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야단법석

돈점논쟁 넘으려면 율에 대한 고민 더해져야

실론섬 2016. 3. 1. 15:17

“돈점논쟁 넘으려면 율에 대한 고민 더해져야”

[석정원 스님 기고] 법응스님의 ‘깨달음 논쟁’ 견해에 아쉬운 점 있다

“‘100%는 못 지킨다해도’라니…출가자에게 계율은 철저해야 하는 것”


석정원스님 


봉녕사에서 율(律)을 공부한 석정원 스님(비구니)이 법응 스님의 글에 대해 율을 공부하는 율사로서의 입장을 최근 <미디어붓다>에 보내왔다. 석정원 스님은 “법응스님께서 미디어 붓다에 기고하신 ‘깨달음 논쟁의 부끄러움 그리고 기회’까지를 읽고- 깨달음에 대한 이해와 그에 대한 논쟁을 관전하면서 떠오른 생각들”이라는 제목의 글 가운데에서 “계는 100% 못 지킨다 해도 자신의 주변과 사회에서 발생하는 불의와 폭력을 외면하고서야 어찌 존경과 권위가 세워지겠는가?” “부처님께서 계를 제정하신 의도 또한 선과 자비심에 바탕한 교단 구성원들의 사회성 진작에 있다고 본다”는 내용에 대해 이견과 아쉬움이 있다고 밝히면서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현응스님의 주장을 혜학의 입장으로, 수불스님의 입장을 정학의 입장으로 파악한 스님은 궁극적으로 이 논쟁은 율학의 입장이 함께 반영될 때 귀결점을 찾을 수 있음을 강조했다. 전문을 게재한다. 편집자

 

법응스님이 미디어붓다에 기고한 ‘깨달음 논쟁의 부끄러움 그리고 기회’까지를 읽고

- 깨달음에 대한 이해와 그에 대한 논쟁을 관전하면서 떠오른 생각들 

 

우선 저는 현응 스님의 깨달음과 역사라는 책을 강원학인 때 대다수 내용은 공감하면서, 일부분은 갸웃하면서 읽고 난 이후부터 최근에 벌어진 여러 학자들의 논쟁까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으나 이 논쟁에 끼어들어 의견을 보탤 정도의 교학도 실참도 갖추지 못한 사람입니다. 출가 딱 십년이 지났다 하나 학인시절 빼면 구족계를 받은 지 얼마 안 되는 신참일 뿐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논쟁에 빠져 있는 아주 중요한 ‘요소’에 대해 아쉬움을 가진 채 관전하고 있었는데 오늘 법응 스님께서 기고하신 글을 읽고 나니 제 생각에 더욱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현응스님의 입장을 ‘혜학(慧學)’의 관점에서, 수불스님의 입장을 ‘정학(定學)’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논쟁이 진정 법응 스님이 말씀하시는 ‘승려의 올바른 수행관과 가치관이 확립되고 종단과 승가가 이상적 조직으로 거듭 태어나’는 ‘수행과 자비실천의 환경성’이 강조되는 방향으로 마무리 되려면 ‘계학(戒學)’이 동등한 무게로 논의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줄곧 생각해 왔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나라 출가자들의 올바른 수행관과 가치관이 확립되고 승가가 이상적 조직으로 거듭나려면, 유독 뿌리가 약한 계학(戒學)과 지계청정(持戒淸淨)에 대한 진지한 고찰과 인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점이라고 봅니다. 지계청정 없이는 아무리 좋은 수행법도 결과를 내기 어려울 것입니다. 부처님을 비롯한 숱한 역대의 선지식들께서 계·정·혜 3학의 균등한 수행을 그토록 강조하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생각해봅니다. 

 

현응스님의 문제 제기는 우리불교 풍토가 그 수승한 간화선을 실참하면서도 깨달음의 결과가 그리 잘 나오지 않는데다가 실참 과정에 있는 수행자들이 사회참여나 현실인식 혹은 역사인식이 부족한데서 시작한 것이라고 봅니다. 스님께서는 그 이유가 간화선의 지나친 강조와 교학에 대한 경시에서 원인을 찾았고, 이 후의 논쟁 역시 그 틀을 중심으로 갑론을박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일정부분은 동의할 수 있지만, 율학을 공부하는 저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이러한 현상의 원인에는 수행자의 ‘지계청정’이 극미하기 때문에 참선을 해도 선정에 들기 어렵고, 혹 선정에 들었다 해도 선정에서 나오면 청정행이 오염되고 혜학이 증장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어떤 수행법을 선택하든 결국은 작금에 우리 승가가 처한 현실적인 문제들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수불스님과 현응스님은 말씀드릴 것도 없고, 법응스님의 글에서마저도 무관심 혹은 잘못된 이해가 보이는 것 같아서 아쉽습니다. 법응스님께 이견을 다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우리가 ‘계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에 아래에 몇 가지만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스님께서는 “계는 100% 못 지킨다 해도 자신의 주변과 사회에서 발생하는 불의와 폭력을 외면하고서야 어찌 존경과 권위가 세워지겠는가?” “부처님께서 계를 제정하신 의도 또한 선과 자비심에 바탕한 교단 구성원들의 사회성 진작에 있다고 본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선 ‘계는 100% 못 지킨다 해도’ 라는 말이 갖는 문제의 심각성을 찾아보겠습니다. 사실 이런 사고는 법응스님 뿐만 아니라 많은 스님들께서 흔히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모순과 문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출가 수행자가 재가 수행자와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선과 자비심’은 경전이나 논장에서 제시하는 것들로써 출가자와 재가자 누구에게나 공통으로 열려 있는 가치입니다. 선과 자비심의 실천이 출가 수행자와 재가 수행자를 나눠서 따로 제시되지 않기 때문에 분리해야 할 당위성은 없습니다. 경전에서는 재가 수행자도 철저한 수행을 통해 출가자 못지않게 선과 자비심을 실천하도록 가르치고 있으니까요.

 

출가와 재가를 구분 짓는 것은 오로지 율장에 근거한 ‘계학’뿐입니다.

출가자의 신분으로 ‘계는 100% 못 지킨다 해도’라는 전제를 깔고 다음 논지를 전개하는 것은 사소하지만 계학에 대한 옅은 인식을 반증하는 매우 중요한 단서입니다. 그래서 저는 스님들께서 이러한 표현을 하시는 것에 대해 아주 슬퍼하는 입장입니다. 그리고 사실 스님들이 지계청정을 기본으로 한 상태에서는 교학을 하든, 참선을 하든, 포교를 하든 무엇을 하든 자연스럽게 그 행위는 세상의 고통을 향해 자비심으로 펼쳐질 수밖에 없고 그 행위 뒤에는 자연스럽게 존경과 권위가 따라 오게 되지 않을까요? 출자가가 ‘자신의 주변과 사회에서 발생하는 불의와 폭력을 외면하고서야 어찌 존경과 권위가 세워지겠는가?’라는 말씀이 틀리지는 않으나 그 전제는 스스로 계를 잘 지키면서 수행을 하는 출가자 가 세상을 향한 자비행을 실천할 때 가능한 것 아닐까요? 지금 우리 불교가 그렇지 못한 이유, 갈수록 세속화되는 이유는 그런 청정행을 중시하는 가치가 사라졌기 때문 아닐까요? 

 

또한 법응스님께서는 “부처님께서 계를 제정하신 의도 또한 선과 자비심에 바탕한 교단 구성원들의 사회성 진작에 있다고 본다”고 하셨는데 이것 또한 주의 깊게 살펴볼 말씀입니다. 부처님께서 계를 제정하신 의도는 6대 광율 모두에 명확하게 언급되어 있기 때문에 자의적 해석을 더할 경우에는 좀 더 주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분율에 따르면 아래와 같은 이유로 계율을 제정하셨습니다.


수행자가 자신의 신구의 삼업을 잘 다스려서 안으로는 환희롭고, 밖으로는 수행자다운 행위와 격식을 갖춰서 전체 승단을 안락하게 하고, 이러한 승단을 보고 재가자들이 불법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불교수행을 해 나가도록 기여하기 위한 것입니다. 수행자가 혹시 범계를 할 경우에는 참회를 통해 청정성을 회복하고, 청정한 지계의 삶을 통해 현세의 번뇌를 제거하고 미래세에 삼악도의 과보를 받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를 통해 청정한 수행자와 승단에서 증득하는 자가 많아지고 결국 불법이 오랫동안 이 세상에 머물게 된다는 것이 계율 제정의 열 가지 이유입니다.

 

물론 법응스님의 말씀대로 우리가 살면서 100% 계를 지킬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이런 견해는 일견 맞는 말씀 같아 보여도 막상 조금만 더 들어가 보면 지켜야 한다는 대상인 그 계의 실체를 무엇으로 보고 있는지도 모호하고, 또한 당연히 고민해야 하는 ‘계학’에 관한 담론을 무관심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습니다.

 

미디어붓다 대표기자인 이학종 님은 당신의 페이스북에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격을 갖춘 논쟁이 이어져 한국불교의 흐름이 확 바뀌기 바랍니다."라고.

 

이 논쟁은 논쟁대로 충분한 의의와 가치를 가지고 있기에 승단의 미래에 바람직한 결과를 낼 수 있기를 저 역시 간절히 발원하는 바입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방식으로는, 예전의 돈점 논쟁역시 그러하였듯이, 격을 갖춘 논쟁만으로 한국불교의 흐름을 바꾸기에 역부족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불교의 흐름을 바꾸려면 출가자와 승단의 근본적 사상변화가 필요한데, 그 변화의 출발점은 ‘계학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지계청정의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물질적 가치가 갈수록 최우선적 가치로 변해버린 한국사회에서 승가가 세상과 자본에 물들지 않고 출가의 근본 목적인 보리심, 즉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의 실천을 성취하려면 깨달음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도 필요하고 좀 더 효율적인 방식으로 간화선 수행을 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근본은 출가자들의 지계청정을 바탕으로 한 ‘계학’의 회복에 답이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논쟁이 정말로 의미 있는 결과를 내려면 이번 기회에 계학이 동등한 무게로 정학과 혜학의 장에 동시 등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불교수행자에게 계학이 중요하다고 마르고 닳도록 강조를 하는 경전들과 조사어록들을 접하면서도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음에서 느낀 엄청난 괴리감과 좌절감 때문에 망설이다가 이런 글을 적게 되었습니다. 이 글이 순전히 제 개인적인 관점일 수도 있고 주제가 벗어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만 누군가는 한 번쯤 이런 이야기를 해 주시길 바라고 있었는데 실현가능성이 보이지 않아 미흡한 제가 몇 자 보탰습니다. 혹여 잘못된 부분이 있거나 오해가 있다면 아직은 부족한 초학자여서 그러려니 선배스님들께서는 너그럽게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영봉우익대사의 다름 글을 공유하면서 글을 마칩니다.

 

人知宗者佛心 教者佛語 不知戒者佛身也。盧舍那佛以戒為體 惡無不止故淨 善無不行故滿。倘身既不存 心將安寄 語將安宣。

(사람들은 참선은 부처님 마음이요 교학은 부처님 말씀인줄은 알지만, 계율이 부처님의 몸인 줄은 알지 못한다. 노사나부처님은 계로써 몸(體)을 삼으셨기 때문에 악은 그치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청정하고, 선은 행하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원만하여 정만이라고 칭한다. 몸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마음은 어디를 의지하며 말은 또 어떻게 가능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