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 화현설(化現說)의 기원과 전개
- 빠알리(Pāli) 초기불교경전을 중심으로 -
조준호 /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수석연구원
목 차
1. 들어가는 말
2. 붓다의 종류와 일국토 일불설
3. 보살 개념의 등장
4. 과거불과 미래불 그리고 다방불
5. 붓다의 반열반과 수명
6. 화현설로의 발전과 철학적 불신론
7. 마치는 말
국문초록
역사적인 인물로서 석가모니 붓다는 위대한 스승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에게 차츰 초인적(超人的)인 성격이 부여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같은 초기불교경전이라도 후기층으로 갈수록 그러한 성격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석가모니 붓다의 초인화는 지적․도덕적 그리고 신체적 모든 부분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것이 결국 그를 인간을 뛰어 넘은 존재나 혹은 신성(神性)을 가진 어떤 존재로 비춰지게 되었다.
여기서 살펴보려는 것은 불교역사에서 다양한 관점으로 붓다가 설명되는 가운데 있어 인간적인 위치에서 초인적인 존재로 전개되어가는 점을 고찰하고 있다. 초기불교경전 가운데 이러한 경향의 진행은 궁극적으로 화현설(化現說)로 마무리되었다. 결국 후기 불교 종파에 있어 이러한 화현설의 최종적인 전개는 형이상학적인 붓다 개념으로, 붓다를 이 세계의 궁극적인 실재로까지 보았다.
본 논문은 이와 같은 경향이 이미 빠알리(Pāli) 초기경전에서부터 준비되어 있었음을 논증하고 있다. 즉, 붓다로 예정된 단 하나의 보살만이 도솔천에서 세계의 모든 존재의 구제를 위해 머무르다 강림한다는 것으로 마치 오랫동안 준비되고 계획된 전 우주 역사의 특수한 임무나 사명을 띤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 것이 그것이다. 그래서 단 한 보살만으로 예정된 성불은 같은 세계, 같은 시간에 다른 붓다들이 같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한정된 붓다 개념을 ‘일국토 일불설(一國土 一佛說)’이라한다.
본 논문의 주요 목적은 이러한 독점적인 붓다 개념이 어떻게 초기불교 문헌 발달과 함께 형성되어 갔는가에 대한 이해와 비판에 있다. 그러므로 본 논문은 붓다가 어떻게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었는가를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1. 들어가는 말
석가모니 붓다는 인도 아대륙의 동북부에서 서력기원전 6세기 혹은 5세기경에 활동하였다. 역사적인 인물로서 석가모니 붓다의 구제론은 종교 철학적인, 그리고 도덕적인 가르침을 통해 인간고(人間苦)의 해결을 제시한 것이다. 열반이라는 말이 그것을 나타낸다. 불교는 '붓다의 가르침'이다. 붓다의 가르침은 궁극적으로 보리(菩提)·열반(涅槃)·해탈(解脫)을 성취하는 것으로 설명되었다. 초기경전 이래 붓다의 일반적인 모습은 열반으로 인도하는 도사(導師 : maggakkhāyī)로 나타난다. 그래서 이후 불교교리사 전반에 흐르는 붓다의 기본적 의미는 자각각타(自覺覺他)의 존재, 즉 스스로 모든 법의 진리를 깨닫고, 동시에 중생을 교도(敎導)하여 깨닫게 하는 존재로 나타난다. 이러한 붓다 개념은 초기불교에서 중심적인 위치에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붓다를 초인적적 존재, 초월적 존재로 결부시켜나가는 면이 있다. 이러한 경향을 화현설(化現說)이란 말로 표현할 수 있다. 화현설이란 궁극적인 존재로서 불․보살이 중생을 교화하고 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본고는 이처럼 붓다를 이 세계의 궁극적인 실재와 같은 존재로 보았던 화현설이 이미 초기불교경전에 내재되어 전개되어가고 있음을 논증해 보려는 것이 목적이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먼저 붓다의 탄생과 관련하여 보살 개념의 등장이 갖는 중요한 의미와 붓다의 반열반(般涅槃)과 관련한 붓다의 수명이 갖는 의미 또한 밝혀보려 한다. 더 나아가 붓다의 종류에 있어 독각불(獨覺佛) 개념이나 불계(佛界)와 일국토 일불설(一國土 一佛說) 그리고 계속해서 과거불과 미래불 개념이 화현설과 관련하여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전개되었는지를 또한 살펴본다. 결국 이러한 붓다개념이 최종적으로 법신(法身)․보신(報身)․화신(化身)의 삼신설(三身說)과 같은 철학적 불신론(佛身論)과 연결되어 있음을 살펴본다.
(본고에서 사용하는 화현설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 후대 바라문 혹은 힌두전통에서 가현설(假現說 : vivarta-vāda)이라는 말이 있다. 가현설은 실재와 현상세계의 존재론적 관계를 설명하는 전문용어로서 예를 들면, 베단타학파의 샹카라에 따르면 궁극적 실재는 단일한 Brahman(梵)으로 이러한 단일한 실재에 의해 현상세계가 마치 환술(幻術 : māya)처럼 나타난다고 하는 주장으로 가현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본격적인 논의 전개에 앞서 먼저 언급해 두어야 할 점은 주제와 관련해 인용되고 있는 경전에 대한 성립사의 문제이다. 초기불교경전의 성립층위에 관해서는 학자들마다 각기 다른 입장이 주장된다. 논자도 초기불교연구에 있어 오랫동안 이 부분에 천착하였기에 층위와 관련한 성립사에 대한 입장을 장황하게 피력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는 논지를 산만하게 할 수 있어 가능한 간략하게 언급하는 정도로 그친다. 사실 본고가 보여주려는 것은 붓다 화현설이 나타나는 경전이야말로 늦은 층이라는 전제가 이미 바탕되어 있다. 그렇기에 그 논의에 있어 기원과 전개라는 제목이 사용된 것이다. 다시 말해, 같은 초기불교경전이라도 그 성립시기에 있어 후기층으로 갈수록 붓다화현에 관한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볼 수 있으며 그러한 경전은 마찬가지로 내용적인 측면에서 후기층으로 간주해도 별 무리가 없다는 것이다.
2. 붓다의 종류와 일국토 일불설(一國土 一佛說)
빠알리 경전에서 붓다의 종류는 크게 정등각자(正等覺者 : Sammāsambuddha)와 독각불(獨覺佛 : Paccekabuddhā)과 같은 두 가지 종류로 나타난다. 하지만 빠알리의 초기불교 경전에 독각불은 정등각자에 비해 그렇게 많은 횟수로 나타나지는 않으며 주로 같은 니까야에서 그 성립시기가 상대적으로 늦은 Aṅguttara Nikāya나 이후 후기 문헌에 주로 나타난다. 또한 정등각자(正等覺者 : Sammāsambuddha)의 정등각(正等覺 : Sammāsambodhi)이 나타나는 것에 반해 독각불의 보리(菩提 : Paccekabodhi)는 따로 제시되어 있지 않다. 즉, 초기의 빠알리 경전에서는 단 한 가지 종류의 보리만이 제시되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후 부파시대의 주석서에 이르러서는 보리(菩提 : bodhi) 또한 세 가지로 분류되는데 아라한의 보리를 의미하는 Sāvakabodhi(聲聞의 菩提), Paccekabodhi(獨覺의 菩提), 그리고 Sammāsambodhi(正等覺의 菩提)가 그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후기의 빠알리 주석서인 Udāna의 주석서에 의하면 3가지 종류의 붓다가 설명된다. 즉, Sāvaka-Buddhā(聲聞佛), Pacceka-Buddhā(獨覺佛), 그리고 Sammāsam-Buddha(正等覺者)가 나타난다. 또한 대승으로 이전해가는 Dīvyāvadāna(226, 271)에서도 마찬가지로 세 가지 보리(菩提)를 말한다. 첫째는 ‘성문(聲聞)의 보리(śrāvakabodhi)’, 둘째는 ‘독각(獨覺)의 보리(prateyekabodhi)’, 그리고 셋째는 ‘무상(無上)의 정등각(正等覺 :samyaksambodhi)’이다. 그리고 모두는 마지막의 정등각을 추구하는 방향에 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다른 Saṁyutta Nikaya나 Aṅguttara Nikaya의 주석서에서는 4가지 종류의 붓다도 언급한다. Sabbaññu-Buddha(一切知佛), Pacceka-Buddha(獨覺佛), Catusacce-Buddha(四諦佛) 그리고 Bahussuta-Buddhas(多聞佛)이 그것이다. 모든 아라한은 4성제를 깨달은 Catusacce-Buddha로 불려졌다. 그리고 배움을 갖춘 모든 사람을 Bahussuta-Buddhas라 하였다. 더 나아가 Pacceka-Buddha는 2아승지에 100천겁 동안 10바라밀을 닦는 존재로, 그리고 일체지의 Sabbaññu-Buddha는 과거 6불이나 석가모니불과 같은 Sammāsam-Buddha(正等覺者)로 설명한다.
여기까지 인도불교사 전체에서 붓다 개념의 출발에 이어 붓다의 종류가 후대 부파시대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확장 전개되어갔는지를 간략하게 살펴본 것이다. 이러한 세부적인 확장의 목적은 다름아닌 단 하나의 정등각자 개념을 격상(格上)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초기불교경전에 정등각자는 다수의 독각불들 가운데 단 하나의 붓다이며, 그만이 일체 모든 것을 아는 전지능력(全知能力)을 가졌으며, 그리고 그만이 깨달은 법(法)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고 강조하고 있다. 즉 정등각자는 법을 스스로 깨달았으며 다른 사람을 깨닫게 하는데 반해 독각불의 경우는 정등각자와 같이 스스로 법을 깨달았지만, 다만 다른 사람들을 깨닫게 하기 위한 법을 설할 수 없다는 구분이 지어진다. 그리고 정등각자가 이 세계에 출현하면 모든 독각불은 자연히 사라지거나 또는 공중에서 그들 스스로 모두 분신(焚身)하여 반열반(般涅槃)에 드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 이유는 세상에는 두 붓다의 이름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라 한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붓다개념은 다음의 일국토 일불설(一國土 一佛說)의 기초 개념이 된다.
불계(佛界)는 일불(一佛)의 공간을 나타내는 말로 khetta는 토지나 국토를 의미한다. 이에 대한 빠알리어 Buddhakhetta라는 말은 오래된 층(層)의 초기불교 경전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대신 같은 초기불교경전에서도 신층(新層)에 해당하는 Apadāna의「붓다 아빠다나」품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불계는 한 붓다가 미칠 수 있는 앎의 범위와 영역과 관련있는 개념으로 볼 수 있는데 Majjhima Nikāya의 Saṅkhāruppati Sutta에 의하면 세계의 기본단위는 일천세계(一千世界), 사천세계(四千世界)…… 일만세계(一萬世界)에 이르기까지 많은 세계들과 무리지어 함께 언급되어 있다. 이 가운데 일만세계가 초기불교 경전 가운데 가장 많이 언급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붓다의 생애와 관련해서도 일만 세계가 많이 나타난다.
Acchariyabbhutadhamma Sutta에 의하면, 보살이 도솔천으로부터 마야부인의 태에 들 때와, 그리고 그의 어머니로부터 태어날 때 일만 세계에 지진이 일어나 진동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신들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광대하고 장려하며 찬란한 광휘로 뒤덮였다고 한다. 또한 Mahāpadāna Suttanta에서도 마찬가지로 과거불인 비파시불(毘婆尸佛 : Vippasi)의 경우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것을 통해 볼 때 초기불교 경전 안에서 불계는 처음에 일만 세계로 전제되어 왔음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 붓다는 일만 세계와 관계하는 범위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같은 초기경전이라도 그 성립시기가 상대적으로 늦은 것으로 간주되는 Aṅguttara Nikāya 에서는 한 붓다가 관계하는 세계에 대해 매우 시사적인 개념을 제공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저 멀리의 달과 태양은 일정한 방향에 따라 움직인다. 그러면서 밝은 빛을 모든 방향에 비추어 일천세계에 이르도록 비춘다. 그 안에 천 개의 달과 천 개의 태양, 그리고 가장 높은 산인 천 개의 수메루산이 있다. 천 개의 염부제(閻浮提), 서쪽에 천 개의 고야라, 북쪽에 천 개의 꾸루, 동쪽에 천 개의 위데하, 4천의 바라, 4천의 강력한 대왕(大王), 일천의 사천왕(四天王), 일천의 삼십삼천(三十三天), 일천의 염라(閻羅)왕의 하늘, 일천의 도솔천, 일천의 화락천(化樂天), 일천의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 그리고 천 개의 범천(梵天)의 세계도 있다. 아난다여, 이것을 일러 일천소천세계(一千小千世界)라 하고 이러한 것이 천 개가 있는 것을 이천중천세계(二千中千世界), 그리고 이러한 중천세계가 천 개가 있는 것을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라고 한다. 아난다여, 여래는 그가 원하기만 하면 그의 목소리를 마지막인 삼천대천세계나 또는 그 이상까지 미칠 수 있게 한다. 만약 그가 하려고 생각한다면… 이러한 관련 속에서, 아난다여, 여래는 찬란한 빛과 함께 삼천대천세계를 온통 뒤덮을 수 있다. 이것은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알게 되며, 여래는 법을 가르치고 그리고 소리를 듣도록 한다. 이것은 여래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A. I, 227.
위 인용경문에 의하면 공간을 나누는데 있어 첫 번째는 일천소천세계, 두 번째는 이천중천세계 그리고 세 번째는 삼천대천세계로 세 단계의 세계로 구분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삼천대천세계의 범위가 한 붓다가 미칠 수 있는 범위라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즉 일만 세계 단위에서 최종적으로 십억의 세계 단위인 삼천대천세계로 크게 확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상상하기조차 힘든 어마어마한 범위로 확대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후 삼천대천세계를 한 불계로 간주하는 것은 Mahāvastu를 비롯하여 대승 불교에 이르기까지 불계의 기본 단위로 정착되었다. 하지만 초기의 빠알리 경전이나 한역 아함(阿含)에서는 또 다른 삼천대천세계가 있다는 것이 전제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에 반해 대중부와 대승 불교는 동시에 많은 삼천대천세계가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서로 다른 각각의 삼천대천세계에 여러 붓다들이 또한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대중부와 대승 불교는 말하고 있다. 이에 반해 빠알리 경전의 초기불교는 하나의 삼천대천세계에 한 붓다만을 이야기하고 동시에 다른 삼천세계에 존재할 수 있는 붓다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말하고 있지 않다.
최종적으로 한 붓다의 불계는 삼천대천세계의 범위로 무상정등각자는 독각불(獨覺佛), 아라한, 보살, 그리고 다른 어떤 존재들과도 비교할 수 없는 다른 존재가 되었다. 이러한 불계 개념과 함께 ‘같은 세계, 같은 시간에는 단 한 붓다만이 존재할 수 있다’는 붓다 개념이 강조되었다. 이는 같은 세계, 같은 시간에 여러 붓다들이 동시에 공존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같은 세계, 같은 시간에 두 명의 붓다가 존재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붓다들의 수명이 한정되어 있고 그가 가르침을 베푸는 기간도 한정되어 있다고 하면서 석가모니 붓다 이전의 과거에 각각 다른 시기에 한 붓다만이 나타났었고, 미래에도 마찬가지로 미륵불과 같은 한 붓다의 출현만을 예고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것을 ‘일국토 일불설(一國土 一佛說)’ 또는 ‘시방계일불설(十方界一佛說)’이라 한다. 초기경전의 한 전거를 들면 다음과 같다.
한 세상에 두 명의 아라한이며 정등각자(正等覺者)인 사람이 함께 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상황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는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다만 한 세상에 한 사람의 아라한이며 정등각자의 출현이 가능한 상황만이 일어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한 세상에 두 전륜왕(轉輪王)의 출현이 동시에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한 세상에 단 한 사람의 전륜성왕만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M. Ⅲ, 65 = A. I, 27/ D. Ⅲ, 114.
그러나 초기 경전에서 왜 이 세상에 두 붓다나 그 이상이 출현할 수 없는지에 대한 분명한 설명은 찾아 볼 수 없다. 아마 한 붓다만으로도 이 세상의 모든 중생들의 행복과 이익을 가져다주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Nikāya와 같은 정전(正典)아닌 이보다 이후에 성립된 Milindapañha에 이르러서야 찾아지는데 그 설명은 매우 독특하다. 즉 이 세계에 한 붓다로 충분하고 두 붓다는 이 세계 자체가 감당하지 못할 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그 원하는 양만큼 음식을 먹었을 때 더 이상의 음식을 먹을 수 없는 것과 같다는 설명을 하고 있다. 또한 사람들에 있어 같은 세계, 같은 시간에 두 붓다가 출현해 있으면, 제자들 사이에 누구와 견줄 수 없는 최고의 존재에 대한 비교의 논란 때문에 두 명의 붓다가 같은 세계, 같은 시간에 출현할 수 없다는 설명을 제시하고 있다. 이후 한 세상에 단 한 분의 붓다만이 존재할 수 있다는 주장은 빠알리 전통의 불교뿐 만이 아니라 모든 다른 불교 부파들에서도 공식적인 입장으로 정착되었다. 대승도 마찬가지로 같은 시간에 두 명 이상의 붓다들이 출현할 수 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대신에 대중부와 대승불교는 수많은 삼천대천세계의 존재를 말하면서 각각의 그러한 하나의 삼천대천세계에 한 붓다들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한다고 하는 것이 다르다.
3. 보살 개념의 등장
한 세계에 한 붓다라는 붓다 개념의 구체적인 표현은 다시 보살(菩薩)의 개념 속에도 나타난다. 보살은 보리살타(菩提薩埵)의 축약형으로 산스끄리뜨로 bodhisattva, 그리고 빠알리로 bodhisatta에 대한 음역이다. bodhi는 붓다의 어원과 마찬가지로 budh이며 sattva는 ‘생명이 있는 존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한역은 중생(衆生)이나 유정(有情)이다.
초기불교경전에서 보살이라는 말의 사용은 제한되어 있다. 즉 석가모니가 보드가야의 보리수 아래서 붓다를 이루기 전까지 전생의 도솔천과 현생의 보리수 아래에서 바로 깨달음을 얻기 직전까지의 시기만을 지칭한다. 또한 보살이라는 말은 과거불에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그렇지만 빠알리 경전에서는 이상하게도 아직 도솔천에 있는 미래불인 미륵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경전에서 보살이라는 말은 다음과 같은 문구로 빈번하게 나타난다.
“내(또는 그)가 깨달음을 얻기 전에, 내(또는 그)가 아직 보살로서 있을 때”
D. Ⅱ, 13; M. I. 17, 114, 163; S. Ⅱ. 5-9.
이러한 문구가 의미하는 바는 보살이라는 말은 결코 깨달음을 얻고 난 후의 붓다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분명히 성불(成佛)하기 직전의 삶과 관련되어 적용될 뿐이다. 후기 빠알리 경전에서는 보살이라는 말은 주로 붓다의 수많은 전생담(前生談)과 관련하여 언급된다. 초기경전에서 보살은 주로 석가모니 붓다의 전신(前身)이 도솔천에서 이 세상으로 강림하여 탄생하고 성도하기 이전까지를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특히 도솔천에서부터의 보살의 미증유적인 삶이 잘 담겨져 있는 경전은 Mahāpadāna Suttanta과 Acchariyabhutadhammā Sutta이다. 이러한 경전에 의하면 석가모니 붓다의 끝에서 두 번째의 삶은 도솔천에서부터 시작한다. 그곳에 그가 머물 때 많은 신들은 보살에게 인간세계에 태어날 적합한 시기가 도래했음을 상기시켰다고 한다. 이렇게 예정된 우주적인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보살은 여러 신들의 호위아래 주의가 집중되고 깨어 있는 상태에서 마야부인의 태에 강림한다. 이 때 어떠한 신도 미칠 수 없는 광대하고 찬란한 광명이 일만 세계를 진동시키는 지진이 일어났다고 한다.
보살이 어머니의 태에 들어서는 어머니는 오계를 지키는 것과 같은 도덕적인 삶과 감각적인 즐거움을 위한 이성(異性)의 생각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열 달 후 서서 출산을 하였고 이 때 네 명의 신(神)들이 신생아의 탄생을 보호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두 물줄기가 내려왔는데 하나는 시원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따뜻한 것으로 이제 갓 태어난 보살을 목욕 시켰다고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보살은 태어나자마자 바로 서서 북쪽으로 일곱 걸음을 걸으며 모든 방향을 관찰하면서 다음과 같이 우렁차게 외쳤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우두머리이고,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존재이고, 나는 이 세상의 가장 연장자이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탄생이다. 더 이상의 다른 삶은 반복되지 않는다.
이제 곧바로 태어난 아기가 일어나 걸으며 또한 큰 소리로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이에 대응되는 한역 경전은 미증유(未曾有)라는 말을 사용하여 불가사의하고 놀라운 일임을 말하고 있다. 더 놀라운 사는 것이다. 그래서 보살은 이렇게 최고로 높은 세계의 꼭대기에 있는 자신을 보고 기뻐서 크게 웃었다고 한다. 여기서 갓 태어난 보살은 이미 모든 세계를 다 관찰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춘 존재임을 또한 분명히 보여준다. 빠알리 경전의 탄생게에 숨어있는 의미는 미래의 붓다야 말로 삼계(三界)를 초월한 이 세계의 최고 정점(頂點)에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유신(有神) 종교에 견준다면 세계의 가장 높은 꼭대기에 위치해 있는 존재는 다름 아닌 창조주라고 할 수 있으며, 그렇기에 시간적으로 만들어낸 어떠한 존재보다도 먼저인 연장자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존재는 일반적으로 일체 세계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일체지자(一切知者) 또는 전지자(全知者)라고 한다. 이처럼 초기불교의 후기층으로 간주되는 경전에서부터 보살의 탄생은 그가 갖춘 능력과 함께 마치 창조주와 같은 존재로 간주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붓다 개념의 전개에 있어 가장 획기적인 전환점을 갖는 것은 바로 보살개념의 출현이다. 이같은 보살의 임신과 강림(降臨), 그리고 탄생과 관련된 이야기는 Majjhima-Nikāya와 함께 Digha-Nikāya의 Mahāpadāna Suttanta 에서도 비파시불(毘婆尸佛)의 사건으로도 나타난다. 그리고 모든 붓다들의 탄생과 관련해 똑같은 사건으로 주어진다. 그러므로 Mahāpadāna Suttanta는 이와 같은 붓다들의 전형적인 모습에서의 탄생을 법성(法性: 존재의 성질 또는 법)으로 표현하였다. 이에 반해 Majjhima-Nikāya에서는 ‘놀랍고 경이로운 법’이라고 표현하였다. 한역(漢譯)의 미증유법(未曾有法)이 그것이다.
보살 탄생과 관련해 법성이라는 말의 사용은 우주적 삶속에 있는 보살의 출현과 이와 관련한 모든 사건들이 일종의 우주적인 이법으로 간주했던 것으로 풀 수 있다. 그렇기에 보살은 스스로 도솔천의 한 신으로 머물다가 천상에서부터 지진(地震)과 찬란한 빛과 함께 어머니의 태에 강림하였다. 이것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보살이 온 세계의 모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우주적인 사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나타낸다. 이러한 사명을 훌륭하게 완수해 내기 위하여 모든 종류의 신들도 보살을 호위하고 시중드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때문에 보살은 사람으로 있을 때는 사람의 말을 하고 신들과 같이 할 때는 신들과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존재로 간주되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화현하는 보살과 관련된 모든 일은 수동적이거나 피동적이지 않고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의지의 표현으로 나타난다. 보살의 강림과 태중에 드는 것, 탄생 그리고 반열반(般涅槃)에 이르기까지 모두 분명히 깨어 있는 자의적인 상태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즉 보살이 어머니의 태에 강림하는 것도 결코 부부 사이의 육체적인 접촉에 따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강림과 함께 임신될 때 이미 보살의 모든 감각기관은 갖추어져 있었다는 것으로 이를 분명히 한다. 보통 사람의 태아들처럼 산모의 태속에서 발육․성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청정한 행을 완전히 갖춘 어머니는 태 안의 감각기관을 모두 갖춘 보살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은 마치 보석을 통과하고 있는 청색이나 황색등의 실을 선명하게 볼 수 있는 것과 같다고 한다. 보살이 태어날 때는 보통 사람과 달리 보살의 어머니는 서있는 채로 출산하였다고 한다. 나아가 보살의 몸은 피나 점액질, 그리고 양수 등에 의해 전혀 더럽혀지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 어떠한 부정한 것도 보살의 몸을 더럽히지 못하고 깨끗한 상태로서 탄생하였다는 것이다.
보살의 어머니는 임신 중에도 5계(五戒)를 수지(受持)하였다고 한다. 5계는 훗날 붓다가 된 그녀의 아들이 제정하기 전에 이미 어머니에 의해 닦아졌던 것이다. 보살이 탄생한 후 7일이 지나자 보살의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재미있게도 이같이 보살의 탄생을 전하는 빠알리 경전 가운데 마야왕비의 출산 후 7일에 죽었다는 이야기는 함의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아마 이러한 이야기는 후대의 경전 편집자들에 의해 한때 보살이 머물렀던 마야 부인의 태가 다시 인간적인 정에 더럽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나타내려 한 것 같다. 다시 말해, 마야왕비가 보살의 출산 7일 만에 일찍 돌아가셨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후일 마야왕비의 동생이며 보살의 양모로 언급되는 Mahāpajāpati의 존재로 보아 출산 후 오래 생존하지는 않은 듯하다. 아무튼 미래의 붓다가 잠시 머물도록 태를 제공했던 보살의 어머니는 돌아가신 후 그 공덕으로 도솔천에 다시 태어나 복된 삶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보살은 그의 탄생과 더불어 1만 세계가 큰 지진으로 흔들렸고 찬란한 광채가 널리 퍼졌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신들의 시중과 보호와 하늘로부터는 신비한 두 물줄기가 흘러 보살을 씻겨 주었다는 등의 이야기는 세상의 우두머리이고 세상의 가장 뛰어난 존재이고, 이 세상의 가장 연장자답게 전우주의 화음(和音) 속에 탄생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보살의 탄생이야말로 우주적인 대사건임을 나타낸다. 다시 말해, 보살은 다름아닌 모든 세계의 존재들을 구할 구세주로서 이 세상에 출현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4. 과거불과 미래불 그리고 다방불
Mahāpadāna Suttanta나 이에 대응되는 한역『大本經』등에 의하면 석가모니 붓다 이전의 과거 6불이 설명된다. 마찬가지로 Cakkavatti-Sīhanāda Suttanta나 증일아함 등에서는 미래불(未來佛)인 미륵불(彌勒佛)이 석가모니 붓다 이후 이 세상에 출현할 붓다라 한다.
먼저 과거 7불은 비파시불(毘婆尸佛 :Vippasi), 시기불(尸棄佛 :Sikhī), 비사부불(毘舍浮佛 : Vessabhū), 구류손불(拘留孫佛 ; Kakusandha), 구나함모니불(拘那含牟尼佛 :Koṇāgamana), 가섭불(迦葉佛 :Kassapa), 그리고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Gotama)이고 다시 후대의 Buddhavaṁsa에서는 붓다의 계보를 연등불(燃燈佛 : Dipaṁkara)부터 시작하는 24과거불로 더 나아가 Apadāna에서는 35과거불로가지 확대되며, 다시 대승에 이르러서는 헤아릴 수 없는 시간과 공간에 많은 붓다들의 이름이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미래불에 있어서도 미륵불 말고도 5불․천불․8만불 등으로 전개된다. 미래불은 지상에 출현하기까지 도솔천에 머무르고 있기에 정확히는 미륵보살로 칭해진다. 과거 7불에 있어서도 성불 이전에 모두 도솔천의 보살로 머물렀다고 한다. 이로써 시간적으로 현재불에서 과거불 그리고 미래불이라는 삼세불로 확대된 붓다의 존재는 계속 늘어나 공간적으로도 4방(동서남북)․8방․시방에 현재불이 등장함으로써 총칭하면 ‘현재 다방불(現在 多方佛) 사상’으로 발전하였다. 예를 들어, 동방 묘희(妙喜) 세계의 아촉불(阿閦佛), 서방 극락세계의 아미타불, 남방의 보상불 그리고 북방의 미묘음불 그리고 사자음광불, 약사유리광불, 위음왕불, 일월정명덕불 등이다.
이러한 다불(多佛)사상은 삼천대천세계마다 각기 다른 붓다가 존재한다는 입장으로 초기불교 부파 가운데 앞서 언급한 것처럼 대중부에서 주장하였다. 이에 반해 유부를 비롯한 빠알리 경전을 바탕으로 하는 부파에서는 수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대승의 다불사상이 출현하였다. 이로써 미래에 붓다를 이룰 일인 보살 개념과 일국토 일불설 개념이 과거불과 미래불 그리고 다방불 개념과 어떠한 관련을 갖고 있는지가 잘 드러난다 하겠다.
5. 붓다의 반열반(般涅槃)과 수명(壽命)
붓다의 반열반(般涅槃) 후에 그의 초인적인 성격이 더욱 더 확장되고 강조되어갔을 것이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인격의 역사성에 대한 기억이 갈수록 희미해져 갈 수 박에 없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그의 무상(無常)의 가르침대로 그의 반열반도 예외 없는 인간적인 한계를 보여 주었다고 하더라도, 붓다를 숭앙(崇仰)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어디까지나 붓다는 초인적인 면모를 갖춘 존재로 신앙되었다.
초기불교 경전에서 반열반에 든 후의 붓다는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차라리 살아 있는 것 이상의 그 어떤 존재의 상태라고 하여도, 그것은 결코 대답할 수 없는 무기(無記 : avyākata)의 범주에 속한 질문이었다. 붓다는 반열반 후 인간이나 신들, 그리고 그밖의 어떠한 존재들에 의해서도 보여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반열반 후의 붓다에게 드리는 예경(禮敬)은 단지 정신적인 가치를 지닌 것이라고 한다.
붓다가 반열반에 들 때 그의 신체는 전륜성왕의 장례법에 따라 행해야 한다고 한다. 붓다는 밤에 깨달음을 이루었고, 그리고 다시 밤에 반열반에 들 때 그의 피부색은 지극히 밝게 빛났다고 Mahāparinibbāna Suttanta는 전하고 있다. 붓다는 질병에 있어서도 일반 사람과 달랐던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초기경전에 의하면 붓다는 질병으로부터 고통받기도 하였으며, 춘다가 올린 ‘수까라 맛다바’(sūkara-maddava)라고 하는 이름의 공양을 받고 반열반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극심한 질병에 이질과 그리고 죽음에 이를 정도의 격심한 통증이 붓다에게도 엄습했다고 경전은 전한다.
하지만 붓다는 1겁(劫)을 살 수 있으며 나아가 1겁의 남은 기간을 사시기를 간청한다면 그 만큼 더 사실 수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붓다는 시봉인 아난다와의 대화에서 사신족(四神足)을 갖춘 사람은 원하기만 하면 1겁 동안이나 1겁의 남은 기간을 살 수 있다고 하는데 붓다도 이러한 사신족을 이미 갖추고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아난다는 붓다의 이러한 제의에 대한 의미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붓다께 1겁이나 1겁의 남은 기간을 사시도록 간청하지 못했다고 한다.
붓다가 반열반하시기 바로 전에 지진(地震)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것은 상서로운 조짐으로 붓다의 반열반이 곧 일어날 것으로 설명된다. 마찬가지로 앞서 말한 대로 붓다의 탄생과 함께 붓다의 생애의 모든 중요한 행적(行蹟)마다 큰 지진이 일어났다. 더 나아가, 붓다의 반열반의 방법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다고 한다.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의 모든 선정(禪定)의 단계를 경유하면서 제4선에서 반열반에 들었다고 한다.
붓다의 수명에 있어 1겁이라는 기간은 거의 무한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초기경전에 의하면, 사방 40리 성안에 겨자를 가득 채우고 백년 마다 한 알씩 꺼낼 때 그 겨자씨가 다 없어져도 겁은 다하지 않는다는 개자겁(芥子劫) 비유와 다시 둘레가 사방 40리 되는 바위를 백년 마다 한 번씩 얇은 옷으로 스칠 때 마침내 바위가 다 닳아 없어지더라도 겁은 다하지 않는다는 반석겁(盤石劫)의 비유로써 겁이 얼마나 긴 시간인지를 설명한다. 그리고 이러한 기간은 과거불(過去佛)에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되어 나타난다. Mahāpadāna Suttanta에 의하면 과거불들의 각기 다른 수명의 기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비파시불(毘婆尸佛)은 8만 년, 시기불(尸棄佛)은 7만 년, 비사부불(毘舍孚佛)은 6만 년, 구류손불(拘留孫佛)은 4만 년, 구나함모니불(拘那含牟尼佛)은 3만 년, 가섭불(迦葉佛)은 2만 년, 그리고 고타마 붓다는 단지 백 년으로 나타난다.
미래불(未來佛)인 미륵불(彌勒佛)은 인간 수명이 8만 년이 될 때 출현한다고 Cakkavatti-Sīhanāda Suttanta에서는 말한다. 이것은 Mahāpadāna Suttanta에서 보여주었듯이 미래불의 수명이 다시 처음의 과거불인 비파시불의 기간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다시 인간의 수명이 백 년에서 8만 년에 걸쳐 있을 때까지가 붓다들이 이 세상에 출현한다고 하는 것을 보여준다.
6. 화현설(化現說)로의 발전과 철학적 불신론(佛身論)
초기경전의 일부에서 1겁 이상을 살 수 있다고 하는 붓다의 수명은 결국 이후 화현설(化現說)의 근거로 볼 수 있다. 즉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붓다의 수명에 대한 개념은 차츰 형이상학적인 궁리(窮理)를 거듭하여 영원한 붓다의 개념으로 차츰 발전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대승불교의 『법화경(法華經)』에서 붓다는 지상에서 80평생의 삶으로 마감할 수 없는 존재로 선언하기에 이른다. 붓다는 결코 죽을 수 없는 존재로서 영원히 사는 생명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가 보여준 반열반은 단지 중생들을 이끌기 위한 방편(方便)으로 화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결국 붓다는 죽을 수 없는 영원한 존재로 간주된 것이다.
이러한 붓다 개념은 초기불교 전통의 대중부의 한 지파 소속인 Mahāvastu와 연결되는 맥락을 가지고 있다. 즉 Mahāvastu에 의하면, “이 세계에 정등정각자(正等正覺者)와 비교할 만한 어떠한 존재도 없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그가 이 세상을 초월한 것(lokottara)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에 이어“붓다가 그의 어머니로부터 태어날 때, 그는 의소생신(意所生身:manomayakāya)이기에 어머니는 출산에 의한 상처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부모에 의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자신의 위신력에 의한 가현(假現)의 존재”로 이 세상에 출현했던 붓다의 위상과 성격을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몸은 부모의 육체적 결합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하지만 (마야왕비의 몸을 빌은 것은) 일반 사람들의 출산 방식을 (방편적으로) 따른 것일 뿐이다”라고 부연설명하고 있다.
이는 인도의 부파불교 교의를 전하는『이부종륜론(異部宗輪論)』에서도 “여래의 색신은 실로 끝이 없고, 여래의 위신력도 또한 끝이 없으며, 모든 붓다의 수명 또한 끝이 없다”라는 불타관은 바로 대중부의 입장임을 설일체유부는 설명하고 있다. 이는 대중부 계의 현존하는 Mahāvastu 소전의 내용과도 그대로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빠알리 전통의 문헌에서도 마찬가지로 증거하고 있다. 즉 아소카(Asoka)왕 시대에 제3결집의 결과로서 성립되었다는 7론 가운데 Kathāvatthu와 그 주석서에서도 이러한 주장들은 Mahāvastu를 소지했던 부파와 관련있는 대중부로 밝히고 있다. 즉 Kathāvatthu에서는 불교 부파 가운데 “붓다는 (동서남북 그리고 상하 등) 모든 방향에 편재해 있다”라거나 “세존은 인간 세상에 산 적이 없다” 라거나, 또는 “세존은 자신이 직접 법을 설하지 않았다”라는 등의 주장은 상좌부의 정통설이 아닌 것으로 정리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Mahāvastu의 이러한 붓다의 가현설은 기독교의 영지주의(靈智主義: gnosticism) 교리인 도케티즘(Docetism)과 비교할 수 있다. 즉 도케티즘은 가현설(假現說)로 옮겨지는데 그 이유는 예수는 신이기에, 이 땅에 있을 때 인간으로서의 몸은 단지 환영일 뿐이라는 것이다. 즉, 예수는 사람의 모습으로 왔을 뿐이어서 물질적인 육체와 결합할 수 없는 존재이며, 실제로는 사람이 아니라는 교리이다. 그러한 가현설 입장에서 예수는 육체 없이 태어났으며, 십자가에 처형 당하기전의 그가 겪은 고통이나 십자가 수난은 모두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가현설의 입장에서는 예수의 부활과 승천이 부정된다. 하지만 후대 기독교 주류 전통에서는 이러한 예수 가현설은 예수의 신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발생한 교리로 간주한다.
여기서 Mahāvastu의 의소생신(意所生身:manomayakāya)이란 말 그대로 ‘마음으로 만든 몸’을 의미한다. 이 세상에 출현했던 붓다는 육체를 가진 실제의 존재가 아니라 ‘의소생신’으로 기독교의 가현설과 그 내용이 서로 상통한다. 따라서 서양의 가현설에 상응하는 불교의 용어는 ‘의소생신’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이러한 의소생신이라는 말은 초기불교경전에서도 나타난다. 주로 신족통(神足通) 등을 설명할 때 사용되는 개념이다. 하지만 의소생신은 붓다 개념과 관련하여 새로운 단계로 진입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법화경』의 제16「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에 나타나 있는 구원실성(久遠實成)의 사상은 바로 ‘모든 붓다의 수명 또한 끝이 없다’는 Mahāvastu의 붓다 수명에 대한 입장이 계승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법화경』에서 말하는 영원한 불타관으로서 구원실성 또는 구원성불(久遠成佛)은 붓다는 아득한 옛날에 이미 성불해있다는 것이다. 이는『법화경』의 중심사상의 하나로 역사적 붓다의 성불에 대비하여 영원불멸의 불타론을 보여준다. 즉 마야부인의 태에 들어 태자로 태어나 출가하고 6년 수도 끝에 보드가야의 보리수 아래 성불한 것이나 쿠시나가라에서 입멸하신 것은 모두 대자비심으로 일체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색신(色身)을 가지고 이 세상에 출현했던 석가불의 80 평생은 결국 가상(假象)의 존재였다는 것이다. 그의 진실한 정체는 한량없는 과거세에 이미 성도해 있었으며 또한 무량한 수명을 지니고 있어 이 세상에 항상하며, 다양한 모습으로 응현(應現)하면서 중생을 교화하고 있다는 붓다 개념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붓다 개념을 구원본불(久遠本佛)이라고도 하는데 Mahāvastu의 초월적인 붓다개념이 바탕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초기불교 경전에 붓다의 수명은 1겁 이상을 사실 수 있다는 불타관이 초기불교 전통의 한 부파를 통해 결국 어떻게 구체화되는지를 살펴보았다. 결국『법화경』에서 강조되는 구원실성의 근거는 바로 초기경전에서 거의 무한에 가까운 붓다의 수명에 대한 본질적인 궁리(窮理)로써 차츰 영원한 붓다 개념으로 결론을 내리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최종적으로『법화경』에서는 붓다는 지상에서 80평생의 삶으로 마감할 수 없는 존재로 선언하기에 이른 것이다. 붓다는 ‘의소생신’의 가현으로 결코 죽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닌 영원한 생명이다.
다시 이렇게 전개되어가는 불타론의 분위기에 따라 대승불교는 더욱 심오한 철학적 불신론(佛身論)으로 삼신설(三身說)을 제시한다. 삼신설은 먼저 80세로 반열반 한 붓다의 본질을 논함에 있어서 그것이 색신(色身 : rūpa-kāya)이냐 법신(法身 : dhamma-kāya)이냐 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전개된 불신론이다. 따라서 삼신설(三身說)의 핵심은 어디까지나 법신(法身)사상이다. 법신은 화신(化身)과·응신(應身)의 본질 또는 근거로 삼기 때문이다. 석가모니불은 누구나 볼 수 있는 색신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법신이 변화하여 모습을 나타낸 것으로 본다. 다른 말로 바꾸면, 법신이 화현한 것이다. 그리하여 법(法)․보(報)․응(應) 또는 법(法)․응(應)․화(化)의 3신 또는 자성신(自性身 = 法身)․수용신(受用身)․변화신(變化身)이라고 하는 3신설이 성립하여 대승의 기본 불신론이 되었다. 삼신설은 뒤에 자수용신과 타수용신 나누어 4신설로 발전했으며, 다시 밀교에서는 오지오불신설(五智五佛身說)로도 전개되었다. 결국 인격적 존재 또는 역사적 존재로서의 붓다에서 어디에나 편만한 상주 불변의 비인격적 원리로서의 법신불(法身佛) 개념에까지 이른 것이다.
7. 마치는 말
지금까지 불교의 중심 개념을 이루는 붓다 개념 가운데 화현설을 중심으로 초기불교 이래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불교전적을 전체적으로 검토해 보면 붓다 개념은 어떤 통일적인 면모를 보여준다기보다는 전적에 따라서 다양한 불타론이 혼재 또는 혼합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흐름의 한 편에서는 끊임없이 '깨달음과 그 깨달음을 얻은 인격에 대한 신비화 혹은 고원화'가 진행되었다. 이는 후대로 갈수록 또는 부파에 따라서 그 정도와 수준 또한 다르게 나타나다. 이러한 흐름에 있어 붓다는 인간을 뛰어넘는 초인적(超人的) 존재나 혹은 신과도 같은 어떤 존재로 설명되거나 강조되기도 한다. 이것을 일러 현대학자들의 일부는 '붓다의 신격화(神格化)'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하지만 인도불교적인 맥락에서 화현설(化現說)이란 말이 더 적당하다. 화현설이란 붓다를 세계의 궁극적 존재로 보고 있음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본고는 이러한 화현설의 기원이 초기불교경전에 이미 내장(內藏)되어 있음을 추적하여 보여주고 있다. 즉 붓다의 탄생과 관련하는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붓다의 반열반(般涅槃)과 수명의 설명, 그리고 불계(佛界)와 일국토 일불설(一國土 一佛說)에 이어 계속해서 과거불과 미래불 개념에 화현설이 내재되어 있음을 비판적으로 밝혀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붓다개념의 최종적인 종착지는 대승의 철학적 불신론으로서 삼신론(三身論)이라는 것이다. 결국 초기와 부파를 거쳐 대승은 여러 양상들의 불타관을 붓다의 화현설(化現說)로 정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덧붙인다면 이러한 철학적인 불신론(佛身論)의 전개는 점차 인간 석가모니의 역사적인 모습을 제거하는 방향이었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결국 매우 복잡하고 고원한 성불론(成佛論)으로 치달아 경우에 따라서는 보통사람으로서 붓다를 성취하는 일은 도저히 이룰 수 없을 정도로 난해하고 아득한 일로 느껴지게 하였다. 예를 들면, 헤아릴 수 없는 붓다의 특수한 그리고 고원한 정신적 특징들과 함께 그러한 정신적 특징을 완성하기까지는 거의 무한에 가까운, 그래서 삼 ․ 칠 혹은 삼십삼의 아승지겁(asaṁkhyakalpa)과 같은 긴 세월이 이야기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음 연구 과제는 어떻게 하면 근본적인 의미의 보편적인 성불론을 위한 붓다개념을 회복할 수 있는가하는 교리적 검토가 요청된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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