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근본불교) 이야기

최근의 댓글을 정리해 봄

실론섬 2016. 3. 7. 15:18

최근에 이런저런 댓글을 달았습니다. 그것을 나름대로 정리를 해 보겠습니다.


1) 불교는 "자업자득" 이다.

"의도된 행위"만이 업을 낳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길을 가다가 땅속에 벌레가 있는줄을 모르고 걸음을 떼었는데 그만 그 벌레가 발밑에 밝혀서 죽었다면 그건 살생일까요 아닐까요? 정답은 그것은 살생이 아니면 업을 낳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죽이겠다고 의도를 하고 내 의지로 생명을 죽인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업자득이란 말 그대로 내가 행한 행동으로 일어난 결과는 행위를 한 주체가 책임을 진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행위는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한 것이지 결코 제 삼자에 의해서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위의 결과는 스스로 책임지고 짊어질 뿐 결코 타인에게 미루거나 타인의 대신해 줄 아무런 이유도 근거도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유의지에 의해서 자신이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하고 그 결과에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불교는 절대자나 신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도둑질이나 살인이 결코 신의 뜻이라거나 신이 시켜서 그렇게 했다거나 신의 정해놓은 길이라는등의 자신의 자유의지는 전혀 없이 오직 제삼자에 의해서 그러한 행위를 했다는 다시말해서 신이 로보트에 프로그램을 해놓았거나 리모콘으로 프로그램이 작동되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결정론은 불교에 의해서 철저하게 배척되는 사상입니다.


2) 윤회의 올바른 이해

초기경전을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붓다께서 윤회에 대해서 수없이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언급에 보면 대부분이 "천상과 선처에 태어난다"라거나 또는 "지옥이나 악처에 태어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환경이 좋고 건강하고 하는 일이 잘되면 인간으로 태어난 것과 또한 선처일 것입니다. 하지만 하루먹을 쌀한톨없는 어려운 환경과 나약하고 늘 삶이 괴롭다면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악처일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업이란 의도된 행위의 결과 입니다. 의도란 인지의 능력이 있는 중생들에게만 가능한 것입니다. 인지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윤리적 도덕적 행위를 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또는 자신의 행위가 윤리적 도덕적 잣대의 판단이 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십선업과 그 반대의 십악업이란  우리가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의도된 행위를 한 것이 도덕적 윤리적으로 판단하여 옳으나 그르냐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행위의 결과를 악처나 선처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불교는 육도윤회라고 하여 태어나는 곳을 6가지로 구분해 놓았습니다. 6도중에서 악처인 아수라 아귀 축생 지옥인데 많은 분들이 윤회를 희론적으로 생각하여 죽으면 개미나 지렁이나 굼벰이나 아메바로 태어날 수도 있다고 말을 합니다. 하지만 좁은 의미에서 축생이란 네 발 달린 짐승이며 육지에 사는 동물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네발 달린 짐승이라도 인지능력이나 자유의지에 의한 행동을 하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동물들은 거의 본능에 의존하는 생활을 합니다. 본능에는 자유의지나 도덕이나 윤리가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의도된 행위만이 업을 낳는데 동물들이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의도된 선한 행위르르 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축생계에 한번 떨어지면 그것보다 나은 윤회계로 태어나기가 어렵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네발 달리지 않은 유정물들은 어떻게 생각하면 될까요? 그건 자연의 순환 또는 자연의 모습 또는 인간을 둘러싼 자연환경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굼벵이가 죽고 태어나고 지렁이가 죽고 태어나는 것은 나무가 가을에 잎이 떨어지고 봄에는 새로운 새삭이 움트고 그리고 과일이 익어가고 떨어지고 다시 봄에 과일이 달리는 자연 순환계의 일부인 것입니다. 식물들도 생명이 있고 살아 있습니다. 하지만 식물은 윤회를 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새로운 싹을 틔우고 새로운 열매를 계속하여 달리게 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지각능력이 없고 자유의지에 의한 의도된 행위를 할 수 없는 유정물들의 태어남과 죽음은 자연순환의 일부일 뿐 결코 그것을 우리들 인간들이 겪는 윤회와 같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물속에 사는 수많은 미생물과 물고기등도 마찬가지 입니다.


사실 그동안 한국불교에서의 윤회나 업보를 이야기할 때는 "의도된 행위"라는 문구가 빠진채 설명이 되어 왔고 그리고 윤회와 관련된 많은 이야기들이 중국의 민간신앙이나 전설에 의해서 아무런 교리적 비판없이 그대로 받아들여진 것도 사실입니다. 많은 분들이 여기에 와서 공부를 할 때 가장 놀라는 것중의 하나가 바로 윤회교리를 배울 때 입니다. "의도된 행위"가 무엇인지 불교의 "자유의지"가 무엇인지 개념이 퍼뜩 서질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흔히들 "나도 모르게 또는 순간적으로" 그렇게 했다라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중생이 심찰나적으로 생멸을 거듭하며 흘러가는 하나의 흐름이라거나 또는 재생연결의식에서의 마지막 의식이 새로 태어나는 첫번째 의식이라는 측면에서 교리를 깊이있게 들여다보면 그런 말은 전혀 쓸모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심찰나적이란 우리가 파리채로 파리를 따아악하고 때려잡는 그 짧은 순간에도 파리에게는 마지막 의식이 있기 때문입니다(예가 좋은 건지 ...누군가 쉽게 말꼬리를 잡겠습니다...^^사람이 총 맞아죽는 순간 또는 폭탄이 몸위에 떨어지는 순간이라고 해야 하나요?).


3) 촉 - 수 - 갈애 - 취 ...

제가 자주 인용하는 댓글입니다만 첫 번째 화살과 두 번째 화살로 아라한과 중생들의 차이를 말합니다. 다시정리하자면 눈앞에 예쁜 꽃을 보고 그것을 분별하는 것은 아라한이나 중생이나 모두다 같습니다. 즉 대상에 대한 인식과 분별은 아라한이나 중생이나 모두다 같으며 이러한 첫 번째 화살은 똑같이 맞습니다. 그런데 아라한은 두 번째 화살은 맞지 않습니다만 중생들은 거의 자동적으로 두 번째 화살까지 맞습니다. 즉 "수"에서 곧바로 "갈애"로 넘어가고 그리고 취사분별을 합니다. 아라한들은 꽃을 보고 갈애를 일으키지 않지만 중생들은 갈애를 일으키며 취사분별을 하는 두 번째 화살을 맞는다는 것입니다.


붓다나 아라한이나 모두다 예쁜 것이나 추한 것이나 밥인지 된장인지 구분을 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세상을 살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청정도론에서는 마음의 작용을 여러가지로 구분하여 설명을 해 놓았습니다만 이러한 아라한의 마음은 "작용만 하는 마음" 이라고 합니다. 즉 꽃이다 여자다 된장이다 밥이다라고 구분은 하지만 그 대상에 대해서 갈애(탐욕, 욕탐, 번뇌, 취사선택)을 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좀더 쉽게 말해서 모든 대상이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써만 흘러갈 뿐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교의 수행은 수(느낌)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하고 갈애를 일으키지 않아야 하느냐가 key point 입니다. 경전에서는 수백번은 더 되풀이 하여 눈이 색을 보고, 귀가 소리를 듣고.... 이런 것 즉 그 느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하느냐에 대해서 되풀이 반복합니다.(한번 찾아서 읽어 보시라고 일부러 전체 귀절을 옮겨오지 않았습니다)


12연기를 하나의 구슬을 꿰어놓은 목걸이라고 한다면 우리들은 "수-갈애"에서 다시 말씀드려서 수(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는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는다면 아라한이며 구슬의 줄이 끊어져 12연기는 줄줄이 땅에 떨어져서 흩어지는 것입니다.


4) 자유의지가 얼마나 중요한가

붓다는 우리들 삶을 네 가지로 구분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행위가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의한 행동이며 이로인하여 자업자득이라는 것입니다.


1) 어둠에서 어둠으로 가는 인생

2) 어둠에서 빛으로 가는 인생

3) 빛에서 어둠으로 가는 인생

4) 빛에서 빛으로 가는 인생 

 

또한 수행에서 우리들은 스스로 자유의지로 아래와 같은 의도된 행위를 해야 합니다. 37조도품의 하나입니다. 찾아서 직접 읽어보시라고 아래 네 가지를 뭐라하는지는 생략합니다.


1) 일어나지 않은 악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도록 

2) 일어난 악한 마음이 소멸되도록

3) 일어나지 않은 선한 마음이 일어나도록

4) 일어난 선한 마음이 더욱더 증장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