觀)으로 직역되었고, 영어권에서는 각각 concentration과 insight라고 번역된다.

(1) 사마타samatha사마타는 산스끄리뜨어 어근 √śam(고요하다, 평온하다, 그치다, 적멸하다)에서 온 명사이다. PED에서 ‘calm, quietude of heart.’이라고 설명되듯이, ‘고요함, 맑음, 적정’ 등을 뜻한다. 모든 불선법(不善法)이 가라앉고 그친다는 의미에서 중국에서 지(止)로 옮겼고, 영어권에서는 calm이라 한다. 이 사마타는 선정(jhāna)을 가리키면서, 삼매(samādhi)와 동의어인 술어이다. 아비담마에서 사마타는 네 가지 색계선(色界禪)과 네 가지 무색계선(無色界禪)이라는 8가지 선정의 경지에서 하나로 집중된 마음(心一境性, cittassa-ekaggatā)으로 정의한다. 이런 경지들은 마음이 한끝으로 집중되어서 마음의 떨림이나 동요가 가라앉았고 끝이 났기 때문에 고요함(사마타)이라 불리는 것이다. 그래서 사마타 수행은 근본집중(appanā-samādhi)과 근접집중(upacārā-samādhi)과 같은 깊은 집중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경에는 사마타를 위한 다양한 수행대상이 언급되고 있는데 주석서에서는 38가지로 정리되어 나타나고 「청정도론」에서는 최종적으로 40가지로 정리되어 있다. 그리고 사마타 수행의 핵심은 표상(nimitta)이라는 개념인데 대상에 집중을 해서 그 대상에서 익힌 표상을 일으키고, 이것이 더욱 발전되어 닮은 표상(paṭibhāga-nimitta)이 될 때 이 닮은 표상을 대상으로 하여 다섯 가지 장애(五蓋, pañca-nīvaraṇa)가 극복되고 마음이 집중되는 것을 근본집중(appanā-samādhi)이라고 한다. 이것이 사마타 수행의 핵심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마타 수행만으로는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기 때문에 탐욕(rāga), 성냄(dosa), 어리석음(moha)으로 대표되는 근본 번뇌들을 꿰뚫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사마타란, 마음과 대상이 온전히 하나가 된 그런 밝고 맑고 고요함에 억눌려서 이런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잠복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집중의 상태를 풀면 다시 이러한 번뇌의 공격을 받는다. 그러므로 위빠사나의 강력한 통찰지혜를 계발하여 이 지혜의 힘으로 그 뿌리를 뽑아,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2) 위빠사나(vipassanā)위빠사나란 vi(분리해서)+passati(보다)에서 파생된 명사로 '분리해서 다르게 본다'는 뜻이다. 어원상으로 볼 때, 그냥 보는 것(sight)에 머무르지 않고 더 깊이 보는 것(in-sight)을 의미한다. PED에서도 ‘inward vision, insight, intuition, introspection.’이라 설명되듯이, ‘안으로 들여다 봄, 꿰뚫어 봄, 직관(直觀), 내관(內觀)’ 등을 의미한다. 그래서 영어권에서는 보통 insight라 옮기고, 중국에서는 과거에 관(觀)으로 옮겼는데 요즘은 어원에 더 충실하여 내관(內觀)으로 옮기고 있다. 위빠사나는 바로 지금 일어나는 정신과 물질의 현상에 대한 무상(anicca), 고(dukkha), 무아(anatta)의 세 가지 성품을 통찰, 혹은 꿰뚫는 것을 뜻한다. 오온(五蘊)의 무상·고·무아를 철견함으로써 탐욕, 성냄, 어리석음, 사견, 자만, 의심 등과 같은 열 가지 번뇌를 제거할 수 있고 그렇게 했을 때 모든 괴로움의 종식인 깨달음에 이룰 수 있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찰나집중(khaṇika-samādhi)이 필요한데 이러한 찰나집중은 오온(五蘊)에 대한 지속적이고 끊임없는 알아차림(sati)을 통해 얻어진다 

◎ 수행 
‘수행’으로 옮긴 바와나(bhāvanā)는 √bhū(되다)의 사역형 동사 bhābeti(되게 하다)에서 파생된 여성명사이
다. 그래서 문자적으로 ‘(마음을) 되게 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PED에서 ‘producing, dwelling on something, putting one's thoughts to, application, developing by means of thought or meditation, cultivation by mind, culture.’라고 설명되듯이, ‘뭔가를 골똘히 생각함, 생각을 대상으로 향하게 함, 수행, 명상, 마음닦음, 마음수련’ 등을 뜻하는 불교수행의 전문술어로 정착되었다. 이러한 바와나는 사유를 쫓아다니지 않고 정신 집중에 의해 직관적 통찰을 얻음으로써 궁극적으로 사유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 즉 무상·고·무아의 세 가지 성품을 철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러한 불교수행법은 크게 사마타(samatha)와 위빠사나(vipassanā)로 구분되는데 전자는 집중(samādhi)인 정(定)를 닦는 집중수행을, 후자는 통찰지혜(paññā)인 혜(慧)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청정도론」에서도 사마타에 대해서는 정품(定品)에서, 40가지 수행주제를 통해서, 익힌 표상(uggaha-nimitta)과 닮은 표상(paṭibhāga-nimitta)을 일으키고 이것에 집중하여 근본집중(appana-samādhi)을 증득하는 삼매수행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위빠사나에 대해서는 혜품慧品에서, 82법의 고유성질과 연기성을 각각 찰라(khaṇika)와 조건(paccaya)으로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7청정을 닦아서 16가지(또는 10가지) 위빠사나 지혜를 체득하여 해탈열반을 성취하고 성자가 되는 통찰지혜 수행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렇듯 사마타와 위빠사나는 불교 수행을 대표하는 개념이다. 이 두 용어는 일찍이 중국에서 각각 지(止)와 관(觀)으로 직역되었고, 영어권에서는 각각 concentration과 insight라고 번역된다.

 

◎ 수행주제
‘수행주제’로 옮긴 깜마타나(kammaṭṭhāna)는 kamma(業, 행위)+ṭhāna(處, 장소, 지역)로 분석된다. 그래서 kammaṭṭhāna는 ‘행위의 장’이 되며 kamma를 업이나 일로 해석하면 ‘작업장, 일터, 업처(業處)’를 뜻한다. 즉 수행자들의 일터라는 뜻으로 수행자들은 40가지 사마타와 10가지 위빠사나를 수행대상으로 삼아 도를 이루기 위해 일(수행)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청정도론」에서는 사마타를 성취하는 40가지 수행주제를 깜마타나(kammaṭṭhāna)로 부르고 10가지 위빠사나는 위빠사나 지혜(vipassanā-ñāṇa)로 부른다.

* 참고: 「대념처경」의 주석서에 따르면 21가지의 수행주제가 있다. 즉 ➀ 들숨날숨[出入息], ➁ 4가지 자세, ➂ 4가지 분명한 앎, ➃ 32가지 몸의 부위, ➄ 사대(四大), ➅-⑭ 9가지 공동묘지의 관찰, ⑮ 3가지 느낌, ⑯ 16가지 마음의 대상, ⑰ 5가지 장애[五蓋], ⑱ 5가지 무더기[五蘊], ⑲ 6가지 감각장소[六處], ⑳ 7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七覺支], ㉑ 사성제(四聖諦) 등이다. 이들 가운데서 들숨날숨과 32가지 몸의 부위와 아홉 가지 공동묘지에 대한 알아차림 11가지는 근본집중(appanā-samādhi)에 이르는 수행대상이다. 그런데 디가 니까야를 암송하는 마하시와(Mahāsīva) 장로는 9가지 공동묘지에 대한 알아차림은 위험함을 관하는 것이라고 설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의 견해에 따르면 두 가지만이 근본집중을 유도하는 대상이고 나머지는 모두 근접집중(upacāra-samādhi)의 대상이 된다.

◎ 세안(世眼)

세간안(世間眼)의 준말. ① 세계의 어둠을 비추는 눈. ② 세상의 안목이 되는 사람, 즉 부처님, 세존.

◎ 습기(習氣, vāsanā)
습기(習氣, vāsanā)는 유식설에서는 종자(種子)의 다른 이름으로 훈습(薰習)이
나 행위(行爲) 등의 일체 유위법(一切 有爲法)을 산출하는 공능(功能) 혹은 능력(能力)으로 아뢰야식 속에 감추어져 있다고 한다. 종자의 이명(異名)인 습기는 『유가사지론』 권52(大30 p.589a9-11)에 기술되어 있으며, 『성유식론』 권8(大31 p.43b2-18)에는 삼종(三種)의 습기에 대한 기술이 있다. 즉 ① 명언습기(名言習氣)는 명언에 의해서 훈습된 종자, 곧 명언종자를 말하는 것으로 일체 유위법을 각각 생기게 하는 직접적인 인(因)으로, 곧 등류과를 이끌어 내는 점에서 등류습기(等類習氣)라고 한다. 이것은 다시 표의명언(表義名言)에 의한 습기와, 현경명언(顯境名言)에 의한 습기의 2종으로 나뉜다. ② 아집습기(我執習氣)는 아집에 길들여진 습기이며 ③ 유지습기(有支習氣)는 삼유(三有)의 인(因)인 선악의 업에 훈습된 업종자를 말하는 것으로, 이숙과(異熟果)를 초래하는 점에서 이숙습기(異熟習氣)라고도 한다.

 

◎ 습종성(習種性)
습종성(習種性)은 육종성(六種性)의 하나로 보살을 행위에 의해서 6종으로 분
류한 것이다. 종성(種性, gotra)은 종성(種姓)이라고도 한다. 성문·연각·보살등의 삼승이 각각의 깨달음을 얻은 종자[種]가 되는 본래 소질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선천적으로 갖추고 있는 경우와 후천적인 수행에 의해서 얻는 2종의 종성이 있다. 『유가사지론』권2(大30 p.284c)에서는 본성주종성(本性住種性)과 습소성종성(習所成種性)의 두 가지를 세우고 있다. 법상종에서는 오성(五性)이 선천적으로 구별되어 있다고 하여 성종성을 설하고 있으면서 한편으로 또 별도의 습종성을 설하는데, 이것은 호법의 학설에 속한다. 『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권上에서는 습종성(習種性)·성종성(性種性)·도종성(道種性)의 3종성을, 『보살영락본업경(菩薩瓔珞本業經)』 권上(大24 p.1012b25)에서는 ① 습종성(習種性, 十住의 보살) ② 성종성(性種性, 十行의 보살) ③ 도종성(道種性, 十回向의 보살) ④ 성종성(聖種性, 十地의 보살) ⑤ 등각성(等覺性, 等覺의 보살) ⑥ 묘각성(妙覺性, 妙覺의 보살)을 설하고 있다.

 

◎ 승처해탈(勝處解脫)
승처해탈(勝處解脫)은 팔승처(八勝處)와 연관 지어 이해할 수 있다. 8승처는 욕
계의 색처(色處)를 관찰하고 이것을 이겨내서 탐심(貪心)을 제거하는 8단계의 과정을 말한다. 

① 색(色)과 형상의 상(想)의 내심(內心)에 있는 것을 없애기 위해서 색처(色處)의 소분(少分)을 관찰하고 이것을 이겨서 탐욕(貪欲)을 멸한다. 

② 다시 색처(色處)의 다분(多分)도 이겨낸다.

③ 내심(內心)에 색처(色處)가 멸하였으나 다시 색처(色處)의 소분(少分)을 관찰하여 이것을 이겨낸다.

④ 다시 이와 같이 색처(色處)의 다분(多分)도 이겨낸다.

⑤ 이와 같이 내심(內心)의 색상(色想)이 없고 다시 대상의 색채(色彩)의 청(靑)

⑥ 황(黃)
⑦ 적(赤)

⑧ 백(白)을 관찰하여 이것도 이겨낸다.

이 중에서 앞의 넷은 모두 초선(初禪)과 제이선(第二禪)에 의한 것, 뒤의 넷은 제사선(第四禪)에 의한 것. ①과 ②는 팔해탈(八解脫)의 제1, ③과 ④는 제2, ⑤·⑥·⑦·⑧은 제3에 해당한다. 8해탈은 탐심(貪心)을 버릴 뿐 자재(自在)를 얻지 못하고 팔승처(八勝處)는 대경(對境)을 제복(制伏)하여 자재(自在)를 얻는다는 차이가 있다.

 

◎ 승진도(勝進道)

승진도(勝進道)는 『구사론』 권26(大29 pp.138c17-139c12)에 번뇌를 끊어서 해탈의 진리를 증득하는 과정(過程)인 사도(四道) 가운데 하나이다. ① 가행도(加行道)는 방편도라고도 하며, 번뇌를 끊기 위한 예비적 수행단계이다.

② 무간도(無間道)는 무애도(無礙道)라고도 하며, 바로 번뇌를 끊는 도로서 단도(斷道)라는 것이다. 이 도의 직후에 번뇌가 끊어지므로 무간격(無間隔)의 의미로 무간(無間)이라 한다.

③ 해탈도(解脫道)는 번뇌를 끊어서 해탈의 진리를 증득하는 도(道).

④ 승진도(勝進道)는 승도(勝道)라고도 하며, 다시 나아가서 다른 이의 번뇌를 끊기 위하여, 혹은 만족하게 이미 끊어진 것을 관찰하는 도(道). 유식설에서는 수행과정을 아홉단계로 나누어 설하고 있는데, 『유가사지론』 권13(大 30 p.346c25-28)에서는 “一世間道, 二出世道, 三方便道, 四無間道, 五解脫道, 六勝進道, 七軟品道, 八中品道, 九上品道.”라고 하고,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권100 (大30 p.881a21-24)에서는 “一世間道, 二出世道, 三加行道, 四無間道, 五解脫道, 六勝進道, 七下品道, 八中品道, 九上品道.”라고 한다.

또 수도(修道)에 대하여 『대승아비달마집론(大乘阿毘達磨集論)』 권5(大31 p.683a27-29)에서는 다음과 같이 9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① 세간도(世間道, laukiko mārga), ② 출세간도(出世間道, lokottaramārga), ③ 탄도(歎道, mrdumārga), ④ 중도(中道, madhyamārga), ⑤ 상도(上道, dhimātro mārga), ⑥ 가행도(加行道, prayogamārga), ⑦ 무간도(無間道, ānantaryamārga), ⑧ 해탈도(解脫道, vimuktimārga), ⑨ 승진도(勝進道, viśesamārga).

『대승아비달마잡집론(大乘阿毘達磨雜集論)』 권10(大31 p.737c28-738a6)에서는 번뇌의 제거가 단계적으로 일어나는 모습이 서술되고 있다. 가행도에서는 번뇌가 부분적으로 제거되고, 무간도에서는 완전하게 제거된다. 그리고 모든 번뇌가 배제된 다음 단계인 승진도에서는 완전한 해탈의 수행과정에 들어가게 된다.

 

◎ 숙고[佛隨念]

‘부처님에 대한 숙고[佛隨念]’라 번역한 붓다누사띠(buddhānussati)는 buddha+anussati의 합성어이다. 그리고 아누사띠(anussati)는 다시 anu(~를 따라서)+sati(念, 알아차림)으로 분해된다. PED에서 ‘remembrance, recollection, thinking of, mindfulness.’라고 설명되듯이, 이 아누사띠는 ‘기억, 회상, 생각함, 주의 깊은 알아차림’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10가지 대상들에 대한 공덕이나 특성 등을 계속해서 생각하는 사마타 수행법 중 하나이다.「청정도론」(Vis.Ⅶ.1)에서는 다음과 같은 열 가지 숙고를 들고 있다.

(1) 부처님에 대한 숙고(佛隨念, buddhānussati)

(2) 법에 대한 숙고(法隨念, dhammānussati)

(3) 승가에 대한 숙고(僧隨念, sanghānussati)

(4) 계에 대한 숙고(戒隨念, sīlānussati)

(5) 보시에 대한 숙고(布施念, cāgānussati)

(6) 천인에 대한 숙고(天隨念, devatānussati)

(7) 죽음에 대한 숙고(死隨念, maraṇasati)

(8) 몸에 대한 알아차림(身隨念, kāyagatā-sati)

(9) 들숨날숨에 대한 알아차림(出入息念, ānāpānasati)

(10) 고요함에 대한 숙고(寂靜念, upasamānussati)

그리고 이러한 열 가지 숙고는 다음과 같은 7가지 사마타 수행대상(samatha-kammaṭṭhāna)에 속한다.

(1) 열 가지 까시나(kasiṇa): 땅,물, 불, 바람, 푸른색, 노란색,빨간색,흰색,광명,한정된 허공.

(2) 열 가지 더러움(不淨, asubha): 부었고, 검푸르고,굶고, 끊어지고,갈아먹고,흩어지고,난도질하여 뿔뿔이 흩어지고,피가 흐르고,벌레가 버 글거리고,해골이 됨.

(3) 열 가지 숙고(隨念, anussati): 부처님, 법, 승가, 계, 보시, 천인, 죽음, 몸, 들숨날숨, 고요함.

(4) 네 가지 무량(appamaññā): 자애(mettā), 연민(karuṇā), 더불어 기뻐함(muditā), 평온(upekkhā)의 사범주(四梵住, brahma-vihāra).

(5) 한 가지 인식(saññā): 음식을 혐오하는 인식(paṭikūla-saññā).

(6) 한 가지 분석(vavatthāna): 사대(四大)를 분석하는 것.

(7) 네 가지 무색(ārupa):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 

◎ 숙명지(宿命智, pubbenivasaanussati-ñ ā ṇa) 

전생을 아는 지혜(宿命智, pubbenivasaanussati-ñāṇa)는 육신통(六神通, abhiññā) 가운데 네 번째로써 사선(四禪)을 토대로 하여 일어난 지혜이기 때문에 원하기만 하면 수십만 생 이전 등도 기억할 수 있지만, 이 태어남을 아는 지혜(jātissara-ñāṇa)는 이러한 사선을 토대로 한 신통지가 아니기 때문에 제한적으로만 전생을 기억할 수 있는 지혜이다. 그러므로 사선정의 체험이 없이도 갑자기 생길 수도 있고 주석서에서는 추론(takka)에 의해서도 생길 수 있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이것은 경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으며 주석서와 복주서 문헌에 드물게 나타나고 있다.

◎ 순수 위빠사나 
수행자(sukkha-vipassanā-yānika)

순수 위빠사나 수행자(sukkha-vipassanā-yānika)란 초선(初禪) 이상의 근본집중(appanā-samādhi)의 힘을 빌리지 않고 곧바로 위빠사나를 닦는 수행자이다. 주석서와 복주서에서는 이러한 수행자를 선정의 습기가 없다는 의미로 마른 위빠사나 수행자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와 반대로 사마타 수행자(samatha-yānika)는 위빠사나 수행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근접집중이나 근본집중으로 구성된 사마타 집중을 계발한다.

 

◎ 술을 마심으로 인하여 생기는 과실

술을 마심으로 인하여 생기는 과실에 대하여 『사분율』 10권의 십과(十過)와 『대지도론(大智度論)』 권13에서는 삼십오실(三十五失)을 들고 있다. 『불설분별선악소기경(佛說分別善惡所起經)』은 음주삼십육실(飮酒三十六失)을 들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① 재물이 모이지 않고 돈을 쓰게 되며 

② 질병을 앓게 되고 

③ 술 때문에 싸우게 되고 

④ 남을 해치려는 마음이 늘어나고 

⑤ 성내는 마음이 늘어나고 

⑥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많아지고 

⑦ 지혜가 줄어들고 

⑧ 복덕이 늘지 않고

⑨ 복덕이 줄어들며 

⑩ 비밀을 지키지 못하고 

⑪ 사업을 이루지 못하고 

⑫ 걱정 고통이 많아지고

⑬ 눈, 귀 등 감각기관이 어두워지고 

⑭ 부모를 욕되게 하고 

 스님들을 존경치 않으며 

⑯ 어른들을 공경하지 않게 되고 

⑰ 부처님을 공경치 않게 되고 

⑱ 부처님 진리를 공경치 않으며 

⑲ 나쁜 벗들과 어울리고 

⑳ 좋은 친구들과 멀어지게 되고  음식을 버리는 일이 잦고  모습이 단정치 못하고  음욕이 불타듯 하고  사람들이 싫어하게 되고  쓸데없는 말과 웃음이 늘고  부모가 기뻐하지 않으며  친척들이 꺼리고 멀리하며  옳지 못한 일을 따르고  바른 진리를 멀리하고  어질고 착한사람을 공경하지 않고 잘못과 실수를 저지르게 되고 열반에서 멀어지며 미치광이 짓이 자꾸 늘게 되고 몸과 마음이 산란하고 나쁜 짓을 하고 게으르게 되어 죽고 나서는 큰 지옥에 떨어진다.

 

◎ 숫도다나(Suddodana)왕 
숫도다나(Suddodana)왕은 까삘라왓투(Kapilavatthu)의 석가족 왕국을 다스리던 왕으로, 마하마야(Mahā-māyā)를 정비로 두었다. 한역으로는 정반왕(淨飯王)이라 한다. 마하마야가 싯닷타 태자를 낳고서 7일 만에 죽어 도솔천에 태어나자 왕은 빠자빠띠(Pajāpatī)를 정비로 삼았다.(Mhv.ii.15f.; Dpv.iii.45; J.i.15, 등) 점성가들이 태자가 출가하여 부처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자 출가하지 못하게 하려고 세 개의 궁전을 지어 태자를 감각적 쾌락 속에 지내게 한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태자는 한밤 중에 성을 나와 출가하고 극단적인 고행을 닦는다. 천인들이 와서 왕에게 태자는 이미 죽었다고 이야기하였지만 왕은 자기 아들은 목표를 이루기 전에는 절대 죽지 않을 것이라고 하며 믿지 않았다.(J.i.67) 태자가 정각을 성취하였다는 소문을 전해들은 왕은 라자가하(Rājagaha)의 죽림정사(竹林精舍, Veḷuvana)로 전령을 보내어 까삘라왓투를 방문해줄 것을 요청한다. 하지만 전령들은 가자마자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출가하는 바람에 자신들의 본래 임무를 망각하고 말았다. 9번씩이나 이렇게 전령들이 돌아오지 않자 숫도다나왕은 깔루다이(kāḷudāyī)를 다시 보내어 부처님을 초청하였고, 부처님도 이에 응해 까삘라왓투를 방문하신다. 왕은 부처님께서 까삘라왓투의 저잣거리를 탁발 다니는 것을 보고는 부끄럽게 생각하자 부처님께서는 왕에게 탁발은 모든 부처님들의 관행이라고 말씀하셨고, 이로써 왕은 수다원과를 얻었다. 왕은 부처님을 왕궁으로 초대하여 공양을 베풀었고, 이 자리에서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사다함과를 얻었다.(J.i.90; cf. DhA.iii.164f) 그리고「마하담마빨라 자따까(Mahādhammapāla Jātaka)」(J.No.447)를 듣고 아나함과를 얻었다. 왕이 임종할 무렵에 부처님은 다시 오셔서 왕에게 법문을 설하셨고, 왕은 아라한과를 얻은 채 임종하였기 때문에 숲속에서 애써 정진할 필요가 없었다.(ThigA.141) ◎ 숫따니빠따(經集, Sutta-nipāta)「숫따니빠따(經集, Sutta-nipāta)」는 경(經)을 뜻하는 숫따(sutta)와 장(章), 절(節), 편(篇)을 뜻하는 니빠타(nipāta)의 합성어로 ‘경의 모음집’이란 뜻이다. 수 많은 경 가운데에서도 가장 초기에 이루어진 경이라는 점에서 그 중요성과 의미가 크다. 특히 제4장 ‘의품(義品)’와 제5장 ‘피안도품(彼岸道品)’은 삼장의 다른 곳에서도 인용이 되고 있고 다소 초기형태의 교법을 담고 있기 때문에 다른 장보다도 더 일찍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우다나(感興語, Udāna)」에 보면 소나(Soṇa) 장로가 의품을 암송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앙굿따라 니까야(Aṅguttara-Nikāya)에는 난다마따(nandamātā)라는 여성 재가신도가 피안도품을 낭송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두 장은 일찍부터 비구들과 재가신도들에게 높이 평가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부처님께서 「숫따니빠따」의 이 두 품에 대해 설명하신 일이 다섯 번 이상이나 된다. 이 두 품이 높이 평가되어 왔다는 사실 외에도, 많은 고어들과 간결한 고문체로 구성되어있는 것을 볼 때 아주 초기부터 숫따니빠따에 대한 주석이 이루어졌으며 그것이 나중에 경장에 포함되었음이 분명하다. 이 「숫따니빠따」는 모두 1,149수의 시를 70경에 정리, 이것을 ‘사품(蛇品, Uraga-vagga)’, ‘소품(小品, Cūḷa-vagga)’, ‘대품(大品, Mahā-vagga)’, ‘의품(義品, Aṭṭhaka-vagga)’, ’피안도품(彼岸道品, Pārāyaṇa-vagga)의 다섯 품으로 나누고 있다. 처음에는 각 장이 독립된 경으로 전해오다가 기원전 3세기를 전후하여 하나의 경집으로 형성된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닛데사(義釋, Niddesa)’라는 주석서는 숫따니빠따의 의품과 피안도품과 사품 「칵가위사나경(Khaggavisāṇa-sutta)」에 대한 사리뿟따(Sāriputta) 장로의 해석을 담은 것이다.

◎ 시방승(十方僧)
시방승(十方僧)이란 사방승(四方僧)이라고도 하며 사방으로 확대되는 승가를 말한다. 단순히 공간적으로 사방에 확대되는 것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미래[已來·當來]로 확대되어 시공을 초월한 일체 승가를 말한다. 이것은 현전승가의 기반이 되는 승가이다.

◎ 시왈리(Sīvalī) 존자
시왈리(Sīvalī) 존자는 꼴리야(Koliya)왕의 딸인 숩빠와사(Suppavāsā)의 아들이다. 그는 전생에 한 도시를 7년 동안이나 물샐틈없이 포위한 악업 때문에 무간지옥(無間地獄, Avicī-niraya)에 났었고,(Mil.357) 고타마 부처님 당시에 마지막 생을 받았을 때에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7년 7일을 있었고, 어머니는 7일 동안 극심한 산고(産苦)를 겪었다.(Ud.ii.8; AA.I.136 f; DhA.iv.192 f; ii.196; J.i.408 f) 어머니는 “죽기 전에 부처님께 보시를 하고 싶다.”고 말하며 부처님에게 보시를 바쳤다. 부처님께서는 그 보시를 받고 그녀를 축복해주셨다. 바로 그 순간 어머니는 순산을 할 수 있었다. 시왈리는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말을 하였다. 바로 그날 사리뿟따(Sāriputta) 존자가 시왈리를 데리고 가서 출가를 시켰는데 머리를 깎으면서 첫 번째 머리칼이 떨어질 때 수다원과를, 두 번째 머리칼이 떨어질 때 사다함과를, 세 번째 머리칼이 떨어질 때 아나함과를, 머리를 다 깎자 아라한과를 얻었다. 그는 천인들의 공양을 많이 받는 등 부처님을 제외하고는 비구들 가운데 가장 많은 공양을 받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공양을 얻는 자 가운데 으뜸이라고 하셨다.(A.i.24) 「법구경」주석서(DhA.iv.192f)에는 시왈리 존자가 전생에 지은 공덕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나온다. 옛날 위빠시(Vipassi)부처님 당시 시민들과 왕 사이에 누가 부처님과 승가에 가장 큰 보시를 할 수 있는지 경쟁을 벌인 적이 있었다. 시민들은 공양 올릴 물건들을 빠짐없이 갖추었지만 거기에 꿀이 빠진 것을 알고 그것을 구하러 여러 심부름꾼들에게 각기 충분한 돈을 주어 내보냈다. 심부름꾼 가운데 한 사람이 그 때 마침 방금 딴 벌집을 팔려고 시내로 들어오는 농부를 만나게 되었다. 심부름꾼은 그에게 벌집 한 개 값으로는 너무나 많은 자기 돈 모두를 주고라도 그 벌집을 사겠다고 제의하자 농부는 의아해 하면서 그 까닭을 물었다. 그 꿀은 시민들이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물의 마지막 품목인 만큼 그만한 값이 있노라 는 심부름꾼의 설명에 농부는 그 보시의 공덕을 자신이 얻을 수 있다면 돈을 받지 않고 거저 주겠다고 하였다. 시민들은 그만한 횡재를 쉽게 마다하는 농부의 신심에 감동하여, 보시의 공덕을 그에게 돌리기로 기꺼이 동의했다. 이 때 올린이 작은 공양 덕분에 그 농부는 그 후 거듭해서 천상에 태어났고 와라나시국의 왕자로 태어나 왕위를 물려받기도 했다. 마지막 생에 그는 시왈리 존자가 되어 부처님 제자로서 아라한과를 증득하였다. 그 후에도 그 벌집 보시는 계속해서 결실을 맺었다. 천인들은 부처님과 시왈리 존자를 포함한 오백 명의 스님들이 여러 날 인적 없는 지역을 지나는 동안 쉴 곳과 음식을 마련했던 것이다. 

◎ 신통(神通, abhijñā)

선정을 수행함으로써 얻는, 무애자재하고 초인간적인 부사의한 작용. 여기에 신족(神足)·천안(天眼)·천이(天耳)·타심(他心)·숙명(宿命)의 5신통이 있다. 또 누진통(漏盡通)을 합해서 6신통이라고도 한다. 『구사론』권27(大29 pp.142c-143b)에 의하면 6신통은 모두 혜(慧)를 본질로 하는데, 그 가운데 5신통은 사선(四禪)을 닦으면 증득할 수 있으므로 성자뿐 아니라 범부도 얻을 수 있으나, 누진통(漏盡通)은 오로지 성자만이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대지도론(大智度論)』 권28(大25 p.264a22-23)에 보살은 오통(五通), 부처님은 육통(六通)을 갖고 있다고 한다.

 

◎ 신통지(神通智,아빈냐 abhiññā)
‘신통지(神通智)’로 번역한 아빈냐(abhiññā)는 ① 신족통(神足通, iddhi-vidha), ② 천이통(天耳通, dibba-sota), ③ 타심통(他心通, paracitta-vijāhana), ④ 숙명통(宿命通, pubbenivāsa-anussati), ⑤ 천안통(天眼通, dibba-cakkhu)의 오신통(五神通)을 가리킨다. 여기에 위빠사나 수행으로 얻는 번뇌가 다한 경지인 ⑥ 누진통(漏盡通, āsavakkhaya-ñāṇa)을 합치면 육신통(六神通)이 되는데 보살은 깨달음을 얻은 단계가 아니기 때문에 ⑥ 누진통을 제외한 것이다. 그리고 오신통(五神通)을 나투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선(四禪)에 들어야 한다. 그래서 사선을 신통의 토대가 되는 선정(padaka-jhāna)이라고 한다.

① 신족통(神足通, iddhi-vidha)
그는 하나에서 여럿이 되고 여럿에서 하나가 되고,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고, 자유로운 공간처럼 장애 없이 담을 통과하고 성을 통과하고 산을 통과해 간다. 그는 물 속처럼 땅 속을 들어가고, 땅 위에서처럼 물 위에서도 빠지지 않고 걷는다. 그는는 날개 달린 새처럼 공중에서 앉은 채 날아다닌다. 그는 손으로 이처럼 큰 신비를 지니고 이처럼 큰 능력을 지닌 달과 해를 만지고 쓰다듬는다. 그는 범천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육신으로 영향력을 미친다.
② 천이통(天耳通, dibba-sota)
인간을 뛰어넘는 청정한 하늘귀로 멀고 가까운 하늘사람들과 인간의 두 가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능력이다.

③ 타심통(他心通, paracitta-vijāhana)

그는 나 자신의 마음으로 미루어 다른 뭇삶이나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분명히 안다. 탐욕으로 가득 찬 마음을 탐욕으로 가득 찬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탐욕에서 벗어난 마음을 탐욕에서 벗어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안다. 그는 성냄으로 가득 찬 마음을 성냄으로(화냄으로) 가득 찬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성냄에서 벗어난 마음을 성냄에서 벗어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안다. 그는 어리석음으로 가득 찬 마음을 어리석음으로 가득 찬 마음이라고 분명히 안다. 어리석음에서 벗어난 마음을 어리석음에서 벗어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안다. 그는 주의 깊은 마음을 주의 깊은 마음(통일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산만한 마음(흩어진 마음)을 산만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안다. 그는 계발된 마음을 계발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계발되지 않은 마음을 계발되지 않은 마음이라고 분명히 안다. 고귀한 마음을 고귀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고귀하지 못한 마음을 고귀하지 못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안다. 그는 삼매에 든 마음을 삼매에 든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삼매에 들지 못한 마음을 삼매에 들지 않은 마음을 삼매에 들지 않은 마음이라고 분명히 안다. 그는 해탈한 마음을 해탈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해탈되지 않은 마음을 해탈되지 않은 마음이라고 분명히 안다.

④ 숙명통(宿命通, pubbenivāsa-anussati)

그는 전생의 여러 가지 삶의 형태를 기억한다. 예를 들어 ‘한 번 태어나고 두 번 태어나고 세 번 태어나고 네 번 태어나고 다섯 번 태어나고 열 번 태어나고 스무 번 태어나고 서른 번 태어나고 마흔 번 태어나고 쉰 번 태어나고 백 번 태어나고 천 번 태어나고 십만 번 태어나고, 수많은 세계가 파괴되고 수많은 세계가 생성되고 수많은 세계가 파괴되고 생성되는 시간을 지나면서, 당시에 나는 이러한 이름과 이러한 성을 지니고 이러한 용모를 지니고 이러한 음식을 먹고 이러한 괴로움과 즐거움을 맛보고 이러한 목숨을 지녔었고 나는 그 곳에서 죽은 뒤에 나는 다른 곳에 태어났는데, 거기서 나는 이러한 이름과 이러한 성을 지니고 이러한 용모를 지니고 이러한 음식을 먹고 이러한 괴로움과 즐거움을 맛보고 이러한 목숨을 지녔었다. 나는 그 곳에서 죽은 뒤에 여기에 태어났다.’라고 여러 가지 삶의 형태를 구체적으로 상세히 기억한다.

⑤ 천안통(天眼通, dibba-cakkhu)

인간을 뛰어넘는 청정한 하늘눈으로 뭇삶을 관찰한다. 그는 죽거나 다시 태어나거나 천하거나 귀하거나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업보에 따라서 등장하는 뭇삶들을 본다. 예를 들어서 ‘어떤 뭇삶들은 신체적으로 악행을 저지르고 언어적으로 악행을 저지르고 정신적으로 악행을 저지르고 고귀한 님들을 비난하고 잘못된 견해를 지니고 잘못된 견해에 따라 행동했다. 그래서 그들은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났다. 그러나 다른 뭇삶들은 신체적으로 선행을 하고 언어적으로 선행을 하고 정신적으로 선행을 하고 고귀한 님들을 비난하지 않고 올바른 견해를 지니고 올바른 견해에 따라 행동했다. 그래서 그들은 육체가 파괴되고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났다.’라고 이와 같이 인간을 뛰어넘는 청정한 하늘눈으로 뭇삶들을 살펴보고 죽거나 다시 태어나거나, 천하거나 귀하거나 불행하거나 업보에 따라서 등장하는 뭇삶들에 관하여 분명히 알고 본다.
⑥ 누진통(漏盡通, āsavakkhaya-ñāṇa)
번뇌를 부수어, 번뇌 없이 마음에 의한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 곧바로 알고 깨달아 성취한다.

◎ 신통의 기초(토대. Cattro inddhipada)

한문으로는 사신족(四神足)이라고 한다. 네가지 수행에서 표현되고 있는 '의도적 노력'이란 '올바른 노력과 정진'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바른 집중(삼매)속에는 탁월한 삼매를 얻기 위한 의욕.정진.마음(의식).사유가 건전한 마음을 향한 올바른 노력과 더불어 공존하는 것이다.
1) 의욕에 바탕을 둔 삼매(집중)와 그 의도적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신통의 기초를 닦는다2) 정진에 바탕을 둔 삼매와 그 의도적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신통의 기초를 닦는다3) 마음에 바탕을 둔 삼매와 그 의도적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신통의 기초를 닦는다4) 사유(지혜)에 바탕을 둔 삼매와 그 의도적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신통의 기초를 닦는다
원래 신통(iddhi,sk,rddhi)라는 말은 '성공,성장,번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인도의 요가를 위시한 명상수행의 전통 속에서는 명상의 결과로 얻어지는 특별한 성취나 놀라운 능력을 말한다. 그러나 인도에서 그것은 초자연적인 기적이라기보다는 정신의 집중을 통해 얻어지는 자연적이고도 인과적인 수행의 산물로 보고 있다. 
빠알리어 니까야를 보면 붓다께서 이러한 놀라운 능력의 영적인 성취를 발휘했을뿐만 아니라 그러한 능력에 능숙한 제자를 칭찬하고 있다. 붓다께서 부정한 것을 이러한 놀라운 능력의 영적인 성취가 아니라 신통술을 불건전한 마음으로 잘못된 목적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붓다는 수행승들에게 이러한 신통술을 보여 재가신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을 금하고 신통술이 있다고 해서 완전한 지혜를 성취했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고 했다. 불교에서 진정한 기적은 악을 극복하고 선을 구현시키는 '가르침의 기적(anusasanipatihariya)'이다.

◎ 실재 
‘실재’라고 번역한 빠라맛타(parama-attha)는 빠라맛타 담마(paramattha-dhamma)라고도 하는데, parama(최고의, 최상의)+attha(이치, 뜻)로 분석된다. 그러므로 ‘최고의 이치’라는 뜻이다. 중국에서는 승의(勝義)라고 직역했고, 영어권에서는 ultimate realitiy로 번역한다. 이러한 궁극적 실재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불교에서 말하는 법(法, dhamma)의 의미를 살펴봐야 한다. 빨리 경에 나타나는 담마(dhamma)의 의미는 크게 둘로 나누어진다.
(1) 부처님의 가르침(Buddha-dhamma)으로서의 법
불·법·승 삼보三寶에 포함되는 법은 부처님의 가르침으로서의 법이다. 영어권에서는 이를 고유명사 취급을 해서 Dhamma로 표기한다.
(2) 존재일반(sabbe-dhamma)으로서의 법
영어권에서는 이를 일반명사 취급하여서 dhamma로 표기한다. 이 법은 정신과 물질의 모든 현상을 말하는데 궁극적 실재(勝義, paramattha)와 개념(施設, paññātti)으로 나뉘며 일반적으로 법은 이 궁극적 실재를 뜻한다.
➀ 궁극적 실재(勝義, paramattha)
일반적으로 법은 이 궁극적 실재를 뜻하며 오온五蘊, 12처十二處, 18계十八界, 사성제四聖諦, 팔정도八正道, 12연기十二緣起, 선법善法, 불선법不善法 등이다. 그리고 이 궁극적 실재로서의 법을 ‘고유의 특성(自性,sabhāva)을 가진 것’으로 정의한다. 여기서 고유의 특성이란, 특정 법이 가지는 자신에게만 있는 고유한 특성을 말한다. 예를 들면, 탐욕(lobha)이라는 마음의 작용을 탐욕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대상을 탐하고 거머쥐는 탐욕만의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성냄(dosa)이라는 심리현상을 성냄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상에 대해서 분노하고 적개하고 밀쳐내는 등의 성냄만의 고유 성질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탐욕이라는 법과 성냄이라는 법은 그 성질이 판이하게 다르다. 그것은 탐욕이 가지는 거머쥐는 성질과 성냄이 가지는 밀쳐내는 성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탐욕과 성냄이 다른 것은 그 고유한 특성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아비담마는 설명한다.
➁ 개념(施設, paññātti)
빤냣띠(paññātti)는 아비담마의 근본주제가 아닌 세속적인 ‘명칭, 개념, 서술, 술어, 용어’ 등을 의미한다. 중국에서 가설(假說), 방편설(方便說)이란 의미의 시설(施說)로 번역하였고, 영어권에서는 보통 concept라고 한다. 이러한 개념에는 두 가지가 있다.  
(1) 뜻으로서의 개념(意施設,attha-paññātti)
개념들이 전달하는 뜻을 말한다. 예를 들면 책상, 의자 등의 용어나 명칭을 뜻한다.
(2) 이름으로서의 개념(名施設,nāma-paññātti)
뜻으로서의 개념(意施設,attha-paññātti)을 통해 전달되는 대상이나 사상을 뜻한다. 이를 삿다 빤냣띠(sadda-paññatti)라고도 한다. 

 

◎ 십이두다(十二杜多)

십이두다(十二杜多)는 십이두타(十二頭陀)를 말한다. 두타(頭陀, dhūta)는 두수(抖擻)·두수(抖藪)·두책(抖拺)·수치(修治)·기제(棄除)·사태(沙汰)·완세(浣洗)·분탄(紛彈)·요진(搖振)·제견(除見)·기(棄)·동(動) 등으로 의역한다. 또는 두타행(頭陀行)·두타사(頭陀事)·두타공덕(頭陀功德, dhūta-guna)이라고도 한다. 범어의 원래 뜻은 흔들어 떨어 버린다는 뜻을 가진 동사 어근 √dhū 에서 파생한 것으로 흔들리다. 동요되다는 뜻이며, 심신에 묻은 때를 떨어 없애 버린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곧 마음을 닦아 의·식·주에 대한 탐욕을 떨어버리는 수행을 가리킨다. 두타는 일반적으로 열두 가지의 수행법으로 이루어져 있어 십이두타라고 부르기도 한다. 십이두타에 

① 아란야에 머무는 것[在阿蘭若處] 

② 늘 걸식을 행하는 것[常行乞食] 

③ 차례대로 걸식하는 것[次第乞食] 

④ 한 끼만 먹은것[受一食法] 

⑤ 과식하지 않는 것[節量食] 

⑥ 점심을 먹고 나면 더 이상 먹지 않는 것[中後不得飮漿] 

⑦ 누더기를 입는 것[著幣衲衣] 

⑧ 삼의만을 입는 것[但三衣] 

⑨ 무덤가에 머무는 것[塚間住] 

⑩ 나무 밑에서 쉬는 것[樹下止]

⑪ 노지에 앉는 것[露地坐] 

⑫ 눕지 앉는 것[但坐不臥]을 말한다.

 

◎ 십변처(十徧處, daśa-krtsna-āyatanāni)

십변처(十徧處, daśa-krtsna-āyatanāni)란 지(地)·수(水)·화(火)·풍(風)·청(靑)·황(黃)·적(赤)·백(白)·공(空)·식(識)의 열 가지가 온갖 곳에 두루 한다는 뜻이다.


◎ 성죄(性罪)

살(殺)·도(盜)·음(婬)·망(妄)의 행위는 부처님이 제지(制止)에 앞서서 그 자체가 죄이므로 이것을 ‘성죄(性罪)’라고 한다. 음주(飮酒)·벌목(筏木) 등은 행위 그 자체가 죄는 아니나, 그 행위로 인하여 마침내 성죄를 불러오는 결과를 가져 오는 행위이며, 이것은 부처님이 제지로 인하여 범했을 때에 비로소 죄가 되는 것이다. 분 바르고 노래하고, 춤추는 것, 남녀의 교제 등은 다 차죄(遮罪)에 해당한다. 『섭대승론(攝大乘論)』 권下(大31 p.146b16-20)에 “공통되거나 공통되지 않는 계율의 뛰어남이란, 보살은 성죄가 현행하지 않기 때문에 성문과 공통적으로 서로 비슷하다. 차죄는 현행하기 때문에 성문과 공통하지 않다. 이 계율에서 성문은 범하는 것이나, 보살은 범하는 것이 아닌 것이 있다. 보살은 신체·말·마음의 계율을 갖추나, 성문은 다만 신체와 말의 두 계율만 있을 뿐이다.

共不共學處殊勝者, 謂諸菩薩一切性罪, 不現行故與聲聞共相. 似遮罪有現行故與彼不共. 於此學處有聲聞犯菩薩不犯. 有菩薩犯聲聞不犯, 菩薩具有身語心戒, 聲聞唯有身語二戒.”

 

◎ 삼무루근(三無漏根. 세가지 무루의 근)

삼무루근이란 '완전한 지혜를 이루고자 하는 이의 근(anannatannassamitindriya)'. '완전한 지혜에 이른 이의 근(annindriyassa)'. '완전한 지혜를 이미 갖춘 이의 근(annatavindriyassa)' 은 무루(anasava)에 속하는 세 근으로, 이를 통칭하여 '삼무루근'이라고 한다. 이들 세 가지 근은 더러움을 떠난 '거룩한 법'을 내는데 강한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근(indriya)'이라 불리운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마음의 근.즐거움의 근.기쁨의 근. 평정의 근. 믿음의 근. 정진의 근. 마음챙김의 근. 삼매의 근. 혜의 근 등의 아홉 근이 진리를 보는 경지에 속하는 흐름에 나아가는 경지(예류도)에 있을 때를 '완전한 지혜를 이루고자 하는 이의 근'이라 한다.

다음으로 닦아 나가는 경지에 속한 것으로, 흐름에 들어선 경지(일래과). 한번 돌아옴에 나아가는 경지(일래도). 한번 돌아옴에 들어선 경지(일래과). 돌아오지 않음에 나아가는 경지(불환도). 돌아오지 않음에 들어선 경지(불환과). 아라한에 나아가는 경지(아라한도)에 있을 때를 '완전한 지혜에 이른 이의 근'이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배움을 마친 경지에 속한 아라한에 들어선 경지(아라한과)에 도달했을 때 '완전한 지혜를 이미 갖춘 이의 근'이라 한다.

 

◎ 심(心, citta)

심(心, citta)은 제8식으로서 아뢰야식(阿賴耶識, ālayavijñāna) 또는 아리야식이라고 한다. 아뢰야식은 현행하는 번뇌가 그의 잠재력을 저장해 놓은 창고라는 의미에서 장식(藏識)이나 택식(宅識)이라고 번역하거나, 또한 일체의 종자를 가진 식이라는 의미에서 일체종자식, 과거업의 과보의 담당자라는 의미에서 이숙식으로도 불린다. 아뢰야식은 마나스에 의해 자아로서 집착하나 결코 자아가 아니다. 아뢰야식 자체도 항시 조건에 따라 생멸하는 식의 흐름으로서, 비록 상대적으로 지속적 존재라는 인상을 준다 하더라도 결코 시간적 경과 속에서 불변하는 동일자로서 간주될 수 없는 것이다.

 

◎ 심사(尋伺)

심사(尋伺)는 심(尋, vitarka)과 사(伺, vicāra)로 『구사론』에 의하면 심소유법(心所有法) 가운데 부정지법(不定地法)에 속한다. 심(尋)은 대상을 거시적으로 고찰하는 것에 대해서, 사(伺)는 대상을 미시적으로 고찰하는 것이다. 구역에는 등관심사(覺觀尋伺)라고 한다. 『성유식론』에서는 사부정(四不定, 悔·睡眠·尋·伺)에 속한다.

 

◎ 심장토대(hadaya-vatthu)
아비담마에 의하면 안식(眼識)과 이식(耳識)과 비식(鼻識)과 설식(舌識)과 신식(身識)은 각각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을 토대로 하여 일어난다. 그러나 이러한 감각기관을 토대로 하지 않는 마음과 의식(意識)은 모두 심장토대(hadaya-vatthu)의 물질을 토대로 해서 일어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 심장토대는 심장 속에 있는 피의 반만큼의 양에 해당하는 피라고 주석서는 설명하고 있으므로 엄밀히 말하면 심장자체는 아니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 현대 서양의 아비담마 학자들은 이견을 제시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빨리 삼장에는 심장토대라는 말은 나타나지 않고 주석서 문헌에서부터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과 의식(意識)은 심장토대를 의지해서 일어난다는 것은 아비담마의 정설이다. 그리고 뇌는 상좌부 불교에서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한 기관이다.

◎ 심일경성(心一境性, citta-eka-agratā)
마음이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여 정(定)에 드는 것.


◎ 심찰나(心刹那) 

‘심찰나(心刹那)’로 번역한 원어는 찟따까나(citta-kkhaṇa)는 아비담마에서 마음의 수명을 일컫는 전문술어이다. 영어로는 thought-moment라고 한다. 이 하나의 심찰나는 너무나 순간적인 기간이라서 주석서들은 번개가 번쩍이고 눈 한번 깜빡이는 순간에도 수많은 심찰나가 흘러갈 수 있다고 설하고 있다. 이 심찰나는 다시 일어남(生, uppāda)과 머묾(住, ṭhiti)과 무너짐(壞, bhaṅaga)의 세 순간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극미의 심찰나에 마음은 일어나서 순간적인 자기의 역할을 수행하고 소멸한다. 그리고 이 마음은 바로 다음에 일어나는 마음의 조건이 되어 그 조건의 힘(paccaya-satti)에 따라서 다음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다. 심찰나는 이렇게 상속(santati)되어서 마음의 흐름은 강물의 흐름처럼 끊임없이 흘러간다.

 

◎ 삼제(三際)

삼제(三際)는 삼세(三世)의 다른 이름으로 횡변시방 수궁삼제(橫遍時方 竪窮三際)이다. 횡(橫)은 공간적으로 시방에 두루 한 것이고, 수(竪)는 시간적으로 과거 현재 미래까지 다한다는 의미이다.

 

◎ 십선지(十禪支)

십선지(十禪支)는 심(尋)·사(伺)·희(喜)·락(樂)·정(定)·내등정(內等淨)·사(捨)·념(念)·정지(正知)·사수(捨受)인데 초기불교나 부파불교 등에서는 선(禪)을 십선지(十禪支)의 유무에 의해서 4단계로 나누어 사선(四禪)이라고 한다. 『구사론』 권28(大29 p.146c2-18)의 십팔정려지(十八靜慮支)를 예로 들자면 초선정에 심(尋), 사(捨), 희(喜), 락(樂), 등지(等持)의 오지(五支)가 있고, 제2선정에 내등정(內等淨), 희(喜), 락(樂), 등지(等持)의 사지(四支)가 있고, 제3선정에 행사(行捨), 정념(正念) 정혜(正慧), 수락(受樂), 등지(等持)의 오지(五支)가 있고, 제4선정에 행사청정(行捨淸淨), 념청정(念淸淨), 비고락수(非苦樂受), 등지(等持)의 사지(四支)가 있다. 이것을 모두 합하여 십팔지(十八支)라고 한다. 그리고 『유가사지론』 권28(大30 p.330c14-19)에서는 초선정에 심(尋), 사(伺), (喜), 락(樂), 심일경성(心一境性)의 오지(五支)가 있고, 제2선정에 내등정(內等淨), 희(喜), 락(樂), 심일경성(心一境性)의 사지(四支)가 있고, 제3선정에 사(捨), 념(念), 정지(正知), 락(樂), 심일경성(心一境性)의 오지(五支)가 있고, 제4선정에 사청정(捨淸淨), 념청정(念淸淨),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 심일경성(心一境性)이 있다고 한다. 또 『유가사지론』 권11(大30 pp.330c14-331a4) 등에도 보인다.

 

◎ 십근진색(十根塵色)

십근진색(十根塵色)은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과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이다.

 

◎ 십인(十忍)

십인(十忍)이란 보살이 감내(堪耐)해서 얻은 10종의 안주심(安住心)이다. 『화엄경(華嚴經)』 권28(大9 p.580c6-10)의 「십인품(十忍品)」에는 수순음성인(隨順音聲忍), 순인(順忍), 무생법인(無生法忍), 여환인(如幻忍), 여염인(如焰忍), 여몽인(如夢忍), 여향인(如響忍), 여뢰인(如雷忍), 여화인(如化忍), 여허공인(如虛空忍)의 열 가지 인(忍)이 보인다.

 

◎ 십악(十惡)

신구의(身口意)의 삼업으로 짓는 살생(殺生)·투도(偸盜)·사음(邪淫)·망어(妄語)·양설(兩舌)·악구(惡口)·기어(綺語)·탐욕(貪欲)·진에(瞋恚)·사견(邪見)을 말한다. 『섭대승론본(攝大乘論本)』下권 「증상심학분(增上心學分)」8(大31 p.146b28) “甚深殊勝者, 謂諸菩薩由是品類方便善巧, 行殺生等十種作業,而無有罪生無量福, 速證無上正等菩提.”

 

◎ 삼유(三有, trayo-bhavāh)

삼유(三有, trayo-bhavāh)는 중생이 생사에 윤회하는 미혹의 생존계인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의 삼계(三界)를 오가는 중생을 총칭하는 말로 삼유생사(三有生死)라고도 한다. 그 중에서 색계와 무색계는 욕계보다 위에 있으므로 상이계(上二界) 또는 상계(上界)라고 한다.

 

◎ 삼륜(三輪)

삼륜(三輪)이란 보시할 때에 공관(空觀)에 머물러 시자(施者)와 수자(受者)와 시물(施物)의 세 가지에 집착하지 않는 것으로 삼륜체공(三輪體空)·삼륜청정(三輪淸淨)·삼사개공(三事皆空)이라고 하며 주로 『반야경』에 설해져 있다.

 

◎ 삼신덕(三身德)

삼신덕(三身德)이란 불과에 갖추어진 삼덕(三德). 지덕(智德)은 불타가 모든 입장에서 본 지혜를 두루 갖추고 온갖 것을 투철하게 보는 덕. 단덕(斷德)은 모든 번뇌와 혹업을 없애버리는 덕. 은덕(恩德)은 중생을 구원하고자 원하는 힘에 의해서 혜택을 주는 것을 말함. 이 삼덕(三德)을 법신(法身)·보신(報身)·응신(應身)의 삼신(三身)에 배대하고, 또 지(智)와 단(斷)의 이덕(二德)을 자리(自利)외 자행(自行)·자각(自覺)에 배대하며, 은덕(恩德)을 이타(利他)·화타(化他)·각타(覺他)에 배대한다.


◎ 삼취계(三聚戒)

삼취계(三聚戒)는 삼취정계(三聚淨戒) 또는 삼종정계(三種淨戒)라고도 한다. 

삼취정계는 초기불교에서 부파불교에 걸친 전통적인 교단에서 재가신자는 삼귀·5계를 받고, 사미·사미니는 10계를 받고, 정학녀는 6계, 비구·비구니는 구족계를 받는 것으로 정해져 있다. 성문계가 율의계(律儀戒) 뿐인 것에 대하여, 보살계는 섭선법계(攝善法戒)와 요익유정계(饒益有情戒)가 첨가된다. 이 두 가지는 적극적으로 선(善)을 행하는 계의 입장이다. 『화엄경』 권27(大10 p.149b22-c8)의 제2 이구지(離垢地)에 삼취정계라는 말이 있다. “항상 스스로 삼종정계에 안주하며 또한 중생에게 이와 같이 안주하게 한다. … 이것을 보살마 하살이 삼취정계에 머물러 영원히 살업(殺業)을 끊은 선근회향이라 한다. 常自安住三種淨戒, 亦令衆生如是安住, … 是爲菩薩摩訶薩, 住三聚淨戒永斷殺.” 그리

고 『유가사지론』 권40(大30 p.511a14-20)에 “즉 재가와 출가의 둘로 나눈 정계(淨戒)를 간략히 세 가지로 요약하여 설하면 ① 율의계 ② 섭선법계 ③ 요익유정계라고 한다. 율의계란 이른바 모든 보살이 받은 칠중(七衆)의 별해탈율의이니 즉 이것은 비구계·비구니계·정학계·근책계·근책녀개·근사남계·근사녀계이다. 이와 같은 7종을 의지하여 재가·출가로 이분하니 마땅히 이와 같이 알지니

이것을 보살의 율의계라고 한다. 卽依此, 在家出家二分淨戒, 略說三種, 一律儀戒, 二攝善法戒, 三饒益有情戒. 律儀戒者, 謂諸菩薩所受, 七衆別解脫律儀, 卽是苾芻戒, 苾芻尼戒, 正學戒, 勤策男戒, 勤策女戒, 近事男戒, 近事女戒. 如是七種依止, 在家出家二分, 如應當知, 是名菩薩律儀.”라고 하였다.

 

◎ 삼현(三賢)과 십성(十聖)

삼현(三賢)과 십성(十聖)이란 불도를 수행하는 사람 가운데 견도(見道) 이상에 도달한 사람을 성(聖)이라 하고, 아직 견도에 도달하지 않았으나 악을 여읜 사람을 현(賢)이라 한다. 『구사론』 23권(大29 p.120c)은 칠현칠성(七賢七聖)을 설한다.

칠현(七賢)은 칠가행(七加行)이라고도 한다. 삼현(三賢)에 오정심(五停心)·별상념주(別相念住)·총상념주(總相念住)가 있고, 사선근(四善根)에 난(煖)·정(頂)·인(忍)·세제일법(世第一法)이 있다. 칠성(七聖)은 수신행(隨信行)·수법행(隨法行)·신해(信解)·견지(見至)·신증(身證)·혜해탈(慧解脫)·구해탈(俱解脫)이 있다. 대승에서는 삼현 십성(三賢 十聖)을 주장한다. 삼현은 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回向)이다. 십성은 초지에서 제십지까지의 보살이다.

 

◎ 상락아정(常樂我淨, nitya-sukha-ātma-śubha) 

① 상(常)은 범부(凡夫)가 자기와 세계의 진실상(眞實相)을 알지 못하여 영원히 존재한다고 여기는 것. 

② 락(樂)은 즐겁다고 여기는 것. 

③ 아(我)는 항상하는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④ 정(淨)은 청정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이와 같이 네 가지 뒤바뀐 생각[四顚倒]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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