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교리 및 수행

초기불교경전에 나타난 사띠(sati)교설에 대한 재검토/조 준호

실론섬 2015. 3. 26. 01:00

사띠(sati / smṛti : 念)는 왜 ‘수동적 주의집중’인가

- 초기불교경전에 나타난 염의 교설에 대한 재검토 -

조 준호


1. 들어가는 말

2 현재까지의 사띠 이해

3. 왜 사띠는 ‘수동적 주의집중’인가

4. 마치는 말



Ⅰ. 들어가는 말

‘사띠(sati / smṛti : 念)는 초기불교의 모든 수행체계에 있어 그 중심에 놓여있다. 사념처(四念處), 사정근(四正勤), 사여의족(四如意足) 오근(五根)과 오력(五力), 칠각지(七覺支) 그리고 팔정도(八正

道)로 구성되어 있는 삼십칠조도품(三十七助道品)의 대부분의 수행도에 있어 사띠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사념처는 물론 오근(五根)과 오력(五力), 칠각지(七覺支) 그리고 팔정도(八正道)에 각각 염근과 염력, 염각지 그리고 정염 등으로 구체적인 수행 항목으로 들어 있고 사정근(四正勤)과 사여의족(四如意足) 또한 그 내용에 있어 직접 ․ 간접적으로 사띠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띠는 모든 불교 수행에 있어 핵심적인 위치에 놓여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요즘에 들어서 더욱많이 언급되는 이유는 위빠사나 수행과 관련해서이다. 위빠사나수행은 이러한 삽십칠조도품을 모두 아우르는 말로 초기불교의 모든 수행도를 한마디로 대표하는 말로 사용되어 왔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사띠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바로 위빠사나는 물론 초기불교 전체의 실천적 행법을 적합하게 파악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에 대한 상이한 이해는 불교의 근본 수행도는 물론 불교의 궁극적인 경지에 대한 입장도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과 관련하여 때늦은 감이 있지만 최근 우리의 학계에서도 sati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도되어 그 이해 차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필자는 이전의 한 졸고에서 sati에 대한 번역어로서 ‘수동적 주의집중’이라는 말을 제시하였다.1) 당시에는 커다란 논란을 불러일으키지 못했으나 이후 차츰 몇몇 연구가에 의해 새로운 주장과 함께 필자의 주장에 반론이 제기되어 왔다. 사실 ‘수동적 주의집중’이라고 옮기게 된 필자는 초기불교의 일반적인 교리적 분석에서 제시되었지만 구체적인 경전 근거는 생략되어 있다. 본고의 목적은 왜 ‘수동적 주의집중’이라고 옮기는 것이 적절한지를 빠알리경전은 물론 한역 아함 경전을 통해 그 근거와 이유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그러면서 부수적으로 그 동안의 필자의 주장에 대한 반론으로서 제기된 주장에 대해서도 검토해 본다.


Ⅱ. 현재까지의 사띠 이해


1. 고대 인도 종교 문헌

고대인도에서는 불교문헌 이외의 다른 문헌에는 smṛti / sati가 기억의 의미 말고 불교처럼 선정 수행과 관련하여 사용되는 경우는 아직 찾아 볼 수가 없다. 오로지 불교문헌만이 다른 인도문헌과는 달리 ‘기억‘의 의미로 볼 수 없는 수행도로서 좀 더 특별한 의미로 쓰이고 있다. 초기불교 경전 상에 있어 sati가 기억이라는 의미로 설명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던 반면에 후기 주석 문헌으로 갈수록 산스끄리뜨 어원을 바탕에 둔 어휘 풀이가 늘어간다. 이는 논서나 주석 시대에 경전 주석에 있어 다분히 도식적이고 기계적인 방법으로 일차적인 어의를 중심으로 설명해나갔던 경향에 따른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 일반의 sati의 일차적인 의미인 ’기억‘을 중시하였던 것이다. 이는 한역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도 여러 역어들이 제시되다가 결국 ’생각’이나 ‘기억’을 의미하는 염(念)이나 억념(憶念) 등으로 정착된 이유와 맥락이 일치한다. 


하지만 원래 불교 경전어는 산스끄리뜨가 아니었고 고대 중기 인도어에서 어느 때부터 산스끄리뜨화하면서 본래 sati의 의미와는 달리 산스끄리뜨 의미로 전와하였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염처수행에 있어 기억의 sati라는 말이 사용하게 된 하나의 가능성은 무엇일까를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아직까지 이에 대한 적절한 해석의 시도는 찾아볼 수 없지만 한번 시도해 볼 만한 가설로서 고대 인도인들의 문헌의 보존과 전승 방식을 통해서이다. 그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바로 기억(smṛti)에 의존한 사자상승(師資相承)이었다. Veda 등의 바라문 성전은 물론 사문종교의 자이나교나 불교도 마찬가지였다. 


즉, 성현이나 경전의 가르침이 암송되어 기억 속에 항상 머물고 있었고 다시 그것을 상기(想起)한 상태에서 수행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수행의 지침은 항상 의식 속의 기억으로 마치 ‘객관적 대상’처럼 머물며 작용하였을 것이다. 나아가 더더욱 집중되고 뚜렷한 의식상태가 형성되면 기억 자체가 생생하게 대상화되어 마치 기억 자체가 저절로 떠올라 스스로 작용하는 것처럼 느끼게 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자연스럽게 바라만 보는 눈이 있었을 것이다. 달리 이야기하면, 경문의 기억이 저절로 떠올라 작용하는 것을 바라보는 또다른 눈과의 적당한 거리가 형성되어 단지 ‘수동적으로 주의를 보내고 있는 상태’가 지속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불교 수행에 있어 ‘기억’이라는 말이 동시에 ‘수동적 주의집중의 상태’를 뜻하는 말로 발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도 해 볼 수 있다. 그래서 오취온(五取蘊)과 같이 자신의 존재 상황이 깊은 선정의 단계에서 마치 생생한 기억처럼 눈앞에 저절로 선연하게 떠올라 있는 것에 비교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때 경구의 기억을 능동적으로 변조를 시도하지 않은 채 단지 수동적으로만 대하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 


이는 사념처 수행에 있어 단지 바라만 보고 있는 상태로서 sati가 확립된 상태를 말하는 맥락과 비슷한 상황으로 비교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기억’이라는 본래의 의미가 특히 불교의 전문 수행 집단에서는 수행도의 성격인 ‘수동적 주의집중의 상태’로까지 발전했을 가능성이 있다. 어원과 관련해 여러 주장이 있을 수 있지만 sati를 단순히 기억의 뜻으로 한정할 수 없는 점은 이후 논의의 여러 방면에서 잘 나타나겠지만 가장 간단한 이유 중의 하나는 신념처의 안반념(安般念 또는 出入息念 : ānāpānasati)수행과 관련하여 ‘호흡을 기억한다’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2. 영역과 한글역

현재까지 서구 인도학 불교학계에서 sati를 mindfulness로 옮겨질 수 있는지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아직 찾아볼 수가 없다. 다만 번역 과정에 있어 고심한 흔적은 찾아 볼 수 있으나 그럴듯한 분량으로 논의되어있지 못하고 또한 그러한 논의조차 별 주목할 만한 것이 없다. 이는 이미 한자문화권의 불교전통에서는 중국에 불교가 처음 전래되었을 때도 이와 비슷하게도 여러 역어들이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가장 이른 시기에 있어 수의(守意)와, 의지(意止) 그리고 억념(憶念)과 염(念) 등으로 옮겨지다가 최종적으로는 염으로 정착되었다. 그리고 이 말의 한자 뜻으로 sati에 대한 이해를 해 왔는데 우리나라에 있어 한글역을 ‘생각’이나 ‘기억’으로 옮기는 이유가 되었다.


영어권의 서구에서는 sati에 대한 역어로 대략 다음과 같은 말들이다. memory, awareness, recognization, consciousness, intentness of mind, recollecting, remembering, heedfulness and mindfulness 등인데 여기서는 mindfulness라는 역어가 현재 가장 많이 쓰이고 있다. 그리고 영어권 이외에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어 한글역에서도 ‘마음챙김’이나 ‘마음지킴’에도 어원적으로 유사한 느낌을 갖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연유한지도 모른다.


현재 국내에 있어 sati를 한역 염(念)에 따라 ‘생각’이나 ‘기억’이라 옮기가 하면 일부에서는 ‘알아차림’, ‘주시’, ‘관찰’, ‘마음챙김’‘마음지킴’ 그리고 ‘각성’ ‘마음 새김’ ‘마음집중’, ‘마음모음’ 등으로 다양하게 옮기고 있다. 이 가운데 ‘마음챙김’ 경우 현재 가장 널리 보급되어 있는 용어이다. 


필자의 ‘수동적 주의집중’에 반해 ‘마음챙김’에 대한 설명으로 챙긴다는 표현에서와 같이 sati를 “대단히 능동적인 마음의 현상”으로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 이렇게 옮길 수 있는 경전적 전거나 교리적 설명이 제시되고 있지 않다. 마음챙김과 관련한 sati 이해 가운데 주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선정 수행이 별로 강조되지 않는다. 극단적으로는 선정수행과 무관한 행법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사선의 기초 없이도 sati를 통한 Vipassanā 수행이 가능하다고까지 주장한다. 하지만 초기경전의 많은 곳에서 sati는 정학(定學)에 포함시켜 설명되고 있다는 사실을 별로 주목하고 있지 않다. 


다음으로 ‘마음챙김에 이어 거의 비슷한 말로 ‘마음지킴’이라는 한글역이 있는데 이는 졸고의 ‘수동적 주의집중’이라는 역어에 대한 재검토에 따른 반론 형식을 통해서이다. 하지만 문제는 ‘마음지킴’ 역어에 대한 정의는 하고 있지만, 초기 경전에 따라 납득할 만한 구체적인 전거 제시가 없고 그에 따른 교리적 분석 또한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A. D. 5세기에 작성된 후대 논서인 Visuddhimagga의 비유를 통해 ‘마음지킴’으로 옮길 수 있음을 들고 있다가 이후 이같은 비유를 초기경전에서 찾아 제시하고 있는 정도이다. 이처럼 경전에서 sati를 문지기로 비유한 것을 바로 sati의 정의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은 문제이다. 사실은 경전에서 sati에 대한 많은 비유가 있는데 이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문지기와 같은 지킴의 성격이 이후의 다른 sati 비유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 성격에 있어 판이하게 다르다는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같은 맥락에서 ‘감관의 문을 지키는 것(indriyesu guttadvāro)’을 들고 있으나 사실은 초기불교의 많은 경전에서 ‘sati-sampajaññā 수행’과 다른 영역의 행법으로 항상 나열되고 설명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마음지킴’ 또한 ‘마음챙김 같이 작위적 성격으로 sati를 “의지적 노력의 대상”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에 대한 교리상의 상충된 문제는 이후에 자세히 검토되어질 것이다. 


다음으로 sati를 ‘알아챔’으로 번역하고 있으며 전문 학술 논문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초기불교내의 용어에 대한 엄격한 개념차를 간과한 것으로 sati와 sampajañña는 그 내용상 분명히 구분되어 있음은 이후에 잘 설명될 것이다. 더 나아가 ‘마음챙김’이나 ‘마음지킴’이 모두 sati를 의도적이고 의지적인 즉 작위의 개념으로 보는 것과 같이 ‘알아차림’ 경우에서도 마찬가지로 sati와 Vipassanā를 인위적이고 조작 개념으로 보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Ⅲ. 왜 사띠는 ‘수동적 주의집중’인가

이처럼 sati의 정의는 다양하게 이루어져 왔고 최근에 본격적인 논의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구체적인 경전의 근거를 들어 이에 대한 자세한 교리적 논증은 없었다. 여기서는 이전에 다시 필자에 의해 이전에 제시된 ‘수동적 주의집중’이라는 역어로 옮기게 된 몇 가지 경전의 근거와 교리적 이해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러한 역어에 대한 새로운 조명과 검토를 해보고자 한다. 그러기전에 먼저 ‘수동적 주의집중’이라고 정의한 이전 졸고의 압축적인 문구의 한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선정을 통해 지극히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아 편안하고 고요한 상태가 계속되면 언제부터인가 사유나 감정이 능동적으로 일어나지 않는 상태, 그러면서 마음은 분명하게 깨어있는 상태가 이루어진다. 이렇게 念이란 자신을 포함한 일체에 대해 의식적으로나 능동적으로 마음을 내지 않은 상태가 되어 단지 모든 것이 철저하게 대상화되어 있는 상태를 뜻한다. 그것은 이후의 Vipassanā 수행을 위한 단지 바라볼 준비 태세가 완비되어 있는 상태라 할 수 있다. 따라서 念 그 자체로서 바로 觀을 의미하지 않는다. 念의 작용적인 측면을 觀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念을 ‘수동적 주의집중’의 상태라 할 수 있다. 이제까지 스스로의 사유와 감정, 그 자체와 하나가 되는 능동적인 행위로부터 벗어나게 되어, 이제부터는 일정한 거리를 두게 된 것이다. 다시말해, 의식상에 있어 완전히 수동적으로 변화되었음을 뜻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念 즉, sati는 일체(五蘊․十二處․十八界)를 대상화시켜 바라 볼 준비 태세를 갖춘 ‘수동적 주의집중’의 상태로 정의할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은 서두에서 밝힌 것처럼 ‘수동적 주의집중’이라고 옮기면서 생략한 구체적인 경전 근거이며 다 자세한 교리적 분석으로 큰 의미가 있다. 왜 ‘수동적 주의집중’ 역어가 적절하지를 빠알리경전은 물론 한역 아함 경전을 통해 그 근거와 이유를 밝혀본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이 현재 일부 연구들의 이해와는 어떠한 큰 차이가 있는지를 또한 검토해 본다.


1. 삼염주(三念住 : tayo satipaṭṭhānā)를 통해 본 sati의 성격

사념처를 사의지(四意止)나 사념주라 한역하였듯이 삼염주 또 한 삼의지(三意止)로 한역되었는데 사념처와 정확히 같은 용어이다. 그런데 sati 이해와 관련하여 삼염주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데도 불구하고 사념처 수행과 관련하여 소홀히 해온 경향이 있다. 이러한 이유는 초기불교 이후 차츰 불타관의 상승과 함께 다른 제자들과 함께할 수 없는 붓다에게만 있는 특유한 공덕으로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이 주어지는데 그 가운데 삼념주를 넣었기 때문에 사념처 수행과 관련한 설명이 일반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지만 초기경전에서는 삼념주를 붓다만의 공덕으로 명시하지 않았을 뿐더러 그 내용상 수행에 뛰어난 제자들도 있을 수 있는 덕목임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를 말하는 경전에서도 성인(聖人)이 수행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그 외의 경전의 많은 곳에서 붓다의 제자들도 이와 같은 덕목이 강조되는 가르침이나 사례들이 나타나거나 이러한 덕목을 지닐 것이 권장되기도 한다. 따라서 초기 빠알리 경전을 바탕한 불타관의 연구에 의하면 본래 붓다 개념과 그의 수승한 제자들 간에 차이는 거의 모든 방면에서 없었던 것으로 증명된다.


삼염주는 3가지 종류의 sati와 sampajāna 상태에 머무름을 말하는데, 첫째 염주는 사람들이 스승의 가르침을 신봉하여 잘 따르더라도 기쁜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sati와 sampajāna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을 말하고, 둘째 염주는 그 반대로 신봉하지 않고 불신하여도 침울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고, 셋째 염주는 양자 모두에도 기뻐하거나 침울해 하지 않고 sati와 sampajāna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sati 확립의 경지는 그 어떠한 반응에도 초연하여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평정한 상태(upekhā)와 같은 선상의 심리적 지경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마찬가지로 upekhā와 sati 그리고 sampajāna와 언급되는 제삼선과 제사선과도 같은 선상의 심리적 지경임을 나타내준다. 즉 삼염주에서 기쁜 마음(歡喜)이나 침울한 마음(憂慼)을 나타내는 attamata와 attamanata는 제사선(第四禪)의 기쁨과 근심(somanassa-domanassānaṁ)과 그대로 동의어로 사용된다. 제사선에서 “행복감이 없어지고 괴로움도 없어지고, 이전의 기쁨과 근심(somanassa-domanassānaṁ)도 제거된다. 그리하여 괴로움도 그치고 행복감도 그친 완전한 평정심(upekhā)에 의한 sati가 청정해진 제4선을 성취하여 머문다.” 가 그것이다. 


마찬가지로 삼염주에 나타나는 사(捨)는 그에 대응되는 빠알리 경전의 upekkha로서 지극히 초연해진 평정심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다시 제사선의 사(捨)와 그대로 일치한다. 그리고 삼염주에서 “전혀 흔들림이 없는 평정의 상태에서 sati와 sampajāna에 머무른다“하여 염주(sati의 확립)의 상태가 제사선의 상태와 연결되어 있음을 두 경구의 비교를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한역에서 상념상지(常念常智)라 했던 것은 말 그대로 sati는 어떠한 심리적 상태가 단속적이지 않고 지속되는 상태임을 간파한 번역이라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sati 확립’ 상태는 제사선의 심리적 지경과 함께 있음을 보여준다. 삼염주에서 sati는 지극히 평정된 상태(upekhā)에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감정적 반응을 쉽게 일으키지 않는 초연한 대응으로서 sati는 제사선의 지경과 일치하여 나타난다는 점이다.


2. sati와 sampajāna 개념 차이를 통해

흔히 sati와 sampajañña의 개념을 같은 것으로 잘못 보는 경우는 물론 양자의 뜻을 애매하게 혼용하는 경우까지 있다. 이러한 개념상의 혼란으로는 sati는 물론 sampajañña의 성격을 제대로 규명할 수 없다. 하지만 다음의 [사띠 경(Sato sutta)]를 통해서 sati 와 sampajāna가 동의어가 아닌 서로 간에 개념상의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잘 알 수 있는데, 이로써 양자의 성격을 새롭게 규정할 수 있는 중요한 단초가 주어진다.


"비구들이여, 비구들은 Sato와 Sampajāno에 머물러야 한다. 이러한 것이 그대들을 위한 가르침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Sato에 머무를 것인가? 비구들이여, 여기에는 몸에서 몸을 따라 관(觀)하는 것에 머문다. 이는 세상의 욕망과 근심이 제거되어 ‘오롯한 정진력(ātāpī)’과 ‘분명히 깨어있는 상태(sampajāno)’ 그리고 ‘수동적 주의집중 (satimā)’이 이루어진 상태에서이다. 느낌에서 느낌을 따라 관하는 것에 머문다. 이는 세상의 욕망과 근심이 제거되어 ‘오롯한 정진력‘과 ‘분명히 깨어있는 상태’ 그리고 ‘수동적 주의집중’이 이루어진 상태에서이다. 마음에서 마음을 따라 관하는 것에 머문다. 이는 세상의 욕망과 근심이 제거되어 ‘오롯한 정진력‘과 ‘분명히 깨어있는 상태’ 그리고 ‘수동적 주의집중’이 이루어진 상태에서이다. 법에서 법을 따라 관하는 것에 머문다. 어진 상태에서이다. 이는 세상의 욕망과 근심이 제거되어 ‘오롯한 정진력‘과 ‘분명히 깨어있는 상태’ 그리고 ‘수동적 주의집중’이 이루어진 상태에서이다."


“비구들이여, 그렇다면 비구의 Sampajāno는 무엇인가? 비구는 나아갈 때나 뒤로 물러설 때나 분명히 깨어있는 상태에 있다. 앞을 볼 때나 주위를 볼 때도 분명히 깨어있는 상태에 있으며 , (팔, 다리

를) 구부리거나 펼 때도 분명히 깨어있는 상태에 있다. 가사(겉옷)를 입고 발우를 들 때도 분명히 깨어있는 상태에 있으며, 먹거나 마시거나 먹고 난 후에나 씹고 맛볼 때에도 분명히 깨어있는 상태에 있으며, 대소변을 볼 때도 분명히 깨어있는 상태에 있으며, 가고 서고 앉을 때에도 ‘잠자고 있을 때(sutte)’나 (잠에서) 일어나있을 때에도 그리고 말하거나 침묵할 때도 분명히 깨어있는 상태에 있다.”


여기서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점은 이처럼 독립된 한 경전에서조차 sati와 sampajāna에 대한 교설이 나누어 제시된다는 점에 주목해야한다. sati는 어디에서나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ṁ”와 같은 문구가 정형적인데 이 때 ātāpī는 물론 sampajāno까지 일렬로 묶여 서술된다. 이 때문에 팔정도의 정념의 경우에서처럼 이같은 문장 전체를 통해 sati 개념을 이해하려다 보니 도대체 어디까지를 정념의 범위로 한정할 것인지의 문제는 물론 다른 용어들과의 갖가지 개념상의 혼란이 초래되어 왔다. 심지어는 sati의 작용적 측면으로서 anupassī의 Vipassanā와 sati를 같은 개념으로 혼용하여 sati는 바로 Vipassanā를 의미한다고 보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다음의 설명은 그러한 개념의 구분을 분명하게 할 수 있는 길라잡이가 될 것이다. 


사념처의 정형구인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에서 anupassī는 kāye kāyā에 의한 작용적 측면으로 Vipassanā를 말한다. 즉 anupassī의 Vipassanā을 위해서 필요한 세 가지 필수조건이 기본적으로 나열되어 있다. 첫째, ātāpī 둘째, sampajāno 셋째, satimā이다. 달리 팔정도로 다시 세분하면 ātāpī의 경우 정정진에 해당하고 sampajāno는 정정 그리고 satimā는 정념이 그것이다. 그리고 anupassī는 법염처의 사성제와 관련해서도 정견에 해당한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은 이러한 세 가지 가운데 원래 경전에서 지시하는 sati의 범위는 kāye kāya까지 만이라는 것이다. 


문장 구조상 sati는 ātāpino sampajānā 뒤에 위치하여 kāye kāya를 다시 받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념처 설명하는 또 다른 정형구에서 kāyekāya 말이 사용되면 ātāpino sampajānā는 생략되지 않지만 sati라는 말은 생략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즉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ṁ”에서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kāye kāya 자체가 sati라는 말을 의미하기에 여기서는 sati라는 말의 생략과 함께 후반부의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ṁ 대신 “ekodibhūtā vippasannacittā samāhitā ekaggacittā kāyassa yathābhūtaṁñāṇāya”가 부가되고 있으며 여기서 사념처 수행에 있어 선정에 대한 전문용어들이 반복적으로 부가되어 강조된 것이 큰 특징이다. 해석을 하면 다음과 같다.


'몸에서 몸을 따라 관하는데 머문다. 이는 ‘오롯한 정진력(ātāpī)‘과 sampajāna(분명히 깨어있는 상태) 그리고 전일(專一)하고, 투명하게 청정해진 마음, 삼매에 든 심일경(心一境) 상태에서 몸의 여실한 지견(知見)을 위한 것이다.'


이 경구는 sati 확립과 관련한 vipassanā 수행에 있어 높은 수준의 선정삼매를 배제한 이해가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너무나 극명하게 보여주는 경구이기도 하지만 여기서 더 중요한 점은 sati의 생략은 kāye kāya 자체가 바로 sati임을 지시함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수 ․ 심 ․ 법염처에서도 동일하게 각각 Vedanāsu vedana, Citte citta, Dhammesu dhammā가 sati를 의미하는데 이를 각각 ‘몸에서 몸을 / 느낌에서 느낌을 / 마음에서 마음을 / 법에서 법’으로 직역할 수 있다. 그런데 sati의 의미는 이렇게 같은 말을 반복적으로 쓰면서 앞 말을 처소격으로 처리하는 것으로 처리하고 있다. 즉 이러한 표현의 경우는 빠알리 경전에서 매우 드문 예인데 이러한 표현이 목적하는 바는 몸과 몸이, 느낌과 느낌이, 마음과 마음이, 그리고 법과 법이 일정한 거리를 갖고 서로 대응해 마주하고 있는 상태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심신의 활동상이 분명히 대상화 또는 객관화가 되어 있는 상태라는 의미에서 “대상화된 몸 ․ 대상화된 느낌 ․ 대상화된 마음 ․ 대상화된 법”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30) 사실 마주 대응해 있는 상태가 될 때만이 이후의 작용으로서 Vipassanā가 가능한 것이다. 이로서 sati의 개념이 대체로 드러난다 할 것이며 다음으로 Sampajāno의 의미이다.


3. sampajāno를 통해 본 sati의 성격 - sati는 반드시 삼매 상태가 바탕되어 있다.

sati는 이처럼 관찰 대상과의 형성된 ‘거리 두기‘라고 할 때, Sampajāna는 앞의 경문을 통해 볼 때 일체의 신체적 행위에 대한 ’ 생생한 깨어 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많은 경전에서 sampajāno에 대한 설명은 이같은 내용의 범위 안에 있다.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黙動靜)과 같은 일거수 일투족’에 대해 생생한 깨어 있음인데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할 점은 ‘잠자는 동안(sutte)’에도 sampajāna 상태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sampajāna상태란 사실 대단히 높은 성성(惺惺)한 지경의 선정 상태임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잠자는 동안에도 잠자고 있다는 사실에 생생히 깨어있음은 보통의 의식상태로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선정의 성성한 지경이 아니고서는 가능하지가 않다. 따라서 대상과의 거리를 갖고 마주 대응하여(sati), 생생하게 깨어 있을 때(Sampajāno)만이 (삼법인에 대한) 위빠사나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Sampajāno는 ‘분명히 깨어있는 상태’로 일거수 일투족에 대한 철저하고 투철한 각성(覺醒) 상태를 의미한다.31) 다시말해, ‘분명한 각성상태‘이며 ’오롯하게 깨어있어 지극히 성성(惺惺)한 지경으로 이러한 ’생생한 깨어 있음‘은 후대 선가의 내외명철(內外明徹)과 비견될 것이다. 다시 취침 상태속에서 까지 Sampajāno라는 것은 숙면일여(熟眠一如)의 경지와도 또한 비견될 것이다. 다시 이는 sati와 Vipassanā를 설하는 한역 [염처경(念處經)]에서도 이러한 지경을 극명하게 잘 보여준다.


"비구는 안으로 몸을 보는데 있어 몸과 같이 한다. 밖으로 몸을 보는데 있어 몸과 같이한다. 염(念)을 세워 몸이 있고 지(知)가 있고 견(見)이 있고 명(明)이 있고 달(達)이 있다. 소위 이것을 비구가 몸을 보는데 있어 몸과 같이 하는 것이다. 다시 비구는 안으로 몸에서 몸과 같이 관하는데 있어 광명상(光明想)을 염하여 잘 받아 지녀 염(念)한 바를 잘 억(憶)하기를 앞과 같이 뒤에도 또한 그러하고 뒤와 같이 앞도 또한 그러한다. 마찬가지로 낮과 같이 밤도 그러하고 밤과 같이 낮도 그러하고, 아래와 같이 위에도 또한 그러하고 위와 같이 아래도 또한 그러하나니 이처럼 뒤바뀌지 않고 , 다음에는 얽매임이 없이 광명상을 닦아 마음은 마침내 어두움에 덮히지 않는다."


한역의 광명상(光明想)에 대한 빠알리어는 āloka-sañña나 āloka-saññī이다. 깨어있음이 밝은 빛과 같은 상태로서 경전의 많은 곳에서 오개(五蓋) 설명 시 sati-sampajāno를 수식하는 말로 사용된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내용을 전하는 빠알리 경전 또한 sati와 sampajāno와 관련한 맥락에서 분명히 '삼매 수행(samādhi bhāvanā)'의 범위로 설명하고 있다.33) 이러한 경구를 통해 볼 때 후대 선가의 내외명철(內外明徹)의 표현에 있어 내외는 물론 더 나아가 전후와 밤낮 그리고 상하 등 일체에 있어 밝은 빛과 같이 뚜렷하고 분명하도록 한역 아함경이나 빠알리경은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다른 [삼매경(Samādhisutta)]에서도 수념처 확립으로 인한 Vipassanā 설명 시에도 sampajāno와 sati는 삼매의 범위와 내용 자체로 설해진다.


다음으로 sampajāno와 sati의 성격을 제삼선과 사념처의 정형구를 들어 다시 확인해 보자.


“희열감이 사라지는 것으로 평정한 마음(upekha)과 sati와 sampajāno에 머문다. 그러면서 온 몸으로 행복감을 느끼면서, 성인들이 말하는 ‘평정한 마음과 念을 지니고 행복감에 머문다’라는 제3선을 성취하여 머문다.”


앞에서 본 것처럼 이는 삼염주의 내용과 일치하고 다시 사념처의 정형구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는데 다음과 같다.


“비구들이여, 여기에는 몸에서 몸을 따라 관(觀)하는 것에 머문다. 이는 세상의 욕망과 근심이 제거되어 ‘오롯한 정진력(ātāpī)‘과 sampajāna(분명히 깨어있는 상태) 그리고 sati의 상태에서이다.”


이렇게 제삼선과 사념처의 정형구에 sati와 sampajāno가 각각 언급된다. 그런데 사념처에서는 삼염주와 달리 “평정한 마음(upekha)이 생략되어 있음이 다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경구는 사념처 수행이 기본적으로 제삼선과 관련되어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제 sati의 사념처 수행과 관련한 선정의 수준은 더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충분하다 할 것이다. 따라서 초기경전의 이른 층에서부터 sampajāno는 sati와 함께 계정혜 삼학 가운데 정학으로 선정을 나타내는 말로 분명히 한정적으로 명시되어 나타난다. 하지만 이처럼 sati 이해에 있어 sati가 선정의 지경 속에 있음은 너무나도 명백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이에 대한 중요성이 제대로 검토되지 않았다. 반면에 이를 간과하고 sampajāno를 선정 밖의 개념으로 보고서 선정의 바탕이 없는 Vipassanā의 주장은 물론 낮은 초입단계의 선정에서도 가능함이 주장되여 왔다. 그러한 입장에서 sampajāno를 단지 일상생활에서의 행동거지를 ‘알아차리고’ 감지하는’ 정도의 인지활동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어왔다.


4. 마치 앉아있는 사람이 누워있는 사람과 마주하듯,누워있는 사람이 앉아있는 사람을 마주하듯

다음으로 이러한 sati의 정의를 뒷받침해주는 중요한 경전은 다름아닌 사염처를 말하는 빠알리 Mahāsatipaṭṭhāna-Suttanta에 대응되는 경 중아함의 [염처경]과 다른 빠알리 경을 통해서이다.


'비구는 안으로 몸을 보는데 있어 몸과 같이 한다. 밖으로 몸을 보는데 있어 몸과 같이한다. ‘염(念)을 세워 몸이 있고(立念在身)’ 지(知)가 있고 견(見)이 있고 명(明)이 있고 달(達)이 있다. 소위 이것을 비구가 몸을 보는데 있어 몸과 같이 하는 것이다. 다시 비구는 몸을 보는데 있어 몸같이 한다. 비구여, 잘 받아들여 서로 마주 보고(또는 마주하여 보는 대상을 단지 느끼고) 염(念)한 바를 잘 억(憶)한다. 마치 어떤 사람이 있어 앉아서 누운 사람을 마주보듯이, 누워있는 사람이 앉아있는 사람을 마주보듯이 해야한다. 이와같이 비구는 잘 받아들여 서로를 마주 보고 염한 바를 잘 억한다. 이렇게 비구는 안 몸을 관찰하기를 몸과 같이한다.'


이러한 비유는 너무나 극명하게 sati의 성격과 개념을 잘 보여준다. 즉,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으로 마치 어떤 사람이 있어 앉아서 누운 사람을 마주보듯이, 누워있는 사람이 앉아있는 사람을 마주보듯이 해야한다”는 것인데 이는 바로 ‘1:1 거리 두기’나 ‘1:1 간격 형성’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마치 맑은 거울 앞에 드러난 자신의 모습을 직면하고 있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입념재신(立念在身)은 ‘sati의 확립(satipaṭṭhāna)’을 말하여 몸에서 몸으로 ․ 느낌에서 느낌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그리고 법에서 법으로’으로 대상화가 확립되었음을 의미한다. 좀 더 부연하자면 대상과 직면한 ‘대칭적(對稱的)주의집중’으로 Vipassanā는 시작된다.


5. sati가 동사보다도 형용사(satimant나 satimā)와 명사로만 쓰이는 이유

이러한 맥락에서 또한 필자의 염에 대한 앞의 인용문 가운데 “念 그 자체로서 바로 觀을 의미하지 않는다. 念의 작용적인 측면을 觀이라 할 수 있다.”와 관련하여 sati는 동사보다도 주로 형용사(satimant나 satimā)와 명사로만 쓰인다는 점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sati의 상태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신수심법(身受心法)을 마치 거울과 같이 생생하게 대면해 있는 상태를 의미하기에 형용사 아니면 그러한 상태의 확립을 결국 명사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반면에 동사로의 쓰임새는 찾아볼 수 없다. 동사가 되면 작용적 측면이 되어 곧 Vipassanā가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단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주의만 집중해 있는 상태의 표현만이 가능하고 주어나 목적어의 움직임과 같은 동사적인 설명이 필요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sati가 의미하는 바가 능동적으로 쫓아서 알아차리거나 보거나 집중하는 것이 아

니라는 것이다. ‘수동적 주의집중’ 이라는 표현은 이러한 상태에 대한 최선의 말로 동사적인 표현이 배제되어 나타난다. 그리고 sati를 담는 동사는 적극적인 움직임을 나타내는 말이 아닌 정지 또는 정적인 말로 ‘머무름(viharati)’이 항상 쓰이는 맥락도 이러한 이유이다.


6. parimukhaṁ satiṁ upaṭṭhapetvā의 의미는 무엇인가?

parimukhaṁ satiṁ upaṭṭhapetvā은 사념처 수행을 설명하는 도입부에 항상 공한처 또는 나무 아래서의 좌선 수행과 함께 언급된다. 그런데 여기서 ‘‥의 앞에’라는 뜻의 parimukhaṁ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현재까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어원적인 분석을 하자면 pari + mukha로 pari는 ‘~의 주변에’라는 의미와 mukha는 얼굴이나 입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여러 종류의 한역에 대한 해석과 함께 현대학자들에 의해서도 무성한 추측성 의견들이 많이 대두되었다. 초기불교 경전의 어디에도 무엇을 지시하는지 정확히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빠알리 논장이나 후기층의 경전에서는 ‘코 끝에’ 나 ‘입 주변에’ 또는 양 사이인 인중에 등으로 보는 설명이 있고 이에 따라 현재 빠알리 불교권의 수행법 지도에서도 이를 따르고 있다. 


하지만 필자의 sati 이해를 통해 보면 이것이 정확히 무엇을 지시하는지 쉽게 풀릴 수 있다. 즉, sa

tiṁ upaṭṭhapetvā이라는 구절에서 parimukhaṁ이 뜻하는 바는 바로 몸에서 몸(kāye kāya), 느낌에서 느낌(vedanāsu vedanā), 마음에서 마음(citte cittā) 그리고 법에서 법(dhammesu dhammā)의

‘서로 앞에 마주하고 있는 것’을 뜻한다는 것이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몸과 몸이, 느낌과 느낌이, 마음과 마음이 그리고 법과 법이 대면(對面 )또는 마주 직면(直面)해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7. 추수철과 추수 후의 목동의 소나 염소, 양들 돌보는 것에 대한 비유를 통해

마찬가지로 sati가 무엇인지를 잘 알 수 있는 재미있는 비유를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인도에는 현재에도 들판에 소를 방목한다. 소 떼들이 무리지어 다니는 모습과 함께 가끔 논밭에 들어가 작물을 뜯어먹는 경우를 보게 되고 이를 황급히 몰아내는 모습도 쉽게 볼 수 있는데 이는 예전에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Dved hāvitakka Sutta 경에서 추수 전과 추수 후의 목동이 소를 돌보는 것에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가 대비적으로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여기에 sati의 수행이 비유된다. 즉 곡물이 여문 추수철에는 소들이 논밭에 들어가 뜯어먹지 않도록 바짝 가까이에서 신경을 써서 논밭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채찍으로 치고 때려 막아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논밭의 주인으로부터 화를 당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반면에 똑같은 상황에서 사띠 수행(satikaraṇīya)의 언급과 함께 추수 후의 일로 비유 ․ 설명하는 차이가 있다. 이러한 비교는 sati의 성격이 어떤 것인지를 잘 나타내는데 다음과 같다.


“비구들이여, 비유하자면 여름의 마지막 달에 모든 곡물을 수확하여 마을로 거둬들인 후 소치는 자는 나무 아래나 공터에 머물면서 소들을 지켜 보는데(rakkheyya) 있어 ‘여기 소들이 있다’라고만 주의를 집중한다(satikaraṇīyam). 비구들이여, 그리고 다시 이와 같이 ‘여기 모든 것들이 있다’라고만 주의를 집중한다.”


추수 전처럼 소들이 논밭에 들어가 뜯어먹지 않도록 가까이 바짝 신경 써서 채찍으로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 아래나 공터에 머물면서 단지 소들에 ‘일정한 거리만을 유지한 채 집중’한다는 것으로 sati 수행이 언급된다. 이 지점에 이르면 마치 곽암(廓庵)의 '심우도(尋牛圖)’의 한 장면을 보는듯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지켜본다’(rakkheyya)라는 말이 사용되었어도 추수 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형국에서의 지켜봄이다. 이 부분은 앞에서 sati를 ‘마음지킴‘ 등으로 역하면서 “의도적이고 의지적 노력의 대상”으로 이해하는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즉‘여기 소들이 있다’고 할 정도만 집중한다(satikaraṇīyam)는 것은 바로 ‘주의의 수동성’을 말한다. 그리고 satikaraṇīya에서 karaṇīya라는 단어 자체가 어근에 수동적 의미를 담는 수동분사라는 사실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러한 표현은 Satipaṭṭhāna Sutta 등에서의 사념처 수행 즉 위빠사나 수행의 가장 중요한 정형구인 “몸이 있다’라고 하는 수동적 주의 집중 상태가 확립되어 단지 그러한 사실을 알뿐이고 단지 주의 집중만을 뚜렷하게 할 뿐이다.”42)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몸에서 몸을 따라 관한다 할 때’ anupassī라는 말의 anu라는 접두사가 ‘‥을 따라’ 수동성과 소들을 논밭에 들어가지 않도록 채찍으로 ‘‥을 쫒거나’, 들어간 소들을 ‘찾아내는’ 뜯어먹지 않도록 하는 소치기와 대비된다. ‘쫒고’, ‘찾는’ 능동성과 단지 간격 형성에 ‘따른’ 수동성의 차이이다. 여기저기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소들을 가까이서 ‘지켜보며(rakkheyya)’ 쫒거나 찾지 않고 단지 거리를 가지고 응시할 뿐이다. 지켜보는데 있어 그저 지켜보는 수동성의 지킴을 의미한다. 이는 대단한 수준의 능동성과 의도성을 강조한 ‘마음챙김’이나 ‘마음지킴’ 등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이로서 sati 수행은 추수 전이 아닌 추수 후라는 상징이 의미하는 바는 능동적으로 조절과 제어 그리고 억제가 따르는 계학(戒學)과 함께 정학 수행의 완성단계임을 시사해주고 있다.


8. 높은 탑의 정상에 올라가 있는 상태에의 비유

앞의 비유는 수평의 상태에서 간격 유지를 보여주는 반면 다음의 비유는 수직의 상태에서 마찬가지로 sati 수행의 성격과 수준을 잘 나타내준다.


‘sati의 확립‘이라는 높은 건물의 정상에 올라가 보니 내가 이전에 유신견(有身見)에 사로잡혀 집착하고 즐거워했던 그들을 본다.'


사념처 수행은 상당히 높은 지경으로 올라간(āruyha) 상태에서 아래의 군상들과 간격을 유지한 채 내려다본다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여기서 올라갔다는 의미는 다른 행법에 비해 사념처가 상대적으로 높은 단계임을 나타낸다. 그래서 자신의 과거와 비견되어 자신이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유신견(有身見 : 실체론적 유아론)에 빠져있는 아래의 다른 사람들을 본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사념처 가운데 심념처에 해당시킬 수 있다. 밖으로 타인의 마음에 탐욕이 있는지 없는지, 성냄이 있는지 없는지를 그리고 높고 큰마음인지 아닌지 등을 내려다 볼 수 있다는 염처이다. 낮은 곳에서는 높은 곳을 올려다보더라도 볼 수 없는 것이 있으나 높은 곳에서는 낮은 곳이 한 눈에 포착된다는 것 또한 사념처 행법의 범위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여기서도 ‘지켜 본다’ 또는 ‘바라본다’가 근접해 일일이 ‘지키고 챙기는’ 식의 관여가 아니라 말 그대로 유지된 간격에서의 바라봄이라는 것이다.


9. sati 행법의 가장 결정적인 경전적 근거에서 핵심은 ‘단지 바라 볼 뿐’이다.

여기서는 sati가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 더욱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경전적 근거는 아래 의 경구이다. 이 경전의 일부는 이전에 필자에 의해 sati를 ‘수동적 주의집중’으로 결론 내리게 된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경전 근거로 사용하였다. 하지만 다른 연구자에 의해 필자의 sati 정의에 이의를 제기하면서도 이 부분을 침묵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그 중요성을 재인식하기 위하여 다시 이전에 인용되지 않았던 후반부까지 모두 인용하여 왜 수동적 주의집중이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한지를 다시 한번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말루끼야뿟따여, 그대가 모든 것들을 보고, 듣고, 지각하고, 안다고 하자. 이때 보는데 있어 단지 바라 볼 뿐이며(diṭṭhe diṭṭhamattaṁ bhavissati), 듣는데 있어 단지 들을 뿐이며, 지각하는데 있어 단지 지각할 뿐이며, 아는데 있어 단지 알뿐이다. 그러므로 말루끼야뿟따여, 그대는 이와 같은 방법으로 보는데 있어 단지 바라보게 되고, 듣는데 있어 단지 듣게 되고, 지각하는데 있어 단지 지각하고, 아는데 있어 단지 알게 될 때 그대는 그것과 함께 있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있지 않을 때, 그대는 그것 안에 있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있지 않을 때, 너는 그것 안에 있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루끼야뿟따여, 그것 안에 있지 않을때, 그대는 이것과 이것의 너머 혹은 그 사이에도 너는 있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고(苦)가 다하는 길이다.”


이러한 세존의 요긴한 가르침을 받은 늙은 말루끼야뿟따는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간략하게 말씀하신 바를 다음과 같이 (다시) 풀어 이해해봅니다”


“만약 색(色)을 봄에 있어 sati를 잃으면 좋아하는 색상을 보고 마음이 일어난다. (그리하여) 좋아하는 대상에 탐욕을 느끼고, 그것에 집착하여 머물게 된다. 그러한 느낌의 치성과 집착에 머물러 수많은 색상의 일어남과 탐욕과 진심(嗔心)이 생기고 그의 마음은 더욱 고통을 느낀다. 그래서 이같은 고통이 쌓이면 열반은 더욱 멀다고 한다.․․․(마찬가지로 성․향․미․촉․법(聲․香․味.觸․法)에 있어도 같은 방식으로 서술된다.)

….

만약 색을 보는데 patissato(sati)가 있어, 색을 보는데 있어 탐욕이 없으면, 그에 대한 집착이 없고, 단지 느낄 뿐이어서 색에 대한 탐욕을 느끼지 않고 집착이 없다. 만약 그가 이와 같이 하게되면 (색을 보고 단지 보게 되고 탐을 일으키지 않으면) sati에 머물러 두루 행하게된다. 그래서 고통이 집적되지 않고 열반은 가까워져 있다고 한다.․․․(마찬가지로 성․향․미․촉․법(聲․香․味.觸․法)에 있어도 같은 방식으로 서술된다.) ….”


sati가 본래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붓다에 의해 그 진수가 먼저 시설되자 이를 받아 말루끼야뿟따는 재확인하고 증명 받는 형식으로 경이 구성되어 있다. 먼저 붓다는 보는데 듣는데 냄새 맡는데 맛보는데 접촉하는데 그리고 인식하는 데 있어 그 어떠한 것도 싣거나 개입시키지 않고, 첨가하지 않고, 단지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접촉하고 인식해야 그 어떠한 경계에도 떨어지지 않고 궁극적으로 고의 소멸로 갈 수 있다는 요긴하게 설한다. 이에 말루끼야뿟따는 스승의 가르침을 게송으로 그 핵심을 다시 정리하는 것으로 인가받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핵심적인 가르침을 부연하는데 다름아닌 sati라는 말이 중심이 되었다는 점으로 sati의 성격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역으로 말하면 모든 것에 보는데 있어 단지 바라 볼 뿐이며, 듣는데 있어 단지 들을 뿐이며, 냄새 맡는데 있어 단지 냄새를 맡고, 접촉하는데 있어 단지 접촉할 뿐이며, 아는데 있어 단지 알 수 있는 것이 sati라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보는 데에 있어 단지 바라볼 뿐이다’(ditthe diṭṭhamattaṁ bhavīssati)에서 ditthe는 처소격으로 바로 다음의 diṭṭha와 말이 반복된 것은 바로 사념처의 정형구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에서 kāye kāya 등과 같은 맥락이다. 그리고 다시 바로 다음의 문구인 matta‘는 단지 ~뿐’ 뜻으로 이 또한 Mahāsatipaṭṭhāna Suttanta의 핵심적인 항목마다 계속 반복되는 구절로서 “‘atthi kāyo ti' vā pan'assa sati paccupaṭṭhitā hoti yāvad eva ñāṇa-mattāya patissati-mattāya"(‘sati의 확립으로 여기에 몸이 있다’라는 정도의 사실을 단지 알뿐이고 단지 주의 집중만을 할 뿐이다.)와 정확히 일치한다. 더 나아가 patissato라는 말이 양쪽 모두에서 동시에 쓰였는데 sati와의 동의어이다. 여기서 sati가 있고 없고의 기준은 단지 보거나 듣거나 냄새 맡는 것에 그치지 못하고 탐욕을 일으켜 집착하는 유전연기 구조로 가느냐의 차이로 나타난다. 이로서 사실 sati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극명하게 드러난다.


10. Sati와 ‘기억’의 문제

사념처 수행에 의해 천(千)의 겁(劫)을 기억한다할 때 동사 anussarati가 사용된다. 이에 대한 명사는 anussaraṇa라는 말로서 같은 문장 내에서 수행도의 염인 sati와 정신 작용의 기억이 어떠한 용어상의 구별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경전의 많은 곳에서 설해지는 삼명의 숙명지(宿命智 : pubbenivāsānussati-ñāṇa)에서 과거생의 기억은 깊은 선정 상태에서 회상되는 것으로, 여기서는 anussati라는 명사형으로 수행도와의 sati라는 말과 분명한 구분을 보여준다. 


몸의 sati를 설하는 경인 Kāyagatāsati Sutta경에서도 ‘세속과 관련된 기억과 의도가 사라진다’ (gehasitā sarasaṅkappā te pahīyanti)할 때에도 기억이란 sara로 구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수행도로서 sati와 함께 호환되는 용어는 anussaraṇa나 anussati 등이 아니라 아래에서 설명

될, 다름 아닌 sati의 성격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경전에서 언급되는 patissato나 Mahāsatipaṭṭhāna Suttanta의 patissati라는 말이다. 즉, 일상 활동 시의 기억과는 달리 깊은 선정의 상태 속에서 떠오르는 과거로서 기억과 마주해 있거나 선정 상태에서 드러나는 대상과의 직면 상태를 지시할 때는 구분된다. 결론적 말해, 수행도의 기억의 sati와 단순한 의미 또는 일반적인 의미의 ‘기억’과는 구별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대단히 제한적이고 예외적이기는 하지만 다음 경구는 sati의 동사형인 sarati(기억하다)와 함께 염근(念根 : satindriya)의 설명 시 앞의 anussarati가 쓰인 예를 통해 기억과 관련한 sati 수행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염근(念根)이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성제자(聖弟子)는 sati와 nepakka을 가지고 지난 과거에 말하고 행했던 것들을 기억하고 회상한다. 이것을 비구들이여, 염근이라 한다 .'


기억이란 과거에 지었던 어떤 것들이 떠오르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과거가 떠오는 것이 기억이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우리의 일상사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필요에 의해 잊었던 것을 쫒아 일부로 또는 억지로 상기(想起)하거나 회상(回想)한다는 그러한 의미의 기억이 아니다. 그리고 여기서 ‘떠오른다’는 말 표현에서처럼 삼매의 상태에서 저절로 일어나고 떠오른 과거의 기억을 말한다.


불교의 업보설에 따라 현재는 항상 과거에 바탕되어 있다. 과거와 단절한 현재는 없다. 항상 과거는 현재의 신구의(身口意)라는 통로로 끊임없이 나타난다. 우리의 일상이란 과거의 기억에 끊임없이 재반응하고 과거에 말려있고 따시 휘말리는 현재가 반복될 뿐이다. 그렇지만 수행도의 sati는 선정 속에서 과거의 것이 끊임없이 현재화되어 떠오르되 거품처럼 사라지게 해야 한다. 그것은 떠오르는 기억들을 단지 마주하여 지켜볼 뿐 그 어떠한 재반응도 하지 않아야 가능하다. 따라서 과거에 말려들거나 끄달리거나 또는 휘말리지 않을 수 있는 상태, 즉 무심히 대응할 수 있는 환경이 요구된다. 이러한 환경이 바로 제사선과 같은 높은 수준의 선정 상태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sati 수행은 과거의 기억에 대해 더이상의 재해석이나 조작이 가해지지 않고 다만 무심한 대응만을 하는 것으로서 과거를 정화시켜 현재를 바로 세우는 것이라 할수 있는 수행도이다.


여기서 언급할 필요가 있는 것은 anussarati로서 sati 수행을 설명하는 것은 같은 Nikāya라 할지라도 앞에서 말한 대로 극히 제한적이고 예외적이다. 이러한 경문은 초기경전에서도 이른 층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다만 상대적으로 늦은 층과 논장에서만 주로 발견된다. 따라서 이는 논장의 성립 시와 맞닿아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경전의 구성양식이나 내용을 볼 때도 후기층으로 간주할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논장 시대의 부가물일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하더라도 anussarati를 과거형으로 사용하는 것을 통해 어떻게 수행도로서의 sati가 나타나는가를 잘 보여준다.


Ⅵ. 마치는 말

본고는 필자가 제시한 sati의 정의로 ‘수동적 주의 집중’을 경전을 통해 교리적으로 증명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기존에 제시되었던 역어들의 문제점들을 염두에 두고 비교적으로 살펴보았다. 이러한 점에서 이제까지의 분석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요약 ․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삼염주의 성격에서 볼 수 있듯이 ‘sati 확립’ 상태는 어떠한 감정의 동요도 일으키지 않는 가운데 지극히 초연한 평정심이 지속되는 상태와 관련되어 있다. 이는 그 내용 상에 있어 제삼선에 이어 제사선과 일치함을 보여준다. 이러한 의미에서 ‘수동적 주의 집중’은 ‘무심한 주의집중’ 또는 ‘취사(선택)없는 주의집중’이나 ‘재반응없는 주의집중’으로도 바꿀 수 있다.


둘째, sati와 sampajāna는 분명한 개념상 차이가 있다. 먼저 sati는 ‘몸에서 몸, 느낌에서 느낌, 마음에서 마음 그리고 법에서 법과 같이 ‘1 : 1 거리 두기의 확립’만을 한정한다. 다시 말해, 대상과 직면한 ‘대칭적(對稱的) 주의집중’이라는 말로도 통하는 말이다.


셋째, sati와 달리 sampajāna는 대단히 높은 수준의 선정 상태로서 잠 자는 동안에도 잠자고 있음을 각성하고 있을 정도이다. 따라서 sati는 밝은 빛처럼 밝게 깨어 있는 분명한 상태와 직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넷째, 이로서 sati는 높은 선정상태의 sampajāna와 항상 함께하고 또한 삼염주나 제삼 ․ 사선에서 알 수 있듯이 지극히 초연한 ‘평정심(upekhā)’과도 함께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sati와 sampajāna 그리고 upekhā는 세발 달린 솥과 같은 상의상관 관계로 볼 수 있다.


다섯째, 경전에서 sati 확립의 비유는 “마치 어떤 사람이 앉아서 누운 사람을 마주 대하듯, 누워서 앉아있는 사람을 마주하는 것과 같다”고 나타난다. 이는 ‘1 : 1 거리 두기의 확립’으로 sati가 확고한 ‘대칭적(對稱的) 주의집중’임을 증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동작을 나타내기보다 단지 상태만을 지시하는 ‘수동적 주의집중’이라는 말의 적절함 또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여섯째, sati 자체가 바로 Vipassanā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이전의 필자의 주장은 다시 한번 확인된다. 하지만 현재까지 많은 연구자에 의해 sati를 바로 Vipassanā로 대입시키고 있는데 이같은 개념상의 혼란은 양자 모두 부적절하고 불완전한 개념 파악임을 스스로 반증한다.


일곱째, 마찬가지로 추수 후 소 떼를 그저 관리한다는 비유는 ‘수동적 주의집중’이 최선의 역어임을 나타내준다. 즉 추수 전 소떼를 쫒아 채찍으로 ‘챙기고’ ‘지키는’ 능동적 관리는 추수 후 단지 거리만을 뚜렷이 유지한 상태와 대비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수동적 주의집중’은 ‘노력없는 노력의 집중’이라는 의미에서 ‘무작위(無作爲) 주의집중’ 또는 ‘무공용(無功用) 주의집중’도 가능하다.


여덟째, 앞의 수평적 sati 비유와 함께 높은 탑의 정상에 올라 거리두기 확립을 의미하는 수직적 비유 또한 발견된다. 이는 sati 확립이 높은 수준의 선정의 바탕과 무욕(無欲)이 전제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다시 이러한 의미에서 관찰대상을 건드릴 수 없는 ‘수동적 주의집중’ 과 멀리 떨어져 ‘객관적 주의집중’할 수 있는 것은 서로 통하는 말이다.


아홉 번째, sati의 유무(有無) 상태를 설하는 경전은 sati 생성의 조건을 극명히 보여준다. 즉, 인식 상에 있어 탐욕이 일어나면 sati를 잃고, 탐욕없이 ‘단지 인식’할 수 있는 바탕이 되면 바로 sati의 언급이 나타난다. ‘수동적 주의집중’으로 옮기게 된 결정적 이유는 바로 이같은 경전의 대비를 통해서이며, 이는 ‘단지 바라만 볼 수 있는 상태’ 다른 표현이다. sati 개념의 핵심은 여기에 있으며 이러한 맥락에서 ‘무욕의 주의집중’이라는 말로도 바꿀 수 있다.


열 번째, (과거의) 기억도 sati 확립에 따른 관찰대상이다. sati는 ‘의지의 활동 또는 작용(行 : saṅkhāra)’을 쉬고 멈추게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모든 행의 지멸를 목표로 하는 선정 체계 속에 sati가 위치해 있는 이유이다. 이처럼 ‘수동적 주의집중’은 선정의 범위속에 ‘능동적 의지작용이 쉰 상태’에 있다. 따라서 목동의 비유에서처럼 쫒고 헤아리거나 ‘챙기고’ ‘지키는’ ‘작위적 ․의지적 또는 능동적 활동’으로서의 sati 이해와 바로 앞장의 서두에서 인용한 필자의 ‘수동적 주의집중’ 이해와는 상당한 점에서 대조를 이룬다. 사실 그러한 불일치로 현재까지 sati를 중심으로 한 시시비비는 계속되어왔다. 즉 출발선이 달라 이후 간격이 컸고, 출발점이 달라 이후 많은 쟁점이 있어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