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근본불교) 이야기

중생의 삶이 과연 고(苦.dukkha)일까?

실론섬 2016. 2. 22. 11:23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 세존께서 원만한 깨달음을 막 증득하시고서 우루벨라의 네란자라 강가에 있는 보리수 아래에 머무르고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는 해탈의 기쁨을 맛보면서 7일동안 가부좌 자세로 나무 아래에 앉아 계셨다. 그리고는 7일의 마지막 날에 세존께서는 그 삼매(마음집중)에서 나오셔서 그날 밤의 초경 동안에 연기에 대해 순관으로 조리에 맞추어 이와 같이 주의를 기울여셨다.


Iti imasmim sati idam hoti, imassuppada idam uppajjati,

yadidam - avijjapaccaya sankhara, sankharapaccya vinnanam, vinnanapaccaya namarupam,

namarupapaccaya salayatanam, salayatnampaccaya phasso, phassapaccaya vedana, vedanapaccaya tanha,tanhapaccaya updanam, upadanapaccaya bahvo, bhavapaccaya jati,

jatipaccaya jaramaranam sokparidevadukkhadomanassupayasa sambhavanti

Evame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samudayo hoti'ti.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이것이 일어남으로서 저것이 일어난다.

다시 말하자면, 어리석음(무명)을 조건으로 해서 식별작용(식)이 존재하게 되며, 식별작용을 조건으로 해서 이름과 형태(明色)가 존재하게 되고, 명색을 조건으로 해서 여섯 감각기관(6입처)가 존재하게 되며, 여섯 감각기관을 조건으로 접촉(촉)이 존재하게 되고, 접촉을 조건으로 해서 느낌(수)이 존재하게 되고, 느낌을 조건으로 해서 갈애가 존재하게 되고, 갈애를 조건으로 취함(취)가 존재하게 되고, 취함을 조건으로 해서 존재(유)가 있게 되고, 존재를 조건으로 해서 태어남(생)이 있게 되며, 태어남을 조건으로 해서 늙음과 죽음 그리고 슬픔.비탄.괴로움. 고뇌.절망이있게 된다. 이것이 모든 고통의 덩어리 근원이다.


과연 우리들이 태어난 것 자체가 고통뿐일까? 눈먼 거북이가 바다 한가운데 떠다니는 나무조각의 구멍에 목을 내미는 만큼 어려운게 중생의 몸으로 태어나는 것인데 그 태어남이나 삶이 sokparidevadukkhadomanassupayasa (근심.탄식.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절망)이라면 이건 뭔가 앞뒤가 안 맞아도 보통 안 맞는게 아니다. 


우리의 삶이 고에 시달리는 것은 욕망.갈애.탐욕등 즉 탐진치 삼독심이 주요 원인이다. 이 탐진치 삼독심과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욕망과 갈애는 바로 "내가 누구다"라는 자아개념에서 오는 것이다. "나" 라는 자아 개념이 모든 탐진치 삼독심의 근본바탕이 되는 것이다. 내것, 나의 것이라는 것을 버리는 것이 곧 수행이다. 이러한 삼독심을 버리는 삶은 곧 행복한 삶이다. 고가 여간해서 끼어들 자리가 없는 삶이다. 자비와 보시로 충만된 삶이 고(苦)의 삶일수는 없을 것이다. 붓다는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네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하신다.


1) 어둠에서 어둠으로  나아가는 사람 (삶이 절대로 행복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런 사람의 삶은 고통이다)

가난하고 신분이 낮고 생김새도 뛰어나지 못하게 태어난다. 생활은 어렵다. 그러면서 그는 몸과 말과 마음으로 나쁜 행동을 한다. 몸이 부서지면 비참한 곳, 나쁜 운명, 지하 세계, 지옥에 다시 태어난다.


2)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사람 (인생과 삶이 행복 그 자체이다)

가난하고 신분이 낮고 생김새도 뛰어나지 못하게 태어난다. 생활은 어렵다. 그러면서 그는 몸과 말과 마음으로 선한 행동을 한다. 그는 죽고 나서 몸이 부서지면 좋은 운명, 좋은 환경, 하늘 나라에 다시 태어난다.


3) 빛에서 어둠으로 나아가는 사람 (인생이 불행하고 종치는 인간이다. 삶이 행복할리가 없다)

부자이고 신분이 높고 생김새도 좋게 태어난다. 생활이 풍요롭다. 그러면서 그는 몸과 말과 마음으로 악한 행동을 한다. 몸이 부서지고 나면 비참한 곳, 나쁜 운명, 지하 세계, 지옥에 다시 태어난다.


4) 빛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사람 (인생이 행복하다. 그 어디에도 불행이나 고통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부자이고 신분이 높고 생김새도 좋게 태어난다. 생활이 풍요롭다. 그러면서 그는 몸과 말과 마음으로 선한 행동을 한다. 그는 죽고 나서 몸이 부서지면 좋은 운명, 좋은 환경, 하늘 나라에 다시 태어난다.


다시말해서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사느냐가 우리들의 행복과 불행을 구분하는 것이다. 우리는 절망과 괴로움을 이겨내고 행복을 위해서 불교를 배우고 수행을 하는 것이다. 절망과 괴로움을 아무리 잘 알았다고 해서 그것에서 빠져 나오는 지혜를 불교에서 배우지 못한다면 말짱 도루묵이다. 그건 불교를 공부하는게 아닐뿐더러 불자의 모습도 아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빛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삶의 모습이 진정한 불교도의 모습이고 붓다께서 희망하시는 것이다. 그러한 삶에는 

sokparidevadukkhadomanassupayasa (근심.탄식.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절망) 이 절대로 없다.


여러번 "윤회의 가르침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라는 글을 올려 놓았다. 그 글에서 가슴에 와 닿는 가르침을 배우지 못하다면 그러한 중생에게 윤회와 과거 현재 미래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어둠에서 어둠으로 가거나, 빛에서 어둠으로 가는 어리석은 중생들을 붓다인들 구제할 수 있겠는가? 


남방권에서 재가자들이 일상으로 암송하는 경전 귀절을 다시한번 되돌아 본다. 어둠에서 빛으로 가는 인생이며, 빛에서 빛으로 가는 인생이 어떤 것인가를 명명백백하게 밝히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 삶이 고(苦)가 아닌 행복한 삶으로의 안내를 하고 있다. 마치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워 주시고, 어둠속에서 등불을 밝혀 주시는 것이다.


살아있는 생명은 어떠한 것이건

동물이건 식물이건 남김없이 길다랗거나 커다란 것이거나 중간 것이거나 짧은 것이거나 

미세한 것이거나

멀리 있는 것이거나 가까이 있는 것이거나

이미 생겨난 것이거나 생겨날 것이거나 

모든 생명들이여 부디 행복하여라 [자비경 중에서]


분수에 알맞은 곳에 살고 일찍이 공덕을 쌓고

스스로 바른 서원을 하는 것.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다.


부모를 섬기고 아내와 자식을

사랑하고 보호하는 것.

일에 질서가 있어 혼란스럽지 않은 것.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다.

 

남에게 베풀고 이치에 맞게 행동하며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보호하는 것.

비난을 받지 않게 처신하는 것.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다. [행복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