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선사 어록/임제록

임제록

실론섬 2015. 8. 22. 18:27

탑기(塔記) - 간단한 행장


선사의 휘는 의현이고 조주 남화 사람이다. 속성은 형씨다. 어려서는 남달리 영특하였으며 자라서는 효성이 지극하였다. 마침내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고 강원에 계시면서 계율을 깊이 연구하시고 경과 론을 널리 공부하였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이것은 세상을 구제하는 약의 처방전일 뿐, 교외별전의 뜻이 아니다.”하며 탄식하고는 곧 옷을 갈아입고 제방을 행각하였다.

   

맨 먼저 황벽 스님을 찾아뵙고 다음으로 대우 스님을 찾아뵈었다. 그 기연과 말씀들은 행록에 실려 있다. 이미 황벽 스님의 인가를 받고 하북으로 가서 진주성 동남쪽 호타하라는 강 곁에 있는 작은 절에 머무셨다. <임제>라는 이름은 그 지역의 이름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그때 보화 스님이 그 곳에 먼저 와서 거짓으로 미친 척을 하며 대중에 섞여 살았는데 성인인지 범부인지 헤아릴 수 없었다.

   

스님께서 그 곳에 가시자마자 보좌해 드리다가 정작 스님께서 교화를 왕성하게 펴실 즈음에 온 몸 그대로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이는 작은 석가모니라는 앙산스님의 예언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그 때 마침 난리가 나서 그 곳을 떠나셨다. 태위인 묵군화가 성안에 있는 자기의 집을 희사하여 절로 만들었다. 역시 ‘임제’라는 액호를 달고 스님을 맞아 계시도록 하였다.

   

뒤에 옷깃을 떨치고 남쪽으로 향하여 하북부에 이르렀다. 부주인 왕상시가 제자의 예를 갖추어 맞이하였다. 거기에 머무신지 얼마 되지 않아 곧 대명부의 흥화사로 옮겨 동당에 기거하였다.

   

스님은 병이 없으셨는데 하루는 옷을 여미고 자리에 앉으시더니 삼성 스님과 문답을 마치시고 조용히 돌아가셨다. 때는 당나라 함통 8년 정해(867) 정월 10일이었다. 문인들이 스님의 전신을 대명부 서북쪽에 탑을 세워 모셨다.

   

시호는 혜조 선사, 탑호는 징령이라 하였다. 합장하고 머리 숙여 스님의 행장을 간단히 쓰노라.

   

법제자 진주 보수사 주지 연소는 삼가 쓰고,

법제자 대명부 흥화사 주지 존장이 교감하다.


행록(行錄)


1. 세 번 묻고 세 번 맞다


임제 스님이 처음 황벽 스님의 회하에 있을 때 공부하는 자세가 매우 순일하였다. 수좌 소임을 보는 목주(睦州) 스님이 찬탄하여 말하기를,

“비록 후배이긴 하나 다른 대중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묻기를,

“스님이 여기에 있은 지 얼마나 되는가?”

“3년 됩니다.”

“공부에 대하여 물은 적이 있는가?”

“아직 묻지 못했습니다. 무엇을 물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방장스님을 찾아뵙고 ‘무엇이 불법의 분명한 대의입니까?’ 하고 왜 묻지 않는가?”

   

임제 스님이 바로 가서 물으니 묻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황벽 스님께서 대뜸 후려쳤다. 임제 스님이 내려오자 수좌가 물었다.

“법을 물으러 갔던 일은 어떻게 되었는가?”

“내가 묻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화상이 느닷없이 때리니 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다시 가서 묻도록 하게.”

   

임제 스님이 다시 가서 물으니, 황벽 스님이 또 때렸다. 이렇게 세 번 묻고 세 번 맞았다.[三度發問 三度被打].

임제 스님이 돌아와서 수좌에게 말하였다.

“다행히 자비하심을 입어서 제가 큰스님께 가서 불법을 물었는데 세 번 묻고, 세 번 맞았습니다. 장애로 인하여 깊은 뜻을 깨닫지 못하는 것을 스스로 한탄하고 지금 떠나려고 합니다.”

“그대가 만약 떠나려하거든 큰스님께 가서 하직 인사나 꼭 하고 가게.”

임제 스님은 예배하고 물러났다.

   

수좌가 먼저 황벽스님의 처소에 가서 말하였다.

“법을 물으러 왔던 후배가 대단히 여법(如法)합니다. 만약 와서 하직 인사를 드리거든 방편으로 그를 이끌어 주십시오. 앞으로 잘 다듬으면 한 그루의 큰 나무가 되어 천하 사람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드리울 것입니다.”

   

임제스님이 가서 하직 인사를 드리니 황벽스님이 말씀하였다.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자네는 고안의 물가에 사는 대우스님 처소에 가도록 하여라. 반드시 너를 위하여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임제 스님이 대우 스님에게 이르자 대우 스님이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황벽 스님의 처소에서 왔습니다.”

“황벽 스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던가?”

“제가 세 번이나 불법의 분명한 대의를 물었다가 세 번 얻어맞기만 했습니다. 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저에게 허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황벽스님이 그토록 노파심이 간절하여 그대를 위해 뼈에 사무치게 하였거늘 여기까지 와서 허물이 있는지 없는지를 묻는가?"

   

임제 스님이 그 말끝에 크게 깨달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황벽의 불법이 간단하구나.”

대우 스님이 멱살을 움켜쥐며,

“이 오줌싸개 같은 놈! 방금 허물이 있느니 없느니 하더니 이제 와서는 도리어 황벽스님의 불법이 간단하다고 하느냐? 그래 너는 무슨 도리를 보았느냐? 빨리 말해봐라, 빨리 말해!” 하였다.

   

이에 임제 스님이 대우 스님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세 번이나 쥐어박았다.

대우 스님이 임제 스님을 밀쳐 버리면서 말하였다.

“그대의 스승은 황벽이다.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다.”

   

임제 스님이 대우 스님을 하직하고 다시 황벽 스님에게 돌아오자 황벽 스님이 보고는,

“이놈이 왔다 갔다 하기만 하니 언제 공부를 마칠 날이 있겠느냐?”

“오직 스님의 간절하신 노파심 때문이옵니다.”


인사를 마치고 곁에 서 있으니 황벽 스님이 물었다.

“어디를 갔다 왔느냐?”

“지난번에 스님의 자비하신 가르침을 듣고 대우 스님을 뵙고 왔습니다.”

“대우가 무슨 말을 하더냐?”

   

임제 스님이 지난 이야기를 말씀드리니 황벽 스님이 말하였다.

“어떻게 하면 대우 이놈을 기다렸다가 호되게 한 방 줄까?”

“무엇 때문에 기다린다 하십니까? 지금 바로 한 방 잡수시지요.” 하며 바로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황벽 스님께서

“이 미친놈이 다시 와서 호랑이의 수염을 뽑는구나.” 하였다.

그러자 임제 스님이 “할”을 하였다.

황벽 스님이 “시자야, 이 미친놈을 데리고 가서 선방에 집어넣어라.” 하였다.

   

뒷날 위산 스님이 이 이야기를 하시며 앙산 스님에게 물었다.

“임제가 그때 대우의 힘을 얻었는가? 황벽의 힘을 얻었는가?”

“범의 머리에 올라앉았을 뿐만 아니라, 범의 꼬리도 잡을 줄 안 것입니다.”


2. 소나무를 심는 뜻


임제 스님이 소나무를 심고 있는데 황벽 스님께서 물었다.

“깊은 산 속에 그 많은 나무를 심어서 무얼 하려 하는가?”

“첫째는 절의 경치를 가꾸기 위해서이고, 둘째는 후인들에게 본보기가 되기 위해서입니다.”라고 하고나서 괭이로 땅을 세 번 내리치니 황벽 스님께서 말씀하였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그대는 이미 나에게 30방을 얻어맞았다.”

임제 스님이 또 다시 괭이로 땅을 세 번 내리치며 “허허!”라고 하니 황벽 스님께서

“나의 종풍이 그대에게 이르러 세상에 크게 일어나겠구나.” 하셨다.

   

뒷날 위산 스님이 이 이야기를 하시며 앙산 스님에게 물었다.

“황벽 스님이 그 당시 임제 한 사람에게만 부촉한 것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도 있는가?”

“있습니다만, 연대가 매우 멀어서 스님께 말씀드리지 않으렵니다.”

“그렇긴 하지만, 나도 또한 알고 싶으니 그대는 말해 보아라.”

“한 사람이 남쪽을 가리켜서 오월지방에서 법령이 행해지다가 큰바람을 만나면 그칠 것입니다.”


3. 무슨 잠꼬대인가


임제 스님이 덕산 스님을 모시고 서 있는데, 덕산 스님이 

“오늘은 피곤하구나.” 하였다.

이에 임제 스님이

“이 노장이 무슨 잠꼬대를 하는가?” 하니 덕산 스님이 후려쳤다.

임제 스님이 의자를 뒤엎어 버렸는데 덕산 스님은 가만히 있었다.


4. 이곳에는 산 채로 매장한다


임제 스님이 밭을 매는 운력(運力)을 하다가 황벽 스님이 오시는 것을 보고 괭이에 기대어 서 있었다.

황벽 스님께서

“이 놈이 피곤한 모양이구나.” 하시니

“괭이도 아직 들지 않았는데 피곤하다니요.” 하였다.

황벽 스님이 임제를 후려치자, 임제가 몽둥이를 잡아 던져버리고 황벽 스님을 넘어뜨렸다.

   

황벽 스님이 유나를 불러 말씀하였다.

“유나야! 나를 부축해 일으켜다오.”

유나가 가까이 다가가 부축해 일으켜 드리면서,

“큰스님! 이 미친놈의 무례한 짓을 어찌 그냥 두십니까?” 하였다.

   

황벽스님은 일어나자 마자 유나를 후려갈겼다.

임제스님이 괭이로 땅을 찍으면서 말하였다.

“제방에서는 모두 화장을 하지만 나는 여기서 한순간에 생매장을 해버린다.”

   

뒷날 위산 스님이 앙산 스님에게 물었다.

“황벽 스님이 유나를 때린 의도가 무엇인가?”

“진짜 도둑은 달아나 버렸는데 뒤쫓던 순라군이 얻어맞은 꼴입니다.”


5. 황벽스님이 자기 입을 쥐어박다


임제 스님이 하루는 큰 방에 앉아 있다가 황벽 스님이 오시는 것을 보고 눈을 감아버렸다. 황벽 스님이 두려워하는 시늉을 하며 곧 바로 방장실로 돌아가 버렸다. 임제 스님이 뒤따라 방장실로 가서 무례하였음을 사과하였다.

   

수좌가 황벽 스님을 모시고 있었는데 황벽 스님이

“이 스님이 비록 후배이긴 하지만 이 일이 있는 줄을 안다.” 하였다.

수좌가

“노스님 자신의 발꿈치도 땅에 닿지도 않았는데 도리어 이 후배를 증명[인가]하십니까?” 하였다.

황벽 스님이 스스로 자기 입을 한 대 쥐어박으니,

수좌가 “아셨으면 됐습니다.”라고 하였다.


6. 이 노장이 무슨 수작인가


임제 스님이 방에서 졸고 있는데 황벽 스님께서 내려와서 보시고 주장자로 선판을 한 번 두드렸다.

임제 스님이 고개를 들어 황벽 스님인 것을 보고서도 다시 졸자 황벽 스님이 다시 선판을 한 번 두드렸다.


그리고 윗자리로 가서 수좌가 좌선하고 있는 것을 보고 말씀하셨다.

“아래 자리의 후배는 좌선을 하는데 그대는 여기서 무슨 망상을 피우고 있느냐?”

그러자 수좌가

“이 노장이 무슨 수작이야!” 하니,

황벽 스님은 선판을 한 번 두드리고 나가버렸다.

   

뒷날 위산 스님이 앙산 스님에게 물었다.

“황벽스님이 선방에 들어갔던 뜻이 무엇인가?”

“한 개 주사위의 두 가지 그림입니다.”


7. 많은 사람이 운력하리라


하루는 대중이 운력을 하는데 임제 스님이 맨 뒤에서 따라가고 있었다.

황벽 스님이 고개를 돌려보니 임제 스님이 빈손으로 오길래

“괭이는 어디 있느냐?” 라고 물었다.

“어떤 사람이 가져갔습니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그대와 이 일을 의논해 보자.”


임제 스님이 앞으로 가까이 오자. 황벽스님이 괭이를 일으켜 세우며 말씀하였다.

“다만 이것은 천하 사람들이 잡아 세우려 해도 일으키지 못한다.”

임제 스님이 손을 뻗쳐 낚아채서 잡아 세우면서,

“그렇다면 어째서 지금은 제 손 안에 있습니까?” 하니 황벽 스님께서

“오늘은 대단한 사람이 운력을 하는구나.” 하시며 절로 돌아가 버렸다.

   

뒷날 위산 스님이 앙산 스님에게 물었다.

“괭이가 황벽 스님의 손에 있었는데, 무엇 때문에 다시 임제한테 빼앗겼느냐?”

앙산스님이 대답하였다.

“도둑은 소인이지만 지혜는 군자를 능가합니다.”


8. 이 일을 안다면 그만 둡시다


임제 스님이 황벽 스님의 편지를 전하려 위산 스님에게 갔었다. 그때 앙산 스님이 지객 소임을 보고 있었는데, 편지를 받으며 물었다.

“이것은 황벽 스님의 것이다. 그대의 것은 어느 것인가?”

임제 스님이 손바닥으로 후려갈기자,

앙산 스님이 그를 붙잡으며 말하였다.

“노형께서 이 일을 아신 바에야 그만둡시다.”

   

둘이 함께 가서 위산 스님을 뵈오니 위산 스님이 물었다.

“황벽 사형께서는 대중이 얼마나 됩니까?”

“7백 대중입니다.”

“누가 우두머리인가요?”

“방금 전에 이미 편지를 전해 드렸습니다.”

   

임제 스님이 도리어 위산 스님에게 물었다.

“이 곳 큰스님의 회하에는 대중이 얼마나 됩니까?”

“일천 5백 대중이라네.”

“매우 많군요.”

“황벽 사형께서도 적지 않으시구나.”

   

임제 스님이 위산 스님을 하직하고 나오니 앙산 스님이 전송하면서 말하였다.

“그대가 뒷날 북쪽으로 가면 머무르실 곳이 있을 것입니다.”

“어찌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가시기만 하면 한 사람이 노형을 보좌해 드릴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머리만 있고 꼬리는 없으며, 시작은 있고 끝은 없을 것입니다.”

   

임제 스님이 뒷날 진주에 이르자, 보화 스님이 이미 거기에 와 있었다. 임제 스님이 세상에 알려지자 보화 스님이 도와 드렸다. 임제 스님이 진주에 머무신지 오래지 않아 전신으로 이 세상을 떠나가 버렸다.


9. 검은 콩을 주어먹는 스님


임제 스님이 여름철 안거 중간에 황벽산에 올라갔다가 황벽 스님께서 경을 읽고 계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저는 스님이 그럴싸한 분으로 생각해 왔는데 알고 보니 검정콩이나 주워 먹는 노스님이군요.”


며칠을 머물다가 하직 인사를 드리러 가니,

“그대는 여름 안거를 깨뜨리고 오더니, 결국 여름 안거를 마치지도 않고 가려 하는가?” 하시므로,

“저는 스님께 잠시 인사를 드리러 왔을 뿐입니다.” 하였다.


황벽 스님께서는 임제 스님을 후려갈겨 내쫓아 버렸다.

임제 스님이 몇 리를 가다가 이 일을 의심하고 다시 돌아와 그 여름 안거를 마쳤다.

   

10. 천하 사람들의 입을 막으리라


임제 스님이 어느 날 황벽 스님을 하직하니, 황벽 스님께서 물었다.

“어디로 가려 하느냐?”

“하남이 아니면 하북으로 돌아갈까 합니다.”

   

황벽 스님이 곧바로 후려치자, 임제 스님이 그를 잡고 손바닥으로 한 대 때렸다. 이에 황벽 스님이 큰 소리로 웃으며 시자를 불렀다.

“백장 큰스님이 물려준 선판과 경상을 가져오너라.” 하시니

임제 스님이

“시자야! 그것을 불살라 버려라.” 하였다.


황벽 스님이 말하였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그냥 가져가거라. 나중에 앉은 자리에서 천하 사람들의 입을 막게 할 것이다.”

   

뒷날 위산 스님이 앙산 스님에게 물었다.

“임제가 황벽 스님을 저버린 게 아닌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은혜를 알아야 은혜를 갚을 줄 아는 법입니다.”

“옛사람들도 이와 같은 경우가 있었는가?”

“있습니다만 너무 오래된 일이라 스님께 말씀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긴 하나 나도 알고 싶으니 말해 보아라.”

“다만 저 능엄회상에서 아난이 부처님을 찬탄하기를, ‘이 깊은 마음으로 먼지 같이 많은 국토를 받드는 것이 곧 부처님의 은혜를 갚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으니, 이 어찌 은혜를 갚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 그렇다. 견해가 스승과 같으면 스승의 덕을 반이나 감하는 것이고, 견해가 스승보다 나아야만 비로소 법을 전해줄 만하다.”


11. 부처와 조사에게 다 예배하지 않는다


임제 스님이 달마 조사의 탑전에 이르렀는데 탑을 관리하는 스님이 말하였다.

“장로께서는 부처님께 먼저 절하십니까? 조사에게 먼저 절하십니까?”

“부처와 조사에게 다 절하지 않습니다.”

“부처님과 조사가 장로에게 무슨 원수라도 됩니까?”

임제 스님이 곧바로 소매를 떨치고 나가버렸다.


12. 오늘은 낭패를 보았다


임제 스님이 행각할 때 용광 스님이 계시는 곳에 이르렀는데, 용광 스님이 마침 법당에서 설법을 하고 있었으므로 임제 스님이 물었다.

“칼을 뽑지 않고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습니까?”

용광 스님이 묵묵히 않아 있자 임제 스님이 말하였다.

“큰 선지식께서 어찌 방편이 없으십니까?”

용광 스님이 눈을 크게 뜨고 쉰 목소리로 “사!”하니,

임제 스님이 손으로 가리키면서 말하였다.

“이 늙은이가 오늘 낭패를 보았구나.”


13. 앉아서 차나 들게


삼봉에 갔을 때 평화상이 물었다.

“어디에서 왔는가?”

“황벽 스님의 회하에서 왔습니다.”


“황벽 스님은 어떤 법문을 하시는가?”

“금빛 소가 간밤에 진창에 빠져 아직까지도 그 자취를 찾을 수 없습니다.”

   

“가을바람이 옥피리를 분다. 누가 이 소리를 아는가?”

“곧바로 만 겹 관문을 뚫으니 맑은 하늘에도 머물지 않습니다.”

   

“그대의 한마디 물음이 매우 높구나.”

“용이 금빛 봉황의 새끼를 낳으니 유리빛 푸른 창공을 뚫고 날아갑니다.”

   

“자, 앉아서 차나 들게.” 하셨다.

   

평화상이 다시 물었다.

“근래에는 어디에 왔는가?”

“용광 스님이 계시는 곳에서 왔습니다.”

“용광 스님은 요즈음 어떠하시던가?”

임제 스님은 곧바로 나가버렸다.


14. 삼산이 만 겹의 관문을 가두어 버렸다


대자 스님이 계신 곳에 갔을 때, 대자 스님이 방장실에 앉아 계셨는데 임제 스님이 여쭈었다.

“방장실에 단정히 앉아 계실 때는 어떻습니까?”

“추운 겨울에도 소나무는 한결 같아서 그 푸른빛이 천 년을 빼어났고, 시골의 노인이 꽃을 꺾어 드니 온 세계가 봄이로다.”

   

임제 스님이 말씀하셨다.

“고금에 길이 뛰어난 크고 원만한 지혜의 본체여, 삼산(三山)이 만 겹의 관문을 가두어 버렸더라.”

대자 스님이 대뜸 “할!”을 하시니, 임제 스님도 “할!”을 하셨다.

대자 스님이 “어떤가?” 하시니, 임제 스님은 소매를 떨치며 가버렸다.


15. 훌륭한 선객은 정말 다르구나


양주의 화엄 스님에게 갔을 때, 화엄 스님이 주장자에 기대어 조는 시늉을 하였다.

임제스님이

“노스님께서 졸기만 하면 어떻게 합니까?”

“훌륭한 선객은 정말 다르구나.”

   

“시자야! 차를 다려 와서 큰스님께서 드시도록 하여라.”

화엄 스님이 유나를 불러

“이 스님을 셋째 자리에 모시도록 하여라.” 하였다.


16. 화살이 서천을 지나갔다


임제 스님이 취봉 스님 계신 곳에 이르자 취봉 스님이 물었다. 

“어디에서 왔는가?”

“황벽 스님 회하에서 왔습니다.”

“황벽 스님은 어떤 법문으로 학인을 지도하시는가?”

“황벽 스님은 법문이 없으십니다.”

“어째서 없는가?”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소개할만한 것이 없습니다.” 

“어쨌든 한 번 말해 보아라.” 

“화살이 서천을 지나가 버렸습니다.”


17. 여기서 무슨 밥그릇을 찾는가


임제 스님이 상전 스님 계신 곳에 이르러 물었다.

“범부도 아니고 성인도 아니니 스님께서는 빨리 말씀해주십시오.”

“노승은 그저 이럴 뿐이네.”

임제 스님이 곧 “할!”을 하며 말하였다.

“허다한 머리 깎은 이들아, 여기에서 무슨 밥그릇을 찾고 있는가?”


18. 짚신만 떨어뜨릴 뿐이다


명화 스님이 계신 곳에 이르자 명화 스님이 물었다.

“왔다 갔다 하며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저 쓸데없이 짚신만 떨어뜨릴 뿐입니다.”

“결국 어쩌겠다는 말인가?”

“이 노인네가 말귀를 못 알아듣는구나.”


19. 노파의 거량


스님이 봉림 스님에게 가던 도중 어떤 노파를 만났는데 노파가 물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봉림 스님이 계신 곳으로 갑니다.”

“봉림 스님은 마침 계시지 않습니다.”

“어딜 가셨습니까?” 하였는데 노파가 그냥 가니까 임제 스님이 불렀다.

노파가 고개를 돌리자 임제 스님이 곧 후려쳤다.


20. 봉림과의 시문답(詩問答)


임제 스님이 봉림스님이 계신 곳에 이르자 봉림 스님이 물었다.

“물어 볼 것이 있는데 괜찮겠는가?”

“무엇 때문에 긁어 부스럼을 만드십니까?”

“바다에 비친 달이 너무나 밝아서 그림자가 하나도 없는데, 노니는 고기가 제 스스로 미혹할 뿐이다.”

“바다에 비친 달은 이미 그림자가 없는데, 노니는 고기가 미혹할 리 있겠습니까?”

“바람을 보아 물결이 이는 것을 알고, 물을 보고 작은 배에 돛을 올린다.”

“외로운 달이 홀로 비치어 강산은 고요한데, 혼자서 웃는 소리가 천지를 놀라게 하는군요.”   

“세 치 혀를 가지고 천지를 비추는 것은 알아서 할 일이나, 기틀에 맞는 한마디를 던져 보시게.”

“길에서 검객을 만나면 칼을 바쳐야 하지만, 시인이 아니면 시를 말하지 마십시오.”


봉림 스님이 거기서 그만두자 임제 스님이 게송을 하였다.

“큰 도는 철저히 동일해서 동쪽과 서쪽을 마음대로 향함이라. 부싯돌의 불도 따라잡지 못하고 번갯불도 통하지 못하도다.”

   

위산 스님이 앙산 스님에게 물었다. 

“부싯돌의 불빛도 미칠 수 없고 번갯불도 통할 수 없는데 옛날부터 여러 성인들께서는 무엇으로 학인들을 지도하였는가?”

“스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말만 있을 뿐 전혀 실다운 뜻은 없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그대는 어떤가?”

“공적으로는 바늘 하나도 용납할 수 없지만 사적으로는 수레나 말까지도 통합니다.”


21. 오늘은 운수가 나쁘다


금우 스님 계신 곳에 이르자, 금우 스님이 임제 스님이 오는 것을 보고 주장자를 가로 누인 체 문에 걸터앉아 있었다. 임제 스님이 손으로 주장자를 세 번 두드리고 선방으로 들어가 첫 번째 자리에 앉으니 금우스님이 내려와 보고 물었다.

“손님과 주인이 만나면 서로 예의를 차려야 하는데, 상좌는 어디서 왔기에 이다지도 무례한가?”

“노스님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금우 스님이 입을 열려는데 임제 스님이 곧바로 후려쳤다.

금우 스님이 넘어지는 시늉을 하는데 임제 스님이 또 치니 금우스님이 말하였다.

“오늘은 운수가 나쁘다.”

   

위산스님이 앙산 스님에게 물었다.

“이 두 큰스님 중에 누가 이기고 누가 졌느냐?”

“이겼다면 다 이겼고, 졌다면 다 졌습니다.”


22. 임제스님이 열반할 때


임제 스님이 열반하실 때 자리에 앉으셔서 말씀하였다.

“내가 가고 난 다음에 나의 정법안장이 없어지지 않도록 하여라.”

삼성 스님이 나와서 사뢰었다.

“어찌 감히 큰스님의 정법안장을 없앨 수 있겠습니까?”

“이후에 누가 그대에게 물으면 무어라고 말해 주겠느냐?”

삼성 스님이 “할!”을 하므로 임제 스님이 말씀하셨다.

“나의 정법안장이 이 눈 먼 나귀한테서 없어질 줄 누가 알겠는가?”

말을 마치시고 단정하게 앉으신 채 열반을 보이셨다.


상당(上堂)


1. 전쟁의 시작


하북부의 부주 왕상시가 여러 관료들과 더불어 임제 스님께 법상에 오르시기를 청하니 스님이 법상에 올라 말씀하셨다.


“산승이 오늘 어쩔 수 없이 인정에 따라서 겨우 이 자리에 올랐으나 만일 조사들이 면면히 이어온 전통에 입각하여 큰 일을 드날려 본다면 곧바로 입을 열 수가 없다. 또한 그대들이 발붙일 곳도 없다. 그런데 산승에게 오늘 왕상시가 간곡히 청하니 어찌 근본종지를 숨길 수 있겠는가. 여기에 이름난 장군[作家]이 있다면 곧바로 진을 펼치고 깃발을 열어서 대중들에게 그 증거를 보여라.”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불교의 대의입니까?”

임제 스님이 곧 “할!”을 하시니, 그 스님이 절을 하였다.

임제 스님이 말씀하셨다.

“이 스님과는 법담(法談)을 나눌 만하구나.”


스님이 물었다.

“선사께서는 누구 집의 노래를 부르며 어느 분의 종풍을 이었습니까?”

임제 스님이 말씀하셨다.

“나는 황벽 스님 처소에서 세 번 묻고 세 번 얻어맞았다.”

그 스님이 우물쭈물 머뭇거리자 임제 스님이 “할!”을 하고 뒤이어 내리치며 말하였다.

“허공에 말뚝을 박을 수는 없느니라.”


어떤 좌주(坐主)가 물었다.

“삼승 십이분교(三乘十二分敎)가 어찌 불성을 밝힌 것이 아니겠습니까?”

임제 스님이 말씀하셨다.

“거친 풀을 두고 호미질을 하지 않았구나.”

다시 좌주가 말하였다.

“부처님이 어찌 사람을 속였겠습니까?”

임제 스님이 말씀하셨다.

“부처님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

좌주가 말을 못하므로 임제 스님이 말씀하셨다.

“상시 앞에서 노승을 속이려 하는구나. 어서 빨리 물러나라. 다른 사람이 묻는 것에 방해된다.”


임제 스님이 다시 말했다.

“오늘의 법회는 일대사(一大事)를 위한 것이니 다시 묻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빨리 물어라.


그대들이 막 입을 열면 일대사와는 벌써 교섭할 수 없게 된다. 왜 그럴까? 보지 못했는가. 세존이 말씀하시기를 ‘법은 문자를 떠났으며 인(因)에도 속하지 않고 연(緣)에도 있지 않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대들이 믿음이 모자라는 까닭에 오늘 이렇게 어지러이 갈등을 하는 것이다. 왕상시와 여러 관원들을 꽉 막히게 하고 불성을 어둡게 할까 염려된다. 물러가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 하시며, “할!”을 한 번 하시고는 말했다.

   

“믿음의 뿌리가 적은 사람들은 마침내 일대사의 일을 마칠 날이 없다. 오래 서 있었으니 편히 쉬어라.”


2. 정안(正眼)


임제 스님이 어느 날 하북부에 갔더니 부주 왕상시가 스님을 청해서 법좌에 오르게 했다. 


그 때에 마곡 스님이 나와서 물었다.

“대비보살의 천수천안 중에서 어느 것이 바른 눈입니까?”

임제 스님이말했다.

“대비보살의 천수천안 중에서 어느 것이 바른 눈인가 빨리 말하라.”

   

그러자 마곡 스님이 임제 스님을 법좌에서 끌어내리고 대신 법좌에 올랐다. 임제 스님은 마곡 스님 앞으로 가까이 가서 “안녕하십니까?” 라고 하니, 마곡 스님이 어리둥절하여 머뭇거렸다. 

   

임제 스님 또한 마곡 스님을 법좌에서 끌어내리고 다시 그 자리에 앉았다. 마곡 스님은 곧바로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러자 임제 스님도 곧 법좌에서 내려왔다.

   

3. 무위진인(無位眞人)


법상에 올라 말씀하셨다.

“붉은 몸뚱이에 한사람의 무위진인(無位眞人)이 있다. 항상 그대들의 얼굴을 통해서 출입한다. 아직 증거를 잡지 못한 사람들은 잘 살펴보아라.”

   

그때에 한 스님이 나와서 물었다.

“어떤 것이 무위진인(無位眞人)입니까?”

임제스님이 법상에서 내려와서 그의 멱살을 꽉 움켜잡고

“말해봐라. 어떤 것이 무위진인가.”

   

그 스님이 머뭇거리자 임제스님은 그를 밀쳐버리며 말했다.

“무위진인이 이 무슨 마른 똥막대기인가.” 라고 하시고는 곧 방장실로 돌아가 버렸다.

   

4. 할! 할! 할!


임제 스님이 법상에 오르니 한 스님이 나와서 절을 하였다. 

임제 스님이 곧바로 ‘할’을 하였다.

그 스님이 말했다.

“노화상께서는 사람을 떠보지 마십시오.”

   

임제 스님이 말씀하셨다.

“네가 말해보아라. ‘할’의 의도가 무엇인가?”

그 스님이 곧바로 ‘할’을 했다.


또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불법의 큰 뜻입니까?”

임제 스님이 문득 ‘할’을 하니, 그 스님이 예배를 하였다.

   

임제 스님이 말씀하셨다.

“네가 한 번 말해봐. 이 할이 훌륭한 할인가?”

그 스님이 말했다.

“초야의 도적[草賊]이 크게 패했습니다.”

임제 스님이 말씀하셨다.

“무엇을 잘못했는가?”

그 스님이 말했다.

“두 번 잘못은 용서하지 않습니다.”

임제 스님이 곧바로 ‘할’을 했다.


이 날은 양당의 두 수좌가 서로 보고 동시에 ‘할’을 하였다. 


어느 스님이 임제 스님에게 물었다.

“그 ‘할’에 손님과 주인이 있습니까?”

임제 스님이 말씀하셨다.

“손님과 주인이 분명히 있다.”

그리고 임제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대중들아, 임제의 손님과 주인의 도리[賓主句]를 알고 싶으면 승당의 두 수좌에게 물어보아라.” 하시고 자리에서 내려오셨다.


5. 불교의 대의


법상에 오르자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불교의 대의입니까?”

임제 스님이 벌레를 쫓는 불자(拂子)를 세워들었다. 그러자 스님이 곧 ‘할’을 하니, 임제 스님이 바로 후려쳤다.

   

또 다른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불교의 대의입니까?”

임제 스님이 또 불자(拂子)를 세워들자, 그 스님도 곧 ‘할’을 하였다. 임제 스님이 또 ‘할’을 하니 그 스님이 머뭇거리자 임제 스님이 곧 후려쳤다.

   

그리고, 임제 스님이 말씀하셨다.

“대중들아! 대저 법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은 몸과 목숨을 잃는 것을 피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20년 전에 황벽 스님의 회상에 있을 적에 세 번이나 불법의 확실한 대의[不法的的大意]를 물었다가 황벽 스님이 세 번이나 몽둥이 하사하는 것을 얻어맞았다. 그 때 마치 부드러운 쑥대가지로 쓰다듬어 주는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다시 한 번 그 몽둥이를 얻어맞고 싶구나. 누가 나를 위해서 그렇게 해주겠는가?”

   

그 때 한 스님이 대중 가운데에서 나와 말하였다.

“제가 해 보겠습니다.”

임제 스님은 몽둥이를 건네주려 하고 그 스님은 받으려고 하는데, 임제 스님이 곧바로 후려쳤다.

   

6. 칼날 위의 일


임제 스님이 법상에 오르자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칼날 위의 일입니까?”

임제 스님이 말씀하셨다.

“큰일 났다. 큰일 났어.”

그 스님이 머뭇거리자. 임제 스님이 곧바로 후려쳤다.


한 스님이 물었다.

“저 석실 행자가 방아를 찧다가 다리 옮기는 것을 잊어버렸다 하니 어느 곳으로 간 것입니까?”

임제 스님이 말하였다.

“깊은 우물 속에 빠져버렸다.”

   

임제 스님이 이어서 말씀하셨다.

“나에게 찾아오는 사람을 나는 조금도 잘못 보지 않는다. 그가 온 곳(견해. 공부의 수준)을 모두 안다. 만약 그와 같이 [석실 행자처럼 되어] 온다면 마치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것과 같고, 그와 같지 않게 온다면 그것은 밧줄도 없이 스스로를 묶은 것이다. 언제든지 함부로 이리저리 짐작하지 마라. ‘안다, 모른다.’ 하는 것은 모두 착각이다. 나는 분명히 이와 같이 말하거니와, 천하 사람들이 헐뜯고 비방하더라도 상관하지 않겠다. 오래 서 있었으니 돌아가 쉬어라.”


7. 고봉정상과 네거리


임제 스님이 법상에 올라 말씀하셨다.

“한 사람은 고봉정상에 있어서 몸이 더 나아갈 길이 없고, 한 사람은 네거리에 있으면서 또한 앞뒤 어디든 갈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이 앞에 있고 어떤 사람이 뒤에 있는가 [누가 더 나은가]?

유마힐도 되지말고 부대사도 되지말라. 편히 쉬어라.”


8. 집안과 길거리


임제스님이 법상에 올라 말씀하셨다.

“한 사람은 영원히 길에 있으면서도 집을 떠나지 않고, 한사람은 집을 떠나 있으나 길에도 있지 않다. 어느 쪽이 최상의 공양[人天供養]을 받을 만한가?” 하시고는 곧바로 법상에서 내려 오셨다.


9. 삼구(三句)


임제 스님이 법상에 오르자 한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제일구입니까?”

임제 스님이 말씀하셨다.

“삼요(三要)의 도장[印]을 찍었으나 붉은 글씨는 그 간격이 좁아서 숨어 있으니, 주객이 나누어지려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 스님이 또 물었다.

“어떤 것이 제이구입니까?”

임제 스님이 말씀하셨다.

“묘해[문수]가 어찌 무착 선사의 물음을 용납하겠는가마는 방편상 어찌 뛰어난 근기[무착]를 저버릴 수 있으랴.”

   

그 스님이 또 물었다.

“어떤 것이 제삼구입니까?”

임제 스님이 말씀하셨다.

“무대 위의 꼭두각시 조종하는 것을 잘 보아라. 밀었다 당겼다 하는 것이 모두 그 속에 사람이 있어서 하는 것이다.”


임제 스님이 말씀하셨다.

“한 구절의 말에 반드시 삼현문(三玄門)이 갖춰져 있고, 일현문(一玄門)에는 반드시 삼요(三要)가 갖춰져 있어서 방편도 있고 작용도 있다. 그대들 모든 사람들은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시고는 법상에서 내려오셨다.


시중(示衆) 1~3


1. 사료간(四料揀)


임제 스님이 저녁법문[晩參]에서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느 때에 사람[주관]을 빼앗고[부정함], 경계[객관]를 빼앗지 않으며,

어느 때는 경계를 빼앗고 사람을 빼앗지 않으며,

어느 때는 사람과 경계를 함께 빼앗고,

어느 때는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지 않는다.”

   

그 때 한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사람을 빼앗고 경계를 빼앗지 않는 것입니까?”

임제 스님이 말씀하셨다.

“봄날의 따스한 햇볕이 떠오르니 땅에 비단을 편 듯하고, 어린 아이의 늘어뜨린 머리카락은 명주실처럼 희구나.”

   

스님이 또 물었다.

“어떤 것이 경계를 빼앗고 사람을 빼앗지 않는 것입니까?”

임제 스님이 말씀하셨다.

“왕의 명령이 이미 떨어지니 천하에 두루 시행되고, 변방을 지키는 장수는 전쟁을 할 일이 없어졌다.”

   

그 스님이 또 물었다.

“어떤 것이 사람과 경계를 함께 빼앗는 것입니까?”

임제 스님이 말씀하셨다.

“병주(幷州)와 분주(汾州)는 소식을 끊고 각기 한 지방을 차지하였다.”

   

스님이 또 물었다.

“어떤 것이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지 않는 것입니까?”

임제 스님이 말씀하셨다.

“왕은 보배 궁전에 오르고 시골 노인은 태평가를 부른다.”


임제 스님이 이어서 말씀하셨다.

“요즘 불교를 배우는 사람으로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참되고 바른 견해[眞正見解]를 구하는 일이다. 만약 참되고 바른 견해만 얻는다면 나고 죽음에 물들지 않고 가고 머무름에 자유로워 수승함을 구하지 않아도 수승함이 저절로 온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예부터 선지식들은 모두가 그들만의 특별한 교화의 방법[路]이 있었다. 예컨대 산승(山僧)이 사람들에게 지시하고 가르치는 것은 다만 그대들이 다른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는 것이다.

   

작용하게 되면 곧 작용할 뿐이다. 더 이상 머뭇거리거나 의심하지 말라.

   

요즘 공부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것은 그 병이 어디에 있는가? 병은 스스로 믿지 않는 데 있다. 그대들이 만약 스스로를 믿지 못하면 곧 바쁘게 돌아다니면서 일체 경계에 끌려 다닌다. 수만 가지 경계에 자신을 빼앗겨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대들이 만약 능히 생각 생각에 찾아 헤매는 마음[馳求心]을 쉴 수 있다면 곧 할아버지인 부처님[祖佛]과 더불어 다름이 없느니라. 그대들이 할아버지인 부처님을 알고자 하는가? 다만 그대들이 내 앞에서 법문을 듣고 있는 그 사람이다.

   

공부하는 사람들의 믿음이 철저하지 못하고 곧 자신 밖을 향해 내달리면서 구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설사 밖에서 구하여 얻는다 하더라도 모두가 훌륭한 문자일 뿐이다. 마침내 살아있는 할아버지의 뜻은 얻지 못할 것이다.

   

착각하지 말라. 여러 선덕(禪德)들이여! 지금 이런 이치를 만나지 못하면 만겁 천생을 삼계에 윤회하여 좋아하는 경계에 이끌려 다니느라 나귀나 소의 뱃속에 태어날 것이다.

   

도를 배우는 여러 벗들이여! 산승의 견해에 의지한다면 그대들도 석가와 더불어 다름이 없다. 오늘 여러 가지로 작용하는 곳에 모자라는 것이 무엇인가? 여섯 갈래(眼·耳·鼻·舌·身·意)의 신령스런 빛이 잠시도 쉰 적이 없다. 만약 이와 같이 이해한다면 다만 한평생 일 없는 사람일 뿐이다[一生無事人].

   

대덕아! 삼계가 불안한 것이 마치 불타는 집과 같다. 이곳은 그대들이 오래 머물 곳이 못된다. 무상(無常)이라는 사람을 죽이는 귀신[殺鬼]이 한 찰나 사이에 귀한 사람, 천한 사람, 늙은이, 젊은이를 가리지 않는다.

   

그대들이 할아버지 부처님과 다르지 않고자 한다면 다만 밖으로 구하지 말라.

   

그대들 한 생각 마음의 청정한 빛은 그대들 집안의 법신불(法身佛)이다. 그대들 한 생각 마음의 분별없는 빛은 그대들 집안의 보신불(報身佛)이다. 그대들 한 생각 마음의 차별없는 빛은 그대 집안의 화신불(化身佛)이다. 이 세 가지의 몸은 그대들이 지금 내 앞에서 법문을 듣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이다. 다만 밖을 향해 헤매면서 찾지 않으면 이런 공용(功用)이 있다.

   

경학을 공부하는 사람[經論家]에 의하면 이 세 가지 불신(佛身)을 취하여 궁극의 경지를 삼으나 산승의 견해로는 그렇지 않다. 세 가지 불신이란 이름과 말이며 또한 세 가지 의지인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몸[佛身]이라고 하는 것은 이치에 의하여 세운 것이고, 국토는 바탕에 의거하여 논한 것이다. 법성신 법성토는 이 빛의 그림자인 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대덕아! 그대들은 또한 그림자를 조종하는 사람을 확실히 알라.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근본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삶의 모습[一切處]이 도를 닦는 이들의 돌아가 쉴 곳이다.

   

그대들의 사대[地·水·火·風]로 된 이 육신은 설법을 하거나 법을 들을 줄 알지 못한다. 비·위·간·담(脾胃肝膽)도 설법을 하거나 법을 들을 줄 알지 못한다. 허공도 설법을 하거나 법을 들을 줄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설법을 하고 법을 들을 줄 아는가? 그것은 그대들 눈앞에 역력하고 뚜렷한 아무 형체도 없이 홀로 밝은 이것이 바로 설법을 하고 법을 들을 줄 안다. 만약 이와 같이 볼 줄 안다면 곧 할아버지 부처님과 더불어 다르지 않느니라.

   

다만 모든 시간 속에 전혀 간격이 없어서 눈으로 보는 것이 모두 다 그것이지만, 그러나 감정이 생겨서 지혜가 막히고 생각이 변하여 본바탕과는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삼계에 윤회하여 가지가지 고통을 받게 된다. 만약 산승의 견해로 본다면 깊고 깊은 경지가 아닌 것이 없고 해탈 아닌 것이 없고 해탈 아닌 것이 없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마음의 작용은 형상이 없어서 시방세계를 관통하고 있다.

눈에 있을 때는 보고,

귀에 있을 때는 들으며,

코에 있을 때는 냄새를 맡고,

입에 있을 때는 말을 하며,

손에 있을 때는 잡고,

밭에 있을 때는 걸어 다닌다.

   

본래 이 하나의 정밀하고 밝은 것[一精明. 一心]이 나누어서 우리 몸의 여섯 가지 부분과 화합하였을 뿐이다. 한 마음마저 없는 줄 알면 어디서든지 해탈이다.

   

산승의 이와 같은 이야기들은 그 뜻이 어디에 있는가. 다만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일체 치구심(一切馳求心)을 쉬지 못하고 저 옛사람들의 부질없는 동작과 언어와 가리키는 것들[機境]을 숭상하고 매달리기 때문이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산승의 견해를 취할 것 같으면 보신불과 화신불의 머리를 앉은자리에서 끊는다. 십지보살[十地滿心]은 마치 식객과 같다. 등각·묘각은 죄인으로서 칼을 쓰고 족쇄를 찬 것이다. 아라한과 벽지불은 뒷간의 똥오줌과 같다. 보리와 열반은 당나귀를 매는 말뚝과 같다.

   

어째서 이러한가? 다만 도를 배우는 이들이 3 아승지겁이 공(空)한 것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장애가 있는 것이다.

   

만약 진정한 도인(道人)이라면 마침내 이와 같지 않다. 다만 인연을 따라서 구업(舊業)을 녹인다. 자유롭게 옷을 입고 가게 되면 가고 앉게 되면 앉아서 한 생각도 불과(佛果)를 바라지 않는다. 어째서 그러한가? 옛사람이 이르기를 ‘만약 업을 지어서 부처를 구하고자 한다면 부처가 오히려 생사의 큰 징조가 된다.’고 하였다.

   

대덕아! 시간을 아껴야 하거늘, 다만 옆길로만 분주히 돌아다니면서 선(禪)을 배우고 도(道)를 배운다고 하는구나. 이름과 글귀를 잘못 알고 부처를 구하고 조사를 구한다고 하는구나. 선지식을 찾아가서 생각으로만 헤아리는구나. 그렇게 잘못 알지 말라.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그대들에게 다만 일개 부모(根本)가 있다. 다시 무슨 물건을 구하는가? 그대들 스스로 돌이켜 보라.

   

옛사람이 이르기를 ‘연야달다(演若達多)가 머리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다가 다시 구하는 마음이 쉰 그 순간에 아무런 일이 없어졌다.’고 하였다.

   

대덕들이여! 평상 생활 그대로이기를 바란다면 다른 모양을 짓지 말라. 좋고 나쁜 것을 알지 못하는 머리 깎은 노예들이 있다. 그들은 문득 귀신을 보고 도깨비를 보며, 동쪽을 가리키고 서쪽을 구분하며, 맑은 것이 좋으니, 비 오는 것이 좋으니 한다. 이와 같은 무리들은 모두 빚을 지고 염라대왕 앞에 가서 뜨거운 쇳덩이를 삼킬 날이 있을 것이다. 공연히 아무 탈 없는 집안의 남녀들에게 일종의 여우와 도깨비의 정령이 붙어 있다. 마치 멀쩡한 눈을 비벼서 괴상망측하게 허공에서 헛꽃을 보는 일과 같이 되었다. 이 눈멀고 어리석은 것들아. 밥값을 받을 날이 있을 것이다.”

   

2. 사조용(四照用)


임제스님이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어느 때는 먼저 지혜로 비춰보고, 뒤에 작용을 하며,

어느 때는 먼저 작용을 하고  나중에 비춰 본다.

어느 때는 비춤과 작용을 동시에 하며,

어느 때는 비춤과 작용이 동시가 아닐 때도 있다.

   

먼저 지혜로 비추고 뒤에 작용하는 것은 사람이 있는 데 해당된다.

먼저 작용을 하고 뒤에 비춰 보는 것은 법[대상]이 있는데 해당된다.

   

비춤과 작용이 동시인 경우에는 밭가는 농부의 소를 빼앗고, 굶주린 사람의 밥을 빼앗는 것처럼, 뼈를 두들겨 골수를 뽑아내고, 아픈 곳에 다시 바늘과 송곳으로 침을 꽂는 것이다.

   

비춤과 작용이 동시가 아닐 때는, 물음이 있으면 답이 있고 손님[객관]도 세우고 주인[주관]도 세운다.

   

물에 합하고 진흙에 합하여 근기에 맞춰서 사람들을 제접한다. 만약 뛰어난 사람[過量人]이라면 법을 거량하기 전에 떨치고 일어나 곧 가버린다. 그래야 조금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3. 일이 없는 사람이 귀한 사람


임제스님이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참으로 중요한 것은 참되고 바른 견해[眞正見解]를 구해서 천하를 마음대로 다니면서 도깨비 귀신에게 홀리지 않는 것이다.

   

일이 없는 사람이 참으로 귀한 사람이다. 다만 억지로 조작하지 말라. 오직 평상의 생활 그대로 하라. 그대들이 밖을 향하고 옆집을 찾아 헤매면서 방법[脚手]을 찾아봐야 그르칠 뿐이다. 단지 부처를 구하려 하나 부처란 이름이며 글귀일 뿐이다.

   

그대들은 바깥을 향해서 허둥대고 찾으려 하는 그 사람을 아는가? 시방 삼세의 부처님과 조사님들이 세상에 오신 것은 오로지 법을 구하기 위함이다. 지금 여기에 참여하여 도를 배우는 사람들도 또한 다만 법을 구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법을 얻어야 끝낼 수 있다. 법을 얻지 못하면 여전히 지옥·아귀·축생·천도·아수라[혹 인도]의 다섯 갈래의 길에 떨어져 윤회하게 된다.

   

무엇이 법인가? 법이란 마음의 법이다. 마음의 법은 형상이 없어서 온 시방법계를 관통하고 있어서 눈앞에 그대로 작용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러한 사실을 철저하게 믿지 못하고서 다만 명칭을 오인하고 글귀를 오인해서 문자 속에서 구하고 있다. 불법을 생각으로 헤아려 이해하려고 하니 하늘과 땅의 차이로 멀리 달라져 버렸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산승의 설법은 무슨 법을 설하는가. 심지법(心地法)을 설한다. 그래서 범부에게도 들어가고 성인에게도 들어가며, 깨끗한 곳에도 들어가고 더러운 곳에도 들어가며, 진제(眞諦)에도 들어가고 속제(俗諦)에도 들어간다. 

   

중요한 것은 그대들의 진(眞)·속(俗)·범(凡)·성(聖)이 아니면서 모든 진·속·범·성으로 더불어 이름을 붙여 준다. 그러나 진·속·범·성이 이 사람[참사람,心]에게 그런 이름을 붙일 수는 없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잡으면 그대로 쓸 뿐 다시 무슨 이름을 붙이지 말아야 한다. 그것을 일컬어 깊은 뜻[玄旨]이라고 한다. 나의 법문은 천하의 누구와도 같지 않다. 가령, 문수보살 보현보살이 바로 눈앞에서 각각 한 몸을 나타내어 법을 물으려고 막 ‘스님께 묻습니다’라고 하면 나는 벌써 알아버린다. 노승이 그저 편안히 앉아 있는데 어떤 수행자가 찾아와 나를 만날 때도 나는 다 알아차린다.

   

어째서 그런가? 그것은 나의 견해가 다른 사람들과 달라서 밖으로는 범부와 성인을 취하지 않고 안으로는 근본 자리에도 머무르지 않는다. 견해가 철저해서 다시는 의심하거나 잘못되지 않기 때문이다.”


4. 수처작주(隨處作主)하라


임제 스님이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불법은 애써 공을 들여서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평상대로 아무 일도 없는 것이다. 똥 싸고 오줌 누며, 옷 입고 밥 먹으며, 피곤하면 눕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나를 비웃겠지만 지혜로운 이는 알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자신 밖을 향해서 공부하는 사람은 모두가 어리석고 고집스런 놈들이다.’ 라고 하였다.

   

그대들이 어디를 가나 주인이 된다면 서 있는 곳마다 그대로가 모두 참된 것이 된다. 어떤 경계가 다가온다 하여도 끄달리지 않을 것이다. 설령 묵은 습기와 무간 지옥에 들어갈 다섯 가지 죄업이 있다 하더라도 저절로 해탈의 큰 바다로 변할 것이다.

   

요즈음 공부하는 이들은 모두들 법을 모른다. 마치 양이 코를 들이대어 닿는 대로 입안으로 집어넣는 것처럼 종과 주인을 가리지 못하며, 손님인지 주인인지를 구분하지 못한다. 이와 같은 무리들은 삿된 마음으로 도[佛敎]에 들어왔다. 그러므로 이해득실과 시시비비의 번잡스런 일에 곧바로 빠져버리니 진정한 출가인 이라고 이름 할 수 없다. 그야말로 바로 속 된 사람[俗人]이다.

   

대저 출가한 사람은 모름지기 평상 그대로의 참되고 바른 안목을 잘 가려내야 한다. 그리하여 부처와 마군을 구분하고 참됨과 거짓을 구분하며 범부와 성인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이와 같이 가려낼 수 있다면 참된 출가라고 할 것이지만 부처와 마군을 구분한다면 그저 한 집에서 나와 도 다른 집으로 들어간 것에 불과하다. 이는 업을 짓는 중생이지 진정한 출가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

   

지금 한 개의 부처인 마군이 있어서 같은 몸이 되어 나눌 수 없는 것이 마치 물과 우유가 섞여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거위의 왕은 우유만 먹는다. 눈 밝은 도인이라면 마군과 부처를 함께 쳐버린다. 그대들이 만약 성인을 좋아하고 범부를 싫어한다면 생사의 바다에 떴다 잠겼다 할 것이다.”


“무엇이 부처인 마군입니까?”

“그대의 의심하는 그 한 생각이 바로 마군이다. 그대가 만약 만 법이 본래 태어남이 없는 이치[萬法無生]를 통달하면 마음은 환영과 같아지리라. 다시는 한 티끌 한 법도 없어서 어딜 가나 청정하리니 이것이 부처다. 그러나 부처와 마군이란 깨끗함과 더러움의 두 가지 경계다.

   

산승의 견해에 의한다면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으며, 옛날도 없고 지금도 없어서 얻을 것은 바로 얻는다. 오랜 세월을 거치지 않는다. 닦을 것도 없고 깨칠 것도 없으며, 얻을 것도 없고 잃을 것도 없어서 모든 시간 속에서 더 이상 다른 법은 없다. 설사 이보다 더 나은 법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그것은 꿈같고 허깨비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산승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모두 이것이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바로 지금 눈 앞에서 호젓이 밝고 역력하게 듣고 있는 이 사람은 어디를 가나 막힘이 없고 시방세계를 꿰뚫어 삼계에 자유 자재한다. 온갖 차별된 경계에 들어가도 그 경계에 휘말리지 않는다. 한 찰나 사이에 법계를 뚫고 들어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말하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말하며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말하고 아귀를 만나면 아귀를 말한다. 모든 국토를 다니며 중생들을 교화하지만 일찍이 일념을 떠난 적이 없다. 가는 곳마다 청정하여 그 빛이 시방법계에 사무쳐서 만법이 한결같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대장부라면 본래 아무런 일이 없는 줄을 오늘에야 알 것이다. 다만 그대들은 믿음이 부족하여 생각생각 내달려 구하면서 자기 머리는 놔두고 다른 머리를 찾느라 스스로 쉬지를 못하는 것이다.

   

저 원교보살 돈교보살[圓頓菩薩]은 법계에 들어가 몸을 나타내어 정토에 있으며 범부를 싫어하고 성인을 좋아한다. 이런 무리는 취하고 버리는 마음을 잊지 못한다. 더럽다, 깨끗하다 하는 마음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종의 견해는 그렇지 않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지 달리 다른 시절이 없다. 산승이 말하는 것은 모두가 병에 따라 그때그때 약을 쓰는 일회적인 치료일 뿐이다. 실다운 법이란 전혀 없다. 만약 이와 같이 볼 수만 있다면 참된 출가이다. 하루네 만 냥의 황금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그대들은 쉽사리 제방의 노사들에게 인가를 받아 가지고 ‘나는 선(禪)을 알고 도(道)를 안다.’고 지껄이지 말라. 설법이 폭포수처럼 말솜씨가 유창하다하더라도 이는 모두 다 지옥 갈 업을 짓는 것이다.

   

만약 참되고 바르게 도를 배우는 이라면 세상의 허물을 찾지 않는다. 참되고 바른 견해를 구하는 일이 간절하고 급박하다. 만약 참되고 바른 견해를 통달하여 뚜렷이 밝으면 비로소 일을 마쳤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이 참되고 올바른 견해입니까?”

“그대들은 언제 어디서나 범부에도 들어가고 성인에도 들어가며 더러움에도 들어가고 깨끗함에도 들어간다. 모든 부처님 나라에도 들어가고 미륵의 누각에도 들어가며 비로자나불의 법계에도 들어가서 곳곳마다 국토를 나타내며 성·주·괴·공(成住壞空)을 한다.

   

부처님께서는 세간에 출현하시어 큰 법륜을 굴리시고 다시 열반에 드시지만 가고 오는 모양을 볼 수가 없다. 그 자리에서는 생사를 찾아도 마침내 찾을 길 없다. 곧 무생(無生) 법계에 들어가 곳곳에서 국토를 노닌다. 화장세계에도 들어가 모든 법이 다 텅 비어있어서 전혀 실다운 법이 없음을 다 본다.

   

오직 법을 듣는 사람, 어디에도 의지함이 없는 도인이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다. 그러므로 부처는 의지함이 없는 데서 생겨난다. 만약 의지함이 없음을 깨닫는다면 부처라는 것도 얻을 것이 없다. 만약 이와 같이 보게 된다면 이것이야말로 참되고 올바른 견해인 것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그것을 알지 못하고 명칭과 글귀에 집착하여 범부니 성인이니 하는 이름에 구애되므로 훌륭한 식견[道眼]이 막혀 분명히 알지 못하는 것이다. 다만 저 십이분교(十二分敎)도 모두 이치를 보여주기 위한 설법인데 공부하는 사람들이 이를 알지 못하고 겉으로 드러난 명칭이나 글귀에서 알음알이를 낸다. 이것은 모두 무엇에 의지하고 기댄 것이라서 인과(因果)에 떨어지며 삼계에서 생사에 윤회함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그대들이 만약 나고 죽음과 가고 머무름을 벗어나 자유롭기를 바란다면 지금 법문을 듣는 그 사람을 알도록 하여라. 이 사람은 형체도 없고 모양도 없으며, 뿌리도 없고 바탕도 없으며 머무는 곳도 없다. 활발발하게 살아 움직이고, 수만 가지 상황에 맞추어 펼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작용에도 정해진 곳이 없다. 그러므로 찾을 수록 더욱 멀어지고 구할수록 더욱 어긋난다. 그것을 일러 비밀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그대들은 이 꿈 같고 허깨비 같은 몸뚱이를 잘못 알지 말라. 머지않아 머뭇거리는 사이에 곧 덧없음[無常,죽음]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대들은 이 세계 속에서 무엇을 찾아 해탈을 하겠느냐? 그저 밥 한술 찾아먹고 누더기를 꿰매며 시간을 보내는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선지식을 찾아 참문(參問)하는 일이다. 그럭저럭 즐거운 일이나 쫓아 지내지 말라. 시간을 아껴라. 순간순간 덧없이 흘러가서 크게 보면 지·수·화·풍이 흩어지는 것이고, 미세하게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의 네 가지 변화에 쫒기고 있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지금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네 가지 지수화풍과 생주이멸의 형상 없는 경계를 잘 알아서 그 경계에 휘말리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무엇이 네 가지 형상이 없는 경계입니까?”

“그대들의 한 생각 의심하는 마음이 흙이 되어 가로 막으며, 한 생각 애착하는 마음이 물이 되어 빠지게 하며, 한 생각 성내는 마음이 불이 되어 타게 하며, 한 생각 기뻐하는 마음이 바람이 되어 흔들리게 하는 것이다. 만약 이렇게 알아낼 수 있다면 경계에 끄달리지 않고 가는 곳마다 경계를 활용할 것이다.

   

동쪽에서 나타났다가 서쪽으로 사라지고, 남쪽에서 나타났다가 북쪽에서 사라지고, 가운데서 나타났다가 가장자리에서 사라지고, 가장자리에서 나타났다가 가운데서 사라진다. 땅을 밟듯 물을 밟고, 물을 밟듯 땅을 밟는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사대육신(四大肉身)은 꿈과 같고 허깨비같은 줄 통달하였기 때문이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지금 법문을 듣고 있는 것은 그대들의 사대육신이 아니지만 그대들의 사대육신을 능숙하게 활용할 줄 안다. 만약 이와 같이 볼 수만 있다면 가고 머무름에 자유자재가 될 것이다. 나의 견해에 의하면 아무것도 꺼려할 것이 없는 이치다.

   

그대들이 성인을 좋아하지만 성인이란 성인이라는 이름일 뿐이다. 어떤 수행하는 이들은 모두 오대산에 가서 문수보살을 친견하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벌써 틀린 일이다.

   

오대산에는 문수가 없다. 문수를 알고 싶은가? 다만 그대들의 눈앞에서 작용하는 그것, 처음과 끝이 다르지 않고 어딜 가든지 의심할 것 없는 그것이 바로 살아 있는 문수다.

   

그대들의 한 생각 차별 없는 빛이 어디에나 두루 비치는 것이 진짜 보현보살이고, 그대들의 한 생각 마음이 스스로 결박을 풀 줄 알아서 어딜 가나 해탈하는 그것이 바로 관음보살의 삼매법이다. 서로 주인도 되고 벗도 되어 나올 때는 한꺼번에 나오니 하나가 셋이고 셋이 하나다. 이와 같이 알 수 있다면 비로소 경전에 설해져 있는 가르침을 잘 보는 것이다.


5. 문자에 속지 말라


스님께서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오늘날 도를 배우는 사람들로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를 믿는 것이다. 밖으로는 찾지 말라. 모두 다 저 부질없는 경계들을 받들어서 도무지 삿된 것과 바른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예컨대 조사니 부처니 하는 것은 모두 다 교학의 자취 가운데 일이다. 어떤 사람이 한 마디 말을 거론하였을 때 혹 그 말의 뜻이 알려지지 않은 상태[隱顯中]에서 나온 것이라면 곧 바로 의심을 내어 이리저리 온갖 생각을 다 하며 천지를 뒤진다[照天照地]. 또 옆 사람을 찾아가 물으며 몹시 바빠서 정신없이 서둔다.

   

대장부라면 이렇게 주인이니 도적이니, 옳거니 그르거니, 색(色)이니 재물(財)이니 하며 쓸데없는 이야기로 세월을 보내지 말라. 산승의 이곳에는 승속을 논하지 않고 다만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 다 알아내 버리고 만다. 그들이 어디서 오든 간에 그들은 다만 소리나 명칭이나 문자나 글귀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모두가 꿈이나 허깨비이다.

   

다시 경계를 부리는[사용하는] 사람들을 보니 여기에는 모든 부처님의 깊은 뜻이 드러나 있다. 부처님의 경지는 ‘나는 부처의 경지다.’라고 스스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디에도 의지함이 없는 무의도인(無依道人)이 경계를 활용하면서 나타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와서 나에게 부처가 되는 길을 묻는다면 나는 즉시 청정한 경지에 맞추어서 대해준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보살을 묻는다면 나는 곧 자비의 경지에 맞추어서 대해준다. 또 어떤 사람이 보리를 묻는다면 나는 곧 깨끗하고 오묘한 경지에 맞추어서 대해준다. 또 어떤 사람이 열반을 묻는다면 나는 곧 고요한 경지에 맞추어서 대해 준다. 경계는 수만 가지로 차별하지만 사람은 차별이 없다. 그러므로 사람에 응하여 형상을 나타내는 것은 마치 물속에 비친 달과 같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그대들이 만약 여법(如法)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대장부라야 비로소 할 수 있다. 만약 시들시들하고 나약하게 흐느적거려서는 안 된다. 깨어진 그릇에는 제호(醍?)같은 좋은 음식을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큰 그릇이라면 다른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고 어딜 가나 주인이 되어 그가 선 자리 그대로가 모두 참다운 삶이 된다.

   

다만 찾아오는 사람이 있더라도 모두 받아들이지 말라. 그대들이 한 생각 의심하면 곧 마(魔)가 마음속으로 들어온다. 만약 보살이라도 의심을 내면 생사의 마군이가 그 틈을 얻게 된다. 다만 생각을 쉬기만 하면 된다. 다시 바깥으로 구하지 말라. 사람이 다가오면 오는 대로 곧 비춰보라.

   

그대들이 지금 바로 작용하는 이것을 믿기만 하면 아무런 일이 없다. 그대들의 한 생각 마음이 삼계를 만들어내고 인연을 따라 경계에 끄달려서 육진경계로 나누어진다. 그대들이 지금 응하여 쓰는 그곳에서 무슨 모자람이 있겠는가? 한 찰나 사이에 깨끗한 국토에도 들어가고 더러운 국토에도 들어가며, 미륵의 누각에도 들어가고 삼안국토(三眼國土)에도 들어가서 곳곳을 다니지만 오직 텅 빈 이름뿐이다.”

   

“무엇이 삼안국토입니까?”

“나는 그대들과 함께 청정하고 미묘한 국토에 들어가 청정한 옷을 입고 법신불을 설한다. 또 차별 없는 국토에 들어가 차별 없는 옷을 입고 보신불을 설한다. 또 해탈국토에 들어가 광명의 옷을 입고 화신불을 설한다.

   

이 삼안국토란 모두가 무엇에 의지하여 변화하는 것이다. 교학자(敎學者)들은 법신을 근본으로 하고 보신과 화신을 그 작용이라 하지만 산승이 보기에는 법신도 설법을 할 줄 모른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말하기를 ‘몸이란 의미에 입각하여 말하고 국토란 본체에 근거해서 논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법성신과 법성토는 건립되어진 법이고 무엇에 의지해야만 통하는 국토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빈주먹과 누런 잎사귀로 어린아이들을 속이는 것이다. 찔레가시와 마른 뼈다귀에서 무슨 국물을 찾겠는가? 마음 밖에는 법이 없고 마음 안에서도 얻을 바가 없는데 무엇을 찾겠는가?

   

그대들이 제방에서 닦을 것도 있고 깨칠 것도 있다고 말하는데 착각하지 말라. 설령 닦아서 얻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가 생사의 업이다. 그대들은 육도만행을 빠짐없이 닦는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모두 업을 짓는 일이다. 그러므로 부처를 구하고 법을 구하는 것은 지옥의 업을 짓는 것이고, 보살을 구하는 것도 업을 짓는 것이며, 경을 보거나 가르침을 듣는 것도 또한 업을 짓는 것이다.

   

부처와 조사는 바로 일없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부처와 조사에게는 억지가 있고 조작이 있는 유루유위(有漏有爲)와 조작 없이 저절로 그러한 무루무위(無漏無爲)가 다 청정한 업이 된다.

   

어떤 눈멀고 머리 깎은 사람들이 밥을 배불리 먹고 나서 곧 좌선하거나 관법을 하되 생각이 새어나가는 것을 꽉 붙들어 달아나지 못하게 한다. 또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고 조용한 것만을 찾는데 이것은 다 외도의 법이다. 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이 만약 마음을 안주시켜 고요함을 보고, 마음을 일으켜 밖으로 관조하며, 마음을 가다듬어 안으로 맑히며, 마음을 한 곳으로 모아 정(定)에 든다면 이러한 것들은 모두가 조작이다.’라고 하셨다.

   

그대들은 지금 이렇게 법문을 듣는 그 사람을 어떻게 그를 닦고, 어떻게 그를 증득하며, 어떻게 그를 장엄하려 하는가? 그것은 닦을 물건이 아니며 장엄할 수 있는 물건도 아니다. 만약 그것을 장엄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다 장엄할 수 있을 것이니 그대들은 잘못 알지 말라.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그대들은 어떤 노스님들의 설법을 듣고 그것이 참된 도라고 여긴다. 이러한 선지식은 불가사의하다고 하면서 ‘나는 범부의 마음이니 감히 그 노스님의 뜻을 헤아려 볼 수 없다.’고 한다.

   

이 눈멀고 어리석은 사람아! 그대들의 일생을 이러한 견해에 사로잡혀 멀쩡한 두 눈을 막아버리고 산다. 추워서 벌벌 떠는 모습이 마치 빙판 위를 걸어가는 당나귀의 새끼 같구나. 그리고 말하기를 ‘나는 감히 선지식을 비방하지 못한다. 입으로 짓는 업이 두렵다.’고 하니라.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큰 선지식이라야 비로소 부처와 조사를 비방할 수 있고 천하의 선지식들을 옳다 그르다 할 수 있다. 그리고 경·율·논 삼장(三藏)의 가르침을 배척할 수도 있으며, 어린애 같은 모든 무리들을 꾸짖을 수 있다. 거슬리고 순종하는 경계 속에서 사람을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12년 동안 업의 성품을 찾았는데 겨자씨만큼도 찾을 수 없었다.

   

만약 새색시 같은 선사라면 절에서 쫓겨나서 밥을 얻어먹지 못할까 두렵고 불안해한다. 그러나 예로부터 뛰어난 선배는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믿지 않아 쫓겨났다. 그리고 나중에야 비로소 귀한 사람인줄 알았다. 만약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인정해 준다면, 이런 사람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한 번의 사자후에 여우의 머리통이 찢어지는 것이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제방의 선지식들이 말하기를 도를 닦을 것이 있고 법을 깨칠 것이 있다고 하는데, 그대들은 무슨 법을 깨치며 무슨 도를 닦는다고 말하는가? 그대들이 지금 쓰고 있는 것에서 무슨 모자람이 있으며, 어떤 점을 닦고 보완한다는 것인가? 못난 후학들이 잘 모르고 이들 여우와 도깨비들을 믿어서 그들의 말과 행동을 받아들인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들까지 얽어매어 말하기를 ‘이치와 행이 서로 부합하고 삼업(三業)을 잘 보호하고 지켜야만 비로소 성불할 수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이 말하는 자들은 봄날의 가랑비처럼 많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길에서 도를 아는 사람을 만나거든, 무엇보다 도에 대해서 말해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만약 누구라도 도를 닦으면 도는 행하여지지 않고 도리어 수만 가지의 삿된 경계들이 다투어 생겨난다. 지혜의 칼을 뽑아들면 아무 것도 없다. 밝은 것이 나타나기 전에 어두운 것이 밝아진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또 옛사람이 말하기를, ‘평상의 마음이 바로 도(道)다’라고 한 것이다.

   

대덕아! 무엇을 찾느냐? 지금 바로 눈앞에 법문을 듣는 그 사람,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은 무의도인(無依道人)은 너무도 분명하고 결코 부족한 것이 없다. 그대들이 만약 할아버지 부처님[祖佛]과 다르지 않기를 바란다면 다만 이와 같이 보면 된다. 의심하여 그릇치지 말라. 그대들의 순간순간의 마음이 다르지 않음을 이름하여 살아있는 할아버지[活祖]라 한다. 마음이 만약 다르면 성품과 형상이 다르게 되지만 마음이 다르지 않기 때문에 성품과 형상이 다르지 않다.”

   

“무엇이 순간순간의 마음이 다르지 않는 경계입니까?”

“그대들이 물으려 하는 순간 벌써 달라져 버린 것이니 성품과 형상이 각각으로 나누어졌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착각하지 말아라. 세간이나 출세간의 모든 법은 다 자성이 없으며, 또한 생멸의 성품도 없다. 그저 허망한 이름뿐이며 그 이름을 쓴 글자도 또한 텅 빈 것이다. 그대들은 이처럼 그 부질없는 이름을 진실한 것으로 알고 있으니 매우 잘못 된 것이다. 설사 그러한 것들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가 의지해서 변화한 경계들이다. 이른바 보리의 의지와 열반의 의지와 해탈의 의지와 세 가지 불신의 의지와 경계와 지혜의 의지와 보살의 의지와 부처의 의지 등이다.

   

그대들은 의지하여 변한 국토에서 무엇을 찾고 있느냐? 삼승 십이분교마저도 모두가 똥을 닦아낸 휴지다. 부처란 허깨비로 나타난 몸이며, 조사란 늙은 비구인데 그대들은 어머니가 낳아 주신 진짜의 몸이 있지 않는가. 그대들이 만약 부처를 구하면 부처라는 마군(魔群)에게 붙잡히고, 조사를 구하면 조사라는 마군에게 묶이게 된다. 그대들은 만약 구하는 것이 있으면 모두가 고통이니 아무런 일 없느니만 못하니라.

   

어떤 머리 깎은 비구가 학인들을 향해 말하기를, ‘부처님은 최고 궁극적인 경지이니 삼대 아승지겁 동안 수행하여 그 결과가 다 채워져서 비로소 도를 이룬 것이다.’라고 한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그대들이 만약 부처를 최고 궁극적인 경지라 한다면 어찌하여 부처님께서 80년 후에 쿠시나가라 성의 사라쌍수 사이에서 옆으로 누워 돌아가셨는가? 그리고 부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우리들의 생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리라. 그대들은 32상과 80종호가 부처님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전륜성왕도 마땅히 여래이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환영이고 허깨비임을 분명히 알리라.

   

옛사람이 이르기를, ‘여래가 갖추신 몸의 모습은 세상의 인정을 따른 것이다. 사람들이 아무 것도 없다는 단견을 갖게 될까봐 염려하시어 방편으로 세운 헛된 이름이다. 32상은 거짓 이름이고 80 종호도 헛소리다. 몸이란 깨달음의 본체가 아니며, 형상 없음이 진실한 형상이다’라 하였다.

   

그대들이 ‘부처님께서는 여섯 가지 신통이 있으시니 참으로 불가사의하다’고 하는데, 여러 천신들과 신선과 아수라와 힘센 귀신들도 역시 신통이 있다. 이들도 마땅히 부처님이겠구나.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착각하지 말아라. 아수라들이 제석천신들과 싸우다 지게 되면 팔만 사천의 권속들을 거느리고 연근 뿌리의 구멍 속으로 들어가 숨는다 하니, 이들도 성인이라 해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예를 든 것은 모두가 업의 신통이거나 의지한 신통들이다.

   

대저 부처님의 육신통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물질의 경계에 들어가지만 물질의 미혹함을 받지 않고,

소리의 경계에 들어가지만 소리의 미혹함을 받지 않으며,

냄새의 경계에 들어가지만 냄새의 미혹함을 받지 않고,

맛의 경계에 들어가지만 맛의 미혹함을 받지 않는다.

감촉의 경계에 들어가지만 감촉에 미혹함을 받지 않고,

법의 경계에 들어가지만 법의 경계의 미혹을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색·성·향·미·촉·법 이 여섯 가지가 모두 텅 비었음을 통달하고 있다.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무의도인을 속박할 수 없다. 비록 오온의 번뇌로 이루어진 몸이지만 바로 이것이 땅으로 걸어 다니는 신통[地行神通]이니라.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참 부처는 형상이 없고 참된 법은 모양이 없다. 그대들은 그와 같은 변화로 나타난 허깨비에서 이런 모양을 짓고 저런 모양을 짓는구나. 설사 그런 것을 구하여 얻는다 하더라도 모두 여우의 혼령들이며 결코 참된 부처가 아니다. 이는 바로 외도의 견해인 것이다. 진정으로 도를 배우는 사람이라면 부처마저도 취하지 않으며 보살과 나한도 취하지 않고 삼계의 뛰어난 경계도 취하지 않을 것이다. 멀리 홀로 벗어나 사물에 전혀 구애되지 않는다.

   

하늘과 땅이 뒤집힌다 해도 나는 더 이상 의혹하지 않는다.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이 앞에 나타난다 하여도 한 생각도 기쁜 마음이 없다. 삼악도의 지옥이 갑자기 나타난다 하여도 한 생각도 두려운 마음이 없다.

   

어째서 그런가. 나는 모든 법은 공한 모습이라 변화하면 곧 있고 변화하지 않으면 없는 것으로 본다. 삼계는 오직 마음이고 만법은 오직 의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꿈이요 환상이요 헛꽃인 것을 무엇 하려 수고로이 붙들려고 하는가.’라고 하였다.

   

오직 도를 배우는 벗들의 눈앞에 법을 듣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고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으며, 삼악도 지옥에 들어가도 마치 정원을 구경하며 노는 듯하고, 아귀 축생에 들어가도 그 업보를 받지 않는다.

   

어째서 그런가하면 꺼려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대들이 만약 성인은 좋아하고 범부를 싫어한다면 생사의 바다에 떴다 잠겼다 할 것이다. 번뇌는 마음을 말미암아서 생겨나는 것이니 마음이 없다면 번뇌가 어찌 사람을 구속하겠는가?

   

분별하여 모양을 취하느라 헛수고하지 않으면 저절로 잠깐 사이에 도를 얻을 것이다. 그대들이 분주하게 옆 사람에게 배워서 얻으려 한다면 삼 아승지겁 동안 애를 써도 결국은 생사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아무런 일 없이 총림의 선상 구석에서 두 다리를 틀고 앉아 있느니만 못하리라.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예컨대 여러 곳에서 학인이 찾아왔을 때 주인과 객이 인사를 나눈 뒤 학인이 대뜸 한마디를 던져 앞에 있는 선지식을 알아보려고 한다.

   

이를테면 학인으로부터 한 가지[箇] 시험하는 말[機權語路]을 끄집어내어 선지식을 향해서 입씨름하는 말[口角頭]을 던져서, ‘보십시오! 스님께서는 이걸 아십니까?’라는 질문을 당하게 된다. 그 때 선지식이 만약 시험하는 말이라는 것[是境]을 알면 그 말을 잡아서 곧바로 학인을 궁지로 몰아넣는다[구덩이에 던져버린다]. 그 때 학인은 곧 태도를 고치고 평상의 자세로 돌아간 뒤 곧 선지식의 말[가르침]을 찾는다. 그러면 선지식은 여전히 그를 부정해버린다. 학인이 말하기를 ‘참으로 지혜로우십니다. 큰 선지식이십니다.’라고 한다. 그 선지식은 곧 ‘이 녀석은 도대체 좋고 나쁜 것도 모르는구나’라고 한다.

   

또 선지식이 하나의 시험하는 말[境塊子]을 학인 앞에 내놓고 희롱하면 그 학인이 알아차리고 하나하나 주제를 지어서 경계에 미혹함을 받지 않는다.

   

다시 선지식이 곧 진심을 조금[半身] 드러내 보이면 학인은 곧바로 “할!”하고 고함을 친다. 선지식이 다시 여러 가지 차별된 말로 시험해 보는데, 학인이 ‘좋고 나쁜 것도 모르는구나. 이 늙고 머리 깍은 종아.’ 하면 선지식은 찬탄하기를, ‘진정으로 도를 배우는 벗이로다.’라고 한다.

   

제방의 여러 선지식들은 삿된 것과 바른 것을 구분하지 못한다. 그래서 학인이 찾아와서 보리와 열반과 삼신(三身)과 경계와 지혜 등을 묻는다. 눈이 먼 노사는 그에게 해설을 해 주다가 학인으로부터 꾸짖고 힐난함을 받게 되면 곧바로 몽둥이로 후려치면서 ‘이 예의와 법도도 모르는 놈아!’라고 한다. 그것은 스스로 그대들 선지식들이 안목이 없기 때문이다. 그 학인에게 화를 내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좋고 나쁜 것을 모르는 머리 깎은 중들이 있어서 동쪽을 가리키다 서쪽을 가리키고, 맑은 날을 좋아하다가 비오는 날을 좋아하며, 등롱(燈籠,등불을 켜서 어둠을 밝히는 기구)과 노주(露柱,법당의 드러난 둥근 기둥)를 좋아한다.

   

그대들은 잘 보아라! 

눈썹에 털이 몇 개가 남아 있는가? 

   

이 일에는 기연(機緣)이 갖추어져 있는데 학인들은 알지 못하고 곧 미쳐버리는 것이다. 이런 무리들은 모조리 여우나 귀신 도깨비들이다. 그 좋은 학인들에게 ‘이 눈멀고 머리 깍은 늙은이가 온 천하 사람들을 미혹하고 어지럽게 만드는 구나’라는 비웃는 말을 듣게 되는 것이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출가한 사람은 무엇보다 도를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지난날 계율에 마음을 두기도 하였고, 경론을 연구하기도 하였다. 나중에서야 그것들이 세간을 구제하는 약이며 겉으로 드러내어 표현하는 것인 줄을 알았다. 드디어 몽땅 다 버려 버리고 도에 대해서 묻고 선을 참구하였다. 그런 뒤에 큰 선지식을 만나 뵙고 나서야 마침내 도안(道眼)이 분명해져서, 비로소 천하의 노화상들이 삿된지 바른지를 알아볼 수 있었다. 이것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나면서부터 바로 안 것이 아니다. 깊이 연구하고 갈고 닦아서 어느 날 아침에 스스로 살펴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법다운 견해를 터득하려면 남에게 미혹[속임]을 당하지 말고 안에서나 밖에서나 마주치는 대로 곧바로 죽여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아라한을 만나면 아라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속을 만나면 친속을 죽여라. 그래야 비로소 해탈하여 사물에 구애되지 않고 투철히 벗어나서 자유자재하게 된다.

   

제방에서 도를 배우는 벗들은 말이나 형상에 의지하지 않고 내 앞에 나온 자는 하나도 없었다. 산승은 여기에서 처음부터 그들을 쳐버린다. 손에서 나오면 손으로 치고, 입에서 나오면 입으로 치며, 눈에서 나오면 눈으로 쳐버린다. 다만 홀로 벗어나서 나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모두가 옛날 사람들의 부질없는 지식이나 언어나 행위들[閑機境]을 숭상하고 받드는 것이었다.

   

산승은 남에게 줄 법이 하나도 없다. 다만 병에 따라 치료를 해주고 묶여있는 것을 풀어줄 뿐이다. 그대들 제방의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시험 삼아 사물에 전혀 의존하지 말고 나와 보아라. 나는 그대들과 법에 대해서 문답을 하고 싶구나. 15년이 지나도록 누구 한 사람 없었다. 모두가 풀이나 나무 잎사귀나 대나무나 나무에 붙어사는 귀신들이다. 또 여우나 도깨비 같은 것들이다. 모두 똥 덩어리에 달라붙어 어지럽게 씹어 먹는 것들이다.

   

야 이 눈 먼 놈들아, 저 시방의 신도들이 신심으로 시주한 물건을 마구 쓰면서 ‘나는 출가한 사람이다’라고 하여 이와 같은 견해를 짓고 있구나. 나는 그대들에게 분명히 말하고자 한다. 부처도 없고 법도 없고 닦을 것도 없고 깨칠 것도 없는데, 어쩌면 그렇게들 옆집으로만 다니면서 무슨 물건을 구하는가? 야, 이 눈멀고 어리석은 놈들아! 머리 위에 또 머리를 얹는구나. 너희들에게 무엇이 부족하단 말인가?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그대들 눈앞에서 작용하는 이놈이 바로 할아버지 부처님과 다르지 않다. 왜 믿지 않고 밖에서 찾는가? 착각하지 말라. 밖에도 법이 없으며 안에도 또한 얻을 것이 없다. 그대들은 산승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는 것보다는 모든 생각을 쉬어서 아무 일 없이 지내는 것이 차라리 낫다.

   

이미 일어난 것은 계속하지 말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은 일어나지 않도록 하여라. 이렇게 한다면 10년을 행각하는 것보다 더 나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런 허다한 일[소승, 대승, 출가, 속가, 수행의 단계 등]은 없는 것이니 다만 평소대로 옷입고 밥먹으며 아무런 일없이 세월을 보내는 것 뿐이니라.

   

제방에서 온 그대들은 모두가 마음이 있다. 부처를 구하려고 하며, 법을 구하려고 하며, 해탈을 구하여 삼계를 벗어나려고 한다.

   

어리석은 이들아! 그대들이 삼계를 벗어나서 어디로 가려고 하는가? 부처와 조사란 보기 좋은 올가미로 만든 이름과 글귀일 뿐이다. 그대들은 삼계가 무엇인지 알고 싶은가? 지금 그대들이 법문을 듣고 있는 그 마음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들의 한 생각 탐내는 마음이 욕계(欲界)고, 한 생각 성내는 마음이 색계(色界)며, 한 생각 어리석은 마음이 무색계(無色界)니라. 이 삼계는 바로 그대들의 집속에 있는 살림살이들인 것이다. 삼계가 스스로 ‘내가 바로 이 삼계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눈앞에서 아주 분명하게 만물을 비추어 보고 세계를 가늠하는 그 사람이 삼계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큰스님들이여! 사대로 되어 있는 이 몸뚱이는 덧없는 것이다. 비장과 위와 간과 쓸개와 머리카락과 털과 손톱과 이빨마저도 오직 모든 것이 텅 비어있는 모양임을 보여줄 뿐이다. 그대들의 한 생각 마음이 쉰 곳을 보리수라 하고, 한 생각 마음이 쉬지 못하는 곳을 무명수라 한다. 무명은 머무는 곳이 없으며, 처음과 끝이 없다. 그러므로 그대들이 만약 순간순간의 마음이 쉬지 못한다면 곧 무명수 위에 올라가서 곧바로 사생 육도(四生六道)에 들어가서 털이 나고 뿔이 달리는 짐승이 될 것이다.

   

그대들이 만약 쉬기만 하면 그대로가 곧 청정법신의 세계다. 그대들이 한 생각도 나지 않으면 곧 보리수에 올라 삼계에서 신통 변화하여 마음대로 화신의 몸을 나타내리라. 그래서 법의 기쁨과 선의 즐거움[法喜禪悅]으로 몸의 광명이 저절로 빛날 것이다. 옷을 생각하면 비단 옷이 천 겹으로 걸쳐지고, 밥을 생각하면 백 가지 진수성찬이 그득히 차려지며, 다시는 뜻밖의 병이나 가난으로 오는 병에 걸리는 일도 없을 것이다. 보리는 어떤 주처가 없다. 그러므로 얻을 것도 없느니라.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대장부가 또 무엇을 의심하는가? 눈앞에서 작용하는 이가 다시 또 누구인가? 잡히는 대로 쓰며 이름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심오한 뜻이다. 이와 같이 볼 수 있다면 싫어할 것이 없는 도리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마음은 만 가지 경계를 따라 흘러가지만 흘러가는 그곳이 참으로 그윽하여라. 마음이 흘러가는 그곳을 따라 성품을 깨달으니 기쁨도 없고 근심도 없도다.’라고 하였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선종의 견해로는 삶과 죽음이 돌고 도는 것이니, 참선을 하는 사람들은 매우 자세히 살펴야 한다. 주인과 손님이 서로 만나면 곧 말들을 주고받는데, 혹은 사람에게 맞추어서 모습을 나타내기도 하고, 혹은 전체작용(全體作用)을 하기도 하며, 혹은 기연과 방편으로 기뻐하거나 성내기도 하며, 혹은 몸을 반쯤 나타내 보이기도 하며, 혹은 사자를 타기도 하고, 혹은 코끼리를 타기도 한다.

   

만약 진정한 학인이 있어서 대뜸 “할”을 하여 아교풀을 담은 단지를 하나 내놓으면 선지식은 그것이 경계[미끼]인 줄 모르고 곧 그 경계에서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지어 낸다. 이것을 본 학인이 다시 “할”을 하여도 앞의 선지식은 이를 놓아버리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의사도 고칠 수 없는 불치[膏盲]의 병이다. 이런 경우를 ‘객이 주인을 본[看破]다.’라고 한다.

   

혹은 또 다른 경우는, 선지식이 아무 것도 내놓지 않고 학인이 물으면 묻는 대로 곧 빼앗아 버린다. 학인이 빼앗기고는 한사코 놓아버리려 하지 않으면 이것을 ‘주인이 객을 간파한다.’라고 한다.

   

혹 어떤 학인이 일개 청정한 경계를 선지식 앞에 내놓으면 선지식이 그것이 경계인 줄을 알아차리고 집어다가 구덩이 속에 던져버린다. 그래서 학인이 ‘참으로 훌륭한 선지식이십니다’라고 하면 선지식은 곧 ‘쯧쯧, 좋고 나쁜 것도 모르는 구나’라고 한다. 그러면 학인이 절을 하는데 이것을 ‘주인이 주인을 간파한다.’고 한다.

   

혹 또 어떤 학인이 목에 칼을 쓰고 발에 족쇄를 찬 채 선지식 앞에 나타나면, 선지식이 그 위에다 다시 칼과 족쇄를 한 겹 더 씌워버리는데도 학인이 기뻐하여 피차가 서로 분간하지 못하면, 이것을 ‘객이 객을 간파한다.’고 한다.

   

큰스님들이여, 산승이 이와 같이 예를 든 것은 모두가 마군과 이단을 가려내서 삿된 것과 바른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이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진실한 마음을 내기는 매우 어려운 것이고 불법은 심오하지만 알고 보면 별것이 아닌 당연한 일[可可]이다. 산승은 온 종일 그들로 더불어 설파해 주지만 공부하는 이들은 도대체 마음을 쓰지 않는다. 천 번 만 번 밟고 다니면서도 도무지 깜깜하다. 아무런 형체도 없으면서 밝고 뚜렷한 이것을 학인들은 믿지 못하고 명자와 글귀위에서 이해하려 한다. 나이가 오십이 넘도록 단지 송장을 짊어지고 밖으로만 다니는구나. 이렇게 짐을 지고 천하를 돌아다녔으니 짚신 값을 받을 날이 있으리라.

   

큰스님들이여! 산승이 밖에는 법이 없다고 말하면 공부하는 이들이 알아듣지 못하고 곧 안으로 알음알이를 지어서 벽을 보고 앉아 혀를 입천장에 붙이고 가만히 움직이지 않고 있다. 그리고는 이것을 조사문중[祖門]의 불법이라 여기는데 크게 잘못 아는 것이다. 그대들이 만약 움직임이 없는 청정한 경계를 옳다고 여긴다면 그대들은 저 무명(無明)을 주인으로 잘못 아는 것이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깊고 깊어 캄캄한 구덩이는 참으로 무섭고 두렵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그대들이 만약 움직이는 것을 오인해서 옳다고 한다면 온갖 초목들도 다 움직일 줄 아니 그것도 응당 도이리라. 그러므로 움직이는 것은 바람의 성질이고 움직이지 않는 것은 땅의 성질이다.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이 모두 다 고정된 자성이 없다. 그대들이 만약 움직이는 곳에서 그것을 붙잡으려 하면 그것은 움직이지 않는 곳에 서 있다. 또 그대들이 만약 움직이지 않는 곳에서 그것을 붙잡으려 하면 그것은 움직이는 곳에 서 있다. 비유하자면 마치 물속에 있는 물고기가 물결을 치면서 뛰어오르는 것과 같다.

   

큰스님들이여,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음이 두 가지 경계이다. 의지함이 없는 도인[無依道人]이라야 움직임도 쓰고 움직이지 않음도 쓰느니라.

   

제방의 학인들이 찾아오면 산승은 여기서 세 가지의 근기로 그들을 판단한다. 중하근기가 오면 나는 곧 경계만 빼앗고 그 법을 없애지 않는다. 혹 중상근기가 오면 나는 곧 경계와 법을 함께 빼앗는다. 만약 상상의 근기가 오면 나는 곧 경계와 법과 사람을 다 빼앗지 않는다. 만약 격을 벗어난 뛰어난 견해를 가진 사람이 오면 나는 여기서 곧 전체작용을 나타내어 근기를 따지지 않는다.

   

큰스님들이여, 여기에 이르게 되면 공부하는 이가 힘을 한껏 써야 한다. 바람도 통하지 않고 전광석화까지도 곧 지나가 버린다. 학인이 만약 눈만 깜박여도 곧 교섭이 없어진다. 마음으로 헤아리려 하면 곧 틀리며, 생각을 움직였다하면 바로 어긋나 버린다. 그러나 아는 사람은 눈앞을 여의지 않을 것이다.

   

큰스님들이여, 그대들은 바랑에 똥짐을 짊어지고 옆으로 내달리며 부처를 구하고 법을 구하는데, 지금 그렇게 구하는 바로 그 사람이 누구인지 그대들은 아는가?

   

활발발하게 작용하지만 그 뿌리가 없으니 움켜잡아도 모이지 않고 펼쳐도 흩어지지가 않는다. 구할수록 더욱 멀어지고, 구하지 않으면 도리어 눈앞에 있다. 신령스런 소리가 귓전에 들리는데 만약 이것을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면 백년 세월을 헛수고만 할 뿐이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한 찰나 사이에 연화장 세계에 들어가고 비로자나불의 국토에도 들어간다. 해탈국토에도 들어가고 신통국토에 들어가고 청정국토에도 들어간다. 법계에도 들어가며 깨끗한 곳에 들어가고 더러운 곳에도 들어간다. 범부의 세계에도 들어가고 성인의 세계에도 들어가며, 아귀·축생의 세계에도 들어간다.

   

그러나 곳곳마다 찾고 또 찾아보아도 아무 곳에도 생사가 있음을 보지 못하고 허망한 이름만 있을 뿐이다. 환영이며 허깨비며 헛꽃인 것을 애써 붙잡으려 하지 말고 이득과 손실과 옳고 그름을 일시에 모두다 놓아버려라.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산승의 불법은 확실하고 분명한 선문의 정통을 계승한 것이다. 위로부터 내려온 마곡화상과 단하화상(738-823)과 도일화상(709-788)과 여산화상과 석공화상은 한길로 조사선의 가풍을 천하에 두루 폈는데 아무도 믿지 않고 모두들 비방만 하고 있다.

   

예컨대 도일화상이 법을 쓴 것은 매우 순수하여 잡티가 없었다. 그 분으로부터 도를 배우던 3백에서 5백이나 되는 학인들은 모두 다 화상의 뜻을 보지 못하였다. 여산화상은 자재하시고 참되고 바른 분이었다. 순으로 혹은 역으로 법을 쓰는 것을 학인들이 그 경계를 측량하지 못하고 모두 다 갈팡질팡 하였다. 단하화상은 구슬을 굴리는 솜씨가 자유자재하여 보였다 안보였다 한다. 찾아오는 학인들마다 모두 꾸지람을 들었다. 마곡화상이 법을 쓰는 것은 그 쓰기가 소태나무와 같아서 모두들 가까이하지 못하였다. 또 석공화상이 법을 쓰는 것은 화살 끝에서 사람을 찾는 것이어서 오는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던 것이다.

   

산승이 오늘날 법을 쓰는 것은 진정으로 만들기도 하고 부수기도 하며 가지고 놀기도 하고 신통변화를 부리기도 한다. 일체 경계에 들어가지만 가는 곳마다 아무 일이 없어서 경계가 나를 빼앗지 못한다. 누가 찾아와서 구하는 이가 있으면 나는 곧 바로 그를 알아보지만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래서 내가 곧 몇 가지 옷을 입어 보이면 학인들은 알음알이를 내어 한결같이 나의 말 속으로 끌려 들어오고 마니 슬픈 일이다.

   

눈멀고 머리 깎은 중이나 안목 없는 사람들이 내가 입은 옷을 가지고 푸르거나 누르거나 붉거나 흰 것으로 오인하고 있다. 내가 옷을 벗어버리고 텅 빈 경계에 들어가면 학인은 한번 보고 기꺼운 생각을 낸다. 또 내가 다시 벗어버리면 마음 둘 바를 몰라 바쁘게 달아나면서 나에게 옷이 없다고 말한다. 내가 그들에게 ‘그대는 내가 옷을 입는 그 사람을 아는가?’ 라고 물으면, 홀연히 머리를 돌려버리고 나를 잘못 알고 만다.

   

큰스님들이여! 그대들은 옷을 잘못 알지 말라. 옷은 제 스스로 움직일 수 없다. 사람이 능히 옷을 입을 수 있다. 청정한 옷이 있고, 생사가 없는 옷이 있으며 보리의 옷과 열반의 옷이 있으며, 조사의 옷과 부처의 옷도 있느니라.

   

큰스님들이여! 다만 소리와 명칭과 문구 따위로만 있을 뿐 모든 것은 옷에 따라 변화하는 것들이다. 배꼽 아래 단전으로부터 울려 나와서 이빨이 딱딱 부딪쳐 그 글귀와 의미를 이루는 것이니, 이것은 분명히 환화임을 알아야 한다.

   

큰스님들이여! 밖으로 소리 내어 말을 하고 안으로 마음먹은 것을 표현하며 생각으로 헤아리는 것은 모두가 옷에 지나지 않는다. 그대들이 그렇게 걸치고 있는 옷을 오인하여 실다운 견해라고 여긴다면 한량없는 세월을 보내더라도 다만 옷에 대해서만 통달할 뿐이다. 삼계에 돌고 돌며 생사에 윤회하게 되니 차라리 아무 일 없는 것만 같지 못하니라. 서로 만나도 알아보지 못하고 함께 이야기해도 상대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격이다.

   

오늘날 학인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은 대개가 이름과 문자를 잘못 알아서 알음알이를 내기 때문이다. 큰 노트에다 죽은 노인들의 말씀을 베껴 가지고 세 겹 다섯 겹 보자기에 싸서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하고 그것을 오묘한 이치라 하며, 애지중지 하는데 아주 잘못된 일이다. 눈멀고 어리석은 바보들아! 그대들은 말라빠진 뼈다귀에서 무슨 국물을 찾고 있는가?

   

좋고 나쁜 것도 모르는 어떤 무리들이 있어서 경전을 자기 나름대로 이리저리 따져서 의미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마치 똥 덩어리를 입 속에 넣었다가 다시 뱉어서 다른 사람에게 먹여주는 것과도 같다. 또 속인들이 비밀한 말을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것과 같으니 일생을 헛되이 보내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출가한 사람이다.’ 라고 떠벌리지만 불법에 대해서 질문을 받으면 입을 꾹 다물고 한마디도 못한다. 멍하니 쳐다 보는 눈은 새까만 굴뚝 같고 입은 서까래를 건 것 같구나. 이와 같은 무리들은 미륵 부처님이 나오시더라도 다른 세계로 옮겨가서 지옥에 살면서 고통을 받을 것이다.

   

큰스님들이여! 그대들은 바쁘게 제방을 쏘다니며 무엇을 구하느라고 그대들의 발바닥이 넓적하도록 걸어 다녔는가? 부처는 구할 수 없고, 도는 이룰 수 없으며, 법은 얻을 것이 없느니라. 밖으로 형상이 있는 부처를 구한다면 그대들과는 닮지 않은 것이다. 그대들의 본래 마음을 알고자 하는가? 함께 있는 것도 아니고 떠나 있는 것도 아니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참된 부처는 형상이 없고, 참된 도는 실체가 없으며, 참된 법은 모양이 없다. 이 세 가지 법이 섞이고 융통하여 한 곳에 화합한 것이니, 이러한 이치를 알지 못하는 것을 망망한 업식중생이라고 한다.

   

“무엇이 참 부처며, 참 법이며, 참된 도인지 비옵건대 가르쳐 주십시오.”

“부처란 마음이 청정한 것이고, 법이란 마음이 밝은 것이며, 도란 어디에나 걸림이 없는 깨끗한 빛이다. 이 셋이 곧 하나이니 모두가 헛이름일 뿐, 실제로 있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도를 지어가는 사람이라면 순간순간 마음에 틈새가 없어야 한다.

   

달마대사께서 인도에서 오신 것은 다만 남에게 속지 않는 사람을 찾기 위해서였다. 뒤에 2조를 만났는데 2조가 한마디 말에 곧 깨닫고 비로소 종전의 공부가 헛된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던 것이었다.

   

산승의 금일 견해는 조사나 부처와 다르지 않다. 만약 제 일구에서 깨달으면 할아버지 부처의 스승이 된다. 만약 제 이구에서 깨달으면 인간과 천상계의 스승이 된다. 만약 제 삼구에서 깨달으면 자기 자신마저도 구제하지 못할 것이다."

   

“달마대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은 무엇입니까?”

“만약 뜻이 있다면 자기 자신도 구제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미 뜻이 없었다면 2조께서는 어떻게 법을 얻었습니까?”

“얻었다는 것은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미 만약 얻지 못했다면 어떤 것이 얻지 못했다는 뜻입니까?”

“그대들은 모든 곳을 향하여 치달려 구하는 마음을 쉬지 못하므로 달마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애닯다. 장부들아! 머리가 있는데 또 머리를 찾는구나.’ 하신 것이다. 그대들은 말끝에서 곧 스스로 자신의 본래 모습을 되돌아보아라. 더 이상 다른데서 찾지 말고 이 몸과 마음이 할아버지 부처와 다르지 않음을 알아서 당장에 아무 일 없게 되면 바야흐로 법을 얻었다고 하는 것이다.”

   

큰스님들이여! 산승이 오늘 부득이해서 쓸데없이 더러운 소리를 많이 하고 있는데 그대들은 착각하지 말라. 내가 보기에는 실로 이처럼 허다한 도리는 없다. 작용하게 되면 곧 작용하고 작용하지 않으면 곧 쉰다.

   

다만 제방에서는 육도만행을 부처님의 법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것을 장엄하는 것이고 불사를 짓는 일이지 불법은 아니라고 말한다.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는 재계를 지키고 계행을 가지며, 기름이 가득 찬 그릇을 들고 가도 출렁거리지 않게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행동하더라도 도를 보는 안목이 밝지 못하면 모두가 빚을 지지 않을 수 없으니 밥값을 갚을 날이 있을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불도에 들어와서 이치를 통하지 못하면, 몸을 바꾸어 신도들의 시줏빚을 갚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자가 81살이 되자 그의 집에 있는 나무에서 비로소 버섯이 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는 것이다.

   

외로운 산봉우리에 혼자 살며 아침 한 끼만 공양을 하고 눕지도 않고 앉아서 밤낮으로 도를 닦는다 하여도 모두 다 업을 짓는 사람들이다. 머리와 눈과 골수와 뇌를 보시하고, 나라와 성곽과 아내와 자식을 보시하고, 코끼리와 말과 일곱 가지 값진 보물들을 모조리 다 기꺼이 보시하더라도 이와 같은 견해는 모두가 몸과 마음을 괴롭히기 때문에 괴로운 과보를 다시 불러오는 것이다. 차라리 아무 일도 없이 순일하여 잡스런 것이 없는 것만 같지 못하니라.

   

또 십지에 오른 보살조차도 이 도인들의 자취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천신들이 기뻐하고 지신들이 그의 발을 받들어 모시며, 시방의 모든 부처님들이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다. 어째서 그런가? 지금 법문을 듣고 있는 도인이 작용하는 그 곳에는 아무런 자취가 없기 때문이니라.

   

“대통지승 부처님께서 십 겁 동안 도량에 앉아 계셨지만 불법이 나타나지 않아서 불도를 이루지 못하였다고 하는데 그 뜻이 무엇입니까? 스님께서 지시하여 주십시오.”

   

“대통이라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 어디에서나 만법은 성품과 모양이 없음을 통달하는 것을 대통이라 한다. 지승이라는 것은 어디에서나 의혹이 없어서 한 가지 법도 얻을 것이 없음을 지승이라 한다. 불이란 마음의 청정한 광명이 온 법계를 꿰뚫어 비추는 것을 불이라 한다. 십 겁 동안 도량에 앉았다고 하는 것은 십바라밀을 닦는 것이다. 불법이 나타나지 않았다 하는 것은 부처란 본래 생기는 것이 아니고 법은 본래 없어지는 것이 아닌데 무엇이 다시 나타나겠는가? 불도를 이루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부처가 다시 부처를 지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부처님은 항상 세간에 계시면서도 세간의 법에 물들지 않는다.’고 하였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그대들이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일체 만물을 따라가지 말아라. 마음이 생겨나면 갖가지 법이 생겨나고 마음이 없어지면 갖가지 법이 없어진다. 한 마음이 생겨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세간이건 출세간이건 부처도 없고 법도 없다. 나타난 적도 없고 일찍이 잃어버린 일도 없다.

   

설혹 부처와 법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가 명칭과 말과 문장일 뿐이다. 어린 아이들을 달래기 위한 것이다. 병에 따라 쓰이는 약이다. 표현하는 이름과 문구일 뿐이다. 그런데 이름과 문구도 스스로 이름과 문구라고 하지 않는다. 또한 그대들 눈앞에서 아주 밝고 분명하게 느끼고 듣고 알며 비춰보는 그 사람이 모든 이름과 문구를 만들어 두었다.”

   

“큰스님들이여! 무간지옥에 떨어질 다섯 가지 업을 지어야 바야흐로 해탈하게 되느니라.”


“무엇이 오무간업입니까?”

"아버지를 죽이는 것과 어머니를 해치는 것과 부처님의 몸에 피를 내는 것과 화합 승단을 깨뜨리는 것과 경전과 불상을 불사르고 깨뜨리는 것이 오무간업이다.”

 

“무엇이 아버지입니까?”

“무명이 아버지다. 그대들이 한 생각 마음이 일어났다 없어졌다 하는 곳을 찾을 수 없어 마치 허공에 메아리가 울리는 것 같고 어디를 가나 일이 없는 것이 아버지를 죽인 것이니라.”

   

“무엇이 어머니입니까?”

“탐내고 애착하는 것이 어머니이다. 그대들의 한 생각 마음이 욕계에 들어가 그 탐내고 애착하는 것을 찾아보아도 오직 모든 법은 공한 모양임을 볼 뿐이고 어디에나 집착하지 않는 것이 어머니를 해친 것이니라.”

   

“무엇이 부처님의 몸에 피를 내는 것입니까?”

“그대들이 청정한 법계에서 한 생각 마음에 알음알이를 내지 않고 어디에서는 캄캄한 것[절대평등]이 부처님의 몸에 피를 내는 것이니라.”

   

“무엇이 화합승단을 깨뜨리는 것입니까?”

“그대들의 한 생각 마음이 번뇌의 속박을 바르게 통달하여 마치 허공이 의지하는 바가 없는 것 같은 것이 화합승단을 깨뜨린 것이니라.”

   

“무엇이 경전과 불상을 불사르는 것입니까?”

“인연이 비고 마음이 비고 법이 비었음을 보아서 한 생각에 결정코 끊어서 초연히 일이 없는 것이 경전과 불상을 불사르는 것이니라.”


큰스님들이여! 만약 이와 같이 통달한다면 범부다 성인이다 하는 이름에 구애되지 않을 것이다. 그대들의 한 생각 마음이 빈주먹 속에서 무엇인가 있다는 생각을 낸다. 또 육근과 육진의 법에서 공연히 없는 것을 만들어 내어 괴이한 짓을 하여 스스로를 가볍게 여기고 뒷걸음질 치면서 ‘나는 범부고 저분은 성인이시다.’라고 한다. 이 머리 깍은 바보들아! 무엇이 그리 다급하여 사자의 가죽을 쓰고 여우의 울음소리를 내는가?

   

대장부 사나이가 장부의 기개를 펴지 못하고 자기 집안의 보물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단지 바깥으로만 찾아다닌다. 옛사람들이 만든 부질없는 명칭과 문구에만 사로잡혀 이리저리 이 말에 의지하고 저 말에 의지하여 분명하게 통달하지 못한다. 경계를 만나면 곧 거기에 반연한다. 육진을 만나면 곧 또 집착한다. 닿는 곳마다 미혹을 일으켜서 스스로 정해진 기준이 없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산승이 말하는 것도 취하지 말라. 왜냐? 내말에도 아무런 근거와 의지할 데가 없다. 잠깐 허공에 대고 그림을 그린 것이다. 또 남이 그린 그림이나 형상에 채색을 입히는 것과 같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부처를 최고의 경지라고 여기지 말라. 나에게는 그것이 마치 화장실의 변기와 같은 것이다. 보살과 나한은 모두 다 목에다 씌우는 칼과 발을 묶는 족쇄와 같이 사람을 결박하는 물건들이다. 그러므로 문수는 긴 칼을 비껴들고 부처님을 죽이려 했고, 앙굴리마라는 단도를 가지고 석가모니를 해치려 한 것이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부처란 얻을 것이 없는 것이다. 삼승과 오성과 원돈교의 자취마저도 모두다 그때그때의 병에 따라 약을 주는 것이지 고정된 실다운 법이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설사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말로 표현하는 길거리의 광고 게시판이다. 문자를 알맞게 배열해 놓은 것이다. 임시로 이와 같이 이야기 해 본 것일 뿐이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어떤 머리 깍은 사람들이 있어서 곧 그러한 것에 공을 드려서 출세간법을 구하려고 한다. 그것은 잘못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부처를 구한다면 그 사람은 부처를 잃을 것이고, 만약 도를 구한다면 도를 잃을 것이며, 만약 조사를 구하다면 조사를 잃을 것이다.

   

큰스님들이여! 착각하지 말라. 나는 그대들이 경과 논을 잘 알고 있는 것을 높이 사지 않는다. 나는 또 그대들이 국왕이나 대신이라 하더라도 높이 사지 않는다. 나는 또 그대들이 폭포수처럼 유창한 말솜씨를 가졌더라도 높이 사지 않는다. 나는 또 그대들이 총명하고 지혜롭다 하더라도 높이 사지 않는다. 오직 그대들이 진정한 안목을 가지기를 바랄 뿐이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설사 백 권의 경과 논을 이해한다 하더라도 일개 일 없는 스님만 같지 못하다. 그대들이 그런 것들을 안다고 하더라도 곧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여 승부를 다투는 아수라가 될 뿐이고 나와 남을 분별하는 무명 번뇌로 지옥의 업을 기를 뿐이다. 예컨대 선성 비구가 십이분교를 잘 알면서도 산 채로 지옥에 떨어져서 대지도 용납하지 않았다. 차라리 아무 일없이 쉬고 쉬느니만 같지 못하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잠이 오면 눈을 감으면 된다. 어리석은 사람은 나를 보고 비웃겠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알 것이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문자 속에서 찾지 말라. 마음이 움직이면 피곤하고 찬 기운을 마시면 좋을 것이 없다. 차라리 한 생각 인연으로 일어난 법이 본래 생멸이 없음을 깨달아 삼승의 방편 학설을 공부하는 보살들을 뛰어넘는 것만 같지 못하니라.

   

큰스님들이여!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지 말라. 산승이 지난날 견처가 없었을 때는 도무지 캄캄하고 답답하였다. 세월을 헛되이 보낼 수 없어서 속은 타고 마음은 바빠서 분주히 도를 물으려 다녔다. 그런 뒤에 힘을 얻고 나서야 비로소 오늘에 이르러 같이 도를 닦는 여러분들과 이렇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도를 닦는 그대들에게 권하노라. 옷과 밥을 생각하지 말라. 세월은 쉽게 지나가고 선지식은 만나가 어려워 우담바라 꽃이 때가 되어야 한 번 피는 것과 같으니라.

   

그대들 제방에서는 임제라는 노장이 있다는 말을 듣고 이곳으로 오자마자 곧 질문을 하여 말문이 막히게 하려고 한다. 그러다가 산승의 전체작용(全體作用)을 당하고 나서 그 학인은 부질없이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입도 열지 못한다. 멍청하여져서 어떻게 대답할지를 모른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용과 코끼리가 힘껏 나아가는데 나귀 따위가 감당할 바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대들 제방에서는 가슴을 치고 옆구리를 치면서 ‘나는 선을 알고 도를 안다.’고 하여 으스대지만, 두 사람이건 세 사람이건 여기에 와서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구나. 애달프다. 그대들은 이 훌륭한 몸과 마음을 가지고 가는 곳마다 두 조각 입술을 나불대면서 다른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 철퇴를 얻어맞을 날이 있을 것이다. 출가한 사람이라 할 수 없다. 모두 아수라의 세계에 빠지게 될 것이다.

   

   대저 지극한 도는 논쟁을 하여 높이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큰 소리를 쳐서 외도를 꺾는 것도 아니다. 불조가 면면이 서로 이어오는 것조차 무슨 별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다. 설혹 부처님의 말씀과 가르침이 있다 하더라도 교화하는 법도에 따른 삼승과 오성과 인천인과의 가르침에 떨어져 있을 뿐이다.

   

그러나 원교 돈교는 또한 그런 것이 아니다. 선재동자도 남김없이 법을 구하고 선지식을 찾는 일을 마치지는 못하였다.

   

큰스님들이여! 마음을 잘못 쓰지 말라. 마치 큰 바다가 죽은 시체를 그냥 머물러 두지 않듯 하니라. 그렇게 한 짐 잔뜩 짊어지고 천하를 돌아다니니, 스스로 견해의 장애를 일으켜 마음을 막는 것이다. 해가 뜨고 구름 한 점 없으니 아름다운 하늘에 온통 햇빛이 비친다. 눈에 병이 없으니 허공에 꽃이 없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그대들이 법답게 되기를 바란다면 오직 의심을 내지 말아라. 펼치면 온 법계를 싸고도 남는다. 거두면 실 끝도 세울 데가 없다. 뚜렷하고 호젓이 밝아 일찍이 조금도 모자란 적이 없었다. 눈으로도 볼 수도 없고 귀로도 들을 수도 없으니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겠는가? 옛사람이 이르기를 ‘설사 한 물건이라 하여도 맞지 않다.’하였다. 그대들은 다만 자기 스스로를 보아라. 더 이상  무엇이 있겠는가? 설명한다 해도 끝이 없다. 각자가 힘껏 노력하여라. 편히 쉬어라.


감변(勘辨)


1. 호랑이 수염을 뽑다


황벽스님께서 부엌에 들어갔을 때, 공양주에게 물었다. 

“무얼 하느냐?”

“대중 스님들이 먹을 쌀을 가리고 있습니다.”

“하루에 얼마를 먹느냐?”

“두 섬 닷 말을 먹습니다.”

“너무 많지 않느냐?”

“오히려 적을까 싶습니다.”

   

그러자 황벽스님이 공양주를 때렸다. 공양주가 이 일을 임제스님에게 말씀드리니, 임제스님이 

“내가 그대를 위해 이 늙은이를 점검해 보리라.”하였다. 그리고는 곧 바로 가서 황벽 스님을 뵈오니 황벽 스님이 앞의 이야기를 먼저 하였다. 


임제스님이 황벽스님께

“공양주가 알지 못하니 스님께서 대신 한 말씀 하십시오. 너무 많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내일 한 번 더 먹는다고 왜 말하지 못하느냐?”

“무엇 때문에 내일을 말씀하십니까? 지금 잡수십시오.”하고 곧 황벽스님을 손바닥으로 쳤다. 황벽스님께서

“이 미친놈이 또 여기 와서 호랑이 수염을 뽑는구나.” 하셨다. 그러자 임제스님이 “할!”하시고 나가 버렸다.

   

2. 도적에게 집을 맡기는 격이다


뒷날 위산스님(771-853)께서 앙산스님(803-887)에게 물었다.

“이 두 존숙들의 참뜻이 무엇이겠는가?”

“화상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자식을 길러봐야 부모의 사랑을 아는 것이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그대는 어떻게 보는가?”

“도적을 집에 두었다가 집안을 망쳐놓은 것과 흡사합니다.”


3. 스님 셋을 후려치다


임제스님이 한 스님에게 “어디서 오는가?” 라고 물었다.

그 스님이 “할!”을 하였다.

임제스님이 허리를 공손히 굽히며 앉게 하였다.

그러자 그 스님이 머뭇거리므로 그대로 후려쳤다.

   

임제스님이 한 스님이 오는 것을 보고 곧 불자를 세우시니, 그 스님이 절을 하였다. 임제스님은 그대로 후려쳤다.

   

또 한 스님이 오는 것을 보고 마찬가지로 불자를 세우시니, 그 스님이 본 체도 하지 않았는데 임제스님이 이번에도 후려쳤다.


4. 나를 위해 그만 두시오


임제스님이 보화스님에게 말했다.

“내가 남방에 있으면서 황벽스님의 편지를 전하려고 위산에 도착했을 때 그대가 먼저 이곳에 와서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소. 그래서 내가 이곳에 와서 그대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내가 이제 황벽의 종지를 세우고자 하니 그대는 반드시 나를 위해서 도와주시오”

   

보화 스님은 인사를 하고 내려갔다. 뒤에 극부 스님이 오자 임제스님은 보화 스님에게 한 말과 똑같이 말했다. 극부 스님 역시 인사를 하고 내려갔다.

   

삼일 후에 보화 스님은 다시 올라와서 인사를 하고는 말했다.

“스님이 지난 날 무슨 말을 했지요?”

임제스님은 주장자를 들고서 곧 내리쳤다.

   

또 삼일 후에 극부스님이 올라와서 인사를 하고 물었다.

“스님은 전날 보화스님을 주장자로 내리쳤다고 하는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임제스님은 역시 주장자로 내리쳤다.

   

5. 너무 과격하다


임제 스님이 하루는 보화스님과 함께 시주의 집에서 재를 올리는데 참석하였다. 보화 스님에게 물었다.

“터럭 하나가 온 바다를 삼키고 겨자씨 한 알에 수미산을 담는다 하는데 이것은 신통묘용인가? 아니면 근본 바탕이 그렇기 때문인가?”

그러자 보화 스님이 공양을 차린 상을 걷어차 엎어버렸다.

임제 스님이 “너무 과격하구나!” 하니

보화 스님께서 “여기가 무엇을 하는 곳이길래 과격하다 점잖다 하십니까?” 하였다.

   

임제스님이 다음날 또 보화스님과 함께 재에 참석하여 물었다.

“오늘 공양이 왜 어제하고 같은가?”

보화스님이 전날과 마찬가지로 공양 상을 발로 차 엎어버렸다.

임제스님이 말하기를,

“옳다면 옳은 일이지만 너무 과격하다.” 하였다.

보화스님이 

“이 눈 먼 사람아! 불법에 대해 무슨 과격하다 점잖다 하는가?” 하였다.

임제스님이 혀를 내둘렀다.

   

6. 범부인가 성인인가


임제스님이 하루는 하양 장로와 목탑 장로와 함께 승당에 있는 화로 가에서 불을 쬐고 있다가 보화 스님의 이야기를 하였다.

“보화가 매일 길거리에서 미치광이 짓을 하는데 도대체 그가 범부인가요, 성인인가요?”

   

말이 끝나기도 전이 보화 스님이 들어오자 임제 스님이 보화 스님에게 바로 물었다.

“그대는 범부인가, 성인인가?”

“그대가 먼저 말씀해 보시오, 내가 범부입니까? 성인입니까?”


임제 스님이 “할!”을 하니 보화스님이 손으로 사람들을 가리키면서,

“하양은 새색시이고, 목탑은 노파선인데, 임제는 어린 종이다. 그러나 각각 한 개의 눈을 갖추었다.” 하였다.

임제 스님이

“야 이 도적놈아!” 하자

보화스님이

“도적을 도적질한 놈아!” 하면서 나가 버렸다.


7. 당나귀 한 마리


하루는 보화스님이 승당 앞에서 생야채를 먹고 있는 모습을  임제스님이 보시고,

“꼭 한 마리의 당나귀 같구나.” 하셨다. 보화스님이 곧 바로 당나귀 울음소리를 내니 

임제스님이 

“야, 이 도적놈아!” 하였다.

보화스님이

“도적을 도적질한 놈아!” 하면서 나가 버렸다.


8. 나는 처음부터 그를 의심하였다


보화 스님은 항상 거리에서 요령을 흔들며 말하였다.

“밝음으로 오면 밝음으로 치고, 어두움으로 오면 어두움으로 치며, 사방 팔면으로 오면 회오리바람처럼 치고, 허공으로 오면 도리깨질로 연거푸 친다.”


임제 스님이 시자를 보내며

“보화 스님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바로 멱살을 움켜잡고 ‘아무 것도 오지 않을 때는 어찌하십니까?’ 하고 물어 보라.” 하였다.

그대로 하자 보화 스님은 시자를 밀쳐 버리면서,

“내일 대비원에서 재가 있느니라.”고 하였다. 

   

시자가 돌아와 말씀드리니 임제 스님이 말씀하였다.

“나는 벌써부터 그를 의심해 왔다.”


9. 한 노스님을 점검하다


어떤 한 노스님이 임제 스님을 찾아뵙고 인사도 나누기 전에   “절을 해야겠습니까. 절을 하지 않아야겠습니까?” 라고 물었다.

임제 스님이 곧 “할!”을 하므로 그 노스님이 곧바로 절을 하였다.

임제 스님이 “정말 좀도둑이로다.” 하였다.

   

그러자 노스님이 “도둑을 도둑질하는 놈.” 하고 나가 버렸다.

임제 스님이 “무사한 것이 좋다고 말하지 말라.”고 하였다.


10. 수좌를 점검하다


임제 스님이 옆에서 모시고 있는 수좌에게 물었다.

“허물이 있는가? 없는가?”

“예, 허물이 있습니다.”

“손님 쪽에 있는가? 주인 쪽에 있는가?”

“두 쪽에 다 있습니다.”

“허물이 어디에 있는가?”   

수좌가 그냥 나가버리니 임제 스님이 말씀하셨다.

“무사한 것이 좋다고 말하지 말라.”

   

뒤에 어떤 스님이 이 일을 남전 스님에게 말씀드리니 남전 스님께서 

“관군들의 말끼리 서로 차고 밟는 격이다.” 하였다.


11. 한낱 나무토막이로다


임제 스님이 군부대에 재가 있어서 초대를 받아 갔을 때다. 문 앞에서 군인을 만나자 천막 기둥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것이 범부인가? 성인인가?”

군인이 아무런 대꾸가 없자 스님께서 기둥을 두드리며

“설사 잘 대답했더라도 다만 한낱 나무토막일 뿐이다.”

하고는 곧 들어가버렸다.


12. 원주와 별좌를 점검하다


임제 스님이 원주에게 물었다.

“어딜 갔다 오느냐?”

“시내에 쌀을 사러 갔다 옵니다.”

“그래 다 사왔느냐?”

“예, 다 사왔습니다.”

임제 스님이 지팡이로 원주의 앞에다 한 획을 그으면서

“그래, 이것도 살 수 있느냐?” 하였다.

원주가 곧 “할!”을 하므로 임제스님이 그대로 후려 갈겼다.


별좌가 오자 임제 스님이 앞의 이야기를 들려주니 

별좌가 “원주가 큰스님의 뜻을 몰랐습니다.”하였다.

“그럼 네 생각은 어떠냐?” 하시니 별좌가 절을 하였다.

임제스님은 그에게도 역시 후려쳤다.


13. 강사를 점검하다


어떤 강사스님이 있어서 서로 인사를 나눌 때 임제 스님이

“강사스님은 무슨 경론을 강의하는가?” 라고 물으니

“저는 아는 것이 모자랍니다. 그저 백법론을 조금 익혔을 뿐입니다.” 하였다.

임제 스님이

“한 사람은 삼승 십이분교에 통달하였고, 한 사람은 삼승 십이분교에 통달하지 못하였다면 같은가? 다른가?” 하시니

강사스님이

“통달했다면 같겠지만 통달하지 못했다면 다릅니다.”라고 하였다.


낙보 스님이 시자로 있었는데 임제 스님의 뒤에 서 있다가

“강사스님께서는 여기가 어디라고 같다느니 다르다느니 하십니까?” 하였다.

임제 스님이 시자를 돌아보시며

“그래 너는 어떻다고 보느냐?” 라고 물으니, 시자가 곧 “할!”을 하였다.

임제 스님이 강사스님을 보내고 돌아와서 낙보 스님에게

“조금 전에 나에게 ‘할’을 하였느냐?” 라고 물었다.

“예, 그렇습니다.” 하니 그대로 후려쳤다.


14. 덕산스님을 점검하다


임제 스님은 제2대 덕산스님이 대중에게 법문을 하면서

“대답을 해도 30방, 대답을 못해도 30방이다.”라고 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시자로 있던 낙보 스님을 보내면서, 

“대답을 했는데 어찌하여 몽둥이 30방입니까? 라고 물어보아라. 그가 만약 너를 때리면 그 몽둥이를 잡아 던져버려라. 그리고 그가 어찌 하는가를 보아라.”라고 시켰다. 

   

낙보 스님이 그곳에 도착하여 시킨 대로 물으니,

덕산 스님이 곧 후려치므로 몽둥이를 붙잡고 던져버리니

덕산스님이 곧 방장실로 돌아가버렸다.

   

낙보 스님이 돌아와 임제 스님께 그대로 말씀드리니,

“나는 이전부터 그 자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너는 덕산을 보았는가?”

낙보스님이 머뭇거리자 임제스님이 곧 후려쳐버렸다.


15. 왕상시를 점검하다


하루는 왕상시가 방문하여 승당 앞에서 임제 스님을 뵙고 여쭈었다.

“이 승당에 계시는 스님들은 경을 보십니까?”

“경을 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선을 배우십니까?”

“선도 배우지 않습니다.”

“경도 보지 않고 선도 배우지 않는다면 결국 무얼 하십니까?”

“모든 사람들이 다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되게합니다.”

“금가루가 비록 귀하기는 하나 눈에 들어가면 병이 된다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대를 일개 속인으로만 여겼느니라.”


16. 행산스님을 점검하다


임제 스님이 행산 스님에게 물었다.

“무엇이 넓은 땅의 흰 소입니까?”

“음매에, 음매에!” 하자, 

“벙어리냐?” 하셨다.

“장로께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하니

“이놈의 축생아!” 하셨다.


17. 낙보스님을 점검하다


임제 스님이 낙보 스님에게 물었다.

“예로부터 한 사람은 방을 쓰고 한 사람은 할을 썼는데 누가 친절한가?”

“둘 다 친절하지 못합니다.”

“그럼 친절한 것은 어떤 것인가?”

낙보스님이 “할!”을 하자 임제스님이 후려쳤다.


18. 어떤 스님을 점검하다


임제스님이 어떤 스님이 오는 것을 보고 두 손을 펼쳐 보였다.

그 스님이 아무런 대꾸가 없으므로

“알겠는가?” 하시니

“모르겠습니다.” 하므로

“곤륜산을 쪼갤 수 없으니 그대에게 돈이나 두어 푼 주겠노라.” 하셨다.


19. 도반인 대각스님이 방문하다


대각 스님이 와서 뵈었다.

임제 스님이 불자를 세우니 대각 스님이 좌구를 폈다.

임제 스님이 불자를 던져버리니 대각 스님이 좌구를 거두어 승당으로 들어가 버렸다.

   

대중스님들이

“이 스님은 큰스님의 친구이신가. 절도 안하고 또 얻어맞지도 않는구나.” 하였다.

임제 스님이 이 말을 듣고 대각 스님을 불러오게 하였다.

대각 스님이 나오자,

“대중들이 말하기를 그대는 나를 아직 참례하지 않았다고 하네.” 하였다.

그러자 대각 스님이 “안녕하십니까?” 하고는 대중 속으로 돌아가 버렸다.


20. 조주스님이 방문하다


조주 스님이 행각할 때 선사를 찾아뵈었다. 그 때 발을 씻고 있었는데 조주 스님이 물었다.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마침 내가 발을 씻고 있는 중이요.”

조주 스님이 앞으로 다가가 귀를 기울여 듣는 시늉을 하자,

“다시 또 두 번째 구정물 세례를 퍼부어야겠군요.” 하였다. 

그러자 조주 스님은 곧 내려가 버렸다.


21. 정상좌가 크게 깨닫다


정상좌(定上座)가 임제 스님을 뵙고

“무엇이 불법의 대의입니까?”라고 물으니,

임제 스님이 자리에서 내려와 멱살을 움켜쥐고 한 대 후려갈기며 밀쳐버렸다.

정상좌가 멍하여 우두커니 서 있으니 곁에 있던 스님이 말하였다.

“정상좌여! 왜 절을 올리지 않는가?”

정상좌가 절을 하려는 순간 홀연히 크게 깨달았다.


22. 어느 것이 바른 얼굴인가


마곡 스님이 임제 스님을 찾아뵙고 좌구를 펴며 물었다.

“12면 관세음보살은 어느 얼굴이 바른 얼굴입니까?”

그러자 임제 스님이 자리에서 내려와 한 손으로 좌구를 거두고 한 손으로는 마곡 스님을 붙잡으며,

“12면 관세음보살이 어디로 갔는가?” 하였다.

마곡 스님이 몸을 돌려 자리에 앉으려 하므로

임제 스님이 주장자를 들어 후려쳤는데

마곡 스님이 이를 받아 쥐니 서로 붙잡고 방장실로 들어갔다.


23. 여러 가지 할!


임제 스님이 어떤 스님에게 물었다.

“어떤 ‘할’은 금강왕의 보검과 같고, 어떤 ‘할’은 땅에 웅크리고 앉은 금빛 사자 같으며, 어떤 ‘할’은 어부가 고기를 찾는 장대 같고 도둑이 그림자를 드리워보는 풀 같고, 어떤 ‘할’은 할로서의 작용을 하지 않는다. 그대는 어떻게 알고 있는가?”

그 스님이 머뭇거리자 임제 스님이 ‘할’을 하였다.


24. 비구니를 점검하다


임제 스님이 어느 비구니에게 물었다.

“잘 왔는가? 잘못 왔는가?”

비구니가 ‘할’을 하자 임제 스님이 주장자를 집어 들고 말씀하였다.

“다시 일러보아라. 다시 일러보아.”

비구니가 또 ‘할’을 하자 임제 스님이 곧바로 후려쳤다.


25. 아직 조사의 뜻은 없다


용아스님이 임제 스님께 물었다.

“무엇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나에게 선판을 건네주게.” 하니 용아스님이 바로 선판을 건네 드렸다.

 임제 스님이 받아서 그대로 내리치시므로 용아 스님이 말하였다.

“치기는 마음대로 치십시오. 그러나 아직은 조사의 뜻은 없습니다.”

   

용아 스님이 뒤에 취미스님에게 물었다.

“무엇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나에게 좌복을 건네주게.” 하니 바로 좌복을 건네주었다.

취미 스님이 받아들고 그대로 후려치므로 용아 스님이 말하였다.

“치기는 마음대로 치십시오. 그러나 아직은 조사의 뜻은 없습니다.”

   

용아 스님이 임제원에 머무르고 있을 때 어떤 스님이 방에 들어와 법문을 청하였다.

“스님께서 행각하실 때 두 큰스님을 찾아뵈었던 일에 대하여 그 분들을 옳다고 인정하십니까?”

“인정한다면 깊이 인정하지만 아직 조사의 뜻은 없었네.”


26. 경산스님을 점검하다


경산문하에 5백 대중이 있었으나 법을 묻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황벽 스님이 임제 스님을 경산에 가서 보게 하였다.

“그대는 거기에 가서 어떻게 하겠느냐?”

“저가 거기에 가면 저절로 방편이 있겠지요.”

   

임제 스님이 경산에 이르러 걸망도 풀지 않은 채 법당으로 올라가 경산 스님을 뵈었다. 

경산 스님이 막 고개를 들려고 하는데 임제스님이 “할”을 하였다.

경산 스님이 무어라고 말하려 하자.

임제 스님이 소매를 떨치고 그대로 가 버렸다.

   

그 즉시 어떤 스님이 경산 스님에게

“저 스님이 왔을 때 무슨 말씀이 있었기에 스님에게 대뜸 ‘할’을 하십니까?” 라고 물었다.

“그 스님은 황벽 스님 회하에서 왔는데 그대가 알고 싶으면 그에게 직접 물어보아라.”라고 하였다.

그리고 난 후 경산의 5백 명 대중이 절반 이상 흩어져버렸다.

   

27. 보화스님의 열반


보화 스님이 어느 날 거리에 나가 사람들에게 장삼[直?] 한 벌을 달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매번 장삼을 주었으나 보화 스님은 그때마다 필요 없다고 하였다.


임제 스님이 원주를 시켜 관을 하나 사오게 한 뒤 보화 스님이 들어오자 말씀하였다.

“내가 그대를 위해 장삼을 장만해 두었네.”

보화 스님이 관을 짊어지고 나가서 온 거리를 돌면서

"임제 스님이 나에게 장삼을 만들어 주셨다. 나는 동문으로 가서 열반에 들겠다.”하고 외쳤다.

사람들이 너도 나도 따라가서 보니 보화 스님이

“오늘은 아니다. 내일 남문에서 열반에 들리라.”

   

이렇게 사흘을 하니 사람들이 아무도 믿지 않았다. 나흘째 되던 날은 따라와서 보려는 사람이 없었다. 혼자 성 밖으로 나가 스스로 관 속으로 들어가서 길가는 행인에게 관 뚜껑에 못을 치게 하였다. 삽시간에 말이 퍼져서 시내 사람들이 쫓아가서 관을 열고 보았다. 그런데 몸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다만 공중에서 요령소리만 은은히 울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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