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역 아함경/증일아함경

12. 일입도품(壹入道品)

실론섬 2015. 5. 15. 15:03

12. 일입도품(壹入道品)


[ 1 ]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일입(一入)의 도(道)3)가 있어서 중생들의 행(行)을 깨끗이 하고 시름과 근심을 제거하여 없애어, 온갖 번뇌가 없는 큰 지혜를 얻어 니원(泥洹 : 涅槃)의 과(果)를 성취하게 한다. 그것은 곧 5개(蓋)4)를 없애고 4의지(意止)5)를 생각하는 것이다."

(일입의 도[一入道]라고 하는 것은 오직 열반의 도에 들어가기 위하여 한결 같이 행해야 하는 도를 이르는 말이다.

5개란 5장(障)이라고도 한다. 개(蓋)는 덮어 가리다[覆蓋]라는 뜻으로서 마음을 덮어 가려서 선(善)한 법을 내지 못하게 하는 다섯 가지 번뇌. 즉 탐욕개(貪欲蓋)·진에개(瞋?蓋)·수면개(睡眠蓋)·도회개(掉悔蓋)·의개(疑蓋)를 말한다.

4의지란 4념처(念處)를 일컫는 것으로서, 즉 신념처(身念處)·수념처(受念處)·심념처(心念處)·법념처(法念處)이다.)  


어떤 것을 일입(一入)이라고 하는가? 이른바 마음을 전일(專一)하게 하는 것이니, 이것을 일입이라고 말한다. 어떤 것을 도(道)라고 하는가? 이른바 현성의 8품도(品道)이니, 첫째는 바른 소견[正見]이요, 둘째는 바른 다스림[正治]이며, 셋째는 바른 행위[正業]요, 넷째는 바른 생활[正命]이며, 다섯째는 바른 방편[正方便]이요, 여섯째는 바른 말[正語]이며, 일곱째는 바른 생각[正念]이요, 여덟째는 바른 선정[正定]이다. 이것을 일러 일입도(一入道)라고 말하느니라.

  

5개(蓋)를 없애야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른바 탐욕의 덮개[貪欲蓋]· 성냄의 덮개[瞋?蓋]·들뜸의 덮개[掉悔蓋]·잠의 덮개[睡眠蓋]·의심의 덮개[疑蓋]이니, 이 5개를 없애야 한다.

  

4의지를 사유한다는 것은 하는가? 비구가 안으로 제 몸을 관하여 나쁜 생각을 제거해버려서 근심이 없게 하고, 밖으로 제 몸을 관하여 나쁜 생각을 제거해 없애서 근심을 없게 하며, 안팎으로 제 몸을 관하여 나쁜 생각을 제거해버려서 근심을 없애야 한다.

  

안으로 느낌[痛 : 受]을 관하여 스스로 즐거워하고, 밖으로 느낌을 관하고 안팎으로 느낌을 관해야 한다. 안으로 마음을 관하여 스스로 즐거워하고 밖으로 마음을 관하고 안팎으로 마음을 관해야 한다. 안으로 법(法)을 관하고 밖으로 법을 관하며 안팎으로 법을 관하여 스스로 즐거워해야 한다.

  

어떤 것이 비구가 안으로 몸을 관하여 스스로 좋아하는 것인가? 비구가 그 몸을 관찰하되 그 성행(性行)을 따라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발끝에서 머리 꼭대기까지 그 몸은 모두 더러운 것이라서 탐낼 만한 것이 못된다고 관찰하고, 또 그 몸을 관찰하되 털·손톱·발톱·이·가죽·살·힘줄·뼈·골수·뇌·기름덩이·창자·밥통·심장·간·지라·콩팥 따위를 모두 관찰해 알고, 또 똥·오줌·생장(生藏)·숙장(熟藏)·눈물·침·콧물·혈맥·지방·쓸개 따위를 다 관찰하여 어느 것 하나도 탐낼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모든 비구들은 그 몸을 관찰하여 스스로 즐거워하면서 나쁜 생각을 버리고 시름과 근심을 없애야 하느니라.

(처음 음식을 받아들이는 장기를 생장이라 하고 음식물을 받아들여서 소화된 뒤에 그 찌꺼기가 머무는 장기를 숙장이라고 한다.)

  

또 비구는 그 몸을 돌이켜 관찰하되 '이 몸에 흙의 요소가 있는가, 물·불·바람의 요소가 있는가?' 하고 이와 같이 그 몸을 관찰해야 한다.

  

또 비구는 그 몸을 관찰하여 모든 경계에 대하여 분별하여 '이 몸에는 4계(界)가 있다'고 알아야 한다. 마치 능숙하게 짐승을 도살하는 사람이나 그 제자가 소를 다룰 때 뼈마디를 갈라 스스로 관찰하기를 '이것은 다리이고 이것은 내장이며, 이것은 뼈이고 이것은 머리이다'라고 아는 것처럼, 비구도 그 경계를 분별하여 그 몸을 관찰하되 '이 몸에는 흙의 요소와 물·불·바람의 요소가 있다'고 그렇게 관찰해야 한다. 이와 같이 비구는 그 몸을 관찰하여 스스로 즐거워해야 하느니라.

  

또 비구는 그 몸을 관찰하되 '이 몸에는 온갖 구멍이 있어서 더러운 것이 새어나온다'고 알아야 한다.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대밭이나 갈대밭을 보는 것처럼, 비구도 그와 같이 그 몸을 관찰하되 '이 몸에는 여러 개의 구멍이 있어서 온갖 더러운 것이 그 구멍으로 새어나온다'고 알아야 하느니라.

  

또 비구는 죽은 시체를 관찰하되 '죽은 지 하루, 혹은 이틀·사흘·나흘·닷새·엿새, 혹은 이레가 지나 그 몸이 부어 터지고 냄새가 나는 더러운 것이라'고 관하고 나서는 제 몸도 저 시체와 다름이 없으니 '이 내 몸도 저렇게 될 걱정을 면하지 못하리라'고 관찰해야 한다.

  

또 비구는 시체가 까마귀·까치·독수리 따위에게 먹히거나 혹은 호랑이·이리·개·벌레들에게 먹히는 것을 관하고 나서 또 제 몸도 그것과 다름이 없어 '내 몸도 저렇게 되는 근심을 면하지 못하리라'고 관찰해야 한다. 이것을 일러 '비구가 제 몸을 관찰하여 스스로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하느니라.

  

또 비구가 시체를 관찰하되 시체의 절반은 뜯어 먹히고 절반은 땅에 흩어져 있어 냄새나고 더러운 것이라고 알고 나서 또 제 몸에 대해서도 그것과 다름이 없어 '내 몸도 저런 법을 면하지 못하리라'고 관찰해야 한다. 또 시체를 관찰하되 송장이 살은 다 없어지고 뼈만 남은 채 피가 묻어 있는 것을 관하고는 또 '이 몸도 저 시체와 다름이 없다'고 관찰해야 한다. 비구는 이와 같이 그 몸을 관찰해야 한다.

  

또 비구는 시체의 힘줄이 나무에 걸린 것을 관하고 나서 제 몸도 그것과 다름이 없다고 관찰해야 한다. 비구는 이와 같이 그 몸에 대해 관찰해야 한다.

  

또 비구는 시체의 뼈가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데 손뼈·다리뼈가 각기 다른 곳에 있고, 혹은 장딴지 뼈·허리뼈·엉덩이뼈·팔뼈·어깨뼈·옆구리 뼈·등뼈·이마 뼈·해골들이 제각기 흩어져 있는 것을 관하고 나서, 또 제 몸도 그것과 다름이 없어 '나도 저런 법을 면하지 못할 것이며, 내 몸도 무너져 없어지고 말 것이다'라고 관찰해야 한다. 비구는 이와 같이 그 몸에 대해 관찰하고 스스로 즐거워해야 한다.


또 비구는 시체가 흰 빛과 흰 구슬 빛처럼 된 것을 관하고 나서, 제 몸도 그것과 다름이 없어 '나도 저런 법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관찰해야 한다. 이것을 일러 '비구가 스스로 제 몸을 관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 비구는 시체의 뼈가 시퍼렇게 멍든 것 같아 탐낼 것이 없고 혹은 재나 흙과 그 빛깔이 같아서 분별할 수 없음을 본다. 이와 같이 비구는 그 몸을 관하여 나쁜 생각을 버리고 시름과 근심을 없애야 한다. 이 몸은 무상(無常)한 것이라서 결국에는 흩어지고 마는 법이다. 이와 같이 비구는 안으로 그 몸을 관찰하고 밖으로 그 몸을 관찰하며 안팎으로 그 몸을 관찰하여 아무 것도 없는 것이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비구가 안으로 느낌[痛]을 관하는 것인가? 비구가 즐거움을 느낄 때는 곧 스스로 '나는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고 깨달아 알고, 괴로움을 느낄 때에는 '나는 괴로움을 느끼고 있다'고 스스로 깨달아 알며,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을 느낄 때에는 곧 '나는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을 느끼고 있다'고 스스로 깨달아 알아야 한다.

  

먹는 즐거움을 느낄 때에는 곧 '나는 먹는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고 스스로 깨달아 알고, 먹는 괴로움을 느낄 때에는 곧 '나는 먹는 괴로움을 느끼고 있다'고 스스로 깨달아 알며, 먹는 것이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을 느낄 때에는 곧 '나는 먹는 것이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을 느끼고 있다'고 스스로 깨달아 알아야 한다.

  

먹지 않는 즐거움을 느낄 때에는 곧 '나는 먹지 않는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고 스스로 깨달아 알고, 먹지 않는 괴로움을 느낄 때에는 곧 '나는 먹지 않는 괴로움을 느끼고 있다'고 스스로 깨달아 알며, 먹지 않는 것이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을 느낄 때에는 곧 '나는 먹지 않는 것이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을 느끼고 있다'고 스스로 깨달아 알아야 한다. 비구가 이와 같이 안으로 느낌을 스스로 관찰하는 것이다.

  

또 비구는 즐거움을 느낄 때에는 괴로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 때 '나는 즐거움을 느낀다'고 스스로 깨달아 알고, 괴로움을 느낄 때에는 즐거움을 느끼지 않나니 '나는 괴로움을 느낀다'고 스스로 깨달아 알며,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을 느낄 때에는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나니 '나는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을 느낀다'고 스스로 깨달아 알아야 한다.

  

그는 나는 습법(習法 : 集法)에 대하여 스스로 즐거워하고, 또 법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며, 또 법이 사라지게 하는 길을 관찰한다. 혹은 느낌이 현재에 앞에 나타나 있을 때에는 그것을 알 수 있고 볼 수 있으며, 그 근본에 대해 사유하여 의지할 만한 것이 없다고 알아 스스로 즐거워한다. 그래서 세상에 대한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거기서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곧 열반을 얻어, 나고 죽음은 이미 다하였고, 범행(梵行)은 이미 섰으며, 할 일을 이미 다 마쳐 다시는 후생에서 몸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사실 그대로 아느니라.

  

이와 같이 비구는 안으로 느낌을 관하여 어지러운 생각을 없애어 근심이 없고, 밖으로 느낌을 관하고 안팎으로 느낌을 관하여 어지러운 생각을 버려 근심이 없다. 이와 같이 비구는 안팎으로 느낌을 관찰해야 하느니라.

 

어떻게 비구는 마음과 마음의 법을 관찰하여 스스로 즐거워해야 하는가? 

비구에게 애욕의 마음[愛欲心]이 있으면 곧 애욕의 마음이 있는 줄을 스스로 깨달아 알아야 하고, 애욕의 마음이 없으면 곧 애욕의 마음이 없는 줄을 스스로 깨달아 알아야 한다. 성내는 마음[瞋?心]이 있으면 곧 성내는 마음이 있는 줄을 스스로 깨달아 알아야 하고, 성내는 마음이 없으면 성내는 마음이 없는 줄을 스스로 깨달아 알아야 한다. 어리석은 마음[愚癡心]이 있으면 곧 어리석은 마음이 있는 줄을 스스로 깨달아 알아야 하고 어리석은 마음이 없으면 곧 어리석은 마음이 없는 줄을 스스로 깨달아 알아야 한다.

  

사랑하는 마음[愛念心]이 있으면 곧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줄을 스스로 깨달아 알아야 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곧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줄을 스스로 깨달아 알아야 한다. 받아들이는 마음[受入心]이 있으면 곧 받아들이는 마음이 있는 줄을 스스로 깨달아 알아야 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이 없으면 곧 받아들이는 마음이 없는 줄을 스스로 깨달아 알아야 한다.

  

어지러운 마음[亂心]이 있으면 곧 어지러운 마음이 있는 줄을 스스로 깨달아 알아야 하고, 어지러운 마음이 없으면 곧 어지러운 마음이 없는 줄을 스스로 깨달아 알아야 한다.


흩어져서 서로 떨어진 마음[散落心]이 있으면 곧 흩어져서 서로 떨어진 마음이 있는 줄을 스스로 깨달아 알아야 하고, 흩어져서 서로 떨어진 마음이 없으면 곧 흩어져서 서로 떨어진 마음이 없는 줄을 스스로 깨달아 알아야 한다.

  

두루 미치는 마음[普遍心]이 있으면 곧 두루 미치는 마음이 있는 줄을 깨달아 알아야 하고, 두루 미치는 마음이 없으면 곧 두루 미치는 마음이 없는 줄을 스스로 깨달아 알아야 한다.

  

큰 마음[大心]이 있으면 곧 큰 마음이 있는 줄을 스스로 깨달아 알아야 하고, 큰 마음이 없으면 큰 마음이 없는 줄을 스스로 깨달아 알아야 한다. 한량없는 마음[無量心]이 있으면 곧 한량없는 마음이 있는 줄을 스스로 깨달아 알아야 하고, 한량없는 마음이 없으면 곧 한량없는 마음이 없는 줄을 스스로 깨달아 알아야 한다.

  

삼매의 마음[三昧心]이 있으면 곧 삼매의 마음이 있는 줄을 스스로 깨달아 알아야 하고 삼매의 마음이 없으면 곧 삼매의 마음이 없는 줄을 스스로 깨달아 알아야 한다.

  

해탈하지 못한 마음[未解脫心]이면 곧 해탈하지 못한 마음인 줄을 스스로 깨달아 알아야 하고, 해탈한 마음[解脫心]이면 곧 해탈한 마음인 줄을 스스로 깨달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비구는 마음과 마음의 모양에서 그 뜻이 그침을 관찰해야 한다. 법이 발생하는 것[習法]과 법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고 아울러 법이 사라지게 하는 길을 관찰하며, 법을 사유하는 것을 관하고서 스스로 즐거워해야 한다.

  

알 수 있고, 볼 수 있으며, 생각할 수 있고, 생각할 수 없는 것에 의지할 수는 없다고 깨달아 세상에 대한 생각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그런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므로 곧 두려움이 없어지고 두려움이 없어짐으로 남음이 없으며, 이미 남음이 없으므로 곧 열반에 이르러서, 나고 죽음이 이미 다하였고, 범행은 이미 섰으며, 할 일은 이미 다 마쳐 다시는 후생에서 몸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사실 그대로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비구는 안으로 마음과 마음에서 그 뜻이 그쳐짐을 관하여 어지러운 생각을 없애 근심이 없고, 밖으로 마음을 관찰하고, 안팎으로 마음과 마음에서 그 뜻의 그쳐짐을 관찰해야 한다. 이와 같이 비구는 마음과 마음의 모양에서 그 뜻이 그쳐지는 것을 관찰해야 하느니라.

  

어떻게 비구는 법과 법의 모양에서 그 뜻이 그쳐지는 것을 관찰해야 하는가? 비구가 염각의(念覺意)를 닦되 관(觀)을 의지하고, 욕심 없음[無欲]을 의지하며, 모두 사라짐[滅盡]을 의지하여 온갖 나쁜 법[惡法]을 다 버린다. 법각의(法覺意)를 닦고, 정진각의(精進覺意)를 닦으며, 염각의(念覺意)를 닦고, 의각의(?覺意)를 닦고, 삼매각의(三昧覺意)를 닦으며, 호각의(護覺意)를 닦되, 관(觀)법을 의지하고 욕심 없음[無欲]을 의지하며 모두 사라져서 다함[滅盡]을 의지하여 모든 나쁜 법을 버린다. 이와 같이 비구는 법과 법의 모양에서 그 뜻이 그쳐짐을 관찰해야 하느니라.

  

또 비구는 애욕에서 해탈하여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惡不善法]을 버리고, 각(覺 : 거친 생각)이 있고, 관(觀 : 미세한 생각)이 있으며, 편안하게 의지할 생각이 있어 첫 번째 선정에 들어가는 것을 스스로 즐거워한다. 이와 같이 비구는 법과 법의 모양에서 그 뜻이 그쳐짐을 관찰해야 하느니라.

  

또 비구는 각이 있음을 버리고 관이 있음을 버리며 안으로 기쁜 생각을 내어 전일한 마음으로 각도 없고 관도 없음을 이룩하여 마음이 편안하게 의지할 생각이 있어 두 번째 선정에 들어가 즐거워한다. 이와 같이 비구는 법과 법의 모양에서 그 뜻이 그쳐짐을 관찰해야 한다.

  

또 비구는 기억[念]을 버리고 보호하기를 닦아서 항상 스스로 몸이 느끼는 것을 깨달아 알고, 여러 성현들이 구하는 바를 즐거워하면, 보호하려는 생각이 청정한 세 번째 선정에 들어간다. 이와 같이 비구는 법과 법의 모양에서 그 뜻이 그쳐짐을 관찰해야 하느니라.

  

또 비구는 괴롭고 즐거운 마음을 버려 근심도 없고 기쁨도 없으며,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어서 보호하려는 생각이 청정한 네 번째 선정을 즐거워한다. 이와 같이 비구는 법과 법의 모양에서 그 뜻이 그쳐짐을 관찰해야 하느니라.

  

그는 발생하는 법[習法]을 수행하고 사라지는 법[盡法]을 수행하며, 아울러 발생하고 사라지는 법[習盡法]을 수행하여 스스로 즐거워하며, 곧 법(法)에 생각이 그치게 되어 현재 세상에서 알 수도 있고 볼 수도 있어 어지러운 생각을 제거해 버리고, 의지하는 데가 없어 세상에 대한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미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면 곧 두려움이 없어지고 이미 두려움이 없어지고 나면 나고 죽음이 곧 다하고 범행(梵行)은 이미 섰으며, 할 일을 이미 다 마쳐 다시는 후생에서 몸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사실 그대로 안다.

  

비구들아, 일입(一入)의 도에 의하여 중생들은 청정함을 얻고, 근심을 멀리 여의며, 다시는 기뻐하는 생각이 없고, 곧 지혜를 체득하여 열반을 증득한다. 이것이 이른바 5개(蓋)를 없애고 4의지(意止)을 닦는다는 것이니라."

  

그때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 2 ]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 가운데서 범행 닦는 이를 미워하고 시기하는 것보다 더 빨리 망하는 법은 보지 못하였다. 그런 까닭에 비구들아, 마땅히 자비와 인욕을 닦되 몸으로 자애를 실천하고 입으로는 자애로운 말을 하며 뜻으로 자애로움을 실천해야 한다. 모든 비구들아, 꼭 이와 같이 공부해야 하느니라."

  

그때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 3 ]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어떤 사람이 세상에 나타날 때에는, 모든 하늘·사람·마천(魔天)·사문(沙門)·바라문들 중에서 가장 높고 최상이 되는 분으로서 이 세상에 그와 견줄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며, 제일가는 복밭[福田]으로서 섬길 만하고 공경할 만할 것이다.


어떤 사람이 그런 사람인가? 

다살아갈(多薩阿竭 : 如來)·아라하(阿羅呵)·등정각(等正覺)을 그런 분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한 사람이 세상에 나타날 때에는 모든 하늘·사람·아수륜(阿須倫)·마(魔)·마천(魔天)·사문·바라문들보다 뛰어나서 가장 높고 최상이 되는 분으로서 이 세상에 그와 견줄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며, 제일가는 복밭으로서 섬길 만하고 공경할 만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비구들아, 항상 여래를 공양하는 것이 제일 잘하는 일이니라. 모든 비구들아, 꼭 이와 같이 공부해야 하느니라."

  

그때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 4 ]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병든 사람을 돌보아주는 것은 곧 나 부처를 돌보는 것이요, 병자를 간호하는 것은 곧 나를 간호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내가 지금 직접 병자를 간호해주려고 하기 때문이다.

  

비구들아, 나는 어떤 사람이 하늘·세간·사문·바라문을 보시하는 것 중에 최상이어서 이 보시보다 더 훌륭한 것이 있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니 이 보시를 행해야 비로소 참다운 보시가 되어 큰 과보(果報)를 얻고 큰 공덕을 얻어 그 명성이 널리 골고루 퍼지고 감로법(甘露法)의 맛을 얻게 될 것이다. 그 한 분이란 여래·지진(至眞)·등정각을 말하느니라.

  

온갖 보시 가운데에서 가장 훌륭한 것은 이 보시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 알고 이 보시를 행하면, 그것은 곧 참다운 보시가 되어 큰 과보와 큰 공덕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이런 인연으로 인하여 이렇게 말한다. '병자를 돌보아주는 이는 곧 나를 돌보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렇게 하면 너희들은 언제나 큰 복을 얻을 것이다. 모든 비구들아, 꼭 이와 같이 공부해야 하느니라."

  

그때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 5 ]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아련야(阿練若)8)를 찬탄하고 칭송하는 것은 곧 나를 찬탄하고 칭송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나는 항상 아련야행을 찬양하고 칭송하기 때문이다. 아련야를 비방하는 것은 곧 나를 비방하는 것이다. 걸식을 찬탄하여 말하는 것은 곧 나를 찬탄하고 칭송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나는 항상 걸식을 찬탄하여 말하기 때문이다. 걸식을 비방하는 것은 곧 나를 비방하는 것이다.

(아련야는 팔리어로는 ara a라고 한다. 또는 아란야(阿蘭若)·아란나(阿蘭拏)라고 쓰기도 하며, 번역하여 최한처(最閑處)라고 한다. 아련야행이란 두타(頭陀)행의 하나로 한가하고 고요한 곳에 머물면서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홀로 앉아 있는 이를 찬탄하여 말하는 것은 곧 나를 찬탄하여 말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나는 항상 홀로 앉아 있는 이를 찬양하여 말하기 때문이다. 홀로 앉아 있는 이를 비방하는 것은 곧 나를 비방하는 것이다.

  

한 번 앉아서 계속 수행하다가 하루에 한 끼니를 먹는 이를 찬양하고 칭찬하는 것은 곧 나를 찬양하고 기리는 것이다. 왜냐 하면 나는 항상 한 번 앉아서 계속 수행하다가 하루에 한 끼니를 먹는 이를 찬양하고 칭찬하기 때문이다. 한 번 앉아서 계속 수행하다가 하루에 한 끼니를 먹는 이를 비방하는 것은 곧 나를 비방하는 것이다.

  

나무 밑에 앉아서 수행하는 이를 찬탄하여 말하는 것은 곧 나를 찬탄하여 말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왜냐 하면 나는 항상 나무 밑에 앉아 수행하는 이를 찬탄하여 말하기 때문이다. 저 나무 밑에 앉아서 수행하는 이를 비방하는 것은 곧 나를 비방하는 것이다.

  

한데 앉아서 수행하는 이를 찬탄하여 말하는 것은 곧 나를 찬탄하여 말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나는 항상 한데 앉아서 수행하는 이를 찬탄하기 때문이다. 한데 앉아서 수행하는 이를 비방하는 것은 나를 비방하는 것이다.


다섯 가지 누더기 옷[五納衣]을 입은 이를 찬탄하여 말하는 것은 곧 나를 찬탄하여 말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나는 항상 다섯 가지 누더기 옷을 입은 이를 찬탄하여 말하기 때문이다. 다섯 가지 누더기 옷을 입은 이를 비방하는 것은 곧 나를 비방하는 것이다.

  

세 가지 법의만 지니는 이를 찬탄하여 말하는 것은 곧 나를 칭찬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나는 항상 세 가지 법의만 지니는 이를 찬탄하여 말하기 때문이다. 세 가지 법의만 지니는 이를 비방하는 것은 곧 나를 비방하는 것이다.

  

무덤 사이에 앉아 수행하는 이를 찬탄하여 말하는 것은 곧 나를 찬탄하여 말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나는 항상 무덤 사이에 앉아서 수행하는 이를 찬탄하기 때문이다. 무덤 사이에 앉아 수행하는 이를 비방하는 것은 곧 나를 비방하는 것이다.

  

하루 한 끼니만 먹는 이를 찬탄하여 말하는 것은 곧 나를 찬탄하여 말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나는 항상 하루에 한 끼니만 먹는 이를 찬탄하여 말하기 때문이다. 하루 한 끼니만 먹는 이를 비방하는 것은 곧 나를 비방하는 것이다.

  

점심때만 먹는 이를 찬탄하여 말하는 것은 곧 나를 찬탄하여 말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나는 점심때만 먹는 이를 찬탄하여 말하기 때문이다. 점심때만 먹는 이를 비방하는 것은 곧 나를 비방하는 것이다.

  

온갖 두타행(頭陀行)을 하는 이를 찬탄하여 말하는 것은 곧 나를 찬탄하여 말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나는 항상 두타행을 수행하는 이를 찬탄하여 말하기 때문이다. 두타행을 수행하는 이를 비방하는 것은 곧 나를 비방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 모든 비구들에게 분부하나니 너희들은 마하 가섭(迦葉)처럼 수행하여 빠뜨림이 없게 하라. 그렇게 해야 하는 까닭은 마하 가섭은 이런 모든 행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모든 비구들은 항상 마하 가섭처럼 수행해야 한다. 모든 비구들아, 꼭 이와 같이 공부해야 하느니라."

  

그때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 6 ]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라열성(羅閱城)의 가란다죽원에서 대비구들 5백 명과 함께 계셨다. 


그때 마하 가섭은 아련야에 머물고 있으면서 때가 되어 걸식할 적에는 가난한 집과 부자를 가리지 않았으며, 한곳에 한 번 앉으면 끝끝내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 나무 밑이나 한데나 비고 한적한 곳에 앉았으며, 다섯 가지 누더기 옷을 입고 세 가지 법의를 지니고 있었으며, 무덤 사이에서 수행을 하였다.

  

혹은 하루 한 끼니만 먹는데 그것도 점심때에만 먹었으며 두타행을 하는 사람들 중에 나이는 가장 많았다. 이 때 존자 마하 가섭은 식사를 마친 뒤에 곧 어떤 나무 밑으로 가서 선정에 들어갔다. 선정에서 다시 일어나 옷을 여미고 세존에게 나아갔다. 


그때 세존께서 멀리서 가섭이 오는 것을 보고 곧 말씀하셨다.

"잘 왔다, 가섭아."

가섭은 세존에게 나아가 머리를 조아려 그 발에 예를 올리고 한쪽에 앉았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가섭아, 그대는 나이도 많고 노쇠하여 기력이 없을 것이다. 그대는 지금부터 걸식과 온갖 두타행을 중단하고 또 여러 장자의 공양과 그들이 주는 옷을 받도록 하라."

가섭이 대답하였다.

"저는 여래의 분부를 따르지 못하겠습니다. 왜 그런가 하오면, 만일 여래께서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無上正眞道]를 이루지 못하셨을 적에 저는 벽지불(?支佛)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벽지불은 아련야행을 행하면서 때가 되어 걸식할 적에는 가난한 집과 부자를 가리지 않고 한곳에 한 번 앉으면 끝끝내 옮기지 않았으며, 나무 밑이나 한데나 혹은 비고 한적한 곳에 앉았으며, 다섯 가지 누더기 옷을 입고 세 가지 법의를 지녔으며, 무덤 사이에서 수행하였고 끼니는 하루에 한 끼니만 먹되 점심때에만 먹었으며, 또 두타행을 행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와서 본래 익힌 것을 버리고 다시 다른 행을 배울 수가 없사옵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장하고 장하구나, 가섭아. 그대는 중생들에게 많은 이익을 주어 한량없이 많은 사람들을 건지고, 널리 일체의 천상(天上)과 인간(人間)을 제도할 것이다. 왜냐 하면, 또 가섭아, 그 두타행이 세상에 남아 있으면 내 법도 또한 이 세상에 오래 남아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법이 이 세상에 남아 있으면 하늘 세계[天道]는 더욱 늘어나고 세 갈래 나쁜 세계는 점점 줄어들 것이며, 또 수다원(須陀洹)·사다함(斯陀含)·아나함(阿那含)의 3승도(乘道)를 성취하여 모두 세상에 존재하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비구들은 수행을 하되 가섭이 익혔던 것처럼 해야 하느니라. 모든 비구들아, 꼭 이와 같이 공부해야 하느니라."

  

그때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 7 ]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이양(利養)은 너무도 무거운 것이라서 사람들로 하여금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無上正眞道]에 이르지 못하게 한다. 왜냐 하면 모든 비구들아, 저 제바달두(提婆達兜 : 提婆達多)는 사람됨이 어리석어서 저 왕자 바라류지(婆羅留支)9)가 공양한 5백 개 가마솥의 밥을 받아 공양하였다. 만일 그가 공양하지 않았더라면 어리석은 제바달두는 끝내 그런 악을 짓지 않았을 것이다. 바라류지 왕자가 날마다 5백 개의 가마솥에 밥을 지어 가지고 가서 공양하였기 때문에 제바달두는 5역죄(逆罪)를 지었고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는 큰 아비지옥에 떨어진 것이다.

(라바류지 왕자란 팔리어로는 Balaruci라고 한다. 번역하여 절지(折指)라고 하며, 마갈타국 빈바사라왕(頻婆娑羅王)의 태자 아사세(阿?世)의 별명이다. 그는 일찍이 아비를 시해하고 자신이 왕이 되었는데, 나중에는 과거에 지은 악업에 대하여 참회하고 부처님께 귀의하였다. 그가 태어났을 때에 관상 보는 사람이 그의 관상을 보고 나중에 틀림없이 아비를 시해할 상이라고 하자 빈바사라왕이 두려운 마음이 생겨 왕자를 데리고 높은 누각에 올라가 그를 밀쳐 떨어뜨렸는데 죽지는 않고 다만 손가락 하나만 부러졌다. 이 왕자는 태어나기 전에 이미 서로 원한이 있었다 하여 그 이름을 아사세(阿?世 : 未生怨)라고 하였고 손가락이 부러졌으므로 또 바라유지(婆羅留支 : 折指)라고 하였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이양은 매우 무거운 것이라서 사람들로 하여금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만약 이양을 탐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거든 다시는 생기지 못하게 하고, 이미 생겼거든 곧바로 없애야 할 것이니라. 모든 비구들아, 너희들은 꼭 이와 같이 공부해야 하느니라."

  

그때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 8 ]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왕사성에 있는 기사굴산에서 대비구들 5백 명과 함께 계셨다.


그 무렵에 제바달두가 승가 대중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여래의 발을 다치게 하고는 아사세를 시켜 그 부왕(父王)을 죽이게 하고 다시 아라한인 비구니를 죽이고는 대중들 앞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악(惡)이 어디에 있으며 악은 어디에서 생기는가? 누가 그 악을 지어 그 과보를 받는가? 나는 어떤 악을 지어도 그 과보를 받지 않는다."

  

그때 많은 비구들이 라열성(羅閱城)에 들어가서 걸식을 하다가 어리석은 제바달두가 대중들 앞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악이 어디에 있으며 악은 어디에서 생기는가? 누가 그 악을 지어 그 과보를 받는가?"

  

그때 많은 비구들은 공양을 마친 뒤에 가사와 발우를 챙겨 두고 니사단(尼師壇)을 오른 어깨에 걸치고 세존께서 계시는 곳으로 찾아가서 머리를 조아려 그 발에 예를 올리고 한쪽에 앉았다.

그때 많은 대중 비구들이 세존께 아뢰었다.

"저 어리석은 제바달두가 대중들 앞에서 말하기를 '어떤 악을 지어도 재앙이 없고, 어떤 복을 지어도 보답이 없다. 선과 악의 과보를 받는 경우는 전혀 없다'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악도 있고 죄도 있으며 선이나 악을 행했을 경우에는 틀림없이 그 과보가 있다. 만일 저 어리석은 제바달두가 선과 악의 갚음이 있는 줄을 안다면 몸이 바짝바짝 타고 초조해 하며, 근심스럽고 피가 끓어올라 얼굴에 있는 온갖 구멍으로 흘러나올 것이다. 저 제바달두는 선과 악의 갚음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대중들 앞에서 '선과 악의 갚음이 없다. 악을 행해도 재앙이 없고 선을 행하여도 복이 없다'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니라."

  

그때 세존께서 곧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사람 스스로 지혜로운 체하며

  악을 행해도 복이 있다 하네.

  그러나 나는 지금 미리 아나니

  선과 악에는 틀림없이 그 갚음 있다네.


이와 같나니 모든 비구들아, 너희들은 마땅히 악은 멀리 여의고 복 짓기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모든 비구들아, 꼭 이와 같이 공부해야 하느니라."

  

그때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 9 ]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남에게서 이양을 받는다는 것은 매우 중(重)하고 쉽지 않은 일이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함이 없는 곳[無爲處 : 涅槃]에 이르지 못하게 한다. 왜냐 하면, 이양의 갚음은 사람의 가죽을 들어가 끊고, 가죽을 끊고 나면 살을 끊으며, 살을 끊고 나면 뼈를 끊고, 뼈를 끊고 나면 골수를 끊기 때문이니라. 모든 비구들아, 이러한 일로써 이양이란 매우 무거운 줄을 알아야 한다. 만약 이양을 탐내는 마음이 아직 생기지 않았거든 다시는 생기지 못하게 하고 이미 생겼거든 바로 없애야 한다. 모든 비구들아, 너희들은 꼭 이와 같이 공부해야 하느니라."

  

그때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 10 ]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남에게서 이양을 받는다는 것은 매우 중하고 쉽지 않은 일이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함이 없는 곳에 이르지 못하게 한다. 왜냐 하면, 만일 저 사리라(師利羅) 비구가 이양을 탐내지 않았더라면 저렇게 한량없는 살생을 하여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 지옥에 들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때 세존께서 곧 게송을 설하셨다.


  남에게서 무거운 이양을 받으면

  사람의 맑고 깨끗한 행 무너지나니

  그러므로 마땅히 그 마음 제어하고

  그 맛을 탐하여 집착하지 말지니라.


  저 사리라 비구가 선정을 닦아

  제석천궁에 태어났지만

  그 신통력이 갑자기 퇴보하여

  백정 노릇을 하는 처지로 타락하였다.


모든 비구들아, 이러한 일로 볼 때에 남에게서 이양을 받는 것은 그리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나니 모든 비구들은 마땅히 다음과 같이 배워야 하리라. 즉 이양을 탐내는 마음이 아직 생기지 않았거든 다시는 생기지 못하게 하고 이미 생겼거든 방편을 써서 바로 없애야 한다. 모든 비구들아, 너희들은 꼭 이와 같이 공부해야 하느니라."

  

그때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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