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당서역기 제 12 권
현장 한역
변기 찬록
이미령 번역
12. 귀국길에 경유한 나라들[22개국]
1) 조구타국(漕矩陀國)
조구타국1)의 둘레는 7천여 리에 달하며 나라의 큰 도성은 학실나(鶴悉那)2)라고 부르는데 둘레는 30여 리에 달한다. 또는 학살라성(鶴薩羅城)3)을 도읍으로 삼기도 하는데 이 성의 둘레는 30여 리에 달하며 이 두 성은 모두 견고하고 험준하다. 산과 강이 높고 가파르며 밭들도 높고 확 트인 곳에 위치해 있다. 농사는 때맞추어 파종하고 보리가 풍성하며 초목은 성글지만 꽃과 과일은 무성하다. 울금향(鬱金香)이 나기에 좋으며 흥구초(興瞿草)4)가 나는데 이 풀은 라마인도천(羅摩印度川)5)에서 자란다.
1) 범어로는 J gu a이며『당서(唐書)』「서역전(西域傳)」을 바탕으로 위치를 찾아보면,
오늘날의 자브리스탄(Zaburistan)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조구타라는 국명은 본래
에프탈인(Ephtalites)이 5세기 말에 대월지(大月氏)를 멸망시키고 그 영토인 카블(Kabul)강
유역 및 칸다하르(Kandahar) 일대 지역을 점령하고 이곳을 Jabula라고 부른 것이 시초이며,
현장이 기술한 이 나라의 별칭인 '조리(漕利)'나 '사율(謝)', 『혜초전』의 사호라살타나
(社護羅薩他那, Jawulasthana)는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고 한다.
2) 범어로는 ghasna이며 지금의 가즈니Ghazni(카블에서 칸다하르에 이르는 길의 要地)이다.
3) 범어로는 ghasala이며 지금의 헬문드(Helmund)강 유역의 주요도시인 Guzar로 추정된다.
4) 약의 일종으로서 아위(阿魏)의 다른 이름이다. 서역에서 나는 식물의 이름으로서 흥거(興渠)
라고도 한다. 5신채(辛菜)의 일종이다.
5)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동부를 흐르는 헬문드강으로 추정되며 지리적으로 보아 이곳이 분명하다.
학살라성 안에는 샘물이 솟아 흐르고 있는데, 이 나라 사람들은 이 물을 이용하여 밭을 경작한다. 기후는 몹시 추우며 눈과 서리가 많이 내린다. 사람들의 성품은 경박하고 조급하며 남을 잘 속인다. 학예를 좋아하고 기술이 많고, 총기가 있긴 하지만 지혜롭지는 못하다. 이들은 아침마다 수만 마디의 문구를 외운다. 문자와 언어6)는 다른 여러 나라들과 다르다. 허풍을 많이 떨며 그 말은 그다지 진실하지 않다.
6) 이 지방은 후한 시대부터 오랫동안 대월지(大月氏, K s a)의 영역이었다가 5세기 후반에
에프탈인들이 북방에서 침입하여 카블강의 모든 영역과 칸다하르에 이르는 영토를 차지하였다.
하지만 이 에프탈인들도 565년에 붕괴하기 시작하면서 서돌궐족(西突厥族)의 지배가 시작되었다.
현장 당시에는 바로 돌궐족이 남하하는 중이었을 것이며, 여기에서 말하는 언어와 문자는 쿠샨
계통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비록 백신(百神)에게 제사를 지내고 있지만 3보를 공경한다. 가람은 수백 곳이 있으며 승도는 만여 명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대승법의 가르침을 익히고 있다. 지금의 왕은 믿음이 독실하며 대대로 조상의 업을 이어받아서 좋은 복을 열심히 짓고 게다가 민첩하며 학문을 좋아한다. 무우왕이 세운 솔도파가 십여 곳이 있다.
천사 수십 곳이 있는데 이교도들이 모여서 살고 있다. 이교도들 중에는 외도들이 많은데, 그 무리는 매우 세력이 강하며 수나천(錫苟反那天)을 섬기고 있다. 이 천신은 옛날 가필시국 아로노산(阿路猱山)에서 이 나라의 남쪽 경계 수나희라산(那呬羅山)으로 옮겨와 살고 있었다. 그는 위엄을 부리기도하고 복을 베풀기도 하며 난폭한 일들을 저질렀다. 그를 믿고 기도하는 자는 반드시 소원을 들어주었지만 경멸하는 자에게는 재앙을 안겼다. 그러므로 멀고 가까운 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우러러 섬기고 신분이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그를 두려워해 기도하였다. 풍속이 다른 이웃 나라에서도 임금과 신하 그리고 뭇 벼슬아치들이 해마다 길일이면 약속을 하지 않아도 모여서 금은 등의 재보를 바치거나 소나 말 등의 가축을 앞다투어 바치며 자신들의 정성스러운 마음을 나타내 보였다. 금과 은이 땅에 깔리고 양과 말이 계곡을 가득 채웠지만 그들은 감히 분에 넘치는 희망을 품지 않고 그저 공양만을 올릴 뿐이었다. 외도들은 천사를 섬기면서 열심히 고행하였는데 천신이 주술을 내려주면 외도가 이를 준수하여 행하였다. 그러면 많은 이들이 질병을 고치고 낫게 되었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5백여 리를 가다 보면 불률시살당나국(弗栗恃薩儻那國)에 도착한다.
2) 불률시살당나국(弗栗恃薩儻那國)
불률시살당나국7)은 동서로는 2천여 리, 남북으로는 천여 리에 달한다. 나라의 큰 도성을 호필나(護苾那)8)라고 부르는데 둘레는 20여 리에 달한다. 토지와 풍속은 조구타국과 같고 언어가 다르다. 기후는 몹시 추우며 사람들의 성품은 거칠고 난폭하다. 왕은 돌궐(突厥) 종족인데 3보에 대한 믿음이 독실하고 학문을 숭상하며 덕 있는 자를 존경한다.
7) 범어로는 v jisth na이며 카블강 유역에 있었던 나라인데 좀더 세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8) 범어로는 h bina이며 지금의 Hupi n, Opian(카블의 북쪽 Charikar)라고 한다.
이 나라에서 동북쪽으로 산을 넘고 하천을 건너서 가필시국 변방에 있는 성의 작은 마을 수십 곳을 거치면 대설산 파라서나대령(婆羅犀那大嶺)9)에 이른다. 산마루는 매우 높이 솟아있고 험난한 고갯길이 심하게 경사져 있다. 굽이굽이 돌아서 좁은 길이 나있고 벼랑과 암굴의 기복이 몹시 심하여 어떤 때는 깊은 계곡으로 어떤 때는 높은 벼랑 위로 올라가야 한다. 한여름에도 얼음이 얼기 때문에 얼음을 뚫어서 건너간다. 이렇게 3일을 가다 보면 그제야 산 정상에 도착할 수 있다. 찬바람이 매섭게 불어대고 쌓인 눈이 계곡에 가득 차있기 때문에 길을 가는 사람들은 발을 멈출 수 없다.
9) 범어로는 varasena이며 지금의 Khawak고개일 것으로 추측된다. 해발 3,500미터이다.
날아다니는 송골매와 독수리들도 높이 날 때에는 단번에 날지 못하고 몇 발짝을 뗀 뒤에 비로소 날아간다. 아래로 산들을 내려다보면 마치 작은 무덤처럼 보인다. 섬부주 안에서는 이 산고개가 특히 높으며 이곳에는 나무가 없고 오직 산봉우리만이 많은데, 그런 봉우리들이 떼지어 한 곳에 모여 있는 모습은 마치 숲과 같다.
다시 3일을 더 가야 비로소 산고개를 내려갈 수 있으며 그러면 안달라박국(安呾羅縛國)에 도착한다.
3) 안달라박국(安呾羅縛國)
안달라박국10)은 도화라국(覩貨邏國)의 옛 땅이다. 둘레는 3천여 리에 달하며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14∼15리에 달한다. 대군주가 없으며 돌궐에게 복속되어 있다. 산이 연이어 늘어서 있고 강과 밭은 좁다. 기후는 몹시 춥고 눈보라가 세차게 분다. 농사는 풍요롭고 꽃과 과일이 잘 자란다. 사람들의 성품은 사납고 난폭하며 풍속은 기강이 없다. 죄와 복을 알지 못하고 학문을 익히는 일을 숭상하지 않는다. 오직 신의 사당에 제사지내는 일만을 할 뿐 부처님의 법을 믿는 자가 거의 없다. 가람은 세 곳이 있고 승도는 수십 명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대중부의 법을 따르고 익힌다. 솔도파가 하나 있는데 무우왕이 세운 것이다.
10) 범어로는 antar va이며 지도상으로는 Khawak 고개로부터 서쪽으로 나아가 Dosh 강에 연한
지역이며, 오늘날에도 Andar b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 수도인 Andar b은 10세기에 ukh rist n
제3의 도시로 꼽혀지고 있었다.
이곳에서 서북쪽으로 계곡을 들어가고 산봉우리를 넘어 여러 작은 성들을 지나서 4백여 리를 가다 보면 활실다국(闊悉多國)에 도착한다.
4) 활실다국(闊悉多國)
활실다국11)은 도화라국의 옛 땅이다. 둘레는 천 리에서 조금 모자라며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10여 리에 달한다. 대군주가 없고 돌궐에게 복속되어 있다. 산이 많고 강이 좁으며 바람이 많이 부는 데다 날씨는 춥다. 곡식이 풍성하고 꽃과 열매가 풍요롭다. 사람들의 성품은 난폭하고 풍속에는 법도가 없다. 가람은 세 곳이 있는데 승도는 적다.
11) 범어로는 khasta이며 지금의 Khost이다. 옥쿠스(Oxus)강으로 흘러드는 상류의 Khost강
유역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서북쪽으로 산을 넘고 계곡을 건너 여러 성읍들을 지나서 3백여 리를 가다 보면 활국(活國)에 도착한다.
5) 활국(活國)
활국12)은 도화라국의 옛 땅이다. 둘레는 2천여 리이며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20여 리에 달한다. 군주가 따로 없으며 돌궐에게 복속되어 있다. 토지는 평탄하고 농사는 때에 맞추어 파종한다. 초목이 우거지고 꽃과 열매가 고루 번성하다. 기후는 온화하고 화창하며 풍속은 순박하다. 사람들의 성품은 조급하고 거칠며 모직으로 만든 옷[氈褐]을 입는다. 많은 사람들이 3보를 믿으며, 여러 신들을 섬기는 이들은 적다. 가람은 10여 곳이 있고 승도의 수는 백 명인데 이들은 대소승을 함께 닦고 익히고 있다. 이 나라의 왕은 돌궐인인데 철문(鐵門) 이남의 여러 작은 국가들을 관장하고 있다. 그는 철새처럼 여러 지방을 옮겨다니면서 거주하며 언제나 같은 마을에 머물지 않는다.
12) 범어로는 war이며 지금의 옥쿠스강(암 다리야)에 가까운 쿤두즈(Kunduz)를 가리킨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가면 총령(蔥嶺)13)으로 들어가게 된다. 총령이란 섬부주 가운데에 의거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대설산에 접해 있고 북쪽은 열해천천(熱海千泉)에 닿고 서쪽으로는 활국에 닿으며 동쪽으로는 오쇄국(烏鎩國)에 닿는다. 동서남북이 각각 수천 리에 달하는데 벼랑과 봉우리가 수백 겹으로 이루어져 있고 계곡이 깊고 험난하며 언제나 얼음과 눈이 쌓여있고 찬바람이 거세게 불어댄다. 파[蔥]가 많이 나기 때문에 '총령(蔥嶺)'이라고 부른다. 또 산과 벼랑이 푸르디푸르기[葱翠]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고도 한다.
13) '세계의 지붕'이라 불리는 이 산을 파미르(Pamir)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이곳을 흐르는
같은 이름의 강인 파미라천(波謎羅川)에서 유래한 것 같다.
동쪽으로 1백여 리를 가면 몽건국(瞢健國)에 도착한다.
6) 몽건국(瞢健國)
몽건국14)은 도화라국의 옛 땅이다. 둘레는 4백여 리이며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15∼16리에 달한다. 토지와 풍속은 활국과 대체로 같다. 대군주는 없으며 돌궐에게 복속되어 있다.
14) 범어로는 mung n이며 정확한 소재지는 찾기 힘들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가면 아리니국(阿利尼國)에 도착한다.
7) 아리니국(阿利尼國)
아리니국15)은 도화라국의 옛 땅이다. 박추하(縛芻河)의 양쪽 기슭을 끼고 있으며 둘레는 3백여 리에 달한다.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14∼15리이며 기후와 풍속은 대체로 활국과 같다.
15) 이 나라에서부터 뒤에 등장할 네 나라는 전해들은 나라임을『자은전』을 통해 알 수 있다.
오늘날의 Hazrad Im m 부근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가면 갈라호국(曷邏胡國)에 도착한다.
8) 갈라호국(曷邏胡國)
갈라호국16)은 도화라국의 옛 땅이다. 북쪽으로는 박추하에 임해 있는데 둘레는 2백여 리에 달한다.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14∼15리에 달한다. 토지와 풍속은 대체로 활국과 같다.
16) 범어로는 이란어로 r gh이다. 오늘날의 바다쿠샨의 수도인 파이자바드(Faizab d)의 북방에
R gh라고 하는 대지(臺地)가 있다. 옥사스강이 크게 굽어지는 지역으로 현장이 기술한 바와
같이 북쪽이 옥사스강에 접해 있다.
몽건국으로부터 동쪽으로 험준한 고개를 넘어 계곡을 거쳐 여러 하천과 성을 지나서 3백여 리를 가면 흘률슬마국(訖栗瑟摩國)에 도착한다.
9) 흘률슬마국(訖栗瑟摩國)
흘률슬마국17)은 도화라국의 옛 땅이다. 동서로는 10여 리이고 남북으로는 3백여 리이다.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15∼16리이다. 토지와 풍속은 몽건국과 대체로 같다. 다만 사람들의 성품은 다른 나라와 달리 난폭하고 악하다.
17) 범어로는 K ma이며 현재의 Kishm, 즉 Taliqan과 파이자바드 사이에 있으며 Kokcha강에
연한 마을이다. 현재의 쿤두즈바다쿠샨의 통로(通路)에서는 벗어나 있지만, 이 지방이 가장
따뜻한 곳이며 과일도 많이 나는데 한 달이나 빨리 과일이 익는다고 한다.
북쪽으로 가면 발리갈국(鉢利曷國)에 도착한다.
10) 발리갈국(鉢利曷國)
발리갈국18)은 도화라국의 옛 땅이다. 동서로는 1백여 리, 남북으로는 3백여 리에 달한다.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20여 리이다. 토지와 풍속은 흘률슬마국과 대체로 같다.
18) 범어로는 par ghar이다. 지도상에서는 Taliqan의 정북(正北)인 옥사스강 북쪽 기슭과
옥사스 강 굴곡부 최북단에 가까운 곳과의 두 곳에 나란히 Parkhar라는 이름을 가진 지역이
있으며 나아가 Taliqan의 동남쪽, Kishm의 서남쪽에 해당하는 지점에 Farkhar라는 땅이 있다.
하지만 단정을 내릴 수 없다.
흘률슬마국으로부터 동쪽으로 산을 넘고 강을 건너 3백여 리를 가면 희마달라국(呬摩呾羅國)에 도착한다.
11) 희마달라국(呬摩呾羅國)
희마달라국19)은 도화라국의 옛 땅이다. 둘레는 3천여 리에 달하며 산과 강이 줄지어 이어지고 토지는 비옥하다. 농사가 잘 되고 보리가 많이 난다. 온갖 꽃들이 아름답게 피어나며 과일들도 풍성하다. 기후는 매섭게 춥고 사람들의 성품도 난폭하고 급하다. 죄와 복을 알지 못하고 생김새는 천하게 생겼지만 행동거지는 의젓하다. 모직[氈]과 가죽옷을 입어서 돌궐과 아주 똑같다. 결혼한 여인의 경우 머리에 관으로 나무 뿔을 쓰는데 높이는 3척 남짓하다. 앞은 두 갈래로 갈라져 있는데 이것은 남편의 부모를 상징하고 있다. 위의 가지는 아버지를 나타내고 아래의 가지는 어머니를 나타낸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사람에 따라서 그에 해당하는 가지를 없앤다. 시부모가 함께 사망하였을 때에는 뿔관을 아예 내버린다.
19) 범어로는 h matala이며 '설산하(雪山下)'라는 뜻으로 현재의 Kwaja Muhammad산의
북단(北端) 부근일 것으로 추정한다. 이 지역 마을인 Dar im은 현장이 제시하는 범어
이름에 가깝다.
이 나라는 초기에 강대한 국가였으며 왕은 석가 종족이었다. 총령의 서쪽 나라들이 대체로 신하의 예를 갖추었으며 국경이 돌궐과 이웃하고 있었으므로 결국 그 나라 풍습에 물들고 만 것이다. 또 침략을 당하자 스스로 국경 지역을 방어하였으므로 이 나라 사람들은 다른 지역으로 떨어져 수십 개의 견고한 성에서 각자 군주를 내세우며 살고 있다. 모직으로 만든 반구형(半球形)의 천막을 가지고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지내는데, 서쪽은 흘률슬마국에 접해 있으며 동쪽으로 계곡을 따라 2백여 리를 가면 발탁창나국(鉢鐸創那國)에 도착한다.
12) 발탁창나국(鉢鐸創那國)
발탁창나국20)은 도화라국의 옛 땅이다. 둘레는 2천여 리에 달하며 나라의 큰 도성21)은 산의 벼랑 위에 자리 잡고 있는데 둘레는 6∼7리이다. 산과 강이 서로 이어지고 있으며 모래와 돌이 도처에 가득하다. 토지는 보리와 콩이 자라기에 좋으며 포도와 호두, 복숭아와 배, 능금 등의 과일이 많이 난다. 기후는 매섭게 추운데다 사람들의 성품은 강인하고 용맹하다. 풍속은 예법을 모르고 학예를 알지 못한다.
20) 범어로는 badak na이며 현재의 바다쿠샨에 해당한다. 서장(티벳)과의 통상(通商)을 하던
창구라고도 말할 만한 지방이다. 마르코폴로도 이곳을 통과하였다.
21) 이 수도는 오늘날에도 바다쿠샨의 정부청사가 있는 파이자바드일 것이다. 그 지세가
현장의 기술과 매우 합치한다.
생김새는 비천하게 생겼고 많은 사람들이 모직으로 만든 옷을 입는다. 가람은 3∼4곳이 있으며 승도는 매우 적다. 왕의 성품은 순박하며 3보에 대한 깊은 믿음을 갖고 있다.
이곳에서 동남쪽으로 산과 계곡을 따라 2백여 리 가다 보면 음박건국(淫薄健國)에 도착한다.
13) 음박건국(淫薄健國)
음박건국22)은 도화라국의 옛 땅이다. 둘레는 1천여 리,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10여 리에 달한다. 산봉우리가 줄지어 늘어서 있어서 강과 밭이 몹시 좁다. 토산물과 기후 조건, 사람들의 성품 등은 발탁창나국과 같은데 다만 언어23)가 조금 다르다. 왕의 성품은 가혹하고 난폭하며 선악에 밝지 못하다.
22) 범어로는 Yambag n이다. 오늘날의 Kokcha강의 유역이고, Jurm보다 상류의 옛 이름이
Yamg n, Hamak n이라고 불렀던 지방이 바로 이 나라라고 한다.
23) 현재 아프가니스탄 동북부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동부이란어로 총칭되며, 다른 이란의
언어보다 옛 형태를 많이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그 가운데 발탁창나국 일대의 언어를
바다쿠샨방언이라고 부르고, 이 음박건국이 있는 Kokcha강 유역은 Shahr-i-Munji를
중심으로 하는 Munji방언을 쓰고 있다.
이곳에서 동남쪽으로 산봉우리를 넘고 계곡을 건너 위험한 좁은 길로 3백여 리를 가다 보면 굴랑나국(屈居勿反浪拏國)에 도착한다.
14) 굴랑나국(屈浪拏國)
굴랑나국24)은 도화라국의 옛 땅이다. 둘레는 2천여 리에 달하며 토지와 산천, 기후와 시절 등은 음박건국과 같다. 풍속은 법도가 없으며 사람들의 성품은 비천하고 난폭하다. 많은 이들이 복을 짓지 않으며 부처님의 법에 대해 믿음을 지닌 이도 아주 적다. 그들의 생김새는 추하고 볼썽사나우며 대체로 모직으로 짠 옷을 입는다. 산의 암석에서는 순금이 많이 나는데, 이것은 그 돌을 쪼개고 가른 뒤에 얻을 수 있다. 가람의 수가 적어 자연히 승도들도 적다. 이 나라의 왕은 순박하며 3보를 숭배하고 존경한다.
24) 범어로는 kur a이며『신당서(新唐書)』권221 하(下)에는 구란(俱蘭)·구라노(俱羅弩)·
구라나(俱爛那)라고 음사하고 있다. 지금의 Kokcha강 상류 Kuran강 유역이다.
이곳에서 동북쪽으로 산을 오르고 계곡으로 들어가 온갖 고생을 하면서 5백여 리의 길을 걷다 보면 달마실철제국(達摩悉鐵帝國)[또는 진품(鎭)이라고 이름하며 또는 호밀(護蜜)이라고 부른다]에 도착한다.
15) 달마실철제국(達摩悉鐵帝國)
달마실철제국25)은 두 산 사이26)에 위치하고 있으며 도화라국의 옛 땅이다. 동서로 1,500∼1,600여 리이고 남북으로 넓은 곳이 4∼5리, 좁은 곳은 1리도 넘지 못한다. 박추하에 임해 있으며 구불구불 굽어져 있다. 흙더미로 이루어진 언덕이 높거나 낮게 자리하고 있고 모래와 돌이 널려있다. 찬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다. 보리와 콩만을 심으며 나무와 숲은 적고 꽃과 과일도 거의 없다. 종자가 좋은 말이 많이 나는데, 말의 생김새는 작지만 빠르게 산을 넘고 물을 건널 수 있다. 풍속은 예의가 없고 사람들의 성품은 난폭하고 거칠다. 생김새도 비천하며 모직으로 짠 옷을 입는다. 눈동자가 대체로 짙은 녹색인 것이 여느 나라와는 다른 점이다. 가람은 10여 곳이고 승도는 아주 적다.
25) 범어로는 dharmasthiti이며 Wakhan의 남쪽 계곡 속, Chitral의 동북쪽 약 90킬로미터 지점에
이 지방의 요충지인 Mast j로 들어가는 입구에 Darah-i-Mast j(Mastuj의 문)라는 땅이 있다.
달마실철제는 이 Darah-i-Mast j를 음사한 것이라고 한다.
26) 이 지대의 북쪽에는 Wakhan 산맥이, 남쪽에는 힌두쿠사 산맥의 동쪽 끝이 동고서저(東高西低)의
지형으로 동북쪽으로부터 서남쪽으로 6천미터 이상의 높이로 가로놓여 있으며, 두 산록은 그 사이를
흐르는 옥사스강가까지 닿아있고 강가에는 낭떠러지를 이루고 있는 곳이 많다.
혼타다성(昏馱多城)27)이 이 나라의 도읍인데 그 속에는 가람이 있다. 이곳은 이 나라의 선왕이 바위를 뚫고 계곡에다 건물을 세웠다. 과거 이 나라에 아직 부처님의 가르침이 전해지지 않았을 때 이들은 오직 삿된 신을 섬기고 있었다. 수백 년 전부터 비로소 부처님 법의 감화가 널리 퍼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27) 범어로는 khand ta이며 이 성은 와한(Wakha)계곡 속의 b-i-Panja강 남쪽 기슭 즉 아프가니스탄
쪽에 있는 부락으로서 오늘날에도 Khand d라 불리는 와한 계곡 최대의 부락이며 그 반대편
언덕인 구 소련령에 Yamg이라는 부락이 있다.
본래 이 나라 왕에게는 사랑하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이 병에 걸리고 말았다. 온갖 의술을 모두 동원해서 치료해 보았지만 병이 낫지 않았다. 그러자 왕은 친히 천사로 가서 예를 올리며 아들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이 때 그 천사의 왕이 말했다.
"천신은 아들이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사문은 죽는다고 말하니, 세상을 속이는 자들의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잠시 후 왕이 궁중에 당도하고 보니 아들은 이미 죽어있었다. 왕은 아들의 죽음을 발설하지 말도록 조치하고 다시 신주(神主)에게 가서 물었다. 그런데도 신주는 여전히 이렇게 말하였다.
"죽지 않을 것이다. 아들의 병은 치료될 수 있다."
왕이 이 말을 듣자 크게 분노하여 신주를 묶고서 그 죄를 거론하면서 꾸짖었다.
"너희들은 무리 지어 살면서 오래도록 악을 행하고 망령되게 위엄과 복을 행사하여 왔다. 내 아들이 이미 죽었는데 어찌하여 여전히 치유될 수 있다고 말하는가? 이는 사람들을 그릇되게 하고 속이는 일이니 그 누가 참을 수 있겠는가? 신주를 죽이고 영묘(靈廟)를 없애버려야 마땅하다."
이에 신주를 죽이고서 신상(神像)을 없애 박추하에 던져버리고서 가마를 돌려 궁으로 돌아갔다. 또다시 사문을 만나게 되자 왕은 사문을 보고 기뻐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하며 말하였다.
"일찍이 지혜로운 인도를 받지 못하여 삿된 길에 발을 디뎠습니다. 요사스러운 폐해가 비록 오래 전부터 자행되어 왔으나 이제 개혁하고자 합니다. 부디 발길을 이곳으로 돌리셔서 궁실에 기거하여 주소서."
사문은 왕의 청을 받아들여서 궁 안에 머물렀다. 왕은 아들을 장사지내고 난 뒤에 사문에게 말하였다.
"인간의 세상은 어지럽게 삶과 죽음이 돌고 돕니다. 내 아들이 병에 걸린 뒤 아들의 생사에 관해 질문을 하였더니 신은 망령되게 반드시 쾌차할 것이라고 답하였습니다. 그러나 앞서 가르침을 듣고 보니 과연 헛된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법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부디 가엾게 여기셔서 이 어리석은 무리들을 인도하여 주소서."
마침내 사문에게 청하여 가람을 짓도록 계획을 세우고 법도에 따라 건립하였다. 이 때부터 불교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 옛 가람 속에는 정사가 있는데 이것은 나한을 위해서 세운 것이다.
가람의 큰 정사 속에는 돌로 만들어진 불상이 있는데 불상 위에는 금동으로 만든 둥근 일산이 걸려있고 온갖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사람들이 그것을 에워싸고 돌면 일산도 따라서 돌고, 사람이 멈추면 일산도 따라서 멈추니 신령스러운 감응은 헤아릴 길이 없었다. 옛 노인들의 말에 의하면, 이것은 성인의 원력이 미치기 때문이라고 하고 또는 내부적인 장치의 신기한 기술로 말미암은 것이라고도 한다. 이 건물을 관찰해 보니 석벽은 견고하게 이루어져 있다. 사람들의 이런 생각들을 곰곰이 따져보아도 진실한 내용을 알 수 없다.
이 나라의 큰 산을 넘어 북쪽으로 가면 시기니국(尸棄尼國)에 도착한다.
16) 시기니국(尸棄尼國)
시기니국28)의 둘레는 2천여 리에 달하며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5∼6리이다. 산과 강이 연달아 이어지고 있으며 모래와 돌이 들판에 두루 깔려있다. 보리가 많이 자라고 곡식은 적다. 나무가 성글고 꽃과 과일도 매우 적다. 기후는 매섭게 추우며 풍속은 난폭하고 용맹스럽다. 살육하는 것을 태연스레 저지르고 도적질을 일삼고 있다. 예의를 알지 못하며 선악도 판가름하지 못한다. 미래의 재앙과 복에 어두우며 현세의 재앙을 두려워하고 있다. 생김새는 천하고 가죽과 모직 옷을 입고 있다. 문자는 도화라국과 같지만 언어29)에 차이가 있다.
28) 범어로는 ik ni이며 현재의 와한 계곡 이북의 구 소련령인 파미르고원 서남쪽의 경사진 면
일대의 지역으로 지금도 Shighn n, Shughn n이라고 부르고 있다.
29) 현재 Shighn n 일대에서 쓰이는 언어는 동부이란어 가운데 파미르 방언이라고 말하는 것
가운데 하나인 Ghalcha 방언에 속한다고 하며, 예로부터 주민의 이동도 적어 고립된
'언어의 섬'과도 같은 지리적 상황도 있었으므로 옛 형태를 많이 남기고 있다고 한다.
현장이 말하는 도화라의 언어도 이란어 계통의 것이었으리라고 추정하고 있다.
달마실철제리국의 큰 산을 남쪽으로 지나면 상미국(商彌國)에 도착한다.
17) 상미국(商彌國)
상미국30)의 둘레는 2천 500∼2천 600리에 달하며 산과 강이 사이사이에 있고 구릉이 높거나 낮게 솟아있다. 곡식은 고루 잘 자라며 보리와 콩이 풍작이다. 포도가 많이 나고 자황(雌黃)31)이 생산되는데 자황은 벼랑을 뚫고 돌을 깎아 낸 뒤에 얻을 수 있다. 포악한 산신이 살고 있어 여러 차례 재해를 일으켰다. 사람들이 제사를 지낸 뒤에 산에 들어가면 평온하게 오갈 수 있지만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폭풍과 우박이 사납게 휘몰아친다. 기후는 춥고 풍속은 조급하다. 사람들의 성품은 순박하고 풍속은 예의가 없다. 지혜가 적고 기민하지 못하며 기능이 천박하다. 문자는 도화라국과 같지만 언어32)의 차이가 있다. 대부분은 모직으로 짠 옷을 입는다. 이 나라의 왕은 석가 종족으로서 부처님의 법을 존숭하고 있다. 나라 사람들도 왕의 교화를 따라서 독실한 믿음을 지니지 않은 이가 없다. 가람은 두 곳이 있는데 승도는 적다.
30) 전해들은 나라이다. 범어로는 ami이며 지금의 치트랄(Chitral) 및 Mast j의 지역을 가리킨다.
31) 유황(硫黃)과 비소(砒素)의 화합물로 채색의 원료나 약용(藥用)으로 쓰인다.
32) 치트랄 및 Mast j를 포함한 이 지역은 다르디스탄(Dardistan)이라고 총칭되며, 그 언어를
Dardic어라고 부른다. 이 언어는 이란어와 인도 아리야어와의 접경 지대에 있으며,
두 계통의 특징을 보유하면서 독자적인 정체성을 유지해왔다. 오늘날에는 인도 아리야어의
한 지파로 간주되고 있다.
국경의 동북쪽으로 산을 넘고 계곡을 건너 위험한 길을 따라서 7백여 리를 가다 보면 파미라천(波謎羅川)33)에 도착한다. 동서로 천여 리, 남북으로 백여 리이며 폭이 좁은 곳은 10리를 넘지 못한다. 두 설산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까닭에 찬바람이 매섭게 분다. 봄과 여름에도 눈이 날리고 밤낮 없이 바람이 휘몰아친다. 땅에는 염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고 자갈과 돌이 많다. 씨를 뿌리기는 하지만 풍요롭지 못하고 초목도 드물어 결국은 텅 빈 황무지가 되어버렸고 사람의 자취도 끊어지고 말았다.
33) 범어로는 pami r이며 파미르라는 말의 의미는 '황야'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페르시아어인
Bam-i-dunya는 '세계의 지붕'이라는 의미이다. 파미르강 유역은 동서로 길게 뻗은 두 개의 산,
즉 북쪽의 Alichur(Shakhdarinskiy)산맥(높은 곳은 5,500미터에 달한다)과 남쪽의 와한산맥
(높은 곳은 6,500미터) 사이에 끼어있는 좁은 지역이다.
파미라천 속에는 커다란 용이 사는 못34)이 있는데 동서로 3백여 리이고 남북으로 50여 리이다. 대총령 속에 자리 잡고 있으며 섬부주 중에서도 이 땅이 가장 높다. 물은 맑디맑아서 거울처럼 비치는데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이다. 색은 청흑색을 띠었고 맛은 감미롭다. 물 속에 사는 어족류로는 상어와 교룡(蛟龍), 물고기와 용, 큰 자라와 악어, 거북과 자라들이 있으며, 물 위를 떠도는 짐승으로는 원앙과 기러기·거위·너새[鴇] 등이 있는데 새들이 낳은 큰 알들의 껍질이 황야나 초원·늪지 혹은 물가에 널려있다. 이 못의 서쪽으로 거대한 물줄기가 흐르는 데 서쪽으로 달마실철제국의 동쪽 경계에 이르러 박추하와 합해져서 서쪽으로 흐른다. 그런 까닭에 이 못의 오른쪽 물은 모두 서쪽으로 흐른다.35) 못의 동쪽에서도 하나의 거대한 물줄기가 흘러 나와 동북쪽으로 흘러 거사국(佉沙國)의 서쪽 경계에 이르러, 사다하(徙多河)와 합쳐져 동쪽으로 흐른다. 그런 까닭에 이 못의 왼쪽은 모두 동쪽으로 흘러간다.36)
34) 오늘날의 빅토리아 호수를 말한다.
35) 빅토리아호의 서쪽에서 파미르천이 서남쪽으로 흘러, Qala Panja의 상류이며 소(小)파미르지방의
호수로부터 흘러온 b-i-Panja(Oxus)와 합류하여 서쪽으로 흐르고 있다. 합류된 뒤의 강 이름은
b-i-Panja, 즉, 옥사스(박추하)라고 부르고 있다.
36) 이 부분에 대한 현장의 기술에는 일부 착오가 있다. 즉 거사국의 서쪽 경계로 흘러서
야르칸드강과 합류하는 강은 아마 오늘날의 Tashkurghan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았는데
이 강의 서쪽 상류의 하나인 Kara Chukur강의 발원지는 Pamir-i-Wakhan 산 속에 있으며
빅토리아 호수에서 발원(發源)하지 않는다.
파미라천 남쪽으로 산을 넘으면 발로라국(鉢露羅國)이 있는데 금과 은이 많이 나며 특히 금의 빛깔은 마치 불과도 같다.
이 강으로부터 동남쪽으로 산을 올라 험한 길을 걸어가면 사람들이 사는 마을은 없고 오직 얼음과 눈 뿐인데 이곳으로 5백여 리를 가다 보면 걸반타국(▩盤陀國)에 도착한다.
18) 걸반타국(▩盤陀國)
걸반타국37)의 둘레는 2천여 리인데 나라의 큰 도성은 거대한 암석으로 이루어진 산봉우리에 자리 잡고 있고 사다하(徙多河)를 등에 지고 있으며 둘레는 20여 리에 달한다. 산봉우리가 서로 이어져 있고 강과 초원은 좁다. 곡식은 넉넉히 수확되지 않으며 보리와 콩은 풍성하다. 숲과 나무들은 드물고 꽃과 과일도 적다. 높고 낮은 땅이나 언덕·성읍은 텅 비어 황폐하다. 풍속은 예의가 없고 사람들은 학예에 관해 거의 알지 못한다. 성품이 사납고 난폭하며 힘세고 용맹스럽다. 용모는 추하고 모직으로 짠 옷을 입는다. 문자와 언어는 거사국(佉沙國)과 대체로 같다. 그런데 돈독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서 부처님의 법을 숭배한다. 가람은 10여 곳이 있고 승도는 5백여 명 있는데 소승의 가르침인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를 익히고 있다. 지금의 왕은 순박하고 3보를 깊이 존경하고 있으며 자세와 용모가 단정하며 기품이 있고 마음이 굳어 학문을 좋아한다.
37) 범어로는 kharbanda이며 오늘날의 타쉬쿠르간(Tashkurghan)이다.
건국이래 오랜 세월이 흘렀으므로 스스로를 지나제파구달라(至那提婆瞿呾羅)38)[당나라 말로는 한일천종(漢日天種)이라고 한다]라고 부른다.
38) 범어로는 c na-deva-gotra이다.
이 나라의 선조는 총령 안의 거친 평원에 자리 잡았다고 한다. 옛 파리랄사국(波利剌斯國)의 왕이 한(漢)의 지역에서 아내를 맞이하여 함께 돌아오는 길에 이곳에 이르렀을 때 마침 전쟁이 일어나서 동서의 길이 끊기게 되었다. 그래서 결국 왕녀를 외딴 산봉우리에 두게 되었다. 이 산은 매우 험하고 위태로워서 벼랑에 사다리를 걸치고 오르내려야 했지만 그래도 그는 그 산 주위에 경비를 세우고 밤낮으로 경호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석 달이 지나자 반란을 일으킨 적들이 비로소 평정되었다. 왕은 귀로에 오르려 하였는데 왕녀가 이미 임신 중이었다. 사신은 놀라서 무리들에게 말하였다.
"왕께서 명하여 부인을 맞아들이다 이런 병란에 휩쓸려 거친 평원에서 노숙을 하며 하루하루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여 왔다. 우리의 왕은 덕과 위엄이 있어 요망한 기운을 평정한 뒤에 나라로 돌아가려 하는데 이렇게 왕의 부인이 임신을 하게 되었다. 이 일을 곰곰이 생각해 보건대 분명히 근심스러운 일이 벌어져 어쩌면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주범을 찾아서 그를 죽이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심문을 하며 소란을 피웠지만 진실을 밝혀내지 못하였다. 이 때 부인을 모시던 몸종이 사신에게 말하였다.
"서로 탓하지 마십시오. 이 일은 부인이 신과 만났기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매일 정오가 되면 장부 한 사람이 태양으로부터 말을 타고 이곳에 와서 부인을 만났습니다."
사신이 말하였다.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죄를 씻을 수 있겠느냐? 돌아가면 반드시 죽음을 당할 것이고 이곳에 남아있어도 우리를 토벌하러 올 것이다. 오도가도 못할 지경이니 어찌해야 될지 모르겠구나."
그러자 사람들이 말하였다.
"이 일은 보통 일이 아니니 누가 감히 처벌을 받으려 하겠습니까? 국외에서 처벌을 기다리며 지금은 잠시 시간을 두고 보기로 합시다."
그리하여 이내 돌산 봉우리 위에 궁을 짓고 숙소를 세운 뒤에 둘레가 3백여 걸음에 달하도록 궁을 에워싸고 성을 구축한 다음 왕녀를 왕으로 세웠다.39) 그리고 관직을 세우고 법을 제정하였다.
산달이 되자 여왕은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용모가 아름다웠다. 어머니가 섭정하면서 아들을 왕으로 모셨다. 아들은 허공으로 날아오르며 바람과 구름을 자유롭게 다루었다. 왕의 위엄과 덕은 널리 퍼졌고 그의 명성과 가르침은 아득한 곳까지 두루 미쳤다. 그리하여 가까운 주변 국가에서 신하의 예를 갖추지 않는 곳이 없었다.
39) 타쉬크루간에서 이 바위산의 요새의 흔적은 오늘날에도 남아있다. Taghdumbash- Pamir의
계곡에서 중국쪽으로 내려가는 도중, 강기슭에 고립해서 돌출해있는 바위산 위에는 폐허가
되어있기는 하지만 중국 변경의 요새에서 볼 수 있는 장성풍(長城風)의 건축법에 의한 성벽을
지금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으며, 이 지역 사람들은 이것을 '왕녀(王女)의 솔도파'라고 부르고
있다.
이 왕이 세상을 떠나자 이 성에서 동남쪽으로 백여 리쯤 떨어진 거대한 산의 암벽 석실 속에 장사지냈다. 그런데 그 시체가 바짝 말라 지금도 부서지지 않고 있으며 그 모습은 파리하고 수척한 사람이 막 잠들어 있는 모습과 같다. 이따금 그의 옷을 바꿔 입히고 언제나 향과 꽃을 올리고 있다 자손들은 대대로 오늘날까지 그 선조의 출생에 대해서 어머니는 바로 한(漢)나라 사람이고 아버지는 곧 태양신의 종족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스스로를 일컬어 '한일천종(漢日天種)'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 왕족의 용모는 중국 사람과 같고 머리에는 네모진 관을 쓰고 있으며 호복(胡服)을 입고 있다. 그러나 그 후대에 이르러 세력이 쇠퇴해져서 지금은 강국의 핍박을 당하고 있다.
무우왕40)은 당대에 걸출한 인물로서 그가 세상을 다스리게 되자 그 궁 안에 솔도파를 세웠다. 그 왕이 뒤에 궁중의 동북쪽으로 거처를 옮기자 그 옛 궁에 존자 동수(童受) 논사41)를 위해 승가람을 세웠다. 누대와 전각이 높고 넓으며 불상은 위엄이 있었다.
40) 기원전 2세기 공작(孔雀) 왕조의 아육왕은 아니다. 동명이인이다.
41) 부법장(付法藏) 제18조로 저서가 수십 부 있다고 하지만 전해지지는 않았다.
존자는 달차시라국(呾叉始羅國)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총명하여 일찍부터 세속의 번뇌를 떠나 불교 경전들을 연구하여 노닐었고 현묘한 이치를 깊이 음미하였으며 날마다 3만 2천 마디의 문구를 암송하였고 겸하여 3만 2천 권의 책도 썼다. 그런 까닭에 그의 학문은 당시의 인재들 가운데 가장 뛰어났고 그 이름은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그는 부처님의 바른 법을 세우고 삿된 견해를 부수었으며 그의 품격 있는 논의는 맑고 분명하였으며 어떠한 논쟁에서도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5인도에서 한결같이 그를 높이 받들어 모셨는데, 그는 수십 부에 달하는 논서를 지었으며 이것은 모두 널리 유포되어 그 논서를 익히고 공부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그가 바로 경량부(經量部)의 조사(祖師)였다. 당시 동쪽에는 마명(馬鳴)이 있었고. 남쪽에는 제바(提婆)가 있었고, 서쪽에는 용맹(龍猛)이 있었으며, 북쪽에는 동수(童受)가 있었다. 사람들은 이들을 가리켜 '네 개의 태양이 세상을 비춘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나라의 왕은 존자의 위덕에 관해서 듣고 병사를 일으키고 민중들을 동원해 달차시라국을 정벌한 뒤에 협박하여 존자를 자신의 나라로 모시게 되었으며 이 가람을 지어서 그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표하였다.
성의 동남쪽으로 3백여 리를 가다 보면 거대한 암벽에 이르는데 이곳에 석실이 두 곳 있다. 이 석실에는 각각 한 사람의 나한이 멸진정42)에 들어있는데 단정하게 앉아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이다. 그 모습은 야윈 사람과도 같고 피부와 뼈는 썩지 않았다. 이미 7백여 년이 지났지만 그들의 머리카락과 수염이 항상 자랐으므로 스님들이 해마다 그들의 머리를 깎아주고 옷을 갈아 입히고 있다.
42) 범어로 nirodha-sam pattidlau이며 멸수상정(滅受相定)이라고도 하고 멸진삼매(滅盡三妹)라고도
일컫는다. 심불상음행법(心不相應行法)의 하나이다. 무소유처(無所有處)의 번뇌를 떠난 성자(聖者)가
그 정(定)의 경지를 무여열반(無餘涅槃)의 고요함에 견주어 무심(無心)의 적정경(寂靜境)을 즐기기
위해 들어가는 정(定)이니, 이 정을 닦음으로서 무색계(無色界)의 제4천인 유정천(有頂天)에
태어난다고 한다.
거대한 암벽에서 동북쪽으로 산봉우리를 넘고 험난한 길을 지나서 2백여 리를 가다 보면 분양사라(奔逋論反穰舍羅)43)[당나라 말로는 복사(福舍)라고 한다]에 이른다. 복사는 총령의 동쪽 산등성이에 위치해 있고 네 산의 한가운데에 있으며 토지는 4방 백여 경(頃)에 달하며 한가운데는 지대가 낮다. 겨울뿐만 아니라 여름에도 눈이 쌓여있으며 찬바람이 매섭게 불어댄다. 밭은 소금기가 많이 섞여있어서 풍작을 거두지 못하며 나무와 숲이 없고, 있는 것은 오직 가느다란 풀뿐이다. 때때로 무더워지기도 하지만 대체로 눈보라가 많이 친다. 사람들이 이 나라에 막 들어오면 그 순간 운무가 일어난다. 상인들이 오가지만 그들이 겪는 고통은 극심하다.
43) 범어로는 pu( ) a ala이며. 자선사업을 하는 곳, 즉 복을 베푸는 집이다.
옛 노인들의 말에 의하면, 옛날 장사치가 만여 명의 무리들과 함께 낙타 수천 마리에 보화를 싣고 장사를 하러 왔다가 눈보라를 만나 사람과 동물들이 모두 목숨을 잃을 지경에 놓였다. 때마침 겁반타국에 대아라한이 있었는데 그가 멀리서 이들이 재앙을 만난 것을 보고 가엾게 여겨서 신통력으로 날아와 그들을 구해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아라한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 이미 그들은 숨을 거두고 난 뒤였다. 이에 온갖 진귀한 보석들을 모두 거두고 그들이 지녔던 것을 한데 모아 숙소를 세우고 재물들을 비축해 둔 뒤 이웃나라에 땅을 사서 변방의 거주민들을 돕고 오가는 사람들에게 보시의 은덕을 베풀었다. 그런 까닭에 오늘날 행인이나 상인들은 모두 그 보시를 입고 있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총령의 동쪽 산등성이를 내려가서 가파른 산봉우리를 오르고 깊은 계곡을 지나 계곡을 따라 난 험한 길을 가면 눈과 바람이 잇달아 불어닥친다.
이렇게 8백여 리를 가다 보면 총령을 벗어나서 오쇄국(烏鎩國)에 이른다.
19) 오쇄국(烏鎩國)
오쇄국44)의 둘레는 천여 리에 달하고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10여 리에 달한다. 남쪽으로는 사다하(徙多河)에 접해 있는데 토지가 비옥하고 농사가 아주 잘 된다. 나무와 숲이 울창하고 꽃과 과일이 번성하다. 여러 옥(玉)들이 아주 많이 나는데, 즉 백옥(白玉)·예옥(黳玉)·청옥(靑玉) 등이 있다. 기후는 온화하고 바람과 비가 순조롭다. 풍속은 예외가 없고 사람들의 성품도 강건하고 난폭하다. 남을 잘 속이면서도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문자와 언어는 거사국(佉沙國)과 비슷하고 용모는 추하며 가죽옷과 털옷을 입는다. 그러나 부처님의 법을 믿고 공경하며 받들고 있다. 가람은 10여 곳이 있고 승도는 천 명에서 조금 모자란다. 이들은 소승의 가르침인 설일체유부를 배우고 있다. 수백 년이래 왕족의 후사가 끊겨서 지금은 달리 군주를 내세우지 않고 걸반타국(▩盤陁國)에 복속되어 있다.
44) 범어로는 u 이며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매우 다양한 설이 있다. 대체로 야르칸드 혹은
그 상류의 어딘가에 위치한다고 추정된다.
성의 서쪽으로 2백여 리를 가다 보면 큰 산에 도착하게 되는데, 운무가 자욱히 끼어있어 돌을 건드려도 구름이 일어난다. 낭떠러지가 몹시 가팔라서 지금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다. 그 꼭대기에 솔도파가 있는데 참으로 그 솜씨가 훌륭하다.
그 지방에서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수백 년 전 산의 벼랑이 무너져 내렸을 때 그 속에 스님이 눈을 감고 앉아있었다. 그의 체구는 당당하고 컸지만 모습은 야위어있었다. 머리카락과 수염은 아래로 길게 길러 어깨를 덮고 얼굴을 온통 가리고 있었다. 사냥하던 사람이 이 모습을 발견하고 왕에게 가서 보고하자 왕이 친히 그를 찾아가 예를 올렸으며 도읍에 사는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부르지 않았는데도 그곳으로 가서 향을 사르고 꽃을 뿌리며 다투어 공양을 올렸다.
왕이 말하였다.
"대체 이 사람은 누구이기에 이토록 위엄이 있단 말인가?"
이 때 어떤 필추가 대답하였다.
"이분의 머리카락과 수염은 길게 자란 것이며, 입고 있는 옷은 가사인데 멸심정(滅心定)에 든 아라한이 분명합니다. 멸심정에 든 사람은 먼저 기한을 정해놓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건치가 울리는 소리를 듣는다고 하고 어떤 이는 태양이 비치기를 기다린다고 합니다. 이런 일깨움이 있으면 곧 선정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만일 일깨움이 없으면 고요히 선정에 들어 조금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선정의 힘이 몸을 유지하고 있어 끝내 쓰러지는 일은 없습니다. 거친 음식물로 버티는 몸은 선정에서 나오면 곧 죽어버리기 때문에 소유(蘇油)45)를 부어서 몸을 충분히 적셔주어야 합니다. 그런 뒤 북을 두드려서 선정의 마음에서 깨어나도록 일깨워 줍니다."
왕이 말하였다.
"그렇게 하겠다."
그리고 나서 건치를 두드리니 그 소리가 울리고서야 비로소 아라한은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한참 있다가 말하였다.
"당신들은 누구인데 몸체가 작고 가사를 입고 있습니까?"
그들이 답하였다.
"나는 필추입니다."
그가 물었다.
"그런데 나의 스승이신 가섭파여래께서는 지금 어느 곳에 계십니까?"
대답하였다.
"대열반에 드신 지 이미 오래입니다."
아라한은 이 말을 듣자 눈을 감고 처연하게 감회에 젖었다. 그리고 이내 다시 물었다.
"석가여래께서 세상에 나오셨습니까?"
그들이 답하였다.
"세상에 나오셔서 세상 사람들을 인도하신 뒤 적멸에 드셨습니다."
그가 이 말을 듣자 다시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자 일어서서 허공으로 날아오른 뒤 신통한 변화를 나타내 보이더니 불을 만들어서 몸을 태웠다. 그의 유해가 땅에 떨어지자 왕이 그 뼈를 수습해서 솔도파를 세웠다.
45) 우유를 끓여서 만든 기름으로 먹거나 몸에 바른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산지와 광야를 5백여 리 가다 보면 거사국(佉沙國)[구역에서 말하는 소륵(蘇勒)이란 바로 그 성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정음(正音)으로는 마땅히 실리흘률다저(室利訖栗多底)라고 불러야 한다. 소륵(疏勒)이라는 말은 오히려 잘못된 말인 것 같다]에 도착한다.
20) 거사국(佉沙國)
거사국46)의 둘레는 5천여 리이고 모래와 자갈이 많고 토양은 적다. 농사는 번성하고 꽃과 과일도 풍성하다. 가는 모직물로 된 옷이나 양탄자를 짜는 기술이 훌륭하다. 기후는 온화하고 화창하며 비와 바람은 순조롭다. 사람들의 성품은 난폭하고 풍속은 남을 속이기를 잘한다. 예의가 경박하고 학예도 천박하다. 그들에게는 자식을 낳으면 머리를 눌러서 평평하게 만드는 풍속이 있다. 용모는 추하고 비천하며 문신을 새기고 눈동자가 녹색이다. 그들의 문자47)는 인도의 문법을 따르고 있다. 비록 생략되었거나 변해버린 것이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인도의 필법 양식을 지키고 있다. 언어48)는 어휘와 발음이 여러 나라들과 다르다. 부처님 법에 대한 믿음이 굳고 부지런히 복과 이익을 베풀고 있다. 가람은 수백 곳이 있으며 승도는 만여 명이 있는데, 이들은 소승의 가르침인 설일체유부를 배우고 있다. 하지만 그 이치를 깊이 연구하지 않고 대부분은 그저 그 글만을 외우고 있다. 그러므로 3장이나 『비바사』를 모두 외고 있는 사람이 많다.
46) 범어로는 kh a이며 지금의 타클라마칸 사막 서쪽 끝에 위치한 요지인 카쉬가르를 가리키는
것은 분명한데 거사(佉沙)의 원음(原音)에 관해서는 다소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47) 이 지역의 불교시대의 유적에서 1906년 P. 페리오가 브라흐미 문자의 단편을 발견하였다.
당시의 중앙아시아와 그 밖의 다른 많은 지역과 마찬가지로 이 문자가 사용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48) 현장이 방문할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는 이 기사 외에 구체적인 것을 찾아볼 수 없지만
11세기에 이 지역에서 태어난 토르코인인 Ma m d al-Ka ghar는 그 저서인『토르코아라비아어
사전』에서, 이 지역은 위글루 문자가 사용되었으며 카쉬가르 교외에서는 K nj k 어가 사용되었고,
도시에서는 Kh q n 의 토르코어를 사용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성 안에는 한인(漢人)이
많이 살며 성 밖에는 전상(纏商, 이슬람 계통의 토르코인)이 모여 살고 있다.
이곳에서 동남쪽으로 5백여 리를 가다 보면 사다하를 건너 거대한 모래산을 넘어서 작구가국(斫句迦國)[구역에서는 조거(沮渠)라고 하였다]에 도착한다.
21) 작구가국(斫句迦國)
작구가국49)의 둘레는 천여 리에 달하며,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10여 리에 달하는데 견고하고 험난한 곳에 위치해 있으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매우 많다. 산과 구릉들이 서로 이어져 있으며 자갈과 돌이 길에 가득 깔려 있다. 두 강50)을 끼고 있어서 농사가 아주 잘 되며 포도·배·능금과 같은 과일들이 아주 풍성하다. 이따금 매서운 바람이 분다. 사람들은 조급하고 난폭하며 풍속은 남을 속일 줄만 알고 공공연히 겁탈과 도둑질도 일삼고 있다. 문자는 구살단나국(瞿薩旦那國)과 같은데 언어는 차이가 있다.51) 예의가 경박하고 학예도 비천하다. 3보에 대한 믿음이 돈독하고 복과 이익을 짓는 행동을 즐긴다. 가람은 수십 곳이 있는데 대부분이 무너졌다. 승도는 백여 명 정도 있는데, 이들은 대승의 가르침을 배우고 있다.
49) 범어로는 cakoka이다. 이 지역은『위서(魏書)』와『북사(北史)』에서는 주거(朱居)·
주거반(朱居半)·주구파(朱駒波)로,『송운행기(宋雲行紀)』에는 주구파(朱俱波),
수(隋)나라 비장방(費長房)이 편찬한『역대삼보기』에는 차구가(遮拘迦)·차거가(遮居迦)로
나타나며, 중앙아시아 출토의 고문헌에서는 cugupan·cugopa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현장이 기술한 거사국 카쉬가르로부터의 거리나 방위·지세 등을 살펴볼 때 지금의 엽성(葉城),
즉 합이갈리극(哈爾噶里克, Karghalik)로 추정된다.
50) 카르갈리크 지역 일대의 북부를 서남 파미르 고원으로부터 동북쪽으로 흐르는 야르칸드강과
그 남쪽의 카르갈리크 근방을 같은 방향으로 흘러서 사막 속으로 사라지는 Tiznaf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 두 강 사이에는 작은 물줄기가 있어서 이 지방을 풍요롭게 만들고 있다.
51) 현장은 이 지역의 문자와 언어를 모두 우전(于闐, 코탄)의 그것과 비교하고 있지만 코탄의
문자와 언어는 그 주변에서 다수 출토된 문서를 통해볼 때, 그 문자는 인도에서 행해지는
브라흐미 문자에 지방적인 수식을 조금 가한 것이라는 점, 그 언어는 처음에는 "알려지지
않은 언어(unknown language)"라고 하였지만, 오늘날에는 동(東)이란어파에 속하는
말이라는 점이 판명되어 코탄어라 불리고 있다. 하지만 이 지역에서 종합적인 문서가
출토된 적이 없어서 그 상세한 차이를 판명할 수 없다. 코탄어에는 카쉬가르의 동쪽 사막
속에 Maralbashi에서 사용되었던 방언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지만 그것과의 차이점도
불분명하다.
이 나라의 남쪽 경계에 큰 산이 있는데 벼랑과 산봉우리가 높고 험하며 뾰족한 산봉우리들이 첩첩으로 이어져 있다. 초목은 겨울의 추위도 이겨내고 봄과 가을에도 그대로이다. 시냇물은 깊은 여울을 돌다가 물보라를 4방으로 뿌리며 흘러내린다. 암굴(巖屈)과 석실(石室)이 산의 벼랑과 숲 속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인도에서 성과(聖果)를 증득한 많은 사람들이 신통력을 부려서 가볍게 날아올라 멀리 노닐다가 이곳에 머물렀다. 그리하여 이곳에서 적멸에 든 아라한들이 아주 많으며 따라서 솔도파들도 많이 있다. 지금도 여전히 세 명의 아라한이 암굴 속에 기거하면서 멸심정에 들어있는데 그들의 형체는 야윈 사람과도 같고 머리와 수염이 항상 길게 자란다. 그런 까닭에 사문들이
때때로 이곳에 와서 잘라주고 있다. 그리고 이 나라에는 대승경전52)의 수가 아주 많다. 부처님의 법이 퍼진 곳 가운데 이처럼 성대하게 행해진 곳도 없을 것이다. 십만송(十萬頌)으로 한 부(部)를 이루는 경전이 열 종류를 훨씬 웃돈다. 이후로 그것은 널리 유포되었으며 실로 광대하게 퍼져 나갔다.
52) 이 지역에 대승불교가 성행하였다는 사실은『역대삼보기』권12의『신합대집경(新合大集經)』
권60 항목에 수(隋) 사나굴다(闍那崛多)의 말로써 "우전의 동남쪽 2천여 리에 차구가국(遮拘迦國)이
있다. 그 왕은 믿음이 순수하고 대승을 존중하며 다른 나라의 이름 있는 승려로서 그 나라에 들어온
자를 모두 다 시험해 보아서 만일 소승을 배우는 자라면 곧 바로 내보내고 머물게 하지 않는다.
그런데 마하연(Mah y na,대승)을 익히는 사람이라면 그를 청하여 머물게 하고 공양한다. 왕궁에는
친히 마하반야·대집·화엄의 1부 대경(大經)과 10만 게(揭)를 지니고 있는데, 왕이 친히 간직하고
있으며 몸소 자물쇠를 들고서 돌려 읽을 때에는 곧 열어서 향과 꽃으로 공양한다. 또 도량 안에는
갖가지 장식과 온갖 보배를 빠짐없이 갖추고 있으며 온갖 꽃들과 제철이거나 제철이 아닌 과일을
걸어두고 여러 작은 나라의 군주들을 불러 들여서 예배하게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산봉우리를 넘고 계곡을 건너 8백여 리를 가다 보면 구살단나국(瞿薩旦那國)[당나라 말로는 지유(地乳)라고 하는데, 이 말은 그 지방의 표준어이다. 속어로는 이것을 한나구(漢那九)라고 하는데 흉노(匈奴)는 이 나라를 가리켜 우둔(于遁)이라고 한다. 제호(諸胡)는 계단(谿旦)이라고 하고 인도에서는 이 나라를 가리켜 굴단(屈丹)이라고 하며 구역에서는 우전(于闐)이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에 도착한다.
22) 구살단나국(瞿薩旦那國)
구살단나국53)의 둘레는 4천여 리이며54) 모래와 자갈이 태반을 이루고 있는데 그 땅은 좁다. 농사가 잘 되며 온갖 과일이 많이 난다. 양탄자와 가는 모직물을 생산하는데 가늘게 실을 뽑아내는 기술이 특히 뛰어나다. 또 백옥(白玉)과 예옥(黳玉)을 생산하고 있다. 기후는 온화하고 화창하며 회오리바람이 불어서 먼지가 날아다닌다. 풍속은 예의를 알며 사람들의 성품은 온화하고 공손하다. 학문을 좋아하고 예능을 익히며 여러 기술에 널리 통달해 있다. 인민들은 부유하고 집집마다 편안한 마음으로 생업에 종사하고 있다.
53) 범어로는 gost na이며 즉 오늘날의 화전(和闐)이다. 오늘날에는 화전은 Khotan, 우전(于闐)은
동방의 keriya를 나타낸다.
54) 구살단나국의 대도성(大都城)에 대해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화전 지방은 곤륜산계
(崑崙山系)인 티벳고원으로부터 북쪽으로 흐르는 동쪽의 옥롱객십하(玉隴喀什河, Yurung
Kash Darya:白玉河)와 서쪽의 합납객십하(哈拉喀什河, Kara Kash Darya:黑玉河)와의
사이에 위치한 비옥한 지역이다) 이 두 강은 이윽고 사막에서 합류하여 화전하(和闐河)라고
불린다. 현재의 화전 거리는 백옥하에 가까운 지점에서 동쪽의 회성(回城)과 서쪽의
한성(漢城)으로 이루어져 있다. 옛날 화전의 도시는 지금의 한성(漢城:新城이라는 뜻)의
서문(西門)으로부터 약 5마일 떨어진 지점에 있는 Y tkan이라 불리는 작은 부락이 산재한
폐허에 해당한다.
나라에서는 음악을 숭상하고 있으며 사람들도 춤과 노래를 즐긴다. 소수의 사람들은 털옷이나 모직옷을 입고 대부분은 명주를 기운 옷[絁紬]이나 흰 모직물[白氈]의 옷을 입는다. 행동거지에는 예의가 있고 풍속에는 기강이 있다. 문자와 법률·제도는 인도의 것을 따르고 있지만 필법이나 양식은 조금 바꾸었으므로 새로운 부분도 있다. 말은 여러 나라들과 다르다.55) 부처님의 법을 숭상하고 가람은 백여 곳이 있으며 승도는 5천여 명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대승법의 가르침을 익히고 있다. 왕은 매우 굳세고 용감하며 부처님의 법을 깊이 받들고 있어서 스스로를 가리켜 비사문천(毘沙門天)의 후손이라고 말하고 있다.
55) 화전의 동북동쪽 사막의 유적인 단단 우일리크(Dandan-Uiliq)에서 발견된 문서에 들어있는
인도 문자는 브라흐미 문자이고 대략 8세기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언어는 동(東) 이란어에
속하는 코탄어이다.
옛날 이 나라는 허허벌판의 광야였을 뿐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는데 비사문천이 이곳에 와서 머물렀다. 무우왕의 태자가 달차시라국에 있다가 눈을 도려내는 일을 당하자 무우왕이 격노하여 태자를 보좌하던 신하를 내쫓았다. 또 그 호족들을 유배 보내어 거주하던 설산의 북쪽에서 내쳐서 황량한 골짜기에 자리 잡게 하였다. 유배당한 사람들은 맹수들을 쫓아내며 이 서쪽 경계에 도달하였다. 그리하여 뛰어난 사람을 천거하여 왕으로 받들었다. 당시에는 동쪽 지역 황제의 아들이 유배를 당하여 이리저리 유랑하다가 이 동쪽 경계에 와서 살았다. 그리고 아랫사람들의 권고에 의하여 스스로를 왕이라 칭하였다. 세월이 꽤 흘렀어도 두 나라는 문화를 서로 교류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왕이 각각 사냥을 하러 나왔다가 우연히 황량한 늪에서 서로 만나 자신의 가계(家系)를 따지다가 서로의 우위를 주장하며 다투게 되었다. 말이 거칠어졌고 마침내 서로 병사를 일으키고자 하였다. 그런데 신하가 이렇게 간언하였다.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사냥하러 와서 싸움이라니요? 게다가 지금은 군대와 무기도 미처 갖추어지지 못하였습니다. 돌아가셔서 병사들을 정비한 뒤에 날을 정하여 모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에 가마를 돌려 각자의 나라로 돌아간 뒤에 군마(軍馬)를 정비하고 훈련을 시켰으며 병사들을 독려하였다. 마침내 약속한 날이 되자 병사들을 모아 깃발을 높이 세우고 북을 두드리며 나아가 대치하였다. 날이 밝자 마침내 전투가 벌어졌는데 서쪽 나라의 군주가 불리해지자 북쪽으로 달아났다. 동쪽 나라의 군주는 그를 쫓아가서 목을 베고 승리를 얻었다. 그는 군주를 잃은 나라의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도읍을 중간 지역으로 옮겨서 성곽을 세우고자 하였다. 그러나 어느 곳이 적절한 땅인지 몰라 일을 성사시키지 못할까 두려웠다. 그리하여 멀고 가까운 곳에 널리 포고령을 내려서 지리에 해박한 사람을 찾았다.
이 때 몸에 회를 바른 외도가 있었는데 그는 커다란 표주박을 짊어지고 있었다. 그는 표주박에 물을 가득 담아서 앞으로 나아가 말하였다.
"제가 지리를 압니다."
그리하여 그 물을 흘려보내니 물은 굽이굽이 돌고 돌아서 다시 처음 흘려보냈던 곳으로 왔다가 갑자기 급하게 흐르더니 어느 순간 홀연히 물이 보이지 않았다. 그 물이 흐르던 흔적을 따라서 성곽의 기초를 높이 세우고 공사를 시작할 수 있었고 드디어 이 나라를 통치하게 되었다. 지금의 왕이 이 성을 도읍으로 정하였는데 성은 그리 높지 않지만 공격을 받아도 쉽게 함락되지 않았으므로 옛날부터 지금까지 이 성을 빼앗은 사람이 없었다. 그 왕이 수도를 옮기고 마을을 만들고서 나라를 세우고 백성들을 평안하게 하였다.
그와 같은 위업을 이루고난 왕은 이미 노인이 되어있었다. 그러나 아직 후사를 잇지 못하였기 때문에 가계가 끊어질까 두려웠다. 그리하여 비사문천신에게 가서 기도를 올리며 후사를 내려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자 신상(神像)의 이마가 갈라지더니 그 속에서 갓난아이가 나왔다. 왕이 그 아이를 받들고 가마를 돌려 돌아오니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경사스러워 하였다. 그런데 아이가 인간의 젖을 먹지 않았다. 왕은 아이가 오래 살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다시 신사로 가서 거듭 아이를 길러줄 것을 청하였다. 그 순간 신상 앞의 땅이 불쑥 솟아올랐는데 그 모양이 마치 젖가슴과도 같았다. 신이 내려준 아이는 그 젖을 먹고 자라나게 되었다. 아이의 지혜와 용기는 앞서 그 어떤 사람보다도 빛났으며 그의 덕풍과 교화는 널리 사람들에게 미쳤다. 그리하여 마침내 신사(神祠)를 지어 조상에게 제사지냈다. 그 뒤로 대대로 이 일을 이어받아서 나라를 계승하여 군림하여 그 왕통이 끊어지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신묘(神廟)에는 수많은 진귀한 보배들이 있으며 제사지내는 일이 끊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땅의 젖[地乳]'으로 왕을 길렀기 때문에 이것을 나라 이름으로 삼았다.
왕성의 남쪽으로 10여 리를 가다 보면 거대한 가람이 있다. 이 나라의 선왕이 비로절나(毘盧折那)56)[당나라 말로는 편조(遍照)라고 한다]아라한을 위하여 세운 것이다.
56) 범어로는 virocana이며 비로자나(毗盧遮那)·비로사(毗盧舍)·미로자나(微盧者那)라고도
음사한다. 지금의 Y tkan 남남동쪽 13마일 떨어진 지점의 Chalma-kaz n의 폐허가 이
사원의 터라고 추측된다.
옛날 이 나라에 부처님의 법이 아직 미치지 못하였을 때 아라한이 가습미라국으로부터 이 숲 속에 와서 조용히 가부좌하여 선정을 익히고 있었다. 이 때 이 모습을 본 어떤 사람이 그 용모와 복장에 놀라서 그의 모습에 관하여 낱낱이 왕에게 보고하였다. 왕은 친히 그곳으로 나아가서 아라한의 용모와 행동거지를 살펴보고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데 홀로 깊은 숲 속에 있는 것이오?"
아라한이 답하였다.
"나는 여래의 제자로서 조용하게 지내며 선정을 닦고 있는 중입니다. 왕께서는 복을 짓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찬양하며 가람을 세우고 승가 대중을 불러 모아야 마땅합니다."
왕이 물었다.
"여래라는 자는 어떤 덕을 갖고 있으며 어떤 신이기에 그대가 숲 속에서 지내며 고행을 하면서까지 그의 가르침을 받드는 것인가?"
나한이 답하였다.
"여래는 모든 생명을 사랑하고 가엾게 여기시며 삼계(三界)를 인도하시기 위해 모습을 나타내시거나 숨기시면서 나고 죽는 오묘한 이치를 보이십니다. 그 법을 따른다면 생사를 벗어날 수 있지만 그 가르침을 깨닫지 못하면 애욕의 그물에 걸려들고 말 것입니다."
왕이 말하였다.
"진실로 그대의 말과 같다면 구체적인 일로 나타내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이렇게 말로 따지는 것보다 더 명백해질 것입니다. 대성(大聖)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만일 그분이 나를 위하여 모습을 나타내 보여 주신다면 우러러 뵌 뒤에는 마땅히 가람을 세워서 마음을 기울여 귀의하고 믿으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치겠습니다."
그러자 나한이 말하였다.
"왕께서 먼저 가람을 세우시어 공을 이루시면 감응이 있을 것입니다."
왕은 그 청을 따라서 승가람을 세우니 멀고 가까운 곳의 모든 사람들이 몰려와서 법회를 열고 경하하였다. 그러나 사람을 불러 모을 때 두드려야 하는 건치가 없었다.
왕이 나한에게 말하였다.
"가람은 완성되었는데 부처님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나한이 말하였다.
"정성이 지극하니 부처님의 보살핌이 멀지 않았습니다."
왕이 나아가 예를 올리며 기도하자 갑자기 공중에서 불상이 나타나 내려와서 왕에게 건치를 내려주었다. 이로 말미암아 진실하게 믿게 되었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치게 되었다.
왕성의 서남쪽으로 20여 리 떨어진 곳에 구실능가산(瞿室伽山)57)[당나라 말로는 우각(牛角)이라고 한다]이 있는데 산봉우리 두 개가 솟아있고 4방이 절벽이다. 절벽 사이에 가람이 하나 서있는데 그 속에 모셔진 불상은 이따금 밝은 빛을 내고 있다. 옛날 여래께서 이곳에 오셔서 여러 하늘과 인간을 위해서 법의 요체를 간략하게 설하시며 이 땅에 나라가 세워지고 부처님께서 남긴 법을 믿고 대승을 따라 행할 것이라고 기약하셨다.
57) 범어로는 go- ga이며 '소의 뿔'이란 뜻이다. Y tkan의 남남서쪽 11마일, 화전오아시스의
서남단, 흑옥하(黑玉河)의 동쪽 기슭에 있는 Kohm ri Hill로 추정된다. 이 산에는 이 지역
사람들이 성지로 숭배하는 석굴이 있는데 이곳에서 1892년 1, 2세기경에 쓴 것으로 보이는
카로슈티 문자에 의한 인도 속어의『법구경』이 발견되었다.
우각산 암벽에는 커다란 석실이 있는데 그 속에 아라한이 멸심정에 들어서 자씨불(慈氏佛)을 기다리고 있다. 수백 년 동안 공양 올리는 일을 한 번도 그만둔 적이 없었는데 근래에 벼랑이 무너지자 석실로 통하는 길이 막혀버렸다. 국왕이 이 병사들을 동원하여 무너진 돌을 치우려 하였지만 검은 벌떼가 몰려들어 사람들에게 독을 쏘았다. 그래서 지금도 석문은 열리지 않고 있다.
왕성 서남쪽으로 10여 리를 가면 지가파박나(地迦婆縛那)가람58)이 있는데 그 속에는 협저(夾紵)59) 입불상(立佛像)이 모셔져 있다. 본래 굴지국(屈支國)으로부터 이곳으로 와서 머물게 된 것이다. 옛날 이 나라에 신하가 있었는데 견책을 당하여 굴지국에서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는 언제나 이 불상에게 예를 올렸는데, 훗날 본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온 마음을 기울여서 멀리서나마 예불을 올렸다. 그러던 어느 날 한밤중에 불상이 갑작스레 저절로 이곳으로 오자 그 사람이 집을 희사하여 이 가람을 세웠다.
58) 위치는 Y tkan의 서남쪽으로 약 4마일 떨어진 지점인 B wa-Kambar의 옛 터로 추정된다.
59) 건칠법(乾漆法)에 해당하는 당대(唐代)의 용어이다.
왕성의 서쪽으로 3백여 리를 가다 보면 발가이성(勃伽夷城)60)에 도착한다. 이 성 안에는 부처님의 좌상이 안치되어 있는데 높이는 7척 남짓하고 얼굴과 모습이 아름다우며 위엄이 있고 숙연하다. 머리에는 보석으로 장식한 관을 쓰고 있는데 이따금 광명이 비친다. 그 지방에서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이 불상은 본래 가습미라국에 있던 불상이었는데 지극히 기도하여 이곳에 오게 되었다고 한다.
60) Bhagai, Bh gya 등으로 원음을 추정하지만 확정을 내릴 수 없다. 코탄으로부터 서쪽으로
나가는 주요도로상인 Pi lma 부근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옛날 어떤 나한이 있었는데 그의 사미 제자가 죽음을 맞이해 신맛이 나는 떡을 찾았다고 한다. 나한이 천안으로 그 모습을 보고서 구살단나국에 그 음식이 있음을 알고 신통력으로 이곳에 와서 구하여 가져다주었다. 사미가 그것을 먹고 난 뒤에 그 나라에 태어나기를 원하였다. 마침내 바라던 대로 그 나라의 왕자로 태어나게 되었다. 그가 왕위를 이어받자 그의 위엄은 멀고 가까운 곳에 두루 미쳤으며 마침내 설산을 넘어 가습미라국을 정벌하러 갔다. 가습미라국의 왕도 군마를 정렬하고 소집하여 변방의 오랑캐를 치고자 하였다. 이 때 아라한이 왕에게 간언하였다.
"병사들을 부려서 전투를 벌이지 마십시오. 내가 능히 그들을 물리치겠소."
이어서 나아가 구살단나왕을 위하여 여러 가지 법의 요체를 설해주었다. 왕은 처음에는 믿지 않고 여전히 병사를 일으켜 전쟁을 벌이려고 하였다. 그러자 나한이 마침내 이 왕이 전생에 사미였을 때 입었던 옷을 가져다가 보여 주었다. 왕은 옷을 보고 나서 숙명지(宿命智)를 얻었다. 그리하여 가습미라왕에게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고 우호를 나누었으며 병사들을 해산시켜 돌아가게 하였다. 그리고 사미 사절에 자신이 공양을 올렸던 불상을 봉양하고 군사들과 함께 예를 올리며 청하였다. 그러자 불상이 이 땅으로 온 뒤에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왕은 물러나서 가람을 세우고 승려들을 초청하였으며 자신의 왕관을 희사하여 불상의 머리 위에 올렸다. 지금 불상의 관은 바로 선왕(先王)이 보시한 것이다.61)
61) 이 전설은 우전국(于闐國)과 총령 저쪽 카시미르에 있어서 간다라 불교 미술과의 교섭을
이야기해주는 문헌상의 증거로서 주목할 만하다.
왕성의 서쪽으로 150∼160여 리를 가다 보면 거대한 사막의 길 한가운데에 구릉이 있는데, 이것은 모두 쥐가 파낸 흙이 쌓인 것이다.62) 그 지방에서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이 사막에 사는 쥐 가운데 큰 것은 고슴도치만 한데 그 털 빛깔은 금빛과 은빛이 섞인 듯 이채롭다고 한다. 쥐들은 자기들의 우두머리가 구멍에서 나와 다닐 때마다 쥐떼들이 무리를 지어 따른다고 한다.
62) 피아르마로부터 동쪽으로 16마일 떨어진 지점에 있는 Kum-rab t-P d-sh him Maz r로
추정된다. 20피트에 달하는 높은 반월형 사구(砂丘)가 연속해 있다. 그곳에는 지금
일반적으로 Kaptar-Maz r(비둘기의 冢墓)라 불리는 사당이 있는데 참배객들의 공양물로
살아가는 비둘기들이 무리를 지어 서식하고 있다. 일찍이 '성스러운 쥐'가 이슬람 시대에는
'성스러운 비둘기'로 변형되었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옛 전설의 면모를 간직하고 있는
성지이다.
옛날에 흉노들이 수십만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변방의 성을 노략질하러 나왔다가 쥐가 파서 쌓아놓은 흙더미 옆에 군대를 주둔시킨 일이 있었다. 이 때 구살단나왕도 수만 명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대적해내지 못할까 두려웠다. 한편 왕은 평소 흙더미 속에 사는 쥐를 기이하게 여기기는 하였지만 신령스러운 힘이 있는지 미심쩍어 하였다. 그리하여 오랑캐들이 쳐들어 와도 살아남을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신하들도 겁에 질리기만 하였지 아무런 계책도 세우지 못하였기 때문에 왕은 하는 수 없이 제단을 마련하고 향을 사르며 쥐에게 빌었다.
"바라건대 신령스러운 힘이 있다면 조금이라도 군사력에 도움을 내려주소서."
그 날 밤 구살단나왕은 꿈에 커다란 쥐를 보았는데 쥐가 왕에게 말하였다.
"삼가 힘을 돕고자 하오니 부디 일찍이 병사들을 정렬하소서. 다음날 아침 전투를 벌인다면 반드시 이기실 것입니다."
구살단나왕은 신령스러운 힘의 도움이 있을 것을 알고서 마침내 군마를 정렬하고 장수들에게 명하여 날이 새기 전에 전쟁터로 나아가서 멀리까지 적을 추격하여 덮치도록 하였다. 흉노들은 이 소식을 듣고 모두들 겁을 내면서 수레에 올라타고 갑옷을 입으려고 하였는데, 모든 말의 안장과 사람들의 옷, 활의 시위와 갑옷의 솔기 등 모든 띠나 실의 종류를 쥐가 모조리 쏠아 끊어 놓았다. 그 사이 구실단나왕의 군대가 이미 들이닥쳐 그들은 싸우지도 못하고 묶이거나 죽임을 당하였다. 이에 그 장수를 죽이고 병사들을 포로로 붙잡으니, 흉노들은 겁에 질려 이것은 신령이 왕의 군대를 도운 것이라고만 생각하였다. 구살단나왕은 쥐의 큰 은혜를 고맙게 생각하여 사당을 세우고 제단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대대로 이들을 존경하면서 특별히 진귀하게 여겼다.
위로는 군왕에서 아래로는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제사를 모시며 복과 도움을 구하였는데, 그 쥐구멍을 지날 때면 수레에서 내려서 종종걸음으로 빨리 나아가 절을 하며 지극한 공경심을 표하였다. 제사를 지낼 때는 복을 구하기 위해 옷이나 화살, 또는 향이나 꽃, 온갖 맛난 음식들로 공양을 올리며, 지극한 정성을 다하여 기도를 하면 많은 이들이 복과 이익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곧 재난을 당한다고 한다.
왕성의 서쪽으로 5∼6리를 가다 보면 사마약(娑摩若)승가람63)이 있다. 이 속에는 솔도파가 있는데 높이는 백여 척에 달하며 신령스러운 감응이 매우 많이 일어나며 이따금 신비한 빛이 비친다고 한다. 옛날 나한이 먼 곳에서 이 숲 속으로 와서 신통력으로 커다란 광명을 비추었다. 이 때 왕이 밤에 2층 누각에 올라 멀리서 숲을 바라보다가 광명이 환히 비치는 것을 보고서 그 내력을 물어보자 사람들이 말하였다.
"어떤 사문 한 사람이 멀리서 와있는데 숲 속에서 가부좌를 틀고서 신통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왕이 곧바로 가마를 준비하도록 명하여 몸소 그곳으로 가서 살펴보았다. 그리하여 지혜로운 현자라고 생각해 마음에는 존경심이 일어났다. 왕이 그의 풍모를 흠모하여 궁중으로 와줄 것을 완강히 청하자 사문이 말하였다.
"이 세상에는 각자 적합한 장소가 있으며, 뜻은 각자 있을 곳이 따로 있습니다. 깊은 숲과 늪지가 마음에 맞으니, 훌륭한 집과 높은 건물은 내가 찾아갈 곳이 아닙니다."
이 말을 들은 왕은 한층 존경하고 우러러보면서 깊이 존중하는 마음이 더해졌다. 그리하여 그를 위해서 가람을 세우고 솔도파를 일으켰다. 사문은 왕의 청을 받아서 결국 그곳에서 머물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왕은 감응을 통해 사리 수백 과[粒]를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크게 기뻐하면서도 혼자 이렇게 생각하였다.
'사리가 나의 정성에 감응한 것이 어찌하여 이렇게도 늦었단 말인가? 일찍 얻어서 솔도파 아래에 안치했더라면 어찌 훌륭한 유적지가 되지 아니하였겠는가?'
그리고 곧 가람으로 가서 사문에게 자세하게 말하자, 나한이 말하였다.
"왕께서는 근심하지 마시고 지금이라도 안치하십시오. 금·은·동·철·대석(大石)을 가지고 상자를 만들어 차례로 사리를 넣으십시오."
왕이 장인에게 명하자 하루도 안 되어 함이 완성되었다. 그리하여 여러 보석들을 가마에 싣고 가람에 도착하였다. 이 때 왕궁에서 시중을 드는 사람부터 관리,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이 광경을 보기 위하여 몰려든 사람들의 수가 만 명을 헤아렸다.
나한이 오른손으로 솔도파를 들어서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뒤에 왕에게 말하였다.
"이제 사리를 안장하십시오."
마침내 땅에 구멍을 파서 사리함을 안장하자 공사는 끝이 났다. 이에 솔도파를 내려놓았는데 조금도 기울어지는 부분이 없었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며 찬탄하였다. 그리하여 부처님을 믿는 마음이 더욱 굳어졌고 법을 공경하는 뜻이 더욱 강해졌다. 왕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일찍이 부처님의 힘은 생각조차 할 수 없고 신통력도 궁구하기 어렵다고 들었다. 어떤 때는 몸을 백억 가지로 나누고 또 어떤 때는 인간과 하늘에 그 모습을 나타내어 주시기도 한다고 들었다. 온 세계를 들어서 손바닥 안에 올려놓아도 그 속에 사는 중생들은 조금도 움직인다는 생각을 갖지 않으며, 법의 성품을 평범한 말씀으로 널리 연설하여도 중생은 자기 근기에 따라서 깨우침을 얻는다고 하였다. 바로 이런 부처님의 신통력이야말로 그 누구에게도 비길 데가 없으며, 부처님의 지혜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지에 있음을 의미한다. 부처님의 몸은 이미 세상에서 사라졌어도 여전히 그 가르침은 전해지고 있다. 그 교화를 즐기고 은택에 젖으며 도를 맛보고 그 풍모를 흠모하는 것이다. 이제 부처님의 사리를 얻어서 그 복의 도움을 크게 입게 되었으니, 사람들이여, 부지런히 깊이 존경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깊고 광대해져 밝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63) 이 원어는 sam j 일 것으로 추정한다. 티벳트에 전해오는 『우전국사(于闐國史)』에 의하면
코탄국왕 Vijaya-Virya가 성의 망루에서 멀리 바라보고 있었을 때 성 밖에 금은 빛의 광명이
비치는 것을 보았다. 그 위치를 찾아다니던 중 gum-stir의 가섭불의 사리를 넣은 솔도파가
서있는 곳을 발견하였다. 그곳으로 Buddhad ta 아라한 등의 가르침에 따라 gum-stir절을
세웠다고 한다. 지금의 Y tkan(옛 于闐國의 首都)의 서쪽 약 1마일 떨어진 지점에 있는
마을인 Somiya로 추정되며 그곳에는 먼 이국에 와서 머물다 간 성인(聖人)의 신령스런
자취로 전해지는 무덤이 있다.
왕성에서 동남쪽으로 5∼6리 떨어진 곳에 마사(麻射)승가람64)이 있다. 이 나라의 선왕의 부인이 세운 것이다. 옛날 이 나라 사람들은 누에나 뽕나무를 알지 못하였다. 그런데 동쪽의 나라에는 그것이 있다고 들었으므로 사신에게 명하여 구해오도록 하였다. 그런데 동쪽 나라의 군주는 이것을 비밀이라고 하여 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변방의 출입문에 엄명을 내려서 누에나 뽕나무 종자가 나가지 못하게 철저히 경비를 서도록 하였다. 하는 수 없이 구살단나왕은 자존심을 굽혀서 동쪽나라에 혼처를 구하였다. 동쪽 나라의 군주는 먼 나라에 영향력을 미치려는 뜻도 지니고 있었으므로 그 청을 받아들였다. 구살단나왕이 사신에게 왕녀를 맞아들일 때 다음과 같이 하도록 명하였다.
"너는 동쪽나라 공주에게 '우리 나라에는 본래 비단실이나 누에, 뽕나무의 종자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것을 가지고 와서 옷을 만들어야 합니다'라고 말하라."
공주는 그 말을 듣고 비밀리에 그 종자를 구한 뒤 모자 속에 감추었다. 마침내 변방의 출입문에 도착하였다. 관리는 두루 수색하였지만 공주의 모자만은 감히 조사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구살단나국에 들어가서 마사(麻射)가람의 옛 땅에 머물렀다. 왕은 그곳에서 비로소 의례를 갖추고 공주를 받들어 궁으로 맞아들였다. 뽕나무와 누에의 종자는 이 땅에 남겨두었는데 따뜻한 봄이 오자 그 뽕나무를 심고 누에 먹일 달[蠶月:음력 사월]이 되자 다시 이곳으로 와
서 뽕나무 잎을 따다가 누에에게 먹였다. 처음에 왔을 때는 여러 가지 잎을 섞여서 먹였지만, 이 때 이후로는 뽕나무가 무성해졌다. 왕비가 이에 돌에다 규정을 새겨두었다.
"살상해서는 안 된다. 누에가 나방이 되어서 날아가 버린 뒤에 누에고치를 처리해야 한다. 만일 이 법칙을 어긴다면 신이 보호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누에를 위해 가람을 세웠다. 이곳에는 말라버린 뽕나무가 몇 그루 있는데, 이것이 그 본래 종자였던 나무라고 한다. 그러므로 지금도 이 나라에서는 누에를 죽이지 않는다. 그리고 몰래 실을 가져가면 다음 해에는 누에 작황이 좋지 못하다고 한다.
64) 코탄의 옛 수도로 Y tkan의 동남쪽 약 1마일 떨어진 지점에 있는 Kum-i-Shah d n이라
불리는 흙으로 지은 사당이 있는데 이것으로 추측된다.
성의 동남쪽으로 백여 리를 가면 큰 강65)이 있는데, 이 강은 서북쪽으로 흐른다. 이 나라 사람들은 이 물을 이용하여 밭을 경작하였다. 그런데 훗날 강물이 끊겼다. 그러자 왕은 참으로 괴이하다고 여기고 가마를 준비하게 하여 나한승(羅漢僧)에게 가서 물었다.
"큰 강의 물을 이 나라 사람들이 나누어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강물이 끊겼으니, 이것은 대체 누구의 잘못입니까? 정치를 공평하게 하지 못하였거나 저의 덕이 널리 두루 미치지 못하였던 것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어찌하여 이토록 무거운 재앙을 내리는 것입니까?"
나한이 말하였다.
"대왕께서 나라를 다스릴 때에 정치와 교화는 맑고 온화하였습니다. 강물이 끊어진 것은 용의 소행입니다. 서둘러 사당으로 가서 기도하고 소원을 빈다면 예전처럼 이익을 회복하실 겁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가마를 돌려 사당에 가서 강의 용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러자 갑자기 한 여인이 파도를 타고 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남편을 일찍 여의고서 의지하고 따를 만한 지아비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강을 막아 농민에게 피해가 가도록 심통을 부렸던 것입니다. 왕께서 나라 안에 지체가 높으신 신하 한 사람을 골라서 나와 혼인을 맺어준다면 강물은 예전과 같이 흐를 것입니다."
왕이 말하였다.
"삼가 그대의 말대로 하겠습니다."
용이 이 나라의 대신에게 맘에 드는 표정을 보였다. 왕이 가마를 돌려 환궁하고서 군신들에게 말하였다.
"대신은 이 나라의 막중한 인물이고 농사는 사람이 연명하기 위한 일이다. 나라가 막중한 인물을 잃는다면 곧 위험해질 것이고 사람에게 음식이 끊어진다면 곧 죽게 될 것이다. 위험함과 죽음의 일 가운데 어떤 것을 택하겠는가?"
대신이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고 답하였다.
"오래 전부터 미천한 몸으로 감히 나라의 중책을 맡아 일을 그르쳤습니다. 언제나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였으나 그 시기를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선택된다면 감히 막중한 책임을 감당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만백성을 이롭게 한다면 이 한 사람의 신하가 어찌 아깝겠습니까? 신하란 나라를 보좌하는 사람이요, 백성은 나라의 근본입니다. 부디 대왕께서는 더 염려치 마소서. 만약 다행히 복을 짓게 된다면 승가람을 세워주소서."
왕이 그의 소원을 받아들여 공사를 하여 순식간에 완성되었다. 그 신하는 용궁으로 빨리 들여보내 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온 나라 사람들은 모두 음악을 연주하고 음식을 가지고 나와서 그에게 공양을 올렸다. 그 신하는 흰옷으로 갈아입고서 백마에 올라탄 뒤에 왕에게 작별인사를 올리고 나라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하였다. 그리고 말을 몰아서 강으로 들어갔는데 물 위를 밟는데도 빠지지 않았다. 그런데 강의 중류까지 건넜을 때 말채찍을 휘둘러서 물을 젓자 물의 가운데가 열리면서 가라앉아 버렸다. 잠시 후에 백마가 떠올랐는데 전단으로 만든 커다란 북 하나와 한 통의 편지를 싣고 왔다. 그 편지에는 대략 이렇게 쓰여 있었다.
"대왕께서 미천한 저를 저버리지 않으셔서 과분하게 선택을 받게 되었습니다. 부디 복을 지으셔서 나라를 이익 되게 하시고 신하들에게 은혜를 두루 미치소서. 이 큰 북을 성의 동남쪽에 걸어두소서. 만일 오랑캐가 쳐들어오면 북이 미리 울려서 소리를 낼 것입니다."
마침내 강물이 다시 흘렀고 지금까지 사람들이 그 물을 이용하고 있다. 세월이 오래 흘러 용의 북은 없어진 지 오래이며 예전에 걸렸던 곳에 지금은 다른 북이 걸려있다. 연못 옆의 가람도 폐허가 되어 스님이 살고 있지 않다.
65) 이 강은 지금의 Yurung-k sh(하얀 옥), 즉 백옥하(白玉河)라 불리는 강이다.
왕성의 동쪽으로 3백여 리를 가다 보면 드넓게 황폐해진 늪지가 있다. 수십 경(頃)에 달하는 땅에 초목은 없고 토지는 검붉은 색이다. 옛 노인들의 말에 의하면, 이곳은 전쟁에서 패한 곳이라고 한다. 옛날 동쪽 나라의 장군이 백만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서쪽을 정벌하러 왔다. 이 때 구살단나왕 또한 군마를 정비하고 수십만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동쪽으로 나아가 강적들과 대항하였다. 이곳에 이르러 두 나라 군사가 마주쳐 전투가 벌어졌는데 서쪽 병사들이 밀렸다. 그리하여 승리를 얻게 된 동쪽 나라의 병사들이 살육을 자행하였다. 왕을 포로로 잡고 그 장수를 죽였다. 병사들은 모조리 살육당하여 누구 한 사람 살아남지 못하였다. 유혈이 낭자하여 땅을 적셨으니, 그 흔적이 지금 이렇게 남아있다.
전투를 벌인 곳에서 동쪽으로 30여 리를 가다 보면 비마성(媲摩城)66)에 도착한다. 전단(栴檀)을 새긴 입불상이 안치되어 있는데 높이는 두 길[二] 남짓하고 영묘한 감응이 매우 많이 일어난다. 이따금 광명을 비추기도 하는데 누구든지 아픈 사람은 자신의 아픈 부위와 같은 불상의 부위에 금박(金箔)을 붙이면 완쾌된다고 한다. 마음을 비우고 기도하고 소원을 비는 자는 대부분 소원을 들어준다.
66) 범어로는 ph ma이며 현재의 화전(和闐, Khotan)과 우전(于闐, Keriya)의 중간에 있는
책륵(策勒, Chira Bazar)으로 추정된다.
그 지방에서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이 불상은 옛날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교상미국 오타연나왕이 만든 것인데 부처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뒤 그곳에서 허공을 타고 이 나라 북쪽 갈로락가성(曷勞落迦城)67) 안으로 왔다고 한다. 처음 이 성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은 안락하고 부유한데다가 삿된 견해에 깊이 빠져있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귀하게 여기거나 공경하지 않았다. 그 불상이 저절로 이곳에 왔다는 소식을 전해듣고는 신기하게는 생각하였지만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훗날 어떤 나한이 이 불상에 예배를 하였는데 이 나라 사람들은 모두 그의 용모와 복장이 남다른 것에 놀라서 달려가 왕에게 보고하였다. 그러자 왕이 명령을 내렸다.
"모래와 흙을 이 낯선 사람에게 뿌려라."
그리하여 아라한은 온몸에 흙과 모래를 뒤집어썼고 입에 풀칠할 음식도 구하지 못하여 끼니를 굶고 있었다. 이 때 어떤 한 사람이 속으로 이 일을 못 견뎌 하였다. 그는 옛날부터 언제나 이 불상을 공경하고 존귀하게 여겨 절을 올려왔던 사람이다. 그가 나한이 이런 지경에 빠진 것을 보고 몰래 그에게 음식을 주었다. 나한이 그 지방을 떠나가려 할 때에 그 사람에게 말하였다.
"내가 떠난 지 7일이 지나면 흙모래가 비처럼 쏟아져 내려 이 성을 가득 메울 것이며 아마 살아남을 자가 한 사람도 없을 것이오. 그대에게 그 일을 알려주니 서둘러 빠져나갈 계책을 세우시오. 나에게 흙모래를 끼얹은 사람들은 그런 재앙을 당하게 될 것이오."
나한은 이렇게 말을 하고서 이내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이 사람이 성 안으로 들어가서 친지들에게 이 일을 알려주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자는 누구라도 비웃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틀째가 되자 큰 바람이 홀연히 불더니 흙먼지가 불어왔다. 그리고 온갖 보석들이 비처럼 쏟아져 길거리를 가득 채웠다. 그러자 사람들은 다시 앞서 재앙을 예고한 사람을 비웃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반드시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았다. 은밀히 길을 파서 성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구멍을 만들어놓았다. 7일째가 되던 한 밤에 모래와 흙이 비처럼 내리기 시작하더니 온 성 안을 가득 메웠다. 이 사람은 구멍을 통하여 성을 빠져 나와 동쪽으로 가서 이 나라에 도착하여 비마성(媲摩城)에 머물렀다. 이 사람이 이곳으로 오자 불상도 따라왔다. 그리하여 이곳에서 불상에게 공양을 올리자 다시 옮겨가지 않았다. 여러 앞선 기록들에 의하면 석가모니부처님의 법이 다하면 불상이 용궁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지금 갈로낙가성은 커다란 구릉이 되어있는데 여러 다른 나라의 군왕이나 귀족들이 이곳에 와서 흙을 파고 그 보물을 발굴해내려고 많이 시도하지만 바로 그 옆에 도착하기라도 하면 맹렬한 바람이 사정없이 불어대고 자욱한 연기와 구름이 4방에서 일어나 길을 잃어버리고 만다.
67) 범어로는 Krora, Kroraina. 즉 누란(樓蘭)을 가리킨다.
비마천(媲摩川)으로부터 동쪽을 향하여 사막으로 들어가서 2백여 리를 가게 되면 니양성(尼攘城)68)에 도착한다. 성의 둘레는 3∼4리에 달하며 커다란 늪지 가운데에 위치해 있다. 늪지는 무덥고 습하여 걸어다니기가 어렵다. 갈대가 어지럽게 자라있어 지나다니는 길이 없는데 오직 이 성을 거쳐 나가야지만 간신히 길을 찾아다닐 수 있다. 그러므로 왕래하는 사람은 이 성을 거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래서 구살단나(瞿薩旦那)는 이 성을 동쪽 국경의 관문으로 삼고 있다.
68) 범어로는 ni a, ninya이며 현재의 니아(尼雅, Niya Bazar)의 북쪽 65마일 떨어진 사막 안에
있는 니아(Niya) 옛 터를 가리키며 비마로부터는 동북쪽에 해당한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가면 거대한 유사(流砂:사막)에 들어가게 된다. 모래가 4방으로 흘러내리고 바람에 따라서 쌓였다가 흩어지곤 하여 사람들이 지나간 흔적이 사라져 결국에는 대부분 길을 잃고 만다. 4방으로 멀리 바라보아도 망망한 모래뿐이어서 어느 곳으로 가야 할 지 알 수 없다. 이런 까닭에 오가는 사람들은 쌓인 유해로 표식을 삼곤 한다. 물과 풀이 부족하고 뜨거운 바람이 많이 일어나는데 바람이 불면 사람과 동물이 혼미해지고 이로 말미암아 병이 생기기도 한다. 때로는 휘파람이나 노랫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또 때로는 흐느끼며 곡하는 소리가 들리기도 하는데 귀 기울여 듣고 보고 있는 사이에 문득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지 못하고서 이로 인해 자주 목숨을 잃게 되는데, 아마 이것은 도깨비의 소행일 것이다.
이곳에서 4백여 리를 가다 보면 도화라(都貨邏)의 옛 영토에 도착하게 되는데, 나라는 이미 텅 빈 지 오래고 성도 완전히 황폐해졌다.69) 이곳에서 동쪽으로 6백여 리를 가다 보면 절마타나(折摩馱那)의 옛 영토에 도착하게 된다. 이곳은 바로 옛 저말국(沮末國)의 영토이다.70) 성곽은 우뚝 높이 솟아있지만 사람들의 흔적은 끊어졌다. 다시 이곳에서 동북쪽으로 천여 리를 가면 납박파(納縛波)의 옛 땅에 도착한다. 이곳은 바로 누란(樓蘭)의 땅이다.71)
69) 오늘날의 Endere로 추정된다. 이곳에 있는 폐허는 수레바퀴 모양의 성벽이 있고 성벽의
일부분은 카로슈티 문서를 포함한 먼지 층을 기초로 하고 그 성 안의 거주지(居住址)에서는
개원(開元) 7년(719)의 기년문서(紀年文書)가 발견되었고 나아가 성 안의 사원에서는
브라흐미 티벳·한문의 문서류가 발견되었다. 이런 상황으로 보아 이 지역은 일찍이
기원후 2∼3세기 무렵은 카로슈티 문자를 사용하는 현장이 말하는 도화라의 주민이
살았지만 이윽고 니아와 함께 차츰 폐허가 되었으며 현장이 통과한 뒤 8세기 초엽에는
당나라가 서역을 개척해 가던 과정에서 그 치세에 들어가게 되며, 안사(安史)의 난(755)
직후에는 토번(吐藩)의 수중에 들어갔다고 볼 수 있다.
70) 지금의 Charchan Bazar(Cherchen이라고도 하며 오늘날 중국 이름으로도 且末이라고 함)이다.
이 지역은 Charchen강을 연한 지역인데 농업이나 목축이 성행하지 않고 곤륜산록에서 많이
서식하고 있는 짐승을 잡아서 얻는 가죽은 광산과 함께 이 지역의 거대한 산업이다.
71) 납박파(納縛波)는 한(漢)나라 이래 누란(樓蘭)에 수도를 설치한 선선국(鄯善國)을 말하는데,
5세기에는 청해성(靑海省)에서 차츰 강대해진 토곡혼(吐谷渾)에게 멸망당하였다. 수나라는
토곡혼을 무너뜨리고 선선군(鄯善郡)을 설치하였으며, 당나라 초기 아직 그 세력이 서역에까지
미치지 못하였던 정관(貞觀) 초년에는 강국(康國) 소그디아나의 대수령(大首領) 강염전(康豔典)이
오랑캐를 이끌고 동쪽으로 와서 이 지역에 식민지를 세우고 있다. 이 같은 시기에 현장이 이
지역을 통과하고 있는 점으로 본다면 그가 납박파의 '옛 땅'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서북인도에
원류를 두고 있는 카로슈티 문자를 사용하는 과거의 나라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타당할
것이며, 따라서 납박파의 '옛 땅'도 navapa라는 고어(古語)에서 원류를 찾아야 할 것이다.
각 나라의 산천을 명백히 밝히고 그 국토들을 두루 고찰하여 그 나라의 풍속이 거칠고 강한지, 부드럽고 순박한지를 상세하게 살펴보고 각처의 기후와 자연환경을 엮어보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갖가지 상황이 동일하지 않고 일을 처리하는 방식도 달랐으며, 직접 끝까지 체험해보기가 어려웠고 함부로 억측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머물거나 도착한 곳마다 간략하게 그곳에 관하여 대체적인 줄거리를 기록하였고, 그 보고 들은 것을 열거하고 당나라의 덕화(德化)를 그리워하는 나라들을 기록하였다.
"태양이 지는 저 곳에서부터 여기까지 모든 사람들은 폐하의 은혜를 흠뻑 입고 있으며 대당의 교화가 퍼진 곳에서는 모두 폐하의 성덕을 우러러 받들고 있사옵니다. 천하가 대동(大同)을 이룩할 수 있게 폐하는 한 집안에 통일을 이루셨으니, 어찌 나 혼자만의 힘으로 이역만리 머나먼 여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겠나이까?"
님의 가르침을 아무리 깊이 연구한다고 하더라도 문헌상으로는 빠진 것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까닭에 학덕이 있는 현자들이 없어져 버린 경전의 학문을 전하였고, 후세의 걸출한 학자들이 빠지고 조각난 문장을 이어받아 연구하였습니다. 그 대의는 아직 드러나지 못하고 정밀한 언어도 누락되어 물을 수 없었습니다.
한편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뒤 많은 세월이 지나면서 한대(漢代)로부터 이 성대(聖代)에 이르기까지 불경을 번역하는 사업은 성대하게 행해지며 훌륭한 성과를 거두어왔지만 현묘한 도(道)는 여전히 충분하게는 퍼지지 않고 진실한 종지는 여전히 잘 이해되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드러나고 사라졌던 시간의 흐름 때문이 아니라 말할 필요도 없이 천자(天子)의 덕화가 그러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우리 대당제국은 천하를 통치하고 해외의 여러 나라를 심복시키면서 성인(聖人)께서 남기신 가르침을 자세히 밝히고 선왕(先王)의 법률과 제도를 올바로 잡았습니다. 나아가 불교를 천명하고 위대한 가르침을 울창하게 펴며, 도(道)가 헛되이 행해지지 않고 널리 퍼지도록 하는 것은 바로 천자의 밝은 덕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3승의 깊은 뜻은 천년 뒤에도 환히 드러나고 10력(力)의 유법(遺法)은 만리 밖에서 삼가 전승되고 있습니다. 신묘한 도는 아무런 걸림 없이 자유롭게 통하나니,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것을 의지처로 삼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에 연(緣)이 있어서 비로소 나타나게 되었으니 그 말은 진실합니다.
무릇 현장법사는 그 청정한 가계가 뇌택(雷澤)72)에서 연원하고, 그 근본은 규천(嬀川)73)으로부터 갈라져 나왔습니다. 그 사람 됨됨이는 훌륭한 덕의 상서로움을 체현하고 있고 중용을 잃지 않는 순수함을 간직하였습니다. 그의 행동에는 덕이 따르고 몸가짐에는 절조가 있습니다. 게다가 그의 복덕은 이미 전세(前世)에 인연을 갖고 있었고, 그의 운명은 바야흐로 탁 트인 세상을 만나게 될 운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속세에서 벗어나 강원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스승의 가르침을 받들고 앞 세대 철인(哲人)들의 미덕을 흠모하게 되어 바랑을 지고 유학(遊學)하며 4방으로 나아가 가르침을 청하였습니다. 연(燕)·조(趙)의 땅을 순례하고, 노(魯)와 위(衛) 땅의 구석구석을 유람하였고, 3하(三河:河南·河東·河內의 세 지역. 즉 長安 부근)를 등지고 진중(秦中:陜西省)에 들어갔으며, 3촉(蜀:蜀郡·廣漢·犍爲. 즉 四川省 지역)을 두루 돌아다니며, 회계(會稽:浙江省 紹興)에 이르렀습니다. 학문에 통달한 준재에게는 애써 널리 가르침을 청하였고 세상에 명성이 높은 현자에게는 거듭 구법(求法)의 뜻을 말하였으며, 갖가지 논의에도 귀를 기울여 들었고 그 학문을 검토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이 공부하는 부문의 교의와 뜻이 맞는 이들과만 무리를 짓고 어울릴 뿐 다른 교의의 학문을 혐오하였습니다. 이에 현장법사는 불교의 근본 뜻을 밝히고 싶은 마음을 내게 되었고 좀더 상세한 연구를 뜻하게 되었습니다.
72) 연못의 이름이다.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복현(濮縣)의 동남쪽·서남쪽으로 흘러서 황하로
들어가는데 순(舜) 임금이 낚시하던 곳이라고 한다. 즉, 현장법사의 가계가 순임금의 가계와
통한다는 뜻이다.
73) 강의 이름이다. 하북성(河北省) 연경현(延慶縣) 동북쪽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흘러
상건하(桑乾河)로 들어간다. 규씨(嬀氏) 성(姓)에서 나왔다는 뜻이다.
때마침 온 천하가 평온하고 4방 곳곳이 근심 걱정이라곤 없던 시절이라 정관(貞觀) 3년(639) 중추(仲秋:음력 8월) 초하루 아침, 옷자락을 걷어올리고 출발하여 석장을 끌면서 아득한 여행길에 올랐던 것입니다. 천자의 덕화에 의지하여 길을 묻고, 보이지 않는 부처님의 도움을 입어서 홀로 유랑하며 철문(鐵門)과 석문(石門)의 어려운 곳을 통과하였고, 능산(凌山)과 설산(雪山)의 험난한 길을 넘어섰습니다. 그리하여 몇 번인가 계절의 변화[灰管] 74)를 반복한 후에 인도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74) 회관(灰管)이란 옛날 갈대 줄기 속에 있는 얇은 막을 태워서 만든 재를 악기의 율관(律管) 속에
넣은 뒤에 기후를 점친 것에서 유래하는 말이다. 따라서 기후 또는 날씨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당나라의 풍습을 외국에 선양하고 커다란 교화를 이역 땅에 주었으며, 스스로 범학(梵學)을 배우고 현자에게 가르침을 청하였고, 오랜 세월 품어왔던 의문은 원문(原文)을 살펴봄으로써 해명하였고, 교의의 깊은 뜻은 학문이 높은 사람에게 널리 질문하여 답을 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마음이 열려 이치를 궁구하였으며 정신이 확 트여서 도를 체득하였으니 일찍이 듣지 못하였던 내용들을 듣고, 깨닫지 못했던 것도 깨우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법사는 실로 도량(道場)의 좋은 친구가 되고 법문의 장인(匠人)이라 하겠습니다.
이렇게 법사의 도풍(道風)이 밝게 드러나고 덕행도 더욱 높아지는 가운데 학문 쌓기를 3년 만에 그 명성은 만 리에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인도의 학인들은 모두 법사의 높은 덕을 우러렀는데, 어떤 이는 법사를 '걸어 다니는 경전 상자[經笥]'75)라고 부르고 어떤 이는 '불법의 장군[法將]'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소승의 학도들은 목차제바(木叉提婆)[당나라 말로는 해탈천(解脫天)이다]라 불렀고, 대승의 법중(法衆)들은 마가야나제바(摩訶耶那提婆)[당나라 말로는 대승천(大乘天)이다]라 불렀습니다. 이것은 바로 법사의 덕을 높이 기려서 아름다운 칭호를 전한 것이며 그 인물 됨됨이를 존경하여 좋은 이름을 입에 담았던 것입니다. 3륜(輪)의 깊은 뜻76)과 3청(請)의 미묘한 말77)에 이르러서는 깊이 그 원류(源流)를 연구하고 자질구레한 부분까지 미묘하게 궁구하여 명확하게 납득하고 충분하게 이해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법사의 질문의 내용은 별록(別錄)에 상세하게 기재되어 있습니다.
75) 경서(經書)를 넣어두는 상자로 박학(博學)한 사람을 의미한다.
76) 3륜(輪)의 깊은 뜻이란 부처님의 신(身)·구(口)·의(意)의 3업을 말한다. 부처님은 이 3업으로
중생의 미혹한 업을 부수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77) 3청(請)의 미묘한 말이란 것은 부처님께서 사리불의 세 번의 권청에 의해 『법화경』의 요의를
설하셨던 고사(故事)에서 나온 말이다.
이미 깊은 뜻에 정통하여 덕풍(德風)에 대한 평판이 높아졌으며, 학식이 넓어지고 덕도 이미 성대해지자 법사는 산천을 두루 다니고 도시와 마을을 순례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모성(茅城)을 나와서 녹원(鹿園)에 들어갔고, 장림(杖林)에 노닐다가 계원(鷄園)에서 쉬었으며, 가유국(迦維國)을 돌아다니며 구시성(拘尸城)을 구경하였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옛 유적지에는 풀이 무성하게 자라있었고, 입멸하신 옛 터는 마을과 떨어진 언덕 위에 황폐해진 채 있었습니다. 부처님의 유적지를 돌아보자 감회가 더욱 커져 현묘한 감화를 우러르고는 길게 탄식하였으니, 그것은 '맥수(麥秀)의 노래'78)로 은의 멸망을 슬퍼하였고, '서리(黍離)의 탄식'79)으로 주(周) 왕실의 쇠락을 애통해 하였던 그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석가모니부처님의 고사(故事)를 상세하게 적어두고, 인도의 사실(史實)을 열거하였으며 나아가 그 나라의 풍토에 대해서도 조금씩 채집하고 이설(異說)까지도 기록에 남겨두었습니다.
78) 은(殷)나라가 망한 뒤 기자(箕子)가 폐허가 된 은의 도읍지를 지나다가 감개무량하여 지은
노래이다.
79) 주(周)나라가 멸망하여 옛 궁전 터에 기장만이 무성함을 보고 하는 탄식이다. 이(離)는
이삭이 드리운 모양을 말한다.
세월은 속절없이 지나가 버리고 여름과 겨울이 몇 번이나 반복되자, 법사는 안락한 고국이 그리워지고 망향의 정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래의 육사리(肉舍利) 150과(顆), 금불상 1구(軀)(이것은 광좌(光座)까지 통틀어 높이 1척 6촌이며, 마게타국의 전정각산(前正覺山)에 있는 용의 굴에 부처님의 그림자를 남겨둔 불상을 본뜬 것이다) 금불상 1구(이것은 광좌까지 통틀어 높이 3척 3촌이며, 파라닐사국(婆羅斯國) 녹야원의 초전법륜상을 본뜬 것이다) 단향목을 조각한 불상 1구(이것은 광좌까지 통틀어 높이 1척 5촌이며, 교상미국의 출애왕(出愛王)이 여래를 사모하여 단향목을 깎아서 진영을 그린 상을 본뜬 것이다) 단향목을 조각한 불상 1구(이것은 광좌까지 통틀어 높이 2척 9촌, 겁비타국에서 여래가 천궁으로부터 보석계단으로 내려오시는 모습의 불상을 본뜬 것이다) 은불상 1구(이것은 광좌까지 통틀어 높이 4척이며, 마게타국 취봉산에서 『법화』 등의 경을 설하신 상을 본뜬 것이다) 금불상 1구(이것은 광좌까지 통틀어 높이 3척 5촌이며, 나게라갈국에서 독룡을 항복시키고 그림자를 남기셨던 상을 본뜬 것이다) 단향목을 조각한 불상한 1구(이것은 광좌까지 통틀어 높이 1척 3촌이며, 폐사리국에서 성을 돌아다니시며 교화하신 상을 본뜬 것이다)와 나아가 대승경 224부, 대승론 190부, 상좌부의 경·율·논 14부, 대중부의 경·율·논 15부, 삼미저부(三彌底部)의 경·율·논 15부, 미사색부(彌沙塞部)의 경·율·논 22부, 가섭비야부(迦葉臂耶部)의 경·율·논 17부, 법밀부(法密部)의 경·율·논 42부, 설일체유부의 경·율·논 67부, 인론(因論) 36부, 성론(聲論) 13부, 그리하여 모두 520상자, 657부를 청하여 구해서 위없는 가르침을 널리 펼치기 위해 험하고 위태로운 길을 지나 고국을 향해 길을 서둘렀습니다.
그리하여 사위성의 옛 수도를 출발하여 불타가야의 옛 거리를 등지고 총령의 가파른 언덕을 넘어 사막의 험한 길을 건너 정관 19년(645) 춘정월(春正月), 경읍(京邑:장안)에 돌아와 낙양에서 천자를 배알하였던 것입니다.
한편, 삼가 조칙을 받고 불경을 번역하라는 명을 받들어 이에 학자를 불러 모아 그들과 함께 이 대불사를 행하게 되니, 부처님의 법구름[法雲]은 다시 한번 중국을 덮었고 부처님 은혜의 태양[慧日]은 거듭 밝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궁중에서는 취봉산의 교화가 흐르고, 중국 땅에서는 용궁의 가르침이 널리 펼쳐지니, 불교의 흥륭은 실로 성대하게 되었습니다.
현장법사는 범학(梵學)에 깊은 조예가 있었기 때문에 깊고 깊은 미묘한 경을 밝히거나 새로운 문장을 대할 때에도 마치 이전에 본 문장인 듯 능숙하였고, 소리를 옮김에 있어서도 메아리에 응하는 것과 같아서 경전의 취지를 그대로 존중하여 문장에 수식을 가하지 않았고, 뜻이 걸맞지 않는 방언은 범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등 애써 원전의 취지를 남기고 경전의 언사를 정확하게 전달하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고려해보건대 원전과 어긋나는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어떤 지체 높은 분이 안색을 달리하며 엄한 태도로 앞으로 나아가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무릇 인도라는 나라는 성인이 내려오신 곳이고, 현자가 태어나신 곳이며, 문자는 하늘나라의 글[天書]이라 불리고 언어는 하늘나라의 말[天語]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그 글과 문자가 치밀하고, 음운은 말과 말 사이가 이어져 있으며, 어떤 때는 한 마디 말로 많은 뜻을 포괄하고 있고 어떤 때는 한 가지 뜻이 많은 말로 표현되기도 하며, 음성에는 억양이 있고 청탁(淸濁)으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범문(梵文)은 의미가 깊어서 번역은 지혜로운 사람의 손에 의하지 않으면 안 되며, 경의 뜻은 깊고 어려워서 그 의미는 덕이 매우 높은 사람이 아니면 안 됩니다. 그런데 번역문을 수식하거나 음률을 다듬거나 한다면 실로 합당하지 못한 일이며, 결코 바른 논의가 아닙니다. 경전의 깊고 그윽한 취지를 전하는 데에는 이해하기 쉬운 점에 주력하면서도 근본 뜻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문장의 수식이 지나치면 '화려하다'고 하고, 지나치게 질박하면 '거칠다'고 합니다. 내용을 정확하게 전하면서도 문장의 수식이 지나치지도 않고 의미를 궁구하면서도 지나치게 질박하지 않다면 일단은 커다란 과오는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비로소 번역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노자는 '말을 아름답게 하는 자는 곧 믿을 수 없고, 말을 신실하게 하는 자는 곧 아름답지 못하다'라고 말하였고, 한비자(韓非子)는 '이치가 올바른 자는 그 말이 솔직하며, 말을 화려하게 꾸미는 자는 그 이치가 애매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펼쳐서 모범을 보일 경우 도리로써 자기를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부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열어 주고 이익으로 이끌어 부처님을 찬탄하고 기뻐하게 해주소서. 원전에 어긋나고 문장에 가식을 첨가한다면 본뜻을 해치는 일이 더욱 심해질 것이니
원문에 충실하는 일이야말로 예로부터 부처님께서 지극하게 권하시고 경계 삼으시던 지침입니다."
그러자 승려와 속인들이 다 함께 말하였다.
"과연 그렇습니다."
이 말은 정확한 의견이었습니다. 그 옛날 공자는 벼슬에 있으면서 재판을 담당하였는데, 그 문서는 사람들과 공동으로 작성하였고 공자가 혼자서 쓰지는 않았습니다. 『춘추』를 편찬하는 일에 이르러서도 기록해야 할 것은 기록하고 삭제해야 할 것은 삭제하며 자유(子游)·자하(子夏)를 비롯해 공자 문하에서 문학으로 명망 있는 사람들조차 단 한 마디도 손을 가할 수가 없었을 정도였습니다. 법사께서 불경을 번역하신 것도 또한 이와 같았습니다. 동수(童壽 : 구마라집)가 장안의 소요원(逍遙園)에서 불경을 번역하였을 때 생(生)·조(肇)·융(融)·예(叡)80)가 자기 마음대로 가필하였던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하물며 오늘날은 네모진 것도 둥글게 하여 각진 것을 깎아내는 세대이고, 장식을 깎아내어 질박하게 하는 시대이거늘 어찌 교지(敎旨)를 가감하거나 경문을 수식하는 일이 옳다고 하겠습니까?
80) 이들은 각각 도생(道生)·승조(僧肇)·도융(道融)·승예(僧叡)를 말한다. 모두 구마라집 문하의
으뜸가는 제자들이었으며 구마라집이 역경하는데 참여하여 활약한 인물들이다.
한편 변기(辯機)는 멀리 은둔자의 혈통을 이어받아서 어렸을 때부터 고답적인 인생을 보내고자 뜻하였다가 15세에 세상을 버리고81) 법복으로 갈아입고 대총지사(大總持寺)에 주석하는 살바다부(薩婆多部)의 도악(道岳)82)법사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비록 장석(匠石)83)이라 할지라도 손을 댈 수조차 없는 썩은 나무와 같은 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법(法)의 무리 속에 들어올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풍요로운 물질 속에 있으면서 청빈은 지켰지만84) 부질없이 온종일 배나 불리면서 견문도 넓히지 않은 채 세월을 보내왔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시기가 이르러 이런 경사스러운 법회에 참여하게 되었고 보잘것없는 참새 같은 자질을 지녔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원홍(鵷鴻:조정 百官의 반열에 드는 큰 인물)의 말석에 참가하여 이에 평범한 재주를 다하여 이 『방지(方志)』를 찬술하게 되었습니다. 학문이 고사(古事)에 두루 통하지도 못하고 아름다운 문장을 쓰지도 못합니다만 무디고 둔한 재주를 격려하고 미약한 몸을 고무하여 삼가 현장 법사의 지기(志記)를 이어받아서 문장을 정리하고, 상서성으로부터 지필을 하사 받아서 찬록하게 되었습니다. 지혜가 얕고 재능이 없는 까닭에 빠뜨리는 곳도 많이 있었을 것이며 또는 넣지 않아도 될 문구가 있어도 삭제하지 않은 부분마저도 있었을 것입니다.
81) 원본에는 추잠(抽簪)이라고 되어있다. 잠(簪)은 관(冠)을 머리에 꽂는 것, 즉 벼슬살이하는
것을 말하며 그 관을 뽑아낸다는 뜻은 관(官)에서 물러난다는 뜻이다.
82) 속성은 맹(孟)씨이며 하남성(河南省) 낙양 사람이다. 15세에 출가하여 수나라 대업(大業)
8년(612)에 대총지사(大總持寺)에 주석하고(34세), 당나라 정관(貞觀) 8년(634)에 보광사
(普光寺)로 옮겨왔다. (『續高僧傳』 권13) 변기는 15세의 나이로 도악 법사의 제자가
되었던 것이다.
83) 고대의 명공(名工)으로 자귀를 휘둘러서 빼어난 작품을 만들어내는 오묘한 경지에 오른
장인을 말한다. 이름은 석(石), 자(字)는 백(伯)이다.
84) 지고(脂膏)란 풍부한 물질을 의미한다. 지고의 한 가운데에 있으면서도 그것에 젖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후한 공분(孔奮)이 풍요로운 지방의 장관으로 있으면서도 스스로 청빈을 지킨
고사에서 온 말이다.
옛날 사마천은 훌륭한 역사가로서의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기』를 집필하고서 간신히 부자(父子) 2대의 업을 완성하였습니다만 책 속에는 이름만을 기록하고 자(字)를 쓰지 않은 경우도 있고, 현의 이름만을 기재하고 군의 이름을 쓰지 않은 경우도 보입니다. 그런 까닭에 한 사람이 아무리 정밀하게 일을 한다고 하여도 생각이 여러 갈래로 걸쳐 있고 문장이 중복된다면 세부까지 음미할 여유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천박하고 우둔하며 어리석은 제가 어찌 능히 조금도 차질 없이 일을 해낼 수 있겠습니까?
한편, 서역 각 지역의 풍토와 습속의 차이, 그 국토의 산물의 기록이나 성품과 지혜로움의 분류, 기후와 계절 등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우열의 상태를 묘사하고 사실을 세밀하게 기록하였습니다. 호(胡)·융(戎) 등의 성씨(姓氏)나 종족에 대해서는 다소 그 나라의 사항을 기록하였지만 인도의 풍속 교화는 청탁(淸濁)으로 구분되어 있어 그 개략만을 기술한 점에 대해서는 본서 제일 앞에 나오는 서(序)의 내용과 같습니다. 국가의 의전(儀典)이나 예식, 호구(戶口)나 군비(軍備) 등의 사항에 대해서는 출가자의 몸으로 상세히 기록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신통력에 의해서 만물을 이끄시고 영묘한 감화로써 가르침을 내리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 신령스러운 도(道)는 현묘하니 즉 그 이법[理]은 인간세계를 초월해있고, 그 영묘한 감화가 숨거나 나타나니 즉 일[事]은 아득한 경계까지도 벗어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불(諸佛)이 강림하신 장소나 선성(先聖)께서 교화를 드리우셨던 유적지 등은 그 영묘한 유적을 대략 열거하고 설명을 개괄적으로 주를 달아 기록하였습니다. 또한 도로는 굴곡이 많고 국경선도 깊숙하게 들어가 있기 때문에 노정은 기록해두었던 바, 순서를 세워서 정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인도의 여러 나라들은 국경을 나누는 일이 없기 때문에 각 국가를 서술한 끄트머리에 영성(領城)의 대략을 기록하였을 뿐입니다.
'……로 가다 보면[行]'이라고 쓴 것은 법사께서 몸소 여행한 곳이고, '……에 이른다[至]''라고 기록한 것은 전해들은 것에 의한 기술입니다. 사실을 직접 기록한 경우도 있고 문장을 완곡하게 한 부분도 있는 등 유연하게 하거나 꾸미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 실록에 충실하게 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이에 정성스런 마음을 천자에게 바치는 바입니다.
20년(646) 가을 7월에 붓을 놓고 책은 완성되었습니다만 천자의 눈을 더럽힐 정도여서 도저히 성의(聖意)에 적합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요원한 땅을 두루 돌아볼 수 있었던 것도 대당(大唐)의 덕화에 의한 것이고 기이한 것들을 편찬할 수 있었던 것도 실로 천자의 덕분이었습니다. 태양을 쫓아 세계의 끝까지 가도 과부(夸父)85)의 힘을 나의 것으로 하지 않아도 좋고, 서역을 향한 천릿길을 개척하더라도 장건(張騫)의 공적은 과거의 일로 듣는 것만으로도 잘 되었습니다. 바야흐로 영취산을 중국으로 옮겨오고 녹야원을 외원(外苑)에 감싸는 바, 마치 천 년 전 옛날을 눈앞에서 똑똑히 보는 것과 같고, 만 리 밖의 나라를 마치 직접 유람하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상고(上古)로부터 지금까지 일찍이 듣지 못한 일이며 어떠한 고서에서도 실려있지 않은 일입니다. 천자의 지극한 덕이 4방을 덮어서 4방의 여러 나라들이 내조(來朝)하였고, 덕풍(德風)이 먼 곳까지 넘쳐 나서 땅끝까지 미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85) 과부(夸父)는 상고(上古)의 인명이다. 과부가 자기의 힘을 헤아리지 않고 태양의 그림자를
쫓으려다가 끝내 지쳐 죽고 말았다는 고사이다. 자기의 힘을 헤아리지 않고 대사(大事)를
꾀하는 것에 대한 비유이다. (『列子』,「湯問」)
이 지지(地志)가『산해경(山海經)』을 보충하고 사관(史官)의 참고로 쓰이며 여러 직책들을 위한 편람(便覽)으로 갖추어지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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