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논문·평론

붓다의 인간관

실론섬 2014. 10. 3. 12:13

붓다의 인간관
월폴라 라훌라(Walpola Rahula) 지음
이 글은 스리랑카의 세계적인 불교학자였던 월폴라 라훌라(Walpola Rahula)의 저서 <禪과 牧牛(Zen and the Taming of the Bull)> (London: Gordon Fraser, 1978), pp.49-54에 수록된 그의 논문 「붓다의 인간관, 인간의 본성과 운명(The Buddha on Man, his Nature and Destiny)」를 번역한 것이다.  

구멍이 한 개 달린 멍에가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인해 몹시도 출렁이는 대양 한 가운데로 던져졌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이 대양 속에 살고 있던 외눈박이 거북이가 하늘을 흘끗 보기 위하여 백년에 한번 올라오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이 외눈박이 거북이가 멍에에 걸려 그 구멍을 통해 하늘을 보게 되는 일이 과연 벌어질 수 있을까? 물론 산술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초기불교의 경전에 따르면,1) 이처럼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우연의 일치가 실제로 일어나는 것보다도 인간으로 태어나는 일이 훨씬 더 어렵다고 한다.

여기에는 불교의 엄숙한 인간관이 담겨 있다. <법구경>에서 붓다는 인간의 삶을 얻기가 무척 어렵다는 것을 분명하게 설하고 있다.2) 인간의 삶을 얻기가 몹시도 힘든 일이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 역시 세계의 그 무엇보다도 독특하다. 불교에 있어서 인간은 천(天, deva)이나 범(梵, brahma)3)까지 포함한 모든 존재 중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다.

붓다는 인간에 비해 훨씬 안락하고 즐거운 생활을 향유하고 있는 천이나 범보다도 인간을 더 높은 위치에 놓았다. 인간에게 있어서 참되고 영원하며 가치 있는 고차적인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은 실로 엄청난 것이다. <여시어경(如是語經)>에 보면, 한 천신이 천계를 떠나게 되자 그의 주변에 모여 있던 다른 천신들이 그를 위로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오 친구여, 그대는 정말로 천계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세계로 가는구나!”4) 이처럼 붓다는 인간의 세계를 천신들이 살고 있는 곳보다 분명히 더 높게 평가하였다.

천신들의 왕인 사카(Sakka)신이 한번은 자신의 전차를 모는 마탈리(Mātali) 신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나는 오랜 세월 동안 자기를 수련하여 성스러운 삶에 이르게 된 덕망 있고 훌륭한 사문들을 진정으로 숭배한다. 만약 어떤 재가신도가 훌륭한 가장으로서 자기 가족을 올바로 돌보며 착한 일을 행한다면, 오! 마탈리여, 나는 그런 사람을 존경하노라!”5)

초기불교의 경전들에서는 천신들이 주로 인간 붓다의 제자나 수행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6) 그들은 절망과 위험의 순간마다 붓다를 찾아가 자문과 지도와 깨우침을 구하고 있다. 후기 불교의 경전들에서도 천신들은 깨달음의 지혜를 얻은 인간보다 더 열등한 존재로서 대부분 다루어지고 있다.7) 이러한 예들은 불교적인 관점에서 볼 때 지혜롭고 유덕한 인간이 어떠한 천신보다도 고귀하며 그런 사람은 모든 천신들로부터 존경과 숭앙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제까지 살펴보았듯이, 종교의 창시자들 중에서 붓다는 인간 이외의 그 어떤 것도 결코 내세우지 않았던 유일한 스승이었다. 다른 스승들은 신이었거나, 신의 육화된 모습이었거나, 아니면 신의 뜻을 따르는 사자였다. 오직 인간만이 붓다가 될 수 있다. 우리는 붓다를 가장 뛰어난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는 ‘인간성’에 있어서 완벽했기에, 후에 초인으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모든 인간은 스스로 노력하여 애쓰기만 한다면 붓다가 될 수 있는 잠재적인 가능성을 자신 속에 간직하고 있다.

비록 불교에서는 인간의 운명을 조종하는 외적인 존재를 인정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렇더라도 인간이 자신의 고유한 업에 의해 지배되고 있지 않나 하는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답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왜냐하면 인간이야말로 자기 자신의 업의 유일한 주인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의 삶이 다른 존재가 내리는 결정에 의존하고 있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가치 있는 삶이 아니다. 그런 식의 의존성은 인간성을 노예상태로 떨어뜨리며, 그럼으로써 인간의 자존심과 인생의 존엄성을 파괴하여 버린다.

비록 인간이 모든 존재자들 중에서 최고의 위치를 지니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인간에게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존재자들을 이용하거나 박해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불교에서 볼 때 인간이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여러 중생 중의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 자신과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존재들을 사랑하고 존중하여야 한다.

붓다는 인간에게는 개인의 노력에 따라 일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에, 각자 자신의 개성을 개발하여 해탈을 이루라고 가르쳤다. 붓다는 “여래만이 유일한 스승임을 알고 열심히 노력하라”8)고 말씀하셨다. 만약 그를 구원자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그가 열반에 이르는 길을 발견하여 보여주었다는 의미에서 그럴 뿐이다. 그러나 그 길을 밟고 걸어가야만 하는 것은 우리들 자신이다.

이와 같은 개인적 책임의 원리에 입각하여 붓다는 그의 제자들을 완전한 자유에로 이끌었다.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에서 붓다는 자신에게는 승단을 지배할 생각이 전혀 없으며 승단이 자기에게 의존하는 것을 바라지도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붓다의 가르침에는 비밀스러운 교리도, 스승의 심중에 은밀하게 감추어진 내용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내밀한 비법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9) 단지 어떤 것이 전통이었고 종교에서 그렇게 말했다는 이유만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어떤 것이 용인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듣는 자에 의하여 이해되고 납득될 때뿐이었다.10)

불교는 인간 세계 내에서의 그 어떠한 계급 차별도 인정하지 않는다. 모든 인간은 출생으로 인해 불리한 입장에 놓일 수 없다는 의미에서 다 같이 평등하게 태어난다. 여러 빨리 성전들에서 붓다는 그 당시 만연해 있던 브라만교의 카스트 제도를 분명한 어조로 비난 공격하였다.11)

<까브시루미나(Kavsiḷumiṇa)>라는 실론어로 된 유명한 시를 쓴 시인은 외부의 모든 사물들을 보는 눈도 자기 자신은 볼 수 없다고 노래하고 있다.12) 스스로를 바라보고자 하는 인간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도대체 우리는 인간의 본질에 관해 인간 자신이 지니고 있는 지식과 판단에 얼마나 의존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은 인류 사상사의 시초부터 모든 사상들을 혼란에 빠뜨린 문제였다. 그러나 고무적인 것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교정 가능성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모든 종교가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의 본질은 세계의 어떤 변화에도 불구하고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언제나 동일하다는 통속적인 견해는 잘못된 것이다. 인간의 본성도 그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사회적 경제적 변화에 따라 전반적으로 변형을 겪게 마련이다. 인간의 본질을 그의 배경 조건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정신분석학자들은 사회 환경이 정신 장애를 가속화시킨다는 사실을 발견해 내었다. 사회적인 변화도 정신장애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인간의 본질은 심오하고 복잡한 반면 동물의 본성을 쉽고 단순하다고 보는 점에서, 우리는 붓다와 생각을 같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13) 우리가 인간의 본질에 관해 많은 생각을 하면 할수록, 그 만큼 더 큰 문제 속에 얽혀 들게 되어 혼란은 극도로 악화되기에 이른다.

“나는 브라흐만이다(Aham brahmāsmi)”, “그는 너다(Tad tvam asi)”라는 우파니샤드의 두 구절은 인간이 곧 브라흐만 자신이라는 것을 가정하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어떤 종교에서는 인간이 원죄를 지닌 채 태어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불교는 중도(中道)를 취한다. 즉 인간은 브라흐만도 아니고, 날 때부터 죄인도 아닌 것이다. 기본적으로 인간의 본성은 선도 악도 아닌 중립적인 것이다. 만약 인간이 올바른 길로 나아간다면 그는 붓다에까지 이를 수도 있지만, 그가 퇴보를 거듭한다면 점점 더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져들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불교경전에서 인간을 ‘지옥에 빠진 사람(manussa-nerayika)’, ‘유령 같은 사람(manussa-peta)’, ‘동물과 같은 사람(manussa-tiracchana)’, ‘인간다운 사람(manussa-manussa)’ 등으로 나눈 것을 상기하여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라 하겠다.14)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 중 어떤 것으로도 될 수 있다.

<증지부경전(增支部經典)>15) 중 두 개의 매우 중요한 경에서는 인간의 본질 문제 전체와 관련하여 지표가 될 수 있는 것이 이렇게 표현되고 있다. “오 비구들이여, 이 마음은 청정하나, 외부의 불순물에 의하여 더럽혀지고 있구나.”, “오 비구들이여, 이 마음이 청정하기에, 외부의 불순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이들 두 가지 경들은 마음이란 본래 청정한 것이지만 외부의 불순물들에 의하여 염오된다고 하는 것과 마음은 이러한 불순물들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 등을 보여주고 있다.

이 두 경전에서 보이는 마음(citta)이라는 개념과 대승불교의 여래장(Tathāgata- garbha) 사상이 놀라울 정도로 일치하고 있다는 점은 많은 것을 시사(示唆)하여 준다. 마음(citta)도 팔리어로 pabhassara(淸淨)라는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여래장도 이에 상응하는 산스크리트어인 prabhāsvara(淸淨)라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마음과 마찬가지로 여래장도 그 본질상 청정한 것(prakṛti-prabhāsvara, 自性淸淨)이지만, 외부의 불순물들에 의하여 더럽혀지게 된다.16)

만약 인간의 본성이 본래부터 불순하며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인간성을 순수한 것으로 개발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설사 개발된다고 하여도 실제에 있어서는 순수하지 못한 것의 성장일 따름일진대, 어떻게 해서 자신의 본성상 불순한 것이 청정한 것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와 반대로 만약 인간의 본성이 완전한 것이라면, 더 이상 향상시킬 것도 없게 된다.

앞서 보았듯이 불교가 취하는 입장은 인간의 본성이란 선도 악도 아닌 중도적인 것이며 외부의 힘들에 의하여 영향을 받지만 거기에서 벗어나 완전한 것에로 발전할 수도 있는 것이라는 데에 있다. 우리의 삶은 대부분 외적인 힘들과 환경 요소에 의하여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자기 자신의 향상을 위하여 실행하여 나아갈 수 있는 선택의 자유가 있다. 붓다는 이러한 비밀을 깨달은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을 수련할 수 있지만, 이것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는 어떠한 발전도 있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17)

불교의 생성 철학에 따를 것 같으면, 인간의 마음은 시간과 공간의 모든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난 완전의 상태에로 발전할 수 있다. 이러한 상태는 아라한의 경지이며, 여기에서는 어떠한 외부의 영향력이나 불순물들도 마음을 더럽힐 수 없다. 그것은 모든 외적인 힘들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반응한다.

만약 우리가 운명을 신에 의하여 먼저 정해진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인다면, 불교의 교리에서 이와 같은 것을 발견하고자 하는 것은 헛된 시도라 아니할 수 없다. 비록 업이라는 것이 있고, 우리가 앞서 행한 업력에 의하여 어느 정도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미리 정해져 있다는 결정론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자신이 앞서 행한 업의 노예라고 하는 생각은 붓다의 가르침의 근본정신에 위배되는 천박한 어리석은 견해이다. 인간에게 운명적으로 일어나는 그 어떠한 것도 그를 무기력한 노예로 만들 수는 없다. 인간이란 자기 업의 창조자이며, 만약 그가 올바른 길을 따르기 위하여 자유를 행사하고자 한다면 개인적인 노력과 지혜에 의하여 업의 과정을 변화시킬 수도 있는 존재인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붓다는 인간 생활의 중요한 요소로 좋은 만남과 훌륭한 배움과 진정한 깨달음과 올바른 행동이라는 네 가지를 들었다.18)

만약 우리가 운명을 죽은 후에 인간에게 일어나는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한다면, 불교에서는 인간이란 죽음으로 종말을 고하는 것이 아니라 열반을 이룰 때까지 계속되는 존재라고 말할 것이다.

‘운명’이라는 말은 인간의 궁극적 목표라는 뜻으로 해석되어져야 한다. 그 목표란 완전한 자유이며 열반의 실현이다. 거기에서는 연장(延長)과 응집과 열기와 운동이라는 네 가지 요소도 존재하지 않으며, 길이·넓이·희박함·풍부함·선·악·명·색이라는 개념들도 모두 사라지게 된다.19) 또한 차안이나 피안, 오고감이나 멈춤, 태어남이나 죽음 내지는 감각 대상들도 모두 찾아볼 수 없게 된다.20)

붓다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 비구들이여, 태어나지도 않고 성장하지도 않으며 조건에 의해 제약되지도 않고 서로 섞이지도 않는 상태가 있노라. 만약 그처럼 태어나지도 않고 성장하지도 않으며 조건에 의해 제약되지도 않고 서로 섞이지도 않는 상태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태어나 성장하며 조건에 의해 제약되어 서로 뒤섞이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있을 수 없게 된다. 태어나지도 않고 성장하지도 않으며 조건에 의해 제약되지도 않고 서로 섞이지도 않는 상태가 있기 때문에, 태어나 성장하며 조건에 의해 제약되어 서로 뒤섞이는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는 것이다.”21)

부정의 형식으로 표현해 볼 경우 ‘모든 괴로움의 종식'22) 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완전의 상태는 자기 통제와 자기 수양을 통하여 점차적으로 스스로를 정화시켜 나아감으로써 이루어지며, 바른 견해·바른 사유·바른 말·바른 행위·바른 생활·바른 노력·바른 통찰·바른 집중이라는 팔정도에 따라 자신의 지적인 역량을 최대한도로 개발함으로써 실현되는 것이다.

이러한 팔정도의 당연한 귀결로서 불교의 이상 사회라는 개념이 생겨나게 된다. 이상적인 불교 사회(불국토)란 승리자는 증오를 낳고 정복당한 자는 비참함에 시달릴 뿐이기 때문에 파멸만을 가져오는 어떠한 정복 전쟁도 포기되는 사회이며,23) 평온한 삶이 정복과 패배와 싸워 이기는 사회이고, 죄 없고 순진한 사람에 대한 박해가 철저하게 비난을 받는 사회이며,24) 자기 자신을 정복한 사람이 전쟁을 통해 수백만 명을 정복한 자보다 더 훌륭하게 평가되는 사회이고,25) 애정이 증오를·선함이 악함을·진리가 거짓을·자비가 탐욕을 극복하는 사회이며,26)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결점이나 약점에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결점이나 약점을 똑바로 봄으로써 스스로를 향상시키고자 노력하는 사회이고,27) 증오나 질투나 악의나 탐욕 등이 인간의 마음 속에 나타나지 않는 사회이며,28) 자비심이 행위의 추진력이 되어 마치 어머니가 자기 자식을 사랑하듯 사람들이 타인을 사랑하는 사회이고, 정직과 성실이 모든 관계를 지배하는 사회이며, 사람들이 자만과 독단에 빠지지 않는 사회이고, 가장 미천한 생물일지라도 모든 존재가 공평하게 사랑으로서 대우받는 그러한 사회이다.29)

이러한 사회에서 각 개인은 그가 적어도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속이거나 도둑질하지도 않으며 부도덕한 죄를 저지르지 않는 이상, 그리고 진실 되고 소박하게 자기의 동요와 부인과 자식과 형제자매와 이웃들에 대해 의무를 수행하고 타인에 대한 책임을 게을리 하지 않는 이상, 모두 고귀한 존재로 간주된다.30)

이와 같은 것이야말로 불교가 이루고자 목표로 하는 사회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단순히 유토피아만은 아니다. 이러한 이상 사회를 자신의 왕국 속에 건설하고자 하였던 왕들이 과거에 여러 명 있었다. 이들 중 가장 유명한 이가 기원전 3세기 경 인도의 위대한 불교 황제였던 아쇼카왕이다. 그는 자신의 검을 다시는 정복을 위해 사용되지 않도록 칼집에 넣어두었던 역사상 유일한 왕이었다. 스리랑카에도 이 위대한 불교 황제를 모범으로 따르고자 하였던 아다가무누(Aḍagämuṇu, 79-89)나 보하라카티사(Vohārakatissa, 269-291)와 같은 왕들이 있었으며, 중국에서는 자기 나라에 불국토를 세우고자 노력하였던 양무제(5세기경)를 중국의 아쇼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러한 이상적인 사회 상태가 발생하여 성장함에 따라서, 불교에서 본 인간의 운명도 훌륭하게 성취될 수 있고 인간의 본성도 충분히 개발될 수 있으며 사물에 대한 인간의 지위도 올바로 평가될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전 우주에 걸쳐 유일무이하고 자기 자신의 주인이며 그 본질상 중도적인 존재인 인간은 스스로의 지성과 노력을 통하여 정도를 따라감으로써만, 일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선악과 시공이라는 모든 상대적인 개념들을 넘어선 완전한 자유의 상태에로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Notes:
1) Majjhima-nikāya (PTS), vol. Ⅲ, p.169.

2) Dhammapada ⅩⅣ 4 Kiccho manussa-paṭilābho.

3) Celestial beings. Brahmas are higher than devas.

4) Itivuttaka (PTS), p.77.

5) Saṁyutta-nikāya (PTS), vol. Ⅰ, p.234.

6) E.g. See Sakka-Pañha and Janavasabha suttas of the Dīgha-nikāya; Mahāmaṅgala and Parābhava suttas of the Suttanipāta; Saṁyutta-nikāya, p.1 ff.

7) Such examples are scattered abundantly in Pali commentaries and popular books such as the Rasavāhinī.

8) Dhammapada ⅩⅩ 4―Tumhehi kiccaṃ ātappaṃ, akkhātāro Tathāgata.

9) Dīgha-nikāya (PTS) vol. Ⅱ, p.100.

10) Aṅguttara-nikāya (PTS) vol. Ⅰ, p.189.

11) See Aggañña and Ambaṭṭha suttas, Dīgha; Assalāyana, Majjhima-nikāya; Vasala sutta of the Suttanipāta.

12) Nuvan bähära nahamat, tamā mut no dakne him

13) Majjhima-nikāya (PTS) vol. Ⅰ, p.341.

14) Vimānavatthu-Aṭṭhakathā (PTS), p.23.

15) Aṅguttara-nikāya (PTS), vol. Ⅰ, p.10.

16) Tathāgata-garbha is sometimes called Ālaya-vijñāna. Laṅkāvatāra-sūtra, ed. Nanjio, pp.77, 222. See also Suzuki's Studies in the Laṅkavatāra-sūtra, p.176.

17) Aṅguttara-nikāya (PTS), vol. Ⅰ, p.10.

18) Aṅguttara-nikāya (PTS), vol. Ⅱ, p.245.

19) Dīgha-nikāya (PTS), vol. Ⅰ, p.223.

20) Udāna (PTS), p.80.

21) Udāna (PTS), p.80.

22) Udāna (PTS), p.80.

23) Dhammapada ⅩⅤ 5.

24) Dhammapada IX 10.

25) Dhammapada VIII 3.

26) Dhammapada XVII 3.

27) Dhammapada IV 7.

28) Dhammapada XVI ff.

29) Metta-sutta of the Khuddakapāṭha or the Suttanipāta.

30) See Sigāla-sutta, Dīgha-nikāya (PTS), vol. Ⅲ, p.180 f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