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이의보(李宜父)에게 드리는 글
이 도의 가장 중요한 첩경은‘한 마디 말’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부처님 입에서 나온 것도 아니며, 모든 조사가 말한 것도 아닙니다. 가령 “마음이 곧 마음이 아니며, 부처가 곧 부처가 아니다”라고 말한다면 배에 칼 잃은 자리를 새기고 토끼를 잡으려고 나무둥지를 지키는 격으로서, 어찌해볼 도리가 없습니다.
만일 묵묵히 이 말귀를 알아차린다면 어찌 입술 나불거린 데에 떨어지겠습니까만, 흙덩이를 좇는 부류들은 허망함을 좇아 헤아리면서 눈을 깜짝이고 움직이지만 꿈에서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옛분들의 체제와 수행에서 총명함을 짓거나 지견을 세우거나 또는 권실(權實)과 조용(照用)등의 경계를 논하지 않았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부득이해서 이윽고 구름 위에 누르고 앉아 별똥이 튀고 번개가 치듯 방과 할을 휘둘렀습니다. 준수한 사람은 겨우 듣기만 해도 귀결점을 알아버립니다. 그렇다면 필경에 이 ‘한마디 말’이란 즉 ‘백수자(栢樹子)’, ‘수미산’, ‘노친(露親)’, ‘할(?)’, ‘보(普)’, ‘착(錯)’, ‘구견(俱見)’, ‘지(知)’ 등이 아닐런지요. 또 ‘한쪽밖에 못보는 놈이네[擔板漢]’, ‘감파해 버렸다’, ‘차마시게’, ‘조심하게’, ‘노형은 아직 깨닫지 못했음을 내 장담하리다’, ‘푹 쉬게’, ‘법당에 참배하게’했던 것 등이 아닐는지요. 그러나 이는 모두 풀이나 나무에 붙은 도깨비 정령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것이야말로 조사는 부처님의 말씀과 마음으로 종지를 삼고 무문(無門)으로 법문을 삼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저울 눈금을 잘못 읽은 것입니다. 곧바로 통 밑이 쑥 빠질 때가 되면 꿈에서 깨어나듯 확철대오하리니, 그런 뒤에야 ‘이 말’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입니다.
82. 한통판(韓通判)에게 드리는 글
투철히 벗어나는 요지는 마음을 쉬는 데 있을 뿐입니다. 이 마음에 지견이 생기기만 하면 더욱 멀어지니 단박에 무심한 경지에 도달하여 텅 비고 한가하고 고요해야 합니다. 천만 가지로 뒤바뀐다 해도 바깥도 아니고 속도 아니어서 끝내 관여할 바가 없습니다. 자연히 날 듯이 자유자재하여 일정한 방향없이 비추고 응하니 하루 24시간을 부리고 일체법을 운용할 수 있게 됩니다.
근본이 툭 트여 나와 남, 사랑과 미움, 잘잘못 그리고 가고 옴 등이 나타나지 않으니, 이를 두고 이른바 “마치 어리석은 사람처럼 자재롭다”고 합니다. 그에겐 애초부터 사람과 통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83. 장국태(張國太)에게 드리는 글
이 큰 인연은 옛 불조께서 독특하게 행하고 창도하여 최상승의 명민하고 날카로운 근기들을 제접한 것입니다. 요컨대, 망정을 초월하고 견해를 떠나 마음 고동[機關]을 깨닫고 우뚝하고 생생하게 번뇌를 꿰뚫으려 한다면, 거량하지 않아도 먼저 알고 말하기 전에 미리 알아차려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조짐이 있기만 하면 한 번에 싹뚝 끊어야 합니다. 그 자리에서 밝히지 못했다 해도 결코 의근(意根)으로 이리저리 사량해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정신을 차려 분명하게 깨닫고 짐을 걸머져, 마치 하늘의 莫?모든 어둠을 밝히듯 해야 합니다.
그 때문에 옛부터 고덕들도 단독으로 제창한 곳에 이르러선 털끝만큼도 용납하지 않고, 두루두루 뽑아내버리고 나서 나아갑니다. 아무 것도 없이 깨끗이 하여 만법과 짝하지도 않고 모든 성인들과 거처를 함께 하지도 않으며 홀로 벗어나고 훌쩍 올라서서 자유자재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덕산스님과 임제스님은 ‘방’과 ‘할’을 휘두르면서, 나오기도 하고 들어가기도 하며, 사로잡기도 하고 놓아주기도 하여 일정한 틀에 갇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언어방편의 작용에 있어서도 일시에 그대로 끊어버려, 성인범부의 길이 끊기고 잘잘못의 망정을 버려서 완전히 쉬어버린 자리에 도달했습니다. 그러니 여기서 무엇을 생사라 부르겠습니까.
가슴이 텅 비어 관조조차도 세우지 않되 만나는 인연마다 그대로 종지입니다. 꺼내들면 하늘을 덮고 땅을 덮으나 자비방편에 의지하여 수준을 낮추어 상대해 줍니다. 이는 바로 영리한 근기들에게 허망한 인연과 악각지견(惡覺知見)을 떨쳐버리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공한 자리를 사무쳐서 그 공하다는 것마저도 간직하지 않아야 합니다. 마음을 마치 허공이 삼라만상을 포함하여 관장하지 않음이 없는 것처럼 하여 물물마다 곳곳마다 큰 해탈을 얻어야만 할 일을 모두 마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향상의 행리를 얻지 못한 것입니다. 향상의 행리란 모든 성인이 가만히 전수한 곳이니, 어찌 만 길 절벽에 서 있다든가 천 리 만 리나 떨어진 정도에 그치겠습니까. 온 누리를 가져온다 해도 한 티끌만큼도 가지지 않으니, 이를 “위대한 작용이 목전에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삼십년씩 오래도록 길러 푹 익어야만 깨달아집니다.
“마음이 바로 부처이다”함을 이미 확실히 밝혔다면,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라”함을 거듭 그 자리에서 점파해버려, 그 말에 매달리지 않고 그대로 뚫으면 옛 사람의 붉은 진심을 보겠지만, 만약 머뭇거렸다가는 그대로 빗나갑니다.
“만법과 짝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하자, “그대가 한 입에 서강의 물을 다 마시면 즉시 그대에게 말해주리라” 하였는데, 이는 상당히 단도직입적으로 요점을 살핀 것입니다. 왜 이처럼 단박 알아차리지 않습니까. 그저 그의 말 속으로 들어가면 영원히 투철하게 벗어나질 못합니다. 학인들이 이처럼 헤아리고 말을 하면서 합치하려고 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이래서야 어찌 생사를 꿰뚫어버린 견해라 하겠습니까. 생사를 꿰뚫고 싶다면 마음바탕을 열어서 통해야 하는데, 이 공안은 마음바탕을 열어주는 열쇠입니다. 밝혀서 요달하고자 한다면 말 밖에서 종지를 알아차려야 비로소 의심 없는 경지에 도달하게 됩니다.
옛날 수산주(修山住)는 지장(地藏)스님을 뵙고서, 수없이 산 넘고 물 건너 고생고생 해서 스님을 찾아 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지장스님이 말하였습니다. “많은 산천이 그대를 싫어하진 않았겠지.” 여기서 수산주는 통밑이 빠진 듯하였습니다. 위와 같다면 어찌 많은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길을 말하는 사이에도 반드시 보임(保任)해야만 합니다.
84. 장자고(張子固)에게 드리는 글
큰 도는 일정한 방향이 없어 오직 이근종성(利根種性)이라야 한 번 들으면 천 가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깥에서 일어나는 것도 아니며 안에서 얻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벗은 말쑥하고 끓는 물에 얼음이 녹듯 하여 애초에 얻고 잃음이 없습니다. 그것은 무릇 중생과 부처가 나뉘기 전, 확 트여 밝고 오묘하며 전혀 기댐이 없이 우뚝 독존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한 생각이 반연을 좇아 이 진실한 바탕을 등져 마침내는 상응하지 않는 많은 업을 일으켜, 환히 밝은 가운데 표류하며 잠시도 쉴 틈이 없게 되었습니다. 경계에 깊숙이 빨려들어 마음의 근원이 혼탁해져 으레히 그런 줄 여기게 됩니다. 보고 듣는 것은 모두가 성색(聲色)을 벗어나질 못하는데, 미혹과 망상으로 스스로를 결박했기 때문입니다.
큰 해탈을 참구하는데 이르러서는 아득하고 망망하여 끝을 알 수 없습니다. 식(識)의 물결은 도도하게 넘쳐흘러 잠시도 쉬지를 않으므로 깨달아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그래도 옛날에 익힌 한 조각 선업이 있어 기쁘게 살피고 믿어 그것을 구하려 하니 매우 착하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엎드리고 참당하여 묻는데 이르러선 다시 깜깜해집니다. 그 까닭은 다름이 아니라, 버리고 떠나 오랫동안 푹 익지 않아서 그러한 것입니다. 지금 당장 알아차리려 한다면 몸과 마음을 고요하게 하여 마음고동을 모두 물리치고 흙과 나무처럼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시절이 도래하면 홀연히 스스로 통 밑이 빠지듯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 본지풍광에 계합하여, 맑고 변함없고 청정하고 함이 없고 오묘하고 밝은 이 성품을 깨닫게 됩니다. 꼭지가 견고하고 뿌리가 깊숙하여 금강처럼 견고한 진정한 자체에 도달하여 온 몸으로 짐을 걸머지고 갈 수 있습니다. 그런 뒤에야 천차만별이 다한 이치로 귀결하고 동과 정이 한결같고 마음과 경계가 맞아듭니다. 그러면 하나를 밝히면 일체를 밝히고 하나를 깨달으면 일체를 깨닫게 됩니다.
어떤 때에는 '수미산이다'를 들어 보이고, 어떤 때에는 '뜰 앞의 잣나무다'라고 말하는 일체의 기연과 경계가 어찌 다른 데로부터 발현하겠습니까. 나아가서 몽둥이를 휘두르고 '할'을 하며, 나무집게를 들이대기도 하고 공을 굴리기도 한 일들이 모두가 하나의 도장으로 찍은 것입니다. 생사와 열반은 마치 어젯밤 꿈과 같아 자연히 편안하고 한가합니다. 푹 쉬어버릴[休歇] 곳을 얻었는데 다시 무엇을 의심하겠습니까. 쓰고 싶으면 바로 쓰고 말하고 싶으면 바로 말하면서, 밥을 만나면 밥을 먹고 차를 만나면 차를 마십니다. 평상심에 계합하여 부처라는 견해나 법이라는 견해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처라는 견해, 법이라는 견해도 일으키지 않는데, 더구나 업 짓는 마음을 일으키고 착하지 못한 생각을 내겠습니까. 결코 그런 태도를 지어서 인과(因果)를 무시하려고 하지를 마십시오. 이렇게 해서 설법좌를 얻어 법의를 걸치고 조복해서 이끌고 항복을 받아 무심과 상응해야만 구경의 귀착지인 것입니다.
영가스님은 "스스로의 마음속에서 더러운 옷을 벗을 뿐이다"하였고, 암두스님은 "무심함을 지킬 뿐이다"하였습니다. 운거(雲居)스님은 "천 만 사람 속에 있어도 한 사람도 없는 것과 같다"하였으며, 조산스님은 "독벌레가 있는 동네를 지나듯 물 한 방울도 그를 적시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두고 "성태(聖胎)를 기른다"하고 "더럽힐 수 없다"고 말합니다. 반드시 이제껏 지어왔던, 깨끗하다 더럽다 하는 상대적인 생각을 버려야만 합니다. 행주좌와 어느 때나 마음을 다해 참구해야만 스스로 힘을 갖추게 되는데, 이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옛부터 내려오는 고덕들의 첩경입니다.
85. 원빈에게 드리는 글
불조의 큰 인연은 개념과 언어, 지견, 알음알이로 총명을 내거나 사유를 일으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잊고 외연을 잊어 밖으로는 모든 모습을 비우고 안으로는 식정(識情)을 벗어나고자 하거든, 뒤로 물러나서 맑고 텅 비고 편안하고 한가함을 지켜서, 맑게 사무쳐 훤히 트이고 모든 방편을 초월하여 대뜸 본래의 오묘한 마음을 꿰뚫어야 합니다.
예와 지금에 뻗치도록 담담하여 움직이지 않으면 만 년이 일념이고 일념이 만 년이어서 영원히 번뇌가 없습니다. 진실 합당한 경지는 한 번 얻으면 영원히 얻어 변함이 없으니 이?“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켜 견성성불 함”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위와 같이 설명한 것도 이론에 불과합니다. 말로써 말을 버리고 이치로써 이치에 회합하여 사람들이 점진적으로 나아가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이치에 깨달아 들어가는 지름길도 흙탕물 속으로 끌고 다니면서 구구한 이론으로 설명한 것이니, 진실을 드는 데 이르러서는 무슨 이 같은 너저분한 설명들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보이자 가섭이 미소하였던 것이니, 이 가운데서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설명하는 도리를 용납하겠습니까. 요컨대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대천찰해(大千刹海)를 한번에 꿰뚫어 귀결처를 알아야만, 위로부터 행했던 진정한 법령을 다 알게 됩니다.
덕산스님의 ‘몽둥이’와 임제스님의 ‘할’이 어찌 어린아이의 장난이겠습니까. 만약 본분작가의 솜씨를 갖추었다면 한 수도 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 때문에 방거사가 석두스님과 마조스님에게 “만법과 짝하지 않는 이는 어떤 사람일까요?”하고 묻자, 석두스님은 그의 입을 틀어막아 버렸고, 마조스님은 “그대가 한 입에 서강의 물을 다 마시고 나면 그대에게 말해주리라”하였는데, 이것이 어찌 다른 이치겠습니까. 그 지극한 뜻을 캐 본다면 다같이 진흙에 들어가고 물에 들어갔던 것이니 어떻게 높다느니 낮다느니, 얕다느니 깊다느니 하겠습니까. 여기에 이르러선 반드시 있음[有]을 알아야 하고, 있음을 알고 나선 다시 꼭 전변(轉變)하여 갈 줄을 알아야 합니다.
죽은 말이나 지키면서 틀에 떨어지는 것을 부디 조심하십시오. 털끝만큼이라도 주관과 객관, 작용, 현묘한 이성(理性)이 있기만 하면 견해의 가시가 사람을 찔러서 끝내 뽑아버리지 못하리다. 그러고서야 어떻게 생사를 벗어나 안락무위하여 움직이지 않는 경계를 증득하리오. 옛 사람은 실천 그것만을 소중히 여겼는데, 자리를 얻어 법의를 걸친 후에도 스스로 살폈던 것이 바로 그런 예입니다. 간절히 바라노니 반드시 잘 간직하여 힘을 얻도록 해야만 좋으리다.
옛날에 현인달사들은 큰 근기를 갖추어 능히 스스로 깨치고, 다시 힘써 실천할 수 있었는데, 이를 ‘공부한다’고 합니다. 오직 자기에게서 일어나는 마음과 요동하는 사념을 오래도록 살펴서 털끝만큼이라도 있기만 하면 급히 없앴던 것입니다. 결코 어떤 일을 한다는 생각을 짓거나 얘기 밑천으로 삼아 다른 사람을 이겨 굴복받기를 기약하진 않았습니다. 즉 지견을 자라나게 하고, 주관을 세우고, 남을 이겨서 명성을 도모하지 않고 진실하게 오로지 생사대사만을 위해 백겁천생토록 어둡지도 않고 함정에 빠지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예로부터 전혀 눈썹을 아끼지 않고 남들을 위해 가리켜 보여준 경우가 많습니다. 즉 운문스님을 “자체 그대로 진실이다”하였고, 임제스님은 “보신 화신불의 머리에 눌러 앉는다” 하였으며, 덕산스님은 “마음에 일삼을 것 없다. 마음에 일삼을 것이 없으면 텅 비었지만 신령하며 고요하지만 두루 비친다”하였습니다. 암두스님은 “그저 무심함을 지킬 뿐, 어느 때나 하고자 함도 의지함도 없으면 자연히 모든 삼매를 초월한다”하였으며, 조주스님은 내가 백천명을 보아도 다 부처 찾는 사람뿐이다. 그 중에서 무심도인을 찾기는 어렵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을 자세히 음미해 보고 마음을 쉬어 나간다면 훗날 언젠가 경계와 인연을 만났을 때 힘을 얻게 되리다. 요컨대 조심스럽게 보호하며 새나가지 않게 하는 것이 비결입니다.
배상국이 황벽스님을 뵙고 말끝에 깨달았으나 다시 전심(傳心)의 비요(秘要)를 발휘해서 재삼 간곡히 일러주었으니 자비가 한량이 없었습니다. 우적(于?)이 양양(襄陽)에서 자옥(紫玉)스님을 찾아뵈었을 때, 한 번 부르자 문득 머리를 돌렸으며, 거듭 “흑풍이 배를 표류하게 하여 나찰을 나라에 떨어지게 됐다”라고 지적해주자 비로소 환해졌습니다. 예로부터 선비들 중에 이 일을 소중히 여겨, 잠도 안자고 먹을 것도 잊은 채 똑바로 진리를 본 사람은 이루 셀 수도 없습니다.
이 모두가 그 사람의 근기, 역량, 지혜, 견해가 고명하고 상쾌한 데다가, 그런 뒤에 선지식을 찾아 결택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미 옛사람들과 짝이 되었으니 더욱 힘써 실천하면서 물러나지 않아야 됩니다. 깊이 증득하고 깊숙이 깨달아 들어가기를 도모하여 입에 발린 말만을 숭상하지 말고, 반드시 마음 마음이 사물에 부딪히지 않게 하고 사물마다 일정한 처소가 없어야 비로소 되리다.
이 도는 외길로 제창하고 홀로 증득하며 불조의 향상 기틀과 계합하여, 마음의 근원에서 높이 벗어나는 것을 귀하게 여깁니다. 마치 전광석화와도 같아서 머뭇거리며 엿보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니, 단박에 꿰뚫어 의근(意根)으로 헤아리는 데 떨어지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치와 성품을 설명하는 데 이르러서는, 말이나 경계 속에서 일정한 틀을 짓고 알음알이를 세워 서로가 전하여 지니면서, 오직 마음뿐임을 설명하여 지수화풍(地水火風)과 융합시키고, 허공의 한량을 가지고 6근과 6진의 일을 꿰뚫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다만 이론일 뿐이며 교가(敎家)의 3승5성(三乘五性)과 방편으로 단계를 세운 것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나. 도리어 바보를 만들 뿐입니다.
반드시 불조가 있기 전부터 있어 온 이 한 조각 심전지(心田地)가 어디서 왔는지를 알아차려야 됩니다. 가는 털끝만큼이라도 얻은 것이 있기만 하면 이는 사이비반야(相似般若)이니, 응당 잘 분별해서 티끌 경계에 떨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죽는 날에 가서 이치 자리가 분명하지 못하여 끊을 수 없으면, 그 때는 두려운 마음이 어지럽게 일어나 후회해도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오조(五組)스님께서는 평상시에 학인들에게 “반드시 죽음에 임했을 때의 선(禪)을 참구하라”고 법문하셨는데, 이는 작은 말이 아닙니다. 설사 총명한 변론과 지혜로 칠통팔달하여 크고 작은 이론이 실낱처럼 이어진다 해도, 그것은 식(識)으로 배운 문자에 불과합니다. 쓸모없는 너절한 것으로는 결국 끊을 수가 없습니다.
그 때문에 옛부터 큰 도를 지닌 종사들은 오직 뛰어난 이근상지(利根上智)의 기특한 인물들과 함께 했습니다. 즉 육긍대부(陸亘大夫), 왕경상시(王敬常侍), 배상국(裴相國)과 감지도인(甘贄道人), 진조상서(陳操尙書), 최군(崔群), 이고(李?), 두홍점(杜鴻漸), 방거사(龐居士), 이발(李勃), 우적(于?)과 본조(本朝)의 내한 양대년(內翰楊大年), 이부마(李駙馬) 등 여러 사람의 경우, 탐색하고 참구하여 팔면이 영롱하여 참된 경지를 밟지 않은 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기 어려운 일을 해냈으며 사람들이 실천하기 어려운 것을 실천할 수 있었습니다. 안팎으로 불법을 보호하면서 큰 법의 바다 가운데서 나루터가 되고 본보기가 되어 남섬부주에 나온 한 생을 허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옛 사람이 이미 그러했는데, 지금은 어찌 일상적인 것만 지키면서 자기의 생사대사와 오묘한 도를 크게 지키는 것으로 지극한 요체를 삼지 않습니까. 내버려 두어 모든 티끌 경계에 끄달리고 얽매이면 말이나 개념, 의미, 법수[數]에 갇혀 뛰어나게 향상의 안목을 지을 만한 대해탈의 근기가 없으니, 애석하다 하겠습니다.
대장부가 껍질을 타파하고 찾아와 법문을 청하였다면 응당 온 몸이 눈[眼]이 되어 허깨비 인연을 간파하고 금강보검으로 애욕의 그물을 끊어야 합니다. 비록 선비가 되어 재관[宰官]의 몸을 하고 있더라도 붓 끝에서 훌륭하게 방편을 짓고 일을 지휘하는 가운데 조사의 법령을 잘 행해야 합니다. 보고 듣는 모든 것에서 인과를 알고 변통을 알면 바로 옛사람과 짝이 되리다.
86. 증소윤(曾少尹)에게 드리는 글
불조의 오묘한 도는 오직 각자 사람들의 근본 위에 있으니, 실로 본래 청정명묘한, 무위무사의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비록 오랫동안 정성을 들였는데도 진실을 살피지 못하는 까닭은 무시이래의 총명과 영리함과 지혜로운 성품으로 조작하는 것이 많아 거기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마음을 텅 비고 한적하며 안정되게 하여 오래도록 담담여여(湛湛如如)하여 변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크게 편하고 즐거울 기약이 있을 것입니다. 근심스러운 것은 푹 쉬어버리지 않고 밖으로 찾아 총명을 부리는 것입니다. 이야말로 본래 있는 성품이 마치 금강처럼 견고하여 영원토록 잠깐사이도 끊긴 적이 없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하겠습니다. 만약 녹여서 쉬어버린 지가 오래되면 갑자기 통 밑이 빠져버린 듯하여 자연히 안락해지겠지만, 선지식을 찾아서 이론만을 넓게 지니려 한다면 더더욱 멀어만 집니다. 다만 매섭고 영리한 근성으로 매섭게 스스로 끊고 스스로 버려야, 깨달아 들어갈 곳이 있어 스스로 알게 됩니다. 이미 알고 난 뒤는 안다는 것마저도 세우지 않아야만 비로소 진실청정한 경계에 나아가게 됩니다.
공이 도에 계합한 밖을 가지고 짐짓 억지로 말하노니, 테두리 바깥을 관조하십시오.
마지막 한 구절에서 비로소 견고한 관문에 이르니, 요긴한 나루터를 꽉 쥐고서 범부든 성인이든 통과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돌(?)! 다만 수준 낮추어서 설한 방편만을 보고서 눈 뜨고 꿈을 꾸어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정수리 위에서 솜씨를 펼 수 있어야 하리다.
87. 장대제(蔣待制)에게 드리는 글
이 일로 말하자면, 하늘, 인간, 뭇 생령, 부처, 조사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이것의 위력을 받습니다. 다만 뭇 생령들은 이를 간직하고 있으나 어둡고 미혹하여 부질없이 생사윤회를 받고, 불조는 이를 통달하여 훌쩍 증득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미혹과 깨달음이 다르긴 해도 불가사의하기는 매일반입니다.
그러므로 불조께서 ‘직지인심 견성성불’을 열어 보이심은,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각각 자기에게 본래 완전하게 갖추어져 있는 청정묘명(淸淨妙明)한 진심을 독자적으로 깨달아 다시는 허다한 번뇌 망상과 헤아리고 생각하는 지견을 남겨두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5온의 몸밭에서 그대로 회광반조하여 담적여여(湛寂如如)하게 확연히 알아차려 이 바른 성품을 분명히 보게 하니 이 성품이 바로 마음이며, 이 마음이 바로 성품입니다.
호호탕탕히 작위(作爲)함이 응당 6근(六根)의 문턱에서 천변만화를 부리지만 애초에 요동하지 않으므로, 그것을 ‘항상 한 본원(本源)’이라고 부릅니다. 이 본원을 통달하면 작용하는 것마다 투철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반드시 흐름을 끊고 증득해야지 이리저리 생각을 움직였다가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집니다.
바로 당사자의 근성이 본래 순수하고 고요하고 침착하면 가장 쉽게 힘이 되는 것이니, 다만 잠시 빛을 돌이켜 한 번 뚫기만 하면 그대로 깨달아 들어갑니다. 옛 사람은 이를 ‘무진장(無盡藏)’, ‘여의주(如意珠)’, 또는 ‘금강보검’이라 불렀습니다.
요컨대 깊은 신근(信根)을 갖추고 이것은 남에게서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믿어야만 합니다. 행주좌와의 네 위의에서 정신을 응집하고 고요히 반조하여 적나라한 경지에서 간단이 없으면, 자연히 모든 견해가 나지 않아 이 바른 자체에 계합합니다. 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으며,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으며, 실제도 없고 헛것도 없어, 이름과 모양을 떠났으니 바로 이것이 자기의 본지풍광이며 본래면목입니다.
그러므로 눈썹을 드날리고 눈을 깜짝이며, 백추를 들고 불자를 세우며, 주장자를 휘두르고 ‘할’을 하며 미묘한 언구를 베푸는 등 옛분들의 백천억 가지 방편이, 모두 사람들로 하여금 여기에서 투철히 벗어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한 번 꿰뚫었다 하면 그대로 근원까지 깊이 사무쳐 꿰뚫어, 문 두드리는 기왓조각을 버리고 끝내 털끝만큼도 마음에 둔 것이 없습니다. 20년이고 30년이고 그렇게 해나가면서 이론이나 주장을 끊고 기연과 경계를 파하고 쉬어버리면 홀연히 무심해진, 그곳이 안락하게 쉬는 경계입니다. 그 때문에 “지금 쉬어야 쉬는 것이지, 만약 때를 찾다가는 끝내 때는 없으리라” 하였던 것입니다.
마갈타에서 방문을 걸어 닫고 비야리에서 말을 막은 일들을 사람들은 극치라고 여기나, 그분들의 발가락 끝도 꿈에도 보지 못하였다 하겠습니다. 대인의 큰 견해, 큰 지혜, 큰 작용이 어찌 격식과 한량에 매이겠습니까. 그대로가 매우 분명한데도 오히려 두 손으로 물려주지 않은 것을 한스러워합니다. 어찌 심천, 득실, 피아의 현량(現量)을 논하여, 어지럽게 진탕을 만들겠습니까. 그렇다면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기 전, 조사가 서쪽에서 오기 전, 허공과 세계가 생기지 않았을 때는 어느 곳에서 더듬고 찾겠습니까.
요컨대 마음[機心]을 버리고, 지견을 죽이며 세간의 지혜와 분별, 총명함을 벗어야만 합니다. 놓아버려서 곧바로 마른 나무, 석은 기둥과 같게 하여 단박에 체득해서, 호흡[氣息]이 끊긴 상태에 도달하면 담담히 마음을 잊어서 만 년이 일념입니다. 이를 기르고 보호하여 오래오래 익혀 자세하게 돌이켜 관찰하면 단박에 마갈타와 정명(淨名:유마)에서 흘러온 맥을 알게 됩니다.
조주스님은 입멸에 임하자 한 자루 불자(拂子)를 봉하여 진부대왕(鎭府大王)에게 보내주면서 “이는 노승이 일생 동안 써도 다 쓰지 못한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스님의 높고 원대한 식견을 살펴보건대 어찌 사람들을 모양에 막히고 말에 집착하며, 언어문자에 매이게 하였겠습니까. 곧바로 깨쳐야만 활발하게 무리에서 벗어나는 계략이 생겨 큰 법을 걸머질 수 있습니다. 마치 물이 물로 들어가고 금에다 금을 입히는 것과 같습니다.
양양군(襄陽郡)의 장수인 왕상시(王常侍)는 위산 대원(?山大圓)스님을 찾아뵙고 종지를 체득하였습니다. 하루는 어떤 스님이 위산에서 찾아오자 왕상시가 물었습니다.
“위산스님이 무슨 법문을 합디까?”
그러자 그 스님은 말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위산스님은 불자를 세웠습니다.”
“산중에선 이를 어떻게 이해하던가요?”
“산중에서는 색을 통해 마음을 밝히고 사물을 통해 이치를 드러냈다고들 의논합니다.”
“알기는 알았습니다만 무엇이 그리 급합니까. 그대는 속히 되돌아 가십시오. 노스님에게 드리는 편지가 있으니 기다리십시오.”
그 스님이 되돌아가 편지를 돌려 드리자 위산스님이 열어보았더니, 일원상(一圓相)을 그리고 그 가운데 날일[日]자가 씌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자 위산스님은 크게 웃으면서 말하였습니다.
“뉘라서 알았으랴. 나를 천 리 밖에서 아는 지음(知音)이 있을 줄을.”
앙산(仰山)스님이 말하였습니다.
“그래도 아직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어떻게 하겠는가?”
앙산스님은 땅 위에 일원상을 그리고 일자(日字)를 쓰더니 발로 문질러버리고 가버렸습니다.
체득한 사람들이 나아간 자취를 보십시오. 어찌 고정된 틀을 지켰겠습니까. 여기에서 그 변화를 잘 관찰한다면 그 마음을 완전히 살필 수 있습니다. 그 마음을 살피고 나면 자유로운 곳이 있으면, 자유로움이 있고 나면 다른 것에 끄달리지 않습니다. 다른 것에 끄달리지 않고 나면 어디를 간들 마음대로 되지 않겠습니까!
사대부를 만나 보면 대개들 “세속의 일에 얽혀 그렇게 할 겨를이 없습니다. 세속의 일을 차츰차츰 정리하고 나서 마음먹고 참구해 보겠습니다”라고들 합니다. 좋은 말이긴 합니다만 그러나 기왕 세속 일에 오래 있어왔으니, 번뇌로써 수행으로 삼으면 됩니다. 번뇌가 출몰할 때 쓸모없는 물건처럼 태워버리고 그것을 그저 ‘세속의 일’이라 부른다면, 어찌 다시 세속의 인연을 버려야 깨달아 들어갈 곳이 있다 하겠습니까.
이른바 “종일 행해도 일찍이 행한 적이 없고, 종일 쓰면서도 일찍이 쓴 적이 없다”한 것입니다. 어찌 번뇌 밖에 따로 이 큰 인연이 있겠습니까. 큰 보배더미 위에서 큰 보배 광명을 놓아 천지를 빛낸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서, 스스로 깨달아 알아차리지 않고 다시 밖에 나가 구하느라고 더더욱 고생만 하니, 어찌 지극한 요점이라 하겠습니까. 큰 근기를 갖추었다면 옛분들의 말씀이나 공안을 들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아침에 일어나서 생각을 바르게 하고 마음을 고요히 하여 가리키고 부르는 등 모든 행위를 할 때 한 번의 행위마다 다시 한 번 집어내서 자세히 살펴야 합니다. 이것이 어디서 일어났으며, 어떤 물건이기에 이런저런 행위를 해내는지를.
티끌 인연 속에서 한 번 꿰뚫으면 일체 모든 인연이 옳지 않음이 없으니, 무엇 때문에 떨어버리기를 기다리겠습니까. 이에 즉(卽)한다면 삼계화택 가운데서 그대로 종지와 격식을 초월하여 청정하여 함이 없고 청량한 큰 도량이 될 것입니다. 「법화경(法華經)」에 이르기를 “불자가 이 경지에 안주하면 곧 부처님의 수용(受用)인 것이니, 경행(經行)과 앉고 누움이 항상 그 가운데 있다”고 했습니다.
88. 영선인(寧禪人)에게 주는 글
생사의 변화는 역시 큰 것이다. 납승이라면 보신, 화신불의 머리에 앉아 털끝만큼의 알음알이를 세우지 않은 채 그대로 투철히 벗어나야 한다. 만 년이 일념이고 일념이 만 년이어서 사사생생(死死生生) 생생사사(生生死死)를 한 덩어리로 만들어 털끝만큼도 기멸과 윤회를 보지 않아야 한다. 그 때문에 아무리 모든 성인이 나온다 해도 결국은 그 그림자 속에서 나타난 것뿐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시험 삼아 묻겠는데, 그 자체는 어떤 형체를 짓고 있느냐? 공겁(空劫) 이전도 '그것'으로 말미암아서 이루어졌고 화장(華藏)세계의 부당왕찰(浮幢王刹)이 다하고 미래가 다할 때까지 모두 '그것'을 의지해 생긴 것임을 알아야 한다.
상근기의 영리한 지혜라면 무시겁부터 내려오는 허망함과 물듦, 성인이니 범부니 하는 망정을 벗어버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맹렬히 살펴 곧바로 꿰뚫으리라. 의지하는 모든 견문각지(見問覺知)와 색성미촉(色聲味觸)을 마치 활활 타는 용광로에 한 점의 눈을 떨구듯, 곧바로 씻은 듯 깨끗하게 버린다.
그리하여 한량없는 진기한 보배를 그 가운데서 운반해 내오며, 가없는 훌륭한 모습이 그 가운데서 환하게 나타난다. 본래의 마음엔 애초에 너와 나, 옳고 그름, 이기고 짐, 좋음과 싫음이 없다. 이제 본래와 둘이 아니고 다를 것이 없는데 다시 무엇을 생사라 하겠으며, 무엇을 크고 작음이라 하겠는가. 그윽하고 우뚝히 고요하여 완전한 안온함을 얻어야만 원래부터 한번도 잃지 않았고 부족하지도 않았음을 알리라.
듣지도 못하였느냐. 석두스님이 약산스님에게 물었다.
“너는 여기에서 무엇을 하느냐?”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냥 앉아 있는 게로군.”
“그냥 앉아 있다면 하는 거지요.”
“그대는 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무엇을 하지 않는다는 거냐?”
“모든 성인도 알지 못합니다.”
석두스님이 이리하여 게송을 지었다.
이제껏 함께 있어도 이름을 모르고
임운등등히 서로 함께 그렇게 갈 뿐이네
예로부터 훌륭한 사람들도 몰랐다는데
경홀한 범부가 어찌 밝히랴.
從來共住不知名 任運相將只?行
自古上賢尤不識 造次凡流豈可明
스승과 제자가 이렇게 실천한 모습을 살펴보라. 그 어찌 본분사라 하지 않겠느냐. 참당하여 묻기를 도모했다면 그분들을 추모하여 옛 가풍을 떨어뜨리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그래야만 자기가 행각하는 일을 결판내게 된다.
89. 승상인(勝上人)에게 주는 글
큰 도는 바탕이 드넓어서 쉬움도 없고 어려움도 없으나 작은 견해로 의심하면 의심할수록 더욱 늦어진다. 만약 큰 도의 바탕이 드넓어 툭 트인 태허공과 같음을 통달하면, 가슴을 텅 비워 부딪히는 곳마다 모두가 진실이어서 일정한 한계에 매이지 않는데, 무슨 어려움과 쉬움이 있으랴. 그저 손가는 대로 집어내서 천지를 덮고 10허(十虛)를 그 속에서 길러내지만, 모양을 내지 않는다.
만약 털끝만한 지견이라도 지어 알음알이에 걸리게 되면 지견에 떨어져 마침내 사무치지 못하고 도리어 여우처럼 의심만 생기게 된다. 그러므로 이 도는 날카로운 큰 근기가 단박에 알아차리는 것에 힘 쓸 뿐이니, 벗은 듯 또렷하게 깨달으면 대뜸 쉬어서 다시는 한정된 지견을 짓지 않는다. 천차만별을 한 칼에 베어버리고 등한하게 승부를 세우지 않고 마치 바보나 천치처럼 한 걸음 물러나서 숨도록 힘쓸 뿐이다.
호젓이 움직이고 홀로 비추어서 융통하게 합치하게 되면, 밀밀면면해서 부처님의 눈으로도 엿보지 못하는데, 더구나 마군 외도의 경우이겠느냐. 오래도록 길러 성취하면 자연히 마음에 사무치고 골수에 배는 공덕이 있게 된다.
그리하여 6근, 6진에 맞고 거슬림, 삶과 죽음까지도 물어뜯어 끊어서 조금도 의심이 없으면, 이야말로 무심하고 함이 없고 일없는 대해탈의 경계인 것이다.
이미 이와 같은 훌륭한 부류에 참여하기로 작정했으면 모름지기 간절하고 부지런히 힘써 몸과 마음을 놓아버리고 확실하게 참구해야만 한다. 한 구절, 한 기틀, 한 경계 위에서 분명하게 깨달아 들어가 한량없는 작용과 공안들을 일시에 꿰뚫어버리면, 꺼내드는 족족 다시는 놓아주지 않고 그대로 끊어버리니, 어찌 통쾌하지 않으랴.
90. 침상인(琛上人)에게 주는 글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조주스님은 ‘뜰 앞의 잣나무’라고 대답하였는데, 이는 참으로 힘을 덜었다 하리라.
요즈음 참당하여 묻는 사람들은 성식(性識)에 어두워 오로지 말 위에서 이러쿵저러쿵 하다가 마침내는 어쩌지 못한다. 당초에 합당치를 못하여 드디어는 뱃속 가득히 의심을 품고 엉뚱하게 이해하고 엉뚱하게 생각해서 본분사에서 빗나가버린다. 본분사란 언어에도 있지 않으며, 사물에도 있지 않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하리라. 마치 館綱?불이나 번갯빛과도 같아서 거의 풍도와 법규를 드러내지 않으니, 잠깐이라도 알아차리려 하면 벌써 두 번째 세 번째에 떨어진다.
만약 단도직입으로 깨치려 한다면 모름지기 한 걸음 물러나 자기에게로 나아가서, 미친 마음을 쉬고 지견과 알음알이의 장애를 모두 깨끗이 없애야만 한다. 그리하여 시절인연이 무르익으면 별안간 깨치는 것도 어렵지 않다. 이처럼 말하는 것도 벌써 너절한 설명들이니, 거듭 쓸데없는 짓을 하였다. 알아서 반드시 들어갈 곳이 있다면 다만 한 개의 공안을 가지고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믿어 들어가 의심 없는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
그러면 밥숟갈 드는 사이에 천 가지 만 가지로 겉만 바꿔가지고 오는 길고 짧은 구절, 많고 적은 구절, 있고 없는 구절 등을 일시에 투철히 벗어나게 되니, 여기에 어찌 두 가지가 있으랴. 이른바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켜 견성성불한다는 것이다.
한 번 얻으면 영원히 얻어, 자기의 보배창고에서 자기의 재물을 운반해 오니, 쓰고 누림에 어찌 다함이 있으랴. 보지도 못했느냐, 덕산스님이 용담(龍潭)스님 회상에서 종이로 감은 촛불을 입으로 훅 불어 꺼버리자, 활연히 깨닫고 말하기를 “오늘부터 천하 노화상의 혀끝을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했던 것을. 그 뒤에 산에 주석하면서 비바람이 휘몰아치듯 했으니 참으로 성미가 급하다 하겠다. 단지 이처럼 참구하고, 이처럼 증득하며, 이처럼 작용할 뿐이다.
하려는 마음만 가졌다면 반드시 그대를 속이지 못하리라.
91. 영상인(英上人)에게 주는 글
도의 현묘함은 지극히 간단하고 지극히 쉽다 하였는데, 이 말은 진실하다 하겠다. 그 근원을 통달하지 못한 자는 말한다. “이는 지극히 깊고 그윽하여 공겁 이전, 혼돈(混沌)이 나뉘지 않고 천지가 성립하기 전에 있었다. 아득하고 황홀하여 궁구하지 못하며 따져 묻지를 못한다. 오직 성인만이 깨달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 말은 알아도 그 참뜻은 모르는데 어떻게 이 일을 말로 하겠는가”라고. 이는 사람마다 자기에게 원만히 이루어져 매일 작용하는 가운데서 적나라하게 모든 일에 다 관계되고 어디에나 두루하여, 아무리 어두운 곳도 밝히지 않음이 없으며 한시라도 작용하지 않음이 없음을 전혀 모르는 것이다. 다만 오랫동안 등지고 치달린 지 오래되어, 억지로 가지와 마디를 내고 스스로를 믿으려 하지 않고 한결같이 밖에서만 찾으려 하기 때문에 찾을수록 더욱 멀어진다.
그러므로 달마스님은 서쪽에서 와서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킨다”고만 하였을 뿐이다. 이 마음이 바로 평상하여 하릴없는 마음이다.
천기(天機)는 스스로 펼쳐져 있어서 구속과 집착이 없고 주착함이 없이 천지와 덕이 같고, 일월은 합당히 밝으며 귀신과 길흉을 같이 하여, 털끝만큼도 알음알이의 가시를 용납하지 않으니, 오직 호탕하고 크게 통달하여, 무심하여 함이 없고 하릴없는 데 계합하였다.
만약 털끝이나 겨자씨만큼이라도 주관과 객관, 나와 남을 구별하면 즉시 막혀서 영원히 뚫지 못하리라. 이는 이른바 “무명(無明)의 참 성품이 부처의 성품이며, 허깨비같이 부질없는 몸이 바로 법신이다”한 것이다. 가령 무명의 껍데기 속에서 참된 성품을 증득한다면 밥숟갈 드는 사이에 무명 그대로를 한꺼번에 발휘하게 되며, 또 허깨비 같은 부질없는 몸 그대로가 빛나게 사무치리라. 다만 염려스러운 것은 무명의 부질없는 몸속에서 인위적으로 견해를 세우는 것인데, 그러면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
이미 이 정체를 꿰뚫고 나면 무명의 부질없는 몸 밖에 따로 밝혀낼 것이 없다. 일체의 모든 존재와 산하대지와 명암색공(明暗色空)과 4성6범(四聖六凡)이 모두 바깥 물건이 아니다. 진실하게 살피기만 하면 하루 종일 온 세상 어디에도 밖이 없으니, 어느 곳인들 자기의 몸과 마음을 놓아버릴 처소가 아니랴.
듣지도 못하였느냐. “번뇌[塵勞]의 친구가 바로 여래의 종자이니 몸의 실상과 부처도 이와 같이 관찰해야 한다”고 했던 옛분의 말씀을. 그런 뒤에 세간법과 불법이 한 덩어리를 이루어, 무심하게 밥 먹고 옷 입는 것이 바로 대기대용이 된다.
그렇다면 방과 할을 하는 등 모든 작위와 기연, 경계 일들을 어찌 의심하랴. 만약 이것을 통달하면 바로 자기 자신 속에서 지극히 쉽고 간단한 도의 묘(妙)와 한량없는 법문이 일시에 열린다.
그리하여 생사를 투철히 벗어나 수승하고 오묘한 과보를 성취하리니, 무슨 어려움이 있으랴.
92. 원상인(圓上人)에 주는 글
예로부터 뜻이 있는 사람은 머리를 깎고 나면 즉시 장소를 가리지 않고 도를 찾아갔었다. 실로 천재일우로 태어난 한 몸을 사바세계에서 헛되게 보내지 않게 하였던 것이다. 그 때문에 각고의 의지로 마음을 쉬고 진정으로 이마에 종안(宗眼)을 갖춘 선지식을 선택하여 짐보따리를 풀어놓고 그를 의지해 끝을 보았다. 그들의 행적을 관찰해 보건대, 진정 용상(龍象)대덕들이었다.
지금 이미 큰 인연에 나아가겠다는 뜻을 품었으니, 반드시 몸과 목숨이 다하도록 한결같이 견고하고 확실하게 해야만 한다. 먹고 자는 것을 잊고 괴로움을 꺼려하지 말고 인고하여야 한다. 이렇게 오래도록 몸소 참구하다 보면 저절로 믿어 들어갈 곳이 있게 한다. 그런데 하물며 이 하나의 인연은 자기의 분상에 원래부터 원만히 이루어져 일찍이 부족하거나 모자람이 없고 불조와 전혀 다름이 없음에랴!
다만 지견을 일으켜 억지로 마디와 조목을 내고 망정으로 헛된 거짓을 집착하였기 때문에 단박에 실답게 깨치지 못할 뿐이다. 만약 숙세에 심은 근기와 성품이 민첩하고 영리하여 한 생각도 내지 않으면 단박에 25유(二十五有)를 초월하여, 자기에게 본래 있는 여여하고도 오묘한 성품을 원만하게 깨닫고 다시는 털끝만큼도 주관과 객관, 나와 남을 나누지 않는다. 툭 트여 성인과 범부가 평등하고 나와 남이 여여하게 되어서, 부처가 다시는 부처를 찾지 않으며, 마음에서 애초부터 마음을 구하지 않는다. 부처와 마음이 둘이 아니어서 이르는 곳마다 있는 그대로 이루어져서, 하루 종일 다시는 헛된 거짓에 떨어지지 않고 단박에 자기에게 원래 있었던 실제의 경지를 밟는다.
자기의 창고를 열고 자기의 재물을 마음대로 운반해 내어, 처소에 따라 기틀(機)을 발휘하여 종지와 격식을 모두 초월하고, 활발하게 진실을 꿰뚫는다. 비록 덕산, 임제, 운문, 현사스님 등이 헤아리기 어려운 오묘한 기틀을 베푸는 것을 만난다 해도 한 수를 쓸 것조차도 없게 된다. 이를 두고 이른바 “많은 헛것이 적은 알참만 못하다”하는 것이다.
그저 맹렬했던 처음의 발심을 변치 말고 계속 이어지게 해서 철저한 곳에 도달하면 자기의 도업(道業)이 완성되지 못할까 근심하지 않아도 된다. 대장부라면 모름지기 향상의 대기대용을 알아서 편안하고 즐거워야 비로소 멈출 수 있다. 절대로 적은 것으로 마치지 말고, 부디 오fot동안 전전긍긍하다 보면 자연히 체득하게 되리니, 어찌 해탈하지 않으랴.
93. 조선인(照禪人)에게 주는 글
석공(石鞏)스님은 30년을 한 활과 두 개의 화살로 반 사람을 쏠 수 있었을 뿐이다. 무엇 때문에 온전하지 못하였을까. 아마도 이 가운데서는 이러함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리라. 어째서 그런가? 듣지도 못하였느냐. 향상의 한 길은 모든 성인도 전하지 못한다고 했던 말을. 만약 전하지 못하는 뜻을 체득한다면 바닥까지 다한 것이다. 이 일을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그대가 마음 기틀을 쓸 곳이 없으며, 그대가 몸을 들이대고 앉을 처소도 없다.
그러므로 옛부터 ‘곧바로 가리킴’만을 제창하여, 사람들에게 격식 밖에서 현묘하게 깨달아 흙탕 속으로 이끌지 않고 티끌 인연에 떨어지지 않게 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 때문에 “저 상근기 무리들은 듣자마자 들어 보이고 뽑아들자마자 바로 행한다. 갖가지 방편을 모아서도 그를 붙잡을 수가 없으며 모든 성인이 그를 가두지 못한다”고 하였던 것이다. 요컨대 이처럼 참구해서 깨달아 들어가야 하고, 이처럼 받아 지녀서 제창하고 거량해야만 하는데 어찌 어리석은 놈을 거론하랴.
각자가 별똥 튀듯한 눈을 가져 살인을 하고도 눈 한 번 깜짝하지 않아야만 비로소 상응할 수 있으니, 만약 주저주저했다가는 천만갈래로 빗나간다. 이 하나 지극한 보배의 경지가 있어야만 천차만별을 건립하게 된다. 만일 진실로 이러한 데 이르면 결코 괴상한 모습을 날조하거나 본[本]을 그려내지 않는다. 다만 무심을 지키는 것도 얻을 수 없는 일이니, 자기를 세워 투철히 벗어나고 중생의 결박을 풀어주는 데 이르러서도 모조리 땅에 웅크리고 앉은 시절일 뿐이다.
임제스님은 말하기를 “산승의 견처는 요컨대, 여러분이 모두 단박에 보신, 화신불의 머리에 눌러 앉을 것을 알게 하는 데 있다”라고 하였다. 이 법문에 의하면 이미 보신, 화신불을 눌러 앉았는데 향상일로에 다시 무엇이 있겠으며, 어찌 세간의 거친 망상으로 헤아릴 바이겠느냐.
요컨대 반드시 종전의 망상과 계교, 집착, 망정의 티끌, 낫다 못하다는 견해를 물리쳐서 본성의 이치를 분명하게 가려야 한다. 끝내 본분이 아닌 것은 한 칼에 잘라야 곧바로 벗은 듯이 자유로울 수 있다. 그렇게 되면 털끝만큼이라도 시방세계 티끌을 포섭치 않음이 없어서 작용하는 모든 것이 불조이며, 모든 불조가 바로 작용이다. 한 번의 몽둥이질, 한 번의 ‘할’, 한 마디 말, 하나의 경계에 전혀 고정된 틀이 없다.
일체를 실제 깨달음으로 도장치니 마치 영약을 만들 듯 무쇠를 두들겨 금덩어리가 되듯 모조리 나로부터 나오지 않음이 없다. 이미 오랫동안 참당하여 법을 묻는 사람도 지견과 알음알이를 내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견문만을 더할 뿐 끝내 실제의 일은 아니다.
모름지기 한 번 쉬어 일체를 쉬고 하나를 알아 모두를 알아서 이 본래면목을 보아 본지풍광을 통달해야만 한다. 그런 뒤에는 무슨 일을 하든지 일체가 있는 그대로 완전하여 마음의 힘을 빌리지 않으니, 마치 바람이 부는 대로 풀이 쏠리듯 한다. 숲 속과 시장거리가 다르지 않으니, 이것을 ‘꽉 움켜쥐고 주인이 되었다’고 한다. 중생의 명맥(命脈)을 저울질함이 자기의 손아귀 속에 있고 마음대로 어떤 판단이든 한다. 바로 이것을 작용 없는 도라 부르니, 어찌 지극한 요체이며 지극히 안온한 큰 해탈이 아니겠느냐.
94. 감상인(鑑上人)에게 주는 글
조사 문하에서는 본분강령만 제창하니 한 마디에 뭇 흐름을 끊어 모든 경계를 다 없앤다 해도 벌써 잡다함에 빠진 것이다. 그러니 더구나 말 위에서 말을 내고 경계 위에서 경계를 내는 경우이겠느냐. 한 무더기 많은 언어문자를 자세하게 따져서 심전(心田)을 더럽히면 언제 끝날 기약이 있겠는가. ‘이 일’이 말이나 경계에 있다면 총명함으로 알아차리고 들뜬 근기로 부질없이 식별하는 자들이 세간 사업을 배우듯 하여 아득히 동떨어지리니, 어찌 여기에 깨달음을 틔우느니 성품을 보느니를 논하랴.
석가 부처님이 한 번 나오셔서 기특하고도 승묘한 일을 무궁히 나투신 것도 오히려 시절 인연을 위해 빙 둘러 하신 말씀일 뿐이며, 최후에 가서야 비로소 이 도장을 가만히 부촉하셨다. 달마스님이 9년을 소림에서 차갑게 앉아 있었는데, 유독 혜가조사만이 알아차렸다. 그러므로 이를 “교 밖에서 따로 행하며 외길로 심인(心印)만을 전수한다”고 한다.
그러면 이 마음 도장을 어떻게 전수하겠는가? 눈썹을 드날리고 눈을 깜짝이는 것으로인가? 아니면 불자를 들고 선상을 치는 것으로인가? 아니면 아무 말 없이 그저 움직이고 행동하는 것으로인가? 이와 같은 것도 모두 아니고 단박에 알아차리게 하는 것으로인가? 아니면 향상 향하와 면전 배후에 따로 특별한 일을 둠으로서 인가? 아니면 성품과 이치를 논하여 연원에 깊숙이 들어감으로서 인가? 위와 같이 한다면 흡사 방망이를 휘둘러 달을 때리는 것과도 같아서 어찌해볼 도리가 없으니 세간의 거치고 들뜬 얄팍한 식견으로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라.
요컨대 용과 코끼리가 차고 밟듯 대뜸 뛰어넘어 완전히 사무치고 완벽하게 증득해야만 하리라. 한결같이 참구하고 법문을 청하여 꼭 꿰뚫어야지 형식적인 소굴에 안주해서는 안되니, 그것은 자신을 속일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허물을 끼친다.
그 때문에 옛부터 작가종사는 이 하나를 우러러 소중히 여겨 경솔하게 맡기지 않았고, 경솔하게 인가하지 않았던 것이다. 듣지도 못했느냐. “분골쇄신한다 해도 은혜를 다 갚을 수 없나니, 한마디에 요연히 백억 법문을 뛰어 넘도다” 하신 영가(永嘉)스님의 말씀을.
비마(秘魔)스님은 평소에 그저 나무집게 한 개를 가지고 있다가 사람만 보면 “어떤 마군 도깨비가 그대를 출가하게 하였느냐? 어떤 마군 도깨비가 그대에게 행각하라 하였느냐? 말을 해도 나무집게에 찝혀 죽을 것이며, 말을 못해도 나무집게에 찝혀 죽으리라”하였다. 그 한 마당을 따져보면 어찌 부질없이 그렇게 했으랴. 아마도 풀구덩이 속에 들어가 사람을 구제함일 것이리라. 만약 있음을 아는 사람이라면 어찌 많은 갈래가 있겠는가. 요란스러이 어지러움에 잠깐이라도 빠지기만 하면 천 리 만 리 나 멀어진다. 금강권(金剛圈)을 뛰쳐나 밤송이를 삼켜야만, 자연히 귀결점을 알리라.
이 종지를 알아차리는 요점은 의식과 마음을 쉬어서 마치 마른 나무 썩은 기둥처럼 차갑고 쓸쓸한 경지에서, 6근, 6진이 짝하지 않고 동과 정이 상대가 끊겨서 서 있는 자리가 텅 비어 안배하여 들어앉을 곳이 없이 벗은 듯 텅 비게 하는 데 있다. 이것이 이른바 ‘사람은 무심하게 도에 합치하고 도는 무심하게 사람에게 합치한다’는 것이다.
중생들을 만나 인연을 따르는 데 있어서도 다른 견해를 내지 않고 다만 지금 그대로의 한 기틀, 한 경계에 의거하여 모두 그대로 눌러 앉아버리니, 다시 무슨 방, 할, 조(照), 용(用), 권, 실을 말하겠는가. 한 번 했다하면 그대로 꿰뚫어, 오직 나만 알 뿐 다시는 다른 일이 없다. 오래도록 이처럼 해나간다면 본분사를 끝내지 못할까 어찌 근심하랴.
95. 조상인(祖上人)에게 주는 글
조상인은 덕산에서 찾아와 오랫동안 이 일에 힘을 썼다. 그러나 장산(蔣山)의 나[佛果]를 본들 어찌 두 종류의 불법이 있겠느냐. 가령 보따리를 걸머지고 왔다면 낭패를 볼 것이며, 보따리를 걸머지고 오지 않았다면 반드시 몸 바꿀 곳을 알아야 한다. 요즈음 남자들은 누구나 도처 총림에서 종장에게 묻고 참구한다. 그러나 하나라도 실제로 깨달아 본분의 경지에 도달하여 완전히 쉬어서 안온한 자리에 간 사람을 찾으려 해도 실로 그러한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
대장부가 고향을 버리고 떠나서 본분존숙(本分尊宿)의 곁에 이미 있으면서, 더더욱 부지런히 힘을 다하여 갖가지 인연을 지은 것이 모두가 분수 바깥은 아니며 행각을 매각(昧却)하지 않았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실제를 살피는 데 있어서는 요컨대, 반드시 옛부터 내려오는 일이 있고, 위로부터 즐비하게 수많은 조사들이 서로 계승하였음을 알아야 한다. 덕산스님과 임제스님에 이르러선 ‘방’과 ’할‘을 행하면서 천만 종류의 방편을 지었으나, 종국에는 사람들로 하여금 무엇을 하게 하려 하였겠는가? 모름지기 큰 코끼리가 강을 건너듯이 번뇌의 물길을 끊고 지나가서 끝내 의심의 장애가 없어야 하니, 이것도 오히려 옛부터 내려오는 일이라 칭할 수는 없다. 도인은 서로 만나도 드러내 보이지 말고 몽둥이로 돌장승의 머리를 쳐야지 책자 위에서 동쪽 서쪽을 가리켜서는 안된다. 그러니 비록 이렇다 하더라도 벌써 허물이다. 덕산으로 돌아가 주지에게 이 이야기를 그대로 전해주고, 그가 어떻게 그대를 위해 증거해 주는지 지켜 보아라.
96. 연선인(宴禪人)에게 주는 글
귀종(歸宗)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와서 하직인사를 하자, 귀종스님은 말하였다.
“지금 바로 가서 보따리를 싸가지고 떠날 무렵에 찾아오면 그대에게 한 차례 불법을 말해 주리라.”
그 스님은 말대로 하여, 다시 방장실에 올라갔더니, 귀종스님은 “ 날씨가 추우니 조심해서 가게나”하였다.
귀종스님은 그에게 가득히 불법을 설해 주었고 그 스님은 마음을 비우고 아직 한번도 듣지 못한 법문을 들으려 했으므로 귀종스님은 그렇게 하였을 뿐이다.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그들 옛분들은 이 일에 있어서 빈틈없이 면밀했다는 점이다. 만일 불법이라고 부른다면 벌써 독약에 중독된 것이다. 안(晏)스님이 찾아와 이별을 하며 옛사람의 자취를 밟지 않으려 하나 그것 역시 처음부터 시작함을 면치 못하는 것이다.
97. 종대사(從大師)에게 주는글(筠州 黃檗山에 머물다)
납승이 안목을 갖추고 행각한다면 반드시 본분의 종지와 향상의 수단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철두철미하게 적나라하여 수행의 단계를 설정하지 않고 곧바로 초월해 올라가서 털끝만큼도 막힘이 없어야 큰 해탈의 금강왕인(金剛王印)입니다. 수만 가지로 얽힌 경계와 수천 성인이 벌려놓은 백억의 단서를 열어제낄 수 없는 곳에서 마침내 수용하도록 해야만 합니다.
닿는 곳마다 몸 벗어날 요결이 있음과 사물마다에서 티끌의 자취를 끊고 벗어남과 온 몸이 통째로 눈이 되는 사람과, 온 세계가 가두지 못하는 사람과 잡든지 놓든지 간에 털끝만큼도 새는 것이 없는 사람과, 용과 호랑이처럼 달리고 번개가 치고 바람이 휘돌 듯 하는 사람도, 더듬고 찾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무심히 호호탕탕하여 어리석은 듯하니, 어찌 다시 선(禪)을 조작으로 이해하여 가는 곳마다 기관 작용과 맞닥뜨려 싸우며 어구(語句)를 설명하여 주해를 내며, 살과 뼈에다 찰싹 붙이고, 향상이니 향하를 따지고 일삼을 것이 있네 없네 하면서 종풍을 매몰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말하기를 “저 체득한 사람은 무심한 경지만을 지킬 뿐이다”하였던 것입니다. 말해 보십시오. 그들은 어떤 도리를 체득하였는지를.
만일 바늘 꿰맨 틈만큼이라도 유무, 득실과 아견(我見)과 아해(我解)가 있다면 목숨의 뿌리[命根]가 찔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맹렬한 불무더기와도 같아서 가까이하면 얼굴을 태워버리고, 금강검과도 같아서 머뭇거리면 몸과 목숨을 잃어버린다는 점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역대의 조사들이 세상에 나와서 이것만을 들고서 만 길 절벽을 세우셨습니다. 이미 큰 근기를 갖추었다면 다른 사람에게 속지 말고 이제껏 의지해왔던 밝고 어두움의 두 갈래를 그 자리에서 벗어야 합니다. 놓아버리고 믿어서 고정된 형식 없이 살아 움직여야 합니다. 툭 트이게 깨끗이 다하고서 옛부터 불조가 함께 증득한 것을 알아차리고 걸머지면 생사를 말끔히 벗어남에 티끌과 분명함을 함께 부수는 것이 어찌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이리해야만 진정한 본분납자라 할 만하니, 이미 여기에 뜻을 두었다면 알아서 도모해야 됩니다.
98. 조선인(祖禪人)에게 주는 글
세존이 꽃을 들자 가섭이 미소하고, 이조스님이 절을 하자 달마스님이 마음을 전했던 것이 어찌 다른 것이겠는가. 화살과 칼끝이 서로 마주친 격이다. 신령스럽게 계합하고 이치가 맞는 상황은 언어와 사고로 헤아릴 바가 아니며 오직 향상의 종풍이 있음을 아는 자만이 깨칠 수 있다. 이는 천억 만년이라 해도 마치 하루와도 같다.
그러므로 옛 불조께서는 이를 구할 적에 처음부터 경솔하게 하지 않고, 날카로운 지혜를 가진 상근기를 두드려 만든 뒤에 요점을 드러내 보이고 마리를 쳐서 가다듬기를 마치 아교풀을 옻칠에 잘 섞듯 하였다. 한 모서리를 들어 주면 나머지 세 모서리를 알아 정해진 형식 없이 자유자재로이 번뇌를 끊는 사람이라야 비로소 수긍할 수 있다. 그런 뒤에 다시 걸러내고 연마하여 사람들이 끝까지 따지고 분별하지 못할 얽히고설킨 곳에 이르러서도 여유작작하다.
수용할 때를 당해서는 차츰차츰 솜씨를 드러내 종지와 격식을 넘어서고, 스승의 뜻을 따르지 않고 흉금을 호젓이 드러내니 천길 절벽에 서 있는 듯하다. 여러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적수를 능가하여 바야흐로 법의 부촉을 감당할 수 있다. 법이 가볍지 않아서 도 또한 존엄하니 이른바 근원이 깊으면 물줄기도 길다는 것이다.
옛부터 고덕들은 한번 했다 하면 평생을 쏟았으니 혹은 20년이고 30년이고 깨달아 들어간 곳에 의지하여 철두철미하기를 기약하였다. 이미 뜻이 세워지고 나면 마음씀씀이도 견고 확실하게 되어, 이로써 성취하고 나서는 금성옥진(金聲玉振)을 땅에 올렸다. 대장부라면 높은 경지를 우러러 바라보는 것도 어쩌지 못해 그리 하는 것이다. 그들도 해냈는데 나라고 어찌 못하랴. 더구나 생사를 투철히 벗어나 미래가 다하도록 한 번 얻기만 하면 영원히 얻는 경우이겠느냐.
반드시 근본을 깊고, 단단하게 해서 그것이 견고하면 가지와 잎사귀가 무성하지 않을 리가 없다. 다만 언제나 있어서 달아나지 않게 하여 맑고 맑아 뭇 물상을 머금고 비추게 해야 한다. 그러면 4대6근이 모두 한갓 살림살이일 뿐이니, 하물며 그 밖의 알음알이와 언어문자로 아는 경우이겠느냐. 당장에 밑바닥까지 몽땅 놓아 버려서 지극히 참답고 일상적인, 완전히 평온한 경지에 도달하게 되면, 절대로 티끌만한 것도 얻을 것이 없다. 그저 어느 곳에서나 편안한 참된 무심도인이 되리라. 이 무심을 보임(保任)하면 끝내는 부처도 존재하지 않는데 무엇을 중생이라고 하겠으며, 보리도 없는데 무엇을 번뇌라 부르겠느냐. 홀연히 영원히 벗어나 시절을 따라 복을 받아들여 밥을 만나면 밥을 먹고 차를 만나면 차를 마신다. 비록 시끄러운 세속의 거리에 있더라도 깊은 산 속처럼 고요하여 애초부터 두 종류라는 견해가 없다.
가령 그를 극락의 연화좌에 데려간다 해도 기뻐하지 않고 지하의 황천(黃泉)에 집어넣어도 싫어하지 않는다. 상황 따라 건립함도 나머지 여분의 일이거늘, 나에게 무엇이 있겠느냐. 대가섭은 이렇게 말했다.
법, 법하는 본래의 법은
법도 없고 법 아닌 것도 없나니
어찌 한 법 가운데
법과 법 아닌 것이 있으랴.
法法本來法 無法無非法
何於一法中 有法有不法
옛사람은 종지를 체득한 뒤에는 깊숙이 감추어서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기를 바랐으니, 일 생기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득이하여 사람들에게 붙들려 나오게 되어도 굳이 사양하지 않았으니, 아마도 무심했기 때문일 것이다. 자비를 내려 방편을 베풀게 되더라도 그저 다만 풍성하면 풍성한 대로 검소하면 검소한 대로 가풍을 따랐을 뿐이다.
구지(俱脂)스님은 한 손가락을 세웠을 뿐이며, 타지(打地)스님은 땅을 쳤을 뿐이고, 비마(秘魔)스님은 나무집게를 들었으며, 무업(無業)스님은 ‘망상 피우지 말라’고 하였고, 항마(降魔)스님은 홀(笏)을 들고 춤을 추었다. 그들은 애초부터 격식과 승부라는 견해에 구애받지 않고 사람들로 하여금 각자 쉼으로 돌아갈 것을 알아서 견해의 가시를 일으키지 않도록 힘썼던 것이다. 귀신의 소굴에서 정혼(精魂)을 놀리지 말고 우뚝하고 정성스러이 몹시 안온한 경지에 도달해야만 비로소 오묘한 종지인 것이다.
영리한 자라면 그 자리에서 모름지기 분명한 경지를 알아 등뼈가 무쇠처럼 단단해야 한다. 인간 세상에 노닐더라도 모든 인연을 허깨비로 보아서 잡는 것마다 주인이 되라. 인정을 따르지 말며 나다 남이다 하는 생각을 끊고 알음알이를 벗어 대뜸 견성 성불하여 묘한 마음을 곧바로 가리키는 것으로 계단을 삼아야 한다. 작용하며 인연에 응하게 되어서는 형식에 떨어지지 말고 ‘한 덩어리’를 오래도록 가져서 고요하고 담박한 몸과 마음을 영원토록 지키면서 티끌번뇌에서 투철히 벗어나야만 훌륭하고도 훌륭한 자이다
99. 제상인(諸上人)에게 주는 글
도는 본래 말이 없으며 법은 본래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말없는 말로써 생겨남이 없는 법을 드러내면 결코 제2의 것(第二頭)이란 없다. 잠깐이라도 쫓아가서 붙들려고 하면 벌써 빗나간다. 그러므로 조사가 서쪽에서 오시어 단지 이 일만을 창도하시면서 말 밖에서 체득하고 일 밖에서 알아차리는 것만을 귀하게 여겼을 뿐이니 스스로 상상의 근기가 아니라면 어떻게 대뜸 알아차릴 수 있으랴. 그러나 여기에 목적이 있는 자라면 어찌 정도와 한량을 헤아리랴.
요컨대 처한 위치가 준엄하여 단칼에 두 동강 내는 아주 영리한 몸과 마음을 갖추어야 한다. 짐 보따리를 내려놓고서는 악착같이 물어뜯는 악독한 솜씨를 가진 사람에 의지하여, 망정을 싹 쓸어버리고 이제껏 배워서 이해한 주장이나 살 속에 착 달라붙은 지견을 한꺼번에 엎어버려 대뜸 가슴이 텅 비게 해야 한다. 자기의 사사로움을 노출하지 않고 한 물건도 위하지 말고 그대로 철저하게 깨달아, 옛사람들과 털끝만큼도 다름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되었다 해도 향상의 일이 있음을 알아서, 스승을 넘어설 지략이 있어야만 하리라. 그 때문에 옛날에 부처님의 향상 경계를 묻자 “부처가 아니다”라고 대답했고, 다시 “방편으로 부처라고 부른다”라고 답변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견성성불도 방편일 뿐이니, 이 가운데서 어떻게 동쪽 서쪽을 가리키겠는가.
모름지기 가만히 계합하여 스스로 잘 간직해서 마침내 쇄쇄낙락할 수 있으면 다시 무슨 열반을 증득한다느니 생사를 깨친다느니 하는 말이 있을 수 있으랴. 다 군더더기다. 그렇긴 하나 나의 말도 지극한 도리로 삼지 말아야 부처의 병통과 조사의 병통을 비로소 면하리라.
대장부가 마음의 요처를 참구하려 한다면 어찌 일정한 한계를 세우랴. 다만 깊은 신심을 갖추고 한결같이 앞을 향한다면 실제의 경지를 밟지 않을 자는 결코 없으리라. 매일 새롭고 나날이 참신하며 매일 덜어내고 나날이 덜어내어 한 걸음 물러나 밑바닥까지 이르면 될 뿐이다. 그리하여 끝까지 이르러서는 그것마저도 세우지 않는 이것이야말로 바로 공부한 곳이다.
100. 양주(楊洲)의 승정(僧正) 정혜대사(淨慧大師)에게 드리는 글
이 일은 작가 선지식을 의지해서만 통할 수 있나니
천리를 논할 것 없이 가풍이 저절로 같도다
명성을 들은 지 10년인데 이제야 서로 만나
금강권, 율극봉을 꺼내 보이는 도다.
箇事唯憑作者通 不論千里自同風
聞名十載今相遇 拈起金剛栗棘蓬
양주(楊洲)땅의 전승정(前僧正)이었던 정혜대사종공(淨慧大師宗公)께서 일부러 강을 건너 종부(鍾阜) 땅을 거쳐 찾아오심은 자기의 큰 인연을 위한 정성의 표시이며, 오로지 소참(小參)을 청하므로 이 게송을 설하여 대사의 성의에 보답코자 합니다.
정혜대사는 평생 매우 청정히 수행하였으니 이는 숙세에 심은 복연(福緣)으로, 마치 부처님이 세상에 생존해 계실 때 수보리의 방 안이 보배로 가득했던 것과도 같습니다. 근성이 명민하여 집착이 전혀 없고 득실을 알아, 모든 사물이 뜻밖에 닥쳐오더라도 마음을 다잡아 오직 이 하나 참구하기만 힘썼을 뿐입니다. 잠깐밖에는 만나보지 못했으나 매우 확고부동하게 애를 써서 기대에 부응하므로 그대를 위해 그 뜻을 펴 보이는 바입니다.
조사와 모든 부처님이 외길로 전하고 밝혀 보이신 것은 사람마다 제 발 아래 본래 있는 성품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성인, 범부의 기세계(器世界)와 6근, 6진인 정보(正報)는 오랜 겁도록 끊어진 적이 없었으나 각자 사람마다 망상으로 티끌경계를 반연하여 장애에 가리웠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근본의 큰 역량을 발현해 용맹하게 닦아 지녀서 한 생각도 내지 않고 앞뒤가 끊기게 되면, 단박에 이 마음을 분명하게 믿고 이 자체를 분명하게 보아서 허공같이 넓고 태양처럼 밝아집니다. 주관, 객관이 나뉘지 않고 한량을 짓지도 않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단박에 철저하게 깨치면 마음 그대로 부처임을 꿰뚫을 수 있습니다. 따로 부처라 할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마음이라 할 부처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적나라하게 텅 비고 오묘하고 분명하게 통하여 절대로 의지하거나 기댐이 없습니다.
이는 마치 사람이 한량없는 보배창고를 열면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이 다 자기 재물인 것과도 같습니다. 매일매일 쓰더라도 온천지 어디에도 감출 수 없이 완전히 쉬어버린 무념무심의 경계로 들어가니 이른바“한 구절에 요연히 백억 법문을 뛰어 넘는다”한 것입니다. 밥숟갈 드는 사이의 천만 가지 일과 천 마디 만 마디 구절들이 어찌 다시 차별이 있겠습니까. 이제 힘을 덜려 한다면 망상의 외연과 의심의 망정을 쉬어 깨끗이 다한 곳이 바로 자기가 생사를 투철히 벗어난 곳임을 아십시오. 그저 이것이 바로 금강권, 율극봉이니, 반드시 이 자리에서 알아차리십시오.
101. 각선인(覺禪人)에게 주는 글
불조의 종승(宗乘)에서는 단도직입만을 힘쓸 뿐이다. 마치 큰 코끼리가 강을 건너듯 굉장한 기세로 밑바닥까지 사무쳐야지 만약 조금이라도 주저했다가는 천 리 만 리 어긋나 어찌해볼 도리가 없으리라. 그러므로 옛부터 고덕들은 방, 할을 행하고 마치 전광석화와도 같이 방편과 경계에서 참구하였으니, 가풍의 규식을 약간이라도 노출했다 하면 벌써 진탕 속으로 이끌고 풀 구덩이 속에 떨어져버린다. 그런데 어찌 다시 심천, 득실, 편원(偏圓), 사리(事理)등의 알음알이를 따지랴. 흙 위에 진흙을 더한 격이라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준수한 부류는 최상승의 도장을 차고 천 개의 해가 동시에 비춰서 어둠을 밝히는 것과도 같다. 문에 들어오는 것을 보기만 하면 눈을 들고 입술을 움직이지 않아도 먼저 오장육부를 꿰뚫어 본 것이다. 대체로 본분종사의 솜씨는 애초에 조작이 없고, 그저 재빨리 스스로 알아차려서 훌쩍 일어나 대뜸 가버리는 것을 귀하게 여길 뿐이다.
그래서 고금을 가두고 시방을 눌러 앉아서 만세천겁토록 실낱만큼도 변하지 않는다. 만약 이처럼 단박에 초월하지 못한다면 우선 스스로 6근, 6진의 허망한 인연을 툭 털어버리고, 나아가 청정오묘하고 빼어나 도리로써 텅 빈 곳을 마주해야 한다.
마치 통 밑이 빠진 듯 가슴이 깨끗하며, 의심의 망정이 다하고 훌륭하다는 생각도 모두 잊어서 자연히 근본이 환하게 밝아지면 옛사람들과 똑같이 증득하여 일찍이 간격이 없어진다. 바로 이것이 진리에 들어가는 문이며, 마음 깨닫는 법칙이다. 끝내 촉루식(觸?識)을 가지고 귀신을 보고 그림자와 광채를 인식하지 말아라. 소굴에 떨어지게 되면 빠져나올 수가 없다.
그래서 옛사람은“마음 그대로가 부처이다”라고 말했고, 또"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했으며, 또”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며, 물건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또”삼선근(三善根)“,”저울추를 톱으로 자른다“등등 천차만별이었다. 만약 이를 단박에 알아차린다면 어찌 두갈래가 있으랴. 때문에 한 번 알아버리면 일체를 알고 한 번 밝히면 일체를 밝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밝히고 안 것까지도 모름지기 세 동강을 내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하릴없고 함이 없는 경지에 들어가 진실 합당한 곳을 밟으리라.
102. 자선인(自禪人)에게 주는 글
처음 발심한 사람이 용맹스런 마음으로 밥 먹고 잠자는 것마저 잊은 채 오로지 확실한 데에만 전념하는 것은 가히 훌륭한 일이다. 더구나 한창 나이에 고향의 포근함을 그리워하지 않고 청정고아한 대중을 따라서 이 하나의 큰 인연을 몸소 닦는 경우야 실로 숙세에 심은 큰 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매일 삼가고 애써서 단박에 씻은 듯 벗어나 자유로이 법도를 실천하며 따라야 한다.
이미 도를 닦겠다는 마음을 먹고 대중을 대신하여 발우를 지녔다면 좋지 않은 일이라 할 수 없다. 모름지기 외진 곳에 거처한다 해도 빽빽이 많은 사람의 속에 있는 것처럼 해야 하니 이른바 “스스로 총림을 짓는다”한 것이다. 소매에 소개장을 넣고 신도집에 명함을 내밀며 사람을 만나 예를 차리는 등 매일 작용하는 가운데서 스스로 참구해야 한다.
그러면 모든 경계와 인연이 모조리 자기가 깨달아 들어가는 길이 되리라. 한 티끌 속에서 투철히 벗어나면 온 세계가 모두 큰 보배창고가 되리라. 이 깊은 무더기를 발현하면 8만의 티끌 번뇌가 모두 8만의 바라밀이 된다. 외물을 움직여 자기에게로 귀결시키고 가는 곳마다 마음을 알아서 공부하는 경계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고덕은 말하기를 “산승이 그대를 위해 방편을 틔워주는 것은 도리어 한계가 있으니 저 산하대지와 일체 음성 및 자기의 마음이 일어나는 자리가 그대로 문수, 보현, 관세음의 오묘한 방편인 것만 못하다”고 했다. 듣지도 못하였느냐. 보수(寶壽)스님이 화주를 나갔다가 시장에서 두 사람이 서로 다투는 것을 보았는데, 곁에 있는 사람이 화해를 권하면서 “너는 이처럼 면목이 없느냐”하는 것을 듣고서 단박에 통 밑이 빠진 듯했던 것을. 그는 그 뒤로 세상에 나와 풍우의 조화를 부리듯 하였던 것이다. 다만 처음 발심했던 마음처럼 한결같이 변하지 말아야 한다. 자기의 칠통팔달한 자재력을 가지고 의심이 없는 경지에 도달하면, 스스로 불조를 초월하고 생사를 투철히 벗어나는 것은 일도 아니다.
103. 유선인(有禪人)에게 주는 글
“지극한 도는 어려움 없으니 그저 이것저것 가리지 않기만 하면 된다”고 한 이 말은 진실하다 하겠다. 조금이라도 가림이 있다면 그것은 마음이 생긴 것이다. 마음이 생기고 나면 나와 남, 사랑과 증오, 좋고 싫음, 취하고 버림이 쑥쑥 일어나서 저 지극한 도로 나아가기란 요원하지 않겠느냐.
지극한 도의 요점은 마음을 쉬는 데 있을 뿐이니 마음을 쉬고 나면 모든 인연이 쉬어버린다. 허공같이 툭 트여 조금도 의탁함이 없는 이것이 진실한 해탈인데 어찌 어려움이 있으랴. 그러므로 이근종지(利根種智)를 갖춘 옛분들은 잠깐 건드려주기만 해도 떨치고 일어나서 바로 떠나 통쾌하게 스스로 짊어지고 결코 그것과 관계하지 않았다.
대매(大梅)스님의 ‘즉불즉심(卽佛卽心)’과 용아(龍雅)스님의 ‘동구의 물이 역류한다’와 조과(鳥?)스님이 실오라기를 입으로 불었던 것과 구지(俱脂)스님이 한 손가락을 치켜세웠던 경우는 모두 근원을 곧바로 깨달아 결코 기댐이 없었다. 지견의 장애를 훌쩍 벗어나 깨끗하니 더럽느니 하는 상대적인 견해에 걸리지 않고 위없는 진실한 종지를 초월 증오하여, 함이 없고 조작이 없는 경계를 밟았던 것이다.
요즈음 도를 배우는 이가 이미 지향하는 목적이 있다면 마땅히 힘써 옛사람과 짝이 되어 마음 깨칠 것을 기약해야만 한다. 참된 경지를 밟게 되면 하는 것마다 모두 근본자리로 돌아가 모든 성인도 그를 가두지 못하며, 알음알이가 다 없어지고 잘잘못을 모두 벗어난다. 바로 이것이 하고자 함도 없고 의지함도 없는 진정 자유자재한 도인이다. 여기에 이르렀는데 어찌 다시 어려움과 쉬움을 논하랴. 결국 어려움 없고 쉬움 없는 그것 역시 있을 수 없다.
납승이 말구절 속에서 몸을 벗어나는 까닭은 아마도 향상의 방편을 갖추어 말 없는 속에서 말을 드러내고, 몸 없는 가운데서 몸을 나타내기 때문일 것이다. 말길이 끊기고 마음 갈 곳이 끊어져 무심하고 넓게 텅 비지만, 잠깐이라도 기연 있기만 하면 천지를 덮는다.
이를 두고 이른바 면면밀밀하여 간격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자유자재한 경지에서 이와 같다. 이 때문에 모든 하늘이 꽃을 바치려 해도 길이 없고 마군 외도가 가만히 엿보려 해도 볼 수가 없으니 이처럼 실천해야 자연히 모든 삼매를 초월한다고 할 만하다.
옛사람이 무위무사로 극치를 삼은 것은 아마도 그 마음 근원이 맑고 텅 비어 융통하고 실제로 이 경계를 밟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결코 여기에 머물지도 않았으니 소반이 주옥을 굴리듯 주옥이 소반에서 구르듯 하였다고 할 만하다. 그러니 어찌 급하게 단박 멈추게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그래서 죽은 뱀이라 할지라도 희롱할 줄 알면 살려놓는다고 하였던 것이다.
장경(長慶)스님은 말하기를“도반과 어깨를 부딪치며 지나는 순간 일생의 참구하는 일을 마친다”고 하였다. 분명코, 홀로 벗어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 일이 있는 줄을 알 수 있으랴. 진실로 알아야 할 것은 모름지기 이러한 사람만이 이러한 일이 있는 줄을 안다는 점이다. 어떤 스님이 조산(曹山)스님에게 물었다.
“땅에서 자빠진 사람은 땅을 짚고 일어난다 하는데 어떤 것이 자빠지는 것인지요?”
“하려고 하면 자빠지는 것이다.”
“어떤 것이 일어나는 것인지요?”
“일어나는구나.”
눈 밝은 사람은 꿰뚫어 보고 다시는 따로 구하지 않는다. 이 한 뙈기 터는 험한 곳은 험하고 평탄한 곳은 평탄하여, 선 자리에서도 밝히지 못하면 앉은 자리에서도 밝히지 못한다고 해야 무방하리라.
옛사람은 뜻을 얻은 다음에 깊은 바위, 궁벽한 골짜기, 띠풀집이나 돌집에서 완전히 쉬어 마음에 간직했던 것을 놓아버리고 살아 나갔다. 명리를 버리고 세속에 관계하지 않으면서 자기 일을 마친 뒤에 인연을 따랐다. 나오지 않으면 그만이었지만 한 번 나왔다 하면 반드시 무리를 놀라게 하고 대중을 조복 받았다. 그것은 아마도 근원이 깊어 물줄기가 길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이미 심산궁곡에 들어가진 못한다 해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단지 본분에 의지하여 맑고 고요함을 지켜야 한다. 그러면 가는 곳마다 현재 그대로를 지켜 편안함을 얻을 것이니, 이것도 역시 심기(心機)를 쉬는 근본이 아니겠느냐.
104. 월선인(月禪人)에게 주는 글
옛날 조산(曹山本寂)스님이 오본(悟本洞山)스님에게 하직인사를 하자 오본스님이 물었다.
“어디로 가느냐?”
그러자 조산스님이 대답하였다.
“변함이 없는 곳으로 가렵니다.”
“변함이 없는 곳에 어찌 감이 있겠느냐?”
“가더라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오본스님은 그를 알아차렸다. 그것은 그의 깨우침이 빈틈없이 면밀하여 큰 안락을 얻어 통하지 않는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관 작용의 길[機路]이 말숙히 깨끗하면 모든 사람이 가두어도 머물지 않으며, 말을 하게 되더라도 단도직입적이어서 전혀 장애와 걸림이 없었다.
만일 가슴에 조금이라도 알음알이가 있어 곳곳에서 집착한다면 어떻게 말끝에서 단박에 이처럼 끊을 수 있었으랴. 이 의도를 잘 체득하면 참으로 변함이 없어져서 천행만겁이 지나도 다만 여여(如如)할 뿐이다.
두서없이 어지러워도 낱낱이 분명하여 아무 변함이 없으니, 어찌 끝없는 허공 같은 완전한 선정을 얻지 않겠는가. 그 때문에 말하기를 “오묘한 자체는 본래 처소가 없으니 온몸인들 어찌 자취가 있으랴” 하였다. 그러니 “가더라도 변함이 없다”한 뜻이 분명하리라.
석가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지금 그대를 위해 이 일을 보임(保任)하오니 끝내 헛된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다. 이야말로 불지견(佛知見)의 연원을 사무치면 모두가 실제 아님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참된 경지를 밟게 되면 모든 행동거지가 다 헛된 데 떨어지지 않는다. 낱낱이 처음부터 끝까지 고금을 초월하여 그 형상을 찾으려 해도 터럭만큼도 찾지 못한다. 그 진실 합당함의 극치는 밥 먹고 옷 입는 4위의(四威儀) 가운데 완전한 모습 그대로 이루어져 있다.
요컨대 그것을 지극한 보배를 얻은 듯 정중히 보임해야 한다. 그것을 보호하고 기르면 큰 역량을 얻어, 이로써 세상을 제도하고 중생을 이롭게 하는데 감당하지 못할 것이 없게 된다. 바야흐로 부처의 아들이 되어 석가 부처님이 애써 말씀하신 것을 저버리지 않으리니, 이것을 ‘은혜를 알면 은혜를 갚을 줄 안다’고 하는 것이다.
105. 본선인(本禪人)에게 주는 글
“항상 홀로 다니고 항상 홀로 걷나니, 통달한 사람과 함께 열반의 길에 노닐도다”한 이 말은 바로 “만법과 짝하지 않는다”한 말의 대의(大意)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하물며 자기에게 본래 있는 발밑에 범부와 성인을 길러내고 10허(十虛)를 머금었다 토해내는 경우이겠는가. 어느 법도 그 힘을 받지 않음이 없으며, 어느 일도 그로부터 나오지 않음이 없으니, 어찌 외물이 있어 장애가 되겠는가.
다만 자신의 믿음이 미치지 못하여 흔들릴까가 걱정일 뿐이다. 만약 환하게 밝혀 투철히 벗어나면 결코 한 마음도 나지 않는데 어느 곳에 다시 허다함이 있으랴. 그 때문에 말하기를, “신령한 광채가 홀로 빛나면서 6근, 6진을 아득히 벗어났다”고 하였던 것이다.
요컨대 본래부터 자기에게 갖추어진, 살아 있는 높고 오묘한 자체를 당장에 알아차려야만 한다. 그러고 나면 언제 어디에서나 그것과 마주쳐 원융히 받아들이지 않음이 없다. 밥 먹고 옷 입는 모든 행동거지와 세간이니 출세간이니 하는 것이 모두 밖에서 얻는 것이 아니다. 이를 통달하고 나면 다만 평상을 지킬 뿐 모든 견해를 내지 않으니, 무슨 “한 입에 서강의 물을 다 마신다”느니 하는 말을 하랴. 설사 백천의 부처님과 한량없는 조사가 이루 셀 수 없는 괴이한 신통변화를 나타낸다 해도 한 수를 쓸 필요도 없다. 이처럼 믿고 보아 사무친다면 어찌 행각하는 일 결판냈다 하지 않으랴.
106. 달선인(達禪人)에게 주는 글
큰 도의 당체는 혼돈(混沌)이 아직 나뉘기 이전이나 아득하고 황홀한 자리에 있지 않다. 그렇다고 고의로 깊숙하게 은폐하여 사람들이 알아차리거나 헤아리지 못하도록 하는 것도 아니다. 지극한 밝음은 밝음이 아니며 지극한 오묘는 오묘가 아니니, 만약 숙세의 근기가 완전히 익어서 고요하면 들자마자 들어 보이고 단박에 귀결점을 안다.
그리하여 다시는 밖으로 치달려 찾지 않고 바로 자신의 발밑에서 백 가지를 맞추고 천 가지를 알아차려 완전한 당체를 그대로 이룬다. 나아가 경계에 부딪히고 외연을 만나더라도 모조리 처음부터 끝까지 사무쳐 눌러 앉고 꽉 쥐고 주인이 되어, 끝내 다른 사람의 혀끝에서 나온 주장이나 고금의 가르침, 기연, 경계의 공안을 가지고 철칙으로 삼지 않는다. 그러므로 옛부터 작가 선지식은 오직 이것을 들고서 사람들에게 스스로 알아차려 걸머지도록 하였을 뿐이다. 어찌 다시 단계나 지위 점차 등을 세운 적이 있겠는가.
이런 경우가 닥쳐온다 하더라도 요즈음 형제들이 전적으로 마음을 쓰지 않는다고는 말하지 않겠으나, 요는 힘을 덜지 못했다는 것이다. 큰 근본, 큰 그릇, 큰 기틀, 큰 작용을 갖추어 하나를 들으면 천을 깨쳐서 골수에 사무쳐 통렬하게 깨달아 지녀야 한다. 털끝만큼이라도 한 번 빗나가기만 하면 그대로 알음알이의 길인 언전의식(言詮意識)의 6근, 6진으로 들어간다. 그 때문에 저 방편의 그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끝없이 의심 품는 것을 면치 못한다. 그리하여 5년 10년씩 해온 둔한 공부를 한다 하더라도 끝내 과감하게 결단하지 못한다.
평소에 매양 형제들에게 권하노니, 모름지기 맹렬하게 분심을 내서 이제껏 배워 안 것과 얻고 잃음의 틀을 버려라. 흡사 만길 절벽에서 손을 놓아버리듯 목숨을 놓아버려 그로부터 숨결 하나 없이 아주 죽은 사람처럼 되면 밥숟갈 드는 사이에 다시 깨어나면, 그대를 속이려 해도 되지 않는다. 이처럼 다하고 나서 실제의 경지에 당도하여 밟으면 허공처럼 넓고 태양처럼 밝아서 다시는 조작이 필요치 않다. 일체가 스스로 원만히 이루어져 하루 종일 모든 성인들과 함께하면서 모두가 수승하고 기특하여 씻은 듯이 벗어난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하고 다리 가는 대로 가는데, 다시 무엇을 의심하랴.
왜 듣지도 못하였느냐. 옛날 큰 스님이 사람에게 가르치기를 “도는 깨달음을 말미암고 법은 보고 들음을 떠났다”고 했던 것을 만약 정확하게 깨닫는다면 다시 무슨 부처님의 말할 줄 모를까 근심하랴. 부디 일상생활 속에서 다른 견해를 일으키지 말고 놓아버려 가슴 속을 깨끗하게 비워야 한다. 정신을 차리고 스스로 엿보기를 오래하면 반드시 믿고 들어가는 곳이 있으리라.
만일 한가로움만을 지켜 눈을 지그시 감고 있다면, 요컨대 노주(露柱)와 등롱(燈籠)에게 참문하라. 부처의 종성(種性)이 있는 사람이라면 마침내 죽은 물 속에 처박혀서는 안된다는 것을 모름지기 알아야 한다. 하려는 마음만 있다면 결코 그대를 속이지 못하리라.
보리는 언설을 떠나 있으며 원래부터 체득한 사람이 없다. 마혜수라(摩醯首羅)의 진정한 안목을 갖춘 영리한 납자는 듣자마자 바로 들어 보이고 바로 꿰뚫어 살펴서 한량을 지어 해탈이라는 깊은 구덩이 속에 떨어지는 짓을 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혹 언어적인 주장을 허용하면서 “언설을 떠남이 진실한 언설이며, 얻음이 없는 사람이 실제로 증득한 사람이다”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런 이는 그 자리에서 빗나가 언어문자에 속박되고 전도되어 끝내 위로부터의 일을 밝히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종문에선 그윽히 계합하고 가만히 부촉함을 힘쓰나 이미 모든 부처님의 후예가 되었으니, 모름지기 가풍을 계승하고 정인(正印)의 심오한 방편을 완전히 제창함을 밝히고 생사번뇌의 못된 집착과 속박을 벗어야만 한다. 그래서 영가스님은 “대장부가 지혜의 칼을 잡으니 반야의 칼끝이며 금강의 불꽃이로다”하였다. 어찌 그 사이에 머뭇거림을 용납하겠는가.
생사가 큰일이라고는 하나 진실로 투철히 벗어버리면 크다고 할 것도 없다. 무엇 때문일까.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진실하게 알고 실제로 깨달아 여여(如如)하게 요동하지 않으며 만물이 생성 변화하는 안팎에서 핵심을 살펴 툭 트여 명백하고 처음과 끝이 모두 평등하여 애초에 얻고 잃음이 없다. 그리하여 항상 이 큰 광명을 잡고 두루두루 비추는데, 마치 해와 달이 높이 떠서가듯, 사자왕이 자유롭게 유희하듯 한다. 백천 겁을 줄여 일념을 만들기도 하고 일념을 늘려서 백천 겁을 만들기도 한다. 또한 수미산을 겨자씨 속에 넣기도 하고 대천세계를 시방 밖으로 던지기도 하니, 모두가 일상적인 내 마음의 부분일 따름이다. 그런데 무슨 깨끗함과 더러움, 가는 것과 오는 것 따위에 장애되며, 생사득실에 얽매이랴. 고덕은 말하기를, “태어남은 마치 웃도리를 입는 것과 같고 죽음은 다시 바지를 벗어버리는 것과도 같다”고 하였는데, 그가 생사를 큰 변고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을 알 만하다.
107. 인선인(印禪人)에게 주는 글
참구하는 요점은 자기 자신이 아침저녁을 가리지 말고 일삼아서, 오래도록 언제나 여기에 생각을 두어야 한다. 스스로 살피다 보면 단박에 정식(情識)이 끊어지고 사량 분별이 사라져 하루아침에 통 밑이 빠진 듯하리라. 마음 위에서 다시 마음을 보지 않는데, 부처 위에 어찌 부처 지음을 빌리겠는가. 크게 쉰 경지를 얻어서 텅 비어 한가롭고 고요하며, 모양 없고 함이 없으며 집착 없고 머뭄이 없다.
조사의 말씀은 결코 다른 일을 밝혔던 것이 아니라, 이른바 몸과 마음의 본래 성품이 공(空)인 줄을 알면 이 사람이 부처와 무엇이 다르랴 하는 점이다. 다만 스스로 몸소 참구하여 결국 깨달아 들어갈 곳이 있게 되면 다시 증거를 받아야 한다. 바로 이것이 일을 마친 사람이니, 자세히 살펴보라.
만학하는 초참 납자가 잠시 참구하려 하나 더듬어 들어갈 곳이 업으므로 선덕(先德)이 자비를 베풀어 고인의 공안을 들게 한다. 이는 대개가 법도를 시설하여 미친 듯이 멋대로 헤아리는 그들의 마음을 잡아매어 알음알이를 쉬게 하여 한결같은 경지에 이르게 하려 한 것이다. 단박에 밝히기만 하면 마음은 밖에서 얻는 것이 아니니, 지난날의 공안은 주인을 부르는 초인종에 불과하다.
방거사가 마조대사에게 “만법과 짝하지 않는 이는 어떤 사람입니까”라고 묻자, 마조스님은 “그대가 한 입에 서강의 물을 다 마신다면 말해 주리라”라고 대답했다. 다만 고요 묵묵히 침착하게 살핀 뒤에 들어보라. 오래 하다 보면 꼭 귀결점을 알게 되리라. 만약 말로 설명하고 주해한다면 알음알이만 더할 뿐, 이 법문의 해탈경계로 들어갈 인연이 없게 된다. 진실로 믿고 또 믿어서, 깨달음을 목표로 삼을지언정 더디고 늦는 것을 걱정하지 말라.
병고가 몸에 있으면 마음을 잘 거두고 바깥의 경계에 흔들리지 말아야 된다. 마음속에서도 생각을 일으키지 말고, 생사의 일은 크며 죽음[無常]은 신속하다는 것을 항시 염두에 두어 잠시도 게으름을 피워서는 안된다. 화[嗔心] 한 번 내더라도 3업(三業)에 있어선 큰 허물이 되니 혹시 좋거나 싫음이 있더라도 절대로 마음을 내지 말아야 한다. 항상 자기를 비우고 마음을 바르게 해서 밖에서 와서 부딪히는 것을 마치 빈 배나 뒹구는 기왓장처럼 보면, 외물과 내가 모두 고요하여 마음이 요동하지 않는 경지에 도달하리라. 깊이깊이 생각하라.
108. 묘각대사(妙覺大師)에게 드리는 글
도를 배우려면 우선 스승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미 정수리에 바른 안목을 갖춘 선지식을 만났다면 그에 의지해서 생사를 해결해야 합니다. 반드시 용맹하게 몸과 마음을 놓아버리고 망정을 잊은채 참구해야 합니다. 깨달아 들어감을 바탕으로 하여 본래부터 홀로 벗어나 걸림 없는 본분사를 밝혀내야만 합니다. 매일 덜어내고 나날이 덜어내어 의심 없고 지극히 참되고 완전히 쉬어버린 곳을 밟게 되면 이른바 안목을 갖춘 참학자입니다.
승부가 있고 형식을 간직하면 비록 이왕에 뛰어넘어 수승하다 하더라도 있음[有]도 모르고 마음을 두지 않으며 도를 배우지 않고 벗어나기를 구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그리하여 이 종문에 있어서는 아직 깊이 들어간 게 못됩니다. 이는 오히려 도중에 있는 것이니 역시 가련하다 하겠습니다. 참으로 출가하여 세속을 떠난 자는 요컨대 성인의 도를 널리 펴고 모든 사람을 제도하되 사람을 제도했다느니 도를 얻었다느니 하는 자취가 없어야 비로소 향상인 의 행리처에 초연히 나아갔다 하겠습니다. 향상인이 제 스스로 불법을 알고 묘과(妙果)를 증득하여 불조를 초월했다고 말하겠습니까. 분명히 그럴 리는 없습니다. 그것은 대개가 털끝만큼이라도 주관과 객관을 나누는 알음알이로 깨달아 들어감을 찾는 때문인데, 그러나 마침내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치연하게 견해의 가시를 내는 경우이겠습니까. 그러므로 고덕은 “저 체득한 사람은 무심을 지킬 뿐이다”라고 하였으며, 왕노사[王老師: 南泉]는 다만 바보처럼 가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그가 매양 이렇게 법문[垂示]하는 것을 보지도 못하였습니까. “3세의 모든 부처님은 있다[有]는 걸 모르는데 고양이와 흰 암소가 도리어 있음[有]을 안다”고 설사 완전히 고양이와 흰 암소가 된다하더라도 그 속에 눌러앉아선 안됩니다. 요컨대 이처럼 한다 하여도 저쪽에서 탁 손을 탁 놓아야 할 것입니다.
협산(夾山)스님은 “그대가 푸른 연못을 거울처럼 맑게 한다 하더라도 끝내 밝은 달이 내려오게 하기는 어려우리라”했습니다. 다달아 사무치지 못한다면 이는 모두 그림자와 메아리로서 돌장승의 머리를 방망이로 치는 격입니다. 진지하게 참다운 일을 논하여 구경처를 보아야만 합니다. 옷 입고 밥 먹는 것이 다른 사람이 아니긴 하지만, 그러나 요컨대 땀 냄새 밴 장삼을 벗어버려야 하는데, 거기에 머물러 막혀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미 땀 냄새나는 장삼을 벗었다면 그는 틀림없이 번뇌를 벗어나 해탈을 얻은 무위무사의 큰 도인일 것입니다.
109. 인서기(仁書記)에게 주는 글
설봉스님은 마치 금시조(金翅鳥)가 바다를 가르고 용을 나꿔채듯 학인을 지도했으니, 이런 경우가 어찌 설봉스님뿐이었으랴. 예로부터 크게 도를 갖춘 인재로서 날카로움과 관조를 동시에 지니고, 노련한 작가선지식의 솜씨를 간직한 자라면 모두 이러하였다. 이는 아마도 단도직입하지 못하면 힘을 다하지 않고 은산철벽처럼 초준(?峻)한가 하면, 곧 완둔(頑鈍)한 공부를 지어갔기 때문이리라.
그러므로 임제스님과 덕산스님이 ‘방’과 ‘할’을 행하면서 독한 솜씨를 썼던 것은 바로 큰 마음, 큰 그릇, 큰 근기들이 향상을 알아차리게 하고 그저 눈앞에 보이는 그림자와 입에서 나오는 성색만이 전부라고 인식하지 않게 하려 함이었다. 그 때문에 ‘향상의 한 길은 모든 성인도 전하지 못한다’고 하였던 것이다. 만약 영리한 놈이라면 듣자마자 들어 보이고 바로 투철히 깨달아 결코 남의 격식이나 지키면서 남의 죽은 말을 취하지 않는다, 자, 방, 할을 행했던 귀결점은 어느 곳에 있느냐? 용을 나꿔챈 뜻을 밝히지 못하면 다시 분분해진다. 대장부는 자기의 신령함조차도 소중히 여기지 않는데, 어찌 다른 사람의 주장[露布]을 갖다가 자기 마음으로 삼으랴!
결코 다른 사람에게 속지 말고 헌걸차게 우뚝 서서 이제껏 의지하고 기댔던 것을 끊어, 현묘한 이치와 계략하던 행동을 떨쳐버리고 본분의 일을 체득해야 한다. 이미 체득하여 본분의 자리에 이르고 나면 그저 팔을 베고 누워 있다 해도 완전히 쾌활한 사람이다. 말끔히 다 없어져서 그윽하지 못한다면 아득히 이처럼 가리니, 겨우 머리를 돌려 당처를 보아 붙들었다 하더라도 털끝만큼이라도 의심이 있으면 영영 빗나가 전혀 관계할 바가 없으리라. 듣지도 못하였느냐. “알고 보니 황벽의 불법도 별 것 아니었군”이라고 했던 임제스님의 말씀을. 참구하라!
110. 이연도인(怡然道人)께 드리는 글
지난날 해주신 훌륭한 소참법문을 듣고 이 도를 가슴 깊이 간직하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이근상지(利根上智)인 도인께서는 확연히 스스로 알아차려 지극히 청정한 본원을 가지고 영롱하게 비추신 바입니다. 투철하게 깨달아 문 밖을 나가지 않고서도 벌써 제방을 모두 경험해버렸습니다. 그런데도 천박하고 고루한 저를 인정하여 살피시고 더욱 격려해 주셔서, 이미 같은 가풍으로 그윽히 계합하여 스스로 외롭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일에 있어서 빠짐없이 늘어놓으신 한 구절, 한 마디, 한 기틀, 한 경계가 모두 견줄 수 없는 깊은 이치였습니다. 심성의 현묘함도 아니고 어묵에 빠짐도 아니고 설명이나 주장도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성색을 덮어 누르고 보신, 화신 부처님의 머리를 눌러 앉아 시비득실에 떨어지지 않고, 근원을 꿰뚫은 청정하고 바른 안목이었습니다. 비록 사념이 적멸하긴 하나, 밝은 지혜로 속박을 벗어나 초연히 정수리 위의 하나를 홀로 증득하니, 이 때에 어찌 가는 털끝 만큼의 도리인들 있겠습니까. 공겁(空劫)이전이나 위음왕불 이후도 있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 이르러선 모든 하늘이 꽃을 바칠 길이 없고 외도가 가만히 엿볼 수가 없습니다. 씻은 듯이 말숙히 깨끗하니 이것이 바로 본지풍광이며 본래면목입니다. 그야말로 부처님도 볼 수 없어서 이른바 향상의 한 길은 모든 성인도 전하지 못한다 하는 것입니다.
오로지 이 가운데의 사람이어야 한 번 들어보여도 단박에 낙처를 아는 것입니다.
111. 황통판(黃通判)에게 드리는 글
별지(別紙)의 실천담(實踐談)을 받아보니 진실로 진리에 뜻을 둔 사람이지, 부질없이 얘기 밑천이나 삼는 들뜬 근기나 그저 말만 숭상하는 천박한 학자가 아니십니다. 더구나 하나의 큰 인연은 사람마다의 근본이지 않습니까. 그것은 훤칠하게 융통하여 뭇 현상을 포괄하고 멸하지도 나지도 않으면서, 고금에 뻗쳐 항상 일을 하는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시작 없는 망상과 습기에 가리워 억지로 알음알이를 짓기 때문에 오롯이 벗어나지 못할 뿐입니다.
총명하신 공께서는 지금 이미 마음을 쉬고 힘을 다해 참구하여, 모든 허망한 인연을 떠나 여여한 성품을 아셨으며, ‘모든 모습이 모습 아님’을 보려 하십니다. 만약 확연하게 한결같이 오래도록 공부를 하시면 결정코 깨닫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마치 저 부처님이 “모든 모습이 아님을 본다면 바로 여래를 보리라”한 말씀대로 모든 모습의 당체는 끝내 얻을 수가 없습니다. 전적으로 자기의 마음으로서 ‘모습 아님’이 됩니다.
즉 여여 하게 왔다가 여여 하게 가면서 둘도 없고 다름도 없습니다. 온 전체가 그대로 참이라 본래 청정한 묘명진심에 계합하나 다만 자기의 본래면목일 뿐입니다. 굳이 사람들에게 모든 모습을 버리고 ‘모습 아님’을 위하여 밖에서 이러 저리 찾게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마음은 본래 맑고 고요하여 사물과 내가 한결같고 여여하며 경계와 마음은 애초에 두 종류가 없습니다.
요컨대 마음이 그윽하고 경계가 고요해야 그런 뒤에 깨달아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깨달아 들어가고 나서는 깨달음도 깨달음이 아니며 들어감도 들어감이 아니어서, 마치 통 밑이 빠지듯 단박에 꿰뚫어야 비로소 남이 없고 함이 없으며 몹시 한가로워 현묘한 도의 바른 당체에 계합하게 됩니다.
지금 하시는, 마음을 쉬고 사려를 맑히는 공부는 도에 들어가는 문호의 첩경입니다. 다만 이 마음만 갖춘다면 깊은 깨달음이 있을 것입니다. 옛분이 말하기를, “선정(禪定)에 편안히 쉬지 않는다면 여기에 이르러 온통 아득하리라”하였습니다. 이를 꿰뚫어 철두철미한 곳에 도달하면 현묘랄 것도 없어서, 불조라고 할 것도 없는 그야말로 향상의 대기대용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의 행리처라도 다시 있음[有]을 알아야 비로소 됩니다.
이 일은 말 속에 있지 않습니다. 운문(雲門)스님은 “가령 말속에 있다면 일대장교가 어찌 말 없음이겠으며, 어찌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도리를 빌리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조사가 오셔서 오직 ‘직지인심 불립문자 어구’만을 논했던 것은 알음알이를 잊고 참구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음을 알겠습니다. 맑고 면밀하게 해서 한 생각도 나지 않게 되면 지난날의 지해, 책략, 기틀, 경계로 헤아린 도리를 벗어버리고 마음을 잊고 곧장 증득하게 됩니다. 그런 뒤에 일상 생활하는 가운데서 이 정인(正印)으로 일체의 모든 모습에 도장을 찍으면 다른 모습이 아니어서, 척척 들어맞아 모두가 진정 명묘한 큰 해탈의 경계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깨달은 뒤에 다시 일상생활 속에서 모든 불조가 보여주신 정인정과(正因正果)를 의지하여, 세간에 잡되게 물들어 도를 해치는 모든 좋지 못한 업을 싹 물리치고 안온한 경지에서 수행해야 합니다. 이삼십년을 이것만을 생각하여 이 마음을 고목처럼 담박하게 하면 이 몸 그대로 견고한 법신을 성취합니다. 인과를 무시하여 그저 텅 빈 공(空)이라거나 걸림 없다는 견해를 지을까 정말 걱정입니다. 이는 독 있는 가시이니, 부디 참구하여 깊은 깨침 도모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112. 선인(禪人)에게 주는 글
일반적으로 생사의 흐름을 끊고 무위의 언덕을 건너는 데에는 다른 특별한 것이 없다. 그저 당사자가 맹렬한 근기로써 자기의 흉금을 내걸고 일체의 유위(有爲)?유루(有漏)는 헛꽃과 같아 원래 참다운 성품이 없는 줄 확실히 아는 것만을 귀하게 여길 뿐이다. 확실하게 비춰보는 마음으로 스스로 돌이켜 관찰하고 확 뒤집어보아서 붙잡고 자세히 살펴서 오래하다 보면, 분명히 깨달아 들어갈 곳이 있으리라.
이것은 결코 다른 물건이 아니며, 다른 사람이 힘을 들여 나를 깨닫게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는 마치 천 근의 짐을 걸머지는 사람에게는 그만한 역량이 있어야만 감당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만약 기력이 약하면 그 짐에 깔려버린다. 그 때문에 큰 사람이 큰 견해를 갖추고 큰 지혜를 가진 자가 큰 작용을 얻는다고 하였던 것이다.
대장부라면 정신을 차려야지 어찌 산(山) 귀신의 굴 속에서 살 궁리를 하겠는가. 언제 나와서 깨달을 기약이 있으랴. 헤아릴 수도 없는 큰 일을 걸머지고 망정과 견해를 초월하여 높고 뛰어난 뜻을 발현해야 한다면, 단박에 투철히 벗어나 시작없는 옛날부터 내려오는 망상, 윤회, 피아, 득실, 시비, 영욕, 더럽고 탁함 등등의 마음을 떨쳐버려야 한다. 그리하여 더럽고 깨끗한 두 쪽을 모두 의지하지 말게 해야 한다. 단박에 오롯이 벗어나면 한 물건에도 의지하지 않으니, 모든 성인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때, 중생과 부처 또는 세간과 출세간이 드러난 적이 없는 곳에서 한 생각도 나지 않고 앞뒤가 끊기게 된다.
본지풍광을 밟고 본래면목을 분명하게 보아 깨치니, 단박에 견고해져서 털끝만큼도 견해의 가시가 없고 안팎이 융통하여 호호탕탕하게 큰 편안함을 얻는다. 여기에서 몸을 돌려 숨을 토하고 이쪽 편으로 오면, 자연히 일상생활 속에서 모든 행위를 할 때 낱낱이 근본으로 돌아가니, 어찌 이것이 분수 밖의 일이겠느냐.
밥 먹고 옷 입으면서 세간법을 닦는다 해도 여여 하지 않음이 없고, 확연하게 꿰뚫지 못함이 없으며 깨달은 그 당체와 상응하지 않음이 없다. 그런데 다시 무슨 고저와 향배를 따지겠느냐. 잠깐이라도 견해의 가시가 생기면 바로 목숨[命根]을 찔린다.
조사와 옛날 큰 스님들이 방, 할을 행하는 등 백 천억 가지 작용이 딴 뜻에서가 아니었다. 다만 사람들에게 완전히 죽은 사람처럼 스스로 투철히 벗어나 스스로 쉬게 하고자 하였을 뿐이다. 어찌 자기만 깨닫고 세상을 제도하는 것은 전혀 쉬어버렸는가. 애쓰는 가운데 여가가 있으면 비원(悲願)을 잊지 말 것이니, 이것을 밀어서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을 일깨워주고, 인간 세상에 살되 매이지 않은 배처럼 떠다니면 무심한 도인이라 부른다.
지금 아직 단박에 깨닫고 단박에 밝히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우선 몸과 마음을 놓아버려 텅 비게 해야 한다. 오래도록 텅 비어 고요하다 보면 갑자기 칠통을 타파하고 통 밑이 빠진 듯한 곳에 이르는 것도 어려울 것 없다. 그러니 더구나 스스로 몹시 영리한 근성을 갖추고 불사(佛事)를 걸머져 수승하고 기특한 인연을 짓는 일임에랴. 이것이 어찌 다른 사람의 힘을 빌려서 되는 것이겠느냐.
그러므로 옛분이 말하기를 “도를 배우려면 반드시 무쇠로 된 높이어야 하니, 착수하는 마음에서 결판내라”고 하였던 것이다.
113. 조부사(詔副寺)에게 드리는 글
옛날 설산(雪山)동자는 게송 반 구절을 들으려고 온몸을 버렸고, 혜가조사는 팔을 끊고 무릎이 눈에 빠지도록 서서 한 마디를 구하였고, 노행자(盧行者 : 6조)는 8개월 동안 방아를 찧었습니다. 상골(象骨 : 설봉스님)은 밥을 짓고 물통을 져 나르며, 원두(園頭)를 본 암두스님과 바느질을 한 흠산스님과 함께 공부하면서, 동산(同山)에 아홉 번 오르고 투자(投子)스님에게 세 번이나 갔었습니다. 이는 오직 이 일을 참구하려고 한 것이었으며, 그 밖에 힘을 다해 애쓰고 눈과 서리 위에서 잠을 자며 괴롭게 공부하면서 담박한 음식을 먹었던 일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들의 행적을 살펴보면 애초에 명예와 이익에 매였던 것이 아니고 모두가 생사대사를 가슴 깊이 품고 불조의 씨앗[種草]을 계승하고 융성시키려고 애를 썼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 쌓인 숲이 광채를 묻고서 소리와 자취가 인간에 이르지 않았으니, 많은 분들이 늙어 죽을 무렵까지 이르러서, 마치 새가 새장을 벗어나듯이 탈쇄(脫灑)하게 홀로 체득하였습니다. 분명하게 깨달아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변함이 없었습니다. 전기(傳記)에 실린 경우는 태산에서 한 털 끝이나, 백천만 가운데서 불과 얼마 안되는 작은 경우일 뿐입니다. 고상하고 깊숙하게 은둔하여 강과 골짜기에 유전하면서 영원히 떠나 되돌아보지 않았으니, 어찌 다 헤아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시고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큰 뜻과 온전한 기틀은 알음알이나 설명을 초월했고 그림자나 자취를 넘어서 성량(聖量)마저도 벗어났으니, 그러니 어찌 자잘한 일이라 하겠습니까. 분명히 지향하는 목적이 있는 사람으로서 숙세에 익혀온 종자가 수승하여 근기와 역량이 보통 사람들과 같지 않아야만 그런 뒤에 이 임무를 감당할 수 있습니다. 비록 머리, 눈, 골수, 뇌라 할지라도 스스로 아끼질 않는데, 더구나 소소한 어려움과 수고로움이겠습니까. 지난날 크게 통달한 사람들은 종지를 체득한 뒤에 깊숙이 문을 잠그고 견고하게 숨었습니다. 그리고는 맞고 거슬리는 방편을 사용하여 고의로 해를 끼치기도 하고 노여움을 나타내 옥하고 매질하고 꾸짖기도 하는 등의 백천 가지 수단으로 학인을 시험코저 하였습니다.
그런 고초를 거치면서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기를 기다렸다가 한 번 살짝 밀쳐주고 한 조각 말과 조그마한 방편을 베풀었습니다. 이는 마치 매우 배고프고 피곤했던 사람이 음식을 얻은 듯, 제호(醍?)와 감로수를 부어주듯 했습니다. 소중하고도 기쁘게 부지런히 하여 잃지 않고 큰 법기를 성취하여 향상인의 지름길을 밟았습니다. 오히려 너절한 경지에서 푹 썩혀 익어야 비로소 부촉했던 것입니다.
예컨대 회양(懷讓)스님은 조계스님에게 있은 지 8년만에야 비로소 “설사 한 물건이라 해도 옳지 않습니다”하였으며, 능(慧稜)스님은 설봉스님에게 가서 15년 동안 좌복을 일곱 개나 떨어뜨렸습니다. 영운(嶺雲)스님은 30년을, 용천(涌泉)스님은 40년을 있었으며, 덕산스님과 임제스님도 모두가 오랜 세월을 스승의 문하에 의지해 있었습니다.
이 도는 모든 성인도 전하지 못하는 오묘한 것인데, 어찌 경솔하고 태만한 마음으로 들어가겠습니까. 영가스님은 말하기를 “분골쇄신해도 은혜를 갚기에는 부족하니, 한 구절에 요연히 백억 구절을 뛰어 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상화(霜華)라는 수행인이 대위산에 있으면서 소임을 볼 때였습니다. 하루는 창고 앞에서 키질을 하는데 대원(大圓)스님이 떨어뜨린 쌀을 한 톨 줍더니 그에게 말하였습니다.
“수행인이여, 이 한 톨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백천 톨이 한 톨에서 나온다.”
그러자 상화가 따져 물었습니다.
“백천 톨이 이 한 톨에서 나온다면 화상께서는 말씀해 보십시오. 이 한 톨은 어디서 나왔는지를.”
대원스님은 소매를 떨치고 가버렸는데 저녁 소참(小參)에서 대중들에게 말하였습니다. “대중들아, 쌀 속에 벌레가 있구나”라고.
조주스님이 동성(桐城) 땅에 갔을 때 길에서 투자스님을 만났는데 투자스님은 인절미떡 하나를 주었습니다. 그러자 조주스님이 말하였습니다.
“오랫동안 투자스님의 소문을 들어왔는데, 그저 인절미 파는 늙은이일 뿐이네.”
“그대는 아직 투자를 알지 못했네.”
“어떤 것이 투자인가?”
투자스님이 인절미를 집어 들더니 말하였습니다.
“인절미, 인절미지.”
쌀 속의 벌레가 어찌 인절미 속의 벌레만이야 하겠습니까. 만약 투자를 참구할 수 있다면 석상(石霜)을 보게 될 것입니다.“ 듣지도 못하였습니까? ”대중 속에 있는 사람아, 납승이라면 첫 번째 금강의 안목을 얻어야 하며, 두 번째는 금강의 보검을 얻어야 하며, 세 번째는 주장자를 얻어야 하며, 네 번째는 납승의 본분소식을 얻어야만 한다“고 했던 말을. 설사 낱낱이 꿰뚫었다 해도 거기에 다시 마지막 한 구절[末後句]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114. 등상인(燈上人)에게 주는 글
당장에 투철히 깨달으려 한다면 반드시 우선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 이 하나가 있음을 깊이 믿어야 한다. 이는 고금에 빛을 드날리며 지견이 아득히 끊어져 씻은 듯 깨끗하여 아무것도 기댈 것 없이 없는 것이다. 항상 목적에 있으면서 털끝만큼도 모습이 없으며, 허공같이 넓고 태양보다 밝다. 천지만물은 비록 이루어지고 파괴됨이 있으나, 이것은 변함이 없으니 옛사람은 이를 “만법과 짝하지 않는 사람”또는 “여래의 정변지각[如來正?知覺]”이라고 불렀다. 다만 진실하게 알아차려 한 생각도 나지 않게 하면 본래를 철저히 깨닫는데, 원래 움직인 적도 없고 영원히 끊어짐이 없다. 가고 머무는 모든 작위가 애초부터 방해롭고 막히지 않아 역력고명하다. 한 기틀, 한 경계와 한 구절, 한 마디가 모두 법계를 머금어서 근본의 진여(眞如)와 들어맞으며 망정의 알음알이가 일었다가 꺼질 자리가 없는 곳이다.
이 정인(正印)으로 한 번 도장 찍으면, 자연히 네모난 건 네모난 대로 둥근 건 둥근 대로 둘이 아니게 되리라. 저 예로부터 불성을 분명하게 보고 도를 체득한 사람은 운용하고 작위 함에 있어서 티끌 인연의 경계를 관찰하되 가히 티끌 인연이라 할 것이 없어서 그것들을 움켜쥐어 하나의 참된 실제로 귀결시켰던 것이다. 이처럼 한 걸음 물러나면 하루 공부가 바로 일 겁(一劫)에 이른다.
그러므로 남천(南泉)스님은 말하기를 “내[王老師]가 열여덟 차례 만에 문득 살 궁리를 할 줄 알았다”라고 했다. 이는 잡아당겨 억지로 한 것이 아니라, 마음대로 나는 듯이 두루 통하고 자재하여 하늘과 용과 귀신도 그의 마음 일으킨 곳을 찾지 못한 것이다. 이 무심한 사람의 행리는 간결하나 깊숙하고 엄하다. 만일 지견과 알음알이를 쉬면 장래에 철저하게 깨달을 분수가 있으며 살 궁리를 할 줄 알게 되리라. 요컨대 목적을 두고 힘써 노력한 뒤에 무엇을 하든지 원만해지면, 조계의 길 위에서 간단없는 힘과 활용을 얻으리라.
115. 선인(禪人)에게 주는 글
이근종지(利根種知)는 듣자마자 들어 보이고 당장에 철두철미하게 알아차려 전혀 다른 법이 없다. 손을 놓아버리고 바로 가버리는데, 어찌 다시 머뭇거림이 있겠는가. 이는 마치 날카로운 칼을 들고 문전을 막아서는 것과 같으니 감히 뉘라서 접근하랴. 이쯤 되면 그 늠름하고 신령한 위엄에 불조도 가까이 할 수 없다. 뭇 생명을 삼켜서 녹여버리는데 어찌 큰 해탈을 얻음이 아니겠느냐. 다시는 향상이니 향하이니를 세우지 않고 초연하게 호젓이 깨닫는다.
그러므로 위로부터 옛분들이 세운 방편 하나, 드리운 말 한 마디를 두고 “낚시를 사해에 드리움은 사나운 용을 낚으려 함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선 이러쿵저러쿵 따질 것 없이 화살과 칼끝이 튕기듯 일격에 뚫을 것을 요한다. 조금이나마 머뭇거렸다간 천 리 만 리 로 멀어진다. 예컨대 달마스님이 소림에서 9년을 면벽하자 혜가 조사만이 묵묵히 계합했던 것이니, 요즈음도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밝히는 것이 어렵지 않다. 다만 이제껏 지어왔던 갖가지 지해나 방편을 완전히 없애 털끝만큼도 세우지 않고, 마음을 깨끗이 비우면 된다. 성인이니 범부니 하는 생각도 간직하지 않고 나와 남에 매이지 않으며 한 생각도 내지 않고 단도직입하는데, 다시 무슨 부처를 찾으랴.
비로자나 부처의 정수리를 높이 밟으며 석가모니 부처에게도 받을 것이 없다. 표적을 부수고 방편을 타파하여, 종지와 격식을 초월하며 머리를 방외(方外)로 내밀어 도대체 내가 누구인가를 살펴야만 비로소 씨앗이 될 만하다. 그런 뒤에 천 사람, 만 사람도 가둘 수 없는 곳에서 종문의 한 가닥 길을 욕되게 하지 않는다. 빳빳이 굳건하게 천 길 절벽처럼 우뚝하여, 무심코 한 털 끝만 집어 들어도 단박에 시방허공이 꽉 차는 것을 보게 되고, 같은 가풍 같은 덕을 들어 보이면 바라지 않아도 저절로 깨닫고, 말하지 않아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서로가 주인과 손님이 되어 종지를 건립하는데, 서로가 강이나 사막에 막혀 멀리 있다 해도 영원토록 눈앞에 보는 것 같아서 향상의 기틀을 꿰뚫고 생사의 일을 마쳐 은혜에 보답하고 법을 세울 수 있게 된다. 뭇 생령들도 낱낱이 이렇게 만들어야 대장부라 할 수 있으며, 기특한 인연을 짓고 수승한 일을 마쳤다 하리라. 옛날 배상국과 황벽스님, 이습지(李習之)와 약산(藥山)스님, 양대년(楊大年)과 광혜(廣慧)스님, 이도위(李都尉)와 자조(慈照)스님 등이 모두 위와 같이 기연에 투합한 분들이었다.
이미 기연이 투합하고 나면 다시 이를 바탕으로 실천하면서 밖으로는 모든 견해를 비우고 안으로는 마음의 지혜를 끊었다. 철저하게 평상심을 간직하여 날듯이 자유자재하여 안팎으로 보호한 사람이 되어 큰 법을 펼쳤던 것이다. 이는 이른바 “이러한 일을 알려거든 반드시 이러한 사람이라야만 하고, 이러한 사람이라야 비로소 이러한 일을 이해한다”고 했던 것이다.
116. 노수(魯?)에게 드리는 글
불법은 큰 바다와 같아 모든 것을 포함하여 모양이나 수량(數量)으로 헤아릴 바가 아니며, 낱낱이 무한함을 갖추었습니다. 만일 깨달아 들어가려면 반드시 헤아릴 수 없는 큰 지견(智見)을 갖추어서 법계를 다하고 허공과 같아져 미래가 다하도록 물러나지 않아야 합니다. 걸음걸이마다 뛰어 넘어 철석같이 견고해진 뒤에 정문정안(頂門正眼)을 확연히 하고, 진실로 본분작가의 솜씨를 갖춘 대종사를 신중히 선택해서 마음을 쉬고 그에게 의지해야 합니다.
생사의 큰일을 그에게 맡기고 투철히 깨치지 않고서는 그만두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형식에 떨어지지 말고 단박에 본래 면목을 분명히 보고 본지풍광을 밟아야 합니다. 뿌리를 깊숙이 박고 줄기를 견고하게 하여 확실히 믿고 확실히 깨쳐서 텅 비고 신령히 밝아 요동하거나 변화하지 않는 것으로써 기반을 삼아야 합니다. 정념도 계교도 전혀 나지 않고 당장에 텅 비어 앞뒤가 끊기면, 모든 성인과 실낱만큼도 다르지 않다 하겠습니다.
이렇게 자기를 살핀 다음에는 뒤로 물러나 아무것도 남겨 두지 않되 털끝에서 찰해(刹海)를 나타내고 겨자씨 속에 수미산을 받아들여, 향상의 기틀을 일으키고 불조의 법령을 드날립니다. 여기에 와서야말로 참으로 힘을 들일 곳이니, 과거와 지금의 현묘한 이성과 기묘한 언구, 하늘을 찌르는 책략에 이르기까지 모두 떨어버려야만 비로소 저쪽의 뜻을 체득합니다.
그렇게 되면 어느 시절에 다시 나는 불법을 알았다느니, 활발하게 대기대용을 드날릴 수 있느니 하겠습니까. 만약 오랫동안 하다 보면 분명 하릴없는 안락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성현이 출현하여 이를 위할 때, 일에 임해서 공이나 능력을 세우지 않고 아견을 드러내지 않았던 의도가 사람들을 의심 없고 함이 없고 하릴없는 데 있도록 하였음을 알겠습니다.
지금 한창 나이에 부귀를 누리시나 숙세의 원력으로서 높고 원대한 식견이 있으니, 이 도를 배우려면 몸과 마음을 청결히 하고 세간의 인연을 버리지 않은 채 청정한 수행을 해야 합니다. 처음 단계가 벌써 바로 되었으니 요컨대 영원히 물러나지 않겠다는 마음을 갖추어, 비록 마음에 맞지 않는 외연을 만난다 해도 엿이나 꿀을 먹듯 해야 합니다. 이렇게 길러서 푹 익히면 크게 해탈한 사람이니 불법과 세간법이 어찌 다르겠습니까. 이를 미루어 곧장 앞으로 전진 한다면 어디를 간들 이롭지 않겠습니까.
옛사람이 말하기를 “천리가 같은 바람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말하지 않고도 알고 대면하지 않고도 알기 때문인데, 어찌 번거로운 말을 빌리겠습니까. 그러므로 비야대사(毗耶大士 : 유마)가 한 번 묵연 하자 문수는 “훌륭하십니다”라고 찬탄하였던 것입니다. 병을 치료하는 데에는 많은 약이 필요치 않습니다. 의도는 낚시 끝에 있으니 모름지기 알아차려야만 합니다.
홀로 가고 홀로 걷는 곳에서 실제를 의지하여 참구하되, 어디로부터 일어나고 어디에서 오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속박을 풀어줄려면 진실하지 않고서는 어찌 기대하겠습니까. 무업(無業)스님은 “망상 피우지 말라”라고 하였을 뿐이며, 구지(俱脂)스님은 한 손가락을 세웠을 뿐입니다. 또 천황(天皇)스님의 “호떡”과 조주스님의 “차 마시게”와 설봉스님의 “공을 굴렸던 것”과 화산(禾山)스님의 “북 칠 줄 아는군”이라 했던 것이, 결코 다른 일이 아닙니다. 참구하십시오.
117. 선자(禪者)에게 주는 글
달마조사는 이 땅에 대승의 근기가 있음을 보셨기 때문에 천축으로부터 오시어 교(敎) 밖의 종지를 전하였다. 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켜 말이나 문자를 세우지 않았으니 아마도 말이나 문자는 지말적인 일로서 여기에 집착해버리면 확연하게 깨닫지 못할까 염려스러웠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집착도 타개하고 현묘함마저도 버렸으며, 전광석화와 같이 견문을 떠나고 생각의 밖으로 벗어났다. 한 생각도 내지 않고 곧바로 6근, 6진을 꿰뚫어 각자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이 하나의 큰 인연을 알아차려 분명히 깨닫도록 하였다.
문득 홀로 벗어나 한 물건에도 의지하지 않고 시방허공을 들이마시기도 하고 토해내기도 하면서 고요하고 잠잠하여 본래의 오묘한 마음을 깨닫게 하였다. 이 마음은 일체의 세간과 출세간법을 낼 수 있으니, 오직 오랜 세월 이전부터 익혀온 사람은 들먹여 주기만 해도 대뜸 그 귀결점이 다시 딴곳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전체 마음이 바로 부처이고 전체 부처가 바로 중생이며, 중생과 부처가 둘이 없이 한결같이 청정하고 텅 빈 것임을 알게 된다.
그러니 어찌 이익과 손해, 잘잘못, 마음에 들고 안듬, 좋고 싫음, 길고 짧음이 있으랴. 유위(有爲)와 유루(有漏)는 허깨비 같고 꿈과 같아 끝내 한 티끌 만큼도 오래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재지(才智)를 갖춘 역량이 있는 사람은 단박에 일념의 진정한 보리심을 발현하여, 여러 인연에 끄달리거나 부귀영화에 얽매지 않아서 움쩍했다 하면 오랜 세월토록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 머리를 묻고 앞으로 전진하면서 이것만을 생각하고 회광반조하여 옛날 위음왕불 저쪽, 모든 인연의 근본을 분명히 살핀다. 꿰뚫어 보기만 하면 몸과 마음이 태연하여 하루내내 다시는 놓아버리지 않고 단박에 철저히 깨치니, 이로써 할 일을 다 마친 것이다. 그런데 그대는 성품이 원래 고요하고 순일하며 자비롭고 선하여 이런저런 잘못된 지견이나 깨달음이 없으며, 게다가 계속 면면히 참구하니 어찌 훌륭하지 않으랴.
옛사람은 모든 사물에서 알아차려야 한다고 하였다. 그저 아침으로부터 저녁까지 “이것이 무엇일까” 하면서, 생각 생각에 잘 살펴서 마음 마음에 머무름이 없어야 한다. 오래도록 푹 익어지면 빛을 보매, 일체법은 공(空)해서 실체가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 이 한 마음만이 고금에 뻗쳐 생사를 투철하게 벗어나게 된다. 이 도를 배우는 사람이 그 관문을 뚫지 못하면 망정과 알음알이 속에 있으면서 부딪히는 것마다 막히게 된다.
그러나 만일 모든 망정을 부숴 없애 가슴 속에 티끌만한 그 무엇도 간직하지 않으면 자연히 칠통팔달하게 도리라. 다만 긴시간 끊임없이 모두 없애버리면 청정하다는 생각과 성스럽다는 생각도 오히려 있을 수가 없는데, 어찌 하물며 망정에 끄달려서 착하지 못한 일들을 할 수가 있으랴!
선지식을 가까이 하는 까닭은 무엇보다도 자신을 이끌어 주어서 더욱 향상할 수 있는 인연을 만들어 줌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세존께서는 미래에 한 마리의 소가 포효하는 땅에 선지식이 있어, 서로서로 격려하고 함께 수행하면서 이 오묘한 도를 체득하리라고 수기(授記)하셨다. 경청(鏡淸)스님은 “너희들은 모름지기 하루 종일 모든 시간을 부린다” 하였으며,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사물을 굴릴 수 있다면 바로 여래와 같으리라” 하셨다.
이미 오랫동안 결심을 간직하였다면 힘써 전진하면서 물러나지 않아야 한다. 그저 한가히 마음속에 한 물건도 남기지 말고 곧장 무심한 사람이 되어, 마치 어리석은 사람처럼 해서 훌륭하다는 생각조차 내지 말아야 한다. 항상 잘 기르고 길러서 생사란 몹시 한가롭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면 조주, 남전, 덕산, 임제 등의 스님들과 동등한 견해를 갖추게 되리라. 간절히 바라노니 스스로 보임(保任)하여, 이 남이 없고 함이 없는 큰 안락한 곳에 단정히 거처해야만 하니, 이래야만 매우 훌륭하다 하리라.
118. 선인(禪人)에게 주는 글
서방의 대성인이 카필라 성에서 나와 한량없는 오묘한 작용을 지으셨고, 티끌 같은 세계에 셀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훌륭한 정인(正因)을 드러내 여러 중생들을 인도하셨다. 그 맞고 거슬리고 열고 닫고 하는 방편과 나머지 말씀은 경전에 남겼고 보장(寶藏)에 가득 차서 넘친다. 그러나 끝에 가서야 한 소식을 드러내셨으니, 이를 “교 밖에서 따로 행하며 심인(心印)만을 외길로 전함”이라 한다. 금색(金色)의 늙은이(가섭) 이래로 분명하고도 끊임없이 다만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켜 성품을 보아 부처가 되는 것”만을 말했을 뿐, 단계를 세우거나 알음알이를 내지 않았다.
지혜로운 상근기들은 무명(無明)의 소굴 속에서 단박에 번뇌의 뿌리와 기둥을 부수는 가운데 활발하게 벗어나 시절인연에 응하여 초월 증득하여 완전한 해탈을 얻는다. 그러므로 인도 땅의 28대 조사와 중국 땅의 6대 조사가 모두 용과 코끼리가 차고 밟듯, 스승은 훌륭하고 제자는 강력하였다. 기연과 경계 및 언어문구와 어묵동정에 최상승 근기는 격식 밖에서 알아차려 그 자리에서 업장(業障)이 얼음 녹듯 하였다. 곧장 알아차리고 걸머져 그런 뒤로는 스스로 감당하고 몸에 지녀 한 덩어리를 이루었다.
세상을 제도하고 번뇌의 흐름을 끊어 단박에 부처님의 경지에 계합하나 거기서 썩은 물 속에 잠기려 하지 않는다. 도리어 현묘함을 꿰뚫고 불조를 초월하여 기연을 제거하고 언어적인 설명(露布)을 끊을 것을 제창하였다. 마치 태아(太阿)의 보검을 어루만지는 것처럼 신령한 위엄이 늠름하였으니 뉘라서 감히 접근하랴. 작가선지식이라면 확실하게 헤아릴 줄 알아서 향상향하나 묘한 이치, 작용이 털끝만큼이라도 있으면 즉시 옛부터 내려오는 씨앗이 아니라고 꾸짖는다. 단박에 충분히 단련하여 푹 익혀서 착실히 실천하여야만 비로소 약간 놓아줄 만하다고 하리라.
비록 그렇다고 해도 행여나 어느 때 자비를 베푼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누를 끼쳐서 정법의 눈을 멀게 할까 염려스럽다. 아! 눈먼 여우같은 어떤 족속들을 보니 꿈에서도 조사를 보지 못하고, 달마스님은 태식법(胎息法)을 사람들에게 전했다고 하면서 이를 두고 ‘법을 전하여 미혹한 중생들을 구제했다’고들 한다. 그런가 하면 옛날부터 가장 오래 살았던 종사인 안국사(安國師)와 조주스님 같은 분들까지 끌어다가 모두 이 기(氣)룰 닦았다고 한다. 나아가 초조 달마스님이 총령에서 한 쪽 신을 끌고 갔던 것과 보화(普化)스님이 죽은 뒤 관이 텅 비었던 것까지를 과장하면서 이 모두가 태식법의 영험이었다고 말한다. 마침내는 온몸 전체가 빠져나간 것을 두고 육체와 정신이 모두 오묘해진 것이라고들 말한다. 사람들 중에 이 방법을 매우 좋아하는 이들은 죽는 날의 공포를 두려워하여 “진(眞)으로 돌아가는 법”이라고 다투듯이 전한다.
죽는 날 그림자를 바라보며 주인공(主人公)이라 부르면서, 이로써 세월을 점치기도 하고 누각의 북소리를 듣고 입속 침을 증험하고 안광(眼光)을 보기도 하면서, 이것이 생사를 벗어나는 법이라 여긴다. 이는 참으로 성한 사람을 속이고 거짓과 소굴을 날조하여 고상한 사람의 비웃음을 사는 일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무리들은 초조의 태식법과 조주스님의 ‘십이시별가(十二時別歌)’와 방거사의 ‘전하거송(轉河車頌)’을 끌어다가 서로서로 가리켜 전수하고 비밀스레 전하여 가짐으로써 오래 살고 또 온몸이 벗어나기를 도모하기도 하며, 혹 3백년이고 5백년이고 살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들은 참으로 망상의 애견(愛見)임을 전혀 몰랐다 하리라. 본래는 선인(善因)이었으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거친 풀숲에 떨어진 것이다. 호걸이나 걸출난 사람 중에 높은 언변으로 조사를 무시하는 자가 이를 더러 믿는다. 이들이 어찌 원래의 걸음걸이를 잃었는 줄을 알랴. 호랑이를 그린다는 것이 이리를 그린 격이다.
언젠가 확실히 통달한 식견있는 이를 만나 밝은 눈에 간과 당할 날이 있으리라. 그들은 평소에 대중 가운데 거처하면서 묵관(?觀)만을 하는 가엾은 이들이니, 어찌 석가모니와 역대 조사들의 체제가 이러한 데에 그쳤으랴. 한번도 스스로 처음과 끝을 회광반조하지 않았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온 세상에는 이를 배우는 자들이 벼, 삼, 대나무, 갈대만큼이나 많다. 고상하고 원대한 식견을 갖춘 이는 주춤거리지 않겠지만, 지금 막 뜻을 낸 사람은 깊은 데까지 들어가지 못할까 걱정이다. 아무리 목적을 높이 세우고 실천이 원대하다 해도 증상만(增上慢)을 만나거나 이 사견(邪見)의 숲 속에 빠져들 것이다.
처음 한 번 어긋나면 영원히 윤회에 빠지고 그 흐름이 차츰차츰 넓어지면 막을 수가 없다. 그래서 이 말을 해주는 것이니, 대해탈과 대총지(大總持)에 원을 세운다면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무생(無生)의 큰 살바야해(薩婆若海)에 함께 들어가서 작은 배를 띄워 여러 중생을 제도하며, 바르고 오묘한 도가 영원토록 퍼지게 한다면 어찌 통쾌하지 않으랴.
119. 원유봉의(遠猷奉議)에게 드리는 글
옛부터 단박에 깨쳐 들어가는 외길과 대뜸 초월해 오르는 데에는 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켜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루는 것 말고 다른 길이 없습니다. 이 마음은 그저 고요하고 깊어 성인이니 범부니 하는 계급을 벗어났습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지혜로운 상근기가 갖가지로 얽힌 무명의 굴에서 털끝만큼도 움직이지 않고 단박에 계합함을 귀하게 여길 뿐입니다.
확연히 사무치고 영명(靈名)하여, 유정(有情)이나 무정(無情)이나 유성(有性)이거나 무성(無性)이거나에 상관없이 한 몸이어서 큰 법과 서로 호응하여 작용을 일으킵니다. 고금을 꿰뚫고 초월하며 소리를 누르고 물색을 덮어, 텅 비었으면서도 신령하고 고요하면서도 환하게 비춥니다. 한량없고 장애 없는 불가사의한 큰 해탈이 낱낱이 종횡으로 뚫려 서로 전혀 관계할 바 없이 곧바로 귀결점을 압니다. 그 때문에 옛 불조께서 이를 외길로 전하고 가만히 분부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마치 도장을 허공에 찍는 듯도 하고 도장을 진흙에 찍는 듯도 하고 도장을 물에 찍는 듯도 합니다. 모든 덕이 환하여 시방을 눌러 앉아 홀로 초연히 깨치니 애초부터 아무것에도 의지함이 없습니다. 가령 견해를 일으켜 형상을 짓는다면 벌써 빗나가 어찌해 볼 도리가 없어집니다.
요즈음 시대에도 크게 종성(種性)을 갖춘 사람이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허깨비 같은 인연과 경계를 타파하고 용맹하게 분발하여 이쪽으로 옵니다. 그런가 하면 오랫동안 마음을 두어 깊숙이 탐구하는 자가 있긴 합니다만, 그러나 방편의 힘이 부족하여 지견의 알음알이로써 명료함을 삼는 데 그치고 마니 걱정입니다. 그러나 이는 앉아 있는 놈 전체가 식심(識心)일 뿐이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하겠습니다.
설사 이해가 부처님 근처에까지 이르렀고 더 이상 수행할 곳이 없는 자리에 도달했다 해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자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작가종사는 알음알이의 조작으로 이해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알음알이를 버려서 가슴 속에 털끝만큼도 남기지 않아 허공같이 호호탕탕하게 되는 것만을 허락했을 뿐입니다. 오래도록 길러서 익어지면 이것이 바로 본지풍광이며 본래면목입니다. 이 고금에 뻗친 경지에 도달하면 생사를 벗어남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배상국이나 방거사처럼 곧장 믿어서 단박에 힘을 얻고 자유롭게 수용하면 6진의 반연과 허망한 경계가 어찌 다른 곳에서 나오겠습니까. 만일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진실을 살피면 하루 종일 모든 사물을 굴리되 굴린다는 생각[能相]이 없습니다. 무심하게 텅 비어 마음을 내거나 생각을 움직이지 않고 스스로의 천진함을 따라 평소 항상함과 진실함을 간직합니다. 그리하여 관직에서 유유히 일하며 모두 꿰뚫어 살피는데 이것이 누구의 은혜를 받은 것이겠습니까.
이미 ‘그것’을 알아차리고 나면 마치 물을 따라 내려가는 배처럼, 그저 좌우를 돌아보면서 붙잡고 가면 자연히 신속하게 반야와 서로 맞아떨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선객들이 말하는 “스스로 하는 공부는 어느 곳에서나 세월을 헛되게 버리지 않는다”한 것입니다. 끊임없이 오래도록 불퇴전의 마음을 갖추면 반드시 세간의 유루와 유위를 다 버린 뒤에야 무위 무사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니, 이는 원래 다른 것이 아님을 알겠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버리고 취하는 마음을 품는다면 두 견해를 세우는 것입니다. 언제든 어디서든 그저 이것을 실제로 삼고 힘써 실천하면 모든 번뇌의 휘말림을 끊고 큰 안락을 얻게 됩니다.
120. 엄, 수(嚴, 殊) 두 도인에게 주는 글
참구하려면 모름지기 실답게 참구해야 하고, 보려면 꼭 실답게 보아야 하며, 작용하려면 꼭 실답게 작용해야 하고, 깨달으려면 반드시 실답게 깨달아야 한다. 만일 가는 털 만큼이라도 실답지 못하면 바로 헛된 데 떨어진다. 이 실제의 경지는 3세 모든 부처님이 깨달으신 바이며, 역대조사가 전하신 것이다. 오직 이 하나의 진실을 “실제의 경지를 밟음”이라 말하며, 반드시 첫 번에 크게 깨달아야 한다. 문턱을 오인하여 고정된 틀이나 설명을 만들며 방편경계, 관조와 작용, 취하고 버리는 알음알이를 세운다면 철저히 깨치지 못한다.
이것이 생사를 꿰뚫는 중요한 첩경이다. 죽는 날이 되어서 천이백 근의 짐을 모름지기 감당할 역량이 있어 걸머지고 갈 수 있어야만 홀연히 홀로 벗어나리라. 그러므로 무업국사께서 법문하시기를 “임종할 무렵에 한 털끝만큼이라도 범부니 성인이니 하는 생각을 없애지 못하고 털끝만큼이라도 알음알이가 남아 있으면 가볍고 무거움에 따라 5음[五陰]에 끌려가리라”하였다.
옛사람은 생사문제를 크게 여겼다. 그래서 도를 찾고 스승을 찾아 결택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말이나 배워 고인의 공안을 이해한 것으로 3백이고 5백이고 선문답을 하면서 그것을 깨달음으로 여겨서야 되겠는가. 총명하고 교활한 지혜는 모두가 도를 장애하는 근본이 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요컨대 가만히 공적함을 두드려 심신을 놓아버려서, 토목이나 기왓조각 같이 되는 것을 걱정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하여 업의 뿌리가 되는 씨[業根種子]를 번뜩 뒤집어 잘못임을 알고, 불법 배우는 것을 독약에 중독된 것처럼 보아야 한다. 그런 뒤에 불법을 투철히 벗어나면 이것이 본분의 일을 체득한 것이다. 이는 작은 인연으로 성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래 참구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놓아버리고, 걸머지지 않아야만 경솔하게 다치지 않는다. 상류(上流)들은 투철하면 투철할수록 더욱 낮추어 세밀하고, 고명하면 고명할수록 더욱 감추어서, 전혀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아무데도 쓸모없는 사람이 된다. 움직여도 먼지조차 일지 않고 말하더라도 사람들을 놀래키지 않아서 담담히 편안하고 한가로이 항상 공경을 행해야만 비로소 보임(保任)을 할 수 있으며, 맞고 안맞는 모든 경계에 마음이 동요하지 않고 뜻이 바뀌지 않는다. 달마스님은 이를 ‘일상삼매(一相三昧), 일행삼매(一行三昧)’라고 하였다.
부디 푹 익도록 실천하라. 그리하여 고금의 작용과 기연에 종횡으로 통달하여도 그것을 가슴에 남겨두지 말아야 한다. 그저 무심하여, 부딪치면 바로 변전(變轉)하고 누르면 바로 움직여, 얽매이지 않으면 수천만 사람 속에 있더라도 한 사람도 없는 것과 같으리라. 이는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히 이렇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여기서 다시 마지막 한마디를 알아야 한다. 참구하라.
121. 도명(道明)에게 주는 글
이 도는 지극히 현묘하고 깊다. 때문에 불조께서는 머뭇거림을 용납하지 않으시고 곧장 알아차려 견문성색의 표면을 뛰쳐나와 오롯이 계합하고 가만히 알 것을 요하셨으니, 그래서 이를 “교밖에 따로 전한다”고 한다. 그러나 깊이 체득하고 철저히 작용하며 알음알이의 장애를 벗어버리고 잘 단련하여 깨끗이 다해서 최고의 경지에 도달했다 해도, 반드시 완전히 통달하여 잘 결택해 주는 선지식을 만나 깎이고 뽑히며 맹렬히 물어 뜯겨 실오라기를 끊어야만 한다. 그래야 비로소 부처와 조사의 소굴을 없앨 수 있다.
다만 평범하게 일상생활 속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한 법도 마음에 걸릴 것 없고 한 생각도 얻을 것 없음을 체득하여 무심하게 행한다. 모든 경계 가운데서 원융하여 끝이 없으나 원융하다 할 것도 없어야 비로소 무간도(無間道) 속을 다니면서 공훈이 끊어진 곳에서 노닐게 된다. 이를 평상심도 얻을 수 없다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실제의 경지를 밟으면 헛된 데 떨어짐이 없는 공부이다. 면면밀밀하게 심전지(心田地)를 말끔히 쓸어버려, 젓가락질 숟가락질하는 갖가지 작위가 모두 자기 집안으로 들어간다. 이 때문에 지장(地藏)스님이 한 스님을 꾸짖어 말하기를 “남방에서는 호호탕탕히 선(禪)을 말한다는데, 말해보라. 나의 여기에서 밭에 씨 뿌리고 주먹밥 먹는 것만 하겠는가를”하였다.
이를 미루어 본다면 괴로움을 참고 수고로움을 이기면서 큰 작용을 융성하게 일으킨 것이니, 거칠고 누추한 가운데서라도 모두가 지극한 참다움이 된 것이다. 오직 마음을 바꾸지 않고 한결같이 나아가며 실천하는 것만을 귀하게 여길 뿐이다. 생사도 나를 어찌하지 못하는데, 더구나 그 밖의 일이야 말해서 무엇하랴! 영가스님은 말하기를, “최상의 인재는 한 번 결단하여 일체를 끝낸다”하였으니 믿을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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