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논문·평론

구원학적 측면에서 본 초기인도불교의 열반

실론섬 2015. 6. 27. 12:50

구원학적 측면에서 본 초기인도불교의 열반

(남아시아연구 제16권 1호 2010)

황 순 일/동국대학교 불교대학 교수

 

차 례 

Ⅰ. 들어가는 말 

Ⅱ. 열반에 도달하는 길 

    1. 고행의 길 

    2. 지혜의 길 

    3. 명상의 길 

Ⅲ. 열반의 상태 

Ⅳ. 맺음말 

 

<국문요약>

구원학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 초기불교의 열반(nirvāṇa)은 여러 가지 의문부호를 달고 있다. 우리들이 열반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으며, 열반이란 어떤 상태일까에 대해서 초기불교는 명확한 답을 주지 않고 있다. 초기경전은 기원을 달리하는 여러 가지 설명들을 열반에 도달하는 방법으로 두서없이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열반의 상태에 관해서도 비유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 논문에서는 구원에 이르는 길과 관련하여 유여열반을 중심으로 초기경전에 나타나는 고행의 길, 지혜의 길, 그리고 명상의 길을 다양한 문화적 종교적 배경을 통해 살펴본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어느 길이 가장 불교적이고 불교 고유의 방법인지를 알아본다. 또한 구원의 상태에 관해서 무여열반을 중심으로 초기경전의 해석서인 아비달마 문헌들에서 나타나는 부파불교의 입장을 살펴본다. 부파불교시대의 무여열반에 관한 견해를 통해 부정적이고 허무적이며 단멸적인 것으로 보였던 불교적 구원의 상태가 어떻게 긍정적이고 낙관적이며 영원한 것으로 해석되게 되었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Ⅰ. 들어가는 말

불교에서 구원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괴로움의 소멸’, ‘현실적인 고통에서 벗어남’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초기 인도불교에서 현실인식의 출발점은 이러한 괴로움(duḥkha) 또는 고통이 우리 삶의 도처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다는 것이었다. 이 세상에 있는 그 누구도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없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과 자신이 얻을 수 있는 것 사이의 부조화 속에 있으며, 따라서 결코 만족스럽지 못한 상태에서(unsatisfactory) 살아가고 있다. 우리의 삶은 심리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고, 항상 다른 어떤 것을 원한다는 점에서 결코 자립적일 수 없다. 불교에 있어서 구원이란 바로 이러한 만족스럽지 못한 상태로부터 영원히 벗어나는 것으로서 열반(nirvāṇa)이란 개념을 통해 설명되고 있다.   

어원적으로 보았을 때 열반이란 nirvāṇa(to go out)에서 파생된 명사로 어떤것이 꺼지고 있는 상태를 지칭한다. 서구에서 불교가 학문적으로 연구된 이래 이 용어는 수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바람 등과 같은 외부의 힘에 의해 등불이 꺼지는 것(blowing out)에 비유되면서 타동사적으로 해석되어 왔다. 하지만 이 용어는 문법적으로 자동사로서 더 이상의 땔감 등과 같은 연료가 없어서 불이 자연적으로 꺼져가는 것(going out)을 지칭한다(Hwang, 2006: 9). 초기경전은 이렇게 꺼져가는 대상이 현실에서 고통 받는 인간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서 이렇게 꺼져가는 것은 탐냄(rāga), 혐오(dosa), 우둔함(moha)으로서 우리를 만족스럽지 못한 상태로 이끄는 모든 번뇌를 지칭한다. 초기불교에서 열반(nirvāṇa)이란 바로 이러한 모든 번뇌의 소멸로서 어떤 것에도 조건 지워지지 않은 것(無爲, asaṃskṛta)이고 깨달음(正覺) 그 자체였다.   

하지만 초기불교의 소박한 열반개념은 점차적으로 죽음 이후의 영역으로 확장된다. 붓다는 스스로를 따타가따(Tathāgata) 즉 ‘앞으로 그와 같이 윤회(saṃsāra)에서 떠나갈 사람’으로 칭하고 있다. 깨달음을 얻어 더 이상의 번뇌가없는 사람의 죽음은 일반적인 죽음과 다른 것이어야 했고, 이렇게 윤회로부터완전히 떠나가는 죽음은 만족스럽지 못한 상태로부터 완전히 떠나가는 것이어야 했다.   

초기불교에서는 이를 유여열반(sopadhiśeṣanirvāṇa)과 무여열반(anupadhiśeṣanirvāṇa)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전자가 불교적 수행의 실천적인 목표로서 모든 번뇌가 소멸되었다는 깨달음의 상태를 지칭한다면, 후자는 불교적 구원의 완성된 결과 이 세계로부터 마지막으로 떠나가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초기불교는 유여열반이 성취되면 무여열반이 자연적으로 뒤따르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Hwang, 2006: 23), 전자를 강조하고 후자를 철학적으로 형이상학적으로 탐구하는 것을 장려하지 않았다. 따라서 따타가따(Tathāgata)가 죽은 후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은 14가지의 대답되지 않는 질문들(無記, avyākṛta) 중의 하나로 남게 되었으며, 불교적인 구원의 완성된 결과는 의문부호로 남게 되었다.     

이 논문은 불교적 구원의 총체적인 모습이 초기불교에서 확정되지 않은 채 남겨졌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구원학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 초기불교는 열반(nirvāṇa)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으며, 열반이란 어떤 상태일까에 대해서 명확한 답을 주지 않고 있다. 초기경전을 살펴보면, 기원을 달리하는 다양한 설명들이 열반에 도달하는 방법으로서 두서없이 제시되고 있을 뿐이고, 비유와 침묵만이 열반의 상태에 관해서 피상적으로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사실상 열반에 관한 본격적인 논의들을 초기경전의 해석서인 아비달마 문헌들을 중심으로 부파불교시대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부파불교 논사들 사이에서 열반은 주석적이고 철학적인 해석의 영역에서 논의되기 시작했고 다양한 이론들과 수많은 논쟁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 논문에서는 유여열반을 중심으로 어떻게 열반에 도달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을 살펴보고 무여열반을 중심으로 부정적이고 허무적이며 단멸적인 것으로 보였던 열반의 상태가 긍정적이고 낙관이며 영원한 것으로 변화해가는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Ⅱ. 열반에 도달하는 길

네덜란드의 유명한 불교학자 틸만 페터는 1988년에 발표한 초기불교의 이념과 명상(The Ideas and Meditative Practices of Early Buddhism)이란 저서에서 초기불교의 열반 즉 구원을 향한 많은 길들 중에서 다음의 세가지를 대표적으로 언급하고 있다(Vetter, 2009: 38).   

첫째, 색계 사선을 통해서 사성제를 인식하고 실천할 때 모든 염오된 것(漏)으로부터 벗어나 윤회와 괴로움에서 자유로워진다.

둘째, 색계 사선과 무색계 사선정을 거쳐서 개념과 느낌이 소멸되는(saññavedayitanirodha) 멸진정에 도달할 때 모든 염오된 것(漏)으로부터 벗어나 윤회와 괴로움에서 자유로워진다.   

셋째, 지혜(paññā)를 통해서 자기 스스로를 다섯 구성요소(pañcaskandha)로 분해하고 각각이 영원하지 않고(anitya), 만족스럽지 못한 상태에 있으며(duḥkha), 따라서 나 또는 나의 것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anātmaka)고 알 때 모든 욕망에서 벗어나 윤회와 괴로움에서 자유로워진다.   

일반적으로 초기경전에 나타나는 이러한 다양성은 초기불교가 다양한 종교적 환경에 노출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결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들 중에서 가장 불교적인 구원의 길을 파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1. 고행의 길
인도의 겐지즈강 중하류 지역을 중심으로 성립된 대표적 출가수행자 집단의 종교로서 아지비까(Ājīvikas), 자이나교(Jainism) 그리고 불교를 들 수 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윤회(saṃsāra)를 받아들이면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계를 괴로움으로 또는 만족스럽지 못한 상태로 가득한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구원으로 가는 길은 끊임없는 반복되는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 즉 끊임없이 흐르는 윤회의 바다를 건너 피안의 세계로 가는 것이 된다. 한역경전에서 흔히 外道로 번역되는 용어로서 tīrthakara 또는 tīrthika가 있다. 이 용어는 건너다란 의미의 √tṛ를 어근으로 ‘강가’, ‘강둑’을 의미하는 tīra를 바탕으로 ‘수로’, ‘길’, ‘조언’, ‘가르침’을 의미하는 tīrtha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어원적으로 보았을 때 윤회의 바다를 건너 해탈로 가는 가르침을 가진 사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아지비까와 자이나교는 구원의 길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   

먼저 아지비까의 경우 행위(業, karman)와 유사한 인과관계의 힘이 작용하고있다는 점은 받아들였지만, 우리들의 인위적인 노력으로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경험하게 될 즐거움과 괴로움은 숙명(niyati)이란 이름으로 이미 결정되어 다가오며, 심지어는 8,400,000겁 동안 윤회를 반복하고 나면 자동적으로 청정해저서 윤회로부터 벗어나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까지 결정되어 있다(황순일, 2009: 162-163).   

한편 자이나교는 행위(業, karman)와 관련해서 우리들의 인위적인 노력이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점을 받아들인다(황순일, 2009: 168-169). 물활론(hylozoism)적인 자이나교에 의하면 이 세계에 있는 모든 것들은 상향성을 지닌 영혼(jīva)을 포함하고 있다(Gombrich, 2009: 48). 하지만 무게를 가진 물질(paudgalika)로 규정된 행위(karman)가 영혼에 달라붙어 영혼을 계박(bandha)하여 올라가는 것을 방해하고 무겁게 만들어 아래로 내려가게 한다(Gombrich,1996: 50). 구원학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자이나의 해탈(mokṣa)은 영혼(jīva)에 붙어있는 모든 행위의 물질들이 고행을 통해서 파괴되어 영혼의 영원한 거주처인 우주의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다시는 밑으로 내려가지 않고 영원히 있는 것으로 설명된다(Jaini, 1983: 237).   

방법론적으로 보았을 때 자이나교의 해탈은 고행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우리들의 어떠한 행동도 영혼에 행위의 물질이 부착되는 결과를 초래하여 영혼이 우주의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것을 방해하게 된다. 따라서 이미 영혼에 붙어있는 행위들은 고행을 통해서 그 고통을 미리 받거나 고행에서 발생하는 열기를 통해서 파괴하고, 더 이상 어떠한 행위도 하지 않음(non-action)을 통해결국에는 우주의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자이나교의 성인들은 스스로 굶어 죽음을 통해 해탈을 성취한다)   

남인도 까르나따까(Karnataka)의 쉬라완벨라골라(Shravanbelagola)에는 자이나교의 성인 고마떼스와라(Gomateshvara)의 유명한 동상이 있다. 그는 어떠한 행동도 하지않고 한자리에 가만히 서있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덩굴나무가 그의 다리로부터 어깨까지 올라와있는 모습을 통해 덩굴나무가 자라는 동안 그가 가만히 서서 어떠한 움직임도 하지 않았음을 표현하고 있다. 즉 이 동상은 어떠한 행위도 하지 않음을 통해 해탈에 이른다는 초기 자이나교의 구원관을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자이나교는 남인도 지역으로 중심으로 의복을 입지 않는 디감바라(Digambara) 전통과 서인도 지역을 중심으로 백의를 입는 스웨땀바라(Śvetāmbara) 전통으로 크게 구분된다. 전자가 모든 정신적 육체적 행위를 중단하는 것(non-action)을 목표로 엄격한 고행을 중시한다면, 후자는 모든 종류의 폭력에 반대하는 엄격한 비폭력(ahiṃsā)을 중시하고 있다. 이 동상은 디감바라 전통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인도불교의 초기경전에는 들판에 가만히 서서 자리에 앉는 것을 거부하고 괴로움과 고통과 찌르는 듯한 아픔을 경험하는 자이나 고행자들이 모습이 종종 등장하는데, 붓다는 이들의 고행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만일 과거의 행위 때문에 기쁘거나 괴로운 느낌을 경험한다면, 자이나고행자들(Nigaṇṭhas)은 아마도 과거에 악한 행위를 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금 괴로움과 고통과 찌르는 듯한 아픔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자이나교의 고행이 가지는 이러한 측면은 선정수행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초기 자이나교의 선정수행은 모든 신체적 정신적 작용이 완전히 멈추는 것을 목표로 한다. 전자를 위해 단식과 호흡의 중단을, 후자를 위해 모든 감각기관의 완벽한 통제를 추구했다(Bronkhorst, 2009: 47). 사실상 붓다는 이러한 자이나교의 선정수행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초기경전에는 붓다가 깨달음을 얻기 전에 혀를 뒤로 말아 올려서 목구멍을 막고 호흡을 중단하거나(MN I, 244-245) 극단적인 단식(MN I 245-246)을 통한 고행을 했을 때의 괴로운 경험이 비판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감관을 억제해서 시각기관으로 외부대상을 볼 수도 없고 청각기관으로 외부의 소리도 들을 수 없는 수련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맹인과 귀머거리를 예로 들며 비판하는 붓다의 모습도 볼 수 있다(MN III, 298-299; Bronkhorst, 2009: 49).  

틸만 페터에 의해서 초기불교의 열반을 향한 두 번째 방법으로 언급된 색계 사선과 무색계 사선정7)을 단계적으로 거쳐서 멸진정에 도달하는 길은 이러한자이나적 요소들을 상당부분 포함하고 있다. 브롱코스트는 무색계 사선정들이 기본적으로 정신현상들을 중지시키는데 목적을 가지고 있고, 무한한 공간의 영역에 대한 선정(ākāśānantyāyatana)과 무한한 의식의 영역에 대한 선정(vijñānānantyāyatana)이 자이나의 무한성에 대한 선정(anantavartitā)과 유사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Bronkhorst, 1993: 87). 또한 어떤 것도 없는 영역에 대한 선정(ākiñcanyāyatana)과 개념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영역에 대한 선정(naivasaṃjñānāsaṃjñāyatana)이 붓다가 깨달음을 얻기 이전의 스승인 아라다 깔라마(Ārāḍa Kālāma)와 라마의 아들 웃라까(Udraka Rāmaputra)에게서 각각 배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MN I, 163-164, 240; II, 212). 물론 이 이야기의 역사적인 신빙성에 관해서는 의문이 많지만(Bareau, 1963: 20-21; Bronkhorst,1993: 85-87), 적어도 이 두 가지 선정이 불교외적인 수행전통에 기원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구차제정으로도 언급되는 이 두 번째 길에서 색계의 사선과 무색계의 사선정을 거치면 마지막으로 멸진정(nirodhasamāpatti)8)에 도달하게 된다. 개념과 느낌이 정지된 선정(想受滅定, saṃjñāvedayitanirodha)으로도 불리는 이 선정에 이르러야 모든 염오된 것이 파괴되었다는 것을 확실히 아는 지혜(漏盡智)가 생긴다는 점에서 구차제정의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다.   

초기경전에 의하면 이 선정에서 들숨과 날숨이란 신체적 작용이 멈추고, 심사(vitarka)와 숙고(vicāra)란 언어적 작용이 멈추며, 느낌(vedanā)과 개념(saṃjñā)이란 정신적 작용이 멈추는 것으로서(MN I 301-302), 신체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단위의 활동만이 허용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폴 그리피스는 멸진정에 든 수행자의 상태를 재로 잘 덮혀져 있어서 겉으로 보기에 마치 꺼진 것처럼 보이지만 언제든지 다시 타오를 수 있는 숯불에 비유하여 설명한다(Griffiths, 1986:10).   

멸진정은 부파불교에서 마음을 포함한 일체의 정신현상들이 완전히 중지되는 선정으로 발전하고, 초기경전에 이미 나타난 들숨과 날숨의 중지되는 선정으로 설명된다는 점에서 자이나적인 요소를 가장 많이 포함하고 있는 선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구차제정을 통해서 열반으로 향하는 길은 초기불교 고유의 것으로 붓다 당시에 언급되었을 가능성이 희박하며 일정 시점이 지난 후에 불교가 외부에서 받아들였을 것으로 보아야 한다(Vetter,2009: 39).  

2. 지혜의 길
번뇌를 제거하는 것에 있어서 지혜(paññā)의 역할은 흔히 비유적으로 설명된다. 어두운 방에 들어간 사람이 방구석에서 뱀과 같은 것을 보면 깜짝 놀라 어쩔 줄을 모르게 된다. 하지만, 점차 주위가 환해지면서 그것이 새끼줄이란 것을 아는 순간 그의 모든 걱정과 두려움이 순식간에 사라지게 된다. 초기경전은 우리들이 모든 욕망에서 벗어나 윤회와 괴로움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하는 지혜를 다섯 구성요소(五蘊, pañcaskandha)에 대한 다음과 같은 통찰로서 설명한다.   

비구들이여 신체(rūpa)는 영원(nicca)한가 영원하지 않는가(anicca)? 
스승이시여, 영원하지 않습니다. 
영원하지 않은 것은 괴로운가(dukkha), 기쁜가(sukkha)? 
스승이시여, 괴롭습니다. 
그렇다면 영원하지 않고 괴로우며 본성에 있어서 변하는 것(vipariṇāmadhamma)에 대해서,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이 나이며 이것이 나의 자아(atta)라고 생각하는 것은 올바른가? 
스승이시여 실로 그렇지 않습니다.(Vin I, 13.)

동일한 논법으로 느낌(vedanā), 개념(saṃjñā), 의지작용(saṃskāra), 그리고 의식(vijñāna)에 관한 대화가 이어진 후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결론 짓는다.  

배움이 많은 성스러운 제자들이 이와 같이 알 때, 그는 신체에, 느낌에, 개념에, 의지작용에, 그리고 의식에 무관심하게 된다(nibbindati). 그가 이들에 무관심하게 되었을 때, 그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욕망에서 자유로움으로 그는 해탈한다. 해탈했을 때 내가 해탈했다는 다음과 같은 앎
(ñāna)이 생겨난다. 생은 파괴되었고 종교적이 삶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모든 일을 다 했음으로 나는 더 이상 이 세계로 되돌아오지 않는다.  

남방 테라와다 교단(Theravādins)의 율장(Vinaya)에 의하면 이 이야기는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직후 사르나트의 녹야원에서 행한 첫 설법에 포함되어 있다. 특히 사성제가 설해지는 중간에 깨달음을 얻은 안나따 꼰단나(Aññāta Koṇḍañña) 사성제가 설해진 후 깨달음을 얻은 왓빠(Vappa)와 밧디야(Bhaddiya)를 제외한 나머지 두 사람은 이 가르침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은 것으로 설명된다. 즉 이들에게 있어서 다섯 구성요소(pañcaskandha)의 각각을 이와 같이 보는 지혜가 이들을 해탈로 인도한 것이다.   

초기경전에서 사용된 anattā의 용법에 관해서 많은 해석과 논란들이 이어지고 있다. 인간존재를 구성하는 다섯 요소(pañcaskandha)인 신체(rūpa), 느낌(vedanā), 개념(saṃjñā), 의지작용(saṃskāra), 그리고 의식(vijñāna)의 각각이 anattā라고 이야기하는 부분에 있어서 이 용어는 문법적으로 보았을 때 자아를 결여하고 있다(無我)는 소유복합어가 아니라 자아가 아니다(非我)라는 서술복합어로 사용되고 있다(Bronkhorst, 2009: 23). 물론 초기불교가 다섯 구성요소(pañcaskandha) 이외에 다른 어떤 것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결국 자아(ātman)가 없다는 무아의 가르침에 접근하고 있지만, 이 용어가 사용된 내용적 맥락을 살펴보면 이 용어는 서술복합어로 사용된 것이 거의 확실하다.   

불교를 제외한 대부분의 인도사상에서 자아(ātman)에 대한 지혜는 구원을 얻는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서 언급된다(Bronkhorst, 2009: 25). 위의 논법에서 부정된 것을 역으로 추적하면 초기경전은 영원하고(nicca) 기쁘며(sukkha) 본성에 있어서 결코 변하지 않는(a-vipariṇāmadhamma) 것으로 설명되는 자아(ātman)를 부정하고 있다.   

구원학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고대 상키아(Sāṃkhya)와 같이 자아에 대한 지혜를 중시하는 수행자들에게 있어서 해탈(mokṣa)은 존재의 핵심으로서 진정한 자아가 우리를 끊임없이 윤회의 세계에 머물게 하는 행위(業, karman)와 전혀 관계가 없고 따라서 영원하며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Bronkhorst, 1993: 31-67). 우빠니샤드(Upaniṣad)의 많은 문헌들은 가장 소중하고 영원하며 기쁨으로 가득한 자아에 대한 지혜가 구원을 얻는 열쇠가 된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Bronkhorst, 2009: 25-26).   

물론 초기경전은 어떤 가문에 속하는지, 이름이 무엇인지, 어디에 사는지, 외모가 어떠한지도 모르면서 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찾겠다는 사람의 우둔함을 예로 들면서, 자아에 관한 지혜가 해탈을 얻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비유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사실상 해탈로 가는 방법만을 따지고 본다면 우리를 구성하는 다섯 구성요소(pañcaskandha)들 각각이 자아가 아니라(非我)는 지혜(anatta)는 힌두 상키아 사상(Sāṃkhya)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상키야에서 자아(ātman)에 해당되는 것은 뿌루샤(puruṣa)로서 순수의식이며 절대적인 비작자로서 행위의 결과를 경험하기는 하지만(bhoktṛ) 결코 행위자(kartṛ)는 아니다(이지수, 1991: 132). 우리 인간존재를 구성하는 통각(buddhi), 자의식(ahaṃkāra), 마음(manas) 등을 포함한 모든 정신적 물질적 요소들은 이 세계를 구성하는 질료인인 쁘라끄리띠(prakṛti)에 속할 뿐이다. 따라서 우리들을 구성하는 정신적 물질적 구성요소들이 결코 자아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분별지(vivekajñāna)가 상키아에 의하면 우리를 해탈로 이끌게 된다(이지수, 1991: 145).  

따라서 지혜(paññā)를 통해서 열반으로 향하는 길은, 슈미트하우젠이 주장했던 것(Schmithausen, 1981: 219)과 같이, 첫 번째 색계 사선을 통해서 사성제를 인식하는 길보다 조금은 후대에 성립되었을 가능성이 높다(Vetter, 2009:40-42). 또한 초기경전은 무실라(Musīla)와 나라다(Nārada)의 이야기(SN II, 115-116.)를 통해 지혜만으로 구원이 가능하다는 점에 강한 의문을 표시하고 있다. 라 발레 뿌셍에 의해 바가바드기따(Bhagavadgītā)의 상키야(Sāṃkhya)와 요가(Yoga)를 연상시키는 것으로도 언급된 이 이야기에서(La Vallée Poussin, 1937), 무실라와 나라다는 동일하게 해탈에 이르는 지혜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전자는 자신이 아라한임을 침묵으로 받아들이는 반면, 후자는 자신이 아라한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나라다는 마치 사막에서 물이 있는 깊은 샘물을 발견했지만 그 물에 도달할 방법이 없는 사람을 예로 들면서, 자신은 비록 지혜는 갖추었지만 아직까지 모든 번뇌가 파괴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Bronkhorst, 2009: 34-35). 즉 모든 번뇌를 파괴하여 구원에 이르는 길에서 지적인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한 셈이다.   

3. 명상의 길
초기경전은 붓다가 자신의 극단적인 고행의 체험을 담담하게 회상한 후, 유년시절 쟁기축제에서 조용히 잠부나무 그늘에 앉아 자연스럽게 기쁨과 즐거움이 동반하는 초선에 들어갔던 경험을 회상하는 이야기(MN I, 246)를 전하고 있다. 붓다는 이 명상의 기억을 바탕으로 색계 사선이란 형태로 정형화된 명상의 단계들을 차례로 거치면서 해탈적 통찰에 이를 수 있는 굳건한 토대에 도달하게 되었다고 틸만 페터는 보고 있다(Vetter, 2009: 65-70).   

슈미트하우젠(Schmithausen, 1981: 203-204)을 비롯한 많은 서구의 학자들은 초기불교의 가장 일반적이고 특징적인 수행의 방법으로 색계 사선을 지적하고 있다. 색계 사선은 기쁨(pīti)과 즐거움(sukha) 그리고 평정(upekṣaka)과 같은 느낌이 함께하는 명상으로서, 고행을 통해 이전의 행위를 소멸시킨다고 하는 초기 자이나의 괴로움을 동반하는 수행과 대비된다(Bronkhorst, 1993:24-25).   

초기불교의 수행자들은 단식을 하거나 마음을 억제하거나 호흡을 중단하려는 대신, 모든 감각적인 경험들 앞에서 평정을 유지하려 했다(Bronkhorst,1993: 30). 초선에서 사선에 도달하는 과정을 틸만 페터(Vetter, 2009: 68)와 라못(Lamotte, 1988: 43)의 설명을 참고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수행자는 감각적 대상에 무관심하게 되고 다섯 장애를 떨쳐버리면서 심사(vitarka)와 숙고(vicāra)를 동반한 기쁨(pīti)과 즐거움(sukha)의 상태인초선에 도달하고 그곳에 머문다. 
심사와 숙고가 사라지면서 내적고요와 마음의 집중이 일어나고 기쁨(pīti)과 즐거움(sukha)의 상태인 이선에 도달하고 그곳에 머문다. 
기쁨(pīti)이 사라지면서 평정하며(upekkhaka) 주의집중하고(sata) 두루 지각하고(sampajāna) 신체를 통해 즐거움을 경험하는 삼선에 도달하고 그곳에 머문다.   
이미 기쁨과 고통이 없는 상태에서 즐거움과 괴로움이 사라지면서 완전한 평정과 주의집중의 상태인 사선에 도달하게 된다.  

초기경전은 붓다가 깨달음을 얻을 때 저녁 무렵에 전생에 대한 인식(宿命通)을 얻고, 한밤중에 행위(業, karman)에 의해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인식(天眼通)을 얻고, 새벽에 모든 번뇌가 제거되었다는 인식(漏盡通)을 얻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Schumann, 1989: 54-55). 물론 이러한 인식이 전혀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부분들은 교주로서 붓다의 깨달음의 체험을 극대화하고 일반인들과는 다른 붓다의 초인적인 능력을 보여주려는 차원에서 이해해야 할 듯하다.     

 

그렇다면 색계 사선은 사성제의 가르침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틸만 페터는 사성제의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사성제를 삼전십이행상(三傳十二行相)으로 알려진 세가지 단계(parivarta)의 열두가지 측면(ākāra)을 통해 인식하고 실천할 때, 우리가 모든 염오된 것(漏)으로부터 벗어나 윤회와 괴로움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Vetter, 2009: 85-90). 브롱코스트는 三傳十二行相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Bronkhorst, 2009: 32):  

 

첫 번째 단계:

이것은 괴로움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원인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다.

 

두 번째 단계:

괴로움은 반드시 두루 알려져야 한다.

그 원인은 반드시 파괴되어야 한다.

그 파괴가 반드시 달성되어야 한다.

그 파괴를 이끄는 길이 반드시 실천되어야 한다.

 

세 번째 단계:

괴로움이 완전히 알려졌다.

그 원인이 파괴되었다.

그 파괴가 달성되었다.

그 파괴를 이끄는 길이 실천되었다.

 

이때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인 팔정도가 바른명상(sammā-samādhi)이란 이름으로 색계 사선을 이미 포함하고 있다. 해탈은 사성제와 색계 사선을 정점으로 팔정도를 실천함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 된다(Vetter, 2009: 69). 따라서 사성제를 단순히 인식하는 것만으로 구원으로 가는 길은 열리지 않는다. 사성제를 통해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첫 번째 진리를 잘 알고, 두 번째 진리인 욕망을 파괴하며, 세 번째 진리를 실현하고, 네 번째 진리를 실천해야만 한다(Bronkhorst,2009: 33). 마치 한쪽 발을 계단에 올리고 다른 발을 힘껏 내딛으면서 계단을 올라가듯이, 우리의 마음이 완전히 평정하고 주의집중하게 되어 올바른 지혜가 생겨날 수 있는 토대가 색계 사선을 통해서 만들어 진다면 사성제를 위와 같이 알고 실천하는 것을 통해서 모든 염오된 것(漏)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초기불교에서 이렇게 모든 염오된 것(漏)에서 벗어나는 것 또는 모든 번뇌가 소멸되는 상태를 유여열반(sopadhiśeṣanirvāṇa)이라 지칭한다. 남방 테라와다(Theravāda) 전통을 따르면 이 열반은 비록 탐냄(rāga), 혐오(dosa), 우둔함(moha)으로 대표되는 모든 번뇌들은 소멸 되었지만(nibbāna) ‘나’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구성요소(蘊)들이 아직까지 남아있는 상태(sa-upādhisesa)로서 번뇌의 소멸(kilesa-parinibbāna)로 해석된다(Hwang, 2006: 14).  

 

한편 이와 같이 유여열반을 성취한 사람은 존경받을만하다는 의미에서 아라한(arahant)이라 불리며 죽음과 함께 무여열반(anupadhiśeṣanirvāṇa)에 들게 된다. 남방 테라와다(Theravāda) 전통을 따르면 이 열반은 탐냄(rāga) 혐오(dosa) 우둔함(moha)과 같은 번뇌들이 이미 소멸된 상태에서(nibbāna) 남아있던 구성요소(蘊)마저 완전히 소멸되는 상태(an-upādhisesa)로서 구성요소(蘊)의 소멸(khandha-parinibāna)로 해석된다(Hwang, 2006: 14).  

 

유여열반이 구원학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 어떻게 구원에 이를 것인가를 보여 준다면, 무여열반은 불교적 구원의 완성된 결과로서 열반이란 어떤 상태인가를 보여주어야 한다. 하지만, 랑스카진(Cousins, 1983: 97)이 지적하고 있듯이 번뇌의 소멸을 얻은 아라한(arahant)이 죽음과 함께 마지막 열반에 도달했을 때 어떤 상태에 있게 되는가 하는 ‘따타가따(Tathāgata)의 사후상태’에 관한 해답은 초기경전의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즉 이 질문이 대답되지 않는 질문들(無記, avyākṛta) 중의 하나로 포함되면서, 열반의 상태는 초기경전에 산재해있는 고립적인 언급들과 몇몇 비유들을 통해서 자의적으로 해석되거나 추정되고 있을 뿐이다. 열반의 상태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학파를 달리하는 부파불교 논사들 사이에서 비로소 시작되게 된다.

 

Ⅲ. 열반의 상태

 

열반을 구원과 동일시했던 유럽의 초창기 불교학자들 사이에서 열반(nirvāṇa)이란 용어 자체가 가지고 있는 부정의 이미지는 사실상 충격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Welbon, 1968). ‘꺼지는 것’ 즉 ‘소멸’이란 열반(nirvāṇa)의 글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보면 불교적 구원의 완성된 모습은 부정적이고 허무적이며 단멸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붓다에 의해 의문부호로 남겨졌던 열반의 상태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에 불과한 것이었다. 사실상 경량부(Sautrāntika)를 제외한 부파불교의 대부분의 학파들은 열반(nirvāṇa)을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해석하면서 불교적 구원의 완성된 모습을 긍정적이고 낙관적이며 영원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도불교에서 열반(nirvāṇa)은 과연 어떤 상태로서 받아들여졌을까? 율장대품에서는 막 깨달음을 얻은 붓다가 아지비까(ājīvika)에 속하는 우빠까(Upaka)에게 남긴 흥미로운 게송이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실로 나는 이 세계에서 존경받을만하며, 가장 뛰어난 스승이다.

나 홀로 두루 완전히 깨달았으며, 평정해졌고 행복해졌다.

나는 이 가르침의 바퀴를 굴리러 까시의 마을(베나레스)로 간다.

무지한 세상에 불사(amata)의 북을 울리리라.

Vin I, 8: ahaṃ hi arahā loke, ahaṃ satthā anuttaro. ekomhi sammāsambuddho, 

sītibhūto’sminibbuto. dhammacakkaṃ pavattetuṃ gacchāmi Kāsinaṃ puraṃ. andhabhūtasmi 

lokasmiṃ āhañhi amatadudrabhiṃ

 

여기에서 불사 즉 죽지 않음은 한역에서 감로 등으로 번역되면서 여러 가지 주석적 논란을 낳고 있지만, 초기불교 구원의 목표가 끊임없는 윤회의 세계에서 벗어나 더 이상 죽음이 없는 상태에 도달하려고 한다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물론 윤회를 받아들인다는 것을 전제로 했을 때 불사를 획득한다는 것은 이 세계에서 영원히 죽지 않음을 통해서 얻어질 수도 있고, 이 세계에서 완전히 사라짐을 통해서 얻어질 수도 있다. 물론 후자의 경우 이 세계에서 완전히 사라진다는 것이 초월적이고 영원히 죽지 않는 세계에 도달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고, 글자 그대로 완전히 소멸된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경량부(Sautrāntikas)는 인도 부파불교에서 거의 유일하게 열반의 상태를 부정적이고 단멸적으로 보는 학파이다. 경량부는 열반을 마치 종소리가 울리기 전에도 없고 울린 후에도 없듯이, ‘있었다가 없어지는 것’(paścādabhāva, 후비존재)으로 정의하고(Lamotte, 1988: 611), 그 존재가 직접지각(pratyakṣa)을 통해 알려지지도 않고 추론(anumāna)을 통해 증명되지도 않는다고 보았다. 북방불교 학파들에서 열반은 지혜를 통한 소멸(擇滅,pratisaṃkhyānirdha)이란 용어로서 나타나는데, 경량부는 이 용어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이미 생성된 잠재상태의 번뇌(anuśaya)와 생(janman)이 소멸(nirodha)되고, 지혜의 힘에 의해 

더 이상의 생성이 없는 것(anutpāda)을 택멸이라 한다.

 

비록 여기에서 경량부가 소멸(nirodha)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열반에 있어서는 ‘더 이상의 생성이 없는 것’(anutpāda)이란 개념을 더욱 중시한다. 열반으로서 경량부의 지혜를 통한 소멸은 스스로의 무상성(anityatā)에 의해서 소멸(nirodha)된 후 더 이상 새롭게 생성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와 같이 모든 번뇌와 생이 소멸되고 더 이상의 새로운 번뇌와 생이 생기기 않는 사람은 죽은 후에 다시 이 세계로 돌아올 원인이 없어져서 더 이상 세계로 다시 돌아오지 않게 되며 불사를 얻게 된다.

 

한편 설일체유부(Sarvāstivādins)는 있는 모든 것들이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서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지혜를 통한 소멸(擇滅, pratisaṃkhyānirdha)이란 이름으로 나타나는 이들의 열반 또한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서 존재하는 실체이다. 설일체유부에 있어서 우리들을 윤회의 세계에 계박시키는 번뇌도 또한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서 존재하는 실체이다.

 

어떤 사람이 번뇌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은, 그 사람이 어떤 주체가 되어 객체로서의 번뇌를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번뇌가 특정한 사람에게 연결되어 작용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번뇌를 지혜를 통한 소멸을 통해 소멸시킨다는 것은 그 사람이 주체가 되어 객체로서 번뇌를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번뇌가 특정한 사람에게 연결된 상태를 끊고 더 이상 그 사람에게 작용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설일체유부는 열반이란 이름으로 지혜를 통한 소멸을 통해 번뇌를 제거하는 이 두가지 단계를 ‘도둑을 내쫓고 문을 닫는 것’과 ‘벌레를 병으로 잡은 후 마개를 닫는 것’으로 비유적으로 설명한다(La Vallée Poussin, 1923: 949-950). 따라서 이와 같은 방법으로 모든 번뇌가 자신과 연결되어 작용할 수 없도록 만든 사람은 있는 죽은 후에 다시 이 세계로 돌아올 원인이 없어져서 더 이상 이 세계로 다시 돌아오지 않게 되며 불사를 얻게 된다.

 

마지막으로 테라와다교단(Theravādins)은 열반을 통해서 우리들이 이 세계에서 완전히 사라져서 초월적이고 영원히 죽지 않는 세계에 도달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은 열반(nibbāna)과 무위

(asaṅkata)와 아라한(arahant)을 동일하게 탐냄(rāga) 혐오(dosa) 우둔함(moha)의 소멸로 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열반의 존재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파괴(khaya)란 용어를 ‘더 이상 생성되지

않는 것으로서의 소멸’(anuppattinirodha)로 정의한다(Vism, 432).

 

테라와다의 주석전통은 열반을 다섯 구성요소(五蘊)와는 별개로 존재하는(pāṭiekka) 어떤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탐냄, 혐오, 우둔함이란 삼화(三火)의 소멸은 별개로 존재하는 열반으로 가는 길에 생기는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며, 열반 자체는 안식처 또는 서쪽의 산과 같이(attha) 따로 존재한다는 점을 받아들인다(황순일, 2004). 따라서 이와 같이 열반에 도달한 사람은 더 이상 이 세계로 다시 돌아오지 않게 되며 불사를 얻게 된다.

 

즉 열반(nirvāṇa)이란 용어가 가지고 있는 부정적이고 단멸적인 이미지들이 부파불교에 오면서 자연스럽게 윤회하는 세계로부터 불사를 성취한다는 생각과 맞물리면서 긍정적이고 영원한 것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Ⅳ. 맺음말

 

열반이란 어떤 경지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과 함께 실천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에게 열반 개념이 가지고 있는 애매모호함을 따지는 것 자체가 별로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를 언어적으로 표현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신비로운 영역에 남겨두는 것이 차라리 실용적이며 어떤 종교적인 중요성을 지닐 거라며 넘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사유가 지배하는 오늘날의 다종교 사회에서는 별로 호소력이 없다. 현대 과학이 제공하고 있는 명확하고 투명한 설명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은 점차 종교적인 영역에서까지도 좀 더 과학적이고 체계적이며 객관적인 설명을 요구하고 있다. 불교의 열반 또한 여기에서 예외로 남아 있을 수는 없다.

 

초기 인도불교의 열반은 유여열반과 무여열반이란 두가지 열반이론을 통해서 설명된다. 구원학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 유여열반은 우리가 어떻게 열반에 이를 수 있을까에 대해서 답하고 있으며, 무여열반은 열반의 상태가 어떠한가에 대해서 답하고 있다. 전자의 경우 초기불교시대의 다양한 문화적 종교적 환경에서 불교적인 구원의 길이 어떻게 성립되어 가는가를 보여주고 있으며, 후자의 경우 부파불교시대에 고도로 발전된 철학적 주석학적 논의를 통해서 열반이 실체화되어 가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종교 간의 대화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양자를 아우르는 공통분모가 있어야 한다. 구원이란 공통분모를 통해 종교 간의 대화를 촉진하는데 이 논문이 작은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