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이야기

[각묵스님] 초기불교의 기본 주제 - 행복

실론섬 2014. 12. 12. 14:32

불교의 목적: 이고득락(離苦得樂)

 

인간은 행복을 추구한다. 경제행위, 정치행위, 문화행위, 철학행위, 의술행위, 종교행위 등 인간의 모든 행위는 행복해지기 위해서이다. 불교도 행복을 추구한다. 그래서 예부터 스님들은 불교의 목적을 이고득락(離苦得樂)이라고 표현하였다. 초기경에서 부처님께서는 다양한 행복을 말씀하셨다. 그것을 간추려보면 금생의 행복, 내생의 행복, 구경의 행복이 된다.

 

금생의 행복 

부처님께서는 금생에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기술(sippa, vijja)을 익혀야 한다고 하셨다. 자기 소질에 맞는 기술을 익혀서 그것으로 세상에 기여를 하고 급여를 받거나 이윤을 창출하여 금생에 행복하게 사는 것이 인간이 추구하는 중요한 행복이다.

 

그러나 기술만으로 금생의 행복은 얻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그 사람이 전문직종의 기술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나쁜 인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사회와 자신을 망가지게 한다. 바른 인성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도덕적으로 건전하고, 이웃에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이를 각각 지계와 보시로 강조하셨다. 이처럼 인간은 자기에게 맞는 기술을 익히고, 도덕적으로 건전하고, 봉사하는 삶을 살므로 해서 금생의 행복을 얻게 된다고 부처님께서는 강조하셨다.

 

내생의 행복 

인간이 짓는 종교행위는 기본적으로 내생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금생에 종교행위를 함으로 해서 사후에 천상이나 극락세계에 태어나거나 천당에 가게 된다고 각 종교마다 이론은 다르지만 이구동성으로 사후세계의 행복을 말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인간이 짓는 의도적 행위(업)가 원인이 되어, 해로운 업(불선업)을 많이 지은 자는 지옥, 아귀, 축생의 삼악도에 태어나게 되고 유익한 업(선업)을 많이 지은 자는 인간과 천상에 태어나게 된다고 가르친다. 초기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인간이나 천상에 태어나는 방법으로 보시와 지계를 말씀하셨다. 한역 〈아함경〉에서는 이를 시.계.생천(施.戒.生天)이라고 옮겼다. 금생에 이웃에 봉사하고 승가에 보시하며, 도덕적으로 건전한 삶을 살면 내생에 천상에 태어나게 된다는 말씀이다.

 

궁극적 행복 

부처님이 말씀하신 세 번째 행복은 궁극적인 행복(parama-sukha, 至福)이며 이것은 열반이다. 불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깨달음, 해탈, 열반, 성불은 세상의 어떤 가치체계나 신념체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불교만이 제시하는 고귀한 가르침이다. 스님들은 이러한 궁극적인 행복을 위해서 출가하여 수행을 하며, 재가 신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신의 가치체계와 신념체계로 받아들이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서이다.

 

궁극적인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개념적인 존재(施設)를 해체해서 법(dhamma)으로 환원해서 보아야하는데, 초기경에서 부처님께서는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사성제의 통찰, 팔정도의 완성, 오온의 무상.고.무아에 대한 철견(徹見), 12연기의 역관(逆觀), 계.정.혜의 실천 등으로 말씀하셨다.

 

초기경에서 보자면, 이러한 세 가지 행복을 바르게 추구하는 방법은 팔정도로 귀결이 된다. 그러므로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수단(직업), 바른 노력,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삼매를 닦아서 금생의 행복과 내생의 행복과 궁극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자야 말로 진정한 불자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세 번째 행복은 궁극적인 행복(parama-sukha, 至福)이며 이것은 열반이다. 불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깨달음, 해탈, 열반, 성불은 세상의 어떤 가치체계나 신념체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불교만이 제시하는 고귀한 가르침이다. 스님들은 이러한 궁극적인 행복을 위해서 출가하여 수행을 하며, 재가 신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신의 가치체계와 신념체계로 받아들이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서이다.

 

궁극적인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개념적인 존재(施設)를 해체해서 법(dhamma)으로 환원해서 보아야하는데, 초기경에서 부처님께서는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사성제의 통찰, 팔정도의 완성, 오온의 무상.고.무아에 대한 철견(徹見), 12연기의 역관(逆觀), 계.정.혜의 실천 등으로 말씀하셨다.

 

그러면 어떻게 열반을 실현할 것인가

 

⑴ 사성제의 통찰을 통해서

나는 알아야 할 것(고성제)를 알았고,

닦아야 할 것(도성제)를 닦았고,

버려야 할 것(집성제)을 버렸다.

바라문이여, 그래서 나는 붓다, 즉 깨달은 사람이다.

(숫따니빠따 558게)

 

⑵ 중도(8정도)를 깨달음으로써

“비구들이여, 출가자는 이들 두 가지 극단을 따라서는 안 된다. 무엇이 둘인가? 감각적 욕망의 즐거움에 탐닉하는 것은 저열하고 촌스럽고 범속하며 고결하지 않고 해로움과 함께하나니 이것이 (하나의 극단이다.) 자기 학대에 몰두하는 것은 저열하고 촌스럽고 범속하며 고결하지 않고 해로움과 함께하나니 이것이 (다른 하나의 극단이다.) 이들 두 극단을 따르지 않고 여래는 중도를 철저하게 깨닫고 눈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었나니 이 (중도는)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중도인가? 바로 이 여덟 가지로 구성된 성스러운 도(八正道)이니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정진(正精進), 바른 마음챙김(正念), 바른 삼매(正定)이다.”(깟짜야나곳따 경, S56:11)

 

⑶ 온-처-계의 무상/고/무아를 통찰함을 통해서

 

“비구들이여, 물질은 무상하고 … 괴로움이고 … 무아이고, 느낌은 … 인식은 … 심리현상들은 … 알음알이는 무상하다 … 괴로움이다 … 무아이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물질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느낌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인식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의도적 행위들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알음알이에 대해서도 염오한다. 염오하면서 탐욕이 빛바래고, 탐욕이 빛바래므로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梵行)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으며,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고 꿰뚫어 안다.”(무상 경 등, S22:12~14)

 

염오(nibbidā) - 이욕(virāga) - 소멸(nirodha) 


염오(nibbidā) - 이욕(virāga) - 소멸(nirodha) - 고요(upasama) - 최상의 지혜(abhiññā) - 바른 깨달음(sambodha) - 열반(nibbāna)

 

염오 - 이욕 - 해탈(vimutti) - 해탈지(vimuttiñāṇa)

 

⑷ 연기의 순관과 역관을 통해서 

“이와 같이 참으로 무명을 조건으로 의도적 행위[行]들이, 의도적 행위들을 조건으로 알음알이가, …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발생한다. 비구들이여, 나에게는 ‘일어남, 일어남’이라고 전에 들어 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眼]이 생겼다. 지혜[智]가 생겼다. 통찰지[慧]가 생겼다. 영지[明]가 생겼다. 광명[光]이 생겼다.” …

 

“이와 같이 참으로 무명이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하기 때문에 의도적 행위[行]들이 소멸하고, 의도적 행위들이 소멸하기 때문에 알음알이가 소멸하고, …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소멸한다. 비구들이여, 나에게는 ‘소멸, 소멸’이라고 전에 들어 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眼]이 생겼다. 지혜[智]가 생겼다. 통찰지[慧]가 생겼다. 영지[明]가 생겼다. 광명[光]이 생겼다.”(사꺄무니 고따마 경, S12:10)

 

결론적으로 사성제/8정도/5온/12연기 등으로 설해지고 있는 법(dhamma)을 봄을 통해서 해탈, 열반, 깨달음을 실현한다.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본다(yo dhammaṁ passati, so maṁ passati)

 

법과 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대반열반경, D16)

 

법을 보기 위해서 개발된 전문적인 기법(테크닉)이 간화선이나 위빳사나 등의 수행법이다.

 

개념(paññatti)과 법(dhamma)의 엄정한 구별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