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이야기

[각묵스님] 초기불교의 진리 - 사성제

실론섬 2014. 12. 12. 14:43

⑴ 모든 가르침은 사성제로 총섭된다.

 

“도반들이여, 예를 들면 움직이는 모든 생명들의 발자국들은 모두 코끼리 발자국에 총섭되고 코끼리 발자국이야말로 그 크기로서 최상이라고 불리는 것과 같습니다. 도반들이여, 그와 같이 어떤 유익한 법[善法]이던 그것들은 모두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에 총섭됩니다. 무엇이 넷인가?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苦聖諦],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苦集聖諦],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苦滅聖諦],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의 성스러운 진리[苦滅道聖諦]입니다.”

                                  (맛지마 니까야 코끼리 발자국 비유경(M28) §2)

 

“그는 모든 번뇌를 소멸하는 지혜[漏盡通]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한다. 그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번뇌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번뇌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번뇌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번뇌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는 그는 감각적 욕망의 번뇌[慾惱]로부터 마음이 해탈한다. 존재의 번뇌[有惱]로부터 마음이 해탈한다. 무명의 번뇌로부터 마음이 해탈한다. 해탈했을 때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사문과경(D2) §97 등)

 

“비구들이여, 괴로움을 본 사람은 괴로움의 일어남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도 본다. 비구들이여, 괴로움의 일어남을 본 사람은 괴로움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도 본다. 비구들이여, 괴로움의 소멸을 본 사람은 괴로움도 보고 괴로움의 일어남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도 본다. 비구들이여,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본 사람은 괴로움도 보고 괴로움의 일어남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도 본다.”(가왐빠띠 경(S56:30) §4)

 

진리[諦]로 옮긴 sacca는 √as(이다, 있다, to be)에서 파생된 중성명사이다. √as는 ‘있다, 이다’를 뜻하는 영어의 be동사와 꼭 같이 범어 일반에서 널리 사용되는 어근이다. 이것의 현재능동분사가 sat이고 여기에다가 가능분사를 만드는 어미 -ya를 첨가하여 satya라는 형용사를 만들어 이것이 중성명사로 쓰인 것이다. satya의 빠알리 형태가 sacca 이다. 그래서 형용사로 쓰이면 진실한, 사실인 등의 의미이다. 중성명사로서는 진실, 진리, 사실 , 실제란 의미로 쓰인다.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苦聖諦, dukkha-ariya-sacca]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集聖諦, dukkha-samudaya-ariya-sacca]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滅聖諦, dukkha-nirodha-ariya-sacca]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의 성스러운 진리[道聖諦, dukkha-nirodha-gāmini-paṭipadā-ariya-sacca]

 

 

지난 번 강의에서 궁극적인 행복인 열반은 ① 사성제를 관통함을 통해서, ② 팔정도의 실현을 통해서, ③ 온/처/계의 무상고무아를 통찰하여 염오-이욕-소멸을 통해서, ④ 12연기의 순관/역관을 통해서라는 네 가지로 실현된다고 했다. 그런데 이 넷은 궁극적으로는 사성제로 귀결된다. 팔정도는 사성제의 네 번째인 도성제의 내용이다. 그러므로 팔정도는 사성제에 포함된다. 물론 팔정도의 처음인 바른 견해(정견)의 내용은 사성제를 아는 것이다. 오온/오취온은 사성제의 첫 번째인 고성제의 내용이다. 그러므로 온/처/계의 가르침은 사성제에 포함된다. 12연기의 순관(順觀, 流轉門, anuloma)은 사성제의 고성제와 집성제에 해당하고 역관(逆觀, 還滅門, paṭiloma)은 사성제의 멸성제와 도성제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12연기의 순관과 역관은 사성제에 포함된다.

 

⑵ 고성제는 ① 사고팔고(四苦八苦)와 ② 삼성(三性)으로 정리된다.

 

① 사고팔고(四苦八苦)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이다. 태어남도 괴로움이다. 늙음도 괴로움이다. 병도 괴로움이다. 죽음도 괴로움이다. 싫어하는 [대상]들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다. 좋아하는 [대상]들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요컨대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五取蘊]들 자체가 괴로움이다.

                                               ”(상윳따 니까야 초전법륜 경(S56:11) §5)

 

일반적으로 사고팔고로 정의된다. 생/노/병/사와 愛別離苦, 怨憎會苦, 求不得苦, 略 五陰盛苦이다. 정리하면 생사문제가 된다. 출가는 생사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② 괴로움의 세 가지 성질[三性] 

“도반 사리뿟따여, '괴로움, 괴로움'이라고 합니다. 도반이여, 도대체 어떤 것이 괴로움입니까?”

 

“도반이여, 세 가지 괴로움의 성질[苦性, dukkhatā]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통스런 괴로움의 성질[苦苦性], 형성된 괴로움의 성질[行苦性], 변화에 기인한 괴로움의 성질[壞苦性]입니다. 도반이여, 이러한 세 가지 괴로움의 성질이 있습니다.”

    - (괴로움 경(S38:14) §3 ― 잠부카다까 유행승과 사리뿟따 존자의 대화)

 

고고성(苦苦性, dukkha-dukkhatā): 중생의 삶은 고통스럽기 때문에 괴로움이다. 

괴고성(壞苦性, viparinnāma-dukkhatā): 아무리 큰 행복일지라도 끝내 변하고 말기 때문에 괴로움이다. 

행고성(行苦性, saṁkhāra-dukkhatā): 본질적으로는 오온으로 형성되어 있는 것을 ‘나’라거나 ‘내 것’으로 취착하기 때문에(五取蘊) 괴로움이다.

 

이 세 가지는 청정도론 XVI:35에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나타나고 있다.

 

“①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괴로운 느낌은 고유성질로서도, 이름에 따라서도 괴롭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괴로움[苦苦]이라 한다. ② 즐거운 느낌은 그것이 변할 때 괴로운 느낌이 일어날 원인이 되기 때문에 변화에 기인한 괴로움[壞苦]이라 한다. ③ 평온한 느낌과 나머지 삼계에 속하는 형성된 것들[行, saṅkhāra]은 일어나고 사라짐에 압박되기 때문에 형성된 괴로움[行苦]이라 한다.”

 

⑶ 집성제(集聖諦,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는 갈애요 갈애는 셋으로 정리된다

 

① 갈애(渴愛, taṇhā) 

taṇhā는 동사 √tṛṣ(to be thirsty)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문자적인 의미는 ‘목마름’이다. 그래서 목마를 갈(渴)자를 넣어서 갈애(渴愛)로 옮기고 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苦集聖諦]이다. 그것은 바로 갈애이니, 다시 태어남[再有]을 가져오고(ponobbhavikā) 환희와 탐욕이 함께 하며 여기저기서 즐기는 것이다. 즉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갈애[無有愛]가 그것이다.

                                               (상윳따 니까야 초전법륜 경(S56:11) §6)

 

여기서 주목할 것은 갈애는 다시 태어남을 유발하는 근본원인이라고 부처님이 설하신 것이다. 이 갈애가 근본원인이 되어 중생들은 끝모를 생사윤회를 거듭하는 것이다. 물론 갈애만이 괴로움의 원인은 아니다. 무명과 성냄이나, 성냄, 질투, 인색 등의 불선법들은 모두 괴로움의 원인이 되고 생사윤회의 원인이 된다. 부처님께서는 갈애를 가장 대표적인 원인으로 들고 계시는 것이다.

 

"환희와 탐욕이 함께 하며(nandi-rāga-sahagatā)’라는 것은 [갈애가] 환희와 탐욕과 뜻으로는 하나라는 뜻이다.”(DA.īi.799)

 

② 욕애(慾愛), 유애(有愛), 무유애(無有愛): 

욕애(慾愛, kāma-taṇhā):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 -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 kāma-taṇhā]’란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에 대한 탐욕의 동의어이다.”(DA.īi.800)

 

유애(有愛, bhava-taṇhā): 색계․무색계에 대한 갈애(常見) -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 bhava-taṇhā]’란 존재를 열망함에 의해서 생긴 상견(常見, sassata-diṭṭhi)이 함께 하는 색계와 무색계의 존재에 대한 탐욕과 禪을 갈망하는 것의 동의어이다.”(DA.īi.800)

 

무유애(無有愛,, vibhava-taṇhā): 비존재에 대한 갈애(斷見) -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갈애[無有愛, vibhava-taṇhā]’라는 것은 단견(斷見, uccheda-diṭṭhi)이 함께 하는 탐욕의 동의어이다.”(DA.īi.800)

 

⑶ [갈애에 대한 연기적 고찰]

 

“다시 비구들이여, 이런 이 갈애는 어디서 일어나서 어디서 자리잡는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 있으면 거기서 이 갈애는 일어나고 거기서 자리잡는다.

 

그러면 세상에서 어떤 것이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인가? 

① 눈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귀는 … 코는 … 혀는 … 몸은 … 마노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일어나고 여기서 자리잡는다.

 

② 형상은 … 소리는 … 냄새는 … 맛은 … 감촉은 … 마음의 대상[法]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일어나고 여기서 자리잡는다.

 

③ 눈의 알음알이는 … 마노의 알음알이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일어나고 여기서 자리잡는다.”

 

④ 눈의 감각접촉[觸]은 … ⑤ 눈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 ⑥ 눈의 인식은 … ⑦ 눈의 의도는 … ⑧ 눈의 갈애는 … ⑨ 눈의 일으킨 생각은 … ⑩ 눈의 지속적인 고찰[伺]은 … 귀의 지속적인 고찰은 … 코의 지속적인 고찰은 … 혀의 지속적인 고찰은 … 몸의 지속적인 고찰은 … 마노의 지속적인 고찰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일어나고 여기서 자리잡는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라 한다.

                                                       ”(디가 니까야 대념처경(D22) §19)

 

6근-6경-6식-6촉-6수-6상-6사-6애-6심-6사

⑴ 멸성제
 
① 멸성제는 열반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苦滅聖諦]이다. 그것은 바로 그러한 갈애가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함, 버림, 놓아버림, 벗어남, 집착 없음이다.
                                             ”(상윳따 니까야 초전법륜 경(S56:11) §7)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함(asesa-virāga-nirodha)’이라는 등은 모두 열반의 동의어들이다. 열반을 얻으면 갈애는 남김없이 빛바래고 소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갈애가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함이라고 설하셨다.
 
열반은 하나이지만 그 이름은 모든 형성된 것들의 이름과 반대되는 측면에서 여러 가지이다. 즉 남김없이 빛바램, 남김없이 소멸함, 버림, 놓아버림, 벗어남, 집착 없음, 탐욕의 소멸, 성냄의 소멸, 어리석음의 소멸, 갈애의 소멸, 취착 없음, 생기지 않음, 표상 없음, 원함 없음, 업의 축적이 없음, 재생연결이 없음, 다시 태어나지 않음, 태어날 곳이 없음, 태어나지 않음, 늙지 않음, 병들지 않음, 죽지 않음, 슬픔 없음, 비탄 없음, 절망 없음, 오염되지 않음이다.”(DA.īi.801) - 26개의 동의어를 들고 있음. 후대에는 모두 43개의 동의어를 듦.
 
② 열반은 탐진치의 소멸이다 
“도반 사리뿟따여, '열반, 열반'이라고 합니다. 도반이여, 도대체 어떤 것이 열반입니까?”
 
“도반이여, 탐욕의 소멸, 성냄의 소멸, 어리석음의 소멸 ― 이를 일러 열반이라 합니다.
                                                      ”(상윳따 니까야 열반 경(S38:1) §3)
 
주석서적인 논의를 종합하면 열반은 출세간도를 체험하는 순간(magga-kkhaṇa)에 체득되는 조건 지워지지 않은 상태(asaṅkhata)를 뜻한다. 이러한 조건 지워지지 않은 상태를 체득하는 순간에 번뇌가 소멸하기(kilesa-kkhaya) 때문에 열반은 ‘탐욕의 소멸, 성냄의 소멸, 어리석음의 소멸’이라고 불리는 것이지, 단순히 탐/진/치가 없는 상태로 쇠약해지고 무기력해진 것이 열반은 아니다.(SA.īi.88 참조)
 
③ 갈애의 소멸에 대한 연기적 고찰 
“다시 비구들이여, 그런 이 갈애는 어디서 없어지고 어디서 소멸되는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 있으면 거기서 이 갈애는 없어지고 거기서 소멸된다. 그러면 세상에서 어떤 것이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인가?
 
① 눈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귀는 … 코는 … 혀는 … 몸은 … 마노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된다.
 
② 형상은 … ③ 눈의 알음알이는 … ④ 눈의 감각접촉[觸]은 … ⑤ 눈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은 … ⑥ 눈의 인식은 … ⑦ 눈의 의도는 … ⑧ 눈의 갈애는 … ⑨ 눈의 일으킨 생각은 … ⑩ 눈의 지속적인 고찰[伺]은 … 귀의 지속적인 고찰은 … 코의 지속적인 고찰은 … 혀의 지속적인 고찰은 … 몸의 지속적인 고찰은 … 마노의 지속적인 고찰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된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라 한다.
                                                       ”(디가 니까야 대념처경(D22) §20)
 
6근-6경-6식-6촉-6수-6상-6사-6애-6심-6사
 
④ [열반은 버려서 실현된다] 
초기불교의 궁극적인 메시지를 하나로 말해보라면 그것은 열반이다. 두 가지로 표현해보라면 열반과 열반에 이르는 길이다. 부처님께서 특히 출가자에게 고구정녕하게 말씀하신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다. 열반이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하자면 버림이다. 그래서 초기경의 도처에서 열반은 “모든 형성된 것들[行]이 가라앉음, 모든 재생의 근거를 놓아버림[放棄], 갈애의 소진, 탐욕의 빛바램[離慾], 소멸, 열반이다.”(A3:32 등)로 표현되고 있고, “탐욕의 소멸, 성냄의 소멸, 어리석음의 소멸”(S38:1 등)이라고도 설해지고 있으며, “[세속을] 전적으로 역겨워함[厭惡, 넌더리], 욕망의 빛바램, 소멸, 고요함, 최상의 지혜, 바른 깨달음, 열반”(D14 등)이라는 문맥에서도 많이 나타난다.
 
이것을 실현하는 길이 바로 도, 저 팔정도요, 더 풀어서 말하면 37가지 깨달음의 편에 있는 법들(37조도품)이다. 이런 열반의 실현에 전념하는 방법으로 세존께서는 출가를 말씀하셨으며, 이런 출가의 삶이야말로 이세상의 진정한 복밭[福田]이라 강조하셨다.
 
⑤ [열반은 삶에 대한 의미부여가 끝나야 드러난다] 
이처럼 열반은 온갖 종류의 삶에 대한 의미부여가 끝나야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를 위시한 인간들은 출가자든 재가자든 삶에 대한 무한한 의미부여를 하고 있다. 삶이 아닌 것은 허무요 끝장이라 생각하며 바들바들 떨어온 게 중생의 역사 아니던가? 물질문명의 극치를 구가하는 현대의 우리는 어느 시대보다 삶에 대한 강한 의미부여를 하고 있다. 그런데 삶에 대한 의미부여가 끝나야 열반이라니 이 무슨 해괴망측한 망발인가!
 
이런 인간들의 구미를 맞추려다보니 역사적으로 불교 안에서부터 가장 난도질당하고 곡해당해 온 것이 부처님 제일의 메시지인 이 열반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래서 열반은 무주처열반으로 이해되기 시작했고, 생사뿐만 아니라 열반마저도 허망하다고 이해되었고, 마침내 생사가 그대로 열반이라고 주장하게 되었으며, 탐진치 그대로가 열반이라는 말까지 서슴없이 내뱉어 왔다. 그런데 이런 말들의 이면에는 생사로 대표되는 삶에 대한 무한한 의미부여가 들어있고, 이 삶 속에서 오래오래 단맛을 쪽쪽 빨아먹으리라는 간절한 소망이 들어있다고 하면 너무 심한 표현일까?
 
혹자는 반박할 것이다. 생사를 떠난 열반이 따로 있다고 한다면 이분법적인 사고라고. 그에게 말하고 싶다. 그대는 이미 스스로가 이 삶에 의미부여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태도로는 절대로 열반을 알 수도 볼 수도 실현할 수도 없다고.
 
⑥ [스승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부처님 제자다. 제자가 자기 스승의 말씀에 대고 자신의 부질없는 생각으로 마구 황칠을 해대면 곤란하지 않은가? 부처님께서 세속에 넌더리치고 열반을 실현하라고 했으면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른 제자 아닌가? 세속문제는 세속의 정치인, 경제인, 지식인, 문화인, 의료인 등 세속전문가들에게 맡겨두면 된다. 출가자인 나는 열반을 바르게 실현하고 드러내는 전문가가 되어야하지 않는가?
 
⑵ 도성제
 
① 도성제는 팔정도다 
“도반이여, 그러면 이러한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도가 있고 도닦음이 있습니까?” 
“도반이여, 이러한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도가 있고 도닦음이 있습니다.” 
“도반이여, [252] 그러면 어떤 것이 이러한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도이고 어떤 것이 도닦음입니까?” 
“도반이여,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구성요소로 된 성스러운 도[八支聖道]이니,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삼매입니다. 도반이여, 이것이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도이고 이것이 도닦음입니다.
                                                    ”(상윳따 니까야 열반 경(S38:1) §4)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의 성스러운 진리[苦滅道聖諦]이다. [422]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八支聖道]이니, 즉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정진[正精進], 바른 마음챙김[正念], 바른 삼매[正定]이다.
                                              ”(상윳따 니까야 초전법륜 경(S56:11) §8)
 
② 팔정도의 정의 
“①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견해[正見]인가? 비구들이여, 괴로움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일어남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에 대한 지혜 ― 이를 일러 바른 견해라 한다.
 
②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사유[正思惟]인가? 도반들이여, 출리에 대한 사유, 악의 없음에 대한 사유, 해코지 않음[不害]에 대한 사유 ― 이를 일러 바른 사유라 한다.
 
③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말[正語]인가? 비구들이여, 거짓말을 금하고 중상모략을 금하고 욕설을 금하고 잡담을 금하는 것 ― 이를 일러 바른 말이라 한다.
 
④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행위[正業]인가? 비구들이여, 살생을 금하고 도둑질을 금하고 삿된 음행을 금하는 것 ― 이를 일러 바른 행위라 한다.
 
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생계[正命]인가?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는 그릇된 생계를 제거하고 바른 생계로 생명을 영위한다. ―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바른 생계라 한다.
 
⑥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정진[正精進]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악하고 해로운 법들을 일어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의욕을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이미 일어난 사악하고 해로운 법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의욕을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유익한 법들을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의욕을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이미 일어난 유익한 법들을 지속하게 하고 사라지지 않게 하고 증장하게 하고 충만하게 하고 개발하기 위해서 의욕을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바른 정진이라 한다.
 
⑦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마음챙김[正念]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몸에서 몸을 따라 관찰하면서[身隨觀] 머문다. 세속에 관한 욕심과 정신적 고통을 제쳐두고서 열심히,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 챙기며 머문다. 느낌들에서 … 마음에서 … 법들에서 법을 따라 관찰하며[法隨觀] 머문다. 세속에 관한 욕심과 정신적 고통을 제쳐두고서 열심히, 충분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며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바른 마음챙김이라 한다.
 
⑧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삼매[正定]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모든 감각적 욕망을 떨쳐내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떨쳐버리고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인 고찰[伺]을 수반하며, 멀리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喜, pīti]과 행복감[樂, sukha]을 특징으로 하는 초선(初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여기 비구는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인 고찰[伺]을 가라앉혔기 때문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자기 내면의 것이고, 확신(sampasādana)이 있으며, 마음의 단일한 상태이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없고,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제2선(二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여기 비구는 희열이 사라졌기 때문에 평온하게 머물고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며[正念正知] 몸으로 행복을 경험한다. 이 때문에 성자들이 그를 두고 ‘평온하게 마음 챙기며 행복에 머문다’라고 일컽는 제3선을 구족하여 머문다.
 
여기 비구는 즐거움도 버렸고 괴로움도 버렸고 아울러 그 이전에 이미 기쁨과 슬픔이 사라졌기 때문에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의 청정함이 있는[捨念淸淨] 제4선을 구족하여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바른 삼매라 한다.”(디가 니까야 대념처경(D22) §21)
 
[4성제 종합] 
“바르게(sammā) 그 스스로 모든 법들을 깨달으셨기 때문에 바르게 깨달으신 분(Sammā-sambuddha, 正等覺者)이라 한다. 그분은 모든 법을 바르게 그 스스로 깨달으셨다. 최상의 지혜로 알아야 할 법들(즉, 사성제)을 최상의 지혜로 알아야 한다(abhiññeyya)고 깨달으셨고, 철저히 알아야 할 법들(즉, 고제)을 철저히 알아야 한다(pariññeyya)고 깨달으셨고, 버려야 할 법들(즉, 집제)을 버려야 한다(pahātabba)고 깨달으셨고, 실현해야 할 법들(즉, 멸제=열반)을 실현해야 한다(sacchikātabba)고 깨달으셨고, 닦아야 할 법들(즉, 도제)을 닦아야 한다(bhāvetabba)고 깨달으셨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설하셨다.
 
“완전히 알아야 할 것을 완전히 알았고 
닦아야 할 것을 닦았으며 
버려야 할 것을 버렸기 때문에 
바라문이여, 나는 깨달은 자(Buddha)다(Sn.558)””(청정도론 VII.26)
 
사성제 - 최상의 지혜로 알아야 함 - abhiññeyya 
고성제 - 철저하게 알아야 함- pariññeyya 
집성제 - 버려야 함 - pahātabba 
멸성제 - 실현해야 함 - sacchikātabba 
도성제 - 닦아야 함 - bhāvetabb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