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교리 및 수행

고행에 대한 불교와 자이나교의 논쟁 / 김미숙

실론섬 2015. 3. 11. 23:00

고행에 대한 불교와 자이나교의 논쟁 / 김미숙

논쟁의 불교학 (6)

불교평론[16호] 2003년 09월 10일 (수)



머리말


불교와 자이나교가 똑같이 슈라마나(沙門)의 일원으로서 출발하였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마하비라의 자이나교가 파르슈와 교단이라는 기성 종교를 동일한 교단 차원에서 재구성한 것이었던 반면에, 고타마 붓다의 불교는 분명히 새롭고 혁신적인 종교 교단이었다.


그 첫째 이유는 고행(苦行, tapas)을 부정했다는 데 있다. 고래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수행 방법들 중 최고라고 공인된 고행을 닦지 않아도 해탈할 수 있다고 주창했던 붓다는 가히 혁명가라는 칭호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이다. 요컨대, 자이나교와 불교는 동시에 반(反)브라만교 운동에 앞장섰지만, 서로 화합할 수 없었던 가장 큰 요인은 고행에 대한 시각의 차이에 있었다.


자이나교는 해탈로 이르는 최상의 수단이 고행이라는 데서 출발하여 고행 자체가 목적이 될 만큼 중요시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 반면에 불교는 자이나교의 고행을 헛된 수고일 따름이라고 비난하는 데서 출발하여 고행 없이도 해탈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고행에 대한 견해의 차이는 브라만교의 희생 제의에 대한 반대라는 동일한 선상에서 출발하여, 자기 정화(淨化)를 강조하는 방식에서 차이가 나게 된 것이라 보여진다. 베다를 기조로 하여 신(神)에게 바치는 희생 제의가 갈수록 잔인해지는 추세에서, 죄 없는 동물을 희생하여 천상에 나기를 기원하기보다는 인간 스스로가 자신을 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맥락에서 고행을 강조했던 슈라마나 운동이 그 방법론에서 자이나교와 불교의 양립 구도로 나뉘게 되었던 것이다.


자이나교에서는 고행을 첫째로 꼽았던 반면에 불교에서는 고행은 육신만을 괴롭힐 뿐, 아무런 이득이 없다고 하였다. 탐욕, 성냄, 어리석음, 즉 3독(毒)이라는 내면의 불은 오로지 마음의 수련을 통해서 정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붓다의 교설이었다. 그러나 자이나교에서도 윤회를 초래하는 주요 원인으로서 네 가지의 오염된 감정, 즉 분노, 교만, 기만(欺瞞), 탐욕 등을 꼽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감정조차도 업 물질을 영혼과 부착시키는 결과를 낳으며, 업 물질을 떨쳐 내는 길은 고행을 하는 것이 최선책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자이나교와 불교 사이에 벌어졌던 논쟁 중에서 고행과 그 목적에 초점을 두고 논의해 보고자 한다.


1. 고행을 포기한 붓다


고타마 붓다의 수행 이력은 널리 알려져 있듯이, 스물아홉 살에 출가하여 6년 동안 갖가지 고행을 다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극한적인 고행 끝에 그 무용(無用)함을 터득하고 포기를 결심한 그는 수자타의 우유죽 공양을 받아먹고 보리수 아래 앉아서 고요히 명상한 끝에 최상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한다. 그의 나이 서른다섯 살 때였다.


그 후로 붓다, 즉 깨달아 해탈한 이로서 전법을 펼쳤던 그의 중요한 교설은 양 극단을 피하라는 것이었다.

“쾌락도 고행도 결코 깨달음을 주지는 못한다. 중도(中道)의 수행을 하라.”

붓다는 거듭 되풀이하여 이렇게 강조했다.


과연 붓다가 부정했던 대로 고행은 깨달음을 얻는 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가? 그렇다면, 오로지 고행만이 해탈로 이르는 지름길이라고 역설하는 마하비라의 교설, 즉 자이나의 가르침은 붓다의 말처럼 허망하고 그릇된 외도의 설일 뿐인가?


흔히 자이나교를 지칭할 때, 극단적인 고행을 일삼는다는 수식으로 많이 묘사되곤 한다. 특히 그들의 고행이 어리석은 일에 불과하다고 비난했던 붓다를 비롯한 불교도들은 나행(裸行)의 자이나 수행자들을 ‘무참(無慙)’ 외도라거나 벌거숭이 무리라고 부르기를 주저치 않았다. 그런데 불교에서 폄하해서 말하듯이, 부끄러움도 없이 벌거벗고 다니는 고행자들을 자이나 교단에서는 비할 데 없이 위대한 스승들이라 칭송한다.


무슨 이유로 이와 같이 극단적인 견해의 차이를 보이는 것인가? 더구나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붓다가 포기했다는 고행은 말 그대로 최극단적인 고행일 뿐이고, 출가자에게 요구했던 그의 지침들은 또 다른 고행일 뿐이라고 한다. 출가 수행 자체가 재가자로서는 도저히 따라 하기 힘든 고행의 길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소위 ‘4의(依)’라고 말해지는 초기 불교의 수행 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분소의(糞掃衣)를 입는다. 이는 의생활의 기본을 정한 것으로서 옷은 남들이 버린 천 조각을 모아서 만든 옷만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항상 밥을 빌어먹는다. 이는 탁발 걸식을 식생활의 기본으로 한다는 것이다.

셋째, 나무 아래서 정좌(靜坐)한다. 이는 주생활로서 지붕이 없는 노천의 나무 아래서 거처할 것을 정한 것이다.

넷째, 부란약(腐爛藥)을 쓴다. 이는 갖가지 약을 쓰지 않도록 제한하고 최소한의 약만을 쓰도록 하는 규정이다.


이상의 원칙들은 평범한 재가자의 생활과 비견해 볼 때, 말 그대로 고행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고타마 붓다가 고행의 무용함을 강조하고 중도의 수행을 불교의 핵으로 삼았다고 알고 있다. 따라서 고타마 붓다가 부정하고 비난했던 고행의 수위와 그러한 비판의 진의는 어디에 있었는지를, 자이나교와의 대론을 중심으로 알아보자.


2. 거룩한 고행 대 무용한 고행


고타마 붓다가 출가할 당시 인도 사회는 브라만교의 폐해에 대한 일반 민심의 반발과 슈라마나로 일컬어지는 일단의 사상가들의 등장으로 큰 변혁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노력하다, 고행하다’라는 뜻의 동사 ‘슈람’(suram)에서 비롯된 슈라마나는 광의로는 수행자를 가리키는 말로서 선한 일을 닦음으로써 악한 일을 제어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을 뜻한다. 일반적으로는 출가하여 수행에만 전념하는 이를 말하며, 불교 교단에서도 출가자를 가리키는 말로 널리 쓰였다. 고타마 붓다 스스로도 슈라마나라는 말로서 자칭하였고, ‘슈라마나 고타마’, 즉 ‘사문 구담(瞿曇)’이라고 경전에서 소개되고 있다. 그의 제자들이 붓다를 가리켜서 ‘대사문’이라고 존칭하여 부른 예도 있지만, 의미상으로는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리고 슈라마나에 대한 인도 일반에서의 묘사나 호칭에서는 그들의 생활 양식이 그대로 배어 난다. 예를 들면 슈라마나는 탁발로 생활하며 한 곳에 머물러 살지 않으며, 여기 저기 떠돌아다니고, 혼자서 지내거나 스승이나 제자들과 함께 집단을 이루어 지내기도 하며, 털투성이의 몸을 드러내 놓고 다니며, 손톱을 길게 기르거나, 옷 한 벌만으로 지탱한다.


사람들은 그들을 자틸라(jat.ila : 헝클어진 머리), 니간타(nighn.t.ha : 지나의 추종자), 아첼라카(acelaka : 나체 수행자), 에카사타카(ekasa칣.aka : 한 벌의 옷만 입은 자), 파릿바자카(paribba칓aka : 종교적 탁발 수도자) 등으로 불렀는데, 이러한 이름들 중에서 니간타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그들의 외양에 따라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슈라마나는 그들의 외모만으로도 기존의 수행자 내지 브라만교의 수행자들과는 확연히 구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 A. K. Narain, Studies in History of Buddhism(1st: 1980, 2nd: 2000, India: B. R. Publishing Corporation), p.73 참조.


그런데 히라카와 아키라(平川 彰)는 불교 경전에서의 슈라마나란, 일반 사상계의 출가 수행자를 의미하는 것이며 브라마나(bra칑man.a,婆羅門)는 포함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사문은 중인도에 아리야 인이 진출해서 구래(舊來)의 바라문 종교와 다른 새로운 종교를 설하는 종교자가 나왔기 때문에 이 신흥 종교자에게 부여된 명칭이었다.”2)라고 말한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기원전 6, 5세기경의 신흥 종교가들을 지칭하는 ‘새로운 단어’가 사문, 즉 슈라마나였던 것은 아니다. 슈라마나의 전통은 훨씬 더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平川 彰, 석혜능 역, 《비구계의 연구》(서울 : 민족사, 2002), p.196.


슈라마나란, 고행 수행의 원류에 서 있는 단어이다. 슈라마나는 아리얀족 내지 브라만교적 전통과는 무관하게 인도 대륙에서 고래로부터 이어져 오던 고행 전통을 따르는 수행자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자이나교에 따르면, 제23대 조사인 파르슈와가 이끄는 교단이 대표적인 슈라마나 교단으로서 정립되어 있었으며, 제24대 마하비라대에 이르러서 마하비라를 추종하는 ‘지나(jina) 교단’과 고타마를 추종하는 ‘붓다 교단’으로 나뉘어지게 되었다고 본다.


일설에서는, 두 종교 모두 5계(戒)를 내세우는데, 그 중 공통적인 4계는 파르슈와 교단의 계였다고 한다. 여기에 마하비라 대에 이르러 무소유를 더하고, 붓다 대에 이르러 무소유 대신에 불음주를 더하게 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불교 경전에서 자이나 교도들을 ‘네 가지 서약을 준수하는 사람들’(ca칣uya칖a-susam.vuto)이라 부르고 있는 것도 파르슈와 교단의 4계를 따르는 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마하비라의 부모는 파르슈와의 추종자로서 교단의 가르침을 따라서 단식사(斷食死)로 생을 마감했다고 전하는데, 이러한 단식사는 최상의 수행법 중 하나로서 현재까지도 자이나 교단 내에서 실행되고 있는 살레카나(sallekhana)를 가리킨다. 3) 살레카나란 음식을 끊음으로써 죽음에 이르는 의식의 일종으로서, 일반적인 자살과 동격으로 취급될 수 없는 제의적(祭儀的)인 죽음이라 할 수 있다. 전적으로 자발적인 선택에 의해 평온하게 이루어지는 살레카나는 삼매사(三昧死, sama칍hi-maran.a)라고도 한다.


또한 파르슈와는 역사적으로 기원전 872∼772년에 생존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으므로, 최소한 슈라마나의 전통은 기원전 9세기경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본다.


그런데 자이나교 전통에 따르면, 제1대 조사인 리샤바(R.s.abha)부터 불살생(不殺生, ahim.sa)의 교의를 지키기 위해서 고행을 했다고 한다. 불살생의 원칙을 지키기 위한 독특한 자이나교의 행법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지만, 그 대부분은 불교도들이 극단적인 고행이라고 비난했던 것들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입 안으로 미세한 벌레들이 들어가서 생명을 잃을까 봐 항상 천으로 입 가리개(muh-patti)를 하고 다닌다든지, 걷거나 앉을 때에도 행여나 생물체를 죽일까 봐서 털채로 쓸고 다니거나 깨끗이 쓴 다음에 자리에 앉는 것 등이다. 이렇게 불살생의 교의를 지키기 위한 구체적인 행법이 정립된 것은 마하비라 때였다고 한다.


마하비라의 고행은 기존의 슈라마나적 전통에 따른 것이기는 했지만 주로 불살생과 무소유를 실천하기 위한 것이었다. 욕망에 이끌려 사는 삶은 쾌락이기보다는 고통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고통, 정확히 말하자면 욕망의 결과로써 받게 되는 고통이, 차라리 옷을 벌거벗고 다니는 것보다 더한 고통이라는 것을 철저히 인식한 결과로 시작한 고행이었다.


수행자들, 그들이 고행의 길을 선택하는 동기는 결코 염세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감행하는 위대한 포기의 동기는 세간에서 영위하는 삶의 무의미성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의 실패나 절망 때문이 아닌 새로운 모색으로서 출가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따라서 출가 후의 어떤 고행도 이미 고통은 아니다. 재가자의 삶이 얼마나 큰 고통이라는 것을 알고 난 뒤의 고행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출가는 염세가 아니라 세상에 대한 멸시이자, 경시에 가깝다. 염세는 소극적이지만, 출가와 고행은 매우 적극적인 실천 의지와 행동을 필요로 한다.


물론 마하비라에 대한 첫째 가는 비난의 대상인 나행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가 처음부터 옷을 벗고 수행했던 것은 아니었다. 붓다가 그랬듯이, 마하비라도 기존의 수행자들이 행하던 갖가지 고행을 다 해 보는 과정을 겪었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옷조차 거추장스러운 소유물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옷 한 조각도 업 물질을 더할 뿐이라는 자각 아래 걸치고 있던 단 한 조각의 옷마저도 떨쳐 버리기로 결심한 마하비라는 벌거벗은 알몸으로 곧게 선 채로 아무런 미동도 없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곧바로 마하비라는 완전지(完全智)를 얻었고 해탈에 이르렀다.


그 후로 마하비라가 해탈을 성취할 때 취했던 자세는 카욧사르가(kayotsarga)라고 하여 자이나의 성상(聖像)을 표현하는 기본 자세가 되었다. 카욧사르가의 지나 상, 즉 나체의 입상(立像)은 완벽한 자기 제어와 완전한 포기, 무소유와 고행 등 자이나의 이상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상이다. 특히 카욧사르가 자세는 영혼이 육신, 즉 업 물질과 완전히 분리된 상태를 의미하며, 이러한 자세의 지나는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한다.


카욧사르가 자세는 자이나의 고행을 상징하는 표상이 되었고, 그 자세만으로도 고행자로서 최상의 경지에 도달한 이를 가리키며, 그러한 이상을 위해서 취하는 고행 방법으로 자리 잡았다. 자이나 교도 내지 수행자는 카욧사르가 자세를 취한 채로 명상함으로써 업 물질을 제거하는 단계를 쌓아 가는 것이다.


그러나 붓다는 고통을 감수하여 업을 없앤다는 것은 망상이라고 비난한다. 특히 앉지 않고 선 채로 지낸다고 하여, 결코 선업을 쌓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그러한 고통 자체를 끊고 그만 두는 것 자체가 악업을 멸하고 선업을 쌓게 되는 계기가 되리라고 한다. 붓다는 경전 곳곳에서 말하고 있다. 이미 지은 악업 때문에 현재의 고통을 당하는 자들이 바로 자이나 고행자들이라고.


불교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지만, 자이나 수행자들의 고행은 수천 년 동안 너무나 성스럽고 거룩한 표징으로서 추앙을 받아 왔던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고행에 대해서 불교 경전에서는 어떻게 비난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3. 불경 속의 대론


불교 경전에는 자이나 교도들이 유독 많이 등장하여 붓다 또는 불교도의 대론자로서 논전을 펼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대표적인 율장의 하나인 《마하승기율》(摩訶僧祇律)에서도 니건자(尼ㅜ子)가 등장하는데 그 정황이 매우 독특하다.5) 5) 《한글대장경 마하승기율》 제2권, 이영무 역(서울 : 동국역경원, 1995), pp.333∼335 참조 요약.


부처님이 왕사성에 머물 때였다. 아사세 왕이 마니(man.i), 즉 보석을 얻어서 친척이었던 이차(離車, licchav┓)족에게 주었다. 이차족 사람들은 그것으로 보배 발우를 만들고 갖가지 보물을 가득 담아서 세존께 바쳤다.


부처님께서 이차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마니 발우는 받을 수 없으며, 이 속에 있는 작은 보물들과 보배 그릇도 또한 받을 수 없다. 청정한 것은 당연히 받지만, 청정하지 않은 것은 받을 수 없다.”


이차들이 보배 발우를 가지고 돌아가서 다시 의논하였다. 누군가 니건자에게 주자고 하자 또 누군가 말하였다.


“그는 술 마시고 남은 찌꺼기나 먹는 나귀이니, 이 보배 그릇과 작은 보물들은 줄 수 없다. 마땅히 끈으로 주머니를 얽어서 빈 발우를 담아서 주어야 한다.”


그들 중에서 니건자를 존경하는 이가 먼저 가서 이러한 사정을 말해 주고서 빈 발우는 받지 말라고 하였다. 이차가 발우를 들고 오자 니건자가 말하였다.


“이것은 빈 발우이니 받을 수 없다. 그리고 먼저 구담 사문에게 준 뒤에 나에게 주었으니 마땅히 받을 수 없다. 내가 이제 받는 것은 오직 한 가지 경우뿐이다. 만일 나이 젊은 이차들의 혀[舌]를 끊어서 소금을 발라 기름에 튀겨 발우 가득히 담아 가지고 오면 내가 마땅히 받겠다.”


그리하여 보내 주면 받지 않고 돌려주기를 세 번이나 되풀이하였다. 그러자 이차들이 말하였다.


“이는 기이한 일이다. 우리가 후의로 그에게 주는데 그가 도리어 원독(怨毒)을 내는구나.”


그들은 즉시 사람을 보내어 니건자를 몽둥이로 쳐서 죽였다.


여러 비구들이 이 인연을 세존께 갖추어 아뢰었다.


“어찌하여 니건자가 혀를 잘못 놀려 몸을 해쳤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단지 오늘에만 혀를 잘못 놀리다가 몸을 망친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위와 같이 발우 하나로 인해서 목숨을 잃고 마는 니건자의 사례는 붓다가 청정한 발우란 무엇인지 예를 들어 설명할 때 나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 내용은 니건자의 입장에서 볼 때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을 만큼 왜곡된 것이라 보여진다. 왜냐하면 기본적인 불살생의 교의를 지키기 위해서 극한적인 자제심으로 기괴하리만큼 세심하게 모든 주의를 다하여 생활할 것을 권장하는 자이나의 교의와는 천양지차를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예는 극단적인 경우이고 대체로 니건자가 등장하는 경전상의 대론은 그 대부분이 교리상의 대립을 주제로 하고 있다. 붓다가 깨달은 후에 제일성(第一聲)으로 강변했던 내용이 고행의 무용함이었듯이, 경전 속의 대론도 그와 관련된 내용이 많다.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서 《우팔리경》을 들어 보자. 이 경에는 업론을 중심으로 하여 고행에 대한 논박뿐 아니라 자이나교와 불교의 상호 교섭 관계 및 그 항력(抗力)까지도 짐작케 해 주는 내용이 들어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아래의 경문은 그 대강을 간추려 요약한 것이다.《아함경》 제1권, 돈연 역(서울: 민족사, 1994), pp.39∼63 참조 요약.


세존이 날란다에 있는 팝팔리카 망고 숲에 머물고 계셨다. 그 때 자이나교의 지도자인 나타풋타가 많은 신자들과 함께 날란다에 머물고 있었다. 그런데 자이나 교단의 한 사람으로서 오랫동안 고행을 했던 수행자가 날란다에서 탁발하다가 망고 숲에 있는 세존이 계신 곳으로 가게 되었다. 세존과 인사를 나누고 나서 한쪽으로 물러서자, 세존이 자리를 권하였다. 세존이 고행자에게 물었다.


“고행자여, 자이나 교단의 지도자인 나타풋타는 몇 가지 행위에 의해서 악한 업이 이루어지고 악한 업이 진행된다고 가르치고 있는가?”

“고타마여, 나타풋타는 세 가지 업, 즉 몸, 입, 뜻의 업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고행자여, 그 세 가지 업은 각각 별개의 것인가?”

“그것은 각기 별개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타풋타는 그 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무겁다고 가르치는가?”

“몸의 죄가 가장 무겁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입이나 뜻의 업은 그만큼 무겁지 않습니다.”

“고행자여, 나는 뜻의 업이 가장 무겁다고 가르친다. 악한 행위를 하는 데 있어서 뜻의 업이 가장 무겁고 비난받을 만한 것이다.”


고행자가 이 말을 세존에게 세 번이나 되풀이하여 확인한 뒤, 나타풋타가 머물고 있는 곳으로 갔다. 그 고행자가 나타풋타에게 세존과 나누었던 대화를 그대로 전하자, 나타풋타가 대답했다.

“잘 말하였다. 대단치 않은 뜻의 업이 어찌 몸의 업을 능가할 수 있단 말인가? 악한 행위에 있어서 몸의 업이 가장 무거운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재가 신자 우팔리가 말하였다.


“이에 대해 사문 고타마를 논파하러 가겠습니다. 존귀하신 스승이시여! 저는 그 곳으로 가서 이 논제에 대해 사문 고타마를 논파해 버리겠습니다.”

우팔리는 세존에게 가서 절을 하고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자이나 교도인 고행자가 이 곳에 왔었습니까?”

그렇다고 하면서 고행자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다시 들려주고 물었다.


“우팔리여, 지금 어떤 자이나 교도가 움직이면서 수많은 작은 생물들의 목숨을 빼앗았다고 하자. 그에 대해 나타풋타는 어떻게 말하는가?”

“나타풋타는 의식하지 못한 채 저질러진 일은 큰 죄악이 아니라고 합니다.”

“만약 의식했다면?”

“커다란 죄악이 됩니다.”

“우팔리여, 그 의식은 무엇에 의거한 것인가?”

“뜻의 업에 의한 것입니다.”

결국……, 우팔리는 세존께 승복하고 만다.


“세존이시여, 저는 제일 첫 비유만으로도 이미 흡족하였습니다. 지금까지 계속 맞서서 논쟁한 까닭은 오직 세존으로부터 갖가지 질문과 답을 듣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는 세존께 귀의합니다. 그 가르침과 비구 승단에게 귀의합니다. 세존께서는 부디 저를 오늘부터 목숨 있는 날까지 우바새로 거두어 주소서.”

집으로 돌아온 우팔리는 문지기에게 말하였다.


“오늘부터 나는 자이나 교도의 남녀에게는 문을 열어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세존의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들에게만 문을 열어 줄 것이다. 만약 자이나 교도가 온다면 이렇게 말해야 한다. ‘멈추시오. 주인이신 우팔리는 이제 사문 고타마의 제자가 되셨소. 자이나 교도의 남녀에 대해서는 문을 열지 못하게 하셨소. 만약 당신이 먹을 것을 구하러 오셨다면 그 곳에서 기다리도록 하시오. 그러면 먹을 것을 가져다 주겠소.’ 이렇게 말해야 한다.”


우팔리가 사문 고타마의 제자가 되었다는 말을 들은 그 고행자는 나타풋타에게 달려갔다.

“존귀하신 이여, 우팔리가 정말로 사문 고타마의 제자가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고행자여, 그럴 리가 없다. 당치도 않다. 오히려 사문 고타마가 우팔리의 제자가 되었다면 모르지만…….”

결국 이를 믿지 못하는 나타풋타에게 고행자는 직접 확인하고 오겠노라고 한다. 우팔리 집으로 갔을 때, 고행자는 문지기로부터 우팔리가 지시했던 대로의 말을 듣는다.


“아니, 나는 먹을 것이 필요해서 온 것이 아니다.”

그렇게 대답하고 황급히 되돌아와서 나타풋타에게 그대로 전하자 도저히 믿지 못하며 말했다.

“내가 가서 직접 확인해 보리라.”

그리하여 나타풋타는 무리를 이끌고 우팔리의 집으로 갔다. 문지기는 똑같은 말을 하면서 제지했다. 나타풋타가 말했다.


“주인에게 가서 이렇게 전하라. ‘자이나 교단의 지도자인 나타풋타가 교도들과 함께 문 밖에 서 있는데, 주인님을 만나고 싶어합니다.’라고 말이다.”

문지기의 전언을 들은 우팔리는 말하였다.


“응접실에 자리를 마련하라.”

나타풋타가 무리들과 함께 응접실로 가자, 예전에 나타풋타를 앉혔던 가장 높은 좌석에 자신이 앉아서 자리를 권하였다. 이를 본 나타풋타가 말하였다.


“우팔리여, 제정신인가? 사문 고타마를 논파하고 오겠다고 하더니 제정신을 잃고 돌아온 것이 아닌가? 마치 고환을 뽑으러 갔던 사람이 도리어 고환이 뽑혀서 돌아온 것처럼, 또 눈알을 도려 내러 갔던 사람이 눈알이 뽑혀져 돌아온 것처럼, 그대는 사람을 유혹하는 사문 고타마의 주술에 걸린 것이 아닌가?”


“존귀하신 이여, 사람을 유혹하는 마술은 참으로 훌륭한 것입니다.존귀하신 이여, 어리석은 자이나 교도의 말은 어리석은 사람들을 물들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현명한 사람들까지 물들일 수 없습니다. 또한 단련시킬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완전한 깨달음에 도달한 존귀한 분이신 세존의 말씀은 현명한 사람을 물들일 수 있습니다. 또한 단련시킬 수도 있고 가르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들을 물들일 수는 없습니다.”


“우팔리여, 이제 그대는 누구의 제자라고 인정해야 하는가?”

우팔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세존이 계신 곳을 향해 합장하면서 말했다.


“확고하고 미혹됨이 없는 분, 마음의 걸림을 부수고 승리를 쟁취하시며 마음이 어지럽지 않고 평정하며 그 성품은 존경을 받으시고, 으뜸 가는 지혜를 갖추시고 모든 중생 가운데 존재하시어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분이신 세존, 제가 바로 그 세존의 제자입니다. ……”


“우팔리여, 말해 보아라. 도대체 어디서 그렇게 많은 사문 고타마의 찬미를 긁어 모았느냐?”

“존귀하신 이여, 찬미를 받기에 더없이 어울리는 사람을 도대체 어느 누가 찬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나타풋타는 우팔리의 세존 숭배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시뻘건 피를 토해 내고 말았다.


이상의 인용 경문에서 보듯이, 논쟁의 정황은 매우 실감나게 전개되고 있다. 이것만으로는 불교, 즉 붓다 쪽에서 자이나교, 즉 마하비라를 간단히 제압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우팔리의 회심이라 할 수 있는 불교로의 전향 동기는 너무나 간단한 말 몇 마디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 이유는 붓다야말로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했기 때문이며 마하비라를 포함한 자이나교는 어리석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기서 의문시되는 몇 가지를 언급해 보자.


첫째로, 몸으로 짓는 업, 즉 신업(身業)을 중시하는 자이나교와 그보다는 의업(意業)이 중요하다고 보는 불교의 입장으로 이분해 놓고 논박을 펼치고 있는데, 자이나교의 업론은 그러한 관점에서 전개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의식하지 않고 살생을 저지른 경우와 의식한 채로 살생을 저지른 경우를 예로 든 다음에, 의식하고서 살생한 경우, 즉 의업을 지었을 때 커다란 죄악을 낳는다는 답을 유도하고 나서 의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논법을 펼치고 있다.


그러나 자이나교에서 신(身)·구(口)·의(意), 3업을 논의할지라도 3업 중에서 어느 한 가지를 더 무겁게 보고 있는 것은 아니며, 특히 고행의 근거가 신업이 중요시되는 데 있다는 등의 논지를 위한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러한 논의를 위해서는 자이나의 업론을 먼저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자이나교에서는 업이란 물질성을 지니고 영혼과 결합한 결과로서 현생의 존재 상태가 결정된다고 본다. 따라서 수행의 목적은 물질적인 업을 순수한 영혼과 분리시키는 데 있으며, 자이나 수행자들은 고행을 통해서 각자의 업을 줄일 수 있다는 대전제에 대한 믿음을 실천할 따름이다.


둘째로, 불교와 자이나교 간의 대론을 접할 때마다 드는 의문점으로서 붓다와 마하비라가 직접적으로 대면하여 논박을 펼친 예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우팔리경》에서와 같이, 두 사람이 동일한 도시의 권역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을 언급하면서도 서로 대면하여 논쟁하거나 직접 부딪혔다는 사실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설령 양자의 대론이 펼쳐졌다 할지라도 양 경전에서 전하는 내용은 상호 일방적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논파 당한 쪽에서 스스로 그것을 자인하여, 기록으로 남길 일은 없을 테니까. 그러므로 논쟁에서의 핵심은 상호간에 먼저 상대방의 주장이 무엇인지 그 교의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있다고 본다.


4. 고행에 대한 논쟁과 논힐


자이나교에서 완벽하게 감관을 제어할 수 있는 자는 지나, 즉 승리자가 된다. 고행은 오로지 감관을 제어하기 위한 수단일 따름이며, 감관을 제어해야 하는 까닭은 업 물질이 유입되는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행을 실천하는 것은 신업을 짓거나 닦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업 물질이라는 해탈의 장해 요소를 제거하기 위함이다. 굳이 불살생을 범해서는 안 되는 이유도 살생으로써 업 물질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마하비라의 통찰에 따르면, 업 물질을 없애는 유일한 방도가 바로 고행이라 한다. 따라서 고행은 어디까지나 수단적 차원에서 행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불교의 수행 목적이 지혜를 얻어서 해탈에 이르는 것이라는 점과 사뭇 다르다.


지혜를 얻기 위해서 닦아야 할 것은 마음 내지 의식이지 몸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붓다의 통찰은 몸과 마음을 이분해서 보는 견지 위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몸의 고통은 몸의 고통일 뿐 마음의 지혜와 무관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차이를 전제로 한 불교와 자이나교 사이의 대론을 전하는 불교 경전의 내용은 논쟁의 차원을 넘어서서 논힐(論詰)에 가깝고, 공정성이 결여된 경우도 허다하다.


“몸을 불로써 지지는 고행을 하거나, 갠지스 강물을 떠다가 숭배하는 등의 그릇된 수행법을 따르는 외도의 법은 모두 질그릇과 같고, 여래의 법은 보배 그릇과 같다.”라는 식의 불경 구절들은 자파의 교설만을 옳다고 주장하는 지나친 편견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붓다 당시에 행해졌던 갖가지 고행들 중에서 자이나교에서 채용했던 나체 수행은 그 중 매우 소극적인 행법이라 할 수 있다. 더군다나 나체 수행의 본의는 옷을 벗고 추위와 더위를 감내한다는 고통 감수의 측면보다는 옷 한 조각에도 집착하지 않고 완벽한 무소유를 실천한다는 데 있었다고 본다. 상대의 교설을 완전히 이해하고 수용하기란 불가능할지라도 겉모습만 보고서 비난하는 것은 분명히 논쟁이 아니라 논힐이다.


일찍이 붓다가 갈파하였듯이, 옷을 벗었다 하여 아라한이 아니며, 고행 또한 진실한 행이라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구하고 거대한 인도 철학사의 흐름 속에서 마음을 잘 거두면 천상에 나거나 해탈을 얻는다는 붓다의 주장도, 나체 수행을 통해서 해탈을 얻는다는 마하비라의 주장도 일 견해일 따름이다.


따라서 서로간에 논쟁은 가능하되, 논힐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논쟁의 끝에서 도출된 합의는 새로운 길로 이끌어 주겠지만, 논힐은 영원한 평행선을 그을 뿐이며 서로에게 이익되는 바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자파의 교설을 위해서 상대의 주장을 왜곡해서 전달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볼 때 쇠멸을 자초할 따름이다. 상호 대론 속에서 각기 성장의 길을 밟아 온 인도 철학의 역사 속에서 논쟁 끝에 살해당하거나, 몰매를 맞고 목숨을 잃는 경우 또한 허다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한 논쟁사에서 불교와 자이나교도 예외가 아니었음을……. ■


김미숙 

전남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를 수료하였다. 전공 분야는 인도불교와 자이나교이다. 현재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강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