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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가밋따(Shangmitta)와 남방 테라와다 전통의 연속성/황순일

실론섬 2015. 7. 30. 14:36

상가밋따(Saṅghamittā)와 남방 테라와다(Theravāda) 전통의 연속성

황순일/동국대학교 불교학부 교수


< 목 차 >

I. 서언

II. 상가밋따(Saṅghamittā)의 생애

III. 상가밋따(Saṅghamittā)와 중국 순례승

IV. 상가밋따(Saṅghamittā)의 유산

V. 맺음말


<한글요약>

남방 테라와다(Theravāda) 전통에서 비구니교단은 10세기경에 소멸된 후 복원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남방불교 전통에는 상가밋따로 대변되는 비구니교단의 역사가 전해지고 있고 상가밋따가 전해준 보리수나무가 남방불교의 중단 없는 연속성을 상징해 주고 있다. 물론 상가밋따의 역사성은 오래전부터 의심되어 왔으며 여전히 그 역사성을 증명할 수 있는 수단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상가밋따의 역사성을 의심하는 학자들에 의해서 꾸준히 언급되어온 현장 법현과 같은 중국 순례승들의 언급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은 권위를 가지고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이들의 언급이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들은 것으로서 총체적으로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만 세세한 부분에 있어서는 많은 문제들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본 논문에서는 남방 테라와다 전통의 스리랑카 역사서인 마하왐샤를 중심으로 상가밋따의 일생을 흩어져서 나타나는 이야기들을 복원하여 남방불교의 벽화들과 함께 살펴본 수 중국 순례승들의 언급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리고 비록 비구니 교단은 사라졌지만 보드가야의 보리수나무 가지를 전해준 것으로서 여전히 중요하게 받아들여지는 상가밋따의 역할을 통해 남방 테라와다 전통의 중단 없는 연속성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Ⅰ. 서언


남방 테라와다(Theravāda) 전통에서 여성의 지위는 양성평등 경향이 강한 현대적 입장에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현재 공식적으로 비구교단 만이 있는 상태에서 비구니교단이 복원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은 점점 커져가고 있지만, 1928년에 이미 비구니 교단의 완전소멸과 복원불가를 선언한 태국의 경우1)에서 보듯이 비구니교단의 복원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1) 1928년 나린끌롱(Narin Kleung)이란 스님이 비구니교단을 지지하며 자신의 딸 2명의 

   비구니계를 인가해주자, 태국승단의 종정(Supreme Patriarch)이 이들을 환속시켜 감

   옥으로 보내고 태국의 어떠한 비구스님도 비구니계를 인가해 주지 못하도록 하는 칙

   령을 선포했다(Dhammananda Bhikkhuni, The Nation July 2006).


비록 남방 테라와다 전통이 비구니교단의 복원에 소극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적으로 남성위주의 마초적인 모습에만 젖어 있는 것은 아니다. 상가밋따(Saṅghamittā)로 대표되는 비구니교단의 역사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고, 상가밋따가 전해준 것으로 믿어지는 스리랑카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의 보리수나무가 붓다(Buddha) 이래 남방 테라와다(Theravāda) 전통의 중단 없는 연속성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가밋따(Saṅghamittā)는 인도 마우리야(Maurya) 왕조의 3번째 왕으로서 불교를 국가 간의 외교관계를 통해 스리랑카에 전해준 것으로 보이는 아쇼까(Ashoka)왕의 딸이라고 이야기되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확인하기 힘든 많은 전설적인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고 서구에서 불교학의 초창기부터 상가밋따(Saṅghamittā)의 역사성에 대한 의문들이 끊임없이 재기되어 왔다. 허먼 올덴베르그(Hermann Oldenberg)는 1879년에 출판된 빨리어 율장 서문에서 마힌다(Mahinda)와 상가밋따(Sanghamittā)에 관련된 스리랑카 역사서들의 이야기를 스리랑카 불교교단의 기원에 역사성을 담보하고 가장 뛰어난 역사적인 인물인 아쇼까(Asoka)왕과 자신들을 연결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견해는 빈센트 스미스(Vincent Smith)에게서도 그대로 받아들여졌으며, 디빠왐샤(Dīpavaṃsa)나 마하왐샤(Mahāvaṃsa) 같은 스리랑카의 역사서 보다 아쇼까왕 비문과 법현 현장 등 중국 구법승의 기록에 우위를 두면서 상당히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비록 아쇼까왕 비문이 아직까지 가장 권위 있는 자료로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중국 구법승의 기록에는 많은 의문들이 제기되고 있다. 법현과 현장의 여행기는 5-7세기 인도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하는 기록으로서 큰 틀에서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이들의 기록이 기본적으로 여행 중에 들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세한 부분에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본 논문에서는 스리랑카의 역사서인 마하왐샤(Mahāvaṃsa)에 흩어져 있는 상가밋따와 보리수나무

에 관련된 이야기들을 남방불교전통에서 중요하게 발전한 벽화들과 함께 살펴보면서 법현과 현장의 여행기에서 전하는 상이한 이야기들에 대한 합리적인 해석을 시도한 후 아누라다푸라 보리수나무가 남방 테라와다(Theravāda) 전통에서 가지고 있는 상징성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II. 상가밋따(Saṅghamittā)의 생애


상가밋따의 생애는 남방 테라와다(Theravāda) 전통의 역사서인 디빠왐샤(Dīpavaṃsa)와 마하왐샤(Mahāvaṃsa)에서 일화별로 여기저기 흩어져서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 의하면 상가밋따는 아쇼까왕과 웨디샤 데위(Vedisa Devi) 사이에서 아들 마힌다(Mahinda) 다음으로 태어났으며 출가하기 전에 결혼하여 남편 앗기브라흐마(Aggibrahmā)와의 사이에 수마나(Sumana)란 아들을 두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녀의 어머니인 웨디샤 데위는 아쇼까가 왕이 되기 이전 인도 중서부 아완띠(Avanti) 지역의 웃자이니(Ujjayinī)로 파견되어 가는 길에 코끼리 상아 세공으로 유명했던 도시 웨디샤

(Vedisa)에서 만난 상인의 딸이었다. 남방 테라와다(Theravāda) 전통에 의하면 아쇼까는 그녀와 함께 웃자이니(Ujjayinī)를 통치하면서 먼저 아들 마힌다를 낳고 2년 후 딸 상가밋따를 낳았다고 한다.


마힌다(Mahinda)가 포교사로서 스리랑카로 파견되기 전에 6개월 동안 웨디샤기리(Vedisagiri)9)에 머무를 때 어머니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는 것으로 보아, 마힌다와 상가밋따는 어머니를 웨디샤에 남겨둔 체 아버지 아쇼까를 따라 마우리야(Maurya) 왕조의 수도인 빠딸리뿌뜨라(Pāṭaliputra)로 간 것으로 보인다. 상가밋따는 수도에서 아쇼까왕의 조카인 앗기브라흐마(Aggibrahmā)와 결혼하여 수마나(Sumana)를 아들로 두었다. 하지만 부섭정(uparājā)인 띳샤(Tissa) 왕자가 사슴사냥에 나갔다가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을 때 앗기브라흐마(Aggibrahmā)는 그와 함께 출가해 버린다. 그리고 목갈리뿟다(Moggaliputta)와 아쇼까왕의 권유로 마힌다(Mahinda)와 상가밋따(Saṅghamittā)는 각각 20세와 18세의 나이에 출가하게 된다. 상가밋따의 아들 수마나(Sumana) 또한 출가한 것으로 보이며 6신통을 갖추고 마힌다와 함께 스리랑카로 파견된 것으로 나타난다.


제3결집 후 목갈리뿟따띳샤(Moggaliputtatissa)는 아쇼까왕의 후원아래 이웃나라들로 포교사를 파견하기로 하고 마힌다는 마힌딸레(Mahintale)로 사냥나온 데와남삐야띳사(Devānaṃpiyatissa)왕 만나 성공적으로 불법을 전한다. 스리랑카 왕가에 불교가 성공적으로 자리 잡으면서 왕의 동생의 부인 아눌라(Anulā) 왕비가 500명의 여성들과 함께 출가하기를 원한다. 마힌다는 여성들에게 자신이 수계를 줄 수 없다면서 데와남삐야띳사(Devānaṃpiyatissa)왕에게 사신을 보내서 비구니 상가밋따(Saṅghamittā)와 보리수나무의 남쪽가지를 요청하게 한다.


스리랑카로 비구니 수계전통을 확립하기 위한 초청을 받은 상가밋따는 초청에 응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남편이 출가하여 홀로 된 후 비구니가 되었지만,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오빠와 아들이 이미 스리랑카에 가 있었기 때문이다. 남방 테라와다 전통에 의하면 떠나가는 딸을 만류하는 아쇼까왕을 상가밋따(Saṅghamittā)가 직접 다음과 같이 설득하고 있다.18)


왕이시여, 오빠 [마힌다]의 이야기는 저에게 아주 중요합니다. 출가해야할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꼭 그곳으로 가야만 합니다.

(Wilhelm Geiger, The Mahāvaṃsa or The Great Chronicle of Ceylon (PTS 1980), p.123: 

me mahārāja bhātuno vacanaṃ garu pabbājanīyā ca bāhū, gantabbaṃ tatha tena me.)


아쇼까((Asoka)왕에게 보리수나무는 아주 소중한 것이었다. 그는 보드가야의 보리수 나무를 보면 붓다는 보는 것 같다고 하면서 나무가 죽으면 자기 자신도 죽을 것이라고 탄식하고 있다. 왕이 직접 보드가야를 방문하여 보리수나무에 경의를 표하는 장면은 인도중부지방의 산치에 있는 대탑의 탑문에 아름답게 조각되어 남아있다.


아쇼까왕의 보리수 나무 숭배를 시기한 왕비의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아쇼까왕의 보리수 사랑은 남달랐다. 그는 아주 성대한 행사를 준비하여 보리수나무의 남쪽 가지와 함께 비구니 수계전통 확립에 필요한 만큼의 비구니들을 선택하여 상가밋따(Saṅghamittā)와 함께 스리랑카로 파견하기로 한다.


남방 테라와다(Theravāda) 전통에 의하면 아쇼까왕은 왕가와 귀족 가문의 아들들을 선출하여 보리수나무 가지를 보드가야로부터 배로 겐지즈강을 지나 벵골만의 따말릿띠(Tāmalittī)로 호송한다. 그리고 해안가에 마지막으로 보리수나무 가지에 경의를 표한 왕은 자신이 직접 목 깊이까지의 바다로 보리수나무 가지를 들고 들어가서 11명의 비구니들이 상가밋따(Saṅghamittā)와 함께 타고 있는 배로 전달한다. 왓포 사원의 벽화는 아쇼까왕이 목 깊이까지 바다로 들어가 보리수나무를 전달하는 장면을 아주 중요하게 묘사하고 있다.


아쇼까왕은 자신이 한 것처럼 스리랑카의 데와남삐야띳사(Devānaṃpiyatissa) 왕도 보리수나무를 공경할 것을 부탁하며 배를 떠나보내고 수도로 돌아갔다고 한다. 벵골만 하구에서 스리랑카까지는 좋은 바람을 만났을 때 약 1주일 정도가 걸리는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많은 학자들은 스리랑카로의 불교전파를 남인도 동쪽 해안의 촐라(Chola)와 빤디야(Pandiya) 지역을 거치는 것으로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들은 고대 남인도의 활발한 행상무역활동을 간과한 것으로서 오늘날 많은 의문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많은 인도역사서들은 기원전후 남인도가 고대 로마와 무역을 행했던 것에 주목하고 있다. 벵골 만은 고대부터 서구의 지중해처럼 해상무역 활동이 아주 활발했던 곳이었으며, 사실상 대양을 항해하는 배를 통해 스리랑카는 인도 동북부와 밀접하게 연결되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즉 고대 인도에서 남인도가스리랑카에 문화적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니라 역으로 스리랑카가 우회적으로 북인도의 산스끄릿 문화를 남인도에 전해준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왓포사원의 벽화는 계속해서 보리수나무가 스리랑카에 도착해서 데와남삐야띳사(Devānaṃpiyatissa) 왕이 아쇼까왕과 동일하게 목 깊이까지 바다로 들어가 보리수나무를 받는 장면과 수도 아누라다뿌라(Anurādhapura)로 가기 전에 해안에서 보리수나무를 숭배하는 장면을 아주 중요하게 묘사하고 있다.


상가밋따(Saṅghamittā)와 함께 보리수 나무가 스리랑카에 도착하자 데와남삐야띳사(Devānaṃpiyatissa)왕도 또한 성대한 환영을 준비한다. 그는 직접 잠부꼴라(Jambukola)까지 나가서 보리수나무를 맞이한다. 배가 도착하자 데와남삐야띳사왕은 아쇼까왕과 같이 목 깊이까지의 직접 바다로 들어가서 보리수나무를 받아 준비된 사당에 모신다. 10일간의 성대한 환영행사가 있은 후에 보리수나무는 마차에 실어져서 상가밋따(Saṅghamittā)와 11명의 비구니 스님들과 함께 수도 아누라다뿌라

(Anurādhapura)로 이송된다.


아누라다뿌라에서 보리수나무는 성의 동쪽 편 준비된 장소에 심어지고 상가밋따는 다른 비구니 스님들과 함께 우빠시까위하라(Upākikāvihāra)에 머물면서 아눌라(Anulā) 왕비와 500명의 여성들과 500명의 후궁 여인들에게 수계를 준다. 이를 통해서 남방 테라와다 전통에 비구니 교단이 공식적으로 시작되게 된다. 마힌다와 상가밋따는 데와남삐야띳사왕 사후 웃띠야(Uttiya)왕 재위 7년 8년경에 각각 60세와 59세의 나이로 죽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shangamitta 가 보리수 나무를 스리랑카에 전하는 모습을 그리 스리랑카의 벽화)



III. 상가밋따(Saṅghamittā)와 중국 순례승


스리랑카 역사서가 전하는 이 동화 같은 이야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많은 학자들은 법현과 현장의 여행기를 중심으로 2가지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첫째 스리랑카 아누라다뿌라(Anurādhapura)에 2년 정도 머문 것으로 보이는 법현이 상가밋따(Saṅghamittā)에 대한 언급 없이 보리수나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고, 둘째 현장이 스리랑카에 불교를 전한 사람으로서 마헨드라(Mahendra)를 언급하면서 아쇼까왕의 아들이 아니라 동생으로 언급한다는 것이다. 먼저 법현은 그의 불국기에서 아누라다뿌라의 보리수나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옛날 한 왕이 중인도로 사람을 보내서 보리수나무의 가지를 가지고 오게 했다. 그는 이 가지를 불당 옆에 심었으며 나무는 약 100미터까지 높이 자라났다. 그 나무의 한 가지가 남동쪽으로 길게 자라나자 부러질 것을 두려워한 왕은 8-9개 기둥으로 그 가지를 받혔다고 한다. … 나무 아래에 사원을 만들고 불상을 모셨다. 스님들과 일반 신도들이 끊임없이 공경했다.


비록 법현이 2년 동안 아누라다뿌라에 머물렀지만, 그는 보리수나무와 루완왈리사야(Ruvanvalisaya) 대탑을 중심으로 거대한 사원을 형성하면서 가장 보수적인 견해를 견지했었던 마하위하라(Mahāvihāra)에서 머물렀던 것이 아니다. 법현은 마하위하라의 라이벌로서 당시 서로 대립했었던 아와야기리위하라(Abhayagirivihāra)에 머물렀다. 교단을 만든 사람의 이름을 따라 담마루찌(Dhammarucis)로 불렸던 이들은 기원전 1세기경에 독립하여 기원후 4세기경부터 거대한 학파로 성장했으며 인도로부터 범어(Sanskrit) 경전 및 논서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수용했다. 이들은 마하비하라(Mahāvihāra)로부터 전통적인 교리가 아니라 확장된 교리라는 의미에서 광설(vaitulya)이라는 비판을 받았으며 인도에서 상좌부(Sthaviravāda)란 이름으로 알려졌고 기원후 4-10세기까지 마하비하라에 버금가는 중요한 학파로서 스리랑카에서 번성했다고 한다. 


법현은 아누라다뿌라의 보리수나무에 대해 마하위하라(Mahāvihāra)의 입장에서 서술하기 보다는 자신이 머물렀던 아와야기리위하라(Abhayagirivihāra)의 입장에서 서술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마하위하라에 유리해 보이는 아쇼까왕과 그의 딸 상가밋따(Saṅghamittā)에 대한 이야기들이 빠져버린 것이다. 하지만 법현은 여전히 보리수나무에 관한 아주 중요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즉 이 보리수나무가 라이벌 학파에서 보더라고 여전히 수없이 많은 승려들과 신자들에게서 끊임없이 숭배 받고 있다는 점을 잘 알리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현장은 대당서역기의 스리랑카 편에서 스리랑카로 불법을 전한 사람으로 아쇼까왕의 동생을 지목하고 있다. 아쇼까왕의 동생은 북방계 아와다나 문헌들에서 위따아쇼까(Vītāśoka) 또는 수닷따(Sudatta)로 나타나고 있으며 현장의 대당서역기에서 마헨드라(Mahedra)로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다. 그가 불교에 귀의하는 과정에 대한 일화로 보아 상가밋따의 남편인 앗기브라흐마(Aggibrahmā)가 함께 출가했던 부섭정(uparājā) 띳사(Tissa)왕자와 동일인물로서 스리랑카의 역사서인 마하왐샤(Mahāvaṃsa)에 나타난다. 현장에 의하면 남인도의 여러 곳에 아쇼까왕이 세운 불탑유적들이 있고 그 중 몇몇은 그의 동생 마헨드라(Mahedra)가 세운 것으로 언급된다. 스리랑카에 불교가 전파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스리랑카는 이전에 비도덕적인 종교에 심취해 있었다. 하지만 불멸 100년 후 마헨드라(Mahendra)라는 이름의 아쇼까왕의 동생이 세속적인 욕망을 끊고 아라한과를 추구해서 증득했다. 그는 6신통과 8각지를 지녔다. 그리고 한순간에 이 나라(스리랑카)로 왔다. 그는 불법을 알리고 물려받은 가르침을 널리 퍼트렸다. 그의 시대로부터 사람들은 가슴으로 불교를 받아들였으며 2만 명의 승려들이 거주할 수 있는 100개 이상의 사원을 건설했다.


현장의 대당서역기는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정교하게 다듬어진 문헌이다. 하지만 현장 스스로가 고백하고 있듯이 그는 전란과 몇몇 사정으로 스리랑카에 갈 수 없었다. 스리랑카와 관련된 그의 이야기들은 그가 여행 중에 들은 이야기에 불과하다. 물론 현장이 스리랑카까지 갈 수 있었다면 법현보다 훨씬 더 자세하고 정확한 기록을 남겼을 것이지만 불행히도 현장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현장이 남인도로 내려갔을 때 오늘날의 첸나이(Chennai) 남쪽의 깐치뿌람(Kanchipuram)이 불교의 중심지였다. 그는 이곳에 수백 개의 불교 사원과 1만 명이상의 스님들이 있다고 전하고 있다. 아마도 현장은 스리랑카에 대한 이야기를 이곳에서 전해 들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는 이 승려들을 대승(Mahāyāna) 상좌부라고만 언급하고 있다. 


현장보다 약 1-2세기 전에 깐치뿌람(Kanchipuram)을 거쳐서 아누라다뿌라(Anurādhapura) 마하위하라(Mahāvihāra)로 갔었던 붓다고샤(Buddhaghosa)가 마하위하라의 주석서에 접근하기 위해 테스트를 받아야만 했다는 사실은 깐치뿌람과 마하위하라 학파 사이에 간극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현장이 마하위하라(Mahāvihāra) 스님들에게 직접 스리랑카 불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스리랑카 역사서와 현장과 법현의 언급에서 보이는 차이점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고대 스리랑카에서 마힌다와 상가밋따에 관련된 일화들은 아마도 마하위하라(Mahāvihāra), 아와야기리위하라(Abhayagirivihāra), 제따와나위하라(Jetavanavihāra)라는 3학 학파들 중에서 주로 마하위하라에서만 전승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시기에 스리랑카를 방문했지만 아와야기리위하라(Abhayagirivihāra)에 머물렀던 법현과 스리랑카를 방문하지 못했고 마하위하라(Mahāvihāra)가 아닌 사람들로부터 이야기를 전해들은 현장이 마힌다와 상가밋따에 관해 침묵하고 있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해 보인다. 


마힌다와 상가밋따의 일화들은 12세기 스리랑카 불교가 빠라끄라마바후 1세 때 아란니까(Āraññikas)를 중심으로 1개로 통합된 후 스리랑카 전역에서 공인된 정설로서 퍼져 나갔을 것으로 보인다. 아란니까(Āraññikas)가 기본적으로 마하하위하라(Mahāvihāra)의 한 분파였기 때문에 빠라그라마바후 1세의 정화 및 교단개혁은 마하하위하라(Mahāvihāra)로의 불교교단 통합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마하위하라 중심으로 개편된 불교가 동남아시아 전역으로 전해졌기 때문에 오늘날 남방 테라와다(Theravāda) 불교권 대부분 지역에서 마힌다와 상가밋따의 일화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IV. 상가밋따(Saṅghamittā)의 유산


상가밋따(Sanghamittā)에 의해 시작된 남방불교의 비구니 수계전통은 힌두교 쉬와 계열의 남인도 촐라(Chola)인들을 스리랑카를 침입하여 10세기 후반부터 11세기 중반까지 아누라다뿌라(Anurādhapura)를 지배하는 전란의 와중에 사라지게 된다. 동일하게 위기를 겪었던 비구 수계전통은 전란이후 신속하게 복원되었지만 비구니 교단은 결국 복원되지 못했다. 따라서 비구니 교단이 사라진 남방불교권에서 상가밋따(Sanghamittā)는 주로 아누라다뿌라의 보리수나무와 관련해서 이야기된다.


남방 테라와다(Theravāda) 전통에서 아누라다뿌라 보리수나무의 중요성은 항상 강조되어 왔다. 피터 스킬링은 보리수 나무의 도착을 붓다의 가르침(śāsanā)의 토대가 스리랑카에 만들어지는 것에 비유하고 있다.42) 스리랑카 테라와다 전통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보리수 나무에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와 관련된 수많은 문헌들을 남기고 있다. 어떻게 보면 샤끼야무니(Sakyamuni) 붓다뿐만 아니라 과거와 미래의 붓다들의 보리수나무를 숭배한다고 하는 남방 테라와다 전통의 모습은 다른 어떤 불교전통에서도 쉽게 찾아보기 힘든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누라다푸라에 있는 스리 마하 보리수(Sri Maha Bodhi Tree)

 

사실상 몇몇 문헌들에서 보리수나무는 붓다가 부제 시에 붓다를 대신할 수 있는 것으로 언급되고 있다. 깔링가보디자따가(Kalingabodhajātaka)에서는 사라와스띠(Śrāvastī) 사람들이 제따와나(jetawana)에 붓다가 없어서 당황한 경우가 많아지자 아난다에게 명하여 제따와나 입구에 보리수나무를 심게 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또한 붓다 자신이 깨달음을 얻고 2주 후에 스스로 전혀 눈을 깜빡이지 않고 보리수나무를 응시했다고 하면서, 붓다도 또한 보리수나무를 숭배한 사람들 중의 하나임이 보리수나무의 기도문에서 강조하기도 한다.


아누라다뿌라 보리수나무의 어떤 측면이 이 나무를 이렇게까지 중요하게 만들었을까? 남방 테라와다(Theravāda) 전통은 3가지 종류의 사리를 구분하고 있다. 붓다의 신체의 일부인 사리라까(sarīraka), 붓다가 직접 사용했던 물건인 빠리보가(paribhoga), 그리고 붓다를 기억할 수 있는 수단인 웃데시까(uddesika)이다. 일반적으로 붓다의 머리카락 이빨 뼈 등이 사리라까에 해당되고, 붓다가 직접 사용했던 바루 가사 보리수나무 등이 빠리보가에 해당되며, 불상과 같이 붓다와 직접적인 접촉은 없지만 붓다를 기억할 수 있는 것이 웃데시까에 해당된다. 따라서 사리라까가 가장 가치가 높고 웃데시까가 가치가 가장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만일 스리랑카 아누라다뿌라의 보리수나무가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보드가야의 보리수나무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 이 나무는 붓다와 직접적인 접촉이 없음으로 빠리보가(paribhoga)가 아니라 웃데시까(uddesika) 즉 붓다를 기억할 수 있는 물건에 불과한 것이 된다.


사실상 아누라다뿌라의 보리수나무는 스리랑카 전역으로 퍼져나간 보리수나무들의 원조가 되며 동남아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간 보리수나무들의 원조가 된다. 역사적인 사실인지 아닌지를 떠나서 바로 이 아누라다뿌라의 보리수나무에 생명력을 부여하고 아누라다뿌라의 보리수나무를 빠리보가로서 아주 중요하게 간주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상가밋따(Sanghamittā)가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보리수나무의 가지가 아누라다뿌라로 전해져서 뿌리를 내렸다는 것을 통해 붓다의 가르침이 스리랑카 마하위하라(Mahāvihāra) 전통에서 중단 없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그리고 이 아누라다뿌라의 보리수나무로부터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의 전역으로 보리수나무의 자손들이 퍼져 나갔다는 점으로부터 사실상 스리랑카로부터 동남아시아로 남방 테라와다(Theravāda) 전통의 중단 없는 연속되어 전해지고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이러한 중단 없는 연속성을 담보하는 것에 상가밋따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V. 맺음말


비록 상가밋따(Saṅghamittā)에 의해 시작된 비구니 수계전통은 사라졌지만 그녀의 유산은 스리랑카 불교 곳곳에 남아있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상가밋따 뽀야(Sanghamitta Poya)로서 매년 12월 보름이면 수없이 많은 스리랑카 불교인들이 아누라다뿌라의 보리수나무를 흰옷을 입고 참배하면서 그녀의 역할을 기리고 있다. 


이들에게 상가밋따(Saṅghamittā)의 역사성을 따지는 것은 거의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다. 남방불교의 여성성을 상징하는 상가밋따는 남방 테라와다(Theravāda) 전통에서 여전히 중요하게 간주되고 있으며 아누라다뿌라의 투빠라마(Thuparama) 근처에서 상가밋따의 불탑(stūpa)가 복원되어 순례행렬을 받아들이고 있다.


태국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의 남방 테라와다(Theravāda) 불교 사원에서는 간혹 사부대중들이 붓다와 함께 모여 있는 모습들이 나타나곤 한다. 남방불교 전통에 의하면 비구니를 포함한 사부대중의 전통은 샤끼야무니(Sakyamuni) 붓다뿐만 아니라 과거의 모든 붓다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가 함께 사이좋게 앉아있는 모습들은 남방 테라와바(Theravāda) 전통에서 비구니 교단이 하루빨리 복원되어야할 당위성을 역설적으로 주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스리랑카의 비구니 스님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