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 마음 깨치면 부처
황벽(黃檗: ?-850) 스님이 배휴(裵休:797-870)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부처님과 일체 중생 한마음일 뿐 거기에 다른 어떤 법도 없다. 이 마음은 본래로부터 생기거나 없어진 적이 없으며, 푸르거나 누렇지도 않다. 정해진 틀이나 모양도 없으며, 있고 없음에 속하지도 않고, 새롭거나 낡음을 따질 수도 없다. 또한 길거나 짧지도 않고, 크거나 작자도 않다. 그것은 모든 한계와 분량, 개념과 언어, 자취와 상대성을 뛰어 넘어 바로 그 몸 그대로 일 뿐이다. 그러므로 생각을 움직였다 하면 곧 어긋나 버린다. 이것은 마치 허공과 같아서 끝이 없으며 재어볼 수도 없다. 이 한마음 그대로가 부처일 뿐이니 부처와 중생이 새삼스레 다를 바가 없다. 중생은 다만 모양에 집착하여 밖에서 구하므로, 구하면 구할수록 점점 더 잃는 것이다.
부처에게 부처를 찾게하고 마음으로 마음을 붙잡는다면, 겁(劫)이 지나고 몸이 다하더라도 바라는 것은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중생들은 마음을 쉬고 생각을 잊어 버리면 부처가 저절로 눈앞에 나타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이 마음 그대로가 부처이고, 부처가 곧 중생이다. 그러므로중생이라 해서 마음이 줄지 않고, 부처라 해서 더 늘지도 않는다. 또한 6도만행과 항하사 같은 공덕이 본래 그 자체에 갖추어져 있어서, 닦아서 보탬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인연을 만나면 곧 베풀고, 인연이 그치면 그대로 고요하나니, 만일 이것이 부처임을 결정코 믿질 않고 겉모습에 집착하여 수행하려 하고, 그것으로써 공부를 삼는다면 그 모두가 망상일 뿐 도와는 서로 어긋나게 된다.
이 마음이 곧 부처요 다시 다른 부처가 없으며, 또한 다른 어떤 마음도 없다. 이 마음은 허공같이 밝고 깨끗하여 어떤 모습도 하고 있지않다. 그러므로 마음을 일으켜 생각을 움직이면 법의 몸[法體]과 어긋나는 동시에 모양에 집착하게 된다. 비롯없는 옛날로부터 모양에 집착한 부처란 없다. 또한 육도만행을 닦아서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곧 차제(次第) 를 두는 것이니, 차제있는 부처란 본래로 없다.
한마음 깨치면 다시 더 작은 법도 얻을 것이 없으니, 이것이야말로 참된 부처이다. 부처와 중생은 한 마음으로 다름없음이 허공과 같아서, 그것에는 잡됨도 무너짐도 없고, 온누리를 비추는 햇살과도 같다. 해가 떠올라 온 천하가 두루 밝아질 때라도 허공은 한번도 밝은 적이 없으며, 해가 져서 어둠이 온천하를 덮을지라도 허공은 어두웠던 적이 없다. 이렇게 밝고 어두운 경계가 서로 번갈아 바뀐다 해도 허공의 성품은 툭 트이어 변하지 않는 것이니, 부처와 중생의 마음도 꼭 이와같다. 만약 부처를 관(觀)하면서 깨끗하고 밝으며 속박을 벗어 났으리라는 생각을 떠올린다든가, 중생은 때묻고 어두우며 생사의 고통이 있으리라는 관념을 버리지 못한다고 해보자.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수많은 세월이 지나더라도 깨닫지 못할 것인데, 이는 모양에 집착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오직 이 한 마음일 뿐, 거기에 티끌만큼의 어떤 법도 있을 수 없으니, 이 마음 그대로가 곧 부처다. 그런데 지금 도를 배우는 이들은 이 마음 바탕을 깨닫지 모하고 문득 마음에서 마음을 내고 밖에서 부처를 구하면 모양에 집착하여 수행을 하고 있으니, 모두가 악법이지 깨닫는 도가 아니다.
"師謂休曰 諸佛與一切衆生 唯是一心 更無別法 此心 無始已來 不曾生不曾滅 不靑不黃 無形無相 不屬有無 不計新舊 非長非短 非大非小 超過一切限量名言 跡對待 當體便是 動念卽乖 猶如虛空 無有邊際 不可測度 唯此一心 卽是佛 佛與衆生 更無別異 但是衆生 着相外求 求之轉失使佛覓佛 將心捉心 窮劫盡形 終不能得 不知息念忘慮 佛自現前 此心 卽是佛 佛卽是衆生 爲衆生時 此心 不減 爲諸佛時 此心 不添 乃至六度萬行 河沙功德 本自具足 不假修添 遇緣卽施 緣息 卽寂 若不決定信此是佛 而欲着相修行 以求功用 皆是妄想 與道相乖 此心 卽是佛 更無別佛 亦無別心 此心明淨 猶如虛空 無一點相貌 擧心動念 卽乖法體 卽爲着相 無始已來 無着相佛 修六度萬行 欲求成佛 卽是次第 無始已來 無次第佛 但悟一心 更無少法可得 此卽眞佛 佛與衆生 一心無異 猶如虛空 無雜無壞 如大日輪 照四天下 日昇之時 明 天下 虛空 不曾明 日沒之時 暗 天下 虛空 不曾暗 明暗之境 自相준奪 虛空之性 廓然不變 佛及衆生 心亦如此若觀佛 作淸淨光明解脫之相 觀衆生 作垢濁暗昧生死之相 作此解者 歷河沙劫 終不得菩提 爲着相故 唯此一心 更無微塵許法可得 卽心是佛 如今學道人 不悟此心體 便於心上生心 向外求佛 着相修行 皆是惡法 非菩提道
2. 무심(無心)이 도(道)이다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것이 무심도인 한 살에게 공양 올린 것만 못하다. 그것은 무심한 사람에게는 일체의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진여 그대로인(如如) 몸이 안으로는 목석 같아서 움직이거나 흔들리지 않으며, 밖으로는 허공 같아서 어디에도 막히거나 걸리지 않으며, 주관 객관의 나뉨은 물론 일정한 방위와 처소도 없다. 후학들이 감히 법에 들어오지 못하는 까닭은 공에 떨어져 닿아 쉴곳이 없을까 두려워해서인데, 이런 태도는 막상 벼랑을 보고는 물러나서 거기다가 널리 지견을 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견을 구하는 자는 쇠털처럼 많아도 정작 도를 깨친 이는 뿔과 같이 드물 것이다.
문수보살은 이치(理)에, 보현보살은(行)에 해당한다. 이치란 진공(眞空)으로서 걸림없는 도리이고, 행실이란 형식을 벗어난 끝없는 실천을 말한다. 관세음보살은 자비를, 세지보살은 지혜를 상징한다. 유마(유마)는 깨끗한 이름[정명]이란 뜻인데, 깨끗하다는 것은 성품을[성]을 두고 하는 말이고, 이름은 모습의 측면에서 한 말이다.성품이 모양과 다르지 않으므로, 그를 정명거사(淨名居士)라 한 것이다. 대 보살들로 상징된 위의 곳들은 누구나가 가진 성품으로, 한마음을 여의지 않으니 깨치면 곧 그대로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자기 마음에서 깨달으려 하지 않고 마음 밖의 경계인 모양에 집착하여 오히려 도를 등지고 있다. 간지스강의 모래란 것을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이 모래는 모든 불보살과 제석, 범천 및 하늘 무리들이 자기를 밟고 지나간다 해도 기뻐하지 않고, 소나 양.벌레.개미 등이 자기를 밟고 지난다 해도 성내지 않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또한 간지스강의 모래는 보배나 향기를 탐하지도 않으며, 똥.오줌 냄새나는 더러운 것도 싫어하지 않는다. 이런 마음이 곧 무심한 마음으로서. 모든 모양을 떠난 것이다. 중생과 부처가 다를 것이 없으니, 이렇게 무심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완전한 깨달음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 그 당장 무심한 상태가 될 수 없다면, 그 사람은 여러 겁 동안 수행해도 도를 이루지 못할 것이니, 그것은 성문.연각.보살의 단계적인 공부에 얽매여 해탈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마음을 증득하는 데는 더디고 빠른 차이가 있다. 어떤 사람은 이 법문을 듣는 즉시 한 생각에 무심이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10신(十信).10주(十住).10행(十行).10회향(十廻向)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무심을 얻기도 한다. 그러므로 더디거나 빠르거나 무심을 얻으면 그만이지 거기에 더 닦고 증득할 것이 없으며, 참으로 얻었다 할 것도 없다. 그러나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는 것이니 당장 한 생각에 깨친 것과 10지를 거쳐 깨친 것이 효용에 있어서는 꼭 마찬가지여서 다시 더 깊고 얕음의 차이가 없다. 그렇지 않으면 다만 긴 세월 동안 헛되이 괴로움을 받을 뿐이다.
선악(善惡)을 짓는 것은 모두 모양에 집착하기 때문인데 모양에 집착하여 선악을 짓게 되면. 허망하게 윤회의 수고로움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그 무엇도 한마디 말에 본래의 법을 문득 스스로 깨닫는 것만 같지 못하다. 이 법 그대로가 마음이어서 마음 밖에는 아무 법도 없으며, 이 마음 그대로가 법이어서 법 밖에는 어떠한 마음도 없다. 그런데 마음 그 자체는 또한 마음이라 할 것도, 무심이라 할 것도 없다.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없앤다면 마음이 도리어 있게 된다. 다만 묵묵히 계합(契合)할 따름이다. 모든 사유와 이론이 끊어졌으므로 말하기를 '언어의 길이 끊기고 마음 가는 곳이 없어졌다'고 하였다. 이 마음이 본래 청정한 부처인데 사람마다 모두 그것을 지녔으며 꿈틀거리는 벌레까지도 불보살과 한 몸으로 다를 것이 없다. 다만 망상 분별 때문에 갖가지 업과를 지을 뿐이다.
供養十方諸佛 不如供養一箇無心道人 何故 無心者 無一切心也 如如之體 內如木石 不動不搖 外如虛空 不塞不碍 無能所無方所 無相貌無得失 趨者 不敢入此法 恐落空無棲泊處 故 望崖而退 例皆廣求知見 所以 求知見者 如毛 悟道者 如角文殊 當理 普賢 當行 理者 眞空無 之理 行者 離相無盡之行 觀音 當大慈 勢至 當大智 維摩者 淨名也 淨者 性也 名者 相也 性相不異故 號淨名 諸大菩薩所表者 人皆有之 不離一心 悟之卽是 今學道人 不向自心中悟 乃於心外 着相取境 皆與道 背 恒河沙者 佛說是沙 諸佛菩薩 釋梵諸天 步履而過 沙亦不喜 牛羊筮蟻 踐踏而行 沙亦不怒 珍寶馨香 沙亦不貪 糞尿臭穢 沙亦不惡 此心 卽無心之心 離一切相衆生諸佛 更無差別 但能無心 便是究竟學道人 若不直下無心 累劫修行 終不成道 被三乘功行拘繫 不得解脫 然 證此心 有遲疾 有聞法 一念 便得無心者 有至十信十住十行十廻向 乃得無心者 有至十地 乃得無心者 長短得無心 乃住 更無可修可證 實無所得 眞實不虛 一念而得 與十地而得者 功用恰齊 更無深淺 祈是歷劫 枉受辛勤耳 造惡造善 皆是着相 着相造惡 枉受輪廻 着相造善 枉受勞苦 摠不如言下 便自認取本法 此法 卽心 心外無法 此心 卽法 法外無心 心自無心 亦無無心者 將心無心 心劫成有 默契而已 絶諸思議故 曰 言語道斷 心行處滅 此心 是本源淸淨佛 人皆有之 蠢動含靈 與諸佛菩薩 一體不異 祈爲妄想分別 造種種業果
3. 근원이 청정한 마음
본래 부처 자리에는 실로 그 어떤 것도 없다. 툭 트이고 고요하여 밝고 오묘하며 안락할 따름이다. 스스로 깊이 깨달으면 당장 그 자리이므로 원만구족하여 다시 모자람이 없다. 설사 3아승기겁을 정진 수행하여 모든 지위를 거치더라도 한 생각 증득하는 순간에 이르러서는 원래 자기 부처를 깨달을 뿐, 궁극의 경지에 있어서는 어떠한 것도 거기에 더 보탤 것이 없다. 깨닫고 난 다음 지난 세월의 오랜 수행을 돌이켜 보면 모두 꿈속의 허망한 짓일 뿐이다. 그래서 여래께서는, '내가 아뇩다라삼막삼보리에 있어서 실로 얻었다 할 것이 없느니라. 만약 얻은 바가 있었다면, 연등부처님께서는 나에게 수기하시지 않았을 것이다'고 하셨다. 도 말씀하시기를,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으니, 이것을 깨달음이라 한다'고 하셨다. 본래 청정한 이 마음은 중생의 세계와 부처님의 세계, 산과 물, 모양있는 것과 없는 것 및 온 시방법계가 다 함께 평등하여 너다 나다 하는 생각이 없다.
이 본래 근원이 청정한 마음은 항상 두렷이 밝아 두루 비추고 있는데도 세상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고 다만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見聞覺知]으로 마음을 삼고, 그것에 덮이어서 끝내는 정교하고 밝은 본체를 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당장에라도 무심하기만 하면, 본 마음자리가 스스로 나타나서 밝은 햇살이 공중에 떠오르듯 시방법계를 두루 비추어 장애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도를 배우는 사람이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일거일동을 마음이라고 오인하는 것이다. 이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을 텅 비워 버리면 마음 길이 끊기어서 어느 곳에라도 들어갈 틈이 없느니라. 다만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곳에서 본래 마음을 인식할지라도, 본래 마음은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데에도 속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떠나 있지도 않느니라. 그러므로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가운데 다만 견해를 일으키거나 생각을 움직이지 말아야 하며, 그렇다고 해서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을 떠나 마음이나 법을 찾아서도 안되며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을 버리고 법을 취해서도 안된다. 그리하면 즉(卽)하지도 않고 여의지도[離] 않으며, 머물지도 집착하지도 않으며, 종횡으로 자재하여 어느 곳이든지 도량(道場)아님이 없다.
세상 사람들은 모든 부처님께서 마음 법을 전한다는 말을 듣고는 마음 밖에 따로 깨닫고 취할 만한 법이 있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마음을 가지고 법을 찾으면서, 마음이 곧 법이고 법이 곧 마음인 줄 알지 못한다. 마음을 가지고 다시 마음을 찾지 말아야 한다. 그래 가지고는 천만 겁을 지나더라도 마침내 깨칠 날은 없을 것이다. 당장 무심함만 같지 못할 것이니, 그 자리가 본래 법이다. 마치 힘센 장사가 자기 이마에 보배 구슬이 있는 줄을 모르고 밖으로 찾아 온 시방세계를 두루 다니며 찾아도 마침내 얻지 못하다가 지혜로운 이가 그것을 가르쳐 주면 본래 구슬은 예와 다름이 없음을 보는 것과 같은 일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도 자기 본심을 미혹하여 그것이 부처임을 알지 못하고 밖으로 찾아다니면서 의식적으로 수행을 하며 차례를 밝아서 깨달으려고 하지만 억겁 동안 애써 구한다고 해도 영원히 도를 이루지 못할터인즉 당장 무심함만 못하다.
일체의 법이 있다 할 것도 얻었다 할 것도 없고, 의지할 것도 머무를 것도 없으며, 주관이니 객관이니 할 것도 없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알아야 한다. 망념을 일으키지 않는 그 자리가 바로 깨치는 자리다. 그때 가서는 다만 본래 마음인 부처를 깨달을 뿐 많은 세월을 거친 노력은 모두 헛된 수행이다. 마치 힘센 장사가 구슬을 얻은 것은 자기가 본래 갖고 있던 구슬을 얻은 것일 뿐, 밖으로 찾아 다녔던 노력과는 상관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내가 아뇩다라삼막삼보리를 실제로는 얻었다 할 것이 없으나 사람들이 믿지 않을까 염려스럽기 때문에 다섯 가지 눈[五眼]과 다섯 가지 말[五語]로써 끌어다 보였노라. 이것은 진실되이 허망하지 않은 것이니, 이것이 맨 으뜸되는 뜻의 이치[弟一義諦]이니라'고 하셨다.
本佛上 實無一物 虛通寂靜 明妙安樂而已 深自悟入 直下便是 圓滿具足 更無所欠 縱使三祈精進修行 歷諸地位 及一念證時 祈證元來自不 向上 更不添得一物 却觀歷劫功用 摠是夢中妄爲 故 如來云 <我於阿뇩菩提 實無所得 若有所得 燃燈佛 卽不與我授記> 又云 <是法 平等 無有高下 是名菩提> 卽此本願淸淨心 與衆生諸佛世界 山河有相無相 十方界 一切平等 無彼我相 此本願淸淨心 堂自圓明 照 世人 不悟 祈認見聞覺知爲心 爲見聞覺知所覆 所以不覩精明本體 但直下無心 本體自現 如大日輪 昇於虛空 照十方 更無障 故 學道人 唯認見聞覺知施爲動作 空却見聞覺知 卽心路絶 無入處 但於見聞覺知處 認本心 然 本心 不屬見聞覺知 亦不離見聞覺知 但莫於見聞覺知上 起見解 亦莫於見聞覺知上 動念 亦莫離見聞覺知覓心 亦莫捨見聞覺知取法 不卽不離 不住不着 縱橫自在 無非道場
世人 聞道諸佛 皆傳心法 將謂心上 別有一法可證可取 遂將心覓法 不知心卽是法 法卽是心 不可將心更求於心 歷千萬劫 終無得日 不如當下無心 便是本法 如力士 迷額內珠 向外求覓 周行十方 終不能得 智者指之 當時 自見本珠如故 故 學道人 迷自本心 不認爲佛 遂向外求覓 起功用行 依次第證 歷劫勤求 永不成道 不如當下無心 決定知一切法 本無所有 亦無所得 無依無住 無能無所 不動妄念 便證菩提 及證道時 祈證本心佛 歷劫功用 是虛修 如力士得珠時 祈得本額珠 不關向外求覓之力故 佛言 <我於阿뇩菩提 實無所得 恐人不信故 引五眼所見 五語所言 眞實不虛 是第一義諦>
4. 일체를 여읠 줄 아는 사람이 곧 부처
그러므로 도를 배우는 사람은 의심치 말아야 한다. 4대(四大)로 몸을 삼으나, 4대에는 '나(我)'가 없고, 그 '나'에도 또한 주재(主宰)가 없다. 그러므로 이 몸에는 '나'도 없고 '주재'도 없음을 알아야 한다. 또한 오음(五陰)으로 마음을 삼지만, 이 5음 역시 '나'도 '주재'도 없다. 그러므로 마음 또한 '나'도 '주재'도 없음을 알아야 한다. 6근.6진.6식이 화합하여 생멸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다. 18계(十八界)가 이미 공(空)하여 일체가 모두 공하고, 오직 본래의 마음이 있을 뿐, 맑아서 호호탕탕 걸림이 없다. 분별의 양식[識食]과 지혜의 양식[智食]이 있다. 즉 4대로 된 몸은 주림과 질병이 근심거리인데, 알맞게 영양을 공급하여 탐착을 내지 않는 것이 '지혜의 양식'이고, 제멋대로 허망한 분별심을 내어, 입에 맞는 것만 구하면서 싫어하여 버릴 줄을 모르는 것을 '분별의 양식'이라 한다.
성문(聲聞)이란 소리를 듣고 깨닫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들은 자기 마음 자리를 깨닫지 못하고 설법을 듣고 거기에 알음알이를 일으킨다. 혹은 신통(神通)이나 상서로운 모양.언어.동작. 등에 의지하여 보리.열반이 있다는 설법을 듣고 3아승기겁을 수행하여 불도를 이루려 한다. 이것은 모두 성문의 도(道)에 속하는 것이며, 그것을 성문불(聲聞佛)이라 한다. 다만 당장에 자기의 마음이 본래 부처임을 단박 깨달으면 될 뿐이다.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으며, 행도 닦을 것이 없으면, 이것이 가장 으뜸가는 도이며 참으로 여여한 부처이니라. 도를 배우는 사람이 한 생각 생기는 것만을 두려워하여곧 도와는 멀어지는 것이니, 생각마다 모양이 없고 생각마다 하염없음이 곧 부처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 부처가 되려고 한다면, 불법을 모조리 배울 것이 아니라 오직 구함이 없고 집착이 없음을 배워야 한다. 구함이 없으면 마음이 나지 않고, 집착이 없으면 마음이 없어지지 않나니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것이 곧 부처이니라.
學道人 莫疑 四大 爲身 四大無我 我亦無主 故知此身 無我亦無主 五陰 爲心 五陰 無我亦無主 故知此心 無我亦無主 六根六塵六識 和合生滅 亦復如是 十八界旣空 一切皆空 唯有本心 蕩然淸淨 有識食有智食 四大之身 飢瘡 爲患 隨順給養 不生貪着 謂之智食 恣情取味 妄生分別 唯求適口 不生厭離 謂之識食 聲聞者 因聲得悟故 謂之聲聞 但不了自心 於聲敎上 起解 或因神通 或因瑞相言語運動 聞有菩提涅槃 三僧祈劫修成佛道 皆屬聲聞道 謂之聲聞佛 唯直下 頓了自心 本來是佛 無一法可得 無一行可修 此是無上道 此是眞如佛 學道人 祈 一念有 卽與道 隔矣 念念無相 念念無爲 卽是佛 學道人 若欲得成佛 一切佛法 摠不用學 唯學無求無着 無求 卽心不生 無着 卽心不滅 不生不滅 卽是佛
5. 허공이 곧 법신
팔만 사천 법문은 팔만사천 번뇌를 치료하는 것으로서, 다만 대중을 교화 인도하는 방편일 뿐 일체 법이란 본래 없다. 그러므로 여의는 것이 곧 법이요, 여의줄 아는 이가 곧 부처이다. 일체 법을 여의기만 하면 얻을 만한 법이 없으니, 도를 배우는 사람이 깨닫는 비결을 터득하고자 한다면, 마음에 어느 것이라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부처님의 참된 법신은 마치 허공과 같다'고 한 비유가 바로 이것이다. 법신이 곧 허공이며 허공이 곧 법신인데도 '법신이 허공계에 두루하고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허공 가운데에 법신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법신 그대로가 허공이며 허공 그대로가 법신임을 모른다. 만약 결정코 허공이 있다고 한다면 법신은 허공이 아니다. 그렇다고 결정코 법신이 있다고 한다면 법신이 허공이 아니다. 다만 허공의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 허공이 곧 법신이니라. 법신의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 법신이 곧 허공이니라. 허공과 법신은 전혀 다른 모양이 없으며, 번뇌와 보리도 다른 모양이 없는 것이니, 일체의 모양을 여윔이 곧 부처이니라.
범부는 경계를 취하고 도를 닦는 사람은 마음을 취하나니,마음과 경계를 함께 잊어야만 참된 법이다. 경계를 잊기는 오히려 쉬우나 마음을 잊기는 매우 어렵다. 사람들이 마음을 감히 잊어버리지 못하는 까닭은 공(空)에 떨어져 부여 잡을 바가 없을까 두려워해서인데, 이는 공이 본래 공이랄 것도 없고, 오로지 한결 같은 참된 법계[一眞法界]임을 몰라서 그런 갈 견해이니, 밖으로 경계를 좇으면서 그것을 마음이라고 잘못 알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이것은 도둑을 제자식으로 잘못 아는 격이다.
탐욕.성냄.어리석음이 있기 때문에 계.정.혜를 세워 말씀하신 것인데, 애초부터 번뇌가 없다면 깨달음인들 어디 있겠느냐? 그러므로 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부처님께서 일체법을 말씀하신 것은 일체의 마음을 없애기 위함이로다. 나에게 일체의 마음이 없거니 일체 법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셨다. 본래 근원이 청정한 부처에다가는 다시 어떤 것도 덧붙이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마치 허공이 수많은 보배구슬로 장엄할지라도 마침내 머무를 수 없는 것과 같다. 불성(佛性)도 허공과 같아서 비록 무량한 공덕과 지혜로써 장엄한다 하더라도 마침내 머무를 수 없는 것이다. 다만 본래 성품이 미혹되어 더더욱 보지 못할 뿐이다.
이른바 심지법문(心地法門)이란 만법이 이 마음을 의지하여 건립되었으므로, 경계를 만나면 마음이 있고 경계가 없으면 마음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깨끗한 성품 위에다가 경계에 대한 알음알이를 굳이 짓지 말라. 또 '정혜(定慧)의 비추는 작용이 역력히 밝고 고요하면서도 또렷하다[寂寂惺惺]'든가, '보고 듣고 느끼고 안다[見聞覺知]'는 것은 모든 경계 위에서 알음알이를 짓는 것이니, 이 말은 임시로 중하근기의 사람들을 위하여 설법하는 경우라면 몰라도, 몸소 깨닫고자 하는 사람은 이와 같은 견해를 지어서는 절대로 안된다. 이것은 모두 경계의 법이므로 유견(有見)이라는 함정에 빠진 것이다. 일체 법에 대해서 있다거나 없다는 견해를 짓지만 않으면, 곧 법을 보는 것이다.
八萬四千法門 對八萬四千煩惱 祈是敎化接引門 本無一切法 離卽是法 知離者是佛 但離一切煩惱 是無法可得 學道人 若欲得知要訣 但莫於心上 着一物 言佛眞法身 猶若虛空 此是喩 法身 卽虛空 虛空 卽法身 常人 謂法身 虛空處 虛空中 含容法身 不知法身 卽虛空 虛空 卽法身也 若定言有虛空 虛空 不是法身 若定言有法身 法身 不是虛空 但莫作虛空解 虛空 卽法身 莫作法身解 法身 卽虛空 虛空與法身 無異相 佛與衆生 無異相 生死與涅槃 無異相 煩惱與菩提 無異相 離一切相 卽是佛 凡夫 取境 道人 取心 心境雙忘 乃是眞法 忘境 猶易 忘心 至難 人不敢忘心 恐落空無撈摸處 不知空本無空 唯一眞法界耳
此靈覺性 無是已來 與虛空同壽 未曾生未曾滅 未曾有未曾無 未曾穢未曾淨 未曾喧未曾寂 未曾少未曾老 無方所無內外 無數量無形相 無色象無音聲 不可覓不可求 不可以智慧識 不可以言語取 不可以境物會 不可以功用到 諸佛菩薩 與一切蠢動含靈 同此大涅槃性 性卽是心 心卽是佛 佛卽是法 一念離眞 皆爲妄想 不可以心 更求於心 不可以佛 更求於佛 不可以法 更求於法 故 學道人 直下無心 默契而已 擬心卽此 以心傳心 此爲正見 愼勿向外逐境 認境爲心 是 認賊爲子 爲有貪瞋癡 卽立戒定慧 本無煩惱 焉有菩提 故 祖師云 <佛說一切法 爲除一切心 我無一切心 何用一切法> 本源淸淨佛上 更不着一物 譬如虛空 雖以無量珍寶莊嚴 終不能住 佛性 同虛空 雖以無量功德智慧 莊嚴 終不能住 但迷本性 轉不見耳 所謂心地法門 萬法 皆依此心建立 遇境卽有 無境卽無 不可於淨性上 轉作境解 所言定慧 鑑用 歷歷 寂寂惺惺 見聞覺知 皆是境上作解 暫爲中下根人說 卽得 若欲親證 皆不可作如此見解 盡是境法 有沒處 沒於有地 但於一切法 不作有無見 卽見法也
6. 마음을 잊어버림
9월 1일 대사께서는 배휴에게 말씀하셨다.
"달마스님께서는 중국에 오신 이후로 오로지 한 마음만을 말씀하셨고 한 법만을 전하셨다. 또한 부처로써 부처에게 전하실 뿐 다른 부처는 말씀하지 않으셨고, 법으로써 법을 전하시고 다른 법을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법이란 설명될 수 없는 법이며, 부처란 취할 수 없는 부처로서 본래 근원이 청정한 마음이다. 오직 이 일승(一乘)만이 사실이고, 나머지 이승(二乘)은 참됨이 아니다.
반야는 지혜라는 뜻으로서, 모양이 없는 본래 마음이다. 범부는 도(道)에 나아가지 않고 단지 육정(六情)만을 함부로 하여 육도(六道)에 빠져 방황한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 한 생각 모든 견해를 일으키면 곧바로 외도에 떨어진다. 또한 남(生)이 있음을 보고 없어짐으로 나아가면 성문도(聲聞道)에 떨어지고, 남(生)이 있음을 보지 않고 오로지 없어짐만을 보면 연각도(緣覺道)에 떨어진다. 법은 본시 남(生)이 없으므로 이제 또한 없어짐도 없으니, 이 두 견해를 일으키지 않아서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으며 일체의 모든 법이 오직 한 마음이어야만 그런 다음에 불승(佛乘)이 된다. 범부는 모두가 경계를 좇아 마음을 내서 좋고 싫음이 있다. 만일 경계가 없기를 바란다면 그 마음을 잊어야 하고, 마음을 잊으면 경계가 텅 비며, 경계가 공적하면 곧 마음이 없어지느니라. 만약 마음을 잊지 못하고 경계만을 없애려 한다면, 경계는 없어지지 않으면서 오히려 복잡히 시끄러움만 더할 뿐이다. 그러므로 만법은 오직 마음일 뿐이며, 그 마음 조차도 얻을 수 없는데 다시 무엇을 구하겠느냐? 반야를 배우는 사람이 얻을 만한 어떤 법도 없는 줄 알게 되면, 삼승(三乘)에는 뜻이 끊어져 오직 하나의 진실뿐이다. 증득하여 깨달았다고 할 것이 없는 자리인데도 '나는 깨달았노라'고 한다면, 모두가 증상만(增上慢)을 내는 사람이다. <법화경>회상에서 옷을 떨치고 나가버린 사람들이 모두가 이러한 무리들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있어서 실로 얻었다 할 것이 없다'고 하셨으니, 그저 묵묵히 계합할 따름이다.
범부 중생들은 다만 죽는 순간에 오온(五蘊)이 모조리 비고 사대(四大)는 '나(我)'가 없음을 본다. 그러나 참된 마음은 모양이 없어서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는다. 태어 났다고 해서 성품이 오는 것이 아니고 죽었다고 해서 성품이 가는 것이 아니다. 담연히 둥글고 고요하여 마음과 경계가 한결같다. 이렇게 될 수만 있다면 그 자리에서 단박 깨쳐 삼세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니, 곧 세간을 뛰어넘은 사람이다. 털끝만큼이라도 나아가는 향방이 있어서는 절대로 안된다. 만일 모든 부처님께서 맞이해 주시는 것 같은 가지가지 신기한 모습을 보게 될지라도 역시 마음에 두려움이 없어야 한다. 다만 스스로 마음을 잊고서 법계와 같아지면, 바로 자재(自在)를 얻은 것이니, 이것이 곧 요긴한 대목이다."
九月一日 師謂休曰 「自達磨大師到中國 唯說一心 唯傳一法 以佛傳佛 不說餘佛 以法傳法 不說餘法 法卽不可說之法 佛卽不可取之佛 乃是本源淸淨心也 唯此一事實 餘二則非眞 般若 爲慧 此慧 卽無相本心也 凡夫 不趣道 有恣六情 乃行六道 學道人 一念計生死 卽落魔道 一念起諸見 卽落外道 見有生趣其滅 卽落聲聞道 不見有生 唯見有滅 卽落緣覺道 法本不生 今亦無滅 不起二見 不厭不 一切諸法 唯是一心 然後 乃爲佛乘也 凡夫 皆逐境生心 心遂 厭 若欲無境 當忘其心 心忘 卽境空 境空 卽心滅 若不忘心而但除境 境不可除 祈益紛擾 故 萬法 唯心 心亦不可得 復何求哉 學般若人 不見有一法可得 絶意三乘 唯一眞實 不可證得 謂我能證能得 皆增上慢人 法華會上 拂衣而去者 皆斯徒也 故 佛言 <我於菩提 實無所得> 默契而已 凡人 臨欲終時 但觀五蘊皆空 四大無我 眞心無相 不去不來 生時 性亦不來 死時 性亦不去 湛然圓寂 心境一如 但能如是 直下頓了 不爲三世所拘繫 便是出世人也 切不得有分毫趣向 若見善相 諸佛來迎 及種種現前 亦無心隨去 若見惡相種種現前 亦無心怖畏 但自忘心 同於法界 便得自在 此卽是要節也」
7. 법(法)은 무생(無生)
10월 8일 대사께서 배휴에게 말씀하셨다.
"화성(化城)이란 이승(二乘) 및 10지.등각.묘각을 말한 것이다. 이것은 모든 중생을 이끌어 주기 위한 방편으로 세운 가르침이므로, 글자 그대로 모두 변화하여 보인 성곽이다. 또한 보배가 있는 곳이란 다름 아닌 참된 마음으로서의 본래 부처이며, 자기 성품의 보배를 말한다. 이 보배는 사량분별에 속하지도 않으니, 그 자리에는 아무 것도 세울 수 없다.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으며, 주관도 객관도 없는데 어는 곳에 성(城)이 있겠느냐? 만약 '이곳을 이미 화성이라 한다면 어느 곳이 보배 잇는 곳인가?' 하고 묻는다면, 보배 있는 곳이란 가리킬 수 없는 것인데, 가리킨다면 곧 방위와 처소가 있게 되므로, 참으로 보배가 있는 곳이 될 수 없다. 그래서 경에서도 말씀하시기를 '가까이 있다' 고만 했을 뿐이다. 그것을 얼마라고 한정 할 수 없는 것이니, 오로지 그 자체에 계합하여 알면 되는 것이다.
천제(闡提)란 믿음이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6도의 모든 중생들과 이승(二乘)들은 부처님의 과<佛果>가 있음을 믿지 않으니, 그들을 모두 선근(善根)이 끊긴 천제라 한다. 보살이란 불법이 있음을 굳게 믿고 대승.소승을 차별하지 않으며, 부처와 중생을 같은 법성(法性)으로 본다. 이들을 가리켜 선근이 있는 천제라고 한다.
대개 부처님의 설법<聲敎>을 듣고 깨닫는 사람을 성문(聲聞)이라 하고, 인연을 관찰하여 깨닫는 사람을 연각(緣覺)이라 한다. 그러나 자기 마음속에서 깨닫지 못한다면, 비록 부처가 된다 하더라도 역시 성문불이라 한다.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교법(敎法)에 있어서는 깨닫는 것이 많으나, 마음 법<心法>에 있어서는 깨닫지 못하는데, 이렇게 하면 비록 겁을 지나도록 수행을 한다해도 마침내 본래의 부처는 아니다. 만약 마음에서 깨닫지 못하고서 교법에서 깨닫는다면, 마음은 가벼이 여기고 가르침만 중히 여겨 흙덩이나 쫓는 개 꼴이 되고 말 것이다. 이것은 본 마음을 잊었기 때문이다. 본래 마음에 계합하면 될 뿐, 법을 구할 필요가 없으니, 마음이 곧 법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계가 마음을 가로막고 현상<事>이 본체<理>를 흐리게 하여, 의례껏 경계로부터 도망쳐 마음을 편히 하려 하고, 현상을 물리쳐서 본체를 보존하려 한다. 그러나 이들은 오히려 마음이 경계를 가로막고, 본체가 현상을 흐리게 한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다. 마음을 비우기만 하면 경계는 저절로 비고, 본체를 고요하게만 하면 현상은 저절로 고요해지므로 거꾸로 마음을 쓰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이 보통 마음을 비우려 들지 않는 까닭은 공(空)에 떨어질까 두려워해서인데, 자기 마음이 본래부터 비었음을 모르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의 경우는 경계는 없애려고 하면서 마음은 없애지 않는다. 그러나 지혜로운 이는 마음을 없애지 경계를 없애지 않고, 나아가 보살은 마음이 허공과 같아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자기가 지은 복덕마저도 탐착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버림에는 세 등급이 있다. 즉 안팎의 몸과 마음을 다 버림이 허공과 같으며, 어디에고 집착하지 않은 다음에 곳에 따라 중생에게 응하되, 제도하는 주체도 제도될 대상도 모두 잊는 것이 '크게 버림<大捨>'이다. 만약 한편으로 도를 행하고 덕을 펴면서 한편으로는 그것을 이바지하여 놓아 버리고 바라는 마음이 전혀 없으면 '중간의 버림<中捨>'이다. 또한 착한 일을 널리 행하면서도 바라는 바가 있다가 법을 듣고서 빈<空> 줄을 알고 집착하지 않으면, 이것은 '작은 버림<小捨>'이다.
큰 버림은 마치 촛불이 바로 정면에 있는 것과 같아서 더 미혹될 것도 깨달을 것도 없으며, 중간 버림은 촛불이 옆에 있는 것 같아서 밝기도 하고 어둡기도 하며, 작은 버림은 마치 촛불이 등 뒤에 있는 것 같아서 눈앞의 구덩이나 함정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보살의 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일체를 다 버린다. 과거의 마음을 버릴 수 없음이 미래를 버린 것이니, 이른바 3세를 함께 버렸다고 하는 것이다.
여래께서 가섭에게 법을 부촉하실 때로부터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하였으니, 마음과 마음이 서로 다르지 않다. 허공에다 도장을 찍으면 아무 문체가 찍히지 않고, 그렇다고 물건에다가 도장을 찍으면 법을 이루지 못한다. 그러므로 마음으로써 마음에 새기는 것이니, 마음과 마음이 다르지 않다. 새김<能>과 새겨짐<所>이 함께 계합하기란 매우 어려운 것이어서, 그것을 얻은 사람은 매우 적다. 그러나 마음은 마음없음<無心>을 말하는 것이고, 얻음도 얻었다 할 것이 없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세 몸<三身>이 있는데, 법신은 자성의 허통(虛通)한 법을, 보신(報身)은 일체 청정한 법을, 화신(化身)은 6도만행법을 말한다. 번신의 설법은 언어.형상.문자로써 구할 수 없으며, 설할 바도 없고 증득할 바도 없이 자성이 허통(虛通) 할 뿐이다.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한 법도 설할 만한 법이 없음을 설법이라 이름한다'고 하셨다. 보신이나 화신은 근기에 따라 감응하여 나타나고, 설하는 법 또한 현상에 따르고 근기에 알맞게 섭수하여 교화하는 것이므로, 이 모두는 참다운 법이 아니다. 그래서 '보신.화신은 참된 부처가 아니며, 법을 설하는 자가 아니다'고 하신 것이다.
이른바 밝고 정밀한 성품인 일정명(一精明)이 나뉘어 6화합(六和合)이 된다고 하였다. 일정명이란 바로 한 마음<一心>이요, 6화합이란 6근(根)이다. 이 6근은 각기 6진(塵)과 합하는데, 눈은 색과, 귀는 소리와, 코는 냄새와, 혀는 맛과, 몸은 촉감과, 뜻은 법과 제각기 합한다. 그런 가운데 6식(識)을 내어 18계(十八界)가 된다. 만약 이 18계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음을 알면, 6화합이 하나로 묶이어 일정명이 된다. 일정명이란 곧 마음이다. 그런데 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이것을 모두 알면서도, 일정명과 6화합에 대해 알음알이 만을 지어서 드디어는 교설에 묶이어 본래 마음에 계합치 못한다. 여래께서는 세간에 나타나시어 일승(一乘)의 참된 법을 말씀하시려 하나, 중생들은 부처님을 믿지 않고 비방하여 고통의 바다에 빠지게 될 것이며, 그렇다고 부처님께서 전혀 말씀하시지 않는다면 설법에 인색한 간탐(간貪)에 떨어져 중생을 위하는 것이 못된다고 하시사, 현묘한 도를 널리 베푸시고 방편을 세워 삼승(三乘)이 있음을 말씀하셨다. 그래서 대승과 소승의 방편이 생겼고, 깨달음에도 깊고 얕음의 차이가 있게 되었으나, 이것은 모두 근본 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오직 일승의 도가 있을 뿐, 나머지 둘은 참된 것이 아니다'고 하셨다. 그러나 마침내는 한 마음의 법<一心法>을 나타내시지 못했기 때문에 가섭을 불러 법좌를 함께 하시사, 따로이 그 '한 마음'을 부촉하셨으니, 이는 언설을 떠난 법이다. 이 한 가닥의 법령은 따로이 행해지는데, 만약 계합하여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은 그 즉시 부처님 지위에 이른다."
十月八日 師謂休曰 言化城者 二乘及十地等覺妙覺 皆是權立接引之敎 爲化城 言寶所者 及眞心本佛 自性之寶 此寶 不屬情量 不可建立 無佛無衆生 無能無所 何處有城 若問此旣是化城 何處 爲寶所 寶所 不可指 指卽有方所 非眞寶所也 故 云 <在近而已> 不可定量言之 但當體 會契之 卽是 言闡提者 信不具也 一切六道衆生 乃至二乘 不信有佛果 皆謂之斷善根闡提 菩薩者 深信有佛法 不見有大乘小乘 佛與衆生 同一法性 乃謂之善根闡提 大抵因聲敎而悟者 謂之聲聞 觀因緣而悟者 謂之緣覺 若不向自心中悟 雖至成佛 亦謂之聲聞佛 學道人 多於敎法上 悟 不於心法上 悟 雖歷劫修行 終不是本佛 若不於心 悟 乃至於敎法上 悟 卽輕心重敎 遂成逐塊 忘於本心故 但契本心 不用求法 心卽法也 凡人 多爲境 心事 理 常欲逃境以安心 屛事以存理 不知乃是心 境理 事 但令心空 境自空 但令理寂 事自寂 勿到用心也 凡人 多不肯空心 恐落於空 不知自心本空 愚人 除事不除心 智者 除心不除事 菩薩 心如虛空 一切俱捨 所作福德 皆不貪着 然 捨有三等 內外身心 一切俱捨 猶如虛空 無所取着然後 隨方應物 能所皆忘 是爲大捨 若一切行道布德 一邊旋捨 無希望心 是爲中捨 若廣修衆善 有所希望 聞法知空 遂乃不着 是爲小捨 大捨 如火燭在前 更無迷悟 中捨 如火燭在傍 或明或暗 小捨 如火燭在後 不見坑穽 故 菩薩 心如虛空 一切俱捨 過去心不可得 是過去捨 現在心不可得 是現在捨 未來心不可得 是未來捨 所謂三世俱捨 自如來付法迦葉已來 以心印心 心心不異 印着空 卽印不成文 印着物 卽印不成法故 以心印心 心心不異 能印所印 俱難契會故 得者少 然 心卽無心 得卽無得佛有三身 法身 說自性虛通法 報身 說一切淸淨法 化身 說六度萬行法 法身說法 不可以言語音聲 形相文字而求 無所說無所證 自性虛通而已 故 曰 <無法可說 是名說法> 報身化身 皆隨機感現 所說法 亦隨事應根 以爲攝化 皆非眞法 故 曰 <報身 非眞佛 亦非說法者>所言同是一精明 分爲六和合 一精明者 一心也 六和合者 六根也 此六根 各與塵合 眼與色合 耳與聲合 鼻與香合 舌與味合 身與觸合 意與法合 中間 生六識 爲十八界 若了十八界無所有 束六和合 爲一精明 一精明者 卽心也 學道人 皆知此 但不能免作一精明六和合解 遂被法 不契本心 如來現世 欲說一乘眞法則衆生 不信興謗 沒於苦海 若都不說則墮小 得有淺深 皆非本法 故 云 <唯有一乘道 餘二則非眞> 然 終未能顯一心法故 召迦葉同法座 別付一心 離言說法 此一枝法 別行 若能契悟者 更至佛地矣
8. 도(道)를 닦는다는 것
배휴가 물었다.
"도란 무엇이며 어떻게 수행해야 합니까?"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도가 무슨 물건이길래 수행하려 하느냐?"
"그렇다면 제방의 종사가 서로 이어받아 참선하여 도를 배우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둔근기(鈍根機)를 이끌어 주는 말이니 의지할 것이 못되느니라."
"그것이 둔근기를 위한 말이라고 하신다면, 상근기(上根機)를 위해서는 무슨 법을 설하시는지요?"
"상근기라면 어디 남에게서 찾으려 하겠느냐? 저 자신마져도 얻지 못하거늘, 더구나 따로 뜻에 합당한 법이 어디 있겠느냐? '법이란 법이 모슨 모양이더냐?'고 한 경(經)의 말씀을 보지 못했느냐?"
"그렇다면 도무지 구하여 찾을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까?"
"그렇게만 된다면 마음의 힘이 덜리는 것이니라."
"그렇다면 온통 끊어져 버려서 '없다는 것'도 가당치 않겠습니다."
"누가 그것을 없다 하였으며, 또 그것이 대관절 무엇이길래 너는 찾으려 하느냐?"
"스님께서는 이미 찾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서는, 어찌하여 그것을 끊지도 말라 하십니까?"
"찾지 않으면 그 자리는 바로 '쉼'인데, 누가 너더러 끊으라 하였느냐? 눈앞의 허공을 보아라. 어떻게 저것을 끊겠느냐? 여기에 알음알이를 내는구나."
"사람들로 더불어 알음알이를 내지 않음이 마땅한 것입니까?"
"내 너를 방해한 적은 한번도 없거니와, 요컨대 알음알이란 뜻[情]에 속한 것으로서 뜻이 생기면 지혜가 막히게 되느니라."
"여기에 있어서 뜻을 내지 않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
"뜻을 내지 않는다면 누가 옳다고 말하겠느냐?"
問 如何是道 如何修行
師云 道是何物 汝欲修行
問 諸方宗師相承 參禪學道 如何
師云 引接鈍根人語 未可依憑
云 此皆是引接鈍根人語 未審 接上根人 復說何法
師云 若是上根人 何處 更就人覓 他自己 尙不可得 何 更別有法當情 不見 敎中 云 <法法何狀>
云 若如此則 道不要求覓也
師云 若與
云 如是則 渾成斷絶 不可是無也
師云 阿誰敎他無 他是阿誰 擬覓也
云 旣不許覓 何故 又言莫斷他
師云 若不覓 便休 卽誰敎 斷 見目前虛空 作
云 此法 可得便同虛空否
師云 虛空 早晩 向 道有同有異 我暫如此說 便向者裸生解
云 應是不與人生解耶
師云 我不曾障 要且解屬於情 情生則智隔
云 向者裸 莫生情 是否
師云 若不生情 阿誰道是
9. 말에 떨어지다
"스님께서는 제가 한 말씀이라도 드리기만 하면, 어찌해서 바로 말에 떨어진다[話墮]고 하십니까?"
"네 스스로 말을 알아듣지 못한 사람이거늘 무슨 잘못에 떨어짐이 있겠느냐?"
問 裳向和尙處發言 爲什
師云 汝自是不解語人 有什
10. 사문이란 무심을 얻은 사람
"그렇다면 이제까지의 허다한 연설들이 모두 방편으로 대꾸한 것들이어서, 사람들에게 가리켜 보이신 실다운 법이란 아주 없었다는 말씀입니까?"
"실다운 법이란 전도됨이 없거늘, 네 지금 묻는 곳에서 스스로 전도되고 있느니라. 그러면서 무슨 실다운 법을 찾는다는 말이냐?"
"묻는 곳에서 이미 스스로 전도된 것이라면, 스님께서 대답하신 곳은 어떠하십니까?"
"사물을 통해서 자신을 비춰볼지언정 남의 일에는 상관할 것이 없다."
그리고는 다시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개와도 같아서 움직이는 물건을 보기만 하면 문득 짖어대니, 바람에 흔들리는 초목과 눠 별다를 게 있겠느냐."
이어서 말씀하셨다.
"우리의 이 선종은 위로부터 이제껏 이어 내려 오면서 알음알이[知解]를 구하게 한 적이 없었다. 오로지 도를 닦으라고만 했을 뿐인데, 사실 이것도 교화하는 방편설이니라. 그러니 도 또한 배울 수 없는 것으로서, 뜻을 두고 알음알이를 배우게 되면 도에는 도리어 어둡게 된다. 도에는 일정한 방위와 처소가 없는 것을 이름하여 대승의 마음[大乘心]이라고 하느니라. 이 마음은 안팍.중간 어디에도 있지 않으며, 실로 방위와 처소가 없는 것이니, 첫째로 알음알이를 짓지 말아야 한다. 지금까지 너에게 말한 것은 뜻으로 헤아림이 다해 버린 바로 그 자리가 도라는 것을 말했을 뿐이다. 뜻으로 헤아림이 다하면 마음에는 방위도 처소도 없느니라.
이 도라는 것은 천진하여 본래 이름이 없다. 다만 사람들이 이것을 알지 못하고 뜻으로 헤아리는데 미혹되었으므로, 모든 부처님께서 나오시어 이 일을 자상히 말씀하신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 모든 사람들이 깨닫지 못할까 걱정하셔서 방편으로 '도'라는 이름을 세우셨으니, 이름에 얽매여서 알음알이를 내서는 안되느니라. 그러므로 말하기를 '고기를 잡았으면 통발을 잊어버려라!'고 하는 것이다. 몸과 마음이 자연히 도에 통하고 마음을 알아 본래의 근원에 통달한 이를 사문(沙門)이라 부른다. 사문이라는 자리는 생각을 쉬어서 이루어 지는 것이지,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니라. 그런데도 너희들은 남의 집에 세살이 하듯,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구하면서 배워서 얻으려하니, 될 까닭이 있겠느냐?
옛 사람들은 영민하여 한 말씀 들으면 당장에 배움을 끊었다. 그래서 그들을 '배울 것이 끊어진 할일 없는 한가한 도인'이라고 했다. 반면 지금 사람들은 하찮은 알음알이를 구하고, 널리 글의 뜻의 캐면서 그것을 수행이라고 하지만, 넓은 지식과 견해 때문에 도리어 장애가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니라. 이는 매 것이므로 각각 말씀이 다르다. 다만 요달하여 알기만 하면 미혹되지 않느니라. 무엇보다도 주의할 것은 한 근기를 대상으로 말씀에 있어서 글자에 얽매여 알음알이를 내지 말아야 한다. 무엇 때문에 그러한가? 실로 여래께서 말씀하실 만한 정해진 법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선종은 이런 일을 따지지 않는 것이니, 다만 마음을 그칠 줄 알면 곧 쉬는 것이요, 다시 앞뒤를 생각할 필요가 없느니라."
問 向來如許多言說 皆是抵敵語 都未曾有實法指示於人
師云 實法 無顚倒 汝今問處 自生顚倒 覓什
云 旣是問處 自生顚倒 和尙答處如何
師云 且將物照面着 莫管他人
又云 祈如箇癡狗相似 見物動處 便吠 風吹草木 也不別
又云 我此禪宗 從上相承已來 不□敎人求知求解 只云學道 早是接引之詞 然 道亦不可學 情存學解 却成迷道 道無方所 名大乘心 此心 不在內外中間 實無方所 第一不得作知解 只是說汝 如今情量盡處爲道 情量 若盡 心無方所 此道 天眞 本無名字 只爲世人 不識 迷在情中 所以 諸佛 出來 說破此事 恐汝諸人不了 權立道名 不可守名而生解故 云 <得魚忘筌> 身心 自然達道 識心達本源故 號爲沙門 汝門果者 息慮而成 不從學得 汝如今將心求心 傍他家舍 祈擬學取 有甚
作絶學無爲閑道人 今時人 只欲得多知多解 廣求文義 喚作修行 不知多知多解 蒜成壅塞 唯知多與兒 乳喫 消與不消 都摠不知 三乘學道人 皆是此樣 盡名食不消者 所謂知解不消 皆爲毒藥 盡向生滅中取 眞如之中 都無此事 故 云 <我王庫內 無如是刀> 從前所有一切解處 盡須倂却令空 更無分別 卽是空如來藏 如來藏者 更無纖塵可有 卽是破有法王 出現世間 亦云 <我於燃燈佛所 無少法可得> 此語 只爲空情量 知解但鎖鎔 表裏情盡 都無依執 是無事人 三乘敎網 祈是應機之藥 隨宜所說 臨時施設 各各不同 但能了知 卽不被惑 第一不得於一機一敎邊 守文作解 何以如此 實無有定法如來可說 我此宗門 不論此事 但知息心卽休 更不用思前慮後
11. 마음이 곧 부처
배휴가 물었다.
"예로부터 마음이 부처라고들 하는데, 어느 마음이 부처인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대사께서 대답하셨다.
"너는 몇 개의 마음을 가졌느냐?"
"그렇다면 범부에 즉(卽)한 마음이 부처입니까, 아니면 성인(聖人)에 즉(卽) 마음이 부처입니까?"
"어느 곳에 범.성의 마음이 있느냐?"
"지금 3승 가운데서 범.성을 말씀하셨는데, 스님께서는 어찌해서 그것이 없다고 하십니까?"
"3승을 말하는 가운데 분명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범.성의 마음이 허망하다'고 하셨느니라. 그런데도 너희는 지금 알지 못하고 아직 '있다'고 집착하여 공허한 것을 무언가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으니, 어찌 허망되지 않겠느냐? 허망하기 때문에 마음이 미혹되는 것이니, 네 만약 범부의 뜻과 성인의 경계를 없애기만 한다면, 마음 밖에 다른 부처가 없느니라. 달마스님께서 서쪽에서 오시어 모든 사람이 다 부처임을 가르쳐 주셨다. 그런데도 너희는 아직도 그것을 모르고 범.성을 집착하고 마음을 밖으로 내달리며 도리어 스스로 마음을 미혹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음 그대로가 곧 부처'라고 하였으니, 한 생각 뜻이 생기면 그 즉시 6도의 다른 곳에 떨어지게 된다. 옛날로부터 오늘날과 한결같이 다르지 않아 어떠한 다른 법이 없었으니, 그러므로 그것을 일컬어 정등각(正等覺)을 성취했다고 하느니라."
"스님께서 말씀하신 '곧 그대로<卽>'라 함은 무슨 도리입니까?"
"너는 무슨 도리를 찾는 것이냐? 어떤 도리라도 있기만 하면 바로 곧 본래의 마음과는 달라지느니라."
"앞서 말씀하신 '시작 없는 때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다르지않다'고 하신 이치는 무엇입니까?"
"찾기 때문에 네 스스로 그것과 달라지는 것이니라. 네 만약 찾지 않는다면 어디에 다를 것이 있겠느냐?"
"이미 다르지 않다면, 굳이 '곧 그대로'라고 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네 만약 범.성을 구별하지 않는다면, 누가 너에게 굳이 '곧 그대로'라는 말을 하겠느냐? '곧 그대로'가 '곧 그대로'가 아니라면, 마음 또한 마음이 아닌 것이니, 이런 가운데 마음과 '곧 그대로'라는 것을 다 잊으면, 네가 더 이상 무엇을 찾겠느냐?"
問 從上來 皆云 <卽心是佛> 未審 卽那箇心 是佛
師云 有幾箇心
云 爲復卽凡心 是佛 卽聖心 是佛
師云 何處 有凡聖心耶
云 卽今三乘中 說有凡聖 和尙 何得言無
師云 三乘中 分明向 道 <凡聖心 是妄> 今不解 返執爲有 將空作實 豈不是妄 妄故 迷心 汝但除却凡情聖境 心外 更無別佛 祖師西來 直指一切人全體是佛 汝今不識 執凡執聖 向外馳騁 還自迷心 所以 向汝道 <卽心是佛> 一念情生 卽墮異趣 無始已來 不異今日 無有異法 故 名成等正覺
云 和尙所言卽者 是何道理
師云 覓什
云 前言無始已來 不異今日 此理如何
師云 祈爲覓故 汝自異他 汝若不覓 何處有異
云 旣是不異 何更用說卽
師云 汝若不認凡聖 阿誰向汝道卽 卽若不卽 心亦不心 可中 心卽 俱忘 阿 更擬向何處覓去
12.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한다[以心傳心]
"망념이 자신의 마음을 가로막는다는데 무엇으로써 망념을 없애야 합니까?"
"망념을 일으키고 그것을 없애는 것 또한 망념이 되느니라.
망념은 본래 뿌리가 없지만, 다만 분별 때문에 생긴다. 네 다만 범.성의 두곳에 알음알이를 내지 않는다면, 자연 망념은 없어지는 것이니, 다시 그것을 어떻게 떨쳐버리겠느냐? 털끝만큼도 의지하여 집착함이 없으면, 이른바 '내가 두 팔을 다 버렸으니 반드시 부처를 이루리라'고 한 것이 되느니라."
"이미 의지하여 집착함이 없다면 어떻게 역대 조사들께서는 서로 이어 받았습니까?"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하느니라."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한다면 어찌 마음 또한 없다고 하십니까?"
"한 법도 얻을 수 없는 것을 마음에 전한다고 하는 것이니, 만약 이 마음을 깨치면 곧 마음도 없고 법도 없느니라."
"마음도 법도 없다면 어찌하여 전한다고 하십니까?"
"너는 마음에 전한다는 말을 듣고는 얻을 만한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는구나. 그래서 조사께서는, '마음의 성품[心性]을 깨달았을 때에야 불가사의하리라. 요연히 사무쳐 얻을 바가 없나니, 얻었을 때라도 알았다 하지 못하노라'고 하셨느니라. 만약 이것을 너더러 알도록 한다 하여도 어떻게 감당하겠느냐?"
問 妄能障自心 未審 而今 以何遺妄
師云 起妄遺妄 亦成妄 妄本無根 祈因分別而有 但於凡聖兩處 情盡 自然無妄 更擬若爲遺他 都不得有纖毫依執 名爲我捨兩臂必當得佛
云 旣無依執 當何相承
師云 以心傳心
云 若心相傳 云何言心亦無
師云 不得一法 名爲傳心 若了此心 卽是無心無法
云 若無心無法 云何名傳
師云 汝聞道傳心 將謂有可得也 所以 祖師云 <認得心性時 可說不思議 了了無所得 得時 不說知> 此事 若敎汝會 何堪也
13. 마음과 경계
"눈 앞의 허공을 경계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경계를 가리켜 마음을 보는 것이 어찌 없다고 하겠습니까?"
"어떤 마음을 너더러 경계 위에서 보게 하느냐? 설혹 볼 수 있다 하더라도 경계를 비추는 마음일 뿐이니라. 사람이 거울로 얼굴을 비출 때처럼 눈썹과 눈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본래 그림자일 뿐 너의 일과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거울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볼 수 있겠습니까?"
"'의지함'에 빠진다면 항상 의지할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야 언제 깨달을 수 있겠느냐? 너는 '손을 털고 그대에게 내보일 아무 것도 없구나. 수천 가지로 말한들 모두 헛수고로다.' 하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느냐?"
"마음을 분명히 알았다면 비출 만한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까?"
"아무 것도 없다면 어찌 더 비출 필요가 있겠느냐? 눈을 뻔히 뜨고 잠꼬대 같은 말을 하지 말라."
問 祈如目前虛空 可不是境 豈無指境見心乎
師云 什人 以鏡照面 縱然得見眉目分明 元來祈是影像 何關汝事
云 若不因照 何時得見
師云 若也涉因 常須假物 有什<撒手似君無一物 徒勞 說數千般>
云 他若識了 照亦無物耶
師云 若是無物 更何用照 莫開眼 語去
14. 구함이 없음
상당하여 말씀하셨다.
"백 가지로 많이 아는 것이 '아무 것도 구하지 않음'만 훨씬 못하니라. 도인이란 일 없는 사람이어서 실로 허다한 마음도 없고 나아가 말할 만한 도리도 없다. 더이상 일이 없으니, 헤어져들 돌아가거라."
上堂云 百種多知 不如無求最第一也 道人 是無事人 實無許多般心 亦無道理可說 無事散去
15. 머문 바 없이 마음이 나면 곧 부처님의 행
배휴가 물었다.
"어떤 것이 세간의 이치[世諦]입니까?"
"언어.문자에 얽매인 이치를 논하여 무엇하겠느냐? 본래 청정한 것인데, 어찌 언설을 빌려서 문답을 하겠는가? 다만 일체의 마음이 없기만 하면 번뇌없는 지혜[無漏智]라 부른다. 네가 모든 언행에 있어 하염없는 법[有爲法]에 집착하지만 않는다면, 말하고 눈 깜짝이는 것 모두가 번뇌없는 지혜와 같으니라. 지금 말법 시대에 접어들면서 참선의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대부분 온갖 소리와 빛깔에 집착하고 있다. 이래서야 어찌 자기 마음을 여의었다고 하겠느냐? 마음이 허공같고 마른 나무와 돌덩이처럼 되어 가며, 또한 타고 남은 재와 꺼진 불처럼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바야흐로 도에 상응할 분(分)이 조금 있는 것이다. 만약 이와 같지 못한다면 뒷날 모두 염라대왕에게서 엄한 문책을 받을 때가 올 것이다. 네가 다만 '있다' '없다' 하는 모든 법을 여의기만 하면, 마음이 마치 허공에 떠있는 햇살같아 태양이 비추지 않아도 자연히 두루 비추는 것이니, 이 어찌 힘 덜리는 일[省力事]이 아니겠느냐?
이런 때에 이르러서는 쉬어 머물 바가 없어서, 모든 부처님이 행하시는 행을 하게 되고,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이 난다'는 것이 되느니라. 이것이 바로 자신의 청정한 법신이며 무상정등정각이니라. 만약 이 뜻을 알지 못한다면 많은 지식을 배워 얻고 부지런히 고행수도하며 풀옷을 입고 나무 먹이를 먹는다 하더라도 결국 자기 마음을 모르는 것이니라. 이것을 모두 삿된 수행이라 하며, 정작 천마의 권속이 되는 것이니, 이런 식으로 수행을 한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지공(誌公 : 418-514)이 말하기를 '부처란 본래 자기 마음으로 짓는 것인데 어찌 문자로 인해 구해지겠는가? 설령 그렇게 해서 삼현(三賢).사과(四果).십지만심(十地滿心)의 지위를 얻는다 해도, 그것은 역시 범부와 성인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고 하였다. 너는 보지 못하였느냐? '모든 행위가 무상하나니, 이것이 나고 없어지는 법이니라'고 하였으며, 힘이 다한 화살은 다시 떨어지나니, 뜻대로 되지 않을 내생을 초래하리로다. 어찌 하염없는 실상의 문[無爲實相門]에 한번 뛰어넘어 여래의 지위에 바로 드는 것만 같으리오' 라고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는 이 정도의 근기가 아니므로 옛사람이 세우신 방편문에서 알음알이를 널리 배워야 하느니라. 지공이 말하기를 '세간을 뛰어 넘은 명철한 스승을 만나지 못하면 대승의 법약(法藥)을 잘못 먹는 것이다.'고 하였다. 네 지금 일거일동에 항상 무심(無心)을 닦아 오래오래 되면 반드시 얻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너는 역량이 부족하니 단박에 뛰어넘지는 못한다. 다만 3년이나 5년 혹 10년만 지나면 반드시 들어갈 곳을 얻어 자연히 알게될 것이니라. 그러나 너는 이렇게 해내지 못하고, 굳이 마음을 가지고 선(禪)을 배우고 도를 배워야 하니, 그것이 불법과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시기를, '여래의 설법은 모두 사람을 교화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마치 누런 나뭇잎을 돈이라하여 어린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따라서 법이란 결코 실다운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무엇인가 얻을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우리 종문(宗門)의 사람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너의 본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느니라. 그래서 경에 말씀하시기를, '실로 얻을 만한 조그마한 법도 없는 것을 무상정각이라 부른다' 고 하였다. 만약 이 뜻을 알아낸다면, 부처님의 도와 마구니의 도가 모두 잘못 되었음을 알게 될 것이니라.
본래 깨끗하여 환히 밝아 모남도 중생도 없고, 크고 작음도 길고 짧은 모양도 없으며, 번뇌(漏)도 작위(作爲)도 없고 미혹됨도 깨달음도 없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요연히 사무쳐 보아 한 물건도 없나니, 중생도 없고 부처도 없도다. 항하사 대천세계(大千世界)는 바다의 물거품이요, 모든 성현들은 스치는 번개불 같도다 ' 한 것이다. 모든 것이 진실한 마음만 같질 못하니라. 법신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부처님.조사와 더불어 마찬가지여서 어디 떨끝만큼이라도 모자람이 겠느냐. 이런 내 말의 뜻을 알았들었다면 열심히 노력해야 하니, 이 생을 마칠 즈음에는 내쉬는 숨이 들이쉬는 숨을 보장치 못하느니라."
問 如何是世諦
師云 說葛藤作什卽名無漏智 汝每日行住坐臥 一切言語 但莫着有爲法 出言瞬目 盡同無漏 如今末法向去 多是學禪道者 皆着一切聲色 何不與我心 心同虛空去 如枯木石頭去 如寒灰死火去 方有少分相應 若不如是 他日盡被閻老子拷 在 但離却有無諸法 心如日輪 常在虛空 光明 自然不照而照 不是省力底事 到此之時 無棲泊處 卽是行諸佛行 便是應無所住 而生其心 此是 淸淨法身 名爲阿뇩菩提 若不會此意 縱 學得多知 勤苦修行 草衣木食 不識自心 盡名邪行 定作天魔眷屬 如此修行 當復何益 誌公 云 <佛 本是自心作 那得向文字中求 饒 學得三賢四果 十地滿心 也祇是在凡聖內坐> 不見道 諸行無常 是生滅法 勢力盡箭環墜 招得來生不如意 爭似無爲實相門 一超直入如來地 爲 不是與 古人建化門 廣學知解 誌公 云 <不逢出世明師 枉服大乘法藥> 如今一切時中行住坐臥 但學無心 久久 須實得 爲 力量小 不能頓超 但得三年 五年 或十年 須得箇入頭處 自然會去 爲汝不能如是 須要將心學禪學道 佛法 有什故 云 <如來所說 皆爲化人 如將黃葉爲金 止小兒啼> 決定不實 若有實得 非我宗門下客 且與 本體 有甚交涉 故 經 云 <實無少法可得 名爲阿뇩菩提> 若也會得此意 方知佛道魔道俱錯 本來淸淨 皎皎地 無方圓無大小 無長短等相 無漏無爲 無迷無悟 了了見無一物 亦無人亦無佛 大千沙界海中 一切聖賢 如電拂 一切不如心眞實 法身 從古至今 與佛祖一般 何處欠少一毫毛 旣會如是意 大須努力 盡今生去 出息 不保入息
16. 육조(六祖)는 어째서 조사가 되었는가?
배휴가 물었다.
"혜능스님께서는 경전을 모르셨는데 어떻게 법의를 전수받고 육조가 되셨으며, 반면 신수스님은 500대중의 수좌로서 교수사(敎授師)의 임무를 받아 32본(本)의 경론을 강의 할 수 있었는데 왜 법의를 전수받지 못하였습니까?"
"신수스님에게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니, 이는 유위의 법으로서 닦고 깨닫는 것을 옳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5조께서는 6조에게 부촉하셨느니라. 한편 6조는 당시에 다만 묵묵히 계합하여 여래께서 은밀히 주신 매우 깊은 뜻을 얻으셨으므로 그에게 법을 부촉하셨느니라. 너는 듣지 못했느냐?
'법이란 본래 법은 법이랄 것 없나니 법 없는 법을 또한 법이라 하느니라. 이제 법 없음을 부촉할 때에 법이다 법이다 하는 것이 일찌기 무슨 법이었던고?' 라고 하셨다. 이 뜻을 알면 바야흐로 출가자라고 부르게 되느니라. 만약 믿지 못하겠다면, 어찌하여 도명(道明)상조가 대유령 꼭대기까지 달려와서 6조를 찾았겠느냐. 그때 6조스님이 묻기를 '그대는 무엇을 구하러 왔는가 옷을 구하는가, 아니면 법인가?' 하니, 도명상좌가 '옷이 아니라 오로지 법을 위하여 왔습니다'고 하였다.
6조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잠시 마음을 거두고 선도 악도 전혀 생각하지 말라' 하시자 도명상좌가 말씀을 받드니, 6조께서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 바로 이러할때 부모가 낳기 이전 명상좌의 본래 면목을 나에게 가져와 보아라' 하셨다. 도명상좌가 이 말을 듣고 곧바로 묵연히 계합하고 문득 절하며 말하기를 '마치 물을 마셔 보고 차고 더움을 스스로 아는 것과 같사옵니다. 제가 5조 문하에서 30년 동안 잘못 공부하다가 오늘에야 비로소 지난날의 잘못을 깨달았습니다'하자, 6조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렇도다' 고 하셨다. 이제 조사가 서쪽에서 오시어 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켜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루게 하심이 언설에 있지 않음을 바야흐로 알 것이로다. 어찌 듣지 못했느냐? 아난이 가섭에게 묻기를 '세존께서 금란가사를 전하신 외에 따로 무슨 법을 전하셨습니까?' 하니 가섭이 아난을 불렀다. 아난이 대답하자 가섭이 말하기를 '문 앞의 깃대<刹竿>를 거꾸러뜨려 버려라'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조사의 표방이니라. 몹시 총명한 아난이 30년동안 시자로 있으면서 많이 들어 얻은 지헤 때문에 부처님으로부터, '천일 동안 닦은 너의 지혜는 하루 동안 도를 닦느니만 못하다' 고 하는 꾸지람을 들었다. 만약 도를 배우지 않는다면 물 한 방울도 소화시키기 어렵다 하리라."
問 六祖 不會經書 何得傳衣爲祖 秀上座 是五百人首座 爲敎授師 講得三十二本經論 云何不傳衣師云 爲他有心 是有爲法 所修所證 將爲是也 所以 五祖付六祖 六祖 當時 祇是默契 得密授如來甚深意 所以 付法與他 汝不見道 <法本法無法 無法法 亦法 今付無法時 法法 何曾法> 若會此意 方名出家兒 方好修行 若不信 云何明上座 走來大庾嶺頭 尋六祖 六祖便問 <汝來求何事 爲求衣 爲求法> 明上座云 <不爲衣來 但爲法來> 六祖云 <汝且暫時斂念 善惡 都莫思量> 明 乃 語 六祖云 <不思善不思惡 正當與下 忽然默契 便禮拜云 <如人飮水 冷暖 自知 某甲 在五祖會中 枉用三十年功夫 今日 方省前非> 六祖云 <如是> 到此之時 方知祖師西來 直指人心見性成佛 不在言說 豈不見 阿難 問迦葉云 <世尊 傳金 外 別傳何法> 迦葉 召阿難 阿難 應諾 迦葉 云 <倒却門前刹竿着> 此便是祖師之標榜也 甚深阿難 三十年爲侍者 祇爲多聞智慧 被佛訶云 <汝千日學慧 不如一日學道> 若不學道 滴水 難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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