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불교를 어떻게 대해야 하나?
이런 질문이나 의문은 참 쉽고도 어려운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지혜롭게 깊이 생각해 본다면 붓다께서는 이미 불교를 어떻게 대하고 접할 것인가에 대해서 명쾌하게 밝혀 놓은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상윳따니까야(상응부 경전) 55번째 주제는 "예류자 상윳따(sotapatti samyutta)" 로써 불교의 믿음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괄호안은 각묵스님의 상윳따 니까야 번역이다. 한문 상응부와 대등소이하다.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법에 대해 파괴됨(오염.잘못.오해)이 없는 믿음을 성취한다. 법은 세존에 의해 잘 설해졌다. 즉 이 법은 현재에서 증명되는 것이며, 때를 가리지 않고 과보가 있는 것이며,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며, 잘 열반으로 인도하는 것이며, 지혜있는 자가 각기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그는 ‘법은 세존에 의해서 잘 설해졌고,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시간이 걸리지 않고, 와서 보라는 것이고, 향상으로 인도하고, 지자들이 각자 알아야 하는 것이다.’라고 법에 흔들림 없는 청정한 믿음을 지닌다)."
1. 현재에서 증명 되는 것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것)
2. 때를 가리지 않고 과보가 있는 것 (시간이 걸리지 않고)
3.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와서 보라는 것)
4. 잘 열반으로 인도하는 것(향상으로 인도하는 것)
5. 지혜있는 사람이 각기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것(지자들이 각자 알아야 하는 것)
이중에서 1번항목은 한문에서는 현견(現見)이라고 했듯이 현재에서 볼 수 있고 증명되는 것이란 어떤 의미일까? 한마디로 말하면 붓다의 가르침은 철두철미한 현실적인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붓다가 '인생은 고(苦)이다'라고 했을 때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우리들 삶의 현실이다. 그리고 연기를 이야기할 때도 잘 사유해 보면 모든 만물이 연기로 법칙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윤회도 마찬가지이다. 조그만 깊이 생각해 본다면 윤회의 과보는 늘 우리 곁에 있다. 왜 우리는 각자 다른 모습과 환경에서 태어날까? 를 생각해 본다면 이건 환생을 이야기하는 수많은 실례를 들지 않더라도 그러한 이유는 과거의 업의 과보라는 설명으로 밖에는 이해가 되질 않는다. 이처럼 붓다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모두다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그것이 진실임을 지금 바로 이 시각에 볼 수 있고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에 붓다께서 환상이나 상상속에서 말씀을 하시거나 그분의 말씀이 상상속에서나 그려볼 수 있는 것들이라면 우리는 그러한 말씀의 사실 여부를 눈으로 보고 현재에서 증명할 수 없을 것이다. 붓다의 모든 제자들은 현실에서 가르침이 사실임을 보고 믿음으로 귀의했던 것이다. 다시말해서 '구름신이 딸을 둘이나 두었다'는 말에 믿음을 낸 것이 아니라 '죽지 않은 사람이 있는 집에 가서 쌀 한톨 구해와 봐라'라는 현실에서 보고 증명되는 가르침에 믿음을 냈던 것이다.
붓다께서 가장 경계했던 부분이 맹신이다. 맹신은 지혜가 없는 믿음에 바탕을 둔다. 무조건 믿는다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다. 깔라마 경에서 붓다는 믿음을 내야하는 조건과 믿음을 버려야 하는 조건을 분명히 밝혀 놓았다. 붓다는 와서 보고 스스로 생각해서 그것이 자신의 고로부터 해방되지 않고 오히려 혼란과 망상만 가중시키는 것이라면 믿지 말라고 했다. 대신에 가르침을 보고 나서 그것이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고로부터 해방이 되는 것이라면 믿으라고 했다. 철저히 현실에 바탕을 두고 그 현실에서 어긋나면 믿지 말라는 것이다.
불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늘 말씀드렸다. 하나는 윤리적 측면이고 또다른 하나는 심리학적(철학적)측면이다. 어느 것 하나 간과하면 절름발이가 된다. 절름발이는 올바른 불교가 아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불교를 또다른 관점인 불교학과 불교철학이라는 두 가지 측면으로도 볼 수 있다. 따라서 불교를 접할 때는 불교학뿐만 아니라 불교철학적인 관점도 두루 갖추는 혜안이 필요하다. 불교철학은 불교라는 종교를 비판적이고 합리적으로 해명하려는 태도로 시작하여, 종교성에 제한되지 않고 불교가 지향하는 가치와 이론 및 수행의 체계에서 드러나는 전제와 주장을 근본적으로 검토하려는 학문적 시도를 가리키는 말로 정의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불교학과 불교철학은 그 토대가 다르다.
불교학이 불교경전에서 발견되는 가르침과 실천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풀어내거나 사상사적 발단과 전개를 드러내는데 주력한다면, 불교철학은 붓다가 말한 내용의 의미는 물론 그의의가 지금 여기에서도 여전히 유효한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부당한 전제를 허용하지 않고 끝까지 의심해 보아 바람직한 의미와 의의가 과연 있는가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이런 양 측면의 접근을 위해서 흔히들 과학적 검증의 잣대를 들이댄다. 문제는 이러한 과학적 검증이 잘못되었거나 또는 과학적 검증결과 불교가 엉터리라는 어떠한 결론도 내린 과학자는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불교만큼 과학적인 종교도 없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게 된다.
불교학과 불교철학이라는 두 가지 측면이 없었다면 불교라는 종교가 지금까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은 분명하다. 세상이 변하고 발전하듯이 불교의 가르침과 사상도 그에 걸맞게 변하고 발전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늘 말하는 것이지만 변화와 변질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변화는 어디에서나 필요한 것이지만 변질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을 새롭게 해석하고 새로운 단어를 쓴다고 하여 이것이 변질이라고 주장한다면 이건 어리석은 자의 주장일 뿐이다.
불교도 처음 시작이후 붓다 사후까지 45년동안 많은 변화를 겪었다. 처음에는 없었으나 상황에 따라 계와 율이 제정되고, 승가가 탄생하고, 여성에게도 출가를 허용했다. 이 모든게 변화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붓다 사후 3개월후에 칠엽굴에서 첫 경전 결집이 있은 후에 여러번 경전 결집이 있었다. 그때마다 내용이 수정되고 가감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3차 경전결집에는 2차 경전결집에는 없었던 논장까지 추가되어 율.경.론이라는 삼장이 확립되기도 했다. 즉 끊임없이 경전이 새롭게 씌여지고 수정되어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18-20개의 부파들은 각자의 주장을 담은 빠알리어 경전을 전승하여 왔다는 것은 거짓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1차에서 6차에 이르는 경전결집이 칠엽굴에서 있었던 1차경전결집의 내용을 토시하나 글자하나 틀리지 않게 했다고 믿는다면 이건 어리석음의 극치이다. 수정 보완 가감은 변화이지 변질이 아니다. 경전결집이 여러차례 이루어져 왔다고 하여 무상 무아 고의 가르침이 변한게 아니다. 붓다의 가르침이 훼손되거나 전혀 다른 색깔로 변질이 된 것은 없다. 경전에 나오는 수많은 하늘나라 천신들은 모두다 당시 인도의 토속신앙에 있던 인도의 신들이고 브라만(힌두교)의 신들이다. 이것을 불교에서 차용해서 변용했을 뿐이다. 그렇듯 인도의 신을 우리나라의 달걀귀신이나 성황당 귀신으로 각색한다고 하여 이를 불교의 변질이라고 본다면 이는 그 사람의 지적 능력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경전에 나오는 하늘나라 천신 제석천 마라(악마)등은 ?
이 경전속에 나오는 이야기를 믿는다고 불자이고 광신자이고 믿지 않는다고 비불자이고 현명한 사람이라는 식의 단순한 이분법적 논리는 타당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한가지 짚고 넘어갈 일은 경전에 나와 있기에 삼십삼천이 있고 악마도 있다는 식의 단세포적인 믿음은 곧 맹신이라는 것이다. 전에도 몇번이고 질문을 공개적으로 연꽃에게 하였지만 '7년동안 임신하고 고통을 받았다'라는 경전문구가 있다. 과연 이게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그럼 현실적으로 증명되지 않는다고 붓다께서 거짓말을 했다는 것인가? 경전에는 '하늘에 천둥이 울리고 십만세계가 흔들렸느니 땅이 흔들렸다'라는 문구가 여러곳에 등장한다. 이말이 사실이라면 십만세계는 그만두고라도 붓다의 근처에 있던 수많은 가옥이 파괴되어 중생들이 깔려서 죽었을 것이다. 혜천스님의 설법에 보면 361번 '마음과 물질'이라는 부분이 있다. 스님은 이 설법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있다.
"그동안 불교에서 내세우던 삼십삼천의 우주관은 이미 그런 우주는 현실의 우주에는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 우주는 상상했던 우주였듯이 상상하고 생각하는 세계와 현실의 경험 세계는 차이가 있기에 붓다께서 법은 현실에서 증명되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재미 있는 것은 각종교의 우주관은 깨어진지 오래 되었음에도 상상의 세계속에 사는 현실경험 세계의 인간이 많다는 사실이 기이하기에 내 자신이 이방인처럼 느껴집니다. 언제나 상상하는 세계와 경험의 세계가 차이가 있음을 인식해 더 좋은 사회를 만들려고 모두가 노력하는 그런 시대가 올까요?"
현존하는 팔리어 경전은
사실 나는 팔리어 경전의 전통성이나 그 권위에 대해서 비판적인 말을 쓴 적이 없다. 왜냐하면 그런 말을 하게 되면 초기불교를 접하는 많은 분들에게 실망을 주거나 오해나 혼란이 오지 않을까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단순한 즉 조금만 불교역사를 공부해 보면 알 수 있는 수준에서 팔리어 경전에 대해서 또다른 시각을 전달하고자 한다.
현존하는 팔리어 경전은 스리랑카에 전해지는 남방상좌부에 속한 것이다. 불교는 붓다 사후 100년경에 최초의 분열이 있은 후 18~20여개의 부파로 나뉘어 붓다의 가르침을 각 부파별로 해석하는 부파불교 시대에 접어들면서 각 부파는 율과 경을 제각각 따로 전하였다고한다. 이 사실이 거짓으로 판명되지 않는한, 현존하는<5부 니까야>는 한 부파의 ‘불교’ 해석만을 전하고 있는 데 지나지 않는다. 물론 현존하는 5부 니까야가 3차경전결집에서 통합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이후에도 부파불교는 계속하여 인도대륙에서 13세기까지 활동을 했었고 또한 대승불교 탄생 이후에도 부파불교의 세력이 대승불교보다 컸다고 당시의 문헌은 전하고 있다. 다시말해서 각 부파는 여전히 ‘불교’라는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따로 전승하던 경전의 내용이 완전히 다를 리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100%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현존하는 빠알리어 경전을 소의경전으로 삼는 남방불교는 자신들의 경전이 100% 완벽하다거나 내것이 전부라는 완벽주의론을 내세우지 않는다. 현존하는 빠알리어 경전이나 텍스트는 부파불교의 산물인 상좌부의 불교해석이라는 프리즘을 거친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다만 그 전통과 권위를 내세우는 것이다. 즉 빠알리어 경전과 비교하거나 대응할만한 또다른 경전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빠알리어 경전에 나와있는 열반에 이르는 길이 아닌 또다른 제3의 길을 기록해 놓은 경전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전통과 권위를 부여하는 것일 뿐이다.
빠알리어 경전이 한국에 소개되고 한글로 번역이 되면서 한편으로는 한역아함경을 무시하는 묘한 경향이 초기불교에 있는 것을 보게되는데 이는 실로 슬픈 일이다. 잘 알겠지만 팔리어 경전과 아함경은 상당부분은 같고 상당부분은 틀리다. 그렇다고 하여 단순하게 팔리어경전과 비교하여 팔리어 경전과 다른 아함경은 엉터리라는 인식은 실로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아함경은 상좌부 불교가 전승해 왔던 경전과 달리 설일체유부등의 또다른 부파가 전승하여 왔고 그 나름대로 충분한 역사적 전통성과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경전이다.
아함경과 빠알리어 경전을 상호 비교해 보면 설법의 의미는 거의 일치하지만 설법배경, 설법주체, 청중, 장소, 설법내용, 내용편집순서, 비유등의 모든 구성이 완전하게 일치하는 예는 거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또는 상호 대응하는 경전이 없는 경우도 많다. 그럼 여기서 우리는 아함경은 엉터리이고 빠알리어 경전만 옳다는 단순명퀘한 주장을 할 수 있을까? 빠알리어 경전의 주장은 옳고 아함경의 주장은 틀리다는 근거가 과연 어디에 있는가? 결국 누워서 침뱉기 같은 이야기이지만 빠알리어 경전이든 아함경이든 붓다의 초기불교 경전이라는 속에는 붓다의 말이 온전하게 100% 다큐멘터리나 녹음기로되살려 놓은 즉 녹취록 그대로 살아 있다고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믿고 무엇을 학습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이 바로 맨먼저 언급한 "현실에서 증명되고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것"을 믿고 학습하는 것이다. 이것이 붓다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증명되지도 않고 볼 수도 없는 '하늘나라 천신운운하면서 매달리는 맹신'으로 불교를 훼손하는 외도가 되기 보다는 '보시하면 내마음이 행복하고 즐거운' 그러한 현실을 믿고 따르면 되는 것이다. 하늘나라 천신을 믿고 허황된 삶을 사느니 차라리 현실의 고(苦)를 응시하며 현재 여기 이시간을 열심히 사는게 불교의 진정한 모습인 것이다.
진흙속의연꽃의 어리석음
이 작자의 어리석음을 지적한 것이 한 두번도 아니고 한 두개의 글을 올린 것도 아니다. 특히 초현실적인 하늘나라 천신들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그저께는 이렇다 하다고 오늘에는 또 저렇다고 한다. 왜 이런 횡설수설이 나올까? 바로 머리가 쑤세미처럼 되어 있어서 개념정립이 전혀 안되어 있기 때문이다. 수박을 보되 줄무늬의 껍데기만 볼 뿐 실제 그것을 깨서 빨간 속내용을 한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즉 머리로만 불교일뿐 가정생활이나 개인생활 또는 학습적으로나 정신적으로는 전혀 불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구차제정이니 마음이니 운운하면서 글을 올렸는데 한마디로 가관일 뿐이라서 일일이 답글을 달지 않았다. 다만 '마음이란 무엇인가'라고 제 방에 글을 한편 올려 놓았다. 구차제정은 사선정과 사무색정으로 나뉜다. 붓다께서 어떤 과정을 거쳐서 열반에 이르렀는지는 경전에 명쾌하게 설명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각 초기경전의 텍스트마다 그 내용이 다르고 각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경전에 따라서는 사선정만으로 열반에 이르렀다고 하고 또는 구차제정의 과정을 전부다 거쳤다고도 한다. 그리고 대반열반경에는 초선 - 상수멸 다시 상수멸 - 초선에 이르러 4선에서 열반에 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것 또한 붓다 스스로가 아닌 이상 그분의 마음 상태를 알길은 전혀 없다. 후대의 기록은 기록일 뿐이다.
선정이나 삼매라는 수행법은 불교이전에 인도에서 있었던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수행했던 방법이다. 붓다가 찾아갔던 두명의 요가 수행자에게서 획득했던 경지는 붓다 이전에 이미 인도사회에 그러한 수행법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구차제정이라는 선정의 단계적 수행법이 불교만의 독특한 수행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힌두교가 물(water)라고 한다고 해서 물이 아니고 불교가 물(water)라고 하면 물이라는 진리가 성립된다는 논리는 세상 어디에서도 확립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굳이 길게 설명할 자리는 아니지만 구차제정이라는 선정의 단계별 수행은 후대에 불교에서 각각의 선정 방법을 정립화 구체화하여 정리하여 놓은 것이지 불교가 만든 독특한 수행법이 아니라는 것만 밝혀두고 싶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유일한 방법이 아니라 하나의 길에 불과한 것이다. 한국불교에서는 ‘Eka yāno maggo’ 를 유일한 길이라고 번역하여 연꽃같은 엉터리 맹신자를 양산하고 있지만 이것은 '유일한 길'이 아니라 ‘하나의 길’로 옮겨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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