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논문·평론

[불설 비불설 논쟁] 최초 경전 편찬은 문자의 영향 - 조성택 교수

실론섬 2015. 9. 8. 22:02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가 「문학/사학/철학」(여름 제17호)에서 초기경전으로 일컬어지는 아함경과 니까야 또한 대승경전과 마찬가지로 붓다의 ‘친설’로는 볼 수 없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다. 이후 “니까야에는 ‘친설’이 담겨있다”는 팔리문헌연구소장 마성 스님을 비롯해 전재성 한국빠알리성전협회장, 황순일 동국대 교수 등과 권오민 교수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오고 갔다. 이런 가운데 조성택〈사진〉  고려대 교수가 이번 논쟁 주제와 관련해 최근 발간된 「초기불교사 ‘재구성’에 관한 검토」(불교학연구 제23호)란 논문 내용을 정리한 기고문을 본지에 보내왔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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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사를 재구성하는데 적용되었던 유럽 근대불교학의 암묵적 전제들을 재검토하고 불교의 종교적 사상적 특징에 입각한 새로운 재구성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이러한 모색이 문헌학적 방법론의 한계를 넘어 고대불교를 ‘상상’하는 다양한 가능성이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고대불교사의 전체를 새롭게 재구성하는 문제는 짧은 글 한편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며 필자의 능력 밖의 일이다. 이 글은 다만 공고해 보이는 ‘고대불교사’라는 근대유럽 불교학의 ‘구성물’에서 발견되는 조그만 균열을 드러냄으로써 새로운 ‘상상’의 가능성을 열어놓기 위한 것이다.


근대불교학은 원산지인 인도에서의 ‘불교의 부재’라는 상황으로부터 출발하였다. 당시 발달하였던 유럽의 문헌학은 이러한 상황을 헤쳐 나가는데 아주 유용한 도구가 되었다. 경전의 언어학적 계통을 구분하고 상호 관련성은 물론 여러 이본(異本)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경전 성립의 역사를 파악하는데 문헌 비평적 접근은 매우 유효하였다. 근대불교학이 재구성한 불교사의 기본 골격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로 요약 될 수 있다.


1. [불교는 본래] 하나의 교단에서 출발하여 역사적 과정 속에서 여러 교단으로 분열되었다. 

2. 현존하는 초기 경전(주로 팔리 경전과 아함경)간의 내용적 차이는 본래의 동일성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 두 가지는 근대불교학이 도달한 결론이지만 어쩌면 근대불교학이 그 출발에서부터 이미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근대불교학의 관점에서는 이 두 가지 전제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의 교단’이라는 전제는 당연히 ‘본래 동일한’ 텍스트, 즉 현존 경전들의 모본(母本, Ur-text)의 존재를 상정하는 것이며, ‘본래 동일한’ 텍스트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교단’이라고 하는 제도적 뒷받침이 있어야 하며 그것도  여럿이 아닌 반드시 ‘하나’의 교단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대불교학의 이러한 전제는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 어느 것도 역사적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막연한 추측과 잘못된 가정에서 출발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근대불교학은, 면밀한 검토나 구체적 증거도 없이, 거의 무의식적으로 브라흐마니즘(Brahmanism)의 구전 전통이 초기불교의 경우에도 그대로 ‘재현’되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나는 두 가지 점에서 이러한 ‘믿음’에는 근거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브라흐마니즘의 구전 전통이 가능하기 위한 몇 가지 선결 조건들이 초기불교에는 없었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브라흐만적 구전전통은 초기불교에서 이미 직접적으로 비판할 만큼 비불교적일 뿐 아니라 불교 교리적 측면에서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점이다. 브라흐만 전통과 불교는 ‘텍스트’에 대한 관념이 전혀 달랐다. 브라흐만 전통에서 베다 문헌은 신성한(sacred) 기원과 신성한 힘을 가진 것이지만, 초기불교 전통에서 텍스트는 그러한 성격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불교가, 적어도 초기불교 전통에서는 붓다의 가르침을 ‘보존’ 하는 것을 가장 중요시 하는 ‘성전(聖典)의 종교’가 아니라,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 실천하는 ‘체험의 종교’라고 생각한다. 초기불교를 재구성하는데 있어 불교의 이러한 특징은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 되며, 이는 초기불교의 성격을 이해하는 기본 전제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불교 경전을 편찬 전승하는 일은 초기불교, 적어도 붓다 입멸 당시의 1차적 관심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 현존하는 엄청난 분량의 불교 경전은 언제 만들어진 것들인가? 현존하는 대부분의 경전들은 초기불교 경전이든 대승경전이든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 후 5세기 사이에 편찬된 것들이다. 앞서 언급하대로 근대불교학은 이 경전들의 모본(母本) 텍스트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모본의 시기는 빠르게는 붓다 입멸 후 100년경을 기준으로 그 직전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하거나 또는 늦어도 2차 결집 당시에는 성립되었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언급한대로 우리는 모본(母本) 텍스트의 존재를 증명해 줄 역사적 자료도 없을 뿐 아니라 그것을 간접적으로 인정할 만한 불교 내적 증거(internal evidence)나 정황적 증거도 없다.


붓다는 80세로 입멸할 때까지 약 35년간 설법을 하였다고 한다. 성도 직후의 전법과 붓다의 마지막 몇 달을 전하고 있는 텍스트를 제외하면 나머지 어떤 경전들에서도, 심지어 대승경전에서도 35년 기간 내에서 시간의 경과를 전혀 감지할 수 없다. 과연 당시 붓다가 몇 세인지, 성도 후 얼마나 경과한 때인지 등을 전혀 느낄 수 없다. 모든 시간은 ‘한 때’일뿐 세월의 흐름에 따른 붓다 설법의 내용이나 어투의 변화 등을 전혀 읽을 수 없다. 물론 대승경전과 초기 경전은 확실히 다르다. 그러나 그 다름은 내용과 서술방식과 내러티브의 전개방식에서 오는 차이일 뿐 두 경전 간에 실제적 시간의 경과는 아니다. 즉 팔리경이나 아함경을 먼저 설한 뒤 나중에 설했다는 그러한 시간의 경과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불교 전통’에서는 이러한 것을 두고 붓다 가르침의 ‘영원성’ 혹은 ‘초역사성’을 역설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불교 경전을 하나의 ‘텍스트’라는 입장에서 보면 불교 경전에서 ‘시간’은 멈춰 있고 시간의 경과를 찾아 볼 수 없다. 붓다가 이 모든 것들을 어느 날 ‘하루’에 설법한 것이라면 모르되 그렇지 않다면 이 텍스트들이 비슷한 시기에 편찬되었기 때문이라는 추정도 전혀 무리는 아닐 것이다.


따라서 나는, 물론 더 많은 사료 분석과 텍스트간의 비교연구가 필요하지만, 일단 현존 경전이 불교 최초의 경전편찬의 결과물과 그리 멀지 않은 시기의 것들이라고 가정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서 현존하는 여러 경전들은 기원전 1세기와 기원 후 5세기 어느 시기에  비로소 편찬되기 시작하였으며 짧게는 1세기 길게는 3~4세기를 거치면서 지금의 경전으로 ‘고정’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최초의 편찬은 유럽의 근대불교학자들이 추정하였던 구술에 의한 편찬이 아니라 ‘문자’에 의한 편찬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당시 편찬의 자료가 되었던 ‘텍스트’들은 그 언어나 체계, 내용 등이 각 지역별로 워낙 다양했기 때문에 ‘구술’에 의해 일관성 있는 ‘정전’(正典) 체계로 만드는 것이 가능했을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최초로 불교 경전이 편찬되기 시작한 것이 기원전 1세기경 그리고 그 이후라면 이 시기는 곧 대승경전이 ‘만들어 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대승경전이 만들어지는 시기와 초기경전이 편찬되었던 시기는 거의 동시대인 것이다. 그리고 리차드 곰브리치(Richard Gombrich) 등이 주장하고 있듯이 불교 경전에 있어 ‘문자’ 사용은 대승경전의 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초기불교 경전의 편찬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앞서 간략하게 언급하였지만, 붓다 입멸 후 각 지역에서 전승되고 있는 붓다에 대한 다양한 ‘기억’들이 초기불교 경전들을 편찬하는 기본 원천 자료(source materials)들이었을 것이다. 세대를 걸친 전승의 과정에서 그 기억의 내용, 순서는 물론 디테일에 있어 많은 차이가 생겼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각 지방 속어의 언어학적 차이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을 것이다.


따라서 편찬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 기억들은 ‘단편적’이거나, 다른 기억들과 ‘불일치’ ‘상충’되는 것이 다반사였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의 일관된 내러티브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단편적 이야기를 다른 자료를 통해 ‘보충’하거나, 때로는 ‘삭제’ 혹은 ‘창작’하는 등 소위 ‘편집 재량권’(editorial discretion)을 발휘하는 것이 불가피 했을 것이다.


근대불교학은 현존 경전에서 발견되는 여러 ‘기억 장치’(mnemonic device)들, 즉 ‘정형구’ ‘통일적 체제’ ‘반복’ 등을 모본(母本)텍스트로부터의 구전 전승의 흔적 혹은 증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구전 전승’을 설득력 있게 입증할 만한 뚜렷한 증거나 단서가 없는 상황에서 ‘기억 장치’의 존재만을 가지고 곧 ‘모본의 구전’을 언급하는 것은 별 설득력이 없다.


나는 현존 텍스트의 ‘기억 장치’들은 ‘과거의 흔적’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장치들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불교인들은 ‘붓다의 가르침’과 ‘붓다의 기억’을 처음으로 편집, 편찬하는 경전화의 과정에서 비로소 전승의 문제를 고민하게 되고, 이를 위해 베다문헌 등에서 ‘정확한 저장기억’을 위해 전통적으로 활용되어 온 여러 ‘기억 장치’들을 활용하였던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설득력 있는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 이러한 경전화/정전화의 작업은, ‘기억’의 관점에서 보면 ‘활력으로서의 기억’을 ‘저장기억’으로 전환하는 작업이라는 의미가 있다. ‘활력적 기억’이 있는 한 붓다는 ‘과거’의 경험이 아니라 ‘현재’적 경험이지만 저장 기억이 되는 순간 붓다는 과거의 경험이 된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팔리 경전 등 초기경전의 편찬자들의 태도와 대승 경전 편찬자/창작자들의 태도는 크게 대조된다. 초기경전 편찬자들이 붓다를 ‘과거’의 기억으로 ‘저장’함으로서 붓다는 일정한 모습으로 ‘고정’되게 된다.


그러나 대승경전의 편찬자/창작자들은 여전히 붓다를 ‘활력적’으로 기억하고자 하였으며 따라서 붓다는 현재적 경험이 된다. ‘반주삼매’와 ‘염불삼매’ 등은 그 대표적인 현재적 경험이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붓다는 ‘활력적 기억’을 통해 ‘항상 현현(顯現)’하는, 다시 말해서 ‘영원한’ ‘상주’(常主)하는 존재로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불신(佛身)에 관한 이론적 고찰의 과정이 비록 없었다 하더라도 색신, 응신, 법신의 삼신(三身)은 이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등장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이 상좌부 불교와 대승불교의 등장을 교단사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붓다에 대한 ‘기억’ 방식의 차이, 즉 ‘저장 기억’이냐 ‘활력적 기억’이냐의 차이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 방식은 그레고리 쇼펜(Gregory Schopen)이 대승불교의 기원과 관련하여 이미 지적한 교단사와 사상사의 ‘불일치’에 대한 또 다른 해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조 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