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당서역기 제11권
현장 한역
변기 찬록
이미령 번역
11. 승가라국과 인도 경내[23개국]
1) 승가라국(僧伽羅國)[비록 인도에 있는 국가는 아니지만 길을 가다 보면 따라 나온다] 승가라국1)의 둘레는 7천여 리에 달하며 나라의 큰 도성2)의 둘레는 40여 리이다. 토지는 비옥하고 기후는 무덥다. 농사는 때맞추어 파종하고 꽃과 과일이 모두 번성하다. 거주하는 사람들은 번창하며 사람들의 가산(家産)은 풍료롭다. 비천한 생김새에 피부색은 검고 성품은 거칠지만 학문을 좋아하고덕을 숭상하며 선(善)을 받들고 복을 짓는다.
1) 범어로는 si hala이며 집사자국(執師子國)·사자국(師子國)으로 한역한다. 오늘날 세일론(Ceylon)이다. 세일론의
고대사는 4∼5세기의 『도사(島史)』, 『대사(大史)』 등에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2) 섬 북부 구릉에 있는 Anuradhapura이다. 성 안에는 부다가야에서 가지고 온 보리수와 Dantapura(佛牙城)에서
옮겨 온 부처님의 치아를 모신 정사가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나라는 본래 보저(寶渚)4)라 불렸다. 예로부터 진귀한 보배들이 많이 나고 귀신들이 살고 있던 땅이었다. 그 후 남인도에 살던 어떤 국왕이 이웃 나라로 자기의 딸을 시집보냈다. 길일을 택하여 딸을 보냈는데, 도중에 사자를 만나자 호위하던 시종들은 모두 공주를 길바닥에 버려둔 채 달아나버렸다. 가마 속에 있던 공주가 목숨 잃을 각오를 하고 있을 때 사자왕이 공주를 짊어지고 달아나버렸다. 그는 깊은 산으로 들어가 공주와 함께 깊은 계곡에 살면서 사슴을 잡고 과일을 따서 때맞추어 공주에게 주었다. 세월이 지나 마침내 아들과 딸을 낳았는데, 생김새는 사람과 같지만 동물의 성품을 지녔다. 아들은 무럭무럭 자라났으며 힘은 맹수와도 같아졌다. 어느새 약관의 나이에 이르자 사람의 지혜도 갖추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물었다.
"나는 누구입니까? 아버지는 야수이고 어머니는 사람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서로 같은 부류가 아닌데 어떻게 결혼하시게 되었습니까?"
그러자 어머니는 과거에 일어난 이야기를 아들에게 들려주었다.
아들이 말하였다.
"사람과 축생의 길이 다르니 어서 빨리 도망치는 것이 좋겠습니다."
어머니가 말하였다.
"나는 앞서 도망치려고 하였지만 혼자 살아갈 수가 없었다."
마침내 아들은 며칠 뒤 사자인 아버지를 쫓아 산을 오르고 산봉우리를 넘어 노닐고 있는 곳을 관찰한 뒤에 마침내 도망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아버지가 외출한 틈을 타서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어깨에 태우고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내려왔다. 어머니가 말하였다.
"모두들 각자 신중하게 비밀을 지킬 것이며 어떻게 된 일인지를 남에게 말하지 말아라. 혹시 사람들이 알게 되면 우리를 비천하게 여길 것이다."
그리고 나서 아버지의 본국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그 나라는 이미 자기 종족의 것도 아니었고 종사(宗祀)도 끊어지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에게 가서 묵을 곳을 청하자 사람들이 물었다.
"그대들은 어느 나라 사람들입니까?"
"나는 본래 이 나라 사람인데 이역 땅을 헤매고 다닌 끝에 자식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모두 그들을 가엾게 여기며 생필품들을 나누어 주었다.
4) 범어로는 ratnadv pa이며 보주(寶洲)·보소(寶所)라고도 번역한다. 사람들이 염부제섬으로부터 바다를
건너서 이 섬으로 호마·쌀·콩·후추 등의 물건을 구하러 왔다고 한다. 그런데 경전에 나오는 보주·보소는
전설적인 측면이 많으며 지리적으로 세일론이라는 확증은 없다. 9세기 아라비아인은 이 섬을 보물섬이라고
부르고 있었다고 한다.
한편 사자왕이 돌아와 보니 아무도 없었다. 그는 아들과 딸을 몹시 사랑하였으므로 이내 분노가 폭발하여 산골을 나와서 마을로 내려왔다. 사자왕은 포효하면서 닥치는 대로 난폭하게 사람들을 해치고 가축들을 잔인하게 죽였다. 마을 사람들은 무심코 집을 나섰다가 이내 붙잡혀 목숨을 잃었다. 그들은 북을 치고 고동을 불면서 활을 짊어지고 창을 들고서 무리지어 다녀야만 해를 면할 수 있었다. 그 나라의 왕은 자신의 인덕(仁德)이 부족함을 근심하면서 사냥꾼을 보내 붙잡아오기로 하였다. 그는 몸소 네 종류의 병사들을 이끌고 수많은 병력을 풀어 숲이나 덤불을 뒤지고 산과 계곡을 이 잡듯 수색하였다. 하지만 사자가 포효하자 사람과 짐승들은 주춤거리며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였고, 결국 사자를 붙잡을 수 없게 되자 마침내 왕은 영을 내려 사람을 불러모았다.
"사자를 잡아서 나라의 우환을 없애는 자에게는 후한 상을 내려 주고 널리 그 무공을 표창할 것이다."
사자의 아들이 왕의 포고령을 듣고서 어머니에게 말하였다.
"굶주림과 추위가 심하니 제가 나가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만일 사자를 잡는다면 이로써 우리도 잘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어머니가 말하였다.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그가 비록 짐승이라 할지라도 너의 아버지이다. 어찌 가난하다고 하여 아버지를 살해할 수 있겠느냐?"
아들이 말하였다.
"인간과 짐승은 다른 부류인데 어찌 예의를 따질 것이 있겠습니까? 이미 거스르고 도망쳐 나왔는데, 이 마음에 무얼 더 바라겠습니까?"
그리고 나서 곧 작은 칼을 소매 속에 감추고서 사자를 잡을 사람을 모집하는 곳에 나아갔다. 이 때 수천 명의 군중과 수만 명의 말을 탄 병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지만 사자가 숲 속에 웅크리고 있었으므로 아무도 사자에 감히 다가가지 못하였다. 그 때 사자의 아들이 앞으로 나아가자 아버지인 사자는 이내 순해지고 무릎을 꿇었다. 사자가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으로 인하여 분노를 잊고 유순해졌을 때, 그는 칼을 꺼내어 사자의 배를 찔렀다. 하지만 사자는 여전히 자식을 향한 사랑의 마음에 분노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결국 사자는 배가 찢겨 고통을 머금고 죽고 말았다.
왕이 물었다.
"이 사람은 대체 누구인데 이처럼 기이한 재주를 가졌는가?"
그리고 나서 그에게 온갖 재물로써 회유하고 또 왕의 위엄으로 윽박질러 마침내 일의 자초지종을 모두 알게 되었다. 일의 전말을 듣고 난 왕이 말하였다.
"이것은 반역이다. 아버지인데도 해쳤거늘 하물며 부모 자식간이 아니라면 오죽하겠느냐? 짐승은 길들이기 어렵고 사나운 마음은 쉽게 흔들린다. 백성의 위험을 없애준 공은 참으로 크지만 아비의 목숨을 끊은 그 마음은 반역이다. 그러니 약속대로 후한 상을 내려 그의 공에 보답하겠지만 먼 곳으로 쫓아보내어 그 반역을 벌하겠다. 그러면 나라의 법이 어그러지지 않을 것이며 왕의 말도 거짓이 없는 셈이다."
이에 두 척의 큰 배를 마련하여 많은 식량을 싣게 하였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나라에 남게 하여 상을 베풀어주고, 한편 그 아들과 딸은 각각 한 척의 배에 몸을 싣고 파도에 이리저리 표류하게 하였다. 아들의 배가 바다를 떠다니다가 이 보저(寶渚)에 닿게 되었다. 그런데 이 땅을 보니 진귀한 보배가 풍부하였으므로 이곳에 눌러 살았다. 그 뒤 상인이 보배를 캐러 이 섬 안으로 오자 상인의 우두머리를 살해하고 그의 아들딸은 살려두었다. 그리하여 자손이 매우 번창해지자 마침내 군왕의 자리에 올랐으며 위아래의 서열이 생기게 되었다. 도읍을 세우고 그에 의거하여 국토로 삼게 되었다. 그 선조가 사자를 잡았기[執師子] 때문에 그 공을 들어 국호로 삼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딸이 탄 배는 이리저리 표류하다가 파라사(波剌斯)의 서쪽에 닿게 되었다. 딸은 신귀(神鬼)들의 유혹을 받아 많은 딸을 낳았다. 지금의 서대녀국(西大女國)이 바로 이 나라이다.
집사자국 사람들의 생김새는 검고 체격이 작으며, 네모진 턱과 넓은 이마를 가졌다. 그들의 성품은 난폭하고 거칠며 짐독(鴆毒)5)도 아무렇지 않게 마시는데, 이 또한 맹수들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그 나라 사람들은 대부분이 용맹하고 강건하다. 이것이 이 나라의 건국 설화이다.
5) 짐(鴆)은 중국 남방에 나는 올빼미 비슷한 독조(毒鳥)의 이름으로서 짐독(鴆毒)이란 이 새의 깃털을
술에 담가서 우려낸 독을 말한다. 이 술을 마시게 하여 죽이는 형벌을 짐독이라고도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기술하는 바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옛날 이 보주(寶洲)의 대철성(大鐵城)에는 5백 명의 나찰녀(羅刹女)6)가 살고 있었다. 그들은 성의 누각 위에 두 개의 높은 깃대를 세워두어서 길흉을 점치고 있었다. 길조를 알릴 때면 길상스러운 깃대가 움직였고 흉사가 있을 때면 흉사를 상징하는 깃대가 움직였다. 나찰녀들은 언제나 상인들이 이 보주에 도착할 때를 노려서 이내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하여 향과 꽃을 들고 음악을 연주하며 맞이해 그들을 위로하면서 이 철성 안으로 유혹하여 들인다. 그들은 흥겨운 환영회가 끝나면 이내 상인들을 쇠로 만든 감옥에 가둔 뒤에 이들을 차례로 잡아먹었다.
6) 사람 고기를 즐겨 먹는 여자 귀신으로 섬 가운데에서 산다고 한다.
당시 섬부주에 대단한 세력을 지닌 상인의 우두머리 승가(僧伽)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의 아들은 이름이 승가라(僧伽羅)였다. 아버지가 연로해지자 아들이 아버지를 대신하여 가업을 잇고 있었다. 그는 5백 명의 상인들과 함께 바다로 나아가서 보물을 캤는데 심한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우연히 이 보주에 당도하게 되었다. 이 때 나찰녀들은 길조를 알리는 깃대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곧바로 향과 꽃을 가지고 음악을 연주하면서 그들을 맞아 환영하고 위로하면서 철성 안으로 유인하여 들였다. 상인의 우두머리는 이에 나찰녀의 여왕과 연회를 즐겼고, 다른 상인들도 각자 짝을 만나서 즐겼다. 이렇게 하여 세월이 지나자 그들은 모두 자식을 하나씩 낳았다. 나찰녀들은 남편들에 대한 정이 소원해지자 그들을 쇠로 만든 감옥 속에 가두려고 상인들의 동정을 살피기 시작하였다.
그 즈음 승가라는 잠을 자다가 악몽을 꾸고서 상서로운 일이 아님을 알았다. 그리하여 돌아갈 길을 몰래 찾기 시작하다가 쇠로 만든 감옥에 이르게 되었으며 그 속에서 흘러나오는 비통한 울음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높은 나무 위에 올라가 물었다.
"누가 그대들을 묶어놓았기에 이토록 원망에 가득 차 있습니까?"
그들이 말하였다.
"당신은 모르십니까? 성 안에 살고 있는 여자들은 모두가 나찰입니다. 옛날 우리들을 유혹하여 성 안으로 들인 뒤에 즐겼지만 당신들이 여기에 오자 우리들을 감옥에 가두고서 차례로 잡아먹고 있습니다. 이제는 반 정도 밖에는 남지 않았습니다. 당신들도 오래지 않아서 이런 재난을 당할 것입니다."
승가라가 말하였다.
"어떤 계책을 세워야 이런 재난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말하였다.
"나는 바닷가에 천마(天馬)가 한 마리 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말에게 지성으로 기도하고 청하면 반드시 구해줄 것입니다."
승가라가 이 말을 듣고 은밀히 상인들에게 일러주었고 그들은 함께 바닷가로 가서 지극한 정성으로 구해줄 것을 기도하였다.
이 때 천마가 그들에게 와서 물었다.
"그대들은 각자 내 갈기를 붙잡아야 하는데 절대로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됩니다. 나는 당신들을 바다를 건너게 해서 난을 피하게 해주겠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섬부주에 도착하면 고향에 편하게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상인들은 천마의 지시를 따라서 오직 한마음으로 그 갈기를 붙잡았다. 천마는 이내 구름 위로 날아올라 바닷가를 건너뛰었다. 나찰녀들은 갑작스레 자신들의 남편이 달아났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서로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어떻게 달아났는지 의아해 하면서 각자 어린아이를 데리고 허공을 타고 올라갔다. 그들은 상인들이 바닷가를 벗어나려 한다는 것을 알고서 마침내 서로들 불러모아 날아서 멀리까지 쫓아갔다. 그리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상인들을 만나자 기쁨과 슬픔에 복받쳐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얼굴을 가리고 울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그저 고맙게도 좋은 사람을 만나서 집안이 화목하였고 오래도록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처자식을 내버리고 홀로 떠나신다니 이 마음에 근심이 가득 찹니다. 누가 이것을 견뎌내겠습니까? 부디 생각을 고쳐 먹고 함께 성으로 돌아가십시다."
그러나 상인들은 마음을 고쳐먹거나 생각을 돌이키려 하지 않았다. 나찰녀들은 아무리 설득하여도 통하지 않자 마침내 아양을 떨고 교태를 부리기 시작하였다. 상인들은 사랑했던 마음을 이겨내지 못하고 떠날 것인지 남을 것인지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그 순간 몸이 천마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나찰녀들은 모두 기뻐하며 상인들과 함께 손을 잡고 돌아갔다. 그러나 승가라는 지혜가 깊고 굳었으므로 조금도 머뭇거리거나 고민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대해를 건너 그와 같은 재난을 면할 수 있었다. 이 때 나찰여왕이 허공을 날아 칠성으로 돌아오자 나찰녀들이 말하였다.
"너는 지혜롭지 못하고 꾀도 없어서 남편에게 버림을 받았다. 기예와 재능이 없으니 이 성에서 살 수 없다."
이 때 나찰여왕은 자신이 낳은 아이를 데리고 허공을 날아서 승가라 앞에 도착하였다. 그리하여 온갖 교태를 부리고 유혹하면서 돌아갈 것을 간청하였다. 이 때 승가라가 입으로 주문을 외고 손에 예리한 칼을 들고 휘두르면서 이렇게 꾸짖었다.
"너는 나찰녀이고 나는 인간이다. 인간과 귀신은 길이 다른데 어찌 배필이 될 수 있겠느냐? 더 이상 괴롭힌다면 너의 목숨을 끊어버리고 말겠다."
나찰녀는 유혹하여도 일을 이루지 못할 것을 알고서 허공으로 날아올라 승가라의 집에 들어가서 그 아버지인 승가에게 거짓말을 하였다
"나는 어떤 나라의 공주입니다. 승가라가 저를 아내로 맞아 아들을 한 명 낳았습니다. 금은보화를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오려고 하였지만 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배가 부서지고 난파당하였습니다. 오직 저희 모자와 승가라만이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산천의 길은 몹시 험하였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없어 온갖 고생을 겪었습니다만 단 한마디 말로 남편의 뜻을 거슬렸다고 하여 버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저를 욕하고 비웃었으며 나찰이라고 꾸짖었습니다. 돌아가자니 친정은 아득하게 멀고, 이곳에 머물러 있자니 외로이 버림을 받아 헤맬 수밖에 없습니다. 오도가도 의지할 곳이 없어 이렇게 감히 사정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승가는 이 말을 듣고 말하였다.
"진실로 너의 말이 사실이라면 당장 집으로 들어와야 마땅하다."
나찰녀가 집안에 들어온 지 오래지 않아서 승가라가 도착하였다. 아버지는 승가라에게 말하였다.
"너는 어찌하여 재보를 소중하게 여기면서 처자를 업신여기느냐?"
승가라가 답하였다.
"그 여자는 나찰녀입니다."
그리고 나서 앞서 일어났던 일을 빠짐없이 아버지에게 들려주었다. 그러자 일가 친척들이 모두 몰려와 나찰녀를 쫓아내려 하였다.
마침내 나찰녀는 왕에게까지 이 일을 하소연하였고 왕은 승가라에게 벌을 주려고 하였다.
승가라가 왕에게 말하였다.
"나찰녀의 성품이란 요사스럽고 사람을 크게 미혹시킵니다."
그러나 왕은 승가라의 말을 사실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찰녀의 정숙하고 아름다운 모습에 반하여 승가라에게 말하였다.
"끝내 그녀를 버리려 한다면 이제 내가 후궁으로 맞이할 것이다."
그러자 승가라가 말하였다.
"재난이 일어날까 두렵습니다. 그녀는 나찰이기 때문에 오직 피와 살만을 먹습니다."
그러나 왕은 승가라의 충고를 듣지 않고 결국 후궁으로 맞아들였다.
그 뒤 어느 날 밤에 나찰녀는 보저(寶渚)로 날아가서 5백 명의 나찰귀녀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하여 그들을 모두 왕궁으로 데리고 와서 사악한 주술로 궁중의 모든 사람들을 잔인하게 해쳤다. 그리고 모든 사람과 가축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셨으며 그 남은 시체를 가지고 보저로 돌아갔다. 다음날 아침 신하들이 조례를 위해 궁궐 문 앞에 모였으나 문은 굳게 닫힌 채 열리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사람의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에 그 빗장을 부수고 문을 열고서 웅성거리며 안으로 뛰어 들어가 마침내 궁정에까지 당도하였다. 그러나 그곳에는 사람이 없었고 오직 해골만이 널려 있었다. 모든 재상들과 신하들은 그 광경을 서로 쳐다본 채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그들은 슬피 통곡하였지만 재앙이 어떻게 해서 일어나게 되었는지 헤아릴 길이 없었다.
이 때 승가라가 일의 자초지종을 자세하게 일러주자 신하들은 수긍하며 이 재앙을 왕이 스스로 불러들인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에 나라를 보필하는 노신(老臣)·관리·장군 등은 밝은 덕을 지니고 숭고한 인품을 지닌 인물을 찾아다녔다. 그리하여 마침내 모두들 승가라의 복덕과 지혜를 우러러보고 서로 상의하여 말하였다.
"무릇 인간의 군왕이라는 자리를 어찌 경솔하게 처리할 수 있겠는가? 먼저 복덕과 지혜를 갖추어야 하고 다음으로는 명철함을 지녀야 한다. 복덕과 지혜가 없다면 보위를 누릴 수 없을 것이며, 명철하지 않다면 어찌 나라의 일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 승가라가 바로 이에 합당한 사람이다. 꿈에서 재앙의 기미를 알아차렸고 천마를 감응시켰으며 충심으로 왕에게 간언하였으니, 지혜로움은 일신(一身)을 도모하기에 족하다. 국운이 이제야 크게 일어나려 하니 새로운 임금을 칭송하자."
하늘의 기운이 이에 이르렀고 새로이 이루어진 일을 함께 노래하면서 모든 사람들이 기꺼이 그를 추대하여 왕위에 앉히고자 하였다. 승가라가 사양하였지만 도리가 없었다. 진실로 중용의 도(道)를 지키고[允執其中]7) 예를 갖추어 뭇 신하들에게 절을 올리고서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이에 전왕의 폐악을 혁신하고 어질고 착한 이를 널리 표창하면서 다음과 같이 영을 내렸다.
"나의 동료였던 상인들이 나찰국에 있는데 그들의 생사를 알 길이 없고 선악도 분명하지 않다. 이제 그들을 구제하고자 하니 병사와 무기들을 정비하라. 위험에서 구제하고 근심을 덜어주는 것은 나라의 복이요, 진귀한 물건을 거두고 보배를 저장하는 것은 국가의 이익이다."
그리하여 병사들을 거느리고 배를 타고 바다로 나아갔다.
7) 요(堯)가 순(舜)에게 왕위를 넘기고 또 순이 우(禹)에게 왕위를 넘겨 줄 때에 왕자(王者)가 지켜야
할 덕목으로써 전수해주며 훈계했던 말이다. 『서경』「대우모」
이 때 철성 위에 꽂혀 있던 흉사를 알려주는 깃발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나찰녀들이 이 광경을 보고 당황하며 겁을 집어먹었다. 그리하여 온갖 교태를 부리면서 그들을 맞으러 나아가 성으로 유혹하려 하였다. 왕은 본래부터 그 속임수를 알고 있었으므로 병사들에게 주문을 외우며 공격하게 하였다. 나찰녀들은 그들의 세력에 밀려서 어지럽게 쓰러지고 흩어졌다. 어떤 이들은 외딴 섬으로 도망쳐 숨고 어떤 이들은 물에 떠내려가 버렸다. 그리하여 철성을 부수고 철로 된 감옥을 허물고서 상인들을 구출해낼 수 있었으며, 나아가 많은 보배들을 얻었다. 그는 백성들을 모아 보주(寶洲)로 이주해 도읍을 세우고 마침내 건국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왕의 이름으로 국호를 삼았던 것이다.
승가라는 석가여래의 본생(本生)의 일이다.
승가라국은 예전에는 오직 사교(邪敎)만을 섬겼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뒤 1백 년째 되던 해에 무우왕의 동생인 마혜인타라(摩醯因陀羅)가 애욕을 버리고 출가하여 성과(聖果)를 구하고자 뜻을 일으켰다. 그는 6신통을 얻고 8해탈을 갖추었으며 자유롭게 허공을 밟고 다니다가 이 나라에 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정법을 널리 펼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퍼뜨렸다. 그 이후로 나라의 풍속은 부처님에 대한 깨끗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 가람은 1백 곳이 있고 승도들은 2만여 명이 있는데, 그들은 모두 대승의 상좌부법을 준수하고 행하고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이 나라에 퍼진 지 2백여 년이 되자 각자 자신들의 전문적인 학문을 천명하게 되었으며 크게 2부(部)로 나뉘어져 성립되었다. 그 중 하나는 마하비하라주부(摩訶毘訶羅住部)8)인데 대승을 배척하고 소승의 가르침을 익히고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아발사기리주부(阿跋邪祇釐住部)9)로서 2승(乘)을 겸하여 익히고 널리 3장을 펼치고 있다. 승도들의 계행은 정결하고 정혜(定慧)가 바르고 맑으며, 풍모가 스승으로 섬길 만하여 위의가 참으로 아름답다.
8) 범어로는 mah -vih ra이다. 대사주부(大寺住部, Mah -vih ra-v sin)라고도 한다. 즉, 고도(古都) Anur dhapura의
남쪽에 기원전 306년 무렵에 천애제수왕(天愛帝須王, Devanampiyatissa)에 의해 세워졌다. 지금도 그 유적이 있다.
9) 범어로는 abhayagiri이며 무외산주부(無畏山住部 Abhayagiri-v sin)라고도 한다. 기원전 89년에 무외왕이 세웠다고
한다.
왕궁 옆에는 부처님의 치아를 모신 정사10)가 있는데 높이는 수백 척에 달한다. 보배 진주로 장식하였는데 그 화려함이 극치를 이루고 있다. 정사 위에는 표주(表柱)11)를 세우고 발담마라가(鉢曇摩羅加)12)라는 거대한 보석을 올려두었는데, 그 보석의 광채가 크게 빛을 발하고 잇닿은 빛이 눈부시게 사방을 비추고 있다. 밤낮의 구분 없이 멀리에서 바라보아도 볼 수 있으며 마치 새벽 별처럼 빛난다. 왕은 부처님의 치아를 하루에 세 차례씩 씻었는데, 향수를 뿌리거나 향가루를 태우고 진귀한 보석으로 더할 나위 없이 화려하게 장식하면서 공양을 올렸다.
10) 『법현전』에는 '불치정사(佛齒精舍)'라고 하여 왕이 부처님의 치아를 받들고 무외산정사로 옮긴 후
공양을 올리는 모습을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수많은 당나라의 승려가 이 부처님의 치아에 예를
올리기 위해 세일론을 다녀갔다는 사실은 『구법고승전』 등에도 나온다. 이 부처님의 치아는 지금도
세일론 중부 제1의 도시인 Kandy의 불치사(佛齒寺)에 안치되어 참배하는 사람이 많다.
부처님의 치아를 모신 정사 옆에 작은 정사가 있는데, 이곳도 뭇 보배로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그 속에 금으로 만들어진 불상이 안치되어 있는데, 이 나라의 선왕과 같은 몸 크기로 주조되었다. 육계(肉髻)는 귀한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다. 뒤에 도둑이 그것을 훔쳐가려고 노렸으므로 겹문을 달고 철책으로 주변을 두른 뒤에 엄중하게 경비를 서게 하였다. 그러자 도둑은 지하로 구멍을 파고 정사 안으로 들어가 마침내 그 보석을 손에 넣으려고 하였는데 불상이 조금씩 위로 올라가 멀어졌다. 도둑이 아무리 잡으려 하였지만 끝내 손에 넣지 못하자 포기하고서 한탄하며 말하였다.
"여래께서 옛날 보살행을 닦으시면서 광대한 마음을 일으키시고 널리 서원을 내시어 위로는 자신의 목숨에서부터 아래로는 나라와 성읍에 이르기까지 4생(生)을 가엾이 여기시어 일체를 두루 베풀어주셨다. 그런데 지금 이 불상은 어찌 이토록 보석을 아까워한단 말인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과거의 보살행은 분명하지 않구나."
그러자 불상은 이내 머리를 숙이더니 보석을 주었다. 도둑이 보석을 얻은 뒤에 살 사람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이 보석을 보는 사람들마다 한결같이 이렇게 말하였다.
"이 보석은 선왕께서 금불상의 육계에 안치하였던 것이다. 너는 어떻게 이것을 얻어서 몰래 팔려고 하느냐?"
그리하여 그를 붙잡아 가둔 뒤 왕에게 보고하였다. 왕이 도둑에게 어떻게 그 보석을 얻었는지 물어보았다. 도둑이 답하였다.
"부처님께서 친히 저에게 주신 것이니 저는 도둑이 아닙니다."
왕은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사람을 보내 불상을 조사해 보게 하였더니 과연 불상이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왕은 이런 신령스러운 기적을 보고서 부처님에 대한 믿음이 더욱 굳어졌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죄를 묻지 않고 그 보석을 후하게 값을 쳐서 다시 산 뒤에 불상의 육계를 장식하기 위해 다시 정수리에 안치하였다. 불상은 지금도 머리를 숙이고 있다.
11) 부처님의 소재를 알리는 기둥으로 범어 K etra의 번역어이다.
12) 범어로는 padma-r ga이며 '연꽃색을 띤 것'이라는 뜻으로 루비나 홍옥 등을 말한다. 세일론의
홍옥은 예로부터 아라비아인들에게도 유명하였다.
왕궁의 옆에 커다란 주방이 마련되어 있는데 날마다 1만 8천 명의 스님들에게 음식을 만들어 공양하던 곳이다. 공양 시간이 되면 승도들은 발우를 들고 밥을 받았으며 음식을 먹고 난 뒤에는 각자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이곳으로 흘러든 이래로 이런 공양이 시작되었는데, 자손들이 왕통을 계승하면서 그 불사를 이어받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수십 년 동안 이 나라는 정란(政亂)에 휘말려 아직까지 군주가 정해지지 않았으므로 지금은 이 불사가 중지된 상태이다.
이 나라에서 바다에 접한 곳은 진귀한 보석이 나는 곳이다. 왕이 친히 제사를 올리면 신은 기이한 보화들을 하사한다. 수도의 사람들이 모두 와서 채집하려고 하지만 각자의 복의 과보에 따라서 얻는 것이 다르며 보석을 얻으면 그에 따라서 세금이 각각 부과된다.
이 나라 동남쪽에는 능가산(勒鄧反迦山)13)이 있다. 암곡은 매우 깊고 험하며 신이나 귀신들이 노닐고 있다. 옛날 여래께서 이곳에서 『능가경(迦經)』[구역에서는 능가경(楞伽經)이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을 설하셨다.
13) 범어로는 la k 이며 세일론섬을 La k dv pa라고도 하고, 또한 세일론의 수도도 La k 라고 한다.
세일론 남부에는 8천 미터 높이의 산이 있다.
이 나라의 남쪽 바닷길로 수천 리를 가면 나라계라주(那羅稽羅洲)14)에 도착한다. 섬사람들은 왜소하여 키는 3척 남짓하다. 몸은 사람의 모습이지만 새의 부리를 하고 있으며 농사를 짓지 못하기 때문에 오직 야자를 먹고 산다.
14) 범어로는 n rikela이며 야자(椰子)섬이란 뜻이다.
나라계라섬의 서쪽으로 바다를 따라 수천 리를 가면 외딴 섬 동쪽 벼랑에 돌로 만들어진 불상이 있는데, 높이는 백여 척에 달하며 동쪽을 향해 앉아있다. 월애주(月愛珠)를 육계로 삼고 있다. 달이 차올라 높이 떠 비추면 물은 곧 높은 곳에서 폭포를 이루어 내리 흐르는데 벼랑을 타고 엄청난 기세의 물이 계곡으로 쏟아져 내린다. 당시 상인들이 풍랑을 만나 파도가 치는 대로 이리저리 떠돌다가 마침내 이 외딴 섬에 도착하게 되었다. 바닷물은 소금기가 있어 마시지 못하여 오랫동안 사람들은 갈증에 시달렸다. 그런데 이 때가 마침 15일이었으므로 불상의 정수리에서 물이 흘러 사람들이 모두 그 물을 먹고 구제 받았으니, 이로써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영성(靈聖)이 이들을 구제한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이곳에 잠시 머물며 며칠을 보냈다. 그런데 달이 높은 바위로 숨어버릴 때마다 그 물이 흐르지 않는 것이었다.
그 때 상인의 우두머리가 말하였다.
"우리들을 구해주기 위하여 물이 흘렀던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예전에 월애주가 달빛을 받으면 곧 물이 쏟아져 내린다고 들었다. 어쩌면 불상의 정수리에 이 보석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마침내 벼랑으로 올라가서 살펴보니 과연 월애주가 불상의 육계삼아 안치되어 있었다.
그 일을 겪었던 사람을 만나보았으므로 그 일을 말해둔다.
이 나라의 서쪽으로 바다를 타고 수천 리를 가다 보면 커다란 보주(寶洲)에 당도하게 된다. 이 섬에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으며 오직 신이 살고 있다. 고요한 밤에 멀리서 바라보면 빛이 온 산과 강을 비추는데, 상인들 중에서 이곳에 간 사람은 많지만 그들은 모두 얻어 갖고 오는 것이 하나도 없다.
달라비다국에서 북쪽 숲으로 들어가면 외딴 성을 거쳐 작은 마을을 지나게 되는데, 흉악한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여행자들에게 해를 입힌다. 이곳에서 2천여 리를 가다 보면 다건나보라국(茶建那補羅國)[남인도의 경계]에 당도하게 된다.
2) 공건나보라국(恭建那補羅國)
공건나보라국15)의 둘레는 5천여 리에 달하고 나라의 큰 도성16)의 둘레는 30여 리에 달한다. 토지는 비옥하고 농사는 풍성하게 거둔다. 기후는 무덥고 풍속은 난폭하고 거칠다. 사람들의 생김새는 검고 품성은 사나운데, 학문을 좋아하고 덕예(德藝)를 숭상한다. 가람의 수는 백여 곳, 승도는 만여 명이 살고 있는데 대소승을 함께 두루 익히고 있다. 천사는 수백 곳 있으며 이교도들이 뒤섞여 살고 있다.
15) 저본으로 삼고 있는 고려장경에는 '다건나보라국'으로 명기되어 있으나 그 외에는 공건나보라국
(恭建那補羅國)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범어로도 Ko ka apura이다. 이 나라의 영토는 크리슈나강
사류인 Tungabhadra강, Varada강 유역 지대를 포함한 해안 지역이다. 이곳에 사는 주민은
거무튀튀하다고 현장은 표현하고 있는데, 이 말은 현장이 보통 드라비다족을 형용하는 말이다.
이 지역 북부는 현재 인도 아리야어의 남부지파인 Marhi어를 쓰고 있으며 그 최남단은 Konka i어를
쓰고 있다. 드라비다어족과의 접경 지대이다.
16) Tungabhadra강 북안에 있는 Annagundi라고 한다. 이 지역은 예로부터 회교도가 침입하기까지 번영을
계속하였던 곳이다.
왕의 궁성 옆에 커다란 가람이 있는데, 승도는 3백여 명 있으며 이들은 거의가 빼어난 인재들이다. 이 가람의 큰 정사는 높이가 백여 척에 달하는데, 그 속에는 일체의성태자(一切義成太子)의 보석으로 장식한 왕관이 안치되어 있다. 높이는 2척에 조금 모자라며 진귀한 보배로 장식되어 보배함에 들어있다. 재일(齋日) 때마다 이것을 꺼내어 높은 자리에 안치하고 향과 꽃으로 공양을 올리는 데 이따금 광명을 발한다.
성 옆의 큰 가람 안에는 정사가 있는데, 높이는 50여 척이고 그 속에는 박달나무로 조각한 자씨보살상이 있다. 높이는 10여 척에 달한다. 어떤 때는 재일이 되면 신비한 빛이 빛나는데, 이것은 문이백억(聞二百億)나한이 만든 것이다.
성의 북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다라수림(多羅樹林)이 있는데, 둘레가 30여 리에 달한다. 그 나무의 잎은 길고 넓으며 광택이 난다. 어느 나라에서든지 책을 쓸 때에 이것을 사용하지 않는 나라가 없다. 숲 속에 솔도파가 있는데, 이것은 과거 네 분의 부처님께서 앉거나 거니시던 유적지이다. 그 옆에는 바로 문이백억나한의 유신사리를 모신 솔도파가 있다.
성의 동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솔도파가 있는데, 기단은 이미 허물어졌지만 여전히 높이가 3길 남짓하다. 옛 선현들의 말에 의하면, 이 속에는 여래의 사리가 모셔져 있었는데, 재일 때가 되면 이따금 신령스러운 빛을 발하였다고 한다. 옛날 여래께서 이곳에서 법을 설하시며 신통력을 나타내셔서 여러 중생들을 제도하셨다고 한다.
성의 서남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솔도파가 있는데 높이는 백여 척이며 무우왕이 세운 것으로 문이백억나한이 이곳에서 위대한 신통을 나타내어 중생을 제도한 곳이다. 곁에는 가람이 있는데 오직 기단만이 남아있다. 이것은 그 나한이 세운 것이다. 이곳에서 서북쪽으로 가면 커다란 숲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 숲에는 사나운 맹수들이 사람들을 해치고 도적 떼가 잔인한 행위를 한다.
이곳에서 2천 400∼2천 500여 리를 가다보면 마하랄타국(摩訶剌侘佗國)[남인도의 경계]에 이른다.
3) 마하랄타국(摩訶剌侘國)
마하랄타국17)의 둘레는 6천여 리에 달하며, 나라의 큰 도성은 서쪽으로는 대하(大河)에 접해 있는데 둘레는 30여 리에 달한다. 토지는 비옥하며 농사는 풍성하다. 기후는 무덥고 풍속은 순하고 질박하다. 사람들의 생김새는 건장하며 성품은 오만하다.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갚고 원한이 있으면 반드시 복수를 한다. 만일 능욕을 당하면 목숨을 바쳐서 원수를 갚는다. 위급한 일을 당하면 의기투합하여 제 몸을 잊고 도와주며, 만일 원수에게 복수를 할 때면 반드시 먼저 알린다. 그리하여 각자 갑옷을 입은 뒤에 봉(鋒)을 들고 싸운다. 싸움에 임해서는 패배한 자를 내쫓지만 항복하면 죽이지 않는다. 병사가 패배할 경우 형벌을 가하지 않지만 여자의 옷을 내려준다. 그러면 그들은 분개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17) 범어로는 mah -r ra이다. 또는 마하륵타(摩訶勒吒)·마하뢰타(摩訶賴吒)라고도 음사하며 대국(大國)이라고
번역한다. 이 나라의 영역은 고다바리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현재의 마하라시트라주에 해당한다.
나라에서는 수백 명에 달하는 용사들을 양성하는데 언제나 결전에 임할 때가 되면 크게 취할 정도로 술을 마신다. 그리하여 한 사람이 상대의 선봉을 꺾으면 수많은 사람들이 뒤이어 그 정예부대를 꺾는다. 사람을 만나서 멋대로 상해를 입혀도 나라에서는 형벌을 가하지 않는다. 임금이 출타를 할 때 마다 북을 두드리며 앞서서 길을 인도한다. 또한 난폭한 코끼리 수백 마리를 사육하고 있다. 그래서 전쟁을 벌이려고 할 때 먼저 코끼리 떼에게 술을 먹인 뒤에 풀어놓아 마구 짓밟게 한다. 그러면 이들 앞에는 아무리 강한 적도 무릎을 꿇고 만다. 이 나라의 왕은 이 같은 병사와 코끼리의 힘을 믿고서 이웃 나라를 쉽게 능욕하곤 한다.
왕은 찰제리 종족인데 이름은 보라계사(補羅稽舍)18)라고 한다. 지략이 뛰어나고 어질고 자애로움이 먼 곳에까지 마치고 있다. 신하들이 이 왕을 모시고 충성을 다하고 있다. 오늘날 계일대왕이 동서의 나라들을 정벌하여 멀고 가까운 나라들이 조공을 바치고 신하의 도리를 다하고 있지만 오직 이 나라만은 계일왕에게 복속하고 있지 않다. 계일왕은 자주 5인도의 병사들과 소집에 응한 여러 나라의 용맹한 장수들을 몸소 거느리고 토벌에 나섰지만 여전히 이 나라에서는 승리를 얻지 못하고 있다.19) 그 나라의 병사들이 이와 같았고 그 풍속이 그와 같았으며 사람들은 학예를 좋아하였고 삿된 가르침과 바른 가르침을 함께 숭배하였다.
18) 범어로는 pulak sin이며 Ch lukya 왕조의 영주(英主)였던 Pulake in 2세를 가리키는데, 그는 나르마다강
이남에서 군림하였고 625∼626년에는 페르시아왕 Khusru 2세와 사절을 교환하고 있다. 아잔타 석굴의
제1호실에는 이 페르시아 사절을 맞이하여 연회를 베푸는 그림이 있다.
19) 북방의 영웅이었던 계일왕이 Pulake in 2세와 자웅을 겨루는 전투를 행하였던 것은 620년 무렵의
일이지만 결국 나라마다강 이남으로 진출하지 못하였다.
가람은 백여 곳 있으며 승도들은 5천여 명 있는데, 대소승을 함께 닦고 익히고 있다. 천사는 백 개가 넘으며 이교도들이 매우 많다.
큰 성의 안팎에 다섯 기의 솔도파가 있는데, 이것은 모두 과거 네 분의 부처님께서 앉거나 거니시던 유적지로서 무우왕이 세운 것이다. 그 밖의 돌이나 벽돌로 만들어진 솔도파들도 매우 많이 있어서 일일이 들 수가 없을 정도이다.
성의 남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옛 가람이 있는데, 그 속에는 관자재보살의 석상이 안치되어 있으며 신령스러운 감응이 눈에 보이지 않게 일어나고 있어서 그곳에서 기도하면 많은 사람들이 소원을 이룬다.
나라의 동쪽 경계에 큰 산이 있는데20) 산봉우리가 첩첩이 늘어서 있고 겹겹이 높은 산들이 깊고도 험하다. 이곳에 가람이 있는데 깊은 계곡에 터를 잡고 있다. 높은 당(堂)과 커다란 건물은 암벽을 뚫고서 봉우리에 기대고 있다. 중각과 대(臺)는 암벽을 등지고 계곡을 바라보고 있는데, 아절라(阿折羅)[당나라 말로는 소행(所行)이라고 한다]아라한21)이 세운 것이다.
20) 이 부분은 저 유명한 아잔타 석굴을 기술하고 있는 듯하다. 위치는 오랑가바드(Aura gabad)의
서북쪽 약 60마일, Bhusaval의 남쪽 약 35마일 떨어진 지점에 있으며 Waghora강이 말발굽형으로
굽어진 곳, 높이는 약 76미터에 달하는 현무암 벼랑 기슭에 길이 약 505미터에 걸쳐 파놓은 크고
작은 29개의 석굴이 있다. 강 아래에서부터 석굴의 번호를 매기고 있다.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에 만들어진 오래된 동굴군(洞窟群)과 5세기 후반부터 7세기 전후에 만들어진 동굴군으로
크게 분류된다. 가장 오래된 굴을 제외하고 회화나 장식, 부조가 있으며 인도 미술 사상 매우 드문
귀중한 자료로 여겨지고 있다. 이 석굴 및 벽화는 1819년 유럽인에게 발견된 이래 많은 소개와
연구가 발표되고 있다.
21) 제26굴에서 발견된 비명에는 수도승인 Acala 상좌가 만들었다는 취지가 기록되어 있다. 이 Acala를
현장은 c ra(所行)로 읽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절라아라한은 서인도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어느 갈래[趣]에 태어났는지 살펴보다 이 나라에서 여인의 몸을 받아 태어난 것을 발견하였다. 그리하여 아라한은 이곳에 와서 근기에 따라 거두어서 교화하고 인도하고자 하였다. 마침내 마을로 들어가 걸식을 하다가 어머니의 집에 도착하게 되었다. 여자아이가 음식을 가지고 와서 보시하였는데 젖가슴에서 젖이 흘러나왔다. 친척들은 이 일을 몹시 흉한 일이라고 하였지만 아라한이 본생인연을 이야기해주자 여자아이는 이내 성과(聖果)를 증득하였다. 아라한은 자신을 낳고 길러준 은혜를 감사하고 업연의 지극함을 깊이 생각하여 두터운 덕을 보답하고자 이 가람을 세웠던 것이다.
가람의 큰 정사는 높이가 백여 척에 달하는데 그 속에는 돌로 만들어진 불상이 있다. 불상의 높이는 70여 척에 달하며 위에는 석개(石蓋)가 7층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고정되어 있지 않고 허공에 걸려있다. 석개(蓋)의 각 층 사이는 서로 각각 3척 남짓 떨어져 있다. 옛 선현들의 말에 의하면, 이것은 아라한의 원력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하고, 또는 신통력에 의한 것이라고 하거나 또는 약술(藥術)의 공덕이라고 한다. 이러한 실록들을 고찰해 보아도 그 자세한 내용을 알 수가 없다. 정사의 주위로는 석벽을 조각하여 놓았는데 여래께서 옛날 보살행을 닦으시던 여러 인연의 일들을 만들어 둔 것이다. 성과(聖果)를 증득하시려는 길상스러운 조짐, 적멸에 드시려는 신령스러운 감응 등 크고 작은 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새겨놓았다. 가람의 문 밖에는 남북좌우(南北左右)로 각각 석상이 한 기씩 안치되어 있는데 토속(土俗)에 의하면, 이 석상들은 이따금 큰 소리를 토해내는데 그 때는 땅이 흔들린다고 한다. 옛날 진나보살이 이 가람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천여 리를 가서 내말타하(耐秣陀河)22)를 건너면 발록갈첩파국(跋祿羯呫婆國)[남인도의 경계]에 도착한다.
22) 범어로는 narmad 이며 빈디야 산맥에서 발원(發源)하여 정동향(正東向)으로 흘러 캄바이(Cambay)만으로
흘러드는 중인도와 서인도의 중요한 강이다.
4) 발록갈첩파국(跋祿羯呫婆國)
발록갈첩파국23)의 둘레는 2천 400∼2천 500리에 달하며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20여 리에 달한다. 토지는 염분이 많아서 초목이 매우 드물다. 바닷물을 끓여서 소금을 만드는데 바다에 의지해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 기후는 무덥고 회오리바람이 느닷없이 일어나곤 한다. 풍속은 각박하고 사람들의 성품은 남을 잘 속인다. 학예를 알지 못하고 삿된 가르침과 바른 가르침을 함께 믿는다. 가람은 10여 곳 있고 승도들은 3백여명 있는데 이들은 대승의 상좌부법을 익히고 있다. 천사는 10여 곳 있고 이교도들이 뒤섞여 살고 있다.
23) 범어로는 bharukacchapa이며 지금의 나라마다 하구에 위치한 항구도시 Bharoach이다.
이곳에서 서북쪽으로 2천여 리를 가다 보면 마랍파국(摩臘婆國)[바로 남라국(南羅國)으로서 남인도의 경계이다]에 도착한다.
5) 마랍파국(摩臘婆國)
마랍파국24)의 둘레는 6천여 리에 달하고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30여 리에 달한다. 막혜하(莫醯河) 동남쪽에 의거하고 있으며 토지는 비옥하고 농사는 매우 풍성하다. 초목이 무성하고 꽃과 열매가 번성하다. 특히 보리가 잘 자라고 병초(餠麨)를 많이 먹는다. 사람들의 성품은 선량하고 순하며 대체로 총명하다. 말25)은 우아하고 낭랑하며 학예에 뛰어나고 깊이가 있다.
24) 범어로는 m lava이며 이 나라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오늘날의 Kaira와
아마다바드, 즉 구쟈라트지방 중부로 추정하는 설이다. 둘째는 오늘날의 말와(M lw ) 즉 웃쟈니
주변 지역으로 보는 설이다.25) 동방 M rw l 영역에서는 지금의 인도 아리야어에 속하는 R jasth ni
방언인 M rw r 어를 쓴다. 이것은 일찍부터 문학어(文學語)로 나타나고 있으며 문헌도 풍부하게
지니고 있다. 서방의 아마다바드를 중심으로 하는 영역에서는 지금의 Gujar t 방언을 쓰고 있다.
이 방언은 Malv 어와 뚜렷한 구별도 없고 같은 문학어로서 나타나고 있다. 이 방언은 중기 인도
아리야어의 일종인 Apabhra a어의 발달에 중요하게 기여하고 있다.
5인도의 나라 중에서는 두 나라가 학문을 중시하는데, 서남쪽의 마랍파국과 동북쪽의 마게타국이다. 덕을 귀하게 여기고 인(仁)을 숭상하며 명민하고 학문에 열성이다. 그런데 이 나라는 삿된 가르침과 바른 가르침을 함께 믿고 있다. 가람은 수백 곳 있고 승도들은 2만여 명 있는데, 이 사람들은 소승의 정량부법을 익히고 있다. 천사는 수백 곳 있으며 이교도들이 매우 많이 무리를 지어 살고 있는데, 대부분은 온몸에 재를 바른 무리들이다.
이 나라의 기록[國志]에 의하면 60년 전 시라아질다(尸羅阿迭多)[당나라 말로는 계일(戒日)이라고 한다]라는 이름의 왕이 있었는데, 이 왕은 기지가 넘치고 지혜로웠으며 재능이 있고 학문에 두루 능통하여 명민한데다, 4생(生)을 사랑으로 기르고 3보를 공경하고 숭배하였다. 태어나서 세상을 떠나기까지 얼굴에 분노하는 기색을 띤 적이 없고 한번도 살생을 저지른 적이 없었다. 코끼리나 말이 물을 마실 때도 물을 거른 뒤에 마시게 하였다. 왜냐하면 물에 사는 생명체가 다칠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 인자함이 이와 같았으므로 그가 재위하던 50여 년 동안 야수들이 사람들과 친해졌고 온 나라의 인민들이 한결같이 살생을 하지 않았다. 자신이 기거하는 궁 옆에 정사를 세웠는데 그 빼어난 솜씨는 장엄함의 극치를 이룬다. 그 속에 7불세존(佛世尊)의 상을 만들어서 모셨다. 그리고 해마다 언제나 무차대회를 마련하여 4방의 승도들을 불러 모았고 네 가지 물건으로 공양을 올렸으며, 또는 3의(衣)와 도구(道具), 또는 7보와 진귀한 보석들로 공양을 올렸으니 이 일은 대대로 이어져서 그의 아름다운 업이 끊이지 않았다.
큰 성의 서북쪽으로 20여 리를 가다 보면 바라문의 마을에 도착한다. 그 곁에 구덩이가 있는데 여름과 가을의 비 내리는 철에도 열흘 정도만 물이 고여있을 뿐이다. 비록 많은 강물이 흘러들고 있지만 물이 고여있지 않다. 그 옆에는 작은 솔도파가 세워져 있는데 옛 선현들의 기록에 의하면, 옛날 매우 교만하였던 바라문이 산 채로 지옥에 떨어졌던 곳이라고 한다.
옛날 이 마을에 어떤 바라문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박식하였고 그의 학문은 당시의 인재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났다. 그는 불경과 외도의 전적(典籍)의 깊은 이치를 두루 꿰뚫었으며 역법과 천문도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환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풍모는 청정하고 고상하였으며 그의 명성은 먼 곳까지 널리 알려졌다. 왕도 그를 매우 공경하였고 그 나라 사람들도 그를 높이 기리고 모셨으며, 그의 도를 즐기고 풍모를 흠모하는 문하 사람들은 천여명을 헤아렸다. 그는 언제나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세상 사람들을 위해서 태어났다. 성현들의 말을 전해 범부들을 인도하니 나보다 앞서 태어났거나 내 뒤에 등장할 그 어떤 성현들도 나와 비교할 만한 자가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저 대자재천(大自在天)이나 파수천(婆藪天)·나라연천(那羅延天)·불세존과 같은 자들에게 모두 경도되어 그 가르침을 이어받으며 그 형상들을 그려서 앞다투어 기도하고 공경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나의 덕은 그들보다 더 뛰어나며 내 이름은 오늘날 널리 드날리고 있어 저들과 다를 바가 없거늘 무엇으로써 이런 나를 세상에 드러낼 수 있을까?"
그리하여 마침내 붉은 단향목으로 대자재천과 파수천과 나라연천과 불세존 등의 상을 조각하여 자기가 앉는 자리의 네 개의 다리로 만들었다. 그리고 자기가 가는 곳이면 어느 곳이라도 그것을 짊어지고 함께 갔다. 그 오만함이 이와 같았다.
이 때 서인도에는 발타라루지(跋陀羅縷支)[당나라 말로는 현애(賢愛)라고 한다]라는 비구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인명(因明)을 미묘하게 꿰뚫어 보았으며 깊이 다른 이론까지도 궁구하였다. 그의 도풍은 순수하였고 그가 지닌 계율은 그 향기가 강하게 퍼져나갔다. 그는 욕망을 줄이고 자족할 줄 알았으며 물욕을 내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듣더니 한탄하며 말하였다.
"애석하구나. 이 시대에는 인재가 없다는 말인가? 이제 저 어리석은 범부로 하여금 감히 저와 같은 흉악한 짓을 행하게 내버려 두는구나."
그리고 나서 지팡이를 짚고 먼 길을 떠나 이 나라에 당도하였다. 그는 이전부터 지녀왔던 속뜻을 왕에게 자세하게 들려주었다. 왕은 낡아빠진 옷을 보고 마음속으로 그를 공경하지 않았지만 그 뜻을 높이 사서 하는 수 없이 그에게 예를 올렸다. 그리고 마침내 논좌를 마련하고서 바라문에게 고하였다. 그러자 바라문이 이 소식을 듣고 비웃으며 말하였다.
"그가 누군데 감히 이런 뜻을 품고 있단 말인가?"
그리고 나서 자신의 무리들에게 명하여 함께 논쟁을 벌일 장소로 나아갔다. 이 바라문에게는 수백 수천 명의 무리들이 앞뒤에서 시중들고 있는 반면 현애는 낡고 오래된 옷을 입고 홀로 풀을 깔고 앉아있었다. 그 바라문은 자신이 지니고 다니던 자리에 올라앉은 뒤 정법을 비난하고 배척하며 삿된 종지를 널리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그에게 맞받아 현애는 물이 흐르는 듯한 맑은 논리를 펼쳤다. 이렇게 여러 차례 돌아가면서 문답이 오고 갔으며 한참이 지난 뒤 마침내 바라문은 굴복하고 말았다.
그러자 왕이 말하였다.
"오래도록 거짓 이름을 빌어 위로는 나를 어지럽히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미혹시켰구나. 선왕들의 전적에 의하면 논쟁에서 지면 마땅히 목숨을 내놓으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뜨겁게 달아오른 화로를 가지고 와서 그에게 그 위에 올라앉게 하였다. 바라문은 하는 수 없이 부처님께 귀의하며 구제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자 현애가 그를 가엾게 여겨서 왕에게 간청하였다.
"대왕이시여, 대왕의 어지심이 멀리까지 미치시고 그 높은 명성은 발이 닿는 길마다 두루 덮고 있습니다. 자비로써 중생을 기르셔야 하나니 잔혹한 형벌을 거두소서. 부디 용서하시고 인적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그를 떠나보내소서."
왕은 바라문을 노새에 올라타게 한 뒤에 성읍을 두루 다니며 고하게 하였다. 바라문은 그 수치심을 견디다 못해 분노를 터뜨렸고 마침내 피를 토하였다. 현애가 이 소식을 듣고 그에게 가서 위로하며 말하였다.
"그대의 학문은 불법과 외도를 두루 포함하고 그대의 명성은 멀고 가까운 곳에 널리 퍼져있다. 영욕(榮辱)에 대하여 그대는 분명하게 처신해야 할 것이다. 무릇 이름이란 것이 어찌 실재하는 것이란 말인가?"
바라문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현애에게 깊이 욕을 퍼부었으며 대승을 비방하고 헐뜯으며 앞서의 성현들까지 경멸하였다. 그런데 그의 말소리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땅이 갈라지더니 바라문은 산 채로 그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 유적지가 바로 이곳에 있는 것이다.
여기서 서남쪽으로 가서 바다[海交]26)를 끼고 서북쪽으로 2천 400∼2천 500리를 가다 보면 아타리국(阿吒釐國)[남인도의 경계]에 도착한다.
26) 해교(海交)라는 말의 정확한 뜻은 알기가 어렵다. 행로(行路)로 보아, 마랍파국으로부터 서남쪽으로
방향을 잡고, 캄바이만 연안으로 나가서 그곳에서 서북쪽 카티아와르 반도를 가로질렀던 것으로 생각된다.
6) 아타리국(阿吒釐國)
아타리국27)의 둘레는 6천여 리에 달하며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20여 리에 달한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매우 많으며 진귀한 보석들이 쌓여있다. 농사도 충분히 하고 있지만 장사를 업으로 삼고 있다. 토지는 염분이 들어 있는 모래땅이며 꽃과 과일이 매우 드물다. 후추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의 잎은 촉초(蜀椒)28)와 같고, 훈육향수(薰陸香樹)도 나는데 나뭇잎이 당리(棠梨)와 비슷하다. 기후는 매우 덥고 바람과 먼지가 아주 많다. 사람들의 성품은 경박하고 재물을 귀하게 여기고 덕을 천시한다. 문자와 언어, 행동거지와 살아가는 규율들은 마랍파국과 대체로 같지만 많은 사람들이 복을 믿지 않는다. 설령 믿는 자가 있다고 해도 하늘의 신을 모시고 있다. 사관(祠館)은 10여 곳이 있으며 이교도들이 뒤섞여 살고 있다.
27) 원어(原語)와 소재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다.
28) 중국 촉땅, 즉 오늘날의 사천성에서 나는 관목 열매로서 향료로 쓰인다. 파초(巴椒)·천초(川椒)라고도 부른다.
마랍파국으로부터 서북쪽으로 3일 동안 가다 보면 계타국(契吒國)[남인도의 경계]에 도착한다.
7) 계타국(契吒國)
계타국29)의 둘레는 3천여 리에 달하며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20여 리에 달한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매우 많고 집들도 풍요롭다. 이 나라에는 우두머리가 없으며 마랍파국에 복속되어 있다. 풍토와 산물도 대체로 마랍파국과 같다. 가람은 10여 곳 있으며 승도는 천여 명 있는데 대소승을 함께 수행하며 익히고 있다. 천사는 수십 곳 있고 외도들이 많이 살고 있다.
29) 이 나라의 원어(原語)와 소재지에 대해서도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천여 리를 가다 보면 벌랍비국(伐臘毘國)[즉 북라라국(北羅羅國)을 말하며 남인도의 경계이다]에 도착한다.
8) 벌랍비국(伐臘毘國)
벌랍비국30)의 둘레는 6천여 리에 달하며 나라의 큰 도성31)의 둘레는 30여 리에 달한다. 토지와 산물, 기후의 상태와 풍속, 사람들의 성품은 마랍파국과 같다. 이곳에 매우 많은 사람들이 살며 집안도 부유하다. 백억의 재산을 쌓은 집이 백여 가구에 달한다. 먼 지역의 진귀한 보화들도 이 나라에 아주 많이 모여있다. 가람은 백여 곳 있고 승도는 6천여 명 있는데 많은 이들이 소승의 정량부법을 배우고 있다.32)
30) 범어로는 valabhi이며 역사상 실재하였던 Valabhi국은 지금의 카티아와르 반도에 해당하며 Maitraka
왕조의 서방분국(西方分國)이었다. 그러나 이 나라가 이 책의 벌랍비국에 해당하는지는 의문이 남는다.
31) 당시의 수도는 카티아와르 반도의 동안(東岸)인 Bhaunagar에 가까운 고도(古都) Valabhipur이다.
이곳은 로마에 비견될 정도로 오래된 수도이며 비명(碑銘)·봉니(封泥)·조각 등 많은 유물이 발굴되었다.
32) 이 나라의 불교교학이 얼마나 융성했는가에 관한 상황은 현장보다 조금 늦은 시기인 의정(義淨)의
『남해기귀내법전』 권4 서방학법(西方學法)에 나란타사에 버금가며 학문을 할 모든 조건이 중국에
조금도 뒤쳐지지 않는다고 소개하면서 인도에서 교학의 2대 중심지 가운데 하나로 꼽을 정도이다.
천사는 수백 곳이 있고 이교도들이 매우 많다. 여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자주 이 나라에서 노니셨으므로 무우왕이 부처님께서 머무신 곳에는 모두 정표를 세워 솔도파를 건립하였다. 과거 세 분의 부처님께서 앉거나 거니시며 설법하시던 유적지도 사이사이에 있다.
지금의 왕은 찰제리 종족인데 그는 바로 옛날 마랍파국 시라아질다왕(尸羅阿迭多王)의 조카이고 지금의 갈약국사국(羯若鞠闍國) 시라아질다왕의 사위인데 이름은 두로파발타(杜魯婆跋吒)33)[당나라 말로는 상예(常叡)라고 한다]이다. 그의 성격은 조급하고 지모가 볼품없다. 하지만 3보에 대해서는 순박한 믿음을 지니고 있어서 해마다 큰 모임을 마련하여 7일 동안 맛좋고 진귀한 음식들을 승가 대중에게 올리며 또한 3의(衣)와 의약품, 7보 등의 진귀한 보배도 올린다. 그리하여 이 모든 것을 다 보시한 뒤에 다시 갑절로 값을 매겨서 사들인다. 덕 있는 자와 어진 이를 귀하게 여기고 존경하며 도를 따르고 학문을 중시한다. 그리고 먼 곳의 고승에게는 더욱 존경심을 표한다.
33) 범어로는 dhruva-bha a이며 이 왕은 Maitraka 왕조 제11대 Dhruva-sena 2세라고 하며, B l ditya라고도
칭한다. 아버지인 Kharagraha 1세는 마랍파국의 l ditya 1세와 형제간이었지만 둘로 나뉘어졌다. 이
이분국(二分國)은 7세기 후반에 마랍비계(系)가 멸하자 다시 통일되었고, 하루샤왕의 제국이 와해됨과
동시에 벌랍비국으로서 독립하여 세력을 떨쳤다.
이 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큰 가람이 있는데, 아절라아라한이 세운 것으로덕혜(德慧)와 견혜(堅慧)보살이 머물렀던 곳인데, 그들은 이곳에서 논을 지어 나란히 널리 유포시켰다.
이곳에서 서북쪽으로 7백여 리를 가다 보면 아난타보라국(阿難陀補羅國)[서인도의 경계]에 도착한다.
9) 아난타보라국(阿難陀補羅國)
아난타보라국34)의 둘레는 2천여 리에 달하고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20여 리이다. 사람들은 엄청나게 많고 매우 부유하다. 나라의 우두머리가 없어서 마랍파국에 복속되어 있다. 토지와 기후, 문자와 법률 등도 그 나라와 같다. 가람은 10여 곳이 있고 승도들은 천 명에서 조금 모자라는 수이다. 그들은 모두 소승 정량부법을 익히고 있다. 천사는 수십 곳 있는데 이교도들이 뒤섞여 살고 있다.
34) 범어로는 nanda-pura이며 북방 Sidhpur의 동남쪽 17마일 떨어진 지점에 있는 Va nagar로 추정되고 있다.
이곳은 오늘날에도 구쟈라트 지방의 종교도시로 유명하다.
벌랍비국으로부터 서쪽으로 5백여 리를 가다 보면 소랄타국(蘇剌佗國)[서인도의 경계]에 도착한다.
10) 소랄타국(蘇剌佗國)
소랄타국35)의 둘레는 4천여 리이고 나라의 큰 도성36)의 둘레는 30여 리에 달하며 서쪽으로는 막혜하(莫醯河)에 임해 있다. 사람들은 매우 많으며 그들은 모두 부유한데 벌랍비국에 복속되어 있다. 토지는 염분이 많아서 꽃과 과일이 드물다. 추위와 더위가 규칙적으로 찾아오기는 하지만 바람이 꽤 거세다. 풍속은 경박하고 사람들의 성품도 무게가 없다. 학예를 좋아하지 않고 삿된 것과 바른 가르침을 함께 믿고 있다. 가람은 50여 곳이 있으며 승도들은 3천여 명 정도 살고 있는데 이들 대부분은 대승의 상좌부법을 익히고 있다. 천사는 백여 곳이 있고 이교도들이 뒤섞여 살고 있다.
35) 범어로는 ur ra이며 지금의 카티아와르 반도 남반부에 해당하며 이 반도에 대한 인도 본토의 지명인
Surat는 이 옛 이름의 잔재라고 한다. 예로부터 서양의 여러 나라들과 교역하여 서방 문헌에도 그 이름이
남아있다.
36) 이 수도는 Girnar산의 서쪽 산기슭에 있는 Jun ga dh이다.
나라는 서해(西海)37)로 통하는 길에 접해 있어서 모든 사람들이 바다에서 나는 토산품으로 생활하면서 장사를 업으로 삼고 물건을 교역하고 있다. 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욱선다산(郁鄯多山)38)이 있는데 그 산 정상에 가람이 있다.
37) 아라비아·아프리카·로마를 가리킨다.
38) 범어로는 ujjayanta이며 오늘날의 Gir r산의 다른 이름이다. 구도(舊都) Jun ga h의 동쪽 10마일 떨어진
지점에 있는 표고 3,616 피트의 성스러운 산이다. 이 산에는 석굴뿐만 아니라 저 유명한 아육왕의 마애(磨崖)
조칙이 있다.
건물 몸채와 행랑·처마 등 많은 부분을 절벽을 뚫어 만들었고 숲이 울창하며 샘이 경내를 돌아서 흘러내린다. 성현이 노닐고 신령스런 신선이 모여 살던 곳이다.
벌랍비국에서 북쪽으로 1천 8백여 리를 가다 보면 구절라국(瞿折羅國)[서인도의 경계]에 도착한다.
11) 구절라국(瞿折羅國)
구절라국39)의 둘레는 5천여 리이고 나라의 큰 도성은 비라마라(毘羅摩羅)라고 부르는데 둘레는 30여 리에 달한다. 토지와 풍속은 소랄타국과 같다. 사람들은 매우 많고 가구들은 매우 부유하다. 많은 이들이 외도를 섬기고 부처님의 법을 믿는 자는 적다. 가람은 한 곳이 있고 승도는 백여 명 정도 있는데 이들은 소승의 가르침인 설일체유부를 익히고 있다. 천사는 수십 곳이 있고 이교도들이 뒤섞여 살고 있다. 왕은 찰제리 종족인데, 나이는 20세이고 지혜와 용기가 뛰어나다. 부처님의 법을 깊이 믿고 있으며 뛰어난 인재들을 높이 받들고 있다.
39) 범어로는 gurjara이며 7세기 구쟈라트는 오늘날의 카티아와르 반도에 미치지 못하고 라쟈스탄
남부를 그 영역으로 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동남쪽으로 2천 8백여 리를 가다 보면 오사연나국(鄔闍衍那國)[남인도의 경계]에 도착한다.
12) 오사연나국(鄔闍衍那國)
오사연나국40)의 둘레는 6천여 리이고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30여 리이다. 토지와 풍속은 소랄타국과 같다. 백성들은 매우 많으며 집안은 부유하다. 가람은 수십 곳이 있는데 대부분 허물어지고 남아있는 것은 서넛 정도이다. 승도들은 3백여 명이 있는데 대소승을 함께 닦고 있다. 천사는 수십 곳 있으며 이교도들이 뒤섞여 살고 있다. 왕은 바라문 종족으로서 사서(邪書)를 두루 읽었으며 바른 법을 믿지 않는다. 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솔도파가 있는데 무우왕이 지옥을 만들어 둔 곳이다.
40) 범어로는 ujjayan 이며 우선야니(優禪耶尼)·오야니(烏惹儞) 등으로 음사한다. 고대 16대국 가운데
하나이다. 문화가 크게 영글어서 K lid sa 희곡의 완성지로, 또한 고대 천문학자들이 자오선(子午線)을
계측하는 기점이기도 하였다. 그리스 문헌에 Oz n 로 등장하는 도시로서 Barygaza항구를 통해서
서방과 교역하는 수출입품의 집산지였다.
이곳에서 동북쪽으로 천여 리를 가다 보면 척지타국(擲枳陀國)[남인도의 경계]에 도착한다.
13) 척지타국(擲枳陀國)
척지타국41)의 둘레는 4천여 리이고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15∼16리이다. 토지가 비옥하여 농사가 잘 되며 콩과 보리가 많이 나고 꽃과 열매가 풍성하다. 기후는 순조롭고 화창하며 사람들의 성품도 선량하다. 많은 이들이 외도를 믿고 있으며 부처님의 법을 받드는 자는 적다. 가람은 수십 곳이 있지만 승도들은 적다. 천사는 십여 곳이 있고 외도는 천여 명에 달한다. 왕은 바라문 종족으로서 3보에 대해 돈독한 믿음을 갖고 있고 덕이 있는 자들을 존경한다. 그래서 4방의 덕 있고 유능한 인재들이 이 나라에 많이 모여든다.
41) 원음과 정확한 소재지에 관해서는 알 수 없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9백여 리를 가다 보면 마혜습벌라보라국(摩醯濕伐羅補羅國)[중인도의 경계이다]에 도착한다.
14) 마혜습벌라보라국(摩醯濕伐羅補羅國)
마혜습벌라보라국42)의 둘레는 3천여 리이며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30여 리이다. 토지와 풍속은 오사연나국과 같다. 외도를 섬기고 존경하며 부처님의 법을 믿지 않는다. 천사는 수십 곳이 있는데 대부분이 재를 바른 외도들의 무리이다. 왕은 바라문 종족인데 부처님의 법에 대한 불신이 매우 크다.
42) 범어로는 mahe varapura이며 이 나라의 소재지에 관해서는 이견들이 있지만 대체로 오늘날의
Bundelkhand로부터 조금 서쪽으로 향해 북쪽에 위치한 Gwalior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곳에서 구저라국으로 돌아간 뒤에 다시 북쪽으로 가서 황야와 험난한 사막을 1천 9백여 리 정도를 가다 보면 신도하(信度河)를 건너서 신도국(信度國)[남인도의 경계]에 도착한다.
15) 신도국(信度國)
신도국43)의 둘레는 7천여 리에 달하고 나라의 큰 도성은 비점파보라(毘苫婆補羅)44)라고 불리는데 둘레는 30여 리에 달한다. 농사가 잘 되고 보리가 풍성하다. 금·은·유석(鍮石)을 생산해내고 소·양·낙타·노새 등 가축들이 살기에 적합하다. 낙타는 키가 작고 등에는 하나의 혹[峯]만 있다. 붉은 소금이 많이 나는데 그 색은 마치 붉은 돌과도 같다. 흰 소금과 검은 소금, 그리고 백석염(白石鹽) 등은
멀리 떨어진 다른 나라에서 약으로 쓰고 있다. 사람들의 성품은 강건하고 난폭하지만 순박하고 곧은 점도 있다. 자주 다툼을 벌이고 남을 헐뜯거나 비방하는 일이 많다.
43) 범어로는 sindhu이며 현재의 파키스탄 영내 북부 Sind의 수크르(Sukkur) 지구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에 해당한다고 추측하고 있다.
44) 원음을 다시 구성해보면 vi a bapura이며 오늘날 파키스탄 령(領)이며 수크르 지구에 있는 Alor로
추정하고 있다.
학문은 박학한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부처님의 법에 대한 깊은 믿음을 갖고 있다. 가람은 수백 곳이 있으며 승도는 만여 명 있는데 그들은 모두 소승 정량부의 법을 익히고 있다. 대체로 성품이 게으르고 행동은 바르지 못하다. 그 중에 정진하는 현명하고 착한 무리들은 홀로 고요한 곳에 머물고 사람들의 왕래가 드문 산이나 숲에 은거하고 있으며 온종일 부지런하게 정진하여 많은 사람들이 성과(聖果)를 증득하였다. 천사는 30여 곳이 있으며 이교도들이 뒤섞여 살고 있다. 왕은 수다라(戍陀羅) 종족인데 성품이 순박하고 부처님의 법을 받들고 있다.
여래께서 옛날에 이 나라에 자주 머무셨던 까닭에45) 무우왕이 부처님의 유적지에 솔도파를 세웠는데 그 수가 수십 곳에 달한다. 오파국다(烏波多) 대아라한이 자주 이 나라에서 노닐면서 법을 널리 펼쳐 사람들을 이끌고 교화하였다. 그가 머문 곳에는 모두 유적지로 표식을 세웠는데 어떤 곳에는 승가람을 세웠고 어떤 곳은 솔도파를 세웠다. 이런 것들이 여기저기에 세워져 있어서 그것에 관하여 간략하게나마 말할 수 있다.
45) 석가모니부처님은 이 나라를 다녀가지 않았으며 이 일도 불교 전래 이후 만들어진 설화일 것으로 보인다.
신도하의 옆으로 천여 리에 걸쳐 늪이 펼쳐져 있는데 그 사이에 수천 호의 집이 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성품이 강건하고 난폭하며 오직 도축을 직업으로 삼고 있다. 소를 치며 살아가고 있으며 다른 것과 관련된 직업은 없다. 남자거나 여자거나 그 신분이 귀하거나 천한 것을 가리지 않고 머리와 수염을 자르고 가사를 입고 있어서 겉모습은 비구들과 비슷하지만 세속의 일을 행하고 있다. 오로지 소승의 견해를 고수하고 있으며 대승을 비난하며 배척하고 있다.
선현들의 기록에 의하면 옛날 이 지역의 백성들은 잔인한 짓을 예사롭게 행하였고 흉악한 일을 저질러왔다고 한다. 당시 아라한이 그들이 악한 구렁에 떨어질 것을 가엾게 여겨서 교화하고자 하여 허공을 타고 날아왔다. 그리하여 신통력을 나타내며 보기 드문 기적을 보여주어 대중들이 믿고 받들게 하였으며, 차츰 그들을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였다. 사람들은 아라한을 존경하고 기뻐하면서 그의 가르침을 받들고자 하였다. 아라한은 대중들의 마음이 길들여진 것을 알고서 3귀의계를 주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 같은 흉악하고 난폭한 짓을 그치고 중생의 목숨을 끊는 일을 그만두었다. 뿐만 아니라 머리를 깎고 물든 옷을 입었으며 부처님 법의 가르침을 공경하고 행하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세상도 바뀌어서 선(善)을 지키려는 의식은 엷어졌지만 다른 풍속들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비록 법복을 입고 있었지만 더 이상 계와 선행은 지켜지지 않은 채 자손들이 대를 이어가게 되면서 점차 풍습으로 변해갔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9백여 리를 가다 보면 신도하의 동쪽 기슭을 건너 무라삼부로국(茂羅三部盧國)[서인도의 경계]에 이르게 된다.
16) 무라삼부로국(茂羅三部盧國)
무라삼부로국46)의 둘레는 4천여 리이고 나라의 큰 도성47)의 둘레는 30여 리에 달하며 사람들이 매우 많고 집집마다 부유하다. 이 나라는 책가국에 복속되어 있다. 토지는 비옥하며 기후도 부드럽다. 풍속은 질박하며 학문을 좋아하고 덕을 숭상한다. 많은 사람들이 천신을 섬기고 있으며 부처님의 법을 믿는 이는 적다. 가람은 10여 곳이 있는데 대부분이 이미 허물어졌고 승도들의 수도 적으며 그들은 전문으로 삼아 배우는 부파가 없다. 천사는 여덟 곳 있고 이교도들이 뒤섞여 살고 있다.
46) 인더스강 상류, Chenab강과 Sutlej강이 합류하는 삼각주 일대, 지금의 물탄(M lt n) 지역이라고 한다.
47) 지금의 물탄이다.
태양을 섬기는 천사(天祠)가 있는데 그 장식은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일천(日天)의 상은 황금으로 주조하였고 진기한 보석으로 장식하였다. 영감(靈感)이 은밀히 흐르고 있으며 신이한 공적이 눈에 보이지 않게 일어나고 있다. 여자 악사들이 교대로 악기를 연주하며 밝은 등불이 태양을 대신하여 밟게 비추고 있는데 향과 꽃을 처음부터 끊이지 않고 공양하고 있다.
5인도 여러 나라의 왕과 호족들은 누구라도 한결같이 이곳에 진귀한 보석을 희사하지 않은 이가 없으며 복사(福舍)를 건립하여 이곳에 음식과 의약품을 두어서 가난한 사람과 병든 사람을 제도하고 있다. 이곳에 와서 기도하는 여러 나라의 사람들의 숫자는 언제나 천여 명을 헤아린다. 천사의 4방 주위에는 못이 있고 꽃나무가 숲을 이루어 노닐고 감상하기에 아주 좋다.
이곳에서 동북쪽으로 7백여 리를 가다 보면 발벌다국(鉢伐多國)[북인도의 경계]에 이른다.
17) 발벌다국(鉢伐多國)
발벌다국48)의 둘레는 5천여 리에 달하며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20여 리에 달한다. 백성들은 매우 많으며 책가국에 복속되어 있다. 밭벼가 많이 나며 보리가 자라기에 좋다. 기후는 부드럽고 쾌적하며 풍속은 질박하다. 사람들의 성품은 조급하고 말은 거칠고 저속하다. 학예에 깊이 정통해 있고 박식하며 삿된 것과 바른 가르침을 함께 믿고 있다.
48) 범어로는 parvata이며 이 나라 이름은 예로부터 유명한데, P ini의 저술에는 타크샤시라에 속하는
나라로 등장한다. 몽고메리 지구의 하랍파 일대 지역으로 추정되며 수도도 이 도시로 짐작된다.
하랍파는 모헨조다로와 함께 선사시대의 유적으로도 유명하다. 이곳도 구릉이다.
가람은 10여 곳이 있으며 승도들은 천여 명 있는데 대소승을 겸해서 수행하고 닦고 있다. 네 기의 솔도파는 무우왕이 세운 것이다. 천사는 스무 곳이 있으며 이교도들이 뒤섞여 살고 있다. 성 옆에 큰 가람이 있는데 승도는 백여 명 정도 살고 있으며 이들은 모두 대승의 가르침을 배우고 있다. 이곳은 바로 옛날 신나불달라(愼那弗呾羅)[당나라 말로는 최승자(最勝子)라고 한다] 논사49)가 『유가사지석론(瑜伽師地釋論)』을 지었던 곳이며 또한 현애(賢愛) 논사와 덕광(德光) 논사가 출가하셨던 곳이다. 이 큰 가람은 자연적으로 발생한 불에 의해 타버리고 부서진 뒤에 황폐해졌다.
49) 범어로는 jina-putra이며 진나불다라(辰那弗多羅)라고도 표기한다. 최승자(最勝子)·불자(佛子)·최승진자
(最勝眞子)라고도 번역하는데, 유식 10대 논사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호법(護法)의 제자이다.
신도국으로부터 서남쪽으로 1,500∼1,600리를 가다 보면 아점파시라국(阿點婆翅羅國)[서인도의 경계]에 도착한다.
18) 아점파시라국(阿點婆翅羅國)
아점파시라국50)의 둘레는 5천여 리이며 나라의 큰 도성은 걸제습벌라(▩濕伐羅)51)라고 부르는데 둘레는 30여 리이다. 서쪽 국경에 치우쳐 위치하고 있으며 신도하에 임해 있고 바닷가에 이웃해 있다. 집들은 화려하며 진귀한 보배들이 많다. 근래에 군주가 없어서 신도국의 통치를 받고 있다. 땅은 낮고 습하고 염분이 많다. 잡초가 제멋대로 자라 무성하고 밭으로 개간한 것이 거의 없다. 비록 농사를 골고루 짓기는 하지만 보리가 특히 풍성하다. 기후는 조금 춥고 회오리바람이 거세게 분다. 소와 양, 낙타와 노새 등의 가축류가 잘 자라고 사람들의 성품은 난폭하고 급하다. 학문을 익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언어52)는 중인도와 아주 조금 다르다.
50) 범어로는 ate ba la이며 또는 Audumbara로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 Audumbara는 인더스강
하구의 캇치(Kacch)에 사는 민족의 이름이다.
51) 범어로는 kaj vara이며 이 도시의 원음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지금의 카라치(Kar ch )에
해당한다고 추정한다.
52) 신드(Sind)지방의 언어는 인도 아리야어의 서북지파(西北支派) 가운데 Sindhi어이고 여기에
다섯 개의 방언이 있다. 카라치 지방은 이 가운데 Lari라는 방언을 쓰고 있다. 조잡하고 거친
말인데 서북 방언 특유의 갖가지 고풍스러운 특색을 지니고 있다.
이 나라의 풍속은 순박하고 3보를 공경하고 있으며 가람은 80여 곳이 있고 승도는 5천여 명이 있는데, 그들 대부분이 소승의 정량부법을 익히고 있다. 천사는 열 곳, 대부분 회를 바른 외도가 살고 있다. 성 안에는 대자재천을 모신 천사가 있는데, 사당은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천상(天像)에는 신령스러운 감응이 있다. 회를 바른 외도들이 그 속에서 머물거나 노닐고 있다. 옛날 여래께서 자주 이 나라에 노니시면서 법을 설하셔서 사람들을 제도하고 범부들을 인도하고 세속을 이롭게 하셨다. 그런 까닭에 무우왕이 부처님의 유적지에 여섯 기의 솔도파를 세웠다.
이곳에서 서남쪽으로 2천 리를 채 못 가면 낭게라국(狼揭羅國)[서인도의 경계]에 이른다.
19) 낭게라국(狼揭羅國)
낭게라국53)은 동서남북으로 각각 수천 리에 달한다.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30여 리이며 솔토려습벌라(窣菟黎濕伐羅)54)라고 불린다. 토지는 비옥하고 농사는 매우 잘 된다. 기후와 풍속은 아점파시라국과 같다. 사람들은 많으며 온갖 진귀한 보석들이 많다. 바닷가에 임해 있으며 서녀국(西女國)으로 가는 길이다. 군왕은 없고 강에 의지해 생계를 꾸리고 있으며 서로 명을 받들지 않고 파라사국에 복속되어 있다. 문자는 인도와 대체로 같은데 언어는 조금 다르다.55)
53) 범어로는 la gala이며 정확한 원음은 알기 어려우나 Langala, Langa, Longhir 등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확한 위치는 지금의 Mekran 동부 바루치스탄의 동남부로 추정된다.
54) 범어로는 st re vara이며 위치는 Khozdar와 Kil t 사이의 L kori n의 커다란 페허가 된 도시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곳은 옛날 한 나라의 수도였다고 하기에 걸맞다.
55) 오늘날 문자는 페르시아 문자를 바꾸어 놓은 것이다. 언어는 이란어에 속하는 서부 Bal ch 어를 쓴다.
인도 서북 방언과 페르시아어의 사이에 놓인 지역이어서 예로부터 말이 심하게 뒤섞여 있다.
삿된 가르침과 바른 가르침을 함께 믿고 있는데, 가람은 백여 곳이 있고 승도는 6천여 명이 있으니 그들은 대소승을 함께 닦고 학업을 익히고 있다. 천사는 수백 곳 있으며 회를 몸에 바른 외도들의 무리가 그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성 안에는 대자재천을 모신 천사가 있는데, 그 장식은 매우 화려하며 회를 바른 외도들이 섬기는 곳이다.
이곳에서 서북쪽으로 가면 파라사국(波剌斯國)[비록 인도의 국가는 아니지만 가는 도중에 접해 있어 눈에 뜨인다. 구역에서는 파사(波斯)라고 하는데 줄인 말이다]에 당도한다.
20) 파라사국(波剌斯國)
파라사국56)의 둘레는 수만 리에 달하며 나라의 큰 도성은 소랄살당나(蘇剌薩儻那)57)라고 불리는데 둘레는 40여 리에 달한다. 강 언저리의 땅이 매우 넓고, 기후 또한 여느 곳과 다른데 대체로 따뜻하며 물을 끌어다 밭을 만들었다. 사람들은 풍요롭고 금과 유석·파지(頗胝)·수정 등 진귀한 보석이 많이 난다. 커다란 비단과 세갈(細褐), 양탄자와 같은 종류를 능숙하게 짜며 우량한 말과 낙타가 많이 난다. 화폐로는 커다란 은전(銀錢)을 사용하고 있다. 사람들의 성품은 난폭하고 풍속은 예의가 없다. 문자와 언어는 다른 나라와 다르며 학예를 배우지 않고 기술을 많이 익힌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것은 이웃 나라에서 귀하게 여긴다. 혼인 관계는 어지러우며, 죽으면 대부분은 시체를 내다버린다.58)
56) 전해들은 나라이다. 페르시아, 즉 지금의 이란이다. 현장이 인도를 방문할 당시 페르시아가 바야흐로
회교도에 넘어가려고 하는 사산(S s n)왕조의 말기였기 때문에 현장의 기술도 이 왕조 시대의 것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57) 범어로는 sura-sth na이며 '신(神)의 거처'라는 뜻이다. 이 범명이 어떤 원어에서 비롯한 것인지는
불분명인데, 사산 왕조의 수도는 페르세폴리스(회교도 침입 후의 I hkhr)이다.
58) 페르시아의 국교(國敎)인 조로아스터교의 가르침에 의한 풍습이다.
그들의 체격은 크고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하며 머리에는 아무것도 쓰지 않는다. 가죽옷을 입거나 비단이나 모직 옷을 입는다. 집집마다 세금을 부과하는데 한 사람이 은전 네 냥을 낸다. 천사(天祠)가 매우 많으며 제나발(提那跋) 외도59)의 무리들이 받들고 있다. 가람은 두세 곳 정도 있으며 승도들은 수백 명이 있고 이들은 모두 소승교의 설일체유부법을 익히고 있다.
59) 범어로는 dinapati이며 '태양'이라는 뜻이다. 조로아스터교에서는 '태양'은 신(神)의 눈으로 인식되어
있었으며 '불'과 더불어 중요한 숭배의 대상이었다. 이 제나발 외도(태양숭배신도)는 그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측된다.
석가모니부처님의 발우가 이 나라 왕궁에 있다.60) 나라의 동쪽 경계에는 학말성(鶴秣城)61)이 있는데 내성(內城)은 넓지 않고 외곽의 둘레는 60여 리에 달한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많고 가산은 풍부하다.
60) 페르시아에 사원이나 승려들이 있었으며 소승교를 전하고 있었고 부처님의 발우를 받들고 있었다고
하는 기사는 다른 서적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며 진위(眞僞)가 불분명하고 상세한 내용도 알 수 없다.
61) 페르시아만 입구의 미나브(Min b) 부근에 예로부터 있었던 항구도시 Hormuz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서북쪽으로는 불름국(拂懍國)62)에 접해 있다. 이 나라의 토지와 풍속은 파라사국과 같고 생김새와 언어가 아주 조금 다르다. 진귀한 보석이 많이 나서 이 나라 또한 풍요롭다. 불름국의 서남쪽 바다에 섬이 있는데 이곳에 서녀국(西女國)이 있다. 이곳은 여인들뿐이고 남자는 거의 살고 있지 않다. 진기한 보화가 많이 나며 불름국에 복속되어 있기 때문에 불름국의 왕은 해마다 남자들을 보내어 배필을 맞게 하고 있다. 그곳의 풍속으로는 사내아이를 낳으면 모두 기르지 않는다.
62) 전해들은 나라이다. 범어로는 prum이며 이란어족이 시리아, 팔레스타인 등의 동로마를 가리키는 말로
중세 페르시아어, 소그드어 등의 문헌에 나타나는 From, Hrom, Hrum, Porum에 대한 한자(漢字)이다.
아점파시라국으로부터 북쪽으로 7백여 리를 가다 보면 비다세라국(臂多勢63)羅國)[서인도의 경계]에 도착한다.
63) 본문에는 집(縶)자로 되어있고 고려대장경 권두(卷頭) 목차에는 세(勢)로 되어 있어 역자가 소제목을
비다세라국으로 달았다. 범어에 의하면 비다세라국의 발음이 맞는 듯하다.
21) 비다세라국(臂多勢羅國)
비다세라국64)의 둘레는 3천여 리에 달하며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20여 리에 달한다. 이곳에는 사람들이 매우 많이 살고 있지만 군왕이 없고 신도국에 복속되어 있다. 토지는 염분이 많은 모래땅이며 차가운 바람이 거세게 불고 보리가 많이 나는 대신 꽃과 과일은 적다. 풍속은 거칠고 언어65)는 중인도와 다르다. 학예를 좋아하지 않으나 순수한 믿음에 대해 알고 있다. 가람은 50여 곳이 있고 승도는 3천여 명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소승 정량부법을 익히고 있다. 천사는 20여 곳이 있고 몸에 회를 바른 외도들이 살고 있다.
64) 범어로는 p ta aila이며 현재의 하이데라바드 부근으로 추정된다.
65) 오늘날의 하이데라바드는 Sindhi어 가운데 Vic li 방언을 쓰고 있다. 이 방언은 신디어 가운데 표준어로
여겨지고 있다.
성의 북쪽으로 15∼16리 가다 보면 큰 숲이 있는데 그 속에 솔도파가 있다. 높이는 수백 척에 달하는데, 무우왕이 세운 것이다. 그 속에는 사리가 있는데 때때로 빛을 발한다. 이곳은 여래께서 옛날에 선인(仙人)이 되셨을 때 국왕으로 인하여 해를 당한 곳이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옛 가람이 있는데, 이곳은 옛날 대가다연나(大迦多延那) 대아라한이 세운 것이다. 그 곁에는 과거 네 분의 부처님께서 앉거나 거니시던 유적지가 있는데 솔도파를 세워서 기념하고 있다.
이곳에서 동북쪽으로 3백여 리를 가다 보면 아반다국(阿軬茶國)[서인도의 경계]에 도착한다.
22) 아반다국(阿軬茶國)
아반다국66)의 둘레는 2천 400∼2천 500리에 달하며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20여 리에 달한다. 대군왕이 없고 신도국에 복속되어 있다. 토지는 농사짓기에 적합하고 보리가 특히 풍작을 이룬다. 꽃과 과일은 적고 초목이 성글다. 기후는 바람이 불고 추우며 사람들의 성품도 난폭하다. 말은 질박하지만 학업을 숭상하지 않는다. 하지만 3보에 대하여 돈독한 믿음을 지니고 있다. 가람은 20여 곳이 있고 승도는 2천여 명이 살고 있는데 대부분은 소승 정량부법을 익히고 있다. 천사는 다섯 곳이 있는데 모두 회를 바른 외도들이 살고 있다.
66) 범어로는 ava a이며 오늘날의 Br hma ab d 또는 Khairpur 부근으로 추정된다.
성의 동북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큰 대나무 숲이 있는데 그 속에 가람의 터가 있다. 이곳은 여래께서 옛날 비구들에게 극박사(亟縛屣)[당나라 말로는 화(靴)이다] 신는 것을 허락하신 곳67)이다. 그 옆에는 솔도파가 있는데 무우왕이 세운 것이다. 기단은 비록 허물어졌지만 여전히 높이는 백여 척에 달한다. 그 옆에는 정사가 있는데 그 속에는 푸른 돌로 만든 입불상(立佛像)이 모셔져 있으며, 재일(齋日)이 되면 이따금 신비한 빛을 발한다.
67) 극박사(亟縛屣)는 잘 벗겨지지 않도록 다리 부분에 꽉 조여 매는 신발이라는 뜻으로 추측된다.
부처님께서 왕사성에 계셨을 때 아반제(阿槃提, Avant )의 억이(億耳) 비구가 대가전연이나
그 밖의 비구가 산지(山地)를 오갈 때 다리에 상처가 나는 것을 보고 두터운 가죽신발을 신을 수
있는 특례를 부처님께 청하여 허락을 받은 일이 있다. 이 아반제는 중인도의 나라마다강가의
땅이라고도 하고 서인도 Sur ra라고도 한다. 현장은 이 아반제를 아반다(阿軬茶)로 혼동하여서
이와 같은 기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어서 남쪽으로 8백여 걸음 가다 보면 숲 속에 솔도파가 있는데 무우왕이 세운 것이다. 여래께서 과거에 이곳에 머무셨을 때 밤이 되어 추워지자 3의(衣)를 덧입으셨다. 그리고 나서 다음 날 아침에 필추들에게 옷을 겹쳐 입어도 괜찮다고 허락하셨다.68) 이 숲 속에는 부처님께서 거니시던 곳이 있다. 또 여러 솔도파들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나란히 줄지어 서있으며 이것은 모두 과거 네 분의 부처님께서 앉으셨던 곳이다. 그 솔도파 속에는 여래의 머리카락과 손톱이 모셔져 있는데 재일이 되면 광명이 많이 비친다.
68) 이 일화도 부처님께서 폐사리성에 계실 때의 일이다.
이곳에서 동북쪽으로 9백여 리를 가다 보면 벌랄나국(伐剌拏國)[서인도의 경계]에 도착한다.
23) 벌랄나국(伐剌拏國)
벌랄나국69)의 둘레는 4천여 리에 달하며 나라의 큰 도성70)의 둘레는 20여 리에 달한다.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가필시국에 복속되어 있다. 지형은 산림이 많고 농사는 때에 맞추어 파종한다. 기후는 조금 춥고 풍속은 난폭하고 거칠다. 사람들의 성품은 조급하고 마음은 비천하다. 언어71)는 중인도와 어느 정도 같다. 삿된 것과 바른 가르침을 함께 숭배하고 있는데 학예를 좋아하지 않는다. 가람은 수십 곳이 있으나 많이 허물어졌다. 승도들은 3백여 명 있는데 이들은 모두 대승법의 가르침을 배우고 있다. 천사는 다섯 곳이 있으며, 회를 바른 외도들이 많다.
69) 『자은전』 권5에 나타나는 현장의 귀로는 중인도에서 서북쪽으로 향해 1개월 남짓 가서 사란달라국
(闍爛達羅國)에, 그리고 20여 일이 걸려서 승하보라국(僧訶補羅國)에 도착하고 그곳에서 다시 20여 일
걸려서 달차시라국(呾叉始羅國)을 지나 인더스강을 건너 다시 서북쪽으로 길을 잡고서 1개월 남짓 가서
남파국(藍波國)을 지나 이곳에서 서남쪽으로 15일 걸려서 벌랄나국에 도착하는 순서이다. 벌랄나는
vara a, var a로 원음을 다시 구성할 수 있다. 지금의 Ghazni의 동남쪽에 있는 Bannu 지방으로 추정하고
있다.
70) 지금의 반누로 추정된다. 이 시는 동북쪽의 폐사와르로부터 서남쪽으로 Kohat, Wa- ziristan을 지나서
쿠에타로 통하는 주된 길에 있는 요충지이다.
71) 오늘날 이 지역은 이란어의 동쪽 끝으로 보이는 Pushto어를 쓰고 있으며 이 지역의 정동향(正東向)은
인도 아리야어의 서북 방언에 접하고 있다.
성의 남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옛 가람이 있는데 여래께서 옛날 이곳에서 법을 설하시어 가르치고 보이시며 이익과 기쁨을 주어 중생들을 이끌고 깨닫게 하셨던 곳이다. 그 옆에는 과거 네 분의 부처님께서 앉거나 거니시던 유적지가 있다.
그 지방에서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이 나라는 서쪽으로 계강나국(稽畺那國)72)에 접해 있는데, 이 나라는 거대한 산 사이에 자리 잡고 있으며 강줄기마다 군주를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대군주는 없다. 양과 말이 많이 나며 종자가 좋은 말은 그 체구가 좋고 크다. 다른 여러 나라에서는 그 종자가 드물기 때문에 이웃나라에서 귀하게 여기고 있다. 다시 여기서 서북쪽으로 가서 큰 산을 넘고 넓은 강을 건너 작은 성읍을 거쳐서 2천여 리를 가다 보면 인도의 경계를 벗어나 조구타국(漕矩吒國)[또는 조리국(漕利國)이라고도 부른다]에 도착한다.73)
72) 범어로는 kokankana이며 반누의 서쪽 Waziristan으로 추정하고 있다. 파키스탄의 아프카니스탄에
접하는 산 속에 있으며 현장의 기술과 같은 지형이다.
73) 이 아래로 이 11권 끝까지는 『고려장경(高麗藏經)』에는 본래 실려 있지 않으나 『신수대장경(新修大藏經)』
각주에 송(宋)·원(元)·명(明) 본의 것을 수록하였기에 역자도 번역해 두었다.
승가라국은 옛날 사자국(師子國)이며 또는 무우국(無憂國)이라고도 부르는데 남인도에 위치해 있다. 이 지역은 진귀한 보석이 많이 나므로 보저(寶渚)라고도 불린다.
옛날 석가모니부처님의 화신을 승가라(僧伽羅)라고 불렀는데 뭇 덕을 두루 갖추셨으므로 나라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되셨다. 그런 까닭에 나라 또한 승가라를 국호로 삼으셨다. 위대한 신통력으로 거대한 철성(鐵城)을 부수시고 나찰녀를 멸하시어 위험에 빠진 사람들을 구제해 주신 뒤에 도읍을 세우셔서 사람들을 널리 교화하고 인도하셨다. 널리 바른 가르침을 펴시고 적멸을 보이시며 치아를 남기셨다. 치아는 이 땅에 남아있었는데 금강처럼 견고하여 오랜 세월이 지나도 부서지지 않았다. 그리고 광명이 미치는데 멀리서 보면 마치 하늘에서 별이 찬란하게 빛을 내는 것과도 같았고 달이 밤에 빛나거나 태양이 낮에 눈부시게 비추는 것과 같았다. 이곳에 와서 기도하는 사람들에게는 메아리가 울려오듯이 응답이 있었다. 나라에 흉사가 들거나 재난이 닥칠 때 오롯한 마음으로 간절하게 기도하면 신령스러운 감응이 나타난다.
지금의 석란산(錫蘭山)이 바로 옛 승가라국이다. 왕궁 옆에는 부처님의 치아를 모신 정사가 있는데, 뭇 보석으로 장식하여 찬란한 빛이 눈부시게 빛난다. 그리고 대대로 이어오면서 그 치아에 경배를 올리는데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다. 지금의 국왕은 아열고내아쇄리(阿烈苦柰兒鎖里) 사람인데 그는 외도를 모시고 제사지내며 부처님의 법을 공경하지 않는다. 게다가 포악하고 학정을 일삼고 패륜을 저지르며 그 나라 사람들을 괴롭히며 부처님의 치아를 멸시하면서 교만을 부리고 있다.
대명(大明) 영락(永樂) 3년 황제가 태감(太監) 정화(鄭和)를 사신으로 보내 향과 꽃을 올리고 나아가 그 나라에 공양하게 하였다. 정화가 국왕인 아열고내아(阿烈苦柰兒)로 하여금 부처님의 가르침을 숭앙하고 외도를 멀리할 것을 권하였다. 그러자 왕이 노하여 해치고자 하였으나 정화가 그 음모를 알고서 도망쳤다. 그 후 다시 정화를 사신으로 보내어 온갖 번(番)을 바치게 하였다. 그가 석란산의 국왕을 배알하니 왕은 거만한 마음이 더욱 커져서 불손하게 다시 사자를 해치려고 병사 5만 명을 시켜서 나무를 베고 길을 막게 하였고 병사들을 나누어 해주(海舟)를 강탈하고서 미리 모여 있다가 기회를 노렸다. 정화 등이 이것을 미리 눈치 채고 재빨리 배를 돌렸다. 그러나 길은 이미 막혀 있었으므로 몰래 사람들만을 보내려고 하였으나 배에 있던 병사들은 이것을 거부하였다. 정화는 병사 3천 명을 데리고 한밤중에 왕성으로 침공해 들어간 뒤에 이것을 사수하였다. 해주를 빼앗았던 번병(番兵)과 국내의 번병들이 4방에서 몇 겹으로 왕성을 둘러싸고 공격을 해왔다. 이렇게 전투를 벌인
지 6일 째가 되었을 때 정화 등이 그 왕을 잡아서 이른 아침을 틈타 문을 열고 나무를 베어 길을 잡았다.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싸우고 한편으로는 길을 가면서 20여 리를 가서 해가 저물 무렵이 되어서야 비로소 배에 도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땅히 예를 갖추어 부처님의 치아를 청한 뒤에 배에 오르니 신령스러운 기적이 범상치 않았고, 광채가 눈부시게 빛나는 것이 앞에서 전하는 바와 같았다. 그리하여 우레와 같은 북소리를 내며 적들을 위협하고 앞으로 나아가니 멀리서 보기만 하여도 겁을 먹고 달아났다. 이렇게 수십만 리 망망대해를 건너는데 바람과 파도가 거세게 일지 않아 마치 평탄한 대지를 밟고 가는 것과 같았다. 사나운 용과 난폭한 물고기들이 그들의 앞에 솟아올랐지만 조용히 있을 뿐 해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배에 탄 사람들은 모두가 편안하고 쾌적하며 안락하게 바다를 건널 수 있었다.
영락(永樂) 9년 7월 초아흐렛날에 수도에 도착하니 황제께서 황성(皇城) 내에 화려하게 장식한 전단목으로 만든 금강보좌(金剛寶座)에 안치하게 명하셨다. 그리하여 법도에 맞추어 공양을 올리며 중생을 이롭게 하고 백성들의 복을 빌면서 한량없는 공덕을 지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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