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근본불교) 이야기

초기불교의 불타관을 확립하자

실론섬 2014. 10. 3. 20:23

불타관(佛陀觀) 

붓다(buddha)라는 말은 깨달은 자(覺者)라는 의미이다. 한자로는 '불타'(佛陀) 또는 줄여서 '불'(佛)이라고 한다. 이러한 붓다를 어떻게 보느냐가 불타관이라고 할 수 있다. 초기불교에서는 석가모니라는 한 인격체로 수행에 의해서 스스로 깨달음을 얻은 자로 보며 이에 대해서 붓다십호 등으로 그분을 예경하고 존경한다. 또한 깨달은 자로서의 부처는 석가모니 한 분만을 생각했다.하지마 부파불교와 대승불교에 이르는 동안 불타관(佛陀觀)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대승불교는 법신불 화신불 보신불등등으로 초기불교의 일불설一佛說을 배제하고  갠지스 강의 모래알 수보다도 많은 부처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다불설(多佛說)이 등장하게 되었다. 다시말해서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불타관은 판인하게 다르며 또한 불타관을 어떻게 놓고 생각할 것이냐에 따라서 불교의 사상적 발달이 거듭되었다.


쉽게말해서 붓다란 나에게 있어서 무엇이냐? 또는 붓다란 누구냐? 를 불타관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불타관의 개념적 정립은 불자라면 누구에게나 확고하게 정립이 되어 있어야 한다. 불타관에 따라서 내가 믿는 불교의 성격이 전혀 달라지기 때문이다. 즉 부처님이 복을 주고 축복을 내려주는 절대자 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기독교인 이상으로 열심히 법당에 가서 기도를 할 것이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역사적으로 실존하셨던 한 인격체로서의 석가모니보다 법신불 화신불이 더욱더 불교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대승경전을 손에 집어들 수 밖에 없으며,어떤 사람들에게는 신격화되고 형상화 된 부처님보다는 실존하셨던 한 인격체로서의 육성이 듣고 싶다면 초기경전을 신봉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초기불교를 믿는 불자들의 불타관은 당연히 역사적으로 실존하셨던 한 인격체로서의 석가모니를 믿고 그분의 육성을 듣고 믿음을 내어 따르는 것이 불타관이다. 그래서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읽고 그분의 생애를 배우고 따를려고 해야하는 것이다. 초기불교는 붓다만이 불교의 교조이며 그분의 가르침이 불교의 전부다. 그러기에 무엇보다도 붓다의 생애를 철저하게 알아야 하고 배워야 한다. 그분의 일대기만 제대로 배워도 올바른 불교관과 불타관을 가질 수 있다. 그분의 생애를 모른채 초기불교를 믿거나 경전을 손에 든다면 모래위의 누각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한국에 전파된 초기불교는 이러한 불타관의 정립이 제대로 안된 상태에서 중구난방식으로 전파가 된 부분이 많이 있음을 보게된다. 그럼으로 인하여 많은 불자들이 혼란을 겪고 있는 점은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많은 불자들이 이미 대승불교를 접한 후에 초기불교에 관심을 가지고 뒤늦게 공부를 하는 입장이다보니 미쳐 초기불교의 불타관이 제대로 정립이 안되어 있다는 점도 간과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다시말해서 초기불교의 불타관이 제대로 정립이 안된 상태에서 초기불교를 믿는 것이 태반이며 그러다보니 신행생활이나 공부에 많은 혼란과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붓다의 원음으로 돌아가자

부파불교 시대는 불교의 교리를 철학적 사상적으로 깊이를 더하고 지평을 크게 넓힌 부분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번쇄한 철학적 논쟁으로 날밤을  지새우다 보니 결과적으로 전문적인 수행승이나 학자들조차도 이해를 하지 못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또한 출가승 위주의 불교와 승원에 안주하면서 머리카락으로 바위에 구멍이라도 낼듯이 번쇄해진 교리는 결과적으로 중생들의 삶과 동떨어지고 불교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 붓다의 원음으로 돌아가자고 일어난 운동이 대승불교 운동이다.


붓다의 원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대자비심에 의한 중생구제와 세간의 삶과 함께하는 가르침일 것이다. 요즘말로 하자면 생활불교일 것이다. 오탁악세의 고(苦)로 가득찬 세간사를 살아가는 중생들의 불타관이란 붓다의 가르침에 의존하고 피난처로 삼고 삶의 지혜를 얻고자하는 것이다. 그것은 붓다의 일생에 가감없이 드러나고 있다. 그분의 생애를 살펴보면 단 한시도 중생들의 곁을 떠난 적이 없으며 중생들의 삶과 괴리되고 동떨어진 가르침을 펼친 적이 없다. 


붓다는 마음만 먹었다면 1250여명에 이르는 아라한들에게 포교나 설법이나 승가운영을 맡기고 자신은 산 좋고 물 맑은 한적한 곳에서 공양을 받으면서 얼마든지 여생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붓다의 45년 일생 그 어디에도 이런 모습은 없다. 마지막 열반의 길에서조차 제자을 받아 들이고 자신의 사후 이후 처리 문제를 재가자들에게 맡겼다. 그것이 불교이다.


부파불교보다 더 왜곡되고 번쇄한 논쟁의 한국의 초기불교 모습

현재 한국불교에서 초기불교의 모습은 겉모양과 경전만 초기경전을 들고 있을 뿐이지 내용적으로 보면 부파불교나 대승불교의 번쇄한 논쟁이나 중생들의 생활과는 너무 동떨어진 불필요한 교리논쟁이나 잘못되고 왜곡된 수행의 논쟁에 휩쌓여 있는 듯 하다. 예전에도 한번 강조를 했지만 초기경전 읽고 공부한다고 모두다 초기불자가 아니다. 스스로의 불타관이 초기불교의 불타관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스스로의 불타관은 부파불교나 대승불교나 중국불교식이면서 손에 초기경전 들고 읽고 공부한다고 그게 초기불교의 진면목을 제대로 몸에 익혀 실생활에 행동으로 나선다고 볼 수 없다. 이러다보니 초기불교이면서도 실제 신행생활은 대승불교도 중국불교도 아닌 어정쩡한 모양새가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경전역경에 앞장서고 계시는 OO스님의 카페에는 초기불교의 불타관 확립과 신행생활보다는 경전의 논서인 청정도론을 익히고 그것을 머리카락으로 후벼파는데 더 신경을 쓰는 것이 현실임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카페의 어느 글에서도 세간사를 살아가는 지혜와 보시와 자비의 베품이 깃들어 있는 붓다의 말씀을 배우는 글을 읽어 볼 수가 없다. 또한 어느 불자는 불교의 알량한 지식을 자신의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하나의 도구로 활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초기불교를 신봉하는 남방국가의 불교를 단 하루도 직접 경험하지 못했으면서도 마치 평생을 남방불교에서 산 것처럼 자신을 속이고 경전의 귀절이 주는 의미를 파악하기 보다는 입에 칼을 품고 남을 해코지하고 비난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는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또한 초기불교를 비난하는 사람들의 십중팔구는 '수행' 운운하면서 선불교식의 해괘한 논리를 들이대면서 날카롭게 대립할려고 한다. 초기불교와 선불교 중국불교 대승불교는 어차피 다른 불교이다. 불타관이 다르기 때문에 '불교'라는 이름의 한 울타리에 있지만 그것은 유럽이라고 해놓고 영국과 프랑스만큼이나 다르다. 물론 여러부분에서 일맥상통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역사적으로 실존하는 석가모니불과 비로자나불이나 아미타불이 같은 분일 수는 없는 것이다. 화학적 결합이 쉽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초기불교를 어떻게 신행생활로 연결해야 할까?

이것에 대한 해답은 초기불교를 신봉하는 남방권의 불자들의 모습에서 정확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그들의 신행생활이 곧 초기불교의 불타관이고 초기불교의 가르침이고 붓다가 원하는 것이다. 요즈음은 한국에서도 이곳을 많이 찾는다. 하지만 석가모니불 앞에서 반야심경을 읋조리고 있으니 늘 겉돌기만 한다. 붓다의 원음을 한 귀절이라도 찾고 그리고 불자들의 신행생활을 보고자 하는 노력보다는 그냥 대승불교권에서 온 관광객에 불과하다.


불교는 오계를 중시한다. 보시와 자비를 최고의 덕목으로 여긴다. 이런 마음냄이 결국 선한 업을 짓게 하고 그 업의 과보로 좋은 곳 선처에 태어나고 다시 그 과보로 열반이 성큼 내게 다가오는 것이다. 우리들은 오계 한가지도 제대로 지키기 어렵다. 10가지 선행중의 50%도 제대로 행(行)으로 실천하지 못하고 살아가는게 현실이다. 그런데도 돼지에 비단옷이라는 속담처럼 어울리지 않게 교리논쟁이니 수행을 했느니 안 했으니 하면서 으르렁 거린다. 5계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10선행의 절반도 채우지 못하면서 출세간의 가르침이나 교리논쟁을 일삼아 벌인다고  그게 불자이고 초기불교는 절대로 아니다. 이것은 거짓과 위선이니 바로 악행을 범하는 것이다. 


초기불교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 해답은 붓다의 일생에 모두다 있다. 오늘부터라도 그분의 45년 발자취를 다시한번 되돌아 보면서 스스로의 불타관을 확립하는데 힘쓰면 하는 바램이다. 참고로 붓다의 일생에 대한 글은 '고요한 소리'에 접속하거나 마성스님의 블로그에 가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