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논문·평론

지와 관, 선정과 사념처에 관한 고찰/한자경

실론섬 2015. 12. 7. 12:21

지와 관, 선정과 사념처에 관한 고찰 

한자경/이화여자대학교 

 

차례

I. 들어가는 말 

II. 수행론에 관한 기존의 논의 

III. 개념의 명료화: 수행 방법상의 개념(지·관)과 수행 내용상의 개념(사선·사념처)의 구분

IV. 수행론의 체계화

    1. 불교수행의 기본방향

    2. 사념처

    3. 선정

    4. 사념처와 선정의 대응관계

V. 대승에서 지와 관: 근본무분별지와 후득

VI. 마치는 말

 

I. 들어가는 말 

 

수세기 동안 한국을 포함한 북방 대승불교의 주된 수행법은 화두를 들고 참구하는 간화선이었지만, 남방불교의 주된 수행법은 사념처를 중심으로 하는 위빠사나 수행이었다. 요즘 들어 마하시나 고엥 카등 위빠사나 수행이 한국에 소개되고 난 후, 선방은 간화선을, 학계는 위빠사나 수행을 불교의 핵심수행인 것처럼 주장하지만, 정작 선과 위빠사나, 지와 관, 정과 혜가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지에 대해, 선승과 학자들간에뿐 아니라 학자들 상호간에도 통일된 의견을 갖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대승기신론도 천태도, 원효도 지눌도 모두 지관쌍행, 정혜쌍수를 주장해왔지만, 아직도 그 논의가 그치지 않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수행의 이론 초월적 심원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어느 정도는 개념적 명료화 내지 체계화의 부족 때문이라고 여겨 진다. 본고에서는 止(samatha), 觀(vipassanā), 定(samādhi), 念 (sati), 禪定(jhāna-samādhi), 念處(sati-paṭṭhāna) 등에 대해 개념 적 명료화 및 체계화를 시도해보고자 한다. 개념적 명료화 및 체계화를 위해 그 단어들이 경전이나 논전에서 사용된 문맥에 따라 그 뜻을 밝히는 작업과 더불어 그들에 대한 기존의 학자들의 이해를 비교 분석해보는 작업을 할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지와 관, 선정과 사념 처가 우리의 수행하는 마음안에서 실질적으로 어떻게 서로 연관되 는지를 내용적으로 살펴보면서 그 연관성을 논해볼 것이다. 

 

이하 본론에서는 일단 2000년 이후 지금까지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지와 관, 사선과 사념처 그리고 상수멸정에 관한 논의 및 논점을 간추려 살펴봄으로써 문제의 지평을 밝혀보겠다(2장). 그리고 기존의 논의에 힘입어 지와 관을 ‘수행 형식(방법)상의 개념’으로, 4선 과 4정, 4념처 및 상수멸정을 ‘수행 내용(실질)상의 개념’으로 구분 해본다(3장). 그리고는 사선과 사무색정과 상수멸정 그리고 사념처를 내용적으로 각각 별개의 것으로 놓지 않고 그것들을 상호 연관지어 하나의 체계로 밝혀보고자 한다(4장). 이어 그 연결의 마지막 지점에서 상수멸정과 법념처가 어떤 의미로 서로 상통하는지를 논해볼 것이다(5장). 그리고 이런식으로 체계화된 불교 수행론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며 글을 맺기로 한다(6장). 

 

II. 수행론에 관한 기존의 논의 

 

지와 관, 선정과 사념처등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은 초기 경전에서부터 확인된다. 오늘날 위빠사나 수행자들이 주 논의근거로 삼는『대념처경』은 사념처수행을 열반과 지혜에 이르는 “일승 의 길”로 강조한다. 사념처는 신·수·심·법을 각각 대상으로 삼아  음지킴(念, sati)과 알아차림(知, sampajāna)으로 성립하므로,  를 사념처관이라고도 하여 관(위빠사나)으로 간주한다. 그런데 법념처에 사성제가 포함되고, 사성제의 하나인 도성제(팔정도)에 正 念(sammā-sati)과 正定(sammā-samādhi)이 포함되는데,『대념처 경』은 정념을 사념처로, 정정을 사선으로 설명한다. 이렇게 보면 사념처가 광의와 협의로 구분될 뿐 아니라, 正定인 사선이 광의의 사념처 속에 다시 포함되게 된다. 

 

사념처(觀): 신념처, 수념처, 심념처, 법념처(…+팔정도: …+正念+正定) = 사념처 = 사선 

 

그런데 팔정도를 계·정·혜 삼학으로 구분할 경우, 정정진과 정념과 정정은 定學에 포함된다. 이렇게 보면 정(사마디) 또한 광의와 협의로 구분될 뿐 아니라, 정념의 사념처가 광의의 정에 포함되게 된다. 

 

삼학:        혜학       |         계학        |           정학 

팔정도: 정견+정사유 | 정어+정업+정명 | 정정진+정념+정정

 

나아가 정혜쌍수나 지관쌍행 등의 주장은 지와 관에 관한 『잡아함경』의 다음 구절에 근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만약 비구가 빈 곳 나무 아래나 고요한 방에서 사유하려면 어떤 법으로써 사유해야 하는가? …… 마땅히 두 법으로써 사유해야 하는데, 지와 관이 그것이다. …… 지를 닦아 익히면 결국 관이 이루어진다. 관을 닦아 익히면 지 또한 이루어진다. 거룩한 제자는 지와 관을 함께 닦아 모든 해탈의 경지를 얻는다.1)

1)『잡아함경』권17, 464(『대정장』권2, 118b), “若比丘於空處樹下閑房思惟, 當以何法, 
   專精思惟. …… 當以二法, 專精思惟, 所謂止觀. …… 修習於止, 終成於觀. 修習觀已, 亦
    成於止. 謂聖弟子, 止觀俱修, 得諸解脫界.” 팔리 상응부 경전에도 이와 동일한 구절이 
    있다. 팔리어 원문은 김준호의「초기불전에 나타난 지관개념」,『한국선학』제1호
   (서울:한국선학회, 2000), 295쪽에 인용되어 있다.

 

이와 같이 사선과 사념처, 정과 관은 서로 겹쳐지면서 포괄하는 얽힌 관계를 이루기도 하고, 지와 관으로 서로 구분되되 또한 선·후의 관계로 또는 동시적 관계로 보완관계에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 연관 관계가 내용상 구체적으로 어떠한지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연구자들간에 다양한 해석이 등장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김준호는 최근 위빠사나 수행에서의 지관해석을 경계할 목적으로 “초기불전에서는 지관이 확립된 수행체계로서 구체적인 서술로 나타나 있지 않다”2)고 주장하며, 지관을 “일련의 선정수행[사무량심·사선·사선·사무색정]을 위한 예비적 수행”3)이라고 논한다. 이에 대한 반박으로 조준호는 “초기불교경전에서 지관의 내용으로 정정과 정념이 나타난다는 것”4)을 지적하며, 지관은 단지 선정에 이르기 위한 예비적 수행이 아니라 오히려 “선정수행과 그에 대한 성취들이 지관 수행의 내용 그 자체”5)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렇게 해서 선정과 관법, 지와 관의 관계가 화두로 등장하게 되었다.

2) 김준호, 같은 글, 296쪽.
3) 김준호, 같은 글, 295쪽
4) 조준호,「김준호의 <초기불전에 나타난 지관개념>을 읽고」,『한국선학』제1호, 논평문, 3쪽. 
5) 조준호, 같은 글, 1쪽.

 

지와 관에 대해 조준호는 일단『대념처경』에서 밝히는 대로 정념은 사념처관이고 정정은 사선인데, “지는 곧 사선”이고 “관은 곧 사념처”라고 논한다.6)

6) 조준호,「초기불교에 있어 지·관의 문제」,『한국선학』제1호, 324, 329쪽.

 

정념 = 사념처 = 관 | 정정 = 사선 = 지

 

그리고 그 둘 간의 관계를 선정에서 관으로 나아가는 관계로 이해한다. “사선의 목표는 념, 즉 sati의 발현과 완성”이며, 그렇게 염이 완성되어야 여실지견의 관이 비로소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결국 지관의 관계에 대해 “선수행(사선)이라는 형식을 통한 삼매의 성취(염의 완성) 속에 신·수·심·법 또는 오온의 비바사나가 이루어지는것”7)이라고 결론 내린다. 그는 염의 핵심을 “언어를 매개로” 한 “일상적인 사유작용[심과 사]을 끊는 것”으로 보며, 따라서 이를 “수동적 주의집중”이라고 칭한다. 김준호가 관을 거쳐 선정에 이름을 궁극으로 보았다면, 조준호는 역으로 선정을 거쳐 관에 이름을 궁극으로 보았다고 하겠다. 

 

                     先              →    後 

김준호: (지)관=위빠사나수행 → 선정 

조준호: 지=사선: 염의 완성   → 관=사념처

 

이렇게 해서 논의는 다시 궁극적인 진리인식인 관에 대해 선정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의 문제로 좁혀졌다고 볼 수 있다. 그 둘은 수행상 선후의 관계인가, 동시적 관계인가? 조준호가 사선으로 염을 완성한 후 그 기반 위에서 관을 행한다는 전자의 관점을 대변한다면, 임승택은 후자의 관점에서 이를 비판한다. 조준호의 지관 이분적 주장에 대해 임승택은 그들의 얽힌 관계를 강조한다. 그는 3선과 4선에 등장하지만 “사실 초선에서부터 이미 존재해 있는” 염이 “관의 실질적 내용이 아니고 무엇인가?”라고 반문한다.8) 그는 사선에서의 염과 사념처의 관이 내용상 마찬가지이므로, 지와 관은 “중층적으로 얽혀있는 구조”로 되어있으며, “사념처의 수행이 선정의 상태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9)

8) 임승택,「<초기 불교에 있어 지·관의 문제>의 논평」,『한국선학』제1호, 논평문, 2쪽. 
9) 임승택,「선정(jhāna)의 문제에 관한 고찰」,『불교학연구』제5호 (서울: 불교학연구회, 
   2002), 261, 252쪽.

 

조준호: 지=사선: 염의 완성     → 관=사념처

임승택: 선정의 염(초선~무소유처) ⇄ 사념처의 관

 

결국 관에 이르기 위해 조준호는 사선을 거쳐야 한다고 보고, 임승택은 초선부터 아니 초선에서 이미 가장 완전한 관이 행해지고 있다고 본다.10) 그런데 위빠사나 수행을 위해 꼭 사선이 함께 해야 하는 것인가? 사선을 거쳐서든 사선과 동시적이든 관을 위해 선정이 꼭 요구되는가? 아예 선정 없이도 위빠사나가 가능하다는 주장도 있다. 김재성은『청정도론』의 순관에 입각해서 “선정의 준비과정 없이 바로 위빠사나를 닦아” 열반에 이를 수 있음을 논하며, 이를 마하시 사야도(Mahasi Sayadaw) 수행법에 따라 “찰나삼매”로 설명한다.11)

10) 임승택은 사선과 사무색정 중에서 특히 초선을 강조하여, “거친사유(尋, vitakka)를 수반
    하는 첫째 선정의 상태에서 가장 온전한 형태의 위빠싸나가 진행된다”고 주장한다.「( 선
    정(jhāna)의 문제에 관한 고찰」, 269쪽). 그는 2선에서부터는 “언어적 분별[尋]이라든가 
    논리적 추론[伺]과 같은 내면의 심리현상에 대한 통찰의 근거가 망실”되어, “진리에 대한 
    통찰과 깨달음”이 초선만 못하다고 보는 것이다「( 첫번째 선정의 의의와 위상에 대한 고
    찰」,『불교학연구』제6호, 2003, 201쪽). 조준호가 염을 언어적 분별을 넘어선 마음상태
    로 보며 그 기반 위에서만 여실지견의 관이 가능하다고 보는데 반해, 임승택은 오히려 언
    어적 분별과 추론인 심사에 의해 진리의 통찰과 깨달음이 가능하다고 보는 차이가 있다.
11) 김재성,「순관에 대하여」,『불교학연구』제4호 (2002), 256쪽, 258쪽.

 

조준호: 사선을 다 닦은 후 위빠사나 가능

임승택: 선정에서 동시에   위빠사나 가능: 특히 초선을 강조

김재성: 선정 없이도         위빠사나 가능: 찰나삼매

 

그런데 이상의 논의에는 ‘지는 선정(정정), 관은 사념처(정념)’라는 것이 이미 전제되어 있다. 이에 반해 정준영은 이러한 동일시에 이의를 제기한다. 지(samatha)와 정(samādhi, 삼매)과 선정(jhāna), 사념처와 위빠사나 등은 그 함의와 차원이 조금씩 다르므로 일의적으로 규정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는 “사마디[정]는 선정[팔정도의 하나인 정정]보다 더 넓고 다양한 범위를 나타”내며, “사념처 수행은 성인을 위한 수행방법이 아니라 성인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예비단계의 방법”이고, 위빠사나는 “계정혜를 갖춘 팔정도의 바른 수행”이라는 점에서 “수념처 수행 자체만을 위빠사나 수행이라고 보는 데는 다소 무리가 있다”고 주장한다.12) 흔히 사마디수행과 위빠사나수행을 사선과 사념처와 동일시하면서 논의하는 것에 제동을 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사마디와 사선, 위빠사나와 사념처는 서로 어떤 관계에 있단 말인가? 이 물음은 아직 해명되지 않은 것 같다.

12) 정준영,「사마타(지)와 위빠사나(관)의 의미와 쓰임에 대한 일고찰」,『불교학연구』
    제12호 (2005), 535, 543, 548, 549쪽.

 

선정과 사선 이외에 사무색정이나 상수멸정에 대해서도 연구자들 서로 간에 의견이 분분하다. 조준호는 사무색정이 일종의 “관상법”으로서 “사선과 사념처의 차제관계를 흐리게 하는” 잘못 끼어든 근거 없는 것이라고 논하지만,13) 임승택은 사무색정을 4선에 이어 무소유처에 이르기까지 위빠사나가 가능한 단계라고 논한다. 나아가 무색정의 비상비비상처와 그 다음의 상수멸정은 수행을 통해 도달되는 삼매이되, “그 상태에서는 위빠사나가 행해지지 않”고, 단지 “그러한 상태를 벗어난 연후에 이전에 소멸한 법에 대해 돌이켜 생각하는 것”이 가능한 그런 상태라고 설명한다.14)

13) 조준호,「초기불교에 있어 지·관의 문제」, 326쪽.
14) 임승택,「선정(jhāna)의 문제에 관한 고찰」, 261쪽.

 

반면 정준영은 상수멸정에 적극적인 깨달음의 의미를 부여한다. “부처님은 기존에 존재하던 여덟가지 선정에 상수멸정 하나를 더 체험함으로써 깨달음을 성취한 것이다. 즉 사마타만으로 얻어지는 선정의 진행과정에 만족하지 않고, 이 선정의 진행과정에서 현상의 생멸을 관찰하는 위빠사나를 통해 무상·고·무아를 통찰한 것이다”라고 하여, 상수멸정에서 사마타를 넘어서는 진리 통찰으로서의 위빠사나의 의미를 발견한다.15) 나아가 정준영은 “선정을 통한 지속적인 중지[사마타]의 과정이 상수멸정을 거쳐 탐·진·치의 중지(소멸)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상수멸정은 탐진치 소멸로서의 열반과 유사하며, 그 중에서도 고락의 느낌이 소멸했다는 점에서 무여열반과 유사한 상태라고 논한다.16)

15) 정준영,「상수멸정의 성취에 관한 일고찰」,『불교학연구』제9호 (2004), 243쪽.
16) 흔히 탐진치소멸로서 도달되는 상태가 열반이되, 오온을 갖고 살아있는 상태를 유
    여열반, 죽은 상태를 무여열반이라고 구분하는데 반해, 정준영은『이띠웃따까』를 
    근거로 탐진치가 제거되되 고락의 느낌이 남아있는 상태를 유여열반, 느낌이 소멸
    한 상태를 무여열반이라고 구분한다『. 청정도론』이 상수멸정을 열반과 같은 상
    태로 설명하고, 주석서인『빠라맛따만주사』도 그 열반을 무여열반과 같은 것으로 
    본다고 논한다. 결국 “의식의 중지상태인 상수멸정을 열반과 비교한다면, 지금 이 
    현세에서 경험할 수 있는 무여열반의 일시적 상태로 보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정준영, 같은 글, 251-257쪽).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지와 관, 사선과 사념처, 사무색정과 상수멸정에 대해 그리고 그들 간의 관계에 대해 연구자들 사이에 공통적인 의견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러다 보니 여러 수행방법들이 서로 연관되는 하나의 체계로 이해되기 보다는 오히려 수행자 각각의 근기와 성향에 따라 달리 제시된 수행법들로 간주되기도 한다.17) 대기설법의 일인자인 붓다가 각 사람의 근기와 성향에 따라 그에 적절한 수행방법을 제시했다는 것은 의미있는 통찰이라고 본다. 그렇지만 일단은 전체 수행방법들을 서로 연관지어 하나의 체계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보며, 이하에서는 이를 논해보고자 한다.

17) 정준영,「인간의 성향에 따른 수행방법에 대한 연구: 주석문헌을 중심으로」,『불교와 
    심리』(서울: 불교와 심리연구원, 2006), 127쪽 이하 참조.

 

III. 개념의 명료화: 수행 방법상의 개념(지·관)과 수행

    내용상의 개념(사선·사념처)의 구분

 

여기에서는 불교의 여러 가지 수행론적 개념들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선행단계로서 개념의 명료화를 시도해본다. 무엇보다도 지와 관 그리고 사선과 사념처가 같은 차원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본다.

 

불교 수행의 목적은 단지 마음의 평안을 얻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진정한 마음의 평안은 진리의 깨달음으로써만 가능하다는 통찰이 깔려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궁극적 깨달음, 진정한 마음의 평안은 어떻게 가능한가?

 

눈앞에 주어지는 다양한 대상들에 마음이 산만하게 끌려 다녀서는 어떤 종류의 진리도 포착하기 힘들 것이다. 진리를 포착하자면 마음이 어느 정도는 가라앉고 진정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마음을 가라앉히는 작용을 지(사마타)라고 하고, 진리를 깨닫기 위해 무엇인가를 관찰하는 작용, 보는 작용을 관(위빠사나)이라고 한다. 마음을 가라앉혀 고요해지면, 보게 된다(지→관). 그러나 어떻게 해야 마음이 가라앉는가? 마음을 들뜨게 하는 것을 바라봄으로써 마음이 가라앉게 된다(관→지). 이렇게 해서 지와 관은 순환관계를 이룬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이는 형식상의 순환이지 내용상의 순환은 아니다.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바라보는 것은 마음을 어지럽히는 생멸하는 대상들이지만, 그 대상들이 잠잠해져 마음이 가라앉고 나서 바라보는 것은 생멸의 원리이므로, 바라보는 대상 또는 내용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보는 작용은 갖지만, 무엇을 보는가의 내용이 서로 다른 것이다. 마찬가지로 생멸하는 대상을 바라보는 때의 마음의 그침과 생멸의 진리를 바라보는 순간의 마음의 그침도 그침이라는 작용 내지 형식에 있어서는 동일하지만, 내용적으로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는 어떤 차원에서의 마음의 그침인가의 내용적 차이와 상관없이 지라고 불리고, 관은 어떤 대상을 바라보는가의 내용적 차이와 상관없이 관이라고 불린다. 예를 들어 숨에 주목하는 것은 ‘수식관’, 시체에 주목하는 것은 ‘백골관’, 일체의 공성을 관하는 것은 ‘공관’이다. 이처럼 구체적 내용을 사상하고 단지 마음의 작용적 측면만을 표현하는 개념을 ‘수행의 방법상 내지 형식상의 개념’이라고 규정한다면, 지나 관은 이런 개념에 속한다.

 

이에 반해 사선이나 사념처는 그러한 마음의 작용이 어떤 차원에서 어떤 대상과 연관하여 일어나는가가 규정되어 있는 개념이다. 사선은 단지 마음이 가라앉고 안정된다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그 내용이 무엇인지, 즉 마음에서 무엇이 가라앉아 결과적으로 마음이 어떤 상태에 이르는지를 네 단계로 구분하여 상세히 규정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사념처 또한 마음을 집중하여 관하게 되는 대상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가 몸과 느낌, 마음과 법으로 규정되어 있으며, 그 각각의 대상에 따라 각각의 념처가 서로 다른 것으로 논해지고 있다. 이처럼 수행에 있어 그 실질적인 내용까지 규정되어 있는 개념을 ‘수행의 내용상 내지 실질상의 개념’이라고 한다면, 사선이나 사념처는 이런 개념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삼매로 음역되거나 定으로 의역되는 사마디도 마음이 하나에 몰입되어 있는 ‘心一境性’의 의미로만 보면 형식상의 개념에 속한다. 마음이 거기 몰입될 그 하나의 대상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가 규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독서삼매이든 열반삼매이든 삼매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반면 사무색정은 그 삼매가 어떤 차원에서 발생해서 그 마음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가 내용적으로 규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수행 내용상의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이 止와 觀 그리고 定은 수행의 방법이나 형식상의 개념인데 반해, 사선이나 사념처 그리고 사무색정은 수행의 실질적인 내용상의 개념이라고 구분해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사선을 지로, 사념처를 관으로 동일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특정 단계에서 특정 내용으로 성립하는 수행인 사선 안에 마음을 안정시키는 지와 사태를 바라보는 관의 작용이 둘 다 포함될 수 있기 때문이다. 초선에서 五蓋가 가라앉음은 지요, 尋伺가 작동함은 관이며, 3선에서 喜가 가라앉음은 지요, 正知(sampajāna)가 작용함은 관이다. 마찬가지로 사념처에서도 지와 관이 함께 작용한다. 각각의 염처에서 몸이나 느낌이나 마음 등을 바라보며, 흔들림 없이 마음을 지키는 念(sati)은 止에 해당하고, 이어 알아차림(sampajāna)은 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특정한 내용의 각 수행 단계 마다 지와 관은 함께 작용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IV. 수행론의 체계화

 

불교 수행론을 하나의 체계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행 형식상의 개념인 지와 관을 통해서가 아니라, 특정한 내용을 따라 각각의 특정한 수행 단계를 의미하는 사선, 사념처, 사무색정, 상수멸정 간의 관계를 고찰해봐야 한다. 물론 사선, 사무색정, 상수멸정은 이미 9단계의 선정으로 설명되고 있다. 본고에서는 사념처가 이 9단계의 선정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논하려는 것이다. 이들 각각과 그 관계를 논하기에 앞서, 우선 불교수행의 기본방향이 무엇인가를 밝혀본다.

 

1. 불교수행의 기본방향

불교 수행과 연관하여서는『마두핀디카경』의 다음 구절이 주목할 만하다.

 

안과 색을 인연하여 안식이 일어난다. 이 세 개의 화합이 촉이다. 촉을 인연하여 수가 있다. 자신이 느낀 것을 자신이 지각한다. 자신이 지각한 것을 자신이 사유한다. 자신이 사유한 것을 자신이 망상한다. 자신이 망상한 것에 의존하여 일어나는 망상-상-수는 과거 현재 미래의 색과 관련하여 안식등과 관련하여 그 사람을 좌지우지한다.18)

18)『마두핀디카경』. 위의 번역문은 안양규의「사고의 역기능과 그 해결: 붓다의 가르침과 
    아론 벡의 인지치료를 중심으로」(명상치료학회 창립학회 발표논문, 2007)라는 논문에
    서 인용한 것이다. 이 논문에서 팔리어 원문도 함께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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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장은 촉으로 인해 느낌(受)이 생기고 느낌으로부터 지 각(想)이, 지각으로부터 사유(思)가, 사유로부터 망상이 이 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개념 망상-想-數 (papañcasaññāsaṅkhā)는 흔히 “망상(희론)에 오염된 지각과 개 념”으로 풀이된다. 즉 망상으로 인해 지각과 개념(개념적 사유)이 확산되고 불어난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보면 느낌에서 지각과 사유 가 생기고 이것이 망상을 일으키지만, 이 망상이 다시 지각과 개념적 사유를 불러일으키는 그런 순환관계가 형성된다. 

 

촉→느낌(受,vedanā)→지각(想,saññā)→사유(思,vitakka)→망상(papañca)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대상과 접촉하면 어떤 느낌을 갖게 되며 그로부터 표상이 떠오르고 생각을 갖게 되어 망상으로 번지게 되지만, 이미 그 표상과 생각, 지각과 사유가 망상에 물들어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지각과 사유가 망상을 낳고 망상이 다시 지각과 사유를 불러일으켜서, 우리는 결국 망상이 망상을 낳는 순환구조 속에 갇혀버리는 꼴이 되고 만다. 업이 업보를 낳고 그 업보로 인해 다시 업을 짓고, 그렇게 해서 업과보의 순환구조 속에서 계속 윤회하는 것과 같다. 무명에서 시작해서 생·노사로 나아가지만 그것이 다시 무명으로 이어져 순환이 반복되는 12지 연기 구조가 그러하다.

 

무명→행→식→명색→육입→촉→ 수→애→ 취→유→생→노사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그런데 이 순환구조는 우리가 그 안에서 단지 수동적으로 이끌리기만 하는 닫친 순환이 아니라, 매순간 능동적으로 순환을 강화시키거나 혹은 약화시키는 것이 가능한 그런 열린 순환이어야 한다. 즉 우리는 이전의 업의 결과인 업보로서 존재하지만, 그것을 넘어서서 다시 새로운 업을 짓는가 아닌가, 그래서 업보를 더 강화시키는가 아닌가는 매순간 우리 자신의 결단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새로운 조업은 12지 연기고리에서 볼 때, 수에서 애로 넘어가는 단계에서 발생한다. 수까지는 지난 업의 수동적 보인 반면, 애와 취는 능동적인 조업이기 때문이다.

 

… →觸→受(vedanā)→愛(taṇha)→取(upādāna)→ …

            과(수동적 보) | 인(능동적 업)

 

느낌은 앞서의 업에 의한 수동적 결과일 뿐이지, 새로운 업을 짓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수에는 고수와 락수의 구분이 있으며, 그에 따라 락수를 좋아하고 고수를 싫어하는 애·증의 분별(애)과 좋은 것을 집착하고 싫은 것을 버리려는 취·사의 분별(취)이 있게 되는데, 이러한 분별적 애와 취가 바로 새로운 업을 짓는 능동적 행위인 것이다.19) 애와 취가 새로운 업지음이라는 말은 수에서 애취로의 이행이 필연적 이행이 아니라는 말이다.

19) 이 능동적 행위과정이『마두핀디카경』에서는 수 다음에 이어지는 지각(想)과 사유(思)로 
    표현된 것이다. 즉 상과 사는 이미 사려분별이 개입된 것이며, 이 점에서 번뇌 망상에 물든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욕계에 오온으로 존재하게 된 우리는 이미 지난 업의 보로서 고 또는 락의 느낌을 받고 살 수밖에 없지만, 어떤 느낌을 가진다는 것과 그 느낌에 따라 취사선택의 행위를 한다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즉 락을 좋아하여 취하고 고를 싫어하여 버리는 것은 번뇌 망상에 휩쌓여 또 다시 새로운 업을 짓는 능동적 행위이다. 결국 고락의 느낌을 갖게 되는 순간 탐진치의 번뇌에 휩쌓여 자신도 모르게 애취의 업을 짓고 마는가, 아니면 고락을 느끼되 그로 인해 탐진치의 번뇌에 휘둘리지는 않게 되는가의 차이가 일반 범부와 수행자의 차이를 만드는 것이다.

 

어리석고 무지한 범부는 고락사의 느낌을 낸다. 지혜롭고 거룩한 제자도 고락사의 느낌을 낸다. 그럼 어떤 차별이 있는가? ······ 어리석고 무지한 범부는 몸의 촉으로 느낌이 생기고 고통이 더해 목숨까지 빼앗기게 되면, 슬퍼하고 원망하며 부르짖고 통곡하여, 마음에 광란이 일어난다. 이는 두 가지 느낌을 증장시키는 것이니, 身受와 心受가 그것이다. 비유하면 두개의 독화살에 맞은 것과 같다. 밝게 알지 못하기에 락수의 촉으로 인해 락수를 받으면, 탐욕의 사자[탐]의 부림을 받고, 고수의 촉으로 인해 고수를 받으면 성냄의 사자[진]의 부림을 받고, 사수가 생기면 어리석음의 사자[치]의 부림을 받는 것이다. 탐진치에 매어 생노병사 및 슬픔과 번뇌에 매이게 된다. 반면 지혜로운 거룩한 제자는 몸의 촉으로 인해 고수가 생기고 큰 고통이 닥쳐 목숨까지 빼앗기게 되도 슬퍼하고 원망하거나 울부짖고 통곡하며 마음의 광란을 일으키지 않는다. 몸의 느낌인 한 가지 느낌만 생기고 마음의 느낌은 생기지 않는 것이다. 비유하면 하나의 독화살을 맞아도 두 번째의 독화살은 맞지 않는 것과 같다. 락수가 있어도 탐욕에 물들지 않고, 고수에 대해서도 성내지 않고, 사수에 대해서도 어리석음의 사자에 부림을 당하지 않는다.20)

20)『잡아함경』, 470 (『대정장』권2, 119c-120a). 이처럼 불교는 심신과 관련하여 느낌을 
    다섯 가지로 분류한다. 몸의 느낌인 樂受(sukha)와 苦受(dukkha), 마음의 느낌을 喜受
    (somanassa)와 憂受(domanassa), 그리고 고도 락도 아닌 捨受(adukkha-asukha)가 그
    것이다. 느낌에 있어 심수와 신수의 구분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정준영의「대념처경에 
    보이는 수념처의 실천과 이해」(『불교학연구』제7호, 2003, 183쪽 이하)를 참조할 수 
    있다. 그는『대념처경』수념처에 등장하는 sāmisa(육의) 느낌과 nirāmisa(비-육의) 느낌
    은 각각 육체적(kāyikā) 느낌과 정신적(cetasikā) 느낌으로 해석되어야지, 일부 주석서에
    서 논해지듯 세간적인 느낌과 출세간적 느낌으로 해석되어서는 무리가 있다는 것을 논한
    다. 나아가 그는『대념처경』에서 사념처 전체에 후렴구로 등장하는 “내적으로 관하고 
    외적으로 관하고 내적 외적으로 관한다”는 구절의 내·외의 해석에 있어 그 관찰대상은 
    항상 수행자 자신이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따라서 수념처에 관한 한 내·외의 구분
    은 자신의 느낌과 타인의 느낌의 구분이 아니라, 바로 심수와 신수의 구분에 상응한다
    는 것이다. 즉 “정신이 몸 안에 있다”(223쪽)고 보아, 안으로 관찰된 느낌은 마음의 느
    낌이고, 밖으로 관찰된 느낌은 몸의 느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불교적 관점에서 볼 때 
    정신이 정말 몸 안에 있는 것일까? 오히려 몸이 정신 내지 마음 안에 있다고 하는 것이 
    더 옳지 않을까.

 

여기서는 범부든 성인이든 누구나 갖게 되는 느낌을 ‘몸의 느낌(身受)’이라고 칭하고, 그 둘을 차이나게 만드는 탐진치에 휘둘려진 마음을 ‘마음의 느낌(心受)’이라고 칭하고 있다. 이 심수가 곧 앞서

논한 바, 락수를 좋아하고 고수를 싫어하는 애증의 감정, 한마디로 애에 해당한다.

 

   … → 촉 → 수 → 애 → 취 → …

                =身受|=心受

     (감각, sensation)|(감정, feeling)

 

일반 범부는 거의 자동적으로 신수에 따라 심수를 일으킨다. 즉 고락의 느낌에 따라 애증의 감정, 탐진의 마음을 갖게 된다.21) 이는 수에서 애취 또는 상사로의 이행이 우리 일반 범부에게 있어서는 지난 과거의 업(습관)에 의해 거의 무의식적이고 자동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뜻한다.

21) 괴로운 고수에는 진심이 작동하게 되고, 즐거운 락수에는 탐심이 작동하게 된다. 고도 
    락도 아닌 사수에 치심이 작동한다고 하는 것은 일반 범부의 경우 사수는 수행을 거쳐 
    얻어진 평정한 마음의 느낌이 아니라, 언제라도 고나 락으로 치우쳐 곧 진심이나 탐심
    으로 바뀔 수 있는 그런 불안정 상태일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벗어날 수 없는 업보의 순환구조 속에 갇혀있는 것처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수행이란 그렇게 무의식적으로 진행되는 자동연결고리를 끊음으로써 그 순환구조 밖으로 뛰쳐나오려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 수행은 마음 심층의 활동, 신심의 작용이 얽혀있는 느낌에 주목한다.22) 우리가 느낌을 느낌 자체로서 여실히 포착하여 거기 머무르지 못하는 한, 느낌의 힘에 휘말려 자기도 모르게 그 다음 단계인 애와 취, 상과 사로 자동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밀려나가 번뇌 망상의 순환구조 속으로 휘말려들기 때문이다. 수에 주목하는 것은 그 자리에 머물며 번뇌 망상의 순환구조 속으로 말려들어가지 않기 위해서, 탐진치에 물든 새로운 업을 짓지 않기 위해서이다.

22) 바로 이 지점에서 불교적 수행법이 현대의 심리치료나 인지치료와 비교되는 경우가 
    많다. 심리장애를 일으키는 “조건화된 무의식적 경향성” 또는 “역기능적 인지도식이
    나 신념에 기반한 자동적 사고”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무의식, 도식이나 신념 
    등을 스스로 자각해야 하는데, 이것이 불교의 집중(지)수행 및 통(관)수행과 흡사하
    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불교와 현대 심리치료를 연관지어 논한 논문으로는 권석만의
   「위빠사나 명상의 심리치유적 기능」(『불교와 심리』창간호, 서울: 불교와 심리연
    구원, 2006, 11쪽 이하), 최훈동의「지관의 심리치료적 의미고찰」(『불교와 심리』
    창간호, 53쪽 이하), 안양규의「사고의 역기능과 그 해결: 붓다의 가르침과 아론 벡의 
    인지치료를 중심으로」(2007년 불교심리치료학회 창립 학술대회 발표문) 등을 참조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느낌에 머물며 탐진치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느낌에 머물러 아무 지각도 사유도 일어나지 않게 멈추라는 말인가? 번뇌 망상에 물든 지각과 사유로가 아니라면, 수행을 통해 우리는 어디로 나아가게 되는가? 이는 사념처와 선정을 통해 밝혀질 것이다.

 

2. 사념처

사념처는 몸, 느낌, 마음 그리고 법에 주목하여 그 각각을 바로 그런 것으로서 알아차리는 수행법이다. 사념처가 몸에 주목하는 ① 身念處로 시작하는 것은 우리에게 느낌을 일으키는 주된 근원지가 몸이기 때문이다. 몸에 주목함으로써 몸의 다양한 작용과 운동성, 몸의 느낌을 그 자체로 포착하여 거기 머무를 뿐, 거기에다 마음의 작용과 느낌을 혼합하여 신수에서 심수로 자동이행해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신념처는 몸의 호흡, 몸의 동작, 몸의 행동, 몸의 구성요소, 몸의 4대, 몸의 부패과정 등을 대상으로 삼으며, 그 각각에 대한 주의집중(sati, 念/止)과 알아차림(sampajāna, 知/觀)으로 성립한다. 그렇다면 예를 들어 호흡의 경우 무엇에 주의를 집중하고 무엇을 알아차리라는 것인가?

 

비구는 계속 주시하면서 숨을 마시고, 계속 주시하면서 숨을 내쉰다. 혹은 길게 숨을 마시면서 ‘길게 숨을 마신다’라고 그대로 알아차리고, 혹은 길게 숨을 내쉬면서 ‘길게 숨을 내쉰다’라고 그대로 알아차린다. 

23)『대념처경』,「신념처」.

 

이렇게 숨에 주목하며 ‘긴 숨을 마신다’, ‘긴 숨을 내쉰다’ 등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의식에서 숨만 남기고 다른 느낌이나 다른 생각을 지워버린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주의집중의 순간에는 탐진치가 작용하지 못하게 된다. 집중이 흐려지면 다시 번뇌 망상이 우리 의식을 점령하겠지만, 적어도 주의집중의 순간만큼은 탐진치에 물든 우리의 번뇌 망상의 의식흐름이 끊어지는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 의식의 흐름을 끊는가? 사념처 각각에 항상 다음과 같은 동일한 형식의 후렴구가 등장한다.

 

혹은 몸에서 생하는 현상을 주시하여 머물고, 혹은 몸에서 멸하는 현상을 주시하여 머물고, 혹은 몸에서 생하고 멸하는 현상을 주시하며 머문다. 

24)『대념처경』,「신념처」.

 

이처럼 숨에 주목한다는 것은 결국 숨이 생하고 멸하는 것, 그 생멸을 주목하는 것이다. 그런데 불교에서 생멸이란 언제나 찰나생멸이다. 생과 멸에 주목한다는 것은 곧 현재 순간을 그 자체로서 포착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 사념처에서 우리의 의식은 과거 회상의 방식이나 미래 기획의 방식으로 현재를 해석하고 의미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순수하게 현재 순간에 충실한 바라봄이어야 한다.

 

몸의 동작의 생멸 또는 느낌의 생멸 등을 포착하자면, 의식은 현재 순간 그 한 찰나에 머물러 그 찰나를 포착해야 한다. 이는 곧 번뇌 망상의 힘에 의해 이끌려가는 의식의 시간 흐름을 끊는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어떤 단계에서이든 모든 직관은 찰나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25)

25) 의식이 현재에 머무르지 못하고 과거나 미래로 향하게 되는 것은 언제나 우리 의식을 
    사로잡고 있는 추상적 개념인 共相의 힘에 의해서이다. 반면 현재에 주목한다는 것은 
    의식이 추상적인 개념적 사유, 판단이나 추론 행위를 멈추고, 순수하게 주어진 사태인 
    自相을 포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상의 감각과 지각 나아가 수행과정에서의 깨달
    음(定觀)은 모두 현재적인 인식인 現量이지 比量이 아니다. 이처럼 참된 사태의 인식
    은 항상 현재적이고 찰나적이다. 마하시가 강조하는 찰나정도 이런 문맥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찰나에 주목함으로써 탐진치의 작동을 끊어 그 순간 탐진치 지멸의 
    열반 경지를 체험한다고 볼 수 있다.

 

의식이 찰나에 작용한다는 것은 과거의 업의 힘에 무의식적으로 이끌리지 않는다는 것, 즉 욕망추구나 악의 또는 의심 등의 번뇌가 그 순간 가라앉는다는 것, 그러면서도 순간의 깨어있음으로 인해 혼침과 들뜸으로부터도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교 수행론은 이상 다섯 가지 장애(오개)를 가라앉히는 것을 5停心觀이라고 하여 사념처에 선행하는 준비과정이라고 논하지만,『대념처경』에서는 신념처수행이 오정심관과 내용적으로 많이 일치한다.26)

26) 오개는 욕망추구·악의·의심·혼침·들뜸이다. 흔히 사념처의 예비단계로 논해지는 5정심관은 
    부정관, 자비관, 인연관, 계분별관, 수식관이다. 그런데『대념처경』에서 논하는 신념처의 
    대상도 ① 호흡의 출입, ② 몸의 동작, ③ 몸의 행동, ④ 몸의 구성요소의 부정함, ⑤ 몸의 
    사대요소, ⑥ 몸의 부패과정으로서 많은 부분 오정심관과 중복됨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다섯 장애를 가라앉혀 가면서 몸의 관찰을 완성하고 나면 느낌을 관찰할 수 있다. 이것이 ② 受念處이다. 수념처에서는 매 순간 느낌에 주목해서 느낌을 관찰하는 것이다. 고수를 고수로서, 락수를 락수로서 알아차리는 것이며, 또한 느낌의 생과 멸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고수를 고수로 알아차리되 고수의 생과 멸을 그런 것으로서 주시한다는 것은 느낌을 느낌으로 알아차리는 것으로 그치지, 몸의 고수로부터 마음의 분노인 진심에 이끌리거나, 몸의 락수로부터 마음의 애착인 탐심에 이끌리는 일이 없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고수를 고수로서 알아차리는 순간, 그리고 그 생과 멸을 알아차리는 순간, 고수 자체가 나의 관찰대상으로 대상화됨으로써 더 이상 나 자신으로서의 작용력을 갖지 못한다는 것을 뜻한다. 결국 수념처가 의도하는 것은 느낌을 느낌으로 자각할 뿐, 느낌의 고락에 의해 애증의 분별로 이행해가지 않는 것, 새로운 업을 짓지 않는 것이다. 생성이 관찰된 느낌은 곧 그 다음 순간 멸이 관찰되면서 소멸한다. 수념처는 결국 느낌을 관찰대상으로 삼아 자기 자신을 느낌 바깥에 세우는 것, 자신 안에서 느낌의 증폭, 고락에의 치우침을 가라앉혀 궁극적으로 느낌의 평형을 유지해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대상과의 접촉에서 야기되는 순간적인 고락의 느낌이 소멸되고나면, 우리는 마음 자체를 더 깊이 관찰하게 되는데, 이것이 ③ 心念處이다. 시간 흐름 속에 부침하는 고락의 느낌들 보다 더 깊은 심층에 잠재해있는 근본 번뇌인 탐진치도 관찰대상이 되며 다시 그러한 탐진치가 잠재워졌을 때 드러나는 마음의 고요함과 해탈의 마음까지도 관찰대상이 된다. 고락의 느낌과 번뇌 망상을 담고 있는 마음 자체를 그 안에 담긴 느낌이나 분별, 번뇌 망상 등을 잠재운 상태에서 지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느낌이 멎은 상태에서의 마음의 지각을 뜻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몸의 작용과 느낌에 주목하고 다시 그런 느낌을 갖는 마음에 주목하여 순간마다의 생과 멸을 알아차리는 념처는 궁극적으로 일체 제법의 이치에 주목하는 단계인 ④ 法念處로 나아가게 된다. 수념처를 통해 마음의 느낌이 가라앉고 심념처를 통해 마음의 자기 자각이라고 할 지각도 가라앉고 나면, 그때 비로소 일체 제법의 원리가 통찰되는 것이다. 인간 존재 양상인 오온과 육입처의 원리뿐 아니라, 수행을 통해 극복되는 오개와 수행을 통해 얻게 되는 칠각지의 원리도 깨닫게 되고 석가의 궁극적 깨달음에 해당하는 사성제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불교 수행의 궁극 목표인 참된 지혜가 완성된다.

 

3. 선정

선정은 사색선과 사무색정 그리고 상수멸정이라는 9단계의 수행과 그로 인해 얻게 되는 경지를 말한다. 선정이 가능하자면 일단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되 또렷하게 깨어있어야 한다. 마음을 가라앉힘으로써 탐진치의 번뇌도 잠재우고 대상을 좇는 산란함도 없게 하되 몽롱한 혼침에 빠져서도 안된다. 탐진치와 들뜸과 혼침이라는 오개를 극복해야만 초선에 이를 수 있다.

 

그렇다면 탐진치와 산란한 마음을 잠재우고 깨어있는 의식으로써 선정이 이루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불교의 수행이 내면의 느낌에 주목하고 느낌을 바로 그런 것으로서 알아챔으로써, 느낌에서 애와 취, 상과 사로의 자동이행을 막고자 하는 것이라면, 이제 선정에서 깨어있는 의식으로 포착해야 할 것은 바로 자신 안에 일어나는 느낌이다. 느낌을 바로 그런 것으로서 알아본다는 것은 곧 그 느낌을 다른 느낌들과 구분하여 어떤 느낌이라고 개념적으로 포착할 수 있다는 말이다. 느낌의 명칭과 더불어 그 느낌의 특징들을 여실히 포착하기 위해 느낌에 대한 거친 사유와 세밀한 사유, 尋(vitakka)과 伺(vicāra)가 함께 해야 한다. 이렇게 깨어있기 위해 아직 심사가 함께하는 상태가 바로 ① 초선이다.27)

27) 외적 대상을 좇아 무질서하게 움직이는 산란한 의식이기를 그만둘 경우 우리는 쉽게
    의식이 잠들어버리는 혼미함에 빠지게 된다. 외부 자극이 없어도 의식이 깨어있을 수 
    있기 위해서는 의식 스스로 개념을 따라 움직이는 사유작용이 있어야 한다. 초선에 
    이르기까지 개념적 사유인 심사를 유지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제2선에
    서부터 심사가 멎어도 의식이 깨어있을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심층 의식이 개념적 
    사유보다 훨씬 더 다양한 방식으로 활동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본다. 이점
    에서 논자는 제2선 이후의 주의집중인 念은 우리의 일상적인 개념적 사유방식, 즉 
    심사를 넘어선 의식상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의식이 뭔가를 알아차린다는 
    것, 더구나 법념처에서 일체 제법의 원리를 개념적으로 포착한다는 것, 석가 설법의 
    내용이 개념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 이것은 결국 념이나 관(위빠사나)이 개념적
    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본다. 초선에서 정지되어야 할 심사(망분
    별)와 법념처의 진리인식에서의 사유(바른 사유)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5장에서 
    다시 언급할 것이다.

 

그러나 선정이 깊어지면 개념적 사유작용인 심사가 멎어도 의식은 느낌만으로도 깨어있게 된다. 느낌이 느낌 자체로서 고찰됨에 따라 신수에 따라 덧붙여서 일어나던 마음의 느낌은 점차 정리되어 마음의 가볍고 편안한 느낌인 喜(pīti)만 남겨지게 된다. 이것이 ② 제2선이다. 그러나 의식의 집중이 계속 이어지면 마음의 느낌인 희도 사라지고, 그와 더불어 몸의 느낌도 그 증폭이 가라앉고 안정되면서 평안한 몸의 느낌인 락(sukha)이 남겨지는데, 이것이 ③ 제3선이다.

 

그렇지만 사색선의 궁극목적은 락의 느낌조차도 넘어서서 모든 느낌의 차별성이 소멸된 상태, 완전한 평정의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고락에 치우침이 없는 완전한 평정심(upekhā)을 얻어 모든 느낌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마음상태, 아무 미동없이 깨어있는 심일경성(ekaggatā)의 마음 상태가 바로 ④ 제4선이다.28) 느낌의 고락에 따라 탐진치가 함께 작동해서 욕망의 업을 짓게 되는 것이라면, 사선을 통해 심수와 신수가 모두 평정해지면, 더 이상 탐진치의 욕망에 이끌리는 업을 짓지 않게 된다. 따라서 그 정신은 욕계를 넘어서 색계에 머문다고 말하게 된다.

28) 여기서 각 선의 단계에서 부각된다고 말한 다섯 가지 특징이 바로 ‘禪의 5支’이다. 그러나 
    이 오지는 선의 각 단계마다에서 비로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래 초선에서부터 함께 
    하는 것이다. 다만 초선에서 2선, 3선으로 나아감에 따라 그 중 가장 표면적인 것이 하나
    씩 둘씩 제거됨에 따라 그 다음 것이 표면으로 드러나게 되며, 바로 그렇게 드러난 것이 
    다시 그 다음 단계에서 제거되는 것일 뿐이다.

 

사색선을 통해 심일경성을 이룬 마음이 선정을 통해 나아가는 다음 단계는 무엇인가? 심일경성이란 오로지 마음만 존재하지 그 이외에 다른 것이 없다는 것이다. 외적 사물이든 내적 느낌이든 모든 마음의 대상이 지워진 상태이다. 아무것도 남겨진 것이 없이 텅 비어있는 空만 무한히 펼쳐져 있다. 마음이 여기 머문 단계가 ⑤ 空無邊處이다. 그런데 그 공이 곧 선정에 든 마음 자체이다. 마음 자체가 경계 없이 무한히 펼쳐진 것이다. 이것을 자각하는 단계가 ⑥ 心無邊處이다. 공이 심이고, 심이 곧 공인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무경계의 마음 안에는 마음이 머물러 기댈 수 있는 것, 마음이 거기 의거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이 경지의 마음이 ⑦ 無所有處이다. 여기까지는 일체의 고락의 느낌이 소멸된 마음이 마음 자체에 대해 가지는 자각, 마음의 지각(想)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공한 마음의 자기 자각은 그 자체가 그 무엇에 의해서도 경계가 지어지지 않

는 무경계의 것이며, 그처럼 무경계이므로 실제로는 그 있음과 없음이 구분되지 않는다. 따라서 마음은 이제 지각이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그런 무분별의 경지인 ⑧ 非想非非想處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사무색정의 과정은 결국 느낌이 멸한 상태에서 다시 그런느낌을 담는 마음을 주시하고 바라보아 마음의 순수한 지각에 이르렀다가 다시 그 지각을 넘어서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사선이 마음속의 느낌에 주목함으로써 그 느낌의 소멸로 나아가는 것이라면, 사무색성은 느낌이 그 안에서 부침하는 마음에 주목함으로써 그 마음을 공으로 무경계로 지각하다가 결국은 그 지각 자체를 넘어서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느낌이 평정되는 사선과 마음의 지각의 분별을 넘어서는 사무색정을 거쳐 마음은 느낌과 지각, 수와 상이 함께 멸하는 ⑨ 想受滅定에 들게 된다. 상수멸정은 그야말로 느낌과 지각이 다 멈춘 상태이므로, 외적으로 고찰하여서는 수행자가 의식을 갖고 있는지 아닌지를 판가름하기 힘들게 된다.29) 그러나 그 상태가 완전 무의식의 수면상태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상수멸정을 거쳐 그 정에서 깨어나면, 그 상태에서 보았던 진리를 다시 언어화하여 서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느낌이나 지각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일체제법의 원리와 진리를 깨닫는 경지가 바로 이 마지막 선정 단계라고 볼 수 있다.30)

29) 상수멸정은 心口意 三行이 모두 멎는 단계로 기술된다. 구행은 심사가 멎는 제2선에서 
    멎고, 신행은 제4선에서 멎고, 의행은 지각과 느낌이 멸하는 상수멸정에서 멎게 되어, 
    결국 상수멸정의 단계에서 3行이 다 멈춘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신행이 
    과연 무엇인가이다. 신행을 들숨과 날숨의 호흡이 멎는 것으로 본다면, 일체 행이 다 
    멎은 상수멸정은 결국 죽은 상태와 별 구분이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상수멸정을 
    이런 상태로 간주하여 무여의열반과 유사한 것으로 보면서, 다만 아직 생명력과 열이 
    남아있으므로 완전히 죽은 것과는 다르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런 점에서 정준영은
   「상수멸정의 성취에 관한 일고찰」에서 “상수멸정 상태는 여러 경전에서 의식의 소멸
    상태란 의미로 반열반 혹은 무여열반과 매우 유사하게 설명되고 있다”고 말한다.(『불
    교학연구』제9호, 2004, 251쪽). 황순일은 그의 논문「멸진정과 두 가지 열반이론」
    에서 붓다고샤는 “이 선정을 열반과 거의 동일시”한 데 반해, 담마빨라는 “이 선정을 
    무여열반과 유사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하여 둘의 차이를 설명한다(『불교학연구』
    제11호, 2005, 346-347쪽). 동일시하지 않고 단지 유사할 뿐이라고 강조하는 것은 
    멸진정에 있어 “멈추는 것은 개념과 느낌이라는 심리적인 상태 즉 정신현상이지 의식, 
    마음 또는 정신 그 자체는 아니”(350쪽)라는 것 때문일 것이다.
30) 정준영도「상수멸정의 성취에 관한 일 고찰」에서 상수멸정을 단순히 의식의 소멸상태
    가 아니라 진리 통찰의 궁극경지로 간주하고 있다. 그는 “부처님은 기존에 존재하던 여
    덟가지 선정에 상수멸정 하나를 더 체험함으로써 깨달음을 성취한 것이다. 즉 사마타만
    으로 얻어지는 선정의 진행과정에 만족하지 않고 이 선정[상수멸정]의 진행과정에서 
    현상의 생멸을 관찰하는 위빠사나를 통해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한다(243쪽). 물론 그렇게 통찰된 진리의 서술은 상수멸정 상태에서가 아니라, 출정하
    여서 비로소 가능할 것이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상수멸정 상태에서 무분별 지혜
    를 터득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근거에서 본고 또한 상수멸정을 사념처관의 마지막 
    단계인 법념처관과 연결시켜 보았다.

 

4. 사념처와 선정의 대응관계

이상의 사념처와 선정을 내용적으로 비교해보면, 그 둘은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라 상호 밀접한 연관관계를 갖고 있다. 이제 그 둘의 연관성을 부각시키면서 이상 논의를 다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오정심관은 원래 사념처를 닦기 위한 선행단계로 논해지지만, 많은 부분이 신념처에서 반복되고 있다. 오정심관을 통해 오개가 극복되는 것인데, 오개의 극복은 초선에 이르기 위한 준비단계이다. 따라서 신념처와 오정심관을 유사한 단계로 보며, 신념처에서 수념처로 나아가고, 오정심관에 이어 사선으로 나아간다고 연결시켜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연결은 수념처와 사선이 내용상 상통하는 데서 다시 정당화된다. 수념처가 느낌에 주목하고 느낌을 알아채서 그 생멸을 관하는 것이라면, 초선에서 제4선에 이르는 사선 또한 마음 안에 떠오르는 느낌을 가라앉히되 느낌에 덧붙여지는 심사를 멈추고 다시 마음의 느낌을 멈추고 이어 몸의 느낌까지도 멈춰 느낌이 멸한 심일성경에 이르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느낌에 주목하고 관찰하는 수념처는 결국 느낌을 가라앉혀 평정에 이르는 사선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수념처에 이어 심념처는 마음에 주목하여 마음의 근본번뇌인 탐진치뿐 아니라 그것이 가라앉은 해탈의 마음까지도 관찰 대상으로 삼는다. 마음 안의 느낌이 소멸된 후, 그 뒤에 남겨지는 번뇌에 물든 마음과 다시 그 번뇌마저도 벗어 텅 빈 마음을 주목하고 관찰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는 사선에 이어 사무색정에서 느낌을 벗어 텅 빈 마음을 무경계의 공으로, 마음 자체로, 무소유처로 자각하게 되는 과정과 다를 바가 없다. 느낌의 소멸 이후 마음 자체를 지각하고 다시 그 지각을 넘어서는 비상비비상처의 경지는 심념처의 궁극경지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석가는 출가 이후 곧 선정수행을 통해 무소유처와 비상비비상처의 경지에 이르렀지만, 그에 만족하지 못하고 나름의 수행방식을 통해 궁극적 깨달음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석가를 궁극 깨달음으로 인도한 그 수행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그 자리에 있는 것이 바로 사무색정 다음의 상수멸정이며, 심념처 다음의 법념처이다. 사념처에서 석가가 깨달은 고집멸도 사성제와 바른 수행의 길 팔정도가 법념처에서 서술되고 있는 것은 그 깨달음의 단계가 느낌에 주목 관찰하거나 마음 자체에 주목 관찰하는 앞의 단계와 구분되는 그 다음 단계, 즉 진리와 법에 주목 관찰하는 법념처의 단계이기 때문이다. 결국 진리의 직관, 지혜에의 통찰은 느낌(수)을 비우는 사선과 지각(상)을 비우는 사무색정이 완성되고 난 후 가능한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상과 수가 멸한 상수멸정 상태에서 도달 가능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법념처는 상수멸정과 연결된다. 이상 사념처와 선정의 연결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본다.

 

사념처:    신념처         →          수념처    →     심념처     →       법념처

                |                            |                 |                    |

선정:      5정심관                     사선            사무색정             상수멸정

         (5개의 극복)                 수 비우기         상 비우기            지혜

 

V. 대승에서 지와 관: 근본무분별지와 후득지

 

법념처를 상수멸정과 연결시키면, 다음과 같은 의문이 발생한다. 상수멸정은 초선 이후 尋伺도 멎고 4선4정을 거쳐 想受까지도 멎은 상태인데, 어떻게 고집멸도 등 진리를 개념적으로 포착하는 법념처와 상응할 수 있는가? 하나는 無念無想의 무분별경지이고, 다른 하나는 개념적 사유와 분별의 의식상태가 아닌가? 둘을 하나로 보는 것은 자기모순적이지 않은가? 마음을 지극하게 다 비워나가는 선정의 마지막 단계인 상수멸정이 마음의 주의집중을 극대화하여 진리를 분별하는 법념처와 일치한다는 것은 모순 아닌가?

 

현상세계를 형성하는 연기의 원리는 연기의 순환고리 밖으로 나아가야 비로소 여실하게 볼 수 있다. 꿈에서 깨어나야 비로소 꿈의 사실과 꿈의 원리를 이해할 수 있듯이, 물고기가 물 밖으로 나가봐야 비로소 물의 현전과 그 의미를 알 수 있듯이, 현상세계의 이치를 제대로 분별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일단 분별된 현상 너머로, 무분별 경지로 나아가야 한다. 색을 보기 위해서는 눈이 무색이어야 하고, 맛을 보기 위해서는 혀가 무미이어야 하듯이, 세상이치를 여실하게 분별하기 위해서는 마음 그 자체가 모든 분별 너머의 무분별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상수멸정은 모든 개념적 분별과 주객의 대립을 넘어선 공의 자각상태이며, 따라서 動과 靜, 寤와 寐, 生과 死가 하나인 무분별 경지이다. 그래서 상수멸정에 든 자는 밖에서 보면 잠든 자 같기도 하고 죽은 자 같기도 하여, 우리는 그 상태를 잠이나 죽음과 유사한 것으로 간주하지만, 그러나 그 경지는 바로 인간의 사려분별을 넘어선 절대의 경지, 부처의 깨달음의 경지이다. 탐진치에 물든 모든 망분별이 멎은 이 절대의 경지에서 비로소 현상세계의 이치가 바로 그런 것으로서 여실하게 분별되는 것이다.31)  『대승기신론』은 이처럼 망분별을 넘어 무분별로 나아가는 수행을 止로, 그 기반 위에서 다시 세계의 이치를 분별하는 마음작용을 觀으로 논한다.

31) 이처럼 우리는 무분별지에 이르기까지 제거되어야 하는 망분별과 무분별 경지에서 
    비로소 얻어지는 참된 분별을 구분해야 한다. 상수멸정에서 제거되는 분별은 탐진치
    에 물든 망분별, 우리의 일상적인 개념적 사유속의 망분별인데 반해, 법념처에서 행
    해지는 분별은 현상세계의 진상을 드러내는 바른 분별인 것이다. 이 점에서 일상적 
    개념적 사유인 심과 사가 초선 이후에 정지됨에도 불구하고 의식의 주의집중은 남아 
    있다가 결국 상수멸정과 법념처에 이르러 다시 개념적 사유로 되살아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즉 초선에서 정지되어야 할 심과 사는 탐진치에 
    물든 망분별적 사유라면, 사선(수념처)과 사정(심념처)을 거쳐 느낌과 지각이 가라
    앉은 상태, 즉 상수멸정과 법념처에서 일어나는 사유는 더 이상 망분별적 사유가 
    아닌 바른 사유이다. 결국 불교의 수행은 탐진치에 물들지 않은 바른 사유, 바른 
    지혜의 추구라고 볼 수 있다.

 

"어떻게 지관문을 수행하는가? 지라는 것은 일체 경계상을 그치게 하는 것으로 사마타관을 수순하는 뜻이 있다. 관이라는 것은 인연생멸상을 분별하는 것으로 비발사나관을 수순하는 뜻이 있다."32)
32)『대승기신론』(『한국불교전서』1-780), “云何修行止觀門. 所言止者, 謂止一切境界相, 
    隨順奢摩他觀義故. 所言觀者, 謂分別因緣生滅相, 隨順毗鉢舍那觀義故”(은정희 역주,
   『원효의 대승기신론소·별기』, 서울: 일지사, 1992, 366쪽). 여기에서는 지와 관이 본고
    가 제안한 바와 같이 수행 형식상의 개념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실질적 규정성을 담은 
    내용적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더구나 여기서는 지와 관이 극히 좁은 협의로 규정되고 
    있으므로, 다른 경전에 등장하는 지와 관의 의미를 다 포괄할 수가 없다는 문제가 있다. 
    나아가 이 문장 자체에서도 지를 관(비발사나관)과 구분하면서도 ‘사마타관’이라고 하고 
    있듯이, 개념이 혼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무분별에 나아가는 수행이 지(사마타관)이고, 인연생멸상으로 나아가는 수행이 관(위빠사나관)이다. 원효는 지를 진여문의 무분별지에 이르는 수행으로, 관을 생멸문의 분별 내지 후득지에 이르는

수행으로 설명한다.

 

‘모든 경계상을 그치게 한다’는 것은 앞서 [망]분별함에 의해 모든 바깥 경계를 짓다가 이제는 깨달음의 지혜(覺慧)로써 바깥 경계의 상을 깨뜨리는 것이니, 경계상이 그치면 분별할 바가 없기 때문에 止라고 하는 것이다. 이어 ‘생멸상을 분별한다’는 것은 생멸문에 의해서 法相을 관찰하기 때문에 분별한다고 하는 것이다. ······ 진여문에 의해 모든 경계상을 그치게 하며, 분별할 바가 없으면 곧 무분별지를 이루게 된다. 생멸문에 의하여 모든 상을 분별하고 그 이치를 관찰하면 곧 후득지를 이루게 된다.'33)

33)『대승기신론소별기』(『한국불교전서』1-781), “言謂止一切境界相者, 先由分別作諸
    外塵. 今以覺慧破外塵相, 塵相旣止, 無所分別. 故名爲止也. 次言分別生滅相者, 依生滅
    門, 觀察法相, 故言分別. ······ 依眞如門, 止諸境相, 故無所分別, 卽成無分別智. 依生滅
    門, 分別諸相, 觀諸理趣, 卽成後得智也.”

 

이와 같이『대승기신론』에서는 지와 관의 관계가 근본 무분별지와 분별 후득지의 관계로 간주된다. 무분별지는 현상세계의 분별상을 넘어서서 무분별 경지에 드는 것이라면, 후득지는 그런 공성으로부터 이 현상세계의 분별상이 어떻게 성립하게 되는가에 대한 분별적 깨달음이다. 현상세계 원리에 대한 후득지는 말 그대로 절대 무분별의 경지인 무분별지의 기반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마음이 우주와 더불어 완전한 공에 이르러 그것이 하나임을 자각하는 그런 무분별의 경지에 들어서야만 비로소 그 빈 공의 바탕 위에서 현상세계가우리의 망분별을 따라 어떻게 그려지는지가 확연하게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무분별적 공의 깨달음인 ‘근본 무분별지’에 입각해서만 현상세계의 구성 원리에 대한 ‘後得智’가 가능하며, 일체 공성의 자각인 ‘空觀’에 입각해서만 비로소 가의 현상세계의 원리를 깨닫는 ‘假觀’이 가능한 것이다.34)

34) 그렇다면 이런 후득지 내지 가관은 왜 다시 개념적일 수밖에 없는가? 이는 假의 현상세계 
    자체가 바로 개념을 따라, 명언종자를 따라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현 상세
    계 형성원리는 개념적으로 분별을 통해 밝혀지고 알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 서 불
    교는 일체 망분별을 버리라고 강조하지만, 이 현상세계의 원리에 대한 석가의 깨달 음이 
    지극한 분별, 바른 분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불교는 현상세계 분별을 넘어 무분별의 경지로 나아가며, 그 무분별지의 기반 위에서 다시 현상세계의 생성원리를 통찰하는 분별적 후득지로 되돌아온다. 이렇게 해서 나아간 것이 다시 되돌아와 그 둘은 결국 둘이 아니게 된다. 이것이 진여문과 생멸문이 둘이아닌 ‘不二法門’이며, 공관과 가관이 둘이 아닌 ‘中道第一義觀’이다. 이런 의미에서 상수멸정은 무분별지의 경지를, 법념처는 분별적 후득지의 경지를 말해주고 있지만, 결국은 이 둘이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닌 것이다.

 

무분별지 = 공관 = 진여문 : 상수멸정

후득지    = 가관 = 생멸문 : 법념처

일체지 중도제일의관 불이법문 : 상수멸정 = 법념처

 

VI. 마치는 말

 

불교는 유한하고 상대적인 인간의 관점에서 우주와 인생에 대해 논리적으로 사유하고 개념적으로 분별해보는 그런 일상적 사유체계가 아니다.

 

유한하고 상대적인 일반 범부의 의식이 아직 갖지 못한 절대의 관점, 우주의 실상과 생명의 비밀을 그 자체로 여실하게 꿰뚫어 아는 그런 절대적 통찰의 관점, 그 관점에 도달하여 깨달은 자인 붓다가 전해주는 깨달음의 체계이며, 그러한 관점과 그러한 깨달음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수행의 체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는 언제나 인생과 우주 전반에 대한 이론적 교설뿐 아니라 그런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실천적 수행을 중시한다. 스스로 수행을 통해 절대의 경지에 이르러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니라면, 팔만대장경의 교설이 다 죽은 문자이고 죽은 개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문자와 개념에 매여 왈가왈부하는 것은 모두 망분별이고 집착일 따름이니, 敎보다는 禪(수행)이 더 강조되기도 하는 것이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불교 수행론에 항상 등장하는 지와 관, 사마디와 위빠사나, 선정과 사념처가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밝혀보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불교 수행론에 관한 최근의 논의들을 살펴본 후, 그 논의과정에서 밝혀진 몇몇 통찰들에 착안해서, 선정과 사념처를 연결시켜 보았다.

 

물론 여기서 시도된 연결은 단지 하나의 큰 지도만을 그려본 것이며,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더 많은 논의들이 필요할 것이다. 더 많은 논의는 다음 과제로 남겨둔 채, 불교 수행 전반을 내용적으로 하나의 완결된 체계로 이해하기 위한 일종의 작업가설을 제안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아직 절대의 관점에 이르지 못한 일반 범부로서 망분별의 위험을 무릅쓰고 바른 사유로 나아가고자 분별을 시도해본 것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