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야단법석

결정론과 자유의지를 넘어서

실론섬 2016. 3. 9. 10:46

우리는 오랜 세월동안 인간의 진리가 결정되어 있는가, 아니면 자유의지의 소산인가 하는 양자택일의 철학적 문제에 골몰해 왔다. 특히 이 문제는 동/서양철학의 사유에서 매우 심각한 주제로 등록되어 왔었다.

 

나는 불전에 나오는 데바닷다의 행위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잘 알 수가 없었다. 데바닷다는 부처님을 배반하고 승가를 분열시킨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배신행위는 이미 결정된 운명의 길을 걸어 간 것인가, 아니면 자유의지의 소산으로 이루어진 것인가? 물론 나의 생각은 그는 자유의지의 판단으로 그런 엄청난 일을 했다는 것이다.

 

나는 과거에 불교의 유식학에서 말하는 아뢰야식의 본질에 주목해 보곤 했다. 유식학에서 아뢰야식의 별칭을 각각 장식(藏識), 이숙식(異熟識), 집지식(執持識)이라 부른다. 


장식은 모든 업의 종자를 다 저장하기도 하고, 그것이 저장되기도 하므로 그렇게 부르며, 

이숙식은 대표적으로 선악의 인과가 다르게 변이하여 중립이나 경우에 따라 대지(大智)로 바뀌므로 이숙식이라 칭한다. 

집지식은 선악의 종자가 상속되므로 그런 이름으로 불리어진다. 


그렇다면 이숙식과 집지식이 다 아뢰야식의 본질에 속하는 셈이다. 이숙식으로 보면 인간 마음의 본질은 업의 운명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참회와 수행에 의하여 하루아침에 무거운 업의 무게와 굴레가 사라질 수 있게되고, 집지식으로 보면 그 업은 상속되기에 또한 결정된 운명의 바퀴를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이런 불교의 가르침은 어느 동/서양철학 이론보다 더 구체적으로 인간의 진리를 밝혀 주는 것으로 여겨진다. 인간의 진리가 결정과 자유라는 실재적이고 택일적인 이분법적 논리로 나눠져 있기 보다, 오히려 마음의 활용에 의하여 자유와 운명(업)의 길을 스스로 밟는 다는 것이 온당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지옥도 정해진 결정론이나 운명 즉 타율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미혹으로 지옥이 좋아 보여서 스스로 거기에 가려고 기를 쓴다는 것이 더 합리적인 생각일 것이다. 지옥도 범천의 세계(천상)도 다 제가 좋아서 가는 것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 스스로가 의도된 행위로 저지르는 선행과 악행을 달리 설명할 길이 없어 보인다.